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eleven (13/41)

Chapter eleven

공항은 여기저기 현준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든 여자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꺅꺅대는 여자애들은 기어코 온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보안경호팀을 뚫고 몰려들었다. 기욱과 내가 두 팔로 현준의 몸을 둘러싼 채 잰 걸음을 옮겼지만, 기실 발을 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쇼케이스 전에 일본 내에서 잡힌 인터뷰와 지면 촬영 스케줄 때문에 슈거 마니아 감독을 비롯해 다른 드라마 출연진들보다 이틀 먼저 비밀리에 출국 일정을 잡은 터였다.

그런데 도통 비밀 엄수가 지켜지지 않는 이 바닥의 생리대로 아침부터 집 앞에 연예부 촬영팀이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라마 종영 후 현준이 집 안에만 콕 틀어박혀 간단한 소감 정도의 인터뷰조차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밀지 좀 마, 제발 좀……!”

악몽 속의 한 장면처럼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갈퀴 같은 손에 머리카락을 뜯기고 선글라스를 빼앗겨야 했다. 기어이 공항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경호팀과 함께 길을 터 주고서야 제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아이씨…….”

그런데 언뜻 현준이 어딘가를 힐긋 보곤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성질을 내는 것이다. 그 시선의 방향으로 눈길을 주자, 경비팀의 누군가가 여자애들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 덩달아 성질을 내며 나는 버럭 목청을 높였다.

“거기요! 거기! 애들 때리지 마세요! 등 돌리고 서세요, 경호만 하라고! 야, 너희도 비켜! 저리 안 비켜?!”

쉰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런 와중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손들에 머리카락을 잡아 뜯기며 겨우 출국장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항공사 직원에게 탑승권을 건네는 동안에도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현준이 드라마를 찍으면서 잠시 잊었던 광란에 가까운 환호와 뜨거운 열기를 오랜만에 접하며 나는 잠시 정신이 아뜩해짐을 느꼈다.

“아으으…….”

보안검색대를 지나고서야 조촐한 여유가 주어졌다. 그리고 그제야 머리카락이 뜯긴 뒤통수가 아릿하게 아픈 것이 느껴졌다.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꾹꾹 누르며 신음을 흘리자,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께의 포켓에 걸쳐 넣던 현준이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흐흥.’ 하고 입술을 비죽이고 웃는다.

“웃어?”

“미안.”

“…….”

세모눈을 하고 따져 묻는 것에 녀석은 곧바로 사과를 하고서는, 여전히 빙긋 웃는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뒤에서 임시 코디네이터인 소현과 나란히 걸어오는 기욱을 확인하고 나는 팔꿈치로 녀석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조용히 타박을 했다.

“계속 웃지.”

“솔직히 요즘 여승재 씨 너무 밉상이거든, 누가 대신 한 대 콱 쥐어박아 줬으면 좋겠다 그러고 있던 터였거든.”

“넌 뭐 다를 줄 알아? 정말 뒤늦게 사춘기 온 것도 아니고, 너 요즘 하는 것 보면…… 하, 됐다.”

“착한 양을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한숨을 폭 내쉬며 손을 저어 그만하자는 것을 현준은 끝내 한마디 더 거들고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탑승 게이트로 향하는 녀석의 발걸음은 어쩐지 경쾌했다. 힐긋 고개를 틀어 얼굴을 훔쳐보자, 담담한 얼굴로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단순하고도 온순한 성격 덕분에 투명하게 속이 비쳐 보였던 녀석이 근래 들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맑게 갠 날씨 같았던 녀석에게 새벽의 안개처럼 음울한 흐릿함을 드리운 장본인이 바로 나라는 생각에 이쪽은 더 착잡한 기분이었다.

“내가 쌀쌀맞게 구니까 삐쳤어?”

항공기 탑승을 위해 진공관 같은 터널을 걸을 때까지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답답했던지 결국 현준이 내 옆구리를 꾹 찌르며 장난을 걸어왔다.

“아니야.”

“삐친 거 맞네.”

“시끄러워.”

냉랭하게 반응하자 녀석은 몇 번 더 장난질을 하다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승무원에게 보딩 패스를 내밀면서는 꽤나 듬직한 얼굴로 대외용 미소를 씩 띠어 보였다.

먼저 들어가 그 얼굴을 빤히 보다가 픽 웃어 버리자, 뒤따라 들어온 녀석이 내 귓가로 고개를 숙인 채 목소리를 낮추어 ‘질투해?’ 물었다.

“…확실히 질이 나빠졌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혼잣말을 하자 현준은 ‘흥,’ 콧소리를 내며 샐쭉거렸다. 그리고 자리를 확인하고 짐칸에 가방을 올려 둔 후 나란히 좌석에 앉자마자 ‘아아―’ 나른한 소리를 내며 빙긋 웃어 보인다.

“그래도 오랜만에 여승재 씨랑 둘이 있으니까 좋다.”

“…….”

“뭐, 좋은 거 좋다 말도 못 해?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보지 마. 난 지금 이 기분 만끽해야겠으니까.”

“그런 식으로 안 쳐다봤어.”

여기 피해망상증 환자 또 하나 있네,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현준은 무슨 생각으로 결론을 지었는지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잠시 후 앞자리에 기욱과 소현이 나란히 앉았다. 어색한지 둘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퇴원했어? 형 어제부터 계속 집에 와 있었잖아.”

그리고 이륙의 순간, 굉음과 함께 몸이 좌석 뒤로 바짝 밀려나는 기분에 괜스레 긴장을 해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는데, 문득 현준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창밖으로 건물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고, 논밭이 손바닥으로 가려지고, 그리고 어느새 구름이 시선 아래에 두둥실 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며칠 더 있어야 된다던데.”

“흥, 그 짐승한테 어떤 떡을 주고 외출 허락을 받아 왔을까?”

안전벨트를 풀며 현준은 불만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비아냥거리며 되물었다. 나는 양팔을 교차해 팔짱을 낀 채 퉁명스레 대꾸했다.

“일 있어서 가는 길인데 뭐라고 해? 그냥 아무 말 없이 와 버렸어. 이제 혼자 잘 움직여. 알아서 하겠지.”

“걱정되는 모양이네.”

“전현준.”

“…손 줘.”

빈정대는 태도에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름을 부르자, 제대로 먹혀들긴 했는지 녀석은 시무룩한 얼굴로 대뜸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손 달라 타령을 했다. 무슨 손, 무뚝뚝하게 물었더니 ‘손 잡고 있게.’ 대답한다.

이미지 관리상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녀석은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투덕거리다가 뒤늦게 생각해 내곤 나는 팔걸이 위로 손가락 하나를 삐죽 내밀어 주었다.

그것을 힐긋 쳐다본 현준이 픽 비웃으면서도 손가락을 덥석 붙잡았다. 그렇게 얌전히 있으면 손을 다 내어 주려 했는데, 잠시 잠잠하던 녀석이 또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더 나갔다.

“요즘은 왜 나 안 이용해 먹어? 개런티 값 받아 내는 재미도 톡톡한데.”

“그럴 기회가 없어서.”

머뭇거리지도 않고 곧바로 쌀쌀맞게 맞받아치자, 현준은 입을 딱 벌린 채 질렸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이 형 요즘 진짜 못되게 군다.”

“난 나한테 착하게 구는 사람한테만 착하게 대해. 못된 망아지처럼 구는 녀석한테는 못되게 대하는 게 당연해.”

“누가 대신 한 대만 더 패 줬으면 좋겠다.”

“좋아, 계속 그렇게 못된 망아지처럼 굴어 봐.”

“…….”

나는 조용한 음성으로 오연히 쏘아붙였다. 결국 현준은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며 반대편으로 돌아앉은 채 기내식을 먹을 때까지 더 이상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꽤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무안스러워, 나는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초코바 하나를 입에 문 채 괜히 창밖을 내려다보고, 뻔히 손목시계를 차고 있으면서도 앞자리의 기욱에게 현재 시간을 물어보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제야 녀석은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뚱한 목소리로 ‘나는 누구처럼 안 삐쳐.’ 말해 왔다.

“…시끄러워.”

