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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가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읽고 있던 신문을 탁, 반으로 접어 보이며 ‘여어―.’ 하고 답지 않게 반갑게 맞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컨디션 좋아 보이네.”
혼자 면도까지 했는지 반질반질해 보이는 얼굴이 오히려 껄끄러워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시큰둥한 태도로 말을 건네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럭저럭.’ 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그러곤 문득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살을 가늘게 뜬 채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며 쯧쯧 혀를 찬다.
“그런데 넌 얼굴이 엉망이네. 수액이라도 좀 맞아. 그나마 볼 만한 게 얼굴밖에 없잖아, 넌. 으음, 하긴 그것도 이제 나이 들면서 서서히 시들기 시작하겠지만.”
“…….”
“아아, 2년 뒤에는 너 서른셋이지? 그땐 또 얼마나 쭈글쭈글 시들어 있을까. 게다가 그동안 나한테 수천 번은 뚫려서 거기는 아주 너덜너덜해지겠지. 스물하나… 아니지, 한창 팔팔한 스물셋 애송이한테는 눈에 차지도 않을 거야. 이를 어쩌나.”
신나게 지껄인 뒤 그는 또 한 번 쯧쯧 혀를 차고는 다시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의 기분을 끝 모르게 띄워 준 뉴스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입영 통지서가 나오지 않은 이상 갑작스러운 결정이 외부에 누출은 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기획사의 대표라는 인간에게는 보고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현준의 입영 신청 소식을 김 실장을 통해 먼저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확실했다.
“…계약 기간 조금 남은 거―”
“아, 너그럽게 용서해 줄 테니 썩 꺼지라고 해.”
“…….”
행여 계약 사항 중 기간 내 입영 연기 조항을 걸고넘어질까,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내자 무진은 상관없다는 듯 손바닥을 휘휘 내저으며 대꾸했다. 그 오만한 태도가 신경을 긁었다.
“군 입대는 명확하게 계약 위반 사항은 아니야, 대한민국 남자면 어쩔 수 없는 경우니까. 입대하는 날까지는 물론이고 어쨌든 계약 기간 동안은 우리가 미디어 노출 정도까지 봐줘야 돼. 재계약도 앞으로 현준이 가능성 객관적으로 따져 보자면 우리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하는 입장이고.”
“그 자식 앞으로도 계속 네가 봐주겠다는 말이야?”
얼굴을 가린 신문을 꾸깃꾸깃 구겨 내리며 무진은 금세 신경질적인 태도로 물었다. 얼굴을 빤빤히 치켜든 채 그렇다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안 될 말이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회사 측에서 필요한 인재라는 말이야.”
“아아, 뭐 확실히 쓸 만한 상품이긴 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넌 2년 동안…… 흐흥.”
어깨를 늘어뜨린 채 대답하자, 무진은 이내 또 기분 좋은 얼굴로 지껄이다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내 몸을 훑는 것에 나는 치를 떨며 쏘아붙였다.
“그렇게 웃지 마, 꼴 보기 싫어.”
“네 기분 맞춰 주려고 울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내가 널 얼마나 끔찍해하는지 잘 알겠다며, 그래서 기가 죽었다며. 정말 기죽은 거 맞아?”
“얼마나 기가 죽었는지 보여 줄까?”
싱긋거리며 대답한 그는 갑자기 몸통을 덮고 있는 시트를 와락 젖혀 냈다. 그리고 입고 있는 환자복 바지에 손을 갖다 대는 것까지 보고, 나는 획 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별로 안 죽었네.”
바지의 허리께를 들춰 속을 힐긋 들여다보며 무진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도로 시트를 덮곤 ‘어이, 여승재.’ 하고 나를 부른다.
곁눈으로 그가 제대로 시트를 덮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돌아서며 기가 찬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무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한쪽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별로 안 죽었어.”
