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
꿈은 이러했다.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을 깨닫고 결국 체념한 채 서서히 진흙에 잠식당해 가는 것.
그런데 그러고 있자니 오히려 따뜻한 진흙이 온몸을 뭉근히 압박해 오는 감각이 그토록 편안하게 느껴질 수가 없음에 허탈해하며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채 온전히 몸을 맡겨 버림으로써 잠에서 깨어났다.
“아…….”
혼몽한 기분으로 눈꺼풀을 느리게 슴벅이고 있는데, 꿈속의 진흙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온몸을 가득 누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은 압박감에 조금 더 얌전히 누웠다가 나른히 몸을 뻗으며 기지개를 켜려 하자, 몸을 누르는 조임이 더 심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 보니, 등 뒤에서 무진이 이불처럼 나를 두 팔다리 가득 감싸 안은 채 자고 있는 것이었다.
고개를 한껏 돌려 입을 조금 벌린 채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잠시 가만 지켜보다가, 일어나기 위해 조심스레 팔을 거두려 하자 그는 잠투정을 하듯이 잠결에도 씩씩대며 더 강하게 내 몸을 압박해 왔다. 가슴이 조여 콜록, 옅은 기침이 나왔다. 결국 팔꿈치로 그의 가슴께를 찔러 대며 깨운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잠들기 직전 케이의 새로운 전담 매니저 용훈으로부터 SOS 메시지를 받았다. 회사에 나가기 전에 먼저 오피스텔로 들러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겨우 팔꿈치로 찔러 깨운 뒤 혼자 쌩하니 일어나선 바쁘게 움직이는 나를 무진은 여전히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뚱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젖은 머리를 털며,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차마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지는 못하고 침대 주위를 어슬렁거리자,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이제는 거의 물어뜯을 듯이 사나운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짖어 댈 듯 입가가 실룩거리기도 했다.
왜 저래……, 곁눈으로 눈치를 살피며 드레스룸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에 아차 하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다가가 마주 서자, 무진은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불만 그득한 얼굴을 곧게 내려다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정말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하?”
그에 무진이 어이없다는 듯 한쪽으로 고개를 뚝 꺾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나 그리 나쁘진 않았는지, 이내 비식 웃으며 모난 두 눈에 품었던 사나운 기운을 풀어낸다. 나는 이제야 권무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감이 조금 잡히는 중이었다.
“이건 여운지 곰인지 대체 분간이 안 서.”
“네 눈은 장식용이야? 사람이랑 짐승이랑 구분 못 해?”
“아, 여승재구만.”
“다행이네, 이제야 알아봐서.”
침대 밑으로 떨어뜨린 두 발로 내 정강이를 툭 건드리며 장난질을 치려 하기에 냉큼 돌아서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에 무진 역시 얼른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라오며 와락 덮치듯 등허리를 바짝 껴안아 왔다. 잠시 휘청했지만 상관치 않고 계속 드레스룸을 향해 걸었다.
조각난 기억을 맞추어 보아도 그러하고, 현재의 그 역시 이렇듯 조금 과격하다 싶은 스킨십을 무척 좋아했다. 어릴 때에는 그게 단순한 괴롭힘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그 나름의 삐뚤어진 애정표현이랄까 하여튼 좀처럼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 어떤 감정의 표출 방식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럴 때 정색하며 거부했다간 그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적당히 받아 주고 또 달래어 줄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에는 차라리 모르쇠로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나았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시행착오로 당한 일들은 상상만으로도 고달픈 것이었다.
“나 오늘, 휴무일 챙겨 먹을 거야.”
역시 끈질기게 등 뒤에 들러붙은 채 치근거리는 것을 짐짓 모른 척하며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절로 떨어진 무진은 대신 작은 장식장 위로 털썩 올라가 앉은 채 이쪽에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가 불쑥 말을 걸어 왔다.
휴무일을 내세우며 떠보는 의도가 뻔하였다. 그 대상이 나라는 것을 제외하고 생각해 보면 그 끝 간 데 모를 정욕이 단순히 같은 남자로서는 대단하게 여겨지기도 하다.
어쨌든 이제 정신없이 바쁜 시기는 지났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일전엔 대체휴무일은커녕 일요일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었다.
“좋겠네. 멋대로 휴무일 정해도 안 잘려서.”
외투를 고르며 그 의도를 모른 척하고 대꾸하자, 기분이 상했는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힐긋 돌아보자, 그제야 무진은 뒤늦게 시큰둥하게 입을 열어 왔다.
“사장이랑 한편 먹어서 말이야.”
“회장님… 너희 아버진.”
도로 등을 돌리며 목소리를 조금 낮추어 물었다. 그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영감은 겨우 이딴 일에 신경 안 써.”
“그럼 어떤 방식이신데.”
타이를 맬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외투를 의자에 걸쳐 놓은 채 빈 손목을 매만지며 다시 돌아섰다. 그가 올라앉은 장식장 서랍 속에 손목시계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진은 어느새 그중 하나를 미리 꺼내 놓았는지, 시계 체인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빙글빙글 돌리며 돌아서는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리 오란 식으로 다른 쪽 손가락을 까딱여 보이는 것이다.
