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two (3/41)

Chapter two

옥상으로 향하는 철제문 손잡이에는 동그랗게 녹이 슬어 있었다. 힘주어 밀어 보자, 덜커덩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황갈색 녹가루가 부스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이윽고 온전히 문을 밀며 바깥으로 나가 섰다.

“하아…….”

사방이 탁 트인 옥상에서는 만개한 벚나무 꽃의 분홍으로 가득 물든 학교 뒷산은 물론이고, 운동장 너머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 단지까지 한눈에 모두 보였다.

그곳에서는 하늘이 다 내 것이었다. 고개를 젖히면 시야에 모두 담지 못할 만큼 아뜩하게 펼쳐진 푸른 하늘이 정신을 어찔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동시에 더욱더 초라하게 만들었고, 깊이 모를 우울과 경이로운 쾌감을 함께 선사했다.

“…배고프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 실질적인 허기를 채워 주지는 못했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선 채 물병에 채워온 수돗물을 소주처럼 홀짝이는 것은 점심시간 동안의 내 주요 일과였다.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포화된 에너지를 어떻게든 쏟아 내겠다는 듯 발광으로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내 가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넘치는 부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므로, 그저 신기하다는 표현이 옳다.

고교 입학시험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아 운 좋게 사립명문 고교에 장학생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 ‘사립명문’이라는 간판의 조건이 단순히 우수한 성적이 아니라 고위층 혹은 부유층 자재들의 교집합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저 집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입학했을 것이었다.

대단한 사립명문 고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내가 온몸으로 깨달은 바는, 누구든 열심히 노력하면 상류계층으로의 편입이 가능하다는 도덕적 허상이 아니라, 계층의 분리는 이미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단단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리 분노하지 않았다. 계급에 따른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장학생 자격으로 입학시켜 준 주제에 그깟 급식비를 굳이 따로 받아 내야겠다는 학교 측의 입장은 조금, 불만이었다.

덕분에 나는 거의 매일을 옥상에서 혼자 수돗물 따위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비참한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고 매일 노력했다.

“상류계층으로의 편입을 향한 노력이 아니라…….”

물통의 마개를 턱으로 꾹 누른 채 중얼거리는데, 언뜻 난간의 저 끝에 놓여 있는 희끗한 물체가 시선에 잡혔다. 터덜터덜 걸어가 확인해 보니, 편의점 따위에선 흔히 구할 수도 없다는 비싼 수입 담배와 그것과 퍽 어울리는 모양의 지포라이터였다.

“…….”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물욕이 강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의 값어치를 계산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도 건들거리는 바보 녀석들처럼 담배라는 것을 한번 피워 보고 싶었다. 어른들이 질색을 하며 뜯어말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어, 도둑이다.”

반들거리는 라이터를 손에 쥐자마자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나는 그대로 집어 든 것을 놓치고 말았다.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것을 도로 주워 원래 있던 곳에 놓아둔 뒤에야 천천히 돌아서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세 명의 녀석들이, 아무래도 ‘건들거리는 바보들’이 분명한 녀석들이 서 있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여긴 우리가 먼저 찜해 놨어.”

그중 가장 멍청해 보이는 녀석이 나름 위협조로 지껄여 왔다. 그리고 뒤이어,

“어, 우리 반 유령.”

키가 작고 예쁘장한 녀석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지껄였다. 바보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새삼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 안경을 쓴 탓인지 그나마 어른스러운 인상의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위아래를 한번 훑을 뿐이었다. 두 멍청이들의 쓸데없는 말보다도 그 고요한 시선이 더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러나 어쨌든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행동을 한 것은 이쪽이었다.

“놓여 있어서 한번 집어 봤을 뿐이야. …도둑이 아니라.”

그들에게 변명이라고 여겨질 법하지 않도록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쟤 예쁘지?”

“…응.”

그러나 내 말은 전혀 듣지 않은 듯, 계집애 같은 녀석과 가장 멍청해 보이는 녀석은 나를 힐긋거리며 이쪽까지 뻔히 들리도록 속닥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평가일뿐더러, 그 느닷없는 칭찬이 내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비난의 유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제야 녀석들을 향해 경계의 날을 세우며 눈살을 찌푸린 채 한 걸음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나쁜 놈들은 아니야, 미친놈들이지.”

무심한 기색으로 잠잠하던 안경잡이가 그제야 처음 말문을 열고는 자신의 동료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나는 더 긴장했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더 물러서는데, 돌연 등 뒤로 무언가 툭 하고 와 닿았다. 그것이 내 날 선 긴장을 건드렸다.

“……!”

날카로운 것에 찔려 터져 버린 풍선처럼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바로 눈앞에 인상 나쁜 녀석이 또 하나 서 있었다.

“도둑 잡았다.”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불량한 자세로 선 채 그는 무료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치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팽팽한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언뜻 그의 눈빛에서 약동하는 천진한 잔악성을 읽을 수 있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순간 단단하게 굳는 기분이 들었다. 달뜬 숨이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녀석은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며 따분하다는 듯 한쪽으로 기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

“…….”

등 뒤에선 세 멍청이들이 무얼 먹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동장에선 아이들이 왁왁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먼 북처럼 울려오고, 볕 좋은 하늘에는 그린 듯 선명한 모양의 뭉게구름이 유채화처럼 천천히 바람에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시간은 일순 정지한 것만 같았다.

문득 난간 밖으로 몸을 날려 뛰어내리고 싶은 기이하고 난데없는 욕망이 일었을 때, 눈앞의 녀석이 먼저 정적을 깨뜨리고 입을 열었다.

“이건 내 거야, 도둑놈.”

그리고 내가 다시 난간 위에 올려 둔 담뱃갑과 지포라이터를 낚아채 갔다. 그의 손에 들린 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는 침을 삼켜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 수 있었다.

“도둑이 아니라―”

“몰래 가져가려고 했잖아. 그건 도둑질이야.”

“…….”

그것 외에는 보류할 수 없다는 듯 그는 단단하게 못 박아 결론 내렸다.

반박할 수 있는 거리가 있었겠지만, 나는 그 물건의 주인이라는 녀석이 가진 무수히 많은 소유물 중 하나가 된 것처럼, 마치 종놈처럼, 하마터면 지조 없이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 얼른 그의 어깨 너머로 눈길을 돌린 채 시선을 외면했다.

그때였다. 더 이상 나와의 시시한 말장난은 그만두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향하기 위해 걸음을 떼던 그가 문득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곤 변덕을 부리듯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고집스레 시선을 피하고 있는 내 얼굴로 바짝 고개를 내려온다.

“…….”

히죽 휘어지는 그의 입가로 짓궂은 잔혹성이, 혹은 잔혹한 짓궂음이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내 시야를 온전히 가로막은 그가 손끝으로 가볍게 내 턱을 들어 올리며 지껄였다.

“사실대로 털어놔 봐. 가지고 싶어서, 훔쳐 가려고 했지?”

“…그런 거 아니야.”

“도둑놈.”

“…….”

탁, 녀석의 손을 힘껏 쳐 냈다. 뒤에서 부스럭대던 소리가 뚝 끊겼다. 눈앞의 인상 나쁜 녀석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와락 인상을 구기며 당장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선다.

