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02-2 (26/41)

“언제부터였냐?”

직접 자판기에서 꺼내 온 따뜻한 캔 커피를 툭 던져 주며 김 실장은 무심한 투로 물어 왔다. 고맙습니다, 인사하며 그것을 받아 들다가 나도 모르게 ‘예?’ 하고 되묻고 말았다. 내숭을 떤 것 같다. 그 또한 짐짓 의식을 했는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그저 캔 뚜껑을 딸깍 열어 따며 곧장 한 모금 마실 뿐이었다.

잠깐 나가 얘기하자 말도 없이 자연스레 북적이는 복도와 휴게실을 피해 찬바람이 부는 옥상으로 걸음을 옮겨 왔다. 거창한 연애지사를 털어놓을 마음으로 그를 찾은 건 아니었지만, 들키다시피 알려진 상황과 더불어, 한때 무진과 나, 그리고 현준이까지 끼어 세 사람의 가운데에서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곤란을 겪은 그였으니 뒤늦게나마 최소한의 경위는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아홉 살 때…….”

“에엑?! 그때부터?!”

잠시 머뭇거리다 뒤늦게 입을 열자, 김 실장은 머금고 있던 커피를 왁 뿜으며 기겁을 했다. 외투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건네며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니요, 그때는 잠시……. 다시 만난 건 여기서, 실장님하고 같이 봤을 때요.”

“그렇지, 그때 동창이라고 하면서… 서먹서먹하게… 정도가 아니라 분위기 완전 나빴잖아?”

“예. 그러니까 그때 한참 치고받고 싸우면서 사고 빈번했던 거, 단순히 권무진 성질 나빠서가 아니라 저하고 감정 관계 때문에요.”

“으음― 애증, 뭐 그런?”

당시의 사건들을 떠올리는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짐작해 물었다. 애증, 무척이나 적절하고도 간결한 관계의 이름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비슷한 것 같기도 하구요. 어쨌든 묵힌 감정 털어 내고 새로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쪽 약혼 깨지고, 너 뜬금없이 사라지고, 그 즈음?”

“예.”

“혹시 현준이 녀석 그렇게 갑자기 입대한 것도 관계있어?”

“…죄송합니다.”

“아, 이제 대충 끼워 맞춰지는군.”

하늘에 그은 점선으로 제대로 된 그림을 완성한 듯 그는 한참 더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는 따뜻한 캔 커피를 양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가늘게 눈살을 찌푸린 채 저 멀리서 신축 빌딩이 세워지고 있는 공사 현장을 바라보았다.

좀 더 가까이 이웃한 건물 1층 상가에는 각종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며 도넛 가게 같은 것들이 입점해 있었다. 무심히 시선을 옮기는데, 문득 도넛 가게의 창가 자리에서 커피와 베이글 따위를 테이블 위에 두고 신문을 보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뭐, 아예 눈치 못 채고 있었다면 거짓말이고, 내가 말 많고 탈 많은 이 바닥서 눈칫밥 몇 년인데.”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기분에 차가운 손등을 목덜미에 가만 대고 있는데 김 실장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왔다. 아래쪽에서 얼른 시선을 거두며 그와 마주 섰다.

“게다가 현준이 놈까지 끼어서 셋이 오죽 사나운 분위기를 풍겨 댔어? 뭔가 심상찮다고는 생각했었지만 말이야, 어쨌든 이제야 앞뒤 꿰맞춰져서 속은 후련하다. 뭐, 사실 진짜 궁금한 건 그런 과거지사가 아니라… 여승재 너 혹시… 무슨 약점 잡힌 거 있냐?”

“예?”

고개를 주억거리며 ‘예, 예.’ 맞장구를 치다가, 돌연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놀라 이번엔 또 말끝을 올리며 되물었다. 그러자 김 실장은 주위를 경계하듯 먼저 텅 빈 옥상 주변을 휘휘 둘러본 뒤,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서며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인다.

“협박 같은 거 당하고 있느냐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왜 하필 그런…….”

그러고는 더없이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아, 하고 그제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실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그러게요, 왜 하필 그런.”

“쯧쯧쯧.”

