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03 (27/41)

Chapter 03

의식하지 않아도 뒤쪽으로 눈길이 갔던 것은 올림픽대로를 탈 때부터였다. 그 즈음부터는 기욱 역시 알아챘는지 운전을 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내비게이션으로 손을 뻗어가 잘 틀어 놓지 않는 dmb 방송을 켰다. 마침 케이의 컴백 티저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잘 빠졌지?”

“예, 예.”

관심을 돌리기 위해 말을 건네자, 액정화면으로 힐긋 눈을 주며 기욱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케이의 컴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녀석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는 용훈을 대신해, 미국에서 도착하는 케이 어머니의 마중을 나가는 길이었다.

고속도로를 타면 뒤가 잡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날 것을 우려해 혼자 나서려고 했는데, 이쪽에서 요청해 들어오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예의가 아니라며 김 실장이 기어이 기욱에게 운전을 맡겨 보낸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과연 본능적인 감으로 단순히 같은 길을 가는 정도가 아니다 여겼는지 두어 번 속도를 높였다 줄였다 하며 실험을 해 보는 듯했다.

88분기점을 넘어서도 계속 뒤가 거슬리자, 기욱은 이쪽에서도 신경이 쓰일 정도로 룸미러를 힐긋거려 댔다. 이 연극이 얼마나 지난하게 늘어질지는 모르지만, 우선은 녀석을 안심시켜 두어야 했다.

“기욱아, 실은 내가 말을 안 한 게 있는데.”

덩달아 룸미러를 힐긋거려 보이며 말을 건네자, 기욱은 단단히 긴장한 얼굴로 꿀꺽 침을 삼켰다.

“예전에 그 스토커 문제가 계속 신경이 쓰여서, 최근에 비밀경호를 받고 있거든. 뭣도 아닌 사람이 그런 거 받는다고 하면 좀 우스워질 것 같아서 알리진 않았고.”

“아……!”

조금 쑥스러운 듯이 설핏 웃으며 진지하게 설명을 해 주자, 기욱은 대단한 감명이라도 받은 듯이 탄성을 터트렸다. 무진은 미심쩍어했지만 내 연기력은 퍽 괜찮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내 기욱은 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어쩐지 좀 서운한 기색으로 ‘저기, 저기……’ 하고 말을 붙여 왔다.

“스, 승재 형 그런 거는 저, 제가 맡아서… 그놈 잡으려고 해, 했는데…….”

그러니까 저를 좀 더 믿어 주지 못한 나에 대한 서운함과 더불어, 그 스토커 놈을 빨리 잡아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녀석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옥죄임으로 훈련되어 있을지 예측할 수 있어, 얼른 고개를 저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을 붙였다.

“사실 스토커 같은 거 없을지도 모르는데 기욱아, 그냥 내가 어쩌다 한번 봉변당하고 오버했을지도 몰라.”

“그, 그래도 신경 쓰이신다고…….”

“응, 그래서 비밀경호 붙였지. 그리고 기욱아, 너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돼. 앞으로 케이 활동 시작하면 너 이제 용훈이랑 같이 다녀야 된다고. 본격적으로 스케줄 잡히면 얼마나 바빠지는지 알지? 너 신경 흩트리면 그 애들 위험해져.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 돼, 너.”

무의식적으로 또 훈계조로 말을 끝맺고 나니, 기욱은 벌써 긴장한 듯이 어깨를 빳빳이 치켜세운 채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당근 주자 싶어 달래듯 덧붙여 말했다.

“케이 이번 활동 끝내고 난 뒤에, 그때까지 내가 계속 불안하면 너한테 맡기자. 그래도 돼?”

“예, 예, 형님.”

그러자 대뜸 옛 버릇으로 깍듯하게 대답하고는, 스스로도 무안했는지 얼굴을 붉힌다. 나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슬쩍 몰래 웃었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진의 말대로 그저 연극한다 치부하고 그들을 다만 내 비밀경호원 정도로 여기고 나니―실제로 무진이 붙인 사람은 그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내 자신이 퍽 대단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다른 한쪽의 비밀경호원이 언제 나를 급습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여행객들과 그들을 배웅하거나 마중하는 사람들로 공항은 북적였다. 입국장 앞의 전광판에서 케이 어머니가 타고 오실 홍콩경유 항공기의 도착 시간과 게이트 번호를 확인하는 동안 몇 번이나 어깨가 부딪쳤다.

기욱은 속상해했던 내 비밀경호원의 존재에 그나마 긴장을 풀었는지, 배가 고프다며 감자칩을 사 와서는 좀 드셔 보시라 내 앞으로 슬며시 내밀어 보이곤 했다. 입맛이 없었지만 꾸준히 권하는 것에 결국 해당 출구 앞에 나란히 대기해 선 채로 몇 개 집어 먹고 있었다.

언뜻 오른쪽 옆으로 단정한 슈트 차림의 키가 훌쩍 큰 남자가 다가와 서는 것이 느껴졌다.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다만 손에 묻은 기름을 닦기 위해 호주머니 안 손수건을 뒤적이다가 찰나 팔꿈치로 남자의 팔뚝 쪽을 툭 건드렸다.

“아, 죄송합니다.”

의식 없이 웅얼거리며 고개를 슬쩍 숙여 보이자, 그 역시 얼핏 고개를 돌리며 그저 ‘아, 예.’ 하고 건성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서던 남자가 문득 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제야 눈길을 들어 제대로 보니,

“…이승현 씨.”

“예. 안녕하십니까.”

앞머리를 짧게 깎아 세워서 이마를 환히 드러내어 인상이 더 단정해진, 무진의 개인비서 이승현이었다.

그는 나를 확인하자마자 조금 놀란 듯했던 기미를 곧장 지우며 깍듯하게 인사해 왔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의심에 찬 눈길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 이승현은 어색한 기운으로 슬쩍 웃어 보이며 의문조로 부드럽게 그어진 눈썹을 조금 치켜올려 보였다. 피곤한 투로 미간을 좁히며 나는 냉랭히 따져 물었다.

“일전에,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전무이사 곁에서 보좌하는 편이 훨씬 의미 있고 스스로 커리어에도 도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건 제가 아니라…….”

그제야 그는 내 오해의 방향을 알아챘는지 서둘러 손바닥을 내보이기까지 하며 부정하곤 난감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쪽에서 좀처럼 수상쩍단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자, 다감히 웃어 보이며 일정의 목적을 알려 주었다.

“전 오늘 전무님 심부름 왔습니다. 지인께서 입국하신다고, 바로 모셔오라고 하셔서요.”

“…아.”

