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한여름 밤의 꿈
평화로운 제국, 볕이 쏟아지는 어느 아침이었다. 나는 부비적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나른하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고 싶은 아침이었다.
“으응…….”
흐응, 오늘 따라 침대가 크게 느껴지네. 베개가 이렇게 컸던가? 기분은 왜일까, 꼭 거대한 공간에 누워 있는 기분이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열여섯 살 생일이 막 일주일쯤 지난 하루였다. 잠이 별똥별처럼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은 침대와 물아일체 설을 주장해 볼까……. 꼬물거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을 때였다.
‘어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아니 벌떡 일어나려 했음이 맞을 거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으니까.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목이 꿈쩍도 하질 않았다.
‘뭐야, 내 손이 원래 이렇게 작았나?’
꼼지락꼼지락 연신 쪼물딱거리는 내 손은 내 손이었지만 내 손이 아니었다. 아아, 세상에 지금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으에우에으오!”
내가 아기가 됐다고?
* * *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을 뭐라 하면 좋을까.
서른 번 면접 끝에 간신히 붙은 회사에 첫 출근을 했더니 텅 빈 사무실을 보게 됐다거나. 큰맘 먹고 지른 명품이 사실 동대문에서도 안 쳐주는 짝퉁이었다거나.
전부 과거 실화였다는 사실이 참 가슴 아프지만 이정도로 황당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 말이 안 나와!’
고생 끝에 말 대신 울음이 터져 나왔다. 네, 제가 한번 울어 보겠습니다.
“흐어어어엉!”
이미 한바탕 당혹을 치른 하녀들이 얼른 달려왔다.
“앗, 황녀님 배고프세요?”
아니, 한나. 그런 게 아니야. 난 지금 처절한 고뇌를 울음으로 표현한 거야. 내 인생 고뇌라고. 그러니 그 젖병은 치워주겠어?
“……앗! 우유가 뜨거우세요?”
아니 대체, 어디서 젖병을 가져온 거야? 설마하니 어느 하녀의 아이 것을 뺏어 온 건 아니지? 그런 진상은 되고 싶지 않아. 그보다 내 궁엔 혼인한 하녀가 없잖아? ……그럼 대체 어디서 가져온 거야.
“네! 식혀서 드릴게요!”
아니라니까. 나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니 정정. 짚으려고 했다.
‘손이 짧아!’
손이 이마에 닿질 않았다. 팔이 짧아서? 정말? 리얼? 이어지는 황당한 상황에 울음이 나올 것 같다.
“어, 어, 황녀님 피곤하세요?”
그런데 서글프고도 우스운 점이 아기의 몸이라는 게, 말을 하려 해도 울음이, 한숨을 쉬려 해도 울음이. 모든 의사소통은 울음, 울음!
“우에에에에, 흐에에엥!”
눈물이 대학 축제 날 등록금이 포함된 불꽃처럼 펑펑 터져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어이없을 데가!
“어머, 얘! 황녀님 기저귀 갈아 드렸어?”
그만. 기저귀라니? 듣고 싶지 않아. 아무리 환생했다지만, 이딴 적나라한 배변 활동 공개는 패스하고 싶단 말이야! 내 손으로 화장실도 못 가는 몸이라니 누가 꿈이라고 알려 주겠어? 더는 내게 굴욕을 안겨 주지 않길 바란단다.
조금 전까지 난리 났던 하녀들이 진정한 것과 달리 나는 여전히 패닉 상태였다. 차라리 정신도 함께 역행해서 함께 아기가 되었으면 편했으련만. 슬프게도 나는 무섭도록 제정신이었다.
아, 잠깐. 슬픈 생각을 하니 또 눈물이 터지잖아.
“흐어엉!”
잠시 뒤 나는 벌게졌을 게 분명한 눈으로 쿨쩍 숨을 들이켰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아기 몸이 상당히, 아니 매우, 매우매우매우 불편하다는 걸. 왜. 왜! 내 몸인데 울음이 내 마음대로 멈춰지지 않는 건데?
“황녀님. 뚝!”
“흐우웁, 흐우웁.”
마치 임신 말기 라마즈 호흡하는 임산부 같은 숨쉬기를 따라 한다. 또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인데 한나는 육아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아이 착하다. 황녀님. 잘 하셨어요!”
얼핏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동생들이 있다 들었었는데, 조련이 수준급이다. 그래 난 어린 짐승이지 뭐. 나도 내 몸에 적응 중이었으니까.
“얼른 새 기저귀를 가져올게요!”
한나가 잠시 나를 두고 문을 열었다. 그 사이 레네가 말을 건다. 별 시답잖은 장난스런 말들이었다. 거 참. 정신까지 아기가 된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전할 방법도 없고.’
딸랑이를 갖고 감흥 없이 흔들고 있을 때였다. 어째서인지 소식을 전해 들은 오라버니들이 하나둘씩 나를 찾아왔다. 문이 쾅 열렸다.
“맙소사. 이게 망할 내 병아리라고?”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플뢰온이었다. 정무 도중 달려왔는지 펄럭펄럭 토가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오더라. 심지어 회의 때만 쓴다는 황자의 관을 그대로 쓴 채였다. 설마, 회의 도중 나온 거야?
“으부?”
나도 모르게 물었으나 나온 것은 정체불명 언어였다.
“……뭐라는 거야?”
오, 맙소사. 새삼 이 상황이 거지 같음을 자각했다.
“미쳤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너희는 뭘 했어?”
“화, 황자님. 그, 그것이…….”
저기, 하녀들에게 뭐라고 할 일이 아니거든?
인성 어디 안 간다더니 쟤가 오자마자 애먼 사람을 잡는다. 성질을 못 이겨 하녀들을 다그칠 줄이야. 그래, 이래야 내 글러 먹은 큰 오라비였다. 하는 수 없지. 나는 빼애액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뭐야. 시끄러워!”
의사소통이 이런 걸로밖에 안 된다. 젠장.
“너 항의하냐?”
한 번 더 빼액 질렀다.
“에잇, 시끄러워. 안 다물어?”
“화, 황자님 황녀님의 입을 그렇게 잡으시면……!”
아기가 되어서 좋은 점을 하나 찾아냈다.
“흡. 후에엥.”
“……어라.”
바로 플뢰온이 당황한 얼굴을 보게 된 거.
“흐어어어어엉!”
그는 하녀들을 다그치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서 눈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날카롭게 올라간 그의 눈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곧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 같았으면 한 대 때렸을 타이밍인데 말이다.
