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몸으로 뒹굴며 싸우다 보면 상대를 알게 되고, 알고 나면 이해하게 된다고 정혜주가 말했었다. 아역 시절부터 험한 연예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연륜 깊은 배우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사정 후 무진은 나를 침대에 납작하게 엎어 놓곤 무릎으로 양다리를 벌려 고정시킨 채 또 한 번 거칠게 삽입을 해 왔다. 헝클어진 침대 시트에 멋대로 비벼지는 내 성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겨우 떼어 내고 바닥으로 기다시피 하며 도망을 쳤지만, 결국 다시 붙잡혀 또 이번엔 한쪽 다리로 지탱해 선 채로 꿰뚫려야 했다.
‘허리가 빠질 것 같아…….’
허벅다리를 타고 주룩 흘러내리는 그의 정액을 느끼며 칼칼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제야 무진은 나를 놓아주고 혼자 털썩 침대 위로 누워 버리는 것이었다. 벌써 새벽 4시였다.
나는 숫제 네발짐승처럼 기어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단단히 잠가 두고 대충 아래만 씻어 낸 후 가져간 속옷을 꿰어 입는데, 한 발씩 들 때마다 발목부터 척추까지 시큰시큰하게 아파 오면서도 내심 무진이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아직도 맨몸으로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씩씩 가슴을 들썩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하물며 제대로 의견을 피력하지도 못했던 열아홉의 내게 몹쓸 짓을 참 많이 했던 열아홉의 권무진조차도 이해가 되었다.
너 외롭고 불안했구나, 이해하고 나니 건장한 체격의 그가 문득 무척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무진은 내가 저녁에 현준과 단둘이 만난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까. 현준에 대한 그의 오해를 풀어 주지 못했다. 그의 불안을 태평하게 잊고 지냈다는 것이 무안하고 미안했다. 그럼에도 그는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와선 달리는 열차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고, 이제 한 침대를 쓰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오해로 12년을 미워하다가, 정작 얼굴을 마주하자 밥을 사 주고 장미꽃다발을 선물하는 아이러니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랬어.”
“…….”
“그런데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됐어, 듣기 싫어. 아무 말 하지 마, 그냥 이리 와서 누워 자, 늦었어.”
침대 곁으로 다가가 벌렁 누운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건넸지만, 무진은 와락 찌푸린 얼굴을 팔등으로 덮어 버리며 대화를 피했다. 내가 또 독한 소리를 지껄이려는 것으로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물끄러미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다시 욕실로 발길을 옮겨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셔 왔다.
내가 아예 다른 방으로 가 버렸다 생각했는지, 무진은 침대 위에 엎드려 누운 채 대뜸 주먹을 뻗어 원목의 침대 헤드를 퍽! 퍽! 쳐 댔다. 으흠, 하고 인기척 소리를 내자 또 한 번 주먹을 뻗다말고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성질낸 거 아니야.”
“그게 성질내는 거 아니면 다른 뭐야.”
“…운동한 거.”
“…….”
내 눈길을 피하며 그는 도로 획 하니 돌아누웠다. 정액으로 더러워진 시트를 그대로 깔아뭉갠 채였다.
그것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리자, 무진은 귀찮다는 얼굴로 아래 시트 한 장을 뭉쳐 바닥으로 밀어뜨려 놓곤 ‘지금은 그냥 자자.’ 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은 듣기 싫다는 듯 팔등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냥 누워 있어.”
나는 그가 누운 침대 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적셔 온 수건으로 그의 발끝에서부터 빠른 손길로 닦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팔을 거둔 무진이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액이 고스란히 뭉개진 사타구니와 복부 쪽을 닦아 줄 때는 또 성기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기도 했다.
“여긴 네가 다시 닦아.”
얼른 건너뛰고, 수건을 뒤로 접어 이어 그의 손을 닦아 주는데, 무진이 다른 손으로 그런 내 팔을 덥석 붙잡으며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너.”
“지저분하게, 씻지도 않고 그냥 자려고 하잖아.”
“하지 마, 이런 걸로 뭐 씻으려고 하지 마.”
“내가 씻으려는 게 뭔데.”
“하여튼.”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뚱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나는 내 팔을 붙든 그의 손등 위로 다시 수건을 문질렀다.
널 얻기 위해 그 앨 이용한 것이었다, 추악한 진실을 어떻게 완곡한 표현으로 돌려 말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그는 또 가슴을 들썩이며 내 이마로 훅훅 뜨건 숨을 내뱉었다.
“나 아까 진짜 성질낸 거 아니야.”
“그래, 운동했다 쳐.”
“…또 우리 아까, 그냥 좀… 하드하게 즐긴 것뿐이야.”
“난 별로였는데… 어쨌든 것도 그랬다 쳐.”
“그러니까 너 여기서 못 나가.”
그래, 곧바로 대답하자 무진은 그제야 차분히 숨을 고르며 ‘응.’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곤 불쑥 내 손에서 수건을 낚아채 가선 직접 닦으라고 했던 사타구니 부분을 성의 없이 문질러 닦은 뒤, 곧장 내 팔을 끌어 바짝 껴안은 채 가로누웠다.
“…권무진.”
그에게 또 온몸이 포박당한 채 나는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무진은 대답이 없었다. 등 뒤로 그의 높은 체온과 발딱거리며 뛰는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현준이는―”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뒤에서 무진이 곧바로 내 입가로 손바닥을 눌러 막아 버렸다. 조심스레 손바닥을 떼어 내며 ‘그게 아니라 현준이는―’ 하고 말을 이으려 하면, 그는 또 다른 손으로 덥석 내 입을 가로막았다.
“됐어, 뭐든 상관없어. 달라지는 거 없어. 너는 계속 나하고 같이 살면서 한 침대 쓰는 거야.”
“…….”
그에게 입이 가로막힌 채 나는 ‘우웅’ 소리를 냈다. 그 대답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무진은 ‘까불지 마.’ 심통스럽게 대꾸하며 집게손으로 내 콧방울까지 꽉 막아 아예 숨도 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몇 번 투덕거리다가 겨우 코를 놓아주곤 ‘이제 자자.’ 하며 먼저 쿨쿨 소리를 냈다.
등 뒤로는 여전히 불안으로 빨리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행여 내가 현준과 정말 깊은 관계라 하더라도 상관이 없단다. 달라지는 게 없단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울고 싶어졌다. 내 초조를 놀려 대며 여유를 부린 주제에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괘씸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만 좀 더 괴롭혀 주기로 했다.
