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사랑은 아모르처럼
짹짹짹.
새가 우는 소리에 눈이 슬쩍 뜨였다. 벌써 아침인가. 수도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하는 곳이 바로 이 황궁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던 나는 무의식중에 옆자리를 더듬다가 단단한 것을 느끼고 그대로 얼굴을 비볐다.
“……일어났나.”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아모르가 중얼거렸다. 낮게 깔려 귀를 긁는 소리가 선연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누구세요?”
그러자 감겨 있던 눈이 스르륵 뜨이더니 나를 향했다. 잘생긴 아미가 찡그려진다.
“……또 이럴 겁니까. 폐하.”
“폐하라니요? 제, 제가요?”
“…….”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끙, 하고 한숨을 쉰 아모르가 나를 노려봤다.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나를 붙잡은 손을 잡아당겼다.
“당신의 반려입니다.”
누운 채 위로 올라다보게 된 눈은 햇빛을 반사해 아름다웠다. 신록을 담은 녹색 눈동자가 한없이 진지했다. 그런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하지 말라고는 안 하네?”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을 아는데 말해 무엇 합니까.”
공손한 말씨이나 불만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가 툭 내 옆으로 누우며 원래 말씨로 물었다.
“그래서 대체 오늘은 뭔가?”
“음, 이 세계에서 갑자기 깨어난 여대생?”
“……이해하지 못했다만.”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는 차츰 흐려지는 전생의 기억이지만, 이따금 이 자연스럽게 잊히는 기억 중에서 가끔 생각나는 것을 아모르에게 써먹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질색하면서도 받아 주는 아모르였다.
귀엽단 말이지.
돌아누운 나는 그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이해 못해도 돼요. 내 꿈에나 나오는 얘기거든요.”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싫다고 하면 안 할 텐데, 좀처럼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받아 주는 아모르를 보는 게 즐거우니 멈출 수가 없다. 후후, 웃는 동안 허리로 단단한 팔이 감겼다.
“날 놀리시는 것은 오늘도 재미있으셨습니까, 폐하?”
“음, 재미……. 있었던 것 같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웃으시며 잘도 그렇게 말하는군요.”
그의 품에 안겨 있노라면, 그가 천천히 고개 숙였다. 목으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재미없는 인생이었으니, 앞으로는 재미나게 살아야죠.”
“……일리가 있는 말인데, 어쩐지 나만 당하는 기분이군.”
“좋으면서.”
나는 기분 좋게 눈 감으며 그의 팔에 얼굴을 비볐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아모르에게만 하는걸.”
아모르가 움찔했다.
“행복해서 질식할 소리군.”
작게 중얼거렸으나, 그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고, 자세가 휙 뒤집혔다.
“그럼, 이제 내가 괴롭혀도 되겠습니까?”
“……네?”
그의 입꼬리가 매혹적인 곡선을 그렸다. 나는 숨을 꿀꺽 삼켰다.
“잠깐, 아모르, 아침인데요?”
“언제 시간을 고려하셨습니까?”
아모르가 머리 옆으로 팔을 짚고,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치사하게 이럴 때만 존댓말을, 잠깐만! 벗기지 말아요!”
오늘 회의가 있다고! 얼른 그의 손을 붙잡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늘하게 미소한 그는 상체를 숙였다. 얼굴이 내려와 목을 지분거렸다.
“윽, 잠깐, 거기는…….”
“폐하께서 약한 부분이지.”
“흣, 치사해…….”
“폐하도 만져 보시겠습니까?”
입술이 점차 아래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나른한 숨이 터져 나오며 그의 어깨를 더듬었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당신, 키가 더 컸어요?”
“나의 폐하는 더 마른 것 같군.”
“그, 그렇진 않아요.”
“말랐어. 언제나 만지니까 알지.”
“……그런 말 하지 마.”
수위가 청소년 관람 불가는 지나도 한참 지난 그의 행동에 내 얼굴은 보지 않아도 붉어졌을 게 뻔했다.
‘이런 게 어디 있어.’
아모르만 나이 먹은 건 아니지? 아모르는 갈수록 능숙해지는 반면 처음과 다름없이 붉어지고 마는 나를 느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렸다.
‘더 잘생겨지긴 했는데.’
그저 ‘아모르’ 부르기만 해도, 입맞춤에도 눈이 촉촉하게 젖던 남자는 어디로 가고 서늘한 시선으로 홀릴 듯 날카로이 잘생긴 미남만 있을까.
“내 아모르는 풋풋했는데.”
“……지금도 네 남자는 눈앞에 있다만.”
“아니야. 아니, 아니, 잠깐만, 나 오늘 정무회의가 있다고요.”
점점 내려가는 입술을 막으려 하던 나는 그대로 그의 머리칼을 잡았다. 상의를 벗고 입 맞춘 그가 뜨거운 숨과 함께 낮게 웃었다.
“지각하겠군.”
* * *
“……진짜 지각했잖아.”
양손으로 얼굴을 모아 쥐고 울었다. 그런 나를 아모르가 바라보는 듯했다. 손가락 사이로 고민하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음. 로제.”
“……말 걸지 말아요. 당신, 앞으로 3미터 내 접근 금지야.”
“…….”
손등이 간지러웠다. 손을 떼어 내자 손목을 꼼지락꼼지락 타고 올라온 넝쿨에서 자그마한 꽃이 활짝 피었다.
펑, 펑펑펑펑!
이를 신호로 내 주변에서 꽃들이 마구 피어났다. 흐드러진 꽃들이 호도도독 떨어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 마요. 귀여운 것까지 다하지 말라고요. 이런다고 풀릴 것 같아?”
“……안 되나?”
이미 풀린 것 같지만. 어차피 화낸 체하기도 글렀다 싶어서 그냥 꽃들 사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푹 쉬었다.
“회의에 지각했다고요. 내가 늦어서 되겠어요?”
“지배자의 미덕 아니겠나. 적당히 성실한 황제는 대신들이 숨 쉴 틈을 만들어 주지.”
“아니, 난 좀 굴리고 싶은데.”
내가 황제가 되고도 5년쯤 흐른 것 같다.
‘얄미운 작자들.’
그동안 신관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 이런저런 일을 벌였는데, 영향이 장난 아니었다. 시시각각 반발하는 나이 든 신관의 상소가 꽤나 재미있다고 느낄 쯤에 나라는 차차 안정을 찾았다.
신관에게는 차차 사라지는 힘에 적응할 시간을 주고, 저주를 완화하는 방식을 찾아서 가르치고, 비신관에겐 균등한 기회를 준다. 신관과 비신관 균형을 맞추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지만 이대로 가면 언젠가는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한다.
‘뭐. 내가 살아 있는 한 제국을 보호하는 결계는 남아 있겠지만.’
사실 모든 힘이 사라지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아직 이 세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꽤 먼 일일 것이다. 나는 손바닥에 올린 흰 꽃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되는 듯 보이지만 정작 내게는 한 가지 고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아직 내가 얼마나 오래 살게 될지 모르겠다.
얼마나 오래 살게 될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오래 살지 않을까 느끼고는 있지만, 이 오래가 어느 정도일지. 보통 사람에게는 아득한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낀다.
고개를 들자 꽃과 나무들이 보였다. 나는 팔에 고개를 기대며, 아모르가 식물들을 배치하는 것을 바라봤다. 땅이 움직이고 새들이 날아와 꽃나무에서 지저귄다. 조그만 숲이 꼭 사람처럼 꿈틀꿈틀 춤을 추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내게는 아모르의 신력이 또렷하게 보였다.