손목 안쪽의 흉터가 보이지 않도록 손등을 위로 한 채 왼쪽 손을 내밀어 주자, 그는 곧장 체인을 걸어 주면서도 버릇처럼 손끝으로 안쪽의 흉터를 슥슥 매만지며 여상한 투로 말을 이었다.
“십 년이 넘도록 날 그렇게 외딴 나라에 내버려 둔 걸 봐, 대충 짐작되잖아? 그 영감 스타일은 말이야, 오냐 너 어디 한번 두고 보자, 하고 모른 척 방관하다가 어느 순간―”
‘덥석!’ 소리를 높이며 그는 그대로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을 끊어 놓으시지.”
경직된 내 목덜미에 고개를 숙인 채 이빨 대신 입술을 꾹 눌러 왔다. 그제야 희미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뭐 벌써 쪼잔하게 굴지 말자고, 여승재.”
꼴깍 침을 삼키는 내 앞으로 무진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해 왔다. 그리고 짐승처럼 드러낸 앞니로 내 입술을 질근 물었다 놓으며 가볍게 혀를 섞어 온다.
아직 씻지 않은 달큰한 그의 숨 내음이 짙게 맡아졌다. 그런 주제에 무진은 온전히 놓아준 다음 쩝쩝 입맛을 다시며 ‘그 치약 맛 별로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빤히 마주 보며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럼 네 손해 아냐, 여러모로.”
“여러모로 뭐.”
게으른 얼굴을 하고 있던 무진이 당장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눈길을 피하며 나는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동안 휴무일도 안 챙겨 먹고 애쓴 거, 몰라주시는 거 아니냐고.”
“과정을 따지지 않는 거지. 결과가 중요한 거야.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서서 훌쩍 높아진 시선으로 대꾸한 무진은 허기가 졌는지 배를 슥 문지르며 먼저 발길을 돌렸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팔에 외투를 걸친 채 나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며 앞선 그를 향해 슬쩍 말을 붙였다.
“그럼 너 오늘 계속 집에서 쉴 거야?”
“쉬긴. 지, 오늘 귀국이라 공항에서 바로 낚아채야 돼.”
힐긋 뒤를 돌아보며 무진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익숙한 명칭에 ‘지석운?’ 하고 묻자, ‘어, 그놈.’ 하고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이어 답한다.
독일에 있었다고 했던가, 바보들 중에서도 그나마 어른스러웠던 녀석을 떠올리며 나는 주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 커피를 내리기 위해 포트에 물을 붓고 있는데, 무얼 가져오는지 거실 쪽에서 돌아 들어온 무진이 ‘어이.’ 하고 뒤에서 불러 왔다.
“왜…… 아.”
대꾸하며 고개를 들자마자 수건 같은 것이 펄럭거리며 얼굴을 덮었다. 무진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부터 씌워진 것을 거둬 치우고 보니, 정교한 자수가 들어간 흰색 에이프런이었다. 활짝 펼쳐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옆에서 희롱조의 설명이 붙여진다.
“출장지서 골라온 선물이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야.”
“너한테 말이지.”
아무렇게나 뭉쳐 다시 그의 가슴께로 던져 버렸다. 흥, 코웃음을 치며 무진은 그것을 싱크대 쪽으로 던져 놓고는 다시 등 뒤로 덥석 몸을 붙여오며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바쁜 것 같으니까 그냥 넘어가겠는데, 저거 꼭 사용해 줘. 발가벗은 채로 말이야.”
“닥쳐.”
악취미에 기어이 험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팔꿈치를 세워 등 뒤에 들러붙은 몸을 가격하자, 무진은 여전히 킬킬거리며 아쉬움 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커피를 내리는 나를 보고는 문득 웃음기를 지우며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야.’ 하고 시무룩한 어조로 부르는 것이다.
“커피 마실 거야?”
“응. 커피만 마시고 바로 나갈 거야.”
진한 원두 향에 기분이 퍽 나아져 녹녹하게 대답해 주었는데, 어쩐지 그는 더 심통 맞은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손안의 작은 공을 툭 내던지듯이 뚱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난 밥 먹고 싶은데.”
“그래서.”
“……”
“나더러 오늘 휴무일 챙겨 먹는 너, 아침밥 해 먹이라는 거야?”
“…….”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심술이었는지 싸늘히 따져 묻는 것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다만 심드렁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다가 기어이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씨발…….’ 하고 조용히 욕설을 내뱉는 것이었다.
나는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내린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뒤,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나도 늦잠 자고 일어났는데 누가 아침밥 다 차려 놔서 딱 숟가락만 들었으면 정말 좋겠어.”
“그래서 나더러 아침 차려 놓으라는 거야?”
무진은 당장 입술을 실룩거리며 시비조로 물어 왔다. 커피 잔 너머로 그를 한심스레 쳐다보며 대답해 주었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열에 아홉은 내가 그렇게 차려 낸 것 같은데.”
“…….”
그리고 이은 침묵.
사실 자초한 일이었다. 한없이 게을러만 보이던 짐승이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하고 간혹 점심시간을 맞추어 같이 하더라도 더 이상의 여유도 없이 곧장 일어나 버리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노곤한 기운을 몰고 들어와, 그러나 쉴 틈도 없이 잠들기 직전까지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겨우 빵조각이나 물며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안쓰럽고 초조해, 차라리 내가 몇 분 더 일찍 일어나 아침밥 한 끼라도 따뜻하게 먹이자 싶었었다.
