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five (6/41)

Chapter five

초인종이 요란스레 울렸다. 협탁으로 손을 뻗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이제 막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베개 아래로 머리를 처박고 무시하려 했지만 현관문 밖의 손님인지 웬수인지는 도무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결국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꾹 누르며 휘청휘청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승재 형 얼굴 부었다. …어라, 이건 또 무슨 냄새야, 형 술 마셨어?”

걸쇠를 풀지 않은 채 문을 열자, 좁은 문틈으로 현준이 말간 얼굴을 바짝 붙여 왔다. 그리고 내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키득대다가, 강아지처럼 콧등을 찡긋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고는 퉁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머리가 아파서… 한 잔 마시고 빨리 뻗어 버리려고 조금.”

“이 사람 또 미련하게 구네. 머리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거기다 술을 부으면 더 탈나지, 어?”

거울을 보지 않아도 형편없이 부은 게 느껴지는 묵직한 눈꺼풀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는 나를 보며 녀석은 애늙은이처럼 ‘쯧’ 혀를 차며 잔소리를 해 왔다.

같잖아 피식 웃었는데, 녀석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문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가로막힌 걸쇠를 찰랑찰랑 흔들며 회유를 해 왔다.

“얼마나 아픈 건데, 내가 좀 봐 줄게. 우선 이것부터 열어 보자.”

“네가 무슨 의사야, 약사야? 됐어, 그냥 한숨 푹 자면 낫는 거야. 너도 이만 들어가. 벌써 자정 넘었잖아.”

“의사 약사 아니니까 머리 아픈 것 정도는 봐 줄 수 있어. 형 편안하게 잠드시는 거 보고 간호 조금만 해 주고 들어갈게. 이제 자정 넘었는데?”

“…….”

어서 보내 버리려 대충 달래듯 말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얼른 문틈으로 발을 끼우며 현준은 능청스럽게 맞받아쳤다. ‘벌써’와 ‘이제’ 사이에 놓인 시간 속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현관 비밀번호 같은 건 아래윗집으로 사는 연기자와 매니저 사이에 불필요한 것이었다. 문제는 현준이 그 공적인 사이로서의 불필요함을 사적인 의도로 악용한다는 것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을 물리치느라 걸쇠까지 이중으로 잠가 두었는데, 내게는 ‘벌써’인 시간이 녀석에게는 ‘아직’이어서, 자정이 넘은 때에 초인종을 백번이나 누른 것이 전혀 무례하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한다면 내가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것이었다.

“…드라마 들어가면 새벽부터 움직이는 버릇 들여 놔야 돼. 어서 들어가 자.”

“아참, 나 용건 있어. 이건 형이 매니저로서 꼭 들어야 되는 문제거든.”

결국 쌀쌀맞은 명령조와 함께 발끝으로 문틈에 끼워진 그의 발치를 툭 걷어차며 문을 닫으려는데, 황급히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현준은 마지막 수단이라는 듯 공적인 업무 사항을 내밀어 왔다.

일이라면 밤낮 가릴 수 없는 위치여서 폭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문을 열어 주자, 머릿속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로 녀석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그 드라마로 선택하려고. 시간의 추? 그거. 제목이 좀 촌스럽긴 한데, 시놉이 좋더라고.”

“그래, 그럼 내일 캐스팅 디렉터한테 전화할게. 넌 담당 피디님한테 전화해서 인사드리고… 그래, 그럼 됐어.”

이제 정말 끝, 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깥에서 문고리를 잡고 단단히 버티고 있는지, 녀석의 꽉 다물린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하……, 또 왜.”

“…아프다며. 내가 옆에 있어 준다니까.”

“…….”

“내가 형 자는 동안 이마에 손 얹고 있으면 아픈 거 다 날아갈걸.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럽잖아. 같이 있을게.”

아직 한참 어린 동네 말썽쟁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떠들다가, 내 반응이 심상찮았는지 이내 훌쩍 다 자란 어른 같은 얼굴로 녀석이 작게 속삭여 덧붙였다.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럽잖아, 같이 있을게. 그것만으로도 두통이 물에 탄 알약처럼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설움인지 오기인지, 이상한 짜증이 왈칵 치밀었다.

“…네가 뭘 해 줄 수 있는데.”

쏘아붙이며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현준의 얼굴이 곧 울 것처럼 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

문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마 당장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선 채 나는 또 지끈거려 오는 머리통을 양손으로 꾹꾹 누르며 ‘아아…….’ 신음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현관문으로 쿵 머리를 박는 것에 문득 밖에서 스윽 발을 끄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결국 다시 문을 열어 보자, 역시 바로 앞에 시무룩한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아, 나 상처 받았다.”

눈이 마주치자, 현준은 마치 남 말 하듯 뚱한 목소리로 여과 없이 자신의 상태를 알렸다. 화풀이 대상이 잘못되었다.

“미안, 내가 지금 좀 예민해서…….”

“진짜 용건은 이거.”

그리고 씁쓸하게 사과를 하는데 마저 듣지 않고 녀석은 대뜸 발치의 뭔가를 툭 걷어차 보였다. 내려다보니, 20㎏ 쌀 한 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

“열어.”

쌀 한 포가 마치 다이아몬드 10캐럿 정도라도 되는 것처럼 기고만장해진 현준이 현관문을 톡톡 두드리며 이어 명령조로 말했다. 이것 봐라,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래도 미안한 게 있어, 나는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곧 걸쇠를 풀며 문을 열어 주고 말았다.

“그걸 직접 사 왔어? 그냥 주문하면 되는데 뭘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거야.”

“아, 나 또 상처 받았다.”

끙, 소리를 내며 한쪽 어깨에 쌀 포대를 얹고 주방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괜한 겸연쩍음에 타박 아닌 타박을 하자, 걸음을 옮기다 말고 우뚝 멈춰선 녀석은 또 시무룩한 얼굴로 내레이션처럼 알려 왔다.

“…식탁 위에 놔둬 줘.”

“식탁 위에 놔두면 형이 이걸 들 수 있고? 쌀통 어딨어, 쌀통.”

그러나 금세 기운을 차리곤 주방으로 들어가 한 손으로 구석에 있는 쌀통 뚜껑을 열고, 바깥으로 쌀알이 튕겨 나가지 않도록 꽤나 신중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쌀을 부었다. 그래도 쌀알 몇 개가 통통거리며 튀어나가 바닥에 흩어지는 게 보였다.

“어이쿠, 허리야……. 으윽, 나의 죽음을 쌍둥이들과 케이에게 알리지 말라…….”

포대를 모두 비운 녀석은 내 눈치를 힐긋 살피며 엄살을 떨다가, 기어이 우스꽝스러운 시늉으로 바닥에 철퍼덕 드러누웠다.

“…….”

그리고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나는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이내 훌쩍 그의 몸을 타 넘고 쌀통 주위에 흩어진 쌀알을 주워 담을 뿐이었다. 그러자 숨도 쉬지 않고 버티던 현준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허!’ 소리를 내며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형은 귀여웠다 안 귀여웠다, 제멋대로야.”

“…전현준, 너 정말 계속…….”

건방지게 구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한마디 하려는데,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대하는지 따져들려는 뒷말을 차마 스스로 입에 담기 무안해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리고 획 하니 거실로 걸음을 옮기는데,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현준이 냉큼 뒤따라 나오며 내 팔을 낚아채 잡았다.

“정말 계속 뭐,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여승재 씨한테 귀엽다 귀엽다 그러는 거? 말했잖아, 나는 형이 서른하나 아니라 마흔하나라 그래도 상관없다고.”

“나는 네가 스물하나 아니라 서른하나라 그래도 상관있어. 나이만 그래? 우리는―”

“아아, 그래. 우리는 연기자랑 매니저 사이고, 게다가 남자랑 남자 사이고… 또 뭐가 있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다는데, 이렇게 정신 못 차릴 만큼 좋다는데 매번 질색할 필요 있느냐 말이야. 당장 뭐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알아만 달라는 건데, 내가 내 맘 흐르는 대로 하겠다는데 그것도 막으면 나더러 숨도 쉬지 말란 얘기 아니야? 그냥 그렇구나 그것만 해 줘, 그거면 돼.”

오래 담고 있었는지, 현준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내 이마에 씩씩 뜨건 숨을 내뿜으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이마 위로 쌀알이 차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쌍둥이들이랑 케이는 어디서 머문다고… 얘기 들었어?”

사뭇 심각해진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설프게 화제를 돌리며 나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차가운 생수를 양손에 꺼내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가 그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불편한 마음을 알았는지 그 역시 스스로를 진정시키듯 훅 한숨을 내쉬곤 꿀꺽꿀꺽 물을 들이켜 생수 한 통을 즉각 비워 냈다. 그러나 아무래도 무리를 했는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콧잔등을 문지르며 ‘으으……’ 신음을 삼킨다.

입을 꾹 다문 채 콧바람을 내며 웃음을 터뜨리자, 그제야 녀석 역시 씩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생각했다. 생수통 뚜껑을 돌려 닫으며 현준이 내 물음에 늦은 대답을 했다.

“쌍둥이들은 친척 집에서 지낸다 그러고, 케이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 왜, 인디 쪽 친한 팀 숙소에서 지낼 거라던데. 케이는 이쪽에서 완전히 맘 떠난 것 같아.”

“맘 떠났다고 오냐 가라 그러고 그냥 보내 줘? 그 바닥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넌 그래도 한때 같이 지냈던 녀석들 걱정 안 돼?”

“나는 팀 해체되고 더 좋아, 형 혼자 독점할 수 있으니까.”

그의 손에서 빈 생수통을 가져와 들고 도로 주방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뒤에서 문득 녀석이 내 목덜미를 끌어당겨 안으며 장난스럽게 애교를 부려 왔다. 웩, 토하는 시늉을 해 주며 얼른 녀석의 팔을 뿌리쳐 달아났다.