“무, 뭐야! 다, 다, 달래 봐!”
이때 막 들어오던 한나가 잽싸게 나를 받았다.
“쉬이이 황녀님, 놀라셨죠?”
플뢰온은 황당함 반, 얼떨떨한 반인 얼굴로 나를 달래는 한나를 보았다.
“네. 괜찮아요. 우리 황녀님 많이 놀라셨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녕 한나. 플뢰온이 지랄에 시동을 걸기에 대뜸 울어 버렸단다. 저놈도 저놈이지. 너희한테 다그칠 건 뭐야.
곧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나이 먹고 으뱌뱌, 으뱌뱌뱌 하고 있는 이 상황은 뭐야! 애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거지같은 노 버프 환생으로도 모자라 몸만 역행이라니. 수치심까지 풀로 안겨 주려는 건가. 이 각박한 세상에 보너스까지 주다니 참 환상적인 인성이군 그래.
혹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훗날 죽어 천국에라도 가면 신을 냅다 후려갈길 거다. 당신을 조져 버릴 인간이 있다면 바로 나일 테니까. 염병할. 세상에 나와 같은 피해자가 또 있다면 부디 나를 센터로 세워 주길. 창조주가 멋대로 선택해 버린 삶에 반환을 제기하고 싶으니까.
“그, 그쳤어?”
당황을 숨기지 못하던 플뢰온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이리 내.”
그러고는 빼어 들듯이 나를 안았다. 문제는 그가 안는 게 몹시, 모옵시 불편했다는 거다.
“야, 머리 쥐어뜯지 마! 야!”
이봐, 오라비, 너 애 안아 봤냐? 하기야 유아독존으로 살아온 네가 어찌 알겠냐. 불편해. 불편하다고!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불편을 토로했다.
“아우아우어!”
“……뭐래. 이거 진짜 병아리, 아니 짐승이 됐잖아?”
“형, 아실리한테 이거가 뭐야. 이거가.”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데인이었다.
“얼굴 좀 봐. 빨개졌잖아.”
플뢰온보다 훨씬 침착한 그는 이미 모든 사정을 건네받은 듯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리 줘.”
몸이 붕 떠올랐다.
“어, 어어. 야 얘 잘 운다?”
“그건 형이라서 그런 거고.”
“뭐야?”
어정쩡하게 안고 있던 플뢰온에게서 나를 받아 온 데인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스럽게 그가 안자 훨씬 편안해졌다.
“안녕, 아실리.”
플뢰온 쪽을 보면서 고개를 내저은 데인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역시 잘생긴 오라비는 언제 봐도 흐뭇하구나. 플뢰온과 달리 데인의 품은 안락하기만 했다.
“얘긴 들었어. ……믿기진 않지만.”
맞아. 나도 믿기지 않아. 인상을 찡그렸다. 곧 데인의 코가 뺨에 비벼졌다.
“아기가 되어도 사랑스럽네.”
데인이 웃었다. 꿀처럼 달콤하게 미소한 얼굴. 예쁘게 휘어지며 나를 담는 눈은 석류알처럼 붉었다.
“응. 예뻐.”
오후의 빛을 받은 홍채는 반짝반짝했다.
“응? 뭐라고?”
나는 얼른 말을 뱉어 냈다. 그러나 나온 건 ‘으버버’ 하는 정체 모를 소리였다. 너도 잘생겨서 질식사할 것 같다고. 그런데 언어로 표현이 안 되네. 참 아쉬운 일이야.
“나도 예쁘다고 말해 준 거야?”
아무래도 아기들은 본능적으로 손에 들어온 것을 꼭 쥐나 보다. 난 가까이 다가온 데인의 머리칼을 쥐고 흔들었다. 세상에 되게 부드럽네? 나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아. 관리 받는 건 난데 왜 네가 더 예쁜 걸까.
“……아실리? 내 말 들려?”
“꺄아!”
그의 말에 맞춰서 손을 흔들자, 데인이 얼굴을 굳혔다. 잠깐 뭔가 생각하는 얼굴이던 그는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아실리, 너 지금 내 말 알아듣고 있는 거지?”
그래. 그거라고! 역시 데인이었다.
“내 말을 이해하면 한 번만 크게 소리 내어 줄래?”
내가 소리를 크게 내자, 그는 잽싼 얼굴로 다시 물었다.
“좋아. 그럼 질문을 할 테니, 맞으면 한 번, 아니면 두 번을 외쳐 줘. 어쩌다가…… 갑자기 이렇게 된 거야?”
“꺄아!”
“혹시 잘못 먹거나, 누가 갑자기 네게 찾아와 신성력을 행사했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
“으야야야!”
“그래. 그러니까 너도 이유를 모르는 거지?”
맞아! 얼른 한번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쳤다. 데인은 잠깐 고민에 잠긴 것 같았다.
“……신관의 저주인가.”
그러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방법을 찾아보자.”
* * *
“으음, 송구하오나 황자님…….”
새하얀 법복을 입은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아기에게서는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습니다.”
“징조?”
“예. 보통 저주의 경우 몸 어딘가에 물리적으로나 신력으로나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보이지 않는다.”
“예.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노인이 제 턱수염을 훑었다. 그는 고위 치료 신관으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해 멋쩍은 모양인지 데인의 반대쪽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가만히 턱 끝을 치던 데인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보이지 않는 종류의 저주도 있나?”
“글쎄요…….”
치료 신관이 고개를 저었다.
“소신이 아는 한 그런 저주는 없습니다.”
“알겠네.”
몸이 붕 떠올랐다. 눈만 올려다보니 나를 들어 올린 데인의 갸름한 턱이 보였다. 그의 속눈썹이 한번 깜빡일 때 그려내는 옅은 그림자가 청초함을 드리웠다. 세상에. 미남은 아래에서 봐도 완벽하구나.
“그럼 가 보지.”
“예.”
치료 신관이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대로 등을 돌리려던 데인이 멈칫했다.
“아. 그리고 오늘 일은 비밀로 해 주었으면 해.”
데인이 고개만 기울여 웃었다. 그의 시선이 정면으로 보이지 않지만 아마 사람을 홀리는 웃음을 짓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겠습니다.”
오늘 일이란 아기가 된 나, 정확히는 7황자가 수상한 아기를 데려다 진찰을 받게 한 것을 말하는 거겠지? 그나저나 왜 저 할아버지는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답한대?
“어려워하지 않으면 좋겠네. 그대가 잘만 지켜 준다면 ‘빚’은 없는 것으로 할 테니까.”
