소설리스트

Chapter 04-2 (29/41)

갈아입을 속옷과 실내복이 침대 위에 반듯하게 접혀 준비되어 있었다. 다른 방 모두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방 안에 작은 욕실 겸 화장실 또한 딸려 있어 잠자리 준비에 번거로움은 없었다.

시간을 들여 씻고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지만,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여 있는 두 개의 더블베드 중 하나를 차지하고 기대앉은 무진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슥슥 비비며 다른 한쪽 침대에 털썩 앉아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아예 쿠션 위로 미끄러지듯이 등을 기대고 누워 버렸다. 그러면서도 코앞의 태블릿 PC에서는 눈을 떼지 않는다.

“…….”

좀 더 바라보다가, 머리카락을 탁탁 털며 일어나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마저 말리고 나와선, 카디건을 걸치고 복도로 나갔다.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마침 진청색 모직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층계참을 돌아서고 있었다. 저기, 하고 말을 건네자 얼른 다정한 얼굴로 돌아보며 나를 확인하곤 종종 다가온다.

“탄산음료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그리고 슬며시 웃으며 말을 건네는 나를 왜인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다가, 한 박자 늦어서야 ‘아.’ 하곤 나긋하게 권해 왔다.

“혹시 소화 안 되어 그러시면, 매실차로 준비해 드릴까요? 늦은 시간이고, 찬 음료보단 나으실 텐데요.”

“예, 그럼 매실차로 부탁합니다.”

생각해 주는 것이 고마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고 여자는 냉큼 돌아서며 또다시 계단을 종종 내려갔다.

불편한 분위기를 띠는 방에 벌써 들어가는 것도 뭣해서, 나는 그대로 복도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금세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삐죽 내밀고 내려다보니, 차남의 처가 쟁반 위에 컵을 담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마주치자 역시 냉랭한 눈길을 휙 거두며 앞을 지나쳐 가다가―

“여승재 씨.”

우뚝 멈춰 서며 이름을 불렀다. 정식 통성명을 나누지 않은 사람에게 이름을 불린다는 것은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대꾸 없이 그저 바라보자, 단발의 옆머리를 획 거두듯이 고개를 돌리며 모서리가 분명히 느껴지는 어조로 물어 온다.

“이런 자리, 불편하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나는 느리게 눈꺼풀을 내렸다 뜨며 담담히 대답했다.

“…괜찮다….”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그녀는 혼잣말을 되뇌며 바닥을 내려다보곤 작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곧게 시선을 맞춰 온다.

“그 말 어쩐지, 고난을 애써 감내하고 있는 듯한 수도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네요. 어쨌든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그녀는 내가 불행하고 가련한 피해자 흉내를 내며 가식을 부리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마주한 눈빛에 굳게 박혀 있는 심지에 일순 스스로도 내가 정말 그러했던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무진의 충고대로 패악을 좀 부려 보려 했지만, 그녀는 내게 그럴 시간도 주지 않고 가뿐히 돌아서 버렸다.

고난, 감내……. 청승맞은 본성을 들켜 버린 걸까. 나는 복도에 혼자 남아, 무진에게서 받은 좋은 옷과 시계 등으로 치장을 해 있으면서도 나는 왜 이리도 궁상맞은 인상을 버릴 수 없는 걸까 하고 짧은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또 피식 실없이 웃어 버렸다.

잠시 후 청색 스커트의 여자가 쟁반을 들고 계단을 올라오다가, 내가 아직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것에 무척이나 죄송스럽다는 듯이 미간을 좁게 모은 채 눈길을 떨어뜨렸다.

“들어가 계시면 가져다드렸을 텐데요…….”

“아니요, 괜찮습…… 그냥 복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또 버릇처럼 괜찮다 대꾸하려다가, 얼른 말을 바꾸어 인사했다. 그리고 쟁반을 건네받고 돌아서려다, 언뜻 고개를 갸웃하며 ‘저기―’ 하고 다시 여자를 불러 세웠다.

동그랗게 눈을 뜨며 여자가 얼른 한 계단 올라섰다. 마주 선 채, 심심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저, 어떻게 보이나요?”

예? 여자가 당황한 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그런 반응에야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첫인상 같은…….”

뒤늦게 스스로가 수상쩍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어, 말끝을 흐리며 외딴 데로 눈길을 돌린 채 어이가 없어 ‘허.’ 한숨을 뱉듯 웃어 버렸다. 그러나 여자는 그 엉뚱한 물음에도 성심성의를 보이고자 ‘어…….’ 하며 말을 끌다가 이내 다정한 얼굴로,

“예쁘세요.”

답해 주는 것이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또 금세 당황한 얼굴로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잇는다.

“아니, 여자 같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인상, 좋으시다구요…, 웃으시니까 더…….”

“아, 예, 고맙습니다.”

얼른 이 상황을 넘겨 버리고자 나는 무성의한 대꾸로 인사했다. 여자 또한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이곤 퍼뜩 뒤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엉뚱한 데서 패악을 부려 버렸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무진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태블릿 PC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발을 조금 끌며 다가가 침대 옆에 선 채 쟁반을 내밀었다.

“…….”

그러나 힐긋 곁눈도 주지 않는다. 결국 직접 컵을 들고 얼굴 바로 앞으로 내밀며 ‘마셔.’ 했다. 그러자 뚱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보인다.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않고 그냥 막 부었잖아. 체기 있을 거 아냐. 마셔.”

“…….”

그제야 무진은 귀찮다는 얼굴로 부스스 일어나 앉아선 컵을 받아 들었다. 그는 따뜻한 매실차를 찬물처럼 꿀꺽꿀꺽 삼켜 마셨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쟁반 위로 빈 컵을 퉁 올려 두고는, 다시 쿠션 위로 풀썩 등을 기댄 채 아이패드에 눈을 박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양손 나란히 쟁반을 든 채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무심한 어조로 또 말을 붙였다.

“이거 부탁한 사람이 가져다주면서, 나 예쁘다고 하더라. …묻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그냥, 아침에 네가 배우 누구 씨보다 내가 더 예쁘다던 게 문득 떠올라서.”

“기억 안 나.”

“…….”

그러나 서러우리만치 쌀쌀맞은 대답에 말 주머니가 가난한 나로서는 더는 이을 말이 없어, 그저 묵묵히 돌아선 채 협탁 위에 쟁반을 내려 둘 뿐이었다.

“불 꺼. 잘 거야.”