단호하고도 깨끗한 어감으로 단번에 납득이 갔다. 확실히 뒤로 엉큼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 타입은 아니었다. 설명도 듣지 않고 몰아붙인 것이 미안하고도 무안해서 제대로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그는 괜찮다는 듯 입매를 말끔히 휘어 보였다.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이는데, 그는 얼굴의 근육을 쓰는 방식과 어법은 물론 목소리를 가다듬어 내는 방법까지도 퍽 어른스럽고, 그래서 언제나 조금씩 날이 서 있는 무진과 나를 모두 달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분명 형제 많은 다복한 집안의 장남일 것이다.

그의 단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에 별다른 위험성은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왼편에 선 기욱은 그저 내 눈치를 살피며 기름 묻은 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이승현은 그런 그에게 먼저 짧게 고개를 까딱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에 기욱이 당황해하며 ‘어, 어’ 하고 서둘러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쪽이 더 창피해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녀석의 허리께를 툭 쳐 버렸다.

그리고 더 무어라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입국장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들뜬 얼굴을 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목을 길게 내뺀 채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두리번거렸다.

마침 이승현이 먼저 찾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아.’ 하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인 그들의 모습이 어느새 이쪽에선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진의 지인이라는 사람을 맞이하는 이승현의 단정한 목소리가 웅성거림 속에서 옅게 들려왔다.

“권무진 전무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이어,

“아―, 그 새끼 성질 한번 급하네. 나 연락 안 하고 와서 우리 영감 먼저 봐야 되는데?”

경박하리만큼 가벼운 어조의 대꾸가 들려왔다. 목을 좀 더 빼내어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를 확인해 보려 했으나 이승현의 뒷모습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곁에서 기욱이 문득 ‘어.’ 하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곧장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얼굴을 마주 본 중년 여자는 케이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왜 안 나오시지……, 하고 좀 더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불현듯,

“엇, 여승이잖아?”

“……!”

친숙하게 내 이름을 토막 내어 호칭하는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려 보자, 낯선 남자가 빙글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이승현이 그 낯선 남자의 것인 듯한 체크무늬 보스턴백을 대신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남자를 훑어보고 있는 이쪽을 역시 어리둥절한 눈길로 바라본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넌 어떻게 그대로다? 어쩐지 권무진이 지나치게 서두른다 했더니. 하여튼 그 자식 대놓고 얼굴 보는 놈이야. 인상 나쁜 제 얼굴은 어떻게 고쳐 볼 생각 안 하고 말이야. 안 그래?”

“…아….”

무진의 지인, 홍콩 경유, 재잘거리는 말투, 세 가지 단서로 나는 마주한 남자의 이름을 번뜩 떠올릴 수 있었다. 믿기 힘들 만큼 체격이 자라고 얼굴의 골격 또한 변하여 생김새가 사뭇 달라졌으나, 눈살을 찌푸린 채 가만 뜯어보자니 크게 변함없는 애교스런 눈매라든가 입술 쪽은 확실히 예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홍.”

이제홍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열아홉 그 시절 바보 사인방이 서로를 불렀던 식으로 그의 이름을 짧게 줄여 부르자, 그는 놀랐다는 듯이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가 이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예쁘장하고 호리호리했던 그의 옛 모습이 더 확연히 떠올랐다.

“뭐야, 이제야 알아본 거야? 하여튼 너 여전히 둔하네. 어쨌든 나가자.”

호쾌하게 말하며 제홍은 곧장 나란히 걸음을 옮길 듯이 한 팔로 내 어깨를 감싸고 발길을 뗐다. 어릴 때는 신장이 비슷해 팔짱을 껴 오곤 했었다.

“아, 아니… 난…….”

여전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한 걸음 따라 걷다가 뒤늦게 단단히 발꿈치를 디딘 채 고개를 저었다. 그에 숨죽인 채 분위기를 살피고 있던 기욱이 덥석 녀석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응? 같이 나 마중 나온 거 아니었어?”

제홍은 멀뚱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붙든 기욱의 손과 나를 번갈아 보곤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승현이 나를 대신해 대답해 주었다.

“따로 나온 길입니다, 여승재 씨는 다른 볼일이 있으십니다.”

아, 하고 제홍은 바로 내 어깨에 두른 팔을 거두었다. 그에 기욱 역시 그를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곧장 입매를 히죽 휘어 올린 제홍이 내게 바짝 얼굴을 붙인 채 기욱을 힐긋 가리킨다.

“그런데 이쪽은?”

그러곤 흥미진진한 눈길을 반질거리며 속삭여 물어 오는 것이다.

“혹시 세컨드?”

“아니야.”

나는 정색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무척이나 아쉽다는 반응이다.

“에이―, 오랜만에 권무진 눈 뒤집히는 거 보나 했더니.”

“…….”

무진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제홍은 가장 효율적으로 나를 놀려 먹을 수 있는 종족이었다.

“저녁에 다 같이 보기로 했거든, 아참, 그러고 보니 저녁에 보면 될 걸 권무진은 왜 벌써 닦달이야? 하여튼 성격 참……. 어쨌든, 저녁에 같이 보자?”

간단하게 한판승을 거둔 제홍은 또다시 혼자 재잘거리며 떠들다가 멋대로 약속을 잡아 왔다.

“아니, 난 다른 일이 있어서 안 되겠어.”

오랜만에 재회한 반가움과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그의 모습에 잠시 놀란 것도 모두 뒤로하고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런 내가 가소롭다는 듯 놈은 곁눈으로 흘긋거리며 빈정거렸다.

“튕기는 것도 여전하네.”

그러고는 아쉬울 것 없다는 듯 훌쩍 걸음을 떼며 ‘어쨌든 보자고.’ 덧붙이는 것이다. 이승현은 내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지고 잠시 후, 얼이 빠져 있는 나와 기욱의 앞으로 케이의 어머니가 먼저 알은척을 하며 다가오셨다.

“아유, 늦었지. 캐리어 못 찾고 허둥댔지 뭐야.”

나는 얼른 표정을 고쳐 보이곤 오시느라 수고하셨다 인사하며 손을 맞잡았다.

***

열아홉 그해 가을, 무진이 그의 아버지에게 쫓겨나듯이 외국으로 떠난 뒤 혼자 비틀거리며 학교로 돌아온 나를 맞은 것은 모욕이나 비난이 아닌, 나의 자리가 없는 일상이었다. 내 별명처럼 나는 진짜 유령이 되어 있었다.

한때 권무진의 노리개, 그러나 증거는 모두 사라졌다. 권력이라는 것을 생애 처음 절실히 통감한 것은 그때였다. 나는 더 이상 어떤 소문으로도, 어느 누구의 기억에서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만 그들, 나머지 세 명이 있었다.

