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thirteen-2 (17/41)

‡ ‡ ‡

‘왜 그렇게 형을 싫어하는 건데.’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구는 무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적당한 답을 찾는 듯 시큰둥한 얼굴로 테이블의 한쪽 모서리를 빤히 쏘아보다가,

‘…그 새끼는 나쁜 걸 몰라.’

투덜거리듯 불만조로 대답했다. 한마디로 자신과 너무 달라 싫다는 말이 아닌가, 그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가 귀엽게까지 느껴져 나는 소리 내지 않고 몰래 웃었더랬다.

“…….”

왜 갑자기 그런 꿈을 꾼 것일까.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다고.

허기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렇게 동물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12년 만이었다.

열아홉부터 천천히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하고 손가락으로 세어 나가며 12라는 숫자를 얻은 나는, 새삼 그 아득한 날들의 경과에 기가 차, 피식 웃음을 흘리곤 말았다. 벌써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그렇다면 오늘은 또 며칠인가 하는 생각에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이미 배터리가 다 닳은 것은 캄캄한 먹통이었다.

내 몸에서는 시큰한 땀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베개며 이불이며 모두 더러웠다. 우선 씻기 위해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려 일어서자, 태아처럼 오래 둥글게 말았던 몸 곳곳에서 뼈가 우둑우둑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마시고, 냉장고 문을 열고 선 그 자리에서 유통기한이 지났을 빵과 우유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그렇게 우선의 허기를 물리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휴대폰을 충전하며 전원을 켜자마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 알림음이 데롱데롱 울렸다. 대부분이 김 실장이었고, 간간이 기욱이나 케이와 쌍둥이 녀석들의 이름이 뜨기도 했으며, 전화번호를 교환한 몇 명의 기자들 사이로 무진의 이름이 단 한 건 포함되어 있었다. 성마른 성질머리에 용케도 참았구나 싶었다.

집 안에 켜켜이 감도는 적막이 싫어 텔레비전을 켜자, 한창 방영 중인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내용도 모른 채 나는 잠시 그 앞에 멍하니 서서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아차 싶어 비틀거리며 걸어가 창가를 꽁꽁 막은 블라인드를 걷어 올렸다. 어스레했던 집 안으로 강한 햇살이 폭력적으로 쳐들어왔다.

“아…….”

나는 그것에 온몸을 관통당한 것처럼 옅은 신음을 흘리며 잠시 창가에서 가만 눈을 감고만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드라마가 끝이 났는지 어느 광고의 로고송이 들려왔다. 익숙한 것에 고개를 돌아보자, 화면 가득 현준의 얼굴이 보였다. 녀석이 찍은 맥주 광고였다.

“…독한 놈.”

전화 한 통이 없었다. 그나마 김 실장에게 연락이 갔다고 하던가.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정혜주의 자진 회견 영상과 뒤늦게 터트린 현준의 입대 소식에 회사가 온통 발칵 뒤집혔다가 이제 조금 잠잠해진 상태일 것이었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친 후에 슬그머니 나타나는 것만큼 밉상이 따로 없지만, 들러야 했다.

침대 시트와 베갯잇을 벗겨 세탁을 돌리며 나는 느긋하게 샤워를 했다. 양치질은 세 번이나 했다.

머리카락을 말리며 보니 앞머리가 눈을 찌를 만큼 길어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단정한 정장 차림을 하고 집을 나서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발소로 들어갔다.

매번 현준이 다니는 헤어 숍에서 덩달아 머리를 맡겼던 터라, 중년 이발사의 ‘어떻게 잘라 드릴까?’ 하는 물음에 나는 조금 암담한 기분으로 머뭇거리다가 그저 ‘깔끔하게요.’ 하고 대답해 버렸다. 이발사는 내 원래의 머리 스타일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이어 가윗날이 서걱서걱 머리카락을 잘라 내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이발기가 내 뒷덜미며 귓바퀴 위쪽을 징징거리며 오르내렸다. 나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시원하고 단정해 보이지?”

그리고 잠시 후 목을 꽉 조였던 커트 보자기를 커튼처럼 좌락 풀어내며 이발사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을 떠 거울을 보자, 웬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이발사―내 뒤에서 뿌듯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서 있는―의 눈치를 살피며 비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뒷덜미가 휑해져 기분마저 조금 머쓱했다. 오랜만에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할 생각이었지만, 알몸이 된 기분에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택시를 탔다.

그리고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해 내리자, 현준의 입영 신청 소식에 눈물 바람인 팬 아이들이 역시나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나를 발견하곤 우르르 몰려들었다.

“승재 씨, 우리 오빠 정말 벌써 군대 가는 거 아니죠? 아니라고 해 주세…… 어, 승재 씨 머리 잘랐네요? 우와, 두상 되게 작고 예쁘다.”

“그래.”

울먹이는 목소리로 칭얼대다가 이내 화제를 바꾸어 재잘거리는 아이들에게 아무렇게나 대꾸해 주고 나는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역시나 마주치는 직원들마다 비식비식 웃는 얼굴로 내 머리통을 손가락질하며 ‘어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역시 ‘예, 예,’ 하고 의미 없는 대꾸를 하며 지나쳤다.