뒤쪽에서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체 조명을 끄고 대신 협탁의 보조등을 켰다. 그리고 비어 있는 침대로 뭉그적거리며 올라가 눕는데, 무진은 이미 반대편 벽 쪽으로 돌아누운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마른 코를 훌쩍이며 도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또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 침대 스프링 나간 것 같아. 그쪽으로 넘어가도 돼?”

“네가 언제 내 말 들었다고.”

그의 퉁퉁거리는 대꾸에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나는 슬그머니 그가 누운 침대 구석으로 몸을 뉘었다. 닿는 것이 싫다는 듯 그가 얼른 반대쪽으로 더 몸을 붙인다.

“…미안해.”

나는 최대한 팔다리를 몸통에 바짝 붙이고 목석처럼 누운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과했다. 하지만 퍽퍽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억양은 스스로가 듣기에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잘못했어.”

“뭘 잘못한지는 알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무진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누운 채 시비조로 따져 물었다. 그가 보지도 않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까 너 따라 패악 안 부리고 내숭 떨었던 거. 너 혼자 쪽팔리게 한 거.”

그러나 정답이 아니었던지, 그는 벽을 보며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저 옅은 조명등 불빛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천장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서 함부로 뻗댈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봐줘.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너도 여기서 함부로 뻗댈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니까…… 내가 정말 미안해.”

“이 돌대가리가 지금 누굴 무시해?!”

그런데 본의 아니게 그의 성질을 긁은 모양이었다. 무진이 돌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채 험상궂은 얼굴로 버럭 목청을 높여 왔다.

“내가 여기서 왜 너 말고 함부로 뻗댈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나 영감한테도 패악 부리고 뻗댈 수 있어, 못할 줄 알아?! 해, 한번 보여 줘?!”

“아니, 알아, 증명 안 해도 돼. 그러니까 진정해.”

목석같은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곧게 누운 채 빠르게 대꾸했다.

어렸을 적에도 그러했지만, 무진은 타인을 앞에다 두고 내게서 위세가 서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선 정말 불같이 화를 내곤 했었다. 뭣 모르던 때에는 그런 상황에서 함부로 더 뻗대었다가 크게 틀어질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씨발, 누굴 진짜 병신으로 알고.”

단단히 기분이 상했는지, 획 하니 쏘아붙인 뒤 무진은 다시 풀썩 돌아누워 버렸다.

“…….”

어쩐지 이번에는 그런 그가 조금 측은하게 여겨졌다. 나는 슬금슬금 몸을 움직여 그의 등 뒤로 붙어 누웠다. 맞닿은 그의 등 근육이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더 비켜날 자리가 없는지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대로 아무 말도 않는 것에 좀 더 용기를 내어, 음탕한 싸구려 작부처럼 그의 등허리를 쓰다듬다가 슬그머니 손을 움직여 고무줄 바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곧장 속옷 안까지 침범한 손으로 앞쪽을 더듬어 가는데,

“손 안 치워?”

고개도 돌리지 않으며 무진이 냉랭한 어조로 으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과감히 내게는 없는 무성한 음모를 손끝으로 빙글빙글 감아 돌리듯 손장난을 치며 그의 등 뒤로 더 바짝 붙었다. 겨우 그 정도로 벌써 그의 속옷 앞섶이 슬쩍 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만 맨날 당하는데, 오늘은 나도 너 한번 희롱해 보려고. 그럴 기분 아닌데 기어이 당하는 기분, 너 직접 깨닫고 반성해야 할 거 아냐.”

묵묵한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나는 한 손을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직 쭈뼛대는 기세의 살덩이를 손바닥 전체로 한번 슥 훑어 올리자 금세 단단하게 힘을 얻는다. 옆구리를 찔린 듯 무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대로 엄지 손끝으로 선단을 살살 간질이자, 등 돌린 그의 앓는 숨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이미 한 손에 다 잡히지 않는 것을 나는 손목 스냅을 이용해 위아래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엉덩이 근육이 바짝 올라붙는다.

그때 갑자기 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나운 몸놀림에 놀라 물러서다가 침대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긴장한 얼굴을 감추려 천천히 숨을 내쉬고 있는 나를 무진은 눈살을 가늘게 찌푸린 채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보조등 불빛에 그의 얼굴이 지옥불 마귀처럼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잠시 팽팽했던 긴장을 깨뜨리며 몸을 움직여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 헤드에 쿠션을 세운 채 태평한 자세로 기대앉는 것이다. 그리고 무릎을 벌려 세운 채 가운데로 힐긋 턱짓을 하며 위협적으로 명령을 해 온다.

“내려가 빨아. 정성껏 빨아, 목구멍 깊숙이 아까워 말고 빨아.”

“…….”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곧장 그의 다리 사이로 옮겨 가 앉았다.

좀 더 부피를 늘리기 위함인지 무진은 벌써 한 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슥슥 문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힐긋 내려다보는 내 얼굴에서 낭패감을 읽었는지 꼴좋다는 듯 ‘흥’ 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꼴깍 침을 삼키며 나는 먼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그의 양쪽 허벅다리 위로 두 손을 미끄러뜨리며 곧장 고개를 숙였다. 제 것을 문지르고 있던 손을 거두어 그는 대신 내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그대로 입 벌려 가득 머금어 보았다.

“읍…….”

목구멍 깊숙이 아까워 말고 빨라곤 하지만, 도무지 그런 것은 뿌리 끝까지는 머금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가 만족할 만큼이라도 넣었다간 정말 눈물을 쏙 뺄 정도로 고통스러워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내 입술을 오므려 쭉 빨아 당기듯이 뒤로 물러나자, 뒤통수를 붙든 그의 아귀힘이 우악스레 짙어졌다. 얼른 다시 고개를 처박고, 이번엔 뿌리 쪽의 음낭부터 머금고 빨았다.

다른 쪽은 손으로 살살 문지르며 힐긋 치켜든 눈으로 그를 살피자, 무진은 화난 듯이 입을 꾹 다문 채로 가슴을 크게 부풀리고 있었다. 선득한 시선이 짧게 마주치고, 나는 얼른 눈길을 내려 코끝으로 그의 음모를 비볐다.

