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불안하고 불온한-3 (21/41)

계절에 맞는 옷가지는 전부 열차에 두고 내린 짐 가방에 넣었던 터라, 챙길 만한 것이 없었다. 무진은 또다시 내 속옷이 들었다는 가방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주장했다.

허튼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묵묵히 배낭 안으로 당분간 입을 만한 옷을 구겨 넣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 짐을 다 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네 몸 하나만 와도 돼. 꼭 필요한 것만 챙기고.”

역시 옆에서 집 안을 둘러보다 막막했는지 무진이 덧붙여 말했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벽면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서류함을 향해 손짓해 가리켰다. 무진은 뜨악한 얼굴로 물었다.

“저거 다, 말이야?”

“응. 회사 소속 연예인들 관련 자료 다 들었어. 언제 갑자기 필요할지 모르니까 갖고 가야 돼. 저것 말고 노트북이랑 외장 하드도 챙기고…….”

그리고 주절주절 ‘꼭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읊는 나를 가만 지켜보다가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아, 잠깐 올라와야겠어.”

잠시 후 운전대를 잡고 대기하고 있었을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무진은 그에게 대뜸 서류함 박스를 떠안기며 ‘내려가.’ 명령했다.

남자가 군소리 없이 곧장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며 나는 배낭을 메고 외장 하드를 챙겨 든 채 무진을 향해 눈짓을 주었지만, 그는 씩 웃으며 ‘알았어, 알았어.’ 이상한 대꾸를 했다. 내가 빨리 가자 재촉하는 것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속옷.”

그리고 마침내 현관을 나서는데, 문득 옷가지는 챙기면서 속옷은 넣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속옷? 무진이 질 나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뒤가 의심스러워 그냥 새로 사겠다 했지만, 이미 양손에 노트북과 묵직한 서류함을 든 채로 그는 한사코 자신이 가져오겠다 고집을 부렸다.

“너 호주머니 검사할 거야.”

결국 먼저 밖으로 나서며 경고를 주었지만, 그는 어느새 발길을 되돌려 옷장을 뒤지며 ‘응.’ 대답할 뿐이었다. 행여 내 속옷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한다 하더라도, 캐내어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나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마침 운전기사가 승용차 뒷트렁크에 서류함 박스를 싣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는 얼른 트렁크를 닫고 앞자리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보조석으로 배낭을 벗어 놓고 직접 문을 밀어 닫으며 나는 그를 향해 형식적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에 남자는 자로 잰 듯 정직한 각도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으로 가까운 곳에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은 대단히 단정해서, 홈쇼핑의 남성 속옷 광고에서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혹은 젊은 아나운서 타입으로, 만약 데뷔했다면 중년 여성층에게 꽤 인기를 끌었을 것이었다.

“더 남은 것 있습니까?”

직업병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히 전체를 훑는데,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는 위쪽으로 짧은 눈짓을 주며 물었다.

“아, 아니요, 곧바로 내려올 겁니다.”

그리고 곧장 올라가려는 듯 걸음을 옮기는 남자를, 급한 마음에 나는 옷깃까지 붙잡으며 말렸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진이 내 속옷을 챙기며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알았다는 듯 남자는 또 한 번 짧게 고개를 까딱이곤 무진을 기다리는 듯 현관 앞에 대기해 섰다. 혼자 차 안으로 들어가 있을 수 없어서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서자, 남자는 온화한 인상으로 버릇처럼 또 고개를 짤깍였다. 이렇게 인사성 바른 사람과는 조금 어색하다.

“이런 일까지 시켜서 미안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덩달아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아 늦은 인사 겸 사과를 하자, 역시 FM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쨌든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 이름 정도는 터놓고 지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쭈뼛대며 용기를 내 보았다.

“…여승재라고 합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이번에도 단정한 얼굴을 끄덕이며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무안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해서 그저 ‘아…’ 하고 따라 고개를 끄덕였는데, 스스로 무례했다고 생각했는지 남자는 조금 정색한 얼굴로 내 앞으로 돌아서며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해 왔다.

“아, 이승현이라고 합니다. 권 대표님 개인 업무를 총괄해 스케줄 관리와 함께 여러모로 모시고 있습니다. 종종 뵐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 운전만 하시는 게 아니었군요. 그러니까, 매니저 격이군요.”

스케줄 관리라니, 반가운 마음에 기색을 밝히며 대꾸하자 남자는 조금 곤란해하는 낯빛으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감히 매니저까지는 아니고… 보통은 비서라고 소개가 됩니다.”

아아, 멍청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정한 얼굴로 웃으며 ‘예.’ 마무리를 지었다. 덩달아 씩 웃어 보이는데,

“뭐야.”

마침 건물 안에서 뚜벅 걸어 나오던 무진이 시큰둥한 얼굴로 따지듯 짧게 물어 왔다. 비서가 얼른 그의 손에 들린 노트북 등을 옮겨 들고 차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나는 다시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가.”

“둘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무슨 얘길 나누고 있었냐고.”

“그냥 인사.”

“새삼스럽게 무슨 인사.”

“이름은 모르잖아. 그리고 싱글벙글 웃지는 않았어.”

“넌 내 앞에선 싱글, 하고도 웃지 않잖아. 그리고 둘이 서로 이름 알아서 뭐, 어디에 쓸 건데. 필요 없잖아,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

시비를 걸듯 바짝 다가와 선 채 몰아붙이는 것에 기가 막혔다. 더욱이, 우리보다 두어 살은 어려 보이는 데다 직책에 대한 프라이드까지 있어 보이는 이에게 그냥 아저씨라 부르라는 말에는, 내가 더 미안해져 슬그머니 비서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남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묵묵히 내 짐을 뒷좌석에 챙겨 넣고 곧바로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넌 왜 항상 적을 만들지?”

한심스러운 기분으로 곧장 발길을 돌리며 빠르게 속삭여 묻자, 역시 바짝 쫓아오며 내 팔꿈치를 붙잡은 채 무진은 전투적으로 으르렁 대답했다.

“난 세상이 다 적이야. 나 자신, 그리고 너, 둘 빼고.”

“…….”

그리고 내가 무어라 대꾸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동안, 앞질러 먼저 차 안으로 훌쩍 올라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주저하며 그의 옆자리에 올라타 앉았다. 슬금 곁눈을 주었지만, 무진은 시무룩한 얼굴로 앞좌석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출발한 차가 과속방지턱에 걸려 조금 덜컹거리자, 이때다 하고 곧장 앞좌석을 발로 텅! 걷어차며 잔소리를 했다.

“운전 똑바로 해.”

“죄송합니다.”

