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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eight (10/41)

Chapter eight

“승재 씨, 이거 우리 오빠한테 좀 전해 주세요.”

콧잔등에 주근깨가 옅게 박힌 여자애가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샛노란 프리지어 다발과 케이크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와락 가슴에 떠안기는 것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받아들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여자애들이 저들끼리 수상한 시선을 교환하곤 쥐새끼들처럼 킥킥대며 웃었다.

현준이 팀 활동을 하던 초창기 시절부터 팬클럽 활동을 했었는데, 그만큼 오랫동안 얼굴을 보아 왔기도 하거니와, 집 앞이고 회사 앞이고 밤늦게까지 따라다니고 기다리는 등의 문제로 여러 번 혼내기도 했던 터라 서로 낯이 익은 아이들이었다.

“현준이 입원해 있잖아.”

마침 병원으로 향하기 위해 집을 나서던 길이었다. 사고 기사가 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은 터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싶어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대체 뭐가 웃겼던지 머리를 맞대고 있던 아이들이 일시에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중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가 얼굴을 삐죽 내밀며 대표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병원엔 경비한테 찍혀서 얼씬도 못한단 말이에요.”

“…병원뿐만 아니라 여기, 집 앞에서도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얼굴 한번 제대로 볼 수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 말이야.”

“그러니까 승재 씨한테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잖아요―.”

“…….”

전하는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고, 병아리처럼 따박따박 일방적인 대답만 해 오는 것에 나는 더 이상 대화라는 것을 해 볼 생각을 접어 버렸다.

어쨌든 이것까진 전해 줄게, 냉랭한 표정으로 말하며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여자애들 특유의 톤 높은 목소리로 ‘와아―.’ 환호하며 박수를 짝짝 쳤다.

뭐랄까, 조금 귀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피식 웃어 버렸더니,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아이들이 또 ‘어어―.’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금 웃었다, 그죠? 승재 씨 방금 웃었어. 이렇게 하는 거 재미있어하시는구나―.”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맞으면서―.”

“…그런데 너희들 왜 자꾸 날 그렇게 부르는 거야? 어른한테, 예의 없어 보여, 그거.”

“에이, 승재 씨를 승재 씨라고 안 부르면 그럼 뭐라 불러요?”

“…….”

임기응변이나 센스와는 거리가 먼 내가 어린 여자애들을 상대로 장군 멍군 대화를 이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사실 이 아이들이 나를 ‘승재 씨, 승재 씨,’ 장난스럽게 부르게 된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 현준이 나를 향해 여승재 씨 어쩌고 하며 하는 말을 들은 후부터 저들도 그리 부르면서 좀 더 친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어른한테 그렇게 놀리는 거 아니야.”

“놀리는 거 아닌데, 우린 승재 씨 좋아하는데. 그 케이크도 같이 드시라고 이렇게 기다렸다 승재 씨한테 부탁하는 건데.”

친밀감도 좋지만 어쨌든 만만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입장이라 제법 쌀쌀맞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이내 기가 죽었는지 뒤에서 웅얼거리며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경비원에게 붙잡혀 저지당하는 아이들을 향해 힐긋 고개를 돌려 보이며 결국 ‘그래 고맙다.’ 말해 주고 말았다.

그러나 차를 몰고 나오는 길목에 우르르 따라나서는 것에는 여느 때처럼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채 ‘비켜, 비켜!’ 고함을 질러야 했다. 목소리가 그리 크게 나오지 않아, 내가 들어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형, 나 이거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다 큰 사내 녀석들이 옹기종이 모여 앉아 햄버거를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프레임 안에 담기는 네 명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이상한 감격마저 느껴져 입구에서 잠시 멍하니 서 있다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각자 성의 없는 인사를 나눈 후 곧장 현준에게 꽃다발과 케이크를 내밀자, 녀석이 순정만화 여주인공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어 온 말이었다.

“애들한테 받은 거야, 너 전해 주라고.”

“아, 재미없어. 이 형 진짜 센스 없어.”

허튼 오해를 받는 것이 싫어 무심한 얼굴로 재깍 대답하자 심드렁한 타박이 돌아왔다. 동의를 구하듯 현준이 ‘그지?’ 하고 묻자, AB 쌍둥이들과 케이까지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응.’ 하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재미없는 사람이어서 미안하다, 중얼거리며 간이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나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쌍둥이 녀석들이 과일을 깎아 달라 떼를 쓰는 바람에 다시 일어나 냉장고를 뒤져 사과 몇 알과 과도를 챙겨 들고 와야 했다.

“승재 형. 우리 청춘 엔터테인먼트로 가는 거, 잘 해결됐대. 오늘 아침에 그쪽 사람한테 연락 받았어.”

그리고 침대 끄트머리에 접시를 얹어 과일을 깎고 있는데, 먼저 자신을 A라고 밝힌 녀석이 문득 소식을 통보해 왔다.

사과 껍질을 깎던 과도가 잠시 멈추었다. 모두들 내 반응을 살피는지 잠시 조용했다. 다시 사과를 돌려 깎으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됐네.”

“뭐야―, 이 형 진짜 재미없어. 반응이 그게 다야?”

녀석들은 일제히 ‘우우―.’ 하고 엄지를 아래로 내리며 야유를 하고는 또 와르르 웃었다. 그러나 다들 내심 섭섭한 기색이었다. 각자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지만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의 과거는 그저 기억의 우물 속으로 잠겨 버렸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추측에 의해서.

“…괜찮아.”

웃음의 끄트머리에서 각자 씁쓸한 얼굴로 콧등을 긁적이거나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나는 어떤 각오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세 녀석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가장 가까이 앉은 케이가 물끄러미 고개를 돌린 채 의아한 얼굴로 물어 왔다.

“형, 몸 아파?”

“아니, 왜.”

“목소리 힘없어, 얼굴도.”

그 부정확한 발음이 조금 재미있어서 입술을 슬쩍 휘어 보였는데, 나머지 녀석들 역시 덩달아 ‘진짜, 아파?’ 하고 새삼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특별히 아픈 구석은 없지만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는 것 같기도 해서 목덜미를 슥슥 문지르며 ‘글쎄…….’ 하고 말을 끌자, 내가 잘라 준 사과 한 쪽을 아삭 베어 물던 현준이 ‘그래.’ 하고 입을 열었다.

“형 오늘따라 유난히 축축해 보여.”

그리고 나머지 세 녀석들이 동시에 ‘맞아,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샤워하고 나와서 그래.”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어서 그래, 음지식물처럼. 대신해서 나는 농을 던졌다. 그러나 아이들은 또 ‘에이―.’ 야유하고는 전혀 웃지 않았다.

이렇게 센스가 없어서 어쩌지, 나는 혼자 웃었다. 그리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케이를 향해 돌연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넌 허튼 생각하지 마.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란 얘기야, 알아들어?”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사과를 아삭아삭 베어 물던 녀석들이 일시에 턱을 합, 다물었다.