그리고 이어 좀 더 아래로 고개를 처박고 성기 아래 회음부부터 샅샅이 뱀처럼 혀를 놀렸다. 그러자 정말 내 자신이 이브를 꼬여 내고 그들만의 천국을 망가뜨린 독뱀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 후로는 거침이 없었다. 음, 음, 나는 당할 때처럼 가늘게 콧소리를 냈다. 길게 혀를 내민 채 검붉게 성이 나 있는 그의 길고 굵은 성기를 맛있다는 듯이 핥고, 문득 앞니로 슬쩍 주름을 긁어내렸으며, 그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그것을 내 얼굴에 가득 비벼 대기도 했다. 나는 기꺼이 천박한 노리개가 되어 그를 융숭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힐긋 눈을 치뜬 채 그의 얼굴을 살피며 선단에 가볍게 입술을 맞출 때였다.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던 그가 시선이 마주치자 문득 픽 웃으며 물어 왔다.

“너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싸구려 작부.”

나는 단조롭게 대답했다. 그의 눈썹 한쪽이 휙 치켜 올랐다. 그리고 불쑥 두 손을 내 겨드랑이 아래로 밀어 받치곤, 무진은 간단히 내 몸을 쑥 당겨 올렸다.

“누가 그렇게 놔둔대?”

“…….”

그의 허벅다리 위에 올라앉은 채 얼굴을 맞대고 있자 그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은 채 음탕하게 굴었던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만큼 새삼 낯이 뜨거워졌다.

그런 변화를 감지한 무진은 슬쩍 눈길을 피하는 나와 부러 더 시선을 맞추려 얼굴을 바짝 붙여 왔다. 그리고 어렵게 낚아챈 눈길을 빤히 응시하며 비식 웃는다.

“너, 지금 나 불쌍하다 생각하고 있지? 그래서 버림받고 성격 더러워진 불쌍한 고아 집안에 들여와 밥 먹여 주는 심정으로 이렇게 살랑거리지?”

“…아니야.”

눈길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무진은 그런 내 턱을 손끝으로 달랑 들어 올렸다. 그의 날선 눈을 슬금 훔쳐보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 너한테는 이름 부르시더라.”

“그게 뭐, 애정 같은 건 줄 알아? 그런 거일 리가 없잖아, 그 영감이. 그저 단순하게 아직 인정을 못 받은 것뿐이야.”

“…….”

“아아, 좋아. 좀 더 불쌍하게 여겨 줘. 나 말이야, 힘없는 어릴 적엔 본가 어머니한테 안 보이는 데를 막 꼬집히기도 했거든. 어때, 젖 물려 주고 싶은 마음 들어?”

고약한 거짓말임이 훤히 보임에도 나는 한없이 그가 가여워졌다. 그런 내 기분을 그 또한 알아챘을 것이었다. 심술궂은 얼굴을 한 채로 그는 콧등으로 ‘흐으응…….’ 하고 여린 짐승의 앓는 소리를 내며 빙글거렸다.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헐렁한 상의 밑단을 직접 가슴 위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가 곧장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내려 내 밋밋한 가슴을 빨았다. 까끌까끌한 혓바닥으로 가슴팍을 핥고, 이어 입술을 오므린 채 작은 젖꼭지를 찾아 물었다.

“아……!”

그가 입속에서 혀끝으로 유두를 가볍게 희롱했다. 허리가 무너져 내리자, 자세가 더 낮아짐에 그가 냉큼 두 손으로 내 등허리를 받쳐 세웠다. 그리고 잠시 가슴에서 입을 떼고는,

“엉덩이 들어 봐.”

꺼칠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는 그의 허벅다리 위에서 양옆으로 벌린 무릎을 세우며 엉덩이를 들었다.

무진은 곧바로 내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그러곤 다시 젖꼭지를 빨며 내 등허리로 두른 양손으로 엉덩이 살을 가득 쥐고 주무른다. 그러다 문득 손가락 하나를 은근히 구멍으로 문질러오는 것이다.

“아, 아…….”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던 터라, 샤워를 하며 꼼꼼히 씻어 두었으므로 나는 다만 그의 목덜미로 두 팔을 바짝 감을 뿐이었다.

그는 쩝쩝 혓소리를 내며 양쪽 젖꼭지를 바쁘게 빨았다. 그러다 언뜻 자신의 손가락을 내 입술에 대어준다.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핥았다.

적당히 타액이 묻자, 무진은 다시 내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조금 성급하다 싶을 만큼 불쑥 안으로 찔러 넣은 손가락을 그대로 추적거려 왔다.

“아, 으으…….”

나는 몇 번이나 무릎을 굽혔다 펴며 그에게 매달렸다. 목 안에서 방울이 울렸다. 무진은 내 목울대를 슥 핥으며 웃었다. 그리고 내 골반을 바짝 붙잡은 채 내려앉을 곳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의 목덜미 위로 이마를 기댄 채 나는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그가 자신의 성기를 붙잡고 정확히 구멍으로 맞대었다. 선뜻 내려앉을 수 없어, 나는 조금씩 끝을 물렸다 놓으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성마른 성질로 그가 내 골반을 누르며 ‘어서.’ 하고 종용했다. 양손으로 괜한 엉덩이 살을 바짝 벌리기도 하였다.

질끈 눈을 감은 채 나는 아래로 엉덩이를 내려 앉았다. 그에 맞추어 무진 역시 허리를 조금 위로 띄웠다. 그리고,

“흐으, 읏……!”

길고 단단한 것이 밑에서부터 쑥 치올랐다. 명치까지 빈틈없이 들어차 침범당한 기분에 돌연 숨이 컥 막혀 왔다. 하아……! 무진은 내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채 축축한 숨을 훅 내쉬며 귓불을 질근 물었다 놓았다.

“움직여.”

그리고 숨을 고를 틈도 주지 않고, 두 눈을 반질거리며 재촉을 하는 것이다. 빡빡하게 들어찬 것을 구슬려 스스로 느끼는 곳을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나는 어설프게 허리를 들썩였다. 재미가 없었는지 무진은 다시 내 골반께를 붙잡은 채 직접 조종하듯 사납게 굴려 댔다.

“이렇게, 그래, 좋아.”

“아, 아, 아! 그, 그렇게 하지, 아……!”

“이거 봐, 섰잖아.”

그리고 희롱조로 말하며 내 아래쪽을 힐긋 눈짓으로 가리킨다. 내려다보니, 역시 그러했다. 외딴 데로 눈길을 거두자, 그가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철썩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때렸다.

나는 그 아닌 다른 데로만 점점이 시선을 돌리며, 동시에 허리를 돌렸다. 아래쪽에선 그가 짓궂은 얼굴을 하고선 힘들이지 않고 간간이 허리를 툭툭 쳐올렸다. 그때마다 나는 딸꾹질처럼 놀라 그의 어깨 위로 폭삭폭삭 무너지곤 했다.