달리 할 말이 없어 퉁명한 얼굴로 그렇게 대꾸하자, 현준은 새우튀김을 한입 크게 베어 먹으며 흐흐 웃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소원대로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대신 누군가에게 머리카락을 또 뜯겨야 했다. 수백 명의 일본 팬들을 비롯해 한국 유학생들까지 가세한 군집에서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불쑥 손을 뻗어오는 이들은 단연 한국인들이었다.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열적이야.”

현준은 아릿한 뒤통수를 꾹꾹 누르는 나를 바라보며 즐거운 듯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기욱을 혼자 호텔로 짐과 함께 보내곤, 연계되어 있는 일본의 기획사에서 보내온 차를 타고 도쿄의 화보 촬영지로 향했다.

차 안에서 소현은 잡지사 측에서 보내왔다는 포트폴리오를 참고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의 방향을 내놓았다.

“응, 좋아.”

경아와 비교하자면 감각이 특출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팀에 있다 임시로 도와주는 만큼 딱히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을 표출할 수도 없었고, 행여 그렇다 해도 구체적으로 지적할 만한 감각이 이쪽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난히 오케이 사인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촬영장에 도착해 보니, 메이크업 전문가는 물론이고 헤어스타일리스트까지 모두 따로 준비가 되어 있어서 정작 소현이 할 일이라곤 현준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어… 이렇게 스케줄이 빡빡한 상황에서 진행해 본 적이 없어서… 저쪽에서 먼저 말이 없기에, 그냥 잠깐 찍는 건데 이렇게 다 준비해 둘 줄 모르고.”

“일본 사람들이 참… 세심하지.”

미안한 마음에 주절주절 떠들자, 옆에서 현준이 도와준답시고 한마디를 거들었다. 소현은 쌩하니 아무 말이 없었다. 정 붙이지 않은 사람을 달래는 방법 따위는 몰라서, 나도 더 이상은 필요 이상의 말을 걸지는 않았다.

촬영과 잡지 인터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는 누구의 눈치를 볼 겨를조차 없었다. 지면에 두어 컷 들어가는 정도인데 현준은 옷을 수십여 벌 갈아입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콘셉트의 메이크업을 받아야 했다.

도중에는 모 아침방송 프로그램의 촬영팀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쳐 잠시 실랑이를 하다가 현준이 너그러운 얼굴로 ‘괜찮아.’ 하는 바람에 두어 팀의 인터뷰를 더 받아야 했다.

저녁까지 이어지는 빡빡한 스케줄 동안 현준은 탈의한 상체가 온전히 드러나는 컷을 위해서 제대로 된 끼니는커녕 간식도 입에 대지 않으려 했고, 덕분에 덩달아 나까지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출국한 지 꼬박 열한 시간 만에 대충의 스케줄이 끝났고, 이미 너무 늦은 시간에 문을 열어 둔 식당을 찾을 수 없어서 결국 우리는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들고 호텔로 돌아와야 했다.

하루 종일 초코바 하나 먹은 게 다인 나는 오히려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아, 현준이 먼저 고르고 남은 것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호텔 측의 경호를 받으며 로비 안으로 들어서는데,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잖아?”

낯익은 인물이 질겅이는 말과 함께 불쑥 앞을 가로막고 서는 것이다.

불량배인 줄 알았는지 일본인 경호원이 냉큼 그의 어깨를 붙들었지만, 사납게 쳐 내는 손길에 뒤뚱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곧 싸울 기세로 벌떡 달려들다가, 급히 막아 세우는 호텔 직원으로부터 무어라 말을 건네 듣고는 이내 온순해진 태도로 그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병신, 무진은 이죽거리며 다시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튀면 못 잡을 줄 알았냐, 멍청아?”

마치 내가 뺑소니범이라도 된다는 듯 구는 태도에 얼굴을 구긴 것은 현준이었다. 나는 적절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진짜 멍청이처럼 더듬거리며 물었다.

“너… 여기, 왜….”

“한류, 한류, 그러기에 얼마나 대단할까 궁금해서 말이야. 마침 이쪽에 연계되어 있는 기획사 측에 볼일도 있고.”

“왜 하필 이 호텔이냐 말이야.”

“여기가 마음에 들어서.”

히죽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는 진실성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호텔 직원들이나 로비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있어서 더 이상 말을 섞다 언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가자, 하고 나는 현준의 옷깃을 붙잡아 당기며 프런트로 잰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체크인을 하고 돌아서는데, 멀리서 기욱이 낯선 캐리어를 끌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느닷없이 무진의 옆에 멈춰선 채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진에게 붙잡혀 고작 벨보이 역할이나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성수기라 그런가, 방이 없어.”

기욱에게 자신의 짐을 떠맡기고 두 손을 호주머니에 꾹 찔러 넣은 채 무진은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헛, 하고 옆에서 현준이 기가 찬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바로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먼저 올라타선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우리를 빤히 바라본다.

“소현아, 가자.”

로비에서 느껴지는 수런거리는 시선에 나는 우물쭈물하는 기욱을 내버려 두고 대신 소현의 팔을 끌어 얼른 안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냉큼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무진은 여유롭게 발을 뻗어 텅! 닫히는 문을 막아 세우곤 기욱을 발길질하다시피 하며 함께 안으로 들어와 섰다.

해당 층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현준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닫힌 문을 매섭게 노려보고만 있었다.

드디어 맑은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내내 어리둥절한 얼굴로 상황을 살피던 소현이 가장 먼저 밖으로 내려서선 ‘저 먼저 들어갈게요.’ 홀가분한 목소리와 함께 캐리어를 끌고 제 방을 찾아 들어가 버렸다. 조용한 객실 로비엔 남자 넷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왜 따라와, 너?”

계속 따라붙을까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나는 정적을 깨며 무진을 향해 시비를 걸듯 물었다.

“방 없다니까.”

전혀 기분 상하지 않은 얼굴로 그는 가뜬히 대답했다. 그럼 다른 호텔 찾아가라 했더니, 너무 늦은 시각이라 밤길에 함부로 나갈 수 없다는 조롱조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결론은,

“재워 줘.”

였다.

“돌았어?”

“내가 누구야, 그쪽 회사 대표잖아. 함부로 굴면 안 되지. 확 다 잘라 버린다.”

이죽거리는 말에 기욱은 당장 움찔 놀라며 둥그렇게 뜬 눈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현준은 피로한 듯 어깨를 주무르며 ‘아아아…….’ 게으른 소리를 냈다. 그러곤 더 이상 소모적인 감정놀음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그러면―,’ 하고 제안을 내놓았다.

“이쪽엔 방 두 개 있으니까, 대표님은 기욱이 형이랑 같은 방 쓰시고, 승재 형은 오늘 내 방에서 자는 거―”

“싫어.”

그러나 무진은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얼굴을 와락 구긴 채 현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대뜸 자신의 가방을 대신 들고 서 있는 기욱의 정강이를 툭 걷어차며 명령조로 지껄인다.

“야, 너 저놈이랑 같은 방 써.”

“어…, 어….”

기욱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와 현준을 번갈아 보며 말을 더듬었다. 안심시키듯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현준이 한 걸음 옮겨 무진의 앞으로 대적하듯 얼굴을 바싹 붙인 채 입을 열었다.

“승재 형이랑 저, 방해 좀 하지 말아 주실래요?”

“싫은데. 까칠하게 굴지 말고 끼워 줘, 응?”

“저도 싫습니다.”

“그게 싫으면 네가 꺼지든가, 애송이 새꺄.”

“그럼 저하고 같은 방 쓰실래요?”

“넌 내 타입 아니야.”

휴우,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쉰 현준이 빙긋 웃으며 ‘그거 정말 고맙습니다.’ 대꾸했다. 뭘, 무진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말장난 끝에는 기어이 주먹질이 시작될 게 뻔했다. 더 이상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새치가 자랄 것 같은 기분에 머리를 흔들며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먼저 획 하니 발길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예약된 객실을 향해 잰걸음을 옮기자, 곧바로 뒤에서 우르르 따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 혼자 쓸 거니까. 나머지 방 하나 어떻게 쓰든, 쌈질을 해서 갈비뼈가 나가든 다리가 부러지든 멋대로 해.”