쌍둥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내가 어떻게까지 했는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축축해질 만큼 고생했으리라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케이는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승재 형…, 우리 옮긴다는데 안 섭섭해?”

그리고 시무룩한 얼굴의 쌍둥이들이 길 잃은 강아지들처럼 콧방울을 발랑거리며 물어 왔다. 이놈들 머리를 한 대씩 때려 버릴까 싶었지만, 역시 몸이 안 좋은 게 맞는지 주먹을 쥐는 것도 힘이 들어 관두었다.

“뭐가 섭섭해. 너희들이 옮기고 싶어 그리로 간다는데. …이왕 잘 해결된 거, 가서 열심히 해.”

사과 껍질을 한데 모으며 시선을 주지 않고 대답하자,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둘이서 뭔가 시선을 교환한 쌍둥이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양옆으로 살갑게 들러붙고는 콧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어 왔다.

“형도 거기로 옮겨가서 우리 일 봐주면 안 돼?”

“절대 안 돼!”

“…….”

병실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단호히 대답한 것은 현준이었다. 포크로 사과를 집으려던 케이는 물론이고 내 양쪽 팔에 매달려 있던 A와 B까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입을 헤 벌린 채 녀석을 쳐다보았다.

“…뭐, 승재 형도 엄연히 계약된 몸이니까.”

스스로도 겸연쩍었던지, 현준은 이마를 긁적이며 웅얼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힐긋 내 눈치를 보며 옆에 놓여 있는 콜라를 들고 빨대를 물려는 찰나,

“안 돼, 그거 마시지 마. 뼈에 안 좋아. 다른 거 줄 테니까.”

나는 양옆에 매달린 쌍둥이들을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를 꺼내어 얼음을 넣은 컵에 따라 돌아서는데, 길을 잃은 데다 비까지 맞은 강아지처럼 쌍둥이 녀석들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끙끙거렸다.

“승재 형… 우리도 뼈에 안 좋은 건 안 마시고 싶다….”

“…나도.”

케이 역시 손가락 하나를 슬쩍 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끝까지 부려 먹는구나, 혼잣말을 하며 컵 세 개를 더 준비해야 했다. 뭐가 좋은지, 현준은 컵 주둥이를 앞니로 슬쩍 문 채 흐흐 웃었다.

“아―, 저 녀석들 정말 시끄러워.”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현준이 꽤나 어른스러운 투로 혼잣말을 했다. 방금 병실을 나선 녀석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똑같은 놈들이야, 너희 네 명 다.”

“이거 왜 이래, 나는 저 녀석들이랑 정신연령 자체가 달라.”

예전 리더랍시고 혼자 어른인 척하는 것이 우스워 한마디 거들자, 꽤나 기분이 상했는지 현준은 불퉁한 얼굴로 대꾸했다.

알았다, 건성으로 대답하며 돌아서는데 녀석이 내 한쪽 옷깃을 삐죽 붙들었다. 왜, 말하며 다시 마주 서자 반질반질한 얼굴을 내밀며 여전히 시무룩한 투로 입을 연다.

“얼굴 답답해. 닦아 줘.”

“…….”

정신연령 자체가 다르긴 퍽이나 다르다, 생각만 하고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셔 왔다. 그리고 뽀얀 얼굴 위로 철썩 수건을 덮어 주고 떨어지려는데, 여지없이 손목이 끌어당겨져 침대 위로 걸터앉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계속 안 보이신다. 어디 가셨어?”

“몰랐어? 우리 엄마 어제 집에 내려갔어. 가게 일도 있는데 계속 여기 있을 순 없고.”

성의 없이 녀석의 얼굴 위로 젖은 수건을 문지르며 묻는 말에, 현준은 기분 좋은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아… 어쩌지…,’ 하고 언뜻 손을 내리며 말끝을 흐리자, 그제야 의문을 띤 얼굴로 눈을 뜨며 ‘왜,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어온다.

“이번에 데뷔하는 애들 프로모션 영상 마무리 작업이랑 케이블 방송국 쪽 배포 맡기로 했거든.”

“잠깐, 잠깐. 신인 프로모션을 왜 형이 맡아? 그럼 나는?”

나직하게 설명하며 다시 녀석의 얼굴로 수건을 갖다 대는데, 현준이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내 손목을 붙잡아 내리고 되물었다. 제 것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애 같은 얼굴을 멀뚱히 바라보며 나는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간병하는 건 기욱이한테 말해 둘게. 당분간 쌍둥이들이랑 케이도 바쁜 일 없을 테니까 매일 불러서 놀든가 하고.”

“그게 아니라, 내 일 말이야. 형은 내 매니저잖아.”

“너 퇴원하기 전에 금방 끝나. …네 말대로 나도 엄연히 계약된 몸인데, 너 입원 핑계로 쉰다고 나도 덩달아 놀고먹을 순 없잖아.”

“내가 말한 계약은 나하고 형 사이 말한 건데.”

“…기본적으론 회사 통해 계약이 성립된 거니까, 내려온 일이 먼저야.”

“그런 의미 아닌 거 알면서 일부러 저렇게 쌀쌀맞게 구는 것 좀 봐. 얼굴 붉히면서 몰라, 몰라 같은 것 좀 해 주면 안 되나?”

“안 돼.”

입술을 삐죽이며 하는 투정에 냉큼 답하며 나는 녀석의 얼굴 위로 도로 수건을 덥석 덮어 버렸다.

“아, 축축해.”

“…….”

그리고 문득 수건 아래에서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의미심장한 말엔 일어서려다 말고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멀쩡한 손으로 스스로 눈 밑까지 수건을 내린 현준이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눈살을 가늘게 뜬 채 유도 심문처럼 말을 흘렸다.

“지금은 다시 마른 꽃잎처럼 바짝 말라 버렸네.”

“…….”

“아까는 축축해서, 그거 묘하게 좀 야해서 스물한 살 한창 청춘인 전현준이 불끈불끈한 거 참느라 혼났거든. 아까 그놈들도 그럴까 봐 얼른 보내 버리고 싶고―”

“그런 농담하는 거 아니야, 너.”

한참 어린 녀석 앞에서 투명 옷을 입고 희롱당하는 불쾌한 기분에 냉큼 자리에서 일어서 버리자, 현준은 온전히 제 얼굴에서 수건을 치워 내곤 곧장 내 손목을 다시 붙들어 잡았다.

“뭐, 불끈불끈한 거? 농담 아니고 진담인데. 나는 뭐 남자 아니고 그냥 애야? 그렇게 보여? 사고 났을 때도 순간적으로 오른손 사수하느라 고생했거든, 나.”

그리고 손목을 붙든 제 오른손을 휘휘 흔들어 보이며 농을 던졌다. 너 왜 남자였다, 애였다, 왔다 갔다 해.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나는 냉랭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럼 계속 오른손이랑 잘 놀아, 허튼소리 하지 말고.”

“안 그래도 내내 그러고 있어.”

“…….”