“소리 참고 있는 거야?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응?”

“흐으……!”

응? 하고 질책조로 물으며 무진은 내 허리를 바짝 당겨 내린 채 성기를 푹 박아 올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는 척하며 입술을 누르고 있던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해 뒤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그대로 그가 몸을 일으켜 덮치듯이 가슴을 껴안아 왔다. 그리고 곧장 양쪽 무릎 안으로 두 팔을 끼워 올린 채 허벅다리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무릎이 한껏 벌려지고, 단단한 살덩이가 묵직하게 아래를 다시 꿰뚫어 왔다. 뿌리까지 욕심껏 찔러 넣은 채 무진은 포만감에 가득 찬 얼굴로 뺨을 맞비비며 속삭였다.

“아아…… 밥보다 술보다 사탕보다, 난 이게 제일 맛있어.”

“아……!”

뭉근히 휘두르는 것에 그의 복부에 비벼진 내 성기가 선단으로 쿠퍼액을 흘리며 떨었다. 나는 퍼뜩 양발을 그의 등허리 위로 바짝 감아올렸다.

후우……, 숨을 내쉬며 그가 슬쩍 몸을 들었다. 마주한 눈빛이 음험한 어둠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빼앗은 채 무진은 내 어깨 위로 다정하게 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곧이어 사납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아, 짧게 터져 나오는 신음에 얼른 손등으로 입술을 눌렀다. 그의 눈매가 악동같이 휘었다. 아슬아슬하게 빼내었다가 속살을 희롱하듯 둥글게 굴리며 다시 들어찰 때는 까무러칠 듯 고개가 꺾였다.

흐흥, 웃으며 문득 그가 내 발목을 자신의 어깨 위로 걸쳐 올렸다. 그리고 요란하게 쩍쩍 살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쳐오는 것에, 침대까지 덩달아 끽끽 밀려나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그의 가슴께로 두 팔을 뻗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아, 내려가, 침대… 바닥, 내려가서 해… 하, 앗……!”

“옆방, 비었어. 그렇게, 방음, 허술, 아아! 허술하지도, 않고. 후, 읏……!”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그는 짧게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나는 질근 입술을 문 채 두 팔을 교차하여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알았어, 그가 탁한 숨을 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예고 없이 불쑥 빠져나가 버리는 것에 나는 ‘흐!’ 급한 숨을 참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나를 내버려 두고 무진은 바삐 바닥으로 시트를 한 장 깔아 펼치고는, 내 손목을 사납게 끌어 잡고 주룩 바닥으로 내팽개치듯 당겨 내렸다. 그리고 옆으로 풀썩 쓰러져 누운 내 한쪽 다리를 곧장 어깨 위로 걸쳐 올린 채 번들거리는 성기를 꾹 찔러 넣어 온다.

“아흐으으……!”

다시 처음부터 속살을 차곡차곡 밀며 들어차는 것에는 늘 생경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바닥 쪽으로 고개를 내리며 앓는 신음을 흘리자, 내 몸을 가로질러 들며 무진은 비아냥조로 희롱했다.

“뭐야―, 축축하게 젖어서 안 아프잖아, 엄살은.”

“너……!”

급히 고개를 틀며 노려보았으나, 그에 맞추어 덜컹 허리를 쳐올리는 것엔 도로 급히 바닥으로 얼굴을 박아야 했다.

이어 무진은 내 무릎에 입을 맞추며 길고 느리게 추삽질을 해 왔다. 비틀린 자세로 받아들이는 그의 몸의 열기가 생생했다. 질러 박아 오는 그것을 물어뜯는 내 속살의 집요함도 숨길 수가 없었다.

잔뜩 발기해 있는 내 것을 손으로 문지르고 싶어 바닥을 짚고 있는 양팔 중 하나를 내리려 하면, 무진은 고약하게도 얼른 제 어깨에 걸친 내 한쪽 다리를 더 높이 올리며 몸을 더 앞으로 쏠리게 하며 방해를 놓았다.

그러나 기실 나는 앞쪽의 자극 없이, 어느 때보다 깊이 들어차는 체위에 몸을 떨다 울음처럼 가슴을 들썩이며 곧 파정을 해 버렸다. 시트가 더러워질까, 얼른 거두어 맨바닥에 쏟아 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깔끔을 떠는 내가 우습다는 듯 무진은 좀 더 가볍게 아래를 찰랑거려 왔다.

“난 아직이야. 뒤돌아 엉덩이 까.”

그리고 내가 힘없이 풀썩 늘어진 채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것에 얼른 살덩이를 빼내어 버리곤 야멸차게 명령하는 것이다. 힐긋 고개 돌려 보니, 복부로 바짝 올라붙은 살덩이가 터질 듯이 팽창해 있었다.

“…쓸데없이 너무 오래 가는 것도 병이야, 그거.”

시무룩하게 볼멘소리를 내며 나는 바닥에 엎드려 무릎을 딛고 엉덩이를 내빼 주었다.

“네가 너무 빠른 거겠지.”

희롱조로 비아냥대며 그가 내 등 뒤로 다가와 몸을 겹쳤다.

“난 평균… 아, 아아…….”

대꾸하려다, 뒤에서 그가 곧장 손가락으로 구멍을 벌리며 굵은 성기를 삽입해 오는 것에 어금니를 딱딱 맞부딪쳤다.

“왜 또 엄살이야? 이렇게 길이 나 있는데.”

증명하듯 바로 철퍽철퍽 앞뒤로 치고 빠지며 그가 비웃었다. 콧등이 시큰했다. 곧이어 무진은 내 골반을 단단히 붙잡은 채 빠르게 질러 박아 왔다. 나는 자꾸만 앞으로 풀썩풀썩 꼬꾸라졌다. 양손을 교차해 바닥에 대고 손등 위로 입술을 눌렀다.

응, 응,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목울음처럼 잠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서 무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절정을 향해 가다 말고, 돌연 그가 내 가슴 밑으로 두 손을 두르곤 번쩍 들어 올리며 자세를 틀어 침대 위로 몸을 기대게 했다.

“안에서 갈 거야, 시트 더러워지면 안 되잖아, 안 그래?”

“…응.”

“엉덩이 직접 벌리고 있어, 난 네 젖꼭지 만질 거야.”

“…….”

나는 침대 위로 얼굴을 기댄 채 순순히 직접 두 손을 뒤로 둘러 엉덩이를 양쪽으로 잔뜩 벌려 주었다. 귓바퀴 위로 입술을 누르며 무진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맛있어.’ 속삭이곤 뭉근히 허리를 돌렸다. 소름이 돋았다.