데인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지만 안겨 있던 나에게는 자세하게 들렸다. 살짝 좁아졌던 데인의 눈 또한 보였다. 그나저나 빚이라니, 뭐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데인의 목소리는 작았건만 신관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대답하는 신관의 목소리는 왜인지 잘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기도 전에 데인이 몸을 돌려서 볼 수 없었다. 나는 잠시 말없는 데인의 얼굴을 보며, 조금 전 대화를 생각했다.
음, 방금 거 꼭 책 속에서 속내를 숨기던 캐릭터가 순간 본모습을 드러냈을 때, 라고 명명하면 딱 좋을 장면이었는데.
‘에이, 설마.’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데인은 나나 플뢰온과 마찬가지로 힘없는 황족 중 하나다. 힘을 가진다면 무엇을 얼마나 가질 수 있겠나. 무엇보다 그는 그런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리며 데인을 잡았던 모양이다.
“왜? 아실리?”
마주한 데인의 낯은 대낮에 마주한 천사처럼 어여뻤다.
“불편해? 다시 안을까?”
그리고 순하게 휘어지는 눈매는 조금 전 가정을 날려 버리기 충분했다. 그래. 저 신관에게 돈이라도 빌려준 모양이지. 플뢰온이 데인에게도 돈은 충분하게 주니까. 나는 머릿속에 ‘데인 흑막설’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을 지워 버렸다.
‘암, 말도 안 되지.’
데인은 책 속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엑스트라였다. 그런 그가 험한 일을 할 리가. 건국제가 가까워지면서 나도 참 우울했나 보다.
그나저나 이 몸을 어떡하면 좋을까. 레베카가 얼른 파트너를 구해 달라 닦달하는 이 시점에 아기가 되었다니 골치 아프다. 심지어 골을 잡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환장할 일이고.
아, 안 돼. 찡그리면 운다. 운다. 마인드 컨트롤을 할 때였다.
‘데인?’
데인이 멈춰 섰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낯선 이가 걸렸다. 그는 이 따뜻한 날에 망토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키와 덩치를 보고서 남자이구나 싶었다. 살짝 보인 입술이 떨어질 때였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데인이 말을 가로챘다.
“예. 아니오. 고개만 끄덕여. 바쁜 일이야?”
남자의 살짝 드러난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이내 그가 끄덕였다.
“…….”
무슨 일일까. 데인의 굳게 닫힌 입매가 보였다. 바람이 불며 얼굴 옆에서 무언가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잡아서 보니, 데인이 늘 하고 다니던 목걸이였다. 수레바퀴 모양의.
“지금은 곤란해.”
데인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근처의 숲이 흔들렸다.
“여기 있었냐?”
잎을 해치고 나타난 사람은 플뢰온이었다.
“잠깐 있다 온다며! 너, 곧 회의가……. 뭐야.”
플뢰온이 데인과 낯선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저놈은 네 민족 아니냐? 특히 저놈은 네…….”
“형. 거기까지만 해.”
순간이지만 데인의 목소리가 꽤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래. 좋아. 얼마나 급한 일인지 한번 가 보지.”
데인이 나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잠깐 울상을 지은 것 같았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보지 못했지만.
“아실리,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줘.”
정신 차리자 나는 플뢰온 품에 안겨 있었다. 데인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금방 올게.”
그렇게 말하고 데인은 등을 돌려 가 버렸다. 데인이 가는 뒷모습을 보며 하베르미아의 달에 그와 헤어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싫어. 그만. 심장 곁이 바늘로 찌른 듯 아팠다. 그러나 아기여서일까, 아픔도 서글픔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순한 뇌라는 걸까.
나는 금방 평온한 기분이 되어서 하늘을 바라봤다. 왜인지 벙 찐 첫째 오라비의 얼굴이 보였다.
“야……. 이 미친놈…….”
얼이 빠진 플뢰온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 회의 가야 한다고…….”
당황한 오라비의 얼굴은 돈 주고도 못 볼 희귀한 광경이었다.
* * *
6행정청 솔라토노스. 통칭 이리의 수하들이라 불리는 6행청 소속 신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리의 수하들. 그들이 이리 불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의 수장 ‘재무관’, 플뢰데온 클라체가 바로 이리의 대신관 후계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리의 신관은 곧 대장장이 신 불카누스의 신관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리는 대장장이 신이 가장 아끼던 동물이다. 대장간에서 가장 신성시 여겨지는 동물이었는데, 이곳 솔라토노스에서는 조금 다르다. 여기서 이리는 그들의 수장과 같은 동물이다. 어떤 점에서냐.
“뭘 보냐?”
저 불같은 성질머리 말이다.
“지금 노려봤냐?”
“아닙니다!”
그들의 수장인 플뢰온은 하루가 멀다 하고 기분 좋은 날이 없었다. 하기야 일하기를 싫어했으니 일터에서 죽상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플뢰온의 얼굴은 다른 날과 달랐다. 얼굴뿐 아니라 상황도 그랬다.
“야. 대체 저……. 저……. 뭐라고 해야 해? 아무튼 저 애는 뭐냐?”
“낸들 알겠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6행정청 소속 관리들은 얼굴을 서로 맞대고 쑥덕거리기 바빴다. 이게 전부 6황자가 뜬금없이 데려온 아기 때문이었다.
아기, 아기라니? 이 복잡하고 바쁜 일터에?
행정청 중 가장 바쁜 4행정청이나 2행정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6행정청도 바쁜 곳이다. 그런 이곳에 플뢰온이 당당히 나타난 것이 바로 10분 전이었다. 제발 30분만 일찍 와 달라고 사정사정했건만 당당하게 지각까지 해 주시면서 말이다. 물론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손에 아기를 달랑달랑 안고 온 것이다. 그 성질 더러운 수장이!
6행정청에는 비상이 걸렸다. 가뜩이나 바쁜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보다 오늘 2행정청이랑 회의 날이잖아!”
그랬다. 무엇보다 오늘은 2행정청과 한 달에 한 번 있는 월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대체 뭐냐고!”
1분이라도 일찍 와서 회의록 검토해도 모자랄 시간에 어디서 보따리 같은 아기 하나를 짊어지고 왔으니 6행정청 신관들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야, 렉스! 말 좀 해 봐. 넌 저분 보좌관이잖아!”
화살은 렉스에게로 돌아갔다. 차마 플뢰온에게 한마디 할 수 없던 그들은 렉스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물론 이야기 소리가 플뢰온에게 들리지 않게 소리를 죽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기분을 풀어 줄 렉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라고 알겠냐?”