“개런티 요구할 거야?”

놔,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내쳐 버렸다. 스스로도 과했다 생각했는지 현준은 순순히 손을 놓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돌아선 내 등 뒤에서 ‘미안.’ 하고 웅얼거리며 사과를 해 온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곧이어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긋 고개를 돌아보자, 체한 것 같은 얼굴로 불편한 듯 웃으며 현준이 프리지어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거 줄게, 화해하자. 그렇게 돌아서지 마, 어?”

“…….”

“내 앞에선 내내 한결같던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변하는 거, 역시 심술 난단 말이야. 게다가 그게 그렇게 질 나쁜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어느새 애 같은 얼굴로 돌아와선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말없이 내민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내 손이 닿자마자 바짝 말라 부스러질 것 같았던 염려와는 달리 꽃은 여전히 싱싱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다음에 들를 때 사 올 테니까.”

다행이다, 생각하며 나는 꽃다발로 시선을 내린 채 여상히 물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 현준은 ‘음……’ 소리를 내고는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반짝 고개를 들었다.

“김밥. 형이 싸 주는 김밥 먹고 싶어.”

“내가 싸 주는 김밥이라니, 내가 언제 김밥 같은 걸 만들어 봤다고…….”

그러나 뜬금없다 싶은 천연한 요청에는 덜컥 당혹감이 끼쳐 왔다. 그에 녀석 역시 덩달아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기억 안 나? 예전에 우리 다 같이 살 때 말이야, 데뷔 직전에, 그때 돈 없어서 반찬도 제대로 못 사서 형이 대충 만들어 줬었잖아. 재료가 김이랑 단무지, 햄밖에 없었는데 그거 진짜 맛있었거든.”

“…그랬던가….”

내가 좀처럼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자 현준은 당시 상황을 비디오처럼 생생하게 읊어 주었지만, 나는 도무지 내가 김밥 같은 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알았다, 하고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현준은 어쩐지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응.’ 하고 얌전히 대답했다.

‡ ‡ ‡

조수석에 놓아 둔 프리지어 꽃다발을 한 손에 들고 차 키를 뽑으며 차에서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한쪽 구석에 주차되어 있던 세단의 차 문이 벌컥 열렸다.

무의식적으로 힐긋 고개를 돌려보니, 내려선 사람은 무진이었다. 꽤나 마음에 드는 차종이었는지, 세단은 이전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뭐야, 그건.”

곧장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무진은 내 한쪽 손에 들린 꽃다발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레 물었다. 길게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하고 성의 없이 답해 버렸더니,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선 채 ‘그냥?’ 되물으며 난데없이 꽃다발이 적수라도 되는 듯 와락 인상을 구기곤 입이 없는 식물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왜 왔는데.”

“…밥 먹으러 가자.”

그대로 놔두었다간 이유도 없이 당장 빼앗아 바닥에 패대기칠 것이 뻔해, 손에 쥔 것을 슬쩍 등 뒤로 감추며 용건을 묻자, 그제야 눈길을 들어 올린 무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한심스러운 답이어서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 문득 발치에 고여 있는 물기에 눈길이 갔다. 비도 오지 않는데 주차장에 웬 물기일까.

“…….”

축축해… 내내 한결같던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변하는 거……. 얼핏 현준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놀라서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진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하 주차장 높은 천장에 매달린 조명으로 한결 더 음영 짙어 보이는 그 곧은 응시에 순간 코끝까지 바닷물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허우적거리며 숨을 거둘 것이다. 안 돼, 고개를 저으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밥 먹고 오는 길이야. 지금 또 볼일 있어서 나가야 되고.”

그리고 얼른 다시 차 문을 열고 올라타자, 당황한 얼굴의 무진이 ‘야, 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내가 상관 않고 곧장 시동을 걸자, 그 또한 다급히 자신의 세단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언젠가 현준이 말한 것처럼 단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약이 올랐는지 기를 쓰고 내 뒤를 쫓아왔다. 그리고 또 그때처럼 내 차를 들이박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두 번째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깊은 시선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꽁무니를 뺐던 터라 목적지가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대형 할인매장 앞을 지나다, 이곳이 가장 안전하겠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환하고, 넓고, 사람들도 많으니까.

어두운 주차장에 차를 내다 버리다시피 하고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어느새 따라붙은 무진이 씩씩대며 곁에 와 섰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그를 무시했다.

환하고 넓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역시 마력을 잃은 권무진은 그런 나를 어쩌지 못하고 마냥 뒤를 따라붙기만 했다.

“이게 볼일이라는 거야?”

그러다 문득 지루했는지 내 팔뚝을 툭 건드리며 물어왔다. 그래, 나는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인지 무진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둘러 카트를 끌고 식료품 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김밥 재료를 하나씩 골라 넣는데, 내 뒤를 어슬렁거리며 따라오던 무진이 언뜻 카트 안을 힐긋거리며 ‘김밥이잖아?’ 하고 아는 척을 해 왔다. 그런데, 하고 쌀쌀맞게 대꾸하는데도 기분 상하지 않았는지 그는 내 곁으로 좀 더 다가와 서며 참견을 했다.

“예전엔 재료 이렇게 많이 안 넣어 만들었잖아.”

“…뭐라고?”

갑작스러운 과거형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선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기억의 오수 속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팔을 집어넣어 아직 살아 있는 고기를 빼내어 올리듯 무진은 태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예전엔 이런 거 안 넣었다고. 재료 고르라고 하면 쭈뼛대다가 김이랑 몇 가지만 손에 들고 왔었어, 촌스럽게.”

“내가… 내가 언제 너랑 이런 데 왔었다고…”

“무슨 소리야? 그럼 그때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면서 우린 뭐 먹고 살았는데.”

“…….”

모르는 소리였다. 그때 우리가 먹은 것이라곤 라면 따위의 인스턴트 혹은 시켜 먹는 음식이 전부였지 않은가. 언제 우리가 함께 마트에서 카트를 끌며 요리할 음식의 재료 같은 것을 고른 적이 있었던가. 도무지 모르는 소리였다.

그러나 무진은 내 나쁜 기억력을 질책하듯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불현듯 내 발치에 또 둥근 물기가 고이는 것 같았다. 내가 잊고 있는 것 중, 어떤 치명적인 것이 남아 있을까. 그래서 그가, 내 발바닥을 핥으며 용서를 빌어도 마땅찮을 그가 이렇게 내 앞에서 안하무인격으로 구는 것일까.

문득, 그때 너 왜 그랬어, 처절한 물음이 목구멍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니다, 이제 소용없다,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그를 내치기 위해 다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한가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맥주와 마른안주 따위를 챙겨 든 무진이 그런 내 곁으로 또 냉큼 따라붙었다. 그러곤 제 손에 든 것들을 내 카트 안으로 덜컹 던져 넣는 것이다.

“…무슨 짓이야?”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신경질적으로 따져 묻자, 그는 히죽 웃으며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내 카드 갖고 있잖아, 어차피 내 돈 나갈 거니까 같이 계산하라고.”

