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⑴ (38/47)

2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⑴

저벅저벅. 울리는 발소리는 하나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복도를 홀로 걷지 않게 되었다. 늘 혼자 걷던 길에 레이 경이 있었고 때로는 데인이, 플뢰온이 있었다.

밤은 어땠는가. 외롭지 않게 함께 달을 보아 주는 얼굴이 있었다. 날 보며 새된 날카로움을 벗고 웃어 주는 아모르, 달처럼 새하얀 얼굴을 사랑했다.

“폐하.”

복도 끝에 이르자, 소릭스와 메타가 고개를 숙였다.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레베카도 함께였다.

“전령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대한 알현실의 문이 열리면 문만큼이나 커다란 기둥이 먼저 보였다. 계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엎드렸다. 무릎을 꿇었음에도 크고 넓은 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개를 들어. 아벨.”

전쟁의 소식을 가져온 이는 3황자 아벨이었다. 바람의 마지막 신관인 그는 누구보다 이 역할의 제격이었다. 그래서 황자임에도 한시바삐 단신으로 달려왔겠지.

“……폐하, 승리했습니다!”

아벨이 무겁게 고개를 조아렸다. 음성에서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드러났다.

“이 시간부로 윌터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에 모든 사람의 눈이 커졌음은 물론이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탄성을 터트렸다. 부둥켜 얼싸안고 붕붕 뛰는 이도 있었다. 모두가 체통을 잃고 기쁨을 드러낸 사이에서 나는 물었다.

“……죽은 이는 없나?”

“아…… 네. 사망자는 전체 군의 약 3분의 1 정도로 신관의 피해는 더욱 커서 부상을 입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지휘관은?”

곧장 대답하던 아벨이 잠시 망설였다. 곧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전 황태자가 나타나 전쟁을 난전으로 만들었습니다. 신관만 골라 죽이는 행태에 속수무책이던 때에…… 가장 강한 두 사람이 나섰습니다.”

“공작과 마리사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 황태자를 막아 냈지만 결국.”

가슴이 울렁거렸다.

“마리사 장군은 치명상입니다. 의식은 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또한 디볼로 공작은……. 혼수상태입니다. 치료 신관이 말하길 손도 쓸 수 없다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그러지 않으려 애썼으나 표정이 자꾸만 가장자리에서부터 무너졌다.

“무슨 말이란 말이냐. 신관인 그가 치료조차 불가하다니?”

“디볼로 공작은 맹세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아벨은 잠시 눈치를 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장기가, 너덜너덜해져서 손쓸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치료는.”

“……복구와 재생은 다른 영역입니다.”

그는 신력으로 팔이 부러지거나 다친 것은 치료할 수 있으나, 사라진 팔을 재생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이미 헤르난의 몸은 쓰임을 다해서 고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아벨이 선고했다.

“절대적인 맹세가 그의 생명만 붙잡아 두고 있습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가 말하는 맹세가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폐하, 그럼 제가 맹세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당신은 알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만약에, 아마도.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 전쟁에서 절대 죽지 않겠습니다.>

헤르난.

<제 마지막은 오롯이 폐하 앞에서 맞이하겠노라 맹세하겠습니다.>

당신은 죽을 거라고 알고서 간 거였어?

“왜 당신은 그렇게 죽음을 쉽게 알아……. 왜…….”

나의 중얼거림은 너무나 작아서 옆에 있는 이들조차 듣지 못했다. 반문하는 이들의 물음을 흘려보내고 고개를 들었다.

기쁨에 가득 찬 대신들, 전쟁이 끝났노라. 대결계가 세워졌노라. 환희와 행복이 절망 위에 쓰였다. 이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했다.

“대신들은 들어라.”

웃고 싶을 때 웃지 못하고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한다. 카스토르와 율리안이 다투던 이 위는 속내를 숨기고 가장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건 누구보다 내가 잘하는 일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이들을 맞이할 수 있게 제의를 준비하라. 아주, 아주 성대한 축제여야 한다. 죽은 이들이 유피넬의 천국으로 향하도록.”

이곳에서는 사자 가운데 죄를 지은 자는 지옥으로, 영웅과 전사는 천국으로 간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애도하는 대신 축복한다. 아주 거대하고 성대하게.

“율리안, 그대가 총괄을 맡아.”

율리안이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댔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 축제를 준비하라!”

“예!”

전쟁으로 멸망할 것이라던 이 나라는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남은 건 카스토르와 루스벨라, 괴물들과의 만남뿐이었다.

대신들이 빠르게 돌아갔다. 준비는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리라. 사실 아직 달이 중천에 뜬 한밤중이었다. 급박하게 모였던 이들은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지.

“모두 물러나.”

대신들이 물러나고 나는 나머지 측근들도 물렀다. 레베카는 잠시 망설였으나 나를 보고는 이내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왜 당신은 가지 않지? 아벨.”

텅 빈 알현실에 나와 아벨 두 사람이 남았다. 공기마저 잠이 든 듯 적막하고 고요했다.

“폐하께 전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할 것?”

그의 손을 벗어난 편지가 바람을 타고 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찬찬히 살펴보니 손때가 많이 묻은 종이였다.

“개인적인 부탁을 받은 것입니다. ‘레이’라는 이름의 검사에게서 받았습니다.”

“뭐?”

“공식적인 문서는 아니기에 대신들이 물러난 지금 전해 드립니다.”

파르르 손이 떨렸다. 무릎에 있는 편지가 마구 흔들렸다.

“저희가 전쟁터에 도착하기 전에 신묘한 계책으로 대군을 상대한 지략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알아.”

서쪽 총책임자인 디아나의 대신관이 보낸 서신에 적혀 있었다. 누군진 모르나 유능한 이의 방략 덕에 겨우 버티고 있다고도.

“그자는 폐하를 알고 있더군요.”

“…….”

“편지는 그자가 쓴 것입니다.”

천천히 편지를 뒤집는다. 낯익은 필체에 뺨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애써 떨림을 참아 내고 아벨을 응시했다.

“……외로워 보이시는군요.”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당신은 건조할지언정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글쎄. 과연 그랬을까?

“그 편지는 그자의 마지막 전언입니다. 편지를 건넨 검사도……. 오래 살긴 어렵다고 하더군요.”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인지, 어떤 얼굴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자,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7황자……. 얼굴 한번 못 본 동생을 대체…….”

아벨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끝말은 탄식에 가까웠다.

“돌아가.”

신등이 모조리 꺼졌다. 짙게 내리깔린 그림자가 나를 꽁꽁 삼켜 주었으면 좋겠다.

“혼자 있고 싶으니.”

아벨은 무어라 더 말하고 싶은 듯 했으나 곧 체념한 낯으로 뒤로 물러났다. 땅을 박차자 그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는 홀로 남아 편지를 톡 건드렸다.

“데인…….”

마지막. 마지막이라고 했다. 그 말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벨에게 가까스로 묻지 않았다.

“……아니지? 응? 아니지?”

인정하면 무너질 것 같았다. 그의 앞에서 열어 보면 모조리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

“지, 진정, 진정하자…….”

어떤 말이 적혀 있을지 몰라. 영영 열어 보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억지로 독려하며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이내 참지 못하고 알현실을 뛰쳐나왔다. 놀란 사슴처럼 정신없이 뛰어간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쫓아오는 듯 했지만 어느 틈엔가 발현된 보라색 나비가 그들을 쫓아 버렸다.

‘싫어. 싫어. 싫어.’

어디로 가고 싶은 지 어디를 향한지 모른 채 마침내 나는 멈춰 섰다.

텅 빈 궁이었다. 아무도 머무는 이가 없어 고요한 궁, 달빛에 물든 지붕은 붉은색이었다. 즉위하고 거처를 옮겼기에 텅 빈 테레나 궁이 한때 주인이었던 이를 소슬하게 반겼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 으어……. 데인…….”

데인의 편지에는 그가 서쪽으로 가기까지의 여정과 지금까지 한 일들,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이 적혀 있었다. 정갈한 필체는 마지막을 준비한 자의 내음을 가졌다.

[사랑하는 아실리, 네가 영원히 이 편지를 보지 않길 바라. 네가 이 편지를 봤다는 건…… 내가 네게 말을 건넬 수 없는 상황이란 얘기일 테니까.]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이곳에서만큼은 아이가 될 수 있다. 엉엉 울어도 부끄럽지 않은 아이, 더는 타박하는 오빠도, 다정하게 안아 주곤 하던 오빠도 없지만 너희는, 내 안에 남아 있으니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나의 세상 일부가 무너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눈물이 한없이 떨어졌다. 이 소란스러움을 어찌 배출할지 몰라 혼란에 잠긴 채로 가슴을 두드렸다.

데인, 데인, 왜 너마저 나를 두고 가는 거야. 데인, 어째서…….

편지를 가슴에 품었다. 더는 읽어 보기가 두려웠다. 왜, 너는 홀로 마지막을 준비했는가? 왜 모두들, 내 곁을 떠나는 거야?

가지 마. 가지 마.

입술을 꽉 깨물어 떨어지는 눈물에 힘을 줄 때였다.

―당신은 항상 울고 계시네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흔들었다. 턱 끝에 대롱 눈물이 매달린 상태로 멍하니 정원을 향했다. 맞은편에는 이곳에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가 서 있었다.

“헤르난?”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반투명했고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어째서 이곳에 당신이 있는 거야?”

그는 희미하게 웃더니,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그는 자신의 손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곧 고개를 든 헤르난이 웃어 보였다.

―폐하는 저의 동반자이시니…… 이런 게 바로 기적이란 걸까요?

이어진 말은 명확한 답이 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헤, 헤르난…… 당신…… 왜…….”

유령이든 뭐든 반가움은 기폭제가 되고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폐, 폐하!

그가 당황한 얼굴로 성큼 다가왔다.

―울지 마세요.