렉스는 억울한 기분이었다. 이 순간 가장 심정이 복잡한 사람은 그일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플뢰온이 어린 시절부터 그를 모시던 사람이다.
‘저 애는 어디서 나타났냐고.’
그런데 모르겠다. 플뢰온의 인간사, 역사, 심지어 애정사까지 꿰고 있건만! 모르겠단 소리다.
‘아니! 저건 누가 봐도…….’
그렇지만 저 모습을 보라. 불편하게 보이긴 해도 아기를 소중히 품고 있다니? 털 날려서 들짐승도 날짐승도 싫어하던 이가!
‘아무리 봐도 자기 딸이잖아!’
렉스가 울컥해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대체 저분이 어떤 귀한 댁 따님을…….
“말도 안 돼!”
렉스의 비명은 아슬아슬하지만 고요하던 균형을 깨트렸다.
“뭐가 말도 안 돼?”
가만있던 플뢰온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황자님 너무하십니다!”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제게, 말씀도 없이! 아이를…….”
억하심정이 몰려온 렉스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용기 낸 다른 신관이 소심하게 외쳤다.
“마, 맞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레, 렉스 이놈이 황자님을 어떻게 키워 드렸는데!”
“뭐야? 누가 누굴 키워!”
플뢰온이 성질을 냈다. 그와 동시의 그의 팔이 살짝 기울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후응, 후읍, 흡.”
평온했던 아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후애앵!”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야, 야! 너희 때문에 울잖아!”
당황한 플뢰온이 소리를 높였다. 6행정청 관리들은 억울하단 표정을 했지만 서러운 게 바로 개똥 말단이라고 얼른 합죽이가 됐다.
“아니, 얘. 왜. 왜 울지? 야? 병아리. 왜 우는데?”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신기한 기분이었다.
“레, 렉스! 어떻게 좀 해 봐!”
“예, 예? 절더러 어떻게 하라는…….”
유아독존. 제 위에 사람 없고 제 밑에 발닦개만 존재하는 줄로 아는 이가 바로 그들의 수장 플뢰온이었다. 여기서 더럽고 치사한 꼴 안 당해 본 이를 꼽기가 어려웠다. 없으니까. 그런데 그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심지어 목까지 붉게 물들이자 그들은 조금 통쾌하기까지 했다.
아기는 계속해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지켜보던 누군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저, 황자님……. 목을 가누지 못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안으면 보통 아기는 불편해합니다.”
플뢰온이 잽싸게 말을 꺼낸 이를 노려봤다. 그는 여기서 그나마 플뢰온에게 덜 당한 하급 관리 헤테스였다.
“내 병아리가 불편해하는지 배가 고픈지 어떻게 알아?”
“그……. 어떻게라고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
“왜?”
헤테스가 멋쩍은 얼굴로 옆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애를 셋 키운 아빠입니다. 황자님.”
“…….”
그렇게 육아 경험이 풍부한 프로 아빠의 등장으로 아기는 울음을 그쳤다. 아기, 아실리의 입장에선 걸린 시간이 속 터질 정도로 느렸지만 말이다.
‘부탁이니까 쟤 말고 다른 사람이 좀 안아 줘!’
그렇게 열심히 어필했건만 누구도 자신의 뜻을 알아채지 못해 다시 플뢰온의 품에 안긴 아실리였다.
‘……이번 생은 망한 게 분명해.’
그나마 헤테스 덕에 전보다는 편한 자세라는 게 위안거리였다.
“2행정청 관리들이 도착했습니다.”
잠시 뒤, 2행정청에서 온 관리 및 신관들이 도착했다. 부행정관을 중심으로 들어오던 이들은 그대로 흠칫했다. 중앙 상석에 앉아 있는 플뢰온을 봤기 때문이었다.
회의석은 긴 직사각형 형태였다. 가로변 상석에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었는데, 각각 2행정청 대표와 6행정청 대표가 앉는 자리였다. 당연하겠지만 6행정청의 대표는 수장인 플뢰온이다. 그러나 2행정청의 대표로 온 대신관은 해괴한 풍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화, 화, 황자님?”
대신관이 말을 더듬으며 운을 뗐다.
“신의 눈이 멀지 않았다면 안고 계신 것은…….”
“아기지.”
플뢰온이 대꾸했다.
“예, 예.”
“뭐 해?”
“……예?”
“회의 진행해.”
몹시도 태연한 플뢰온의 반응에 더욱 당황한 2행정청 대표가 얼른 6행정청 관리를 바라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것이냐?’
그러나 6행정청 관리들은 짜기라도 한 듯 뻔뻔한 얼굴이거나 슬쩍 눈을 피했다.
‘이리의 수하들이 하나같이 뻔뻔하다더니!’
행정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수하는 수장을 닮는다고. 대표적인 예가 4행정청에 무식할 정도로 힘만 센 수장 아래 힘으로 말썽을 부리는 순찰대 케레스와 바로 이 6행정청이었다. 2행정청 대표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을 했다.
“뭐 해? 회의 진행하라니까.”
도대체 언제쯤 시작하는 거지?
“회의를 시작하자고 했을 텐데.”
얼른 아실리를 편한 곳으로 데려다주고 싶은 플뢰온이 짜증을 냈다.
“그대는 나의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나?”
플뢰온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왜. 그대도 내가 신관이 아니라 우습나?”
사나워진 얼굴은 청년답지 않게 기세등등하며 오만했다. 괜히 개인주의자들의 집합소인 이리 떼를 이끄는 수장이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송구합니다. 늙은이가 노망이 들어 황자님의 심기를 어지럽혔군요.”
대신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적어도 6황자가 가진 몸에 밴 우아함과 위엄만은 진짜였다. 설사 신관이 아니라도 말이다.
“주의하겠습니다.”
2행정청 대표의 사과를 마지막으로 회의가 시작했다. 회의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 이어졌다. 회의 중간에 젊은 신관들이 흘끗흘끗 플뢰온 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아기가 있는 쪽이었다.
‘거 신통방통하게 한번 울지도 않네.’
아주 작은 아기인 데다, 이 공기가 답답할 법도 한데 울지도 않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더구나 자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어여뻤다. 몰래 눈치를 보던 한 신관이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기가 방긋 웃더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신관은 심장 근처가 아렸다. 세상에, 이래서 결혼을 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 신관은 금혼령의 신관이었다. 그는 곧 피눈물을 흘렸다.
‘아이고, 내 신세야.’