외딴 데로 슬쩍 눈길을 피하며 대꾸하자, 동감을 구했다 생각했는지 김 실장은 빠르게 혀를 차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난간 위에 커피 캔을 놓아두고, 얼른 그의 옆으로 서며 바람을 막아 주었다.

두어 번 만에 불을 댕긴 그는 앞니에 담배를 문 채 라이터와 담뱃갑을 주머니에 챙겨 넣다 말고 문득 ‘너도?’ 하고 물어 왔다. 생각 없었는데 막상 눈앞에 보이니 또 피우고 싶어졌다. 예,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개비 받아 들었다.

“음? 그런데 여승재 담배 다시 시작했어?”

이번엔 그가 몸으로 바람을 막으며 라이터 불을 댕겨 주다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 왔다. 불이 붙은 것을 우선 당장 한 모금 깊이 빨고 난 뒤, 한결 여유로워진 기분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예, 어쩌다 보니.”

“아, 대충 상상이 간다.”

미간을 구기며 김 실장은 선뜻한 수긍으로 맞장구를 쳤다. 담배를 찾을 수밖에 없는 심란한 심경의 제공자가 누군지 뻔하다는 짐작이 숨어 있었다. 틀리지 않아, 나는 그저 말없이 눈길을 내린 채 웃을 뿐이었다.

“…꽤 근사하게 웃을 수 있게 됐네….”

그런 나를 말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혼잣말을 하듯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쩐지 무안해진 기분에 얼른 입매를 굳게 다물어 버렸지만, 그는 ‘흥.’ 하고 심술궂게 비웃었다. 그리고 바람을 피해 돌아서며 물음을 이어 온다.

“어쨌든 이사한 집은 그럼 그… 같이?”

“예, 같이…….”

빨던 것을 급히 뱉으며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구만. 으음, 그랬단 말이지.”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뭐, 확실히 쉽게 말하긴 곤란한 얘기니까.”

그리고 담배를 다시 앞니에 질근 문 채로 걸음을 옮긴다. 이만 들어갈까 하며 나도 얼른 뒤따라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앞서 걷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선다. 그리고 돌연 획 하니 돌아서더니,

“아아― 여승재에―.”

물고 있던 담배를 그대로 뱉듯이 떨어뜨리며 와앙― 울상인 얼굴로 내 이름을 크고 길게 늘어뜨려 부르는 것이다.

“왜,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인가 놀라 얼른 가까이 다가선 채 물었다. 그런데,

“시집가지 마라, 여승재에―.”

“…….”

“응? 그딴 바보 건달 날라리 같은 놈한테 시집가면 안 돼, 여승재에―.”

“시집 안 갑니다.”

“같이 산다며―.”

“…….”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터무니없을 만큼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안 갑니다, 시집.”

버리려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깊이 빨았다. ‘정말?’ 김 실장이 냉큼 옆으로 와 서며 물었다. 반대편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건성으로 ‘예.’ 대꾸하고 그만 돌아서려다가, 역시 마음에 걸려 도로 그와 마주 선 채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애초에 남자는 시집이 아닌 거 아닙니까?”

“응?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선 아무래도 남자 여자로 구분될 수밖에 없잖아, 보통 그렇게 생각되니까 말이야.”

과연 별 뜻은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한 그는 먼저 걸음을 떼는 내 뒤를 따라 발길을 옮기면서도 사뭇 진지한 태도로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게다가 권무진 상대로 여승재가 장가든다는 것보단 시집간다는 쪽 그림이 더 그럴듯하니까. 딱히 시집장가 구분 안 되는 거 알지만, 그림이 말이야. 뭣보다 권무진이라니, 정말이지 곱게 키운 여동생 빼앗기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여승재, 정말 그렇게 불한당 같은 놈한테 시집―”

“안 갑니다.”

“응. 다행이다.”

정색하며 단호히 말을 자르자, 그는 진심으로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농담이 아니라서 기분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대로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 담배를 끄려다가, 난간에 올려 둔 커피 캔을 떠올리고 아차 하며 되돌아 걸음을 옮겼다. 이미 차갑게 식은 캔을 집어 들며 이웃한 빌딩의 1층 상가로 눈길을 스쳤다. 도넛 가게 창가에 남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서 와, 실내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힌 채 기다리고 섰던 김 실장이 답지 않게 살가운 목소리로 불러 왔다. 가볍게 뛰어가 그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며 이번엔 내가 정답게 그를 불렀다.

