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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 Rose and Castor (47/47)

외전 6. Rose and Castor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느리게 눈이 깜빡깜빡 움직였다. 선명한 눈동자는 곧 커다란 손에 가려졌다. 자신의 얼굴을 나른하게 문지른 남자는 고개를 기울였다.

깜빡이는 눈동자는 세상에 처음 뜬 태양처럼 아주 아름다운 금색이었으나 동공에 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천 번 깜빡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이 언제였더라. 이제는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었다. 수백 년, 어쩌면 천년일지 모를 시간을 살아온 남자에게는 시간을 세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그에게는 모든 시간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아니, 느린 것이 아니라 정체된 것. 세상은 항상 그를 제외하고 흘러갔으며 변해 갔다. 당연했다. 그 홀로 시간을 반복했으니까.

아무리 반복해도 시간이란 참 신기하여 항상 많은 것이 변했다. 친구였던 자가 적이 되었다. 적이었던 자가 동료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알게 된다. 적도 친구도 동료도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사람들은 반복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주신의 신관, 그중 가장 강한 신관만이 겪는 「주신의 저주」. 그는 역대 이 저주를 앓던 이들이 모조리 미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끝이 어땠다고 하더라.

그래, 모두 너절하게 생을 마무리했겠지.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사랑하는 이를 제 손으로 전부 죽여야 하니까. 그런데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도록 강해진 자는 어찌해야 하는가. 힘이 강해지고 강해져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자는?

이전에 「주신의 저주」를 앓았던 이들은 강해지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타고나길 나라를 멸망시킬 운명을 가졌던 남자다. 결국 그는 선황의 욕심과 결부되어 최악이라 불릴 만큼 강해지고 말았다.

죽음으로부터 외면받은 인간. 선황이 멸망을 막기 위해 만든 괴물이 바로 그였다.

카스토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 여인이 그에게 걸어 놓은 저주였다. 그녀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에야 비로소 앞을 볼 수 있는. 그의 갈망이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았지만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이 멀어 버린다.

네가 보고 싶다고 생각할수록.

그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깜빡여도 원하는 사람이 앞에 보이지는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꺄아악!”

그때였다. 수풀 사이에서 커다란 비명이 들렸다. 새된 소리는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남자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분명 비명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표정이었다.

‘이쪽으로 오는가.’

타닥타닥. 다급한 발소리가 수풀을 밟았다. 이윽고 아주 가까이서 들리는 숨소리. 신관인 그에게는 바로 옆에서 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의 뒤를 쫓는 짐승이 있다.

한 마리…… 세 마리인가. 늑대가 있다.

남자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저벅저벅 걸어 수풀 사이로 걸어갔다. 그는 보이지 않았지만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파르르 떠는 소녀가 마구 나무줄기에 등을 밀었다. 그 앞을 세 마리의 늑대가 막고 컹컹 짖었다.

세 마리의 늑대는 연약한 먹잇감을 가벼이 여기고 이빨을 드러냈다. 어느 쪽이 달려들든 금방 물어뜯을 수 있기에 가장 오른쪽에 있던 늑대가 달려들 때였다.

“꺄악!”

아이는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뚝뚝.

눈을 뜨자 선명한 피가 보였다. 검을 든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바람에 남자의 긴 머리가 파도처럼 한들거렸다. 아이는 이처럼 새까만 머리칼을 가진 이를 보지 못했다. 그림자를 그대로 베어 사람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마치 도시 중앙에 세워진 동상보다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남자의 뺨에 알알이 튄 피는 오히려 하얀 피부를 도드라지게 했다. 남자의 감긴 눈이 느리게 뜨였다.

찬란한 태양을 녹인 듯 선명한 금색 눈동자가 긴 눈꼬리 사이로 반만 보였다 다시 사라지길 반복했다.

“……익숙한 상황이군.”

카스토르는 느슨히 고개를 기울여 말했다. 소녀가 딸꾹질했다.

그는 눈을 떴지만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주 아래에서 느껴지는 숨소리로 보아 허벅지까지 겨우 올 법한 아이임을 알아챘을 뿐이었다. 여자아이라는 것도 숨결이 미약하여 그렇지 않을까 추측했을 뿐.