“어이, 그만해.”

말린 것은 안경잡이였다. 잠시 두 녀석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혔다. 나머지 두 녀석들은 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인상 나쁜 멍청이가 씩 웃으며 안경잡이의 어깨를 툭 건드리곤 걸음을 옮겼다.

“지, 너 감히 내 앞길을 막아 세웠겠다, 응?”

그리고 곧이어 다 함께 시시덕거리며 옥상 한구석으로 우르르 몰려가선 바닥에 털썩 앉는 것이었다.

나는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가장 건들거리는 녀석이 이곳은 자신들이 먼저 찜한 곳이란 주장을 했지만, 기실 옥상은 2년 동안의 내 비밀 아지트였고, 그것은 내게 붙은 ‘유령’이라는 별명이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 네 명의 침입자들이 맨바닥에 태평히 다리를 뻗고 앉아 수제 샌드위치 등을 먹고, 또 그 문제의 담배를 피워 대는 동안, 나는 여전히 난간에 기대어 물병을 빨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소음들보다 바로 곁의 그들의 대화가 더 상세히 들려왔고, 알고 싶지 않아도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각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역시 별것 없었는데, 그런데도 나는 어느새 그들의 별것 없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유명했다. 모두 걸출한 집안 자제들이며 덕분에 자기들 잘난 맛에 사는 치들이 모인 학교였지만, 그중에서도 네 명의 멍청이들은 단연 돋보였다.

특히 그들이 모두 일명 ‘서자’ 출생이라는 소문은 유명 여배우의 섹스 스캔들처럼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었다. 홍길동 모임이 아닌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풉.”

“…여승…! 야, 여승!”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주먹으로 입가를 가로막고 몰래 웃음을 터뜨리는데, 문득 멍청이들 속에서 내 이름 비슷한 것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자, 나와 같은 반이라는,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진짜 이름은 이제홍인데, 그 무리 안에서는 그저 ‘홍’이라고 불리는―이 또다시 내 이름을 우스꽝스럽게 부르며 물었다.

“여승, 너는 밥 안 먹어?”

“…배 안 고파.”

“으응.”

“그리고 내 이름은 여승이 아니라, 여승재야.”

“알아.”

내 딱딱한 지적에도 녀석은 가뿐히 어깨를 으쓱이며 담백하게 대꾸했다. 그러곤 또 냉큼 안경잡이―그들 사이에서는 ‘지’라고 불리지만 진짜 이름은 지석운이라는―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이쪽을 힐긋거리며 ‘쟤 예쁘지?’ 하고 속닥거렸다.

이쯤 되면 그 예쁘다는 말이 어떤 모욕의 뜻을 가장함이 분명하다 생각되었다.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는데, 그 옆에서 또 최고 멍청이 녀석이―이름이 현찬성이라고 했는데, 다들 ‘찬’이라고 불렀다― 갑자기 요란스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우하하! 여승이래, 여승! 비구니 같잖아, 응? 아, 그러고 보니 딱이네, 어울려!”

“…….”

언짢아진 기분으로 나는 다시 난간을 붙잡고 돌아선 채 운동장으로 시선을 내려 버렸다. 바보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서늘한 뒷덜미로 와 꽂히는 시선 하나가 따갑게 느껴졌다. 턱을 문지르는 척을 하다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감싸 덮자, 바람결에 희미한 조소가 담겨왔다. 귓바퀴가 뜨거웠다.

마음껏 모두 떠들어 댔는지, 점심시간이 10분 정도 남아 있는 상태에서야 녀석들은 느긋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옥상을 벗어났다. 언뜻 등 뒤에서 제홍이 ‘여승, 안 내려가?’ 하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은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조심해.”

곁을 스쳐 지나가던 안경잡이 녀석―지석운―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붙이는 것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혹시 흔들리는 난간 따위를 조심하라는 경고인가 싶어 획 하니 고개를 돌려보자, 걸음을 옮기던 녀석 역시 잠시 멈춰선 채 말을 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쁜 놈이야.”

“…….”

나쁜 놈으로 분류된 그놈이 누구인지,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리고 왜 내게 그런 경고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묻지 않았다.

침입자들이 모두 내려간 후의 옥상은 다시 적막하고 한가로웠다. 수업 예비종이 음산하게 울렸고, 나는 외간 남자의 체취를 묻혀 들어온 마누라를 구박하는 좀생원처럼 깐깐한 얼굴로 옥상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이윽고 녀석들이 머물렀던 장소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뭐야.”

그들은 먹다 남긴 것을 치우지도 않았다. 슬그머니 뒤늦은 부아가 치밀어 발바닥을 까딱이며 탁탁 소리를 내는데, 때마침 본능처럼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

나는 한동안 멀거니 그들이 남긴 음료와 샌드위치 따위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곧이어 수업 종이 울렸다. 그것이 계시인 것처럼, 망설임 없이 허리를 굽히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직 여러 개비가 남은 듯한 담뱃갑과 근사한 지포라이터를 낚아채 들었다.

“블랙… 데빌….”

담뱃갑에는 마치 악마주의를 연상시키는 듯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케이스를 열어 보자, 브랜드명과 꼭 어울리는 까만색 궐련지로 둘러진 담배 개비가 보였다.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묘한 쾌감에 손이 조금 떨렸다.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곧장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고, 손에 익지 않은 지포라이터의 휠을 돌려 어색하게 불을 댕겨 붙였다. 그리고 양 볼을 홀쭉하게 만들며 문 것을 호기롭게 빨아들이는 순간,

“흣……! 크읏!”

그러나 흡입의 방법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원래 담배 맛이 그런 것인지, 마치 연탄 가루를 마신 것처럼 역겹고 고통스러운 기분만 드는 것이었다.

목 안은 물론이고 눈과 코까지 매워 나는 눈물을 찔끔 짜내며 한참을 콜록거려야 했다. 그러느라 미처 등 뒤에서 녹슨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혼자서 요란스레 발을 구르며 고개를 내젓다가, 그제야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또 잡았다, 도둑.”

“…….”

그는 히죽 웃는 얼굴로 나른하게 말했다. 블랙 데빌, 머릿속에서 검은색 악마가 박쥐 같은 날개를 활짝 펼쳐, 바람이 일었다.

나는 아직 연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어설프게 쥔 채였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가슴께에 달린 명찰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무진,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경찰에 넘길까?”

그리고 악마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차분히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니야, 네가 두고 갔으니까 이건 도둑질이 아니라―”

“아니면, 선생한테 이를까? 학교 공짜로 다니는 장학생이 옥상에서 담배나 몰래 훔쳐 피운다고.”

“…….”

그렇게 되면 그 담배의 원래 주인인 너 역시 처벌 대상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나는 따져 묻지 않았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눈을 맵게 했다.

눈살을 찌푸린 채 외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또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선 채 손을 뻗어 왔다. 그리고 빼앗듯 내 손에서 담배를 가져가, 시범이라도 보이듯 곧장 입에 물고 내 눈을 곧게 응시하며 천천히 그것을 빨아 보였다.