자퇴서를 낸 것은 숫제 스스로의 미래를 망쳐 버리고 싶다는 비틀린 폭력성과 절망감 때문이었으나, 기실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경멸에 찬 눈초리였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당시 그들이 형제처럼 지내던 무진을 배신한 내게 아무런 해코지도 않았던 것은, 무심이나 냉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박하리만치 그들 나름으로 나를 잘라 내고자 했던 결연한 각오였을 것이었다. 그토록 참혹한 비극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그들 또한 깊이 상처 입었을 것이었다.

그것이, 삶이 내게 주는 모멸감만큼이나 나를 고통스럽게 했었다.

***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집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확인하니 좀처럼 발길이 떼어지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불 밝혀진 베란다 창문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곤 십여 분 덧없이 건물 앞을 서성이자, 경비원이 다가와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을 확인하곤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며 발길을 돌렸다.

나는 다시 큰길가로 나가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사고, 천천히 걸어오며 한 개비를 피웠다. 바람이 찼다. 손가락이 얼어 무얼 쥐고 있다는 감각조차 느낄 수 없어서, 한 개비 더 피우지는 못했다.

짧게 남은 꽁초를 구둣발로 비벼 끄고, 콜록 헛기침을 하며 이윽고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켜보고 있었던지, 다가와 얼굴을 확인했던 경비원이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현관문 앞에 서선 도어록 버튼을 누르다 말고 빨갛게 얼어 어묵처럼 퉁퉁 부은 손가락이 우스워서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모두 번거로워진 기분이 들어 곧장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역시 여러 켤레의 신발이 뒤엉켜 있었다. 거실 안쪽에서 ‘왔다.’ 하는 목소리가 겹쳐져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들이 불현듯 오래전부터 조금씩 소멸되어 왔던 내 무엇을 재생시키는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손바닥으로 눈가부터 관자놀이까지 힘주어 비비며 신발을 벗고 걸음을 옮겨 거실로 들어서자, 베란다로 통하는 통유리 창가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이쪽을 마주 보고 있던 무진이 먼저 ‘늦었어.’ 하고 웃으며 맞았다. 그리고 이어 소파 위에서 늘어져 앉아 있는 지석운과 현찬성이 한 손을 설핏 들어 보이며 차례대로 인사를 건네 온다.

“오랜만.”

“아, 난 저번에 봤어. 창립기념 파티 때 말이야, 모에샹동이랑 캐비아를 엄청난 기세로 먹어 치우던데?”

오랜만이네, 대꾸를 했으나 어쩐지 탁하게 가라앉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그대로였다. 그 당시에도 벌써 발육을 마친 것처럼 건장했었으니, 어깨가 조금 더 넓어지거나 턱선이 좀 더 뚜렷해진 정도에 피부의 탄력도 때문인지 얼굴의 표정이 한층 느긋하게 보인다는 것 외에는, 찍어 놓은 듯이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혹시 이건 열아홉의 내가 죽어 가며 꾸고 있는 꿈이 아닐까 하는 소름끼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문득 끝 모를 서러움이, 방향 없는 안타까움이 가없이 밀려들었다. 소멸된 시간이 칼날로 변해 무릎을 댕강 잘라 낸 것처럼 어떤 중력도 느낄 수 없었다.

질식할 듯 가쁜 숨이 차오르고, 한 걸음 힘겹게 내디딜 때마다 모래 늪으로 폭삭폭삭 발목이 빠지며 걸어 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그때,

“걸어왔어? 왜 이렇게 차가워?”

얼이 빠진 얼굴로 휘청거리며 다가가는 것에 결국 무진이 씩 웃으며 걸음을 옮겨 먼저 내 앞에 와 섰다. 그는 빨갛게 언 내 손을 붙잡아 입가에 가져가선 ‘하아―’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따뜻했다. 그제야 번득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너구나, 하는 조건 없는 안도감.

그는 나를 빤히 응시하며 입김으로 내 손을 좀 더 녹여 주었다. 조명을 등지고 선 그의 음영 짙은 얼굴, 웅숭깊은 눈동자가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모두 알고 있다고, 이미 말해 두었다고, 그러니 저 애들은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홀린 듯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네 말대로 할게,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말 없는 내 다짐에 그는 만족한 듯 웃어 보이며 ‘착하네―.’ 조롱조로 속삭이곤, 내 손을 잡아끌고 비로소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마침 2층 계단에서 제홍이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본다고 했잖아?”

웃으며 주먹을 뻗어와 친근한 투로 팔뚝을 툭 건드렸다.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어릴 적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를 확인하고서야 나는 선연한 현실 안으로 들어섰다. 꿈이 아니다. 모두 살아 있다.

“…어쨌든… 오랜만이네.”

긴장이 모두 풀려,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그들과 마주 선 채 나는 뒤늦게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너무 기운이 빠져 있어서인지 스스로 듣기에도 어딘가 귀찮아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런 내가 우스웠던지 그들은 서로 짓궂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질 나쁘게 웃어 댔다.

“저놈 여전히 혼자 모노드라마 찍고 그러냐?”

“여승 청승이 어디 가겠어? 그런데 쟤 여전히 예쁘지?”

“…응.”

여전히 죽이 잘 맞는 현찬성과 이제홍은 먼저 내 개인의 신상을 조롱하고는, 이어 음흉한 어조로 이 집의 인테리어에 대해 비아냥거렸다.

“야, 그런데 위층 구조가 뭐 저 따위야? 찬, 너 저기 한번 올라가 봐. 2층 올라가자마자 바로 떡하니 침대 놓여 있다? 멀쩡한 방 따로 놔두고 말이야. 엄청 노골적이야.”

“현관 바로 앞에 침대 없는 게 어디야. 하여튼 권무진, 성질 급한 새끼.”

“안 닥쳐? 내 집 내 맘대로 꾸미는데 무슨 상관이야?”

내 눈치를 힐긋 살핀 무진이 기어이 그 둘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성질을 부렸다. 그동안 지석운은 술안주로 펼쳐 놓은 나초를 바삭 씹으며 한심스런 눈길로 그들을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네 명은 내가 통과해 온 동시에 소실점 바깥으로 던져두었던 시간이었다. 그것을 마주한 지금, 무릎뼈가 단단히 채워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고맙고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들에게 어떤 보답을, 가장 원초적인 충족으로써 배상을 해 주고 싶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퍼마시고 있는 거야?”

두꺼운 외투를 벗어 대충 소파 위로 걸쳐 두며 여상히 묻자, 한참 투닥거리고 있던 바보들이 우뚝 멈춰 서며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를 훑어보니 아직 비어 있는 맥주병은 거의 없었다. 이제 막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 밥 해 주려나 보다.”

“여승이 예전부터 인정은 있었잖아.”