“실장님, 저 오늘 술 마시고 싶은데요.”

“응? 대낮에 술 마시자고?”

뜬금없다는 듯 그가 돌아보며 옅은 눈썹을 히쭉 치켜들어 보였다. 지금 말고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에 목소리를 낮추어 이어 말했다.

“좀 비싼 데서, 일도 하고 공짜 술도 마시고, 그런 거요.”

“이 바닥서 그런 자리야 거의 매일 밤마다 있다만, 괜찮겠어? 요즘 통 몸 사리더니?”

“이 바닥서 계속 몸 사려 가면서 일할 수 있나요, 어디. 조만간 케이 컴백도 있으니까요.”

“뭐 마침 오늘 빈자리 있다. …내가 너 내보내는 거 아니다?”

휴대폰으로 스케줄 표를 확인하며 알려 주다 말고, 김 실장은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확답을 요하듯 말끝을 올려붙였다.

“오랜만에 술 마시고 싶어서요, 제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러나 좀처럼 의심에 찬 눈길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

“괜찮으세요?”

아무래도 너무 오랜만에 부어 댄 것이 무리가 된 듯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바탕 게워 내고 변기 레버를 내리며 문을 열고 나오자, 세면대에서 찬물로 목덜미를 적시고 있던 용훈이 ‘어.’ 하고 알은척을 하며 놀란 얼굴로 물어 왔다.

괜찮아, 손을 흔들어 보이며 찬물로 입안을 헹구었다. 문밖 복도에서 광광거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들의 고성이 왕왕 들려왔다.

케이블 음악 프로그램 담당자들을 상대하는 건 비교적 얌전한 자리였다. 사실상 서로 손잡고 가는 입장인 데다, 워낙 저들끼리도 흥에 겨워 잘 노는 타입들이라 그저 빈 잔에 술이나 채우고 눈치껏 새로 주문을 넣고, 알아서 노래방 기기의 번호를 입력해 슬며시 마이크를 돌리다가 또 이쪽 잔에 채워지는 술을 비워 내며 왜인지 짝짝 박수를 받거나 하면 되었다.

별것 없는 음담패설은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었고, 서로 사정을 다 아는 사이, 앞으로도 적당히 공생할 사이에 무리한 것을 요구해 오지도 않았다.

가장 피곤하고 악질적인 축에 속하는 것은 캐스팅이나 광고 계약 건이 오가는 사이거나 펜 끝으로 놀려 먹는 치들이었는데, 급히 불려 나온 것인지 오전에 보았던 옷 그대로 입고 나온 용훈이 하필 그들을 맡은 듯했다.

“어우―, 저 새끼들 뭐 저렇게 지저분하게 놀아요? 여자들 다 나가 버렸어요, 젠장, 또 다른 데서 불러오래요. 그럼 비싼 술이라도 좀 작작 해치우든가.”

사실상 케이를 전담하게 될 그가 이쪽 룸으로 와야 할 터였다. 사정을 아는 김 실장이 오랜만인 나를 배려하기 위해 자리를 바꾼 모양이었다.

“바꿀까?”

“예? 에이… 아니에요. 선배 들어가면… 됐어요, 그냥 제가 할게요.”

미안한 마음에 슬쩍 떠보듯 묻자, 용훈은 세면대에 두 손을 디딘 채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이제 좀 약아졌는지, 힘들고 더러운 일은 적당히 미루고 싶다. 말없이 한 번 더 입안을 헹구어내자, 눈치껏 넘어가 주려 용훈이 손을 닦으며 이어 말을 걸어온다.

“기욱이는요?”

“숙취제 사러.”

“시작하기 전에 안 드셨어요?”

“미리 먹었는데 별로 안 들어서.”

“적당히 하고 들어가세요.”

그리고 꾸벅 머리를 숙였다 올리며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용훈아, 거울로 그를 보며 불러 세웠다.

“혹시 네 머리에 술 들이부으면, 너도 냅다 같이 쏟아 버려. 서로 같이 곤드레만드레 돼서 그랬다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흐흐 웃으며 녀석은 대답도 않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진심인데.