비서는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측은해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핀트 잘못 맞췄어.”

창턱에 팔을 괸 채 나는 조용히 말을 걸었다. 무진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뭐?’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는 냉랭하게 대꾸했다.

“너 지금 성질 낼 타이밍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너 성질 죽이기로 했어. 이렇게 유치하게 나와도 나 너랑 같이 안 살아.”

“…응.”

온순한 대꾸에 고개를 돌려보자, 그는 무얼 잔뜩 참는 듯 얼굴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그러곤 절대 조련되지 않을 야생의 새카만 눈빛으로 나를 빤히 응시해 오다가, 돌연 손을 뻗어 내 한쪽 팔뚝을 와락 움켜잡곤 옆으로 획 잡아당긴다.

“아…….”

가죽 시트 위로 주룩 미끄러지며 그와 바짝 닿아 앉은 채 나는 와락 덮쳐 오는 그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듯 먼저 입술을 벌려 주었다.

그런데도 무진은 내 턱을 아프게 움켜잡은 채 다급하게 입술을 핥고 혀를 빨아 댔다. 쪽, 쪽,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났다. 나는 그것이 정복에 대한 과시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바보 같으니, 그의 윗입술을 잘근거리며 나는 웅얼거렸다. 흐흥, 무진은 나른하게 웃었다. 여승재 타락했어, 김 실장이 차체 천장에 붙어 반복해 말했다. 알아요, 혀를 움직였다.

‡ ‡ ‡

“여승재 요즘 타락했어.”

“…….”

“라고, 우울증 걸린 것 같은 얼굴로 김 실장님이 말씀하시더라.”

가방 안에서 뜨끈뜨끈해진 오렌지 하나를 꺼내어 내게 획 하니 던지며 현준이 말했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두 손을 급히 머리 위로 뻗으며 받아 냈다. 아쉽다는 듯 녀석은 입술을 삐죽였다.

회사 명의의 오피스텔인 만큼, 군복무 동안에는―제대 후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까지 대비해― 집을 비워야 했다. 현준이 계약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회사에 들렀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러나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김 실장의 전하는 말에, 짐이 빠지는 오피스텔에 들러 대신 힘쓰는 일이나 돕자 싶어 걸음 한 것이었다.

기본적인 가구는 역시 회사 소유의 물건으로, 빠지는 짐이라고 해 봤자 현준의 개인 물건들이었다. 직접 손을 걷고 이사 박스에 옷가지 등을 챙겨 넣고 녀석의 고향 집 주소로 보낸 후, 어쩐지 휑해진 집 안을 둘러보고 있는데 문득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여전히 청명한 얼굴의 녀석이 신발을 신은 채 뚜벅 안으로 들어와선,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뜬금없이 김 실장의 근래 십팔번을 읊는 것이었다.

“아예 대놓고 뻔뻔해지기로 했어? 생기 있는 얼굴인데, 감히 그런 얼굴로 내 앞에 나타나?”

가방 안에서 오렌지를 하나 더 꺼내어 직접 손으로 두꺼운 껍질을 까며 현준이 시비조로 따져 물었다. 꽤 요령 좋게 기껏 깔끔하게 까 낸 껍질을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휙휙 던지는 것을 무심히 쳐다보며 나는 조용히 반박했다.

“…내가 먼저 왔어.”

“당신, 부숴 버릴 거야.”

“…….”

녀석은 오래전 유행했던 드라마의 대사를 읊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눈살을 가늘게 뜬 채 오렌지 한 조각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 것에,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런 나를 보며 재미없다는 듯 현준은 ‘흥’ 콧방귀를 뀌고는 털썩 소파 한쪽으로 와 앉아, 남은 오렌지 껍질을 까며 주절주절 떠들었다.

“어때, 복수의 화신처럼 보여? 나쁜 남자, 그거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처음엔 쿨하게 보내 주고 싶었는데, 내가 뒤끝이 좀 있는 것 같아. 이번 기회에 내 그런 성향을 깨달았지 뭐야.”

“그래도 대외적으론 아직 네 매니저로 있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만나기 싫으니 나오지 마라 그러면 회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무뚝뚝한 얼굴로 잔소리를 하자, 녀석은 억울하다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따지고 들었다.

“형은, 내가 그렇게 간다는데 잡는 시늉도 안 하고, 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전화 한 통도 안 했잖아.”

“…그거야, 네가 내 전화 안 받을 것 같아서… 그러는 너도 쌍둥이들이랑 케이한테만 연락하고 나한테는 전화 한 통 안 한 건 마찬가지잖아.”

“…….”

져 주지 않고 같은 식으로 따져 묻자, 현준은 쩝 입맛을 다시며 외딴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른스럽지 못했다, 어린애들처럼 서로 네 탓만 하며 투덕거린 꼴이 부끄러워 나도 괜스레 그에게 받은 오렌지를 손톱으로 꾹 눌러 서툴게 껍질을 벗기며 딴청을 부렸다. 손톱으로 노란색 과즙이 울컥 스며들었다.

불편한 마음에 의식적으로 서로를 피한 것이었다. 그가 나를 보기 싫어한다는 말에 회사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며 다행이다 안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얼굴을 보니, 생각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마음을 다 가늠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심히 굴어야 했다. 전화는커녕 평생 내 얼굴 따위 보기 싫다 해도, 섭섭해하지 말아야 했다. 천천히 거리를 두며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 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군대는 내가 가는데 머리는 왜 형이 그렇게 짧게 자른 거야?”

과즙으로 흥건히 손을 적신 채 씁쓸한 얼굴로 형편없이 오렌지 껍질을 까고 있는 나를 다시 돌아보며 현준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쩌다 보니.”

“실연당해서라고 말해 주는 센스 같은 건 없지. 하여튼 융통성은 더럽게 없어. 저런 사람이 무슨 연예인 매니저야, 운동선수 담당이면 몰라.”

그리고 내 성의 없는 대답에 발끝을 까딱이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대꾸하며 비식 웃어 버리자, 녀석은 질색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과장되게 떠들었다.

“아, 얼굴 완전 생기발랄해 보여. 진짜 싫다, 짜증 나.”

“별로, 생기발랄 아니야. …넌 얼굴에 살 좀 올랐다. 보기 좋아.”

“퍼져서 생활하니까 뭐. …아아, 뭐 하는 거야, 대체. 손 다 젖었잖아. 이리 줘 봐.”

그리고 내가 하는 꼴을 빤히 지켜보다가 결국 답답하다는 듯 획 하니 손을 뻗어 엉망이 된 오렌지를 낚아채 갔다. 그러나 너덜너덜해진 것을 요령 좋게 껍질을 깔끔히 벗겨 내다 말고, 문득 실수했다는 듯 ‘아아―’ 하고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젖힌다.

