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⑵ (39/47)

2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⑵

낯선 바닥이었다. 나는 그대로 무너져, 눈물을 토해 냈다.

“아…….”

마지막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누군가의 희생으로 구해졌고 살아남았다.

“안 돼. 안 돼.”

어째서 이런 식으로 살아남지? 이럴수록 카스토르를 죽이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커졌다.

“고작, 고작 피를 묻히는 게 뭐 대수라고. 뭐 대수라고!”

일기장은 카스토르를 죽여도 소용없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거기서 신력을 써 봤더라면, 시도라도 했다면 무언가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죽여야 했다. 죽여야 했어. 반드시 그놈을 죽여야…….”

쾅.

의지에 반응한 신력이 손등에 식물을 피워냈다. 엉망이 된 감정을 대변하듯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식물이었다. 어느새 손에 쥔 가시 덩굴로 손을 쾅쾅 내려찍었다. 내려친 손도 넝쿨을 쥔 손도 금방 엉망이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아프지 않았으니까.

“이런.”

쉴 새 없이 내려치는 동안 나는 이 공간이 어디인지, 어느 시간인지도 관심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막았을 때, 그제야 여기 혼자 있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라고 준 힘이 아닌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눈앞에는 낯설지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아, 아모르?”

눈앞에서 그가 평화롭게 웃고 있었다. 아니, 눈에는 짐짓 노기가 어렸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가 눈앞에 있는데. 그리운 얼굴 앞에서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모르……. 아모르……!”

나는 손을 뻗었다.

“이번엔 진짜야?”

숨이 막혔다. 이 순간 그가 가짜이고 허상이고 돌변해 내 목을 조르더라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당신이 눈앞에 있다. 당신이.

“진, 짜……, 당신이야?”

더듬더듬 뻗은 손, 덜덜 떨어서일까 주르륵 옷에서 미끄러졌다.

“네겐 가짜 반려도 있더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한번 웃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까딱하는 것으로 나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다. 넓고 포근한 품에 안겨서야 나는 참았던 울음을 토해 냈다.

꽃내음, 나무의 향기, 숲의 공기. 전부 아모르였다.

“이것 참 언제부터 이런 응석받이가 되었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니면, 내가 없는 곳에서 이렇게 울었나?”

짐짓 엄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나긋하게 잠식했다.

“우는 너는 이렇게나 예쁘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또 누구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나.”

그제야 나는 울음을 그치고 그를 올려다봤다.

“예, 예쁘다니, 그게, 무슨 읍!”

기다렸다는 듯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곧 전과는 전혀 다른 기분에 눈을 번쩍 떴다. 입술을 댄 채 마주한 그의 눈이 사르르 휘어졌다.

그 순간 입술을 가르고 그의 혀가 쑥 들어왔다.

“읏, 응, 잠, 으읏…….”

이 상황에서 꺼낼 말은 아니지만, 그, 기술이, 그러니까 입술을 채우고, 현란하게 응하는 기술이…… 전혀 달랐다. 나도 모르게 아모르를 밀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아, 아, 아모르?”

그제야 그가 눈에 들어왔다.

“대, 대체, 이건, 아니 당신 어디서 이런?”

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내리고 앞섶을 편안하게 반쯤 풀어헤친 모습은 내가 알던 것과 다르지 않았지만, 더욱 깊어진 눈매나 타액이 묻은 혈색 좋은 입술, 나른한 색향마저 흐르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네게 너무 일렀나?”

그는 더 무르익은 느낌이었다. 마치 그가 나이를 먹어…… 그래, 한 서른 살쯤이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오랜만에 그때의 너를 보니, 참을 수가 없어서.”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내 폐하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사랑스럽군.”

그가 타액이 남은 입술을 훔치고는 제 입술로 가져갔다.

“로제. 부끄러운가?”

여전히 까칠하지만 농익은 미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불가항력이었다.

“지금 몇 살이에요?”

“응?”

“몇 살이냐고요. 빨리 말해.”

아모르는 픽 웃더니 자신의 옷섶을 잡은 내 손을 그대로 잡았다.

“몇 살일 것 같으냐.”

점점 표정이 사라지는 내 얼굴에 그가 슬쩍 덧붙였다.

“흐음, 서른은 넘었다만.”

그 말에 당황도 잊고 아연함을 느꼈다. 믿기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언젠가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소릴 듣던 그가, 약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서른 살이 되었다니. 미래라기엔 너무 달콤했고, 현실이라기엔 환상 같았다.

“혹시 여기, 내가 만들어 낸 꿈인가?”

“꿈?”

아모르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뜻 모를 시선이었다. 그는 이내 보일 듯 말 듯 미소했다.

“글쎄. 어떨 것 같나.”