그렇게 머금은 담배 연기를 조롱조로 내 얼굴에 정통으로 뿜어 댈 줄 알았는데, 그는 다만 내 머리꼭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연기를 훅 내뿜을 뿐이었다.

그가 피우는 담배에서는 왠지 커피 향이 맡아졌다. 그게 무엇이냐고, 어떻게 해서 담배에서 그런 냄새가 나느냐고 촌스러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에, 잔뜩 긴장한 채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불현듯,

“무, 무슨……!”

내 왼쪽 가슴 위로 그가 지그시 손바닥을 덮어 누르는 것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것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리라는 생각에 차라리 심장을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안 될 일이었다. 그리고,

“여승재.”

그가 문득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 보자, 자욱한 담배 연기 너머로 악동처럼 웃는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 ‡ ‡

“이거 바를래?”

여자들이 바르는 립스틱 같은 것을 불쑥 내밀며 제홍이 말했다. 쉬는 시간마다 녀석이 챙겨 바르는 것이었다. 끝은 이미 뭉뚝해져 있었다.

“아니, 됐어.”

“입술 안 트게 해 주는 거야, 발라 봐.”

“내 입술은 별로 건조하지도 않아, 됐어.”

“좋겠다.”

가방을 챙기며 건성으로 대꾸하자, 제홍은 부럽다는 듯 새치름히 말하곤 그대로 가만 앉아 있었다. 그냥 놔둘까 어쩔까 하다가 결국 어깨를 툭 두드리며 ‘안 가?’ 했더니, 금세 애 같은 얼굴을 하고선 ‘찬성이 기다려야 돼.’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하며 나는 미련 없이 훌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뒤에서 곧장 그런 내 옷깃을 삐죽 붙잡으며 역시나 아이처럼 물어 온다.

“어디 가?”

“응, 편의점.”

“뭐 사게?”

“아르바이트.”

내 무뚝뚝한 대꾸에도 녀석은 딱히 괘념치 않는 듯, 그러나 그로서는 그 내용 또한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그저 투정조로 말을 이어 왔다.

“에이― 재미없어. 좀 있다 찬성이하고 여자애들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서 놀자.”

“됐어.”

“무진이도 같이 갈 수 있는데에?”

“…….”

겉보기에도 놀기 좋아할 것 같은 찬성이라면 몰라도 제홍이 녀석도 여자애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는구나,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가볍게 고개를 젓는데, 문득 녀석이 무진의 이름을 던졌다. 그의 이름이 고래를 잡을 수도 있는 미끼쯤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걸음을 떼다 말고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권무진이 여자애들하고 노는데 뭐.”

그러나 나는 고래가 아니었다.

획 하니 고개를 돌리며 곧장 가방을 챙겨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가 버리자, 뒤에서 제홍의 ‘우우―’ 하는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바깥의 소음이 잠시 쏟아지다가 문이 닫힘과 동시에 다시 먼 거리의 그것처럼 잦아들었다. 닫힌 문 안쪽으로 무진이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여긴 뭐 손님이 들어와도 인사도 안 해?”

“…….”

“여기 사장 불러와.”

“무슨 일인데.”

어린놈이 벌써부터 꼰대 흉내를 내는 것이 볼썽사나워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하자, 무진은 상관치 않는다는 듯 키들거리며 걸음을 옮겨 카운터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러곤 껌이나 사탕 따위를 쓸데없이 뒤적이며 ‘그냥, 심심해서.’ 하고 뒤늦은 대답을 했다.

그러는 동안 또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두어 명의 손님이 들어왔다. 그들이 물건을 골라 카운터로 다가서자, 무진은 기지개를 켜며 발길을 돌리더니 진열대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손님들이 가져온 물건에 바코드를 찍고 거스름돈을 계산해 주면서도 온 신경이 그를 향해 있었다. 기어이 한번은 500원과 100원짜리 동전을 바꾸어 내주는 바람에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냉동고 쪽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던 무진이 때맞춰 힐긋 얼굴을 내밀곤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손님들이 모두 나간 후, 녀석이 멋대로 아이스크림 하나를 입에 물고 다시 다가왔다.

“야, 계산하고 먹어.”

“돈 내면 될 거 아냐.”

타박을 하자, 불퉁한 얼굴을 하고선 다시 뒤돌아 진열대에서 무언가를 집어 왔다. 그리고 카운터 위로 지갑과 함께 털썩 던져 올리는 것의 정체는,

“…미성년자한테는 안 팔아.”

“계산이나 해.”

성인용 잡지와 콘돔 한 세트였다.

나는 잡지 표지 위로 묵묵한 눈길을 떨어뜨린 채 여자들이 가슴골을 드러낸 채 엎드려 있는 모양을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마 위로 빤히 느껴지는 그의 시선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고집을 읽곤 결국 바코드를 찍었다.

그리고 그의 지갑에서 직접 카드를 꺼내어 계산을 하는데, 그런 나를 뚫어져라 직시하던 무진이 문득 손끝으로 사진 속 여자의 가슴골을 은밀하게 더듬어 보이는 것이다.

“…개 같아.”

계산을 마친 카드를 다시 그의 지갑 안에 끼운 뒤 바로 카운터 위로 슥 밀어 주며 나는 냉랭한 감상을 뱉었다. 그러자 당장 날카로운 반응이 돌아온다.

“뭐야?”

“이 여자 자세가 말이야.”

눈길을 돌린 채 카드단말기의 롤지를 교체하며 나는 덤덤히 덧붙여 설명했다. 납득한다는 듯 무진은 이내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편의점 안을 두리번거리고는 대뜸 카운터 안쪽까지 들어오려 했다.

“뭐 하는 거야. 나가.”

“싫어, 만지고 싶어졌어.”

“…….”

단호히 제지하다 말고, 그 노골적인 말에 나는 또 버릇처럼 얼른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비껴 버렸다. 가까이 다가서던 그 또한 순간 멈칫 멈춰선 채, 왜인지 심술궂은 얼굴로 ‘흥.’ 소리를 내곤 마저 걸음을 옮겨 왔다. 그리고 내 뒤로 바짝 붙어선 채 기다란 두 팔로 와락 허리를 감싸 안는다.

“…하지 마, 방해 돼.”

한쪽 어깨 위로 그의 턱이 툭 얹어지고, 목덜미에 시큰한 숨결이 와 닿았다. 그리고 이윽고 허리를 감싼 두 손이 슬금슬금 앞치마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한다.

“얌전하게 굴기로 했잖아.”

어깨를 뒤채며 저지하자, 그는 권총을 가누듯 내 관자놀이에 바짝 입술을 붙인 채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동안 멋대로 내 밋밋한 배나 가슴 따위를 손바닥 가득 문질러 댔다.

그는 그날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빌미로 하여 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싶어 했다. 나는 그의 협박처럼 무진이 그 일을 경찰이나 학교 측에 고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런 내 생각을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그에게 끌려다녔고, 그는 거침없이 악독한 난봉꾼처럼 굴었다.

“아……!”

유니폼 티셔츠 위로 느껴지는 그의 손길이 좀 더 집요해졌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정확히 유두를 노리고 문질러 대는 것에, 나는 이상한 소리를 내 버렸다. 그가 귓바퀴 뒤에서 소리 없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 말라고… 했잖아…!”