그의 손은 그대로 얼굴을 통과했다. 생각지 못한 듯 당황한 얼굴이던 헤르난은 곧 쓴웃음을 지었다.

―닦아 드릴 수가 없어요.

“…….”

―죄송해요.

죄송할 일이 아닌데도 그는 마치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뭐하는 거야. 다, 당신이 죄송할 일이 아니잖아.”

―그, 그래도…….

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정말 헤르난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헤르난.”

―네.

“왜…….”

황급히 입을 닫았다. 왜 그곳에 갔어? 어째서 죽을 줄 알고도 그곳에 간 거야? 왜 결국 그 모양 그 꼴이 된 건데? 왜!

쌓은 말은 끝내 언어가 되지 못했다.

“왜 내가 항상 울고 있었다고 말한 거야?”

이미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신을 사지로 내몬 건 나다.

“난 당신 앞에서 항상 운 적이 없는데.”

이 순간 지하실에서 보았던 칼타니아스의 기억이 스친다.

<처음은 하녀, 다음은 시종. 그리고 유모였습니다……. 유일한 혈육을 잃었고 아끼던 충신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녀를 구성하던 가족, 혈육, 충신……. 아마도 그녀를 사랑해 주었던 이들을 잃었겠지.

<운명은 잔인하군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한다니.>

수천 년이 지나 멸망을 논하는 시대에 운명은 한 번 더 반복된다고 했다. 그녀가 거론한 마지막 황제는 누구였을까? 나는 카스토르의 왕관을 빼앗아 이 자리에 올랐다. 지금 황제는 나였다. 그렇다면 나는 운명에 의해서 모든 것을 잃고 있는 거다.

내 주먹이 그대로 꽉 쥐였다.

“헤르난.”

―……네.

헤르난은 다시 한 번 더 손을 뻗었다. 뺨을 그대로 통과하는 손을 보며 그는 울 것처럼 얼굴을 흐렸다.

―울지 마세요.

“봐. 지금은 안 울어.”

―눈물이 없다고 해서 어찌 우는 얼굴이 아니겠습니까.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진심을 토해 냈다.

―제가 본 당신은 항상 울고 계셨습니다.

손을 뻗을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대로 통과해 버릴 테니까.

“그래서 내가 웃기를 바랐던 거야? 미소만 지어 준다면 모든 걸 다 하겠다고 했던 거고?”

―네.

“참 어리석다. 당신.”

―어리석어도 괜찮았습니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에도 눈물이 뚝뚝 타고 흘렀다.

“당신도 참 울보야.”

웃으며 조금은 아쉽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지금이라면 멍하니 우는 저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어 줄 수 있을 텐데. 아모르가 싫어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라면 못마땅한 표정으로 모른 체해 주었겠지.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당신이 다시 한 번 나타나 줘서…… 이 말은, 전할 수 있게 됐거든.”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지난 세월을 보내며 뼈저린 고통 끝에 얻은 교훈이었다.

“당신은 몇 번이나 나를 구해 줬잖아. 아, 물론 내 죽음을 방관한 적도 있고 나를 속상하게 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말이야.”

나는 눈을 감았다.

“고마워.”

한때 그를 향해서 온 원망을 쏟아냈다. 짓지도 않은 죄로 쏟아지는 원망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당신이 삼켜 준 덕에 악을 털어 낸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은 당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한 번 말하고 싶었어. 당신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곧이어 새파란 홍채에 물이 가득 차고, 그는 아주 설피, 섧게 울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지켜 줘서 고마워.”

통과해 버릴 것을 알아 그의 뺨에 닿을 듯 말 듯 멈춰 버린다. 그는 눈물을 매단 채로 옅게 웃더니 그대로 내 손에 뺨을 가져다 댔다.

“나는 당신 또한 잃겠지.”

손에 든 데인의 편지가 살짝 구겨졌다.

“이것이 내 운명이라는데, 참 거지 같다 생각해. 이미 플뢰온도 데인도 아모르도 곁을 떠났거든.”

―…….

그가 머뭇거리더니 슬픈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폐하.

그동안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은 헤르난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카스토르는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아요.

헤르난이 잊지 말아 달라는 듯 또렷하게 알려 주었다.

―카스토르를 찔렀을 때, 한순간이지만 아주 크고 강대한 힘을 느꼈어요.

“뭐?”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는 자가 인간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카스토르의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신같이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폐하께 단서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의 형상이 손끝에서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나도 알았다. 곧 끝이라는 걸. 그의 모습은 더욱 희미해졌다.

―두려워 마세요. 실체를 모르는 적보다 어떤 존재인지 아는 적이 상대하기 쉽습니다. 폐하께선 잘 해내실 겁니다. 마지막 힘을 동원해서 감을 느꼈거든요.

“……내가 승리하면 당신은 돌아와?”

하늘을 향해 잠시 웃는가 싶던 헤르난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강하십니다.

그의 입술이 이마를 스쳤다. 닿는다는 느낌은 없었으나 그는 마지막 축복을 내게 남겼다.

―희생을 달가이 여기지 않으심을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전부 주고 싶었습니다.

“…….”

―6황자님께서도 7황자님께서도 그런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저는 당신을 만나며 비로소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덧 반 이상 사라져 금방이라도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4황자님이 계시지 않을 때가 당신께 저를 알아 달라, 감히 수작이라도 부려 볼 절호의 기회일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그답지 않은 말은 마지막을 슬퍼하지 않으려는 웃음이었으리라.

―그럼 안녕히. 폐하.

그는 돌아서서 눈을 감았다.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으나 여느 때와 전혀 다른 무게를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헤르난이 있던 곳은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공기 중에 아릿하게 백합향이 남은 것 같았다. 빛 부스러기조차 남지 않은 자리를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일어났다.

맨발이었다. 아마 정신없이 이곳으로 뛰어오던 중에 신발이 벗겨졌을 것이다. 걸어온 길을 보노라면 새하얀 바닥에 검붉은 자국이 남아 있다. 새삼 아프지는 않았다.

텅 빈 궁에는 신등조차 없었다. 달빛만이 등불이었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감았다.

‘누군가 다가오는구나.’

강력한 감이 들었다. 이젠 일기장을 읽는 대신 이런 식으로 미래를 아는 걸지도 모른다. 몇 분을 기다렸다가 눈을 뜬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곳을 향했다.

“나와.”

캄캄한 숲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리자, 사각사각 수풀이 흔들리더니 곧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흔들림 없이 바라보며, 앞으로 다가오며 차츰 사람의 형상을 갖추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루스벨라.”

루스벨라가 아름답게 미소했다.

“안녕, 아실리.”

돌고 돌아 달이 배부르게 차오른 밤,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주했다. 그녀도 나도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전부 봤나?”

“흐응, 무엇을 말하는 걸까?”

헤르난은 못 본 건가. 아니면 보지 않은 체하는 건가. 가늘게 휘어지는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못 봤으면 됐어.”

고개를 돌렸다. 손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 일기장이 나타났다.

“당신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지?”

“데인 로웰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나는 데인의 편지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들었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데인은 편지로 당신이 날 찾아올 거라 말했어.”

“그런데?”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날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루스벨라의 머리 위에 달린 달은 무섭도록 눈이 부셨다. 이를 조명 삼은 루스벨라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찌푸리게 했다. 곤충을 유혹하는 위험한 식물 같았다.

“당신이 나를 도우러 오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데인의 편지에는 그가 앞으로 할 일도 적혀 있었다. 조금 전 훌쩍이던 때야 몰라도 이성이 돌아온 지금은 충분히 이상하다 여길 만했다.

“아마 스틱스강에 대고 맹세라도 한 모양이지.”

“…….”

루스벨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나는 루스벨라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더는 헛소리는 통하지 않으니 바른대로 말해. 전쟁은 어쩌고 이곳에 온 거지?”

그녀는 우습다는 듯 미소했다.

“이미 들었잖아? 칼타니아스가 승리했다는 걸.”

지나치게 태연한 루스벨라는 시종일관 차분했고 패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전쟁을 일으킨 건 윌터국이지 칼타니아스가 아니야. 너에겐 책임감도 없나?”

사람이 죽었다. 더는 책의 세계가 아닌 이 세계에서는 지나가는 행인마저 스쳐 가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누군가로 인한 이기적인 전쟁에서 다치고 죽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나?

“너 때문에 무수한 이들이 죽었어. 가엽지도 않아?”

난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너흰 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겠지. 오래전에 죽어 버린 괴물이니까.”

그러자 루스벨라가 매섭게 노려봤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더는 너와 카스토르의 뜻대로 두지 않아.”

나는 지지 않고 맹렬하게 지껄였다. 아니, 많은 이들을 잃은 내게 두려울 것이 뭐가 있을까. 기꺼이 너희의 목덜미도 물어뜯어 주겠노라고.

“하, 이건 뭐야…….”

루스벨라는 기가 막힌단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데인 로웰에게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구나. 정말 아무것도…….”

잠깐 무너지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사나움을 무너트렸다. 뭐지?

“데인은 편지에 네 약점을 알아냈다고 적어 놨어.”

“그 약점이 뭔데?”

굳이 대답해야 할까? 하지만 어쩐지 초조한 목소리에 난 눈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네가 어떤 ‘도구’를 아낀다고 했어. 그 도구를 뺏는다면 네가 날 도우러 올 거라고 했지.”

루스벨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아하하하. 우습네. 진짜 우습다. 하…….”

미친 듯이 터지던 웃음이 딱 그쳤다. 그녀는 늘어트린 머리를 우아하게 쓸어 올렸다.

“난 정말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녀가 짓씹듯이 뱉었다.

“네가 싫어.”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세찬 금색 기운이 포악하게 일렁거렸다.

“그자는 네게 끝까지 내숭을 떨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렇게 보였다는 걸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와 함께 무시할 수 없는 위험한 기운이 함께였다.