뾰족하게 돋은 내 젖꼭지를 매만지며 그는 탁탁 짧고 단호히 허리를 쳐올렸다. 엉덩이를 벌린 양손에 그의 골반이 채찍처럼 닿았다. 침대 위로 거칠게 문질러지는 뺨이 아파 얼른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움직이던 무진은 간간이 깊게 삽입한 그대로 느리고 둥글게 휘저으며 ‘아아, 맛있다―.’ 하고 음탕한 감상을 지껄이곤 하였다. 몸을 지탱한 허벅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리고 마침내,

“아… 좋아, 죽을 것… 흣!”

한창 사납게 아래를 치대던 그가 탁한 숨을 터트리며 몸통을 바짝 감싸 안아 왔다. 깊숙이 아래를 박아 넣은 채 툭툭 얕은 허리 짓을 하는 것에 잔뜩 헤집어진 안쪽 가득 미지근한 정액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달아.”

좀 더 여운을 즐기듯 삽입된 채로 가볍게 몸을 문지르며 무진은 축축하게 속삭여 왔다.

“…단 거 먹었으면 기분 좋아졌을 텐데.”

침대 위로 힘없이 얼굴을 묻은 채 대꾸하자, 등 뒤에서 가슴을 들썩인다.

“그래, 모난 성질 풀렸어. 성공했어, 여승재.”

그리고 왜인지 내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심통 맞은 목소리로 퉁퉁 말을 잇는 것이다.

“여우 같은 새끼.”

“…….”

“귀신 같은 새끼.”

“…….”

“예쁜 내 새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나는 풀썩 무릎을 접으며 꼬꾸라져 버렸다. 뒤에서 무진의 살덩이가 주룩 빠져나갔다.

이제 욕심을 다 채웠는지 그는 내 뒤통수에 짧게 입을 맞춘 뒤 가뿐히 몸을 떼고 뒤쪽의 침대로 털썩 등을 기대앉았다. 그리고 협탁 위에 놓아둔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와 불을 붙이는 듯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 위로 몸통을 기댄 채 그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쓰으으으, 뒤쪽에서 담배 필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어 매캐한 담배 냄새가 맡아졌다.

피곤해 그것도 피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가물가물 눈을 감는데, 문득 그가 손을 뻗어 등허리를 슥 매만진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보자, 불량스레 담배를 삐뚜름히 입에 문 채 무진이 씩 웃으며 지껄여 왔다.

“흐르는 거 보여 줘.”

“…기억 안 난다며?”

“예쁜 내 승재야―.”

“…….”

다시 고개 돌려 침대 위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뼛속까지 지끈한 무릎을 겨우 세우고, 엉덩이를 조금 치켜들었다. 그의 정액이 허벅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히야―, 뒤에서 그가 희롱조의 감탄사를 터트린다.

“절경인데.”

그리고 질 나쁘게 낄낄거리며 웃는 것에, 슥 고개를 돌려 곁눈으로 노려봐 주었다.

한껏 여유로워진 얼굴로 담배를 빨던 무진이 그런 나를 보곤 피식 웃었다. 그러다 자신이 내뿜은 연기에 눈이 매운 듯 설핏 눈살을 찌푸리곤, 후다닥 다시 달려들었다.

간밤 내내 눈이 내렸는지 아침, 창밖은 설국이었다.

성인 남자 둘이 눕기엔 좁은 침대 위에서 서로 바짝 몸을 포개어 껴안고 잠들었었다. 죽은 듯이 자다가 문득 감은 눈꺼풀 위로 아프게 빛이 쏘이는 기분에 번쩍 눈이 뜨였다. 그리고 곧장 일어나 앉으려다 허리 아래쪽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으으…….’ 신음을 삼켜야 했다.

몸을 감싸고 있는 무진의 긴 팔다리를 거두어 낼 자신도 없어, 그대로 다시 누워 버렸다. 그리고 고개만 조금 치켜든 채 넓게 트여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설국, 하루 만에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는 것에 잠시 넋을 빼놓고 있으니, 무진이 잠투정을 하듯이 불룩해진 사타구니를 등허리 위로 문질러 왔다. 늦은 밤까지 해 대고 나면 여운 때문인지 다음 날 아침 꼭 이런 상태인지라, 모른 척하며 좀 더 멋대로 굴도록 놔두고 나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완전히 깨어난 무진은 작은 양심이나마 있었는지 슥슥 머리를 긁적이며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까지 하고 나와선 젖은 머리를 털며 창가에 선 채 ‘첫눈이네―.’ 하고 심드렁한 감상으로 평하였다.

재벌가의 가풍은 원래 그러한지, 다 같이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 식사를 하는 대신 각자의 방으로 룸서비스처럼 식사가 배달되어 왔다.

덕분에 나는 침대 위에서 좀 더 휴식을 취하며 무진과 단둘이 간단히 스프와 커피, 도넛 따위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식사 후 빈 접시들이 나갔고, 이어 사이즈가 다른 목이 긴 부츠 두 켤레와 수렵복을 대신한 가볍고 보온성이 좋은 새로운 외출복 두 벌씩이 배달되었다.

부츠 사이즈가 정확히 맞는 것으로 보아, 무진과 나의 갑작스런 추가 일정으로 근처에 묵고 있을 이승현이 어제 늦은 밤이나 오늘 이른 아침에 급히 구해 온 것일 터였다. 두 개의 가죽 장갑 중 하나엔 미처 떼지 못한 가격표가 붙어 있기도 했다.

“북 치는 꼬마 병정 같네.”

후드가 달린 체크무늬 사파리 재킷을 껴입으며 단추를 채우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무진이 문득 비식 웃으며 조롱조로 말을 걸었다.

마감 부분에 짧은 퍼가 덧대어진 가죽 소재의 사파리 재킷을 걸치고,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검정 색 부츠를 신은 그를 무심한 눈길로 훑으며 나는 간단히 대꾸했다.

“넌 나치 같네.”

무진은 키득거리며 장갑을 꼈다. 그리고 먼저 문을 나서며 들으란 듯 비아냥조로 혼잣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해가 뜨면 여승재는 쌀쌀맞아지지.”

“…….”

복도를 멀쩡히 걷고, 계단을 내려서다가는 언뜻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조금 떨어져 걷던 무진이 급히 팔뚝을 붙들어 잡았다. 그리고 퍽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며 씩 웃어 보이곤, 팔을 놓아주고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누구 본 사람이 없는가 주위를 둘러본 뒤, 나는 난간을 붙든 채 계단을 내려갔다.