결국 몸을 세게 뒤채며 그를 밀쳐내다, 붙들고 있던 영수증 롤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영화 시상식의 카펫처럼 롤지는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길게 늘어져 하나의 선을 만들었다.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주워. 너 때문이잖아.”

“…….”

척하니 내밀어진 내 손끝에서 역정 섞인 고집을 읽었는지, 무진은 어쩐지 순순히 무릎을 굽혀 펼쳐진 롤지의 심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지루한 표정으로 빠르게 손을 움직여 돌돌 롤을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원래의 상태로 만들어 낸 후 카운터 위에 쿵, 소리 내어 얹고는 바짝 다가선 채 위협적으로 속삭여왔다.

“한 번만 더 나한테 이딴 거 시키면 너 진짜…….”

그러나 나는 ‘너 진짜’ 뒤로 잘려진 말에 대해서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그 역시 내가 별반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갑자기 피식 웃어 버리곤 다시 내 등허리로 양팔을 감으며 바짝 들러붙었다. 그리고 사뭇 은근한 목소리로 짐짓 내밀한 요청을 해 왔다.

“큰형이 살다가 유학 가면서 비어 있는 오피스텔이 있어. 거의 내가 쓰는데… 가자, 여기서 가까우니까.”

“…….”

그가 최종적으로 내게 무얼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게, 무서웠다. 마지막까지 그가 내 모든 것을 탐하고 나면, 그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할 때면 나는 마음이 작게 오그라들고 우울해졌다. 그런 내가 싫고, 무서웠다.

“싫어.”

“…….”

짧게 대꾸하자, 그 역시 포기가 빨랐다. 무진은 획 하니 내 등 뒤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카운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의 뒤꿈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어느새 맞은편에 와 서는 것에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불만 그득한 그의 얼굴이 한쪽으로 삐뚜름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 기울기와 딱 어울릴 만큼, 한쪽 입꼬리를 비죽 치켜올리며 그가 홀연 입을 열었다.

“그럼 난 이만 가야겠어. 애들이랑 약속이 있어서.”

“…….”

문득 제홍이 말했던, 여자애들과의 미팅이 떠올랐다. 한번 떠보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고만 있었다.

한동안 그런 내 머릿속을 투시라도 하듯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말끄러미 응시하던 무진이 이윽고 반대편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돌연 성인 잡지를 내 앞으로 슥 내밀며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을 붙인다.

“이건 네 거.”

바로 앞에 놓인 선정적인 사진을 힐긋 내려다보다가 도로 고개를 들자, 그는 손가락 사이에 콘돔 박스를 끼운 채 내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이건 내 거.”

그리고 그것을 한 손으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심드렁히 돌아서더니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딸랑, 사납게 문이 열렸다 닫혔다. 종소리는 오래 울렸다. 그가 셔츠 위로 문질렀던 가슴의 돌기가, 마치 누군가 짧은 손톱으로 확 긁어 버린 것처럼 뜨끔했다.

‡ ‡ ‡

비록 내가 그들 각자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성격까지를 매치해 알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와 그 네 명의 바보들과의 거리에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같은 반인 제홍을 제외하곤 모두 점심시간 때 옥상에서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럴 때마다 현찬성은 불량배처럼 건들거리며 여지없이 옥상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또 그때마다 제홍이 뜬금없이 ‘쟤 진짜 예쁘지?’ 하고 속닥거리면 거리낌 없이 ‘응.’ 대답했으며, 뒤편에 조용히 서 있던 지석운은 손끝으로 무테안경을 슥 올리며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곤 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물탱크 곁의 그늘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제 햄버거나 도시락 등을 먹어 치우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나는 멀찍이 떨어진 곳의 난간에 기대어 운동장 아래를 내려다보며 편의점에서 가져온 유통기한이 지난 싸구려 샌드위치로 배를 채우곤 했다.

단 하나의 접점은 무진이었다. 그는 수업 예비종이 울리면 다른 바보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먼저 아래로 내려보내고,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은 협박 따위를 내세워 내 몸을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곤 했다.

스스로 성적으로 담백한 편이라 자신했던 나는 다른 이의 손에 몸을 맡기는 쾌감에 조금씩 마모되어 갔다. 마모되어, 생생한 신경세포가 드러났다.

나는 한 번도 성인 잡지나 영화를 보며 자위를 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의 허벅다리 위에 앉아 스스로 교복 셔츠를 들춰 올려 밋밋한 가슴을 그에게 내밀어 보이는 것에 대한 수치를 알지 못했다.

그가 기타 줄을 뜯듯 손끝으로 내 앙상한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게걸스레 내 가슴을 핥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달뜬 호흡과 몸속을 아우르는 이상한 열기는 단지 뜨거워지는 계절에 따른 영향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처음 수치를 느낀 것은, 어느 새벽이었다. 사춘기 시절의 몽정이야 이미 경험되어 왔으니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새벽에 깨어난 나는 몽정 속 주인공의 얼굴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잠귀 밝은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욕실에서 조심조심 더러워진 속옷을 손빨래하는 내내, 귓바퀴가 아플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지만, 그때, 조금 울었다.

‡ ‡ ‡

“아…… 이제 그만해.”

여느 때처럼 포만감으로 가득 찬 얼굴로 무진이 마지막 디저트처럼 느긋하게 내 몸을 핥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로 걸친 두 손을 뻗어 난간을 붙든 채 버티고 있다가, 돌연 헐렁한 바지의 허리춤 안으로 불쑥 침입하는 난폭한 손길에 나는 기어이 저항의 말을 뱉었다.

“…씨발.”

그리고 퍼뜩 뒤로 물러앉는 나를 보며 무진은 와락 찌푸린 얼굴로 낮게 욕설을 뇌까렸다.

“더럽게 깐깐하게 구네.”

“…….”

그가 내 몸을 희롱하는 범위에는 당연히 바지 안쪽까지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새벽의 몽정 이후로 나는 그의 손길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빈약한 둔부 가득 손바닥을 얹고 살집을 그러모아 주무르는 것 따위는 내내 당해 온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검지 하나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어디인지, 그래서 내가 결국 어떤 얼굴로 어떤 소리를 내게 될지, 그 새벽의 몽정이 보여 준 것이었다.

내가 상상하는 삽입은 합일의 통관절차가 아니라 파괴의 한 모습일 뿐이었다. 절실히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그에 의해 파괴되어 죽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래도 곧 죽을 것 같았다.

“일어나, 날라리. 수업 종 쳤어.”

풀어헤쳤던 자신의 옷가지를 어느새 말끔히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무진이 곁눈을 던지며 말했다. 나는 난간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저벅저벅 걸어가 녹슨 철제문을 사납게 열어젖히고 실내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쥐가 난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철제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아직 고작 한층 계단의 절반쯤에 다다른 채 뒤를 힐긋거리고 있는 것이다.

안심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퍼뜩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난간을 붙잡고 한 걸음씩 발길을 옮기자, 그 역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 버린다.

“쥐 났어?”