“권무진은 기껏 초대해 놓곤 안주로 배 채우라고 했는데.”

소매를 걷으며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찬성과 제홍이 또 말을 맞춰 떠들어 댔다.

“저런 놈들 뭐 하러 밥 먹여 줘?”

싱크대 앞에서 먼저 손을 씻고 있으니, 따라 들어온 무진이 퉁퉁거리며 말을 붙여 왔다. 그리 싫진 않은 얼굴이었다.

“뭐 도울 거.”

“없어. 거치적거려, 나가 있어.”

쓸데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뒤적거리는 것을 내보내고, 새로 밥을 안치고, 아주머니가 미리 깔끔하게 손질 후 밀봉해 놓은 생선을 굽고, 시판 된장을 풀고, 역시 언제나 냉동실에 준비되어 있는 멸치육수와 바지락, 다진 마늘 등을 꺼내 놓고 나니 손수 하는 요리랄 것도 없었다. 다만 애호박과 감자 등을 씻고 깎고 다듬는 정도.

항상 2인분의 요리 양이 준비되어 있어서 두부가 좀 더 있었으면 했지만, 맛이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니라 대충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있는 대로 밑반찬을 모두 꺼내 놓고 나니, 마침 압력밥솥이 경쾌한 완료음을 냈다.

압력 추 밑으로 증기가 쉭쉭거리며 빠져나오는 소리에, 부르지 않았는데도 거실에서 네 명이 주방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앉았다.

“난 또 거창하게 지지고 볶은 거 차려 주나 했더니. 뭐, 소박한 가정식 백반, 좋네.”

한 명씩 차례대로 공기에 밥을 퍼 주는데, 가장 늦게 들어온 현찬성이 차려진 식탁을 훑어보곤 어깨를 으쓱이며 한소리를 했다.

“넌 먹지 마.”

그 앞으로 놓아둔 밥그릇을 당장 치우며 쏘아붙이자, 왜인지 찬성과 제홍이 그런 나를 보곤 동시에 기함을 하며 ‘우와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모른 척하고 미간을 좁힌 채 자리에 앉는 나를 향해 무진이 흡족한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너 그렇게 까불다 여승재 독침에 한번 맞을 줄 알았다.”

“청승 떨던 여승 어디 갔어, 옛날 여승 데리고 와…….”

결국 손바닥을 싹싹 빌어 보인 후에야 내게 다시 밥그릇을 건네받은 찬성이 시무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했다는 듯이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지석운이 국자로 된장찌개를 떠 개인 접시로 담으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주눅 들어 있어 그랬지 딱히 고분고분한 성격은 아니었지.”

“내가 그거 산증인이야.”

무진이 냉큼 말을 받았다. 힐긋 쳐다보자, 딴청을 부리듯 곧장 눈길을 돌린다. 그리고 나를 가만 주시하고 있던 제홍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어 왔다.

“나이 먹으면서 독해진 건가? 그 얼굴 달고 있었으면 뭐 딱히 고생할 일은 없었을 텐데.”

“넌 그동안 꽤나 고생한 모양이네.”

그런 그를 무심한 눈길로 마주 보며 나는 심드렁히 대꾸해 주었다. 숨은 뜻을 곧잘 간파한 제홍이 ‘으힉!’ 하고 기이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나머지 녀석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성장 변화지. 여러모로 신기한 생명체야.”

지석운은 여전히 진지한 태도로 밥알을 씹으며 안경 너머 제홍을 힐긋 쳐다보곤 설명했다. 이어 찬성이 키득대며 결론 내렸다.

“요샛말로 역변이지, 역변. 크크크큭.”

“뒤늦게 제대로 잘 자란 거지. 네놈들이 너무 빨리 다 자라 버린 거다.”

자신을 두고 오가는 평가가 못마땅한지 제홍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뚱하니 말을 받았다. 아무래도 신기해,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예사로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말투나 행동이 덩치 따라 조금이나마 달라져서 다행이야. 예전 그대로였으면 좀… 그 뭐라고 하지… 아, 그래, 드래그 퀸 느낌일 것 같은데.”

“으하하하하!”

조롱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 내 심상한 어투에 오히려 찬성은 경박하게 웃어 댔다. 지석운조차 슬며시 입매를 휘며 키득거렸다. 옆자리의 찬성을 팔꿈치로 가격하며 제홍은 울적한 얼굴로 말했다.

“야, 넌 웃을 때 아니야. 너하고 나 합쳐서 삼연타야…….”

“아웃이지, 얼른 먹고 썩 꺼져.”

두 사람의 앞으로 젓가락을 짝 엇갈려 부딪치며 무진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소박한 가정식 백반일지언정 기실 가장 알찬 저녁 식사를 마친 덕분에 헛배를 불리는 맥주는 치워졌다. 대신 무진은 2005년산 샤토 페트뤼스를 땄다. 그리고 제홍은 집들이 선물로 오는 길에 샀다며 뜬금없이 스파클라를 꺼내어 보이곤, 각자 하나씩 나누어 주며 심지에 불을 붙여 주었다.

“옛날 생각나고 좋잖아. 일어나, 일어나. 더 나이 들면 이런 유치한 짓거리도 쪽팔려서 못할 거 아냐.”

결국 우리는 추운 베란다로 나가선 채 작은 막대 폭죽을 밝히며 와인을 마셨다. 스파클라에서 튀어 오르는 불티에 그들은 모두 그것을 쥔 손을 창밖으로 내민 채―정작 그것을 준비한 제홍까지도― 조금 귀찮아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청명한 겨울밤 짙은 어둠 속에서 작게 빛나다 이내 사그라져 버리는 불꽃에 마음을 빼앗겨, 멍하니 바라보며 슬쩍 막대를 좌우로 흔들어 보기도 하였다.

파사삭, 불티가 튀어 올랐다. 그것은 제홍의 말처럼 내 열아홉 기억 속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등이 베이는 줄도 모르고 수풀 속에서 무진과 몸을 섞으며 그의 어깨 너머로 올려다보았던, 여름밤 끝없이 피어오르던 불꽃.

문득 눈이 먼 것처럼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불꽃이 꺼졌다.

“…….”

좌우로 흔들던 막대를 얼굴 앞에 가져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무진이 거실 안으로 들어가 남아 있는 스파클라와 내 외투를 가져와 건네주었다.

외투를 어깨에 걸친 채 또 하나의 스파클라 심지에 불을 붙이자, 네 명도 거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선 채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또한 창밖으로 막대 폭죽을 든 손을 길게 뻗어 흔들며 다른 한 손엔 와인 잔을 쥐고 조금씩 홀짝였다. 입안을 감도는 타닌이 풍부한 과일 향과 오묘하게 어우러지고, 진한 초콜릿의 끝 맛이 여운을 남겨 퍽 인상적이었다.

