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twelve(3권) (14/41)

Chapter twelve

“하아―.”

든든한 포만감으로 게을러진 사자처럼 무진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그러다 압박 붕대로 감아 둔 몸통에 자극이 왔는지 퍼뜩 어깨를 움츠러뜨리며 ‘윽!’ 소리를 낸다.

그 꼴이 우스웠으나, 병원 특유의 크레졸 냄새를 지우기 위해 어디선가 끊임없이 풍겨 오는 싸구려 방향제 냄새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나를 보며 무진 역시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선 손가락을 까딱여 보였다.

“…….”

“이리 오라니까.”

그러나 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선 채 다만 천천히 물병을 기울여 꼴깍꼴깍 물을 삼키고만 있자, 답답하다는 듯 기어이 ‘쯧.’ 혀를 차며 명령조로 말해 왔다.

등신,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슥 닦아 내며 생각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그를 기욱에게 맡기고, 특별한 외상 없이 다만 겁을 먹고 반쯤 기절해 있는 감독은 조연출에게 아무렇게나 떠안겨 버렸다.

드라마 담당 피디와 주연 배우가 속해 있는 기획사 대표 사이에 있었던 폭행 사건에 대해 함부로 먼저 떠들었다간 이쪽에서도 그동안 처리해 주었던 외주 제작비와 개인적인 성희롱 건에 대해 진지한 법률적 상담을 받아 보겠다고 단단히 일러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급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이미 일이 터진 상황에서는 얕잡혀 보이면 안 되었다.

그리고 공항 앞에 나온 회사 차에 먼저 현준을 태워 보낸 뒤 나는 곧장 회사로 향했다. 저녁 늦은 시간에도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내 마음이 더 소란스러워 무슨 일이 있느냐 누구에게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바로 김 실장을 찾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결국 일본에서 있었던 스케줄 정리표와 지출 내역만을 따로 문서 보관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먼저 위층의 현준에게 들렀지만, 녀석은 ‘피곤해, 들어가 자.’ 한마디 하고는 문을 열어 주지도 않았다.

전 주인에게 박해받아 쫓겨난 강아지처럼 초라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어, 도저히 술 한 잔을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성으로 씻고, 침대 위에 덩그러니 앉아 머그컵에 따른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기욱이었다.

‘주, 죽겠다고 해서, 그래서요…….’

녀석은 앞뒤 사정없이 대뜸 그렇게 더듬어 말했다.

피곤한 몸 안에서 빠르게 도는 알코올의 탓이었을까, 나는 젖은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실내복 그대로 휴대폰과 지갑만 달랑 챙겨 들고 바쁘게 신발을 구겨 신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등신, 이런 등신이 또 어디 있을까. 하물며 권무진이 갈비뼈는 물론이고 오장육부가 파열되어 내 눈앞에서 피 토하며 죽어 간다 하더라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다만 나는 내 안에서 조금씩 소멸되어 가는 이성의 유리에 대해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허물어뜨리고 강탈한 것이 바로 눈앞의 포악한 짐승이었다.

“가르쳐 줘.”

손을 뻗는 그에게 홀린 듯 가까이 다가서며 나는 속삭여 물었다. 내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무진이 ‘어?’ 하고 게으른 음성으로 의미를 물었다. 두 손을 완강히 내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난 채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약점이 뭔지 알려 줘.”

“흥.”

드러난 말의 의미에 무진은 날카로운 한쪽 송곳니를 내보이며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절박했다. 끝내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가르쳐 줘, 어떻게 해야 내가 널 이길 수 있는지.”

어리석은 짓만 반복해 왔다. 정혜주의 호감을 이용해 그를 망가뜨리려 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조준이었으며, 오히려 그녀의 치부를 드러내 버린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양심을 팔아 현준의 활촉을 샀지만, 제대로 된 조준에서조차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활촉은 먼저 내 가슴을 관통했고 끝내 그의 갈비뼈를 조금 상하게 한 뒤 바닥에 나뒹굴어 버렸다.

나는 비틀거리고, 현준은 검은 방 안에서 쓰러져 혼자 울 것이고, 그는 단단한 압박 붕대로 몸을 지탱한 채 편안히 침대 위에 누워 내 헐거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희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미워.”

“아아.”

음울한 목소리로 진심을 담아 고백하자, 무진은 따분하다는 듯 아무렇게나 대꾸하곤 내 트레이닝복 바지의 허리 밴드 부분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속옷 안으로 여유롭게 손을 넣어 장난감처럼 내 성기를 만져 댔다.

허리를 비틀며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어차피 넌 처음부터 돈도 많고 힘도 더 센 놈이잖아. 반쯤은 네가 이긴 상태에서 출발한 거잖아. 그러니까 가르쳐 줘, 내가 어떻게 해야 널… 죽일 수 있는지.”

“음… 거기, 옆에 과도 있잖아. 그걸로 왼쪽 가슴께를 찔러.”