“이게 아닌데……. 나쁜 남자 해야 된단 말이야, 씨이……. 자, 안 해 줄 거야.”

“…….”

“딱하다는 눈길로 보지 마.”

내 앞으로 껍질이 남은 오렌지를 도로 툭 놓아주는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현준은 콤플렉스 덩어리 인간처럼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안 봐.”

“거짓말.”

“그냥 있는 그대로 네 모습이 좋다고 생각했어.”

“…아, 또 저래.”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혼잣말을 하는 것에, 순간 내가 실수를 했나 싶었지만 달리 번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조금씩 정을 떼더라도, 굳이 상처를 줘 가며 억지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건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내 이기적인 마음인지도 몰랐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그래서, 김 실장님하고는 얘기 잘 끝났고?”

잠시의 침묵이 불편해, 나는 오렌지를 마저 까서 먹으며 화제를 돌려 물었다. 역시 남은 오렌지를 입안에 밀어 넣곤 현준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응. 재계약 건은 제대 후에 얘기하자 그랬어. 나도 그렇지만 회사 측에서도 그때 사정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까.”

“그래, 잘했어. …혼자서도 잘하네.”

손수건을 꺼내어 과즙으로 흥건해진 손을 닦으며 기특한 마음으로 대꾸했는데, 어디가 우스웠는지 현준이 갑자기 ‘으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요란스럽게 웃다가, 겨우 진정시키듯 ‘어후…,’ 하고 눈가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

“형 진짜 나 어린애로 보는구나?”

“…….”

남자로 보인 적도 있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그저 오렌지만 우걱우걱 씹어 먹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현준은 문득 치통을 앓고 있는 환자 같은 얼굴을 하곤 ‘형.’ 부르며 말을 이었다.

“형, 나 배고프다. 여기는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 되겠고… 밑에 내려가서 나 밥 좀 해 줄래?”

“…그냥 시켜 먹자. 쌀이 없을 것 같아.”

나는 주저하다 겨우 냉랭한 대답을 해 버렸다. 잠시 가만 눈을 깜빡이던 현준은 이내 씩 웃어 보이며 ‘응.’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흔적만 남은 복부 아래의 수술 자국 부근이 어쩐지 조금 아파 왔다.

그리고 우리는 자장면 두 그릇을 시켜 먹었다. 내가 그릇을 씌운 랩을 벗겨 내는 동안 현준은 테이블 위로 휴대폰을 반듯하게 놓곤, 요즘 즐겨듣고 있다는 음악 파일을 재생시켰다.

무언가 하고 귀를 기울여 보니, 녀석들의 데뷔 앨범이었다. 나는 배를 부여잡고 큭큭대며 웃었다. 현준은 뿌듯한 얼굴로 나무젓가락을 뜯었다.

식사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배가 고프다던 녀석은 평소 잘 먹지 않던 단무지까지 조금씩 씹어 먹으며 느긋하게 그릇을 비워 나갔다. 그동안 녀석들의 앳된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유쾌한 기분에 긴장이 흐트러져 버렸다. 나는 버릇처럼 힐긋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다 순간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못 보던 시계네.”

“아.”

“비싼 거 같다?”

이제 손목의 상흔을 애써 감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입장인 데다, 거의 한시도 빼놓지 않던 버릇에 빈 손목이 어쩐지 허전했다. 그런 내 기분을 먼저 눈치챈 무진이 마침 자신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것을 곧장 빼 준 것이었다.

“흥.”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왼손을 테이블 밑으로 슬그머니 내리며 단무지만 오독오독 씹어 먹고 있으니, 내 이마를 빤히 쏘아보던 현준이 노골적으로 콧방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또 나무젓가락을 쥐고 있는 내 오른손을 힐긋 턱짓으로 가리키며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거기, 손가락에 반지도 못 보던 건데.”

“아, 이건…….”

“흥.”

정혜주가 남기고 간 반지였다. 손목시계보다야 그에게는 더 떳떳한 물건이었지만, 그렇다고 녀석에게 모든 사정을 꺼내어 놓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어물거리며 답을 잇지 못하자, 그릇을 다 비운 현준은 테이블 위로 젓가락을 탁 놓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또 가방을 뒤져, 이번에는 오렌지 주스를 두 개 꺼내어 놓았다.

“원래 이렇게 산뜻한 이미지란 말이야, 내가.”

“응.”

자랑처럼 턱을 치켜들고 하는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녀석은 병뚜껑을 열어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곤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또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뒤끝 남겨서 미안한데, 그래도 궁금해서 밤잠이 안 와서 말이야. 물어보자, 예의 없고 막무가내에 사납기까지, 여승재가 딱 싫어하는 타입이잖아, 그 사람. 그런데 왜 좋은 거야? 사람 마음, 말로는 정리 안 되는 거 알아. 아는데, 그래도 뭔가 있을 거 아냐. 그러니까 그렇게 악다구니 쓰며 싫어하면서도 줄줄 흘리다 결국 넘어가 버린 거잖아.”

“…….”

녀석의 물음에 나는 ‘으음―’ 말을 끌다가, 시간을 벌기 위해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 뚜껑을 따고 입술로 주둥이를 붙이며 천천히 병을 기울였다.

그러다 기어이 입가로 주스를 조금 흘리고 말았다. 급히 손등으로 닦으며 나는 참 줄줄 흘리는 것도 많다, 생각했다.

같은 생각으로 당장 비웃을 줄 알았는데 현준은 진지한 얼굴로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돈이 많아서.”

“…….”

고심한 끝에 대답을 내놓고, 나는 남은 주스를 모두 꼴깍꼴깍 마셔 버렸다. 황당한 얼굴로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준은 갑자기 ‘큭’ 소리를 내는 것을 시작으로 우하하하! 요란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대로 선뜻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가려고……?”

“여승재 씨, 안 되는 임기응변으로 수고했다.”

부스스 따라 일어서며 묻는 말에 녀석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다른 대답을 했다. 역시 내 임기응변 실력은 최악인 듯했다.

시무룩해져 있는 내 어깨를 마지막으로 툭, 건드리며 현준은 여전히 옛날 노래가 나오고 있는 휴대폰을 챙겨 들고 발길을 돌렸다.

“아, 실장님한테 미리 말씀드리긴 했는데, 입대하는 날엔 형 나오지 마라. 그냥 기욱이 형이랑 김 실장님 대신 나와 달라고 했어. 그날만큼은 정말 형 얼굴 보기 싫어.”

“…응.”

“또 너무 쉽게 놔주네, 이 사람.”