“거지야? 네 건 네가 계산해.”

“너, 이……!”

카트 속에서 그의 물건을 도로 빼내어 그의 가슴팍으로 털썩 떠안기고 나는 냉큼 카트를 밀며 가 버렸다. 나쁜 성질머리에 불쑥 목소리를 높이던 무진은 모아지는 주위 시선에 그나마 신경은 쓰였던지 씩씩대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세모눈을 하고선 나를 빤히 노려보다가, 갑자기 획 하니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무섭대?”

나는 그제야 여유롭게 장을 볼 수 있었다.

“비켜.”

그리고 오랜만에 매장에 들른 김에 텅 빈 냉장고 속을 넉넉히 채워 둘 만큼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온 길이었다. 내 집 현관문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무진은 등 뒤로 무언가를 감추곤 캔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시선을 무시한 채 우선 양손의 묵직한 봉지를 바닥에 놓아두고 호주머니를 뒤적여 열쇠를 꺼내며 냉랭하게 말했지만, 그는 비켜서지 않았다.

“차라리 고주망태가 돼서 찾아와, 그편이 갖다 버리는 게 더 쉬우니까.”

“너 뭐 믿고 계속 까불어?”

“최소한 널 믿진 않아.”

동네 불량배처럼 이죽거리며 묻는 말에 당차게 쏘아붙이자 그는 재미없다는 듯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그러곤 돌연, 내 얼굴 앞으로 등 뒤에 숨겼던 것을 불쑥 내밀었다. 아니, 내미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것으로 내 얼굴을 후려갈긴 것과 마찬가지였다.

순간 놀라 눈을 깜빡 감았다가, 그리 아프지 않은 것에 슬그머니 눈을 떠 보니, 얼굴을 때린 것은 신문지로 둘둘 감싼 장미 다발이었다.

“…미쳤어? 이건 또 무슨 짓이야?”

“김밥, 줘.”

물물교환하자는 식의 요청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빤히 노려보고만 있자, 무진은 내 뺨을 때리듯 장미 다발을 다시 들어 얼굴의 다른 쪽으로 와락 내밀며 이어 말했다.

“재료 샀잖아, 만들 거 아냐.”

“오늘 만들 거 아니고, 너 줄 건 더더욱 아니야.”

독한 장미 향에 잠시 정신이 어찔했으나, 그가 물러선 틈에 나는 냉큼 열쇠를 꽂아 문을 열며 대꾸했다. 그러나 문은 그가 걷어차는 발길에 쾅! 사납게 닫혀 버렸다.

씩씩대는 거친 숨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귓속까지 안개가 낀 것처럼 축축해질 것 같았다.

“화장실 쓸 거야.”

그리고 무진은 허락도 없이 내 어깨를 밀어젖히며 먼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굴 앞에서 이내 쾅! 닫히는 문을 빤히 노려보았지만, 별수 없었다.

바닥에 내려 둔 봉지를 집어 들고 다시 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 열린 욕실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은 닫아야 할 거 아냐, 투덜거리면서도 그대로 지나쳐 식탁 위로 짐을 올려 두는데,

“…아아… 여승재… 흣…!”

얼핏 나른한 숨소리와 함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욕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단순히 볼일을 보거나 분에 차 씩씩거리느라 숨이 가빠 내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순진할 리 없었다.

열에 들뜬 숨소리는 점점 더 짙고 크게 들려왔다. 냉장고에 찬거리를 넣다 말고 나는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켜고 볼륨을 크게 올렸다.

잠시 후 개운해진 얼굴로 밖으로 나온 무진이 제집인 양 곧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짓을 할까 곧장 따라 들어가자, 그는 보란 듯 봉지 속에 끼워 둔 노란색 프리지어 다발을 바닥으로 획 하니 패대기를 치고, 대신 자신의 장미 다발을 얌전히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남의 집에서 더럽게 무슨 짓이야?!”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사납게 밀쳐 내며 따져 묻자, 무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의 아랫도리를 힐긋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발기해서.”

“너 정신병 있는 거 맞아.”

“오늘은 이만 갈게. 피곤하기도 하고… 둘이 노는 모양새를 보니 기분 더러워졌어.”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 혼자 구시렁거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버렸다. 곧이어 현관문이 쾅, 사납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안이 벙벙해져 멀뚱히 서 있다가, 그제야 얼른 걸쇠를 잠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고리로 팔을 뻗는 순간, 또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씩씩대는 얼굴로 나타난 무진이 불쑥 손을 뻗어와 내 멱살을 덥석 틀어쥐고 끌어당겼다.

“읏……!”

코끝이 닿을 만큼 바짝 멱살을 붙들어 올린 그는 내 얼굴에 훅, 뜨건 숨을 내뿜고는 욕설과 함께 이를 갈며 말했다.

“씨발 내가, 분해서 말이야.”

“무슨… 으, 읍!”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에, 달랑 끌어올려져 발꿈치를 세운 채 이유를 묻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무진은 물어뜯을 것처럼 포악스러운 키스를 하고는, 아쉬움 없다는 듯 내 어깨를 와락 밀쳐 내며 다시 현관문을 쾅! 사납게 닫고 나가 버렸다.

“무, 무슨…….”

얼얼해진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나는 걸쇠를 마저 잠글 생각도 하지 못하고 현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현관문 밖에서 복도를 씩씩대며 걸어가는 그의 구둣발 소리가 오랫동안 울려 왔다.

문을 닫기 직전, 나를 노려보던 그의 원망 그득한 눈빛이 손바닥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뜬금없이 버들강아지 따위를 떠올렸다면 터무니없는 일이겠지만, 사실 그러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여승재….”

손바닥을 바지 옷깃에 슥슥 문질러 닦으며 나는 얼간이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타일 바닥 위에 오래 주저앉은 엉덩이가 차가웠고, 터진 맹장의 봉합 부위에서 버들강아지가 푸들푸들 고개를 흔들며 어딘가를 끝없이 간질였다.

그와 함께 김밥 같은 걸 만들어 먹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쿵, 쿵, 빠른 비트에 맞춰 영상 속의 아이들은 묘기처럼 팔다리를 움직였다. 머리맡에서 강하게 내려 쬐는 조명이 그들을 투명하게 만들고, 아이들은 곧 마술사의 비둘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좋아, 임팩트 있어.”

모니터 속 영상을 정지시키며 김 실장은 만족한 얼굴로 감상을 말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벌서듯 주룩 서 있던 네다섯 명의 아이들은 그제야 ‘아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활짝 웃어 보였다.

영상 속에서 빛에 감싸여 사라진 아이들이었다.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아 제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어린애들이었다. 가장 ‘연장자’가 열일곱이라고 했다.

“수고했다, 여승재. 시간 촉박하다더니 빨리 끝냈잖아? 결과물도 좋고.”

