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thirteen (16/41)

Chapter thirteen

“나쁜 년.”

“…….”

소주잔을 꺾으며 김 실장은 조용히 욕설을 내뱉었다. 익숙한 욕설에 뜨끔한 기분이어서 나는 그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젓가락 끝을 테이블 위에 뚝 세운 채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나아―쁜 년.”

결국 김 실장은 스스로 잔을 채우곤 또 한잔을 털어 넣으며 진득하니 욕설을 질겅였다. 나는 그가 다시 집으려는 술병을 얼른 치웠다.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벌써 많이 취하셨어요, 그만하시죠.”

“…흥.”

술을 달라 손을 내미는 것에도 고개를 저으며 만류하자,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의 김 실장은 입술을 실룩이며 불만 그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는 정혜주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 무렵에는 벌써 커튼 사이로 푸른 새벽빛이 스며들어 오는 중이었다. 잠깐 눈 붙였다 다시 일어나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그대로 새벽을 지낸 후 회사로 나가 김 실장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물가물 감기는 눈꺼풀에 이내 쓰러지듯 잠이 들어서는 정오가 넘어서야 일어났다. 더욱이 곧바로 그에게 연락 또한 닿지 않아, 결국 저녁에 더 가까운 시간에서야 만날 수 있었다.

‘정혜주 씨가 떠났습니다.’

무어라 포장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언제나처럼 직설적으로 결론부터 꺼내어 보고하자, 아이들이 준 막대사탕을 돌돌 빨던 김 실장은 그것을 아드득 깨물며 대뜸 ‘고기 먹으러 가자.’ 했다.

고기를 구우며 나는 그녀가 남긴 자체 촬영 회견 영상이 담긴 메모리칩과, 떠나며 나누었던 말들에 대해 모두 전해 주었다.

고기 한 점이 까맣게 탈 때까지 젓가락으로 꾹 누른 채 이야기를 듣던 김 실장은 돌연 번쩍 손을 들어 ‘여기 소주요―.’ 주문을 하곤 그때부터 연거푸 잔을 들이켜는 것이었다.

…좋아했던 걸까. 동경이나 연민의 이름을 붙이기에는 ‘나쁜 년’ 소리가 퍽이나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내 추측은 그의 주정이랄까 취중진담에 의해 곧 사실로 드러났다.

“여승재, 너 내 대학 전공이 뭐였는지 아냐?”

열판에 바싹 눌어붙은 고기 한 점을 집요하게 젓가락으로 긁어내던 그가 문득 꼬인 발음으로 물었다. 그의 앞으로 잘 구워진 고기 한 점을 밀어 주며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것을 날름 집어 먹으며 김 실장은 스스로 답을 내 주었다.

“토목건축이었다, 토목건축. …흐흥, 그런데 뭔 놈의 연예 기획사냔 말이다? 그것이 말이다? 정혜주 그게 어렸을 때부터 참… 이뻤단 말이다. 정식 브로마이드는 물론이고, 서점에서 잡지 사진 몰래 오려 방안 벽지를 다 그걸로 덮었단 말이지. …겨우 좋은 대학 입학해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마침 정혜주가 있다는 기획사라는 거야. 돈 안 받아도 좋으니 제발 써 주십시오 빌었지. 거기서부터 시작했어. 화장실 청소부터 했다.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했지만 그 한 번이 한 달 월급보다 좋았어. 그러다 졸업 후에 전공하곤 전혀 상관없는 사무직으로 들어앉고, 자청해서 신인 매니저 맡아 경력 키우고, 이 바닥 더럽고 매운맛 다 보고 조금씩 인정받아 겨우 실장 자리 꿰차고 앉았는데, 것보다 좋은 게 정혜주 담당이 된 거였지. 아아… 그런데 이게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거야,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흐흐흐.”

회상하듯 테이블의 한쪽 모서리를 먼눈으로 바라보며 김 실장은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나는 조용히 따라 웃으며 내 잔에도 술을 조금 따르다가, 차를 가져왔다는 생각에 술병을 다시 테이블 위에 탁 놓아 버렸다.