그리고 최상층으로 오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열리며 후다닥 밖으로 나오던 아이들 중 하나가―내가 프로모션 비디오를 맡아 준 데뷔 그룹의 리더라는 녀석― 빠르게 지나치다 말고 ‘어!’ 하고 우뚝 멈춰선 채 알은척을 했다.

“매니저님, 머리 자르셨네요? 시원해 보여요, 더 어려 보이시고요.”

“고맙다.”

형식적인 대꾸에 왜인지 다른 아이들까지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중얼거리며 나는 뚜벅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아이들이 꾸벅 허리를 숙여 보인 뒤 저들끼리 킬킬거리며 다시 어디론가 뛰어갔다.

“엇, 너!”

그리고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김 실장과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아, 소리를 내며 뻣뻣하게 굳어 있자 그 역시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나를 향해 손짓했다.

양쪽 모두 움직이지 않자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려기에, 나는 얼른 손을 뻗어 열림 버튼을 누른 뒤 밖으로 훌쩍 나와 서며 그를 향해 슬그머니 인사를 건네었다.

“…며칠 복잡하셨지요?”

“뭐? 며칠 복잡하셨지요?? 이 자식이 며칠을 잠적해 있다가 나타난 주제에, 군기가 빠졌어, 엉?! 밤톨 머리통 내놓고 나타나면 귀엽다고 봐줄 것 같아? 내가 지금 잠깐 나가 봐야 된다, 너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알았어?!”

“…….”

내 대답을 듣지 않고 그는 곧장 엘리베이터 안으로 올라타 버렸다. 그리고 자리가 뒤바뀌어 마주 선 채 신경질적으로 닫힘 버튼을 꾹꾹 눌러 대는 것에 나는 닫히는 문틈으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며 피식 웃어 버렸다. 웃지 마, 인마!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휑한 뒷덜미를 슥슥 문지르며 나는 긴 복도를 걸었다. 대표실이 있는 층이어서 그런지 간간이 눈에 띄는 아이들조차 뒤꿈치를 들고 조심하는 태도처럼 보였다. 폭군이 다름없지, 중얼거리며 문 앞에 멈춰 섰다.

“…….”

똑똑, 노크를 하자 안쪽에선 ‘예’인지 ‘왜’인지 ‘에’인지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대답을 해 왔다.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문고리를 돌려 열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커다란 책상 위에서 마우스를 딸깍거리고 있다가 등 뒤로 문을 닫는 나를 힐긋 확인한 무진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어색해하는 태도로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웃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얼굴을 하곤 나를 찬찬히 살피는 것이다.

머쓱한 기분에 나는 두어 걸음 더 안쪽으로 들어서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농땡이 부리고.”

그런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던 무진이 먼저 말을 붙였다. 그것이 며칠이나 잠적한 나를 질책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동안 무얼 했느냐고 묻는 말인지 분명치 않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특별히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 역시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선 내게 다가오려는 듯 책상을 둘러 앞으로 걸어 나오다가, 내가 주춤 경계하는 태도로 한 걸음 물러서자, 그대로 책상 위로 털썩 기대어 앉았다.

나는 한동안 그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그렇게 조금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그의 머리통이나 단단한 어깨선 따위를 천천히 훑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맥연히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왠지 조금 악동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 아귀가 맞지 않는 책장의 문짝처럼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번에 잠깐 그런 얘기 나온 것 같은데……,”

그의 턱 즈음에 시선을 맞춘 채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양손을 뒤로 뻗어 나른하게 상체를 젖히고 있던 무진이 ‘응?’ 하고 대꾸했다.

“너, 정신병원에 강제입원 당한 적 있어?”

담담한 목소리로 묻자, 그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진은 그런 나를 가만 바라보다가, 시큰둥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내 성격 알잖아. 하도 개지랄을 떠니까, 저 새끼 진짜 미친 거 아니냐 해서… 잠깐 그냥 상담만 받은 정도.”

음, 무어라 대꾸를 해 줘야 할 것 같아 나는 그저 입을 다문 채 그 정도의 소리만 내곤 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또 한동안 침묵하던 가운데 무진이 문득 ‘흐흠,’ 하고 낮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자, 내 왼쪽 손목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거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장난감 같은 걸 계속 차고 다니는 걸 보니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선물 받은 거라서. 마음에 들기도 하고.”

손목시계 위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대답하자, 내가 쑥스러워한다고 생각했는지 무진은 좀 더 짓궂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슬며시 웃었다.

어쩐지 그는 조금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희망으로 저러는 것일까, 그러나 내 눈앞에는 무너진 콜로세움이 흑백으로 보일 뿐이었다.

“…저번에 또, 약혼 어쩌고 하더니.”

칼칼한 목소리로 이어 묻자, 무진은 그제야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듯 씩 웃으며 턱을 빳빳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목을 풀듯이 고개를 천천히 원으로 돌리며 ‘으음―’ 소리를 내고는,

“다음 주에 할까 말까 고민 중인데.”

천장을 바라보며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을 했다. 뚜렷하게 드러난 그의 목울대를 쳐다보며 나는 곧장 되물었다.

“왜 고민 중인데.”