하필이면 금혼령 신관이라 토끼 같은 자식도 보지 못한다! 이렇게 억울한 것은 처음이었다. 한편 아실리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니, 다들 왜이래? 회의라면서 왜 다 손을 흔들어? 컵을 둥둥 띄우는 건 웃어 달라는 거야?’
나이를 불문한 신관들이 그녀에게 재롱을 떤다. 그래, 저건 재롱이라 표현하는 게 적합했다.
‘……언제까지 웃어 줘야 하나.’
아실리는 머리를 붙잡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차피 닿지도 않을 테지만. 이미 순찰대라는 막강한 팬 부대에 익숙해진 아실리는 영혼 없이 그들의 재롱에 반응해 주었다.
“잠깐 쉬지.”
기나긴 회의가 잠시 휴식을 맞이했다. 관리들과 신관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한숨을 내쉬었다. 몇몇 젊은 신관들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상관의 눈을 피해서 회의 시간 내내 필사적으로 아실리에게 재롱을 떨던 이들이었다.
‘저렇게 귀여울 수가!’
그들은 아실리의 통통한 뺨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저렇게 귀여우니 말이라도 걸고 싶은데 곁에 6황자가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볼 한번 찔러 봤다간 인생에 종이 칠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일어나던 그때였다.
“저, 황자님…….”
말을 꺼낸 이는 2행정청의 대표였다. 그는 창과 방패의 신 대신관으로서 이 상황에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바로 자신이 대표로 무엇이든 물어봐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뭐지?”
플뢰온은 심기가 불편했다. 긴 시간 내내 꼼짝 않고 앉아 있던 아실리 때문이었다. 육아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적어도 원래 애들이 지루한 시간에 얌전하게 있는 게 애다운 행동은 아니란 것은 알았다.
‘병아리, 눈 뜨고 기절한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저조해졌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긴장한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그…… 아기…….”
“아―기?”
“아, 아기님은.”
대신관이 재빨리 정정했다.
“크흠, 그 아기님은 대체 누구십니까?”
누구시길래, 그 성질머리가 유명한 황자가 금덩이 안듯 소중하게 안고 있느냔 말이다. 그것도 이 긴 회의 시간 내내! 심지어 대신관이 아는 플뢰온은 진짜 금덩이라도 이렇게 안을 인간이 아니었다.
“그거야 내…….”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던 플뢰온이 당황했다. 아기가 아실리란 사실은 비밀에 붙이기로 했다. 특히나 데인은 범인을 모르니 조심 또 조심하라고 했다. 막 병아리라 말하려던 플뢰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애매한 곳에서 말이 끊긴 덕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더욱 귀를 기울였다.
“내…….”
가장 불안한 사람은 누구도 아닌 아실리였다. 대체 이 오라비가 무슨 소릴 하려고. 익숙한 불안감이 뒷목을 잠식했다. 모두의 불안과 기대를 안은 플뢰온의 입이 떨어졌다.
“내 딸이다!”
그리고 오라버니의 시답잖은 변명은 아실리의 비명을 토해 내게 만들었다.
‘야, 이 미친놈아!’
싸늘한 공기가 몰아친 회의실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가득 메웠다.
* * *
“아하하하!”
데인은 배꼽을 잡고 뒹굴었다. 나무에 등이 쿵쿵 부딪쳤지만 아랑곳 않는 모습이다. 좀처럼 볼 수 없던 데인의 희귀한 함박웃음이었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딸이라고 한 뒤에? 어떻게 됐는데?”
“뭘 어떡하긴. 갑자기 렉스 그놈이 벌떡 일어나서…….”
“일어나서?”
“……울던데.”
그다지 유쾌한 기억이 아니었는지 전달하는 플뢰온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반면 데인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커지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데인이 눈물을 훔치며 일어났다.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데인이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플뢰온이 눈썹을 휙 휘었다.
“뭐야? 네놈만 있었어도 이렇게는 안 됐어. 원래 2행정청 대표로 네가 오기로 했잖아.”
“맞아. 2황자 형님 대신 가기로 했었지.”
데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잠시 바쁜 일이 생겼지만.”
데인이 낮게 덧붙였다. 고개를 돌린 데인은 잠시 하늘을 향했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마침 눈을 깜빡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봄바람이 살랑였다. 이곳은 봄인지 여름을 앞둔 늦봄인지 늘 따뜻하기에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나를 향한 얼굴에서 계절을 느꼈다. 네 얼굴에 잠시 봄이 깃들었다.
“지금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네.”
데인은 깃털처럼 포근하게 미소하며 내 뺨을 감싸 쥐었다.
“있지…… 이럴 땐 스스로 신관이 아니란 것에 자괴감을 느껴.”
그가 보드라운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데인의 손이 시야를 한가득 채우고, 새삼 내가 작아졌음을 느낀다. 조금 뒤 다시 빛이 쏟아지는 것과 함께 놀라울 정도로 예쁘게 웃는 미남이 있었다.
“내 아실리.”
가까이서 본 그의 홍채가 빛을 붉게 난반사한다. 마치 찬란한 태양 같았다.
“돌아오면 지금처럼 사랑스럽게 웃어 줘.”
미남의 미소를 독차지한 것에 좋아해야 할까. 사실 데인이야말로 내 취향에 가장 걸맞은 마스크인데. 넌 왜 오빠니? 새삼 이 외모가 아깝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웃어 주었다.
“꺄아!”
아기의 근육이란 어른보다 부드러운 모양이다. 평소보다 부드럽게 올라간다.
“넌 아기가 되고서야 편안하게 웃는구나.”
데인은 조금 서글프게 웃었다.
“레이, 아실리를 4황자 궁으로 데려다줘.”
“뭐?”
플뢰온이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질 했다.
“너 미쳤어? 왜 저놈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맡겨?”
“그럼 누구에게 맡겨?”
“저놈 손에 맡기느니 내가!”
“형은 나랑 다시 돌아가야지. 회담 중간에 뛰쳐나왔잖아.”
데인이 빙긋 미소했다.
“가 봐야지. 형도. 나도.”
그러나 오래 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데인 또한 아쉬운 얼굴이었다.
“레이, 조심해서 데려가.”
레이 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데인의 뒤로 뚱한 표정의 플뢰온이 보였다. 안하무인, 제 위에 사람 없는 제멋대로인 큰오라비였지만, 데인에겐 꼼짝 못했다. 역시나 끌려 나간다. 물론 조용히 끌려 간 건 아니었다.
“야, 놔 봐! 저놈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가 복도 저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욕설이 들렸으니까.
고요히 보던 레이 경이 한마디 했다.