“네 말대로 내가 널 돕는 건 말도 안 되지.”

그 말에 나는 찡그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루스벨라가 입술을 비틀었다.

“슬론이 화살을 맞았어. 디아나의 대신관이 쏜 독화살이지. 그건 평범한 인간은 견디지 못해.”

루스벨라가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는 데인 로웰과 슬론의 생명을 두고 거래한 대가로 지금 여기 있는 거야.”

도구라기에 루스벨라의 중요한 성물을 뺐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분노도 잊게 했다. 슬로레니안, 슬론. 한때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라 여겼던 남자. 그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퍼즐이 맞춰졌다.

“당신 설마…….”

혀를 빠져나가지 못한 수많은 단어가 엉켰다.

“입 다물어.”

루스벨라가 쏘아 낸 빛이 뺨을 스쳤다. 주르륵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축하해. 아실리 로제.”

루스벨라가 악에 받힌 낯으로 읊조렸다.

“네가 만들어 낸 작은 조각들이 결국 미래를 바꿨구나.”

흐흐흐, 그녀가 숨을 흘리며 흐느끼듯 웃었다.

“내가 널 돕는 건 내가 아는 미래에서도, 그자의 예상에도 전혀 없는 일이었지.”

“…….”

“데인 로웰은 네가 만든 싹이란다. 기쁘니? 나는 미리 그 싹을 뽑지 못해 후회해. 하여 끝내 널 돕게 된 지금을.”

증오해. 그녀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돕는 방식은 정하지 않았지. 쉽사리 널 돕고 싶지도 않아.”

금빛이 번득이는 눈에는 분노와 슬픔, 회한과 후회가 한데 뒤엉켜 일렁이고 있었다.

“그거 알아요?”

아카데미에서처럼 존대어로 돌아온 루스벨라의 목소리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의 영혼은 내가 데려왔다는 걸.”

카스토르에게서 느꼈던 광기.

거친 손이 머리칼을 잡아 쥐는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바람에 나무 그림자가 걷히며 루스벨라의 미소가 눈앞에 선연하게 드러났다.

“궁극적으로 데인 로웰은 당신의 행복을 바랐고, 이를 위해 당신을 도우라고 했지만……. 방식은 내 맘대로야.”

그녀의 발밑에서 처음 보는 새카만 기류가 흘러나왔다.

“으윽. 이, 이건 뭐야…….”

나는 재빨리 목을 조르는 손목을 잡았다. 치이익. 살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 신력 다루는 솜씨는 너무 미숙하네요. 아니, 배울 시간이 없었나.”

루스벨라의 손이 떨어졌으나 검은 기운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발등을 덮었다. 이전 그녀의 공간으로 끌려들어 갈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선득한 느낌에 얼른 신력을 일으켜 얇은 막을 만들었다.

“소용없어. 당신을 공격하려는 게 아니거든.”

그러나 늪같이 진득한 기운은 얇은 보랏빛 막을 불쑥 뚫고 다리를 휘감았다.

“행복해지고 싶죠?”

“이거 놔! 놓으라고!”

“그럼 꼭 이 세계에서 행복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슨 말이냐 묻는 순간 꾸역꾸역 올라온 검은 덩어리가 입까지 막아 버렸다. 이내 코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원한다면 나는 당신의 세계에 돌려보낼 수 있답니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말이죠. 루스벨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비록 꿈이라 해도 말이에요.”

* * *

<옛날 옛적에 아주 평범한 대리님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실직당한 아가씨는 음주 운전한 트럭에 쾅. 어머나, 세상에! 죽고 말았네요.

그리고 눈을 뜨니 새로운 세상이었죠.>

손바닥만 한 잔에 투명한 소주가 콸콸 채워졌다.

“그건 무슨 해괴한 이야기야.”

쪼르르 기울이던 병이 멈췄다. 친구는 소주잔에 끝에 칼같이 맞췄다. 이전부터 이 솜씨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해괴하다니? 흔한 얘기잖아.”

친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 책장에 한가득 있는 얘기 아니냐.”

반박이 어려웠다.

“내가 다독하긴 하지.”

“그래. 로맨스도 책은 책이지. 근데 넌 너무 편식한다고. 읽는 소설이라곤 죄다 새드 아니면 피폐. 아니면 배드 엔딩이라니. 변태 같은 취미가 있어.”

친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발끈했다.

“너 방금 나를 비롯한 수많은 독자의 취향을 무시했어. 전국의 수많은 변태한테 사과해.”

싸움이 되질 않았다. 친구나 나나 서로의 책장을 훤히 알고 있는 탓이다.

“근데 세계를 휙 넘어가는 거 말이야. 왜 항상 교통사고로 넘어갈까?”

“흔하잖아. 가장 흔한 사망사고라서 그런 거 아냐?”

“그럼 주인공은 평범한 회사원보다는 평범한 대학생이 많은데 그건 왤까?”

“이입하기 쉽나 보지.”

“쳇. 시시하네. 우리 같은 대리님은 어쩌라고. 대리님을 위한 소설은 없나?”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이윽고 세 병이 되는 기적을 발휘했다. 평소에도 그리 강하지 않던 친구가 먼저 취했다.

“우린 그냥 주옥 된 거야. 인생 뭐 있냐?”

“없지.”

취한 사람 앞에선 장사 없다. 장단 맞춰 주는 게 제일이라 그저 끄덕였다.

“승진이 다 뭐야. 결혼한 게 죄입니까? 애 낳으면 일 못 하냐고요?”

“몰라.”

지금보다 파릇하던 시절 게임을 잘하던 이 친구는 잘나가던 BJ가 되어 보겠다며 나섰다가 청춘을 쫄딱 소비하고 그쳤다.

“흑, 망할 세상. 망해 버려라. 싹 다 망해 버려라…….”

말단 사무직이 나쁜 것은 아니나, 세상은 가난하거나 끝자리에 서 있거나 아무튼 모든 을을 나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흑흑, 영국의 마법학교님 제게도 부엉이를 보내 주세요…….”

‘어라?’

문득 대꾸하려다 말고 눈을 껌뻑였다.

“야. 친구야.”

“어엉?”

“나 이 장면이 낯이 익다?”

꼭 원래 있었던 기억을 한 번 더 겪는 기분인데. 이런 걸 데자뷔라 하던가.

“낯이 익다니?”

“아, 아냐…… 하던 말 계속해.”

뺨을 긁적이는데, 뺨이 휑뎅그렁한 기분이었다. 묘한 공허감이 달아오른 뺨을 휘감았다.

‘대체 뭐지?’

친구가 홱 고개를 쳐들었다. 취기가 잔뜩 오른 얼굴이었다.

“안아. 넌 꿈이 뭐였냐?”

엉뚱한 질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언어가 앞서갔다.

“……더는 죽지 않는 거?”

말을 하고서야 아차 싶었다. 왜 이런 말을 했지? 친구는 참 짠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너 요즘 많이 힘들구나…….”

그래도 자살은 안 된다며 말리다 말고 그녀는 다시 마법학교니 부엉이 타령을 했다.

그렇게 술자리가 파하고, 나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평범하고, 평범한 업무, 때론 진상을 상대하는 아주 무난하고 잣 같은 일이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퇴근길, 친구는 해장을 하자며 날 불러냈다. 해장은 해장술이라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뜯어말리고 해장국 한 그릇 뒤 나란히 카페에 앉았다. 카페 유리벽에는 못 보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친구가 어, 이거? 하고는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저게 바로 엄청 유명한 애니메이션이라니까? 흥행했잖아. 내용? 주인공이 휙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세상을 구하는 거지.”

“그거 흔한 얘기 같은데.”

친구는 작화가 흔하지 않다며 금발 미남인 남자 주인공에 대해 역설했다.

“뭐. 흔한 얘기라면 흔한 얘기겠다. 당장에라도 네 책장에 한가득 있지 않느냐.”

친구는 애꿎은 내 책장을 몰아갔다.

“야, 근데 안아. 이런 얘기는 말이야, 보통 해피엔딩이지?”

“그렇지?”

“그럼 주인공들은 전부 자기 세계로 돌아가던가?”

나는 멈칫했다.

“……글쎄.”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습관처럼 뺨을 긁적였다. 그렇다고 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왜? 어째서?’

의아함에 굳어 있을 때, 친구는 나름 결론을 내렸는지 홀로 화제를 넘겼다.

“맞다. 너 최근에 끼고 다니던 소설은? 요즘은 통 얘길 안 한다?”

“소설?”

“그래. 취향에 꼭 맞는 걸 찾았다며.”

“그랬나……. 기억이 안 나네.”

“자랑을 하더니 금방 식었어?”

“무슨 내용인데?”

친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야 모르지. 제목이 가물가물하네……. 그치만 네 취향이 빤하지 않냐. 폭군도 나오고 집착도 하고 주인공은 시련에 시련을 거듭하는 피폐물이고 그렇겠지.”

“내가 변태냐. 그런 걸 좋아하게.”

“엥. 취향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거였나?”

친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해괴한 사람처럼 쳐다봤다. 난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고생하는 거 별로야. 힘들고.”

어쩐지 친구 얘길 들으며 꼭 겪은 것처럼 기분이 더럽다 말을 하니, 친구가 더욱 이상하게 보았다. 그러나 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 먹구름에 가린 별들이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거뭇한 아파트들은 네모난 상자들의 집합소 같았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서 돌아보면 아래가 한눈에 보였다. 그래서 봄이면 풍경을 담은 창문에 벚꽃이 참 예쁘게 장식되곤 했다. 밤은 시야를 먹칠했다.

난 가만히 서울 전경을 눈에 담았다.

「……이곳이 네가 살던 세계로군.」

난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 누구세요?”

그러나 앞뒤, 좌우를 돌아봐도 아무도 없었다. 간간이 불 켜진 아파트와 주차장을 가득 채운 텅 빈 자동차뿐이었다.