“조건은 좋은데 얼굴이 별로던데.”

“얼굴 오래 안 가. 웬만하면 그냥 해.”

장난조로 답하는 것에 담담히 권하며 대꾸하자, 태평하게 고개를 온전히 뒤로 젖히고 있던 무진이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잔뜩 귀찮은 얼굴을 한 채 시선을 맞추어 왔다.

“…또야?”

“시비 걸려는 거 아니―”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그러나 더 이상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곧바로 휴대폰과 지갑을 챙겨 들며 기대고 있던 책상에서 훌쩍 내려섰다.

그는 들뜬 기대와 쑥스러운 장난기, 과장된 피로함으로 이상해진 얼굴을 하고선 내게 곧게 걸어왔다. 그리고 무심히 스치듯 지나며 덥석 내 손목을 붙들어 당긴다.

그러나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내치며 한 걸음 물러선 채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적여 봉투 하나를 그의 앞에 내밀어 보였다. 내쳐진 자신의 손을 시무룩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불쑥 내미는 것을 역시 시큰둥한 얼굴로 힐긋거리며 그는 ‘뭔데.’ 하고 불퉁하게 물었다.

“이런 거 처음 써 보는 거라서 이렇게 쓰는 거 맞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형식적인 거니까 받아 둬.”

“…이거 한자, 사직서라고 쓴 건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지 않고 무진은 그저 봉투 위에 적힌 한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이어 물었다. 나는 여전히 그의 턱 아래에 봉투를 내민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근데 이거 왜.”

“관두려고.”

“내가 너 섬에 팔아 버린다고 말 안 했었나?”

“…….”

여전히 봉투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진은 여상한 음성으로 ‘응?’ 되물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가만둔 채 기어이 사나운 눈만 번뜩 치켜떠 보인다.

아이 같은 협박조의 투정이 엿보여, 나는 차라리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하자, 무진아.”

대신 힘겹게 목 안을 조이며 가까스로 말을 전했는데, 머저리처럼 목소리가 꺾여 나와 버렸다.

그는 웃지 않았다. 이마에 그가 씩씩 내뿜는 숨이 와 닿았다. 권무진을 흥분시키는 방법은 이리도 간단하고 또, 아프다. 전동 드릴에 뚫리는 것처럼 아파, 나는 결국 슬그머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린 채 말을 이어야 했다.

“내가… 내가 미안했다.”

“죽을라고?”

무진은 기껏 삼류 건달처럼 건들거리며 대꾸하곤, 꼴깍 소리가 나도록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마를 가린 내 손을 덥석 붙들어 치우곤, 바짝 붙어선 채 말의 진위를 가리려는 듯 곧게 시선을 맞추어 왔다. 그는 부지런한 개미처럼 내 얼굴에서 장난이나 거짓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시선을 샅샅이 이동시켰다.

“…미안.”

“씨발 가만 좀 있어.”

조용히 속삭이며 다시 한번 사과하자, 그는 내가 자신의 수사에 방해가 된다는 듯 잡은 손을 흔들며 채근했다. 그리고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하…!’ 공허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 새끼… 둘째 형, 그 또라이 새끼 때문에 그래? 그거라면 내가… 지금 당장, 씨발 나도 지금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간 이번엔 정신병원이 아니라 철창에 갇혀서… 씨발, 그럼 너 다시는 못 보고… 어? 내가 그랬으면 좋겠…… 그렇게 아니더라도 내가 언젠간 그 새끼 네 앞에 무릎 꿇게 해 줄… 아니면, 그냥 지금, 네가 그러면 그냥 지금… 어?”

그는 매정한 손님 앞에서 한없이 물건 값을 낮춰 파는 장사꾼처럼 안달복달하며 굴었다. 누군가 손톱으로 가슴께를 북북 긁어 댔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무 많이 지나 버렸어, 그건 벌써 십이 년이나 지난 일이야.”

“…….”

무진은 내 말을 듣고서야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나 버린 것을 깨달았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동안 우리는 나이만 먹고 철은 안 든 거야. 그래서 미련을 떨었다, 그게 전부야. 그 후로 제대로 살아 본 적이 없어. 네가 나사 하나를 잃어버린 동안 나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였어. 그 일의 진위가 어떻게 됐든, 너무 오래전 일이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고… 그만하자, 무진아. 알잖아, 우리 계속 보면 안 돼.”

“왜 안 돼.”

내 담담한 설명을 듣던 무진은 다시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입안에 든 사탕을 빼앗기기 싫은 어린애처럼 불퉁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나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조심스레 떼어 내며 대답했다.

“계속 아플 거야.”

“…….”

“그만 미워하고, 이제 그만 좀 잊자. 그리고 우리 좀, 살자.”

“…죽을라고?”

무진은 한쪽 무릎을 반쯤 굽혀 삐딱하게 선 채 불량스럽게 반복해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미 굽혀진 무릎만큼 기가 꺾여 있었다. 권무진답지 않아서 나는 그 헛된 물음에도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해 주었다.

“미안하다… 내가 빌게… 그만하자… 무진아, 놔주라.”