재빨리 키를 꽂고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선 채 나는 지긋지긋한 기분으로 복도 밖에 다닥다닥 붙어선 놈들을 향해 쏘아붙였다.

가장 뒤쪽에 선 기욱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고, 현준은 차라리 그게 낫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누구 맘대로.”

무진은 다짜고짜 힘으로 문을 열어젖히곤 냉큼 안으로 들어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닫으려는 것에, 이번에는 현준이 씩씩대며 힘을 써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꽝! 문을 닫았다.

결국 이 방법뿐인가, 나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을 기욱을 향해 ‘방 혼자 써라.’ 전하곤 객실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뭐야, 드디어 할 마음이 생긴 거냐, 쓰리섬?”

아직도 문 앞에서 씩씩대고 있는 현준을 향해 무진이 픽 비웃으며 물었다. 미친놈, 중얼거리며 현준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 저 어린 새끼가 나한테 욕지거리를 하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쌍놈새끼가.”

그런 녀석에게 들리라는 듯 무진은 큰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힐긋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넌 대체 얼마나 대단한 가정교육을 받았기에 이렇게 무식하게 구는 거야?”

같잖아서 웃으며 묻자, 그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알잖아, 우리 집에선 나 내놓은 거.”

하긴, 냉담한 응수와 함께 나는 곧장 시선을 돌려 버렸다. 곧이어 욕실에서 세찬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무진은 할 일 없는 건달처럼 내가 짐 가방을 정리하는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무시로 일관하며 현준의 속옷과 실내복을 챙겨 들고 욕실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큰둥한 얼굴로 ‘야, 야,’ 하고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왜 그런 것까지 하는 거야?”

“매니저들 다 하는 일이야. 현준아, 문 앞에 속옷 놔뒀어.”

욕실 문을 똑똑 두드려 알리고 다시 돌아서다가, 바로 뒤에 서 있던 무진의 어깨에 코를 부딪쳤다. 아이씨, 성질을 내며 그의 어깨를 밀쳐 내고 걸음을 옮겨 마저 짐 정리를 하는데, 그는 또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상대를 해 주지 않아 심심했던지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어 벌컥벌컥 마셔 댔다.

“내가 연예 기획사 대표가 해내야 할 업무에 어떤 게 있는지 리스트라도 작성해 줄까?”

그 꼴이 한심스러워 빈정대듯 물었더니, 무진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제 대충 알아.”

“근데 왜 빈둥거리는 거야? 네가 네 일을 안 하는 덕분에 다른 분들이 두 배로 처리해야 하잖아. 너한테 양심은 바라지도 않아, 다만 최소한의 책임의식 정도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자꾸 시비 걸면 뒹굴자는 소리로 알아들을 거야.”

“…….”

끔찍한 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냉큼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시 후 현준이 말간 얼굴로 젖은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녀석에게 가져온 도시락을 내밀어 조금이라도 먹어라 이르고, 나는 옷을 챙겨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안쪽에서 문을 잠갔는데, 내가 샤워를 끝낼 때까지 무진은 밖에서 끈질기게 문을 두드려 댔다.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아 서둘러 씻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가자, 그는 옷을 모두 제대로 챙겨 입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흥.’ 하고 입술을 실룩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욕실을 쓰는 동안 나는 현준과 나란히 앉아 도시락을 뜯었는데, 도통 입맛이 없어 일본식 돈가스 몇 점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 양치질만 했는지 손끝만 조금 젖은 채로 무진이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아, 배고픈데.”

그리고 내 손에 든 도시락을 힐긋 쳐다보며 꿍얼거리는 것에, 나는 그에게 조금도 남겨 주기 싫어 꾸역꾸역 먹어 해치우다가, 결국 체할 것 같아 반쯤은 남기고 말았다.

무진은 걸식이 취미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내 도시락을 낚아채 가선 남은 것을 모두 먹어 치웠다.

현준은 얼굴을 구긴 채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대뜸 맥주를 찾았다. 내일 스케줄 문제가 있으니 마시지 마라, 이르고 나는 곧바로 프런트로 전화를 넣어 추가 이불채를 주문했다.

그런데 어느새 도시락을 다 비운 무진이 입안 가득 음식물을 우물거리며 불시에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워 버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여승재, 이리 와.’ 명령을 하는 것이다.

“내려와. 침대 현준이 쓸 거야. 오늘 피곤한 애야, 내일 스케줄도 빡빡하고. 괴롭히지 마.”

“그럼 난 어디서 자란 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쌀쌀맞게 대꾸하며 그가 했듯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내려오라 반복해 말하자, 무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기듯 바닥으로 내려섰다.

나는 얼른 현준의 팔을 끌어 침대 위로 올려 보냈다. 졸린 눈을 슴벅이며 현준이 ‘형은?’ 하고 물었다.

“저 인간 소파에 재우고 난 바닥에서 자면 돼. 우선 오늘만 이러고 자자. 걱정하지 말고, 내일 스케줄 있으니까 푹 자 둬.”

“…침대 넓은데 그냥 옆에 눕지.”

“셋이서 한 침대 쓰고 싶어?”

근심 어린 얼굴을 손끝으로 꾹 밀어 눕히며 진지하게 묻자, 녀석은 픽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싫어, 대꾸하며 발길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

마침 벨소리에 무진이 문을 열자, 호텔 직원이 추가한 이불을 가지고 들어왔다. 무진은 내게 시선도 맞추지 않으며 시무룩한 얼굴로 곧장 시트 한 장과 베개 하나를 챙겨 들고 소파에 털썩 몸을 뻗고 누웠다.

문을 닫고, 나는 남은 시트와 베개를 챙겨 바닥 한가운데에서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누웠다. 이 기묘한 상황에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몸과 마음 모두 많이 지쳐 있어서인지 의외로 눈을 감자마자 축 늘어지는 기분과 함께 정신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밤은 곧 세 사람의 깊은 숨소리로 가득 찼다. 어서 아침이 밝았으면 좋겠다, 잠결에도 소원했다.

그러나 발을 헛디뎌 까마득한 곳으로 추락하는 기분으로 화들짝 놀라 눈을 떴을 때에는 아직도 어두웠다. 꿈이었을까,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눈을 끔벅이는데 문득 아래에서 저릿하게 올라오는 쾌감에 허리가 휘었다.

“흣……!”

터져 나오는 신음에 급하게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아래로 고개를 내려보니, 무진이 내 속옷을 허벅다리까지 끌어내리곤 입안 가득 내 페니스를 물고 있는 꼴이 보였다. 뻔뻔하게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눈길과 직선으로 시선이 닿자, 그는 눈매를 휘어 보이며 문 것을 쭉 빨아올려 보였다.

“이, 미친… 너 지금 무슨… 아, 아…!”

온몸의 피가 급하게 아래로 몰리는 기분에 나는 딱딱한 바닥에서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주먹으로 그의 머리통을 아무렇게나 쳐 댔다. 행여 큰 소리를 냈다간 현준이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소란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런 내 염려를 안다는 듯 무진은 머리통과 얼굴을 사납게 얻어맞으면서도 입에 문 것을 계속 빨아 대며 축 늘어진 음낭을 멋대로 주물렀다.

입술을 악문 채 소리를 참고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지만 무진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회음부를 빠르게 문지르는 것에 나는 결국 세웠던 무릎을 뻣뻣하게 펼치며 그의 입안에 정액을 쏟아 내고 말았다.

“하아, 하! 비, 비켜…….”

수치와 자괴감으로 바닥을 치며 울고 싶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다 가린 채 쌕쌕거리며 말했지만, 무진은 머금고 있던 내 정액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뱉어 내곤 온몸을 눌러 압박한 채 더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내 입술 사이로 나른한 혀를 밀어 넣어 왔다.

“으, 으!”

비릿한 내 정액 맛에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밀쳐 냈지만, 무진은 내 바쁜 혀를 잽싸게 감싸 핥고 혀끝으로 입천장을 긁으며 농락했다. 그리고 내 정액을 묻힌 손으로는 열심히 아래를 헤집고 있었다.