“하! 걱정? 너 혼자 쇼하지 마. 그 애 없어도 2년 동안 너랑 나, 우리 사이엔 아무 일 없어. 그동안 내 구멍이 너덜너덜해지는 문제도 너하고는 상관없을 얘기야. 아니, 뭣하면 이제 내가 그 회사에서 신경 써야 할 문제 하나 없으니 맘 놓고 사표라도 던지면 영영 모르는 사람이야. 혼자 들뜨지 마, 뭐든 꿈꾸지 마, 계획하지 마, 하더라도 거기에 나는 빼놓고 해.”
“…….”
가슴을 들썩이며 맹렬히 쏘아붙이자 무진은 가뭇한 눈빛으로 나를 고요히 쳐다보며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언뜻 빈 벽으로 눈길을 던지며 입술을 삐죽여 혼자 웃음을 흘리곤 이내 다시 뻔뻔한 얼굴로 지껄여 온다.
“어린애처럼 칭얼대지 말고 물이나 꺼내 줘.”
“…개자식, 말이 안 통하지.”
허탈해진 기분에 나는 아무렇게나 욕설을 내뱉으며 냉장고에서 생수통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 멀리서 침대 쪽으로 훌쩍 던져 버렸는데, 고집스러운 얼굴의 무진은 포물선을 그리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으로 끝내 손을 뻗지 않았다.
“윽……!”
물이 꽉 찬 생수통은 정확하게 그의 몸통을 향해 떨어졌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무진은 그것에 몸을 맞자마자 신음을 흘리며 급하게 허리를 구부렸다.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주저하자, 압박 붕대를 감은 몸통에 가해진 충격이 꽤 심한 듯 무진은 두 팔로 스스로 몸을 감싼 채 거친 숨소리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나를 다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밑으로 떨어진 생수통을 주워, 그가 앉은 자리 옆에 슬쩍 올려 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는데, 여지없이 그가 매처럼 내 손목을 덥석 낚아채곤 침대 위로 바짝 끌어당겨 올렸다.
“아……!”
나는 거의 패대기쳐지는 기분으로 그의 몸 위로 풀썩 쓰러졌는데, 그는 내게 눌려진 부분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아무런 충격도 없었다는 멀쩡한 얼굴로 내 오른손목을 움켜쥐곤 대뜸 자신의 사타구니를 더듬게 했다.
“무슨… 노, 놔…!”
“건강하지?”
홑겹의 환자복 아래로 흉흉하게 발기해 있는 성기의 단단한 촉감에 나는 화끈 달아오른 얼굴로 당장 벗어나려 어깨를 틀었지만, 그는 잡은 내 손목을 더 아프게 움켜잡으며 그것을 진득하니 꾹 누르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문지르는 행동으로 손을 움직이며 심드렁한 음성으로 이어 지껄였다.
“이거 병 아닌가 싶은데 말이야, 너만 보면 발기하는 거. 어쨌든 넌 이걸 다행으로 알아야 돼. 이것만 아니었으면,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너 벌써 찢어 죽였어.”
살벌한 경고를 가하면서도 무진은 여전히 졸린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 차라리 병이라 의문시되는 자신의 욕망이 가지는 이름에 대해 모호해하는 것에 가까우리라.
나는 그런 그가 그저 생식기에 모든 욕망이 응집된 발정기의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했으나, 나의 내부에서 짝짝 찢어지기를 바라는 이 무서운 욕망에 대해서도 적당한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사표를 내? 영영 모르는 사람?”
그리고 어느새 무진은 형형한 눈빛으로 내 멱살을 와락 움켜잡은 채 씩씩 숨을 내쉬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바짝 맞댄 이마에 후끈한 열이 느껴졌다. 누구의 몸이 아픈 걸까, 말없이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는 내 입술을 물어뜯으며 협박조로 속삭였다.
“해 봐, 한번. 지구 끝까지 찾아내서 너, 어디 섬에다 팔아 버릴 테니까.”
그러곤 다짜고짜 자신의 환자복 바지 안으로까지 내 손을 밀어 넣으려 했다. 다른 손으로 내 손목을 붙든 그의 손을 뜯어말리고, 그는 또 그런 내 손을 붙잡아 말리며 우리는 한동안 어린애들처럼 손 싸움질을 하며 투덕거렸다.