“데인님께서도 고생이 많으시군요.”
왜 아니겠어.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 *
“날씨가 좋군요.”
제국이 날이 좋지 않은 적 있던가 뭐. 그런데 이상했다. 원래 몸으로는 감흥 없이 느껴지질 않던 하늘이 몹시 예쁘게 보였다.
여름 하늘, 미지근한 바람. 녹색빛 나무 그늘. 잎새가 사각사각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려진 몸처럼 꼭 감정도 죽기 전 어린 시절 그대로 돌아간 것 같다. 더 선명하고, 더 화사하고, 더 순수하게 다가오는 것들.
“황녀님.”
어째서일까, 레이 경이 잠깐 나를 복잡한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꼭 사고 친 나를 보듯이, 감당 안 되는 걸 보는 눈? 근데 이건 내가 친 게 아닌데 말이다.
“……당신은 어린 아기님이 되고서야 활짝 웃으시는군요.”
레이 경이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건 바람에 가려,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아실리 님, 이기적이지만, 당신이 얌전히 안겨 있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으야.”
그가 나를 힘주어 안았다.
“적어도 위험하지 않을 테니까.”
왜일까, 난 그가 부르는 아실리 님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지금 그가 날 부르는 이름은 이전보다 조금 달게 들려왔다.
‘레이 경과 달콤함이라니.’
마른 오징어와 와인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는 조합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않아서 도리어 이상한 기분이었다.
“잡담이 길었군요.”
그는 나를 안고 뚜벅뚜벅 걸었다. 하나였던 발소리가 두 개가 되었다. 곧 그는 테레나 궁 정면에서 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레이 경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퀴타 경?”
그가 인사를 한 사람은 레베카였다. 레베카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딜 가는 길이죠? 지금 6행정청에 있어야 하지 않나요?”
“데인 황자님의 심부름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레베카의 검은색 눈이 우아하게 굴러 나를 향했다.
“꺄아!”
‘안녕, 시녀님.’
나는 눈이 마주친 레베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미소는 덤이었다. 아니, 난 딱히 웃을 생각이 없었는데 레베카를 보자마자 절로 떠오르는 것이, 난 미녀에게 약한 게 틀림없다. 자동 반사적으로 웃어졌단 말이지. 이걸 보면 아기의 몸이란 참 단순한가 보다.
“잠깐.”
곧 경악하는 레베카를 볼 수 있었다.
“설마, 황녀님?”
아. 역시 내 시녀님. 유능한 시녀님답게 단박에 눈치챈 모양이다. 머리 색이나 눈 색이 판박이니까 당연한 건가?
“아, 아기가 되셨다니요?”
그리고 레이 경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레베카는 플뢰온이나 레이 경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또 무슨 사고를.”
아니. 잠깐. 왜 다들 내가 사고를 쳤다 생각하는 거야?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볼을 부풀이며 레베카에게 항의했다. 억울하다.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손가락질이 안 된다니.
“……아퀴타 경. 황녀님께서 무어라 하시는 거죠?”
“글쎄요, 억울하다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레이 경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원래 사고 치신 뒤에 아닌 척하시지 않습니까.”
“아아.”
내가 언제. 레베카 넌 왜 끄덕이는데? 뭐 맞다고? 왜 맞장구치는데? 왜 공감한다는 얼굴인데? 무척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이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아기가 돼서도 하나같이 놀라는 대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얼굴로 보는 거지?
“아무튼. 데인 황자님 명에 따라 테렛 궁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 4황자님께 가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레이 경이 가볍게 끄덕였다.
“확실히 그분이라면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약에 능통하신 분이니.”
“예.”
무뚝뚝한 검사님과 도도한 시녀님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사실 둘 다 표정 변화 없이 딱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인물들이었다. 보는 내가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레베카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래요, 어려진 황녀님을 뵙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군요.”
그러고는 얼굴을 가까이한 채로 속삭였다. 그녀가 나를 부르고는 작게 웃었다.
“흐응, 주인님.”
나는 내게 뻗은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레베카가 이내 휙 검은 눈을 휘었다.
“이리 작아지시니, 꽤 어여쁘시군요.”
와, 데인에서부터 느낀 거지만 미인은 가까이서 볼수록 진국이구나. 티 하나 없이 맑은 흰 피부, 장미를 머금은 듯 붉은 입술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리 홀리시니, 어찌 욕심나지 않습니까. 주인님.”
“으야?”
“잠시나마 이리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시네요.”
머리칼 색과 같은 고운 그녀의 속눈썹은 꼭 나비의 날갯짓처럼 움직였다. 흑요석같이 까만 눈동자가 잠시 유혹하듯 농밀한 빛을 띠었다.
“어때요. 주인님. 3일만 이 모습을 해 주시면.”
그녀가 내 손을 잡아 쥐었다. 그 순간 까칠하고 도도하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아찔하게 웃음을 그렸다.
“제 방에서 주무시겠어요?”
……지금 좀 위험했어.
“뺘!”
아니, 아니아니! 지금 이 시녀님이 무슨 무서운 말을 하는 거야. 나를 유혹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황급히 그녀의 손을 놓고 아기어인지 모를 외계어를 나오는 대로 쏟아붓자, 레베카는 빙긋 웃었다.
“농입니다.”
어느새 그녀는 원래의 도도하던 모습 그대로 돌아간 뒤였다.
* * *
레베카와 헤어지고, 레이 경은 테렛 궁에 도착했다. 나는 줄곧 그의 품에 안긴 채였다.
“어머나.”
4황자 궁의 하녀들은 아기를 품에 안은 검사가 등장하자 희한하게 보았다. 레이 경은 그중 한 사람에게 다가가 목적을 밝혔다. 이후 나타난 하녀장이 기꺼이 아모르의 방으로 안내했다.
“황자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침대에 편히 기대어 있던 아모르가 우리를 반겼다.
“넌…… 7황자의 검사?”
평온하던 얼굴은 금세 찡그린 낯이 되었다.
“어쩐 일이지?”
아니, 표정을 보아하니 반긴 건 아닌 것 같고. 평소의 까칠한 낯이 더욱 구겨진 느낌이다. 경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레이 경을 느슨히 노려보던 아모르의 얼굴이 천천히 나를 보더니 성마르게 홱 찌푸려졌다.
“……이건 또 뭐야.”
왜.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나는 애써 눈을 휘어 주었다. 플뢰온이랑 레베카도 홀딱 넘어갔으니 당신도 넘어가라는 의미로. 그러나 더욱 깊게 찡그린 아모르가 보였다.