쥐고 있던 스파클라의 불꽃이 마지막 불티와 함께 어둠 속에서 잠잠히 사그라지고 난 후, 나는 더 이상 새로운 심지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마시고 있는 와인에 관심이 옮겨 갔다.

내 잔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곤 무진이 와인 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것을 받아 들고 나는 직접 잔을 채웠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기울여 혀를 적시며, 천국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가 형상화된 와인 병의 라벨을 보았다. 그제야 페트뤼스Petrus가 성 베드로의 라틴어식의 발음 표기임을 알아차렸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언한 첫 번째 사도였으며, 예수의 수난 시에는 세 번이나 그를 부정하였으나 신의 관용과 사랑을 받고, 예수의 승천 후 결국 로마가톨릭교회의 초대주교가 된 성 베드로. 그리고 종래엔 어떻게 되었던가, 황제의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殉敎,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

나는 혼자 세 번째 잔을 비웠고, 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무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혀 거꾸로 매달린 채 죽어 가는 남자를 떠올렸다.

별것 없는 대화였다. 각자 진행하고 있는 일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 대한 겉핥기식의 이야기뿐이었다. 겨우 그 정도에도 내가 참여를 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는 것이 신경이 쓰였는지, 내게서 와인 병을 다시 가져가며 제홍이 문득 영화배우 누구 씨의 사인을 부탁해 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말았다.

내 집요한 시선에 무진 역시 오만한 얼굴로 간간이 곁눈으로 이쪽을 힐긋거리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어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또 한 번 순교에 대해 생각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들이 두어 번 돌아가며 잔을 더 비운 후, 이제 그만 들어가자 하고 발길을 옮기던 찰나였다. 가장 먼저 거실 안으로 들어서던 제홍이 벨이 울리고 있는 탁자 위 무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건네주려다 말고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액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권무형……?”

“…….”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진의 둘째 형이었다. 시선들이 빠르게 교차하고, 그것은 종래 나와 무진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머물렀다.

왜인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어 나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무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아, 그래. 알아, 이번 주말. 음.”

통화를 하는 목소리 또한 지극히 예사스러워 오히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지, 그가 언뜻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데리고 갈 생각이야. …그래, 알았어.”

그리고 가뿐히 전화를 끊은 뒤, 저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을 오히려 수상쩍다는 듯이 흘겨보며 눈썹을 히끗 치켜올려 보이는 것이다. 그에 제홍이 실망스럽다는 듯이 광대 쪽으로 얼굴 살을 밀며 콧소리를 낸다.

“에이―, 오랜만에 권무진 신랄한 쌍욕 듣겠구나 기대했는데.”

“재미없어.”

찬성 역시 뚱한 얼굴로 거들었다. 그러나 무진은 어울리지 않는 유순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나른한 어조로 대꾸했다.

“쌍욕할 게 뭐 있어. 나쁜 뜻 없었고 치기 어린 장난질이었다는데 뭐. 그런 새낀 거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제 와 형제끼리 척질 수도 없는 거잖아. 뭣보다―”

그러다 또 이쪽으로 냉랭한 곁눈을 주며 말을 잇는다.

“여승재가 얼마나 착한지 몰라. 참고 인내하고 견디고, 모른 척하고. 다만 언젠가 내가 표독스럽게 구는 게 더 좋다고 했더니 나한테만 일부러 못돼 처먹은 척을 하고 말이야. 하여튼 내 앞에서 빼곤 다 천사표야.”

“…….”

그에 세 명이 또 얼른 굳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그의 빈정거림 그대로 보란 듯이 고개 돌리며 모른 척해 주었다.

우리를 할퀸 그 비극의 전말에 대해 내가 더 이상 아무런 언급도 않는 것을 질책하는 말임을 알고 있다. 질책하는 동시에, 그럼으로써 나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무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그의 아버지 앞에서 다만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선언한 것은, 우리 관계의 종식 여부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도 함구하겠다는 뜻이었고, 그건, 이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나의 무력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기력함 앞에서 궁상떨지 않기 위해, 처량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쾌하고 구역질 나는 기억에 함몰되어 지금 우리의 시간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감시하는 이의 정체를 캐물으면서도 끝내 먼저 그의 둘째 형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진은 그러한 나의 태도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종종 제가 먼저 그에 대해 넌지시 말을 꺼내었다가 내가 슬쩍 시선을 회피하면 이토록 날카롭게 굴어 오는 것이었다.

“아, 기분 굉장히 좋아졌어. 기념으로 한 잔씩들 더 하자고. 이번엔 정말 좋은 놈을 가져올 테니까.”

이번에도 역시 불현듯 내게 화풀이를 하는 그가 미워 일부러 더 눈길을 피해 버리자, 그런 나를 빤히 쏘아보던 무진은 돌연 몹시도 부자연스러운 호쾌함으로 지껄이고는 주방 안쪽으로 척척 걸어 들어갔다.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힐긋거리고 있던 찬성이 석운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지, 저걸 의학적으로 뭐라고 설명하지?”

“싸이코.”

지석운은 간명히 대답했다. 아하, 제홍과 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곧 돌아온 무진의 손에 들린 와인 병에 붙은 변색된 1947년 빈티지 라벨을 확인하고는 이내 태도를 바꾸었다.

“진짜 남자야, 감정을 자유자재로 막 조절해.”

“알고 보면 여승 머리 나쁜 게 제일 나빠.”

그에게 살살거리다 못해 제홍은 나를 모함하기까지 했다. 지석운조차 그의 손에 들린 것에서 흥미로운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지껄였다.

“세상엔 좋은 싸이코와 나쁜 싸이코가 있어, 확신컨대 넌 옳은 쪽이야.”

추켜세워진 것에 퍽 기분이 나아졌는지 무진은 느긋한 얼굴로 코르크 마개를 따다 말고, 그러나 이내 나를 향해선 냉랭한 눈길을 던지며 명령조로 말을 건넸다.

“넌 이만 올라가서 자.”

“…….”

언 손을 녹여 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번엔 내팽개쳐진 기분에 나는 잠시 그를 뚱한 눈길로 쏘아보다가, 냅다 손을 뻗어 그에게서 1947년산 베드로를 낚아채 왔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바보들에게 말릴 겨를도 주지 않고 곧바로 와인 병 주둥이에 입술을 댄 채 고개를 젖히고 꿀꺽꿀꺽 짙은 액체를 들이켜 버렸다.

“야, 너 그거……!”

“안 돼…….”

