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seven
“네가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알려 줄까?”
촬영 현장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때 으레 그러하듯 나는 팔짱을 낀 채 현장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내 옆으로 와 선 무진이 말해 보라는 듯 한쪽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20세기 싸구려 영화에 나오는 사창가 포주처럼 보여. 순진한 처녀들 꾀어 좁고 음습한 곳에다 모아 놓고 밤낮없이 몸 굴리게 하고, 있는 빚 없는 빚 다 떠안기고, 그것 핑계로 영원히 잡아다 두고 행여 도망이라도 갈까 두 눈에 쌍심지 켜고 감시하는.”
“네가 느끼는 이곳이 그랬단 말이지. 작업 환경이 엉망이구만.”
딱하다는 듯 그가 미간을 좁게 찌푸리며 대꾸했다. 명확하게 해 둬야 할 것 같아 나는 무진의 가슴께를 향해 고갯짓을 해 보이며 강조해 말했다.
“너 말이야, 너. 너 하나가 이 신성한 촬영장을 그렇게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는 얘기야.”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양쪽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나를 따라 하듯 호주머니에서 빼낸 두 손을 교차시켜 팔짱을 끼며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야? 난 그저 연예기획사 대표 자격으로 촬영장 분위기가 어떤가 견학 삼아 와 본 것뿐이야. 겸사겸사 소속 연기자, 해당 직원이 일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말이야. 그래, 감시라면 감시겠고. 아,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이제 나도 여기저기 얼굴이나 좀 비출까 해서. 김 실장이 그렇게 권하던데, 자고로 이 바닥은 인맥 관리가 중요하다고.”
“여기 사람들 노는 거 좋아해. 너 잘하는 대로 하면 돼, 밤에 제작진들 불러 모아 여자들 끼고 술 퍼마시는 거. 괜히 촬영장에 찾아와서 분위기 흐리지 말란 말이야.”
“꼭 내가 여자 끼고 술 마시는 걸 본 것처럼 말하네.”
“…….”
모를 줄 아느냐, 몇 가지 증거를 들어 따져 볼 수도 있는 경황이었지만, 그건 마치 내가 십 년이 넘도록 그의 불륜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 간직하고 있는 의처증 환자처럼 보이기 십상인 터라,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촬영장에서 배우들의 감정 신이 펼쳐지고 있어서 모두가 침묵했다. 핀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크게 울릴 것 같은 분위기에서 옆의 무진은 내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자 벌써 지루해졌는지 팔짱을 풀어 다시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조용히 긴 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무진은 연락도 없이 불쑥 들이닥쳤다. 퇴원하자마자 딱 하루 쉬고 곧바로 그동안 대신 일을 봐준 김 실장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아 새벽부터 현준을 깨워 촬영장에 나온 터였다.
다들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맹장은? 맹장은?’ 하고 물어 와서 조금 쑥스러웠다. 괜찮습니다, 하고 얌전하게 대꾸하는데 어디서 픽, 하고 익숙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자, 감독과 이미 인사를 나눈 것인지 나란히 선 무진이 ‘너 여기 사람들한테는 그런 식으로 구느냐.’ 묻는 식으로 내 위아래를 기분 나쁘게 훑었다.
‘하아…….’
피곤하다는 투로 현준이 나보다 먼저 한숨을 내쉬며 반응을 했다. 그래도 예의는 차려 주자 싶었는지 짧게나마 고개를 까딱해 보이곤 곧장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행여 그가 그런 녀석을 뒤따라가 무슨 해코지를 하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곳곳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다니다가,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이제는 내 곁으로 다가와 괜한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감시고 견학이고 다 핑계고, 목적은 너야.”
“…….”
그리고 잠시 신이 바뀌는 차에 촬영이 중지되어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틈타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싸늘해진 표정과 목소리에 순간 복부의 수술 부위로 재차 메스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앞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그가 문득 ‘여승재.’ 하고 내 이름을 불러 왔다. 끝내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는 비참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봉합 부위가 아직 다 안 나았어.”
그러나 무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 하고 바람 든 비웃음을 뱉어 내곤 이내 사납게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내가 섹스에 환장한 짐승처럼 보여?”
“아니었어?”
진심으로 의문스러워 묻자, 꽤나 신경을 건드렸는지 그는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와 서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좋아, 말 나온 김에 그럼 다음 주쯤에 같이 병원 가 보자고. 내가 너 의사 앞에 들고 가서 직접 물어볼 거야, 이거 이 정도면 이제 맘껏 뒹굴며 갖고 놀아도 되는지 안 되는지. 그리고 어쨌든 오늘 목적은 말이야, 너, 그 오피스텔 부동산 내놨던데?”
그리고 당장 코끝이 맞닿을 만큼 바짝 고개를 숙인 채 위협적으로 속삭이며 확인조로 이어 묻는 것에,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퇴원한 다음 하루 쉬는 동안, 곧바로 부동산에 연락해 급매물로 내놓았다. 마음 같아선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내가 없애고 싶은 것은 그 뜨겁고도 추웠던 열아홉의 여름일 뿐, 멀쩡한 건물이 아니었다.