그동안에도 여러 추측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아니면, 나는 절대로 오지 못할 시간일지도 모르겠네.”

데인과 플뢰온과 레이가 나 없이 단란하게 웃던 시간처럼. 헤르난이 행복하게 웃던 그 시간처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어떤 자신감?”

“이런 행복을 쟁취할 자신감.”

일기장은 다시 돌아와서 행복해지라고 말했다. 내게 행복은 카스토르와의 악연을 끝낸 뒤 찾아오는 것이다.

“어떤 위기에서든 당당하던 나의 폐하답지 않군.”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턱밑을 잡고 간질였다. 허리를 쓸어내리는 농밀한 접촉에는 한껏 애정이 실려 있었다.

“무엇이 너를 이렇게 꺾어 놓았나.”

그 다정함에 기대어 나는 채 삼키지 못한 울음과 함께 토해 냈다.

“그를, 카스토르를 죽여야, 나는 행복해지는데 난……. 손을 뻗을 수가 없었어.”

여전히 이곳이 꿈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지우지 못한 나는 어리광처럼 짧아진 말을 뱉었다.

“왜?”

“그를 죽이면, 당신이 실망할 테니까. 아니 아니야……. 내가 당신 얼굴을 볼 수 없을 테니까.”

행복해지고 싶었으나, 손에 피를 묻히는 순간 잡지 못할 것이 된다. 아니었다. 이기적이라 해도 좋다. 나는 나를 죽인 남자처럼 되고 싶지 않다. 생명을 빼앗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당신도 살인자가 된 나는 싫잖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웅얼거리는데,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음성이 떨어졌다.

“그것 참 어리석은 고민이군.”

“……뭐?”

그가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로제, 내가 몇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나.”

사라락.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부드러이 내 손을 활짝 열었다. 얼떨떨한 내 얼굴이 깜짝 선물처럼 드러났다.

“내가 만든 독을 먹은 이들이 지금도 저승에서 울부짖고 있을 거다.”

그는 한때 성에 갇혀 황제의 수족으로 있던 시절을 시인하며 이어 말했다.

“나는 평생 그들에게 속죄하며 살아가겠지. 그러나…….”

그의 시선은 차갑고 단정적이었다.

“나의 형님은 속죄하던가.”

“…….”

“제가 죽인 이를 기억조차 못 하는 것은 차라리 인간 백정이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속죄, 카스토르와는 먼 단어였다. 아모르는 언젠가 처음 만나던 날처럼 까칠하고 냉소적인 웃음 그대로 지어 보였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알겠더군. 내가 갇힌 채로 많은 것을 잘못 생각해 왔음을. 한지만 말하자면,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을 인간이라 부르지 않아도 된다, 로제. 그런 이를 죽였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요?”

“쓰레기 수거니까.”

신랄한 그의 표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도 잠시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죽이진 않았는데.”

“그렇다면 더욱 쓸데없는 고민 아닌가.”

그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말이다. 넌 이미 전쟁을 이끈 황제다.”

잠시 멈칫한 나는 깨달았다. 그가 알려 주려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왜 지금까지 몰랐던 거지?’

입술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황제다. 전쟁에서 죽고 시들어 간 생명 또한 내 몫이 아니던가. 그것이 두 괴물이 먼저 일으킨 전쟁이라 하여도.

“이상해요.”

카스토르와 같은 인간은 되기 싫다. 늘 그렇게 여겼다. 지금도 그 뜻은 변함없다. 하지만 나는 이미 자의든 타의든 생명을 저울질하는 심판을 내렸다. 이 사실이 나를 바꿔 놓진 않더라도 적어도 전쟁으로 인한 무덤을 가슴에 만들었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난 이미 피를 묻혔다. 카스토르를 죽이든 죽이지 않았든.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건 아니었다. 다만, 돌이켜 보면 그동안 카스토르를 죽이겠다, 죽이지 않겠다. 이 한 명제에만 사로잡혔던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시간의 왜곡에 들어간 이후로 내내.

“왜 지금까지 하나에만 갇혀 있었지?”

그제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바로 형님이 타인을 옭아매는 방식이겠지.”

아모르는 분노와 약간의 슬픔을 담아 중얼거렸다.

“지지 말거라.”

그가 나를 품에 가두듯 안았다. 나를 잡은 손은 단단하기만 했다. 이렇게 아모르의 품의 안겨 있는 시간이 꿈만 같았다.

“나와 다시 만나기로 했지 않았나.”

나는 멈칫했다.

“……봄과 함께 나를 데리러 온다고 하지 않았어.”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구슬프게 들린 것은 착각일까.

“……응.”

왜인지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눈물이 들어찼다.

“괴로워하지 마라. 잊지 말아 줘. 난, 네가 이 세상을 멸망시켜도 널 사랑할 거다.”

나이를 먹은 아모르,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아모르.

