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어느 공녀의 칼타니아스 미남 관찰기 (42/47)

외전 1. 어느 공녀의 칼타니아스 미남 관찰기

서쪽의 제국 칼타니아스. 이 나라는 몹시 신비한 곳이었다.

“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나라에도 수명이 있다. 보통 왕국의 수명은 길어야 수백 년이다. 수없이 나뉘고 합치기를 반복하는 야만국들은 더욱 수명이 짧다. 그런 의미에서 윌터국은 오래 연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는 수천 년을 자랑하는 칼타니아스에 비해 걸음마 수준이었다.

아무튼 이런 윌터 왕국의 공녀, 아이라 데 메리골드는 황당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 공작 베테르 데 메리골드를 응시했다.

“칼타니아스에 다녀오라고요? 아니, 제가 왜요?”

공작이 한숨을 쉬었다.

“내 어찌 알겠느냐. 체자르니안 왕세자께서 정한 일이다.”

아이라는 아주, 매우, 황당했다.

‘내가 왜 연고도 없는 제국에 사절단으로 가는데?’

최근엔 여성이 황제까지 될 수 있는 제국과 다르게 왕국에서는 여성의 활동을 극히 제한했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사절단에 그녀가 들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됐다.

하지만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이 왕세자 체자르니안이라면?

‘그놈이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아이라는 골 아픈 표정을 했다.

아내는 남편, 딸은 반드시 아버지 아래에서 순종하는 윌터였다. 남자로 구성된 사절단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제가 끼는 게 중대한 규칙 위반이었다.

“잘 생각하세요, 아버지. 다름 아닌 제국 황제의 탄신일이라고요. 그것도 전쟁 뒤 처음으로 여는 자리인데 날 데려간다고요?”

“알고 있단다.”

“제가 윌터의 얼굴을 대표하라니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이걸 허락하셨다고요?”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신들도 황당하지만 어쩌겠느냐.”

공작이라고 처음부터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의 황제가 여성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나와 같은 대신들은 제국 황제가 여성이니 거기에 맞춰 보자는 심산이란다.”

제국에게 잘 보여야 할 윌터로서는 같은 여성이 낫지 않을까 의견이 나온 것이다.

“어쨌거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제지 않으냐. 더구나 조약을 맺은 상대니 무시할 수는 없지.”

공작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시인했다.

윌터의 국왕은 제국의 여성 황제를 좋게 보지 않았다. 물론 제국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말이다. 제법 그럴듯한 이유기는 하지만 아이라는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왕세자께서도 그런 생각이 아니실까 한다.”

그녀는 왕세자 체자르니안과 소꿉친구였다. 몇 년 전까지 약혼이 오간 사이기도 했다. 여러 이유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루스벨라가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지.’

그녀는 왕실과 약혼했다. 정확히는 그녀와 체자르니안의 형 슬로레니안 간의 약혼이었다. 기간도 매우 짧았던 데다 시원하게 파토 나 버렸으니 이제 와서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지금 중요한 건 사절단이다.

‘이대로 둘 순 없어.’

아이라는 그 길로 체자르니안을 찾아가 따지기로 했다. 체차르니안은 자릴 비운 형 대신 아주아주 바빴다. 그는 어느 날 사라진 전 왕세자 슬로레니안을 대신해 왕세자가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줄 시간이 매우 짧았단 얘기다.

“왕세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 아이라!”

“오냐, 망할 친구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 아이라의 말이 금방 짧아졌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데는 그와 아이라, 황실 총시종장 외에는 아무도 없는 알현실이 한몫했다. 나이 지긋한 시종은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해 주었다.

아이라는 대체 저 인간이 무슨 꿍꿍인가 궁금했고, 어떤 소릴 하든 일단 들어 주기로 했다. 그렇다 해도 그가 한 얘기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였다.

“아이라! 가서 황녀님의 소식을 가져와 줘!”

아이라는 남아 있던 예의범절을 집어던졌다. 황당함 앞에선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었다.

“뭐어? 황녀님? 거기 황녀가 어딨어? 드디어 돌았어?”

정세에 무지하지 않은 아이라가 지적하자, 체자르니안은 깜빡했다는 듯 다시 말했다.

“아, 이젠 황제셨지!”

나이를 먹어도 여전한 소년 같은 얼굴의 체자르니안이 맑게 웃었다.

“제국의 황제. 그분의 소식을 알아 와 줘. 기왕이면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프시지는 않은지!”

‘그분’의 정체를 알게 된 아이라가 경악했다.

“송구하나 전하.”

“응?”

“너 미치셨어요?”

둘째 왕자이던 시절부터 뇌에 주름이 없나 싶을 정도로 청순하던 체자르니안이었다. 애가 가끔씩 상식과 개념이 없어진다는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하하하! 아이라 농담도!”

그는 곧 상큼하게 웃으며 아이라가 선택된 이유를 말했다.

“아이라는 말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잖아?”

“예?”

“그러니까 전부 보고 전해 줘!”

무슨 이딴 인선이 있단 말인가?

“무슨 소리야?”

“그려 주면 더 좋고!”

“미친 거냐고요!”

아이고. 내가 16년 동안 이런 걸 친구로 뒀단 말인가! 그녀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그 먼 길을 왜 가요? 아니 있어 봐. 난 여자라고. 왜 나한테 그런 중책을 맡기는 건데!”

“하하하, 아이라는 똑똑해! 나보다 먼저 산수도 떼고 법전도 외웠잖아?”

그건 네가 둔해서고요! 라고 아이라의 뇌가 외쳤다.

“아이라는 현명해. 그분처럼 말이야. 그러니 부탁해. 꼭 내 소식을 전해 줘. 알았지?”

“잠깐, 전하, 아니, 전하! 야!”

“알았지?”

“어딜 도망가!”

아이라가 득달같이 반대했지만 형이 도망간 자리를 채운 체자르니안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싫어! 가기 싫다고!”

그렇게 왕국 유일한 공녀 아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명을 받고 제국으로 파견됐다. 그녀의 절규는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 * *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녀님.”

아이라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안내를 맡은 안개의 신관 안테케라 합니다.”

“네. 반가워요.”

그녀는 숫제 영혼이 없는 얼굴로 끄덕였다. 겉이나마 우아하게 보이도록 필사적으로 노력 중이었다.

‘황제 탄신일이라고 했나.’

제국까지 길은 멀다. 마차 여행은 허리가 아프고 불편하고 지루하다. 그녀는 긴 여행에 반쯤 지치고 반은 체념한 상태였다.

“숙소로 가시기 전에 중앙궁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어떠신가요?”

“영광이지요.”

아이라가 조금 어둡게 말했다. 피로 때문이었다.

“이런.”

그러나 그런 그녀를 본 안내 신관이 그녀의 반응을 오인했다.

“죄송하지만 폐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공녀님의 방문 소식을 듣고 아주 유감스러워하셨습니다.”

“아. 아니에요.”

아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윌터의 사절단이 예정 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했으니까요.”

마차가 싫어서 닦달했다는 사정은 쏙 빼놓고 아이라가 말했다.

“그사이 아름다운 궁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영광이라 여기겠어요.”

전쟁의 승국인데도 칼타니아스는 오만하지 않았다. 공손한 신관의 태도가 오히려 두 나라 간의 관계를 상기시켰다.

‘황제의 성정 때문인가.’

전쟁이 끝난 지 5년. 황제는 윌터를 핍박하지도 적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패전국에게 관대한 처사를 베풀었다. 아이라는 천천히 제국의 황제,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얼굴은 잘 모르지만……. 젊고 어린 여성이라 했지?’

그녀는 즉위와 동시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단한 황제였다.

‘멋지네. 이 커다란 나라의 주인이라니.’

무엇보다 오랫동안 남성이 이끈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황좌에 앉은,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긴 이였다. 이전까지 숨죽여 살았던 막내 황녀라는 점은 그녀의 이야기가 나올 때 업적을 더욱 빛내는 장식이었다.

아이라가 이 모든 것을 아는 건 윌터가 패전국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패배자는 이쪽이니 황제의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어쩌면 제국의 황제가 으레 그렇듯 남성이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후궁으로 바쳐졌을 터였다. 패전국이 하는 일이란 비슷하니까.

<조공은 됐다. 저들이나 짐이나 휘말린 전쟁일 뿐이야.>

여기에 대해 황제가 뜻 모를 소릴 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돌았다.

<아이라. 꼭 내 소식을 전해 줘. 알았지?>

사실 아이라는 오랫동안 적국이었던 윌터와 칼타니아스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체자르니안과 황제와 관한 이야기였다.

‘짝사랑 상대의 안부를 알아다 달라는 게 말이 되냐고.’

어린 시절부터 뭐든 아이라에게 재잘재잘 털어놓곤 했던 체자르니안은 일찍이 그의 수줍은 짝사랑 또한 아이라에게 털어놓았다. 왕세자가 되고 좀 잠잠하나 싶었더니……. 몇 년이 지나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지요.”

금방 오겠다더니. 신관은 한참이나 오지 않았다. 하품을 참으며 신관을 기다리던 아이라는 문득 복도 한복판에서 묘한 것을 발견했다.

‘어린 소녀?’

아이라가 얼른 눈을 깜빡였다. 분명 소녀를 본 것 같았는데, 눈 떠 보니 어디에도 없었다.

‘잘못 본 건가.’

그러나 이상한 기분이 든 아이라는 조심스럽게 아이가 있던 기둥으로 걸었다. 그렇게 기둥에 도달했을 때였다.

눈앞에 자욱한 빛이 터졌다.

‘윽, 내 눈!’