싸구려 취급하며 아주 헐값에 팔아 버릴 생각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몇 번이나 정말 이 값이 맞느냐고 물어 왔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확인 전화가 오는 것에 귀찮아 수신 거부로 돌려 놓았더니, 전 주인이었던 그에게 연락이 갔던 모양이었다.
내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자, 익숙한 반응으로 무진은 내 얼굴 앞에서 씩씩 숨을 몰아쉬며 ‘죽을라고?’ 건달처럼 위협을 했다. 나는 그를 향해 턱을 바짝 치켜들며 맞대응을 했다.
“줬잖아, 내 소유지잖아. 내 집 내가 어떻게 처분하든, 내 마음이잖아.”
“현금이 필요했어?”
“것도 주려고?”
“주지.”
“…….”
“없이 살면 다 너같이 그렇게 되나?”
“함부로 지껄이지 마.”
“이렇게 만든 건 너야.”
그리고 날 이렇게 만든 것도 너지. 나는 말하지 않았다. 눈가가 화끈 달아올라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무진은 우악스럽게 내 턱을 붙잡아 돌리며 서늘한 눈빛으로 이어 빈정거렸다.
“뭐 좋아, 마음대로 처분해. 그리고 좋은 음식 많이 먹고 몸 관리 잘하고 있어. 다음 주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봉합한 부위가 터지건 말건, 이전에 못한 거 이어서 해야겠으니까, 응? 내가 그거에 아주 환장한 새끼거든.”
그리고 내 어깨를 털썩 밀어내며 말을 끝마쳤다. 떠밀려 뒤로 주춤 물러서다 급히 자세를 바로잡는데, 언뜻 멀리서 굳은 얼굴의 현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머릿속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퍼뜩 앞으로 나가 서자, 무진이 그런 나를 힐긋 돌아보다 역시 그를 확인했는지 ‘흥.’ 하고는 다시 내 앞으로 한 걸음 더 나가 섰다. 그러나,
“밥 먹는 시간.”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곧장 내 앞으로 다가온 현준은 어느새 빙긋 웃는 얼굴을 한 채 가뿐한 목소리로 목적을 전해 왔다.
“…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멍청하게 반응하자 녀석은 한창 어린 꼬마에게 하듯이 ‘귀여워.’ 혼잣말을 하며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당혹스러워 나는 오히려 바짝 얼어붙었는데,
“야, 너―”
지켜보고 있던 무진이 역시나 턱을 삐죽 내민 채 현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는 듯 ‘아참.’ 하고 현준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대표님, 감독님이 좀 보자고 하시는데요.”
“수작 부리지 마.”
“진짠데.”
“…너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순진스럽게 반응하는 현준을 더 어쩌지 못하고, 무진은 대신 내 코앞으로 손끝을 가리키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곤 분주한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현준을 향해 눈살을 가늘게 떠 보이자, 녀석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짜라니까?’ 말했다.
“밥 차 아직 도착 안 했어. 어수선하다, 밴 안에 들어가 있자.”
그리고 내 어깨를 끌어 잡고 주차되어 있는 밴 안으로 자연스레 이끌었다. 긴장이 풀려 넋이 조금 빠져 있던 나는 힘없이 그의 손에 따라 차 안으로 들어갔다.
졸고 있었는지, 운전석에 앉아 있는 기욱이 느리게 눈꺼풀을 끔벅이며 대뜸 ‘출발할까요?’ 물었다. 피식 웃으며 현준이 대신 대답했다.
“아니, 형. 잠깐 쉬러 들어왔어. 밥 차 도착할 거야, 형 나가서 경아 누나랑 밥 먹어라.”
응, 대꾸하며 기욱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내일의 날씨를 전하고 있었다. 약한 비가 지나갈 것이라고. 내일도 야외 촬영 있는데 또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어야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 말 없는 나를 현준 역시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다는 말이,
“아니라고 말해 줘.”
였다. 그래서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아니야.”
“언제부터 여승재 씨가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픽 웃으며 녀석이 혼잣말처럼 빈정거렸다. 무어라 혼내 주려다, 말았다.
“김 실장님한테 얘기 들었어,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근데 사이 별로 안 좋다며. …헤어졌다 다시 만난 거야?”
“헤어지고 어쩌고 할 만한 관계도 아니었어.”
그쯤 하면 마냥 부정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뜻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근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한 계절 내내 사냥에 실패한 승냥이처럼 눈빛이 사나운 거야?”
“원래 저렇게 생겨 먹었어.”
“그럼 형은 또 왜 이렇게…….”
말을 하다 말고 현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내 눈빛은 또 어떠하기에 이러나 싶어 힐긋 고개를 들어 앞좌석의 룸미러로 내 얼굴을 살펴보았더니, 좀 우스웠다. 뭐 이런 얼굴이 다 있나 싶었다. 얼굴 보며 인사 나눴던 사람들이 다 뒤돌아서서 ‘뭐야, 저거.’ 했겠다 싶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지금도 아니야.”
“형은 아닌데, 저 사람 혼자 난리 피우는 거지, 그럼? 괜히 괴롭히고 희롱하고 막 그러는 거지?”
응, 대답하며 나는 손가락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댔다. 다행이다, 현준이 한숨처럼 말했다.
“그냥 봐도 질이 나빠 보여. 딱 여승재 씨가 질색하는 타입인데 그럼.”