긴장과 기대로 어깨를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그런 내 어깨를 툭 두드리며 김 실장이 말을 걸었다. 조금 넋을 빼놓고 있다가 나는 얼른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뭘요,’ 대답을 이었다.

“저야 마무리 작업하는 데 들어가서 지켜보기만 했는데요.”

“스튜디오 인간들 쪼는 것도 기술이야, 그치들은 시간 개념이란 게 없어요.”

아닌 게 아니라, 영상과 음악은 모두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마무리 편집으로만 몇 주를 끌던 작업 중에 ‘더는 못 기다린다, 네가 가 봐라.’ 하는 지시에 따른 일이었는데, 일명 그 ‘쪼는 기술’이란 것에 별다른 것은 없고, 다만 정승처럼 밤낮없이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근데 정말 어떻게 쪼아 댄 거야? 조금만, 조금만 하면서 몇 주를 끌던 걸.”

“…그냥 계속 스튜디오 한쪽 구석에 서서 기다렸어요.”

“아니, 그래도 무슨 말을 해서 타협점을 찾았을 거 아냐.”

“그냥 서 있었어요. …밥 시켜 주는 거 안 먹고, 그냥 계속.”

“…아아.”

잇새로 담배를 문 채 라이터를 뒤적이던 김 실장은 내 대답에 어쩐지 김이 빠진 듯 도로 담배 개비를 손에 들곤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정말 다른 비법 같은 건 없는데, 하고 중얼거리자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이 뭐가 웃긴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매니저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대뜸 ‘열일곱의 연장자’라는 아이가 대표 격으로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톡톡 두드리며 인사를 해 왔다.

“아, 프로모션 영상물은 내가 조금 봐준 게 맞는데, 앞으로 너희들 봐줄 매니저는 내가 아니야.”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예의상 그러는 것인지 정말 섭섭해 그러는 것인지 아이들은 일제히 몸을 배배 꼬며 ‘아이이―.’ 하고 투정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곤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앵앵거리며 말을 잇는다.

“매니저님이 계속 저희 봐주시면 안 돼요?”

“응, 안 돼.”

“…예에….”

이미 내정된 다른 매니저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단호히 대답하자, 아이들은 또 일제히 푸시시 내려앉는 거품 같은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김 실장이 뒤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아이들을 향해 ‘됐어, 이제 나가 봐.’ 하고 손바닥을 휘휘 내저으며 회의실 밖으로 내몰았다.

“현준이도 이제 자리 잡았는데, 새로 애들 한번 키워 보고 싶지 않아?”

아이들이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본 후 다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며 김 실장은 건성으로 물어왔다. 라이터에서 솟는 작은 불꽃을 가만 쳐다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제 감당 못 할 것 같아요, 저렇게 어린 애들.”

“하긴, 이집트 벽화에도 요즘 애들 싸가지 없다고 써 있다더라.”

키득거리며 답하곤 김 실장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문득 내가 담배를 마지막으로 피운 것이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 개비 얻어 피울까 잠깐 생각했지만, 양치를 하러 가는 게 귀찮아 관두었다.

“그런 것보다는… 어린애들이 주체하지 못하고 발산하는 에너지 같은 거요. 열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이제는 너무 벅차게 느껴져요. 예전에 우리 애들 같이 할 때는 저도 덩달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시들어 가는 게 비교돼서 더 여실하게 느껴질 것 같아 꺼려지기도 하고요.”

“여승재 감히 내 앞에서 나이 들먹이냐?”

비 맞은 중처럼 꿍얼거리는 나를 향해 다리를 번쩍 들어 보이는 시늉을 하며 김 실장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주춤 물러서는 나를 보곤 또 혼자 키득거리며 ‘뭐어―,’ 하고 말을 잇는다.

“그래도 저번에 보니 여승재 아직 생생하더구만, 뭐.”

“예?”

“권 대표한테 개가 짖네 어쩌네 했을 때 말이야. 흐흐흐, 내 속이 다 시원했다.”

“…….”

“그런데 어째, 동창이라고 해서 좀 쉽게 가겠구나 했는데 오히려 더 험악해졌어, 분위기가. …예전부터 사이가 별로였어?”

“그냥, 좀.”

“하긴, 그 인간이랑 여승재가 친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호러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김 실장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들어 남은 오렌지 주스를 홀짝 다 마시곤 ‘입이 심심하네.’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 하며 얼른 가방을 뒤져 은박도시락에 싼 김밥을 내밀었다.

“김밥 있는데, 좀 드실래요?”

“응? 웬 김밥? 여승재가 만든 거야?”

“아니요, 제가 김밥을 어떻게 만들어요. 며칠 전에 현준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오는 길에 샀어요.”

“자식들이, 매니저가 아주 지들 봉이지. 음, 그래도 넌 그나마 김밥이지, 난 예전에 한 달에 한 번씩 누구 씨 생리대 심부름하는 게 일이었다. 결혼하고 자식 생기니까 그나마 한 가정의 가장 대접은 해 준다고 요즘은 안 그런다만.”

뚜껑을 열어 주자 김 실장은 곧바로 김밥 두어 개를 한꺼번에 집고는 입안으로 욱여넣으며 구시렁거렸다. 그에게 생리대 심부름시킨 누구 씨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피식 웃었더니, 양 볼 가득 김밥을 우물거리며 김 실장은 문득 게슴츠레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꿀꺽, 한꺼번에 삼킨 뒤 짐짓 근심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누구 씨 요즘 너무 불안해. 입단속, 글단속 철저하게 하는데도 여지없이 말들은 흘러 퍼지고… 광고도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시나리오 들어오는 것들은 하나같이 다들 무슨 예술 표방한 저질 외설이고, 제기랄, 누구 씨가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느냐 말이야. 흥.”

“…그래도 이제껏 다져 놓은 게 있는데, 잘되시겠죠….”

“그래야지.”

누구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 둥글려 말하자, 김 실장은 분한 얼굴로 다짐처럼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리고 도시락으로 손을 뻗어 또 김밥 두어 개를 한꺼번에 집고는, 혼자 먹는 게 미안했던지 하나를 내 입에 불쑥 집어넣어 주었다.

엉겁결에 받아먹곤 ‘고맙습니다.’ 어설픈 인사를 하자, 미간을 힐긋 모아 올리며 그는 왠지 ‘여승재에―.’ 하고 내 이름을 길게 끌어 불렀다.

“너 인마, 뭘 그렇게 온몸 바쳐서 하는 거야?”

“예? 무슨…….”

“스튜디오 놈들 쪼으랬지, 누가 너 생고생해 가며 필름 얻어 오래? 이전 대표 그래서 너 이뻐하긴 했다만, 그래서 너한테 남는 게 뭐야. 몸은 몸대로 상하고. 네 내장기관 중에 아직도 멀쩡한 게 남았냐? 내 기억에 이젠 어디 더 탈 날 데도 없을걸.”

“…….”