머리카락이 뜯기는 것도 상관치 않으며 무진은 혀로 날름 침을 바른 손끝으로 다시 내 속옷 안의 성기를 희롱하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걸까, 그러면 네가 영원히 보이지 않는 걸까. 널 지울 수 있는 걸까.

“윽……!”

움켜쥔 그의 머리카락을 획 하니 뒤로 잡아당기자, 바짝 고개가 젖혀진 무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아픈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채 한동안 시큰둥한 눈길로 내 얼굴을 살피던 그는 불현듯 생각이 났다는 듯 놀고 있는 다른 한 손으로 내 뺨을 강하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무슨 상관이야.”

그가 내 얼굴의 무엇을 닦아 내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팔을 저어 그의 손길을 내치며 말하자, 무진은 다시 내 옷깃을 끌어당기며 침 바른 손끝으로 내 얼굴을 슥슥 문질러 댔다.

“네가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상관없어. 하지만 이제부턴 안 돼, 내가 있으니까 안 돼. 망가뜨리는 것도, 결국 버리는 것도 나야.”

“…….”

평생 재수가 없었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되려고. 픽 웃으며 생각했지만 정말 재수가 없을까 봐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의 축축한 손끝에서 내 얼굴이 멋대로 망가지고 있었다. 문득 차가운 현관 바닥에 뺨을 대고 쓰러져 누웠을 현준이 떠올랐다.

너 때문에 그 애가 현관문 앞에서 울어.

“네 탓이야, 다 너 때문이야.”

다시 한번 그의 머리카락을 바짝 잡아당기며 책망하듯 속삭이자, 무진은 한쪽으로 고개가 꺾인 채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여전히 내 얼굴로 손을 뻗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렇게 평생 내 원망만 하며 살아.”

“…….”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은 진실로 그에게 있고, 그것을 책망한 것은 나인데, 어쩐지 그에게 사죄를 하며 그의 말처럼 굽실거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나는 정말 그에게 종속된 군마들 중 하나일 뿐인 걸까.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은 움직이기 싫다. 체스판을 떠나 그저 풀이나 뜯어 먹은 뒤 어두운 다락방에서 둥글게 몸을 말아 눕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리 올라와.”

그런 내 생각을 투명하게 꿰뚫고 있다는 듯 무진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내가 곧장 움직이지 않자, 고삐를 잡아당기듯 내 멱살을 틀어잡고는 강제로 침대 위로 끌어당겨 눕혔다.

나는 고체로 굳은 단단한 무엇처럼 그의 옆에 엎드려 누운 채 고집스럽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밤 내내 무진은 헐렁한 내 트레이닝복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마른 엉덩이 살을 그러쥐며 주물러 댔다. 몇 번 뒤채다 포기하고 나는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 ‡ ‡

불편한 새우잠으로 밤을 난 탓인지 뒷목부터 등짝까지 다 아파 왔다. 단단하게 뭉친 어깨를 스스로 주무르며 병실 문을 나서는 차였다.

마침 복도 저 끝에서 김 실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기세에, 절로 다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저기… 실장님, 어제저녁에 회사 들어갔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연락도 안 되어서 우선 진행보고서만 책상에 올려 두고 왔습니다.”

“너, 알고 있어?”

“예? 무슨…….”

급하게 다가와 마주 서는 그를 향해 주저하듯 늦은 보고를 올렸는데, 김 실장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가쁜 숨과 함께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당혹감에 말끝을 흐리다가, 문득 그가 바쁜 마음으로 채근하는 것이 공항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한 보고임을 추측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었다.

“아, 실장님. 그건 권 대표가 저 이상한 꼴 당하고 있는 줄 알고 무턱대고 덤빈 건데, 우선 제가 그쪽에 말은 해 뒀습니다. 그렇잖아도 오늘 찾아뵙고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

“뭐, 권 대표가 감독 친 거 말하는 거야? 그건 대충 이쪽에서 잡아 둘 수 있는 사건이야, 그게 아니라, 혹시 너한테 정혜주 연락 간 거 있느냐 말이야.”

그러나 김 실장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구긴 채 세차게 고개를 젓고는 난데없는 이름을 담아 되물었다. 독촉하듯 따져 묻는 인상에 나는 덩달아 억울한 누명을 쓴 죄인처럼 울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실장님이 연락 안 되시는데, 정혜주 씨가 왜 저한테 따로 연락을 주시겠어요. 왜요, 정혜주 씨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야… 승재야, 이를 어쩌냐. 이걸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제야 김 실장은 속 깊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내게 팔을 기댄 채 애원하듯 말을 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정황을 듣지도 않았는데, 다만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순간 머리끝까지 쭈뼛 서는 듯한 긴장감이 들었다. 그리고,

“실장님, 왜요… 왜 그러시는데요.”

“…어제 늦은 저녁부터 동영상이 하나 나도는데… 그게 누가 봐도 정혜주야.”

“무슨, 그게, 무슨…….”