그의 체중에 고스란히 눌려 나는 다리를 버둥대지도 못했다. 내 정액으로 미끈거리는 그의 손가락이 유연하게 속살을 파고드는 것에 숨이 덜컥 막혔다. 곧 현준이 ‘승재 형, 나 물…….’ 하며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개자… 식, 정말 안 비키… 아흐으!”

그가 내 귓불을 물고 빠는 틈에 나는 드디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어떤 지독한 저주를 퍼붓기도 전에 자극점을 꾹 누르는 손끝에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삼켜야 했다.

쉬잇―, 무진은 내 한쪽 허벅다리를 들어 올리며 사타구니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손바닥으로 내 입가를 꾹 눌러 덮었다.

“조용히 해, 오늘 무척 피곤했던 애기 깬다.”

“으, 응……!”

그리고 곧바로 허리를 들썩이며 귀두를 찔러 넣어 왔다. 귓바퀴의 솜털까지 바싹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쉬지 않고 한꺼번에 끝까지 파고드는 것에 이내 아랫배가 묵직해져 왔다.

입이 틀어막힌 채 그의 손등 위로 짧은 콧김을 씩씩 뿜어 대자 무진은 나른한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빠져나갔다가 덜컹 빠르게 치고 들어오며 ‘마음에 들어?’ 속삭이듯 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저어 댔다.

“그러게 애송이 앞에서 무슨 망신을 그렇게 주느냐 말이야, 이기지도 못할걸. 씨발, 쪽팔려 죽는 줄 알았잖아. 후우… 읏!”

잘게 움직여 부드럽게 허리를 실으며 무진은 이 도둑질 같은 섹스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분한지, 말을 끝맺을 때는 귀두 끝까지 빼내었다가 단번에 질퍽! 찔러 들어왔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으으… 흐으…!”

헛구역질이 치밀어 덥석 그의 손목을 붙들어 입가에서 손바닥을 치워 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진은 질 나쁘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내 얼굴 위로 씩씩 숨을 내뱉으며 점차 사납게 허리를 싣기 시작했다.

열 발가락 끝을 바늘로 따는 기분에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팔뚝을 붙들고 매달렸다. 감각도 없이 울었던 걸까, 무진은 고개를 숙여 내 눈꼬리에 맺힌 물기를 핥았다.

“겁먹었어? 애송이 깰까 봐, 그래서 들킬까 봐 겁나? 아아… 씨발, 그래서 이렇게 죽여주게 조이는 거야? 어?”

“흐, 으, 응……!”

그러나 희롱조로 ‘어? 어?’ 하고 따져 물으며 허리를 쳐올리는 것에는 명확한 분노와 경멸이 느껴졌다.

나는 매 맞는 것처럼 찰싹찰싹 살 맞부딪치는 소리에 겁을 먹었다. 얼른 그의 목 뒤로 두 팔을 둘러 감자, 그제야 무진은 시무룩한 얼굴로 내 입술 위에서 손바닥을 떼어 주었다. 입가 전체가 얼얼했다.

벌린 입술 사이로 학학 가쁜 숨을 뱉어 내자,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무진은 무심히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러나 키스하지 않았다. 그는 내 몸이 밀려날 것을 염려해, 내 머리통을 꼭 감싼 채 다시 허리를 사납게 움직였다.

“아, 아흐……!”

큰 소리를 내지를 수도 없어 나는 거의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허리 뒤로 다리를 감았다. 한참을 포악하게 움직여 대던 무진은 내가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 내는 것을 보고는, 능숙하게 허리를 원으로 돌리며 입을 맞추어 왔다. 허벅다리가 넓게 벌어졌다.

내 혀를 핥던 무진은 언뜻 고개를 물리고, 대신 내 상의를 들춰 올려 말랑한 유두를 덥석 물었다. 그의 혀끝에서 내 것이 콩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소리 내, 여승재… 애송이 깨워… 깨워서 차라리……. 너 못 줘, 씨발.”

코끝을 맞붙인 채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실으며 무진은 가쁜 숨처럼 재촉을 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손바닥으로 입가를 눌러 막은 채 견뎠다.

문득 열아홉의 어느 늦여름, 그의 친구들에게 들킬까 옥상의 물탱크 뒤에서 소리를 죽인 채 그를 받아들여야 했던 사건들이 기록처럼 냉정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네 친구들은 다 어디에 있어? 나는 숨을 할딱이며 물었지만, 내 목소리는 너무 작고, 그의 신음 소리는 너무 커서 그에게 가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진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허리를 들썩였다.

그리고 갑자기 후다닥 뒤로 물러나기에, 콘돔을 착용하지 않은 채로 속에다 사정하는 것이 미안해 그러나 싶었는데, 역시 그에게 그만한 인정이란 없는 터여서, 무진은 내 한쪽 발목을 붙잡고 채근하듯 흔들며 ‘엎드려.’ 명령하는 것이었다.

내가 분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팔꿈치를 움직여 뒷걸음질을 치자, 무진은 덥석 덤벼들듯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으르렁 목 끓는 소리를 내며 ‘여승재.’ 내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내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결국 직접 손을 써 내 몸통을 전 부치듯 와락 뒤집어엎고는 체벌처럼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 억누른 신음을 흘리며 어깨 뒤로 매서운 눈길을 던지자, 무진은 ‘흥,’ 소리를 내며 내 머리채를 붙잡은 채 그대로 고집스런 삽입을 해 왔다. 달라진 체위에 꿰뚫리는 방향까지 달라진 것 같아 나는 턱을 늘어뜨린 채 끅끅거렸다.

무진은 내가 바닥에 온전히 엎드리지 못하도록 아랫배를 단단히 받쳐 든 채 여유롭게 추삽질을 해 댔다. 그리고 불쑥 팔을 뻗어와 바닥을 긁는 내 손을 낚아채 등 뒤로 잡아당긴 채 허리를 쳐올렸다.

“으읏!”

아래에서 쳐올린 반동으로 허리가 들썩이고, 붙잡힌 손이 끌어당겨져 다시 짓눌려야 하는 절구 형식의 체위에 속살이 절로 옴짝거렸다.

뒤에서 무진이 그렁그렁 목 끓는 소리를 내며 욕설을 뱉어 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힘을 주느라 아래에 꽉 아물린 것을 더 가득 조였을 것이었다.

“하…! 이렇게 하는 거, 읏…! 조, 좋아? 응? 기분, 좋아? 여승재, 이렇게 물고 조이면… 아! 씨발… 너, 죽이게…!”

“아흐으… 그, 그만… 힘들… 아, 아! …읏, 너 싫어… 아…!”

찰박찰박, 채찍처럼 살이 맞붙었다 떨어지고, 묵직하게 눌려진 채 내장을 훑듯 좌우로 흔들리는 것에 정신이 아뜩해졌다. 우리는 어느새 무릎으로 바닥을 디딘 채 앞뒤로 달싹 들러붙어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진이 사납게 나를 밀쳐 도로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나는 개처럼 팔꿈치로 상체를 받친 채 바닥에 정액을 줄줄 흘렸다.

그는 내가 사정하느라 부르르 몸을 떠는 찰나를 알아차렸고, 씩씩거리며 내 엉덩이를 잔뜩 벌려 잡은 채 푹푹 박아 넣으며 정액을 쏟아 냈다.

“하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내 속으로 찔러 넣고는, 내 등허리로 털썩 엎어지며 무진은 개운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귓바퀴를 덥석 찾아 물며 ‘예쁜 새끼…….’ 웅얼거린다.

“…미친 새끼.”

나는 바닥에 이마를 박은 채 조용히 반박했다. 등 뒤로 그가 가슴을 들썩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말 미쳤나 보다, 눈 안쪽이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 ‡ ‡

내가 지쳐 곯아떨어진 후에도 한동안 더 내 몸을 만지작거리다가 가장 늦게 잠든 무진은,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나 샤워까지 마친 후 말끔해진 얼굴로 나를 깨웠다. 그리고 오늘 하루는 일본 기획사 측의 간부진들과 약속이 잡혀 있으니 아마도 내일 귀국하는 길에나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설명하곤 문밖을 나섰다.

“…누가 물어봤다고.”

달칵,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나는 퉁퉁 부은 얼굴을 문지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발끝이 시려 얼른 양말부터 찾아 신었다. 섬나라 특유의 습한 공기에 밤새 창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잠들었었는데, 아무래도 밤공기가 찼던 모양이었다.