“아참, 우리 회사 대표 바뀌었다더라. 형 오늘 것 때문에 회사 불려갔다며, 봤어?”

그리고 빈 통을 재활용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마시지 않은 새것을 다시 넣어 두려는데 현준이 먼저 냉장고 문을 열어 주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어왔다. 냉장고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냉기에 얼핏 치통이 느껴졌다.

“…….”

“응? 만나 봤어?”

“아, 응, 잠깐. 근데 넌 누구한테 들었어?”

“좀 전에 준기랑 해원이 놀다 갔거든, 소식통들이잖아. 되게 젊다더라, 무슨 대표가 날라리 건달처럼 생겼다던데?”

“…생긴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날라리 건달이야.”

“어? 뭐라고? 뭐라 그랬어?”

“아니야, 암것도.”

얼른 냉장고 문을 닫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는지 현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답하고 거실로 나가자, 여지없이 녀석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됐어, 고마워. 너 이제 가.”

거추장스러운 기분에 멈칫 뒤돌아서서 팔짱을 낀 채 꼬장꼬장하게 말을 건넸다. 그에 현준은 비식 웃는 얼굴을 하고선 놀랍다는 듯 과장하여 입을 쩍 벌려 보였다.

“우와― 허리 나갈 만큼 힘써서 수고했더니, 이제 됐다고 그냥 나가래. 이 형 되게 못됐다.”

“…….”

“…나 저녁 못 먹어서 지금 배고픈데, 밥 해 주면 안 돼? 아, 형 머리 아프다고 했으니까, 정말 딱 밥만 해 주면 그냥 물 말아 먹고 설거지까지 내가 다 해 둘게. 내 집에도 쌀이 없어서―”

“그럼 쌀 절반 덜어 가.”

“우와…… 진짜 못됐다. 내가 쌀쌀맞게 구는 사람한테 매력 느끼는 거 알고 그러는 거야, 모르고 그러는 거야?”

“나중에 네 색시 되는 여자는 진짜 피곤할 거야.”

“…….”

더 이상 끌었다간 끝도 없이 이어질 말장난이어서 확실히 선을 그으며 대꾸하자, 당장 얼굴을 굳힌 녀석이 입을 딱 다물었다.

이런, 선을 잘못 골랐나 보다.

“…남자들도 집안일 할 줄 알아야 돼. 내가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 해 줄 수는 없잖아, 뭐야, 내가 네 엄마도 아니고,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이 시간에 밥 해 달라는 게 잘못된 거잖아.”

무안한 마음에 주절주절 떠들며 주방으로 들어서려 걸음을 옮기자, 또 문득 내 팔뚝을 붙들어 잡아 세운 현준이 한쪽 눈을 찌푸려 웃으며 ‘얄밉다, 진짜.’ 말했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엄마는 그냥 쉬어.”

그리고 ‘승재 엄마, 승재 엄마.’ 놀리듯 연이어 부르며 저 혼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부르지 마.”

몇 번이나 오르내리는 열기에 얼굴이 끈적거리는 것 같아 조용히 타박을 하곤 나는 곧장 욕실로 발길을 옮겨 들어갔다. 그리고 세면대에 찬물을 받아 얼굴을 적셔 닦고 있는데, 어느새 또 뒤따라왔는지 현준이 문틀에 기댄 채 ‘형.’ 하고 불렀다.

“역시 귀찮다. 그냥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 먹을래.”

“…지금 얼른 밥 해 줘?”

사실상 매니저 역할이 기본적으로는 엄마 노릇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아닌가, 생각으로 얼굴에서 물기를 뚝뚝 흘리며 그리 묻자,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현준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대꾸했다.

“됐어, 엄마.”

“하지 말라고 했어.”

“엄마, 엄마, 엄마.”

“이게 진짜……!”

열 살이나 어린 주제에 사람을 손바닥 위에서 갖고 노는 게 아무래도 고약해, 왁 악을 써 보았지만 머리꼭지부터 발끝까지 곧 상품인 녀석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고작 한다는 게 그의 얼굴에다 손가락을 튕겨 물방울 몇 흩뿌리는 것이었는데, 그가 생각해도 ‘고작’이었는지, 현준은 킥킥거리며 우우― 야유와 함께 ‘엄마, 엄마’ 노래를 불러 댔다. 그러다 기어이 장난이 선을 넘은 것은,

“엄마 젖 주세…….”

“…….”

다른 대상이었다면 선뜻 웃고 넘길 수 있을 상황이었다.

내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 얼굴을 마주 본 현준이 급히 말끝을 흐리며 귓바퀴를 붉게 물들였다. 얼굴에 끼얹은 물기가 열기로 바짝 마른 것 같았다.

“아, 아니, 이번 건 실수. 진짜 이번엔 잘못 나온 거.”

“…….”

“진짜, 형 진짜, 어? 혀가 미쳐서는……. 미, 미안. 형 나 갈게, 정말 미안.”

손바닥으로 뺨을 슥 문지르며 턱을 늘어뜨린 채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자, 당황한 것이 역력한 얼굴로 현준은 말까지 더듬으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리고 ‘이게 아닌데……’ 중얼거리며 후다닥 꽁무니 빼듯 현관으로 달아나 버렸다.

“하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는데, 뜨끈했다.

“…다행이다….”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물리쳤다.

‡ ‡ ‡

첫 대본 리딩 연습을 앞두고 현준이 목감기에 걸려 버렸다. 리딩 연습 장면을 담을 촬영팀까지 모두 대기하고 있던 터에 무조건 참석은 해야 했지만, 감독의 허락하에 녀석은 말 그대로 대본을 ‘읽기’만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관리를 잘 못했습니다.”

“괜찮아,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잖아.”

안 그래도 아이돌 출신의 녀석이 첫 드라마에서부터 덜컥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에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 무조건 굽히며 들어가야 할 판에 처음부터 미운털 박힐 짓만 골라 한다는 수군거림이 노골적으로 귓전에 들려왔다.

당장이야 첫인상이 나빴다 하더라도 어디 가서 미움 살 성격의 녀석은 아닌지라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연습시간 내내 복도에서 서성이며 틈틈이 창문 안쪽의 상황을 살펴야 했다.

그리고 한번 쉬어 갈 것 같은 분위기를 눈치껏 알아맞혀 쏜살같이 방송국 아래 커피 전문점으로 달려가 연기자와 스태프들 수만큼 주문해 두 손 가득 들고 돌아와선, 직접 한 컵씩 가져다 바치며 잘 부탁드린다, 죄송하다, 한 명 한 명 눈 맞추며 인사를 해야 했다.

‘어머, 승재 씨 얄미워. 전현준 미운털 박힐까 또 얼굴 로비 하는 것 좀 봐. 에잇, 저 녀석 확 꼬집어 줄까 했더니.’

그리고 그때 마침, 가수와 연기자를 겸업하고 있어서 일단 가장 낯이 익은 여배우 혹은 여가수 J 씨가 그리 진땀을 빼고 있는 나를 향해 농을 거는 것에 일순 사방에서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덕분에 분위기가 살았다, 슬쩍 눈길을 건네며 눈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다 안다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또 한동안 얼굴 로비라는 게 대체 뭔가 하며 이런저런 의견인지 농인지 오가는 것을 보다가, 분위기를 전환시켜 준 고마운 J 씨에게 뒤늦은 대답으로 ‘그런 거 아니에요…….’ 하며 겸연쩍게 씩 웃어 보였더니, 그 정도로 된 것인지 다들 입 맞추어 수긍조로 ‘아아―’ 하고는, 왠지 또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왕 뽑힐 기미가 보이는 미운털, 아예 뿌리까지 뽑아 버리자 싶어 나는 현준의 옆구리를 꾹 찔렀고, 다른 물이긴 했지만 어쨌든 연예계 눈칫밥 경력이 몇 년인 녀석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분위기 좋은데 저 노래 한 곡 부를까요?’ 하고 자청해서 한 곡조를 뽑았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깊숙이 허리를 숙인 채 ‘몸 관리 잘못해 죄송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습니다, 선생님들 선배님들 예쁘게 봐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며 탁한 목소리로 고운 인사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까지.

그제야 다들 어린 녀석이 처세법을 안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는 분위기였다. 새벽에 갑자기 목이 잠긴 걸 발견하고 아침부터 급하게 링거를 맞고 온 녀석의 발긋한 얼굴을 조용히 살피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그럭저럭 정리되어 훈훈하게 마무리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가장 잘 보여야 할 감독에게는 따로 인사를 한 번 더 해야 했다.

지독한 설탕 마니아라는 정보를 입수해 미리 케이크 전문점에서 주문해 온, 보기만 해도 혀가 얼얼해 오는 컵케이크 세트를 바치며 모두 내 탓이다 허리를 굽혀 사죄하자, 겉으로는 인자하게 들리지만 조금만 파 보면 어쨌든 전현준이 어린 혈기에 밤늦게 놀면서 컨디션 관리 못한 것 아니냐는 뜻이 담긴 대꾸가 돌아왔다.

“현준이 생긴 것처럼 안 그래요, 감독님. 보통 제가 먼저 다그치기 전에 자기 관리 알아서 잘하고, 스케줄 아닌 이상 밤늦게 어디 돌아다니고 그러지도 않고요. 기본적으로 착실하니까 앞으로 잘할 거예요.”

“그럼 그래야지. 내 믿지, 그러니까 캐스팅에 힘 실어 줬지.”

“예, 고맙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감독은 손등으로 여상히 내 뺨을 슥 훑고는 ‘어쨌든 매니저가 고생이 많다.’ 하며 걸음을 옮겼다.

“…….”

마침 연습실 문 앞에서 덩그러니 서 있던 현준이 지켜보고 있었던지, 바로 앞을 지나는 감독에게도 그저 고개만 꾸벅해 보이곤 무뚝뚝한 얼굴로 곧장 내게 걸어왔다.