달래듯 거듭 묻는 말에 김 실장이 꺼내어 놓은 대답은 그저 아연하기만 한 것이었다. 나는 머저리처럼 두 눈을 활짝 열고 말을 더듬었다. 김 실장은 거의 흐느끼다시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집에도 없고… 도통 연락이 안 닿아. 그 사람 너 이뻐했으니까 혹시 연락 갔나 싶어서… 그런데 너한테도 아니면, 승재야, 이거 어쩌냐…….”

“무슨… 무슨 동영상이… 무슨 영상이요, 실장님, 그게 뭔데요, 그거 대체 뭔데요… 실장님…!”

숨이 막히고 눈이 뒤집혔다. 미지근한 크레졸 냄새와, 그것을 뒤덮기 위해 어디선가 끊임없이 뿌려 대는 싸구려 방향제 냄새에 토악질이 치밀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동동걸음을 구르며 김 실장에게 매달렸다. 어느새 그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치 않았다, 이대로 건물이 와르르 무너졌으면 싶었다. 살색의 영상이 머릿속을 잔뜩 점령하고, 동시에 왼쪽 손목이 너덜거리듯이 아파 왔다.

“너 왜 이러는… 야, 여승재…!”

경련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나는 팔을 붙드는 그를 사납게 밀쳐 내며 기어이 병실 안으로 발을 굴러 들어갔다.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퉁퉁 세상 밖으로 튕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악에 받친 채 나는 씩씩거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와 곧장 침대 위에 기대앉아 있는 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개자식! 너야, 이번에도 너야! 네 짓이야, 네가 그런 거야!”

“읏…! 뭐, 뭐 하는 짓…이야, 너!”

“여승재, 여승재! 너 왜 이래, 인마! 정신 차려!”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악귀처럼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조르며 해치려 하자, 뒤에서 김 실장이 기를 쓰고 내 몸통을 붙들고 침대 곁에서 떼어 냈다.

이미 내게 얼굴이 할퀴어지고 무릎으로 옆구리를 가격당한 무진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잔뜩 구겨진 얼굴로 김 실장에게 붙잡힌 채로도 악을 쓰고 있는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죽어! 죽어 버려, 개자식아! 넌 악마야, 더러운 진구렁이야, 남의 피나 빨아먹고 사는 추악한 흡혈귀야! 그게 너야, 그게 네가 사는 방식이야!”

“닥쳐!”

눈이 까뒤집힌 채 저주를 뱉어내는 나를 향해 무진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러 제압했다.

나는 입을 크게 벌린 채 서럽게 울었다. 턱밑으로 침을 흘리며 울었다. 왼쪽 손목이 너무 아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를 향해 죽어 버리라고 했지만, 너무 아파 차라리 내가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은 지경이었다.

“승재야, 여승재. 너 왜 이러냐, 응? 나 힘들다, 지금은 너 이러지 마라. 정신 좀 차려.”

나를 진정시키느라 바닥에 함께 털썩 주저앉은 채 김 실장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 몸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애원조로 말했다.

“말해, 무슨 일이야! 뭔데 저 지경이야!”

그리고 김 실장을 향해 무진이 윽박을 지르며 경위를 물었다. 꺽꺽 숨을 몰아쉬는 내 등허리를 두드려 주며 김 실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혜주 씨… 영상이 하나 돌고 있습니다.”

“무슨… 무슨 영상을 말하는 거야.”

당혹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무진이 더듬어 되물었다. 김 실장은 내 등허리를 두드려 주는 손길을 멈추고, 물기 어린 음성으로 겨우 말을 이어 붙였다.

“…이전 대표랑 같이 찍은 거였나 봅니다. 그냥, 부부들끼리 연인들끼리 이색 경험하는 식으로 찍었는지, 자연스럽게 이름 부르면서 대화하고, 목소리 나오고, 얼굴 나오고… 다 나옵니다, 다….”

“…그게 왜 갑자기, 어디에서.”

순간 숨을 멈추었던 무진은 싸늘해진 음성으로 침착하게 이어 물었다. 거의 토악질을 하듯 울음을 뱉어 내던 나는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급한 숨을 다스려 소리를 죽였다. 그런 나를 힐긋 바라보던 김 실장이 침잠한 눈으로 또한 조용히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방송으로 현직 검사들 비리 크게 터지고, 그거 묻으려면 더 큰 게 필요했겠지요. 마침 전 대표 수사망 점점 좁혀 왔을 테고……. 어느 쪽에서 먼저 제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쪽으로 짐작 못하면 바보 멍청이지. 내가 이쪽 물을 몇 년 먹었는데. 벌써부터 이전 대표 그 개자식 사건 그냥 벌금형 얼마로 처리될 거라는 소문까지 흘러나오고 있고. 씨발… 고작 그런… 그런 개새끼를…….”

쿵, 김 실장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나는 끅끅 울음을 삼키다가, 이 무시무시하고도 역겨운 사건의 전말에 경악으로 기어이 욱! 구역질을 했다.

급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병실 내의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통에 고개를 처박고 토악질을 했지만, 나오는 것은 노란 신물, 허무뿐이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김 실장은 한참 울분처럼 눈물을 쏟아 내고는, 돌연 손등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그래서 정혜주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도대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병실 문을 나섰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간단히 찬물로 얼굴을 적시고 나와서 나는 그대로 기운이 다 빠져 버려 젖은 얼굴을 닦지도 못한 채 그가 앉았던 바닥에 다시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버렸다.