그리고 염불을 외듯 중얼거리며 소파 머리 위로 사직서를 놓아둔 뒤,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무진이 놀란 얼굴로 한 걸음만큼 얼른 더 다가섰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갈게.’ 말하며 그만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박차고 나가자마자, 어려운 생계 때문에 갓난애를 혼자 시장 바닥에 내버려 두고 도망치는 몰인정한 엄마처럼, 그렇게 나는 빠르게 발을 굴렀다.

“여승재!”

그는 내가 마침 도착해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복도 밖으로 뛰쳐나왔다. 반복해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빠른 속도로 뛰어와 손을 뻗는 그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닫히던 문이 덜컹! 다시 열려 버렸다.

센서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아예 문틀 위로 올라선 무진이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몰라, 네가 설명하는 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씨발, 뭐라는 거야. 아니, 네가 그러건 말건 알게 뭐야.”

“…빌게. 제발.”

“그러니까 내가 알 게 뭐냐고, 네가 빌어도 몰라, 그런 거. 어차피 개차반인데 네 부탁 같은 걸 내가 들어줄 거 같냐?”

“…….”

직원인지 연습생인지 누군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는지 그의 뒤에 가려진 채 ‘저기……’ 하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왔다.

“시끄러워!”

두 팔을 벌려 엘리베이터 입구를 양쪽으로 버티고 잡은 무진이 누구를 향해서인지, 벼락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지만, 그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 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복도 전체가 텅 빈 듯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무진이 양팔을 벌린 채 산처럼 서 있었다.

저 산을 넘어, 내가 그 안에서 헤매며 뛰놀았다는 것을 잊으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이런 짓까지 했었어.”

도무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그를 앞에다 두고, 나는 결국 손목시계를 풀어야 했다. 오랜 시간 햇볕에 닿지 않아 유난히 새하얗게 투명시계처럼 흔적이 남은 부분, 그 가운데에 선명한 상흔.

“…….”

손목을 뒤집어 지네처럼 남은 흉터를 보여 주자, 무진은 그제야 양팔을 털썩 떨어뜨린 채 멍한 얼굴이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 들썩이던 그의 가슴팍까지 사진처럼 멈추었다.

시간은 정말 계속 흐르고 있는 걸까. 꿈처럼 이명의 상태에서 나는 연습한 대로 혀를 움직였다.

“널 보면 이 상처가 벌어져서 다시 피가 철철 흐를 것 같아, 그렇게 아파.”

“…….”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굳게 다물렸던 그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비겁하다는 거 알아. …그래도 무진아, 나 좀 살자. …살려 줘, 좀 봐줘. …놔줘.”

그리고 내 손목의 상흔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무진은 이윽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넋이 빠진 듯 주춤, 뒤로 물러섰다. 숨을 쉬라고 등을 좀 두드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센서에서 풀려난 엘리베이터 문이 이내 스릉― 닫히고 있었다. 좁은 틈으로 마지막으로 그가 급히 내게 눈을 맞추며 무어라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하아! 하…!”

나는 급하게 뒤로 물러나 벽으로 등을 부딪치며 기대었다. 무릎이 후들거려 서 있을 수 없었다. 주저앉아 무릎을 껴안고, 내 발등을 까마득히 내려다보며 급하게 터져 나오는 숨을 다그쳤다.

엘리베이터가 끝없이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지옥까지 떨어지리라.

잠시 후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으나, 나는 도무지 무릎을 세울 수 없었고, 아무도 타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또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상승, 혹은 하강. 나는 상관치 않았다. 다만 평생 그 안에서 먼지처럼 부유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디엔가 멈춰선 엘리베이터는 나를 다그치듯 또 한 번 기계음과 함께 스릉― 문이 열렸다. 나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

다시 그곳이었다, 눈앞에 무진이 있었다. 아니, 그건 권무진이 아니었다.

“…으… 내가… 여승재, 내가…,”

그는 어린애처럼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울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런 얼굴을 모른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두 손을 짚고 선 나를, 내 왼쪽 손목을, 구부정하게 내려다보며 무진은 뜨건 숨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승재야… 여승재, 내가… 잘못…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흐, 읏…! 내가 잘못했… 승재야, 승재야…….”

터무니없을 만큼 절절히 비는 것이었다. 권무진이 내게 잘못했다 사죄를 하고 있었다.

“그, 그만해……!”

나는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매몰차게 밀쳐 내 버렸다.

뿌리 뽑힌 나무처럼 서 있던 무진은 역시 터무니없을 만큼 힘없이 뒤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그는 엉망진창인 얼굴로 ‘여승재에…’ 하고 흐느껴 나를 불렀다.

“아… 아아… 으, 흐으읏!”

안전하게 문이 닫힌 공간 안에서 나는 마음껏 입을 벌리고 울었다. 모두 다 거짓말이었다, 손목의 상처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나는 이제 아픈 것 따위 느낄 수도 없었다. 나는 살고 싶지도 않았다, 한 번도 살고 싶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그를 보면 절실히 살고 싶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가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하며 살았을지 떠올리면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그의 날개를 꺾어 버렸다는 생각에, 그 환멸에 참을 수가 없다.