“그러니 그런 하찮은 걸로 내 사랑을 의심하진 말아다오. 너라도 용서할 수 없으니.”

아모르는 살짝 웃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랑해, 로제.”

가까워지는 그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기다리지.”

입술이 이마에서 눈, 다시 코로, 마지막으로 입술에 눈송이처럼 내려앉았다. 그리고 끝으로 입술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내 쪽에서 숨을 헐떡일 때까지.

고개를 든 그는 나지막하게, 이게 바람은 아니겠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속삭인다. 미래의 내가 때리려 하면 꼭 막아 주어야 한다며.

“나머지는.”

그가 다시 입술을 눌렀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미래에서.”

신관의 키스는 축복이라고.

* * *

눈을 뜨면 다시 시간을 이동한 것인지, 거대한 황궁 앞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바람조차 불지 않고 멈춘 하늘이 보였다. 현재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카스토르가 있었다. 그는 전과 다른 초조한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안녕.”

어째서인지 나는 마치 새로운 사람이 된 양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유로워서도, 그에게 되찾은 안정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가 달리 보였다.

“……아실리.”

지난 몇 년간 내 삶을 지배했던 남자. 나는 그의 이름이 참으로 버겁고 두려웠다.

솔직하게 말을 해 보자면, 더는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이미 그때의 나는 손 뻗어도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졌다.

“아실리 로제.”

그 자리에 공포와 절망을 채워 넣었던 남자가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짓는다.

“어느 시간에 다녀왔지?”

아. 알겠다. 그가 짠 시나리오 속에는 없는 일인 것이다. 내가 눈앞에서 사라진 것으로 모자라,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바라보는 것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당신, 참 쓰레기 같네.”

가감 없는 감상에 카스토르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내게 이끌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내 가면을 쓴 듯 나긋한 미소를 돌려주며 말했다.

“나는 알아. 너는 많은 것에 연민과 동정을 주곤 하지.”

동정의 선 안에 과거의 자신도 들어가지 않았느냐. 돌려 묻는 그는 태연하고도 뻔뻔했다.

나는 픽 웃었다.

“그래. 너 참 불쌍하더라.”

“…….”

“측은하고.”

“…….”

“값싼 동정마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정도로 탐욕스러워.”

카스토르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네겐 적선하듯 던져 주는 정도 아까워”

노래하듯 음성이 튀어 나간다. 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넌 황제를 증오하지.”

한평생 많은 이들의 생을 쥐락펴락 가지고 놀았던 선황, 그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가해자였다. 그러나.

“개새끼.”

“…….”

“네가 황제랑 뭐가 달라?”

고개가 도도하게 기울어진다. 나는 미소를 건 채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휘휘 꼬았다.

“내 눈엔 너도 다를 것 없이 보여. 아니, 황제와는 다르지. 너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니까. 불쌍하고 가련하고, 더럽고. 치졸한 새끼.”

그 순간 그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쾅.

잘려 나간 내 머리칼이 나풀나풀 허공에 나부낀다. 오른쪽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보였다. 거인의 주먹이 다녀간 듯 커다란 구덩이다. 미처 살필 새도 없이 다음 일격이 덮쳤다.

‘정면.’

나는 손을 가로저어 신력을 일으켰다. 해일처럼 덮쳐 온 신력의 파도는 새하얀 벽에 가로막혀 여러 갈래로 부서졌다. 그러나 이건 탐색전에 불과하다.

‘오른쪽!’

황급히 손을 세로로 휘저었다. 식물이 빽빽하게 돋아난다. 의지에 따라 자라난 넝쿨 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진다. 썩둑. 섬뜩한 소리와 함께였다.

검을 든 카스토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이곳으로 도약한 그는 흉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뭘 그렇게 봐? 이제 시작이야.”

내 입술이 호를 그렸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몸을 움직여 뒤를 점거했다.

‘등 뒤라면.’

아무리 그라도 등 뒤는 무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잽싸게 등을 돌렸다. 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들어왔다.

‘이 정도는 내게 어림없어!’

휘리릭 뻗은 식물 줄기가 검을 잡았다. 검은 머리칼이 출렁 춤을 춘다. 본디 식물이란 날붙이를 이길 수 없는 성질이었으나 신력으로 만든 식물은 달랐다. 능히 카스토르의 검을 이겨 냈다. 팽팽한 힘이 대치했다.

“어느 시간에 다녀온 거냐고 물었지?”

땅을 뚫고 나온 뿌리가 그의 다리에 휘감겼다.

“……그래. 어느 시간에 다녀왔지?”

“아주 행복한 시간에.”

그는 한쪽 다리와 팔이 구속당한 채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떨어진 놈의 입술 사이로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황금으로 된 정염이 그의 눈동자 속에 활활 타고 있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카스토르 네겐 없었으니까.”