그녀는 황급히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라는 기둥 뒤에 없던 낯선 여성을 발견했다.

“이런. 잘못 이동했네.”

커다란 천을 머리까지 덮고 있는 여성은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로 보나 아주 수상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천 너머의 굴곡이나 가느다란 손목을 보면 젊은 사람이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으음, 어떡한다?”

여성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아이라에게 인사했다. 마치 아이라가 쳐다본 것을 알았다는 듯이. 아이라가 화들짝 놀랐다.

“날이 좋죠?”

“네? 아, 네에.”

여성은 정면으로 마주해도 여전히 얼굴의 반이 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신관인가?’

제국은 신전별로 규율이나 전통이 다르다고 들었다. 낯선 여성의 얼굴을 덮은 천도 그런 것이 아닐까 했다.

아이라는 얼른 신관에게 건네는 인사를 떠올렸다.

“아! 주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여성이 탄음을 흘렸다.

“저는 그 인사를 좋아하지 않아요.”

“네? 어째서요?”

동시에 여성의 우아한 입술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신은 아무것도 주지 않거든요.”

헉, 아이라가 숨을 삼켰다. 신을 모시는 제국에서 신성 모독에 가까운 말이 아닌가! 그러나 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아이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신 저는 이렇게 건네죠.”

체온이 무척 따뜻했다.

“당신의 내일이 평온하기를.”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아이라는 자신을 빤히 보는 여성의 시선을 느꼈다.

아이라는 몰랐지만, 여성은 이 나라의 황제 아실리였다. 짐승의 도시를 시찰하던 도중 대뜸 윌터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서신을 받고 부랴부랴 혼자서 이동했던 참이었다.

어쩌다 보니 좌표가 어그러졌고, 눈앞에는 웬 다람쥐 같은 아가씨가 있었지만.

아실리는 유쾌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런 말 이상하지만, 오늘 여기서 당신을 만날 줄 알았답니다.”

아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를 아시나요?”

“아니요. 하지만 곧 알게 되겠죠.”

“네?”

본래 뜬구름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였다. 하지만 왜일까 여성의 신비로운 말씨가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실 난 아직 여기 있으면 안 되거든요.”

“안 된다니요? 헉, 혹시…… 쫓기고 계신가요?”

“재밌는 분이시네요. 물론 아니랍니다.”

아실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살짝 웃었다.

“황궁은 치안이 좋은 편이거든요.”

“다행이네요.”

“네. 다행이죠.”

아실리는 샐쭉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눈에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어떤 부탁이요?”

“이걸 잠시 맡아 줄래요?”

아실리는 들고 있던 것을 건넸다. 아이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아까는 텅 빈 손이었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은 저 손에 작은 수첩이 들려 있었으니까.

“이걸 가지고 있다가 한 사람에게 전해 주세요.”

“누구에게요?”

“황궁 가장 안쪽 방에 있는 사람이에요.”

아이라는 얼떨떨했다. 말씨만 신비롭고 이상한 줄 알았더니 부탁마저 이상했다. 황궁 안쪽이라니. 자신이 어찌 황궁 가장 안쪽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곧 알게 될 거예요.”

때마침 여성이 아이라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덧붙였다.

“부탁해요.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아이라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수첩을 받았다.

“이상하네요. 저의 뭘 믿고 소중한 물건을 맡기시나요?”

아실리가 살짝 미소했다.

“제 눈은 정확하거든요.”

아이라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갈색 가죽으로 된 수첩은 일기장으로 쓸 법한 크기였다. 새것처럼 깨끗했지만 가름끈에서 손때가 느껴졌다. 아이라는 무심코 이걸 열어 보았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데?’

종이는 깨끗했다. 수첩을 다시 덮을 무렵, 아이라는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어, 어디 갔지?”

웅장한 복도에는 그녀 홀로 서 있었다. 여성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마치 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으스스하네. 유, 유령은 아니겠지?”

아이라가 수첩을 보며 파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다시 한번 바람이 불었다. 이번엔 조금 전과 달리 머리칼이 흩날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었다.

“폐하!”

아이라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폐하?”

아이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환상?’

자신을 보며 놀랐던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 덕에 아이라는 자신이 꿈을 꾼 것도 환상을 본 것도 아니란 걸 알았다.

“실례했습니다.”

남자의 낯에서 놀람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이라는 잠시 숨을 멈추고 하얀 물결이 이는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봤다. 바람에 남자의 머리칼이 한들한들 움직였다.

“분명 폐하의 기운이었는데……. 착각인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남자가 손을 뻗자, 길게 뻗은 손으로 푸드득 소리와 함께 새하얀 새가 내려앉았다.

‘새?’

특이하게도 꽁지깃이 새파란 색인 새였다. 아울러 남자의 하얀 피부와 몹시 어울렸다. 천천히 남자가 그녀를 돌아볼 때,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여기서 빨개지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정말이지, 환상을 본 건가 싶을 만치 잘생긴 남자였다. 아니. 가히 파괴적인 미모였다. 세상에. 타국의 미남에게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질을 잘 알았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었다. 이미 아이라는 상상 속에서 저 남자와 아이 셋을 낳았다. 부끄럽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미남은 옳다고! 저 남자가 너무 잘생겼잖아!’

그녀는 왕국에서도 미남이란 미남은 전부 한 번씩 짝사랑해 봤다. 그중에 체자르니안도 있었으나 껍데기와 다른 내면에 와장창 부서졌던 기억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자.

낯선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아이라는 숨을 꿀꺽 삼켰다.

“저 실례지만, 혹시 조금 전까지 이곳에 계셨다면 한 사람을…….”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남자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종소리처럼 청아했다. 백합처럼 청초한 얼굴과 몹시 어울렸다.

“헤르난 님! 너무하십니다!”

아이라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한 사내가 달려와 먼저 온 남자의 앞에 멈춰 섰다.

“갑자기 저를 따돌리고 가시다니.”

헉헉 숨을 몰아쉰 사내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헤르난이라 불린 남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찰거머리가 따로 없군.”

그러고는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검? 아이라가 눈을 깜빡이는 동안 헤르난의 검을 피한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악! 헤르난 님!”

몹시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거, 검을 휘두르시면 어떡합니까!”

“소릭스 경. 자네한테 이름을 허락한 적 없는데.”

그러자 갈색 머리칼 사내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주근깨가 흩뿌려진 낯은 사근사근한 인격을 대변하는 듯 부드러웠다.

“하하하, 대장님이라 부르면 싫어하실 거잖습니까?”

“……당연하지. 난 네 대장이 아니니까.”

헤르난이 눈썹을 찡그렸다. 떨어트려 놓아도 들러붙는 소릭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차지 않기는 예전부터 그랬다.

“아니. 저 좀 그만 미워하십쇼. 제가 공작님의 대대장이 된 것이 2년째입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황성 총군단장을 공작께 맡기셨고 저는 당신의 부대 대대장이니. 저 좀 예쁘게 봐주시면 안 됩니까. 예? 이렇게 검을 휘두르실 때마다 울고 싶습니다!”

“그러던지.”

헤르난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는 아실리를 제외한 사람, 특히 남성에게는 늘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폐하 앞의 모습 반의반만이라도 보여 주시면 안 됩니까. 폐하께서 대장님의 이중적인 모습을 아셔야 하는데. 소름 돋습니다.”

“뭐라고?”

“아주 멋지다고 말입니다.”

헤르난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번 대련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

“하, 하하하하. 전 이제 대련은 폐하 앞에서만 할 겁니다.”

어색하게 웃던 소릭스가 얼른 뒷걸음질 쳤다.

“죽기 싫거든요.”

지켜보고 있던 아이라가 몰래 감탄했다.

‘어머나 세상에. 싸늘한 얼굴도 멋지네.’

아이라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어떤 표정이든 다 어울리다니. 정말 대단한 얼굴이었다. 살짝 내려간 눈꼬리는 순해 보였으며, 지붕처럼 덮인 속눈썹이 무척이나 길었다.

“폐하는 어디 계시지?”

“그건 저도 잘……. 저도 막 꽃의 도시에서 돌아온 길에 헤르난 님을 뵌 거라서요. 하하하…….”

“도무지 쓸모가 없군.”

“너무하십니다.”

헤르난이라 했던가. 남자의 눈동자는 꼭 여름날 호수같이 푸르렀다. 다만, 알 수 없는 냉함이 있었다. 이윽고 헤르난의 시선이 아이라를 향했다. 아이라는 자신을 향해 뻗어진 손을 멍하니 응시했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네? 네?”

“실례를 범하고서 제대로 설명조차 드리지 못했군요. 일단 제 소개를 먼저 해도 되겠습니까? 저는 제국의 장군직을 맡은 헤르난데즈 폰 디볼로입니다.”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인사였다.

“아……. 저는 윌터국에서 온 아이라 데 메리골드입니다. 부족하지만 이번 탄신일 기념 사절단의 대표로서 왔답니다.”

헤르난은 젊은 여성의 신분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러고는 이내 끄덕였다.

“귀하신 분이셨군요. 부디 실례를 용서하시길 바라며 머무르시는 동안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아이라는 헤르난의 얼굴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곳에 꽂혀 떨어지지 않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건……. 혹시 아가씨의 물건입니까?”

아이라는 그의 시선이 향한 것을 보고서 아, 탄음을 터트렸다.

“아……. 아뇨. 누군가에게 받았답니다.”

누군가라 말하는 순간 헤르난의 눈이 커졌다.

“누굴 말씀입니까? 혹시 금발이셨습니까? 그러니까……. 공녀와 같은 색 말입니다!”

“네?”