무릎걸음으로 질질 몸을 끌어 침실 쪽으로 힐긋 목을 빼고 들여다보니, 현준은 아직 잠들어 있는 채였다.

소리를 죽인다곤 했지만 마지막 즈음엔 나는 물론이고 무진 역시 조금 큰 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태평하게 누워 잠들어 있으니 다행히 아무것도 알아차리지는 못한 것일 테다. 안심한 채 나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한동안 물끄러미 침대 곁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럴 때가 아니지 싶어 그만 몸을 일으키곤, 스케줄 수첩을 펼쳐 들고 현지 통역사와 통화를 나누고, 오늘 녹화가 있을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담당자에게 확인 전화를 돌린 후에야 현준을 깨우기 위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일어났어?”

그런데 통화하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현준은 벌써 침대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잔뜩 뻗친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아침―.’ 칼칼한 목소리로 인사를 해 왔다.

그래, 짧게 대꾸하며 가까이 다가서다 말고 나는 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다가가 녀석의 등허리를 두드리며 ‘어서 씻어라.’ 말할 수 없었다. 나처럼 더럽고 영악한 인간은 닿을 수 없도록 어떤 금단의 보이지 않는 결계가 침대 둘레로 그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왜 그래?”

뚱뚱한 한쪽 눈꺼풀을 비비다 현준은 얼핏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어서 씻으러 들어가. 소현이 부를게.”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자, 녀석은 ‘으음.’ 뭉그러진 발음을 내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훌쩍 높아진 시선에 새삼스레 이 녀석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곁을 지나치던 현준이 고개를 돌린 채 ‘또 왜.’ 물었다.

“그냥, 많이 컸다 싶어서.”

“…키는 원래부터 내가 더 컸다 아이가.”

실없는 대답을 하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현준은 돌연 피식 웃으며 유명한 영화 대사를 흉내 내곤 다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부지런한 소현이 메이크업 도구 등을 챙겨 들고 왔다. 한류 스타 노릇을 해야 하니 호텔 밖을 나서기 전에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아침 식사는 룸서비스를 주문해 받아먹었다. 현준은 커피와 과일을 조금 먹다 말았다. 오후에는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것이니 든든히 먹어 두라고 했지만, 녀석은 꽤나 어른스러운 얼굴로 ‘형 많이 먹어.’ 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후 들른 현지 통역사에게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배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격적인 스케줄은 호텔을 나서면서부터였다. 역시 건물 밖으로 팬들과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현준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천천히 미끄러져 나가는 차 안에서 차창을 내린 채 얼굴을 내밀어 보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몰래 웃었다. 도로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인 현준이 ‘나 멋있나?’ 하고 거드름을 피웠다. 응, 너 멋있다. 굳이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조용한 차 안에서 느껴지는 현준의 숨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가쁜 것 같았다. 어디 안 좋으냐 물었더니, 그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그저 감기 기운이 조금 있는 것 같다 대답했다.

아무래도 창문을 열어 두고 잠든 것이 문제였나 보다 싶어서 ‘아, 미안.’ 멋쩍은 사과를 하자, 현준은 또 한참을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항상 가방에 소지해 다니는 비상약통을 꺼내어 종합감기약 한 알을 생수와 함께 내밀었다. 녀석은 ‘응.’ 대꾸하며 그것을 받아들고 얌전히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녹화는 약속된 정시에 곧바로 시작되었다. 일본의 아이돌 몇 명과 인기 개그맨이 진행하는 오락 프로그램이었다. 현준의 약력이 영상으로 소개되었고, 무대 뒤의 스크린이 갈라지며 그가 영웅처럼 등장했다.

미리 추첨을 통해 초대된 방청객들이 ‘와아―’ 톤 높은 목소리를 내며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이색적인 분위기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현지 통역사에게 미리 배워 둔 일본어를 현준은 아무 때나 불쑥불쑥 꺼내어 말하며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매력을 어필했다. 일본인 개그맨이 그런 그를 향해 크게 제스처를 하며 무어라 과장된 억양으로 말을 하는 것에,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도 기어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녹화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현지 통역사에게 들러붙어 대본에서 주어진 대사 외에 더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나머지 녹화 역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진행자들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과도 기념사진을 찍은 후에는 일본 방송국장과 저녁 식사 약속이 있었다. 그는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한류스타가 도쿄에 세운 식당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나는 소현과 기욱을 먼저 호텔로 보내고 현지 통역사를 대동했다. 현준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고, 나는 내내 조심스러워했다.

“잘했어, 수고했어.”

하루의 모든 스케줄이 끝났고,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지 급격히 피로해진 얼굴로 차 안에서 털썩 다리를 뻗는 현준이었다.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하자, 녀석은 뒤로 고개를 젖힌 채 ‘아아아―.’ 하고 모호한 소리를 냈다.

“난 기욱이랑 한방 쓸 테니까, 너 오늘은 혼자 편하게 있어. 내일 쇼케이스도 오전부터 준비해야 하니까 일찍 자고.”

그리고 호텔에 도착해 그의 룸 앞에서 먼저 문을 열어 안으로 들여보내며 말을 전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뒤쪽 옷깃이 불쑥 당겨졌다. 뒤돌아보니 현준이 내 셔츠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왜, 뭐 필요해?”

“…같이 있어 주면 안 되냐?”

“…….”

“몸이 좀 안 좋아. 옆에 있어 줘.”

장난을 치려거나 행여 다른 의도는 없다는 듯 현준은 담담한 얼굴로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의심 많은 얼굴을 한 채 손등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펄펄 열감이 느껴졌다.

“뭐야, 너 계속 아팠던 거야? 약 먹은 것도 소용없을 만큼―”

“실은 어젯밤에 먹은 게 체한 모양이야. 내내 속이 불편했는데 아까 그 높으신 분이랑 마주 앉아 식사하면서 긴장하느라 더해진 것 같고.”

화들짝 놀라며 묻는 말에 현준은 침착한 어조로 조용히 설명했다. 그리고 들어오라는 듯 한쪽으로 비켜서는 것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객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려 봐, 소화제도 갖고 있으니까…….”

테이블 위로 가방 안의 물품을 모두 쏟아 내며 약통을 찾았다. 그러나 현준은 아무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는지 거뭇한 안색으로 목덜미를 문지르다, 기어이 ‘욱―!’ 소리를 내며 급하게 욕실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탕! 문을 잠가 닫고는 체한 것을 토해 내는지 웩웩 소리가 들려왔다.

“현준아, 문 열어 봐. 등 두드려 줄게, 어?”

잠긴 문고리를 달칵거리며 나는 무진이 그러했듯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다. 한참 후에야 변기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현준은 그새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막상 문이 열렸는데도 그런 얼굴을 마주하곤 놀라 멍청하게 굳어 있는 나를 보며 녀석은 힘없이 피식 웃었다. 그러곤 언뜻 얼굴을 굳힌 채 ‘승재 형.’ 하고 낮게 불러 온다.

“어? 어.”

삽시에 어둑해진 낯빛에 나는 기욱이처럼 더듬으며 대답했다.

“…나 오늘 잘했어? 아픈 티 안 내고, 잘 처신했어?”

“응, 잘했어. 수고했고.”

뜬금없이 묻는 말에 어릴 적처럼 칭찬을 바라고 그러는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히 대답하자, 현준은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나 어젯밤에는, 잘했어?”

“…무슨….”

“어젯밤에는 내가 잘 처신했느냐 말이야.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마냥 태평한 어린애처럼 쿨쿨 잠이나 자는 척, 그렇게 잘 했느냐 말이야.”

“…….”

세면대에 틀어 놓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시간이 제대로 잘 흐르고 있구나, 멋대로 잘도 흐르고 있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다만 정지한 것은 내 심장 박동과 그런 나를 뜯어보듯 가는 눈살로 살피는 현준의 눈동자였다. 아니,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던가.

“아니라고 말해 봐.”

“…아니야.”