“역시, 신력이 더 강해졌네요.”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것 같군.”
그는 나를 응시하며 살짝 머리를 기울였다.
“이게,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했나?”
“응.”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벨이나 헤르난도 차츰 강해지고 있어요. 대부분이 마지막 남은 신관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나는 시대가 남긴 최후의 힘이라 생각해요.”
“산불처럼 마지막에 가장 크게 타오른다 이거군.”
“네. 그거예요.”
숲처럼 울창해진 정원을 바라보며 아모르가 미소했다.
그는 이미 이 땅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 수도, 가뭄으로 병들게 할 수도 있었다. 그가 이처럼 힘을 가볍게 자주 쓰는 건 혹시나 강해지는 힘을 통제하지 못할까 대비하는 훈련에 가까웠다.
“가끔은 이 힘을 한계까지 소진했을 때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모르의 손에서 피어난 꽃을 바라보던 나는 턱을 괸 손을 풀며 끄덕였다. 나도 궁금하던 일이다.
“그러게요. 나도 한 번쯤 어떨지 궁금하네요. 이 세상이 꽃으로 가득해지려나?”
그가 피식 웃었다.
“낭만적인 결과 아닌가.”
“네. 해피엔딩이 좋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반면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미 주신의 후계자가 모든 힘을 다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카스토르로 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죽음의 후계자이기도 했다. 같은 주신의 신관이어도 힘의 사용법이 천차만별일진데 죽음의 힘까지 포함되면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은 힘이 너무 커서 제어가 잘 안 되기도 하고.’
나도 연습을 좀 할까? 이렇게 생각하며 눈앞에 작은 구를 띄웠다. 자색과 금색을 반반씩 띤 신력이 뭉쳐진 덩어리였다. 조금씩 몸을 부풀리던 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실리!
눈앞에 자그만 소녀가 나타났다. 밀빛 금발이 출렁였다.
“일기장?”
데인에게 잠시 맡겨 둔 일기장이 왜 여기 나타난 거지? 나는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소녀를 바라보며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거 당장 없애!
“뭐?”
―잊었어? 네 신력은 소원하는 걸 이루어 주는 힘이라고 바보야!
무어라 반문할 틈도 없이 주변이 빛으로 가득했다.
“아모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놀란 아모르의 표정이었다.
빛이 사그라지자마자 나는 벌떡 땅을 짚고 일어났다. 장소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론가 이동한 것은 알았지만 도착지를 알 수 없다. 어딘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눈앞에는 선명한 숲이 들어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린아이만 한 풀들이 빽빽하게 나 있는 곳이었다. 아주 익숙한 배경이기도 했다.
“여기는……. 황궁이잖아?”
나는 눈을 찡그리며 관찰했다. 분명 서쪽 구역이다. 하지만 건물들의 형태가 좀처럼 눈에 익지 않다.
서쪽은 황후나 황비, 그리고 후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하지만 내가 가 본 곳은 내 궁, 아모르, 데인, 플뢰온 궁뿐으로, 그 외의 궁은 볼일이 없었다. 황제가 된 뒤로는 중앙 궁에 살았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하나 같은 구역은 비슷한 건축 양식을 띠었기에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일기장은 어디 갔지?’
일기장은 내 일부와 다름없다. 분명 옆에 나타나야 할 일기장이 나타나지 않아서 이상했다.
이제 일기장 없이도 자유자재로 신력을 사용할 수 있기에 자유롭게 활보하도록 두었고, 일기장은 나와 있는 대신 황궁 곳곳을 누비곤 했으나, 나와 비슷한 외모라 눈에 띄는 것이 싫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데인과 함께 있길 즐기던 일기장이다.
일단, 일기장은 조금 있다 찾아보기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신관으로서의 감이었다.
‘어쩐지 묘한 기시감이 들어.’
아니, 일단 이럴 때가 아니다. 아모르도 이 힘에 휘말려 함께 이동하는 걸 봤다. 얼른 아모르를 찾으러 가야하는데……. 나는 퍼뜩 머리를 들었다.
“저기요? 거기 누구 있나요?”
나는 얼른 손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신력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수풀을 응시했다. 이윽고 흔들린 수풀 사이에서 한 사람이 등장했다. 눈앞에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거기 누가 있어요?”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낯선 얼굴이었다.
나도 참 뭘 생각한 거지. ……카스토르가 나타날 리 없잖아. 그가 만든 공간도 아닌데.
“안녕하세요.”
이름 모를 남자가 반가운 얼굴로 미소했다.
“아. 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사람이 있었군요. 잘못 느낀 게 아니었네.”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였다. 검사는 아닌 듯한데, 문관인가? 나는 남자의 반짝반짝한 금발에 먼저 시선을 주었다.
‘이상해. 황궁 관리라면 나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털썩. 눈앞의 남자가 쓰러졌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누가 퍽 떠민 것처럼 남자가 넘어진 것이다.
“……괜찮아요?”
제 발에 장엄하게도 넘어진 남자에게 나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아아, 네. 괜찮아요!”
“도와드릴게요.”
“헉, 고마워요!”
율리안인가? 아니, 얼굴이 완전 다른데? 아니. 세상에 율리안같이 아무것도 없는 길에서 넘어지는 인간이 또 있구나. 그러나 나는 곧 깨달았다. 이 남자가 넘어진 이유를.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 앞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아. 그런 건 아니에요.”
남자의 음성은 인상과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가 일어날 수 있게 손을 붙잡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눈을 감으셨나요?”
눈을 감고 걷는 짓은 일부러 하라 해도 안 할 일이었다.
“음, 이 눈이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종종 보는 눈이다 보니.”
아니, 그래도 그렇지 눈을 감고 다녀…….
그렇게 중얼거리던 나는 멈칫했다. 남자에게서 익숙한 신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힘은……. 주신의 신관이 가진 힘이잖아?
그때 나를 향한 남자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밝은 갈색이 섞인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확신했다. 황금색. 확실하다. 이 남자는 주신의 신관이다.
‘이 남자가 주신의 신관이라고?’
처음 보는 얼굴이다. 어째서 여기에 주신의 신관이 있는 것인가 생각하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본다고요.”
“네. 그래서 눈 감고 걷는 연습을 했죠. 오랫동안이요.”
그건 내가 일기장을 보지 않는 노력과 같은 일일까.
“불편했겠네요.”
“그렇죠. 지금처럼 눈을 뜨고 사람의 눈을 마주한 순간 상대가 감춘 ‘진실’과 ‘미래’가 보이니까요.”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손을 쥐었다가 폈다. 생각보다 당황하지 않고 물을 수 있었다.
“지금도, 보인단 말인가요?”
“네. 그래서 이 순간에 당황하지 않는 당신이 누구인지도 알죠.”
남자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 순간 남자에게서 흩날리는 밀빛 금발이 퍽 익숙하다고 느꼈다. 대부분 색이 뚜렷한 사람이 많은 이곳에서 색 바랜 금발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다.
“당신이 내 이름을 이미 알고 있으려나요?”
“제가 알고 있을 리가요? 우린 처음 만났잖아요.”
“아실론. 내 이름입니다.”
멈칫한 채로 환히 웃는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대칭인 듯 닮은 눈매, 그리고 주신의 힘. 휘어지는 눈동자. 내 손을 부드러이 붙잡은 남자가 이어 말했다.