기회라는 듯 김 실장은 냉큼 손을 뻗어와 내 잔을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홀짝 잔을 기울여 비운 뒤 ‘캬―’ 소리를 내곤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더냐? 한 달에 한번 생리대 심부름했던 거. 그건 예삿일이었어. …임신 테스터기까지 사다 줬을 때는… 울었다. 그리고 그 주에 바로 선봐서 지금 마누라 만난 거야. 우리 마누라한테 비밀이다, 응? 그렇게 쳐다보지 마, 인마. 아무 일도 없었어, 결혼 전에도 후에도. …전 대표랑 그런 사이라는 건 담당 맡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한 사람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모든 걸 알게 되어있어. 그러다 보면 또 모든 걸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래, 넌 그렇게 사는 게 정답인가 보다 싶었어. 마누라하고 정 붙이고 살면서는, 그리고 애들 태어난 후로는 담담해지더라. 그래서 아아, 나도 이제 늙었구만― 생각했지. …그런데, 여승재, 그런데에―”

덤덤하게 말을 잇던 김 실장은 문득 어린애 칭얼대듯 말끝을 길게 늘이다가, 콧구멍을 발롱거리며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쿵,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나쁜 년, 나쁜 년’ 훌쩍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그저 주위의 술병이나 잔을 옆으로 치워 주기만 했다. 그러다 돌연 그가 번쩍 고개를 들곤 ‘여승재.’ 부르며 시퍼런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정혜주가 마지막으로 왜 너한테 간 거냐? 평소 너 이뻐하더니…… 둘이 설마 무슨 일 있었던 거냐? 응? 그런 거지?”

“손도 안 잡아 봤어요.”

“…….”

시큰둥한 목소리로 곧장 대답하자 그는 킁, 코를 훌쩍이곤 겸연쩍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시 테이블로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또 잔뜩 졸린 목소리로 ‘여승재에―’ 하고 내 이름을 길게 늘여 부른다.

‘네에―’ 하고 다정하게 답하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그저 ‘말씀하세요.’ 정도가 최대한 성의를 다한 대꾸였다. 불만이라는 듯 김 실장은 또 ‘흥’ 소리를 내곤 테이블 위에서 고개를 틀어 힐긋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메모리 안에 들었다는 거, 직접 찍었다는 거… 봤냐? 확인했어?”

“…아니요. 못 보겠어서. 이거 어떻게 할까요.”

“네가 받은 거니까 네가 해결해, 인마. 편집을 따로 하든, 그대로 회사에 넘기든.”

그는 어느새 마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한 번 ‘하여튼 나쁜 년…….’ 중얼거리고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맞은편에서 쿨쿨 코를 골며 엎어져 누운 그를 두어 번 어깨를 흔들어 깨우다가, 포기하고 자리에 털썩 앉아 버렸다. 그리고 남은 고기 몇 점을 다 집어먹고 침을 꼴깍 삼키다가 기어이 술도 한 잔 따라 마셔 버렸다.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되었을 때는 나도 차라리 ‘그런데에―’ 하고 칭얼대다가 뻗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그리고 이대로는 안 되겠지 싶어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기욱아, 미안한데… 운전이랑 사람 운반 좀 해 줘야겠다.”

이 근처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다던 녀석은 정말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을 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뻗은 김 실장과 덧없이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나를 번갈아 보다가, 내 턱짓에 김 실장을 번쩍 업고 먼저 가게 밖으로 나갔다.

계산을 치르고 따라나서자, 녀석이 뒷좌석에 김 실장을 구겨 넣느라 고생 중이었다. 도와주고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타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데, 기욱이 시동을 걸자마자 뒷좌석에서 ‘정혜주 나쁜 녀언…’ 하고 축축한 목소리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오디오로 손을 뻗어 음악을 틀고 볼륨을 높였다. 기욱이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흐…….’ 웃었다.