그러다 문득 아무렇게나 휘두르던 내 손바닥이 그의 한쪽 뺨을 찰싹, 때려 버렸다. 무진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손등으로 내 뺨을 철썩 쳐올렸다. 그리고 내가 잠시 놀라 어리둥절해 있는 틈에 다시 내 손목을 끌어 자신의 바지 속으로 구겨 넣으며 으르렁댔다.
“그러니까 여승재, 너 이건 끔찍하게 생각하면 안 돼. 이거 다행으로 여겨, 고맙다고 생각해, 네 목숨의 은인인 격이란 말이야, 새끼야.”
“이……!”
손바닥 가득 와 닿는 그의 성기에서 느껴지는 맥박으로 번쩍 정신을 차리고, 나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턱에 닿기도 전에 여지없이 그의 손아귀에 또 덥석 잡히고 말았다.
무진은 붙든 내 손목을 바짝 끌어당겨 몸을 붙인 채 내 눈가로 훅, 입 바람을 불었다. 윽, 어깨를 뒤채며 급하게 눈을 깜빡이는 동안 그는 여유롭게 손을 움직여 내게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게 하고, 그러다 문득 내 왼쪽 손목에 채워진 스파이더맨 손목시계를 발견하곤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손목시계 멋진데.”
“거, 건드리지 마!”
만지려 드는 것에, 나는 불현듯 만화 속 주인공처럼 영웅적인 힘을 발휘해 와락 그를 떠밀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가슴을 들썩이며 씩씩거리자,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생각했는지 무진은 얼굴을 구긴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대, 넌 안 갔겠지.”
아직 그의 페니스 열기가 고스란히 남은 오른쪽 손바닥으로 내 왼쪽 손목에 감겨진 스파이더맨을 가득 덮어 감추며 나는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무진은 입술을 실룩이며 불퉁하게 대답했다.
“내가 거길 왜 가? …그러는 넌.”
“난 육군 자원입대 했었어.”
“흥, 그 꼴로?”
“군에 있는 동안 필수적으로 태권도 단증을 따게 되어 있는데 말이야, 지금 너 환자복만 안 걸치고 있었음 앞발차기로 날려 버리고 싶어.”
“이쪽이야말로, 내가 이깟 붕대 감고 있느라 너 하나 맘대로 못하는 것 같아?”
한마디씩 맞받아치다가 우리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씩씩대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꽉 말아 쥔 서로의 주먹을 힐긋 쳐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어 주먹질을 시작했다.
‡ ‡ ‡
초인종은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울렸다.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그나마 절친하게 지내던 기자에게서 온 이메일의 답장을 작성하던 중이었다.
답장의 요지는 정혜주가 현재 정신적으로 심하게 충격을 받은 상태로 어떤 식으로든 인터뷰가 불가능하고, 공식 기자회견 역시 현재로써는 시일을 장담할 수 없으며, 다만 지금 그녀가 병실과 다름없는 집 안에서 요양 중이라는 정보밖에 알려 줄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기자 신분인 사람에게 기획사 측에서도 그녀의 행방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떻게 문장을 꾸며야 거짓의 티가 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는 차라리 다른 기자들에게와 같이 묵묵부답을 이어 갈 것에 대한 계시와도 같이 여겨졌다.
결국 인터넷 창을 꺼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끌며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구멍으로 밖에 선 사람을 확인하고 곧장 걸쇠를 풀어 문을 열자,
“어…….”
기욱은 자신이 벨을 눌러 놓고도 갑자기 열리는 문에 화들짝 놀랐다는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또 내 얼굴을 빤히 살피며 ‘어어…….’ 소리만 반복해 낸다.
“왜, 너도 어디 가 버린다 말하려고?”
“예? 아, 아니… 아니요, 저는 아무 데도 안 가는데요, 그게… 그게…….”