“…다 내 탓하기로 했지만, 이건 아니야.”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무진이 문득 말을 걸어 왔다. 그에 관해선 김 실장의 설명도 있었으니 딱히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무어라 답하지 않고, 그저 물기 고인 턱을 손등으로 슥 닦아 내며 망연히 쳐다보자 무진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제껏 네가 나한테 밉다 싫다 끔찍하다 하는 거, 그냥 그러려니 했어. 그런데 너한테 내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치 떨릴 만큼 혐오스러운 개자식인지… 동영상 얘기만 나와도 그렇게 까무러치는 걸 보니, 그래, 알겠어. 그래서 기가 좀 죽었다.”

“…….”

퉁명스레 말하는 모양이 정말 어딘가 축 늘어져 측은한 기분마저 들게 해, 나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정면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내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야. 그래, 우리는 내 탓이었다고 쳐. 아니, 내 잘못이었어. 너 그 정도로 기겁하는 걸 보니 확실하게 내 잘못이었다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야. 이번 건은 아니야.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개자식은 아니니까. …너한테는 안 믿기겠지만.”

“…….”

“정혜주 건은 지금 당장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 내가 잘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여배우한테 그런 스캔들 치명적이고, 우선 당사자부터 모습 안 보인다 하니까,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 겨를도 없으니 어떻게 도와줄 수도 없는 상황이야. 이미 영상이 퍼졌다 하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내 힘이 닿는 데까지는 도와줄 테니까 우선은 사람부터 찾아. 거기에 필요한 인력, 말하면 내가 보충해 주고.”

“…….”

그가 그렇게 차분하고 길게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본 터라, 나는 새로운 형태의 TV 쇼를 보는 기분으로 어느새 다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멍한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대답 없이 가만 눈꺼풀을 슴벅이고만 있자, 무진은 금세 악동 같은 얼굴을 하고선 삐죽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거려 온다.

“오해해서 미안한 거 아니면 그만 울어. 넌 예나 지금이나 콧물 흘리면서 우는 거, 최고로 흉하니까.”

“그냥 물기야.”

나는 손가락으로 코끝에 고인 물기를 닦아 내 보이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아아, 무진은 성의 없이 맞장구쳤다.

왜 그렇게나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까무러쳤던 걸까. 천하의 권무진이 기가 죽었다 고백할 만큼, 뒤돌아 생각해 보면 간질병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이 될 만큼 왜 그리 요란을 떨었던 걸까.

철저히 통제되어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허무였다. 왜일까, 무진이 그 스스로 말했듯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개자식은 아니어서? 그래서 그를 더한 악마로 만들지 못했다는 서러움 때문에?

아아…, 나는 정말 오롯 그를 미워하는 힘으로만 삶을 견뎌 왔구나, 하는 생각에 또 한 번 허무해지고 말았다.

‡ ‡ ‡

「어때, 너는 어떻게 좀 알아봤어?」

잔뜩 쉰 목소리로 휴대폰 너머에서 김 실장이 간청하듯 물어 왔다.

“그게… 불법인 줄은 알지만, 급해서요, 권 대표한테 부탁해서 이동통신사에서 정혜주 씨 최근 통화 내역을 뽑아 봤습니다.”

「그래? 잘했어, 잘했어! 그래서, 누구랑 통화한 게 나와?」

“예, 제가 알아볼 수 있는 연락처와 대조해 보니… 바로 어제까지 개그맨 T 씨랑 연극배우 H 선생님과 통화하셨더라고요. H 선생님은 요즘 무대에서 작품 활동 중이시라 조용히 접근할 방법이 없고 전화도 안 받으셔서요, 그래서 지금 T 씨 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 잘했어, 수고했어! 그럼 우선 T 씨 뵙고 다시 나한테 전화 줘. 응?」

김 실장은 우선 갈증을 해소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당부하곤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 역시 정혜주의 흔적을 찾아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단 이틀 만에 회사 내의 모든 전화는 먹통이 되었다. 잠적한 정혜주의 행방을 묻는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 결국 모든 회선을 끊어 버린 것이었다. 김 실장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휴대폰의 연락처 목록에서 기자들 그룹의 전화번호를 모두 수신 거부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무진의 말처럼 우선 사람을 찾아야 했다. 기자회견에 끌어내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그녀의 무사한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먼저 연락이 되는 수단을 모두 끊어 버린 상황에서 그나마 무진의 도움으로 얻은 통화 내역은, 다행히 그녀의 먼 안부를 얻어들을 수 있었다.

“어디에서 머물고 있다는 얘기는 안 했어요. 으음, 그렇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그건 진짜 모르는걸. 다만 목소리는 생각만큼 침울하지 않았어요. 알잖아,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 아니야.”