저릿한 다리를 주무르며 겨우 복도 아래까지 내려서자, 마침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던 무진이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그는 젖은 손을 탁탁 털어 말리며 무뚝뚝하게 이어 말했다.

“코에 침 발라.”

“뭐?”

“혀로 손가락 끝 먼저 핥고 말이야, 그걸 코끝에 바르라고.”

“…….”

그러나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불퉁한 얼굴로 다시 횅 하니 앞서가 버렸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언뜻 혀로 핥은 손끝으로 가만히 코끝을 눌러 보았다.

그런데 그때, 앞서가던 무진이 무어라 말을 꺼내며 얼핏 고개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꼴을 확인하곤 우뚝 멈추어 서 버리기까지.

“…….”

“…….”

딱히 비웃지는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여전히 저릿했다. 왠지 불만 그득한 얼굴로 그런 내 다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무진 역시 이내 고개를 돌리곤 앞서 걸으며 무심한 말을 건넸다.

“고양이 소리 내 봐.”

“뭐?”

“쥐 났잖아.”

“…유치해.”

나지막하게 대꾸했는데 들었는지, 앞서가던 그의 어깨가 조금 들썩였다. 그런 그의 어깨를, 와글와글 웃고 떠들며 복도를 뛰어가던 아이가 털썩 건드렸다.

그에 무진이 금세 사나운 눈초리로 돌아보며 불량스럽게 턱을 내밀어 보이자, 동년배임에도 상대는 질린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곤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수업 종이 울렸는데도 복도는 소란스러웠다. 아이들은 마지막 발악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복도 한쪽 끝에서 저 끝까지 뛰어다녔다.

그러나 무진과 내가 두어 걸음쯤 거리를 둔 채 걷는 것을 힐긋거리는 시선에는 심상찮은 적요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또한 느꼈는지, 자신의 교실 앞에 먼저 당도한 무진이 안으로 들어서기 직전, 문득 뒤를 돌아보며 악마 같은 얼굴로 말을 던졌다.

“소문 흘렸거든, 내가.”

“…무, 무슨….”

뱀처럼 서늘해지는 그의 눈빛에 일순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흩어져 나오는 내 물음에 대한 답을 그는 정확히 하지 않았다. 대신 비식 웃음 짓는 그의 입가에서 그 소문이라는 것이 나와 연관되어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머릿속에서 빨간 등이 켜졌다. 온몸에 쥐가 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 심상찮은 상태를 보며 무진은 지루하다는 듯 짙은 눈썹을 꿈틀거려 보이곤 ‘쯧’ 혀를 찼다. 그리고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주먹으로 내 한쪽 어깨를 툭 치고는 여상스러운 말투로 이어 지껄였다.

“오늘 아르바이트 없는 날이지? 마치고 우리 집에 가자.”

“…….”

“겁먹지 마. 그 빈 오피스텔 말고, 우리 집, 본가 말이야. 그냥 같이 시험공부나 하자고. 너 공부 잘하잖아, 과외비 줄 테니까 나 좀 가르쳐 봐.”

“무슨 소문을… 뭐냔 말이야.”

등 뒤로 아이들의 소란이 차츰 잦아들었다. 복도 맨 끝에서 벌써 교사들이 하나둘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그를 온 힘을 다해 쏘아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나 무진은 가소롭다는 듯 그저 피식 웃으며 헛소리를 지껄일 뿐이었다.

“고양이 소리 내 봐. 그럼 가르쳐 줄게.”

힘껏 말아 쥔 주먹으로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말해. 무슨 소리냐고, 그게.”

“멍청한 놈들이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내가 알 게 뭐야.”

가슴을 들썩이며 재촉하자, 더 이상은 피곤하다는 듯 무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뭉그러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목 안이 조여 와, 나는 더 이상 따져 묻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소란처럼 내 가슴의 들썩임도 차츰 잦아들자 무진은 손끝으로 내 가슴께를 꾹 밀어내며,

“수업 마치면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갈 테니까.”

말하고, 교실 문을 닫았다.

‡ ‡ ‡

“확실하게 말해. 정말 아무것도…….”

그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 안으로 들어선 후, 내게는 공원의 그것처럼 보이는 초록의 정원 길을 따라 걸으며 나는 이윽고 또 그 소문의 진상에 대해 꺼내어 물었다.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무진이 짜증 그득한 얼굴로 힐긋 곁눈을 흘겼다. 그러나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쯧’ 혀를 차곤 이내 빠르게 앞서 걸어가 버렸다.

집 안으로 들어서서는 누구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청이처럼 두리번거리자, 무진은 그것조차 번거롭다는 듯 내 손목을 우악스레 움켜잡고 곧장 이층 자신의 방으로 끌고 올라갔다.

시험공부라는 것은 역시 명목에 불과했고, 그는 나를 자신의 방에 데려다 놓고는 사식처럼 이것저것 음식을 가져와 먹이곤, 자신은 그저 게임기나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그가 가져다 준 샌드위치와 과일을 미련스럽게 모두 먹어 치우고, 이제 또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고 있자, 그는 그런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일만 할 뿐이었다.

게임 하나를 망치곤 신경질을 내며 게임기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이번엔 만화책을 집어 들곤 침대 위에 덜렁 드러눕는 것을 보고, 나도 차라리 그에게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리고 그와는 상관없이, 오늘 그의 집에 방문한 목적대로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좌식 테이블 위에 책을 펼쳐 놓고 털썩 바닥에 앉는데, 문득 뒤통수로 푹신한 무언가 던져졌다.

뒤돌아보자, 체크무늬의 쿠션이었다. 침대 위에서 그가 옆구리에 끼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

이걸 깔고 앉으라고 던져 준 것인지 어쩌라는 것인지 몰라 또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는 모른다는 듯 여전히 만화책을 뒤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옆에 놔두고 다시 돌아앉아 본격적으로 책을 보는데, 돌연 ‘에이!’ 괜한 신경질을 내곤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후 터벅터벅 다가온 무진은 자신이 던진 쿠션 위로 머리를 얹은 채 바닥에 벌렁 긴 몸을 뻗어 누웠다. 내 허벅다리로 그의 머리끝이 닿았다. 그것을 힐긋 쳐다보았다가 다시 책 위로 시선을 돌리자, ‘흥’ 하고 불만스런 소리를 낸다.

“…하지 마.”

그리고 역시 그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는 듯, 거리낌 없이 내게 손을 뻗어 왔다. 얼굴이나 목덜미 따위를 만지작거리는 것에는 귀찮아 그저 팔꿈치로 대충 물리치는 시늉을 했지만, 그게 심통이 났는지 그는 기어이 내 티셔츠 안까지 손길을 뻗었다.

“하지 마.”

같은 말을 반복해 말렸으나, 그는 집요하게 내 별 볼 것 없는 허리께나 가슴을 문질러 댔다. 그리고 명백한 희롱조로 손끝에 걸리는 유두를 은밀히 매만지기까지 했다.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유두가 뾰족하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장난감처럼 손끝으로 둥글게 굴리며 그가 휘파람 소리를 냈다.

탁.