아이라가 흠칫 놀라자, 헤르난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어, 아니에요. 혹시 이 수첩의 주인이신가요?”

“아닙니다.”

“아하. 주인을 아신다면 제 대신 돌려주시겠어요?”

헤르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것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직접 돌려주시겠습니까?”

아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건 꼭 이 수첩이 자아라도 가진 것 같지 않은가. 그녀는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저는 주인을 모르는데 어찌…….”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는 수첩을 잡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의 주인은…….”

헤르난의 눈이 유순하게 접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사랑스러운 분이시지요.”

봄을 접한 아이처럼 무구하고 경계를 무너트린 미소였다. 아이라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조금 전 만났던 여성과 똑같이 맥락 없는 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르난은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이어 덧붙인 말은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가장 좋아하는 분이기도 하고.”

남자가 귀를 살짝 물들였다.

“그, 그렇군요.”

아이라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저어…… 뺨이 붉은데 괜찮으신가요?”

남자의 얼굴은 초콜릿에 퐁당 빠트린 비스킷처럼 달콤했다. 아이라는 이 남자가 조금 전까지 또 다른 남자를 냉정하게 바라보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아……. 괘, 괜찮습니다.”

그는 애써 뺨을 가리려 했으나 머리가 새하얘서 대비가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사실, 실례일진 모르겠으나 공녀님의 머리칼 색은 그분과 같은 색이라 조금 전엔 순간이지만 착각할 뻔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래서 저를 보고 놀라셨던 거군요?”

“예. 흔치 않은 색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분은 아주 아름다운 눈동자 색을 가지셨습니다.”

“그, 그런가요?”

왜 머리카락 얘기를 하다가 눈동자 얘기를? 아이라는 지금까지 지극히 사무적이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 상기되었음을 느꼈다.

“예.”

남자가 보인 시선은 아주 오래전 슬로레니안이 루스벨라를 바라볼 때와 똑같았다. 그 무뚝뚝하던 전 왕세자가 하던 것처럼 웃는 모습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다고 할까. 아니, 어쩌면 더할지도 모른다고 아이라는 생각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거 완전 사랑에 빠진 눈이잖아?’

만약 같은 나라 사람이었다면 맹세컨대 아이라는 한 번쯤 이 남자를 짝사랑했을 것이다.

‘이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어딨어!’

아이라는 체자르니안이 자신을 보낸 또 다른 사정을 짐작했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위기를 번드르르하게 잘 넘겼다. 또한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공녀가 아니라 남작이나 자작의 딸이었더라도 처세술로 편히 살았을 거란 말이다.

‘끄응……. 빠졌더라도 사리는 분별했겠지만.’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잘했다.

“처음 뵌 분을 상대로 말이 많았군요.”

곧 미소를 지워 낸 헤르난은 거리를 벌렸다. 이를 보며 아이라는 남자가 원래 능숙하게 벽을 두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내 헤르난은 나긋하지만 냉정한 모습으로 사라졌다. 그를 따라왔던 소릭스도 유쾌한 인사를 남기고는 바로 뒤따라갔다.

아이라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몰라도 저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를 구했나. 복 받았네. 복 받았어.’

저런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한 누군가가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것 외에도 포기가 빠르다. 아무리 잘생겨 봐야, 그녀를 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암. 저런 남자를 두고 그림 속 케이크라고 하는 거지.’

아이라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는 언제쯤 볼 수 있는 거려나.”

아이라는 다시 홀로 남았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만큼 꾀에 밝고 약삭 빠른 기질이 있었다. 그래서 복잡한 일,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는데.

‘체쟌이 날 추천했다고 했을 때부터 도망갔어야 했는데.’

칼 없는 전쟁이라는 사교계에서 문제없이 잘 먹고 살았다. 그게 독이 될 줄은 어찌 알았을까. 하나 이제 와서 어떡하겠는가.

‘내가 똑똑한 탓이지 뭐.’

그녀는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멍하니 풍경을 응시했다.

‘일단은 이 풍경에 위안을 둘까.’

빛이 닿아 부서지는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신화를 기록했다 했던가. 녹빛 숲과 어우러진 새하얀 기둥은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조각 같았다.

‘서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이라더니 정말 예쁘네.’

본국에서도 칼타니아스의 궁은 유명했다. 어느 것 하나 수천 년 묵지 않은 게 없으니, 관광을 위해서 기를 쓰고 자원하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안내 신관이 돌아왔다. 얼마든지 더 구경해도 된다 말해 주어 아이라는 풍경에 푹 빠졌다.

뚜벅뚜벅.

이때 무거운 구두 소리가 들렸다. 윌터 왕국에서도 제법 듣던 소리였는데, 주로 기사들의 구두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발소리의 주인공은 여인이었다. 탐스러운 적발을 가진 여성이 멈춰 섰다. 여성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어머. 이 시간에 아리따운 아가씨를 볼 일이 있던가.”

아이라는 커다란 검과 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서 얼른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제국으로 출발하기 전 12신의 이름과 문양을 달달 외운 탓이다.

“검의 대신관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고, 실례가 안 된다면 소개를 받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작은 피피오?”

적발의 미인이 은근히 눈웃음을 흘리는데 어찌 넘어가지 않을까. 언니라면 뭐든 가능합니다. 아이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녕하세요, 윌터 왕국에서 온 아이라 데 메리골드입니다. 부족하지만 이번 사절단의 대표로서 왔답니다.”

“어머나. 귀하신 아가, 아니 공녀셨군요.”

붉은 머리 여성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검의 대신관 마리사라 합니다.”

낭창낭창한 눈웃음과 달리 기사처럼 절도 있는 인사였다.

“편히 마리사라 불러 주세요.”

고개를 든 마리사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현재 폐하께서 부재중이실 텐데, 이곳을 구경 중이셨나요?”

“네. 그렇답니다.”

“확실히 볼 것이 많은 곳이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마리사가 한걸음 다가왔다.

“이것도 인연인데 다음 구역부터는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괜찮은가, 안내인?”

마리사의 목소리는 낮은 중저음의 허스키한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마리사의 은근한 시선을 이기지 못한 안내인 안테케가 허둥지둥 아이라를 넘겼다.

“그, 그럼 대신관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라야 누구에게든 받아도 상관없었다. 다만 조금 신기하긴 했지만 말이다.

‘대신관이면 높은 자리 아닌가?’

아이라는 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잠자코 뒤를 따랐다. 어째서인지 저 신관은 아이라를 보면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저런 흐뭇한 얼굴이라니. 아이라는 그 시선이 꼭 부모가 걸음마하는 자식을 보는 시선처럼 느껴졌다.

‘이상하네.’

두 사람이 침묵 속에서 막 모퉁이를 돌 때였다.

“공녀님, 황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문득 튀어나온 마리사의 질문에 아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하얀 대리석, 아름다운 건축물과 황금을 덮어씌운 지붕, 그리고 수많은 조각상? 생각나는 것이 너무 많아 아이라가 망설였다.

“혹시 아름다운 궁, 이런 것을 생각하셨나요?”

“네. 그렇지 않은가요?”

마리사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틀린 말은 아니랍니다. 다만 현시대, 제국의 궁에는 말에요……. 더 특별한 것이 있죠.””

마리사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특별한 것이요?”

“네.”

마리사의 목소리는 꼭 녹아들듯 은밀했다. 아울러 사람이 홀린 듯이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공녀님, 잘생기고 아름다운 미남을 좋아하시나요?”

아이라가 눈을 깜빡였다.

“……잘생긴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요?”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조심스레 말하자, 마리사가 빵 웃음을 터트렸다.

“네. 그것이랍니다.”

“네?”

“이 궁에는 ‘그것’이 가득하다는 말이죠.”

“그것이라 하면…….”

“미남 말예요.”

빠르게 다가온 마리사가 속닥속닥 속삭였다. 그러고는 붉은 눈을 휙 휘었다. 과연 짓궂은 악동 같은 미소가 눈앞에 있었다.

“이곳에 황후 폐하와 그분의 황비들이 머물고 있지요.”

마치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 간드러진 목소리가 속삭였다.

“황비?”

“네. 정확히는 후보라고 해 둘까요.”

‘농은 아닌 것 같은데.’

마리사의 음성은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눈치가 빠른 아이라는 그녀가 농을 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었으니까.

“재미있는 말씀이시네요. 혹시, 그중에 머리칼이 하얀 분도 계신가요?”

“어머나. 이미 헤르난 공을 보셨나요?”

마리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제대로 보셨답니다.”

아이라는 작게 감탄했다. 윌터에서 왕은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린다. 귀족들은 후처를 둘 수 없지만 다들 알음알음 애인을 만들거나 코르티잔을 가까이하곤 했다.

‘하지만 현 황제는 일편단심이라 들었는데. 잘못 알려졌나?’

이곳의 황제는 여성이 아니던가. 성별이 바뀐 것뿐인데 생소하고 흥미로웠다.

“정말 후궁이 있나요?”

“네. 그럼요. 전부 빼어나죠. 어떤 의미인지 곧 아실 거랍니다.”

마리사가 말을 맺은 그때, 막 모퉁이를 지나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마침 오네요.”

걸어오는 이를 보며 마리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이에 아이라가 고개를 돌렸다. 각기 진한 머리칼을 가진 두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잠시 멈춰 섰다.

“대신관?”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맞군요. 오랜만이네요. 검의 대신관.”

스물네 살쯤 되었을까, 가을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이 흔들린다. 수려한 미남에 바람마저 멈춘 기분이었다.

“반가워요. 데인 님.”

아이라는 마리사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4행정청에서 오시는 길이셨나 보지요?”