화장실에서 나와선 곧바로 룸 안으로 빠끔 고개만 내민 채 문에서 가장 가까이 앉은 음향 담당 누구 씨에게 입 모양으로 바람 쐬겠다 말을 전하고, 다시 복잡한 복도를 통과해 밖으로 빠져나와 버렸다. 찬바람이 뜨거운 얼굴과 맞닿아 기분이 좋았다.

그대로 두어 계단 내려가다 말고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아 버리자, 입구를 지키고 섰던 경호 직원이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힐긋 쳐다보았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눈길을 돌려 버렸다. 상관치 않고 고개를 훌쩍 뒤로 젖힌 채 좀 더 찬바람을 맞았다.

맞은편엔 환하게 불 밝힌 세븐일레븐. 건너편 한적한 차도에서 차들이 쌩쌩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어.’ 하고 알은체를 해 왔다. 고개를 돌려 보자, 하필 질 나쁘기로 소문난 S 매거진 연예부 기자 Y였다.

“요즘 현장에서 통 안 보이던데?”

“간이 나빠져서, 이제 몸 좀 사리려고요.”

“하긴, 여승재도 벌써 꽤 됐지. 처음 봤을 땐 파릇파릇했었는데.”

옆자리에 털썩 앉은 채 쓸데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는데, 그가 문득 한쪽 어깨를 툭 맞대며 사뭇 의뭉스런 어조로 말을 이어 왔다.

“아참, 나 여승재한테 궁금한 거 있다.”

“예.”

“일전에 우스갯소리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뭐 그냥 말 그대로 우스갯소리로 들어라? 이쪽 치들 워낙 음탕한 얘기 만들어 내는 거 좋아들 하잖아, 왜.”

“…….”

벌써 어떤 쪽의 소문인지 알 것 같아 얼굴을 굳히며 입매를 다물었지만, Y는 오히려 그런 내 반응이 더 재미있다는 듯이 열뜬 목소리로 지껄여 댔다.

“그, 예전에 현준이네 그룹 맡던 때 말이야, 애들 한창 때였잖아, 여러모로. 그런데 희한하게 애들 여자 쪽으로 스캔들 전혀 없었고. 그래서 소문으로는 여승재가 한창 때인 애들 달래느라 그런…… 있잖아? 그런 상대도 해 줬다고, 정말 대단한 직업 정신이라고. 크크큿! 하여튼 이쪽 새끼들 상상력 한번 짓궂지, 응?”

“어땠을 것 같으세요?”

“…어쭈, 그 눈빛 꽤 센데.”

고개 돌려 얼굴을 마주한 채 똑바로 쏘아보며 조롱조로 되묻자, 잠시 움찔하는 듯했던 Y는 그러나 이내 피식 웃으며 손등으로 내 한쪽 뺨을 슥 문질러 왔다.

나는 얼굴을 돌려 피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싫은 내색도 않자, 손을 내리다 말고 그는 퍽 흥미롭다는 듯이 눈매를 휘며 좀 더 멋대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몸 안 좋아? 어디 좀 들어가 쉴까?”

그리고 기어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묻는 말에는 픽 웃으며 고개를 바로 돌렸다. 맞은편의 편의점 통유리로 내비치는 환한 조명에 눈이 부셨다.

Y의 서늘한 손길이 목덜미까지 와 닿았다. 그때 문득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기도 전에 목덜미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던 Y의 손이 먼저 떨어졌다. 그리고,

“자주 좀 보자, 여승재.”

그렇게 인사를 대신하곤 뭐 급한 일이 있다는 듯 그는 서둘러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손톱으로 목덜미를 긁적이며 지루한 눈길로 그를 힐긋 돌아보다가, 또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입구 쪽 경호 직원과 언뜻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바로 돌려 보니, 머리맡에서 커다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선 기욱이 양손에 숙취제를 꼭 쥔 채 난감한 얼굴로 씩씩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이다.

“다, 다 팔려서, 저기 멀리까지 다녀오느라…….”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다정히 웃어 보였다.

“기욱아. 안에 들어가서 사람들한테 여승재 몸 안 좋아서 먼저 가 본다고 말 좀 전하고 와라. 그리고 우리, 드라이브 좀 하자. 술 냄새 풍기면서 늦게 들어가면 사나운 룸메이트가 성질낼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예.”