그러나 T 씨에게서는 기대했던 정혜주의 행방을 알아낼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말처럼 목소리가 괜찮았다는 소식에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다행이네요, 나는 버릇처럼 왼쪽 손목에 채워져 있는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꺼풀에 나 있는 혹 같은 점이 트레이드마크인 T 씨는 간지럽다는 듯 그곳을 슥슥 긁적이며 데면데면하게 구는 내게 차라도 한잔 들고 가라고 권했다.

그 유쾌하면서도 살가운 태도가 얼핏 그녀를 연상시켰다. 어디선가 불쑥 고개를 내밀곤 톤 높은 목소리로 ‘자기, 나한테 정말 장가 안 올래?’ 능청스럽게 물어 올 것 같았다.

차는 다음에 정혜주 씨와 함께 방문해 마시겠다 인사하고 나는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 실장에게 전화를 해서 T씨에게서 얻어 낸 소식을 들려주자, 그는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울먹이며 대꾸했다.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나는 운전을 하며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리고 문득, 정혜주가 무척 보고 싶어졌다.

‡ ‡ ‡

“안녕.”

문을 열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관을 향해 오도카니 앉아 있던 현준이 한 손을 삐죽 들어 보이며 산뜻하게 인사해 왔다.

서로의 현관 열쇠는 물론이고 비밀번호까지 공유한 사이이니 종종 이런 일이 있어 왔지만,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피곤으로 반쯤 넋이 빠진 상태로 들어서던 중에 너무 놀라 여자애처럼 새된 비명을 지를 뻔했다.

“뭐야, 너. 놀랐잖아.”

“별로 놀란 얼굴 아닌데.”

요란스레 팔딱거리는 가슴께를 툭툭 털어 내는 척하며 애써 시무룩한 어조로 질책하자, 현준은 신발을 벗느라 고개를 숙인 내 얼굴 아래로 빠끔 고개를 내밀어 보이며 대꾸했다. 짧게 시선이 마주쳐, 나는 얼른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이었다.

“난 표정이 굳어 있으니까.”

“그 굳은 표정에서 미묘하게 어색해하는 낌새가 느껴지기도 하고.”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현준은 웃음기 띤 음성으로 맞받아쳤다. 획 하니 고개를 돌려 노려보자, 녀석은 비식 웃으며 다른 곳으로 눈길을 옮겨 딴청을 부렸다.

“…….”

그러나 아닌 게 아니라, 그를 대하는 것에서 나는 전과 다른 긴장을 느껴야 했다. 취중에 몸을 섞을 뻔했던 다음 날에도 이렇진 않았고, 개런티 놀음을 하던 때에도 아니었다.

나는 내 앞에서 가장 따뜻하고 단단해 보이고 싶어 했던 남자애의 가장 약한 모습을 보고 만 것이었다. 내가 졌다,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리던 얼굴을 떠올리면 치아가 모두 녹아 버릴 것처럼 슬퍼졌다.

누가 먼저였을까, 우리는 변했고, 그런 서로를 의식했다. 다행히 드라마가 종영된 후 공식적인 휴식기에 접어든 현준이 당분간 스케줄이 비어 있는 터라, 녀석은 노골적으로 나를 피했다.

공항에서 사건이 터진 후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래위층 살며 스케줄 외에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얼굴을 보던 것을 떠올려 보자면 그 며칠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뭐 시켜 먹을래? 지금 밥이고 반찬이고, 아무것도 없다.”

이웃보다 먼 친척의 방문처럼 서먹서먹한 기분에 나는 괜스레 냉장고를 뒤지며 밥 타령을 했다. 주방까지 따라 들어온 현준은 대답 대신 왠지 ‘흐흐.’ 하고 낮게 웃었다. 힐긋 고개를 돌려 보자, 녀석은 식탁 뒤로 몸을 기댄 채 꼭 누구 흉내를 내듯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끼니마다 밥 챙겨 먹이고, 시간 되면 등 떠밀어 운동시키러 가고, 친구들이랑 밤늦게 돌아다니면 괜한 시빗거리 만들까 기가 막히게 찾으러 와선 빼내 가고…….”

“…….”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형.”

제 사생활에까지 참견을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가 싶어, 마주 선 채 역시 팔짱을 끼곤 물끄러미 바라보자, 현준은 뜬금없이 윗사람처럼 그동안의 내 수고에 대한 치하를 했다.

아직 어려 위아래 쓰는 말을 구분 못하나 싶어 나름 엄한 얼굴을 한 채 ‘너 그게 뭐야.’ 했더니, 녀석은 좀 더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못 알아들어? 여승재 씨 해고당하는 거야, 지금.”

“…뭐?”

“농담.”

그리고 이내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허무하게 말을 끝맺곤, 나를 옆으로 밀어내고 냉장고 문을 열어 탄산음료를 꺼내었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었던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현준은 캔 하나를 단숨에 비워 내곤,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풉’ 웃었다. 그리고 곧이어 가리지도 않고 꺼억, 트림을 해 보이기까지.

“너 이러는 거 알면, 네 팬들이 기절을 할 거다.”