열아홉의 그가 이마가 찢어진 채 느꼈을 슬픔과 배신감이 너무나 선명하게 배를 갈랐다. 나는 복부를 감싼 채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평생 그리워하다 죽어 버려야지, 불구가 된 영혼으로.

그렇다면 그가 나를 조금은 측은하게 여겨 추억해 주지 않을까, 나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남루한 12년의 시간보다 더, 깊이.

‡ ‡ ‡

“승재 혀엉―.”

문을 열자, 마침 초인종을 누르려던 커다란 사내 녀석들 셋이 정승처럼 버티고 선 채 칭얼대며 나를 불렀다. 쌍둥이 AB와 케이였다.

인기척도 없었던 터라 아무것도 모른 채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던 나는 공포 영화처럼 흠칫 굳으며 놀랐다가, 애써 태연한 척 담담히 대답했다.

“…어, 왜.”

그리고 조용히 숨을 내쉬며 녀석들을 둘러보는데, 얼굴들이 엉망이었다. 확인한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녀석들 또한 울상이었다.

“얼굴이 다들 왜 그래.”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얼굴의 피부가 문제였다. 쌍둥이 AB는 울긋불긋하게 열꽃이 피었고, 케이는 꼭 사춘기 사내애처럼 좁쌀 같은 여드름이 가득 얼굴을 덮은 채였다.

“우리 다음 주부터 프로그램 들어가는데에―.”

우선 들어오라며 문을 활짝 열어 주자, 앞다투어 우르르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녀석들이 멋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칭얼거렸다.

그런 와중에도 케이는 욕실에서 먼저 손을 씻고 나와선 역시 멋대로 주방에서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을 만한 것이 없다는 걸 알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와선 ‘뭐 없다.’ 중얼거렸다.

“…….”

손목시계를 힐긋 확인하고, 나는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3인분만큼의 쌀을 안치고 레토르트 카레를 봉지째 냄비에 담아 데워 둔 후, 물에 적신 수건과 얼음으로 차가운 팩을 만들어 쌍둥이 녀석들의 얼굴에 철퍼덕 얹어 주었다.

“피스타치오 먹었어?”

“피스타치오?”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흰색 수건을 얼굴에 덮은 녀석들을 내려다보며 묻자, A인지 B인지 하나가 수건을 눈 아래까지 힐긋 내리며 되물었다.

“그래, 피스타치오. 너희 그거 알레르기 있잖아.”

손등을 찰싹 때리고 수건을 이마까지 잘 덮어 주며 대꾸하자, 이번에는 다른 하나가 또 수건을 조금 내리며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찰싹 손등을 때리고 이마까지 덮어 주자, 둘 다 차가운 수건 아래에서 얌전히 내 잔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런 거 미리 니들 지금 매니저한테 말해 둬야 할 것 아니야. 아니 애초에, 너희 몇 살인데 아직도 뭘 가려서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면 돼?”

반성을 하는지 마는지, 그저 콧구멍 있는 부분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에 따라 수건이 부풀었다가 딱 들러붙었다가 반복했다.

“별로 심한 정도는 아니니까 우선 그렇게 얼굴에 열 가라앉히고… 예전에 먹다 남은 알레르기 약 있으니까, 우선 밥 먹고 한 알씩 넘겨. 내일 아침에 그래도 경과 없으면 지금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병원 데려다 달라고 그러고. …자? 내 말 듣고 있어?”

얌전한 것이 심상치 않아 수건 두 개를 동시에 획 하니 내려 보자, 두 녀석이 동시에 입을 맞추어 ‘시원해서 기분 좋아―.’ 하고 방긋거렸다.

다시 철퍽 수건을 덮어 주고, 요란한 압력밥솥 작동 소리에 주방으로 들어서자 아직도 냉장고를 뒤지고 있던 케이가 벌떡 일어섰다.

“밥 다 됐어, 기다려.”

“어디 가?”

그리고 대뜸 현관 쪽을 손짓하며 어눌한 발음으로 물어 왔다. 신발장 앞에 놓아둔 여행용 가방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릇들을 꺼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퍼 담으며 ‘회사에 뭐 좀 가져가려고.’ 건성으로 대답하자, 녀석은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서서 수저를 챙기는 녀석을 향해 나는 또 조용히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 손은 잘 씻으면서 얼굴은 왜 제대로 안 씻어?”

“응?”

“넌 피부 타입 지성이어서… 기름이 많아서 조금만 관리 게을리하면 곧바로 트러블 나잖아.”

“응.”

“왜 대답만 잘하는 거야? …밥 먹고 곧바로 나가서, 예전에 다들 관리받았던 데 기억해? 전화해 둘 테니까, 거기 가서 얼굴 봐 달라고 해. 오늘은 내가 같이 못 가 줘.”

귀찮은데, 컵에 물을 따르던 녀석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 들었어, 끼어들며 말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어.’ 대답한다.

대체 어디까지 이해했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루치의 잔소리는 그만하기로 했다. 그리고 쌍둥이 녀석들까지 불러 식탁에 함께 앉히고, 나도 자리에 앉아 밥을 조금 떴다.

“형 왜 것밖에 안 먹어?”