투덜거리며 현관문을 여는 녀석을 보며 나는 또 어떤 대꾸를 해야 할까 생각하며 ‘음…….’ 말을 끌었다. 픽 웃으며 현준이 그런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형은 여기 마저 치우고 나와.”

“어, 그래야지.”

“먼저 갈게.”

“어, 가.”

“…….”

그리고 재미없는 대답만 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또, 그 치통을 앓는 환자 같은 얼굴을 설핏 띤 채 갑자기 내 멱살을 와락 붙들어 올렸다.

“아……!”

강하고 위협적인 힘이었다. 순식간에 벽에 밀쳐진 채로 한쪽으로 목이 꺾였다. 당황해 녀석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현준은 곧장 내 목덜미로 고개를 숙여 이를 박아 넣었다. 잘근 물어뜯긴 살집 위로 곧이어 위로처럼 혓바닥이 슥삭 스치고, 입술을 조여 피부를 아프게 흡입했다.

“아, 아파……!”

나는 온 힘으로 녀석의 어깨를 밀쳐 냈다. 덜컥 떠밀린 현준은 ‘후!’ 숨을 내쉬며 여유롭게 손등으로 제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너 정말 이럴……!”

“이건 내 마지막 발악이자, 그 무식한 아저씨한테 거는 테스트야.”

그리고 버럭 소리치는 내 뒷말을 자르며 태연히 대꾸했다. 기가 막혀 그저 따가운 목덜미 위로 손바닥을 덮은 채 얼굴을 구기며 쏘아보자, 녀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현관문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백일휴가 나와서 어쩌겠다는 거 농담 아니야. 사랑 없이도 그걸 한다, 그게 나쁜 남자 신조라던데. 기대해.”

그러곤 제대로 된 인사말도 없이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선, 집 안으로 빠끔 고개만 들이민 채 헛소리를 지껄인 뒤 획 하니 빠져나갔다.

“…뭐가 산뜻해, 느끼해진 주제에….”

얼이 빠져 여전히 손으로 목덜미를 덮은 채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온전히 아물려 닫히지 않은 현관문 틈으로 복도를 빠르게 걷는 현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뚱한 목소리를 냈다.

“야, 너 그러지 마. …속상해.”

마침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던 현준이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곤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웃기고 있네. 그럼 아름다운 이별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냐? 분이 풀릴 때까지 괴롭혀 줄 거야. 당하고 싶지 않음 휴가 때건 제대 후에건 알아서 피해 다녀.”

“…….”

그리고 한참이나 어린 개구쟁이처럼 혀를 ‘에에―’ 내어 보이곤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훌쩍 올라타 버렸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뒤늦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녀석이 원한 게 바로 이런 것일 테였다. 심각해지지 않는 것, 그래서 반쯤은 장난으로 제 상처 난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였을 테지만,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진심일 터였다.

알아서 피해 다니라니. 그러니까 그 속내란, 더 구질구질하게 남고 싶지 않으니 다신 얼굴 볼 일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 갈팡질팡하는 마음과 모순되는 행동들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때는 집안일을 해 주는 아주머니에게 다 큰 남자애들 속옷 빨래를 맡기는 것이 어려워 대신 팬티까지 직접 손으로 빨아 주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런 뒷바라지라면 해 줄 수 있었다. 다만 그 해진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리고 녀석의 말대로 집 안을 정리하기 위해 마주 앉아 자장면을 먹었던 테이블로 향하는데, 깨끗하게 다 먹었다 생각했던 그릇과 테이블 위쪽이 여기저기 흘린 자장 양념으로 몹시 지저분해 보이는 것이었다.

욕망이 가고 남은 자리는 이렇게도 추했다. 녀석의 말대로 역시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없는 걸까. 그제야 현준이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생각되었다.

그리고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우리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연애 그 비슷한 것을 했었다는 것이다. 연애 그것보다 좀 더 은밀하고 측은했던 시간들.

행주가 없어 나는 티슈를 물에 적셔 테이블을 깨끗하게 닦았다. 그리고 자장면 그릇들도 물로 깨끗이 헹구어 문밖에 내놓았다. 그러나 오렌지 주스 때문이었을까, 입안이 조금 썼다.

‡ ‡ ‡

그래도, 아무리 분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현관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목덜미를 문지르며 생각했다. 집 안의 불빛이 문구멍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현준에게 물린 곳은 결국 불그스름한 흔적을 남겼다. 그것은 어떤 야릇한 상상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흡사 커다란 벌레에게 물린 것과 비슷 보였다.

그러나 옷깃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에 반창고를 붙일까 했지만, 언젠가 경아가 일러 주었던 것이 떠올라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랍을 뒤졌다.

다행히 메이크업에 필요한 파운데이션이―아마 경아가 놓고 간 것을 아무렇게나 집어넣어 둔 것일― 하나 들어 있었다. 응급처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정황상으로는 결백하다 자신하면서도 나는 이미 감정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현준에게도 무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고, 분명 억울한 부분을 더 명확히 느낌에도 불구하고 역시 마음 한구석의 미적지근한 죄책감에 떳떳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화장품으로 색을 가린 것이 아직 제대로 피부에 붙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거울이 없었다. 결국 잔뜩 긴장한 채 도어록의 버튼을 꾹꾹 눌러 문을 열었다.

현관에는 무진이 아침에 신고 나갔던 구두가 대충 벗어 놓은 듯, 한 짝씩 외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발끝으로 슥슥 모아 나란히 한 켤레를 맞추며 ‘나 왔어.’ 목소리를 냈지만, 집 안에선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

신발을 벗고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소파 위에 무진이 벗어 놓은 슈트가 허물처럼 흩어져 있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그것들을 집어 들고 정리를 하는데, 옷감에 밴 담배 냄새가 지독했다.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이 피워 댔기에 이 정도인 걸까,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왔네.”

그리고 마침 욕실 문을 열고 무진이 커다란 수건으로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린 채 나오며 인사했다. 샤워 후 말개진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기미처럼 깔려 있었다.

기획사의 경영은 아예 원 실무진들에게 맡긴 채 노골적으로 핫바지 대표 행세를 하는 대신,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케이엠 그룹 본사로의 입성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처리할 게 좀 있어서 늦었어.”

“응, 나도 이제 막 왔어.”

슬쩍 눈치를 살피며 그런 그보다 늦게 귀가한 이유를 밝히자, 무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심히 대꾸했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말리며 저벅저벅 다가와, 불쑥 내 한쪽 팔을 잡아당기며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는 듯이 이런 식의 스킨십에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길고양이처럼 적응력이 떨어지는 나는 이렇게 소소한 애정 표현에도 당황하며 촌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어, 어…….’ 하고 뻣뻣하게 굳은 나를 두고 무진은 그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돌아섰다. 잠시 후 드레스룸에서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박혀 있는 내게 또 가까이 다가왔다. 쭈뼛거리다, 나는 얼른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덮어 버렸다.