혹시라도 김 실장이 계속해서 정혜주에 관한 술주정을 하며 실수라도 할까 염려되어 차라리 술이 깰 동안 내 집이나 기욱의 집으로 모실까 했지만, 그편이 더 오해를 받기 십상인 것 같아, 결국 기욱에게 곧장 김 실장의 집으로 가자 일렀다.

그리고 아직 해가 지기 전부터 고주망태가 된 남편을 맞이한 형수에게는 정혜주 사건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마신 것이니 이상한 술주정을 하더라도 그저 헛소리로만 여겨 달라, 부탁인지 양해 말씀인지를 전하고, 나는 다시 기욱이 모는 차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승재 형, 집으로 갈까요?”

서너 잔 마신 것으로 티가 나는지, 기욱이 그런 나를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우선 기획사 대표라는 인간에게 정혜주가 남긴 메모리칩에 대해 알려야 했다. 김 실장은 내게 해결하라 했지만, 내 권한 밖이었다.

“…아니, 우선 병원에 좀 들러야겠다.”

축적된 피로에 옅게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기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기어를 넣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한쪽으로 추하게 꺾여 있던 목이 뻐근했다.

짧은 시간 동안 깊은 꿈에 빠져 있었던 것처럼 혼몽한 기분에 나는 기욱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안전벨트도 풀지 않고 자리에 앉아 눈꺼풀을 슴벅이고만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어떤 꿈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깐 물건만 전해 주고 내려올 거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

차 밖으로 내려서서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러두었다.

그리고 얼굴에 고인 묵직한 피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좌우로 목을 꺾으며 한 발자국 내딛는데, 뒤편에서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 한 대가 부앙―! 사나운 소리를 내며 바로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갔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씨앙!”

운전석으로 돌아가던 기욱이 차체로 털썩 몸을 기우는 나를 힐긋 확인하자마자 와락 콧등을 구기며 당장 오토바이를 향해 달려들 듯이 과격한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다.

순식간의 소동에 병원 건물 앞을 지나던 환자들과 관계자들이 휘둥그런 눈으로 그런 기욱을 돌아보았다. 이중으로 놀라, 나는 차라리 얼얼한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은 채로 ‘기욱아, 기욱아.’ 반복해 녀석을 불러 간신히 고개를 돌아보게 할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팔다리를 움직여 보여 주자 기욱은 그제야 꽉 말아 쥐었던 주먹을 풀며 겸연쩍은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묵묵히 다시 운전석에 가 앉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도 병원 건물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아무래도 놀라며 어깨 근육이 함께 경직되었는지 맥연히 불쾌한 기분이 감돌았다. 로비를 걷는 동안엔 유난히 병원 특유의 약품 냄새가 강하게 느껴져 불편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지만, 다들 편안한 표정들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혼자 너무 유난을 떠는 것일까, 생각하며 굳은 어깨를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문득 내가 맡고 있는 냄새가 다름 아니라 내 숨결에 섞인 소주 냄새라는 것을 깨닫곤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비식 헛웃음을 흘려 버렸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바삐 걸어오던 누군가가 갑자기 멈춰선 나를 짐작지 못하고 그대로 한쪽 어깨를 툭 건드리며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바쁜 걸음을 계속하며 어느새 뒤가 된 나를 힐긋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여 사과를 해 왔다.

“아, 실례합니다.”

“아니요, 괜찮…….”

여전히 혼몽한 기분에 나는 내가 떠밀린 것도 모르고 있다가, 남자의 사과를 받고서야 주춤 발을 떼 균형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대로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급하게 시선을 돌리자, 남자 역시 예사로운 부딪침에 그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계속했다.

“…아.”

그러다 몇 걸음 더 나아가다 돌연 자리에 우뚝 선 남자는 뒤늦게 기억해 냈다는 듯 ‘아.’ 소리를 내며 또다시 나를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무진의 둘째 형이었다.

고결한 먹물의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반가워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것에, 나는 최대한 어깨를 곧게 펴고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른 시간부터 소주나 마시고 다니는 폐인으로 보이기는 싫었다. 그에게는 그랬다.