신력으로 일어난 바람에 검은 토가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못지않게 내 옷자락도 펄럭였다. 긴 머리칼 사이로 그가 보이다가 사라지다가, 다시 보이기를 반복하다가.

“생각해 보니, 굳이 널 이해할 필요가 없겠더라고.”

주변에 떨어진 줄기가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내 의지에 따라 이것은 뾰족한 칼날처럼 그를 겨냥했다.

나는 태연히 미소했다. 이 순간에도 그를 붙잡고 있는 식물이 파르르 떨었고, 계속 붙든 채로 버티는 건 결코 쉽지 않았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이런 것으로 나를 묶어 두진 못할 텐데.”

“알아.”

오른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뭉쳐 하나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히 시간 벌기지.”

솜뭉치같이 작던 것은 점차 커지고 형체를 이뤘다. 형체가 마침내 기지개를 켰을 때, 거대한 짐승이 울음을 토해 냈다.

“크르르릉―.”

나를 지키려는 듯 내 앞을 가로막은 하얀 짐승은 카스토르를 보며 이빨을 드러냈다. 본능적으로 적을 알아차린 듯 적의가 어린 울음이었다.

나는 손을 살짝 내려다봤다.

‘처음 해 보는 것인데, 되는구나.’

내겐 아모르의 힘과 헤르난의 힘이 있었다. 오랫동안 각성하지 못한 나는 신력을 활용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러나 아올레시아에게 배우고, 루스벨라와 싸우며 깨우친 지금은 다르다. 내게 있는 모든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용 방법을 몰라 방치해 두었던 힘. 그리고 죽음의 신과 주신, 두 신의 힘 또한 있다.

“어때, 이제 할 만하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와 나는 보통 신관을 초월한 이들임을.

초월자들의 전투는 힘의 용량의 차이와 사용에 얼마나 능숙하냐에 달려 있다. 비약적으로 성장한 나였지만 카스토르는 한 차원은 더 높은 곳에 있지 있을까. 격이 다른 세계에 있는 강자였다.

그러나 나와 그에겐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힘의 본질이다.

“네게 죽었을 때처럼 무력하지 않아.”

그때였다. 치이익. 염산을 뿌린 듯 내 주변에 떠 있던 식물이 타들어 간다. 그의 다리를 잡고 있던 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몸을 낮춘 짐승이 그르렁거렸다.

“……언제쯤이면 망가질까.”

한 손엔 검을 쥔 채, 다른 손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카스토르가 보였다.

“네게 절망을 주었는데도 아직도 망가지지 않았네.”

광기로 빚은 칼날같이, 섬뜩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역시 나는, 너를 완전히 꺾어 놓았어야 했나.”

그의 등 뒤로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네 날개를. 잡아 뜯어야 했다.”

눈부신 황금색 눈동자 또한 정체를 모를 검은 것이 차지했다.

“그랬다면 내 손에 들어올 텐데. 멀리 돌아갈 것 없이.”

그를 침식한 저 검은 아지랑이는 무엇일까. 단순한 기운이 아니다. 그저 보기만 했음에도 마치 수백 년 묵은 썩은 늪처럼 질퍽하고 음침한 기분이 들었고 불길함에 몸서리 처졌다.

“여기서 무릎 꿇리면 내 것이 되겠지?”

나는 주춤 반보 물러났다.

“도망가는 건가?”

광기에 잠식된 듯 묵직하고 황홀한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그는 들어 올린 발 그대로 그림자를 짓이겼다.

“그럴 리가.”

처음부터 도망치려 한 적 없다. 도주해 봤자, 끝을 볼 때까지 나를 쫓을 테니까. 내가 여기서 널 이기거나, 끝내 쓰러지거나,

“이 세상이 멸망해 단둘만 남는다 해도 너 따위와 남고 싶지 않아. 차라리 죽어 시간을 돌리고 말지.”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아모르를 볼 수 있을 테고.”

카스토르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땐 아모르 또한 죽여 주지.”

그가 남긴 검은 아지랑이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흉흉한 기운은 화롯불에 장작을 던진 듯 더욱 강해진다.

“크르르르릉!”

하얀 짐승이 옆에서 나타나 카스토르에게 달려들었다. 카스토르는 가볍게 짐승을 튕겨냈다. 그러나 맹렬했던 기세는 효과를 보았다. 물러난 그의 뺨에는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주르륵 그의 흰 뺨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아아. 헤르난의 힘인가.”

순식간에 피가 멈췄다.

“피를 흘려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것도 얼굴에서.”

그러나 주신의 신관의 능력은 내가 가진 재생 능력과는 달랐다. 회복력을 가졌을 뿐 완전히 낫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는 발톱 자국이 남은 뺨을 쓸어 보다 피식 웃었다. 시선을 마지막으로 그의 발이 땅을 박찼다.