그러나 몸의 피로와 겹쳐 늦잠을 자고 말았다. 보통 느지막이 나가는 나와는 달리 기상 시간이 빠른 무진은 물 한잔 마시지도 못하고 급하게 씻고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저기, 사실 현준이는―’ 하고 말을 꺼낼라치면 그는 여지없이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덥석 가로막았다. 양치질을 하면서도, 넥타이를 매다가도.
졸졸 따라다니며 ‘현준이 말이야……,’ 하고 입을 열 때마다 덥석덥석 손바닥으로 입이 봉해지던 나는 기어이 현관을 나서는 그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까지 함께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던 무진은 귀신처럼 흐느적거리며 쫓아오는 나를 힐긋 돌아보며 기어이 ‘에잇,’ 하고 귀찮은 소리를 냈다. 건물 앞에는 비서가 먼저 차를 대 놓고 밖에 나와 서 있었다.
“혹시 너, 나한테 사람 붙여 놨어?”
현준의 이름을 꺼내지 못하게 한다면 다른 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얼른 차를 타고 피해 버리려는 그의 뒤에서 옷깃을 잡아 붙들며 직격으로 물었다.
무진은 물론이고, 아직 세안도 하지 않아 꾀죄죄한 몰골의 나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며 뒷문을 열어 주던 비서까지 흠칫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
뚱한 얼굴로 그저 나를 쏘아보기만 하는 무진을 대신해, 나는 고개를 돌려 단정한 얼굴의 비서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거짓말을 못할 것 같은 얼굴이니까.
“…저는 아닙니다.”
그리고 역시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까지 내저으며 대답했다. 사나운 얼굴로 무진이 냉큼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저기.’ 하고 부르자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그 사람 잘라 버려.”
“뭐?”
뒤를 붙인 것을 질책하는 의미로 들었는지 무진은 다짜고짜 입술을 실룩거려 보였다. 퉁퉁 부은 눈두덩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나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알아내려면 제대로 알아내든가. 엉터리야, 잘못됐어.”
“뭐라는―”
“현준이, 아니야. 처음부터 네가 오해한 거야. 그거 알고 있었는데 그냥 놔뒀어. 아니, 내가 더 부추겼어. …잘못했어.”
“…….”
꼭 붙들었던 옷깃을 놓아주어도 무진은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끝으로 내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가 눈길을 피하는 방향대로 따라 고개를 기울이며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얼굴로 ‘왜?’ 물었다.
“…너 화나게 하려고….”
그의 뒤에 서 있던 비서가 뚜벅 뒤로 물러서며 곧바로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물어뜯자, 무진이 멍한 얼굴로 내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그의 손끝에 짧게 입을 맞추고 나는 말을 이었다.
“어제도 그냥 짐 정리한다고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냥 얘기 좀 하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 녀석이랑… 아니었다는 말이야?”
무진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이어 물었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그가 화가 난 것인지 표정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몇 번이나 그런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을 만들었던 주제에 갑자기 처음부터 아니었다 말하니 신뢰가 없을 것이었다. 의기소침해졌다.
“그 녀석이 나를 좀… 잘 따랐어. 그 이상 감정은 내가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어쨌든 그런 관계는 아니었어. 아니었는데… 네가 화내니까, 그렇게 됐어. 그러니까, 나는… 처음부터 나는 너밖에…….”
네 감정을 돋우기 위해 나를 향한 다른 감정을 이용했다, 내 흉악한 진실을 이만 눈치채 줬으면 했다. 그래서 경멸한대도 할 수 없었다. 고백하는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어깨는 달팽이처럼 동그랗게 말려들었다.
“…여승재.”
그가 문득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지 않자,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이리저리 내 눈길을 낚아챘다. 얼핏 스친 그의 얼굴이 얼간이처럼 흐흐 웃고 있는 표정인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제야 두 손으로 덥석 내 얼굴을 덮어 버렸다.
“얼굴, 왜.”
“가려워서.”
손바닥으로 벅벅 얼굴을 비벼 대자, 무진이 내 두 손목을 움켜잡고 양쪽으로 벌려 떼어 냈다. 그리고 울긋불긋해진 내 얼굴 위로 둥글게 입술을 말아 ‘후우― 후우―’ 하고 입바람을 불어 주었다. 눈가가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무진은 계속해서 내 열뜬 얼굴로 바람을 불어 주면서도 슬쩍슬쩍 턱을 더 내밀어 이마와 눈가와 콧등에 짧게 입술을 맞추고 떨어졌다.
나는 주위를 힐긋거리며 사람이 없는가 살폈지만, 그는 신기한 것을 보는 어린애처럼 입을 헤벌린 채 웃으며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 지금 출발해도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어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비서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걸었다.
아아, 무성의하게 답하며 무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뒤로 휙휙 손을 저어 보였다. 차 문이 도로 닫히고, 무진은 붙잡은 내 손목을 와락 끌어당기며 껴안은 채 속삭였다.
“…고맙다.”
“…….”
“말해 줘서 고마워, 여승재. 나 이제 정말 성질 죽일게.”
“…열 번 중에 제일 못 참겠는 거, 한 번 정도는 맘껏 성질내. 그게 네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아. 어제 보니까 그렇게 계속 참다간, 너 정말 머리 확 돌겠던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어떻게 된다 그러고, 어제처럼 그러면 너 조만간 뇌… 뇌출혈 같은 거 위험하겠더란 말이야.”
그의 어깨 위로 턱을 괸 채 나는 부러 불퉁한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런데도 무진은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네 앞에선 성질 안 내.”
그러곤 대꾸하는 말이 그랬다, 아예 성격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내 앞에서는 성질을 내지 않겠다고.
기특하다고 해 줘야 할지 의아했으나, 확실한 것은 나는 그에게 수십 수백 번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추악한 나를 받아들여 줘서 고맙다고, 고맙고 또 고맙다고.
“고마워.”
그러나 내가 입술을 달싹이며 ‘저기, 저기…’ 주저하는 동안,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듯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떨어진 무진은 열어 둔 차 문 안쪽으로 들어앉으며 다시 한번 대신 말하는 것이었다.
“…응.”
나는 그저 얼떨떨한 상태로 멍청하고 뻔뻔스럽게 대답해 버렸다. 그러곤 곧장 와락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무진은 씩 웃어 보이곤 차 문을 닫았다.