“…응? 왜.”

그러나 무진은 그대로 내 곁을 스쳐, 소파 위에 놓아둔 노트북을 테이블 위로 옮겨 놓을 뿐이었다. 그리고 언뜻 곁눈으로 그런 나를 눈치채곤 의뭉스러운 얼굴로 물어 오는 것이다.

“아니야, 아무것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어 대답했다. 그리고 목덜미에서 손을 내릴 적절한 타이밍을 생각하고 있는데, ‘왜 그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무진에게 결국 먼저 손목을 잡혀 버렸다.

“목에 뭐, 왜 그래.”

“아, 아니, 그냥…….”

“아무것도 없잖아. 열나는 거야?”

힘으로 누른 그가 손을 떼어 내고 드러난 내 목덜미를 빤히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가슴이 방정맞게 뛰었다. 나는 마른 코를 훌쩍여 보였다.

내 이마에 손등을 짚어 본 무진은 그러나 별것 없다는 듯 ‘아닌데.’ 하고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듯 나를 옆에 세워 두곤 혼자 털썩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

파랗게 떠오르는 노트북 창에 그의 얼굴이 형형한 빛으로 물들었다. 잔업이 남았는지, 무릎 위로 팔을 괸 채 구부정하게 상체를 숙인 무진은 그래프 표를 열고 심각한 얼굴로 딸깍딸깍 마우스를 움직였다.

멀뚱히 서서 그것을 지켜보다가, 나는 문득 손을 뻗어 아직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슬쩍 매만졌다. 여전히 그래프 표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무진이 ‘왜.’ 물었다.

“머리 제대로 다 안 말리면 안 돼.”

“응, 괜찮아.”

얌전한 타박에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손끝에 묻어난 물기를 옷깃에 문질러 닦아내며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쪽 팔에는 그가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을 정리하기 위해 차곡차곡 걸쳐 둔 그대로였다. 소파 아래를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옷 이렇게 벗어 놓지 마, 낮에 아주머니 오신대도 이렇게 어지럽혀 놓으면 부끄럽잖아.”

“으음.”

마우스를 딸깍이며 무진은 그렇게 하겠다는 것인지 어쩌겠다는 것인지 모호한 대답을 했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나며, 쭈뼛대다 나는 또 이어 말했다.

“…담배도 너무 많이 피우지 마, 냄새 나.”

“아.”

“신발도 똑바로 벗어 놔. 집에 들어올 때 현관이 첫인상이잖아. 거지 집 같아.”

성의 없는 대꾸에 슬쩍 부아가 치밀었던 것 같다. 혹은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자신감이 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랑카랑한 말투로 떠들자마자, 무진은 이번에는 획 하니 내게 고개를 들며 저지시키듯 낮게 이름을 불렀다.

“여승재.”

“…….”

“잔소리 다 했으면 씻으러 들어가. 늦었다.”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옷을 도로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두고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왜인지 무진은 슬쩍 입매를 휘며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내가 욕실로 향하기 위해 온전히 발길을 돌리자 문득 ‘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잠깐 서 봐.”

그가 말하기도 전에 나는 우뚝 멈춰선 채였다. 그리고 맨발의 그가 서너 걸음 만에 뒤에서 나를 와락 껴안아 왔다.

“아…….”

내 양팔 아래로 두 손을 둘러 몸통을 가득 감싸 안은 무진은, 내 뒤통수에 입술을 묻고 ‘으음―’ 소리를 내다가 언뜻 고개를 더 숙여 뒷덜미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가 그대로 화장으로 커버한 목덜미 부분까지 입을 맞춰 올까, 초조한 긴장과 수상한 열락에 들떠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무진은 그 상태로 곧장 손을 내려 내 바지 버클을 풀고, 헐거워진 허리춤 안으로 불쑥 손바닥을 밀어 넣는 것이다.

“아, 왜 그래.”

“가만있어 봐.”

허리를 뒤틀며 미약하게 저항했지만, 그는 달래려는 듯 뒤에서 내 귓바퀴를 잘근거리며 손쉽게 속옷 안까지 손바닥을 들였다. 그러곤 이제 제법 손가락 사이로 집힐 만큼 자란 음모를 슥슥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

“샤워하면서 여기도 다시 깨끗하게 밀고 나오는 거야, 알았어?”

“…확실히 변태야, 넌.”

팔꿈치로 그를 밀쳐 내고 냉큼 벗어나며 말하자, 무진은 키득거리며 내 엉덩이를 툭 치곤 ‘어서 가.’ 했다.

“낯간지럽게 굴었던 주제에, 왜 이랬다저랬다 하는 거야.”

“여승재, 지금 뭐라고?”

욕실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는 말에, 자리로 가 앉은 무진이 소파 뒤로 고개를 빼고 소리 높여 물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냉랭하게 대꾸하며 욕실 문을 찰칵 잠가 닫아 버렸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지만 바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추적추적 옷을 벗고, 미지근한 물로 몸을 적시며 씻는 동안에도 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샤워를 마친 후,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드라이어기로 확실히 말린 후 밖으로 나가 보자, 무진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집중한 얼굴로 노트북 창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소파 뒤를 지나가며 슬쩍 훔쳐보았지만, 무엇에 관한 도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나는 손거울과 경아의 화장품을 챙겨 들고 침대로 털썩 가 앉았다. 그리고 거울을 한 손에 든 채 삐죽 턱을 치켜들고 씻겨 나간 부분에 다시 커버 화장품을 슥슥 문질러 발랐다. 그동안에도 무진은 침대 쪽으로 고개를 돌아보지 않았다.

푸른색 시트를 젖히고 베개를 툭툭 두드리며 정리한 뒤, 결국 먼저 ‘야.’ 하고 불렀다. 그제야 무진은 말없이 힐긋 이쪽으로 고개를 돌아보았다.

“모니터 불빛 신경 쓰여. 계속 보려면 서재 들어가.”

“싫어.”

그러나 그는 퉁명스레 짧게 대꾸하곤 다시 획 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 하고 소리를 내다 말고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털썩 베개 위로 머리를 얹고 시트를 어깨까지 끌어올리며 누웠다.

잠시 후 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정의 조명을 끄고 다른 곳에 놓인 스탠드를 소파 곁으로 끌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랬다저랬다 하고.