“크와앙!”

짐승이 기다렸다는 듯 내 앞을 막아섰다. 이빨이 검을 물고, 대치가 이어졌다. 나가떨어진 쪽은 짐승이었다. 그러나 카스토르 또한 미미하게 낯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움직임이 둔해졌어.’

나는 하늘을 쳐다봤다. 움직임 없는 달. 이 공간은 엄청난 신력을 잡아먹는다.

‘이 공간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는 거야.’

순식간에 앞으로 나타난 카스토르의 검이 가로막은 짐승을 베었다.

“성가시군.”

기운으로 만들어진 짐승이건만 마치 고통을 느낀 듯 깨갱하는 울음소리가 심장을 선득하게 했다.

‘안 돼!’

재빠르게 지진을 일으켰다. 하나 땅의 균열이 카스토르에게 채 닿기도 전에 그는 뒤로 물러나고 말았는데, 대가리만 남은 짐승이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환희에 찬 표정을 하며 하얀 짐승을 쳐다봤다.

‘신력으로 만들어져서 몸을 베어도 움직이는구나!’

같은 생각을 카스토르 또한 뱉었다.

“……형체가 없다. 이건가.”

이내 기운을 받아 짐승이 제 형태를 되찾았다. 동시에 내 의지를 따른 신력이 움직였다. 카스토르 발밑에 거대한 나무가 자랐다.

나는 박수를 쳤다.

‘바로 지금!’

나무에서 강철 같은 가시가 돋아났다. 창처럼 뾰족한 가시를 그의 살갗에 박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피했으나 모든 것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스토르의 검이 가시를 베었다. 그러나 줄기가 그의 등을 노리고, 짐승이 달려들었다. 한순간 그의 몸이 휘청였다. 틈을 노려 보랏빛 나비가 그를 뒤덮었다.

나무를 베느라 카스토르는 미처 나비를 보지 못했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나비가 폭발했다.

콰앙!

거대한 바위가 둘로 깨지는 소리, 성공했다면 형체조차 남지 않았을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러나 먼지바람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커다란 덩어리가 바람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으읍!”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어깨를 잡는 악력에 나는 그만 바닥으로 쓰러졌다. 묵직한 체중이 나를 짓눌렀다.

“왜.”

피할 곳은 없었다.

“왜 난 안 되는 건데.”

반은 금색에, 나머지 반은 검은 그림자에 잠긴 눈이,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말해 봐.”

한 팔로는 짐승의 이빨을 잡고, 온몸에 가시에 긁힌 상처를 입은 카스토르였다. 그가 잇새로 거친 음성을 토해 냈다.

“왜 난 안 되는 것이지? 왜?”

뚝. 뚝뚝. 그의 핏방울이 뺨으로 떨어진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 웃었다.

“나를 죽인 주제에.”

정말로 우습기 짝이 없어 입술이 비틀렸다.

“웃기고 있네.”

서로의 신력이 충돌해 일어난 바람에 머리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깨에서 희미한 고통이 느껴졌다. 흘끗 보자 그의 검이 꽂혀 있다.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의 일격을 맨몸으로 받아 냈으니 성할 리가 없다.

‘미처 방어할 새도 없었으니까.’

울컥 토혈이 올라왔다. 어째서지? 재생해 보려 해도 되지 않는다. 빠르게 훑어보니 카스토르의 검은 덩어리가 상처를 후벼 파고 있다. 아마도 재생이 막힌 건 검을 휘감고 있는 저 어두운 덩어리 때문인 것 같다.

‘으윽.’

이 덩어리의 정체가 뭔진 모르겠지만 재생을 막는 것뿐 아니라 고통마저 안겨 주었다.

‘죽을지도 몰라.’

나는 곧 초연해졌다. 그러나 체념은 아니었다.

‘괜찮아. 어차피 죽어 봐야…… 시간만 돌아갈 거.’

반복은 또 한 번의 기회다. 이젠 두렵지 않은 반복은 새 희망을 받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어.’

살이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의지는 무뎌지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다시 죽어도 좋다. 처음부터 하면 되니까. 죽으면 이 지긋지긋한 얼굴을 다시 한 번 보는 것이 지겹고 싫고 괴로울 뿐이지.

“너.”

그러는 동안 카스토르는 기어코 짐승을 신력으로 돌려버렸다. 풀려난 카스토르의 손이 내 목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절망하지 않지?”

“……절망하면 좋겠어?”

나는 가쁜 숨을 토해 내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래야…… 네게로 넘어갈 테니까?”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가쁜 와중에도 기어이 웃음이 터지고 만다.

“그런데 어떡하지.”