「안녕, 로제.」

낯선 목소리,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잠들어서 좋은 점도 있군.」

그곳에 아주 새하얀, 눈 같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은색인지 하늘색인지 모를 머리카락이 길게 나부낀다. 바라보다 문득 맨발에 시선을 멈췄다.

“춥지 않아요?”

이상했다. 이 계절에 얇은 옷을 입고 맨발로 선 외국인이라니. 순간 내가 선 채로 잠이 들었나 생각했다. 눈앞의 그가 미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나 자신이 가장 이상했다.

「춥지 않다.」

그가 대답했다.

“나를 알아요?”

「글쎄. 그대를 전부 알진 못하지만, 아주 사랑하고 있지.」

유령일지도 모른다. 꿈을 꾸는 걸지도 모르지. 현실과 전혀 다른 옷과 남자의 머리만 펄럭이는 광경이 뒷받침했다.

「로제. 나보다 이 세계를 더 사랑하지는 말아 줘.」

바람이 불었다. 그의 옷도 내 머리칼도 모두 날아가게 만든 바람은 겨울의 입김이 아니었다.

「나는 오래 머무르지 못해.」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내 뺨을 쓸어내렸다. 오랫동안 혼자였기에, 타인의 접촉은 낯설기만 했는데.

따뜻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날…… 어떻게 알아요?”

남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예민한 듯 까칠해 보이는 낯이 흐려지자 마음이 아렸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아프구나.」

“아…….”

은은한 녹색 빛이 남자의 손에 머물렀다.

「나는 행복이 찾아오리라 믿는다. 네가 알려 준 것이니까.」

성큼 다가온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시선이 맞닿는 순간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청량한 향기, 찬 입술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고 떨어졌다.

「사랑해. 로제.」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남자는 홀씨가 날아가듯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그대가 데려올 봄을 기다리고 있어.」

마지막 순간 그가 웃으며 가리킨 손가락을 쫓았다.

“아……. 꽃이.”

한겨울, 만개한 벚꽃에 모든 걸 잠시 잊고 멍하니 바라봤다. 살랑살랑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에 이곳이 꿈결인가 싶다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겨울이 기승을 부리는 날 빈 가지 사이에서 홀로 핀 꽃은 가슴에 오래도록 자리를 잡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광경을 응시하다가 눈을 깜빡였다.

“사라졌다…….”

꽃은 언제 피었다는 양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참으로 꿈결같은 일이었다. 낯선 유령 같은 남자를 본 것도 한겨울에 피지 않을 꽃을 본 것도. 그러나 왜일까, 낯선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 계절에 맞지 않은 아름다운 꽃이 핀 풍경을 본 적이 있다는 듯이.

기이한 일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문을 닫았을 때였다.

그저 사라진 줄 알았던 목소리가 다시 귀를 스친다.

「그만 돌아와, 로제.」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었다. 듣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으니까. 아울러 거짓말처럼 가슴에 꽃이 피었다. 장막이 걷히고 꽃으로 피어난 이름.

“……아모르.”

추억이 아릿한 가슴에 발자국을 찍었다. 눈물과 사랑, 아픔과 헌신. 그렇게 새하얗던 설원에 기억이 채워졌다. 내 뺨으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헐레벌떡 아파트 앞으로 뛰어갔다.

“아모르!”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 덩그러니 핀 꽃을 보며 잊었던 이름을 되뇌었다. 데인, 플뢰온, 레이, 레베카, 헤르난……. 그리고 아모르. 꽃잎마다 그리움이 아스라이 스쳐 갔다.

“이, 잊어서 미안해.”

기억해. 기억했어.

“날 찾아냈구나.”

두고 온 것, 잊고 있던 것,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것. 주먹을 눌러 쥐었다.

“돌아가야 해.”

* * *

일상은 무난한 클래식 선율 같았다. 부드럽고 잔잔한 음표들의 나열이었다. 갑갑하고 힘들거나 짜증 나던 날도 역치를 넘지 않았다. 그런 날엔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하다 어느 틈에 또 잊곤 했다.

“대리님이 가는 곳마다 꽃이 피네요.”

막 가르치기 시작한 신입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최근 들르는 곳마다 나만 지나가면 화분이 생생해지곤 한다며 그가 다시금 중얼거렸다.

“잘못 본 거겠죠. 먼저 갑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흐르고, 토요일이었다. 이른 오전에 꽃을 한 아름 사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웬 꽃이야? 아저씨 좋아하시겠다.”

오랜만에 가는 병문안에 친구도 같이 가겠다며 함께 찾았다.

문이 열리면 화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바람을 따라 커튼이 흩날렸다. 나는 문득 커튼 뒤로 아주 고대 그리스 신전 기둥같이 커다란 기둥의 잔상을 보았다. 눈을 감았다 뜬다.

“지안아.”

발코니와 넓은 침대가 있어야 할 것 같은 곳에는 자그만 병원 침대가 있었다.

“아빠.”

병원복을 입은 사람은 내 아빠였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마르고 앙상한 몸을 가진 아빠가 다정하게 웃었다.

“왔니? 친구도 같이 왔구나.”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아빠는 친구에게도 반갑게 인사했다. 친구는 부녀간의 다정한 시간을 보내라며 마실 걸 사 오겠단 핑계로 자리를 비워 주었다.

“꽃 사이에 있으니 누가 우리 딸인지 모르겠네.”

“무슨 참.”

꽃병에 꽃을 꽂아 놓고, 나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아빠의 자리는 창문 바로 옆인지라 바람이 그대로 머리를 살랑였다.

“아빠,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애정으로 가득한 목소리는 평생 들었던 음성 중 내가 가장 사랑했던 목소리였다. 다른 세계에서도 끝내 잊지 못해 그리워하던 음성이었다.

하늘에선 볕이 반짝였다. 제법 화창한 하늘이었다. 구름이 수를 놓은 하늘과 새빨간 동백. 겨울임에도 한파 대신 유달리 따뜻한 날.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빠. 나는 너무 아쉬운 게 하나 있었거든.”

나는 천천히 창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아빠 얼굴이 너무 보고 싶었어.”

아빠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줄곧 잊고 있었거든. 그곳에선…… 내 과거를 모조리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했어.”

손을 더듬어 아빠의 앙상한 손을 잡았다. 난 서글프게 웃었다.

“다른 건 아쉽지 않았는데, 날 사랑해 줬던 아빠를 잊은 건 무척 후회가 됐어.”

“안아?”

“아빠는 오래전에 죽었으니까.”

아빠가 살아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병을 앓던 아빠는 눈앞에서 숨을 거뒀으니까. 그래서 나는 병을 앓고, 아픈 이들을 두고 보지 못했다.

“아빠가 죽고, 회사에서도 잘리고, 준비하던 시험에도 떨어졌을 때 나는 너무 암담했거든. 그래서 죽어 볼까도 싶었지만 어떻게든 잘 살았어. 결국 죽고 말았지만.”

내 사인은 흔한 교통사고였다. 너무 많이 일어나서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죽음이었다.

“있잖아, 아빠를 정말로 사랑했어.”

“…….”

“아빠가 없는 이 세계에 미련은 없는데, 한 번이라도 아빠 얼굴을 봐 둬야 할 것 같았어.”

그러자 아빠는 몹시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일어나는 날 붙잡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열자, 친구가 서 있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한 표정, 그녀는 모든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갈 거야?”

“응.”

친구의 손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왜? 여기는 네 세계잖아.”

친구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안아, 내가 본 이야기에서는 주인공들이 전부 자기 세계로 돌아와. 해피엔딩은 그런 거야.”

“내 세계는 여기가 아니야.”

나는 눈을 천천히 내리깔았다.

“이젠 알 수 있어. 저쪽엔 나를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

친구가 애달프게 나를 잡았다.

“그럼 나는?”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게 난 필요하지 않아.”

함께 자랐지만 일찍이 실패를 겪고, 한발 앞서 성숙을 경험했던 친구는 늘 나를 걱정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동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계엔 내가 없어도 많은 이들이 있었다.

“레베카가 좋았던 이유를 알겠다. 걘 예전의 너랑 비슷해. 까칠하지만 정이 많았어.”

“무, 무슨 얘긴지 모르겠어. 지안아, 그 세계로 가면 넌 행복해져?”

친구의 물음에는 애정과 슬픔이 함께 묻어났다.

“응. 이젠 알 것 같아.”

“…….”

“내가 행복해질 방법을.”

친구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나는 친구를 꽉 안아 주었다가 그녀를 살짝 밀어냈다. 그렇게 소중했던 것들을 모두 병실에 둔 채로 나는 병실 문을 닫았다.

‘안녕 내 세계.’

나는 한때 내 세계였던 곳에 안녕을 고했다.

문을 다시 열자, 반대편은 새카만 암흑이었다. 그러나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 * *

눈을 다시 떴을 때, 새벽녘의 정원이었다.

“돌아왔나.”

나는 목소리를 좇아 머리를 돌렸다. 궁 계단에 루스벨라가 소복소복 쌓인 눈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당신에게는 이것도 통하지 않나 보네요.”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루스벨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쾅.

눈앞에 금색 번개가 내리꽂혔다. 나는 펼쳐진 보호막 안에서 그녀를 응시했다.

“더 강해졌네.”

잎사귀 그림자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낯이 미소했다.

“나한테 뭘 한 거지?”

“뭐긴 뭐예요. 조금 전 그건 당신의 미련.”

번개를 쥔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거대한 번개가 다시 한 번 방어막을 때렸다.

“미련?”

“그래요. 저쪽 세계에 두고 온 미련이죠. 당신에겐 무의식중에 저쪽 세계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잖아요.”

루스벨라가 턱을 짚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저쪽으로 넘어가서 끊게 한 거고.”