며칠 잔뜩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 어물거리는 태도에 더 신경이 긁혀 날카롭게 반응하자, 기욱은 휙휙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주저하듯 옆쪽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대체 무얼 하나 싶어 팔짱을 끼고 빤히 쳐다보는데, 열어둔 현관문 뒤쪽에서 갑자기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흣―!”
찰나, 나는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공포 영화의 유령을 보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 높은 신음을 내 버렸다.
무릎에 힘이 빠져 한쪽 벽에 바짝 등을 기대고 헉헉 숨을 내쉬며 눈앞의 그림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빠글빠글한 파마머리에 위아래로 짙은 꽃무늬 몸빼옷을 차려입고 형광색 슬리퍼를 신은 여자였다.
희한한 차림새의 절정은 창백한 얼굴을 절반쯤 가리는 커다란 샤넬 선글라스였는데, 예리하지 않은 눈썰미로도 그것이 진품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한 기운에 눈살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번 여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런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관리가 잘된 깨끗한 피부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제야 짙은 선글라스에 가려진 얼굴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저, 정혜주 씨……?”
그녀였다.
“이거 예전에 드라마 할 때 소품이었는데 내가 몰래 슬쩍한 거다? 이럴 때 써먹네.”
빠글빠글한 파마머리의 가발을 훌렁 벗어젖히며 정혜주는 꼬마 계집애처럼 앞니로 혀끝을 잘근 물었다 놓으며 웃었다.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입을 헤 벌린 채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늘어진 턱을 툭 쳐서 올려 주었다.
“어디… 계셨어요?”
입술을 달싹이다 나는 괜스레 코를 한번 훌쩍이곤 겨우 탁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 촌스러운 태도에 그녀는 깔깔 웃음을 터트리곤 또다시 손을 뻗어 이번엔 내 코끝을 꾹 눌렀다 떼며 입을 열었다.
“여승재는 이렇게 가끔 맹한 구석이 매력이더라. …집에 계속 있었어. 어디 갈 데가 있어야 말이지. 아니 갈 데 있더라도 꼼짝을 못 하지. 그래서 아예 커튼 꼭꼭 닫고 빈집처럼 하고선 며칠 견뎠는데 마침 먹을거리가 다 떨어졌지 뭐야. 오늘, 지금 이 시간에서야 겨우 눈치 봐 가며 나왔다, 이 꼴을 하고선 말이야.”
“걱정 많이 했어요.”
“산전수전 다 겪은 정혜주야, 약 먹고 콱 죽어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
“…….”
“실은 그러려고 했다가, 무서워서 그만뒀어. 별로 착하게 안 살아서 분명 죽으면 지옥 떨어질 거라고 우리 엄마가 매번 경고했거든.”
혼자 묻고 또 혼자 답하며 그녀는 분주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담배를 찾는 것 같아,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가져와 건네주었다. 그것들을 받아 들며 내 스파이더맨 손목시계를 힐긋 확인한 정혜주가 흐흥, 하고 콧소리를 내고 웃었다.
“그 손목시계 자기한테 어울린다.”
“정혜주 씨도 지금 옷차림 잘 어울리십니다.”
“어머, 맞받아칠 줄도 아네.”
실없는 농담으로 대꾸하자 그녀는 양 볼을 홀쭉하게 만들어 담배를 빨면서도 천진난만하게 킥킥거렸다. 그리고 부옇게 피어나는 연기 뒤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다가 문득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얼굴에 화장했니?”
“예? 제가 무슨 화장을 해요.”
“거기 눈가랑 입가에 울긋불긋한 건 그럼 뭘까?”
“아, 깡패를 만나서요.”
“아하, 치정 싸움이로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뻔뻔하게 대답하다가 결국 폐부를 찌르는 말엔 버릇처럼 외딴곳으로 눈길을 흘리며 십팔번 대꾸를 하고 말았다. 정혜주는 고개를 젖힌 채 요란하게도 웃어 댔다.