무진에게는 차라리 남창 취급을 당하며 자학과도 유사한 쾌감을 느낀 것에 대해 부정할 수 없고, 애초에 그의 앞에선 딱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때 그를 향한 배신의 조력자가 돼 주었던 남자에게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의 뿌리는, 그래, 일테면 정혜주의 말처럼 ‘쪽팔려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때의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 또 한 번의 마주침으로 그는 어느 시간까지 되돌려 떠올릴 수 있을까. 마주 선 채 ‘혹시―’ 하고 말문을 여는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곧게 바라보며 나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 우리 어디에서 보지 않았나요?”

그러나 남자는 희미한 눈썹을 모아 찌푸리며 곤란하다는 얼굴로 모호하게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 헛웃음을 흘릴 뻔한 것을 겨우 입매를 단단히 해 참을 수 있었다.

내게는 뿌리까지 뽑혀 흔들렸던 사건이 타인에게는 이리도 하찮은 과거의 한 톨로 남은 것이 우스웠다. 그리고 그것은 내 존재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었다.

무진이 느낀 것이 바로 이것이었을까. 그래서 나를 파티에 데려가 이 남자와 마주치게 했던 걸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우스워지고 싶지 않다면 차라리 영원히 묻어 버려야 한다고.

그렇다면 나 역시 이 남자에게만큼은 뻔뻔스러워져야 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우스워진 내 존재를 위해서.

“…창립 기념 파티에서, 권 대표와 동석했었습니다.”

“아! 그렇지. 맞아요, 맞아.”

내 대답에 남자는 그제야 또렷이 기억난다는 듯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 여전히 청교도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가 그리도 환하게 반기는 태도에서는 그 주위로 이상한 성채가 오로라처럼 뿜어져 나오는 환각이 들기도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아, 혹시 무진이 병문안 오는 길인가요?”

“아니요, 보고할 사항이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난 이제야 시간이 나게 되어서 처음으로 녀석 상태를 보러 오는 길입니다. 부인과 아이들은 먼저 들어가 있을 거예요.”

“예…, 그럼 전 이만.”

어서 이 밝은 빛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어두운 숲속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선교하기 전에 먼저 발길을 돌려 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음?’ 소리를 내며 나를 붙들었다.

“왜, 보고할 사항이 있다면서요. 괜찮아요, 일 문제라면 잠시 자리를 피해 줄 테니. 같이 올라갑시다. 그냥 가면 괜히 말 걸었나 싶어 미안해지는데.”

“…….”

부드러운 권유에 나는 결국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긴, 뻔뻔해지기로 했으면서 꽁무니를 빼는 것은 더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내 숨결에서 맡아지는 술 냄새를 극도로 조심하며 그의 곁에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먼저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는데, 그런 내 왼쪽 손목에 채워진 캐릭터 시계로 언뜻 남자의 시선이 힐긋 와 닿았다.

“내 아들이 좋아할 만한 손목시계…… 로군요.”

“…….”

손목시계, 뒤로 지체되는 어색한 틈 속으로 십여 년 전의 시간이 불쑥 흘러든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쥐가 난 부분이 점점 확장되는 기분에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타셔야죠.”

먼저 안으로 올라탄 남자가 침착한 권유조로 나를 불렀다. 좀 더 멍하니 섰다가, 결국 뒤에서 떠미는 사람들에 의해 함께 안쪽으로 들어서야 했다.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움직였다. 중력을 거르며 육중한 기계에 몸을 싣고 상승하는 동안 나는 어찔한 현기증을 느껴야 했다. 좀처럼 머릿속에 가득 낀 안개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내 옆에 선 남자는 왜인지 내내 조용한 웃음을 머금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얼핏 자신을 힐긋 쳐다보는 나를 역시 조금 돌아보다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모아 찌푸리며 ‘풉.’ 하고 웃음을 흘리는 것이다.

“…왜 그러시죠?”

“아, 미안. 갑자기 좀 웃긴 생각이 나서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내 날 선 반응에 남자는 다시 온화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중간에 멈춰선 엘리베이터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내리자, ‘저기, 혹시…’ 하고 은밀한 목소리로 물어 온다.