“……끊지 못했다면?”

내 반문에 그녀의 입술이 해사하게 끌어 올려졌다.

“물론 끊지 못했다면 그 세계에서 눌러사는 거고.”

그러고는 광기 어린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어느 쪽이든 당신에게 나쁠 것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당신에게 미련을 남긴 소중한 것만 있는 세계였을 테니까. 그리 속삭이는 목소리에 살며시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하지만 사실이야.’

아빠를 보고 싶던 마음이 더 컸다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아마도 더 어린 시절에 이걸 봤다면 머물렀을지도 모르지. 그 세계에 안주해 버렸을지도.

‘잠깐 그렇다면 결국 루스벨라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 배회했다.

“당신, 정말 날 도운 거였어?”

불신이 얼룩진 내 얼굴은 분명 꼴사납겠지.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되나요?”

“하. 그걸 말이라고.”

“불쾌해 보이네요. 당신이 그럴수록 난 기분이 좋지만.”

루스벨라가 키득 웃었다.

“당신도 참 어지간히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뭐, 내 탓인가.”

아카데미에서의 존대와 거친 반말 어투가 혼재했다. 직감이지만 이쪽이 루스벨라의 진짜 목소리라고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미치도록 싫어.”

지직, 파지직, 그녀의 손에 들린 번개가 크기를 부풀렸다. 범상치 않은 힘에 얼른 나비를 일으킨다.

“어째서…… 당신만, 당신만. 당신에게만 바꿀 기회가 주어진 건데!”

“크읍!”

“왜!”

파도처럼 넓게 퍼진 나비가 점이 되어 번개를 에워쌌다.

“소용없어.”

흩어지는 나비 사이로 번개가 팔을 관통했다. 쾅. 비껴 나간 우레가 나무를 쪼갠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손목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신력을 다루는 힘은 아주 형편없으니까.”

“쿨럭!”

“겨우, 이 정도로 운명을 바꾸려 했어요? 이래서는 카스토르를 막지 못할 거야.”

나는 번개로 인해 한참이나 밀려났다. 바닥에는 찌익 끌린 자국. 피와 땀이 한데 엉키고 시야가 아득했다.

‘회복을, 회복을 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액체, 냄새가 익숙하다. 웅덩이 진 작은 샘에 풀이 젖어든다. 내 몸에 이렇게 피가 많았던가.

“나는 번개를 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전부 쉽게 부서져서 질색이었거든. 예전의 나는 그랬죠.”

꼼짝 말라는 듯 번개가 스쳤다. 머리카락이 허공에 흩날린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루스벨라는 그대로 일기장을 눌러 밟았다.

“어느 순간부터 상관없어지더라고요.”

발아래 깔린 일기장이 거친 빛을 내고 사납게 펄럭였으나, 그녀는 더욱 거세게 밟는 걸로 무시해 버렸다.

“파괴하는 힘이면 어때. 전부 시들고 쇠퇴하고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손으로 입을 가져간 루스벨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도 죽어 버리고 그 남자도 죽어 버리면 참 좋을 텐데.”

‘신력을 다루는 능력.’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올레시아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그녀는 나에게 어떻게 사용하라 했더라?

“이봐요. 아실리. 나를 재밌게 해 줘요. 마지막이잖아?”

번개가 입힌 부상은 아프지 않다. 까맣게 타들어 간 팔도 금방 아물었다. 나는 피를 닦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넌…… 닥치는 게 좋겠어.”

찐득해진 피를 닦아 내며 숨을 토했다.

“네 눈은 완전히 맛이 가 버렸네.”

루스벨라가 맞다며, 키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요. 난 오래전에 미쳤답니다. 그리고 아실리. 난 알아요.”

그녀가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당신은 간신히 미치지 않고 있을 뿐이야.”

하얗고 마른 루스벨라의 손에 다시 한 번 신력이 뭉쳤다. 나의 나비들이 기다렸다는 듯 반구 형태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루스벨라의 손에서 신력이 회전하고 돌풍처럼 몰아친다. 그 속에서 번개는 더욱 힘을 부풀렸다. 맞으면 몸이 그대로 날아갈 것이다.

그 순간 몸속에서 빠져나온 일기장이 파라락 넘어가며 빛을 뿜었다. 이것이 도움을 주려는 듯 잊고 있던 목소리가 들렸다.

<힘을 쓸 때도 간절히 염원하렴.>

나는 지금 어떤 신의 힘을 쓰고 있지? 내 본질은 무엇인가? 죽음의 신관이며 주신의 신관이다. 하지만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그녀와 나의 차이는 이다지도 압도적인가?

내게 무엇이 부족했지? 이윽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단순히 신력을 일으키는 데 그쳤던 거야.’

지금까지 나는 능력을 쓴 것이 아니다. 일부를 끌어내는 데 그쳤을 뿐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능히 산불을 끌 수 있는 양의 물을 바가지로 퍼올린 것과 같았다.

능력을 쓴다는 건 폰투스가 얼음을 일으키는 것처럼, 아모르가 대지를 흔들고 식물을 움직이는 것처럼.

내가 소유한 신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리고 염원하는 것.

“이걸로 끝을 보죠. 질긴 악연의 끝을!”

눈앞에 눈부시도록 커다란 번개가 직격했다. 콰지지직. 기둥이 쪼개진다. 나무에 불이 붙고 땅이 새까맣게 그을렸다. 모든 것을 검게 태우는 번개, 맨몸으로 번개를 부딪치는 건 미친 짓이었다. 내 손가락이 하나씩 그을리고 살갗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손목으로 팔꿈치로 팔뚝으로.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죽으려고 작정했군요?”

“아니.”

나는 마침내 웃으며 루스벨라의 팔을 잡았다. 번개를 뚫고 지나간 내 손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당신에겐 죽음의 힘이 없지?”

팔목에 휘감긴 아모르의 팔찌에서 후드득 줄기가 피어났다. 모든 권능을 다룰 수 있다. 즉 아모르가 남긴 성물로 텔루스의 힘도 쓸 수 있다.

죽음의 힘은 불사, 자색 나비가 에워싸고 사라진 자리에 새것 같은 내 팔이 드러났다.

“넌 나와 다르게 회복도 불사의 힘도 불가능한 거야.”

우리는 달라. 그리 속삭이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난 말이야, 예전에 이곳에서 만났을 때부터. 당신을 한 방 갈겨 주고 싶었어.”

쾅.

거대하게 뭉친 신력이 루스벨라의 보호막을 때렸다. 나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사이를 저벅저벅 걸었다.

“일어나. 이 악연을 끝내자.”

나는 그녀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후드득.

루스벨라는 새가 깨고 나온 알의 형태처럼 깨진 보호막 가운데 주저앉아 있었다. 유리 조각처럼 흩어진 보호막 파편이 연기로 사그라졌다.

“후후후, 축하해요. 신력을 다루는 방법도 깨우쳤네요.”

그녀가 비틀거리며 상체를 세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자, 잠깐, 당신 몸이 왜 그래?”

땅에 떨어트린 사기 인형이 이럴까. 콰직, 그녀의 몸에 균열이 가며 형체가 흐릿해졌다 나타났다가 다시 흐릿해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조금 전 헤르난의 마지막 모습같이.

“한 몸에 두 영혼이 존재할 순 없어요.”

쿨럭, 루스벨라가 기침했다. 피는 나지 않았으나 기침에 존재가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본래라면 당신의 각성과 함께 일기장과 나는 사라져야 했지만…….”

그녀의 눈꺼풀이 꺼지기 직전 촛불처럼 깜빡였다.

“당신이 바보같이 저쪽 세계에 미련을 둔 덕분에 좀 더 오래 남아 있었던 거예요. 내 쪽은 불완전해서 육체 능력은 형편없었지만.”

그러더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서 그런 얼굴이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웃음은 머지않아 꺼지고, 그녀가 증오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난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에요.”

“…….”

“빨리, 나의 몰락을 기뻐해요. 어서!”

그녀가 이를 악 물었다.

“설마, 나를 동정하는 건 아니죠?”

“…….”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나를 이세계로 이끈 그녀의 몰락을 바라보며.

“날 그렇게 보지 마!”

악을 쓴 얼굴은 악귀와도 같았다. 그러다 무슨 영문에서였는지 그녀가 멈칫했다. 이내 루스벨라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기뻐하란 말이야……. 기뻐해! 내가 죽잖아! 모든 일의 원흉인 내가!”

알 수 있던 건 지옥도를 목격한 듯 분노와 혼란과 번민. 그리고 설움에 찬 루스벨라의 낯이었다.

“당신이 싫어! 정말 싫어! 왜! 왜! 당신은 살아 있는 거야? 난 죽는데, 왜!”

너도 망가져. 망가져 버리라고! 루스벨라가 거침없이 소리쳤다. 나는 그저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나도 당신이 싫어.”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나는 무겁게 입을 떼었다.

“하지만 잘 죽었다고 하지는 않을 거야.”

“…….”

“나는…… 누구의 죽음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야.”

죽음보다 외로운 형벌은 없다. 그러나 그 사무치는 외로움에 갇혔다 마침내 해방된 당신의 얼굴은 후련함이 아니다.

“하…… 하하……. 나는 세상에 원래 없던 사람이라 했는데도……, 그런데도 죽는다고 말해 주는군요.”

난 그저 사라질 뿐인데. 그녀가 속삭였다.

“돌아가.”

“어디로요?”

“윌터로.”

그녀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공허하고 허탈한 웃음이 공터를 메웠다.

“어차피 나는 당신과 다시 마주한 순간 사라졌을 운명이에요. 그러니 불가능해. 처음부터 그렇게 튼튼하게 만들어지지 않았거든.”

“……죽을 줄 알고 날 찾아왔다고?”

그녀의 웃음은 긍정에 가까웠다.