곧바로 부드러운 시동 소리가 들리고, 문득 짙게 선팅된 차창이 내려졌다. 밖으로 얼굴을 내민 무진이 초조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 왔다.
“오늘도 조금 늦을 것 같은데, 그래도 최대한 빨리 들어오도록 할게.”
“…응, 나도.”
콧등을 긁으며 대꾸하자, 그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차가 출발했다.
“…….”
나는 고개를 빠끔 내밀고 차 꽁무니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차가 큰길로 나가는 걸 보고서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현관 계단에 가 털썩 쪼그리고 앉았다.
“…뭐 저렇게 바보 같은 놈이 다 있어….”
무릎 위로 이마를 얹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너털웃음이 다 나왔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그대로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하아― 크게 숨을 내쉬며, 그렇게 한동안 동그랗게 몸을 말고 움직이지 않았다. 구부정한 등줄기 위로 아침의 상쾌한 바람이 옷깃을 흔들며 지나갔다. 문득 누군가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른이 운다아―.”
그리고 내가 앉은 앞을 지나가며 어린애가 큰소리를 냈다.
“안 울어.”
퍼뜩 고개를 들어 마른 얼굴을 보이며 말하자, 체크무늬의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와 손을 붙잡은 아이 엄마가 ‘어머나.’ 하고 놀라며 걸음을 빨리해 지나가 버렸다.
나는 다시 무릎 위로 이마를 얹어 기대었다. 그리고 몸을 더 둥글게 말았다. 벌써 그가 보고 싶었다.
‡ ‡ ‡
“여승재 씨?”
차를 보낼 테니 점심을 같이 하자는 무진의 전화를 받고 나오던 걸음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우르르 몰려들어 오는 연습생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문 바로 앞에 세워진 검정 색 세단에서 나온 남자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을 걸어왔다.
“…예, 그렇습니다만.”
늠름한 풍채와 희끗한 머리, 더해 직선으로 바라보는 곧은 눈빛이 단단한 위압감을 불러일으켰다. 경계하는 태도로 주춤 멈춰선 채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남자는 반듯하게 입술을 휘며 말했다.
“마침 전화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리 마주쳐 다행이네요.”
그리고 아무런 요구 없이 당연하다는 듯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
그가 누구이고, 어떻게 내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으며, 무슨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인가에 대해서 묻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이 순간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어떤 두려운 기대치를 안고 있기도 한 것이었다.
무진에게는 점심 약속을 파기한 것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해야 할까, 생각하며 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마침 무진의 은색 세단이 급하게 다가와 바로 앞으로 멈춰 서는 것이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람은 젊은 비서―이승현, 이름까지 정직하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는 나와 남자를 향해 차례로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그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며 먼저 말을 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일일이 그런 걸 자네한테 보고해야 되는 건가.”
중년 남자가 힐난조로 대답했다. 젊은 남자가 곤란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슬쩍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럼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내가 어느 분 지시로 움직이는지 몰라서 이래?”
“…….”
강경한 어조를 띤 중년 남자의 말에 아직은 기세가 약한 젊은 비서가 다시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 어깨 너머로 빤히 느껴졌다. 모시는 사람에 따라 비서도 급이 달라지나 보다, 생각하며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당황한 얼굴로 젊은 비서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승현 씨.”
“아, 예.”
이름을 부르자 그는 더 당혹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이래서야 권무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권무진한테는 저 그냥,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데리고 오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세요.”
“저, 그럼 우선은―”
“우선 그렇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집스러운 어투로 말하자, 비서는 난감한 낯빛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비실 웃어 주며 나는 그의 어깨를 스치고 검정 색 세단 안으로 올라탔다. 중년 남자가 차 문을 닫아 주고 곧장 앞으로 둘러 와 운전석에 앉았다.
부드럽게 차가 출발하고, 뒤를 힐긋 돌아보자 비서가 멀뚱히 이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똑바로 돌아앉은 채 나는 룸미러로 중년 남자의 얼굴을 힐긋 살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정면을 곧게 쳐다보며 내 쪽으로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정면을 주시한 채 남자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놀라 ‘예?’ 하고 반응하자, 그제야 룸미러로 나를 짧게 힐긋 하며 말을 이었다.
“그저 잠시 만나 말씀을 한번 나눠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아드님과 동거하는 분이 궁금하실 테지요.”
“…….”
내가 겁먹은 것처럼 보였나 보다. 조금 우스웠고, 또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일에 관련된 게 아니라면 딱히 긴장하는 성격은 못 됩니다.”
“다행이군요.”
애써 여유로운 목소리를 꾸며 내며 말했지만, 남자는 입매를 휘며 대꾸했다. 거의 아버지뻘로 보이는 나이 차를 제외하고도 그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따져 보았자 소득 없는 일이거니와, 어디까지 알고 나를 재단하든 타인의 시선에 말을 두어 봤자 더 낮게 보여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뒤가 붙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은 한강대교를 지날 때 즈음이었다. 운전석의 남자 역시 같은 느낌이었는지 백미러를 힐긋거리며 뒤를 확인하다가, 어떤 확신이 들었는지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쿵 내리쳤다.
그리고 차는 길 한쪽에 세워졌다. 뒤를 따르던 승용차 역시 바짝 붙어 섰다. 무진인가 싶어 차창 밖으로 눈을 붙이며 살폈지만, 그의 차가 아니었다. 곧이어 뒤에 붙어선 차의 운전석과 뒷문이 동시에 열렸다.
“…아.”
뒷문에서 나온 사람의 얼굴은 꽤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신문지면이나 텔레비전 뉴스 등을 통해서였지만, 가장 최근엔 무진과 동행했던 케이엠 그룹 창립 기념 파티에서였다. 무진의 큰형이자, 케이엠 그룹 본사 사장 권무열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먼저 차를 세운 뒤로도 그저 잠시 곤란하다는 듯 손끝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고 있던 운전석의 중년 남자는 룸미러로 권무열이 밖으로 나와 선 것을 확인하곤 곧바로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차창을 조금 내리자, 내가 앉은 뒷좌석 바깥에서 마주한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다 우연히 눈에 익은 차가 있어서 말입니다. 얼핏 보아하니, 나도 한번 만나고 싶었던 손님을 태우고 가는 것 같기에 따라가 보자 했습니다.”
“회장님께서 뵙고 싶다 하셔서 모시고 가는 길입니다.”