그 억지스러운 웃음에 가슴 한쪽이 찌르르했다. 너무 웃어 눈물이 다 난다는 듯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다른 손으로 눈가를 훔쳐 닦으며 그녀는 ‘하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이렇게 평범하게 얘기하고 있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서 내가 여승재를 찾아온 거야. 적당히 걱정하고, 적당히 무신경하게 배려해 주니까.”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내 멋쩍은 대꾸를 따라하며 그녀는 담배를 문 채 씩 웃었다. 그녀가 문 담배 필터 끝에 하얀 담뱃재가 아슬아슬할 만큼 길어지자, 자리를 피해 주느라 주방에서 어물거리고 있던 기욱이 냉큼 재떨이를 만들어 왔다.
“고마워.”
그 위로 재를 떨며, 다시 성큼 뒤로 물러서는 기욱에게 인사한 정혜주는 재미있는 관심사라는 듯 내게로 고개를 삐죽 내밀며 ‘충심이네.’ 속삭이곤 말을 이었다.
“이 앞에서 만났어. 서성이고 있기에 이 시간에 뭐 하냐 했더니 여승재 스토커 쫓느라 그러고 있대.”
“저 녀석이 아직 옛 버릇 못 벗어나서 그래요. …기욱아, 이제 집에 들어가서 쉬어라.”
나는 조금 부어오른 듯한 광대뼈 부근을 슬쩍 문지르며 대꾸하곤, 주방으로 들어간 기욱을 향해 목을 빼고 말을 전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좀처럼 걸음을 옮기질 않았다. 어차피 정혜주를 다시 데려다주려면 필요하기도 해서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 내게서 물끄러미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그녀가 또 흥미로운 얼굴로 눈썹을 힐긋 치뜨며 물어왔다.
“어쨌든 그 얼굴은 권무진 작품이렸다?”
“…글쎄요.”
그 얘기라면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면 안 될까 싶었다. 평소라면 상대가 진심으로 곤혹스러워하는 화제는 되돌리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무례하다 싶을 만큼 곤란한 구석을 파고드는 건, 그녀가 가진 아픈 구석이 더 깊어 그러리라, 생각되었다.
유희거리가 되어 그녀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진다면, 뭐 그 정도면 어떠한가 싶어, 그녀의 머릿속에서 권무진과 여승재가 손톱을 세우고 싸우는 모습이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재생되도록 나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대꾸해 버렸다.
그리고 역시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혼자 어깨를 움츠리며 키득거리고는, 돌연 ‘아참’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번에 말이야, 권 대표 소개로 누굴 좀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했을 때, 상대방이랑 시간이 어긋나서 둘이서 세 시간가량을 커피나 마시며 죽치고 기다려야 했거든. 그때 권무진이 세 시간 내내 여승재 욕만 하더라.”
“…서른 시간이 주어졌으면 서른 시간 내내 욕했겠죠.”
“거봐, 치정 싸움 맞잖아.”
반쯤은 체념한 채 음울하게 속삭이자, 그녀는 담뱃갑에서 또 한 개비를 꺼내며 추측해 말했다. 나는 라이터를 들어 대신 불을 대어 주며 정색하고 대꾸했다.
“그건 아닙니다.”
“치정이 안 들어갔으면, 남자 둘이 주먹질을 했는데 상처가 겨우 그게 다야? 보아하니 그냥 치는 시늉만 했네, 뭘.”
“…….”
“놀리는 것 아니야. 열심히 싸워. 무슨 원한이 그렇게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뜯고 할퀴고 걷어차고 주먹질하고 최선을 다해서 싸워. 그러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게 되어 있어. 그거 유치한 거 아니야, 정직한 거야. 내 생각엔 말이야, 어린애들뿐 아니라 어른도 그런 식으로 싸워야 하는 것 같아. 그래야 상대방이 진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그게, 그러니까……”
연설조로 열심히 떠들던 정혜주는 문득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처럼 허공으로 막연한 시선을 던진 채 말끝을 흐렸다.
“…기욱이 녀석이 가진 향수의 세계죠.”
그러다 이윽고 커다란 눈동자가 축축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얼른 아무 말이나 던져 버렸다. 정혜주는 그런 내게 고개를 돌린 채 피식 웃어 보였다.