“물론 지금 시기는 아니었죠. 좀 더 윌터에 머물다가 최후의 순간에나 찾아가려 했는데.”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아쉬움이 스쳤다. 나는 그 시선에 담긴 것을 똑똑히 알아챘다.

“루스벨라, 당신 슬로레니안을…….”

“이봐요. 아실리.”

힘없이 깔던 눈동자에 금빛이 번득였다.

“나도 한때는 당신처럼 사랑을 알았고, 설렘을 알던 사람이었답니다.”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위협적으로 아른거렸다.

“그러나 이젠 난 사랑과 증오를 구분할 수 없어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미움인지 애정인지 오래전에 분간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끝나지 않는 무간지옥.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였지요. 그것이 내가 삶을 바쳐 사랑하던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

“그렇게 미쳐 버린 거죠.”

루스벨라의 눈은 건조했다.

“사랑하지만 미웠고, 애정을 쏟았지만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해. 어느새 정상이란 기준은 사라지고 광기만 남았어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괴물이 된 거야.”

괴물은 자신의 광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담담하게 고백했다.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이 땅은 나를 불행하게 했잖아요? 그래서 멸망시키고 싶었답니다.”

“행복을 위해서라면 멸망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아봤어야지.”

“지금 당신은 미래를 바꿨다고 내게 자랑하기라도 하는 건가요?”

“아니. 파멸을 위해 스스로마저 바친 당신이 가엾다는 거야.”

“…….”

“호기롭게 멸망을 외쳤으면 다음도 있어야지!”

첩첩이 쌓인 시간 속에서 말라 버린 눈동자. 금빛 시선을 가진 이의 사랑은 썩었단다. 아올레시아의 말이 아릿하게 가슴을 스쳤다.

“네 사랑은 비틀어졌고, 썩었어! 연인을 사지에 이끌고 죄 없는 자들의 전쟁을 일으키고 그대로 버리는 게 네 사랑이야?”

“…….”

내게 일기장을 가져다준 루스벨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도 증오한다. 지독하게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 나를 데려온 것은 그녀였다. 혼재한 감정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왜! 왜 네가 이런 모습으로 동정을 사는 건데.”

쓰러진 그녀를 보노라면 이가 갈렸다. 당신이 밉다. 당신으로 인한 죄 없는 자의 죽음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나. 그럼에도…….

“넌 죄를 지었어. 나에게도 수많은 사람에게도.”

“…….”

“네 욕심에, 네 욕심이 일으킨 전쟁에 죽은 사람은, 가엽게 죽어 간 사람들은 무슨 죄인데! 제발 뉘우쳐! 후회하고 자책해. 네가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해. 어서.”

나는 조금 전 루스벨라가 했듯이 소리치고 악을 썼다. 넘실거리는 감정의 파도가 나와 루스벨라 사이를 가득 메웠다.

“죽어 가면서 속죄해. 뉘우쳐. 후회하고 용서를 빌어.”

“불가능한 걸 바라지 말아요.”

“……그럼 네 사랑도, 사랑이었다 믿을게. 한때는 무력했던 그래서 미치기 전의 당신을 내가, 내가 기억할게……. 그러니까 뉘우쳐. 제발 뉘우쳐, 루스벨라. 당신은, 수많은 이들을 죽였어.”

“…….”

물끄러미 나를 보던 루스벨라는 이내 흐릿하게 웃었다. 조금은 난감해 보이는,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상냥하네요. 당신은.”

정말로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악당이나 운명에게 이용당하는 거야.”

당신이 나를 속였던 책 『루스벨라의 빛』은 이야기가 아닌, 한때 있었던 시간을 기록해 둔 보고서. 어느 불쌍한 여인의 삶의 기록. 처절한 생존의 회고록.

“당신은 나보다 적은 수의 반복을 거쳤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수렁이 나와 달랐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렇다면 당신도 한때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밝고 상냥한 사람이었나? 그래. 그랬을 거다.

“아실리.”

그랬던 거라고 믿고 싶다.

“그건, 네 이름이잖아.”

“아니, 나는 루스벨라…….”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루스벨라에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못 박았다.

“설사 우리가 같은 이름이어도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운명을 바꿨고. 나는 패퇴해 사라질 거야.”

차갑고 매끄러운 손이 뺨을 스쳤다.

“당신이…… 나와 같은 길을 택하지 않아서 바뀐 걸까.”

흉터가 있던 뺨이었다.

“미안해요.”

“…….”

“당신과 친구가 되어서 기쁘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어. 항상…… 외로워서…….”

루스벨라는 사막의 모래처럼 퍼석하게 마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순간에도 운명을 개척하는 당신이 부러워.”

끝내 눈물이 말라 버린 여자는 마지막 꽃을 피워 낸 고목처럼 천천히 시들어 갔다. 나는 고꾸라지는 그녀를 내 무릎에 눕혔다. 그녀는 점차 창백해진 낯을 하고서도 눈을 크게 깜빡였다.

“콜록, 시간이 됐나 보네요.”

“당신 피가…….”

“괜찮아요. 이 몸은 가짜라 죽어 가는 것뿐이니.”

그녀는 심장 부근을 더듬더니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피가 잔뜩 묻은 손에 단단한 것이 휘감겼다. 단검이었다.

“이건 내 마지막 사죄의 표시에요.”

그녀는 심장에서 자라난 단검을 뽑아서 내게 내밀었다.

“……검?”

검은 요요한 빛을 품고 있었다.

“카스토르를 이걸로 찔러요. 찌르면서 당신이 원하는 걸 생각해.”

“원하는 것이라니…….”

“죽이든 영원한 고통을 주든.”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아 검을 쥐게 했다.

“당신의 힘과 나의 힘, 그리고 당신 안에 잠든…… 당신이, 당신을 사랑한 이들의 힘. 전부 합쳐지면 뭐든 가능할 거예요. 그럴 거야.”

심장이 있던 자리가 뻥 비워진 루스벨라가 힘을 짜내서 웃었다.

“누군가 당신에게 그러지 않던가요? 카스토르가 마치 살아 있는 신과 같다고.”

헤르난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루스벨라는 더는 나를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다 억지로 다시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자가 신이라면 당신도 걸맞은 존재가 되면 돼.”

이윽고 반쯤 감긴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했다.

“있잖아요. 영혼의 일부가 섞인 것도 혈연이라 친다면……. 당신은 내 자매이지 않을까요?”

그녀의 숨이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당신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할래. 나는 이기적이니까. 그래야 마지막 길이 외롭지 않잖아. 그래도 당신, 원하는 끝을 맺어요. 그리고 내 죽음을 기뻐해요.”

“……나는 누군가의 죽음에 기뻐하지 않아.”

“우습네. 부디 나처럼 되지…… 말…… 아요.”

그리고 스르륵 손이 떨어졌다. 그녀의 시체는 눈부신 빛으로 산화했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손을 적시던 피도 무릎 위의 온기도. 그저 새하얀 단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은 건 눈물이 되지 못한 핏방울.

텅 빈 궁, 다시 홀로 남은 정원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왜일까. 어디선가 뎅그렁, 종소리가 들렸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뭔가 이상한데.’

낌새를 눈치챈 건 아주 사소한 점에서였다.

“어째서……. 달이 움직이지 않는 거지?”

루스벨라가 죽은 지 몇 시간이나 흘렀다. 몸은 모조리 수복되었고, 달도 별도 움직여 하늘이 슬슬 아침을 준비하는 것이 옳았다. 기다려도 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

홀린 듯이 중얼거리다, 벌떡 일어났다. 바람조차 없는 하늘. 미동도 않는 대기. 모든 진동이 사라진 공간. 아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멈췄어.’

세상 전체가 멈췄나? 나에게만 멈춘 건가? 알 수 없다.

지금 태연한 건 내 의지일까, 광기의 경계를 걷고 있기 때문일까. 놀랍지 않다. 왜? 이런 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지 않은가.

박제된 하늘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멈췄다. 이곳은 달이 지지 않는 영원의 밤이 되어 버렸다. 밤이 먹칠을 하고 태양이 자취를 감춘 하늘 너머를 한없이 달렸다.

보름달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시간, 황궁 앞에서 달을 바라보고 있던 자가 느지막이 고개를 내렸다.

“달이 아름답구나.”

“…….”

“그렇지 않으니? 내 아실리.”

이곳은 카스토르가 준비한 무대였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다른 사람들은?’

황성을 지키는 병사들은?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사람은 없단다.”

낮은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죽였나?”

“글쎄.”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카스토르가 말했다.

“죽이진 않았어. 어디론가 치워 두었지.”

고개를 든 그는 달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너무 많은 수를 죽여서 더 죽여도 감흥이 들지 않으니.”

그의 어깨 위로 달이 매달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덮칠 것 같이 거대한 달. 분명 비정상적인 크기였다.

“그렇겠지. 네게는 모든 사람이 개미보다도 못한 존재일 테니까.”

달 위로 금색 빛무리가 이지러진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지만 그 빛을 보고 있으려니 오히려 지금 상황이 실감 났다.

“그러니까 그동안 그렇게 쉽게 죽이고 가지고 놀았던 거야. 그렇지?”

“…….”

“날 가지고 놀았던 것처럼.”

카스토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시간마저 멈춘 공간, 분명 바람 또한 멈춰야 할 터인데 머리카락이 세차게 흔들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눈을 다시 뜨자, 기둥에서 내려온 카스토르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펄럭펄럭, 카스토르의 새까만 토가가 깃발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칠흑처럼 긴 머리카락 위로 이질적인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기를 반복했다.

“왜,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나는 손등으로 굳은 피를 비벼 닦아 내고는 말했다.

“뭐 이젠 좋아. 네가 뭐라고 하던 진실은 변함없으니까. 아니 이젠 네게 무슨 소리를 듣던 흔들리지 않을 테니.”

후두둑 떨어지는 피딱지는 내가 짊어져야 할 껍데기였다.