그는 언젠가 무진과 나의 관계가 부정되길 바라며 요구하던 때처럼 차분히 말했다. 나는 착한 아이 흉내를 내며 절반쯤은 체념한 채 그가 바라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현준은 혐오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웃었다. 그리고 문득 다시 토기가 올라오는지 와락 얼굴을 찌푸린 채 급히 변기통으로 고개를 박았다.

“우, 우욱……!”

나는 그의 등허리를 두드려 주지 못했다.

현준은 속에 든 것을 모두 토해 내려는 듯 온몸을 들썩이며 토악질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퉤,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그러나 옷깃에 토사물이 튄 것을 발견하고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작게 짜증을 내며 이번에는 샤워기 아래로 가 선 채 곧장 수도꼭지를 틀었다.

“…감기 걸려, 나와.”

세찬 물줄기 아래에서 이내 흠뻑 젖는 현준을 바라보며 나는 밀랍으로 빚은 인형처럼 단단히 굳은 채 속삭임처럼 중얼거렸다. 찬물에 젖은 것은 그인데, 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춥게 떨렸다.

차갑고 더러운 여자 화장실의 바닥, 왜 끊어 낼 수 없는 걸까.

애써 다리를 움직여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줄기 아래에서 어린애처럼 쪼그리고 앉아있는 현준의 위에서 구부정하게 몸을 숙여 막을 만들었다. 세찬 물줄기가 불꽃처럼 내 뒷덜미며 등허리를 타닥타닥 태워 갔다.

“비켜.”

자신의 무릎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현준이 머리 위로 물줄기가 쏟아지지 않자 힐긋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하곤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집스레 묵묵히 버티었다. 그러자 얼굴을 구기며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양팔을 아프게 잡아 쥔 채 사납게 흔들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매번 이런 식이지! 뭐든 양보하고, 뭐든 위해 주고, 뭐든, 뭐든……! 형이 잘못한 거야! 네가 못된 거야! 어린애한테 그렇게 잘해 주면 착각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혹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우리는 모두 흠뻑 젖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른 사막처럼 건조해,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를 꼴깍꼴깍 삼키며 사납게 흔들렸다.

현준의 얼굴은 쏟아지는 물줄기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등 뒤로 손을 뻗어 수도를 잠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을 만큼, 홍수처럼 젖어 흐르고 있었다.

“형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날 돌보는 걸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어. 입안에 든 사탕이 모형이라는 걸… 처음부터 말 좀 해 주지 그랬어. 내가 마법을 부리지 않는 이상, 그걸 진짜 사탕으로는 못 바꾼다고 말 좀 해 주지… 네가 못된 거야… 으, 으…….”

현준은 내 멱살을 와락 움켜쥔 채 애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울었다. 입안에서 절대 녹지 않는 모형 사탕을 욕심껏 깨물었다가 이가 상해 다친 것처럼, 아픈 듯이 울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그러나 손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그보다 키가 크지 않아서 마주 보고 선 채로는 물줄기를 막아 줄 수도 없었다. 다만 나는 조용히 고백했다.

“…너 좋아하는 거 맞아, 그거 모형 아니야. 모형 아닌 걸 모형으로 바꾸는 마법 같은 건 못 부려. 난 너 좋아했어. …좋아해.”

너는 내가 꿈꾸었던 과거의 이상향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나다. 너처럼 살고 싶었다. 반짝반짝 빛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주위의 사람들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어우르며 살고 싶었다.

한 번도 거짓으로 너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너를 동경했고, 그래서 좋아하게 됐고, 그 때문에 아쉬워했다. 그때, 열아홉의 내가 옥상 문을 열고 만난 사람이 너였다면…….

그러나 현준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쏟아지는 물줄기에 고개를 들어 얼굴을 씻고, 다시 천천히 눈을 떠 시선을 마주하며 다그쳐 물었다.

“그 자식 싫어한다는 건, 끔찍하다는 건, 사실이야? 싫어해야 하고, 끔찍스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함부로 말하지 마! 그 새끼하고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네 멋대로 재단할 수 없는―”

무진과의 관계까지 확장시키는 감정에 대해 나는 그의 어깨를 매섭게 밀어내며 반박했다. 그러나 다시 바짝 다가와 멱살을 움켜쥐는 것에 말을 맺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 복잡해 미치겠어서 옆에 나 재워 놓고 그 짓을 해?! 그렇게 싫은데 왜 나 안 불렀어? 비명이라도 지르지, 싫다 저항이라도 하지, 왜, 그건 계집애 같은 짓이라서? 그래서 내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어쩔 수 없다 하고 당하고만 있었다고?! 싫어하고 끔찍해하는 사람이랑 그 짓 하면서 그런… 그런 소리를 내?! 여승재 진짜 남창이야?!”

짜악―!

버럭 외쳐 묻는 그의 목소리가, 내가 손바닥을 휘두르며 따귀를 때리는 소리와 맞물려 찢어질 듯한 파열음을 냈다.

하아, 하아, 오래 달린 것처럼 달뜬 숨을 내뱉는 것은 나였다. 오히려 현준은 고개가 한쪽으로 꺾인 채 차분하게 숨을 고르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등 뒤로 손을 뻗어 수도꼭지를 잠근다. 머리꼭지 위로 세차게 쏟아지던 물줄기가 뚝, 그쳤다.

“그러면 진짜로 좋아한다는 나하고도 못할 거 없겠네.”

그보다 차가워진 얼굴의 현준이 낯선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곧장 내 두 손목을 낚아채 타일 벽으로 밀쳐 넣곤, 당혹으로 벌려진 내 입안으로 급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아, 으……!”

그가 서툰 손길로 내 셔츠의 단추를 뜯어내며 입술을 깨무는 동안,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두 손을 버둥거리며 허우적거렸다.

아아… 현준아, 너는 이 숨 막히는 현실에서 내 유일한 꿈의 통로였는데……. 그걸 망가뜨린 건 네 말처럼 내 역겨운 모형의 감정이었을까.

“이게, 이게 왜……!”

그러나 젖은 셔츠가 뜻대로 잘 벗겨지지 않자, 현준은 옷깃을 쥔 채 좌우로 뜯어낼 듯 사납게 뒤채며 울부짖었다.

나는 폭풍우 속 나비처럼 뚝뚝 관절을 꺾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 내 멱살을 움켜쥔 채 일으키고 또 일으키던 현준은 결국 같이 바닥에 쓰러지듯 앉으며 서럽게 입을 맞추어 왔다.

“그, 그만… 현준아… 그만…!”

신경증적으로 내 바지 버클을 풀어내고, 이어서 지퍼를 내려 속옷께로 손길을 뻗는 것에 나는 황급히 그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외쳤다.

순간 현준이 전광처럼 번쩍 눈을 홉뜬 채 시선을 맞추어 왔다. 그리고 거봐란 듯 피식 웃어 보인다. 거짓말쟁이, 남창, 모형 사기꾼,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젯밤이랑 똑같은 소리, 안 내기만 해 봐.”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아 누른 채 현준은 씩씩거리며 급하게 자신의 바지 버클과 지퍼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 속옷 아래에서 아직 채 발기하지 않은 성기를 꺼내어 성마른 손길로 문지르며 내 바지를 벗겨 내려 들었다.

나는 그에게 넘어뜨려지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도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더 이상 어깨를 밀쳐 내며 강하게 거부하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천천히 매만졌다. 험한 짓을 저지르며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는 그 겁먹고 서러운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에 현준이 동작을 뚝 멈추고 물끄러미 시선을 맞춰 온다.

“…그러지 마, 현준아.”

더러운 건 내가 다 할게.

“애처럼 달래려고 하지 마.”

울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일렁이는 눈으로 현준은 나를 쏘아보며 대꾸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지 마. 내가 빌게. 그렇게는 되지 마라, 어?”

“…….”

울음을 참는 듯 그는 떨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러나 이미 젖은 얼굴의 물기가 오뚝한 코끝으로 고여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내 얼굴에 닿을 때마다 화산재처럼 피부가 움푹 파이는 것만 같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그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다가, 나는 팔꿈치로 몸을 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 현준의 씩씩 숨을 내뿜는 입술을 핥고, 울음을 참는 코끝에 고인 물기를 빨며, 손을 내려 그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의 어깨가 긴장으로 단단해졌다.