나는 베개에 입술을 꾹 눌러 묻은 채 웅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뭐라고?’ 묻지 않았다. 눈을 감고 돌아눕는데, 딸각거리는 마우스 작동 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노트북이잖아, 굳이 왜 마우스를 쓰는 거야.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말았다. 그리고 다시 옆으로 돌아누우며 뒤척이는데,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무진이 문득 ‘여승재.’ 하고 불렀다.

“…왜.”

번뜩 베개 위에서 머리를 들어 소파 쪽으로 고개를 빠끔 내밀며 대답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였다.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무슨… 뭐, 어떤 거.”

불편한 자세 때문인지 순간 목소리가 우스꽝스럽게 꺾여 나왔다. 듣지 못했는지 무진은 여전히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무덤덤한 목소리로 이어 물었다.

“회사 일 같은 거 말이야, 하루 일과나… 오늘 만났던 사람 이야기나, 있었던 일 같은 거.”

“…별로.”

“그럼 누워 자.”

“…….”

퉁명한 내 대답에 그 역시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담백하게 말했다.

거의 반쯤 일어나 앉았던 나는 다시 몸에 힘을 빼고 털썩 누워 버렸다. 푹신한 베개에 몇 번 이마를 박아 댔지만, 그저 먼지만 풀썩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단순한 일상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얼마쯤 잠이 들었을까. 몸이 먼저 수면 아래로 스며들었고, 의식은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 각성 상태였다. 몸 안에서 열기가 빠르게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득 어깨까지 덮였던 시트가 스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여승재… 승재, 입 벌려 봐.”

손끝으로 굳게 다물린 내 앞니를 톡톡 두드리며 무진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턱이 얼얼할 만큼 이를 악물고 자는 잠버릇이 있었다.

‘으으……’ 소리 내며 고개를 돌리자, 귓바퀴며 눈가에 짧게 입을 맞추며 달래던 무진은 안 되겠다 싶었던지 내 턱을 단단히 붙잡고 힘주어 입을 벌리게 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어 혀를 잡아 누르며 매만졌다.

“…응… 무아…”

발음이 뭉그러져 나왔다. 그에 무진이 비식 웃고는 내 몸을 반쯤 덮은 채 가로누우며 입을 맞추어 왔다. 혀와 혀가 얽히고 그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타인의 것처럼 끼어들었다. 입가로 타액이 흘렀고, 무진은 혓바닥 전체로 게걸스럽게 내 턱까지 샅샅이 핥아 냈다.

나는 그제야 오만상을 찌푸린 채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무뚝뚝한 얼굴의 무진이 다시 진득하게 입을 맞추어 왔다.

“아! 그러지…….”

내 혀를 앞니로 물어 고정시킨 뒤 사탕처럼 빨던 그가 이어 불쑥 고개를 내려 목덜미의 여린 살결을 핥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행여 그가 이상한 맛이 나는 커버 화장품을 핥아 먹을까, 나는 냉큼 그의 머리통을 붙잡아 올렸다.

키스해 달라는 뜻인 줄 알았는지 무진은 다시 혀를 얽어 왔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머리통을 단단히 붙잡은 채 키스하며, 다른 한 손은 셔츠 밑으로 집어넣어 내 별것 없는 복부와 가슴께를 쓰다듬었다.

그가 손끝으로 내 유두를 굴리며 간질일 때마다 나는 그의 팔뚝을 긁었다. 갑자기 뒤로 물러난 무진이 입고 있던 제 셔츠 밑단을 붙잡고 곧장 벗어 젖혔다. 그리고 왜인지 씩씩대며 내게 달려들었다.

“으……!”

내 티셔츠 역시 순식간에 벗겨 낸 그는 그것을 바닥으로 휙 집어 던지곤, 드러난 유두를 콩알처럼 혀로 굴리며 빨아 댔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뒤이어 자연스레 내 다리 사이에 파고든 그가 두 손으로 서둘러 내 바지춤을 붙잡고 아래로 내렸다. 순간 떠오르는 생각에 급히 손을 저어 말렸으나, 늦었다.

“…….”

속옷과 함께 무릎께까지 벗겨 낸 무진은 드러난 내 사타구니에 잠시간 눈길을 빼앗겨 멍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풉.’ 소리를 내며, 다른 곳도 아닌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고는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비, 비켜……! 저리 가!”

“크흐흐흐! 아, 아하하하!”

나는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어 그의 머리를 밀쳐 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끝을 비비기까지 했다.

깨끗하게 면도되어 민둥해진 사타구니에 그가 뱉어 내는 숨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벌써 귀두 끝이 히죽거리며 서는 느낌이었다.

한참을 키득대던 무진은 문득 웃음기를 싹 거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어 왔다. 나는 얼른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코믹만화처럼 귓구멍으로 김이 풀풀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양 손목을 붙잡고 얼굴에서 치워 냈다. 손을 놓아주면 나는 또 얼굴을 가렸고, 그는 재차 손목을 붙잡아 거두었다. 말없이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다, 지겨워져 나는 털썩 양팔을 침대 위로 늘어뜨려 버리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이게 한번 밀었더니 자랄 때는 따갑단 말이야, 다른 이유 없어.”

“…….”

무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어쩐지 비웃는 입매를 하곤 나를 빤히 응시하며 무릎 즈음에 걸쳐져 있던 내 속옷과 바지를 완전히 벗겨 냈다.

“두 시가 넘었어.”

왜인지 시선을 오래 마주할 수 없어,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눈길을 돌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알려 주었다.

응, 그는 무심히 대꾸했다. 그러나 시간 따위 상관없다는 듯 곧장 무릎으로 내 허벅다리 안쪽을 밀어 벌리며 다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그리고 미리 내 타액으로 적셔 둔 손을 아래로 내려 다물린 입구를 매만진다.

“아아……!”

곧이어 고집 센 손끝이 주름을 펴며 안쪽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조금 뻑뻑했다. 베개 위에서 고개를 저으며 침대 헤드 옆의 협탁을 힐긋거렸지만, 무진은 내 귓불을 빨며 모른 척했다.

협탁 서랍에 얌전히 들어 있는 젤을 쓰지 않겠다는 의도가 무언지 알 수 없었지만, 차마 노골적으로 젤을 사용해서 삽입해 달라 부탁할 수가 없어서, 그가 끈질기게 손가락을 늘려 근육을 이완시키는 것을 나는 끙끙거리며 견뎌야 했다.

“후우―.”

그리고 문득 몸을 떼고 일어나 앉은 무진은 서둘러 속옷과 바지를 벗은 뒤 다시 내 허벅다리 안쪽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힐긋 고개를 내려 보자, 어느새 잔뜩 발기해 성이 난 그의 페니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 것 없이 벌써 급한 숨이 터져 나왔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가로막았다.