“그때… 맞죠?”

“…….”

“미안해요, 미리 알아보지 못해서. 너무 예전 일이라… 내가 원래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해요. 그래도 그쪽이 워낙 특출한 외모여서 잔상이 남아 그나마 이렇게라도 기억해 낸 거지. 아…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이전에 파티에서 만났을 때도 얼핏 떠오르다 말았거든.”

“…….”

“어쨌든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그 후로 갑자기 보이지 않아서 내심 궁금했답니다.”

발가벗겨진 채 군중 속으로 밀어뜨려진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반가워하는 태도였다. 거짓은 없었다. 그것이 나를 더 치욕스럽게 만들었다. 그저 남자가 그런 나의 내부를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 내립시다. 걱정 말아요, 일 이야기 하는 데 방해 안 할 테니.”

해당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이번에도 먼저 밖으로 나가선 남자가 온화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나는 다음에 오는 것이 좋겠다 했지만,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왜요?’ 하고 순박하게 물었다.

이 남자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얼마나 더 나를 초라하게 만들 것인가, 나는 절반쯤 체념한 채 내내 손안에 쥐고 있던 정혜주의 메모리를 더 꽉 움켜쥐며 결국 걸음을 내디뎠다.

나란히 복도를 걷는 도중, 남자가 들뜬 목소리로 이어 말을 붙여 왔다.

“그런데 무진이와 이렇게 다시 만나는 걸 보니, 다행이네요. 어떻게 잘 화해를 했나 봐요.”

“…….”

툭, 발길을 떨어뜨리며 우뚝 멈추어선 채 나는 그를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박았다. 음? 하고 남자 역시 멈춰 선 채 나를 돌아보았다. 그에게서는 어떤 악의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해맑고 천연해 보여 나를 더 우스운 존재로 만들 뿐이었다.

“화해라고 할 만한……, 그저 일 때문에 보는 것뿐입니다.”

꺼림칙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대꾸한 뒤, 나는 어서 메모리칩을 무진에게 던져 주고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선뜻 병실 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서 버렸다.

그러나 병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사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인지, 침대 위에는 흐트러진 시트와 그가 읽고 있던 책으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녀석이랑 화해를 안 했다는 말은… 그러니까, 아직 서로 오해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순진스러운 얼굴로 의아하다는 듯 물어 왔다. 누구보다 상세히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 무슨 허튼소리인가, 온전한 기억이 아닌가 보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마음에 덧없이 손안의 메모리칩을 굴리며 냉담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일반 서류였다면 침대 맡에 메모와 함께 놓아두고 어서 건물 바깥으로 나가 버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함부로 맡길 수도 없는 물건에, 초조한 마음으로 손안의 것을 만지작거리며 병실 안을 뚜벅뚜벅 걸어 다니자,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가 돌연 ‘풉!’ 하고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

참을 수 없는 불쾌함에 노골적으로 찌푸린 얼굴로 길게 숨을 내쉬며 가만 시선을 맞추자, 그는 흡사 장난질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이크!’ 하고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힐끔 눈치를 살피곤 이내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빛내며 바짝 다가와 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재미있네요, 두 사람. 아니, 정말 마음들이 좋네요. 이거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요. 배워야겠어요, 그런 포용력이라니. 어쨌든 정말 다행스럽기도 하고.”

그는 멀뚱히 선 내 주위를 빙글 돌아다니며 감격한 듯한 얼굴로 떠들었다.

그 제멋대로의 해석에 나는 기어이 ‘하……!’ 헛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내 입안에 고인 독한 소주 냄새가 골을 얼얼하게 마비시키는 기분이었다.

“그런 것 아닙니다. 용서 같은 거…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죄송합니다, 더는 그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전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럼 혹시.”

그리고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획 하니 발길을 돌리는데, 이내 시무룩해진 얼굴로 남자는 바로 앞을 지나치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집요하게 말을 붙이는 것이다.