“뭐 하는 거야, 너. 감독님한테 제대로 인사 안 해?”

“왜 안 피해?”

목소리를 낮추어 혼을 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현준은 내 이마에 입을 맞출 듯 바짝 고개를 숙인 채 쏘아붙이며 물었다. 탁한 목소리가 마치 동굴 속에서의 그것처럼 깊게 울렸다.

그의 감기가 내게 전이된 것처럼 갑자기 목 안이 건조했다. 침을 꼴깍 삼키고서야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무슨 소리야.”

“…….”

“그냥 수고한다고 독려해 주시는 거였잖아.”

“그게 그냥… 그런 거라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실룩이며 녀석이 되물었다. 그가 무얼 염려하는지, 무얼 의심하고 추측하며 지난날 혼자 열병을 앓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회적으로 피해 가야 했다.

“그냥 그런 거 아님 다른 거 뭔데. 너 지금 내가… 내가 무슨 이상한, 모욕적인 꼴이라도 당했다는 거야, 뭐야.”

“…….”

“어서 가서 다시 인사드려.”

노련한 조련사처럼 채찍으로 혼내기도 하고 당근으로 달래어 보기도 하며, 또 진심으로 기분 상했다는 듯 인상을 찌푸려 보인 채 마지막으로 이제 다 자란 단단한 어깨를 툭 밀어내자, 현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꾹 다문 입술을 심통스럽게 내밀며 감독을 향해 달려갔다.

걱정이 되어 계속 쳐다보고 있자, 그런 나를 힐긋 돌아본 녀석이 감독의 앞으로 가 꾸벅 허리를 숙이며 또 죄송하다, 앞으로 잘하겠다, 잘 봐달라,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감독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몇 가지 독려의 말씀을 전하는 사이, 몇 번이나 더 나와 시선이 오간 녀석이 갑자기 씩 웃으며 ‘감독님.’ 하고 애교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감독님, 앞으로 잘하라고 기운 북돋아 주시는 겸해서 저 얼굴 한 번만 쓰다듬어 주세요. 그러면 힘 나서 감기도 뚝 떨어질 것 같아요.”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헤헤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절로 미간이 다 찌푸려졌다.

“뭐? 허허, 이 녀석 봐라. 오냐, 옛다. 앞으로는 몸 관리 잘해야 된다, 응?”

그러나 그런 과한 처세가 지독한 슈거 마니아의 마음에는 흡족했는지, 감독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부탁대로 녀석의 얼굴이며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어 주곤 이어서 다른 스태프들에게 우리 현준이가 어쩌고 하며 새삼스레 적절한 캐스팅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리고 문득 현준이 나를 향해 또 한 번 힐긋 시선을 주곤 묘하게 웃어 보였다.

“…….”

이만하면 되었느냐는 의미도 아니고, 나 잘했지― 하는 귀염성 섞인 의미의 것도 아니었다. 그건 일테면 경고와도 같았다. 바로 이게 진짜 ‘그냥 그런 거’라고. 그제야 귓등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쁜 자식.”

입술을 달싹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입 모양을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 현준이 그런 나를 보며 또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복도에 와글와글 모인 스태프들 사이에 끼어 오늘 점심을 회식으로 할 것인가 이대로 해산할 것인가 하는 시답잖은 토론의 장에 발언권을 기다리며 서 있는 모습을 보고야, 이제 됐다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아…….”

온몸이 종잇장처럼 흐늘거렸다. 새벽부터 현준의 상태 때문에 놀라고, 급히 병원에 데려가 수액을 맞히고 방송국 다시 데려와 앉히느라 바삐 움직이고, 바짝 긴장한 채 이리저리 눈치 살피고 허리 굽히고 일명 그 얼굴 로비라는 것도 좀 하느라 몸이 피로한 건 차치하고, 마음도 조금 다친 것 같았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했지만, 사실 내 경우는 얼떨결에 서른을 훌쩍 넘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이렇게 활기와 긴장으로 가득한 장소 한가운데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갈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거기다 이런 성격에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내 연기자를 소개해야 하는 일이라니, 나는 아직도 이게 내 일이 맞는 걸까 하는 사춘기적인 방황을 하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주는 환상으로 눈과 귀가 멀어 행여 허튼 바람이 들지 않도록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이쪽 계열과 더 잘 맞는다는 의견―대표적으로는 정혜주 씨의―도 있기는 했지만, 글쎄, 내내 타인의 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이 비현실감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다만 한 가지, 이렇게 내가 나이 먹는 것도 잊은 채 바쁘게 지내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내 생을 견디지 못하고 또한 서른을 참아 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긴장이 풀려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룩 미끄러져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그런 나를 다그치듯 호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웅웅 진동을 했다.

여전히 복도 한쪽에서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현준을 확인하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액정에 뜨는 수신인 이름을 대충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귀찮아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그 순간 아차 하는 기분과 함께 날카로운 직감이 머리꼭지를 슥 스쳐 갔다.

흉측한 것을 앞에 둔 것처럼 퍼뜩 멀리 전화기를 떼어 액정을 확인해 보니, 역시 얼핏 본 발신자명이 맞았다.

『개』

권무진이었다. 아주 피할 수만은 없는 관계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무어라 입력을 해 놓아야 하는데, 그를 대표하는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개’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여승재.」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눌러 두곤 아무런 대꾸가 없자, 결국 휴대폰 너머 그가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뺨을 후려쳐 나를 비현실적인 감각에서 현실의 세계로 불쑥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독한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몽롱했던 의식이 갑자기 등줄기가 섬뜩해질 만큼 또렷해졌다.

“…왜.”

「전화하면 튀어 오랬잖아. 사무실로 들어와.」

“갑자기 무슨……!”

아무래도 현준의 감기가 옮은 게 맞는 것 같았다. 잔뜩 쉰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그는 제 할 말만 지껄이곤 뚝 전화를 끊어 버린 뒤였다.

“이런 개―”

“형.”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려는 찰나, 공교롭게 바로 곁으로 뚜벅 다가온 현준이 놀란 얼굴로 나를 불렀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장난 전화.”

“그래. 아, 첫 리딩 연습 기념 회식하기로 했어. 같이 가자.”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별다른 낌새를 채진 못했는지 현준은 곧바로 제 용건을 말하곤 어서 가자 손을 흔들었다. 아니, 나는 쭈뼛대며 둘러댔다.

“그게… 나는 지금 회사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은데. 김 실장님이 잠깐 불러서.”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아, 그럼 기욱이 형한테 데려다달라고 해. 어차피 이 근처 식당으로 예약한다니까 나는 잠깐 다른 사람 차 얻어 타고 가면 되니까.”

연기자는 다른 사람 차 얻어 타는데 매니저가 개인적인 일로 기사 딸린 차를 굴려도 될까 싶어 머뭇거리자, 녀석은 달래듯 ‘응? 그렇게 해라.’ 단호히 이르곤, 어느새 친해졌는지 자신을 부르는 스태프 누구 씨에게 손을 흔들며 곧장 달려갔다.

그 모습이, 눈부셨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꽉 쥐어졌다.

‡ ‡ ‡

“밥 먹자.”

“…….”

졸업 후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은 평범한 동창처럼 무진은 그렇게 말했다. 며칠 전 12년 만에 대면한 우리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깡그리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고작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거야? 너 때문에 나는 처음 보는 선배들 스태프들 사이에서 낯가리는 내 연기자 혼자 두고 왔어.”

“고작 밥이나 먹자고 부른 건데, 지금 네 건방진 눈빛을 보니까 내 발이나 닦게 하고 싶어졌어.”

행여 잊었을까, 내가 그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지 알려 주기 위해 삐딱하게 반응해 주자 무진은 그제야 험상궂은 얼굴로 으르렁대듯 하얀 이를 내보이며 대꾸했다.

그럼 그렇지, 픽 비웃는 내 팔꿈치를 우악스럽게 붙들고 그는 곧장 사납게 문을 열어젖히고 복도로 나갔다. 그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걷는 나를 보며 지나는 아이들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안녕하세요…….’ 웅얼거리듯 인사를 해 왔다.

“인사 똑바로 하고 다녀.”

그런 아이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무진이 위협조로 말했다. 바짝 얼어 있는 아이들에게 괜찮다, 어서 가라, 말해 주고 나는 먼저 그의 팔을 붙들어 엘리베이터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애들한테 무섭게 굴지 마. 여기 군대 아니야.”

“어디서든 인사는 가장 기본적인 거야.”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붙든 그의 팔을 놓고 한마디 하자, 두 손을 호주머니에 불량스레 찔러 넣으며 무진은 나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질겅이는 발음으로 대꾸를 했다. 기가 찼다.

“…날라리 건달.”

“뭐?”

그런 그를 보며 아이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떠올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귀는 밝은지 그제야 고개를 틀곤 눈썹을 꿈틀거리며 날카롭게 반응했다. 나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아무 말도 안 했어.”

“후…….”

화를 참는 듯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못 참겠는지 내게 한 걸음 다가서는 순간, 마침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의 아이들과 직원들이 그를 마주하곤 바짝 겁먹은 기색으로 ‘안녕… 하세요….’ 어설픈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고, 나는 먼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뒤쪽에서 또 그가 인사 똑바로 어쩌고 하며 사납게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상관 않고 곧바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데, 입구 바로 앞에다 차를 세워 두고 기욱이 멀뚱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차 뒷문을 열어 주는 녀석을 향해 나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물었다.

“들어가 있지, 왜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그냥…….”

우물우물 대답하는 기욱의 시선이 언뜻 내 머리통 위로 높아졌다. 한쪽 어깨 뒤로 체온 높은 몸이 와 닿았다. 그리고 곧이어 귓바퀴 뒤에서 권태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또 뭐야.”

“로드 매니저야, 함부로 말하지 마.”