카스토르는 소녀를 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아주 오래전 금지된 숲에서 아실리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짐승을 잡아 주었던가.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아 찬란하던 밀빛 금발을 떠올렸다. 보일 듯 말 듯 멀어지는 새하얀 얼굴도. 갈증을 대신하여 그가 자주 하는 행위였다. 이것이 갈증에 바닷물을 마시는 일이라 하여도.

너는 어디에 있을까.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미물을 잡는 데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짐승은 살기가 뚜렷해 검사보다 잡기 편했다. 신력을 쓸 필요도 없었으니.

그가 피범벅이 된 채로 생각에 잠긴 동안 타다닥, 발소리가 들렸다. 카스토르는 생각에 빠진 사이 아이가 도망가 버렸음을 알았다.

아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그의 기분에 따라 죽을 수도 있던 아이였다. 이는 그저 아이의 운이 따라 줬을 뿐이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기억 속에 스친 여인의 얼굴을 음미하기 위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니 저 작은 아이가 두려움에 사라져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이것이 착각이었음을 알았다.

* * *

“누구세요?”

카스토르는 살짝 눈을 떴다.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발 닿는 곳 어디든 헤맸지만, 가끔 과거를 회상하는 날에는 며칠이고 한자리에 머물렀다. 아실리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는 날은 귀중한 시간이니까.

눈을 떴으나 어린아이의 말에 대꾸해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가 가볍게 검을 쥐었다. 가지고 싶었던 단 하나를 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라는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화하는 쪽보다 좀 더 쉬운 쪽을 택하고자 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저씨가 아직도 이곳에 있다고.”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소리가 향하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타인이 보아선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지 않을 모습이었다.

아이가 말한 아빠라는 사람이라면 하루 전 이 주변을 서성이던 남자를 말하는 듯 했다. 아직 늑대가 어슬렁거리는 숲이기에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될 것인데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가 나서지 않아도 죽을 확률이 높은 생명이었다. 그러니 눈 감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녀를 되새기는 것으로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너는 왜 눈꺼풀 위로만 나타나는가.’

사람을 죽이는 데 무감각해진 건 아니다. 아니, 단 하나를 제외하면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기억은 영원하지 않아서 자꾸만 신기루처럼 아스라이 멀어지고, 선명했던 것도 물에 탄 듯 희미해져 간다. 이는 그녀가 남긴 흔적이다. 끝내 그의 기억에 머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게 되새기지 않으면 자꾸만 사라졌다.

그러나 불청객은 그가 집중하도록 두지 않았다.

“아저씨, 왜 눈을 감아요? 어디 아파요?”

그의 검은 번개처럼 눈앞의 아이가 조용해지도록 목을 잘라 버릴 수 있었다. 그가 그러지 않음은 단순히 변덕이었다.

“많이 아파요? 저 구하다가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서 카스토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카스토르는 피 흘리는 그를 증오스럽게 쳐다보던 아실리를 떠올렸다.

“아저씨?”

카스토르는 검을 내리며 권태에 물든 얼굴을 보였다. 모든 것이 그저 지루했다. 갈망은 더욱 커져만 간다.

“내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카스토르는 보지 못했지만 아이는 얼굴을 기울였다.

“치료요?”

“필요 없다.”

묘한 풀 내음이 난다 했더니 약초인 듯 했다. 그는 약초에 무지하지 않았다. 아니, 그가 무지한 학문이 없었다. 한때는…… 성군을 꿈꾸기도 했었으니.

이젠 그날이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라, 정말이네. 다친 곳이 하나도 없어요.”

아이는 카스토르의 주위로 원을 그리듯 한 바퀴 돌고는 철퍼덕 그의 앞에 주저앉았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

“아빠랑 아저씨들이 그러는데 아저씨한테는 사, 살, 살기! 가 있어서 가까이 못 갔대요. 먹을 거도 주고 고맙다고도 하고 싶었는데.”

확실히 생각 중에 사람도 짐승도 오는 것이 싫어 살기를 조성하기는 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기운이란 무형적인 것이기에 어린아이, 그중에서도 둔감한 자는 느끼지 못할 만도 했다. 그가 깊이 생각에 빠지며 느슨해졌던 것도 있었으니.