반 공기도 되지 않는 밥 양을 보며 쌍둥이 중 하나가 물었다. 곧 나가 봐야 할 시간이다 대답하자, 바쁜 나를 고려하겠다는 듯 세 녀석들이 일제히 전투적으로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라곤 레토르트 카레뿐인데도 석 달은 굶은 것처럼 맛있게 먹어 대는 녀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문득 허전한 기분이 들어, 나는 슬그머니 현준의 안부를 물었다.

“응, 아까 오전에도 영상통화하고 왔는데. 왜? 형한테는 전화 안 해?”

밥풀 하나를 입가에 묻힌 쌍둥이 중 하나가 입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옆에 나머지 하나가 역시 입을 우물거리며 ‘현준이 얼굴 살쪘다.’ 하고 히히 웃었다.

그럼 다행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밥을 다 먹자마자 디저트 타령을 하는 녀석들의 등허리를 찰싹찰싹 때려 각자 약을 먹이고 얼굴을 씻게 한 뒤 소처럼 현관으로 내몰았다.

“형도 지금 나갈 거야? 이거 들어 줄까?”

투덜거리며 신발을 구겨 신던 녀석들이 문득 신발장 앞의 여행 가방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곤 대답도 듣지 않고 곧바로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케이를 만류하며 나는 먼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쌍둥이들은 피스타치오 들어간 초콜릿, 과자, 아이스크림, 하여튼 조금이라도 들어간 건 먹으면 안 돼. 새 매니저한테 확실하게 말해 둬. 그리고 케이도 조만간 컴백해야 하니까 알아서 관리 좀 잘 받으러 다니고, 어?”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뒤를 따라나서며 잔소리를 해 대는 것에, 이제 배부른 세 녀석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아아아―’ 따분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알았어, 말하고 나는 인사를 대신해 한쪽 손을 힐긋 들어 보였다. 닫히는 문안에서 녀석들이 히히 웃으며 장난스럽게 손을 휙휙 저어 보였다.

“케이, 지금 곧바로 관리실 가야―”

급한 마음에 빠르게 말을 이었지만, 문이 먼저 닫혀 버렸다. 층수 표시판을 멍하니 쳐다보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그제야 손목시계로 시선을 내렸다. 시간이 빠듯했다.

잰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해치우고, 베란다 밖으로 녀석들이 주위를 어슬렁거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나는 현관에 세워 둔 여행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기차역으로 가자 주문을 한 뒤 버릇처럼 또 손목시계를 힐긋거리자, 급하다 생각했는지 운전기사는 평일 한낮의 도로를 쌩쌩 내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몸을 단단히 누르고 있는 안전벨트를 다시 한번 더듬어 확인했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려 멍한 시선을 던지는데, 문득 호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어 액정을 확인하니, 김 실장이었다. 여보세요, 말하기도 전에 그는 휴대폰 너머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진짜 이럴 거야?! 여승재 직접 오랬지, 누가 장기욱 대신 보내랬어?!」

“…….”

그의 목소리가 운전석에까지 가 들렸는지,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나를 힐긋 쳐다보며 ‘더 빨리 갈까요?’ 물었다. 비식 웃으며 이 정도면 괜찮다 대답했는데, 김 실장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는지 또 ‘뭐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연속으로 계속 농땡이 치는 거 그냥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이거 진짜 안 되겠네?」

“실장님, 저 사직서 냈다고 말씀드렸―”

「나는 그거 못 봤어, 인마! 사직서 내려거든 나한테 직접 갖고 와서 구경이라도 시켜 줘!」

“…지금은 어딜 가는 길이어서요,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어디 가는 길인데!」

“경주요.”

「경주? 불국사 있는 경주 말하는 거야?」

차분히 행선지를 밝히자, 왁왁 소리를 지르던 김 실장은 전화상으로도 의아해하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목소리로 ‘엥?’ 하고 우스꽝스럽게 물었다.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예, 그 경주요. 한 번도 가 본 적 없어서.”

「엉? 대한민국에서 초중고 다닌 사람 중에 경주 한번 안 다녀와 본 사람이 어디 있어? 소풍이나 수학여행 단골 코스잖아.」

“소풍이나 수학여행에 매번 빠져서요.”

「여승재, 놀 줄 모르는 범생이였구만.」

글쎄, 왜 하필이면 경주였을까. 그의 말대로 대한민국에서 초중고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소풍이든 수학여행으로든 다녀와 봤을 법한 곳이었지만, 내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아이들 매니저로 있으면서 전국을 다 돌아다닌 것 같은데, 희한하게 그곳만은 또 예외였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유년과 바쁘게만 지냈던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 경주의 호텔을 예약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라디오 광고 중에 끊임없이 ‘천년고도 경주’ 하는 소리를 되풀이해 듣던 것이 기억이 나, 뜬금없이 행선지를 경주로 정한 것뿐이었다.