“안녕하세요, 따님.”
* * *
날이 좋은 건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이곳이 과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장한 하늘 아래 나는 자그만 다과상을 앞두고 앉아 있었다.
그것도 내 ‘친아버지’라는 사람과 말이다.
“표정이 좋지 않네요.”
“네.”
나는 눈을 찡그렸다. 고민이 넘쳐서요, 하고 덧붙이면서.
“무슨 고민인가요?”
“글쎄요.”
어느새 놓인 따끈따끈한 차를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그림처럼 부드러이 앉아있었다. 조금 전 진실을 듣고, 이동해 그가 머무는 곳에 마주 앉은 지 10분째였다.
“왜 여기 왔나 하는 고민이죠.”
“아하.”
남자가 순하게 웃었다.
이 사람이 내 친부라고? 카스토르는 시간을 마구 뒤섞은 공간을 만드는 것도 가능했으니 나도 시간 이동쯤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왜?
나는 끙 한숨을 뱉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당신 주신의 신관이죠?”
“네. 맞아요.”
“미리 말하자면 나도 주신의 신관이에요.”
“그렇군요. 그러지 않을까 했어요.”
남자가 끄덕였다. 나는 설명을 이었다.
“더 설명하자면 내 힘은 단순히 주신의 힘뿐만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것을 실현하는 힘이기도 해요. 그런데 내가 어째서 여기에 오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아요.”
“음, 여기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가령 나라거나.”
“그럴 리가요.”
난 딱 잘라 말했다. 얼굴 한번 못 본, 거기다 이름조차 거의 들어보지 못한 친부다. 간절할 게 무에 있을까? 그러나 집중한 나머지 실수했음을 몰랐다. 고개를 들고서야 남자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았다. 헉.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요. 간절하지 않았다고요.”
“앗, 그럼 보고 싶었다는 거죠?”
“……네, 어, 음. 뭐. 궁금은 했죠?”
……아마도?
“그러니까 저를 보고 싶었던 건가요? 정말? 나처럼요?”
눈을 끔뻑이며 마지못해 끄덕이자, 남자는 해사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아주 많이!”
……은근히 양심을 자극하는 얼굴이네.
“미래에서 오는 따님이라니 내가 이런 예지를 느낄 줄은 전혀 몰랐어요.”
“네. 저야말로 과거에 뚝 떨어지다니, 생각하지 못한 일이에요.”
나는 찻잔을 잡으며, 그를 응시했다.
동글동글한 눈동자와 새하얀 피부.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다. 거기다 고양이 같으면서도 순한 인상, 거짓말에 홀라당 넘어갈 것 같은 얼굴에서 내 어릴 적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평소 내 얼굴을 보던 이들이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확실히 나는 성장하고도 아올레시아와 닮지 않았단 소리를 들었다. 이전에 아올레시아도 말한 적 있지만, 나는 정말 친부를 닮았었나 보다.
“근데 말 편히 하시겠어요? 제가 누군지도 알았으니 굳이 높여 주실 필요 없잖아요.”
“음, 이쪽이 편한데요?”
“그래도요. 어쨌거나 딸뻘이고.”
“원래 이렇게 말을 해요. 아마도…… 따님이 태어났더라도 나는 같았을 거예요.”
고개를 갸웃한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봄날같이 따뜻하게 휘어지는 눈을 보며, 나의 탄생을 못 보지 않았느냐는 말은 꿀꺽 삼켜 버렸다.
“그래요.”
이 사람을 원망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새삼스러울 만큼 타인처럼 느꼈고 이게 더 자연스러운 사이였다. 그저 나와 닮은 얼굴을 응시하며 작게 숨을 뱉었다.
‘아모르를 어디서 찾지?’
남자는 신나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막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실론! 아실론! 얘, 너 여기 있지? 얼른 나와 봐!”
뚜벅뚜벅. 신나게 걸어오는 사람은 이제 스물 초반쯤 될까 싶은 여인이었다.
“응? 뭐야, 손님이 있었네?”
여인은 놀란 눈으로 나와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남자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어 나를 가리켰다.
“제 새 친구예요. 누님.”
“세상에. 세상에나 아실론! 네게 새로운 친구가 생길 줄은 몰랐구나! 미리 말을 해 줬어야지! 안녕?”
동그란 안경을 걸친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여인은 꼭 강아지처럼 귀여운 얼굴이었다. 나는 여인의 금발을 바라보다 말고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도 주신의 신관이구나.’
황족인가? 이 시대에 여성이면서 주신의 신관이었다면 후에 분명……. 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예쁘다, 예뻐. 어린 친구네.”
쪼르르 달려온 여인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활짝 웃었다.
“사랑스러워라. 몇 살이니?”
“네? 네? 아, 저 스물두 살…….”
당황한 내가 나이를 뱉자 내 손을 잡은 여인이 눈을 반짝였다.
“나보다 세 살 어리네. 눈이 너무 예쁘다!”
아니 잠깐, 나보다 세 살 많다고? 이 얼굴이? 내가 놀란 눈으로 응시하는 동안 여인이 휙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봤다.
“아올레시아는 알고 있니? 네가 이런 어여쁜 친구가 생긴 걸?”
“이런, 누님이 생각한 것이 전혀 아니니까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제겐 아올레시아뿐인 걸요.”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이분은 제 먼 친척인 누님이시자 제국의 1황녀인 헤메이라 팔라스 칼타니아스예요.”
“뭐야. 네가 소개해 버리면 난 할 말이 없잖아?”
1황녀. 나는 숨을 속으로 삼켰다. 들어 본 적 있다. 주신의 힘을 타고났으나 그 힘이 약해 수정의 희생양이 되고 만 사람. 이 사람이 데인이 말했던 나 이전에 희생당한 황녀였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힘없이 쓰러지기는커녕 생기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마침 잘 됐다. 오늘 네 친구도 피크닉에 데려오렴.”
“네?”
“아, 그거 좋겠네요.”
“난 네게 시간을 알려 주러 온 거거든. 이따 2시에 서쪽 중정으로 오렴! 마리사랑 아올레시아는 동궁에서 오기로 했어.”
아니, 잠깐 내가 어딜 가?
“그럼 이따 보자꾸나!”
1황녀는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돌아가 버렸다. 일이 있다고 한 걸 봐서는 다른 곳을 들렀다 오는 듯했다.
“누님은 원래 즉흥적인 분이에요.”
“네……. 그래 보이네요.”
수습하려는 듯 건넨 남자의 말에 끄덕였다. 그리고 무척 편견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느꼈다.
‘……누가 봐도 닮은 얼굴을 두고 의심 한 번 안 하다니.’
내 생각을 알아챈 듯 아실론이 누님은 한곳에 빠지면 다른 것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주신의 신관으로서 내 힘은 약한 축에 속해요. 그런데 간헐적으로 아주 크게 작용할 때가 있는데, 그때 큰 운명을 맞닥뜨리곤 하죠. 따님을 만나는 미래를 본 것도 이런 맥락이에요.”
금색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기분 좋네요. 정말 행복해요.”
다정하게 말을 건넨 그가 살갑게 웃었다. 어쩐지 심장께가 간질간질한 기분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다. 솔직하게 털어놓은 내게 남자가 이어 말했다.
“아까 따님의 힘은 바라는 것을 이루는 힘이라 그랬죠?”