“말해. 어째서 시간을 멈췄지?”

루스벨라와 전투를 벌이며 다치고 까진 상처 위로 새살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전투 중에 깨달은 건데 이젠 마음만 먹으면 재생이 가능했다.

“시간을 멈췄다라. 글쎄. 이젠 그런 것이 가능하게 되었더구나.”

기둥처럼 선 카스토르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말려 올라갔다.

“아실리.”

“내 이름, 부르지 마. 소름 끼치니까.”

“…….”

그는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 입술만 끌어 올린 얼굴이었다.

“들어 보렴.”

더는 듣지 말자. 어차피 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는 악마의 것처럼 나락으로 떨어지도록 날 현혹할 테니까.

“닥쳐.”

“내가 무슨 소릴 하던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니?”

그가 한 걸음 디뎠다.

“그럼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잠자코 들어 주어야지. 넌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

개소리를 더 들어 주는 대신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내 손에 모인 신력이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건 곤란해.”

그러나 그는 금빛이 도는 반원 안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를 보호하던 신력이 사라지고 금빛 아지랑이가 바람처럼 휘휘 그의 팔을 맴돌고 있었다.

“네가 흔들리지 않는다니.”

“…….”

칫, 내가 혀를 차며 팔찌를 응시했을 때였다. 숭, 본능적으로 걸음을 물렸다. 어느새 바짝 앞으로 다가온 카스토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니?”

그는 희미한 녹색 빛을 내는 팔찌를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마치 이것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듯이.

“여기까지 와서도 헛소리구나. 참 지긋지긋해.”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주먹을 뻗었다. 신력으로 휩싸인 손에서 나비가 채찍처럼 날아갔다. 탕. 타타타. 탕. 하루살이가 전구에 부딪치듯 나비 떼가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쾅.

카스토르의 검에 날아간 나비는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과거. 현재. 미래.”

자욱하게 일어난 연기 속에서 무언가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네가 알지 못하는 시간까지. 시간에 울고 웃고 지배당했지.”

손목을 잡은 카스토르가 그대로 눈을 난연히 휘었다.

“시간이 멈춘 이 공간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거든.”

심상치 않은 말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순간 양쪽에서, 바닥에서 거칠게 뻗은 장미 넝쿨과 뿌리가 그를 옭아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그는 가시가 삐죽삐죽 선 넝쿨에 구속당한 채로도 나를 놓지 않았다.

“난, 널 망가트릴 거야. 아실리.”

그의 피도 붉었다. 그는 가시에 잡힌 채로 내 손목에 입을 맞췄다.

“망가져 줘. 그리고 나를 사랑해 줘.”

뚝뚝. 그는 내 손끝을 타고 흐르는 피를 혀로 핥았다.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날것에 가까운 미치광이의 눈동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너뿐.”

“…….”

“사랑해. 아실리.”

짐승 같은 광기 어린 시선이 주문이라도 되는 양 몸을 속박했다.

“이대로 망가져, 영원히 내 곁에 머물러 주겠나.”

바닥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왔다. 빛에 식물이 하나씩 삭아 끊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대론 안 돼. 점차 이끌려 들어가는 몸에 이를 악물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너를 내게 줘.”

귀로 달콤한 목소리가 감겼다.

“네게 세상을 주지.”

“…….”

“더는 반복도 아픔도 죽음도 없는 암흑으로 잠긴 세상을.”

헤어 나올 수 없이 바짝 다가온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였다. 내 가슴에서 새파란 보랏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쉬이잉!

칼날처럼 일어난 바람은 카스토르의 옷을 찢고서야 멈췄다.

―떨어져.

눈앞에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살랑거리는 금빛 타래가 보였다.

“일기장?”

사람의 형체를 했지만 알아볼 수 있다. 이건 일기장이다. 손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은 일기장을 건드리자 실체가 만져졌다.

“영혼의 찌꺼기인가.”

카스토르는 찢어진 어깨를 잡은 채 나른하게 미소했다.

“이미 늦었다.”

곧바로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곤 몸을 빼내려고 했으나 이미 금빛이 새장처럼 나와 일기장을 가둔 뒤였다. 늪처럼 몸이 점점 빠져들었다.

“아실리.”

카스토르가 여유롭게 나를 불렀다.

“이곳에선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잖아? 여긴 시간이 뒤엉킨 공간이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앞에서 카스토르가 사라졌다. 새카만 어둠에 당황한 것도 잠시, 새하얀 손이 나를 붙잡았다.

―여긴 시간이 뒤엉킨 공간이야. 저자의 말대로.

“너…….”

―길을 잃으면 영원히 현재로 빠져나갈 수 없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일기장이 말했다.

―내가 길잡이가 될게. 날 따라와.

뺨이 통통한 내 모습이었다. 눈동자색이 금색이었고, 뺨에 상처만 없을 뿐.

“너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야? 사람으로 변하는 게 가능했어?”

일기장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원래 이 모습은 소모가 커서 할 수 없어. 이 공간이라서 가능한 거야.

무어라 더 말하려는 내 손을 일기장이 잡아당겼다.

―빨리 나가야 해. 여기에서 넌 무엇을 볼지 몰라. 영원히 갇혀 있고 싶진 않겠지?

“…….”

―얼른 나가자!

다급해 보이는 얼굴이 거짓 같지는 않았다. 당장 뭐가 뭔진 몰라도 따라서 나쁠 것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순순히 일기장의 손에 이끌려 주는데, 일기장이 잠시 멈칫했다.

―혹시 이 모습이라서 불편해?

“뭐?”

무슨 말이지? 알아듣지 못해 쳐다보면 일기장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네 어릴 적 모습이어서 불쾌한지 물었어.

“그걸 물은 거라면 전혀.”

상관없어.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수없이 내 모습으로 나타나 놓고서 이제 와서 물어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

끄덕이는 일기장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이제부터 출구를 찾을 거야.

유심히 보려 하는데, 일기장을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찾는 도중에 무엇을 보게 될지 몰라.

“뭘 보는데?”

―나도 몰라. 여긴 모든 시간이 뒤엉킨 곳. 그래서 조심하라는 거야.

“그 조심이란 거 어떻게 하면 되는데?”

―아마 시간들이 곳곳에 퍼져 있을 거야. 절대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특히나 구멍 같은 걸 조심해.

“그래?”

―어. 혹시라도 빠지게 되면 날 불러. 나는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빨리 말하지.”

일기장을 보며 걷느라 눈앞에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구멍을 보지 못했다. 늪처럼 한쪽 발을 끌어당긴 구멍에서 이내 치솟아 오른 검은 액체가 나를 덮쳤다. 부글부글, 말을 하려 해도 기포가 나올 뿐. 나는 삼켜진 채 눈을 감았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아 내 몸은 어디론가 내동댕이쳐졌다.

“하…….”

아프진 않았지만 절망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카스토르를 상대하기는커녕 대체 이게 무슨 꼴이지.’

하지만 얼른 얼굴을 쓸어내리고 고개를 휘저었다.

‘정신 차리자.’

이 공간 자체가 카스토르의 함정이라면 무엇이 됐든 조심해야겠지.

사방을 살펴본다. 아득한 황무지가 보였다. 사막이라곤 할 수 없지만 곳곳에 바짝 마른 나무나 누렇게 변한 풀, 쩍쩍 갈라진 바닥이 보였다.

‘이 천막은 뭐지?’

더구나 난 천막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흡사 몽골에서 쓰이는 집대용 천막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보다는 더 간단한 구조처럼 보인다.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이 작은 틈에서 빠져나가서 상황을 보는 게 먼저겠다. 그렇게 엎드린 채로 기어갈 때였다.

“거기 너. 누구냐.”

엉금엉금 틈을 기어 나오자 눈앞에 반짝이는 칼날이 보였다.

“침입자인가.”

고개를 들면 역광에 가린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체격으로 성인 남자란 걸 알았을 뿐. 하지만 왤까, 묘하게 낯이 익다.

“무슨 일이야?”

사내는 하나가 아니었는지, 뒤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침입자야, 레이?”

“……글쎄요. 애매합니다.”

“왜?”

“저는 검 하나 없는 가녀린 여성을 침입자로 간주하고 싶진 않아서요.”

“하하하. 언제부터 그렇게 물렀다고.”

낯익은 목소리다. 하지만 나는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이런 곳에서 그를 마주치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데인?’

눈앞에서 데인이 웃고 있었다. 비록 그 웃음 한편으로 나를 살펴보고 있다고 해도, 분명 데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어째서 여기 계신 건가요?”

목에 겨눠진 검이 사라졌다.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날 알아보지 못해?’

묘한 감각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고 보니 데인은 중상을 입어 죽기 직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눈앞의 데인은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법한 터번을 머리에 둘둘 감고 입술을 가리는 긴 천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말을 못 하시나요?”

낯설었다. 다정함이라곤 한 톨도 담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나를 관찰하는 붉은 눈동자도. 입술만 여물어 웃는 미소도.

“아니면, 안 하는 건가.”

“…….”

데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황제의 첩자라면 결계를 넘어서도 올 수 있겠지.”

설산의 동백꽃처럼 피어난 눈동자는 꼭 겨울처럼 차가웠다.

“그만하십시오.”

그를 막은 건 레이 경이었다.

“복장을 보세요. 황무지를 건너올 만한 옷이 절대 아닙니다. 저보다 잘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흐응, 처음 본 여성의 편을 드는 거야? 우리가 함께한 수많은 밤을 무시한 채?”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레이 경은 진저리를 내면서도 내 앞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뭐. 좋아. 이 아가씨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은 분명하니까, 나는 모든 걸 의심해 볼 이유가 있어. 그렇지 않아?”

“…….”