정말 숟가락만 들면 되도록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바쁘게 나서는 그를 끌어 잡고 앉힌 채 몇 숟가락만이라도 들게 한 뒤, 또 그렇게 숟가락만 내려놓자마자 그대로 일으켜 ‘이제 다녀와라.’ 했었다. 한마디로, 버릇을 잘못 들였다.
“…새로 밥 할 시간 안 되고, 냉동시켜 둔 거 해동해 줄 테니까 대충 먹어. 국, 찌개 타령하면 정말 걷어차 버릴 거야.”
커피 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며 말하자, 무어라 대거리질은 하지 못하고 혼자 퉁퉁거리고 있던 무진이 ‘어?’ 하고 안색을 밝혀 온다. 그러나 금세 히죽 웃기엔 체면이 서지 않는지, 여전히 퉁명스런 얼굴로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말을 붙인다.
“바쁘면 그냥 가. 오후에 사람 오면 얻어먹고, 아님 나가는 길에 사 먹으면 되니까.”
결국 제 손으로는 챙겨 먹지 않겠다는 말이다.
“됐으니까 냉장고에서 밑반찬이라도 좀 꺼내.”
일 인분만큼 미리 나누어 용기째 냉동시켜 놓은 밥을 꺼내어 전자레인지로 옮기며 말하자, 그는 퍽 온순히 ‘응.’ 대답하곤 당장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꺼내 놓은 밑반찬이라고 해 봤자 고만고만한 터라 나는 결국 달걀을 하나 더 꺼내고 곧장 팬 위에 기름을 둘렀다. 뒤쪽에서 ‘흐흥.’ 하고 만족스레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그가 좋아하는 반숙으로 프라이를 부쳐 내고, 그가 앉는 자리 앞으로 수저 한 벌을 챙겨 놓자,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무진이 얼른 내 앞으로도 수저를 한 벌 더 놓아두었다.
“난 커피로 됐어.”
“빈속에 무슨 커피야. 그냥 같이 먹어.”
마침 밥을 해동시키던 전자레인지에서 작동 완료음이 울려 돌아서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해 왔다. 수저까지 챙겨 주는데 뜨는 시늉이라도 하자 싶었다.
뜨거운 밥그릇을 먼저 꺼내 놓아두고, 밥을 나눌 빈 그릇을 하나 더 챙기려고 돌아서는데, ‘그냥 같이 먹자니까.’ 하는 소리가 덧붙여졌다. 결국 우리는 가난한 시대에 어미를 잃은 고아 형제들처럼 밥그릇 하나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채 사이좋게 숟가락을 교차하여 밥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몇 번 숟가락을 움직이다가 서로의 것이 짤깍 부딪히기도 했는데, 어쩐지 이 꼴이 우스워서 둘 다 픽픽 웃고 말았다.
“그런데.”
“응.”
나는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은 커피를 마저 마시며 문득 말을 걸었다. 반숙한 달걀프라이의 노른자 부분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젓가락으로 찢으며 그가 대답했다. 어쩐지 귀엽게 보여서 턱을 괸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음을 이었다.
“지석운은 무슨 죄를 졌기에 독일에서 이제야 귀국을 하는 거지? 이제홍은… 아직도 홍콩에 있다는 거 보니 대단하게 한 건 터트렸을 테고.”
“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진이 눈을 힐끗 치켜떴다. 반숙한 달걀노른자를 아끼는 사람의 얼굴치곤 역시 지나치게 사납고 불량스럽다.
“너처럼 사고 쳐서 쫓겨나 있던 거 아니었어?”
“푸핫……!”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짐작하고 있던 것을 되묻자, 무진은 요란스럽게 웃어 젖혔다. 기어이 노른자가 터져 버렸다. 한참이나 미친놈처럼 웃어 대다가 무진은 그것을 아예 통째로 집어 삼켜 버리곤, 우물거리며 웃음기 띤 얼굴로 물어 왔다.
“그놈들 보고 싶어?”
“그건 또 무슨 억측이야?”
“저번에도 뜬금없이 자다 일어나선 그놈들 소식 물었잖아.”
“그냥 궁금해서. 그래도 한때는… 내가 만든 김밥 얻어먹은 녀석들이 뭘 하며 살고 있나 싶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조금 더 키득대던 무진은 마른반찬을 집어먹으며 짧게 그들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어떤 사고를 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 먼저 지석운은 단순 유학으로서 이제 외과의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귀국 후에는 그의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종합병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대대로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조부와, 현재는 제1금융권의 장(長)인 아버지와 대주주인 숙부를 등에 업고, 은행업계의 큰손으로 여겨지는 집안의 이례적이고도 철없는 막둥이 이제홍은 사촌형을 따라 일 좀 배우라는 뜻에서 홍콩으로 함께 보내졌으나, 일은 뒷전이고 그저 명품 딜러 놀이만 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라며 무진은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KM그룹 창립기념 파티 때에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쪽을 보았다던 현찬성은, 사실 나 또한 몇 번인가 멀리서나마 그를 스치듯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다름 아닌 국내 최고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H신문의 사주인 덕분에 언론방송 쪽과 관계된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를 대동하였기 때문이었다.