천년 동안의 수도, 그건 꽤 멋지고 웅장하며 또 그만큼 현실성이 없는 아득한 느낌이었다. 천년, 그 거대한 시간은 나를 무겁게 짓눌러 왔다. 아… 천년이면 될까, 생각했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여튼 너 인마!」

그리고 도로 현실로 끌어내듯 휴대폰 너머에서 김 실장이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범생이 소리에 흐흐 웃고 있던 나 역시 바짝 정신을 차리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나 정말 그 인간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야. 게다가 이 며칠, 아예 코빼기도 안 보였단 말이야, 그 인간. 아니, 약혼식 저 혼자 해? 결혼식도 아니면서 무슨 유난이냐고, 이게. 자고로 약혼식은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하는 거잖아. 안 그래도 저 대신 처리할 게 산더민데 왜 바쁜 사람 오라 가라야, 엉? 내가 너 대신 장기욱이랑 여기 와서 할 일이 뭐냐고 대체. 부케 받아? 나 오늘 부케 받아서 육 개월 안에 시집가야 되는 거냐? 고교 동창끼리 둘이 짰어? 너도 덩달아 말 더럽게 안 듣지. 내가 요즘 살맛이 나겠냐, 안 나겠냐, 엉?」

“…….”

김 실장은 한풀이를 하듯 한참 동안이나 징징거리며 잔소리를 쏟아 냈다. 약혼식 제대로 하는구나, 나는 그 생각뿐이었다.

“실장님, 그냥… 대신 축하 잘해 주세요.”

「그 인간 축하해 줄 마음 없다니까, 그러네!」

“거기, 대단한 사람들 많이 올 거예요. 얼굴 익혀 둬서 손해 볼 것 없잖아요.”

「권무진 약혼식에서 비즈니스 하리?!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줄 아냐? 꽃 나르고 있다, 꽃. 기획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나한테 이런 거 시켰어, 여승재. 이런 상황에서 무슨 얼굴을 익혀 둬, 차라리 가면을 쓰고 싶다. 그러니까 너 당장 오란 말이야! 와서 그 자식하고 대신 싸워 줘! 그 인간이랑 맞장 뜰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잖아!」

“…….”

대신 싸워 달라는 소리에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휴대폰 너머로 김 실장이 거의 울부짖다시피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나는 죄송하다 말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하고 있구나, 약혼식. 휴대폰 전원을 꺼 버리며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는 예약한 기차 출발 시간보다 15분 앞서 역에 도착했다. 늦을 것 같아 차라리 다음 기차를 타자 절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터라, 운전기사에게 요금에 웃돈을 조금 더 얹어 주었다.

무거운 가방을 끌며 역으로 올라가다 말고, 나는 또 다른 손님을 태우고 떠나는 택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문득 모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색깔이 바뀌는 신호등, 혼잡한 도로 한쪽에서 성인 남자가 타고 가는 자전거의 바퀴살, 고층 빌딩에 걸린 광고 간판, 나는 이제 그런 것들로 시간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스파이더맨 손목시계는 플랫폼으로 들어서기 직전 풀어 휴지통에 버렸다. 허전한 왼쪽 손목의 뼈마디로 바람이 숭숭 불어 드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그런 내게 신경을 쓰지 않을 테지만, 어쩐지 모두의 시선이 내 왼쪽 손목에 와 닿는 것 같아 나는 서둘러 먼저 도착해 있는 해당 열차에 올라탔다.

열차 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동이 많지 않은 평일 시간이어서 얼핏 확인한 다른 칸에도 역시 빈자리가 많았지만, 아예 한 자리도 차지 않은 것이 아무래도 의아해 지나는 승무원에게 표를 확인시켰다. 승무원은 친절한 미소를 띤 채 문제가 없다는 확답을 주었다.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열차는 덜컹이며 출발했다. 천장에 매달린 작은 모니터에서 해당 도착역이 표시되었다. 그제야 안심하고 가방을 짐칸에 올리기 위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도무지 힘에 부쳐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어 그 멍청한 꼴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생각했다. 그리고 가방을 차창 쪽 의자 위에 털썩 놓아두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의 열차 칸에서 승무원이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들어서다 말고 휑하니 빈자리를 둘러보곤 언뜻 ‘혼자세요?’ 물었다. 당황스러워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글쎄요.’ 답했더니, 그 역시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경쾌하게 웃어 보이곤 다음 칸으로 건너가 버렸다.

잠시 후 먹을거리를 담은 카트를 끌고 들어온 직원 역시 어리둥절한 얼굴로 휑한 자리를 둘러보곤 내게 눈을 맞추어 왔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어깨를 으쓱이며 어색한 웃음을 띠어 보였다. 그리고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육중한 기차 바퀴가 오후의 열에 달구어진 레일을 빠르게 밟고 구르며 내는 요란한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오른편 의자 위에 놓아둔 여행 가방 위로 기우뚱 몸을 기울인 채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얼마 가지 않아 열차는 가장 가까운 역에 멈추어 섰다. 작은 역에서 올라타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내가 있는 칸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듯했다.

가방 위로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나는 열차가 다시 출발하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차창 밖으로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뒤쪽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또 승무원이거나 카트를 미는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걸음은 내 바로 뒷자리에서 우뚝 멈추곤 정말 뒷좌석에 털썩 앉는 것이었다.