“응, 그래. 그게 그러니까 사나이들의 세계란 말이지.”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곤, 화제를 바꾸어 요즘 뜨고 있는 신인배우 누구라든가 유행하고 있는 화장법 등―사실상 내게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의미 없는 수다를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그러나 나는 지루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이십 여분 동안 쉼 없이 떠들던 정혜주는 불현듯 방전된 레코드처럼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불을 붙여 준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고 곧바로 재떨이에 비벼 끄며 담담한 어조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실은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내가 여승재를 조금 곤란하게 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현준이 녀석이 던져 두고 간 폭탄이 있어서 저 회사에서 미운털 단단히 박힌 상태에요. 여기서 뭐 더 곤란해져도 상관없을 만큼.”
“그럼 미안해하지 않고, 이거 좀 맡길게.”
입매를 휘어 설핏 웃어 보이며 그녀는 헐렁한 꽃무늬 바지의 속 깊은 호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메모리 칩 하나를 꺼내어선 그것을 불쑥 내 앞으로 내밀었다. 우선 손바닥에 받아 들고 ‘뭐죠?’ 묻자,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공인으로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
“기자회견 같은 걸 하면, 여승재, 나 아무래도 좀 추하게 울 것 같은데.”
“안 하셔도 돼요. 그런 자리 앉히려고 찾아다닌 거 아니에요.”
“응, 그런데 필요한 거거든. 그런데 도저히… 참… 너무 부끄러워서.”
콧등을 찡긋거리며 말을 맺는 그녀를 향해 나는 당신은 잘못한 것 없고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말해 줄 수 없었다. 다만 조용한 분노를 삼켜야 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화를 냈을까.
“그래서 대체해서 찍어 온 거야, 직접 카메라 삼각대에 세워서 말이야. 변명이라면 변명이랄까. 멋대로 홈페이지 같은 데다 올려 버릴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독단적으로 나가면 회사에 너무 큰 폐가 되잖아. 그거 자기가 알아서 넘겨줘. 회사든 기자 놈들한테든.”
“…왜 저한테… 김 실장님이 걱정 많이 하고 계세요.”
“그 인간은 뭐 한번 일 터질 때마다 너무 찌질댄단 말이야. 저가 내 오라비야, 아버지야. 나보다 더 난리야, 하여튼. 얼굴 보면 또 그 잔소리…… 싫어, 봐줘.”
싫다 하는 말에서 그에 대한 오래되고 친숙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장난스럽게 진저리를 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매를 단단히 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당분간은 어디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자, 정혜주는 댕그란 눈을 더 활짝 떠 보이며 ‘아차!’ 하고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지금 공항 가는 길이야.”
“예?!”
딸꾹질처럼 불쑥 목소리를 높이자, 주방에 있던 기욱이 무슨 일인가 싶어 힐긋 고개를 빼고 쳐다봤다. 정혜주는 흐흐 웃고는 말을 이었다.
“맹세코 일이 이렇게 터질 줄은 모르고… 왜, 우리 언니 가족이 호주에 살잖아, 그래서 휴가 겸해서 다녀오려고 한 달쯤 전에 미리 비행기 티켓을 구해 뒀거든. 몰래 빠져나가려고 새벽 시간을 택했었는데, 이렇게 맞아떨어지네.”
“아…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그렇게 되었구나,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순진스럽게 묻자, 정혜주는 잠시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승재.’ 하고 사뭇 진지한 음성으로 불렀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힘없이 피식 웃어 보이며 묻는 말에, 나는 잠깐의 침묵 속에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예.’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히 대답했다.
“아하하! 왠지 기합이 잔뜩 들어간 대답이네.”
정혜주는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쳐 닦으며 ‘하긴―,’ 하고 말을 잇는다.
“맞아, 비자 문제도 있는데 언젠간 돌아와야지.”
“…….”
씁쓸하게 다무는 입매에서 나는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리라 예감할 수 있었다.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아 그런가, 추운 기운이 들어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슥슥 문질렀다. 가만히 테이블 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던 그녀가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런 반응 좋네.”