무진은 그가 한때 거창한 포부를 품고 인터넷 방송국 구축을 진행 중이다가 결국 지금은 H 본사에서 신문배달일이나 하고 있다며 조롱조로 덧붙였지만, 걸러 들어야 할 말이었다.
물론 KM그룹 일가 개인사를 함부로 떠벌릴 위인은 없을뿐더러 애초에 그룹 내의 언론팀에서 먼저 대응에 나섰겠으나, 무진의 약혼이 무산된 일이 주부 대상 잡지에서 짧게 발표되었을 뿐 더 이상 말이 없었던 것은, 서얼들끼리의 개인적인 친분에 기댄 가위질 덕분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조만간 다 보게 될 거야.”
마지막으로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무진은 덤덤히 덧붙여 말했다.
“홍을 불렀거든. 별로 하는 일도 없는 놈이라 부르면 곧장 튀어오니까. 하필 그 망나니 놈이 제일 중요한……”
그리고 여전히 비아냥조로 제 친우를 흉보다가 맥연히 말끝을 흐리며 나를 슬쩍 건너보는 것이다. 팔을 뻗어 그의 앞에서 빈 그릇과 수저를 모아 챙기고 일어서려다 말고, 쳐다보는 시선에 ‘응?’ 하고 눈을 크게 떠 보았다. 별것 없다는 듯 무진은 한량처럼 건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놈이 제일 능숙하게 널 괴롭혔잖아, 웃으면서.”
“네 명이 또 뭉쳐서 날 공격하겠다는 거야?”
“응, 바로 그거야.”
“아주머니 오시기 전에 이거 설거지해 놔.”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 곧바로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싱크대 안으로 그릇과 수저를 담아 두고 다시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가 무척이나 황당한 얼굴로 ‘왜?’ 하고 물어 왔다.
“지저분하잖아. 미리 좀 치워 두는 게―”
“그런 거 치워 달라고 부르는 사람이야. 눈치 볼 필요 없잖아. 너 가끔 다른 사람들한테 하는 꼴 보면 그건 배려 아니라 그냥 청승이고 비굴이야.”
“…….”
기실 평소의 독설보다는 한참 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쏘아붙이는 힐난에 문득 터무니없이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말없이 빤히 쳐다보다가 팔을 걷으며 획 하니 싱크대 쪽으로 돌아서자,
“알았어, 내가 해.”
무진은 또 다급히 달래듯 말하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거실 쪽으로 밀며 ‘진짜 한다고.’ 덧붙인다.
이거야말로 청승이고 비굴 아니냐고 쏘아붙이려다가, 말았다. 그가 나 아닌 다른 누구에게 청승이나 비굴을 떤다 상상하자니 쓴소리를 들을 만했다.
“누가 보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하는 줄 알겠네.”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핀잔을 건네자, 그 역시 씩 웃으며 대꾸한다.
“물 안 묻히게 하잖아.”
“바쁜 출근 시간에 밥 달라고 붙잡긴 하지.”
냉큼 덧붙이며 식탁 위에서 휴대폰을 집어 올리는데 마침 벨이 울렸다. 기욱이었다.
“어, 그래, 기욱아. 아니야, 올 필요 없어. 지금 바로 나가는 길이야, 택시 타면 돼. 응, 그래.”
케이가 활동을 시작하면 이번엔 용훈과 함께 녀석을 태우고 다녀야 할 텐데, 계속 내 개인 운전수 노릇을 하고 있는 버릇을 미리 고쳐 놓기 위해 나는 부러 기욱에게 내 스케줄을 꼬아 말해 주며 데리러 오려고 할 때마다 허탕을 치게 만드는 중이었다.
“택시 타고 갈 거야?”
짧게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자마자 곁에서 듣고 있던 무진이 물어 왔다. 외투를 껴입으며 ‘응.’ 대꾸하자, 그는 먼저 앞으로 나서며 ‘태워 줄게.’ 했다. 걸음을 옮기다 말고 퍼뜩 멈춰 서서 그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렇게 하고서?”
씻지도 않았음은 물론, 자다 일어난 차림 그대로였다. 거실로 나가 테이블 위에 던져 놓은 키를 집어 들며 무진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냥 운전만 하는데 누가 봐?”
“…….”
“설거진 다녀와서 할 거야.”
그리고 인상 나쁜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덧붙였다.
“왜 차 안 몰고 다니지?”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잠시 정차한 무진이 힐긋 눈길을 주며 물어 왔다. 정말 추리닝 차림에 발가락이 드러난 슬리퍼를 신고 운전대를 잡은 그 모양이 우스워 몰래 곁눈을 주며 힐긋거리고 있다가, 얼른 시선을 흩트리며 입을 열었다.
“귀찮아서. 택시가 편하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고. 일할 땐 휴대폰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하니까 직접 운전하면 위험하기도 하고.”
“아, 그럼 하지 마.”
진지한 얼굴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신호가 바뀌었다. 교차로로 진입하며 무진은 또 ‘그 자식 말이야……,’ 하고 말을 걸어 왔다. 무슨 자식?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백치 그놈.’ 하고 덧붙인다. 기욱을 말하는 것이었다.