반갑다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우스꽝스러운 꼴이 될 것 같아 참았다. 그리고 한참을 더 비스듬한 자세로 멍하니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뒤에서 박자를 맞추듯 내가 앉은 좌석을 툭, 툭, 걷어차기 시작했다. 신경이 거슬려 눈치를 주기 위해 팔을 뻗어 차창에 매달린 커튼을 획 하니 걷었지만, 뒷사람은 어지간히 무신경한지 내 기분 따위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기어이 타이밍을 고르며 고개를 돌려 ‘저기요.’ 말하려는 찰나, 발길질이 뚝 끊겼다. 이제 됐다, 하고 도로 가방 위로 풀썩 기대어 누웠다. 그러자 또 발길질이 이어지는 것이다.

“…….”

그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뒷좌석의 사람은 내 참을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을 만큼만 발길질을 하다 멈추곤 했다.

그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리듬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애써 추측해 보려 했지만 그따위 발길질에 도무지 음악성이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차라리 많고 많은 다른 빈자리로 가 버리자 싶어 옆자리에서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서는 찰나였다.

역시 거의 동시에 뒷자리의 사람 역시 불쑥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척이었다. 그러곤 먼저 자리를 빠져나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내 바로 왼쪽의 좌석으로 털썩 가 앉는 것이었다.

“…….”

짧게 눈이 마주쳤다. 무감각한 일상의 풍경처럼 스쳐 봤을 뿐이었는데, 나는 다 알 것 같았다. 측량할 수 없는 이 설움은 천년이 흘러도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발목이 댕강 잘려 나가는 기분에 도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 좌석에 올려둔 가방 위로 철퍼덕 쓰러지듯 엎드려 버렸다.

덜컹덜컹, 기차 바퀴가 레일을 밟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먼 소음 위로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 기차, 어디 이름 모를 섬으로 가는 거 맞아?”

“…얼굴, 그게 뭐야.”

손등 위로 이마를 누른 채 내뱉는 내 목소리는 꼭 투정부리는 어린애처럼 웅얼거리며 나왔다. 최악이었다.

“우리 아버지, 예순이 훌쩍 넘어서는 야구에 심취하셔서 말이야. 이번엔 그나마 골프채도 아니고, 야구 배트였어, 씨발.”

무진은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다 찢어진 입가가 당겨 오는지 ‘아, 아……’ 하고 신음을 흘렸다.

목 안이 먹먹해져, 나는 차라리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덥석 감싸 덮어 버렸다. 그리고 겨우 새 울음 같은 목소리를 끌어냈다.

“놔달라고 했―”

“안 되겠어.”

그러나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말끝이 잘렸다. 무진은 자리 밖으로 기다란 다리를 쭉 뻗으며 이어 말했다.

“안 되겠더라고.”

“…….”

“죽겠어. …네가 아픈 걸 어쩌라는 거야. 안 돼, 어차피 나는 개차반 같은 놈이잖아. 내가 죽게 생겼는데, 미쳤어? 네 사정을 봐주게? …안 되겠어, 죽겠어, 정말 콱 죽겠단 말이야. …씨발, 너 아니면 발기도 안 돼.”

짜증스럽다는 듯 그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앞좌석을 덜컹! 걷어차며 말을 마쳤다.

나는 울지 않았다. 눈물을 짜내어 그에게 빌고 싶었으나, 도무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콱 죽겠다는 그의 말처럼 내가 꼭 그렇게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잡아.”

그리고 문득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고개를 들어 돌아보자, 무진이 팔걸이 위로 털썩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네 앞에서 사람 하나 죽어 나가는 꼴 보고 싶지 않음, 잡아.”

입을 벌린 채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고만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다시 한번 앞좌석을 쿵! 걷어차며 협박조로 말했다.

숨은 점점 더 가빠져 왔다. 눈물이 나와야 그에게 두 손을 싹싹 맞비비며 좀 놔달라고 빌 수 있겠는데, 눈물은 이미 고체가 되어 버린 듯 뜨건 눈가 안쪽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으, 으으…….”

나는 거의 눈이 뒤집힐 만큼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이 파랗게 질렸다. 무진은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않고 그런 나를 빤히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네가 미워, 컥컥거리며 나는 속삭였다. 무서운 얼굴로 내내 쏘아보고만 있던 그가 씩 웃어 보였다. 네가 정말 미워, 벌린 입에서 침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손톱을 세운 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

무진은 내 비어 있는 왼쪽 손목을 포악스럽게 낚아채 잡아당겼다.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고, 그의 멱살을 와락 움켜쥔 채 입을 맞추었다, 혀를 섞었다, 숨을 나눠 쉬었다. 그리고 우리는 키스했다.

그제야 단단했던 눈물이 턱 끝으로 떨어졌다. 그는 내 턱을 핥아 눈물을 빨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찢어진 눈가와 이마와 입술을 핥아 피를 빨았다.

폭력적인 굴복과 순종에 대한 욕구가 온몸을 휘감았다. 당장 바닥으로 기어 내려가 그의 발가락을 핥고 싶었으나, 그는 내 머리통을 단단히 감싼 채 더 이상 아래로 내려보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의 숨을 절박하게 탐했다.

안다, 우리의 섬광은 이미 한번 불발로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그의 무자비한 나라에서 길을 잃은 채 헤매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가. 그는 내 하나뿐인 폭군이며 파괴된 우주인 동시에 아들이자 아버지, 그리고… 내 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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