어쩜 이런 정직한 집착이 있을까. 그의 생각이, 그의 속이 보였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기다리지.>

미래에서, 내 반려가 기다릴 테니까. 그가 나를 불렀으니까.

나의 힘은 기원이다.

“넌 틀렸어.”

수없이 반복하던 어느 날 내 힘은 미약한 기원에서 시작되었다. 강하게, 강하게 바랄수록 힘은 커진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보다, 끄읍. 증오가 더 클 거라고? 아니……. 틀렸어. 나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증오도, 버릴 수 있어.”

나의 운명을 두고 칼타니아스는 잃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했던가.

“그러니까, 더는 잃지 않겠어.”

바라면 무엇이든 된다. 길을 찾게 된다.

아올레시아는 말했다. 내 딸, 네가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데인도 플뢰온도 헤르난도 아모르도 모두 마지막까지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길 바라며 사라졌다.

나는 내 목을 움켜쥔 그를 잡은 채, 손을 뻗었다.

‘벗어나고 싶어.’

손바닥 위로 묵직한 것이 생겨났다. 나는 이것이 무엇일까 깊게 생각하는 대신 그것을 내질렀다.

푹.

무언가 쑥 들어가는 느낌은 끔찍하고 생경했지만 희열감이 함께였다.

“어때, 카스토르?”

이가 덜덜 떨렸다. 처음으로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찔렀다.

“한때, 너를 찌르는 꿈을 꿨어. 아주 무수히.”

목에서 끊임없이 피가 올라왔다.

“네가 죽기를 바랐어.”

어깨에 꽂힌 카스토르의 검에서 나오는 기운은 독같이 상처를 통해 천천히 나를 침식하고 있었다.

<이걸로 찔러요. 찌르면서 당신이 원하는 걸 생각해.>

단검을 가슴에 꽂은 카스토르는 미치광이처럼 입술을 휘었다.

“나를 죽이려고?”

“…….”

“역시, 나를 증오하는 게 맞잖아. 그렇지? 사랑 따위보다 더.”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은 눈동자. 그곳에 가시화된 광기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나는 심장을 뚫려도 죽지 않아.”

그럴 리가 없다. 반박하려 했지만, 쿨럭 피 섞인 기침이 터지며 말을 가로막았다. 카스토르는 첫울음을 터트린 아이를 보는 어미처럼 황홀한 기쁨으로 가득한 얼굴을 내게 향했다.

“아실리.”

그가 사랑을 속삭일 듯 달큼하게, 광기 어린 다정함을 담아 속살거렸다.

“나는 네게 물었지. 이 나라가 어떤 의미인지. 황제를 어찌 생각하는지.”

어둠 속에서 내게 묻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카스토르는 마치 꿈결을 걷듯이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물을 차례야.”

바로 지금도 카스토르는 하베르미아의 달, 끔찍한 검을 들이대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는 네게 어떤 의미지?”

지독하게 날 옭아매던 세 질문. 돌고 돌아, 그날의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러나 나는 피를 퉤 뱉어 내고는 웃었다.

“아무 의미 없어.”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가슴 한편이 간지럽고 울렁거렸다.

“네가 뭐라고 의미씩이나 두지?”

희열이었다. 기쁨이며 환희고,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낙락이었다. 나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눈앞이 가물거리고 흐리지만 상관없다.

모두가 너를 향해 죽어 마땅한 쓰레기라 하였지만, 나는 그런 이조차 죽여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내가 타인을 직접 살해한다는 건 너와 같이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가 널 죽이겠대? 나는 널 죽이지 않아.”

괴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죽고 죽어, 잃고 또 잃어 고통 속에서 선택한 나의 길이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함께하는 길뿐이다.”

그가 내 목을 쥔 채 소리를 높였다. 피와 먼지로 흐트러지고 엉망이 된 모습, 이제 그저 광기로 일그러진 괴물.

눈앞의 그가 두렵지 않았다.

“아니. 널 죽이지 않고도 나는 미래로 갈 수 있어.”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이와 함께 손에 힘을 주었다. 바라는 것을 구체화했다. 이 순간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무언갈 눈치챈 카스토르가 더욱 거세게 목을 압박했다.

“그래서 너는 진 거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이 끝나는 순간, 눈부신 빛이 그와 나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내 힘은 수없이 잃은 대가다. 너로 인해, 잃은 것들.

하얗고 성스러운, 단검으로부터 시작한 빛은 카스토르를 삼켰다. 나 또한 새하얀 그림자에 잡아먹혔으나, 불안하기는커녕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었다.

‘눈부셔.’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조금 전보다 그를 더욱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미소했다.

“이젠 알았어.”

나는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 그랬던 것도 같다. 모든 것이 카스토르가 만든 함정임을 알면서도 그를 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아. 그리고 내 삶에서 당신을 지워 낼 거야.”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지만 잘은 모르겠다.