입을 딱 벌리며 인상을 찌푸린 채 노려보자, 그는 알았다는 듯 핸들을 붙잡고 있던 한손을 휘휘 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머리는 다쳐 그렇다 치고, 몸은 좀 어때, 쓸 만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몸 쓰는 실력 말이야. 저번에 덤빌 때 보니, 전력 다하진 않는 것 같긴 하던데… 행여 그게 진짜 전부면 곤란하고. 그래도 몸 굴리며 살다 그렇게 된 놈이니까 본능적인 감은 남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어떠냐고.”
무진은 기욱의 전과 기록과 현재의 장애를 입게 된 사고의 경위에 대해서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에 아무런 대꾸도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자, 그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덤덤히 이어 말했다.
“너한테 들러붙어 있는 놈인데 그 정도 조사도 안 했을 것 같아? 뭣하면 그놈 아예 네 운전만 전담하도록 배치하고.”
진의를 파악하고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됐어, 싫어. 기획사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길 테고. 이건 청승이나 비굴 아니라 그냥 아주 일반적인 눈치야.”
“꽁하기는.”
“…….”
그리고 얼른 덧붙이는 말에 그는 질 나쁘게 웃으며 지껄였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거의 다 와 가서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창틀에 팔꿈치를 얹은 채 턱을 괴고 나란히 정차한 옆 차선의 차들을 심드렁히 쳐다보다가, 문득 백미러에 비치는 한 대의 승용차에 시선이 갔다.
“…….”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단순한 내 착각 혹은 피해망상 정도에서 그친 일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눈치를 챈 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서툴러 보이는 은색 그랜저였다. 운전자는, 장신에다 밝 색으로 염색을 한 헤어스타일 때문에 길거리나 북적이는 음식점 등에서도 비교적 눈에 잘 띄었다.
처음 그를 의식하고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며칠 후부터는 좀 더 정교한 기술이 덩달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형 소나타와 흰색 아반떼로, 이번에는 확실히 전문가다운 실력이 느껴졌다.
운전자는 한 사람이었는데, 하루씩 번갈아 차를 바꾸는 것 같았다. 멍청하게 두리번거리며 찾지 않는 이상 절대 눈에 띌 만큼의 거리를 두지도 않았고, 그 정도 또한 빈번하지 않았다.
그랜저 쪽이 의도적으로 눈에 띄어 부러 겁을 먹게 하려는 의도라면, 다른 한쪽은 그저 단순한 감시의 목적인 것 같았다. 누구일까, 의뢰인이 한 사람인지 각자 다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진과의 일로 나를 경계하기 위함은 분명하였다.
가장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두 명의 배다른 형제들이었다. 현재 무진과 한편이 되었든 적수가 되었든, 이쪽이 신경 쓰이긴 양쪽 모두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물론 장담할 순 없었다.
대면한 적은 없지만 무진의 호적상 현재 어머니와 두 형제의 처가 쪽에서도 내가 불편한 존재이긴 할 것이었다. 명확한 한 가지는, 그의 아버지는 아니라는 것.
‘오냐 너 어디 한번 두고 보자, 하고 모른 척 방관하다가 어느 순간 덥석!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뜯어 숨을 끊어 놓으시지.’
무진의 장난스런 증명이 있기도 했거니와, 내가 직접 그를 만나 느낀 것에 있어서도 그 노회장은 이런 방식을 채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처럼 어설프게 사람을 붙이진 않을 것이었다. 일정한 방치 후, 어느 날 곧장 결단이 내려지겠지. 서늘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담담히 생각했다.
근래 기욱을 따돌린 것 또한 그들을 의식해서이기도 했다. 무진의 말대로 머리가 둔감해졌다곤 하더라도 본능적인 감이 남아 있을 녀석이었다. 더욱이 내 스토커를 잡아낸다며 혈안이 되어 있는 녀석이다. 행여 나쁜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고, 아예 잘못된 짐작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의식한 이상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역시 정신을 곤두세운 채 몸을 사릴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힐긋 무진을 돌아보는데, 문득 그조차도 의심이 되는 것이다. 겁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순 감시라면, 충분히 그일 수 있었다. 일전에도 모르게 내 뒤로 사람을 붙인 것을 저 스스로 말실수해 들킨 적이 있었다.
“왜 그래.”
점차 확정적이 되어서 아예 그를 향해 자세를 틀고는 눈살을 접은 채 빤히 쳐다보자, 그런 시선이 불편한지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짧게 물었다. 의혹의 기미를 거두지 않으며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되물었다.
“기욱이…, 내 개인 운전기사 시킨다면서 몸 쓰는 실력은 왜 묻지?”
“뭐, 운동 실력이 곧 운전 실력과도 이어지니까.”
“…….”
“뭘 또.”
“그냥, 이렇게 보니까 코가 꽤 잘생겼다 싶어서.”
“…….”
역시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 또한 완전히 꼬리를 잡기 전까지는 모른 척하고 있자 싶어 심드렁히 대꾸해 버렸다.
잠시 머쓱했던지 묵묵히 운전하며 빠르게 눈을 깜빡이던 무진은 그러나 아무래도 그 의도가 불량하다 생각되었는지,
“…지금 욕하는 거야?”