그리고 스스로 타협점을 찾는 듯 주절주절 떠들다가 또 문득 ‘다행이다.’ 하고 씩 웃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럼 내가 애써 마음 접을 필요도 없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는 거지?”
“…기든 아니든 애초에 너하고는 상관없는 문제야.”
“아, 그건 잔인했다, 승재 형.”
냉정하게 잘라 말하자, 녀석은 언제나처럼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선 능청스럽게 맞받아쳤다. 그리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어서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왜인지 현준은 와락 몸을 숙이며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는 ‘아아…….’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지 ‘그―’ 하고 입을 열며 고개를 들다가, 문득 차창 밖으로 힐긋 곁눈을 주곤 ‘흥.’ 소리를 냈다. 그리고 동네 말썽꾸러기처럼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선 심드렁한 음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괴롭히고 희롱하고…, 완전 나쁜 사람이네…. 그럼 이쪽에서도 적당히 돌려줘야지.”
“무슨…….”
무얼 보고 이러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자, 과연 무진이 터덜터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괜한 시비를 겪고 싶지 않아 ‘우리도 이만 나가자.’ 하고 나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돌연, 현준이 내가 앉은 자리로 무릎을 딛고 커다랗게 그림자를 만들며 몸을 덮쳐 왔다.
“전현……!”
그리고 손쓸 새도 없이 내 목덜미를 꺾고 약한 살결을 앞니로 긁어내리듯 훑고는 재빨리 떨어졌다. 짙게 선팅된 차창 때문에 밖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훤히 다 본 것처럼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무진이 문득 자리에 우뚝 멈춰선 채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자, 출발.”
그리고 현준은 경쾌한 태도로 어느새 앞좌석으로 훌쩍 넘어가 버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안전벨트 매라, 형.”
경악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룸미러로 시선을 마주친 녀석은 여유롭게 씩 웃어 보이며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차창 밖으로 무진이 얼굴을 사납게 구긴 채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닿기 전에 차는 먼저 출발했고, 급출발로 몸이 덜컹 튀어 올라, 나는 허겁지겁 안전벨트를 끼워야 했다.
“뭐 하는 짓이야, 얼른 차 안 세워?! 장난이 지나쳐, 너!”
“장난하는 거 아닌데?”
“전현준!”
“형 아직 몸 안 좋으니까, 가까운 데서 죽이라도 사 먹이고 오겠다고 감독님한테 말해 두고 왔어. 걱정하지 마. 감독님도 흔쾌히 허락했고. 근처에 죽집 있는 거 확인해 뒀으니까 20분이면 돼.”
“하아……!”
직접 안전벨트를 매어 놓곤 엉덩이를 들썩이며 소란을 피우다가, 어쨌든 허락을 맡고 왔다는 말에는 탈진감으로 털썩 팔다리를 뻗어 버렸다. 룸미러로 그런 나를 확인한 현준이 ‘흐흠.’ 짓궂게 웃었다.
“넌 지금 웃음이 나와?”
“아니, 실은 별로 웃고 싶은 마음 없어.”
“…….”
“찔리지? 그러니까 그냥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면 참 고맙겠다. 내가 누구처럼 질 나쁘게 악한 마음 먹고 이러는 것도 아니고.”
“…이건 질 나쁜 짓 아님 뭐야.”
꽤나 질근 씹었는지 따가운 느낌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 목덜미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질책하자, 역시 룸미러로 그것을 확인한 현준이 그나마 미안한 생각은 들었던지 얼굴을 붉힌 채 대답을 주저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음… 그건 좀, 음흉한 마음.”
그 대답이 지나치게 솔직해서 나는 차라리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기분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또 ‘흐흐.’ 하고 순박하게 웃었다. 계속 그렇게 있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내 마음을 당연히 모를 현준은 제법 여유롭게 운전을 했다.
촬영장에서 벗어난 차는 국도로 접어들었다. 덜 붐비는 것을 고려해 야외 촬영지가 서울 외곽인 터에 불편한 것은 감수해야 했다.
어쨌든 이런 길에 죽집 같은 게 있었던가,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얼핏 멀리서 자동차 바퀴가 아스팔트 위에서 요란스레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미러를 힐긋 확인한 현준이 ‘역시…….’ 하고 중얼거리며 속도를 올렸다. 설마. 뒤를 돌아보니 헤드라이트가 날카롭게 빠진 은색 세단이 씩씩 성난 숨을 내뿜는 것처럼 분연히 달려오고 있었다.
“혀, 현준아… 속도 줄여, 아니, 차 세워… 얼른!”
누구인지 뻔했고, 그 뻔한 누군가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도망치자 하고 싶었지만, 내내 뒷좌석에만 앉는 버릇 든 현준의 운전 실력은 그리 훌륭하지 못했고, 그런 그에게 일차선 국도는 오히려 과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자칫 위험해질 소지가 있었다. 우선 차를 세워 그 성난 짐승을 달래거나, 정 안 되면 경찰이라도 부를 심산이었다.