“그거, 내가 미안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가……?”

“아까부터 계속… 다른 일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일방적인 주절거림에, 단어를 겨우 뗀 갓난쟁이를 상대할 때처럼 기진맥진해져 나는 잠시 멈춰선 채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대꾸해 주었다. 그리고 ‘그럼 이만.’ 짧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며 서두르다시피 다시 발길을 옮기는데,

“무진이 이메일, 그거 말이에요.”

“…….”

또 불쑥 던져오는 말엔 무릎이 툭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 일 맞죠? 내 기억력이 이래요, 도무지 여러 가지가 섞여서는. 음… 맞아요, 이메일로 그런 거, 우연히 보고선 장난스러운 생각에 말이에요.”

“…….”

나는 잠시 고장 난 타자기가 된 것 같았다. 남자의 말이 제대로 머릿속으로 입력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간신히 말뜻을 파악한 순간 뼛속까지 소름이 돋은 것은, 남자의 모호한 말의 정체 때문이 아니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정결하고도 순진스러운 얼굴 때문이었다.

“…무슨…”

“그때 아마… 문득 짓궂은 기분이 들어서, 내가 그런 것 같은데……?”

조심스럽게 대답하며 남자는 난처하다는 듯 설핏 웃음을 머금은 채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왜일까, 나는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는 것을 보며 그 역시 안심한 듯 환하게 따라 웃었다.

“…권무진 이름으로 비디오… 영상 퍼트린 게… 그러니까…”

“그러게요, 그때는 참… 누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는 호기심이랄까… 아니, 그냥 재미있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은데, 어려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 게다가 당사자들이 이렇게 다시 어울리는 걸 보니까… 음, 다행스럽다 생각했는데 또 서로 화해나 용서는 안 했다고는 하니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고… 조금 혼란스럽네요, 그렇죠?”

“…….”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에 나는 얼른 손을 뻗어 아무것이나 붙잡고 몸을 기대었다. 투둑,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내가 붙잡은 것이 창문에 걸린 커튼이었다. 그것이 절반쯤 뜯어졌을 때, 마침 입구에서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무진이 링거가 걸린 삼각대를 끌고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 왔구나. 좀 괜찮니?”

남자는 사심 없는 얼굴로 그를 반기며 물었다. 그러나 무진은 내가 아무렇게나 꼭 붙잡아 버티고 있는 커튼처럼 형편없이 구겨진 얼굴이었다.

“지금… 뭐? …뭐가, 무슨, …어?”

술을 마신 것처럼 곧 홧홧하게 달아오른 안색으로 무진은 자신의 형을 쳐다보며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아, 들었구나?”

남자는 쑥스러운 듯 양쪽 어깨를 조금 으쓱이며 한숨처럼 작게 속삭여 대답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아주 잊고 있었던 터라 말이야. 둘이 만난 걸 미리 말해 줬으면 좀 더 빨리 오해를 풀어 줬을 텐데…….”

“너, 이―!”

“아빠아―.”

무진이 경악으로 크게 입을 벌린 채 삼각대를 끌고 덤벼드는 찰나, 문밖에서 천사처럼 하얀 어린애가 우다다 뛰어 들어와 남자에게 풀쩍 안겨 들었다.

남자는 우선 진정하자는 듯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보이며 ‘다음에, 다음에.’ 하곤, 익숙하게 아이를 편안히 안아 들었다.

“엄마는?”

“엄마 저어기―.”

“저어기가 어디야. 아, 그래, 기후야, 너 저런 손목시계 사 줄까?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남자는 문득 나를 가리켜 보이며 아이에게 물었다. 천사 같은 얼굴의 어린애가 내 손목에 감긴 시계를 확인하곤 ‘와아―’ 환호하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피에로처럼 입을 길게 벌린 채 비실비실 웃고 있었나 보다. 무진이 그런 나를 쳐다보며 화를 참는 듯 끅끅거렸다. 그리고,

“아……!”