그제야 그의 농담 소리가 제대로 이해되어, 나 역시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녀석을 밀쳐 냈다. 그리고 냉동고에서 얼음을 몇 개 꺼내어 컵에 담는데, 뒤에서 바스락바스락 빈 캔을 우그러뜨리던 현준이 또 문득 ‘있잖아.’ 하고 말을 걸어 왔다.

응, 이온 음료를 따르며 건성으로 대꾸하자 녀석은 ‘그……’ 하고 주저하다 불쑥 말을 던졌다.

“나 입영 신청했다.”

“…뭐라고?”

컵을 기울여 음료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뜬금없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선 채 물었다. 그러나 현준은 이번에는 ‘농담.’ 하고 덧붙이지 않았다.

“입영 자원했다고. 저번에 신검은 받아 뒀잖아. 한두 달 뒤에 입대 영장 나올 거야. 그전까지 집에… 지방 우리 부모님 사는 집, 거기 가 있으려고.”

“무슨 소리야, 입영 연기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아니, 너 몇 살인데 벌써 군대를 가, 이건 아니야, 너무 일러. 농담하는 거야?”

“스물 하나둘, 대한민국 남자들 그 정도 나이면 다들 가던데.”

“일반인하곤 다르잖아, 너 아직 스물하나고, 이제 한창 시작인데 어딜 간다는 거야, 도대체!”

아니겠지 생각하며 차분히 묻다가, 결코 ‘농담.’ 소리를 내지 않는 현준이 더없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에 나는 기어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그치고 말았다.

그는 내가 아슬아슬하게 손에 쥐고 있는 컵을 받아 들고 대신 식탁 위에 놓아두곤,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실연당하면 여자는 머리 자르고 남자는 군대 간다던데.”

“…….”

“아, 방금 건 그냥 여승재 씨 마음 아프라고 한 말이고.”

“장난하지 마, 그러고 싶은 마음 없어, 지금.”

슬쩍 손을 붙잡으며 덧붙이는 말에, 나는 냉큼 손을 저어 내치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러다 얼핏 떠오르는 게 있어 후다닥 현관으로 나가 보자, 역시 그가 들어서는 나를 맞으며 앉아 있던 것은 평범한 의자가 아니라 커다란 트렁크였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전현준…….”

털썩 그 위로 앉아 버리며 환청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자, 현준은 내가 이온 음료를 따랐던 컵을 들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먼저 한 모금 마시곤, 내 손에 다시 컵을 쥐여 주었다.

먹먹한 갈증에 나는 그것을 허겁지겁 삼키고 얼음 두어 개까지 양 볼에 가득 끼워 넣었다. 그런 내 꼴을 보며 현준은 개구쟁이처럼 낄낄 웃었다.

그는 모든 준비를 끝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엔 온순하지만 어느 하나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 한두 달 내에 머리를 빡빡 깎고 군인이 될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형도 내가 이제 시작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다른 비겁한 수 아니라, 이왕 가야 할 거면 빨리 갔다 와서 거리낄 것 없이 펄펄 날고 싶어. 대한민국, 일본, 중국, 태국, 대만, 것뿐이야? 제일 높이 떠서, 가장 반짝반짝 빛날 거야. 그리고 늙어 몸 아프면 멋지게 내려올 거고. 그러려면 미리 다녀오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결심, 안 바꿀 거지.”

“응, 안 바꿔.”

내 앞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현준은 단호한 의지를 보여 주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진심인가 보다, 나는 왼쪽 볼에 저장해 둔 얼음 하나를 아작아작 깨어 먹었다.

비식 웃으며 내 모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현준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훌쩍 일어섰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 녀석의 옷깃을 붙잡았다.

“현준아, 내 생각엔 그래도 몇 년 더 있다가―”

“길게 봐서 생각해 줘, 형. 김 실장님 아니라, 다른 누구도 아닌 형은 그렇게 생각해 줄 수 있잖아.”

“…….”

“어디 죽으러 가는 거 아니잖아. 더 좋은 길이 열린다 생각하면… 형,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현준은 더없이 어른스러운 태도로 나를 달래었다. 욕심과 의무감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그가 장난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이해에 다행이라는 듯 비식 웃으며 현준은 내 머리에서 손을 떼며 말을 이었다.

“회사하곤 아직 계약이 몇 개월 좀 더 남았는데… 그 정도면 옛정이 있으니 너무 야박하게 굴진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무슨 문제 생길 것 같으면 형이 잘 처리해 줄 테고. …지금 회사 한창 복잡한 거 알지만… 그게 내가 형한테 내리는 죗값이라고 생각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심술궂은 표정을 만들어 보이며 현준은 말을 맺었다. ‘아아…’ 하고 나는 얼간이처럼 어수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미 작아져 버린 얼음 조각을 마저 아작아작 깨어 먹었다.

“승재 형, 좀 비켜 줘.”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 후, 내 주위를 저벅저벅 걸어 다니던 현준이 마침내 내가 깔고 앉은 트렁크를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나는 놀란 토끼처럼 후다닥 일어나 비켜서며 말더듬이처럼 물었다.