이윽고 나는 그의 손등을 매섭게 쳐 내 버렸다.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무진이 입술을 실룩이며 아래에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외면하며 나는 서둘러 샤프 꼭지를 짤깍짤깍 눌러 심을 빼내었다. 그러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 위로 밑줄을 긋고 둥근 원을 그렸다.

그 사이, 무진이 짜증을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엔 내 뒤쪽으로 바짝 몸을 붙이고 앉았다. 졸지에 그의 허벅다리 사이에 갇힌 나는 펼쳐진 페이지 위로 샤프심을 꾹 누른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 하지 마…….”

머저리처럼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뒤에서 내 귓바퀴를 앞니로 잘근 물며 무진은 소리 없이 웃었다. 허리께를 둘러 감은 양손으로는 티셔츠 안이며 헐렁한 바지 안을 느긋하게 더듬어 왔다.

이미 잔뜩 자극받아 꼿꼿해진 유두를 한 손으로 여유롭게 꼬집듯 매만지며, 다른 한 손은 기어이 속옷 안쪽까지 침입해 들어오는 것에 나는 허리를 비틀며 저항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벌을 주듯 내 귓바퀴를 더 세게 물 뿐이었다.

“아……!”

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공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그는 집요하게 내 몸을 훑었다. 어느새 바지 버클이 내려갔다. 속옷을 사이에 두고 그는 삐죽 발기한 내 성기를 덥석 붙잡았다. 숨을 급히 들이키는 바람에 쇳소리 같은 것이 났다.

힘이 빠진 내 몸을 돌려 앉히며 무진이 급하게 입을 맞추어 왔다. 놀라 입을 벌린 사이 그의 혀가 다급하게 쳐들어왔다. 내 입천장을 두드리고, 잇몸을 핥고, 혀뿌리까지 집요하게 빨아 댔다. 입안이 얼얼했다.

요령이 없어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턱밑으로 지저분하게 침을 흘리기까지 했다. 만족한 듯 잠시 떨어진 무진이 그런 내 턱을 혓바닥으로 샅샅이 핥아 냈다. 그리고 내가 물러서려 하자, 손목을 아프게 틀어잡고 나직하게 속삭여 왔다.

“내가 힘으로 너 누를 수도 있었어. 언제, 어디서든.”

“…왜 그렇게 안 했는데.”

곧게 응시해 오는 시선에 홀린 기분으로 나는 쓸모없는 물음을 했다. 기어코 내 사타구니로 손을 뻗어 오던 그는 갸웃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걸 모르겠어.”

“…하지 마.”

“샤프 들고 있잖아, 정말 싫으면 그걸로 날 찔러.”

애원조로 속삭이는 거절에 어느새 또 형형한 야생성이 느껴지는 눈빛을 번득거리며 무진은 흡사 영화 속 희대의 연쇄살인마처럼 야비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계속 샤프를 손에 꼭 움켜쥐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제야 힘없이 테이블 위로 도르륵 샤프를 놓쳐 버렸다. 그것을 힐긋 쳐다본 무진이 씩 웃으며 물었다.

“넌, 왜 그렇게 안 하는데.”

나도 그걸 모르겠어. 나는 소리 내어 답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비껴 그의 어깨 너머로 망연한 눈길을 던질 뿐이었다.

“못 참겠어.”

그리고 무진이 곧장 몸을 덮쳐 왔다. 쿵, 바닥에 머리를 찧었지만 그는 괜찮으냐고 묻지도 않았다.

“…지금이 그 ‘언제, 어디서든’의 중점이야?”

“평소엔 말도 없는 주제에 하필 입 열 때마다 그따위야, 넌.”

목덜미를 잘근거리는 그의 이마를 떠밀며 묻자, 무진은 귀찮은 투로 타박을 했다. 그리고 바쁜 손길로 내 평평한 상체를 더듬다가, 또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아래로 손을 내렸다. 나는 얼른 바지춤을 단단히 여며 잡았다. 그것을 본 무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짧게 명령했다.

“벗어.”

“싫어.”

“…….”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훅 내쉬는 그의 숨이 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었다. 곧이어 그는 내 양쪽 어깨를 짓누른 채 게으른 맹수처럼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우둑, 물렁뼈 어긋나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정말 지금이 그 중점인 것 같은데. …힘으로 누른다.”

“아……!”

그는 경고한 그대로 다짜고짜 힘으로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허벅다리 위를 지근지근 밟아 대는 그의 무릎에 나는 결국 바지춤에서 손을 거둬야 했다. 그의 입가로 경쾌한 획이 그어졌다. 그리고 손쓸 틈도 없이 바지와 함께 속옷이 훌렁 벗겨져 나갔다.

“흐으……!”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무너졌을 것이었다. 그가 내 두 발목을 단단히 그러쥐고 양쪽으로 활짝 벌리는 것까지 보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손바닥 가득 얼굴을 덮어 버렸다.

엉덩이가 높이 들려지고, 내 등허리 뒤로 그가 자신의 무릎을 찔러 넣은 채 자세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기우뚱 기우는 것을 막느라, 나는 서둘러 얼굴에서 손을 치워 바닥을 짚어야 했다.

“겁먹지 마.”

드러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겁에 질린 얼굴 따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지만, 실상 나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가슴은 물론이고 복부까지 들썩였다. 그러나 무진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그가 호주머니에서 연고처럼 보이는 것을 꺼내었다. 그리고 재빨리 뚜껑을 열어젖히고 내용물을 손끝에 가득 묻혀 내 아래로 손을 붙여 왔다. 단단히 맞물린 틈을 가르며 그의 손가락이 무자비하게 침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아!”

여과 없이 아픈 소리를 내지르며 나는 짐승처럼 그의 얼굴 앞으로 두 손을 휘둘러 댔다. 그러나 내 짧은 손톱은 그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상처 입히지 못했다.

내 손톱을 피해 뒤로 조금 고개를 물렸던 무진이 비죽 웃으며 ‘쓸데없는 짓.’ 하고 지껄였다. 그리고 발버둥치는 내 다리를 좀 더 바짝 들어 올리곤 자신의 양 어깨 위로 털썩 얹어 놓았다.

“아흐으… 그, 그만…….”

자비심도 없이 손가락을 늘이는 짓거리에 나는 결국 다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애원해야 했다. 뻑뻑한 근육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난폭하게 들락거리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안쪽으로 침입한 손끝이 갈퀴처럼 연한 속살을 긁는 것에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 그가 손바닥으로 내 엉덩이를 따귀처럼 철썩 때리는 것이다.

“얼굴 가리지 마. 소리도 죽이지 말고. 어차피 여기 아무도 안 올라와.”

놀라 휘둥그레진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기죽은 듯 축 늘어져 있는 내 성기를 덥석 움켜잡았다.

“읏!”

삽시에 발끝이 저릿했다. 그의 어깨 위로 올려진 내 종아리가 단단히 긴장하는 것을 느낀 무진이 씩 웃어 보이며 두 손을 함께 움직였다.

“으, 흐으……!”

앞뒤로 관통당하는 기분에 나는 열없이 흐느적거렸다. 허리가 멋대로 들썩였다. 내 성기를 빠르게 훑는 그의 손길에 뒤를 무자비하게 넓혀 대는 감각도 잊었다.