“아… 형… 형… 승재 형….”

현준이 울먹이며 나를 불렀지만,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나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그의 사타구니로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깨끗한 성기를 입안 가득 물고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흐으으, 신음처럼 그는 울었다. 나는 천박하게 혀를 놀리며 움직였다. 내가 얼마나 난잡한 짓을 했었는지 그가 알았으면 했다. 순수한 경멸로서만 나를 보아야 했다.

“으, 읏……!”

손바닥 가득 내 머리카락을 쥐어 잡은 채 현준은 내 입안에서 사정을 했다. 나는 고개를 든 채 그의 정액을 꿀꺽, 소리 내어 삼켜 보였다. 마주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대충 젖은 것을 닦아 내며 욕실 문을 나섰다.

“못된 거 알아?!”

머리채를 잡듯 현준이 버럭 소리를 질러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아직 차가운 타일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슴을 들썩이고 있었다.

“잔인한 거 알아?”

“…알아.”

“나하고 같이 자.”

“…소화제 놔두고 갈 테니까, 챙겨 먹고 일찍 자.”

나는 욕실 문을 열어 둔 채 바깥으로 나갔다. 내 발걸음 뒤로 미련처럼 축축한 자국이 남았다. 그러나 복도 밖으로 나가 등 뒤로 객실 문을 닫는 순간, 풀썩 무릎이 꺾였다.

‡ ‡ ‡

“얼굴, 왜 그래.”

버릇처럼 한쪽으로 고개를 꺾어 우둑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무진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이 덕지덕지 눌어붙은 얼굴은 오히려 그쪽이어서 나는 대답 대신 한심한 눈길을 힐긋 던져 보일 뿐이었다. 그에 무시당했다 생각했는지, 무진은 사냥개처럼 코를 실룩이며 ‘안 들려?’ 하고 건들거려 왔다.

“기욱이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잘 못 자서.”

옆에 들러붙어 귀찮게 구는 것이 짜증 나 기계처럼 빠르게 대답해 버리고 나는 출국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아아, 소리를 내며 그 역시 재빨리 다리를 움직여 따라붙었다.

그런 그에게 더 신경을 쓰지 않고, 나는 앞쪽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어 앞서 걸어가는 현준의 뒷모습을 확인했다. 그는 공항에서 무진과 맞닥뜨리자마자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내 곁에서 떨어져 걸었다.

“기욱아, 앞에 가서 현준이 옆에 서.”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기욱에게 말하자, 녀석은 충직한 태도로 고개를 꾸벅해 보이곤 곧장 작은 캐리어를 돌돌 끌며 보폭을 넓혔다.

그러나 무진의 곁을 지나며 앞서는 순간, 불쑥 발을 뻗은 그에게 뒷무릎을 걷어차여, 장병처럼 걷다 말고 캐리어와 함께 우당탕! 요란스럽게 엎어지고 말았다.

“…괜찮아?”

차마 놀라지도 못하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물었다. 창피했던지 기욱은 꽤 아팠을 텐데 재깍 일어나 짐을 챙겨 들곤 퍼뜩 현준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녀석이 든 것은 무진의 짐이었다.

“넌 악질이야.”

기욱을 넘어뜨린 후로 계속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히죽 웃고 있는 놈에게 욕설처럼 조용히 쏘아붙이자, 무진은 다시 코를 실룩거리며 무어라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쌍스러운 말이었을 것이다.

“…난 어젯밤에 일본 관계자가 게이샤 나오는 데를 데려가 줘서 말이야, 아침까지 있었는데 말이야.”

그러나 내가 잔뜩 굳은 얼굴로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또 뭔가 질 떨어지는 장난을 치고 싶었는지, 그는 팔꿈치로 내 몸통을 툭 건드리며 혼자 떠들어 댔다.

마침 그에게서 여권과 탑승권을 건네받고 있던 항공사 직원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줄 알았는지 대뜸 ‘하이!’ 하고 톤 높은 목소리로 엉뚱한 대꾸를 했다.

먼저 게이트를 지나온 나는 냉큼 걸음을 빨리 옮겨가 버렸다. 그러나 어느새 따라붙은 무진은 끈질기게 내 귓가에 바짝 고개를 숙인 채 비밀처럼 이어 속닥거려 왔다.

“거기서 재밌는 걸 많이 봤는데 말이야, 그걸 너한테 시켜 보고 싶어.”

“…….”

“그거, 뭐라고 하지? 나이트가운처럼 생긴 것 말이야, 그것도 하나 구해 왔으니까. 너한테 잘 어울릴 거야.”

“그래서, 네 엄마하고는 잘 놀다 왔어?”

걸음을 옮기다 말고 결국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경멸조로 묻자, 무진은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이씨―’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앞서 걷던 현준과 기욱이 힐긋 뒤를 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무장경찰까지 시선을 던져오는 것에 스스로 화기를 가라앉히려는 듯 훅, 훅, 숨을 내쉬었다.

딱히 상관치 않으며 획 하니 고개를 돌려 나는 다시 빠르게 걸었다. 그런 내 곁으로 또 잽싸게 따라와 붙으며 무진이 불퉁한 목소리로 이어 말을 붙여 왔다.

“섹스는 안 했어.”

“상관없어.”

그러나 내가 튕겨 오른 스프링처럼 재깍 대꾸하자, 그는 기어이 ‘썅!’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무장경찰이 이윽고 발걸음을 떼고 그를 향해 다가왔다.

씨발 저건 또 뭐야, 투덜대는 그를 내버려 두고 나는 길게 늘어진 출국심사대의 줄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곧바로 용건을 전했다.

“실장님, 저희 지금 출발합니다. 말씀드렸던 시간 정각에 도착할 것 같으니 공항 앞에 차 대기시켜주세요.”

「응, 알았다. 수고 많았어. 뭐 일 생긴 건 없었고?」

그러나 내가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아차 싶어, 좀 더 부드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 예.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잘 마무리하고 들어갑니다. 음… 한국에는 별일 없으셨지요?”

「으하하! 여승재, 귀여운 놈.」

“…….”

「뭐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별일이라면 지진 소식 빈번한 거기가 걱정이었지. 아, 여기에 뭐 하나 터진 건 있었다.」

“무슨 일이요?”

뭐 하나 터졌다 소식을 전하는 김 실장의 목소리가 그리 어둡지 않아, 나 역시 그리 긴장하지 않고 한쪽 어깨로 휴대폰을 떠받친 채 건성으로 물었다.

「딱히 터졌다기보다는 이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방송에서 현직 검사들 비리를 대대적으로 터뜨린 거지. 바로 어제 저녁에 말이야. 것 때문에 꽤나 떠들썩하긴 해. 괜한 불똥 튈까, 이쪽에서도 한편으론 바짝 긴장하고 있기도 하고. 여론 시선 돌리는 용으로 써먹잖아들.」

김 실장은 재미없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상대로 회사 내의 문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안심하며 나는 여권과 보딩 패스 등을 뒤적이다 말고 언뜻 뒤를 돌아보았다. 짜증으로 오만상을 찡그린 무진이 경찰에게 여권을 보이며 신분을 증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쪽 사람들은 어두운 쪽으로 숨겨 둔 스캔들도 없는데요, 뭘.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지 뭐.」

그리고 차례가 되어 전화를 끊고 출국심사를 통과한 뒤 나는 곧바로 기욱과 현준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곁으로 다가가 섰다.

내가 옆에 서자 기욱은 자연스레 그러하듯 소현을 데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채 따라왔다. 그러나 현준은 항공기 안으로 들어가 나란히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나를 아주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었다.

“전현준,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 아득한 침묵이 답답해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안전벨트를 매던 현준은 푹 눌러쓴 모자 챙 아래로 힐긋 시선을 던지며 씩 웃는 얼굴로 담담히 대답했다.

“어떻게 멋지게 한 방 먹일까 고민 중이야.”

“…….”

“뭐해, 안전벨트 안 매?”

“…….”

“여승재 씨, 안전벨트.”

“내가 나쁜 거 알아. 하지만 네가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어린애 같아.”