“아, 그럼 제 차로 모시지요. 어차피 본사 사옥으로 가시는 길 아닙니까.”
“사장님, 저 회장님 말씀 따르는 사람입니다. 곤란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저는 이런 길가에 오래 나와 서 있으면 구경거리 되는 사람입니다, 아시잖습니까.”
“…….”
“그럼 이렇게 하지요. 이쪽도 방향이 같습니다. 손님은 제 차에 태우고, 사옥 도착할 때까지만 제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방금처럼 나란히 따라오셔서 정문 앞에서부터 모시고 가면 될 것 같은데.”
좌석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은 채 나는 중년 남자가 잔뜩 불편한 얼굴을 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힐긋 눈을 들어 훔쳐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런 나를 알고 있다는 듯 남자가 짙게 선팅된 차창 너머에서 내게 곧게 시선을 맞추어 왔다.
“…여승재라고 합니다.”
나는 직접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섰다. 권무열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이름을 밝혀 인사하자, 그는 알고 있다는 듯 눈썹을 부드럽게 치켜올렸다 내리며 에스코트하듯 몸을 틀었다.
“제 차로 모시지요.”
정중한 태도에 나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사장의 운전기사가 뒷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가 나란히 뒷좌석에 앉자마자 차는 미끄러지듯 출발했고, 처음 나를 태웠던 중년 남자가 모는 세단이 뒤를 따랐다.
“갑작스럽게 혼란을 드린 것 같아 대신 사과드립니다. 우리 회장님이 원래 잠잠히 계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내미시는 타입이셔서, 모르는 입장에서는 뜬금없다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길가에 오래 서 있으면 구경거리가 된다 말했던 남자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인사를 해 왔다. 그리고 능숙하게 대화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내가 앉은 쪽을 향해 조금 자세를 튼 채 ‘회장님’으로 칭하는 그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대해 대신 사과를 했다. 최소한 내가 겁을 먹었다고 해석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 놀라진 않았습니다. 언젠가 뵐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는 적당히 온화했고 적당히 위압적이었으며, 적당히 예의를 차렸다. 내가 긴장하는 타입은 바로 이런 유의 사람이었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오히려 특색이 없는 사람.
무진 역시 자신의 큰형을 설명하기를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 평했었다. 욕심과 양심이 적당한 사람, 그래서 무진의 입장에서는 협상하기에 좋은.
무진이 먼저 그 협상의 내용에 대해 상세히 말해 주지 않은 터라 굳이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지만, 그 협상의 시발점에 내가 연관되어 있다는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궁금했다.
그러나 초면의 사람을 대하는 것에 능숙해 보이는 남자는 서툴게 본론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그는 먼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가볍게 질문하고, 점차 무진의 이야기로 좁혀들어 갔다. 나는 흔쾌히 덫을 향해 몰아지는 멍청한 노루가 되어 주었다.
“불편한 건 없습니까? 그러니까… 그 녀석하고 같이 지내는 것 말입니다. 워낙 고집도 세고 조금 제멋대로인 성향이어서 전 항상 무진이 내처 될 사람이 궁금하고 걱정되고 그랬거든요. 아, 두 사람 사이에서는 내처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은 것 압니다만, 달리 통용되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요. 혹시 기분 상하셨나요?”
“…그냥 하우스메이트 정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담백한 어조로 대답하자, 남자는 그리 경박하지도 않지만 또한 부러 꾸며 냈다고도 느껴지지 않는 밝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이네요, 저는 여승재 씨에게 닥쳤던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조금… 우울한 성향의 사람이 아닐까 짐작했었는데, 유쾌한 분이었군요. 다행입니다, 무진이한테도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아요.”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유쾌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난생 처음이어서, 이번에는 그가 조금 포장해서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나는 딱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분 좋은 얼굴로 조금 더 혼자 웃음을 머금었다.
도련님으로 나고 자란 이들이 대체적으로 동성애에 그리 큰 적대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간혹 쾌락의 도구 정도로 여기기까지 한다는 것은 그런 치들로 득시글했던 고교생활과 이후 기획사에서 구르며 직접 보고 들어 알고 있는 사정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형제의 입장이 되어서도 태연히 ‘내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가 과연 일반적인 평범의 범주에 드는지는 의문이었다.
물론 그에게 별다른 악의는 없다 느껴졌고, 나 또한 무진과의 관계에서 단순 여성체로 분류하는 시선에 미간을 좁힌 채 깐깐히 따지고 들 만큼 열렬한 젠더 운동가는 아니므로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며 반기를 들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큰형에 대한 무진의 평가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무진이가 제 이야길 하던가요?”
“예, 딱히 좋은 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으로 질이 나쁜 쪽 역시 아니라고.”
“음?”
온화한 얼굴로 묻는 질문에 사심 없이 들은 그대로 대답했는데, 그는 조금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아하하하!’ 경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솔직한 사람이군요. 그런데 제가 묻고 싶은 건… 저를 어떤 사람으로 소개받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진이와 제가 어떤 이야길 나누었는지 여승재 씨가 알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일에 관련해서 상세하게 늘어놓는 타입이 아니어서… 그냥 이야기가 잘되었다고만,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기실 내가 들은 것이 그 정도가 전부였지만, 그보다 나는 좀 더 순진한 척을 해 주었다. 옆자리의 남자는 내게 일러 줄 것이 있어 부러 나를 먼젓번의 세단 안에서 빼내어 온 것이었다.
“길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니 지금부터는 둘러말하지 않겠습니다.”
머저리 같은 내가 만족스럽다는 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는 차창 밖으로 눈길을 줘 어디쯤 지나고 있는가를 확인했다. 그리고 사뭇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차분히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겠지만, 무진이 녀석 조만간 본사로 공식적인 발령이 날 겁니다. 계열사가 아닌 케이엠 그룹 본사의 전무이사, 그 직급에서 시작하지요. 그리고 내후년에 회장님이 경영에서 은퇴하시면 저나 작은아버지 둘 중 하나가 회장직에 오를 테고, 부사장 자리를 놓고 무진이와 둘째가 경합할 겁니다. 그런데 둘째는…….”
“…….”
둘째, 그러니까 차남에 대한 설명을 잇는 도중엔 언뜻 내 기색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내게 닥쳤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무언의 위로의 시간인 셈일 테다. 나는 모른 척했고, 그 또한 자연스레 말을 덧이었다.