빈티지에 따라 그 향과 혀를 적시는 재질감이 달랐다. 처음의 것보다 훨씬 독특한 향이 코를 찌르고 동시에 묵직한 타닌감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목구멍을 뱀처럼 넘어왔다. 압도되는 기분에 기분대로 양껏 들이키지 못하고, 입안에 머금었던 것도 병을 치우며 반쯤 뿜어 버리고 말았다.

“주여, 저 새끼를 용서하소서…….”

경악스럽다는 얼굴로 찬성이 가슴 위로 성호를 그으며 지껄였다. 지석운은 얼른 내 손에서 와인 병을 가져가며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이놈이 우리나라에 몇 병 들어와 있는지 몰랐을 거야, 아무렴.”

“무지몽매해서 저지른 실수라고 너 지금 빨리 기도하면 용서해 주실지도 몰라.”

이어 제홍이 힐난조로 말을 붙였다. 무진은 감흥 없는 얼굴로 다만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힐긋 시선이 마주치자 재미있다는 듯 반들거리는 눈매로 픽 웃어 보였다. 그를 곧게 쏘아보며 나는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닦아 냈다.

“난 절에 다녀.”

“그럼 우선 부처님한테 용서를 구해. 두 분 친해서 대신 얘기해 주실 거야.”

“헛소리 좀 지껄이지 마. 이딴 거 알 게 뭐야.”

그리고 더 이상 상대하기 귀찮아져 쏘아붙여 주고, 곧장 발길을 돌려 계단으로 걸음을 옮겨 버렸다. 뒤에서 나를 두고 부조리한 판단들이 오갔다.

“여승 확실히 나이 먹으면서 변했다니까, 그것도 질 나쁜 쪽으로.”

“내 생각엔 아무래도 권무진한테 옮은 것 같아.”

“동감.”

“저거 지금 나한테 잘 보이려고 저렇게 못돼 처먹은 연기하는 거라니까.”

마지막으로 무진이 비아냥조로 떠들었다. 얼른 위층으로 올라서 버렸다. 그리고 먼저 욕실로 들어가 건성으로 씻고 나오니, 아래쪽에선 여전히 간간이 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퍽 진지한 투로 조용히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나 속이 불편하지 않아 의식하지 못했는데 퍽 취기가 오르긴 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모두 아침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아 드레스룸이나 다른 방 안으로 들어가 자려고 했는데,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나른한 기분이 들어 온몸을 곧게 늘어뜨린 순간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온전히 빠져들진 못하고 어렴풋한 가수면 상태로, 잠결에도 복기하듯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다시 몸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것이다.

개자식, 분위기 좋았는데 뜬금없이 전화라니. 이래저래 불쾌하기 짝이 없는 역겨운 개자식.

“개자식, 그거 나한테 하는 욕이야?”

“…….”

그런데 문득, 온몸을 지그시 압박해 오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바짝 속삭여 왔다. 퍼뜩 잠이 깨어 반짝 눈을 떠 보니, 역시나 무진이 내 몸 위로 덮치듯 올라와 있었다.

귓바퀴가 얼얼했다. 깨문 모양이었다. 한쪽 벽 구석의 보조등에서 고요히 흘러나오는 연약한 불빛에 코앞 그의 얼굴이 가면처럼 반쪽씩 어둡거나 환하였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뭘.”

“방금 어금니 딱 붙인 채 질겅 씹었잖아, 개자식, 그거 내 욕이냐고.”

“아니야.”

시치미를 떼 보다가 불량스레 되묻는 것에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무진은 내 턱을 붙잡아 마주 돌리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냥 꿈꿨어.”

“아하.”

“꿈에 멍멍개가 나와서 내 바지에 오줌을 갈겼거든.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개, 사나운 얼굴이 널 닮은 것 같… 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덥석 고개를 내려 귓바퀴를 질근 씹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는 내 손목을 먼저 낚아채 붙들고는, 의기양양한 투로 속삭여 물어 온다.

“너, 집에 들어서면서 쫄았지.”

“…….”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대답 없이 심드렁한 얼굴을 해 보였다. 나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미리 풀어 둔 것으로 치하를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내게는 직접 말 꺼내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상기시키는 꼴이 잔망스럽고 괘씸해, 나는 이번에도 역시 모른 척해 버렸다. 그러자 무진은 좀 더 묵직하게 온몸으로 나를 깔아뭉개며 은근한 투로 말을 잇는 것이다.

“다들 밑에서 뻗어 누웠어.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옛날 생각나지 않아?”

“옥상 물탱크 뒤로 끌고 가서 입 틀어막고 박아 대던 그 옛날 말이지.”

그에 관해서라면 이쪽 역시 할 말이 많아 냉큼 힐난조로 말을 받았는데, 무진은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한참 키득거렸다. 그리고 또 슬며시 턱을 핥아 오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거들먹거려 온다.

“어때, 추억 삼아 한번.”

“뭘 또 추억 핑계 삼아? 그냥 하고 싶은 거 아냐. 그런 기분 들어 이 새벽에 깨운 거잖아.”

“어떻게 알았지?”

어깨를 떠밀며 핀잔을 주자, 그는 진심으로 궁금하단 얼굴로 갸웃하며 물었다. 나는 한심스런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며 슬쩍 한쪽 무릎을 세워 그의 사타구니를 지적했다.

“이렇게 단단해진 걸 문지르고 있는데, 몰라?”

“아,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그에 무진이 당장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상의를 벗기려 들었다. 능숙한 손길에 저항하기도 전에 가슴께 위로 옷자락이 밀려 왔다. 그리고 익히 그래 왔다는 듯 무진은 곧바로 내 젖꼭지를 핥았다.

“미쳤어? 아래 다 자고 있다며. 저리 비켜.”

“싫어.”

머리카락을 뜯어 올리며 억지로 떼어 내자, 심통 맞은 얼굴로 짧게 대꾸한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숙여 오는 것에, 나는 얼른 먼저 그의 사타구니로 손을 뻗었다.

“손으로 대충 해 줄 테니까 참아.”

“그걸로 안 돼.”

“뭐가 안 돼? 벌써 이렇게 흘리고 있으면서.”

실내복 바지와 속옷을 차곡차곡 끌어 내린 뒤 벌써 빳빳하게 머리를 세우고 있는 것의 번질거리는 꼭지를 슬쩍 매만지며 힐난하자, 일순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통스런 얼굴을 한다. 얇게 벌린 입술 사이로 묵직하게 새어 나오는 숨결에서 알싸한 과일 향이 맡아졌다.

“아…… 넌 이쪽으로 부추기는 건 타고났어. 이런 놈이 왜 다른 쪽으로는 영 머리를 못 쓰지?”

“또 무슨 헛소리야. 아… 그만 좀… 알았어, 그럼 입으로 해 줄 테니까…….”