그러나 현준은 벌써 이상한 흥분에 휩싸인 듯 내 말은 듣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속도를 더 높일 뿐이었다. 핸들을 붙잡은 그의 손등 위로 힘줄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전현준! 위험하잖아, 속도 좀……!”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뒤에선 벌써 은색 세단이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전방에서는 택시 한 대가 옆으로 물러설 것을 재촉하듯 빵빵 요란하게 클랙슨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현준이 급하게 핸들을 한쪽으로 꺾었고, 차가 뒤집힐 듯 기울어졌다.
“아……!”
택시는 아슬아슬하게 곁을 빗겨 갔다. 나는 멍청한 소리를 내지르며 눈을 감아 버렸다. 동시에 뒤쪽에서 또 한 번 끼이익―! 타이어 긁히는 굉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타고 있는 차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어졌다.
뒤집히는구나……! 생각하며 다시 눈을 질끈 감는데, 덜커덩! 험한 진동에 이어 차는 이내 네 바퀴로 달리기 시작했다. 승차감이 좋지 않은 것에 슬쩍 눈을 떠 확인해 보니, 갓길 포장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자, 추월하려다 마주 오는 택시 때문에 실패한 은색 세단이 국도 위에서 바퀴가 돌아간 채 비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하아! 하아, 하…….”
차를 대신해 내가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처럼 숨이 가빴다. 심장이 요란하게 날뛰고,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았다. 이상한 환희가 눈앞에서 번쩍였다. 룸미러로 그런 나를 확인한 현준이 ‘괜찮아?’ 하고 물어 왔다.
“안 괜찮아. 너 제정신이야? 골로 가고 싶어?”
잔뜩 화를 내며 혼을 내 줘야 하는데, 내 목소리에는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돌아온 아이처럼 들뜬 희열과 성취감이 담겨 있었다. 꼴좋다, 개자식.
“난 아직 해 보고 싶은 게 많은 열혈 스물한 살 청년이야. 그럴 생각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 내 수상한 마음을 알아챘다는 듯 현준이 피식 웃으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엄격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달리지 않아, 간판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허름한 죽집 앞에 차가 멈추었다. 정말 있었구나, 얼뜨기 같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현준은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곤 먼저 밖으로 내려섰다.
“기다려. 여기서 먹고 가면 오래 걸릴 테니까 포장해 올게.”
혼자 씩씩하게 걸음을 옮긴 녀석은 제 키보다 낮은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동안 혼자 차 안에 남아 들뜬 열을 가라앉히느라 쌕쌕 숨을 몰아쉬고만 있었다. 그리고 국도 위에 덩그러니 세워진 권무진의 은색 세단을 생각했다. 눈매가 날카로운 제 주인을 쏙 빼닮은 헤드라이트.
촬영장이든 서울의 회사로든, 다시 돌아갔을까. 가다가 타이어 바람이나 빠져 버리라지.
그런 심술궂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가볍게 차가 흔들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아보니, 현준이 벌써 까만색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옆자리에 올라타며 차 문을 닫은 것이었다.
“지금 단팥죽밖에 없다 해서 하나만 사 왔어. 괜찮지? 근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그냥.”
내 무릎 위로 뜨끈한 봉지를 조심스레 얹어 주며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 그런데 눈치 빠른 녀석이 또 무슨 낌새를 챘는지, 곧바로 나가려다 말고 도로 옆자리에 털썩 앉고는 ‘승재 형.’ 부르며 미간을 좁힌 채 시선을 맞추어 왔다.
“그런 타입하곤 정면 승부하면 안 돼. 살살 약 올려서 제풀에 제가 꺾이게 만들어야지. 아까도 봐, 별것 아니었잖아, 그냥 눈앞에서 돌아가 버렸을 뿐인데 괜히 혼자 열 받아선 기를 쓰고 쫓아오다니. 좀… 아니, 많이 욱하는 성격인가 봐, 앞뒤 안 가리고. 그치?”
나를 향한 잔소리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의 험담에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좀 우쭐해졌는지, 녀석이 또 건방지게 내 머리로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이번엔 당장 철썩 손을 쳐 내자, 녀석은 금세 시무룩한 얼굴로 ‘치, 내가 대신 싸워 이겨 줬는데.’ 하고 투덜거렸다.
불현듯 무릎 위에 올려 둔 비닐봉지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느껴졌다. 옆자리로 옮겨 놓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너한테 줄 게 없어.”
“나는 여승재 씨한테 다 주고 싶어.”
그는 평소처럼 ‘아, 나 상처 받았다.’ 하고 능청을 떨지 않았다. 대신,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렇게 고백하듯 속삭였다. 마주한 그의 눈빛이 정결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자괴감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순결하게 꿈꿔 본 적이 없었다.
“…토할 것 같아.”
어떤 식으로든 무안해진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무뚝뚝한 얼굴로 애들 같은 말을 사용해 대꾸하자 현준은 김빠졌다는 듯 ‘에이―’ 하고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옆자리에 놓아 둔 비닐봉지에 손을 대 뜨거운 것을 확인하곤 ‘뭐어,’ 하며 말을 이었다.
“프러포즈처럼 흘렀는데, 저번에 말했듯이 강요할 생각은 아니고. 그냥 내 각오… 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거야. 이렇게 해 둬야, 잘 안 되더라도 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내 방식이야. 형 곤란하게 안 해, 그냥 알고만 있으라고.”
“…….”
“…그러다 받아들일 맘 생기면 더 좋고.”