“아아. 네. 그렇지요.”

남자의 눈은 루비처럼 강렬하고 타오르는 듯 붉은색이었다. 새빨간 입술과 늘어트린 시선. 바라보노라면 그윽한 눈매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촉촉한 대지의 색처럼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아이라를 보며 살짝 눈을 휘었다.

“……그런데 이분은?”

“윌터국에서 오신 공녀랍니다.”

남자가 눈동자를 약간 굴렸다.

“아하. 귀한 분이시로군요.”

아찔할 정도로 농밀한 시선에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남자는 인사를 하다 말고 짐짓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 일기장, 아니 수첩은 누군가에게 받으신 건가요?”

아이라가 어깨를 움찔했다.

“아, 아! 네. 그렇습니다. 혹시 주인을 아시나요?”

벌써 두 번째로 받는 질문이었다. 이쯤 되면 아이라는 이 수첩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네. 압니다.”

남자가 부드러이 웃었다.

“윌터국 사절단이시군요. 반갑습니다. 2행정청의 수장을 맡은 데인 로웰이라 합니다.”

손등을 스친 입술은 딱 예의에 걸맞을 정도로 담백했다. 그러나 아이라는 소개에 경악했다.

‘화, 화, 황무지의 악마?’

5년 전 칼타니아스와의 전쟁에서 윌터국에 악몽을 새겨 준 사람이었다.

소문 속 그는 놀라울 정도로 머리가 좋으며 끔찍하리만치 정확한 전략으로 윌터를 매번 패배로 몰고 갔다. 신묘한 책략으로 대군을 패퇴하게 한 자 아니던가. 아이라 또한 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쪽을 윌터의 피로 물들인 자. 그의 책략은 윌터에게는 꿈이었으면 좋을 지옥을 만들었으며, 제국이 열세에 몰린 상황을 뒤바꾸고, 윌터가 패배의 잔을 들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전쟁 뒤 살아 돌아온 이들은 악의와 경의를 모아 그를 ‘황무지의 악마’라 불렀다.

그런 황무지의 악마가 이렇게나 젊은 남자라니……. 관찰하는 시선이 조심스러워졌다.

조금 전 보았던 하얀 머리칼의 남자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저 묘한 눈매가 남사스럽지만 관능적이었다. 입술까지 저리 붉으니……. 작정하고 눈을 휘면 홀리지 못할 이가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아, 저, 황제 폐하의 후궁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라가 조심스럽게 데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로서는 아직 마리사의 말이 실감 나지 않았던지라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다.

“후궁이요?”

그러자 왜인지,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잠시 마리사를 흘끗 본 데인은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예. 제겐 가장 영광스런 자리지요.”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속삭였다.

“언젠가 황후 폐하를 끌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꿈이지요.”

그 순간 마리사가 쿨럭하고, 헛기침을 토했다.

“네……. 네?!”

“농입니다.”

데인의 눈이 반원으로 휘어졌다. 이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아주 유혹적이었다.

“노, 농이요…….”

“네. 농이요.”

아무리 봐도 진심 같았는데, 아이라는 말을 삼키기로 했다.

“실례지만 공녀님께선, 어여쁜 색을 가지셨군요.”

“네?”

색이라니, 무슨 색을 말인가? 그녀는 곧 말의 뜻을 알았다. 데인이 훌쩍 다가온 것이다. 아이라는 어느새 데인의 손에 잡힌 제 머리칼의 일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 가, 감사합니다.”

아이라는 데인이 한곳에 눈을 둔 것을 알아챘다. 데인 또한 그녀의 시선을 알았는지 옅게 웃었다.

“예뻐요.”

정말, 잠깐 사이에 간을 빼 먹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아는 언니가 말했지. 이런 남자한테 빠지면 답도 없다고,’

확신하건데, 이런 남자를 좋아했다간 탈탈 털리고 패가망신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레이?”

그사이 데인은 고개를 돌려 레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줄곧 침묵하던 레이가 눈을 돌렸다.

“레이디와 대화하는 사이에 제게 말을 거시면 어떡합니까. 예의를 알 만큼 아시는 분께서.”

좋게 표현하자면 내게 말 걸지 마, 정도 될 무례한 말에 데인은 싱긋 웃었다.

“아리따우신 공녀께 말을 걸 기회를 드린 거지. 안 그래?”

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사이 데인은 아이라와 대화를 이어 갔다. 주로 드레스와 장식에 대한 것이었다.

“공녀님, 녹색을 좋아하시나요?”

“네에. 어, 좋아해요.”

“공녀님께 오늘 같은 녹색 장식이 어울린다 여겨집니다.”

레이는 데인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참도 잘한다고 생각했다. 정작 그 말을 건네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으면서.

“아, 공녀님. 이쪽은 또 다른 후궁인 레이입니다.”

쿨럭. 레이가 헛기침을 토했다.

“예? 아. 그렇군요.”

레이는 당황한 나머지 해명할 기회를 놓쳤다.

‘망할. 황자님 같으니.’

아이라의 시선이 레이를 향했다. 남자는 큰 붓으로 짙은 물감을 꾹 찍어다 만든 듯 훤칠한 얼굴이었다.

‘정말 크네.’

칼타니아스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윌터인보다 크다. 이 남색 머리의 남자는 특히나 조금 더 큰 듯했다.

“레이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잖아. 말할 기회를 준 거라고.”

“전 거짓말 못합니다.”

“그래? 진심은 어떤데?”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아이라는 흔들린 머리칼이 이마를 간지럽힘을 느꼈다. 레이의 눈은 흔들리는 머리칼에 꽂혔다. 곧 그가 한숨처럼 수긍했다.

“……공녀님의 머리칼이 몹시도 아름답습니다.”

“아, 고마워요.”

저를 향한 칭찬임을 곧바로 알아들은 아이라가 살짝 웃어 보였다.

‘어쩐지 오늘 머리칼 칭찬을 참 많이 듣는 것 같은데…….’

아이라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데인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러이 놓아주었다.

“이런…… 대단히 실례했네요.”

사르르 눈이 휘며 꼭 홀릴 것 같은 미소가 자리했다. 아이라는 한 걸음 가까워진 그에게서 진한 향기를 맡았다.

“색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눈길을 빼앗겼네요.”

아이라는 이 남자가 고의적으로 미소를 흘렸음을 알았다. 이는 꽃다발을 가득 짓이겨 만든 향수처럼 유혹적이다. 어떤 꿍꿍이를 품은 것인지 모르게 하려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남자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면 엄청 계략적이라 들었는데.’

향기 때문일까?

‘아니, 의외로 순정파라거나.’

이토록 단정한 차림새인데 부드러우면서도 묘하게 어둡고, 퇴폐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남자였다. 하나 이 남자는 아는 거다. 자신의 낯이 어떤 파괴력을 가졌음을. 머리가 좋은 이니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을 리 없다.

“너 여기 있었냐?”

그때, 새로운 침입자가 불쑥 난입했다. 아니, 뻥 뚫린 복도였으니 침입이란 뜻은 어울리지 않았다.

“형.”

새로 나타난 이를 보며 데인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그 표정은. 오늘 보자고 한 소리 못 들었냐?”

“못 들었는데.”

“거짓말하지 마.”

“형, 손님이 계신데.”

말조심하라는 듯 데인이 고개를 까딱였다. 플뢰온이 얼른 입을 닫았다.

“그리고 말이야. 형 용건은 빤하잖아?”

“뭐, 뭐? 빤해?”

“그래. 언제까지 형 연애 상담이나 들어 줘야겠어?”

데인이 씩 웃었다.

“벌써 5년이라고, 5년. 내가 아벤타 공녀였으면 도망갔을 거야. 답답하지, 제멋대로지. 말 한 번 곱게 못 하지. 아주 멀리 도망갔겠다.”

“너!”

데인은 잽싸게 플뢰온의 손을 피하고는 맵시 있게 등을 돌렸다.

“공녀님, 전 이만 가 봐야겠군요.”

데인은 얼른 아이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연회에서 또 뵙겠습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손등에 담백하게 입을 맞춘 데인이 얼른 걸음을 놀렸다. 우아한 걸음이건만 소리 없이 빠른 속도였다. 마치 귀찮아서 피하기라도 하듯이.

“허어, 저놈 봐라. 도망가네?”

아이라가 조심스럽게 남은 남자를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쫓을 것 같더니, 의외로 남자는 데인을 쫓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를 거칠게 쓸고는 그녀를 보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시선에 아이라가 움찔했다.

“실례했습니다.”

회색 머리칼의 남자는 미남이었으나 아주 사나워 보였다. 그렇다고 거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식이 훌륭한 도자기나 정련된 철 같았다.

“저는 제국의 6행정청을 맡은 재무관 플뢰데온 클라체 칼타니아스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의외로 고아하게 고개를 숙인 남자의 예법은 완벽하여, 교본을 보는가 싶었다. 또한 칼타니아스라는 성을 들으니 현 황제의 오라비 중 하나인 듯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윌터에서 온 아이라 데 메리골드입니다.”

“공녀이시군요.”

아이라가 얼른 끄덕일 때였다.

“흐응, 아직도 제 조카님의 마음을 완전히 얻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조용히 있던 마리사가 살짝 끼어들었다.

“마리사.”

플뢰온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홱 찡그렸다.

“공녀님, 소개드리자면 이분이 바로 폐하께 후궁 제도, 일처다부제를 열심히 외치는 분이시랍니다.”

“아하. 그렇군요?”

아이라가 아, 하고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사. 쓸데없는 소릴…….”

플뢰온이 흘겨보자 마리사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접었다.