“아시겠지만 둘째는 지금 금융계열사 대표이사로 나가 있는 상태이고, 근본적으로는 순한 성향이지만 둘째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본사의 자리가 탐이 날 테지요. 무진이 생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그 녀석은 둘째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가지려 하는 것까지 모두 빼앗을 거예요. 장남 되는 입장에선 정직하게 경쟁해서 어떤 식으로든 발전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해요. 다만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무진이가 좀 더 열심히 해 줬으면 합니다.”
“…왜죠?”
“그 녀석은 선천적으로 투사 기질이 강하거든. 곁에 두면 천군만마지만, 적으로 두면 골치 아픈 타입이지요. 게다가 둘째한테는 지금 어머님이 든든한 벽이 되어 주실 테니, 정직하게 겨루려면 나는 무진이 손을 들어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장남 입장에서 손아래 두 형제들 간의 정직한 경쟁을 위한다니, 자칫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 안쪽의 연약한 살을 잘근 물며 나는 애써 얼굴의 근육을 단단하게 유지했다.
케이엠의 삼 형제가 모두 배가 다르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장남의 친모가 일찍 돌아가시고, 그러니 현재 케이엠의 안방마님은 둘째의 친모인데, 본사 지분의 무시 못 할 정도가 그쪽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 또한 어림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재벌가의 자리싸움에는 부모 형제가 없는데, 하물며 반쪽짜리 피붙이라면 남자의 말대로 천군만마 혹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현재의 노(老)회장이 경영 은퇴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장남이 무진의 손을 붙잡은 것은 상부상조의 미덕보다는 진퇴양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그들의 협상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과거의 일에도,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내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 무진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더 깊이 알아야 했다. 내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상황은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둘러말하지 마시고, 절 여기에 태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해 주세요.”
무릎 위에 편안히 올린 두 주먹을 빤히 내려다보며 나는 관조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러했다 생각했는데, 막상 객관적으로 들리는 내 목소리는 조금 공격적인 느낌이었다.
남자 역시 그런 내 어투에 조금 놀란 듯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온화한 미소를 띠며 ‘예.’ 하고 말을 이었다.
“회장님, 말씀을 조금 모질게 하십니다. 기본적으로 엄격한 아버지이자 리더 타입이시거든요.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말했듯이 무진이는 케이엠 본사의 전무이사로 시작합니다. 그 후로는 원하는 걸 가질 테지요. 말하고자 하는 건 이겁니다, 여승재 씨, 취하고자 하는 걸 모두 취하세요, 마음껏. 대신 그러기 위해선 절대 여승재 씨가 먼저 무진이 녀석 손을 놓지는 말라는 겁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죠?”
기껏 형제간의 치열한 자리다툼을 발판으로 깔아 놓고선 결론은 둘이 절대 헤어지지 말라는 따위의 보송보송한 이야기에 맥이 빠졌다. 연기자를 키우는 일을 하지만 막상 나는 연기에 능숙하지 못했다. 한심해하는 낯빛을 숨기지 않고 묻자, 남자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무진이를 곧바로 본사 전무이사로 들이려는 걸 알고 항간에서는 녀석이 지분 얼마를 제게 떼어 줬다는 소문이 무성하더군요. 사실이 아닙니다. 다만 약속을 하나 했지요. 그 약속이 바로 여승재 씨예요.”
나를 약속했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친절한 학습지도교사처럼 다정하게 덧붙여 주었다.
“여승재 씨가 계속 무진이 곁에 있어 준다면, 저도 안심하고 녀석과 공생할 수 있겠지요.”
“…….”
순간 푸른색 피가 머리를 차게 식혔다. 가진 것 없는 천애 고아, 하물며 자궁조차 없어 후사를 보지도 못하는 밋밋한 사내놈. 그게 내가 가진 타이틀이자 무진의 약점이며 케이엠 장남의 안전장치였다.
나는 또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협상 테이블의 부비트랩 정도는 되는 줄 알고 자칫 교만해질 뻔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냥 의자나 옷걸이였다. 그런 내 처지를 비관해야 할지, 차라리 다행이다 해야 할지, 그저 비실비실 웃음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훗날을 생각해 보아도, 이편이 지금의 저와 작은아버지… 그리고 어머님 사이처럼 서먹서먹한 관계를 만들어 내지 않을 테고요. 저는 우리 가족과 무진이, 그리고 여승재 씨 또한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내와 아이들은 포용력이 넓거든요.”
이제야 내가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했다 생각했는지, 그는 마음껏 떠들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관대함에 도취된 듯 내 친아버지나 친형처럼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마주한 채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는 관용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폭력적이며 보수적인 공격성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무진이 맞았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다수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지략적인 로맨티스트시군요, 아니, 로맨틱한 지략가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비식 웃으며 그를 평했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은 비겁하다는 의미였다. 남자는 그리 기분 상하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온전한 로맨티스트가 아니어서 실망했어요?”
“아니요, 로맨티스트와는 별로 상성이 맞지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다 왔군요. 난 다른 곳에서 선약이 있어 이대로 다시 출발할 예정입니다. 자, 내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본사 사옥 후문 앞에서 차는 멈추어 섰다. 기사가 내려 뒷좌석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직접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문을 닫기 직전, 안쪽의 그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밖을 향해 올려다보며 온화하게 말했다.
“회장님 앞에서는 적절히 조절을 해요. 회장님은 상대가 주눅 든 것보단 차라리 당돌한 편을 더 좋아하시지만, 어린 사람이 너무 뻗대는 건 또 예의가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무진이 손을 잡았다는 걸 아시니 회장님도 여승재 씨한테 너무 강압적으로 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뒷말이 숨겨져 있었다. 왜 다들 내가 결국은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할까.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기센 사람들 틈에서 생활하다 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그리 겁먹고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릴 필요는 없었다. 상대가 만만찮을수록 더 억누르고 싶어 하는 그네들의 욕심과 욕망은 이미 무진을 통해서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오히려 좀 더 온순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을 얼굴에 잘 펴 바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담담했다. 로비에 들어서기 전 줄곧 뒤따라온 중년 남자가 회전문을 먼저 밀고 들어가며 앞장을 섰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간부급 집무실이 있는 상층에 도착해 복도의 호화로운 카펫을 밟으면서 남자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나를 힐긋거렸다.
나는 회장 집무실이 아닌 임원 접견실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 준 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중년 남자는 곧바로 문을 닫고 물러났다.