내 말을 자르며 타박을 하곤 현준은 불쑥 내 얼굴 위로 바짝 고개를 붙여 왔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팔을 둘러 대신 양쪽 벨트를 끌어 딸깍, 채워 준 뒤 ‘이런 것도 못하고.’ 잔소리를 했다.

“…고마워.”

다시 자신의 자리에 제대로 가 앉는 현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채 속삭여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비행기가 다시 착륙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기욱과 소현을 데리고 그의 객실 문을 두드렸을 때, 현준은 이미 멀끔해진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전날 저녁에 일본에 도착한 드라마의 주연 배우들과 슈거 마니아 감독, 그의 오른팔인 조연출이 합류해서 본격적인 프로모션이 시작되었다.

쇼케이스라 이름 붙였지만 드라마에 관한 영상 소개와 주연 배우들의 인터뷰가 주가 되었고, 그나마 현준이 처음과 마지막에 드라마 주제곡을 부르는 것으로 대충의 명색을 갖추는 식이었다.

철저한 리허설 준비에 이어 오후 3시부터 정확하게 두 시간 동안의 본식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이는 현준의 모습에 나는 새삼스레 응원 피켓을 든 여자애들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되고 싶었던 나. 온화하고 단단해 쉬이 허물어지지 않는.

‘현준아, 너 멋지다.’

잠시 무대 위에서 스크린 영상이 나가는 동안 대기실에서 소현에게 메이크업 정돈을 받고 있는 녀석을 향해 대뜸 그렇게 말하자, 현준은 씩 웃어 보이며,

‘닥쳐.’

대답했다. 소현이 놀란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지만, 덩달아 비식 웃는 나를 보곤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정체 모를 시선을 나누며 그저 고요히 웃고만 있었다.

얼마나 내 따귀를 때리고 싶었을까, 그런데도 현준은 묵묵히 나를 곁에 세워 두고만 있었다. 두 뺨이 얼얼했다.

“매니저 수고 많았어.”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비행시간이 짧은 것이 다행이었다. 바쁘게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뒤에는 수하물수취대에서 소현의 큼직한 캐리어를 대신 찾아 주고 있는데, 문득 옆에 와 선 슈거 마니아 감독이 말을 걸었다.

뒤편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기욱에게 들어내야 할 짐을 가리켜 보이며 ‘저거’ 손짓해 주고, 나는 곧바로 감독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루에 벌써 열 번째는 될 인사였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감독님 멀리까지 함께 발길해 주시고, 직접 드라마 소개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이, 매니저가 프로모션 준비까지 전반적으로 미리 해 두고 애쓴 거 알고 있어. 나야 그리 먼 길도 아니었는데 뭘.”

얼굴 앞에서 두꺼운 손바닥을 휘휘 저어 보이며 대답하던 감독은 문득 수하물수취대로 눈길을 던지곤 ‘어, 저거.’ 했다. 비행기 안으로 들고 탑승해도 될 만한 작은 짐 가방이었다.

얼른 집어 들고는 조연출에게 내밀어 보였지만, 그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모르는 척을 했다. 밉살스럽지만 저런 녀석이 또 언제 연출 자리를 꿰차고 앉을지 모를 일이어서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대신 가방을 들고 감독과 걸음을 맞추어야 했다.

“그래, 우리 뒤풀이하러 가야지.”

“…오늘이요?”

그런데 살가운 태도로 팔을 맞붙인 채 출국장을 향해 나란히 걷던 감독이 격려처럼 내 어깨를 두드리며 또 몇 번째인지 모를 뒤풀이 이야기를 꺼내었다.

곧바로 회사에 들어가 정리할 것이 남은 터라 조심스러운 태도로 되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응, 그럼 오늘 해야지 또 언제 하나. 이제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매니저 얼굴이 영 까칠해졌구먼, 현준이 다른 스케줄 때문에 일본에서 며칠 더 있었다고? 그래, 남의 나라에서 제대로 먹은 게 없어 그래. 오늘은 내가 몸에 좋은 거 살 테니까, 가자고. 수고들 했는데 그 정도 못 해 줄까.”

거드름을 부리는 감독의 뒤에서 조연출이 퍼뜩 ‘감독님 인자하십니다.’ 하고 추켜세웠다. 그에 또 어깨가 으쓱해졌는지 감독은 ‘매니저 합석해야지, 응? 응?’ 재촉하듯 물으며 손바닥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두어 걸음 떨어져 기욱과 함께 걸어오던 현준이 선글라스를 고쳐 쓰는 척하며 이쪽을 힐긋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 치욕을 느끼게 하는 것은 감독의 이런 구역질 나는 태도가 아니라, 그것을 방관하는 조연출의 비겁함이 아니라, 현준의 저런 올곧은 눈빛이었다.

부끄러움에 서둘러 시선을 떨어뜨리자, 현준의 꽉 말아 쥔 주먹이 보였다. 그동안 감독은 내 뒷덜미를 능숙하게 주무르며 ‘역시 피곤했겠지, 근육이 뭉쳤어.’ 하고 염려하는 투로 혼잣말을 했다. 나는 어깨를 비틀어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늘 소화해 내던 일정이어서 괜찮습니다. 이 정도 피로는 하루 집에서 편안히 쉬면 다 풀어지고요.”

“젊어 몸 축내면 늙어서 고생하지. 그래, 내 오늘 좋은 데… 무, 무슨… 으억…!”

그러나 다시 내 어깨를 잡아채는 감독은 큰일 날 소리라는 듯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을 잇다가, 불현듯 자신의 멱살을 사납게 잡아채는 손길에 급한 숨을 들이키며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리고 주춤 물러선 조연출과 내가 말릴 겨를도 없이, 자연재해처럼, 뺑소니 사고처럼, 일이 터졌다.

“이 씨발 새끼가!”

무진은 야차 같은 얼굴로 곧바로 감독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다 꽂았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둥그스름한 덩치의 감독이 ‘아이구구!’ 요란한 신음을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꺅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흩어졌고, 멀리서 공항 보안요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왔다. 무진은 바닥에 뻗은 감독의 멱살을 붙잡고 일으켜 세워 무어라 컹컹! 사납게 짖어 댔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조연출이 들고 있던 자신의 가방으로 무진의 뒤통수를 내리쳤고, 그에 꿈쩍도 하지 않은 무진이 씩씩대며 이번에는 그의 멱살을 붙들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러나 부리나케 달려와 훌쩍 몸을 덮쳐누르는 보안요원들에게 저지당해 바닥에 깔린 채 왁왁 소리를 질러 댔다. 그리고 문득,

“읏―! 아파! 씨발, 아파, 아프다고! 앰뷸런스!”

몸통을 뒤틀다 다시 갈비뼈에 무리가 왔는지, 더 이상 몸부림은 치지 못하는 대신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함인지 호통인지를 쳐 댔다.

경찰들은 먼저 폭력을 행사하고 출국장 입구를 소란스럽게 만든 주제에 유난을 떨며 앰뷸런스를 불러내라 호통을 치는 무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서로의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다 결국 어딘가로 무선호출을 했다.

나는 내내 들고 있던 감독의 짐 가방을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 현준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는 아수라장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외롭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져 소란을 떨고 있는 무진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역시 내게 물끄러미 시선을 던져 왔다.

그는 아직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내게 한 걸음 다가와서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하려고… 생각을… 생각만…….”

“…현준아.”

상처를 입은 것은 갈비뼈가 상한 무진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준을 할퀸 것은 내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이 아니라, 내가 그의 진심을 자꾸만 밀어내려 했던 지난날들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임을 그의 일렁이는 눈빛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어떻게…….”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러나 결국엔 피식 헛웃음을 띄워 올리며 현준은 고백처럼 털어놓았다.

“내가… 졌다.”

그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서, 나는 얼른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선글라스를 낚아채 대신 얼굴에 씌워 주며 눈을 가리게 했다.

현준은 무진이 들것에 실려 가는 것을 지켜보는 내내 픽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내부 어딘가 허물어져 스산한 바람이 든 걸까. 그것까지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 안의 단단한 유리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앰뷸런스에 옮겨지는 순간에도 무진은 오만한 제왕처럼 우리를 코끝으로 내려다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소름이 끼쳐, 깨어진 유리 조각 위에서 몸을 뒹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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