노골적으로 허리를 움직이며 내 손바닥 안에서 그것을 문지르다 말고, 그것으로 안 되었는지 무진은 우악스런 손길로 이번엔 내 아랫도리를 벗기려 들었다.

“술기운에 더 달아 있는 거 안 느껴져? 목구멍 다 헐고 싶어? 그냥 제대로 한번 대 주고 말아. 아래층에 있는 놈들 신경 안 써도 돼, 정신없이 뻗었어. 2005년산에다 47년산까지 모두 한 방울도 남김없이 해치웠다고. 망할 놈들.”

“그거, 얼마나 하지?”

힘으로 누르는 것에 순식간에 바지가 벗겨지고, 안간힘으로 속옷을 붙잡아 버티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꼴을 한 채로, 어쨌든 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숨을 할딱이며 물었다. 그런 내 손목을 붙잡아 떼며 무진은 빠르게 대답했다.

“47년 빈티지엔 딱히 가격이란 게 안 붙었어. 경매제로 데려온 놈이니까. 왜, 입맛에 맞았나?”

“…너희 다 지옥 갈 거야.”

고작 마시고 사라져 버리는 것에 붙여지는 숫자가 대충 예상되어 뜨악한 기분으로 중얼거리자, 기어이 내 손가락을 모두 떼어 낸 무진이 속옷을 끌어 내리다 말고 생경한 얼굴을 한 채 내 한쪽 머리칼을 와락 움켜잡아 올리며 서늘히 말을 이었다.

“잘됐네. 난 천국에 오르거나 지옥에 떨어지거나 무조건 네 머리끄덩이 붙잡고 같이 데려갈 거니까. 어쨌든 지금은 제일 비싼 것 먹여 줄 테니까, 다리 벌려.”

그리고 성마른 손길로 당장 내 속옷을 찢어 낼 듯이 벗겨 내렸다. 이어 양쪽 무릎이 단단히 접혀 벌려졌다. 자리를 잡기 위해 뒤로 조금 고개를 물린 그의 얼굴이 보조등 조명에 온전히 드러났다.

아, 그제야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당장 상체를 일으켜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나한테 화내지 마.”

그리고 그대로 풀쩍 뒤로 눕는 것에 무진 역시 따라와 주듯이 얌전히 몸을 겹친 채 퉁명스레 대꾸한다.

“너한테 화낸 적 없어.”

“내 앞에서까지 연기하지 마, 소름 돋아.”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의 귓바퀴를 질근 물어 버렸다. 움찔하지도 않고 그는 가소롭다는 듯 ‘흥’ 콧소리를 냈다. 다시 그의 귓바퀴에 뺨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청승 안 떨었잖아. 뭘 더 어떻게 하란 거야.”

“나한테 제일 센 놈 되라고 닦달하던 패기는 어디 갔느냐 말이야.”

“그러려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까짓 내가 그거 감수하겠다고 했더니, 너 죽을래 했잖아. 그런데 뭘―”

정부라도 되겠다던 각오를 떠올리며, 그러나 한량없이 서럽고 억울한 기분에 빠르게 속삭이는데, 그가 벌떡 고개를 들며 사납기 그지없는 얼굴로 으르렁 송곳니를 드러낸 채 쏘아붙였다.

“뭐 이딴 돌대가리가 다 있어? 한 대 패야 정신 차려? 내가 그깟, 어느 집안 따님이랑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로 순위 매겨질 것 같아? 그게 오히려 내 족쇄 될 거란 생각은 못해? 게다가 너는 뒷방 정부로 밀어 두고 말이지? 여승재 너 날 아주 머저리 건달로만 보고 있잖아? 너 나 욕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씨발, 내가 기어이 쌍욕이 안 나와?”

“알았어, 그럼 네 맘에 꼭 들도록 주말엔 단단히 독기 품고 그럴싸하게 패악 부리고 올게. 됐어?”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것에 얼떨떨해져 두 눈을 둥그러니 뜬 채 버벅거리며 말을 받았다. 병신 같다고 또 한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그는 어이없을 만큼 금세 누그러진 얼굴을 하고서는,

“…약속해.”

힐긋 내 눈치를 살피기까지 하며 다짐을 받아 두려는 것이다.

“미친놈.”

기가 차, 여지없이 이쪽에서 한소리가 나갔다. 그러자 무진은 다시 고약해진 얼굴을 하고선 바짝 고개를 붙여 왔다.

“너 말로는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며 얌전떨면서, 그 말인즉 뒤로는 언제든 손 털고 물러설 준비하고 있다는 거, 모를 줄 알아?”

“그런 적 없어.”

“보따리 싸 놓고 비행기 티켓 끊어 놓는 것만 그런 준비 아니야. 청승도 몰래 떨고 있잖아. 여승재, 그거 속으로만 준비하다가 조용히 속으로만 끝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그거 가만 두고 볼 줄 알아? 웃기지 마, 꿈도 꾸지 마, 기미만 보였다간 당장 사지 절단해서 가둬 둘 거야.”

“…….”

코끝이 닿을 만큼의 거리에서 그가 내뿜는 뜨건 숨이 이마를 들들 끓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머리 뚜껑을 열고 폭발할 듯이 두 눈에 파란 불꽃을 일렁이고 있는데, 덕분에 나는 오히려 나른하게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성질 다 냈으면 비켜, 제대로 앉아 봐. 입으로 해 줄게.”

아직도 단단히 발기해 있는 것을 맞닿은 곳으로 느끼며 문득 그것이 가여워진 기분에 달래듯 말했다. 그러다 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불퉁히 덧붙였다.

“그리고 누구더러 돌대가리라는 거야? 나 너보다 전교등수 훨씬 높았어.”

슬그머니 아랫도리를 내리며 일어나 앉던 무진이 그에 어이없다는 듯 ‘허!’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 확실히 꽁한 거 맞아. …제대로 안 하면 엉덩이에 박을 거니까 알아서 잘해.”

그리고 태연히 두 팔을 뒤로 뻗어 기댄 채 한쪽 다리를 접어 앉는다. 그 가운데 내보인, 바짝 독이 올라 빳빳이 머리를 치켜든 물건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입을 풀기 위해 먼저 혀로 입술을 축이자, 빤히 지켜보고 있던 무진이 꿀꺽 침을 삼킨다. 모른 척하며 곧장 무릎을 꿇고 그의 허리께로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

언뜻 그의 팔뚝 뒤로 무언가 어른거리는 것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빼며 쳐다보자, 역시나 계단 쪽에서 주춤거리고 있던 현찬성이 턱을 길게 늘어뜨린 채 눈을 끔벅여 보였다. 헛숨을 삼켜 콜록 기침을 하는 나를 보곤 무진이 심드렁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그래. …무, 무슨!”