소파에 앉아 있던 회장은 안쪽으로 들어서는 내게 짧은 눈길을 주곤 이내 다시 손바닥 위에 얹은 아이패드로 시선을 내렸다.
“…….”
이름을 말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필요 없다 생각되었다. 회장은 신기한 장난감을 처음 만져 보는 어린아이처럼 골몰한 얼굴을 하고선 신중하고도 순진스러운 태도로 태블릿 컴퓨터의 액정화면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저 손으로 야구 배트를 붙잡고 당일 약혼을 파기한 무진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상상하자니 어쩐지 우스워졌다. 하긴,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외양은 아이패드가 아니라 차라리 야구 배트에 더 잘 어울렸다.
“신기한 물건이지.”
말없이 맞은편에 오도카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노회장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만지고 있는 기기에 대해 문득 말을 꺼내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IT 산업의 주도권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넘어갔다는 주요 지표야. 통신에서 콘텐츠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말할 것도 없지.”
기껏 한 입 거리도 되지 않는 나를 불러다 놓고 대단한 패악을 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진의 큰형이 걱정한 만큼 노회장은 특별히 강압적으로 나를 다루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맞은편에 앉은 내게 힐긋 눈길을 맞추기도 하며 국내의 폐쇄적인 정보유통 환경이나 게으른 인프라 개발 등의 문제점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스티브 잡스 개인에 대한 사견을 내놓기도 했다.
나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그저 신중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반응을 했다. 마치 내가 케이엠 그룹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후보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회장이 사심 없이 화장실 청소부를 앞에다 두고도 흥얼거리며 떠들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본론은 기습적이었다.
“어지간히 구슬리고 위협을 한대도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그 난리들을 피우고도 다시 붙어먹는 위인들이니 말이야.”
“…….”
한참을 태블릿 컴퓨터에 대해 떠들다가, 표정이나 어조의 어떤 변화도 없이 노회장은 돌연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뜬금없다 생각될 만큼 갑작스러웠지만, 미리 장남으로부터 잠잠히 계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내미시는 타입이라는 설명을 들었던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회장이 십여 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져, 기분이 조금 착잡해지기는 했다.
내가 아무 대답 없이 무감각한 얼굴로 눈만 끔벅이고 있자, 노회장은 내내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나를 직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삼남 중 그를 가장 닮은 이는 무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무진인 첫째한테 손을 내밀었다지. 왜 자식들은 부모 속을 썩이는 나쁜 쪽으로만 똘똘 뭉치는지 모르겠어. …그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다 알아. 하지만 조직의 발전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지. 무진이가 내친 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도 없을 거야.”
“…….”
“허락도 없이 맞은편에 와 앉는 걸 보니 겁이 없는가 보군. 좋아,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 얻을 수 있다 생각하는 최고치를 말이야.”
노회장은 내 깊이를 가늠해 보겠다는 듯 눈살을 가늘게 뜬 채 물끄러미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어두운 우물의 바닥이 어디쯤인지는 스스로도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머릿속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둥글게 파문이 일고, 나는 그의 앞에 놓인 아이패드를 빤히 쳐다보며 서늘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는 무진이가 옆에 있으라고 하면 계속 있고, 가라고 하면 갈 겁니다.”
“…….”
회장은 바다와 강을 착각하고 도착한 사공처럼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이가 들어 숱이 적어진 옅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가만 쳐다보기에, 나 역시 고개를 들어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이내 노회장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끌끌 웃었다. 역시 뜬금없다 생각되었다.
“이걸 가져가. 재미있는 물건이니 가지고 놀아 봐.”
그리고 문득 테이블 위에서 아이패드를 내 쪽으로 슥 밀어내며 호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지루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나중에, 무진이가 가라고 할 때, 위로금으로 받겠습니다.”
한지 공예품 등으로 장식된 접견실 내벽이 노회장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로 파르라니 떨렸다. 나도 따라 웃고 싶었지만, 입매가 좀처럼 휘어지지 않았다.
‡ ‡ ‡
‘필요한 거 다 골라.’
대형 할인 매장을 통째로 떠안겨 줄 것 같은 기세로 무진이 말했다. 나는 쭈뼛대며 카트를 밀었다. 그리고 휴지나 주방세제 등의 생필품을 고르는데, 문득 그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무진이 빈 카트를 들들들 전투적으로 타고 달려왔다.
‘그러지 마, 물건 쌓아 둔 거 박을 거야.’
‘시이―러.’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타박을 하면, 그는 말 안 듣는 개구쟁이처럼 쌩하니 앞을 지나가며 노래를 부르듯 미운 대꾸를 했다.
부루퉁한 얼굴로 쯧 혀를 차면서도 나는 그런 그가 조금 귀엽다 생각했다. 나보다 머리통은 하나 더 있는 그가 귀엽다니, 스스로도 기가 막혔다.
늦은 밤의 대형 할인 매장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무진은 곧잘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 문득 사라져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획 하니 앞을 지나가며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속력으로 카트를 밀고 달려가 그에게 엎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와 부딪쳐 폭발하고 싶었다, 죽어 버리고 싶었다.
‘…죽을래?’
열뜬 얼굴을 거북이처럼 목 안으로 집어넣은 채 눈만 댕그라니 치켜뜨며 소심하게 속삭이면, 사나운 얼굴의 그는 또 어느새 바짝 다가와 이마를 맞댄 채―
‘죽을라고.’
위협적으로 뇌까린 뒤,
‘이렇게 하는 거야.’
덧붙이며 또 씨익 웃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얼른 카트를 밀고 식료품 칸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마른 김과 단무지 등을 골라 카트에 담고 있으면, 또 어느새 뒤를 따라붙은 무진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관심을 기울이곤 물어 왔다.
‘뭘 사는 거지?’
‘…김밥, 싸 볼까 해서.’
‘흐흥,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어?’
‘저녁에 할머니하고 같이 준비해 놓으면, 새벽에 팔러 나가시니까.’
‘아아.’
내 의기소침한 대답에 무진은 게으른 짐승처럼 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지고 놀던 빈 카트를 아무렇게나 버려 두곤, 냉동고에서 달걀 등을 고르는 내 등 뒤로 달싹 달라붙어 어깨 위에 턱을 얹었다.
‘저리 가, 사람들이 봐.’
어깨를 흔들며 떼어 내려 하면, 그는 악귀처럼 더 바짝 들러붙어 내 목덜미에 코를 비벼 댔다.