“왜 그렇게 득달같이 일에 달려드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네 성향이 원래 성실한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너무 무리는 하지 말란 얘기야. 그렇게 안 해도 시간은 잘 흘러가고… 뭐, 그렇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 죄송합니다.’ 하고 뜬금없는 사과를 해 버렸다.

말하고서도 너무 바보 같아서 피식 웃어 버리자,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던 김 실장 역시 픽 웃으며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 다시 도시락으로 손을 뻗으며 김밥 몇 개를 더 집어먹다가 ‘으음.’ 하고 감상조로 입을 열었다.

“맛있다, 이거. 근데 정말 네가 만든 거 아니야? 사서 먹는 김밥은 이런 맛이 안 나는데 말이야.”

“못 만들죠, 저는, 김밥 같은 거.”

“말이 뭐 그래? 뭐, 어쨌든 너는 김밥 같은 것도 잘 만들게 생겼는데 말이야.”

“…제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김밥 같은 거 잘 만들게 생겼다니까.”

“아.”

쓸데없는 대화를 좀 더 나누며, 나는 그가 ‘이제 배부르다.’ 할 때까지 그의 앞에 도시락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 ‡ ‡

“아아.”

“…승재 형….”

“…….”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창가에 기대서 있는 무진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가를 입안에서 우물거리며 그가 ‘아아.’ 게으른 소리를 내며 알은체를 했고, 뒤이어 침대 위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현준이 질린 얼굴로 구조요청을 하듯 나를 불렀다.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무진이 먹고 있는 것이 도시락 포장되어 있는 김밥임을 알 수 있었다. 힐긋 확인을 하고, 나는 이마에 닿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그를 지나쳐 곧장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몸은 좀 괜찮아?”

그리 괜찮아 보이지 않는 안색을 살피며 안부를 묻자, 현준은 창가에 선 무진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히죽 불편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뼈는 제대로 붙어 가고 있는데 정신은 피폐해지고 있어. 이틀째 찾아와선 저기서 저렇게 김밥 먹으면서 노려보고 있는데, 형, 나 체하겠네?”

“…경아랑 기욱이는.”

“같이 있었는데 내가 보냈어. 멀쩡한 사람들까지 속병 날까 봐.”

하하하, 분리된 음절로 딱딱하게 웃으며 현준은 제 얼굴을 슥슥 긁었다. 이미 누군가 준비해 두고 갔는지 침대 위에 올려진 물수건을 집어 들어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대충 닦아 주었다.

‘아아― 좋다―.’ 하며 현준은 그런 상황에서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감탄조로 속삭였다. 뒤에서 은박 도시락을 아그작 구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밥은, 먹었어?”

“체할 것 같다니까. 그냥 물렸어.”

“그래도 제대로 먹어야 할 거 아냐. …자, 이거.”

가방을 뒤져 반쯤 남은 김밥 도시락을 꺼내 들자, 현준이 당장 반색하며 ‘김밥!’ 하고 외쳤다. 이번엔 등 뒤에서 쓰레기통 안으로 무언가를 사납게 던져 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게 목을 빼내어 내 어깨 너머로 힐긋 시선을 던진 현준이 샐쭉 웃으며 ‘흥.’ 소리를 냈다. 그리고 도시락의 뚜껑을 열어 주자마자 곧장 손을 뻗어 김밥을 하나 집어 들며 기대에 부푼 얼굴로 물어온다.

“형이 직접 만든 거야?”

“난 김밥 같은 거 만들 줄 모르―”

“너무 좋다, 형. 무슨 요술봉 같아, 만들어 달란다고 뚝딱 만들어 주고. 사랑의 힘인가, 응?”

입안으로 가져가는 동그란 김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녀석은 내 대답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우걱우걱 먹어 대면서도 새처럼 재잘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그거 내가 만든 게 아니―”

“고마워, 잘 먹을게. 이런 거라면 비행기 추락사고 중에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

녀석이 무얼 의식하며 떠드는지 알 것 같아, 나도 더 이상은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마구잡이로 먹어 대다간 체할 게 분명해, 등이라도 조금 두드려 주고 싶었다.

대신 물을 따라 주려 고개를 돌리는데, 어느새 침대 머리와 이어지는 창가에 다가와 서 있는 무진이 시야에 들어왔다. 괜한 시비가 붙기 싫어 시선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역시 우걱우걱 씹던 것을 한꺼번에 삼키는 듯 꿀꺽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흘깃 곁눈이 가고 말았다.

맛없는 것을 억지로 삼키는 듯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턱을 삐죽 치켜든 채 목덜미를 비틀고 있었다. 덩달아 그의 뚜렷한 목울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형, 나 물.”

이상한 것을 몰래 훔쳐본 것 같은 기분에 잠시 얼이 빠져 주춤거리고 있는 나를 향해 현준이 정신 차리라는 듯 팔을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어, 응, 멍청하게 대답을 하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주었다.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무진이 엄지로 자신의 입술을 슥 닦아 냈다. 짧은 시선이 부딪치고, 또 황급히 거두어졌다.

그리고 현준이 다시 건네는 생수통을 받아 드는데, 문득 녀석의 입가에 밥풀 하나가 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자, 또 김밥 하나를 냉큼 입안에 집어넣던 현준이 ‘왜, 잘 먹으니까 좋아?’ 하고 너스레를 부려 왔다.

“…….”

무언가에 홀린 게 분명했다. 나는 현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 멈칫하는 녀석의 입가에서 밥풀을 떼어 내, 배고픈 걸인처럼 그것을 선뜻 내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아.”

작은 밥알 하나를 앞니로 슬쩍 물어 반으로 나누는 동안, 현준의 얼굴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포슬포슬 부스러졌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이내 평소처럼 씩 웃어 보인다. 부끄러웠다, 자괴감으로 밥알 대신 혀를 물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때 옆쪽에서 무람없이 꺽, 하고 서슴없이 트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등으로 가린 채 고개를 들어보자, 무진이 지옥 불구덩이 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죄다 뽑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 잠깐… 손 씻고 올게.”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생수통을 놓아두고 황급히 발길을 돌렸다. 병실 안에 딸린 화장실 안으로 달려가듯 들어가 곧바로 세면대의 수도를 틀어 얼굴을 씻었다. 두어 번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데, 문이 열렸다.

“재미 좋아?”

안쪽으로 들어온 무진이 등 뒤로 문을 닫으며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는 아직 입안에 든 것을 모두 삼키지 못한 듯 우물거리고 있었다. 턱밑으로 물기를 후두둑 흘리며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향해 내 몽땅한 송곳니를 내보였다.

“너야말로 구질구질하게 사람 괴롭히면서 재미 좋아? 이런 거 네 방식 아니… 아!”

그러나 말을 모두 잇지 못하고 그에게 어깨가 떠밀려 차가운 타일 벽에 납작하게 붙여져야 했다. 넓게 펼친 손바닥 가득 내 가슴을 떠민 채 무진은 입술이 맞닿을 만큼 바짝 고개를 숙이며 음산하게 되물었다.