“지, 지금? 벌써 가려고?”

“지금 당장 군대 들어가는 게 아니라요, 당분간 부모님 집에서 쉴 거라고요, 입대 영장 나올 때까지. 여승재 씨한테 다 미룬다 했지만 다른 문제도 있으니까 어차피 또 올라와야 하고.”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현준은 유치원생에게 하듯 또박또박 설명을 해 주었다.

“아, 응…….”

나는 또 멍청하게 대꾸하며 옆으로 물러서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트렁크를 들고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구겨 신는 녀석을 향해 어물거리며 말을 걸었다.

“내려 둬, 내가 들어 줄게.”

“괜찮아. 그리고 벌써 이상한 기분 들게 아래까지 따라 내려오고 그러지 마라. 그냥 여기서 현관문이나 잘 닫아.”

“운전, 기욱이 부르지.”

“됐어, 귀찮게. 그냥 혼자 운전해서 가고 싶어.”

“…….”

신발코를 바닥에 쿵, 찧으며 현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거운 트렁크를 한 손에 드느라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모습으로 씩 웃어 보인다.

“이 형은 끝까지… 아, 끝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순간에도 재미가 없네. 가지 말라고 눈물 바람으로 매달리면 못 이기는 척하고 고집 꺾으려고 했는데.”

“…못 그러는 거 알잖아. 그런 마음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그렇잖아.”

“알아. …거기서 시작한 거 같은데. 저 형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고, 그렇게 눈길 주고 관심 가지다 보니까… 그러다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고맙게 생각해.”

네 눈길 다 알고 있었다, 그거 좋았다, 내 추운 젊은 날들에서 외로운 기분 들지 않게 해 줘서 고마웠다, 주절주절 말하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숫기가 없는 나는 주저하다 결국 무뚝뚝하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 반응에 현준은 질린다는 듯 웃다 말다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와― 말하는 거 봐. 진짜 정 떨어진다.”

그리고 ‘전화할게.’ 하며 가뿐하게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문을 닫곤, 돌아선 채 ‘승재 형.’ 하고 불렀다.

나는 맨발로 현관에 나가 그와 마주 섰다. 현준은 말을 꺼내기 쉽지 않다는 듯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슥슥 긁으며 ‘그게…’ 하고 입을 열었다.

“그때 말이야, 솔로 콘서트 마지막 날… 술 마시고 미수사건에 그쳤던 거… 그때 나, 취한 거 아니었어. 술김에 실수인 척했던 거야. 여승재 씨 생각하는 만큼 내가 그렇게 순진하고 착한 놈은 아니었어, 처음부터. 그러니까… 아까 내가 그렇게 말한 것 때문에 너무 죄책감 느끼고 그러지 말라고.”

“…….”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녀석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화났나 보다.’ 혼잣말을 했다. 별로, 늦은 대꾸를 하며 고개를 저어 보이자 현준은 그제야 히히 웃어 보이며 다시 문을 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간 그가 문을 닫기 전에 먼저 문고리를 붙잡았다.

“안 나가. 여기서 엘리베이터 타는 것만 볼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트렁크를 내리고 멈추어 섰다. 여전히 맨발인 나는 문고리에 몸을 지탱한 채 문밖으로 빠끔 고개만 내밀고 그를 바라보았다.

현준은 버튼으로 손을 뻗다 말고 문득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발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다시 이쪽으로 뛰듯 다가왔다.

“무슨…… 아.”

그가 내 집에 무얼 놓아두고 갔다거나, 미리 일러두지 못한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버릇처럼 무슨 일이냐 물었고, 화난 듯 씩씩거리며 다가온 현준은 그런 내 머리통을 와락 붙잡은 채 곧장 입을 맞추어 왔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지 않았다. 다급하게 혀를 섞는 것에는 어떤 설움이 느껴지기도 해서,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내가 숫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더 나빠지기 싫어서였다.

“다 거짓말이야, 형한테 좋은 말 해 주고 떠나기 싫어.”

그리고 내 입술을 잘근 물어뜯으며 물러난 현준이 가슴을 들썩이며 분에 찬 목소리를 냈다.

“너 나쁜 년이야.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뻔히 다 알면서 모른 척했어, 나중에는 이용하기까지 했어. 두고 봐, 최고로 성공할 거야, 대한민국 딴따라 어느 누구도 올라가 보지 못한 데까지 오를 거야, 여승재 배 아파서 죽을 만큼 성공할 거야. 너 후회할 거야, 늙은 주제에 열 살이나 어린 나 차 버린 거,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

그래, 그래, 나는 부지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꼭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새삼 그가 대견스러워져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들어 올린 손을 어디에 댈 줄 모르고 주저하다 그저 그의 어깨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를 떼어 주고 말았다.