‘괜찮아, 형제라고 하면 돼.’
‘…하나도 안 닮았어.’
‘그러면 부부라고 하면 돼.’
‘…네가 여자 해.’
손끝으로 콧등을 비비며 하는 내 대답에 무진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요란하게 웃어 댔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나는 얼른 카트를 밀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여―로 시작하는 말이 뭐가 있지?’
그리고 두 손 가득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쓸데없는 말을 상대해야 했다. 그는 내가 곤혹스러워하는 꼴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마였다.
‘여승재.’
‘그거 말고.’
‘여기요.’
‘하여튼 병신.’
‘…….’
나는 도무지 순식간에 패악질과 낯간지러운 짓을 번갈아 하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 재미없는 나를 금세 질려 할까 겁이 났다.
‘여권 커플 왔다아―.’
그리고 시간관념이란 것이 없는 바보들은 시시때때로 오피스텔로 몰려왔다. 녀석들은 무진과 나의 성씨를 따서 우스꽝스럽게 하나로 묶어 불렀는데, 나는 무진이 녀석들을 혼내 주었으면 싶었지만 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아지트를 빼앗은 건 내 쪽이어서, 거추장스럽게 놀려 대도 조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김밥 만들 거야? 잘됐다, 우리 배고파.’
호기심 많은 제홍이 내가 든 비닐봉지를 덥석 낚아채며 안을 살피곤 재잘거리자, 석운과 찬성이 덩달아 ‘배고프다―.’ 하고 말을 맞추었다.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안으로 들어가면, 뒤에서 무진이 녀석들을 발로 걷어차며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재료는 조촐했다. 마른 김과 참기름에 양념한 흰 밥, 단무지, 그리고 볶은 햄. 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준비한 재료들을 늘어뜨려 놓자, 녀석들이 조르르 앞에 와 앉았다.
‘이게 다야? 이걸로 김밥이 나와?’
‘씨발 새끼야, 넌 먹지 마.’
시큰둥한 얼굴로 찬성이 초라한 재료에 불만을 터트리자, 여지없이 무진이 녀석을 발로 걷어차며 잠시 소란을 피웠다.
상관 않고, 나는 묵묵히 대나무 발 위에 마른 김을 한 장 깔고 흰 밥을 판판하게 펼쳤다. 이어 단무지와 햄을 한 줄씩 올리고, 비장한 얼굴로 대나무 발을 돌돌 말아 길쭉한 타원형의 김밥을 만들어 냈다.
그에 네 명의 바보들이 일제히 ‘우와―’ 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면 나는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히쭉거리는 입매를 힘주어 꼭 다문 채 순식간에 재료를 다 써서 김밥을 몇 줄씩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맛있어! 맛있다! 고작 이런 게 맛있어!’
초라한 재료에 불만을 터트렸던 찬성은 썰어 준 것을 하나 입에 넣어 우물거려 보곤, 신대륙이나 발견한 것 같은 얼굴로 떠들어 댔다. 그러다 결국 무진에게 다시 걷어차이곤 했다.
‘김밥 파티다!’
24시간 내내 취한 것처럼 들떠 있는 제홍이 어느새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어 와선, 신이 난 목소리로 외치며 페트병을 위아래로 힘껏 흔들어 곧바로 뚜껑을 열었다.
‘으아아! 뭐야! 저리 가! 역류하잖아!’
온 집 안이 솟구치는 콜라 분수로 엉망이 되었다. 얌전한 석운까지 질색한 얼굴로 그것을 피해 뛰어다니고, 녀석들의 소란에 쌓아 둔 김밥 또한 다 짓밟혀 먹지 못하게 되었다.
‘아하하하!’
그러나 나는 고작 그런 것이 웃기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크게 소리 내어 웃어 본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내가 웃는 것을 본 제홍은 더 신이 나 페트병을 흔들고, 무진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을 헤벌려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이런 게 좋은 거야?’
가까이 다가온 그가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로도 힉힉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많이 웃어서 눈물이 다 고였다. 무진이 손끝으로 그런 내 눈가를 슥 누르며 닦아 주었다.
‘…….’
그리고 웃음이 멎었다. 문득 정말 울고 싶어졌다. 가슴을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뱉자, 내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던 무진이 곧장 내 뒤통수를 끌어당기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뒤에서 세 녀석들이 우우― 하고 야유를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축축한 혀를 섞으며 눈을 감아 버렸다.
‡ ‡ ‡
“하아……!”
물에서 막 건져져 나온 것처럼 급한 숨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뜨자, 블라인드가 올라간 정면의 창문 너머로 아스라한 그믐달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두통으로 곧바로 집에 들어와 타이레놀을 삼키고 잠이 들었던 터였다.
“…야.”
벽시계를 확인하니 무진이 들어왔을 시간이었다. 보통 내가 잠이 들었어도 서재로 들어가지 않고 침대 근처의 소파에서 남은 일거리를 처리하던 그였다.
그러나 소파는 비어 있었고, 평소처럼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가지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은 채 나는 무뚝뚝한 투로 몇 번이나 ‘야, 야.’ 하고 그를 불러 찾았다.
“…….”
그는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지 않았다. 멀리서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가 긴 여운을 남기며 들려올 뿐이었다. 주저하다 결국 ‘권무진.’ 이름을 불렀지만, 역시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는데, 순간 무섬증이 일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는데, 이제는 아예 지구 밖으로 내던져져 우주미아까지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 무진아… 권무진… 무진아…!”
익히 알고 있었다, 내게 그가 없는 삶이란 중력도 없이 아득히 추락하는 것과 같았다. 꼭 쥐고 있었던 시트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흘려 버리고 나는 ‘엄마’를 부르듯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외쳐 불렀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숨이 가쁘게 터져 나왔다.
“무진아!”
정신이 나가 옷장 안까지 뒤지며 발을 굴렀다. 그리고 기어이 욕실 안까지 들어가 살피는데, 문득 주방 쪽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발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 보자, 식탁 위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무진이 노트북 화면을 골똘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먼저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뭐 해?”
“아, 출출해서. 국수 해 먹을까 해서. 너도 좀 먹을래?”
그는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태연히 대답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가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따지듯 묻자, 무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듯 입술을 꼭 말아 문 채 그러나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큭큭거렸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내가 머저리처럼 그를 몇 번이고 외쳐 부른 것을 다 알고 있는 꼴이었다.