“아저씨, 아저씨. 이름이 뭐에요? 이름을 모르면요, 인사를 할 수가 없어요.”

“…….”

“아저씨.”

카스토르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이의 말을 무시한 채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너는, 해질녘 밀밭 같은 금발인가?”

“네? 으으음……. 제 머리 색깔은 파란색이에요. 아아주 파란색!”

“자색 눈동자를 가졌나?”

“아니요. 주황색 눈동자인데…….”

“그렇다면 살 가치가 없군.”

카스토르가 가볍게 일어나며 손을 휘둘렀다. 거센 파공음과 함께 우수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소리 없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아마도 딸꾹질을 참고 있을 아이에게로.

“카스토르다.”

아이가 듣고 싶어 했던 이름을 알려 주며 카스토르가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는 아이가 살면서 듣는 마지막 이름이 될 것이다. 여자아이의 뺨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갔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카스토르는 보지 못하는 그 순간에, 아이가 밝게 웃었다. 그가 보지는 못했으나 소리는 들렸다.

“와, 별의 이름이네요!”

그 순간 숙련된 검사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카스토르의 검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형님, 그거 아세요? 저와 형님의 이름은 별의 이름이래요! 행복합니다. 형님이랑 저랑 공통점이 생겼잖아요.>

카스토르가 미소를 지웠다.

<형님이 너무 좋습니다!>

우습게도 그날의 감정도 생각도 전부 잊어버렸건만 미련한 동생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형님…… 흐흑…… 왜, 제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아마도 이는 율리안이 항상 같은 얼굴로 웃었기 때문이리라. 심지어 그가 그의 어미와 사랑하는 이를 베었을 때에도.

<아니야. 형님에게도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에게 동생의 얼굴은 더는 족쇄가 되지 못했다. 이조차 시간 속에 덧없이 부스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희미한 과거에 대한 속죄에 가까운 만성적인 행위로써 검을 내렸다.

‘분명 베었던 감각이 있다.’

동시에 아이의 멍청함을 알아차렸다. 검 끝에 살갗이 베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멍청히 그에게 되묻는단 말인가. 죽이는 대신 그는 물었다. 권태에 사로잡힌 음성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무섭지 않나?”

검 끝에 살갗이 닿았다. 뺨일지도 모르고 목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숨소리는 정확히 알 수 있다. 흩어졌다가, 모아졌다가, 다시 흩어지는 숨소리는 놀랍게도, 안정적이었다.

“네! 무섭지 않아요.”

<무섭지 않아요.>

그 순간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머리칼이 뺨을 간지럽혔다. 하. 카스토르는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가 피식 웃었다.

앞이, 보였다.

눈앞에서 멍청하도록 웃는 어린 여자아이가 보였다.

* * *

“여기는 테키탈라스 숲이에요. 우리 집은 저어어쪽. 아빠가 다섯 밤만 걸어가면 아주 큰 도시가 있대요.”

눈이 보인 적은 처음이 아니었다. 여인이 걸고 간 저주는 ‘모든 순간 앞이 보이지 않는’ 저주가 아니었으니까.

<넌 날 생각할 때, 앞을 보지 못할 거야.>

원론적으로, 그가 그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앞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카스토르는 단 한 번을 제외하면 제대로 앞을 본 적이 없다. 모든 순간 그녀를 떠올렸기에.

그 한 번 눈을 뜬 순간조차도 그에게 얼쩡거리는 사내 떼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카스토르의 금품을 빼앗아 팔을 자르려 했다. 빼앗기는 것은 상관없으나 몸을 재생하는 것은 귀찮았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에게 집중했고 그 순간 눈이 뜨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카스토르는 이 순간 이 어린아이에 대한 아주 작은 흥미로 시야가 트였음을 알았다. 금방 다시 보이지 않게 되리란 것도.

“아주 큰 도시의 이름은 메티스래요. 옛날에 아주아주 지혜로운 여신님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이름이랬어요.”

아이는 멋대로 찾아와 떠들었다. 카스토르는 그 말을 듣지 않거나 눈을 감았지만 의외로 쓸 만한 말을 듣기도 했다. 아이는 이번에 학교에서 배웠다며 웬 책을 펼치며 재잘거렸다.