1층의 거실로 내려오니 벌써 모두 나가 있는지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무진의 한 걸음쯤 뒤를 따르며 바깥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엔 급히 눈살이 찌푸려졌다. 흰색 물감을 뒤집어쓴 듯 세상이 온통 하얬다. 창문을 통해 액자 속 그림처럼 감상했던 설원이 막상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에 숨이 막혀왔다. 눈사태 같은 것이 금방이라도 머리 위로 덮쳐올 것 같아 현기증이 일었다.

뭉글한 입김을 내뿜으며 그렇게 잠시 얼이 빠져있는 나를 무진이 팔꿈치로 툭 쳤다. 돌아보자, 그제야 모두 나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무진의 앞으로 한 걸음쯤 나서며, 나는 대표하여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를 했다.

“편안히 잘 잤어요?”

장남 내외만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예순이 넘은 노회장은 전문 수렵복을 갖춰 입어 무진과 비교해보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곧고 건장한 풍채를 뽐내며 뒷짐을 진 채 무심한 눈길로 우리를 힐긋 흘겨볼 뿐이었다.

정원에는 수렵용에 맞도록 화물칸이 개조된 투박한 SUV 차량 4대가 나란히 서 있고, 옆쪽으로는 포인터 종의 사냥개 십여 마리가 늠름한 태도로 목을 곧게 빼고 앉아 있었다.

전문 수렵인으로 보이는 네 명의 남자들이 각자 맡은 차량으로 먼저 포인터를 두 마리씩 올려 태운 뒤 충전 장비와 마운트 등을 점검하였다.

수렵장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은 어른들을 배웅하기 위해 얌전히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현관문 앞으로 나와 서 있었다. 그 곁으로 진한 청색의 모직 스커트를 입은 여자들 또한 마네킹처럼 대기해 있었다. 잠시 나와 선 것으로 따로 외투를 갖춰 입지 않은 탓에 모두 애써 추위를 참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그 중, 어젯밤 매실차를 가져다주었던 여자가 보였다. 슬쩍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얼핏 눈이 마주쳤는데, 추위에 양 볼이 발개져 있는 여자는 얼른 입술을 깨물며 작게 웃음 띤 얼굴로 희미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에 나도 단정한 미소를 띠며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는데,

“이게 어디서 헤프게 함부로 웃어 대?”

곁에 서 있으면서도 이쪽으론 전혀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심드렁해 있는 듯했던 무진이 냉큼 고개를 붙여 오며 음산한 목소리로 낮게 질책을 하는 것이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 무시했다. 그것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생각했는지 무진은 의기양양한 투로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빳빳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타이어에 체인까지 모두 감아 둔 상태인데 왜 어서 출발을 하지 않고 있나 의아했는데, 곧 의문이 풀렸다. 별장 곁의 작은 주택에서 두 명의 남자가 길쭉한 나무 상자들을 품에 안은 채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리고 먼저 회장에게로 다가가 준비가 늦어 죄송하다 말하며 상자의 뚜껑을 열어 무언가를 확인시켰다.

“음, 됐어.”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주인과 함께 드디어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그들이 올라탄 SUV로 두 개의 상자를 옮겼다. 그리고 이어 장남과 차남 내외에게도 역시 다른 상자를 확인시켰다. 그들 역시 차례로 배달되는 상자와 함께 각자의 차량으로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무진의 앞에서 뚜껑이 거두어진 상자 속에는 총열이 좌우로 배열된 수평쌍대의 엽총이 들어 있었다.

우아하게 뻗은 총신이 성인의 한쪽 팔만큼이나 길고, 목제 개머리판에 덧대어진 금속판 위로는 정교하게 조각된 독수리 머리가 붙박인, 클래식한 멋이 제대로인 매우 아름다운 녀석이었다.

“넌 만지면 안 돼. 허가증 따 오면 이것보다 더 근사한 놈으로 사 주지. …그런데 어차피 세상 제일 좋은 총이 이미 네 거잖아?”

남자를 향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무진은, 그것에 눈길을 떼지 못하는 나를 향해 슬쩍 얼굴을 붙인 채 은밀히 속삭였다.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자, 그는 또 예의 그 의미심장한 얼굴로 씩 웃어 보이곤 먼저 차량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버릇처럼 ‘콜록’ 짧게 헛기침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널찍한 뒷좌석엔 늘씬한 포인터 두 마리가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퍽 잘 훈련된 녀석들인지, 들어서는 우리를 확인하곤 얌전히 아래로 내려가 몸을 말고 누웠다.

이쪽 차량의 운전과 안내를 맡은 중년의 남자가 운전석에 앉으며 한 마리는 앞쪽으로 옮길까요 물어 왔다. 자리에 앉아 녀석들을 쓰다듬으며 나는 되었다 대답했다. 차가 출발했다.

“그런데, 눈길에 괜찮습니까?”

발치에 몸을 눕힌 흰색의 얼룩무늬 개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역시 빤히 쳐다보며 무진이 문득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남은 남자는 예사롭다는 듯 털털하게 대답했다.

“습기 없이 그저 푸슬푸슬 날리는 성질의 눈이기도 하고, 그리 많이 쌓이진 않아서요, 뭐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래도 평소보단 조금 아래 차를 대야죠.”

“아아.”

기껏 질문을 해 놓곤 무진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창틀 위로 한쪽 팔꿈치를 괸 채 비스듬히 나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포갠 앞발 위로 순하게 턱을 괴고 있는 포인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그 얼굴이다.

나는 힐긋 앞쪽을 살피며 몸을 조금 숙인 채 손가락을 까딱여 그를 불렀다. 재미있는 장난을 치듯이 활기찬 얼굴을 한 채 무진이 얼른 몸을 숙여 얼굴을 붙여 왔다.

“계속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눈살을 찌푸려 보이며 낮게 속삭여 타일렀으나,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빙글거렸다.

“걱정 마. 누가 지금 네 얼굴로 그랬던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

그 정도라면 당연할 테지만, 아무래도 그는 간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내 몸 상태로 따지자면 하루이틀 정도는 더 움직임이 고달프겠으나, 덕분에 당분간은 그를 온순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니 이쪽으로서도 아쉬운 장사는 아니었다.

더 이상 대꾸 않고 나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발치의 개를 무심히 쓰다듬었다. 숙였던 몸을 도로 세우고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앉은 채 그런 나를 또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무진이 문득 나른하게 물어 왔다.