“네.”
“그럼 당신이 간절히 바랐던 건 뭐였나요? 누군가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면, 이곳에 온 이유가 여기 어딘가 있지 않을까요?”
“……이유를 찾으면요?”
천천히 고개를 들면 나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그 답을 찾으면 돌아가겠지요.”
나는 벌떡 일어났다.
“사실 그 전에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도와줄래요?”
아실론이 눈을 깜빡이더니, 곧 잎새처럼 푸릇한 청록색이 잘 어울릴 미소를 지었다.
“물론. 피크닉까지는 두 시간 정도 남았으니까요. 그리고 어디 있을지도 알 것 같네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그의 눈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분명 꺼리는 색이 금색이다. 한데, 이상하게도 카스토르처럼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 * *
“이쪽으로 걸어가면 로제가 있나?”
아모르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찌푸려진 미간이 이를 증명했다. 신록을 담은 듯 짙푸른 그의 눈이 굴러갔다. 그의 옆에서 자박자박 걷던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대답해라.”
―확실해. 몇 번이나 묻는 거야?
바랜 밀빛 금발과 자색 눈동자, 채 열 살도 안 된 외모의 소녀는 일기장이었다.
―나는 당장 아실리에게로 넘어갈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말했지?
“나 때문이라고?”
―그래. 넌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떨어지면 넌 시간을 표류할 테니까. 미아가 되고 싶어?
사나운 일기장의 시선에 아모르가 차게 웃었다.
“참 희한하군. 네가 나를 그 정도로 생각해 준다고는 느끼지 않는데.”
일기장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오직 아실리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실리가 최우선인 ‘신물’이었다.
“그나저나 표류라고 했지, 너와 떨어지면 원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나?”
―아니. 시간이 지나면 원래 시간으로 돌아가겠지. 넌 이 시간의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그게 네 스스로 갈 수 있단 소리는 아니야. 돌아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아실리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찾아낼 거라는 얘기지.
아모르가 멈칫했다. 일기장이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 난 지금 아실리가 잠시라도 슬퍼하는 게 싫어서 옆에 있는 거야.
아모르가 묘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고, 일기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고맙긴 한데 그걸 꼭 쌀쌀맞게 말해야 하나?”
―누가 누구더라 쌀쌀맞다고 하는지?
그건 아모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난 원래 싫어하는 인간에겐 싸가지 없게 생겨 먹었어. 본체의 성격을 닮으니까.
“본체? 네 말은 로제가 싸가지 없단 말인가?”
―아니. 아실리 말고도 있어. 본체.
그럼 누굴 말하는 것인가. 아모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일기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둘 다 타인에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일기장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성향이 그러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 더 걸었는데, 몇 걸음 못 가 아모르가 한숨을 쉬었다. 돌아선 그는 뒤처진 일기장을 안아 들었다.
―뭐, 뭐하는 거야?
“놀라는 얼굴은 로제와 똑같군, 그래.”
일기장은 보일 듯 말 듯 웃는 아모르를 노려봤다.
―내려놔!
일기장은 아모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실리가 여러 날 울며 수정 속에 갇힌 아모르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아모르 또한 일기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아실리에게 들어 그녀가 겪은 불행의 원흉이 이 소녀임을 알았다. 정확히는 소녀의 본래 형태인 일기장임을 말이다. 반려가 평생 괴로워한 원인을 제공한 물건을 좋아할 리 없었다.
“보폭 차이가 나서 어쩔 수 없으니 안겨 있겠나? 되도록 조용해주면 좋겠군. 나도 썩 유쾌하지 않으니.”
그러나 이렇게 안고 있으니 영락없는 작은 아이여서 아모르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러니 마치 네가 딸 같군.”
―쓸데없는 소리.
일기장의 거센 대꾸에도 아모르는 태연했다.
“나도 네가 로제를 닮았기에 한 말이다. 그녀를 닮은 딸을 바라지만 너와 같은 성격은 아니길 바란다.”
서늘한 그의 시선에 찡그린 일기장이 발끈했다.
―뭐야? 아실리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이유도 모르면서…….
“뭐?”
아모르가 멈칫하자, 아차 싶었던 일기장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실리가 어디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저쪽이야.
“너 방금…….”
소녀는 아모르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그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 시간축이 달라서 여기선 신력도 제대로 못 쓸 텐데?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평소라면 쉴 새 없이 떠들었을 식물들이 반 이상 고요했으니까. 아모르는 말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었으나 이 소녀가 대답해 주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앞으로 공기가 답답해도 참아. 당신이 이 시간의 사람이 아니라서 그래. 시간에서 자유로운 건 주신의 신관뿐이니까.
“너는 괜찮고?”
―그래. 난 아실리의 신물이잖아?
어깨를 으쓱하며 으스대는 소녀를 바라본 아모르가 한마디 더 하려 할 때였다.
“거기 누가 있나요?”
풀숲을 가르고 한 여인이 등장했다. 역광에 가려진 여인은 웬 낯선 이들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아모르는 저도 모르게 일기장을 응시했다. 일기장 또한 생각지 못한 상황인지 표정이 굳었다. 마침내 전부 드러난 여인의 머리칼은 은빛과 보라색이 적절하게 섞인 오묘한 색이었다. 여인을 바라본 아모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누구시죠? 여긴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인데…….”
놀랍게도 그녀는 아올레시아였다.
“아…….”
“아?”
황급히 제 입을 가로막은 아모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올레시아라니, 이미 죽은 사람이 어찌 여기에 있을까? 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아올레시아가 젊어 보였다. 그녀가 아모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훨씬 앳된 나이대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정말 과거란 말인가.’
이미 일기장으로부터 이곳이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언질을 받은 아모르였다. 일기장을 바라보자, 소녀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귀족이신가요?”
“예……. 일단은.”
귀족보다는 황족이지만, 아모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거기까진 설명하긴 어려울 테다. 다행인 점은 아모르가 아올레시아를 성인이 돼서야 만난 터라 그녀가 그를 알아볼 리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황궁 구경을 시켜 주려 했는데, 아이가 마음이 들떠 뛰어가고, 뒤를 쫓다 보니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시종도 보이지 않더군요.”
“아아.”
확실히 납득이 가는 이유였던지 굳어 있던 아올레시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안겨 있던 소녀에게 향했다.
“그 아이는……. 딸인가요?”
“네? 그건.”
“아빠!”
아모르가 말문을 잃었다. 생긋 웃은 일기장이 아모르의 목을 껴안았다.
“아빠가 안아 준댔잖아. 응?”
“……그래. 그랬지.”
아모르는 인간답지 않은 악력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조금 전 너 같은 딸은 싫다고 한 말의 복수임을 알았다.
‘이런 점은 로제를 닮았다고 할지.’
찡그린 아모르가 어색하게 일기장의 머리를 껴안았다.
“아빠, 이렇게 꽉 잡으면 아파. 응?”
“……실수란다.”
이들을 지켜보던 아올레시아는 이들을 기꺼이 대로로 안내해 주기로 했다. 낯선 남자라면 모를까 부녀지간이라 하니 조금 경계를 푼 탓이었다. 사실 이는 그녀에게도 매번 딸을 낳고 싶다 재잘대는 연인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저 아이…….’