“아실리?”
놀랍게도 아모르는 단박에 나를 알아맞혔다. 레베카에 이어 나를 맞춘 아모르를 보며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떻게 다들 한 번에 알아맞히는 걸까? 그렇게 판박이인가. 뺨에 이름이라도 적혀 있나. 거울을 볼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7황자님께서는 의술에 유능하신 황자님께서 방법을 아시지 않을까 하여 저를 보내셨습니다.”
천천히 내게서 눈을 떼어 낸 아모르가 흘끗 레이 경을 향하며 비웃었다.
“의술이라? 그것이 아니라 독이겠지. 사람을 죽이는.”
“……저는 들은 대로 고할 뿐입니다.”
아모르가 고갤 숙여 픽 웃었다.
“놓고 가라.”
“……예?”
“못 들었나? 여기 침대에 내려놓고 가라고.”
“…….”
“불만 어린 눈이군. 내 친히 검사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이라도 해 주란 소린가?”
“아닙니다.”
잠시 이를 사려 문 레이 경이 천천히 걸어갔다. 아래에서 단단히 다물린 턱이 보였다. 경은 불만 어린 표정을 할 때 꼭 턱에 힘을 주곤 했다. 레이 경의 손이 떨어지기 직전에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꺄아!”
‘나는 괜찮아.’
괜찮다는 듯이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목이 짧아 그가 제대로 보았을지 의문이지만 전달되길 바라며.
“……늦어지면……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래, 레이 경. 아모르가 내게 위해를 끼칠 리 없지만. 그렇게 해서 레이 경이 만족한다면야.
레이 경이 문을 닫는 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렸다. 잠시 침묵이 남은 방. 천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천장만 보이던 시야로 은실 같은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그리고 숲을 닮은 녹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물끄러미 보던 아모르가 불쑥 말했다.
“정말 닮았군.”
당연하지. 나니까. 그럼 내가 나를 닮지 누굴 닮겠어?
옹알이하듯 받아친 내 목소리에 아모르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퍽 우스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모르가 날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아모르에게도 별다른 수가 없어서 이대로 아기인 채로 살게 되면 어떡하지? 고민이 산처럼 쌓였다. 줄곧 미뤄 둔 숙제와 당면한 기분이었다. 사실 데인과 치료 신관을 방문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쭉 미뤘다. 잠시 잊으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까 하고.
큰일이다. 아직 건국제 파트너도 정하지 못했고, 춤 연습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내 방 어딘가에 고이 모셔져 있을 일기장은 어떡한단 말인가. 아하시야, 그녀의 불운한 미래를 막지 못하면 내가 죽을 텐데.
그건 안 되는데.
해야 할 것도 해치워야 할 것도 산더미 같다. 나는 미력한 아기의 몸이었다. 아모르마저 아무 방법이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서늘한 감촉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차가운 듯 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군.”
찬 겨울 서리로 얼어붙은 전나무 숲 같은 회녹색 눈동자.
“내가 널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지 못할 것 같나?”
유리구슬 같은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예전 어머니가 읽어 주신 이국의 동화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더군.”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시선을 따라 나의 눈동자가 함께 움직였다.
“옛날, 왕국에 사는 공주가 저주에 걸려 흉측한 모습이 되어 영원한 잠에 빠졌다. 왕은 공주를 깨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실패했다. 결국 왕에게마저 버려진 공주는 숲속에 홀로 남겨졌다. 수백 년 뒤 지나가던 백마 탄 왕자가 이를 보고는 그녀를 잠에서 깨우고, 저주를 풀었다.”
이곳의 동화는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럼 뭐 할까. 내 인생에는 백마도, 백마를 탄 왕자님도 없는데. 가시덤불과 용과 지옥불이 일렁이는 삶 속에 죽음이 언제나 뱀의 아가리처럼 발밑에 도사렸다. 그런 삶에선 희망마저 사치였다.
“아실리.”
아모르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네 표정은 알 것 같군. 심드렁한 눈이 똑같아.”
그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괸 고개를 기울였다.
“지나가던 왕자가 공주의 잠을 깨우고 저주를 푼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거야 키스겠지. 당연하잖아.
잠깐만, 키스? 입술을 오물거리다 말고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래. 동화 속 방법은 어쩐지 신관의 축복과 닮지 않았나?”
아모르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손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오늘따라 까칠함이 덜한 것 같은데 착각인가?
“눈 감으란 소린 하지 않겠다.”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께에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꼭 욕탕 구멍을 막아 놓은 마개를 뽑아 물을 분출하는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상쾌함이 온몸에 들었다. 그 순간 입술에서 말캉한 느낌이 전해졌다.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건 나를 바라보는 회녹색 눈동자였다.
“이, 이게 무슨!”
“아. 원래대로 돌아왔군.”
“그, 그러고 보니……?”
소리치려다 말고 얼른 손을 살폈다. 커다랗다. 조금 전 성인 손가락조차 쥐지 못하던 손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아모르는 부드럽게 웃었던 것이 언제냐는 듯 예의 북풍같이 차갑고 까칠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나 못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그럴 리가. 넌 일시적으로 신력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몸이더군. 마치 빈 구멍이 없는 그릇처럼.”
“내가 신력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은 없다. 왜인지 몰라도 일시적으로 네 몸에 신력이 가득했고 그 영향으로 어려진 것 같더군. 나는 축복을 통해 그 기맥을 뚫어 줬을 뿐이다.”
아모르의 말은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이해했다. 내 몸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 그것도 완전히. 이를 의식한 순간 눈앞에서 따뜻한 숨이 느껴졌다.
“아…….”
그가 한 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고…… 마워요. 오라버니.”
“인사는 고작 그게 다인가.”
“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네 뒤치다꺼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팔짱을 낀 아모르가 느슨하게 몸을 기댔다. 다시 가까워진 거리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왜 그러지? 내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던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축복은 입술로만 하는 거예요?”
“말했지 않은가. 신마다 다 다르다고.”
그러니까 왜 그놈의 대지와 식물의 신은 입술에서 입술로다가 축복을 내리게 했냐는 거다.
나를 보던 아모르가 짐짓 짓궂은 음성으로 말했다.
“왜. 한 번 더 받아 볼 텐가?”
나는 본능적으로 다가온 아모르의 얼굴을 막았다. 정확히는 입술을. 곧 아모르는 내 손을 잡아 삐뚜름하게 웃었다.
“축복을 막는 못된 손 아니던가.”
“아! 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났어요.”
아모르의 손을 살짝 뿌리치며 얼른 뒷걸음질 쳤다.