뒤늦게 사나운 반응을 보였다. 운전이나 해, 나는 앞쪽으로 턱짓을 하며 대꾸했다. 무어라 더 지껄이려다 말고 그는 바뀌는 신호등을 확인하며 핸들을 돌렸다. 골목 안으로 접어들어선 속도를 늦추었다. 저 너머 오피스텔 건물이 보였다.
“저기지?”
“응, 여기서 세워 줘.”
무진은 좀 더 안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고마워, 들어가, 인사하며 곧장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서는데,
“여승재.”
문득 그가 고개를 삐죽 내밀며 불러 왔다. 차 문을 닫으려다 말고 덩달아 안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응?’ 대꾸하자, 짓궂은 얼굴로 씩 웃으며 물어 온다.
“나, 예쁘냐?”
“…….”
그조차 어떤 꼼수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한심스런 눈길로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구려.”
짧게 대답했다.
“뭐야?”
기대에 잔뜩 부풀어 빙글대던 얼굴이 단숨에 왁 구겨졌다. 그를 향해 가늘게 눈살을 찌푸려 보이며 나는 말을 이었다.
“분명 뭔가 꿍꿍이속이 있어, 너 요즘. 구려.”
“너……!”
그리고 단호히 말을 끊고 차 문을 탕 닫아 버렸다. 곧장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빵! 신경질적인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타이어가 시멘트 바닥과 거칠게 마찰하며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리인이 오랜만에 보는 나를 향해 알은척을 해 왔다. 간단히 안부 인사를 하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케이는 현준이 있었던 오피스텔에 머물게 되었다.
해당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마침 내려오려고 했던지 케이의 새로운 전담 매니저 용훈이 ‘엇.’ 하고 맞으며 뒤로 물러섰다.
“아, 오셨네요. 기욱이 전화 와서 잘 도착하셨는지 묻더라고요.”
“음, 택시 타고 왔어. 케이는 좀 어때, 계속 그래?”
기욱이 또 무어라 걱정을 쏟아 냈는지 훤했다. 복도로 나와 서며 대충 둘러대고 곧바로 케이의 상태를 물었다.
용훈의 SOS 내용인즉, 매번 컴백을 앞두고 잔뜩 예민해져 은둔해 버리는 케이가 이번에는 퍽 오랜만인 데다가 혼자여서 그런지 더욱 상태가 심각해져선 우울증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라는 것이었다. 이미 일정이 잡혀 있는데, 제대로 된 활동은커녕 컴백조차 미루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였다.
“병원에 한번 데려가 봐야 할까 싶다가도, 괜히 또 이상한 쪽으로 소문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요.”
잠깐 뜨다만 신인 연기자를 전담하기도 했던 용훈이었지만, 케이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고 부담되는 경우일 것이었다. 내가 의사도 뭣도 아니지만, 열여섯 살짜리 애들 한참 사춘기 심할 적부터 밥 해 먹이고 속옷 빨래하며 보살펴 온 만큼 진짜 병원까지 데려가야 할지 살펴보는 것은 물론, 더욱이 컴백 연기에 대한 의견은 내 선에서 올라가야 할 문제였다.
“그래, 한번 보자.”
“예. 어, 그런데 이 시계…….”
“응?”
어쨌든 은둔한 녀석 얼굴이라도 먼저 보자 하고 버릇처럼 한쪽 팔을 걷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용훈이 내 왼쪽 손목에 감겨 있는 시계를 보고는 부리부리하게 눈을 밝히며 떠들어 왔다.
“우와― 감쪽같네요. 이거 최신 모델이던데, 어디서 이렇게 쌔끈하게 빠진 걸 구하셨어요?”
그제야 나도 내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을 제대로 보았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채워지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응…, 그래도 손목 닿는 데 안쪽이 좀 다르지.”
“그렇죠, 완전히 똑같으면 그것도 문제니까. 그거 진품은 집 한 채 값이래요. 미쳤다 싶은데, 그래도 그거 한번 구경은 해 보고 싶어요.”
“응…, 보통은 뭐.”
아귀가 맞지 않는 대꾸를 흘리며 다시 슬쩍 소매를 내렸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에 용훈이 ‘흐흐.’ 웃었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 도착해선 카드키를 찍으며 문을 열어 주곤 들어가시라 비켜 주었다.
고맙다 하고 혼자 집 안으로 들어서 보니, 곧바로 적요한 기운이 안개처럼 훅 끼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케이. 형 왔다.”
역시 대답은 없었다.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찾지 않고 먼저 느긋하게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생수와 탄산음료를 하나씩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겨, 이불이 반듯하게 펼쳐져 있는 침대 위로 털썩 올라가 잠시 몸을 뻗고 누워 버렸다.
“인사도 안 해?”
묵묵부답. 그대로 옆으로 돌아누운 채 반대편 침대 아래쪽으로 힐긋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콜라 마셔도 돼?”
“…….”
납작하게 바닥에 엎드려 있던 케이는 그제야 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얼른 캔 뚜껑을 땄다.
지금의 케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서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덩치가 커지고, 나는 아무래도 즐길 수 없을 것 같은 종류의 음악에 심취해 있고, 가끔 어른스러운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많지만, 이럴 때의 케이는 꼭 처음 보았을 때와 같았다.