“웃지 마, 못 들었느냐 말이야.”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씩씩대며 물었지만, 무진은 여전히 노트북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키들거리며 웃었다. 그러곤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뜬금없는 말을 지껄인다.
“여승재, 내가 너 사랑한대.”
“…뭐?”
“아, 아니다. 98점 넘었으니까…… 집착한다는데? 뭐야, 기분 나쁜데 이거.”
“…….”
노트북으로 이상한 걸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게 무어냐 묻지 않았다. 그저 냉장고에서 찬 생수를 꺼내어 벌컥벌컥 마시고, 생수통을 얼굴에 문지르며 열을 식혔다.
그동안 무진은 또 무얼 보는지 혼자 ‘흐흥.’ 하고 짧게 웃으며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냄비에서는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나머지 세 녀석들은? 지석운이랑… 제홍이, 현찬성, 그놈들 말이야.”
생수통의 한 단면을 이마에 갖다 댄 채 나는 웅얼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제야 무진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엉뚱하다 타박하듯 슬쩍 눈썹을 모아 찌푸린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내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홍은 지금 홍콩지사 가 있고, 지는 독일에…… 아니다, 둘이 바뀌었나…… 어쨌든 그 둘은 지금 외국 나가 있어. 지는 다음 달에 귀국한다고 했고, 찬은 한국에 있어. 이전에 창립기념 파티에도 참석했었어, 그쪽은 너 봤다던데,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인사하려다 말았다더라. …아, 지 귀국하면 다 같이 한번 보자고 했어. 그놈들 너 보면 까무러칠 거다. 아직 우리 같이 사는 거 모르거든.”
“…응….”
그가 녀석들을 예전처럼 이름을 짧게 줄인 애칭으로 부르는 것에 묘한 감흥이 일었다. 그건 나를 슬프게 하기까지 했다. 내가 망쳐 버린 그 시간들이 안타깝고 아까워서 몸속이 다 바싹 말라 버릴 것 같았다.
닫았던 생수통 뚜껑을 다시 돌려 열고 남은 물을 모두 꿀꺽꿀꺽 마셔 버리자, 냄비에 소면을 넣던 무진이 힐긋 뒤를 돌아보며 ‘물배 채우지 마.’ 했다. 그리고 레버를 돌려 불 조절을 하며 ‘너 오늘―’ 하고 말을 잇는다.
“영감한테 불려 갔다며.”
“…….”
“이승현이 내 아랫사람인데 그럼 네 말을 듣겠냐? 내 말을 듣지.”
“…나, 네 백 믿고 좀 까불었어.”
“잘했어.”
“난 너하고 자장면 먹기 싫어.”
가벼운 어투로 대꾸한 그는 이어 내가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자, 황당함이 고스란히 묻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국수 만드는 거라니까, 저번에 같이 먹은 거. 난 자장면 못 만들어.”
“다 먹고 난 자장면 그릇처럼… 너하고 그러기 싫어.”
“…면이 싫은 거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어 온 그는 내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레버를 돌려 불을 꺼 버렸다. 그리고 한번 설명해 보라는 듯 내 앞으로 온전히 돌아선 채 헐렁한 실내복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나는 다시 한번 꼴깍 침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나 너 믿고, 까불었단 말이야.”
“…….”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네가 제일 약해. 제일 힘센 사람들 앞에서 내가 우스운 짓 한 거야. …난 네가 제일 힘이 세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무한테도 이용당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으면… 우리가 지금 스물넷, 스물여섯 정도였으면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거야.”
가쁜 호흡에 턱을 조금 들어 올려 뻔뻔해진 얼굴로 말하자, 달리 해석했는지 금세 사나워진 얼굴로 무진이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와서며 으르렁댔다.
“여승재, 너 허튼 생각 하면 가만 안―”
“나는 정부 같은 거 돼도 좋아, 괜찮아.”
“…뭐?”
그러나 나는 그의 뒷말을 가로막으며 곧장 서럽고 호기로운 말을 꺼내었다. 무진은 어린애처럼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두 손을 호주머니에서 덜렁 빼내었다. 나는 가슴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대단한 집 여자랑 결혼하고, 애를 열 명 정도 낳아도 괜찮고… 그리고 가끔 나한테 와도… 그냥 와서 얼굴만 보고 가도 되고, 좀 그런 기분 들면 자고 가도 되고, 나는 그 정도라도 괜찮을―”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어느새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선 무진이 뒷말을 자르며 선뜩하게 질책했다. 그리고 대뜸 내 뒷덜미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뒤통수에 소름이 돋았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퍼뜩 고개를 숙이자, 그는 잡은 내 뒷덜미를 끌어올리며 쿵― 하고 서로의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죽을라고.”
작게 속삭여 위협하곤, 턱을 내밀어 입술 끝을 슬쩍 부딪쳐 왔다. 찰나였다. 나는 허겁지겁 그의 혀를 핥으려 했지만, 무진은 금방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마른 코를 훌쩍이는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이곤 ‘나가자.’ 하고 손목을 잡아끌었다.
“면 싫어하면 미리 말했어야 할 거 아냐. …냉장고가 텅텅 비었어. 늦었으니까 대충 편의점이라도 가자고.”
나는 발을 끌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물이 끓었다. 가스레인지 불을 껐던가 싶어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는데,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신발 신어.”
먼저 현관에 나가 신발을 구겨 신은 채 무진이 말했다.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가 시키는 대로 아무 신발에다 발을 구겨 넣었다. 그의 것이었는지, 컸다.
제자리에서 달가닥거리며 몇 번 발을 움직이자 무진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가선 채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잡아, 어서.”
“…큰 데 가고 싶어.”
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한 채 나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응? 하고 무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말했다.
“대형 할인 매장… 아직 문 열었을 건데.”
“아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알아들었다는 듯 무진이 게으른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은 여전히 내 앞으로 내밀어진 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로 손끝을 얹었다. 그는 곧장 손바닥을 미끄러뜨려 내 손목을 답삭 움켜잡았다. 나는 이제 집 안에서는 손목시계를 풀어 둘 만큼의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가지 뭐. 필요한 거 다 골라.”
탕, 등 뒤로 문을 닫으며 그가 거만한 투로 말했다. 참기 힘들 만큼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무진은 내 손목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힐긋 고개를 돌린 채 어둠 속에서 씩 웃어 보였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와락 엎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