재깍 옹호하고 나서자, 무진이 내 어깨를 툭 건드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와 마주한 기욱이 눈에 띄게 긴장한 얼굴로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기욱아, 인사드려. 새 대표님.”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공적으로야 당연히 인사를 시켜야 할 입장이었다. 내 말에 기욱은 잠시 주저주저하다가 이윽고 예전 버릇 그대로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며 ‘안녕하십니까.’ 깍듯한 인사를 했다.

“마음에 드네.”

그 정도쯤 되어야 흡족한 듯, 무진은 피식 웃으며 한마디 하곤 선뜻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난 저기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 기욱이 너도 같이 밥 먹으러―”

“안 돼.”

그리고 고작 밥이나 먹으러 가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기욱에게 넌지시 제안을 하는데, 역시 귀 밝은 짐승이 서너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대뜸 획 하니 고개를 돌리며 뒷말을 가로막았다.

기욱이 불안한 눈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무진과 잠시 눈빛으로 신경전을 벌이다, 결국 어깨를 늘어뜨리며 기욱을 향해 달래듯 말을 이어야 했다.

“…금방 올 테니까 너도 멀리 가지 말고, 이 근처에서 밥 먹고 있어. 전화할 테니까.”

“스, 승재 형…….”

그리고 부득불 무진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기욱이 퍼뜩 그런 내 옷깃을 잡아당기는 것이다. 돌아보자, 초조한 기색으로 그는 무진과 나를 번갈아 보며 ‘저기, 저기……’ 하고 말을 더듬었다. 기욱은 본능적으로 권무진이 위험한 인간임을 느꼈을 것이었다.

“괜찮아, 금방 올게.”

씩 웃어 보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무진 역시 퉁퉁한 얼굴로 획 하니 고개를 돌리곤 향하던 발길을 계속 옮겼다.

차로 이동할 줄 알았는데 그는 주차장을 지나 인도 쪽으로 곧게 걸어갔다. 나는 두어 걸음 떨어진 채 그의 뒤를 따랐다.

평일 낮 시간의 거리는 한산했다.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 사이로 간간이 주변 가게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침입하는 것이 전부였다. 화난 듯 빠른 속도로 움직이던 그의 다리도 어느 순간부터는 산책이라도 하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긴 시간을 지나와서도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희석시키지 못한 채였다. 나는 그에게 최악으로 굴어 보라고 부추겼다. 그렇게 하지 말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낡은 기억을 재생시켜 드러나는 것은 내 상처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어야 했나,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남은 것은 없다고 시침을 떨었어야 했나.

자동 로봇처럼 무감각하게 두 다리를 움직이며 그런 생각 따위를 하고 있는데, 앞서가던 무진이 갑자기 우뚝 멈춰서더니 획 하니 돌아섰다.

“너 왜 그 자식한테는 그렇게 웃어 주……!”

“뭐?”

그러나 다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단단히 응축되었던 감정이 엉망으로 파열하는 기분이었다. 일순 어찔한 시야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는 불만 그득한 얼굴로 입술을 실룩이며 도로 고개를 돌려 빠른 속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밥이나 먹자고 했지만 이끌고 가는 곳이 사실은 복싱장이 아닐까 생각했던 터라 그 의외성에 놀랐고, 오늘의 첫 끼니를 기름진 음식으로―게다가 권무진과 함께하는 식사에서 당연히 소화력은 현저히 떨어질 터인데― 때워야 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눈살이 찌푸려졌다.

“풀코스로 시킬 테니까 하나라도 안 먹어 봐.”

그런 내 표정을 확인한 무진이 아직 가게 안으로 들어서지도 않은 주제에 사납게 구긴 얼굴로 먼저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미리 예약을 해 둔 것인지 자리에 안내되어 앉자마자 그의 말처럼 해산물 요리 코스가 테이블 위로 펼쳐졌다.

스프와 샐러드, 셔벗을 먹을 때까지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남기면 당장 테이블 위를 박차고 뛰어와 목을 조를 것처럼 자신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신경질적으로 나를 힐긋거렸다. 그러다 메인으로 나온 도미요리를 보곤 그제야 늦은 점심시간에 잔뜩 허기져 있는 자신의 공복 상태를 느꼈는지 허겁지겁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

나는 잠시 포크를 접시 위에 가만 놓아둔 채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허기진 권무진은 마치 이제 막 목덜미가 물려 숨이 할딱할딱 붙은 가젤의 내장을 파헤치는 표범처럼 보였다.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네발짐승. 문득 그가 아주 하찮게 느껴졌다.

“남기기만 해 봐.”

그런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바삐 턱을 움직이던 그가 힐긋 내 앞의 접시로 눈길을 던진 채 협박조로 말했다. 나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우선은 그의 신경을 피해 걸어야 했다.

내가 자신의 말에 얌전히 따르자, 만족한 얼굴의 무진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직원을 불러 곧바로 디저트를 달라 주문했다.

“…내가 데리고 있었던 애들이 있어. 원래 한 팀이었고… 내가 처음 맡은 애들이었어.”

포만감에 찬 얼굴로 여유롭게 블루베리 위에 얹어진 크림 슈를 스푼으로 휘적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애써 무던한 목소리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호기심이 일었는지 무진은 어울리지 않게 순진스러운 얼굴로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일 얘기인 것을 알아채곤 다시 미간을 찌푸린 채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팀 리더 녀석을 먼저 솔로 독립시켜 내보냈더니, 나머지 녀석들이 불안했는지―”

“아, 그 녀석들 얘기라면 이미 알고 있어.”

그의 손장난에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무너지는 디저트를 빤히 쳐다보며 차분히 말을 잇는데, 여지없이 그가 내 말을 자르며 따분하다는 듯 스푼으로 접시를 챙챙 두드렸다.

“회사 직원들은 한때의 정이 어쩌고 하면서 그놈들 감싸고도는 모양인데, 안 될 말이지.”

그러곤 삐딱하게 고개를 들어 보이며 손끝으로 자신의 목을 슥 긋는 시늉을 해 보이는 것이다. 애써 가라앉혔던 불티가 발바닥에 흐르는 전류처럼 탁탁 튀어 올랐다.

“아직 어린 애들이야, 비겁하게 나오지 마.”

“얘기가 달라진 것 같은데. 최악으로 굴어 보라고 했잖아, 네가.”

행여 옆 테이블에 우리의 대화 소리가 들릴까 낮게 속삭이듯 빠르게 말했는데, 그는 느긋하게 의자 뒤로 등을 기댄 채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밉살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

스물하나, 그 천방지축 아이들의 목에 밧줄이 매어지는 영상이 흐릿하게 눈앞을 덮었다. 충분히 그럴 인간이었다.

“우리 사이에 낀 사람들이 피해 입게는 하지 말란 말이야.”

“아, 정직하게 구는 방법 같은 건 몰라서.”

“…….”

“게다가 그 녀석들이라면 먼저 변칙을 쓴 걸로 아는데. 계약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잠적한 것 아냐. 굳이 내 방식대로 휘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계약서대로의 처벌감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

“아하.”

목이 말라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놓쳤다. 액정에 뜬 발신인을 곁눈으로만 확인하고 버릇처럼 곧장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을 때처럼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여지없이 내 빈틈을 낚아챈 그가 한쪽 입꼬리를 삐죽 비틀어 올리며 승리감에 찬 심술궂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튕겨 나간 것이 테이블 위를 직선으로 빠르게 굴러 왔다. 내 앞으로 총알처럼 다가오는 것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붙잡았다.

“…….”

손바닥을 들어 보자, 열쇠였다.

“다음부턴 부르면 그쪽으로 와.”

어떤 의미인지 알겠냐는 듯 눈썹을 힐긋 치켜올리며 무진이 히죽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떤 의미인지, 명확해졌다. 구역질이 나서 서둘러 둥근 컵으로 손을 뻗어 물을 벌컥 마셨다.

“와인 마실까?”

테이블 위로 느긋하게 팔꿈치를 괸 채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며 그는 단조롭게 물었다. 마침 깡총한 타이를 맨 웨이터가 다가와 커피와 홍차 중 어떤 것으로 하겠느냐고 물어 왔다.

“아예 술독에 빠져 뒈져 버려.”

옆에 선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맞은편의 무진을 매섭게 노려보며 그리 쏘아붙이자, 웨이터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무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흥, 입버릇이 고약해졌네.”

“사람을 가리게 됐지.”

“지금 네 앞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는 얌전히 다리를 벌려야 될 거야.”

“그리고 넌 입을 좀 닥쳐.”

“…재미있긴 한데, 작작하는 게 좋아.”

드디어 그가 본색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괜찮아, 얼어 버리자, 차갑게, 차갑게.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손을 들고 다시 웨이터를 불러 얼음물을 갖다 달라고 말했다.

무진은 뜨거운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나는 그가 설탕도 넣지 않고 마시는 검은색 액체가 맹독이기를 바랐다.

“안됐지만 이건 그냥 커피야.”

그런 내 생각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무진이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셔 보이며 말했다. 아아, 나는 아쉬운 소리를 내며 얼음을 씹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생각은 할 줄 알면서 왜 아무런 의심을 안 했지?”

“뭐?”

“예전… 그때 말이야,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 경고했었잖아, 내가 너 죽여 버릴 거라고.”

“…….”

그는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순간 온몸의 솜털까지 빠짝 설 만큼 지독한 오한이 느껴졌다. 그의 손에 쥔 잔을 빼앗아 뜨거운 커피를 벌컥 들이켜고 싶었다.

“미리 예약을 하고 왔어.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오는 걸 보고도 얌전히 받아먹다니……, 여승재 머리까지 나빠졌네.”

빈정대듯 말을 맺은 뒤 그는 태연히 ‘먼저 갈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몇 개의 테이블을 지나치는 동안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는지, 웨이터가 주문하지도 않은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한 모금 입에 담는데 갑자기 신물이 욱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상태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지 웨이터가 급히 화장실로 안내해 주었다.