“손 얌전히 놔둬.”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무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쌩하니 손을 거두고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였지만, 그는 곧장 내 허벅다리 안쪽을 움켜잡으며 들어 올린 채 음낭이며 엉덩이 골에 자신의 성기를 무심히 비벼 댔다. 긴장으로 가슴이 들썩였다. 그리고,

“아…… 읏!”

손가락으로 입구를 조금 벌리며 그가 묵직한 아랫도리를 밀어 넣었다. 턱을 늘어뜨린 채 신음을 흘리다가, 기어이 한꺼번에 뿌리까지 꽉 들어차는 것에는 급하게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평소대로라면 그대로 잠시 시간을 두는 편이었지만, 무진은 잔뜩 찡그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곧장 허리 짓을 시작했다.

아슬아슬할 만큼 뒤로 빼내었다가 곧바로 싸움질처럼 덜컥 쳐들어왔다. 반쯤 빼내어서는 둥글게 허리를 굴리며 내벽을 훑었다. 허벅지 안쪽이 경련처럼 덜덜 떨려 왔다.

전희도 짧았고, 아래를 제대로 이완시킨 것도 아니었다. 이물감과 동시에 통증이 허리를 스치는 쾌감과 뒤범벅되어 머리를 관통했다.

무엇보다 나는 조금 넋이 빠진 채였다. 선잠을 자다 깨어난 상태였고, 시시때때로 바뀌는 무진의 말투나 표정 하나로 안달복달하던 중이었다.

“아, 아아……! 조, 조금만, 아, 무진… 왜, 그… 아아!”

“으읏, 힘 빼……!”

아무렇게나 뒤흔들리면서도 그처럼 변덕스럽게 구는 이유를 물었지만, 무진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철썩이며 명령할 뿐이었다. 테크닉이 형편없는 취급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스스로 흥을 고취시킬 필요가 있어 손을 내려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는 내 성기를 붙잡고 위아래로 문질렀다. 그러나 무진은 이내 매서운 손길로 그런 내 손등마저 내치곤 사나운 눈길로 쏘아보는 것이었다.

“대체 어쩌란 말… 아, 아! 으, 으응!”

바락 소리치며 대들었지만, 순간 허리를 틀며 깊숙이 찔러오는 것에 끔찍한 신음이 터졌다. 괜한 반발심에 더 부추길 순 없었다. 두 손을 힘없이 양옆으로 뻗으며 나는 차라리 온몸에 힘을 빼 버렸다.

무진은 손쉽게 내 양쪽 무릎을 접어 어깨까지 밀어 올렸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내 아랫도리에 단단한 성기를 연속해서 뺐다 꽂으며 질펀한 몽둥이질을 하고, 우는 소리를 내는 나를 빤히 응시하며 깊게 찔러 넣은 채 심술궂은 엇박자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 후로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정하게 뺨에 입을 맞추고 장난을 걸었던 그가 갑자기 화난 얼굴로 사납게 덤벼든 것은 단순히 새로 배워 나가는 일이 어려워 스트레스를 받은 화풀이 정도로 여겨졌다.

그 화풀이 대상이 왜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억울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권무진이 나 말고 다른 어디에서 이처럼 패악을 부리는 것보다야 낫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흐, 으읏……!”

이거야 완전히 흑백 영화 속 흡사 ‘영자’라는 이름이 어울릴 법한 여주인공이 가졌던 전근대적 사상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영자가 되었든 철수가 되었든, 기실 쾌감에 머리꼭지부터 아랫도리까지 축축이 젖는 것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래전부터 무진이 내게 몸으로 가르쳤듯이 바야흐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수치의 자리에 쾌락을 유입시켜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발기한 내 성기의 선단에서는 이미 질척한 액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손을 내려 주무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무진은 여지없이 내 손등을 매섭게 쳐 내며 무서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리고 매질처럼 난폭하게 아래를 쳐올리며 내 입술을 물어뜯었다.

“아흐으! 그, 그만… 알앗… 알았어… 좀 살살… 하아!”

오직 뒤가 들쑤셔지는 감각만으로 가도록 하는 것 역시 일찌감치 그가 몸으로 익혀 준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스스로 자신만만하게 지껄였듯이, 내 몸을 샅샅이 알고 있는 무진에게 그깟 전립선을 찾아 찔러 올리며 나를 사정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번에는 교묘하게 내가 느끼는 곳만을 피해 허리를 돌린다는 기분이었다. 장난질을 치고 싶은 걸까. 어쨌든 마냥 ‘구멍’ 노릇만을 하고 있는 것은 자존심상 참을 수 없어서,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능동적으로 나서 주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아, 아……!”

양쪽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채 허리를 들썩이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꽤 우스꽝스러운 꼴이었지만, 직접 맞추어 느끼는 쾌감으로 머리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무진은 급히 내 허리를 눌러 잡으며 저지시켰다.

“읏…! 그만…! 여승재… 엉덩이 움직이지 마. 속살 너무 질근거리지도 말고. 오래 하고 싶으니까.”

그리고 터무니없을 만큼 일방적인 요구를 하고는,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에 맞추어 다시 사납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허리가 둥글게 말리고, 골반이 붙잡혀 꼼짝하지 못한 채 그저 난폭하게 아래를 꿰뚫릴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감각들이 온몸의 뼈를 달그락거리게 했다.

속살 질근거리지 말라는 노골적인 말에 정말 그렇게 해 버리고 싶었지만, 깊게 들어왔다가 한 번에 훅 빠져나가는 것에는 절로 속살이 진득하게 물려 나갔다.

그러다 문득, 혼자 잔뜩 발기해 있는 내 성기를 힐긋 내려다본 그가 덥석 손을 뻗어 와 잡곤 엄지로 선단을 꾹 눌러 막아 버렸다. 아아아! 나는 벼랑에서 떨어지는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 버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급히 두 손으로 그의 팔등을 꼬집고 긁으며 치우도록 했지만, 무진은 붙잡은 성기를 더 꽉 조이며 끝내 선단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결국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백기를 들었다. 성기를 붙잡은 손에 힘이 조금 풀어졌다.

아래에서 푹푹 찔러 올리는 반동에 흡사 그가 손으로 내 것을 주무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절대 귀두 끝을 놓아주지 않는 손가락 때문에 사정감에 이를 수는 없었다. 아랫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찰랑거리며 끝내 다 채워지지 않는 쾌락에 이를 딱딱 맞부딪히며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제발, 무진아 제발. 그러나 그는 솜으로 귓구멍을 꽉 틀어막은 듯 이를 악문 채 사나운 추삽질에만 열중해 있었다.