“여기는요, 예전에는 조금 작았는데 아주 큰 도시가 되었대요. 여기에 영웅 율리안 님이 왔는데, 잘생기고 똑똑해서 홍수가 났을 때도 거대한 댐을 쌓아서 막았대요.”

메티스, 분명 지혜의 대신전이 있던 도시였다. 그러니 이야기 속 율리안은 그가 알던 율리안일 것이 틀림없었다.

“홍수를 막고 영웅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

“네? 영웅님은 죽었어요.”

아이에게서 나온 시간을 듣는 순간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흘렀음을 알았다. 희미한 감정이 교차했다.

시간도 공간도 다른 곳으로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다른 차원일지도 모른다고도. 그러나 그는 먼 시간을 돌고 돌아 제국으로 돌아온 듯했다.

한때 그에게 맹목적일 정도로 순진하고 멍청하고도 그래서 정이 넘치던 동생이 죽었을 정도로 먼 시간.

소녀는 카스토르의 대답이 없어도 재잘재잘 떠들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요, 이렇게 멋진 공작님도 있어요! 머리가 아주 빨갛고 예뻤대요. 이분이 학교를 세우는 데 불카누스에서 아주아주 많은 돈을 냈대요. 지금 제국에서 제일 큰 학교에요! 제국의 아이들은 열네 살이 되면 전부 이 학교에 가요.”

그는 대부분의 말들을 흘려들었다. 가끔은 흘려듣지 못할 말도 있었다.

“새하얀 머리의 공작님은 산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 냈대요.”

아이의 이야기는 전부 과거, 혹은 전설이었다.

끝내 모두 죽고 말았구나. 카스토르의 권태 어린 얼굴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카스토르. 너는 질 거야.>

한때는 주종이었고 한때는 같은 적을 두었던 자.

<외롭게 남을 너를 조금은…… 동정해.>

짐승이란 운명에 흔들리면서 한편으로 유약했던 인간.

평생 그를 유일하게 친우라 부르던 이였다. 반복해 망가진 그를 향해서도 너는 미쳤지만 그럼에도 내 친우라 부르던.

결국 서로에게 검을 꽂아 넣은 사이였으나, 시간이란 참으로 우습고 아이러니하여 기억의 앞 페이지에 아스라한 것들만 남겼다. 얄궂고 일그러진 뒤 페이지는 그저 사그라지도록.

카스토르는 아이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드디어 반응을 보이는 그에게 신난 아이가 떠들었다.

“제가 제일, 제일 제일 좋아하는 건 이 사람인데요. 예쁘기도 예쁘고 아주아주 똑똑한 황제였는데 옆 나라 왕비님이랑도 친했대요.”

무의식중에 아이가 가리키는 페이지를 본 순간 눈앞이 새카매졌다. 카스토르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황제는 어떻게 됐지?”

“네? 이 사람은요…….”

스스로도 다급한 음성임을 알았다. 한데, 더는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고요했다. 모든 소리로부터 차단된 것처럼.

하. 하하하.

웃음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날 생각할 때, 혀로 나를 말할 수 없어. 또한 귀로 듣지도 못하겠지. 영원히 날 찾을 수 없게.>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것은 너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너의 저주가 또 너로부터 나를 떼어 놓는구나. 그녀가 남긴 거센 거부 속에서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듣지 못해도 황홀함이 피어 나왔다.

그는 입을 막은 채 소리 없이 끅끅, 웃었다. 조잘거리던 아이가 어느새 입술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느끼지 못했다.

<당신,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지?>

그래. 맞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그 사랑이 지독하리 깊어 네 증오와 치환하고 싶었다. 네 가슴을 할퀴고 난자해 그 조각 속에 남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더, 네가 날 쳐다볼 테니까.

그의 입술이 일그러진 채로 올라갔다. 마침내 돌고 돌아서 네가 있는 시간에, 네가 마셨던 공기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지옥에나 빠져.>

네가 선사한 지옥이라면, 기꺼이.

다만, 그는 빌어 보았다.

네가 지켜보는 곳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는 없겠느냐고.

* * *

‘이거 줄게요!’