“이 빛이 보여? 이 순간만큼은 여긴 내 공간이야.”

아. 이곳이 편안한 이유를 알았다. 내가 만들어 낸 곳이어서구나. 나의 신력으로 가득 찬 곳.

“있잖아. 이 공간에서는 너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나는 수십 번 죽었다 살아나도 이 사람처럼은 되지 못하겠지. 결국 당신과 나의 선택은 달랐다.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야. 넌 더 이상 나를 휘두르지 못해.”

나는 괴물이 아니다.

“이 순간부터 내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

그의 눈이 무섭도록 커졌다. 그가 손을 뻗어 나를 잡으려 했으나, 그 손은 닿지 못했다.

“사라져 줘.”

“……뭐?”

빛이 우리 사이를 갈랐다.

“어떤 시간으로 갈지, 어떤 공간일지 나도 모르겠다.”

“아실리 로제!”

나는 맑게 웃었다. 내 삶을 지배했던 가련한 악인에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이 순간 그는 나를 잡지 못했으나, 나는 그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행복해질 거야.”

“너는 행복해질 수 없다. 내 곁에서가 아니면, 행복해질 수 없어!”

카스토르가 짐승처럼 끓어오르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결코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널 보내지 않아. 절대로!”

맹렬하게 소리치는 그에게 나는 더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나를 찾기 위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거야.”

결심을 마치자, 동시에 그가 당황한 낯으로 자신의 눈을 더듬었다.

“어째서? 보, 보이지 않아…….”

“그래. 넌 날 생각할 때, 앞을 보지 못할 거야.”

손을 휘젓는 그에게 속삭여 주었다.

“날 생각할 때, 혀로 나를 말할 수 없어. 또한 귀로 듣지도 못하겠지. 영원히 날 찾을 수 없게.”

나의 음성은 널 마주한 날 중에서 가장 다정했으리라.

“당신,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지?”

집착일지언정, 집념일지언정. 우습게도 그는 감정만은 진심이었다. 나를, 수없이 많은 이의 감정을 압제하고 묵살했으며 마침내 모든 감정을 잊은 남자가 사랑만큼은 소유했다.

오염된 바다처럼 탁하고 어둡고 음침한 사랑. 내 눈엔 여전히 집착일지라도 그에게는 사랑이었으리라.

이젠 보였다. 나를 잃은 너는 연옥에 빠진 것처럼 괴로워하리란 걸.

“네가 사라지고, 난 널 잊을 거야.”

그리고 그런 네게 선고한다.

“너라는 사람을 잊은 채로. 네가 준 죽음도 지운 채로 행복해질게.”

내가 당신에게 죽어 꾸었던 악몽처럼. 너도 그런 악몽을 꾸길.

“지옥에나 빠져.”

웃음이 절로 나왔다. 네겐 나를 잊는 그날까지 꾸는 악몽이 끔찍한 형벌이 되리란 걸.

엉망으로 일그러진, 그럼에도 광기가 가시지 않은 그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그…… 렇게 두지 않아.”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나를 스치고, 다시 뻗어도 잡지 못했다. 마치 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디 있나. 어디야!”

지옥을 유영하는 망자처럼 절박한 손짓이 나를 향했다.

“아실리, 이럴 순 없다! 그럴 순 없어!”

그에게서 처음으로 절망을 읽었다. 폭발할 것 같은 분노가 함께였다.

“너로 인해 얻게 된 이 강대한 신력으로, 모두 잊어 줄게. 카스토르 너에 대한 기억만.”

그를 비웃듯이 내 음성이 이어졌다. 다시 한번 알려줄 작정이었다. 널 보내고 내가 어떻게 살지.

“한때 모든 기억을 잃었던 날처럼.”

눈을 마주하고, 활짝 웃었다.

“너를 잊을게.”

이젠 그의 귀에 내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리라. 그에게 내 마지막 음성은 잊겠다는 그 말이었겠지.

이 순간 뺨을 적신 것이 당신의 피라는 사실이 우습다. 만신창이로 맞이할 마지막이 즐겁고, 아프고 슬프며 고통스럽다. 이 끝으로 향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던가. 그러나 이젠 느낀다. 정말 끝이라는 것을.

그의 뒤로 거대한 주술진이 펼쳐졌다. 나는 마침내 그의 가슴을 떠밀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다.

“평생을 지옥에서 살아.”

* * *

새하얀 빛이 자신을 집어 삼켰을 때, 카스토르는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한 감정. 절망을 떠올렸다.

절망이라니. 미쳐 버렸을지언정 뭐든 할 수 있다 여긴 자신이었다.

그런데 왜?

왜?