왜소한 체격에 순한 양처럼 귀여운 외모였었다. 이민 2세라는 특징과 더불어 한국말을 거의 못 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가장 신경이 쓰이는 녀석이었다.
“자메이카 안 보내 줘서 화났어? …그쪽 음악으로 앨범 못 채우게 해서 기분 상했어? 그래서 내 얼굴은 보기도 싫어졌어? …아, 이제 여기 오면 안 되겠다.”
“…혀엉….”
지금 녀석이 가진 불안의 정체를 모른 척하며 어색한 연기를 펼치는데도, 녀석은 비로소 부스스하게 고개를 돌리며 원망조로 나를 불러 왔다. 녀석의 곁으로 내려가 앉으며 생수를 내밀었다. 덩달아 구부정히 일어나 앉으며 받아 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케이는 울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망할 거 같아….”
“안 망해. 그리고 망하면 뭐 어때, 어차피 내년에 지구 종말설 있던데, 망하면 다 같이 망하라지.”
나는 캔 뚜껑을 딸깍거리며 부러 심통 맞은 어조로 대꾸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녀석이 드디어 마음을 열어 왔다.
“승재 형, 다시 나하고 같이 있어, 계속, 예전처럼. 나 혼자니까 형도 많이는 안 힘들 건데.”
여전히 어색한 발음과 화법이었다.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또 얼른 탄산음료를 삼켰다. 그리고 입술을 닦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케이, 그거 계속하려니까 형 이제 좀 힘들다. 그래도 너 중요한 스케줄은 같이 할 거야. 이번에 준비하면서도 절반은 형이 같이 했잖아. 그 정도로 봐줘, 응?”
“…응….”
케이는 착한 녀석이다. 배려심이 깊고, 무리한 고집도 부리지 않는다. 다만 예민한 성격에 걱정이 많고 불안과 우울에 쉽게 전이될 뿐이다.
“어쨌든 그래도 아직 아닌 거 같아…, 팬들도 실망할 거야.”
“네가 뭘 하든 응원해 줄 사람들이야.”
“이상하잖아, 그거.”
“그러니까 고마운 거지. 그러니까 너 더 힘내야 되고, 이렇게 엎어져 있으면 안 되는 거야. 이제껏 그렇게 잘해 왔잖아.”
“…….”
아무래도 가뿐히 일어설 순 없는지, 케이는 다시 힘없이 주룩 넘어지더니 바닥으로 엎어져 버렸다.
“침대 올라가 누워. 어서. 화낼 거야.”
좀 더 달래 줄까 하다가, 이제 그 이상은 내 몫이 아닌 것 같아 단호히 말했다. 그에 움찔하는 것 같더니, 녀석은 말없이 흐느적거리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누웠다.
그 위로 이불을 덮어 주며 ‘형 갈게.’ 하고 곧장 발길을 돌려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복도에 기대서있던 용훈이 기다렸다는 듯 물어 왔다.
“어때요?”
“병원은 무슨.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한 정도야. 향수병에다 어리광도 좀 더해져서.”
“어리광이요? 저 덩치로요?”
어이없다는 듯 용훈은 입가를 비실거리며 되물었다. 걸음을 떼며 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성장기 적부터 이쪽에서 쭉 일해 왔잖아. 보통 또래보다 비정상적으로 성숙한 면도 있고, 또 반대로 정체된 면도 있어. 그래서 스스로 중심을 잘 못 잡는다고 해야 하나……, 그럴 때 많으니까 평소에도 잘 살펴봐야 되고. 우선 일정대로 그대로 가. 미국서 어머니 잠깐 모셔 와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실장님한테 내가 말씀드리고. 그리고 너 오늘부터 여기서 같이 살아. 관찰을 하든 생활을 하든, 같이 살면서 정 붙이란 말이야.”
“어… 그런데 좀…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제가 아니라 케이가.”
곁을 따라 걸으며 용훈은 아무래도 기껍진 않은지 뒷머리를 긁적여 대꾸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 채 잔소리를 이었다.
“아니야, 안 그래. 그냥 같이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밥 먹고 티브이 보고, 그렇게 해. 혼자 일어나서 물 마시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억지로 끌고 나가 운동 시키고. 아, 얼굴 관리 받게 하는 거 잊지 말고. 어쨌든 계속 같이 있어.”
“예…….”
“지금부터 바로. 들어가 봐.”
내려가시는 거 보고요, 흐흐 웃으며 용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붙임성 좋은 녀석이다. 케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여자애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마주 서며 대신 핀잔조로 말을 건넸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녀석은 눈길을 돌리며 또 흐흐 웃는다.
“왜요, 여자애면 귀엽고 분위기 좋죠. 저도 달래 주기 더 쉽고.”
“생리혈 묻은 팬티, 와이어 들어간 브래지어, 비싼 속옷 안 상하도록 손빨래하면서 말이지.”
1층 버튼을 누르며 나는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닫히는 문 너머로 용훈의 뜨악한 얼굴이 확 붉어졌다.
***
“김 실장님, 계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마주친 안무 트레이너를 붙잡고 열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내가 우스웠는지 그는 히죽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이 시간에 실장님 계시지, 그럼.”
“아니 혹시 다른 스케줄 있으신가 해서…….”