“아흐, 으, 으흣……!”

그리고 결국 내 양손과 골반을 꽁꽁 묶어 둔 채 무진은 짐승처럼 앞니를 다 드러내어 으르렁거리며 절정감에 다다랐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속 감각으로 깊숙이 박아 넣은 그의 성기에서 정액이 훅 뿜어져 나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랫배가 축축이 차올랐다.

“하아……, 좋았어.”

어느새 온순해진 얼굴을 한 무진이 상쾌한 숨을 내쉬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여전히 얼이 빠진 얼굴로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뒤늦게 알아챘다는 듯 ‘아참.’ 하며 눌러 막고 있던 내 성기를 그제야 놓아주었다.

“으, 응…….”

그러나 이미 몇 번이나 사정감을 놓친 성기에서는 쿠퍼액이나 다름없는 정액 몇 방울이 찔끔 흘러나오는 것으로 그쳤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피식 비웃은 무진이 천천히 허리를 뒤로 뺐다.

꽉 아물렸던 것이 빠지며 속을 가득 채웠던 그의 정액이 막을 새도 없이 주룩 흘러나왔다. 무진이 씩 웃으며 엉덩이 사이로 손을 질척이다가, 다시 한번 입을 맞추기 위해 내 얼굴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철썩―

그러나 나는 냅다 그의 뺨으로 손바닥을 내쳐 버렸다. 획 하니 고개가 돌아간 무진이 음산한 얼굴을 하고 천천히 눈을 굴려 나를 노려보았다.

“…너…”

“너 방금 나, 구멍 취급했어. 남창 취급도 아니고, 하물며 짐승 취급도 아닌, 그냥 구멍, 이름도 없는 구멍 말이야.”

“…….”

그리고 내가 울분처럼 쏟아 내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문득 뒤로 고개를 젖힌 채 ‘후우―’ 하고 깊은숨을 내쉬는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동들이어서 미간을 찌푸린 채 화를 내면서도 입이 헤벌어졌다. 다시 고개를 내린 무진이 그런 내 멍청한 얼굴을 마주 보며 감흥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심했다. 미안해.”

“…새로 일 시작해서 스트레스 받는 거 알아서 참은 거야. 다음엔 용서 안 해.”

그답지 않은 곧은 사과에 오히려 얼떨떨해져 나는 쭈뼛대며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무진은 다시 픽, 비웃으며

“일 때문에 스트레스?”

빈정거리는 투로 되물었다. 또 순식간에 달라진 태도에 어리벙벙해져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이번에는 뻐근한 어깨 근육을 풀듯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뚝, 뚝, 물렁뼈 소리를 냈다. 그리고 비실비실 웃으며 나른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맞춰 온다. 머릿속에서 위험 경보기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그래, 일 새로 배우느라 스트레스가 심해.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이번에는 너도 좋아하게 해 줄 테니까.”

무진이 내 손목을 끌어 잡으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속삭여 말했다. 아래에서는 무방비하게 흘러나온 그의 정액이 내가 앉은 침대 시트를 더럽히고 있었다.

“됐어, 몸도 아프고… 지금 너무 늦었어. 그냥 빨리 씻고 자는 게―”

얼른 손을 빼며 침대 아래로 내려서려 몸을 틀었다. 그러나 뒷말을 잇지 못하고, 이번에는 그에게 발목이 붙들려 버렸다.

“아……!”

“이번엔 잘해 준다니까……!”

주룩 거꾸로 당겨져 그의 무지막지한 손에 두 다리가 활짝 벌려졌다.

“무슨! 이……! 거짓말! 너 아까부터 계속 거짓말했어! 미친 자식! 계속 화내고 있었던 주제에, 다정하게 볼에 입 맞추고… 미친놈, 변태, 사이코! 놔, 이거 놔아……!”

이제 명확해졌다. 일시적인 스트레스 때문도 아니고, 그가 다중인격자여서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잔뜩 화가 난 상태였고, 계속 성질을 억눌러 참느라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처럼 다정한 연인과 무자비한 폭군의 역할을 반복했던 것이었다.

고함을 지르며 온몸을 버둥거리자, 무진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씩씩거리며 달려들었다. 강한 두 팔로 내 몸을 바짝 조이며 포박하고, 틈 없이 껴안은 뒤에서 곧바로 흉기 같은 페니스를 엉덩이 사이로 찔러 넣어 왔다.

버둥거리는 다리는 자신의 긴 한쪽 다리로 힘껏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잔인하게 뒤쪽만 푹푹 쳐올려 댔다.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나도 좋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듯 몸을 감싼 손을 내려 내 성기를 움켜쥐고 위아래로 흔들고 주물러 댔다.

악악거리며 나는 허리를 뒤틀었고, 정신병자처럼 구는 그가 무서워서 애처럼 훌쩍였다.

“그렇게 울 정도로 좋아? …확실하게 새겨 둬, 너 이렇게 위아래로 질질 짜게 할 수 있는 사람, 나밖에 없어. 알아들어? 여기, 정확하게 여기잖아, 응?”

여기, 하고 무진이 정확히 전립선 부분을 찔러 누르며 귓바퀴를 잘근 물었다. 후두둑,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바들바들 몸을 떠는 것에 아래 역시 잔뜩 조였는지 그가 뒤에서 욕설과 함께 ‘죽인다……’ 하고 헐떡였다. 그리고 돌연,

“내놔!”

신경증적인 기세로 소리치며 내 한쪽 손목을 대뜸 뒤로 꺾어 가선, 새끼손가락에 헐겁게 끼워진 정혜주의 반지를 덥석 앞니로 긁어 빼내어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는 것이다.

“너, 그거, 안……!”

“안 빼앗겨, 이 새끼야!”

화들짝 놀라 뒤로 고개를 꺾으며 말리려 하자, 그는 뜻 모를 말을 더 크게 버럭 외쳤다. 그리고 내 어깨를 덥석 물어 오며 사납게 허리 짓을 시작했다. 나는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린 정혜주의 반지를 떠올리며 둥글게 몸을 말았다.

“어, 어떡할… 아흐읏…! 어떡할 거… 아, 아아!”

원망하는 말은 꿰뚫려 난폭하게 뒤흔들리는 탓에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무진은 온 힘으로 나를 포박하면서 동시에 정신없이 허리를 쳐올리느라 아예 쉰 목소리로 헉헉거렸다. 그리고 정액을 쏟아 내면서도 끊임없이 철벅이며 추삽질을 해 댔다. 그는 섹스를 하다가 죽어 버릴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게 사납게 구는 그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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