일기장을 바라보던 아올레시아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오동통한 뺨을 가려서 그렇지 찬찬히 살펴볼수록 묘하게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아실리의 경우 성장하며 아올레시아를 닮았으나, 어릴 적 생김새는 아실론에 가까웠다. 그러나 더욱더 어릴 적에는 아실론조차 많이 닮지 않아 구분이 힘들었는데, 이 때문에 아올레시아는 구분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이 길로 쭉 걸으면 중앙 통로가 나옵니다. 거기까지는 동행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아…….”
“아까부터 왜 절더러 아, 하고 마는 거죠?”
침묵했던 아모르가 고개를 가로젓고 말버릇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전했다. 무의식중에 아올레시아라는 이름을 담을 것 같으니 주의해야 할 듯했다. 아올레시아는 눈썹을 휘며 입술을 열었다.
“가시는 길에 제 친우를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길은 같으니 동행해도 될까요?”
“좋습니다.”
그 말이 무섭게 오른쪽 모퉁이에서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치고는 훌쩍 큰 키에 편안한 옷을 걸치고 높게 올려 묶은 붉은 머리.
“엇, 시아!”
젊은 시절의 마리사였다.
“시아! 여기 있었냐?”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니.”
아올레시아가 짐짓 찌푸리며 대꾸했다. 젊은 마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 이름은 쓸데없이 기니까 말이지. 그나저나 누구야? 세상에, 남자? 잘생겼네? 네가 바람…….”
“딸이래.”
“―은 아니겠고. 안녕하세요?”
고개 숙이는 마리사에게 아모르도 함께 까딱였다. 마리사 또한 아모르가 성인이 돼서야 마주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기억에 그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어서 아올레시아의 얘기를 듣고 사정을 알게 된 마리사는 재밌어하며 동행했다.
“아하, 길을 잃으셔서 네가 안내했단 말이지? 웬일로 네가 착한 일을 했네. 아휴, 아가야, 누굴 닮아 이렇게 이쁘니?”
“엄마요!”
어느새 마리사에게 안긴 일기장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이 어린 아실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난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이뻐요.”
“그으래? 난 저기 있는 내 삐딱한 친구가 제일 이쁘던데. 근데 너도 크면 미인이 되겠다. 아유, 이뻐.”
“엄마 닮아서요.”
“오구오구, 그랬어요? 말도 잘하고!”
마리사가 어찌나 귀여워하며 좋아하던지, 그녀는 일기장이 손을 내밀자 신나서 흔들고는 활짝 웃었다.
‘내가 싫은 건지, 마리사가 좋은 건지.’
아모르는 마리사와 일기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둘 다겠지만.’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양 사이가 좋아 보였다. 하기야 현재 시간에서도 연이 있으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저기요.”
아모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아올레시아가 아모르의 팔을 가리켰다.
“다치셨네요.”
“아. 그렇군요.”
그가 팔을 들어 보니 못 보던 상처가 있었다. 아마 이곳으로 떨어지며 난 상처인 듯했다. 시간을 넘어오며 회복도 더뎌진 모양이다. 보통 때라면 흔적 없이 사라졌을 상처였다. 피가 밴 소매를 바라보던 아모르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올레시아가 그를 붙잡았다.
“잠시 실례하죠.”
그가 놀라기도 전에 팔을 통해 익숙한 것이 넘어왔다. 신력이었다. 아올레시아가 손을 떼어 내자 상처가 말끔히 사라진 팔이 보였다.
“죽음의 신관은 신력을 집어넣어 회복력을 빠르게 하여 상처를 치료할 수 있어요. 일종의 편법이죠. 대뜸 나았으니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감사하군요.”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쪽도 신관이죠?”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아모르가 끄덕였다.
“죽음의 신관은 타 신관에게 신력을 옮길 수 있는 겁니까?”
신관끼리는 고유 신력이 달라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신력을 넘긴다는 건 불가능하거나 매우 힘들었다. 신력끼리는 반발한다. 억지로 넣어 봐야 100을 넣어도 10밖에 남지 않는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네. 죽음의 신관만이 가능한 일이죠.”
가볍게 끄덕인 아올레시아가 물러나며 말했다.
“본래 이리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거. 딸을 쫓으시다 난 상처 같아서요.”
그 말에 아모르는 아올레시아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마리사에게 안겨 활짝 웃는 소녀를 바라보며 아모르는 잠시 감상에 잠겼다.
‘만약 딸이 태어난다면 저렇게 생긴 건가.’
만약 그와 아실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정말 저렇게 닮았으면 좋겠군.’
그는 아직 사랑을 주는 것에 서툴렀다. 아이가 있다면 자신보다는 아실리를 닮았으면 했다. 그럼 많은 것을 해 주고 싶을 터인데.
살랑살랑. 꽃이 떨어지는 나무를 바라보던 아모르가 짐짓 부드럽게 웃었다. 아올레시아는 마침 새순처럼 웃는 남자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미소할 때 사뭇 느낌이 다른 남자였다. 아모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 아올레시아를 향했다. 그가 처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정하시군요.”
아올레시아가 살짝 입을 벌렸다.
“저 말인가요? 제 연인에게 말고는 처음 듣는 얘기네요.”
“그렇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게 친절했다면 당신보다는 아이 때문이에요.”
아실리와 같은 색이지만 그녀와 다르게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아올레시아가 잠시 시선을 깔았다.
“아마 당신은 다정한 사람일 겁니다. 신관의 감이라 해 두지요.”
아올레시아의 삶을 아는 아모르가 위로하듯 건넸다. 보통 그라면 이리 살갑게 건네지 않는다. 그러나 아실리의 가족이자, 이 여인의 마지막을 알기에 나온 말이었다.
‘묘하네.’
아올레시아가 서늘한 눈을 깜빡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남자에게서는 평소 그녀가 바라보던 남신관들에게서 느끼는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욕망 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고, 희롱도 건네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에게서는 숲에 있는 것처럼 청량하고 차분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냉담한 얼굴임에도 편안함을 느끼는 걸 거다.
그렇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속내를 툭 꺼냈다.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만나는 사람이면 언젠가는 저런 작고 사랑스러운 딸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아이는 싫다. 가족들의 몰살을 겪은 그녀의 어린 시절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복해지고 싶어요.”
아모르는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실리와 아올레시아의 관계에 어렴풋이 알았기에, 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아올레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이 많았네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아모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다 봅니다. ……언젠가 그런 딸을 낳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짤막하지만 단호한 말에 아올레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아모르는 이미 그녀를 보지 않고 있었다.
“시아, 시아! 방금 굉장한 생각을 했어!”
떨어져서 걷던 마리사가 쪼르르르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 애도 피크닉에 데려가자!”
“뭐?”
아올레시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헤메이라가 얠 정말 좋아할 거라고.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잖아?”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도 되니?”
“뭐 어때. 우리 1황녀님과 난 공석에서는 철저한 주종관계! 그러나 사석에서는 친구! 말도 트는 거지. 얼마나 편한 관계야?”
“참 근본 없는 관계구나.”
“뭐? 말 다했어?”
마리사가 눈썹을 실룩였다.
“내가 할 말을 다하면 넌 울고 말 거란다.”
“이 죽도 못 먹은 비실이 신관을 상대로 결투하자고 할 수도 없고. 불쌍해서 봐준다. 알아?”
“죽음의 신관을 상대로 전투를 한다고? 누가 우세할지 뻔한 일이네. 매일같이 무식하게 큰 검만 휘두르다 뇌에 검만 가득하게 된 거니?”