녀석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부지런히 대답하곤 냉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약한 꼬리를 얼른 감추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

집 한 채 값이라는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기욱이 준 박하사탕을 어금니로 아드득 깨물었다. 새벽 2시 30분. 입안이 화했다. 무참히 부스러진 사탕 조각을 마저 아득아득 씹으며 기대고 있던 현관문에서 등을 뗐다.

한번, 비밀번호를 잘못 눌러 록이 다시 걸렸다. 처음부터 차근히 버튼을 누르자, 삑― 소리를 내며 안쪽에서 걸쇠가 풀렸다. 문을 당겨 열고 현관 복도 안으로 들어서자, 1층엔 주황색 보조등만 은은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벗은 외투는 거실 소파에다 툭 던져 놓고, 이어 양말 따위를 하나하나 벗으며 계단을 올랐다. 2층에 다 올랐을 때는 어설프게 바지벨트를 풀다 만 채로 받쳐 입은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늦었잖아, 전화도 없이.”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태블릿 PC를 내려다보고 있던 무진이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곤 다시 눈길을 내렸다. 제법 잘 다스려진, 감흥 없는 목소리였다.

“응, 미안. 김 실장님이랑 오랜만에 좀 마셨어.”

나는 지그재그로 걸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무릎이 닿자마자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던지듯 엎드려 누워 버렸다.

콜록, 작게 기침이 나왔다. 그가 무성의한 손길로 내 등허리 위로 시트가 아닌 쿠션을 툭 얹어 준다. 흐흣, 웃으며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말을 이었다.

“너도 늦을 줄 알았어. 공항에서 바로 지석운 낚아챈다고 했잖아. 오랜만에 만나서 진탕 술 마시고 놀고… 그러고 늦게 들어올 줄 알고.”

“독일서 오늘 입국한 놈 데리고 뭘 진탕 술을 마셔?”

“…….”

대꾸하는 목소리에 조금 날이 서 있다. 번득 고개를 세우고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는 들고 있는 PC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쪽으로 날카로운 곁눈을 힐긋 주고는 이내 도로 눈길을 거두었다.

나는 조금 흐느적거리며 일어나 앉아, 불쑥 그의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들고 있는 것에서 눈길을 뗀 무진이 놀란 듯 주춤했다. 나는 곧장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고, 손끝으로 힘을 주어 턱을 벌리게 한 채 열린 입안으로 코끝을 바짝 갖다 대어 희미하게 치약 냄새가 남은 그의 입속 냄새를 맡았다.

“마셨잖아, 냄새 남았어.”

“얘기하면서 가볍게 한 잔, 아니 한 모금 마셨어.”

조금 귀찮은 투로, 그러나 옅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해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주 보며 그가 대꾸했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코끝을 비볐다.

“아니잖아, 술 냄새 독하게 남았는데.”

“웬 주정이야? 네 몸 안에 쌓인 냄새겠지.”

기어이 그가 내 머리통을 움켜쥔 채 쿠션 위로 엎어뜨렸다. 나는 그대로 코를 박고 엎드려 누운 채 푹푹 숨을 내쉬다가, 웅얼거리며 이어 물었다.

“뭘 보고 있어?”

“재미없는 거.”

“아침에 설거지했어?”

“아니.”

“더럽게 말 안 듣네.”

“입 다물고 잠이나 자.”

“…꿀물 마셨으면 좋겠어.”

“……”

내 뒤통수에 손가락을 밀어뜨려 한가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길이 갑자기 그쳤다. 그리고 일순 우악스레 머리카락을 움켜잡더니 와락 뒤로 당겨 고개를 들게 하는 것이다.

“아…….”

목이 꺾인 채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자, 어느새 사나운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있던 그는 물어뜯을 듯한 눈길로 내 얼굴을 훑다가 다시 쿠션 위로 풀썩 엎어뜨렸다. 그러곤 ‘씨발…….’ 중얼거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선다.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꿀물을 만들어올 때까지 나는 그가 놓아둔 태블릿 PC를 들고 그가 보던 화면을 넘겨보았다. 역시 별 재미없는 것뿐이었다.