“읏, 우욱……!”

화장실 가장 안쪽 문을 박차고 들어가 곧바로 변기통 속에 머리를 처박았지만, 입안에 계속 머금고 있던 미지근한 맹물만 뱉어 낼 수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씩씩대다가, 결국 손가락을 입안으로 쑤셔 넣으며 억지로 먹은 것을 토해 냈다.

“하아! 하……!”

그리고 위가 뒤틀린 느낌에 손바닥으로 복부를 문지르며 밖으로 나와 세면대로 향하는데, 바닥을 향한 시선 안으로 얼핏 리듬을 맞추듯 까딱이는 구둣발이 들어왔다. 불길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자, 역시 무진이었다.

“잘못 판단했어, 여승재.”

반질반질한 까만색 타일 벽을 등 뒤로 하고 세면대 끝에 슬쩍 기대어 선 채 그는 내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그러나 악마 같은 얼굴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내가 그렇게 쉬운 방법을 쓸 것 같아?”

그리고 획 하니 손을 뻗어 와 내 머리채를 낚아채곤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코끝이 맞닿았다. 내가 변기통에다 먹은 것을 토해 내는 동안 그는 제자리 뛰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가슴이 달뜬 숨으로 들썩였다. 커피 향 짙은 그의 숨결이 입술 위로 후끈하게 와 닿았다.

“난 너, 천천히 피 말려 죽일 거야.”

서로의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거리에서 그가 속삭여 말했다. 그리고 돌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왔다.

“방금 토했어.”

“나한테 내숭 떨 거 있어?”

고개를 비틀며 거부하자, 놀랍다는 듯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조롱조로 물었다. 오기가 치밀었다.

“…없지.”

대답하며 나는 먼저 입술을 벌리고 그와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입안에서 혀를 찾아 감고 내 입안에 남은 역겨운 감을 모두 밀어냈다.

내 머리채를 아프게 움켜쥐고 있던 그의 손이 내 뒷덜미를 은근히 문지르다가, 이윽고 머리카락을 헤집듯 하며 손바닥 전체로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이 단단한 머리통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제 되었다는 듯 물러서려는 그를, 이번에는 내가 그의 멱살을 꼭 움켜쥔 채 달려들었다. 맞닿은 그의 입술이 슬며시 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냉큼 물어뜯고, 다시 혀를 감아 핥았다. 혓바닥과 혓바닥이 경쟁을 하듯 맞붙었다.

그러나 편안히 타일 벽에 등을 기대고 선 무진이 돌연 내 허리께로 슬며시 두 손을 감는 것을, 나는 매섭게 쳐 내었다. 그리고 그의 혀끝을 물며 뒤로 물러났다.

“…흥.”

아쉬운 듯 입술을 핥으며 비웃던 그가 뒤늦게 입안에 감도는 역겨운 맛을 느꼈는지 문득 인상을 찌푸리곤 곧장 세면대로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손바닥에 받은 물로 입안을 헹구고, 턱 끝으로 물기를 뚝뚝 흘리며 거울 속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웃었다. 그 새카만 눈동자에서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애써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경멸을 담은 시선을 흘리자, 여전히 거울 속에서 그런 내게 눈길을 떼지 않으며 무진이 나른하게 말을 붙였다.

“어쩌지? 나, 이전보다 지금 네가 더 마음에 드는데.”

“…저런.”

비난 혹은 조롱 같은 고백에 순간 발끝이 저릿했다. 괜찮아, 가만, 가만. 주문을 외웠다. 그가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세찬 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 ‡ ‡

탁, 탁, 탁, 쿠션감 좋은 러닝화가 딱딱한 바닥을 빠르게 두드렸다. 정신 사나워,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 내 발목에 매달린 발이 불안을 견디기 위해 멋대로 떨리는 것이었다.

“오늘은 장미에 가시가 잔뜩 돋았네.”

손톱을 물어뜯으며 그렇게 다리를 달달 떨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옆에 와 앉으며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곧장 발짓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니, 정혜주였다.

“아…, 안녕하세요.”

“응, 자기도 안녕. 운동하러 왔어?”

얼빠진 얼굴로 꼭 그만큼 어설프게 인사를 하자, 그녀는 마치 어린애에게 하듯 검지 손끝으로 내 코끝을 톡 건드리며 물었다.

그 가벼운 손짓 하나에 마술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타인의 기분을 파악하고 또 변화시키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타고난 광대였다.

“현준이 운동 시키러…, 저는 그냥 흉내만 내러 왔죠.”

“하긴, 자기는 괜히 운동해선 우락부락하게 몸 만들지 마라. 요즘 개나 소나 근육 만든다고 난리들인데, 나는 그런 흉측한 몸은 딱 질색이야. 자고로 사람 몸이란 자기처럼 이렇게 미끈하게 빠져야 되는 거거든.”

“예에…….”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에 우울한 기분으로 말끝을 흐리며 대꾸하자, 그것 또한 금세 알아차리곤 ‘내가 언제 자기 놀리디?’ 하고 새치름하게 반박했다.

그제야 피식 웃어 보이자, 그녀 역시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이온 음료를 마시며 자연경관을 감상하듯 ‘좋다…….’ 하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워낙 연예인들이 많이 찾는 헬스클럽이어서 딱히 누구도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래서 그 모습이 조금 독특해 보였다. 일반인들을 구경하는 배우라니, 그녀 역시 그런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터였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한참을 말없이 가만 앉아 있었다.

“아, 정혜주 씨도 운동하러 오셨어요?”

그러다 곁에 앉은 채 내내 침묵만 하는 게 어쩐지 무안스러워 뒤늦게 아차 하고 안부처럼 묻자, 그녀는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귀엽기는 정말. 응, 요즘은 부지런히 다니거든. 이제 나잇살을 무시할 순 없더라고.”

딱히 답할 거리가 없어 그저 또 ‘예에…….’ 하고 대꾸하고 말았는데, 다른 더 무엇을 원한다는 듯 그녀가 나를 지그시 응시하며 좀 더 바짝 다가와 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쭈뼛대며 고개를 주춤 뒤로 물리자, 힌트를 주듯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힐긋거리며 눈썹을 치켜떠 보였다.

“…아, 그게… 여전히 근사하세요.”

“아하하!”

그제야 눈치를 채곤 힘겹게 대답하자, 잘했다는 듯 그녀는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요란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몇 느껴졌는데,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치? 내가 아직은 좀 쓸 만한 몸이거든? 응? 여승재 씨?”

그리고 어깨를 편 채 가슴을 쭉 내밀어 보이곤 팔꿈치로 나를 툭 건드리며 재촉하듯 연이어 물어왔다. 그 노골적인 의미를 이번에는 정확히 알아챌 수 있었다.

“쓸 만하다 뿐인가요, 훌륭하시죠.”

“아, 이럴 때 보면 곰인지 여우인지 알 수가 없어.”

능청스럽게 칭찬하는 말로 원점을 피해 가자, 얄밉다는 듯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물고 웃어 버렸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이어 말했다.

“아아, 미워하려고 했는데 또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포기해야겠다. 좋아, 소원을 들어줄게.”

“예?”

“아니, 그건 너무 허무맹랑한 노랫말 같네. 그래, 그럼 나는 고민을 들어 주지. 자, 말해 봐.”

“무슨…….”

뜬금없는 상담사 같은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 몸을 투명하게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여승재 일이 년 눈독 들이고 있나? 그냥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여 있는 거랑 개인적인 고민 있는 거랑 구분도 못 할까?”

“…….”

“뭐랄까, 여배우의 귀신같은 직감에 따르자면…… 승재 씨 혹시 연애, 뭐 그런 거 하니?”

“그런―,”

거짓말하는 아이를 닦달하는 듯하다가, 내가 아예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다시 자상한 누이처럼 은근하게 물어 왔다. 하지만 연애라니, 딸꾹질이 날 뻔했다. 목소리가 꺾여 나왔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평소의 그런 거 아니에요―에서 절대가 붙어서 좀 불안하긴 한데 믿어 줄게. 믿어야지 뭐. 믿는다?”

침을 꼴깍 삼키고 목청을 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또 ‘어휴, 다행이다.’ 하고 들으란 듯 혼잣말을 했다.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흔히 여배우들 팔자에 귀기가 보인다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배우 정혜주한테는 그런 팔자가 없나 보다 싶었다. 연애라니.

고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래 굳이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섹스 로비를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이런 고민은 진짜 무당 앞에서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

그리고 발꿈치로 바닥을 툭, 툭, 치며 또 한 번 대한민국 최고 몸값 여배우의 잘못 틀어진 귀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불현듯 끼어드는 지각으로 쭈뼛 허리가 펴졌다.

대한민국 최고 몸값 여배우.

“…저기, 정혜주 씨….”

홀린 듯한 목소리로 부르자 좌우로 고개를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그녀가 퍼뜩 반짝거리는 얼굴로 응? 반기며 내게 시선을 주었다.

“소원…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자기 소원이라는데 내가 뭔들 못 들어줄까. 뭔데, 말해 봐. 별 따 줘? 달 따 줘?”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선 태양이라도 따 줄 수 있을 듯한 신뢰가 들었다. 조마조마하게 목 안을 조이며 숨을 고른 뒤 나는 절실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저하고 같이… 애들 몇 데리고, 회사 옮기실래요?”

“…아, 이건 예상치 못했네. …아까워라, 소원 들어주는 조건으로 결혼하자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나 아무래도 별이나 달을 따는 것보다 어려웠는지, 짐짓 큰소리를 내던 그녀는 내 진짜 소원 앞에서는 맥주 거품처럼 부스스 식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냥 한번 해 본 말이에요.”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 잠깐 스친 엉뚱한, 꿈같은 생각이었다. 현실성은 없었다. 정혜주의 몸값을 이렇게까지 높인 것이 바로 몸담고 있는 기획사였다. 그녀 개인적으로도 그곳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을 터였다.