“예?”
“감정표현 서툰 여승재가 지금 온몸으로 아쉬워하잖아.”
“예.”
“너무 금방 답하니까 또 거짓말 같고.”
“…그 반지, 누구한테 받은 건가요?”
이어지는 말장난을 그만두고 나는 언뜻 그녀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정혜주는 밉다는 듯 가늘게 뜬 눈살로 나를 비껴보며 대답했다.
“손가락이 허전해서 내가 직접 샀다니까.”
“그거, 저 주실래요?”
“받으면 나중에 나랑 결혼해야 된다?”
“그러죠.”
“…….”
틈 없이 곧바로 대답하자 정혜주는 뒤이을 말을 잊은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으며 ‘싫어.’ 답하기에 또 곧장 ‘왜요?’ 물었더니,
“말린 멸치 같잖아.”
대답했다. 그리고 시무룩해 있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알았어, 줄게.’ 하고 뒤늦게 허락을 해 주었다.
“대신 나중에 귀국하면 돌려줘야 돼. 그 디자인 내가 직접 주문한 거라서 특별하거든. 그때 가서 맡아 준 보답으로 다른 것 사 줄 테니까.”
그녀가 손가락에서 빼내어 준 반지를 새끼손가락에 끼워 넣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정혜주는 ‘그럼 됐다.’ 하고 홀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곧바로 떠나 버리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차림으로요…?”
“응, 아무도 못 알아볼 것 같지 않아? 아까 자기도 처음에 나 누군지 몰랐잖아.”
선글라스를 척 쓰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향해 ‘그건 그렇지만…’ 대꾸하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에 띌 텐데요.”
“그런가?”
“그렇죠.”
마주 선 채 그녀는 ‘그럼 어쩌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먼저 기욱을 불러 차를 대기하도록 하고, 휴대폰을 들어 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잠들 시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통화음이 얼마 가지 않아 ‘승재 형…….’ 어눌한 발음으로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 ‡ ‡
새벽 시간이라 그나마 한가한 공항 내에서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멀리서 케이와 쌍둥이 녀석들이 누가 봐도 연예인 티가 나도록 화려하게 차려입은 채 패션쇼를 하듯 라운지를 활보하고 있었다.
“밥 한번 사 준 적 없는데, 미안하고 또 고맙네.”
내 만류로 결국 평범한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은 정혜주가 선글라스를 코끝에 걸친 채 그런 녀석들을 힐긋 건너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목 끄는 것 좋아하는 녀석들이라서 괜찮아요. 아, 짐도 부치셨어요?”
역시 녀석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그녀는 손에 쥔 위탁수하물표를 팔락여 보였다. 그리고 먼저 출국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이번에는 내 얼굴을 힐긋 쳐다보곤 묻는다.
“너무 밝아서 그런가? 넋이 좀 빠진 것 같다?”
“…예,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구가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도는 것처럼…….”
아무래도 누군가 알아볼까 걱정되는지 빠르게 걷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며 나는 벌써 숨이 차올라 혼잣말처럼 헛소리를 지껄였다.
새벽의 공항은 내게 현기증을 일으켰다. 아득한 우주 공간처럼 그것은 무섭고 쓸쓸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뭐라고? 그녀가 귀를 기울이며 다시 물었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나저나 정말 실장님한테 전화라도 한 통 안 남기시겠어요?”
“응, 그냥 도착해서 연락할게. 자긴 내가 준 것 내일 아침이라도 곧바로 전해 줘도 돼.”
출국장을 저 앞에 남겨 두고 정혜주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내 양쪽 어깨를 툭 짚으며 출정을 앞둔 군인처럼 결연히 훅, 짧은 숨을 내쉰다.
“여기서 돌아서자. 바로 앞이니까.”
“…….”
“전화할게. 반지 잘 맡아 줘.”
그러곤 정말 담백하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곧장 발길을 돌려 버렸다. 여전히 얼이 빠진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나는 뒤늦게 후다닥 그녀의 뒤를 쫓아가 팔을 붙들어 세웠다.