“개 기를까?”

“혼자 두는 시간 많아 안 돼, 불쌍하잖아.”

“그럼 서너 마리 기르지.”

“집 안 어지러워져.”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면 되고.”

“됐어.”

“…그만 쓰다듬어.”

그러나 이내 여지없이 초조하고 사나운 기세로 명령해 온다. 고달프게 애쓴 것이 사라져 버릴까, 나는 선뜻 손을 뗐다. 앞으로 조금 기울었던 무진의 자세 또한 다시 느긋하게 젖혀진다.

얼마 가지 않아 차는 산길 초입에 멈추어 섰다. 먼저 도착한 차량에서 내린 운전수가 밖으로 나와 선 채 능선을 둘러보고 있는 노회장에게 눈길 상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어. 수렵 시즌이면 짐승들도 알아,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면 벌써 다른 산으로 달아나 버리지. 산책 삼아 천천히 걸어 올라가 보자구.”

노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곤, 우리를 향해 힐긋 시선을 그었다. 그리고 문득 새삼스러운 눈길로 장전되지 않은 엽총을 살펴보고 있는 무진의 헌칠한 키대를 짧게 훑었지만,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곧장 안주인과 함께 전문 수렵인과 포인터 두 마리를 대동한 채 앞장서 산길을 올랐다.

이어 장남과 차남 내외가 각자 거리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차 밖으로 내려선 포인터 두 마리는 신선한 산 공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제자리에서 다리를 탁탁 치며 꼬리를 흔들었다. 무진은 차량 문을 연 채로 수렵인의 도움을 받으며 느긋하고 세심하게 총신을 점검했다.

총열을 꺾은 상태로 약실에 직접 두 발의 셸을 장전한 후 그것을 개방해 둔 채로 그는 이윽고 ‘가자.’ 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걸음을 떼자, 근질근질했다는 듯 포인터가 곧장 앞서 달려 나갔다.

딱히 험준한 산이 아니어서인지, 조금 걸어 올라가다 보니 잡풀이 우거진 구릉지가 나왔다. 그곳에서 무언가의 냄새를 맡았는지 사냥개 두 마리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다가서며 우리를 부르듯이 힐긋힐긋 돌아보곤 하였다.

무진은 개방했던 약실을 닫으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한쪽 어깨에 개머리판을 고정시킨 채 엽총을 조준했다. 나는 남자와 조금 뒤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어 포인터가 수풀 안쪽으로 거침없이 달려들었고, 그에 무언가가 푸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주홍색 날개를 가진 꽁지가 긴 장끼였다.

탕―!

무진은 놈이 최대한 높이 날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사격을 하였다.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청명한 하늘에 빛을 긋고 날아가던 장끼가 우거진 수풀 속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을 날렵한 포인터가 냉큼 찾아 물어 와 무진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잘했어, 상쾌한 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쪽에서 수렵인 남자는 흐뭇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는 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방아쇠를 당기는 쪽이 아닌, 총구 앞에 서는 것으로 타고난 인간임이 틀림없다.

이후 무진은 조금 흥분한 얼굴을 한 채 야생적인 태도로 거침없이 사냥을 이어 갔다. 포인터 역시 신이 나서 우리를 더 깊은 산길로 이끌었다.

다른 쪽에서도 소식이 있는지 멀리서 간간이 총성이 길게 바람을 타고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이쪽에서 터트리는 총성의 횟수가 월등하였다.

“힘들어?”

조금 거리를 둔 채 뒤따르는 이쪽은 아예 잊은 듯이 한창 사냥에 몰입해 있던 무진이 문득 고개 돌려 나를 찾고는, 가까이 다가와 선 채 물었다. 허세를 부리기엔 내 숨이 퍽 거칠었다.

“조금.”

한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착잡하게 대답하자, 무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흐음.’ 소리를 내며 씩 웃었다. 그러곤 얼핏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휘익― 휘파람을 불어 사냥개를 부른다.

“데리고 있어.”

충직한 모습으로 다가와 서는 두 마리 중 흰색 점박이 놈을 불쑥 안아 올린 무진은 놈을 곧장 내 품으로 털썩 떠안겼다.

“혹시 적이 나타나거든, 물어, 해.”

그리고 멍청한 얼굴로 그저 하얀 입김만 내뿜고 있는 나를 좀 더 빤히 살피다가, 이내 입꼬리를 휘며 발길을 돌렸다. 갈색 점박이 놈이 그를 뒤따랐다.

나는 품 안의 묵직한 녀석을 다시 바닥에 내려 준 뒤, 쾌활한 걸음으로 산길을 오르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더 이상 따라 오르는 건 내겐 무리였다.

흰색 점박이 녀석을 데리고 나는 잠시 숨 돌리며 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점박이 놈은 엽총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사냥감이 있는 자리를 두어 번 심각하게 알려 주었는데, 내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조금 머쓱해하는 듯이 눈치를 살피며 다시 옆으로 돌아오곤 했다.

커다란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낯을 가리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녀석을 손짓해 불러 보았다. 그리고 가만가만 등허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문득 하얀 눈밭 위에 나와 녀석의 발자국 외에 작은 화살표 모양의 표시가 계시처럼 찍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끼의 발자국일 것이었다.

사냥은 않더라도 점박이 놈을 좀 놀려 주고 싶은 짓궂은 마음이 불현듯 들었다.

“찾아보자.”

그것을 찾는 척하며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시늉을 해 보았지만, 이제 속지 않겠다는 듯 녀석은 곧잘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멋대로 앞서 걷는 것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꼬리도 흔들지 않으며 옆으로 붙어, 우리는 함께 화살표를 추적했다.

그리고 어느새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키가 훌쩍 큰 나무의 둥치 사이로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설핏 움직이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으쓱한 기분이 들어 그만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때,

“여승재 씨……?”

익숙한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는 것에 반사적으로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마주한 사람은, 무진의 둘째 형이었다. 초록을 감싼 순백의 자연 속에서 그는 창백한 안색 때문인지 어쩐지 더 청렴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 모순의 상황에 불쾌감을 감출 수 없어, 나는 모른 척하며 얼른 뒤돌아서 버렸다. 그러나 그는 나를 확인하자마자 새삼 반가운 얼굴을 하고는 성큼성큼 쫓아오며 말을 걸어 왔다.

“혹시 장끼 발자국을 쫓아 왔어요? 이런, 나와 같은 실수를 했군요. 화살표 모양의 발자국이 장끼 것이긴 하지만,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이 아닌 그 반대쪽이 진행 방향이죠. 나도 깜빡했어요.”