“어휴, 싫다 정말. 한마디도 안 지지.”
“나도 싫어해 줘서 고마운 건 네가 처음이야.”
“……예쁜 게 말이나 못하면.”
“왜, 내 얼굴은 네 취향이니?”
결국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친근해 보였다.
아모르는 문득 그가 아올레시아나 마리사나 그가 아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두 사람 다 아모르가 자세히 알고 지낸 이들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 다르다는 건 분명하다. 과거란 이런 것일까?
어느새 다가온 아올레시아가 미안하다는 듯 입술을 열었다.
“어쩌죠. 저 예의를 모르는 치가 저러는데 실례가 많네요. 함께 가시겠어요?”
“……초대는 감사하지만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아모르가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황궁에 있나요?”
“예, 다만 어디에 있는지 몰라 조금 염려되지만 말입니다.”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냉랭하고 까칠하던 얼굴에 근심 어린 표정이 가득했다.
“그럼 더욱 따라오셔야겠군요. 그곳에 사람 하나 기가 막히게 잘 찾는 ‘예언가’가 있으니까요.”
예언가. 낯익은 호칭이었다.
“가실까요?”
이에 아올레시아가 처음으로 미소했다.
“따님한테 좋은 추억을 드릴 테니 갑시다!”
아올레시아의 말과 마리사의 채근에 못 이겨 발을 옮긴 아모르는 곧 멀리 보이는 중정에 이르렀다.
* * *
“이쪽으로 가면 중정이에요?”
“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향긋한 숲 내음이 가득한 오솔길이었다. 오래전 내 궁에서 4행정청으로 가는 길에 이런 길이 있었는데.
‘돌아가면 산책이나 할까.’
아스라한 추억이 머리와 가슴을 적셨다. 과거는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문득 떠오를 때마다 지워 내거나 그저 넘겨 버릴 뿐.
“따님, 꽃 좋아해요?”
어느새 걸음을 멈춘 남자가 물었다. 덩달아 멈춘 내가 나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뇨.”
이곳은 불의 계절이었다. 여름. 봄처럼 찬란하지 않아도 싱그러운 풀꽃들이 길을 따라 활짝 피어 있었다. 그중 해바라기를 닮은 것을 바라보다 살짝 웃었다.
“모든 식물을 좋아해요.”
꽃과 나무. 잎과 숲. 녹색으로 얼룩진 모든 것을 사랑한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네요.”
꽃을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하고 있었다.
“난 그런 당신을 바라보며 안심했어요.”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나는 바람 사이에서 찬찬히 남자를 담았다. 평생 보지 못하리라 생각한 이였다. 당연했다.
당신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라는 존재에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라면 모를까 나는 당신을 궁금히 여긴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제야 드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안심해도 돼요. 예쁘게 자랐으니까.”
그러나 이 순간 당신을 바라보며 서글퍼진 것은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당신을 동정하는 것이리라.
“동의하죠?”
그가 맑은 하늘처럼 웃었다.
“과연 그러네요.”
원래 세계의 아빠는 나를 바라보는 눈에 꽃을 담고 별을 담았다. 유리병 속에 갇힌 바스러지는 것을 대하듯 나를 소중히 여겼다. 어째서 당신은 끝내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딸에게 이런 시선을 보내는 걸까?
결국 나는 경계를 지우고 쓰게 웃고 말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오랫동안 악의와 집착에 길들여진 눈은 도리어 선의와 호의를 거짓말처럼 잡아냈다.
“혹시 내게 원하는 것이 있나요?”
“아니요. 없어요.”
남자는 웃었다. 아무것도. 그리 덧붙이면서. 남자는 정말 무엇도 바라지 않는단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숨을 쉬고 걷는 것만으로. 이미 행복하니까.”
그 덕에 늘 차갑고 건조하며 무섭다 여긴 황금색이 처음으로 다정하게 보였다. 어느새 나를 붙잡은 부친의 손을 바라보며 장난치듯 던졌다.
“……이러면 엄마, 아니. 아올레시아가 질투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안 할 거예요. 나는 시아를 가장 사랑하고 시아는 나를 가장 사랑하니까요.”
“그런가요?”
“네. 그리고 당신은 사랑의 결실이고요.”
남자는 온순하게 미소했다. 그러나 확고한 목소리였다. 돌연 성큼 다가온 부친이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강아지 같은 눈매가 휘어졌다.
“사랑스러운 따님.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문득, 아주 오래전 유모와 하녀들만 남은 궁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만약, 당신이 살았다면 나의 유년 시절은 달라졌을까?
그러나 나는 끝내 웃고 말았다. 미래를 아는 이들에게 있어 과거는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기에.
이 남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저기요. 정말 내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나요?”
“네.”
“왜요?”
어째서 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남자에게 되물었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다정히 미소하며 내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
“……원하는 것이라. 그럼 딱 하나만 들어줄래요?”
“네. 뭐든지요.”
뭐냐는 듯 묻는 나의 시선에 잠시 곤란한 듯 침묵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를 아빠라고 한 번만……, 불러 줄래요?”
나는 멈칫했다. 남자는 다시 웃었지만 조금 전에 스친 남자의 간절한 눈을 모르지 않았다. 입을 뻐끔거렸다.
“……아…….”
“…….”
“…….”
그러나 끝내 내게서 나오지 못한 침묵의 울림을 바라보던 남자는 선량하게 웃었다. 괜찮다는 듯이. 처음 나를 보았을 때처럼.
“괜찮아요.”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남자의 어깨 뒤로 커다란 중정이 보였다. 새하얀 정자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마도 저기에 따님이 찾던 사람이 있을 거예요. 내가 가서 이쪽으로 보낼게요.”
“아, 같이…….”
“같이 가는 건……. 제 느낌으로 안 될 것 같아요. 시아와 당신이 마주쳐서는 안 된다 경고하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한 ‘느낌’이란 신관으로서의 감일 것이다. 나 또한 비슷한 것을 느꼈다.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남자와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다시 같은 기회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언제부터 내가 결정에 망설였지?
나는 성큼 걸음을 디뎠다.
“저기요!”
세 걸음도 못가 남자를 멈춰 세운 나는 곧바로 부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신력에는 고유의 느낌과 향이 있다. 아모르에게 숲의 향이 나듯이. 우습게도 당신에게서는 나와 비슷한 향이 났다.
나는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가 휘청거리는 나를 받아주었다.
“……미안해요. 나는 당신을 한 번도 떠올려 본 적 없어요. 아빠라고 여기지도 않아요. 미안해요.”
당신을 생각하기에 내 삶은 너무 바쁘고 아팠다. 태어난 걸 원망도 해 봤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라 여긴다. 그러니 모두 지난 지금에 당신을 만난 건 다행일지도 모른다.
“나를 만나는 미래를 알았죠. 그럼 혹시 당신의 미래도 알아요?”
“……네.”
“미래를 알았다면 왜 미래를 바꾸지 않았어요?”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웃음 속에 숨겨진 서글픈 눈을 볼 수 있었다.
“미래를 바꾸는 데는 아주 강한 힘이 필요했을뿐더러……. 내가 죽지 않으면 당신은 태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말의 무게에 잠시 침묵했던 나는 남자와 같이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내가 행복하길 바랐던 거죠?”
“네.”
“누구보다도?”
잠시 침묵한 남자가 곤란한 듯이 웃었다.