“아참, 김 실장 얘기론 새로 온 대표랑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혹시 그거랑 연관 있는 거?”

뜬금없는 소원 타령에 괜스레 무안해져 슬쩍 웃고 말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는지 내 얼굴 아래로 바짝 고개를 드민 채 그녀가 심각하게 물어 왔다. 대한민국 최고 몸값 여배우의 귀기는 역시나 무시 못 하는구나, 다시 생각을 바꾸며 나는 고개를 저어 대답했다.

“아니요,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애들이 지금 대표를 너무 무서워하더라고요. 징크스잖아요, 회사 안에서 분위기 안 좋으면 데뷔 이후에도 편안하지 못한 거…….”

주절주절 만들어 낸 변명을 읊는데, 역시 귀신같은 여배우에게는 통하지 않았는지 그녀는 눈살을 가늘게 뜬 채 ‘흐음……’ 하고 탐정 흉내를 내며 턱을 쓸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다가 아예 포기해 버리고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걸 보곤, 픽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 왔다.

“자기, 내가 몇 년 더 산 인생 선배로서 조언 하나 해 줄까? 자기가 제일 힘센 놈이 될 수 없을 것 같으면, 제일 힘센 놈한테 붙어.”

“…….”

“어어―, 자기 우니?”

“예? 아니에요, 그런 거.”

“이것 봐, 말도 거꾸로 하고?”

내가 그것이 되지 못한다면 제일 힘센 놈에게 붙어야 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구르며 이미 온몸으로 터득한 일이었지만, 타인의 목소리로 재차 확인해 듣는 일은 역시 씁쓸하고 우울한 것이어서 그저 묵묵히 시선을 내렸을 뿐인데, 좋은 놀림거리를 잡은 그녀가 꼭 어린애들처럼 집요하게 말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럴 때 정혜주 씨, 점점 김 실장님하고 닮아 가는 것 같아요.”

“어머, 그건 정말 악담이다, 자기, 순둥이 주제에.”

결국 혀를 내두르며 한마디 했더니 그녀는 질색한 얼굴로 기함을 했다. 순둥이 소리에 나도 따라 기함을 할 뻔했다. 내가 권무진에게 어떻게 굴었는지, 그녀는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저 순둥이 아니에요, 저 못됐어요.”

“맞아요, 이 형 되게 못됐어요. 승재 형이 누나 앞에서 내숭 떨어서 본모습을 못 보셨구나?”

본의 아니게 이중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우울한 기분으로 웅얼거리며 대꾸하는데, 문득 활기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개인 트레이너와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현준이었다.

고개를 들어 녀석을 확인한 정혜주가 여전히 질색한 얼굴로 손바닥을 휘휘 저어 보이며 말했다.

“어머, 얘 지금 누구더러 누나래니. 나는 누구들처럼 나이 안 맞게 무조건 누나 소리라면 환장하는 사람 아니야. 그냥 선배님 그래, 선배님. 그리고 어디서 잘난 척이야, 내가 여승재를 너보다 덜 아니?”

그리고 잠시 두 사람의 투덕거림을 지켜보느라 나쁜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할 겨를이 없었다. 느긋하게 뒤로 몸을 젖힌 채 그 둘을 번갈아 보며 ‘흐흥….’ 하고 작게 콧소리를 내며 웃었는데, 떠들면서도 그걸 들었는지, 한창 투덕거리다 말고 문득 두 사람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따라하듯 ‘흐흥.’ 하고 웃어 보였다.

회사, 옮기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 ‡ ‡

이제 이 녀석들을 어쩌지……. 물끄러미 쳐다보는 내 근심 어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쌍둥이들과 케이는 그저 열판 위에서 고기가 익는 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되었다 싶으면 부리나케 젓가락을 움직여 입안에 누가 더 많이 넣는가에만 열중하는 모습들이었다.

내게는 아직 스물한 살 철없는 애들이었지만, 기실 그 애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어서 함부로 타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내가 스물한 살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위협적인 생을 견뎠는지 기억할 수 없다.

“…아무리 얹혀산다지만,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다녀? …많이 먹어.”

“형은 안 먹어?”

허튼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잘 살고 있나 궁금해 불렀더니, 다짜고짜 고기 사 달라던 녀석들이었다. 각자 친척집이며 친구 집에 잠시 의탁해 있다고 했었다.

몇 달 잠적한 동안 녀석들이 살던 숙소를 곧장 빼 버린 회사 측이 야속하기도 하고, 그런 계기를 마련해 준 녀석들이 한심스럽기도 해서 속상한 마음에 투덜거렸다가, 또 괜한 잔소리에 체할까 싶어 많이 먹어라 얼러 주었더니, 그제야 케이 녀석이 내 젓가락이 깨끗한 것을 힐긋 살피며 물어 왔다.

뒤이어 쌍둥이 녀석들까지 ‘진짜네, 안 먹었네.’ 하고 뒤늦게 걱정하는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너희가 지금 누굴 걱정하니, 어서 먹어라 이르고 나도 그제야 대충 몇 점 집어 먹는 시늉을 했다.

“근데 사람들이 우리 알아보는 것 같아, 히히. 기분 좋다.”

대충 배를 채웠는지 한결 여유로워진 얼굴로 사이다를 홀짝홀짝 마시던 쌍둥이 중 하나가 자신들을 힐긋거리는 시선들을 덩달아 힐긋거리며 속닥거렸다.

“너희가 활동한 게 몇 년이고, 또 잠적한 게 고작 몇 달인데, 그럼 알아보지. 당연히 알아봐야지.”

언론에서 잠적 이유에 대해 뭐라고 추측해 떠들건, 어쨌든 몇 년 동안이나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줬던 애들이었는데, 고작 몇 달 얼굴 비추지 않았기로서니 비난하거나 냉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면, 그건 얼마나 슬픈 거니. 사람들이 얼마나 못된 거니.

울적한 마음에 공연한 질책을 하는데도, 아이들은 그저 ‘그런가…….’ 하고 머쓱하다는 듯 히히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속이 저릿해, 달래려 찰랑찰랑 소주잔을 들어 올리려는데 마침 호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반드시 액정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화면에 뜬 발신인은 그런 습관을 챙기도록 해 준 장본인이었다.

『개』

미간을 찌푸린 채 신경질적으로 아예 전원을 꺼 버리자, 맞은편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이 놀랍다는 듯 입을 헤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연예기획사 매니저가 장기처럼 달고 다녀야 할 것이 휴대폰이었다.

“그냥 장난 전화야. 아까부터 계속 울려서. …마저 먹어.”

통상적인 변명에도 아이들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믿는 눈치였다.

“그런데, 경아 누나 저렇게 됐어.”

그리고 더 이상은 먹기 힘들다는 듯 젓가락을 놓아 버리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던 케이가 언뜻 내 옆자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어눌하게 말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알았는지, 테이블 위에 이마를 박고 있던 경아가 빙그르르 고개를 돌려 불콰해진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오빠… 우리 짠 하자, 짠―.”

“많이 취했어, 그만해.”

자신의 빈 술잔에 스스로 소주를 따르는 것을 말리다가, 계속해서 ‘짠― 짠―’ 하고 칭얼거리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잔을 빼앗아 대신 고개를 꺾고 털어 넣어 버렸다.

목구멍이 불판 위에서 달궈지는 생고기처럼 치이이―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것 같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크으……’ 소리를 내자, 그걸 본 경아가 깔깔 웃으면서도 슬쩍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쳐 닦았다.

못 본 척하며 나는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라 또 한 번 대신 홀짝였다. 그러자 문득 케이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 다가오더니,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엎드려 있는 경아의 어깨 위로 걸쳐 주곤 자리로 돌아간다.

외국에서 나고 자란 케이에게는 그런 매너가 그저 당연한 것일 터였는데, 오히려 쌍둥이들이 촌스럽게 ‘오오―.’ 하고 수상쩍은 소리를 냈다. 경아는 히히 웃으며 ‘내가 호강한다.’ 하고 여전히 엎어진 채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였다.

4년을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방송 아카데미를 다니다가 먼저 있었던 코디에게 픽업되어 우리 쪽으로 소개받아 들어온 경아였다.

그저 남자연예인 메이크업 코디만 하기에는 아까운 재능에 한번은 유학을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고개를 저었던 것도 사귀던 남자친구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먼저 자랑스레 떠벌리지 않아서 한 번도 자세히 물었던 적은 없지만, 경아는 그동안 남자친구의 생활비까지 대 주는 노릇을 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여자가 생겼는지, 아니면 좋은 곳에 취직해서 더 이상 이 애가 필요 없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헤어졌고, 모든 연인들이 그러하듯 둘 중 하나가 그 과정에서 더 많이 상처받게 되는데, 그 하나가 경아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촬영이 해 질 무렵에야 끝나 거의 녹초가 된 현준을 집에 데려다주고, 이제 너도 들어가라 하는데 문득 ‘오빠 나 오늘 술 사 줘.’ 했다.

어차피 저녁에 아이들과 약속이 되어 있었던지라 그럼 애들 고기 구워 먹일 동안 너는 옆에서 술 마셔라 했더니 그러겠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곤 정말 자리에 앉자마자 소주를 들이붓기 시작하더니, 결국 아이들이 주문한 고기를 모두 먹어 치우기도 전에 곯아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내가 가서 혼내 줄까?”

“이 헐렁한 손목으로?”

이제 좀 술이 깨는지, 그래서 맞은편에 앉은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괜히 혼자 히히 웃으며 눈가를 훔쳐 닦는 게 안쓰러워 조금 웃겨나 주려고 그리 말했더니, 녀석은 눈가를 비벼 대던 손으로 내 손목을 덥석 붙들고 흔들며 입술을 삐죽여 대답했다.