“건국제 파트너, 파트너를 정해야 해서요!”
그렇게 말한 동시에 등을 돌린 나는 얼른 뛰어갔다. 등 뒤의 아모르가 아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나를 잡으려 했다는 것을 모른 채로.
궁 밖으로 나와 놀란 고라니처럼 재게 발을 놀리는 동안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이상하게 달릴수록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돌아가야 해. 얼른 돌아가자.’
그사이 나는 내 가슴께에서 옅은 보랏빛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오늘 있었던 일이 하나씩 지우개로 지워지는 요상한 기분이었다. 망각의 강물을 마신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사라진다. 마침내 금지된 숲을 통해 내 궁에 도달했을 때, 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왜 뛰고 있었더라?”
어쩐지 하루가 아주 아득하게 느껴졌다.
* * *
“전하. ‘한여름 밤의 꿈’을 아십니까.”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에 기울어졌던 남자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까만 머리가 푸스스 흩어진다. 흘러내린 머리를 수습할 생각이 없는 듯 남자, 카스토르는 느리게 제 턱을 괴었다.
“웬일로 즐거워 보이는군. 아올레시아.”
그러자 황제의 방 한편을 차지하던 여성이 살짝 웃었다. 아름다운 은보랏빛 머리는 이 제국에서 아올레시아만이 가진 상징이었다.
“네. 즐거울 일이 있었습니다. 폐하가 돌아오는 동안 당신과 둘이 있어도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자수정처럼 빛나는 자색 눈동자는 차갑고 건조하기만 했다.
“여전히 솔직하군 그래.”
카스토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잠시 자리를 비운 황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함께 있지 않을 사이였다.
“그래 즐거운 일이 뭐지?”
그러자 잠시 눈을 들어 카스토르를 바라본 아올레시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여름 밤의 꿈’을 아십니까?”
조금 전 꺼냈던 소리였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한 번 더 되풀이했다.
“어느 시인이 만든 희곡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아올레시아가 그리 대답하고는 제 앞의 잔을 들어 올렸다. 하나 곧바로 설명할 것처럼 굴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아올레시아가 침묵한 채 있자 흥미를 잃은 카스토르가 창밖에 눈을 두었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대꾸가 나온 것은 10분이 지난 뒤였다.
“그 단어에는 또 다른 뜻이 있지요. 죽음의 일족에게.”
그녀는 대꾸 없는 카스토르 대신 창문 너머 먼 곳을 응시했다.
“죽음의 일족에게는 늙지 않는 저주가 주어집니다.”
카스토르는 반응이 없었지만 아올레시아는 말을 이었다.
“어릴 적에 이것은 성장하지 않는 저주로도 나타나지요.”
“…….”
“그리고 아주 가끔 부작용을 겪기도 합니다. ‘역행기’를 겪는 것이죠.”
“역행기?”
“예. 모든 힘이 안으로 꽁꽁 숨고, 힘을 보호하기 위해 육체도 아주 어려지는 일을 말합니다.”
카스토르가 천천히 눈만 돌렸다.
“의지와 상관없이 아기가 된다는 얘기지요.”
“재미있군.”
그리 말했지만 카스토르는 크게 흥미가 없는 얼굴이었다.
“더 재미난 게 있지요.”
아올레시아는 카스토르의 태도가 성의 없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남자는 모든 것에 이런 태도였다. 자신이 관심을 둔 아주 소수의 것 외에는.
“이 현상은 하루에서 3일 동안 지속되며, 이후에는 뭉쳐 있던 힘이 흩어지며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아기였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지요.”
“그런가?”
“예. 이는 아기로 화한 죽음의 일족을 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족의 몸에 뭉쳐 있던 힘은 스치거나 눈이 마주치거나 한 공간에 있던 이들의 기억을 지우는 데 사용되지요.”
“그런가.”
“본디 망각의 물은 죽음의 것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아올레시아가 보일 듯 말 듯 미소했다.
“저희는 이것을 두고 ‘한여름 밤의 꿈’이라 말합니다.”
가장 뜨거운 여름밤에 스치듯 지나간 하룻밤, 그 밤의 꿈같이 일어나는 기현상.
아올레시아는 끝으로 마지막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리고 이건 죽음의 후계자에게 가끔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죽음의 대신관으로서 아올레시아는 제 딸이자 죽음의 신관인 황녀의 몸에 일어났던 변화를 느꼈다.
‘이는 또한 내 딸이 각성할 준비가 되었다는 말. 그리고 진실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이것이 강력한 ‘죽음의 후계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지 않고 넘겼다. 어차피 말했다 한들 이 남자는 그녀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부터 카스토르는 다른 곳에 정신이 휩쓸린 것처럼 보였으니까.
‘저건 뭐지?’
아올레시아가 눈을 좁혔다. 그저 평소처럼 권태롭게 시간을 흘리고 있나 생각했더니, 그녀의 착각이었다.
‘저건 황족 정도나 쓸 종이인데.’
어느새 카스토르의 손에는 조그만 양피지가 들려 있었는데, 딱 보아도 황금 인장이 새겨진 고급 양피지였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아올레시아는 곧 보았다. 양피지에 대해 묻는 순간, 시든 꽃이 살아나듯 생기가 돋아난 얼굴을. 시체가 일어나면 이러할까. 얼굴에 비친 이것은 사기邪氣에 가까웠지만 금안이 번득이는 낯이 아이로니컬하게도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이건 내게 천국을 안겨다 준 것이지.”
카스토르가 양피지를 흔들었다. 그의 음성은 꿈을 꾸는 듯 진득했다.
“그렇습니까?”
“그래. 아주 달콤한 초대장.”
천천히 양피지를 향한 아올레시아의 눈이 글자를 읽었다.
수신인,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
“그렇군요.”
아올레시아는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친애하는 오라버니께.]
발신인을 알게 된 그녀는 눈을 깔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얼굴은 몹시 담담해 보였다.
“아아. 기대되는군.”
아올레시아는 이미 오래전에 미쳤을지도 모를 남자의 광기 어린 말을 억지로 넘겼다.
[제 건국제 파트너가 되어 주세요.]
바람결에 흔들리는 양피지로 볕이 내려앉았다.
팔랑팔랑. 종이처럼 내려앉은 나뭇잎, 그것이 카스토르의 손에 닿는 순간 파스스 부스러졌다.
“아실리.”
만약 진실을 알게 되면,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할까?
그리고 이를 보게 된다면…….
“……행복해서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어.”
카스토르의 웃음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