카스토르는 말없이 책을 들어 올렸다. 아이가 억지로 안겨 주고 간 것이었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지만 역시나 아실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페이지는 볼 수 없다. 실망이라 할 것도 없었다. 이룰 줄 알았기에. 그는 태워 버리는 대신 손에 들기로 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던 그는 잠시 멈췄다.

영웅 율리안의 묘비명은 이러했다.

‘형, 나를 찾아온다면 부디 내 무덤을 보며 웃어 줘.’

단 두 줄의 유언이었다.

‘그럼 나도 용서할게.’

누구도 그의 유언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황제만은 그의 유언을 허락해 어떤 상황에서도 풍화되지 않는 신석神石을 세워 주었다.

카스토르는 책을 덮었다.

* * *

그날 이후로 카스토르는 아이의 수다를 더욱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실리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기에 이야기는 다른 것이 되었다. 아이가 영민한 눈치로 카스토르가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챈 탓이다.

“마을에는 피터랑 사라랑 저랑 이렇게 있는데, 피터는 날 좋아해요.”

카스토르가 눈만 굴려 아이를 응시했다. 손에서 검이 가볍게 늘어진 채 있었지만 언제라도 뽑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요, 잘 모르겠어요. 나도 피터를 좋아하는데 피터는 잘 대답도 안하고 말 걸어도 뚱하고…….”

“피터라. 피터 카페하인드인가?”

“네!”

아이가 어떻게 알았느냐는 얼굴로 보았지만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무료하고도 나른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천천히 내렸다.

“염려할 필요는 없겠군. 넌 그자와 결혼할 거다.”

“네에? 결혼요? 아닌데. 생각 안 했는데. 나 안 받아 줬는데!”

카스토르는 그 말을 그저 흘려들었다.

주신의 신관인 그의 눈에는 모든 진실과 미래가 보였다. 특히나 시간을 뒤엎을 정도로 강한 그의 말은 말 그대로 예언이었다.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을 미래를 예언한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요, 아직 제 이름을 얘기 안 했잖아요?”

“필요 없다.”

“에이, 그래도요!”

소녀가 활짝 웃었다. 카스토르는 귀에 거슬리는 웃음을 들으며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조금만 더 웃으면 그대로 휘두를 생각이었다. 여기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제 떠날 때가 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 저 엄마가 돌아오라고 한 시간이에요! 내일 또 올게요.”

등을 돌린 아이가 다다다, 뛰어갔다. 카스토르가 고개를 돌리던 그때 아이가 뱅글 돌았다.

“내 이름은 엘리야―.”

카스토르는 다음 순간 나온 말에 눈을 떴다.

“엘리야 블루로즈(Elia bluerose)예요!”

장미(Rose), 어디선가 진한 장미 향이 코를 덮쳤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아이가 멀리 사라진 뒤였다. 앞을 바라보던 카스토르가 천천히 제 얼굴을 부여잡았다. 그에게서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웃음은 차차 일그러졌다.

운명으로 이루어진 신관의 생에 우연은 없다. 특히나 강대한 이들일수록 더욱이. 그렇기에 그는 이것이 아실리가 남긴 메시지임을 알았다.

자신을 쫓지 말라는.

* * *

카스토르는 아이에게 호감을 품었다. 비록 이것이 아이에게 있어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닌 호감이었으나 상관없었다.

긴 시간 아니 그는 시간을 셀 수 없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저 셀 수 없을 정도로 흘렀으리라 예상했을 뿐. 돌고 돌고 또 돌아 드디어 그녀의 끝자락을 밟았다. 어쩌면 아실리는 이 시간이라면 다를 것이라 여기고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억겁을 산 이는 이미 변할 대로 변해 이제는 변할 수조차 없는 괴물이거늘.

그러나 그럼에도 카스토르는 아이에게 호감을 느꼈다. 단 하나, 아실리의 이름 철자를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하나만으로 소녀는 그에게는 무감각한 개미와 같은 것이 아닌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있는 한 개체가 되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뚝뚝.

카스토르는 피가 뚝 떨어지는 검을 잡은 채 황홀한 웃음을 흘렸다. 누군가가 보기에 마치 신이 현신한 듯 신성하고도 아찔한 미소였으나, 40구가 넘는 시체 사이에서는 아니었다. 차라리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에 가까우리라.