그러곤 역시 화들짝 놀라선 급히 먼저 내 몸 위로 시트를 덮어 가려 준 뒤, 곧이어 제 아랫도리를 신경질적으로 끌어 올린다. 그런 와중에 찬성은 저 또한 당황했는지 계단을 더 오르지도, 아예 내려가지도 못한 채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너 뭐야, 거기서 뭐 해.”

그리고 무진이 내 앞을 가로막고 침대 아래로 내려선 채 위협적으로 묻자,

“아…… 화장실 가는 중.”

마음을 정했는지 결국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마저 올라와 어딘지 모를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대답하는 것이다. 화장실이라면 아래층에도 있다.

어설픈 대답에 무진이 곧 덤빌 듯이 한 걸음 옮겨 갔다. 그에 찬성은 얼른 멈춰 서며 두 손바닥을 뻗어 보인 채 다급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게, 다투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서, 야, 난 진짜 말리려고, 너희 생각하는 마음에, 응?”

“너 어디부터 봤어.”

“뭘 봐, 아무것도 못 봤어. 뭐 하고 있었는데? 나 이제 막 올라와서 아무것도 못 봤는데? 아니 이렇게 어두운데 뭘 봐?”

그리고 갑자기 까막눈이라도 된 것 마냥 두 손으로 주위를 헛짚으며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 멍청한 모양새에 퍽 믿음이 갔는지 무진은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후우―’ 짜증 섞인 숨을 내쉬고는, 얼핏 나를 돌아보곤 아직도 시트로만 몸을 가리고 있는 것에 눈살을 찌푸려 왔다.

“넌 뭐 해? 얼른 안 입어?”

“속옷 안 보여.”

점화되기 직전으로, 나는 쌩하니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바보 무리 안에서 가장 건들거리는 주제에 안타깝게도 가장 덜떨어진 현찬성이 몹시도 순진스런 태도로 냉큼 침대 맞은편 의자 아래를 손으로 가리키며 알려 왔다.

“아, 여승 네 팬티 저기 있어.”

“…….”

무심히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정확히 내 속옷의 위치를 확인한 무진이 얼굴을 확 찌푸리며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리 와, 새끼야, 너 다 봤지?! 눈알 뽑아 버릴 거야!”

“아니라니까!”

당장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에 찬성이 기겁하며 피하고, 약이 오른 무진이 씩씩대며 그를 뒤쫓았다. 갑작스런 난리에 두통이 일었다.

“하지 마. 그만하라고. 둘 다 좀……! 몇 살이야, 대체, 시끄러우니까… 어린애들처럼 그러지 말란 말이야……! 뛰지 마……!”

차마 속옷을 주우러 가지는 못하고 나는 침대 위에서 시트로 몸을 감싼 채 소리를 질러 그들을 말려야 했다. 죽마고우 사이에 허물이 없어 그러하겠지만, 서른 넘은 사내 둘이 쫓고 쫓기며 아옹다옹하는 꼴이 질릴 만큼 저속하고 유치했다.

결국 아래층에서 잠들어 있던 나머지 두 명도 소란에 깨어났는지 ‘뭐야―’ 하며 찌푸린 얼굴로 계단을 올라왔다. 그에 얼른 찬성이 그들 뒤로 몸을 숨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화장실 가려고 깼는데 위에서 싸우는 소리 들리더라고, 권무진 막 쌍소리하면서 싸우는 소리 들려서, 나 정말 그거 말리려고 올라왔단 말이야. 그런데 저놈들 엉덩이 까 놓고 뒤엉켜 있다가 괜히 생사람 잡잖아. 와―씨, 나 진짜 억울해!”

분통을 터트리는 녀석의 과장된 말솜씨에 졸린 기미를 싹 지운 두 사람은 판관처럼 엄격한 얼굴을 한 채 침대 위에서 지친 기색으로 웅크리고 있는 나와 여전히 씩씩대고 있는 무진을 둘러보고는, 그 정도로 상황을 모두 파악했는지 가뿐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석운이―안경을 쓰지 않아 조금 낯선 인상으로― 먼저 무진을 향해 질책조로 말을 던졌다.

“권무진 그 버릇 아직 못 고쳤냐?”

그러곤 귀찮다는 듯 획 하니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 버리는 것에 무진은 무어라 반박하려다가 그저 입술을 실룩일 뿐이었다.

“취향이라고 해야 하나 취미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너 그거 한번 참 고약해.”

그런 그를 힐난하듯이 위아래로 흘겨보며 제홍이 이어 말했다.

“옛날에도 양호실이든 창고든 다 놔두고 기어이 밥 먹고 있는데 여승 물탱크 뒤로 끌고 갔잖아. 아니 그럼 아예 모르게 하든가. 아아, 어쨌든 친구라서 너무 심한 말은 못하겠는데, 그런 쪽으론 너 진짜 저질이야.”

그리고 역시 무진이 ‘이……!’ 하고 성질을 내려던 찰나 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곧장 발길을 돌려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혼자 남은 찬성이 한껏 기세가 산 얼굴로 ‘거봐―.’ 하고 거들먹거렸다.

“그 성질 좀 죽여야 된다고, 너. 게다가 지금 우리한테 막 대하면 안 되잖아?”

“…….”

뭔가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힌 듯, 무진은 자신을 힐긋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찬성을 빤히 쏘아보면서도 끝내 달려들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풀어내지 못한 나쁜 성질머리에 잔뜩 분하다는 듯이 얼굴의 근육을 불편하게 꿈틀거리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 와 딱히 수치스럽다거나 남사스럽다는 감상은 없었다. 다만, 몹시, 지쳤다.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무진아.”

곧장이라도 욕설을 뱉어 낼 듯한 얼굴로 무진은 혼잣말을 퉁퉁거리며 다시 침대가로 다가왔다. 나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어, 대답하며 그는 조금 머쓱한 듯이 나를 힐긋거렸다.

“너도 내려가.”

“내가 왜.”

그러나 덤덤히 덧붙이는 내 말에 당장 험상궂은 투로 대거리를 해 오는 것이다. 피로해져, 나는 간단히 반복해 말했다.

“내려가.”

“…….”

어찌할까 따져 보는 듯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애들 있어서 내가 한 번만 봐주는 건 줄 알아.”

질겅이는 발음으로 불량스레 말을 뱉고는 곧장 발길을 돌려 어슬렁대는 듯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향해 갔다. 그가 터덜터덜 계단을 돌아 내려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얼른 이불을 뒤집어써 버렸다. 피로와 긴장과 졸음이 바늘처럼 눈꺼풀을 찔러 왔다.

건들거리는 바보 사인방, 내 무채색 옥상의 요란한 침입자 녀석들과 다시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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