“타국에 먼저 알리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좋지 않을까 했지. 정말 말하면 어떡하란 거야.”

“저런. 왜 당황하고 그러시나요. 아, 혹시 몰래 일부터 벌였다가 미움받을까 봐 이러시나?”

“당연하지! 누가 걔 미움을 받고 싶어 해!”

플뢰온은 외치고는 곧바로 제 입을 가로막았다. 홧김에 진심이 나온 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사는 빙글 돌아 아이라를 향했다.

“아무튼 황비는 많아야 좋다 주장하는 분이시지요.”

“당연하지.”

플뢰온은 살짝 헛기침을 하면서도 동의했다. 아이라는 살짝 고개를 좌로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에 대해 들은 것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사이가 무척 좋다고 들었는데.’

잘못 안 것일까?

‘제국에 황비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지.’

모든 왕이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은 아니다. 아내를 여럿 둘 수 있는 윌터에서도 현 왕의 경우 왕비를 무척이나 사랑해 왕비에게서만 자식을 보았으니까.

“이해가 어렵다는 표정이시군요.”

어느새 플뢰온이란 남자가 오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라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끔 웃으며 살짝 입을 떼었다.

“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은 궁금하네요. 왜 많을수록 좋다 주장하시는지.”

플뢰온이 살짝 웃었다.

“그런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군요. 글쎄, 처음 뵌 분께 말하기에는 사적인 사안이지만.”

웃어도 사나운 느낌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이 누구보다 사랑받길 원합니다.”

그러나 아이라는 그 얼굴이 아주 근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경쟁자가 많다면, 사랑받기 위해서 더욱 사랑하겠지요. 가능한 오랫동안, 할 수 있다면 영원히 사랑받는 것. 책 많은 오라비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목례했다. 끝으로 보인 인사 또한 예법 교과서에 싣고 싶을 정도로 고아한 움직임이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제국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분명 고개 숙인 쪽은 저 남자이건만 거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오만함이야말로 저 남자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곳에 있으면 모시러 올 겁니다.”

마리사와의 짧고도 긴 유람이 끝났다. 유람 끝에서 그들은 중앙궁에 다다랐다. 길은 궁 구석구석으로 이어져 있다. 곧 아이라를 데리러 궁의 재정을 맡은 사람이 찾아올 것이었다.

“곧 찾아올 이는 제 조카아이인데, 시녀 일도 겸임하고 있답니다. 시녀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나……. 아무튼 공녀님을 잘 맞이해 줄 거예요.”

아이라가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마움을 담아 입을 떼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웠어요.”

이래저래 공녀답지 못한 모습을 보인 듯 했지만 마지막만큼은 우아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저도 즐거웠답니다. 아주 오래전 공녀님 또래 아가씨와 즐거운 유람을 했던 추억을 떠올렸거든요.”

마리사는 웃어 주고는 등을 돌렸다. 절도 있는 걸음으로.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호쾌하고 산뜻한 퇴장이었다.

홀로 남은 아이라는 발아래 펼쳐진 풍광을 응시했다. 지대가 높아 전경이 그대로 보였다. 잘 닦인 길을 보며 아이라는 잠시 자신의 가문 영지를 떠올렸다.

영지에도 이런 길을 들여온다면 상업 거래량이 얼마나 늘까?

무역량은?

여기에 따른 농업 효율은?

곧 아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전부 한낱 여자인 자신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어차피 아버지에게 난 시집이나 잘 가면 그만일 텐데. 뭐.’

그저 아이라는 조금 신기했다. 황제가 여성인 이 나라와 검을 들고 머리를 짧게 치고 당당히 군화를 신은 대신관 마리사의 모습이.

‘물론 기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윌터는 성별의 역할이 명확한 나라였다. 모든 것에서 다른 이 나라가 신기했을 뿐이라고 아이라는 자위했다.

‘그나저나 오늘은 종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네. 이번엔 언제 오려나.’

시녀장이라는 사람이 언제 올지 가늠하며, 아이라가 고개를 길게 뺄 때였다. 손안에서 온도가 느껴졌다.

손안의 수첩이 빛을 내고 있었다.

“빛나고 있어?”

신비로운 보랏빛이었다. 저도 모르게 수첩을 펼치자, 흩뿌려진 빛의 아지랑이가 한곳으로 뻗었다. 마치 유혹하듯 뻗은 빛의 인도에 아이라는 아연한 기분이었다.

“……설마, 이걸 따라가라는 건가?”

아니, 손님인데 마음대로 움직여도 되는 걸까? 그러나 아이라는 곧 깨달았다.

<곧 알게 될 거예요.>

여자가 이것을 말했던 건가. 그렇다면 이대로 이동해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외교 문제가 발생하면 어떡하지. 체쟌이 책임지려나.’

그녀를 여기로 보낸 것은 체자르니안이다.

‘모르겠다! 걔가 책임져 주겠지!’

그녀는 약삭빠르게 책임을 떠넘겼다. 오히려 억지로 보내져 긴 마차 여행도 견뎠으니 이 정도 보상은 마땅하다 여기며 걸음을 내디뎠다. 뚜벅뚜벅. 보랏빛을 따라갈수록 신기한 기분이었다.

‘공기가 시원해.’

넝쿨이 구불구불 감은 기둥 사이 녹음이 짙은 풍경은 점차 환경이 변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기분 탓인 줄 알았으나, 점차 주변에 식물이 많아졌다. 더구나 이상하게도 마리사와 걸으며 보았던 수많은 시종과 하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인적이 드물었다.

한참을 걷던 아이라는 마침내 나타난 문 앞에 멈춰 섰다. 이때 보라색 아지랑이가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마치 이곳이 목적지라는 듯이.

‘들어가도 되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자 한눈에 담겼다. 속이 비치는 재질의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아래로 보일 듯 말 듯한 인영이 누워 있었다.

‘헉. 남자?’

커튼 아래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남자는 잠에 푹 빠져 있었다.

‘허억. 미남이잖아?’

남자를 본 순간 아이라는 숨을 들이켰다.

조금 창백하지만 백옥 같이 하얀 피부, 은실처럼 늘어진 청은빛 머리칼, 고요한 풍경에 녹아든 남자는 아이라에게 마치 금지에 들어온 것 같은 배덕감을 느끼게 했다.

‘잘못 들어온 것 같다.’

아이라는 얼른 뒷걸음질 치려 했다. 그러나 그때였다. 휘리릭, 어디서 날아온 얇은 넝쿨이 손을 휘감았다. 히이익! 아이라가 황급히 손에 걸린 넝쿨을 빼는 사이 천천히 남자의 눈이 뜨였다.

“로제?”

낮은 목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달콤하게 들렸다.

“아. 아니군.”

아이라는 그만 자리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빽빽한 숲 한가운데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런 기분일까. 수만 가지 녹색을 가득 담아 놓은 눈이 볕을 반사했다. 남자가 아름다운 눈을 감았다 뜨면, 눈동자로 빛을 머금은 다채로운 색이 머물렀다.

“누구냐.”

달콤했던 시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을 세웠다.

“누구냐 물었다.”

목덜미를 오싹하게 조이는 냉정한 목소리에 그녀가 움찔했다. 남자의 눈이 천천히 아이라를 향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은 그가 곧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웃음과 함께 냉한 낯이 흐트러지며 하늘색 머리칼이 사르르 흩어졌다.

“아무래도 장난을 치고 싶었던 모양이군. 가엾은 희생양인가…….”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녀인가?”

아이라는 무슨 말인가 싶어 무심코 제 몸을 훑었다가 이상한 옷을 입은 자신을 발견했다. 분명 화사한 외출용 드레스였던 그녀의 옷은 어느새 무명으로 된 단출한 원피스가 되어 있었다.

“내, 내가 언제 이런 옷을?”

분명 복도에서 본 하녀들이 이런 옷을 입고 있었다.

“이상하군. 하녀가 아닌가?”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서늘한 시선 속에 경계는 완전히 지우지 않은 채로.

“아니, 아니에요. 저는 하녀가 아니라……. 윌터의 공녀입니다.”

아이라가 황급히 제 신분을 밝혔다.

“귀한 분이셨군.”

잠시 놀란 남자가 곧 수긍했다.

“성함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아이라 데 메리골드입니다.”

남자가 식물로 가득한 풍경 속에서 웃을 듯 말 듯 입술을 끌어 올렸다.

“메리골드, 꽃의 이름이군요.”

‘꽃의 이름’이라 말하는 부분에서 남자의 낯이 아주 잠시 부드러이 풀렸다.

“아무래도 그녀는 당신의 이름까지 알고서 내게 보낸 것 같으니.”

그녀? 아이라를 이곳으로 보낸 사람을 이르는 걸까. 아이라야말로 남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여긴 어디며,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아는 걸까 몹시도 궁금했으니.

“‘그 성물’이 이곳으로 인도한 거군요. 그녀 외에는 신력을 사용하는 물건이 아닌데 그것의 마음에 쏙 드신 모양입니다.”

아이라는 생각에 잠기느라 남자가 말끝을 올린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이리 주시겠습니까?”

남자가 말하는 것이 수첩임을 알았다.

“이것의 주인이신가요?”

“아닙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하늘색 머리칼이 살랑 움직였다.

“그럼 드릴 수 없어요.”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츠렸다.

<부탁해요. 나름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함부로 건넬 수 없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맡긴 것이었지만, 그 순간의 목소리는 기억했다. ‘소중하다’ 했을 때 아주 깊고 애틋했던 목소리를.

그러나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혹시나 하는 가정이 고개를 들었다.