<도, 도적 떼다!>

도적 떼가 작은 마을을 덮쳤다. 카스토르는 얼마 있지 않은 남성들을 대신해 검을 들었다. 물리쳤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한칼에 모두 도막 내어 버렸으니까. 쉽고, 빠르게.

카스토르는 나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생 바라보았던 시선이되 지긋하던 시선이기에 감흥은 없었다.

그의 눈은 천천히 굴러 두 남녀에게 꼭 붙잡힌 엘리야 블루로즈를 향했다. 그러고는 그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놀랍게도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섞여 있었다. 늑대를 베는 것은 몰라도 사람을 베는 것은 다르게 느껴진 듯했다. 그에게는 늑대나 사람이나 그저 붉은 피를 품은 것은 같은데 말이다.

그가 저벅저벅 걸었다. 칼끝에서 떨어지는 피와 발끝에 채이는 시체가 놀랍도록 익숙했다. 마치 황궁에 있는 것처럼. 그의 옷이 나풀나풀 토가 자락처럼 보였다.

나른한 걸음에 도망치려 하던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느꼈다. 그들은 고마움은커녕 강대한 힘 앞에서 무력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카스토르가 한쪽 무릎을 접었다. 흔들리는 주황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이가 묻지 않아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 가, 감사합니다.”

“…….”

아이는 의연하게도 울음을 참았다. 이런 순간에 어른보다 나은 모습이었다.

“아,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다, 다 죽었을 거라는 거 알아요. 흡.”

카스토르는 이 순간에도 아이를 통해 무언가를 찾았다.

“저, 저 사실은 아저씨를 만날 거란 걸 알았어요.”

“누가 알려 줬지?”

카스토르가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신관의 생애에 우연은 없다. 역시나. 그가 기다렸던 답변이 나왔다.

“어, 어떤 예쁜 언니가요. 언젠가 아저씨가 지나갈 거라고 했어요. 검은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라……. 이제 이 세상에 금색 눈동자는 어, 없을 테니까, 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이 세상에 더는 주신의 신관이 없다는 것. 적어도 그와 그녀를 제외한다면.

카스토르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가 더욱 깊이 휘어졌다. 그가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안배였다.

“……그녀는 혼자였나?”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헤르난같이 강대한 신력을 가진 이조차 죽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니까. 희미한 황홀감이 그를 감싸 안았다.

“아니요.”

아이가 두려움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 언니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었어요.”

카스토르와 대화하는 사이 잠시 두려움을 잊은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무섭도록 굳은 얼굴에 다시 부모의 손을 꼭 잡았지만.

“누구냐.”

“아, 아, 아주아주 잘생긴 오빠가 같이 있었어요. 아저씨보다는 조금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카스토르가 비틀거렸다. 엘리야가 보기에 저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왜인지 아주 슬픈 것처럼 느껴졌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어째서 눈물 같아 보였던 걸까.

“하……. 하하하.”

카스토르는 제 얼굴을 가린 채로 한참을 웃었다. 평생을, 아니 남은 시간을 전부 바쳐 그리워하던 얼굴이 이곳을 지나갔던 것과 그의 예상이 틀렸다는 사실이 교차하며 그의 정신을 잠식했다.

그가 천천히 웃음을 그쳤다.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뜨인 눈. 권태로 침잠하던 눈동자로 광기가 일렁였다. 황금색 신력이 아지랑이처럼 그의 발밑에서 꿈틀거렸다.

그 순간 그는 아실리가 아이에게 남긴 뜻을 읽어 냈다.

<네가 사라지고, 난. 널 잊을 거야.>

그녀는 자신을 잊겠다고 했다. 그가 새겨 넣은 증오를 깨끗이 잊어서 더는 없는 존재로 여기겠다고. 그러나 아이에게 남겨진 흔적은 다른 것을 가리켰다.

‘카스토르, 당신을 위해 변할 수 있다면. 변해.’

카스토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광기와 기쁨 사이에서 소리 내어 웃는 그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오래전에 망가졌으니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이를 응시했다.

“전해 줘서, 고맙군.”