코를 훌쩍이며 덧붙이는 말에는 아무래도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문밖으로 나가 돌아가지 않고 곧장 운전석으로 넘어가려는 듯 구부정하게 일어나 돌아서던 현준이 그런 나를 돌아보며 ‘혀엉…….’ 하고 야속하다는 듯 길게 불렀다.
“알았어, 미안해.”
그리고 고맙고, 덧붙이려는데 문득 앞 유리창 너머로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빠르게 달려오는 은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혀, 현준……”
둥그렇게 뜬 눈으로 더듬어 이름을 부르자, 엉거주춤하게 섰던 현준이 ‘응?’ 하고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세단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어어어―!’ 외치며 현준이 당황한 듯 허공에서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그의 몸을 붙들 겨를도 없었다. 곧장 세단이 벼락처럼 쾅! 하고 와 부딪쳤다.
“아―!”
덜커덩! 흔들리는 차체의 충격에 현준의 몸이 꼬꾸라졌고, 눈앞이 하얘졌다.
‡ ‡ ‡
“팀워크 한번 죽여준다, 대―단해.”
김 실장이 박수를 치며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어떻게 연기자랑 매니저가 하루 건너서 하나 꼴로 병원 신세를 지냐? 둘이 짰어?”
“그러게요, 이러다가 저 퇴원하고 다음에는 기욱이 형이나 경아 누나가…….”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에 각각 깁스를 하고 누운 현준이 히히 웃으며 넉살 좋게 대꾸를 하다가, 김 실장의 등 뒤에서 온갖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치를 주는 나를 힐긋 쳐다보곤 슬그머니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넌 어떻게 상처 하나 없냐?”
허리 양옆으로 두 손을 척 얹어 올린 김 실장이 나를 획 하니 돌아보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무색히 눈길을 떨군 채 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안전벨트를 계속 하고 있어서….”
“아주 자알― 했다, 차 안에서 연기자 일으켜 세워 두곤 혼자 살겠다고 안전벨트를 꽁꽁 매고 있었어? 그래, 자알― 했어.”
“…….”
끔찍한 생각이긴 하지만, 행여 진짜 큰 사고여서 둘 중 하나만 살 수 있다 하면 저승사자 앞에 나서서 ‘저요.’ 해야 하는 것이 매니저 역할이었다. 김 실장이 아무리 독하게 쏘아붙여도 나는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죄인이었고, 어디 하나 부러진 데 없는 것을 다행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에이― 실장님은. 그래도 하나라도 멀쩡하니 다행이죠.”
구부정하게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나를 옹호하며 나선 것은 이번에도 현준이었다. 흥, 입을 실룩이며 김 실장은 고개를 틀었다. 씩 웃어 보이며 현준이 깁스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나를 가까이 불렀다.
“그런데 승재 형, 엑스레이 한번 찍어 봐야 되는 거 아닌가? 형 아까 덜컹 튀어 오르면서 목 꺾이는 거 봤는데, 겉으로는 말짱해 보여도 교통사고 후유증이라는 게 무시 못할 거라서―”
“엑스레이 찍어 봤단다, 근육이 놀란 것 외에는 이상 없대, 신기할 정도로 말짱하시단다.”
김 실장이 또 불쑥 끼어들며 빈정거렸다. 나는 힐긋 그의 눈치를 살피며 ‘괜찮아.’ 답하고 다시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며 ‘쯧쯧쯧.’ 혀를 차던 김 실장이 또 이번에는 현준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이어 물었다.
“근데 어쩌다 그렇게 부딪친 거야? 권 대표는 거기 왜 갔고.”
“뭐… 우린 죽 사러 갔고… 그 대표님도 죽이 먹고 싶었겠죠, 갑자기, 앞뒤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열렬하게.”
상하지 않은 쪽의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현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풀어 놓은 답안이 웃겼던지 ‘흐흐.’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 또한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흥.’ 꽁한 소리를 내며 김 실장은 마침 열리는 문 쪽으로 흘깃 곁눈을 던지곤 더더욱 떨떠름한 기색으로 급히 목청을 가다듬었다. 한쪽 눈썹 위로 반창고를 붙여 더 사나워진 인상의 무진이 어슬렁대며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나마 사고 난 차량이 권 대표 차여서 다행이지 말입니다. 합의니 뭐니 귀찮은 일은 없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랄까, 하하.”
자신의 옆에 와 서는 무진을 곁눈질하며 김 실장은 전혀 웃지 않는 얼굴로 억지 웃음소리를 내며 떠들었다. 침대 위에 길게 누워 있는 현준을 위아래로 훑던 무진이 그에 언뜻 김 실장을 바라보며 ‘응?’ 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야, 난 합의할 생각 없는데.”
“…….”
김 실장을 비롯해 나와 현준까지 떫은 얼굴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도 무진은 ‘뭐, 왜.’ 하고 오히려 신경질을 냈다.
허! 콧방귀를 뀌자 이번에는 시선들이 내게로 꽂혔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나는 최대한 의연히 말문을 열었다.
“그거 어느 나라 법이야, 가르쳐 줘. 먼저 들이박은 주제에 합의금 타낼 수 있는 나라 말이야. 그렇잖아도 내가 한 대 치고 싶은 인간이 있거든.”