“건네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이 저입니다.”

아이라가 살짝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도 생각했던 참이었다.

<황궁 가장 안쪽 방에 있는 사람이에요.>

황궁 가장 안쪽의 방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이곳이 아닐까 했다. 한참을 걸었으니.

“의심하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그래도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아니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녀가 말한 이는 분명 나일 테니까.”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확신에 가득 찬 음성이었다.

“내 소개가 늦었군요.”

바람이 불었다. 긴 바람 끝에서 잎사귀가 한들한들 흔들렸다. 식물이 움직이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춤을 추는 듯했다.

그 순간 꽃봉오리가 돋아났다.

‘아, 꽃이.’

꽃이 만개했다. 팔랑팔랑. 꽃잎이 흩날렸다. 식물과 꽃에 휩싸인 남자는 꿈결인 듯 몽환적인 이 풍경에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남자는 스치듯 나직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나는 제국의 황후입니다.”

아이라는 잠시 잘못 들었다 여겼다.

“네? 그렇다면…….”

그녀의 눈이 천천히 손을 향했다. 저 남자가 황후라면, 이걸 건네준 여자는…….

“아이참.”

천장에서 누군가 뚝 떨어졌다. 누구인지 모를 사람은 이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가볍게 무릎을 툭툭 털었다.

“아모르가 그렇게 말하면 내 정체도 드러나잖아요.”

처음 수첩을 건넨 여자였다. 아이라가 입을 뻐끔거렸다.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나의 폐하.”

남자가 나지막이 웃었다. 놀란 건 아이라 혼자인 듯했다.

“좀 더 속아 넘어가 줄 거라 생각했죠.”

“송구하나 나는 폐하 이외의 사람과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모르가 찡그린 것과 동시에 여자의 손에서 작은 꽃이 피었다.

“옆을 오래 비웠지 않습니까.”

“나 고작 하루 다녀온 건데?”

“하루든 한 시간이든 깁니다.”

볼멘소리와 다르게 여성의 손에 핀 꽃은 귀엽고 앙증맞은 팬지였다. 여성이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아모르는 보고 싶었단 말을 늘 이런 식으로 하네요.”

뒤이어 두 사람 주변으로 꽃이 활짝 피었다. 아이라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어…… 어…….”

여성이 생긋 웃더니 머리를 덮은 천을 잡아당겼다. 천이 벗겨진 자리로 우아한 금발이 굽이쳤다. 색이 바랜 밀빛 금발……. 아이라는 더욱 놀랐다. 채도가 조금 달랐지만 아이라와 같은 색이었다.

다만, 갈색 눈동자인 아이라와 달리 여성의 눈동자는 자수정을 뽑아다 박은 듯 반짝이는 자색이었다. 유려한 곡선을 타고 올라간 뺨에는 긴 궤적이 그어져 있었다.

들은 적 있었다.

<황제의 얼굴에는 흉터가 있다 하더구나.>

윌터의 중신들이 그녀를 여성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는 이 흉터의 존재가 컸다. 윌터에 사는 여성의 얼굴에 흠이 있다면,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삶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반가워요.”

그러나 아실리는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흉터를 내보이고도 웃어 보였다. 아이라의 시선이 흉터를 향했음을 알았을 텐데도 태연했다.

“말했죠? 다시 만날 거라고.”

아실리가 봄볕에 말린 천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였다. 아이라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아…… 황제 폐하를 뵙…….”

그러나 아이라의 인사는 이어지지 못했다. 아실리가 숙이지 못하게 그녀를 잡아서였다.

“인사는 필요 없어요. 난 황제로 여기 있는 게 아닌걸.”

확실히 타국의 공녀에게 존대하는 황제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녀가 아이라에게 권위를 보이고자 했다면 이런 식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한 가지만 물어도 되, 되나요?”

“물론이죠.”

“혹시 왜 저한테 이걸 맡기신 건가요?”

아이라가 용기 내어 물었다. 아실리는 아직 아이라의 손에 들린 수첩을 흘끗 보고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당신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되도록 조용히요, 하고 아실리가 덧붙였다.

“네? 저를 말이신가요?”

여전히 놀란 눈을 한 아이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황제가 한낱 공녀를 만나고 싶어 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저를 말씀하신 게 맞죠?”

“네. 당신을요. 우린 만나게 될 거라 알고 있었으니까요.”

조금 전과 같이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고민하던 아이라는 체자르니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치 아이라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아실리가 말을 꺼냈다.

“왕세자에게서 사신을 보내겠다는 서신을 받았어요. 그는 어떤 사신이 좋겠냐고도 물었죠.”

아이라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나는 왕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여성을 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죠.”

똑똑하다. 이것은 윌터국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는 윌터에서 영악하다, 교묘하다, 약삭빠르단 말로 바꿔 칭해지곤 했다.

“실례지만…… 어째서인가요?”

아이라는 궁금했다. 그러나 아실리는 고개를 저었다.

“별 뜻은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

제 위로 여덟의 오라비가 있었고, 그들을 제쳐 피로 황위에 올랐다는 황제. 아실리는 소문답지 않게 소탈한 모습이었다.

“으음. 그래도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내가 아는 한 윌터 여성 때문이겠네요.”

카우치에 앉은 아실리가 아이라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주 아름답고 똑똑하지만 슬픈 운명을 가졌던 여자를요. 그 사람이 단지 누군가의 약혼녀였고 거기에서 끝나 버린 이야기가 조금은 안타까워서……. 라고 해 둘까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으나, 아실리의 표정이 겨울 노을처럼 씁쓸해 보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웃음이 자리를 메웠다.

“그런데 당신을 보니 내 시녀의 예전 모습이 생각나네요.”

“시녀요?”

“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아주 멋진 사람이랍니다.”

그렇군요.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내 시녀와 내가 처음 만났던 때에,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죠.”

찬연한 눈동자가 아이라를 올곧이 응시했다.

“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모르고 살곤 해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글쎄요. 비록 원하던 힘은 아니었지만 가끔 나는 사람의 속을 읽어요. 누군가의 고민이나 과거. 미래까지도.”

아이라는 문득 아실리의 나이를 떠올렸다. 이십 대 초반을 막 넘어가는 나이였다. 자신보다 서너 살 더 많을 뿐인데 나이를 더 먹은 어른처럼 느껴졌다. 이는 황제란 자리 때문인 걸까.

아실리에게서 무어라 더 말이 나올 것 같아 기다렸지만 의외로 아실리는 저 말을 끝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데구루루, 눈을 굴리던 아이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제 자리에 누구보다 오고 싶어 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아이라는 지금이야말로 이 이야기를 꺼낼 때라 생각했다.

<꼭 내 소식을 전해 줘. 알았지?>

그녀의 소꿉친구, 사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누구보다 참석하고 싶었던 체자르니안의 이야기를.

“그런가요?”

살짝 고개를 기울인 아실리가 빙긋이 미소했다.

“저는 공녀를 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아실리의 낯이 예의에 맞는 거리에서 보다 더 가까워졌다.

“공녀가 나와 좀 더 대화를 해 주면 안 되려나.”

“그, 그건 무슨 뜻.”

“뜻 그대로요.”

눈앞에서 이슬처럼 맑게 터지는 웃음에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뺨을 붉혔다.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대단한 미남들을 본 아이라의 눈은 저기 산꼭대기에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미녀는 아님에도 왜일까, 아실리에게는 시선을 사로잡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어서.”

도리질하며 뺨의 열기를 날려 버리려던 아이라는 그녀와 눈을 마주한 순간 문득 깨달았다. 웃음을 띤 아실리의 눈은 깊고도 우묵했다. 아름다운 자색 속에 아주 깊은 우물이 있는 것만 같았다.

과연 황제가 체자르니안의 사랑을 몰랐을까?

아실리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환한 미소임에도 이상하게 더는 말을 붙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이라는 불현듯 깨달았다. 만약 아실리가 체자르니안에게 미리 뜻을 전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는 직접 제국에 나섰을 것이다.

‘내가 잘 알지.’

이 순간 아실리는 부드럽게 돌려 전한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우회해 꺼내지 못하게 함으로서. 아이라는 체자르니안에게 어떤 희망도 줄 수 없을 것이다. 벼락같은 깨달음이었다.

‘체쟌……. 너 진짜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랑을 했구나.’

친구로서 딱하고 안타까웠으나, 아이라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편으로 왜일까. 완만하게 거절하는 황제가 싫지는 않았다.

아이라가 흘끗 황제 곁의 황후를 곁눈질했다. 시선 끝에 걸린 남자는 마치 설원 속 숲처럼 고요했다. 그럼에도 차갑고도 날카로운 존재감이 함께였다.

‘내가 눈치가 빠른 것에 감사해야 할까.’

소문은 사실이었다. 황제와 황후의 금슬이 아주아주 좋다는 소문 말이다. 겨울 숲을 조각해 넣은 눈이 오직 황제를 바라볼 때면 눈 녹듯 녹아내릴진대, 저것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또한 아실리의 눈에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어느 누가 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미안. 체쟌.’

아이라가 가슴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끼익 유리문이 열리며, 새로운 인물이 문 사이로 들어왔다. 아이라는 흔들리는 붉은 머리칼을 보며 마리사인가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여기 계셨군요.”

적발에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었다.

“손님을 말없이 데려가셔서 하녀들이 많이 놀랐습니다만.”

“레베카.”

아실리의 낯이 아이처럼 밝게 누그러졌다.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지금 짐승의 도시에 있어야 하실 분께서.”

“하하하. 땡땡이?”

“…….”

“……는 아니고! 빨리 쉬러 왔지. 전부 끝내고 말이야.”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신 건가요?”