목 안에서 방울이 달랑거렸다. 끔찍한 신음이 콧등 위에서 흘러나왔다. 까무룩한 시선 속에서 무진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시는 것이 보였다. 그 혀를 앞니로 물어뜯고 싶었다.

“흐으, 으, 읏!”

그러나 내가 한 것은 고작 엉덩이 근육을 단단히 경직시킨 채 파르르 떨며 내 복부 위로 정액을 쏟아 내는 일이었다. 경악으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무진은 더러워진 내 복부를 빤히 내려다보며 왜인지 입을 꾹 다문 채 웃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잠시 내 몸을 놓아주곤 서둘러 서랍 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다급한 손길에 서랍 한 칸이 통째로 빠져나와 안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나는 급하게 몸을 돌려 무릎걸음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아!”

그러나 두 걸음도 채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게 뒷머리를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사나운 손길로 나를 도로 돌려 눕혔다. 그리고 두 다리를 찢어발길 듯 활짝 벌려 잡은 채 자신의 양쪽 어깨 위로 걸쳐 놓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취한 듯 붉으락푸르락했다. 목이 타는지, 침을 삼켜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것도 유난히 크게 확장되어 보였다.

그리고 부스럭대며 다급한 손길의 기척에 얼핏 눈길을 내려다보자, 이미 바지 버클이며 속옷을 모두 내린 그가 흉흉하게 드러난 자신의 검붉은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있는 것이다.

“…하, 하지 마….”

“얌전하게 굴어.”

닿지 않는 거리임을 알면서도 그의 가슴께로 손을 뻗어 가로막으며 말하자, 무진은 그런 내 손을 붙잡고 손가락 끝을 약하게 물었다 놓아주며 경고했다. 그리고 곧바로 내 허벅다리 안쪽을 단단하게 붙들고 자세를 곧추세웠다.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에 무진이 다시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힘 빼.’ 명령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 무진은 곧장 한 손으로 내 아랫구멍을 잔뜩 벌린 채 자신의 귀두를 접합시켰다.

“아, 아아……!”

“읏! 힘… 빼라고 했어…….”

지체 없이 꾹 밀려들어 오는 거대한 힘에 나는 턱을 바짝 치켜세운 채 신음을 삼켰다. 그 역시 힘이 들었던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그런 나를 닦달했다.

그러나 내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자, 짜증 그득한 얼굴을 하고선 갑자기 답삭 허리를 숙여 내 몸통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인공호흡 같은 키스가 이어졌다.

나는 끅끅대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래에서는 그가 끊임없이 치밀고 들어왔다. 질끈 감은 눈가를 축축이 적신 무언가 끝내 귀 뒤로 뚝 흘렀다. 나는 내가 울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한참 후 내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생각했는지, 무진은 다시 허리를 곧추세운 채 손바닥으로 내 허벅다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 마른 허벅다리 안쪽과 맞물려 비벼지는 것은 어느새 그의 허리께로 바뀌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콘돔을 씌운 그의 성기가 칼날처럼 내 몸을 반으로 잘라 내는 것만 같았다.

“좀 더… 힘 좀 빼 봐… 씨발, 조여….”

“아… 아파… 그만, 제발 그만 좀… 아파….”

나는 손을 뻗어 닿는 그의 팔뚝을 복수처럼 할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아프지 않은지 오로지 자신의 성기에만 몰두해 있는 얼굴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문득 그를 용서해 주고 싶었다. 무엇으로든, 어떻게든. 그래서 그의 말을 따라 조금씩 몸에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발끝부터 서서히 긴장을 풀자, 그 역시 안간힘을 쓰며 밀어붙이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어 왔다.

“…….”

그제야 내가 울고 있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는 곧장 내 얼굴로 손을 뻗어 와 젖은 뺨을 투박한 손바닥으로 슥 훑으며 닦아 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장난을 치듯 끝까지 삽입된 상태에서 은근슬쩍 허리를 문질러 왔다.

“읏!”

안쪽 가득 묵직하게 들어찬 것에서 돌연 고리 같은 것이 찰칵 감기는 감각을 느낀 것을 그때였다. 역시 그러한 낌새를 챘는지, 무진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며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고리를 잠그듯 몇 번 더 허리를 들썩였다. 어깨가 간지러웠다. 그러나 여전히 아팠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이를 악문 채 그저 고개를 젓는 동안, 무진은 좀 더 수월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펴졌다 반복했다.

“아아… 죽인다… 흐읏…!”

낯 뜨거운 감상을 지껄이며 그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목덜미 중앙에 툭 튀어나온 울대뼈를 바라보다가, 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얼른 시선을 옮겼다. 그의 어깨 위에 매달려 힘없이 달랑거리는 내 발목.

“아… 아파… 이제 그만….”

고통을 잊으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고리가 채워지는 감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한 아픔에 묻혔다. 나는 그의 팔뚝 대신 방바닥을 긁어 대며 울었다. 열에 들뜬 그가 내 안으로 들었다 나갈 때마다 속살이 뜯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문득,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러 방바닥을 긁어 내던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그가 뜯어서 버린 콘돔 포장지였다. 그것은, 그가 편의점에서 사 간 것이 아니었다.

툭, 그의 얼굴을 향해 나는 그것을 힘껏 던져 버렸다.

“…….”

포장지의 모서리로 그의 뺨에 붉은 생채기가 그어졌다. 놀란 얼굴로 언뜻 멈춰선 무진이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힐긋 쳐다보곤, 입술을 실룩이며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양쪽 어깨를 단단히 그러쥐곤 단번에 꿰뚫고 들어왔다.

“아!”

“너 많이 봐주고 있는 거야, 정도껏 기어올라.”

엉덩이에 그의 음낭이 진득하니 비벼질 만큼 무진은 바짝 몸을 접한 상태로 치근덕거리며 위협조로 경고했다. 나는 크게 벌린 입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미 넓게 벌려진 내 양쪽 다리를 그는 더 높이 치켜 올리며 활짝 벌려 잡았다. 그리고 훈련되지 않은 사나운 말처럼 난폭하게 움직여 댔다. 내 속의 고리에 대한 감각은 이제 완전히 잊혀졌다.

나는 내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에 들뜬 신음을 흘리는 무진을 올려다보며 관용과 복수의 상반된 감정이 이마를 절구처럼 찧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경주마처럼 빨리 달리던 그가 갑자기 욕설을 뇌까리며 불쑥 떨어져 나갔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그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성기에 씌워진 콘돔을 벗겨 내곤 다시 내 발목을 붙잡아 벌리며 다가왔다.

고개를 저어 보였지만, 그는 오롯 시선을 내 아랫도리에 붙박은 채 또다시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나는 결국 발꿈치로 그의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아!”

짧게 소리치며 그가 주춤 물러났다. 그 틈에 서둘러 몸을 돌려 무릎걸음으로 도망을 쳤지만, 이번에도 역시 얼마 가지 못해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나를 다시 똑바로 돌려 눕히지 않았다. 네발짐승처럼 엎드린 채 나는 그에게 범해졌다. 뒤에서 무자비하게 꿰뚫고 들어오는 것에, 나는 바닥에 이마를 기댄 채 견뎌야 했다. 문득 내가 성인 잡지의 표지 모델을 향해 무어라 말했는지 기억해 냈다.