조곤조곤 따져 묻는 말에 턱을 삐죽 내밀며 ‘이게―’ 하고 다가서는 무진을 김 실장이 서둘러 막아 세우며 ‘어쨌든―’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자, 어쨌든, 응? 우선은 말이야, 뒤처리를 해야 하니까… 그래, 현준이 깁스 언제 풀 수 있다고?”
“차라리 깨끗하게 잘 부러져서 삼 주 정도면 깁스는 풀 수 있대요. 그 후에 물리치료 같은 거야 통원으로 받으면 되고요.”
힐긋 내 눈치를 살피며 현준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시선을 마주한 채 씩 웃어 보이기까지.
여전히 무진의 앞을 온몸으로 바짝 막아 세운 채 김 실장은 필요 이상으로 근심 그득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주연이니까 현준이 신만 뒤로 미룰 수도 없는 일이고 촬영 전면 중단해야겠네…. 이 문제는 권 대표가 방송국 쪽이랑 조정을 해 줘야 되고요. 자, 그럼 이만 갑시다.”
그리고 일을 핑계로 무진을 끌고 나가려는 듯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어 당기며 힘차게 다리를 들어 움직였다. 그러나 무진은 못 박힌 듯 제자리에 단단히 버티고 서서, 혼자 나가라는 듯 문 쪽으로 흘깃 턱짓을 해 보일 뿐이었다.
“…아, 예, 뭐 그럼.”
떫은 얼굴로 김 실장은 단번에 포기해 버리고 우리에게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곧바로 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만 남은 병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심해의 그것처럼 묵직하게 흘러넘쳤다. 숨이 막혀 왔다.
그러나 그러한 긴장을 만들어 내는 장본인은 무진 하나뿐으로, 가장 실질적인 피해자인 현준은 여전히 빙그레 웃는 얼굴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너도 이만 나가지그래.”
“여기 안 보여? 다쳤어.”
결국 먼저 입을 열어 권하자, 무진은 와락 구긴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 보이곤 손끝으로 자신의 눈썹 위에 붙은 반창고를 가리키며 뻔뻔히 대꾸했다. 그 안하무인에 기가 차, 코가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 넌 겨우 그 정도지만 현준인 지금… 너야말로, 안 보여?”
“…….”
깁스한 채 누워 있는 현준을 손짓하며 따지자, 무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아보곤 ‘쩝’ 입맛을 다시며 침대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파?”
현준의 팔 깁스붕대 위로 노크를 하듯 손등으로 툭툭 건드려보며 의뭉스럽게 묻는 것이다.
“아…, 조금이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현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신음으로 대답했다.
“괴롭히지 마……!”
바락 외치며 다가서려 하자, 현준이 급히 손바닥을 내보이며 나를 막아 세웠다. 무진이 그런 나를 힐긋 돌아보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엔 녀석의 다리 쪽 깁스붕대를 툭툭 건드리며 ‘여긴?’ 하고 또 묻는다.
“아으으…, 거긴 좀 많이 아픈데요.”
현준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곧이곧대로 대답하자, 그제야 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나 손을 거두었다.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갑자기 죽이 너무 먹고 싶었거든, 앞뒤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열렬하게.”
그리고 현준이 내놓았던 핑계를 그대로 빈정대듯 따라하고는, 위로처럼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이내 좀 더 손을 올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 척을 하다가, 불현듯 머리카락을 와락 잡아채며 낮은 목소리로 을러댄다.
“이만한 걸 다행으로 알아. 앞으로 조심하고.”
“얼굴에 손대지 마, 연기자야!”
더 두고 볼 수 없어, 나는 퍼뜩 다가가 그를 밀어내며 외쳤다. 괜찮은데, 현준은 넉살 좋게 웃으며 잡혔던 머리를 손가락으로 슥슥 쓸어내렸고, 무진은 내게 떠밀린 자신의 팔뚝을 힐긋 내려다보곤 희번득 사나운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곧장 내 멱살을 움켜쥐고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벽을 향해 메다꽂듯 내 몸을 와락 밀어붙였다.
“승재 형!”
현준이 상체를 번쩍 일으켜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힘써 볼 새도 없이 도르르 떠밀리며 벽으로 처박힌 나는 액자처럼 숨도 쉬지 못하고 단단하게 굳어야 했다. 그런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듯 살피던 무진이 뜨건 숨을 훅 내뿜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물었다.
“너 왜 말짱해.”
“…….”
“너 왜 하나도 안 다쳤어.”
“미친 새끼.”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대표님.”
팽팽한 시선으로 맞서며 조소로 답하는 내 욕설 뒤로 이어 현준이 그를 불렀다.
“뭐……?”
내 멱살을 힘주어 틀어쥐고 있던 무진이 얼굴을 구기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바로 앉는 것이 힘들었던지 현준은 다시 침대 위로 비스듬히 누운 채 금세 여유를 찾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승재 형 좋아해서요.”
“…….”
“좋아하니까 아껴 주고 싶고, 이쁘다 이쁘다 해 주고 싶고,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고 싶고 그러는 건데. 대표님은요? 대표님은 승재 형,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시는 건데요. 감정 나쁘고 그래서 사이 나쁜 거면 차라리 안 보면 그만인데, 설마 다 큰 어른이 유치원생도 아니고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식은 더더욱 아닐 테고, 왜 그러시냐고요. 제가 승재 형을 좀 많이 좋아해서 저 사람 요즘 힘들어하는 거 눈에 다 보여서요, 그래서 이유라도 알고 싶은데요, 대표님 승재 형한테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시는 건데요.”