기어이 내가 붙잡아 버티고 있던 커튼이 우두둑! 끝까지 뜯겨 버렸다. 나는 붙잡고 있던 것과 함께 바닥으로 풀썩 쓰러져 뒹굴었다.

그런 나처럼 무진이 한쪽 무릎을 훅 굽히며 쓰러질 듯하다가, 급하게 삼각대를 붙잡고 버티어 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뒤로 세련된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가 ‘도련님, 왜 그래요?’ 물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으, 으, 읏, 으아아아아―!”

억누른 신음을 간헐적으로 내뱉던 무진이 기어이 눈이 뒤집힌 채 삼각대를 치켜드는 것까지 보고, 나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무언가 와장창 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여자가 톤 높은 비명을 지르고 어린애가 왕왕 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망치처럼 머리를 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몇 명의 남자들이 병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네발로 기었다. 전쟁터에서 포환을 피하기 위해 그러하듯, 나는 바닥에 납작하게 몸을 붙인 채 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간 후에는 정신없이 발을 굴렀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계속해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추악한 내 운명이 아가리를 쫙 벌린 채 꿈틀거리며 쫓아올 것만 같았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들이 그런 나를 수상하게 쳐다보았다. 아, 아, 아, 나는 이상한 신음까지 흘려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우스웠다.

그리고 1층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정신없이 발을 굴렀다. 그러다 로비에서 미끄러져 우당탕! 요란하게 자빠지기도 했다. 몇몇이 풉, 풉,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이윽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자, 차를 세운 채 기다리고 있던 기욱이 그런 나를 확인하곤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스, 승재 형, 왜, 왜… 무슨…”

“빠, 빨리 가자. 쫓기고 있어, 스토커가…”

어디요, 어디요, 기욱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내버려 두고 먼저 세워진 차를 향해 달려갔다. 제가요! 외치며 기욱이 재빨리 뒤따라와 얼른 운전석에 가 앉았다.

나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 기욱은 빠른 속도를 내며 그러나 흔들림이 크지 않도록 능수능란하게 차를 몰았다. 그동안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달뜬 숨을 골랐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던가, 정리도 할 수 없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묻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니기에 스토커 소리에 혹시 경찰서로 향하나 싶었다.

그러나 기욱이 차를 세운 곳은 한강변 근처였다. 무슨 축제가 있는지 사람들로 가득 차, 어느 부분 이상은 도로의 차량마저 통제되어 있었다.

개미소굴 같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며 기욱은 이제 됐다는 듯 안심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쫓길 때는 이렇게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택하는 방법은 어쩐지 어느 갱스터 영화에서 본 것 같아, 나는 비식 웃어 버렸다.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기욱은 또 한 번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를 벤치 한구석에 앉혀 놓곤 물을 사 오겠다며 어디론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제야 넘어지며 부딪친 무릎의 통증이 느껴졌다. 이까짓 거, 나는 무릎을 툭툭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그리고 마음까지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몇 번 더 무릎을 털어 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인들, 가족들, 동료친구들로 구성된 무리들이 하나같이 모두 들뜬 얼굴로 웃고 떠들며 간혹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뭔가를 하려나 보네.”

“불꽃놀이 축제 기간이잖아요!”

“아…….”

혼잣말을 하는 걸 들었는지, 벤치 앞 잔디밭에 둘러앉은 무리 중 한 명이 힐끗 뒤를 돌아보며 명랑한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기욱이 언제 올까 살폈다. 그러나 녀석은 고작 물을 구하러 멀리까지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아가 된 불우한 기분에 다리를 달달 떨며 입술을 물어뜯는데, 불현듯 잔디밭의 무리에서 ‘뼈아픈 후회―’ 하고 사뭇 비장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내게 축제 기간임을 알려 준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을 하듯 시를 읊기 시작하고 있었다. 문학소녀들인 모양이었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

어쩐지 추웠다. 나는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호주머니 더 깊이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다 얼핏 손끝에 걸리는 메모리칩을 꺼내 들고, 이걸 전해 주지 않고 와 버렸다는 생각을 했다. 어서 편집을 해서 공개를 해야 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1)

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하는 것을 들으며,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문득 그것을 내 휴대폰 뒤쪽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목을 빼고 기욱이 올까 살폈지만 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뒤쪽을 살펴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손바닥으로 휴대폰 액정을 반쯤 가린 채 메모리에 저장된 영상을 재생시켰다. 그러자, 정혜주의 얼굴이 조그맣게 떴다.