“재미 좋으냐고 먼저 물었잖아.”

“…….”

대답할 수 없었다. 괴롭다고 마음을 털어놓으면, 그가 잔인하게 비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릴 것 같았다. 게임 오버, 넌 이제 끝났어. 그리고 한동안 배곯고 있던 내 사악한 운명이 아가리를 벌려 내 머리를 덥석 삼킬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을 알고 있었다. 의지박약, 학습 능력 제로.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 다짐처럼 입을 앙다물자, 무진은 씹고 있던 것을 마저 삼켜 없애듯 꿀꺽 소리를 내며 한쪽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내 가슴을 짚고 있던 손으로 곧장 가슴께를 덮은 단추 하나를 풀어냈다.

“……!”

내 얼굴을 뚫어져라 직시하며 그는 풀어 낸 셔츠 버튼 사이로 천연히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차가운 손끝이 내 유두를 문지르며 콩알처럼 딱딱하게 만들었다. 머릿속까지 소름이 돋았다. 나는 꿈쩍도 하지 못한 채 당황한 시선을 부유시켰다.

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는데도 그는 다른 쪽 손바닥으로 내 입가를 지그시 눌러 막았다. 그리고 아랫도리를 바짝 밀착시켜 오는 것에, 그제야 번뜩 정신이 들어 그를 밀쳐 낼 수 있었다.

“요즘 네가 하는 짓이 어떤 식으로 읽히는지 알고는 있어? 허튼짓 하지 마, 우리는 그냥… 물어뜯고, 물어뜯기는 관계야, 사고파는 관계야, 장미 따위가 아니라 카드나 오피스텔 건물 같은 걸 주면 되는 거야, 그리고 지금 네가 해칠 수 있는 건 내 몸밖에―”

“내가 그냥, 너 한 번 봐준다고 하면. 그러면.”

자신의 어깨를 떠미는 내 손목을 다시 낚아채 움켜쥔 채 무진이 내 말을 뭉텅 잘라 내며 급한 투로 물었다.

그는 이제 입안에 남은 것도 없는데 자꾸만 목울대를 꼴깍이고 있었다. 마주한 내가 다 조갈이 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스웠다. 해이해질 뻔했던 마음이 칼자루를 쥔 것처럼 서늘해졌다.

“누가… 누굴 봐줘?”

“…예전 일 포함해서, 그 후로 네가 어떻게 굴러먹었든, 내가 너 그냥 한 번 봐주―”

“비켜, 개자식아. 난 지금 충분히 재미 좋으니까.”

온 힘으로 그의 어깨를 떠밀어 버렸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무진은 털썩 맞은편 벽으로 등을 부딪친 채 나를 노려보았다.

노려보면 어쩔 거야, 빈정대며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양 볼에 김밥을 잔뜩 밀어 넣어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현준을 향해 다가가는데, 뒤이어 따라 나온 무진이 넓은 보폭으로 성큼 나를 앞지르곤 대뜸 녀석이 누운 침대 다리를 덜컹 걷어차며 조악하게 지껄여 댔다.

“어이, 너 혹시 쓰리섬이라는 거 알아? 어때, 여승재 끼워서 해 보는 거, 관심 없어? 가르쳐 줄 테니까.”

“너……!”

현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다급히 무진의 팔뚝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그러나 거칠게 팔을 내치는 것에 오히려 휘둘려 기우뚱 넘어질 뻔했다.

양 볼에 채워 넣고 있던 것을 꿀꺽 삼키며 현준이 놀란 얼굴로 상체를 번쩍 들어 그런 나를 한번 살피곤, 곧이어 무진을 향해 ‘저기요.’ 하고 불렀다. 그리고 벙긋 웃는 얼굴로 흥분을 꾹 눌러 참는 목소리를 낸다.

“나하고 한 판 뜰래요?”

“아아, 몰랐어? 그러려고 너 깁스 풀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가소롭다는 듯 무진은 양쪽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엔 침대맡으로 저벅 다가가 도시락으로 불쑥 손을 뻗어 마지막 남은 김밥 하나를 집어 냉큼 입안에 넣곤, 몇 번 우걱우걱 씹다가 돌연 내 멱살을 와락 붙들어 잡아 왔다.

“읏……!”

“씨발 새끼, 이거 네가 만든 거 맞아.”

무진은 곧 울음을 터뜨리려는 갓난애처럼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단정적으로 말했다. ‘씨발 내가, 분해서 말이야.’ 하고 또 과격하게 입을 맞춰 올 것 같았지만, 그는 틀어쥔 내 멱살을 그대로 와락 풀어 낼 뿐이었다. 그리고 넓은 보폭으로 발길을 돌려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쾅! 사납게 닫히는 문소리를 뒤로 거짓말 같은 정적이 남았다. 나는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현준이 생수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뚜껑을 돌려 닫으며 ‘일어나.’ 말했다.

나는 벌을 서는 학생처럼 그의 말을 듣자마자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저런 타입이랑은 정면 승부하면 안 된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가 자리 옆에 내려놓은 생수통을 슬쩍 굴리며 나는 딴청을 부리듯 먼저 입을 열었다. 현준의 대답이 수직으로 머리에 꽂혔다.

“형 아까 나 이용했어.”

“…….”

“이용해 먹었어, 여승재.”

“…개런티 안 받을게.”

내가 나쁘다는 것을 안다. 그가 베푸는 다정한 호의에 오만해져, 몸에 익지 않은 비겁한 방법으로 그를 상처 입혔다.

그러나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그가 행여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여길 것 같았다. 그가 상처 입은 것은 내가 그를 이용해서가 아니라, 이제껏 그에게 보여 주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받을 거야, 개런티. 내놔.”

“…….”

“말했잖아, 어떻게 부서지든 이대로는 분해서 못 물러나. 여승재가 나 이용해 먹었으니까, 나도 좀 더 거리낌 없어도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개런티, 내놔.”

내 옷깃을 꼭 붙잡은 채 현준은 떼쓰는 아이처럼 씩씩거리며 말했다.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나는 그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숙여 주었다.

그리고 처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숙연히 눈꺼풀을 닫으며 ‘때려.’ 말했지만, 그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내 뒷덜미로 손을 넣어 얼굴을 끌어당겼다.

급한 숨이 입술 사이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이 무모한 스물한 살의 사내애가 퍼붓는 열정이 아프고, 회오리처럼 나를 열아홉의 시간으로 끌고 들어가는 무진의 식지 않는 사나운 열성에 잠식당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서술하는 적확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현준에게 혀를 빨리면서 나는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몰래 무진이 풀어 놓았던 가슴께의 단추를 채워 잠갔다. 그대로 두었다간, 열린 셔츠 버튼 사이로 심장이 용암처럼 흘러나올 것 같았다. 화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 ‡ ‡

아이들이 와글와글 떠들며 복도를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고는 각자 손을 흔들거나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해 왔다. 그래, 대꾸를 해 주며 나는 커피를 다 마신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매니저님, 뭐 하세요?”