“미안해요. 시아가 제일 행복했으면 바라고 따님은 다음이었어요.”
“나쁜 아빠네요.”
“…….”
“엄마에게만 바람직한 아빠고.”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고 추억도 없었으며 이렇게 스치듯 만난 기적이 전부일 터다. 애틋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인연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아빠. 만나서 반가웠어요.”
남자의 입술이 잠시 떨리는 듯했다. 이내 다정한 손이 등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좋네요. 보상받았어요. 따님,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이곳에 왔나요?”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굴리던 나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모르의 행복을 바랐어요. 그가 아주아주 행복하기를.”
“아모르라, 당신이 찾는 사람의 이름인가요?”
“네.”
“사랑이라……. 좋네요.”
남자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이 시간에 온 것은 이 시간 속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런가요?”
“네. 신력은 그러한 힘이니까요.”
……황금색이 정녕 다정하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다정으로 가득한 황금색 눈을 보는 순간 남아 있던 공포와 찌꺼기들이 쓸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럼 가 볼게요.”
부친의 손이 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남자를 아빠라고 생각하지 않음에도 그의 손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허전하다고 느꼈다. 참 이상하게도.
모든 끝이 있는 것은 슬프다. 그 끝이 신도 바꿀 수 없는 시작의 끈이라면 더욱이.
“잘……, 잘, 지내요.”
“네.”
“행복하세요.”
마지막 순간까지. 라는 말은 끝내 붙일 수 없었다. 남자는 꽃이 흔들리는 바람 아래 웃으며 돌아섰다.
“따님도.”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는 중정의 정자는 흥겨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그림 같았다. 신관의 신체 능력은 우월하여 조금 먼 거리라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흥겨워하는 마리사를 바라본 나는 살짝 웃었다. 단단한 경갑을 걸치고 머리를 높게 묶은 그녀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무척 즐거워 보였다. 마리사의 옆에서 그녀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는 사람은 조금 전에 보았던 1황녀였다. 마리사가 그녀의 우니카라더니 허물없는 주종 관계처럼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옮기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아올레시아, 나의 모친이 활짝 웃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의 함박웃음에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깨닫고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많이 사랑했구나.
<넌 그 남자를 닮았구나.>
당신은 나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 시간에서만큼은 나의 엄마가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란다. 간절한 소원을 빌며 눈을 떼어 냈다.
아실론과 아올레시아는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다.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을 사랑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한 나날이 있었다. 이 시간만큼은 나의 엄마와 아빠의 해피엔딩이리라.
사박사박. 풀이 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이 멈춰 섰다.
“아모르.”
“로제.”
팔을 벌려 그의 품에 안겼다. 허리와 등으로 단단하고 따뜻한 체온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들자 걱정이 담긴 회녹색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 방긋 웃어 주고는 입술을 열었다.
“돌아가요. 우리 시간으로.”
시간의 힘을 가진 주신의 신관이라서일까. 본능적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친 일기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개방할게.
눈부신 금빛과 보랏빛이 우리를 감싸 안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익숙한 천장이었다.
* * *
“돌아왔네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나를 감싸 안은 팔이 스르륵 풀렸다.
“……그렇군.”
아모르가 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흡사 나를 덮치는 자세에서 양옆으로 짚은 손을 좁혔다. 양팔로 무게를 지탱한 채 나를 응시하는 그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아모르?”
무어라 더 중얼거리던 말은 입술을 덮은 숨결에 읍 하고 막혔다. 그의 입술은 평소보다 조급하고 갈급했다. 꼭 전쟁에 나서기 전처럼 격렬한 입맞춤에 나는 입술을 맞댄 채로 호선을 그렸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의 목에 팔을 걸었다. 이내 숨이 가빴다. 이윽고 긴 숨결의 나눔이 끝나고 천천히 고개를 떼어 낸 그가 내 손을 들어 올렸다.
“하아, 로제…….”
아모르는 녹진하게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름을 중얼거렸다. 목덜미를 지분대던 입술이 천천히 손목을 향했다. 그는 핏줄이 도드라진 곳에 입술을 눌렀다.
“왜 이렇게 급해요. 응?”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입술을 누른 채 그가 눈을 감았다. 섬세하게 긴 은하늘색 속눈썹이 애처롭게 깜빡거렸다. 마치 겨울로 넘어가는 하늘처럼 처연한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잠시라도 너를 보지 못하면 힘들어. 늘…….”
“그거 나도 그런데.”
그의 피부는 무척이냐 얇고 하얀 탓에 금방 붉어지곤 했다. 지금처럼 격렬한 키스 끝에 눈 밑이 달아오른 모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였다.
“한 번 더 할까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쪽하고 맞춘 나는 빙긋 웃었다. 그렇게 그의 목을 살살 잡아당겨 입술을 막 겹치는 순간이었다.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술이 닿기 직전 그가 내 뺨을 그러모아 쥐었다.
“일기장이 그러길, 너를 그대로 놓치면 시간에 표류한다고 하더군.”
까칠하고 서늘하던 그의 눈동자가 풀어지는 순간은 오직 나를 앞둘 때뿐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일기장을 바라보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손 틈으로 이쪽을 응시하던 일기장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입모양으로 ‘간다고!’ 하고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데인에게 갔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뒷목을 톡톡 두드렸다.
“네. 일기장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난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낼 거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일기장도 그리 얘기하더군.”
한번 시간이 엉킨 공간을 뒹굴어 본 나나 일기장이다. 아모르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끝내는 찾아냈겠지. 물론 그와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철렁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불안해하지 않을래요. 그건 오래전으로 충분해.”
행복한 시간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인걸. 고개 숙인 나는 보일 듯 말 듯 미소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모르가 대꾸 대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손에 기대 눈을 살짝 감았다.
“행복한 시간…….”
빛을 받아 연한 녹색이 된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왜인지 고민에 잠긴 얼굴이라 나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
“로제, 나의 폐하. 당신은 나와 함께 오래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겁니까?”
나지막하게 열린 입술에서 살짝 거친 목소리가 나왔다. 뜬금없이 높아진 말에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끄덕였다. 맞아, 나는 아모르와 오래 함께하고 싶다. 당연하다고, 그리 답했건만 아모르는 만족하는 대신 고개를 내렸다. 닿을 듯 말 듯 숨이 가까워진 사이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그 마음에 한 점 거짓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아모르, 왜 그래요?”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을 긁듯 낮고 으르렁거리는 음성은 긴장감을 불러왔다. 그가 나를 잡아당겨 깍지를 낀 손이 위로 올라갔다.
“이건, 몇 년 전에 든 생각입니다.”
사람을 녹진하게 녹일 듯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턱 끝에 입을 맞췄다.
“당신은 앞으로 신관의 수가 차차 줄다가 끝내는 사라질 것이라 했지요. 그렇기에 강대한 신관들이 남은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으로 남은 신관일수록 특히 강할 거라고도요.”
그가 잠깐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폐하, 대결계를 새로 치고 신력을 통합하며 죽은 사람마저 되살린 폐하야말로 이 제국에서 제일 강한 신관이십니다. ……나나 헤르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가 이토록 장황하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말을 높였음을 알았다. 내 손이 그의 눈을 스치자 그가 눈을 감았다.
“강대한 신관은 오래 산다. 또한 수명이 길다. 이것만큼은 저도 압니다.”
눈을 뜨고, 청명한 그의 눈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니 나의 폐하.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사십니까?”