“…….”
차분하게 따져 묻는 말에 무진은 혼란스럽다는 듯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멱살을 쥔 그의 손아귀 힘이 스르륵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지간히 분하고 억울한 얼굴이었다.
왠지 고단해진 기분으로 나는 그만 시선을 거두며 그의 어깨를 밀쳐 냈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는 내 가슴께를 완강히 밀어붙이며 귓가로 입술을 맞붙인 채 비밀이야기를 하듯 은밀히 속삭여 왔다.
“나 저 새끼 소리 소문 없이 묻어 버릴 거야.”
“…최소한의 양심이란 걸 좀 가져 봐.”
“없어, 그딴 거.”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하는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때,
“나 다 들었는데.”
짐짓 천연스럽게 끼어들며 현준이 또 말을 붙였다. 권태로운 빛으로 무진이 고개를 좌우로 뚝뚝 꺾으며 녀석을 향해 돌아섰다. 힐긋 그의 눈치를 살피며 현준은 혼잣말처럼 주절주절 떠들었다.
“나 팬 되게 많은데, 나 갑자기 없어지면 우리 애들이 어떤 식으로든 찾아낼 텐데. 원래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웬만한 과학수사보다 빠르고 치밀해서 못 찾아내는 게 없는 걸로 유명하고.”
“…여승재, 저 새끼 너 뭐라고?”
녀석의 말을 가만 듣고 있던 무진이 내게 다시 고개를 돌리며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의아한 빛을 띤 얼굴로, 그리고 어떤 기대를 담뿍 담은 시선으로 현준 또한 나를 향한 눈길에 거들었다.
그러나 나는 자못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그 둘을 번갈아 보다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번 말해, 내가 데리고 있는 연기자… 읏!”
말을 끝맺지 못했다. 큰 보폭으로 다가온 무진이 내 뒤통수를 단단히 감싸 쥔 채 우악스레 턱을 움켜잡아 벌리게 한 입안으로 와락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가 아니었다. 내게는 희롱이었으며, 현준에게는 조롱이었다.
“으, 으읍, 응……!”
마구잡이로 입술을 핥고 혀를 찾아 빨다가 앞니로 답삭 물어 입술 밖으로 빼내었다. 잘려 끊길까,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순순히 혀를 내어 주어야 했다.
밖으로 빼낸 혀를 사탕처럼 물고 빨다가 무진은 마지막으로 방향을 바꾸어 아프게 쥐었던 내 턱을 슥 핥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너 빨리 나아.”
곧장 현준을 돌아보며 경고문처럼 완쾌를 주문했다.
“그리고 너도.”
이어 아쉬울 것 없다는 듯 병실 문을 나서며 그는 내게도 역시 같은 것을 주문했다. 짧게 스치는 그의 눈빛이 사탕 뺏긴 아이처럼 불안하고 불우해 보였다. 제멋대로 휘저었던 주제에.
“…….”
그리고 둘만 남은 병실 안에서는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나는 손등으로 무진의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술을 문질러 닦고, 또 닦아 내고만 있었다.
그런 내게 시선을 주지 못하고 공연히 병실 구석과 창밖을 둘러보던 현준이 씁쓸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그냥 못 본 걸로 해야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물.”
누가 또 내 집 현관문 앞에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불법 투기한 걸까, 생각하고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센서 반응에 켜진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만취해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무진이었다.
“무울―!”
“…….”
독한 술 냄새를 풀풀 내뿜으며 그는 애처럼 잔뜩 찡그린 얼굴로 물 달라 소리를 질러 댔다. 앞집 사람이 현관문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지, 희미하게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여기…, 다쳤잖아.”
냉담히 쏘아붙이며 가방 안에서 열쇠를 찾는데, 그가 문득 자신의 이마를 손끝으로 가리켜 보이며 웅얼거렸다. 눈썹 위의 반창고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무시로 일관하고, 나는 곧장 열쇠 구멍에 맞추어 철컥 열쇠를 끼워 넣었다. 그러자 그런 내 발목을 와락 움켜잡으며 무진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나사 하나가 풀렸어, 완전히 빠져 버렸단 말이야!”
“넌 원래 그랬어.”
“아니, 이건 네가… 여승재 네가……”
“…그게 그렇게 억울해?”
“나사 하나가 아예 없어졌어, 네가……”
“미친놈.”
발을 걷어차 그의 손을 내치고 나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서는데, 만취한 주제에 매번 그 순간만큼은 어떻게 멀쩡해지는지, 닫히는 문을 다짜고짜 힘으로 열어젖히고 무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엔 이내 힘을 잃고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와락 엎어져 버렸다. 덕분에 그의 밑에 깔려 바닥으로 머리를 찧으며 나는 고스란히 그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소리만 요란했지, 그때 네 아버지도 진심으로 힘쓰진 않으셨나 보네.”