마침 내가 프로모션 영상을 담당해 줬던, 데뷔를 앞둔 아이들 중 하나가 말간 얼굴을 내밀며 물어왔다.

“김 실장님 기다려.”

짤막하게 대꾸하며 어서 지나가라 길을 터주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던 아이는 까딱이는 내 손짓에 아쉬운 얼굴로 ‘예에….’ 하곤 걸음을 옮겼다.

데뷔 후 너희 그룹을 응원해 줄 팬을 가장한 아르바이트생을 채용하는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어 들어왔다, 진실을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판기 커피를 하나 더 빼 마시는 동안에도 잠시 밖에서 저널리스트 L씨를 만나고 있다는 김 실장은 들어오지 않았다. 데뷔 그룹에 내정된 신참 매니저와 임의로 결정을 내려 둘까, 하고 돌아서던 길이었다.

“아.”

누군가 단단한 벽처럼 어깨에 쿵, 하고 와 부딪쳐 왔다. 조심성 없이 곧바로 등을 돌린 탓도 있어서 앞니로 물고 있던 종이컵을 얼른 쥐어 내리며 ‘미안하―’ 사과를 꺼내다가, 마주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곤 입을 합 다물어 버렸다.

“사람 쳐 놓고 왜 사과도 안 하지?”

“…….”

“여기에 커피도 튀었는데 말이야.”

깨끗한 셔츠 깃을 툭툭 털어 내 보이며 무진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종이컵의 한쪽 주둥이를 앞니로 덥석 문 채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채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의 손아귀에 우악스럽게 턱이 붙잡힌 채 벽으로 밀쳐져야 했다.

“왜 제대로 사과를 안 하느냐 말이야.”

“아… 아, 아파, 이거 놔…!”

두 손을 완강히 버둥대고서야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미 한 무리가 지나가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컵을 신발 굽으로 지근 밟아 버리는 것으로 대신 화를 푸는 나를 보며 무진은 ‘흥.’ 비웃으며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실내 금연이야, 애들 많이 오가는 장소―”

“이번 주말 저녁에 케이엠 창립 기념 파티가 있어. 드레스 코드 따위 없으니까 그냥 이런 정장 차림으로만 대기하고 있어.”

상관치 않는다는 듯 곧바로 라이터 불을 붙이곤 그는 내 뒷말을 자르며 거만한 투로 명령을 했다. 호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 넣으며 짜증스레 인상을 잔뜩 찌푸려 보이자, 그는 언젠가처럼 내 머리꼭지 위로 후―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마 대표 자리에 앉아 있는데 여기 얼굴마담이라는 너 하나 정도 데리고 참석해야 본새가 살 거 아냐. 대기해. 운전까지 너 시킬 거니까.”

한마디로, 케이엠 그룹으로 보자면 하찮기만 한 연예기획사 대표 자리의 위세를 어떻게든 치켜세워 보이기 위해 사내 사람을 운전기사까지 시켜가며 데리고 가겠다는 속셈이었다. 그게 왜 하필 내가 되어야 하는지는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주말에 현준이 퇴원하는 날이야.”

“아아, 그럼 대신 거기 가서 그 애송이랑 한 판 뜰까? 그 자식 소원대로 말이야.”

“유치하게 굴지 마.”

“그렇게 말하니 또 생각나는 게 있네. 한 녀석이 남아 있었지, 아마. 케이라고 했던가.”

손장난을 하듯 지포라이터 뚜껑을 반복해 여닫으며 무진은 빈정대는 투로 대꾸했다. 한심스러워 그를 빤히 노려보다가, 생각을 바꾸어 피식 웃으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하긴, 그렇게 비열하게 나와야 너답지. 좋아, 같이 가지. 술 취한 널 뒷좌석에 앉히고 내가 운전대를 어떻게 꺾는지 봤으면 좋겠는데.”

“취해서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누누이 말하지만, 그 전에 술독에 빠져 뒈져 버리란 말이야, 제발 좀.”

속삭이듯 빠르게 뱉어 내고 그의 어깨를 밀어젖히며 점차 더 바짝 붙어오는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서둘러 발길을 돌리는데, 이번엔 또 등 뒤에 바로 서 있었던 듯 아슬아슬하게 부딪칠 뻔한 사람과 당장 코앞에서 마주쳐야 했다.

“어이쿠, 깜짝이야.”

“…아, 정혜주 씨….”

클래식한 원피스를 입은 정혜주였다. 높은 굽을 신었는데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의문이었다. 그러나 것보다 그녀가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는지가 문제였다.

난감한 기분으로 내가 뱉어 냈던 말들 중 어떤 상황을 유추해 낼 만한 단어가 있었던가 빠르게 되짚어 보는데, 그녀는 그저 주먹으로 장난스럽게 내 가슴께를 톡 건드리며 먼저 말을 붙였다.

“자기, 나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승재 예쁘기만 한 줄 알았지, 이렇게 터프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단 말이야. 이것 참, 나 완전히 넋이 빠지겠네, 진짜.”

번뇌에 쌓인 듯 길죽한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정혜주가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옆에 서 있던 무진이 픽, 웃었다.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두리번거리고만 있자, 대신해 주겠다는 듯 정혜주가 문득 무진의 옆으로 붙어 섰다.

“이렇게 저렇게 좀 더 희롱하고 싶은데, 아쉽게도 내가 오늘은 선약이 되어 있거든.”

그리고 느슨하게 풀어진 그의 팔짱을 감아 끼며 아쉬운 얼굴로 덧붙여 말하는 것이다. 어리둥절해져 무진을 올려다보자, 그 역시 별다른 설명 없이 그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순진한 아이가 된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윽고 ‘어디 가?’ 하고 물었다. 귀엽다는 듯 정혜주는 그런 내 볼을 살짝 꼬집고는, 이어 무진을 향해 ‘갑시다.’ 하며 산뜻하게 말할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진이 에스코트하듯 그녀를 이끌었다.

나는 제자리에 선 채 멍하니 그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긴 복도를 걸어가다 언뜻 무진이 뒤를 힐긋 돌아보곤 정혜주의 허리로 손을 둘러 감았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곧바로 안으로 올라탄 뒤 다시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다음에 터프하게 대시해 줘.”

복도 끝에 선 나를 향해 정혜주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목소리를 높여 장난조로 인사를 대신해 말했다. 그 순간에야 척추 뼈가 뚝, 뚝,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안 돼……, 나는 스스로 읊조리는 말의 대상을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걸음마를 연습하는 아이처럼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런 나를 향해 정혜주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러나 무진은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둘러 올리며, 다른 한 손으론 닫힘 버튼을 누르는 듯했다. 복도 중간부터는 거의 달리다시피 했지만, 내가 닿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은 먼저 닫히고 말았다.

“…….”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 문에 두 손을 댄 채 나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를 붙잡고 싶었던 걸까. 스테인리스 재질의 차가운 그것에 손바닥이 온통 화상을 입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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