놀랐는지,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꼴깍 침을 삼킨 뒤에야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르쳐 주세요.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지, 화내지 않을 수 있는지,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지.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의 그녀를 보자마자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느 종교 현자에게 그러하듯 나는 매달려 그녀에게 답을 얻고 싶었다.
짧은 시간 말장난 따위나 했지만, 세상에, 그녀는 너무 경악스러운 배신을 당한 사람이었다. 출국장을 앞두고 나는 이제야 새삼 그녀가 처한 처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와 나는 고작 말장난이나 주고받은 것이다.
그러나 정혜주는 차마 다 맺지 못한 내 물음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피식 웃어 보이며 가볍게 대답을 해 왔다.
“쪽팔려서.”
“…….”
“사람들 앞에서 울면 내가 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갈게.’ 말하곤 다시 한번 손을 들어 보이며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그녀가 항공사 직원에게 탑승권을 내밀어 확인을 받은 후 씩씩한 걸음으로 출국장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꼼짝하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안쪽으로 아주 모습을 감추기 직전, 그녀는 잠시 뒤를 돌아보며 얼핏 코끝까지 선글라스를 내려 보였다. 나는 눈살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가 젖었던가, 코끝이 빨갰던가.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가 무척 단단해서, 이번 일로 인해 아주 많이는 다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어 케이를 불렀다.
“케이, 이제 됐어. 돌아가자.”
「형, 우리 여기 사람들 쳐다보니까 좋아. 더 놀다 갈게. 여기에서 햄버거도 사 먹을 거야, 옛날처럼.」
“…너무 소란 떨면 안 돼.”
새벽의 공항이 주는 음습한 기운 때문일까. 멀리 눈으로 보이는 녀석들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밝은 음성조차도 어쩐지 외롭게 들려왔다. 결국 힘없이 당부의 말을 남긴 채 나는 혼자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 가셨어요?”
바로 앞에 차를 대어 놓고 있던 기욱이 얼른 뒷문을 열어 주며 물었다. 응, 대답하며 나는 앞좌석으로 올라타 앉았다. 얼른 돌아와 운전석에 앉은 기욱은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후 차를 출발시켰다.
“사람들이 떠나는 건 한순간이다.”
머리 위로 비행기 소음이 윙― 지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캄캄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중얼거렸다.
딱히 어떤 호응을 원한 말은 아니었는데, 기욱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예에, 맞아요.’ 대답했다. 그리고 나를 계속 힐긋거리다가, 문득 라디오를 틀고 볼륨을 최대로 높이는 것이다. 윽, 하고 나는 손을 뻗어 볼륨을 낮추어 타박을 했다.
“너무 시끄럽잖아.”
“죄, 죄송합니다…….”
앞에 보고 운전해, 말하며 나는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차창으로 운전석의 기욱이 계속해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비쳐 보였다.
왜 그럴까 했는데, 문득 녀석이 정혜주가 내게 반지를 주는 것을 보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웃었다.
차창으로 기욱이 그런 나를 힐긋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비쳐 보였다. 나는 결국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힉힉 소리를 내기까지 하며 웃어 댔다.
“볼륨 높이고 우는 거, 옛날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거잖아. 촌스럽다, 기욱아.”
음, 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은근히 말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내 목소리에서 염소 울음소리가 났다.
“…죄, 죄송합니다….”
기욱은 쩔쩔매며 또 바보처럼 사과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녀석은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성인인 녀석을 계속 타박하는 것도 무안스러운 일이어서, 나는 말없이 차에서 잠시 내렸다.
그리고 어두운 들판에서 바람이 보리를 사납게 헤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곳에서 문득 ‘엄마아―’ 하고 크게 불러 보고 싶은 청승맞고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뜬금없이 정혜주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닌 여자였던가, 생각하며 몇 번이나 ‘음, 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아마 그 스스로도 모를 테지만, 기욱은 몇 번이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더듬어 말했다. 정말 바보 같아서,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