그러다 얼핏 내 왼쪽 손목에 끼워진 두꺼운 시계 체인을 건드리고는 ‘아.’ 하곤 다시 손을 내리며 짐짓 우스갯소리로 이어 말한다.

“그 새끼 운동선수 출신이다, 오빠.”

“…그럼 기욱이 대신 보내고.”

굳이 빈 술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며 조용히 대꾸하자, 경아는 물론이고 맞은편의 아이들까지 테이블을 두드리며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테이블 아래에서 왼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 체인의 위치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언젠가 공중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그대로 나와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가만 서 있어도 땀이 뻘뻘 나는 무더운 날씨에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긴 소매의 재킷을 걸쳐 입고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팔을 걷다가 경아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그때도 경아는 그저 ‘아.’ 하고는 고개를 돌려 주었었다.

나는 이렇게 배려심 깊은 아이가 행여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딱 한 잔만.’ 하는 경아에게 직접 반 잔만 따라 주고, 빈속이 상할까, 애들이 먹다 남긴 생당근도 슬쩍 밀어 주었다.

네 탓이 아니다. 인연이 아니었다 생각해라. 너는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충분히 아름다웠다. 너를 배신한 건 네 삶이나 운명이 아니라, 그저 초라하고 못난 한 남자일 뿐이다. 너는 여전히 젊고 예쁘다. 네 탓이 아니다, 그러니 너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해치는 어리석은 행동 같은 건 하지 마라.

길고 청승맞은 말들을 대신해, 나는 차가운 새 물수건을 얻어 와 경아에게 주었다. 취기 오른 열감을 식힌다는 핑계로 경아는 그것으로 얼굴을 푹 덮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나는 잠시 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가만 지켜만 보다가, 아무래도 불안해 다시 휴대폰 전원을 켜 보았다.

역시 성질 급한 ‘개’로부터 몇 통의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김 실장으로부터의 연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통화 연결음이 몇 번 들리지 않고 곧바로 ‘어이, 여승재―.’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실장님. 잠깐 배터리가 꺼져서… 무슨 일이세요?”

실장님, 부르는 소리에 저들끼리 와글와글 떠들던 아이들이 흠칫 굳은 채 이쪽을 돌아보았다. 연습생 시절부터 군기 반장 담당을 했던 김 실장을 아이들은 여전히 무서워했다.

들리지도 않을 텐데 통화를 하는 내내 일제히 목을 삐죽 내밀고 귀를 기울이던 녀석들은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무언으로 물었다.

“이 근처라고… 할 말 있다고, 잠깐 들르신다고.”

“아이이…….”

아이들을 따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들키는 것은 현재로서는 내 입장에서도 썩 유익한 일이 아니어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통화 내용을 말해 주자, 녀석들은 일제히 풀 죽은 목소리를 냈다.

“경아 이렇게 있어서 여기선 못 움직이잖아. …너희들 어서 숨어.”

남은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바쁜 손길로 녀석들을 일으켜 세웠다. 밖으로 내보냈다간 어설픈 타이밍에 마주칠 수도 있어서, 결국 가게 안 화장실 쪽으로 우르르 몰아넣고 자리에 돌아와 앉는데, 정말 근처에 있었는지 때맞춰 김 실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물건 왜 이래.”

나를 발견하고 곧장 자리로 다가선 김 실장은 여전히 흰색 물수건으로 얼굴을 푹 덮고 있는 경아를 보곤 흠칫 놀라며 물었다. 수건을 눈 아래까지 슬쩍 내려 보이며 경아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곤 또다시 냉큼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안 좋은 일 있다고 해서…….”

“남자친구하고 헤어졌냐?”

“…….”

대신해서 에둘러 대답했는데, 섬세하지 못한 김 실장이 대뜸 진실을 캐내며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경아의 어깨가 움찔하는 걸 보고서야 뜨끔해하는 얼굴이 되어선 ‘진짜?’ 하고 내게 입 모양으로만 물어 왔다.

저 갈래요, 하며 경아가 의자를 끌고 일어났다. 택시 타고 가라, 하고 지갑에서 돈을 얼마 꺼내어주는데, 김 실장이 냉큼 만원 지폐 몇 장을 경아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비틀대는 것을 붙잡고, 결국 밖에까지 따라 나가 직접 택시를 잡아 태워 주고 다시 돌아와 보니, 김 실장이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며 몇 점 남지 않은 고기 조각을 집어 먹고 있었다.

더 시켜 드세요, 하고 자리에 앉는데 문득 옆자리에 경아가 놓고 간 케이의 재킷이며 테이블 위에 아이들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접시며 수저 같은 것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

“여기 고기 좋네.”

“예…, 술이랑 같이 더 주문할까요?”

아차 싶어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김 실장은 그 정도로 별다른 낌새를 채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휴, 몰래 한숨을 내쉬며 얼른 술잔을 채워 주며 묻는데, 잔 위를 손바닥으로 가로막고는 대뜸 다른 접시와 수저들을 가리키며 물어 왔다.

“아니, 됐어. 나도 이미 한잔하고 오는 길이야. 근데 여기 누구 더 있었어?”

“아… 경아 친구들… 이요.”

“여승재가 경아 친구들을 만나고 다녀? 흐음.”

“…….”

“하긴, 너도 얼른 여자 만나 결혼해야지.”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기는. 그게 뭐 나쁜 거냐? 그건 그렇고…….”

화장실에 갇혀 있는 게 답답했던지 뒤쪽으로 아이들이 힐끔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불안한 마음에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턱짓을 하며 대충 대꾸를 하는데, 물로 입안을 헹군 김 실장이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길게 말을 끌었다.

“그 녀석들 말이야…, 나머지 세 놈들.”

무의식적으로 꼴깍 침을 삼키고 말았다. 제 이야기를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들은 내 말을 듣지 않고 벽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들였다 하면서 또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권 대표한테 말해 봤어?”

“…대충….”

“에이, 대충 말해서 돼? 동창 좋다는 게 뭐냐― 하면서 살살 굴려 봤어야지. 쯧.”

그 좋다는 동창이 일을 빌미로 해서 시시때때로 전화를 해 대며 섹스 로비를 강요하고 있고, 최종적으로는 나를 피 말려 죽여 버린다는 협박까지 했다고 말해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곤 혼자 실없이 픽 웃어 버리는 나를 보며 김 실장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 또 ‘쯧쯧쯧’ 하고 혀를 찼다. 말할 수 없었다, 가장 힘센 놈은 김 실장이 아니라 권무진이었다.

“방금 권 대표하고 한잔하고 오는 길이야.”

“아…….”

그럼 전화를 받을걸 그랬나. 그러나 김 실장까지 함께 세 명이서 하는 술자리가 마지막까지 세 명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은 자명했다.

“한번 떠봤는데 말이야, 뭐라고 확답이 없어. 그러는 거 보면 봐준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또 그 성격으로 봐선 절대 그럴 타입이 아니거든.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어휴, 그런 지랄이 또 없어. 에잇, 더러워서 원. 오죽했으면 대표실 담당 수진 씨 말이야, 저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명패 들고 마주쳤던, 그 사람도 제 발로 나가 버렸다. 흥, 아무리 서자 출생이라고 해도 말이야, 어쨌든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 받고 자란 도련님 아니냐고. 그런데 성질머리가 왜 그따위야? 양아치야, 뭐야, 왜 뻑 하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한테 욕지거리야?”

“…….”

쌓인 게 많았는지, 아이들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김 실장은 어느새 권무진의 험담을 하느라 목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진정 좀 하시라고 찬물을 건네자, 그제야 어험, 어험 하고 화기를 누르는 듯했다.

무어라 맞장구를 쳐 주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보다 훨씬 끔찍한 권무진을 알고 있었다.

“저… 실장님. 애들 다른 기획사랑 연결시켜 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릴.”

다시 슬쩍 아이들 이야기로 돌아가 나름대로 생각해 낸 방안을 꺼내자, 김 실장은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내 얼굴 앞으로 바짝 손바닥을 내보이며 ‘쉿, 쉿’ 하고 말을 이었다.

“애들 진짜 이 바닥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꼴 보고 싶어? 알잖아, 다른 데서 우리 회사더러 뭐라는지. 괴물이야, 괴물. 너무 커져 버렸지. 언론 갖고 노는 거야 식은 죽 먹기야. 이 정도 괴물이랑 대항할 수 있는 덩치의 회사도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가운데서 애들 못 버텨. 그런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마.”

“…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른들이 참 못됐지. 애들이 실수 한번 한 걸, 그래 니들이 잘못했지?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하고 한번 봐주면 될 걸. 무슨 계약이 어쩌고, 본때가 저쩌고.”

내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대꾸하자, 내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김 실장이 과장되게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입을 꾹 다문 채 여전히 힘없이 웃어 주고 말았다.

나와 같이 있는 자리여서 이런 말을 할 테지만, 어쩌면 아이들의 처벌을 종용하는 무리에는 김 실장 역시 끼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그는 회사의 오랜 내부 사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김 실장의 집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그의 아내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주고, 이곳이 일반 고깃집이며 주위에 여자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김 실장은 겸연쩍은 듯 웃어 보이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따라 일어서는 나를 향해 되었다 손짓을 하고는, 문득 다시 테이블을 둘러보며 ‘여승재.’ 하고 사뭇 진지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예?”

“애들 잘 달래고 있어. 괜히 허튼 생각 못 하게 하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기, 회사 카드로 계산해라.”

그리고 어느 영화의 주인공 흉내를 내며 멋들어진 포즈를 취해 보이곤 빠른 걸음으로 가게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엉덩이가 아픈 것도 모르고 털썩 자리에 앉아 버렸다.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지 곧이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맞은편에 앉았다.

“…….”