레베카가 골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실리가 아모르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묻은 채로 배시시 웃었다.

“골치 아픈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황후 폐하.”

레베카가 힘주어 불렀다.

“로제.”

아모르는 그러거나 말거나 누그러트린 눈으로 아실리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머리끝에 입을 맞췄다.

“기왕 쉬는 김에, 밤까지 머물다 가면 어떤가.”

그러며 고개를 기울여 아실리의 귀로 입술을 가져가는 모습은 아이라의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아이, 이거 참 좋은 유혹인데. 기억해 둘게요.”

아실리가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제 황후를 밀어냈다.

“손님이 계시잖아요?”

그러면서 아이라를 바라봤다.

“그만 갈까요?”

“아! 네!”

“이런. 긴장하지 말아요. 공녀를 보고 싶었던 것은 진심이었으니까.”

아실리가 아이라의 손을 잡았다.

“비밀인데 난 앞에 보이는 내 시녀님이 무척 무섭거든요. 같이 가 줘요.”

마치 친한 영애에게 하듯 친근한 행동에 아이라의 눈동자가 작게 진동했다.

“어, 어찌 저에게 이렇게 대해 주시나요?”

“으음. 별 뜻 없는데. 이유는 지금부터 만들면 되죠. 나는 또래 친구가 거의 없으니 공녀가 해 주어도 좋지 않겠어요?”

“제, 제가요?”

눈앞에서 아이라와 같은 밀빛 금발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아실리의 자색 눈동자가 사르르 접혔다.

“응. 머리색도 같겠다. 훌륭한 공통점이 있잖아요? 이런 걸 인연이라 하는 법이죠.”

청산유수처럼 흘러가는 말에 아이라는 홀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반쯤 홀라당 넘어갔다.

“……싫은가요? 그건 슬픈데.”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여 살짝 침울한 낯을 한 황제를 보며 아이라는 한 영애가 키우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녀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윌터에서는 고양이에게 마력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을 유혹하고 무장을 해제시키는 요망한 마력 말이다.

“기뻐요.”

손뼉을 치던 아실리가 막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옷을 깜빡했네요.”

아실리가 눈앞에 걷는 레베카를 보다 살짝 허리를 기울여 속닥였다.

“재밌는 걸 보여 줄까요?”

장난스러운 음성이었다.

“그전에 그걸 내게 돌려줄래요?”

아이라가 수첩을 아실리에게 돌려주었다. 그 순간, 하얀빛 섞인 보랏빛 아지랑이가 수첩에서 피어올랐다.

쑥쑥 자란 빛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점령한 빛이 사라진 뒤로 아이라는 어느새 새로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금줄이 달리고, 섬세하게 짜인 천이 보였다. 막 도착했을 때의 단출한 외출용 드레스도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하녀복도 아니다. 훌륭할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제국식 전통 옷이었다.

“마음에 들어요?”

“네? 아. 네네!”

“정말?”

“정말로요!”

흥분한 아이라가 손을 파닥파닥 흔들며 말했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꼭 저를 꾀시는 것같이 느껴질 정도인걸요.”

잠시 눈을 깜빡인 아실리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많이 들어 본 소린데. 꾀어내면 넘어와 주나요?”

“……네?”

아실리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느리게 눈을 휘었다.

“농담. 옷은 선물이에요. 만난 기념.”

아주 오래전, 윌터에는 마법이 있었다. 기적이라 불리던 힘은 윌터에서 영영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간의 세상에서 일상만을 겪은 아이라에게 아실리는 기적을 일으킨 무척이나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가슴이 설렜다.

‘……이러다 나 체쟌이랑 경쟁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아울러 쓸데없는 고민을 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내 시녀 소개를 깜빡했네요. 앞에 걸어가는 사람은 레베카. 내 시녀이자 궁정 차관을 맡은 사람이에요.”

칼타니아스 직급에 해박한 것은 아니었던지라 아이라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궁정 차관?”

“윌터에서 궁 총관리자와 같은 역할이겠네요.”

이를 알아챈 아실리가 설명했다. 아이라의 입이 벌어졌다. 여인이 궁 총관리자라니, 보통은 아주 요직으로서 중요한 이들에게만 맡기는 일이 아니던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후로 대화는 없었다. 사박사박. 얇은 천이 아이라의 다리를 스쳤다. 아이라는 자신과 비슷한 옷을 걸친 아실리와 그녀의 뺨을 잠시 응시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앞서 걷는 시녀의 반듯하게 펴진 등을 바라보았다. 잠깐 얼굴 본 것이 다인 붉은 머리칼의 여성은 몹시도 당당하게 걸었다.

‘심장이 울렁거려.’

아이라는 기묘한 기분이었다. 웃고 싶었고 울고 싶었고 무엇인가에 실망했고 또 부러웠다. 그러면서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포용한 길은 곧 갈림길에 들어섰다.

“아쉬워라. 여기서 헤어지겠네요.”

나눠진 길을 본 아실리가 멈춰 섰다. 이로 모자라 성큼 걸어와 아이라의 손을 잡았다.

“그럼 연회에서 봐요. 그때는 황제로서 있겠지만. 내 본질은 지금과 다르지 않아요.”

가까이서 바라본 아실리의 표정은 훨씬 풍부했다.

“그러니 지금의 아실리 로제로 기억해 주세요. 나는 그편을 더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잠깐 침묵했던 아실리가 쓴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그리고 체쟌 왕자님에게도 잘 지내 달라 전해 줄래요?”

“……아.”

“이것이 마지막일 거라고도.”

손이 스르륵 풀리며, 아실리가 등을 돌렸다.

“또 봐요. 공녀.”

아실리는 황후와 함께 반대 방향의 길에 섰다. 옆에서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이쪽입니다.” 하고 말했으나 아이라는 잠시 황제와 황후 쪽을 바라봤다.

“아모르. 내가 보낸 선물은 어땠어요?”

“하녀복을 입은 소녀 말인가?”

“어머,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내가 선물한 건 추억이에요. 당신과 나의 추억.”

“그런가.”

고개 숙여 웃는 두 남녀가 보였다. 곧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글쎄. 난 추억보다 눈앞의 폐하가 좋은데.”

대화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환히 웃는 두 남녀의 얼굴만은 선명하게 아로새겨졌다. 행복이란 표정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저들과 같은 얼굴이지 않을까. 아이라는 고개를 돌렸다.

이후 황제의 탄신일 기념 연회는 전쟁 뒤 5년 만에 열린 만큼 아주 성대하고 호화로웠다. 유례없이 제국민과 타국, 모든 신관이 함께한 거대한 축제였다.

아이라는 의욕 없던 출발할 때와는 달리, 윌터의 대표이자 얼굴로서 모든 역할에 충실했다. 후야제가 끝나고 아쉬움과 변화를 품은 채 돌아갈 때까지.

그녀 생에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 * *

돌아온 아이라는 바로 체자르니안을 찾는 대신 공작 저에 머물렀다. 안달 난 체자르니안이 그녀를 왕궁으로 소환할 때까지 말이다.

그때까지 잘 먹고 푹 쉬었다.

“즐거운 축제였어?”

아이라가 뚱한 얼굴로 체자르니안을 응시했다.

“잘 다녀왔냐는 말씀이신가요?”

새초롬하게 대답해 주자 체자르니안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오가는 길이 어찌나 길고 피곤한지 머리도 아프고 밤도 추워서 감기에 걸릴 것 같았고. 아직도 허리가 아프네요.”

“응!”

“그래서 더 길게 요양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체자르니안이 끄덕이면서도 울상을 지었다. 보아하니 그가 원한 반응이 나오지 않아 끙끙대는 기색이 만연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이라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문득 한숨을 푹 쉬었다.

“전하.”

“응. 아이라!”

“저, 말 편히 해도 되겠어요?”

체자르니안이 밝은 표정으로 “물론.” 하고 허락했다.

“이봐, 친구님.”

아이라가 잽싸게 짝다리를 짚었다.

“너 왜 황제 폐하가 서신 보냈단 말은 안 했어.”

표정을 무섭게 굳힌 아이라에게서는 그가 원했던 말 대신 책망이 튀어나왔다.

“아아. 그거. 깜빡했어!”

“뭐?”

체자르니안은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깜짝 선물이랄까? 그편이 더 재미있잖아.”

“재―미?”

장난하냐. 이런 뇌가 청순한 왕자를 보았나. 말끝을 늘리는 왕세자의 행태에 발끈하려던 아이라가 얼른 화를 가라앉혔다.

‘아냐, 진정하자.’

아이라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입을 떼었다.

“이봐요, 전하. 내가 칼타니아스에서 알아차린 게 하나 있는데 말이지.”

“응?”

“너 내내 제국의 황제에게 서신 보냈지?”

“으응?”

체자르니안의 성정은 소꿉친구인 아이라가 제일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볼꼴 못 볼꼴 보며 자랐지 않았던가. 그러니 단 한 줄 말로도 그의 행적이 줄줄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체자르니안이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데굴데굴 굴렸다.

“그럼 그렇지. 네 성격에 보내지 않고 버틸 리가 없지! 얼마나 자주 보낸 거야?”

“아, 아니야! 많이 안 보냈어! 진짜야!”

“……얼마나?”

“……이, 일 년에 두 통?”

“…….”

“……세, 세 통.”

황제에게 개인적으로 연통을 보내는 왕세자라니. 슬로레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이놈은 넙죽 후궁이 되겠다 나섰을지도. 이 생각까지 미치자 아이라는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신빙성 있는 얘기였다.