바닥으로 포슬포슬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힐긋 내려다보며 현준은 그제야 진정이 되는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가 후회되는 거 하나는, 여승재를 죽도록… 정말 죽도록 원한 적이 없었다는 거. 그냥 좋아하고 사랑하기만 했지, 앞뒤 상관 않고 눈이 뒤집히도록 탐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거. 나는 이렇게 충만하고 들끓으니까, 그 정도면 된다 생각했던 거. 여유로운 척했지만 늘 내가 지금보다 열 살, 아니 다섯 살만 더 많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주저했던 거. 그래서 행여 여승재가 나를 그냥 미지근한 놈으로만 기억할까 봐, 나는 그게…….”

그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나는 다시 손을 들어 녀석의 입술을 눌러 막았다. 그가 내게 얼마나 따뜻한 사람이었는지 알려 주고 싶었지만, 덩달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현준은 입술을 달싹이는 나를 잠시 가만 쳐다보다가, 자신의 입을 가린 내 손을 떼어 내고 끌어당기며 또다시 입술을 맞추어 왔다.

그는 몇 번이고 내게 짧은 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소리가 들리자, 평소와 다름없는 환한 얼굴을 해 보이며 내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인 채,

“백일 휴가 나오면 한번 할 거다.”

속삭인 뒤 훌쩍 떨어져 복도를 뛰어갔다.

나는 그가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을 결국 복도 밖까지 나와 지켜보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집 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았다.

“…뭘 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되새겨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더러워진 발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샤워기를 틀어 한쪽 발바닥으로 다른 쪽 발등을 비비며 이제 회사에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아.”

그러다 문득 멍청한 소리를 내며 서둘러 샤워기를 잠그고, 젖은 발은 닦는 둥 마는 둥 하며 나와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밥통 뚜껑을 열어 보니, 먹다 남겨 적은 양이긴 하지만 밥이 조금 남아 있었다.

“밥 좀 먹고 가라고 해야…….”

곧장 몸을 틀어 현관으로 향했다. 발가락만 겨우 끼워 넣은 신발은 복도를 구르듯 뛰어나가며 대충 맞춰 신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 계단을 서너 칸씩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숨이 차오르고, 그가 벌써 가 버렸을까 진땀이 났다.

“하아… 하아…!”

그리고 겨우 1층에 도착하자, 건물 현관 앞을 지키는 경비원이 그런 나를 수상스럽게 쳐다보며 ‘엘리베이터 고장 났어요?’ 물었다. 고개를 저으며 나는 가쁜 숨과 함께 그에게 먼저 물었다.

“호, 혹시… 현준이, 나가는 거… 하아…!”

“아, 방금 차 몰고 나갔는데.”

건물 밖을 향해 손짓하며 경비원은 가볍게 대답했다. 하아, 하아, 터져 나오는 숨을 침착하게 고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연 피식 웃음을 흘리자, 경비원은 내가 미쳐 버렸다고 생각했는지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힐긋 훔쳐보았다.

상관치 않고 나는 두 손을 양쪽 허리에 짚은 채 후우, 후우, 숨을 내쉬며 열뜬 심장을 달래었다. 그런 와중에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그리 마음이 바빴을까. 그깟 밥 한 끼 못 먹으면 무슨 큰 탈이 나는 것도 아닌데, 집에 내려가면 손맛 좋은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집밥을 먹을 텐데.

“아참, 저기.”

그리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경비원이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나를 부르며 뒤에서 커다란 박스를 하나 꺼내어 ‘이거요.’ 하고 불쑥 내밀었다.

“…저한테 온 겁니까?”

“예, 댁에 안 계실 때 도착한 겁니다. 외국에서 발송되어 온 것 같던데요.”

“아, 고맙습니다.”

외국에서 우편물을 보내올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받아든 택배 박스 위에는 역시 경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장소를 잊고 그 자리에서 북북 포장을 뜯어 박스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선물 포장된 박스와 엽서 한 장이 들어있었다.

먼저 엽서를 읽어 보았지만, 그곳의 비싼 물가와 나쁜 날씨에 대한 불만과 룸메이트의 흉을 보는 것 등 외에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다만 자신은 잘 지내고 있으며 건강하라는 안부 몇 줄이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나는 곧이어 선물 포장이 된 작은 박스도 뜯어 열어 보았다.

“하……!”

안에는 꼬마 녀석들이나 좋아할 법한, 스파이더맨이 큼직하게 박힌 캐릭터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엽서를 읽어 보았다. 몇 번을 더 읽어 보아도 거기에는 비싼 물가와 나쁜 날씨, 그리고 흉잡을 것이 많은 룸메이트에 대한 내용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승재 오빠, 그래도 난 벌써 시차 적응 완벽하게 끝냈다. 오빠도 건강하슈.』

다만 장난스러운 두어 줄의 안부가 내게 전하고자 하는 말 전부였을 것이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스파이더맨 손목시계와 성의 없는 엽서를 품에 가득 껴안은 채 털썩 무릎을 굽히며 쭈그리고 앉아 버렸다.

“저… 어디 아프세요?”

경비원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문득 손목시계로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경아는 무얼 하고 있을 테고, 현준은 어디쯤 가고 있을 테였다. 나는 좀처럼 이 세계에서 시차 적응이 잘 되지 않아, 그렇게 얼마간 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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