문득, 그의 아버지 앞에서 잠자코 무진의 곁에서 그의 말을 따르다가 훗날 그가 이별을 고할 때 위자료조로 대신 아이패드를 갖겠다며 허세를 부렸던 날이 떠올랐다. 노회장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었다.

“마시고 그대로 엎어져 자는 거야, 알았어?”

어느새 다녀온 무진이 꿀물이 든 유리컵을 내밀며 협박조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달고 따뜻한 액체가 목구멍에 잔뜩 돋은 독기를 녹이며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착해지는 기분이 든다.

단숨에 그것을 다 비워 내고, 곧바로 뒤로 털썩 쓰러지듯 누웠다. 무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내 곁으로 무릎을 딛고 올라앉아 티셔츠 자락을 끌어 올리려 했다. 나는 쓸모없이 그의 손등을 긁었다.

“안 할 거야.”

“나도 술주정뱅이랑 섹스할 생각 없어. 냄새 뱄어. 안 벗을 거면 바닥에서 따로 자.”

내 손을 매섭게 쳐 내며 그는 그대로 훌렁 상의를 벗겨 냈다. 머리가 헝클어졌다. 그리고,

“…여긴 왜 이래.”

머리맡에 둔 티셔츠를 가져와 바닥으로 떨어뜨리는데 언뜻 그가 어두운 어조로 물어 왔다. 그의 손끝이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그것이 총부리처럼 곧 목을 뚫을 것 같았다. 힐긋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무서웠다.

“몰라, 긁었겠지.”

서늘해진 기분에 옆의 시트를 끌어와 가슴을 덮었다. 무진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좀 더 아래로 내려가 이제는 내 바지를 벗기려는 듯 내가 풀다만 벨트를 마저 풀어내며 사뭇 누그러진 어조로 꾸며 내어 물어 왔다.

“김 실장이랑 단둘이 마셨다고?”

“응.”

“다음에 또 마시고 싶으면 말해. 조용하고 깨끗한 데 알려 줄 테니까.”

나는 그가 내 바지를 쉽게 벗겨 낼 수 있도록 엉덩이를 조금 들어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됐어. 난 그냥 포장마차가 좋아. 너야말로 마시고 싶을 때 말해. 오늘 우동 맛이 끝내주는 포차를 발견했거든.”

“…포장마차…?”

무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내 속옷까지 단번에 와락 아래로 끌어내려 벗겼다. 발목에 걸린 속옷과 바지를 마저 끌어 내 침대 밑으로 던지며 나는 나른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 서민의 정이 느껴지는 포장마차…… 아, 왜 그래. 안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가 대뜸 내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그냥 한번 보는 거야.”

“변태…….”

“흥.”

그러곤 깨끗하게 면도한 음모의 자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매만지며 만족스러운 듯 웃는 것이다.

처음 그에 의해 아래쪽을 면도당한 이후로 계속 이 꼴을 하고 있어야 했다. 조금 자랄 법하면 맨살끼리 비벼질 때마다 따갑다며 그가 성질을 내는 탓이었다.

보름 동안의 출장 기간 동안은 건드리지 않아 제법 유순하게 자라기도 했지만, 무슨 심술인지 그는 그것조차 거추장스럽다며 처음처럼 내 다리를 벌리게 하고 직접 깨끗하게 밀어 내 버렸다.

“네가 굉장한 변탠 거는 알겠는데, 더 이상 변태 짓은 하지 말아 줄래?”

잠시 입맛을 다시다가 곧장 혀를 내밀며 아래쪽으로 고개를 숙이려는 것에, 나는 당장 두 발로 그의 양쪽 어깨를 막아 세우며 조롱조로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 역시 당장 야만성으로 번득이는 얼굴을 하고선 거칠게 내 두 발목을 그러잡은 채 부러 양옆으로 활짝 벌리는 것이다.

“취하면 이따위로 살랑거리는데, 어디서 어떤 놈 앞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알게 뭐야? 그래, 일테면 우동 맛이 끝내주는 포장마차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예쁘다며 멋대로 얼굴이나 목 같은 데를 만져 대는데도, 냅다 손목을 꺾어 놓기는커녕 비실비실 웃어 대고 있거나 말이야. 그거 보통 다리 벌려 줄 의사 있다는 태도거든, 백치도 아는걸. 하긴, 여승재는 이 세상 내 앞에서만 걷어차 버릴 거라느니 뻣뻣하게 굴잖아, 안 그래? 겨우 술에 취해서나 하느작대고 말이야.”