네, 짧게 대꾸하며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옆쪽에서 끈질기게 걸음을 맞추던 남자가 문득 우울한 목소리로 잇는 말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여승재 씨, 아직 날 원망하고 있군요……, 그렇죠……?”

“…….”

“내가 더 어떻게 사과를 해야 기분이 풀릴지 모르겠네요……, 정말 어려워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미간 사이로 불티가 탁탁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싸늘히 대꾸하며 불끈 주먹을 말아 쥐고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런데 돌연,

“손목, 흉터는 좀 어때요?”

전연 그의 것으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조용히 속삭여 물어 오는 것이다. 분명 거리가 조금 있는 상태인데, 귓가에 바싹 입술을 누르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주춤 멈춰 서며 기어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마주한 얼굴은 원래의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는 수줍은 듯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그쪽으로 실력이 좋은 성형외과의 친구를 알고 있어요.”

“혹시……,”

등줄기를 스치며 떠오르는 하나의 영상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네, 말하세요. 그는 옅은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대꾸했다. 혹시……, 말을 잇는데, 문득 점박이 녀석이 불안한 듯 끙끙거리며 나무숲 뒤쪽을 향해 앞발을 두드렸다.

“…아니요, 됐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서려는데, 여승재 씨, 이름을 부르며 그가 서늘한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와 찰나 내 왼쪽 손목을 덥석 낚아채듯 붙잡는 것이었다.

“이, 이것, 놔아……!”

순간 전신에 끔찍한 소름이 돋아, 이성을 잃고 온 힘을 다해 그를 와락 밀쳐 내 버렸다. 아……! 그는 허약한 짐승처럼 눈밭 위를 나뒹굴었다. 두려워 재빨리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먼저 어깨를 틀며 발길을 떼는 순간,

“두 사람, 잠시 가만히 있는 게 좋겠어요.”

길을 들어선 쪽에서 이번엔 남자의 아내, 무진의 둘째 형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내 이마를 향해서였다.

“여승재 씨, 움직이면 안 돼요. 뒤쪽에 위험한 짐승이 있으니까.”

내가 바로 돌아서 보이자, 그녀는 조준구에서 잠시 눈을 뗀 채 나를 향해 다시 한번 경고를 하였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 입을 굳게 다문 채 씩씩 가쁜 콧김을 내쉬었다. 콧등의 뼈가 산산조각이라도 난 것처럼 아프고 뜨거웠다.

진정하라는 듯, 여자는 ‘쉬―’ 하고 입술을 모아 바람 소리를 냈다. 등 뒤에선 점박이 녀석이 나무숲을 향해 계속해서 끙끙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나는 총구 뒤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얼핏 그녀의 입매가 비아냥조로 비스듬히 치켜 올라가는 듯했다. 관자놀이가 터질 듯해, 차라리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리고 그때,

“형수.”

철커덕―, 총열을 꺾었다 붙이는 소리와 함께 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더 뒤쪽이었다.

“움직이면 안 됩니다, 조심하세요.”

고개를 들어 보자, 긴 팔로 태연히 총신을 조준한 채 이쪽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내 검은 폭군이 보였다. 나는 그를 곧게 응시하면서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만 옆쪽에서 패잔병처럼 쓰러져 있던 그의 형이 아군을 만난 듯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불렀다.

“무, 무진아…….”

“닥치고 그쪽도 움직이지 마.”

무진은 그를 향해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으며 심드렁히 명령했다. 남자는 잘 길들여진 온순한 동물처럼 그의 말대로 무릎을 딛고 선 채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뭘… 하시려는 거예요?”

내게 겨누었던 총구를 슬쩍 떨어뜨리며 여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등 뒤의 무진을 향해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뭘 하려다니, 형수와 같은 걸 하려고 하죠.”

웃음기를 띤 채 무진은 농담조로 대꾸했다. 그리고 조준구에 바짝 붙이고 있던 눈길을 잠깐의 외도처럼 나를 향해 힐긋 그으며 음습한 목소리로 낮게 덧붙인다.

“위험한 짐승이 감히 내 걸 노리고 있어서.”

“…….”

불쾌한 얼굴로 여자는 무릎을 꿇고 있는 자신의 남편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남자는 쩔쩔매는 듯한 태도로 무진과 자신의 아내와 나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빙점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멀리서도 총성은 울려오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눈 속에 파묻힌 듯하였다. 그리고 맥연히 뒤쪽에서 나뭇가지에 얹힌 눈덩이가 푹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박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발을 굴렀다.

나는 비로소 굳게 다물고 있었던 입술을 떼었다. 벌린 입술 사이로 새하얀 정념이 흘러나왔다. 조준구 너머로 여자의 뒤통수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무진이 언뜻 그런 나를 향해 곧게 시선을 돌려 왔다.

…물어.

나는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그에 무진이 겨눈 총구가 곧장 나를 향해 그어져 왔다, 그리고 이어, 탕―! 커다란 총성이 빙점을 깨뜨렸다.

“꺄아아아!”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엽총을 떨어뜨렸다.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는 턱을 늘어뜨린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탄환 배출구로 탄피가 툭 떨어지고, 무진은 이어 곧바로 또 한 발을 쏘았다. 탕! 총성이 높이 치솟았다. 그러나 무진은 숙달된 움직임으로 재빨리 총열을 젖혀 열고 새 실탄을 장전했다.

철커덕―, 다시 약실이 닫히고, 그는 무감한 얼굴로 내 이마 곁으로 조준을 하자마자 연사를 하였다. 탕! 탕! 잇단 총성에 기어이 여자가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

나는 얼음처럼 붙박여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성의 여운과 함께 나무숲 뒤쪽에서 커다란 짐승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투투툭,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여자가 가쁜 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탄피를 툭 걷어차며 무진은 한쪽 어깨에 총신을 걸친 채 여자를 지나쳐 나를 향해 곧게 걸어왔다. 그리고 가까이 마주한 내 얼굴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가,

“이제 그만 우리 집에 돌아가자, 예쁜 내 승재야.”

씩 웃으며 내 손목을 붙잡아 끌었다. 영원히 그 자리에 박혀 있을 것만 같았던 무거운 발길을 떼며 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옮기며, 언뜻 오른쪽 관자놀이로 환열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흘긋 곁눈으로 돌아보자, 좀비처럼 구부정히 선 남자가 캄캄한 동굴처럼 두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탄피를 밟으며 서둘러 무진의 보폭에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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