볼륨을 소거한 상태에서 목소리는 물론 들리지 않았다. 나는 손끝으로 무어라 입술을 달삭이며 말하는 정혜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언뜻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볼륨을 최소한으로 높여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내 귓속으로 정혜주가 따뜻한 음성으로 속삭여 말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후회 또한 없습니다.』

“우와아! 저기!”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검은 하늘 저편을 가리켜 보였다. 무심코 나도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아… 아…….”

거대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작고 화려한 불꽃들이 캄캄했던 밤하늘을 가득 물들였다. 그것은 혈류처럼 계속 이어 퍼졌다. 내내 멎어 있었던 심장이 빠르게 맥동한 것은 그때였다.

나는 어느새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내 눈에 색색의 화려한 불꽃이 와 박혔다. 나는 그것들을 알고 있었다. 좀 더 소박했으나, 더없이 아름다웠던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어느 여름밤의 하늘. 그리고 그것은 내 아득한 기억을 불티처럼 하늘에 펼쳐 수놓았다.

끝없이 떠올랐다. 내 뜨거웠던, 그래서 아팠던 열아홉의 날들. 그래, 나는 무진과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했고, 재료들을 사서 함께 김밥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그 외에 요리가 아닌 것들을 멋대로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우리는 함께 수영했고, 손가락 하나로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했고, 조조 영화를 보았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몰래 키스했으며, 그리고 우리는 사랑했다.

“으… 으, 윽…!”

가슴이 지끈거려 숨을 쉴 수 없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나는 주먹으로 왼쪽 가슴께를 쿵, 쿵, 두드려 댔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는 나를 흔들고 깨부수어 새로 태어나게 했다. 내 아버지, 나는 그를 종교처럼 수줍게 사랑했다. 우리는 오전에는 새벽의 잎사귀처럼 싱싱했으며 오후에는 신열처럼 들끓었다.

그러나 내가 다 망가뜨려 버렸다. 내가 진정 무서워했던 것은 그의 배신이 아니라, 언젠가 그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내 두려움이었다.

차라리 현실로 다가왔을 때에는 나는 반기지 않았던가,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혼자 처절한 배신감으로 환호하며 손목을 긋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서 허약한 스스로를 위로하며 더 견고한 성을 쌓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무얼 위해, 그저 배신감을 곱씹기 위해, 그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러나 나는 고작 좀비처럼 살아왔다. 시체 꼴을 하고선 열심히도 살아왔다.

“아, 아아… 으, 으읍…! 흐으… 으, 흐으, 으…!”

후회할까 봐 무서웠다, 그가 보고 싶을까 봐 두려웠다. 아…, 그래서 결국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가.

“흐읏… 으, 으흐읏…!”

나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던, 그러나 평생 자신을 원망하고 살라던 무진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젖힌 채 정신병자처럼 웃다 울다 했다.

마침 벤치 앞을 지나가던 가족 중 어린애 하나가 그런 나를 보곤 손짓하며 ‘어른이 운다! 어른이 운다!’ 하고 목소리를 높이자, 부모들이 아이를 얼른 데리고 가 버렸다. 그리고,

“저기… 괜찮으세요?”

연설문처럼 시를 낭독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문득, 열아홉 그 여름밤의 불꽃놀이 중 혼자 울던 남자가 생각났다. 왜 나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걸까. 그 또한 후회가 되었다. 온통, 후회뿐이었다.

기욱은 좀처럼 물을 사 들고 오지 않았다. 내가 주먹으로 가슴을 쿵, 쿵, 내리치는 동안 하늘에선 끊임없이 펑― 펑― 화려한 불꽃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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