불륜의 증거를 찾는 듯이 그는 파랗게 불이 붙은 눈으로 활짝 벌린 내 사타구니를 샅샅이 훑으며 점차 흥분해서는 씩씩대며 쏘아붙였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는 덤덤히 대꾸했다.

“비실비실 웃지는 않았어. 가까이서 보지도 않았으면서 상황 짐작으로만 멋대로 소설 쓰지 말라고 전해.”

“…….”

“너, 잡혔어, 꼬리.”

발목을 잡는 아귀힘이 조금 느슨해진 틈에 얼른 두 다리를 빼내어 내리며 그 위로 역시 시트를 덮어 가렸다. 그에 무진은 아쉽다는 듯 쩝 입맛을 다시곤 시큰둥한 얼굴을 해 보였다. 좀 더 뜨끔해하는 반응이 아니라 의아했으나, 머리 굴릴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곧장 이어 쏘아붙였다.

“은색 그랜저, 신형 소나타, 흰색 아반떼. 어느 거야?”

“그랜저.”

픽 웃으며 그가 즉답했다. 그 어이없을 만큼 빠른 이실직고의 내용과 태도 모두 기가 차, 나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부러 눈에 띄게 굴기에 분명 겁을 주려는 쪽으로 확신했었다. 혼란스럽고 경악스러워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를 마주한 채 무진은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부린 수작임을 알아채고는 이제 한껏 여유로워진 태도로 빈정거려 왔다.

“이제야 알아챘어? 생각보다 둔하네.”

당장 옆자리의 쿠션을 집어 들고 그의 얼굴로 후려쳐 버렸다. 그의 짧은 머리카락이 까치집처럼 삐죽 섰다.

한쪽으로 고개를 틀었다가 ‘쓰읍―’ 하고 훈계조로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얼굴을 돌렸다. 나는 턱이 얼얼할 정도로 어금니를 앙다문 채 그를 노려보다가 이어 빠르게 쏘아붙였다.

“뒤에 사람 붙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못 미더워? 나 네 아버지 만났을 때 네가 하자는 대로 할 거라고 건방 떨었어, 그냥 폼 잡으려고 그랬을 것 같아?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때 잠시 너 개새낀 거 깜빡했어.”

“깜빡할 게 따로 있지.”

그는 내 아랫도리를 덮은 시트를 슬쩍 들춰 보며 조롱조로 대꾸했다. 이번엔 베개를 냅다 집어 들어 후려치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그에게 손목이 붙잡히며 들고 있는 것도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바닥 멀리 내팽개쳐지는 베개를 바라면서는 까닭 모를 서러움에 눈매가 와락 찌푸려졌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기분 얼마나 더러운 줄 알아? 그것도 이번엔 아예 일부러 알아차리게 했지. 알아서 미리 몸 사리란 거야?”

“맞아, 알아서 미리 몸 사리란 의미. 그 대상이 다른 쪽이긴 하지만.”

“…….”

무진은 그런 나를 곧게 응시하며 담백하게 대꾸했다. 서늘한 예감이 뒷덜미를 슥 스치고 지났다. 어깨가 절로 축 늘어졌다. 냉정을 되찾은 것 같기도 했다.

“…그 다른 쪽은 어디에서 붙인 거야.”

“그게 좀처럼 안 잡혀서 차라리 이쪽에서도 붙인 사람 있다 광고한 거야. 거기선 아예 독립적으로 의뢰한 것 같아. 뭐,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어. 예전에 말한 적 있잖아, 나는 나 자신이랑 너 빼고는 모두 적이라고.”

“미리 알려 줬으면 됐잖아.”

“미리 알려 줬으면 너 뻣뻣하게 연기해서 산통 깰 거고, 그거 아님 아예 혼자 청승 떨며 내빼 버렸겠지.”

“이제 안 내뺄 거라고 했잖아.”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의 책망 어린 짐작에 당장 두 눈을 치켜뜨며 반박했다. 못 믿겠다는 듯 그는 고개를 저으며 이어 말했다.