손을 뻗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변명하려 열었던 입을 그대로 닫았다. 그는 가볍게 깨달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랐건만 폐하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한때 전 황제에게 능력과 두뇌를 착취당할 정도로 유능한 이였다. 허공에 멈춘 나의 손을 가져간 그가 내 손끝에 입을 맞췄다. 서서히 올라오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옆을 짚은 그의 손이 있어 피할 곳은 없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아모르이니까 꼼짝없이 갇혔지만 도리어 안락하기만 했다.
“나와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까?”
“…….”
“아이가 당신보다 먼저 죽을까 봐.”
그와 내가 혼인한 지 4년이 흐르는 동안 한 번도 그는 아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막연히 그가 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처럼. 그래. 유년 시절이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 또한 나만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숨길 생각은 없었어.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집요한 그의 시선이 쫓아오는 것을 느꼈다.
“정녕 숨긴 것이 맞군요.”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한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었으면 하고 바라는 게 당연하잖아요?”
“로제, 너만 괴로운 채로?”
“괴롭지 않아요.”
괴롭지 않다. 감수하기로 했던 거니까. 단지 오래 사는 것으로 사랑했던 이들이 전부 돌아왔다. 무엇을 원망하란 말인가? 진실로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신을 만나는 날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니까.
“미리 말을 못한 건 미안하지만…… 아모르가 이 선택을 탓한다고 해도 난 옳다고 여겨요.”
“누가 네 선택을 탓한다고 했나.”
“……네?”
쓴소리를 생각하고 감았던 눈을 떴다. 얼떨떨한 얼굴을 한 내게 아모르가 웃었다.
“함께하고 싶다.”
그가 속삭였다.
……잘못 들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모르는 마치 봄볕 새순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선택에 나도 끼워 달라고 했다.”
“무슨…….”
“내게는 너 없는 삶이 의미가 없는데, 당신에게도 그렇지 않나?”
고개 숙인 그가 귀를 한번 깨물었다가 서늘하지만 달콤한 음성으로 속살거렸다.
“그러니 나의 폐하, 당신이 얼마나 살지 모를 그 긴 영생, 저도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당황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는 붙잡힌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꾸준히 방법을 찾았지만, 마땅한 것을 찾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괴로웠다.”
내 손을 뺨으로 가져다 댄 그가 눈을 감았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속눈썹을 응시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로제. 하지만 이번 시간 이동을 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너와 내가 함께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입술에 그려진 황홀한 미소에 나는 움찔했다.
“……방법?”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네가 내게 신력을 넘겨준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있지 않나?”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죽음의 신관은 신력을 옮길 수 있다 들었다. 타 신관들과 다르게 아무런 손실 없이.”
신력은 곧 생명력이었다. 이 때문에 신력이 강대할수록 오래 살았다. 따라서 죽은 이들을 살리는 대가로 끝없이 강한 신력을 갖게 된 나는 얼마나 오래 살지 알 수 없었다.
내 생명이지만 나조차도 알 수 없는 생, 영생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이런 내가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끝내 내 아이마저 나보다 일찍 죽어 버릴 텐데. 그래서 낳고 싶지 않았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폐하, 당신의 강대한 신력을 내게 나눠 준다면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오래 살겠지.”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 줄 알아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가 먼저였다. 고개를 내린 그가 관자놀이에 입술을 눌렀다. 차근차근 내려오는 입술은 눈썹 뼈와 코끝을 스쳐 입술 앞에서 멈췄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나의 폐하와 함께하는 삶인데.”
“…….”
“무엇이든 아깝지 않은 것을.”
나는 숫제 울먹이고 있었다.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 안돼요……. 당신은 유한한 삶을 포기한다는 게 어떤 소리인지 몰라서 그래요. 평범한 삶을 포기하는 소리란 걸 왜 몰라요?”
아모르가 어떻게 죽음의 신관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나 나도 이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긴 생,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하지만 이기적이었다.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아요. 영생을 살지도 몰라요. 언제 죽을지 모른단 말이야…….”
나라도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모르는 단호했다.
“너를 그 생에 홀로 남기고 가는 것이 더 잔인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가 깍지를 낀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속삭였다. 숨을 들이켜며 절로 눈물이 섞인 음성을 삼켰다.
“말했듯 너를 포기하는 것이 곧 삶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나를 놓지 않았다. 얼굴을 가렸던 손이 부드럽게 붙잡혔다. 마침내 집요한 시선을 마주 보고 말았다. 그것은 간절한 시선이었다. 나를 홀로 두고 가지 말아 달라는 그의 바람.
“싸울지도 몰라…….”
“무한히, 화해할 시간이 있지 않나.”
“갈라서면 어떡해요?”
“이 세상에 멸망이 찾아와도 없을 일을 얘기하고 있군.”
“흡, 내가 바람이라도 피우면…….”
“……내가 눈 돌아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가?”
나는 양손을 붙잡힌 채로 미소하고 말았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듯 만반의 준비를 한 듯한 그를 바라보며 실소가 터졌다.
아모르의 말대로였다. 나의 힘은 너무나도 강해서 누군가를 나와 같은 처지로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각오를 하기에 ‘영원’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대체 그 방법은 어떻게 안 거야.”
“글쎄. 이런 일에 돌아가신 그분의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군.”
그럼에도 그는 나의 벽을 부수고 들어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마침내 웃고 말았다.
“후…… 그래요, 나의 황후님. 선택해요. 자칫하면 인생 종칠 선택인 거 잘 알고 얘기해 줘요. 번복은 받지 않을 테니까.”
갈망하는 녹회색 눈동자를 나는 끝내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삶과 죽음의 사이, 인간의 삶은 무수한 선택이랬어요. 오랫동안 생각해도 모자랄 일이에요.”
“그래서?”
“나는 아모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거예요.”
아모르도 알았을 것이다. 내 등 뒤로 거대하게 펼쳐진 주술의 진을. 그는 이제 와 거짓이라고, 하지 않겠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따님, 당신은 무엇을 바라며 이곳에 왔나요?>
남자는 어디까지 보았을까?
<아모르의 행복을 바랐어요. 아주아주 행복하기를.>
아주아주 강력한 신력으로 빌었던 것은 언젠가 홀로 남을 반려의 행복이었는데.
<당신이 이 시간에 온 것은 이 시간 속에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이미 당신은, 함께 행복할 길을 찾고 있었다.
“로제,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은가?”
“……당신에게 최선인 선택이요.”
자색과 황금빛이 마치 꽃처럼 피어나며 우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영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나를 향하고 있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뚝 떨어졌다. 방울방울 눈물이 나는 가운데서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아모르 또한 싱그러운 숲처럼 웃었다.
“그럼 이미 답을 알겠군. 내게는 오직 하나뿐인 것을.”
아아, 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이런 미소를 바라보고 싶었다. 나를 향했으면 했다.
“영원이 두렵지 않아요?”
“글쎄.”
당신이 나를 부르는 이 이름이 영원하다면 이 긴 삶도 결코 외롭고도 무료하지 않겠지.
신관의 축복이 마치 빛처럼 쏟아진다. 빛의 우화우羽花雨가 사뿐사뿐 떨어졌다.
“네가 머문다면, 어디든 영원히 지지 않을 봄일 테니까.”
깍지 낀 손으로부터 타고 올라간 넝쿨이 꽃을 틔웠다. 그의 입술이 마침내 입술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