어설프게 따라 웃어 보이며 대꾸하곤 얼른 발길을 옮기자, 동갑인 그가 뒤쪽에서 친근하게 내 엉덩이를 툭 치며 ‘분위기 수상쩍네?’ 하고 말을 붙였다. 아니야, 대꾸하며 마침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로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날 이후 김 실장과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한 번, 첫 장기 광고가 들어온 연기자의 매니저가 가져온 계약서를 조율하기 위해 실장실을 찾아갔으나, 마침 급하게 문을 나서는 그와 어정쩡하게 만나서는 어쩐지 똑바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거―’ 하고 계약서만 밀어 보였는데, 그 역시 어색했는지 ‘어, 어, 네가 알아서 해.’ 말하곤 얼른 자리를 떠 버렸었다.
그 외에는 딱히 그에게 보고나 지시를 받으러 갈 일도 생기지 않아서 자연스레 마주치지 않게 되었는데, 생각해 보니 한 건물 안에서 움직이면서 얼핏 스친 적도 없었다는 것이 조금 이상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시―
“피하시는 건가…….”
선뜻 실장실 문을 열지 못하고 먼저 화장실로 들어와서는 무의식적으로 소변기 앞에 선 채 멍하니 속엣말을 중얼거렸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무리 성적 취향의 자유를 넘어 방종하기까지 한 이쪽 동네에서 오래 생활해 온 사람이라지만, 불편을 넘어 불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또 혼잣말을 했다. 그런데 그때,
“엇.”
문득 뒤쪽에서 누군가 들어서는 인기척이 났다. 힐긋 돌아보자, 김 실장이었다. 그 역시 화장실에서 나와 마주친 것에 놀랐는지 일순 움찔했다가 이내 ‘음, 흠.’ 목청을 가다듬고는,
“케이는 좀 어때.”
덤덤히 물으며 내 옆의 소변기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나는 앞쪽의 타일 벽을 빤히 마주 본 채 차분히 대답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예민해져 있는 것 같긴 한데, 그 정도는 용훈이 책임이라고 맡겨 두고 왔습니다.”
“컴백 일정 무리 없고?”
“예, 미룰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미국에서 어머니 며칠이라도 모셔 와야 할 것 같고요.”
“알았어, 그쪽엔 네가 연락해. 비행기 티켓 구해 놓고.”
“예.”
지퍼도 내리지 않고 그저 껍질 벗긴 바나나 모양을 본뜬 소변기 앞에서 나란히 선 채 각자 정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꼴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웃음기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러자 김 실장이 이쪽으로 획 하니 고개를 돌리며 심드렁히 말을 이어 왔다.
“그리고 난 너 피한 적 없다. 네가 날 피했겠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제야 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버릇처럼 대꾸했다. 그러나 김 실장은 입을 삐죽이며 소변기 앞으로 더 바짝 붙어선 채 지퍼를 찍, 내리곤 퉁명스레 말하는 것이다.
“뭐가 또 그런 게 아니냐? 이제 안 속아.”
“그런… 속인 게 아니라… 불편해 하실까 봐…….”
덩달아 소변기 앞으로 붙어 서며 지퍼를 내리곤 주절주절 말을 잇다가, 문득 아차 싶어 힐긋 그의 눈치를 살폈다. 민둥산 아랫도리는 자랑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나 김 실장은 다른 무엇을 오해했는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턱을 딱 늘어뜨린 채 무척이나 억울하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안 봐, 안 본다고. 난 흥미 없어, 안 궁금하다고. 어차피 벗긴 바나나 껍질에 가려서 보이지도 않아.”
“예? 아니요, 그게…….”
“들어가면 될 거 아냐.”
그리고 토라진 듯 지퍼를 다시 찍 올리고는 화장실 안쪽 칸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지만, 염려하지는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의 화는 서운함에서 오는 것일 뿐, 비난이나 원성의 성격은 아님이 느껴졌다.
“저, 실장님.”
칸 안에서 변기 뚜껑 올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달래듯 그를 불렀다. 왜, 시무룩한 목소리로 그가 안쪽에서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내 마음이 아직 거칠고 비좁아 그를 오해했다.
“뭐, 오줌 싸는 거 안 보여 줘서? 하긴, 남자들끼리의 정은 그런 데서 돈독해지는 건데 말이야.”
쪼르르 오줌발 떨어지는 소리를 가감 없이 내며 그는 능청스럽게 대꾸를 해 왔다. 그저 피식 웃고 말았는데, 그때 마침 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돌아보자, 먼저 마주쳤던 안무 트레이너가 샐샐 웃는 낯으로 화장실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엇, 실장님, 여승재가 오줌 싸는 거 안 보여 줘서 삐지셨어요? 우와, 소문내야지―.”
그리고 볼일은 보지도 않고 당장 화장실 밖으로 뛰어나가 버리는 것이다. 칸 안쪽에서 김 실장이 뒤늦게 ‘앗.’ 하고는 벌컥 문을 열어 고개만 빠끔 내밀며 소리쳤다.
“야, 너 누구야! 소문내기만 해 봐!”
그리고 멀뚱히 서 있는 나를 획 쳐다보다가 또 ‘아참.’ 하며 다시 급하게 문을 닫고 들어간다. 곧이어 변기물이 주룩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