“칼타니아스랑 윌터가 오랜 적국이었던 건 기억해?”

“그거야 아바마마나 형님 때의 일이고…….”

“전쟁까지 치렀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 체자르니안이 뺨을 긁적였다.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해.”

아이라는 그런 소꿉친구를 복잡한 눈으로 보았다. 대대로 호색한인 사내가 많았던 윌터 왕가에서 체자르니안의 아버지는 단 한 사람의 반려만 두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들도 같은 성정을 보였다.

‘이건 보고 자란 게 있기 때문일까.’

슬로레니안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체자르니안도 다르지 않았다. 남들은 그저 풋사랑이라고, 첫 연정이라고 언젠가 잊는 것을 그녀의 소꿉친구는 약 7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체쟌. 편하게, 속 시원히 말할게. 네가 좋아하는 황제 폐하는 아주 편히 잘 먹고 잘 주무시고 자알 지내셔.”

그녀가 친구의 애칭을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응.”

체자르니안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저 미모만은 어린 시절부터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행복하셔. 적어도 내가 본 황제 폐하는 그랬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

체자르니안은 대답이 없었지만 맑은 미소는 여전히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다행이다. 행복하셔서.”

아이라는 저도 모르게 ‘이 맹추야!’ 소리 지르고픈 마음을 참았다. 하기야 미련해서 형이 버리고 간 자리를 지키는 것일 터다.

‘어쩜 이렇게 미련한지.’

아이라는 앞으로도 체자르니안이 황제를 잊지 못할 것이라 예감했다. 아마 제 아버지처럼 슬로레니안처럼. 이 핏줄은 한 번에 하나 이상을 하지 못하니까. 아이라는 확신했다. 이대로는 왕세자비, 나아가 누가 왕비가 되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하리라.

미래의 그녀들을 동정하는 건 아니다. 그들 또한 감안하고 선택한 길일 테니. 이 왕국에서 혼인엔 사랑이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아이라는 고요히 눈을 빛냈다. 섬광처럼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너 나랑 결혼해.”

“응……. 응?!”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체자르니안이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잘못 들은 거 아냐.”

“아, 아이라? 너 설마 나 좋.”

“아니. 그렇다고 널 사랑하는 것도 아니니 안심해.”

“그, 그럼 왜?”

아이라가 삐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곧 심술궂게 웃었다.

“너, 평생 그분을 잊지 못할 거잖아.”

“…….”

아이라는 체자르니안의 표정을 보며, 제가 정곡을 찔렀음을 확신했다.

“그런 정신으로 결혼해서 어떡할래?”

눈을 깜빡이던 체자르니안이 아이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는 나로 괜찮아?”

“괜찮겠니?”

아무리 왕족과 귀족의 혼인이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 아이라에게도 낭만이란 것이 없진 않았다. 오래전에 이 현실 앞에 포기했을 뿐이지. 아이라는 눈을 감았다. 이전까지 의무라 생각했던 생각이 황제 부부의 시선을 보고서 바뀌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나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나, 가주가 될 거야.”

“응? 하지만 여성은 가주가…….”

“될 수 없지.”

아이라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니 네가 바꿔.”

“어?”

“넌 다음 왕이잖아.”

아이라라고 연애와 사랑, 결혼에 환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윌터의 남자들보다는 체자르니안이 나을 것이다.

“네가 법을 바꿔줘. 내가 가주도 하고, 왕비도 할 수 있게.”

적어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남자이니까. 사랑보다는 동반자일 터다.

“난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몸이야. 알다시피 여성의 여행은 결혼 전엔 아버지의 허락이, 결혼 후엔 남편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아이라는 공녀로 태어나 부족할 것 없이 편히 살았다. 적어도 귀엽고 착한 딸로서는.

“그래서 나는 오래전에 체념했어. 모든 걸 포기했단 말이야.”

하나 그녀는 지나치게 영리했다. 수를 보면 곱절의 셈이 가능했고, 사람의 심리를 읽는데 능통했다. 특히나 상업과 경영에 있어선 흐름을 통째로 읽는 눈이 있었다. 스스로의 능력을 깨달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영지 경영서를 보면 이상하단 소릴 들었고 성격은 영악하고 교묘하며 약삭빠르단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포기했다. 체념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 여겼다. 그런데 이제 와 누군가 그녀를 영리하다고 현명하다 인정했다.

<그럼 나는 왕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여성을 보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죠.>

체자르니안이. 그리고 황제가. 그녀를 인정했다.

“그런데 나는 밖으로 나가서 만나고 싶은 분이 있거든. 황제 폐하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아이라는 아주 젊은, 그러나 수많은 세월이 담긴 눈을 가졌던 황제를 떠올렸다.

“그분이 나랑 친구하자고 했거든.”

황제에겐 한순간의 유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라에게는 평생 가져온 것이 흔들리던 시간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자신을 모르고 살곤 해요.>

찬연한 자색 눈은 분명 ‘당신처럼.’이라고 말했다.

“몰라. 내가 지금 무슨 감정을 가진 건지. 그러니 나가서 확인해 보고 싶어.”

아이라가 체자르니안을 응시했다.

“너도 알잖아. 난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한다는 걸.”

아이라가 슬로레니안과 약혼을 파기한 것은 슬로레니안이 탐나지 않아서였다. 칼타니아스의 미남들을 바라보며 볼만 붉히고 만 것도 욕심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미래를 거머쥐고 싶었다.

“나 그분처럼 살아 보고 싶어.”

아이라의 가슴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올랐다. 실패할지도 모르나, 해 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나랑 함께해, 체쟌.”

체자르니안은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정말 나로 괜찮아? 아이라, 난 네가 염려돼서 하는 말이야. 언젠가 네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몰라.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도.”

“물론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걱정 마. 한눈은 안 팔 테니까.”

“그,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아이라가 환한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 괜찮다고 말하는 거야. 체쟌. 내 남은 인생에서 낭만과 사랑을 포기해도 좋아.”

그녀는 허리를 폈다. 한평생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도 숨겨왔던 시선을, 말을, 마음을 이제는 편안히 드러낼 수 있다. 아이라는 이것만으로 인생을 걸만하다 여겼다.

“평생 다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너와 내게 자유를 줄 남자를 찾는 나는 좋은 파트너가 될 거야.”

“사랑이 없어도?”

“그래. 네가 사랑 대신 채워 줘.”

아이라가 웃었다.

“나는 평생 네 사랑을 바라지 않는 대신 네 인생을 가질 거야. 아울러 내 인생도.”

체자르니안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내 환한 웃음과 함께 끄덕였다.

“그래. 아이라는 언제나 똑똑하고 현명했으니까.”

어느 ‘소녀’가 책 속 이야기로 알았던 배경 속 왕국 윌터.

소녀가 던진 돌은 윌터의 미래 또한 바꾸어 놓았다.

훗날, 체자르니안 레 윌터가 즉위했을 때, 왕국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옆에는 윌터국 최초의 여성 공작인 메리골드 공작이 함께였다.

또한 언제나 발 벗고 나선 메리골드 공작은 놀랍게도 윌터국 왕비이기도 했다.

<왕비면서 공작을 겸하는 게 아니야. 공작이면서 왕비를 겸하는 거야. 알겠어?>

비록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는 아니었으나 두 사람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물론. 우리 왕비님 말씀이 맞지!>

이들 부부가 왕과 왕비가 된 후 한 가지 특이한 일은 윌터의 왕비가 의아할 정도로 자주 제국을 방문했다는 점이었다. 서쪽의 두 강대국, 윌터의 왕비와 칼타니아스의 황제 간의 우정은 후세에도 길이길이 전해졌다.

* * *

아이라가 돌아가고 몇 년 뒤.

칼타니아스의 황제 아실리는 정성 들여 쓴 서신 하나를 받게 된다. 발신인은 윌터 왕실이었다.

“무슨 내용인데, 그리 즐겁게 웃나.”

“아. 윌터 왕실에서 혼인이 있을 거라네요.”

싱글벙글한 아실리의 얼굴을 보며 턱을 괸 아모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의?”

“공작과 왕세자요.”

아실리는 몹시 즐거운 사람처럼 후후후, 웃었다.

아실리가 언젠가 본 미래에는 그녀와 함께 웃던 ‘친구’가 있었다. 아주 귀엽게 생겼지만 속은 누구보다 꽉 찬 강단 있는 친구였다. 그 친구의 머리칼은 자신과 같은 밀빛이었다. 아실리는 때때로 이런 미래를 읽는 것이 즐거웠다. 제멋대로 발동하는 능력이 달가운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머지않아 ‘친구’가 이곳에 방문하리라.

“공작은 아모르도 아는 사람이에요. 몇 년 전에 여길 방문했던 귀여운 공녀님.”

“아아.”

“정말로 공작이 되었네.”

아실리는 이것이 못내 기쁘게 느껴졌다. 아이라의 미래가 변한 것은, 아실리가 이 땅의 운명을 바꿨기 때문이었으니까. 나비효과, 그것도 누군가의 운명을 행복한 쪽으로 이끈 좋은 나비의 날갯짓이었다.

“즐거운가?”

“응.”

아모르를 바라보는 아실리의 시선이 별처럼 빛났다.

“나는 변화가 즐거워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더욱.”

언젠가 자신이 책으로 읽었다 믿었던 이야기, 현실이 된 세상 속에서 사는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이야기는 없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한 세상은 있더라구요.”

그리고 그녀는 오랫동안,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살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기나긴 삶에 좀 더 나은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아실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아모르가 그 뺨에 입술을 남겼다.

“다행이군. 그런 너를 보는 나도 늘 행복하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