“내가 널 몰라? 극단적이야. 중간을 모르지. 혼자 청승 떨거나, 독기 올라 패악 떨거나. 못돼 처먹어서 그래. 그러니 차라리 모르게 한 채로 독기 오르게 하는 편이 더 낫다 생각했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잖아. 이거 캐내려고 감히 날 낚은 솜씨는 훌륭했어, 정말 깜빡 속았지 뭐야. 그런데 것 때문에 오늘 까딱 두 사람 목숨 오간 거 알고는 있어?”

“…패악이라니, 너한테 그런 쪽으로 질책 들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수치스럽다.”

“영광으로 생각해.”

팔을 뻗어 온 그가 손등으로 내 뺨을 톡톡 두드리며 짓궂게 웃었다.

진상을 모두 알고 나니 어쩐지 기운이 다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전의를 상실하고 나는 뒤로 곧장 털썩 누워 버렸다. 그리고 두 팔을 교차시켜 얼굴을 가린 채 음울한 목소리를 냈다.

“나, 어느 날 갑자기 어두운 뒷골목에서 납치당해서는 배 태워져 섬 노예로 전락하거나, 아님 골방에 갇힌 채 이상한 주사 맞아서 기어이 똥오줌 흘리는 반푼이 되는 건가?”

“그것보다 좀 더 최악은 없어?”

“…….”

“이제 와서 청승 떨 생각하지 마. 겁먹지도 말고. 나까지 쪽팔리게 하지 말란 말이야.”

그는 질책조로 대꾸했다. 기분이 상해 두 팔을 거두어 내리고, 그가 기대앉았던 침대 헤드 쿠션에 목을 세운 채 팔짱을 끼고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무진은 내 발목을 매만지며 심드렁히 말을 이었다.

“우선 지금 뒤에 붙은 놈은 걱정하지 마. 이제껏 별다른 행동 없었으니까 너 뻣뻣하게 굴어서 들킨대도 다를 거 없을 거야. 이쪽에서 이미 주시하고 있는 것도 알 테고. 잠시 같이 놀아 준다 생각해.”

“지금까지의 내 감상은 말이야……,”

“무섭다고만 하지 마. 안 어울리니까.”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안 부르시는 네 아버지가 제일 무서워.”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또다시 장난스럽게 시트를 치켜들어 속을 훔쳐보던 무진은 반짝 눈길을 들어 시선을 맞춰 오며 나른하게 이어 말했다.

“아, 그건 걱정 마. 아직 행동하실 때 아니야. 말했잖아, 우선은 방치해 두신다고. 그러니까 이쪽에선 좀 더 오래 지켜볼 생각 드시도록 재롱이라도 떨면서 시간을 유예시키거나, 이제 그만 됐다― 마음먹으시기 전에 먼저……”

“전에 먼저?”

“뭐, 어떻게든 해야겠지.”

그리고 퍽 의미심장한 투로 말끝을 흐리다가, 결국은 실없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것이다. 허무해져, 온몸을 늘어뜨린 채 외딴곳으로 눈길을 돌려 버렸다. 기어이 내 아랫도리를 가린 시트를 펄럭 거둬 치우며 무진은 악동 같은 얼굴로 지껄여 왔다.

“한 가지 너한테 더 절망스러운 소식 하나 알려 줄까?”

“나락 끝까지 한번 추락시켜 봐. 오기가 좀 생길 것 같아.”

나는 두 발을 들어 올려 그의 가슴께를 지그시 떠밀었다. 내 두 발목을 붙잡아 자신의 양쪽 어깨 위로 걸쳐 올리며 무진은 약동하는 눈길로 나를 곧게 응시해 왔다.

“다음 주말, 본가 어머니 생신이셔. 그냥 다 같이 모여 식사할 건데, 나 거기 너 데려갈 거야.”

“…빌어먹을 자식.”

“독기 좀 올랐어?”

“엄청.”

대답하며 한쪽 발꿈치로 그의 가슴께를 걷어찼다. 꽤 힘이 들어간 발길질이었는데도 무진은 그저 웃었다. 못마땅해, 기대고 있던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나는 그를 질책했다.

“뭐 하고 있어?”

흐흥, 웃으며 무진은 당장 내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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