억겁의 시간 동안 그는 손에 넣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끝에는 허무함뿐이었다. 이제 그 공허를 채워 줄 빛을 찾았는데. 왜? 왜! 왜 자신은 아실리 로제만은 가질 수 없는가.

타오르는 정염이 그를 불살랐다.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갈증이 일었다. 그는 이해자가 필요했다. 수천 번 반복해 미쳐 버린 이 정신에도 구원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얀 공간은 거대했다. 발버둥 쳐도 힘을 일으켜도 아랑곳 않고 그를 늪처럼 집어삼켰다.

그는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이동했다. 모래 냄새가 나는 바람. 돌아보면 낯선 곳이었다. 카스토르는 발밑의 땅을 응시했다.

여긴 어디지?

그는 오래전에 저를 외면한 신 대신 그녀라는 신을 찾았다고 믿었다. 자신했다. 모든 게 그의 뜻대로 될 것이라고. 처음 그녀를 본 순간부터 느꼈다.

<저건 나와 같은 동류다.>

첫 만남. 색이 다른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그는 미래를 보았다. 미래에서 자신과 판이한 선택을 한 그녀를 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각성한다면, 그를 구원해 주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저이는 그저 수정의 연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랬다. 그의 입장에서 아실리 로제를 살해한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구원이었다.

죽음쯤이야, 반복하면 익숙해지지 않겠는가? 자신처럼.

그는 날개가 꺾인 새를 치료해 날려 보내는 대신 거대한 새장에 가두기를 택했다.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틀리면 그녀와 저 사이를 방해하는 모든 걸 없애 버리면 된다. 오래전 그의 옆에서 짹짹대던 성가신 이들처럼.

세상은 그를 이해 못하는 자와 이해하는 자 둘로 나뉜다. 카스토르는 전자를 모조리 제거했다. 후자에 해당하는 것은 아실리, 오직 그녀다. 그녀만이 그를 구원할 것이다.

각성해서 미래를 보는 힘을 얻고, 나와 같은 강력한 신관이 되어서. 끝내 자신을 구원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지옥에서 못다 핀 꽃, 끝내 날아가 버린 새. 자신의 옆에서 피워 내지 못한 그녀를 가져야 했다.

“그래, 끝이 아니야…….”

거대한 황무지에서 카스토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분명 아주 낯선 곳이었다. 적어도 제국에 있는 땅은 아니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찾으면 되니까. 찾아서, 다시 한번 되새겨 주면 되니까. 네 옆에 있어야 하는 것은 나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눈앞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경악스럽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실리를 찾고자 마음먹은 순간 불을 꺼진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바람 소리마저 잠잠해졌다.

<넌 날 생각할 때, 앞을 보지 못할 거야.>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날 생각할 때, 혀로 나를 말할 수 없어. 또한 귀로 듣지도 못하겠지. 영원히 날 찾을 수 없게.>

그녀는 영원히, 영영 자신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느 시간인지, 어느 공간인지 모를 장소에서, 카스토르가 거칠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눈을 뜨면, 다시 황궁이었다.

빛이 사라지고, 기이한 하얀 낮이 사라진 곳, 고즈넉한 밤이었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는 느꼈다. 바람이 분다. 구름이 움직인다. 돌이 굴러가고 흐드러진 나무가 춤을 춘다.

시간이 흐른다.

나는 입을 잠시 벌렸다가, 다물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데.

‘뭐라 하려 했더라?’

그냥 말을 하지 않았다. 기쁨도 환희도 들어 줄 이가 없으니 그저 텅 빈 말이 될 것이다. 이상하다.

마침내 승리했는데, 어째서……. 남은 것은 텅 빈 가슴뿐인가?

카스토르에게 마지막으로 외쳤던 말들을 곱씹었다.

“……그래. 기억…….”

기억을 지울 생각은 없었다. 쫓기듯 살았던 지난 삶이었으나 카스토르의 기억을 지운다는 건 결국 내 삶을 지우는 것과 같아서. 기억을 잃는 것이 행복해지는 삶은 아니었다. 구멍 뚫린 채로는 그저 허무할 뿐임을 이미 체험했으니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카스토르는 내가 그를 잊었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면 됐다.

“……동화 속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시넝쿨을 넘어 용을 물리친 용사를 만나 마침내 행복해진 동화 속 공주님. 그러나 용사가 없어 홀로 가시넝쿨을 넘고, 맨손으로 악당을 물리친 황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멸망을 막고, 세상을 구했으나 소중한 것은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뎅그렁.

먼 곳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초라한 기쁨이 찢어진 깃발처럼 너덜거리며 입술에 묻어났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밤하늘, 함께 웃어 줄 이는 어디에도 없는 황홀한 슬픔만이 함께한 하늘. 뺨 위를 채 닦지 못한 눈물이 궤적을 그리며, 흘러내린다.

나는,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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