신발을 벗지도 못한 채 캄캄한 현관 앞에 드러누워 있으니, 창밖에서 스며들어오는 가로등 붉은빛이 맥연히 언젠가 피범벅이었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내 몸을 가득 덮은 그의 온전하고 묵직한 몸의 형태를 느끼며 빈정거리듯 혼잣말을 하자, 내 위에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무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짙은 눈썹을 실룩거리다가 내 턱과 목덜미 부분을 서툴게 핥기 시작했다. 취기에 그것이 내 혀나 입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만, 해… 아직 봉합 부위가 아프다고 했잖아. 안… 돼, 아직.”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아직’을 말하자 무진은 심술궂은 얼굴로 ‘흥,’ 소리를 내곤 다시 내 목덜미로 털썩 이마를 박았다. 그리고 씩씩 콧김을 내뿜으며 술주정을 지껄였다.
“난 다 기억해. 네 몸 구석구석, 어딜 건드리면 어떻게 울었는지. …한 번만 하면 너 다신 나 못 벗어나. …머저리 새끼.”
“대단한 자신감이네. 열에 들떠 찢어 먹기나 했던 주제에. …병신.”
병신 소리에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가슴을 들썩이며 키득거리기나 했다. 맞닿은 가슴이 함께 들썩였다. 병신, 나는 소리 없이 또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상태로 태평하게 잠이 들었는지 그의 숨소리가 점점 짙어졌다. 슬쩍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돌려보자, 역시 눈꺼풀이 감겨 있었다.
진짜 나사 빠진 놈 아냐. 나는 끙끙거리며 그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야. 일어나 가. …꺼지란 말이야.”
여전히 엎어져 있는 그의 머리맡에 서서 발끝으로 어깨를 툭툭 밀어내며 말했지만, 무진은 죽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버릇처럼 팔짱을 낀 채 나는 발치의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슨 상관이야, 네가. …나한테 그 애가 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너는 그냥 내 몸이나… 괴롭히고 또 괴롭히면 되는 놈 아니냐고.”
그리고 바로 호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었다. 지방에 계신 현준의 부모님을 내 부탁으로 병원까지 모시고 온 기욱은 밤이 늦을 때까지 묵묵히 옆에서 대기해 있다가, 내가 일어서자 따라나서서 집까지 데려다주었었다. 통화 연결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기욱아, 아직 멀리 안 갔으면 다시 좀 와 줬으면 좋겠는데.”
금방 갈 수 있어요, 대답한 기욱은 정말 이 근처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얌전히 현관문을 노크했다. 집 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지 않아 잠든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곧바로 문을 열어 주자, 놀랐는지 기욱은 잠시 멍한 얼굴을 하곤 ‘아… 안녕하세요.’ 하며 새삼스런 인사를 또 해 왔다.
“응, 그래. 기욱아, 이것 좀 내다 버려 줘.”
무심히 대꾸해 주고, 나는 발치의 커다란 짐승을 툭 걷어차며 다시 부른 목적을 말했다. 기욱은 아예 넋이 빠진 얼굴로 ‘어… 이거…’ 하며 우물쭈물 안으로 들어와 섰다.
그리고 얼핏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반짝 정신을 차린 눈빛으로 엎어져 누운 무진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갑자기 현관문을 서둘러 닫고, 민첩한 동작으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몸을 돌려 목덜미에 손을 갖다 댔다.
“그냥 술 먹고 뻗은 거야.”
“…아….”
무슨 상상을 했는지 뻔했다. 진실을 말해 주어도, 기욱은 그의 숨이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을 제 손으로 직접 확인한 후에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장 그의 몸을 들쳐 업고 일어나 ‘어디요?’ 하고 물었다.
“그냥 현관문 밖 어디든.”
“…….”
“바깥에 쓰레기 수거함, 그 옆에 놔두면 될 것 같은데.”
모호한 대답에 당혹스러워하기에 좀 더 정확한 장소를 집어 주자, 기욱은 또 ‘어…’ 하고 말끝을 끌다가, 내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자, 할 수 없다 생각했는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나는 현관문을 직접 열어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오늘 고맙다.”
“예, 승재 형 쉬세요.”
커다란 덩치를 등에 업은 채 기욱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현관문을 닫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들고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마침 건물 밖으로 커다란 덩치 둘이 겹쳐져서 나오는 중이었다. 숨이 찬 듯 기욱이 훅훅 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기욱은 이윽고 전봇대 옆의 노란색 쓰레기통 앞으로 등 뒤의 짐승을 내려놓았다.
“…….”
유쾌한 기분에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아래까지 들리진 않았는지, 기욱은 긴박한 투로 주위를 살피곤 건물 앞에 세워 둔 차에 훌쩍 올라탔다.
어두운 밤의 정적을 흔들듯 잠시 부릉― 시동 소리가 들렸지만, 운전 실력이 좋은 기욱은 커다란 타이어의 마찰 소리도 없이 이내 골목을 빠져나갔다.
“꼴좋다.”
생수 뚜껑을 돌려 열며 나는 쓰레기통 앞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뻗어 있는 무진을 빤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목이 마르지 않아 도로 뚜껑을 돌려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새벽에 목이 말라 언뜻 잠에서 깨어났다. 화장실에 다녀오고, 물을 마시고, 그리고 잠시 베란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노란색 쓰레기통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