입을 꼭 다문 채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무언으로 묻는 것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사이다를 한 병씩 더 시켜 주고, 택시를 불러 한 명씩 태워 보내면서 좀 더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인사처럼 했다.

경아가 마시려던 걸 빼앗아 몇 잔 대신 마신 게 전부였는데, 빈속이었던 게 문제였는지 걸음이 곧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로 들어서는데 현관문 앞에 놓인 커다란 쓰레기봉투 같은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렇게 취하지는 않았는데… 생각하며 두어 걸음 더 옮겨 보자, 센서로 복도의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문 앞에 놓인 것의 정체가 선명해졌다.

“…….”

차라리 누군가 내 집 앞에 몰래 불법 투기한 쓰레기였으면 싶었다. 쓰레기보다 못한 권무진은 아예 정신을 잃을 만큼 취했는지, 내 집 현관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때문에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다정하게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짓은 할 수 없어, 발끝으로 그의 허리께를 꾹 밀어내는데, 순간 번쩍 눈을 뜬 그가 내 발목을 덥석 붙잡으며 사나운 눈초리를 들어 노려보았다. 공포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볼 때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너 가.”

“목말라.”

애써 가라앉힌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는데, 그는 잔뜩 쉰 목소리 그대로 심드렁히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발목을 잡은 손을 거리낌 없이 바지 밑단 속으로 밀어 넣곤 말랑한 종아리를 주무르며 희롱했다.

“가라고.”

“물!”

냉큼 다리를 털어 내 그의 손을 내치며 반복해 말하자, 어느 것에서 성질이 났는지 그는 대뜸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가 늦은 밤 조용한 복도를 왕왕 울렸다.

한동안 둘 다 꼼짝도 않자, 복도의 조명이 다시 꺼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형형한 눈빛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몸 안에서 히치콕 영화의 배경 음악이 둥둥 연주되었다.

“…싸이코.”

속삭이듯 내뱉고 서둘러 손을 움직여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데, 어느새 일어선 무진이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덜컥 막아서는 것이다.

상관치 않고 나는 그대로 힘주어 문고리를 당겨 버렸다. 그에 손가락을 찧은 무진이 ‘윽!’ 소리를 내곤, 곧이어 악에 받친 듯 힘주어 벌컥 문을 잡아 열었다.

“아……!”

당겨지는 힘에 이끌려 나는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품에 와락 안기는 꼴이 되었다. 등 뒤로 사납게 문을 닫으며 그는 즉시 내 어깨를 신발장으로 밀쳐 붙였다.

볼록 튀어나온 신발장의 손잡이에 등이 찧어 아픈 신음을 내는 사이, 그가 내 벌린 입술로 곧장 혀를 밀어 넣어 왔다.

“으, 으, 읏……!”

그의 혀를 물어뜯어 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염려했다는 듯 그는 내 턱을 아프게 쥔 채 다물지 못하게 하곤 마음껏 내 입안을 취했다. 쩝쩝대며 내 입술과 혀를 핥고 빠는 행동이 마치 허기를 채우는 짐승처럼 느껴졌다.

문득 머릿속에서 또다시 가젤의 내장을 파헤치는 표범의 모습이 영상으로 반복되어 떠올랐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머릿속으로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해졌다. 때문인지 이 상황에 어떤 기시감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은 일찍이 무수한 모습으로 반복되어 온 내 과거의 잔상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에 슬퍼졌다.

두 팔로 그의 단단한 어깨를 덧없이 밀어내다가 결코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윽고 그의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고 뽑아낼 듯 뒤흔들자, 무진은 그제야 내게서 떨어졌다.

“너……!”

그리고 당장 한 손을 획 하니 치켜들었다가, 내 뺨을 후려치는 대신 손바닥으로 내 입가를 단단히 가로막고 내 고개를 한쪽으로 꺾었다.

“으, 으읍……!”

그러곤 드러난 내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고는 영역 표시를 하듯 연한 살결을 잘근잘근 씹으며 빨아 댔다. 피가 나는 게 아닐까, 아팠다. 그러나 나는 입이 가로막힌 채 아무런 호소도 할 수 없었다.

“죽을라고.”

흡혈귀처럼 오랫동안 내 목덜미에 매달려 있던 무진은 마무리를 하듯 내 눈가를 핥으며 익숙한 지껄임을 끝으로 내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내 어깨를 털썩 밀쳐 내곤 멋대로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열아홉 아니야, 그때처럼 똑같이 대하지 마.”

힘이 빠져 그대로 현관 앞에 털썩 주저앉은 채 나는 씩씩대며 쏘아붙였다. 그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최악이었다. 왼쪽 손목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처럼 아파 왔다.

“말했잖아, 그때보다 지금 네가 바락바락 대드는 게 돋우는 맛이 있어서 더 마음에 든다고.”

어느새 냉장고를 뒤져 물을 찾았는지, 한 손에 생수통을 들고 느릿한 걸음으로 되돌아온 무진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곤 한 모금 물을 벌컥 들이켰지만, 아직 술이 깨지 않았는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주먹으로 이마를 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술독에 빠져 뒈져 버리라고 했더니.”

“아. 하러 온 거야.”

당장 멱살을 붙들어 잡고 창문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마음을 대신해 내쏘았는데, 다른 쪽으로 건드렸는지 무진이 한쪽으로 고개를 꺾은 채 불량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마개를 막은 생수통을 바닥에 던져 버리곤 재킷 역시 곧장 벗어 던지며 다가와, 와락 내 두 손목을 끌어 잡았다.

“읏―!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한껏 뒤로 몸을 빼며 저항했지만 나는 여지없이 무기력하게 그에게 끌어올려졌다. 바짝 끌어안은 채 성마른 손길로 바지춤에서 티셔츠를 끄집어내며 동시에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려는 것에, 두 손으로 바쁘게 그의 얼굴이며 손을 밀어내어 반박하자, 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듯 대답할 뿐이었다.

그 일방적인 태도에 바짝 약이 올랐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나는 그의 어깨를 냅다 밀쳐 내며 간신히 품에서 벗어났다.

“열아홉 아니라고 했어. 함부로 굴지 마.”

그러나 넓지도 않은 집 안에서 그를 피해 달아날 곳은 없었다. 오히려 안쪽으로 더 들어온 꼴이 되어, 그와 마주한 채 팽팽히 맞선 상태로 나는 더 이상 당하고만은 있지 않겠다 초라한 경고를 했다.

무진은 이미 하나 풀어진 셔츠 버튼이 답답하다는 듯 두어 개 더 거칠게 풀어 헤치며 여유롭게 웃는 낯짝으로 지껄였다.

“열아홉이든 서른하나든 너는 여전히 여승재고, 나는 권무진이지. 그대로야, 달라질 거 없어.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확실하게 엉망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리고 나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가며 무언가를 연상시키듯 자신의 바지 버클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대어 보였다. 나는 뒤로 손을 뻗어 그를 찌를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고작 두꺼운 러시아 문학책이었다.

죄와 벌, 마침 적절한 제목에 픽 웃으며 곧장 그것을 치켜들었다.

“아……!”

그러나 내 손에서 그것이 떨어지기도 전에 먼저 날렵하게 다가온 무진이 내 팔을 낚아채 꺾고 뒤로 몸을 돌려세웠다.

내가 책장의 모서리에 이마를 박는 동안, ‘죄와 벌’은 합당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페이지를 넓게 펼친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생은 페이지가 없다, 우리는 돌아가지 못한다, 되돌리지 못한다.

“으, 읏! 다시는… 다신 너한테 아, 안 당해…!”

“…그건 또 누구 맘대로?”

이미 빼내어 둔 내 셔츠 자락 안으로 뜨거운 손바닥을 덥석 밀어 넣곤 멋대로 내 복부며 가슴께를 더듬는 무진의 팔을 할퀴며 고함을 질렀지만, 그는 내 등허리 뒤로 자신의 부푼 아랫도리를 바짝 붙인 채 내 귓바퀴를 잘근 씹으며 되물었다.

그리고 소름처럼 돋은 내 한쪽 유두를 희롱하며 다른 한 손으론 급하게 내 바지 버클을 풀어내는 손길에, 나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온몸을 번쩍 치켜세우며 완강한 몸부림을 쳤다.

“읏―!”

그런 내 머리통에 그의 턱이 덜컥 맞아떨어졌다. 뒤로 주춤 물러서는 그가 아직 남은 숙취에 머리가 또 어찔한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으으……’ 신음을 했다.

그 틈에, 나는 얼른 바닥에서 두꺼운 책을 주워들어 그의 머리통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퍽! 하고 ‘죄와 벌’이 그의 머리를 때리고, 곧이어 그의 커다란 몸이 벽에 부딪혔다가 다시 바닥으로 털썩 엎어졌다.

“하아! 하아, 하……!”

오한이 들었다. 발끝으로 그의 한쪽 어깨를 밀어 몸을 돌려 눕히자, 태평하게 입을 벌린 채 씩씩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가슴 속에서 울분 같은 것이, 혹은 서글픔 같은 것이, 아니면 안도감 같은 것이 벌레처럼 득시글거렸다.

“…싸이코.”

나는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두고, 그의 두 발목을 붙들고 끙끙거리며 현관을 향해 끌었다. 그러나 거실의 채 절반도 건너지 못하고 지쳐 그의 곁에 털썩 쓰러져 눕고 말았다.

나는 꼭 그의 한쪽 팔에 안긴 것처럼 누워 있었다. 그런데 돌연, 그가 잠버릇처럼 옆으로 몸을 굴려 내 위로 한쪽 팔과 다리를 얹었다.

놀라, 후다닥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당장 주방으로 들어가 식칼을 꺼내 들고, 흥분으로 혼자 씩씩거리며 그의 주위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는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나는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며 그를 경계하다가, 결국 그에게 보이지 않는 침대 반대편으로 넘어가 식칼을 꼭 쥔 채 세운 무릎 위로 고개를 얹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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