개 같아, 개 같아, 개 같아.

그리고 마침 내 등 뒤로 바짝 몸을 붙여 온 무진이 내 귓바퀴를 물어뜯으며 그르렁거렸다, 개처럼.

울음인지 웃음인지, 무언가 악다문 입가로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내 등 뒤에서 물러난 무진은 이제 내 허리께를 바짝 붙들어 잡은 채 가쁘게 신음하며 절정을 향해 사납게 추잡질을 해 대었다.

일순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리고 잠시 후, 손바닥 가득 그러잡은 내 엉덩이를 욕심껏 벌려 댄 무진이 깊이 몸을 묻은 채 드디어 토정을 했다.

내 안에서 그의 정액이 왈칵 쏟아지는 것이 끔찍하리만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직장을 가득 채우는 그 충만감, 그것에 나는 또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등 뒤에선 무진이 달뜬 숨을 내뱉으며 내 몸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온몸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팠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은 엉망이었다. 변기 레버를 누르자, 붉은 핏덩이와 함께 오물이 회오리치며 내려갔다. 그 속에는 그의 정액도 들었으리라.

한 번 더 아래를 씻어 내고 수건으로 닦아 냈지만, 흰색의 그것에 여전히 불그스름한 흔적이 묻어나왔다. 결국 드라이어로 대신 물기를 말리고, 무진이 던져 준 연고를 손끝에 묻혀 조심조심 상처 부위에 발라 두었다.

이렇게 해서 상처가 아물까. 그럼 그동안 화장실은 어떻게 다녀야 하는 걸까. …다음에 또, 아니, 매번 할 때마다 이렇게 찢어지는 걸까…….

거울 속의 나는 울어서 부은 것 외에도 어딘가 얼굴이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문득 어릴 적 들었던, 성관계를 자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표식이 얼굴에 나타난다던 속설이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빠른 성관계에 대한 수치와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어른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이거나 혹은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성적 호기심을 배척하기 위해 만든 것이겠지만, 나는 다시 차가운 물을 틀어 벌써 다섯 번째 세안을 했다.

발긋해진 얼굴로 욕실 문을 나서자, 곧바로 보이는 침대 위에서 무진이 태평하게 누워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책과 샤프, 그리고 내 교복 단추와 그가 내던진 콘돔은 그대로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삐꺼덕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내 물건만 따로 챙겨 가방에 넣었다. 무진은 그런 내게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관계 전에 뒤적이던 만화책을 다시 집어 들곤 딴청을 피웠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정원이나 집 안에도 사람이 꽤 여럿 있던 것을 보았는데,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는지 우리가 입을 다물자 온통 정적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멀리서 커다란 대문이 열리며 끼이익― 음산한 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그에 비로소 무진이 반응을 보였다.

역시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인지, 만화책을 다시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곤 그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 커다란 창가로 바짝 붙어선 채 꼼짝 않다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는지 ‘에이……’ 소리를 내며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휙 닫아 버렸다.

“…누군데.”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나는 마주 본 그를 향해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싫은 기색이 그득한 얼굴로 무진이 대답했다.

“둘째 형이라는 놈.”

“…….”

“보지 마, 재수 없는 자식이야. 보면 네 눈이 썩을 거다.”

그저 달빛에 젖은 정원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어 창가로 다가섰을 뿐인데, 그는 날 선 반응을 보였다. 우뚝 멈추어선 채 가만히 있자, 그 역시 등으로 창가를 가린 채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마주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이제 되었다 싶었는지 그는 그만 커튼을 걷고 발길을 옮겨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던져 눕고는, 내게는 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낫다 생각했다. 이제 와 괜찮으냐 물으며 어설프게 사과하고 위로하려 든다면, 정말 개처럼 그의 팔뚝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었다.

숫제 홀가분하게 밤의 정원을 감상하기 위해 나는 쭈뼛대며 창가로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문득 뒤에서 퉁명한 목소리가 던져졌다.

“이제 가 봐.”

“…….”

“여기서 자고 갈 거 아니잖아.”

뒤돌아보자, 그는 여전히 내게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였다. 눈두덩 안쪽이 후끈 달아올랐다. 위로 따윈 싫지만, 이런 식의 취급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형편없이 느껴졌다. 수치스럽고 불쾌하고 역겨웠다.

인사하지 않았다. 가방을 챙겨 들고 곧장 방문을 나서서 1층으로 내려갔다. 혹여 그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듯한 그의 둘째 형을 만나면 예의 바르게 웃으며 인사 건네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추측되는 사람은 마주치지 못했다.

다리는 생각만큼 빨리 움직여 주지 않았다. 다행히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다만 거칠게 터져 나오는 숨을 간신히 다스리며, 감상다운 감상도 하지 못하고 나는 긴 정원을 절뚝이며 빠져나왔다. 어둠 속에서 더 거대해 보이는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엔 왠지 얼핏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끔찍한 둔통을 무시하며 내리막길을 저벅저벅 걸어 내려가는 때였다. 언뜻 뒤에서 대문이 사납게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편의점. 생수 사러.”

가쁜 숨을 다스리는 목소리로 무진이 등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고집스레 앞만 보며 걸었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길을 걸었다.

문득 골목 저 끝에서 세단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빛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무진이 내 발목 부근을 툭 걷어차며 구석으로 몰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순순히 길가로 옮겨 걷자, 그 역시 주춤주춤 곁으로 다가와 붙었다. 그런데 잠시 후 가까이 다가오는 자동차를 확인한 무진이 움찔 놀라며 벽 쪽으로 획 하니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뭐야, 또 누군데.”

“아버지… 같은데.”

곁을 지나간 자동차의 꽁무니를 힐긋 돌아보며 퉁명스레 묻자, 그는 조금 겸연쩍은 듯 대답했다. 그 생소한 모습에 어쩐지 비틀렸던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았다.

뒤를 흘깃거리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완전히 사그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무진은 훅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골목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가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그 곁으로 다가서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서워?”

“무섭다기보다는…….”

그는 말끝을 흐리며 비식 웃었다. 무서워하는 것보단 좋아하고 존경하는 쪽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 같았다. 왠지 나는 다시 우울해졌다. 그런데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가 그런 나를 힐긋 살피며 ‘어.’ 소리를 냈다.

“너 웃는 거 처음 본다.”

“…….”

그랬던가. 그와 함께 있으면서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나, 생각하다가 다시 피식 웃어 버렸다. 스스로도 얼굴 근육이 이대로 굳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원래 잘 웃지 않는 성격이기도 한 데다, 그래서 화난 것 같다는 오해도 종종 받곤 했었다.

“웃으니까 되게… 못생겼네.”

“…….”

“웃지 마.”

조금도 좋은 하루가 아니었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시간이었다. 권무진은 짐승처럼 나를 강제로 범했고, 그건 차라리 폭력에 더 가까웠으며, 웃음만큼 눈물도 없던 나는 많이도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머저리처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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