선선히 웃는 부드러운 얼굴에 광기가 도드라졌으나 아이는 거기까지 보기에 너무 어렸다. 그가 사람을 유혹하듯 눈을 접었다.

“로즈.”

아실리, 네가 끝내 내게는 허락하지 않았던 이름. 너를 부를 수도 없게 만들었다.

아이의 이름은 아실리의 이름과 다르게 밖으로 나왔다. 이것만은 허용된다는 듯이. 그는 불꽃 너울처럼 희고 찬란히 미소를 품었다. 그는 아이의 조그만 손을 잡았다. 너무나 조그마해 그의 손바닥보다 훨씬 작았다. 그는 아이의 손끝에 입을 맞췄다.

“너는 천년 만에 내게 축복을 받는 인간이로구나.”

그가 농홍하게 눈을 휘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 행복을 바라지. 바라는 것은 모두, 이뤄질 것이다.”

그를 아는 이들이 그가 행복을 담는 모습을 보았다면 모두 기만이라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카스토르는 진심이었다.

“그럼 로즈. 네 사랑과 네 삶에 신이 깃들길.”

신들이 사라진 시대, 고대 유물로만 남은 고대의 신관이 작은 소녀에게 흔적을 남겼다. 평생 누군가를 학살하며 살해한 이가 바란 행복의 축복이 어찌 될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그가 강력한 신력으로 빈 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의 신력은 곧 ‘의지’였다.

* * *

마을을 한참 나선 그는 어느 황무지에 멈춰 섰다. 마을을 나선 순간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다. 텁텁한 먼지 냄새와 흙 내음이 느껴졌다. 모래바람이 몸을 감싸며 아우성이었으나 그는 홀로 광소를 터트렸다.

‘당신을 위해 변할 수 있다면. 변해.’

그와 그녀는 같은 수라장을 겪었으나 끝내 한 가지만이 달랐다. 그는 망가졌고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황홀할 정도의 곧음에 차라리 망가트리고 싶었다.

아실리, 너는 시간이 지난다고 하여 내가 너와 같이 되리라 생각했나?

억겁의 시간이 흘러 그가 그녀를 잊고 그만의 삶을 살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그녀는 지겹도록 그의 그림자 아래 있었으면서 아직도 그를 모르는 것이다.

이미 그는 남은 시간을 모두 바쳐 맹목적으로 그녀만을 쫓고 있음을.

변화, 변화라. 가히 수백, 어쩌면 천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학살자였던 이의 변화란 누군가를 살리는 것인가?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수를 세었다.

‘일흔.’

조금 전 그가 지킨 마을 사람의 숫자였다. 반평생 학살만을 일삼던 손이 다시 사람을 살렸다.

아실리는 사람을 죽이던 그밖에 보지 못했으나, 그는 한때는 성군을 꿈꾸며 정책으로 수백, 수천을 살리던 현명하고 지혜롭던 황자였다. 우습지 않은가. 자신이 그리 살아 보지 못한 것도 아니거늘.

진정으로 변할 수 있다 여겼나?

카스토르의 웃음이 천천히 멈췄다. 그는 황무지 한가운데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리 하지.”

그녀가 원한 ‘변화’가 이런 것이라면 그는 기꺼이 실천하기로 했다. 그녀가 선사한 지옥마저 황홀하거늘 어찌 하지 못할까. 그래, 그는 앞으로 사람을 살릴 것이다. 수십, 수백, 어쩌면 수천을 살려, 언젠가는 세상에 널리 알려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마침내 돌고 돌아 죽인 것보다 살려내면, 너는 내 앞에 나타날까?

그동안에도, 나는 네 궤적을 쫓겠노라고.

“로즈.”

아실리.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 아니던가.

“로즈.”

어디선가 장미향이 났다. 잡초마저 피지 못한 황무지, 모래 내음 사이로 향기로운 장미의 향기가. 그의 주먹이 빈 허공을 잡았다. 향기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마침내 재만 남은 듯 스르륵 흩어진다. 희미해진다.

그가 끝내 가지지 못한 재와 장미(Ashely Rose)였다.

그리고 영원히 찾아 헤맬 미로의 이름이었다.

외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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