천천히 무릎을 접어 앉은 데인이 경의 팔을 치워 내고 나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묘하게 감각을 자극하는 아가씨. 이상하지만 나는 당신이 낯설지 않네요. 당신은 누구며 어째서 여기 있나요?”

“……데인.”

그 순간 데인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레이경이 얼른 이쪽을 돌아봤다.

“어째서, 내 이름을…….”

서늘해진 목소리는 채 이어지지 못했다.

“야!”

누군가 소리치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야, 데인 로웰. 이래도 되는 거냐?”

씩씩대며 나타난 남자는 여기가 보이지도 않는 듯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아무리 유능하다지만 네 일을 나한테 다 떠넘겨? 망할. 네가 반란군의 수장이라 해도 반란은 네가 일으킨 거지, 내가 일으킨 게 아니거든?”

흔들리는 잿빛 머리칼을 본 순간 나는 이미 달려가고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판단할 겨를도 없었다.

“으아악! 뭐, 뭐야!”

콰당. 달려온 내게 부딪쳐 남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나는 그의 허리에 올라탄 채로 멍하니 남자를 응시했다.

“야! 이 계집애는 뭐야? 네 새로운 애인이냐?”

“…….”

“아니, 이 계절에 왜 홀딱 벗겨 놨어. 미친 거 아니야?”

오만하게 낯이란 낯은 전부 찌푸리면서, 차마 내게 손대지 못한 남자를 향해 입을 떼었다.

“……플뢰온.”

꽥꽥 고함치던 플뢰온이 멈칫했다.

“내 이름도 알아? 이상하네. 난 그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그보다 너 뭔데 감히 나를 편하게 부르냐?”

“…….”

“어어, 우냐? 왜, 왜…… 우려고 하는데? 야!”

저벅저벅 뒤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데인과 레이 경일 것이다. 왤까 답답함이 목 끝까지 치솟았다.

“바보. 멍청이. 왜 못 알아보는 건데! 네 여동생이잖아!”

“……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맞아 주던 플뢰온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플뢰온은 혼란이 섞인 얼굴로 반문했다.

“난 여동생 없는데?”

쿵. 심장이 떨어졌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플뢰온을 보았지만 그는 반쯤 무구한 낯으로 찡그리고 있었다. 애초에 연기와는 영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아가씨, 당신은 정말 누구죠?”

“…….”

“여기는 반 황제파 사령부, 반란군의 비밀 근거지입니다. 신관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은 우리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군요. 그것도 어릴 적 버린 이름을.”

답을 알고 있다. 나를 본 순간 알아채지 못하는 데인과 레이 경,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성숙한 외모와 낯선 황무지.

여기는 내가 없는 시간이다. 너희가 나를 모르고, 나를 잊고, 너희의 웃음과 행복을 공유한 시간.

목소리가 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네 여동생이라고, 네가 그토록 아꼈던 동생이라고 해야 하는데. 끝내 터져 나온 것은 울음과 비슷한 신음이었다.

그들은 얼이 빠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낯선 막사로 데려갔다. 천막 안은 허름한 겉과 달리 안락했으며 따뜻했다. 나는 의자에 앉았고 그들은 차례로 내 옆과 앞을 차지했다. 구속만 하지 않았을 뿐 관찰하는 시선을 느꼈다.

“그래서 아직 아가씨가 누군지 듣지 못했군요.”

입을 뗀 것은 데인이었다. 은연중에 압박이 서린 목소리가 거북했다.

“뭐야, 네 애인 아니었어?”

따라 들어온 플뢰온이 낯을 확 찡그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조금 전 대화를 듣고도 생각할 머리가 없어, 형?”

“너 지금 나 멍청하다고 깠냐?”

플뢰온의 눈썹이 산처럼 솟았다.

“아무렴. 자기 욕은 귀신같이 알아채는 형의 눈치에 박수 쳐 주고 싶어. 그 머리가 다른 곳에도 쓰이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오냐.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나 까는 건 안다. 엉? 이 망할 자식이 은혜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는 데인이 못마땅한지 플뢰온이 잽싸게 손을 뻗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피한 데인은 오히려 발을 뻗었다.

“야!”

“그러게 운동 좀 하지 그랬어. 형.”

“저게 날로 성질만 더러워져서는. 나도 근거 없이 말한 거 아니거든? 저 여자, 봐!”

쿠당탕 넘어진 플뢰온이 씩씩대며 데인을 노려봤다.

“어딜 봐도 네 취향이잖아!”

그 말에 잠자코 지켜보던 중 나도 모르게 데인을 쳐다봤다. 데인은 말이 없었다.

“맞지? 맞으니까 말이 없는 거겠지. 내가 네놈 취향은 안다!”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 거라곤 생각 안 해?”

데인은 기가 차다는 듯 쯧 혀를 차고는 플뢰온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상대도 안 할 생각인 듯했다. 곧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농홍하게 눈을 휘었다.

“당장 말할 생각은 없나 보네요.”

“…….”

“그렇다면 여기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끝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데인은 그대로 나가 버렸다.

‘이젠 어떡해야 할까.’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인데, 당장 그럴 수가 없다. 아마 그들의 모습이 눈에 걸려서인 것 같다. 오래전에 잃었던 모습이 눈앞에 있다. 그들과 함께여서 완벽했던 세상이다. 비록 나는 없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말은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었는지 내가 있는 천막을 누군가 지켰고, 감시자는 레이 경이었다.

중간중간 병사가 음식을 가져왔는데, 식사라고 가져온 걸 보면 꽤나 인도적인 처사였다. 그들에게 아마 상당히 수상한 사람일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거절했다.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천막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창문을 보자 저녁별이 총총 뜬 밤이었다. 나는 부스스 의자에서 일어나 천막의 문을 들어 올렸다. 한 걸음 떼려는데,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십니까.”

천막에 기댄 레이 경이 눈감은 채 물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뜬다. 채도 낮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그 옷차림으로는 오래 도망 못 갑니다.”

그러니 얌전히 들어가란 소리였다. 나는 반문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화장실요.”

“……예?”

다시 한 번 조곤조곤 ‘화장실. 큰 거요.’ 하고 말해 주자, 무뚝뚝한 낯이 살짝 찡그려졌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라 생각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내가 잘못 들었습니까?”

“미인은 화장실도 안 간다는 말 몰라요?”

레이 경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재미없긴. 있는 그대로요.”

“……농을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묵묵하지만 조금 뚱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지고, 조금 그립다고 생각했다.

“앉아도 되죠?”

그렇게 말했지만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냉큼 옆에 앉았다. 레이 경은 날 보며 잠시 눈을 찌푸리다가 제 망토를 벗었다.

“여기 앉으시지요.”

그의 배려에 기쁨은커녕 씁쓸함이 가슴에 자리했다.

“……수상한 사람한테 잘해 줘도 돼요?”

내가 앉는 것을 본 레이 경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는 왠지 그래도 될 것 같군요.”

나를 보지 않는 덤덤한 옆모습은 오래전 익히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이상한 느낌이긴 합니다. 분명 수상한데, 경계가 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이어 레이 경이 눈을 내리깔며 무심히 덧붙였다.

“뭐. 미인에게 약한 것이라 해 둬도 좋겠군요.”

“응?”

너무 담담하게 지나친 말에 눈을 크게 깜빡였다. 하지만 검 끝을 툭툭 내려치는 레이 경의 얼굴은 변함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난 나를 태연히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미인은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고 하더니.”

무뚝뚝하면서도 능글맞은 모습은 분명 레이 경이었다. 그리고 무어라 하려던 그때였다.

“뭐야, 데이트라도 하냐?”

모퉁이에서 나타난 플뢰온이 우릴 보자마자 소리 내어 말했다. 밤바람에 흔들거리는 잿빛 머리칼을 보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들어갈게요.”

왜일까 참을 수 없는 감각이 가슴에서부터 밀려들었다. 천막을 닫는 뒤로 플뢰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방해했냐?”

“그렇다고 하면 사과하시겠습니까?”

“뭐? 웃기고 있네. 넌 데이트하면서 옷 하나 벗어 주지 못하냐? 못난 놈이군.”

천막이 닫히며 모든 소리와 차단되었다.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밀려오는 파도를 이기지 못하듯이 쓰라림이 몰려왔다.

고개를 들자, 천막 안은 나올 때와 변함없었다. 그러나 긴 카우치에는 조금 전까지 없던 데인이 앉아 있었다. 이 천막에 드나들 수 있는 문은 두 개였다. 다른 문으로 들어온 걸까?

‘자고 있네.’

데인은 고요한 잠에 빠져 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모습을 보다 나도 모르게 성큼 다가갔다. 그는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치 빚어 놓은 듯 아름다운 낯은 조명의 명도가 낮은 밤에도 퇴색되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미간을 찡그리고 있네.’

찡그려진 주름을 펴 주려 손이 막 닿았을 때였다.

덥석.

그가 눈을 번쩍 떴다. 휙 시야가 뒤집혔다. 등 뒤로 푹신한 천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데인은 나를 눕힌 채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암살자는 아닌가 보네요.”

내 손을 잡아당긴 데인의 눈이 아찔하게 휘어졌다.

“틈을 주면 정체를 드러낼까 했더니.”

그의 새빨간 눈에는 차가운 불꽃이 일렁였다. 그는 신관이 아니기에 이질적인 빛이 눈동자에 그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그 눈을 보며 깨달았다.

“그리워해도 돌아갈 순 없구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내가 지워진 세계.

“……무슨 말이죠?”

대체, 하고 그가 말을 잇다 말고 멈칫했다.

“당신, 울어요?”

눈물방울이 뚝뚝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너는 싫어. 데인.”

“당신…….”

“미워하고 싶지, 않아.”

너흰 이렇게나 완벽한데. 완벽하게 너희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나는 없다. 너희가 아무리 너희처럼 행동해도 낯선 것을 보는 눈을 견디기 힘들다.

싫어. 이런 시간은 싫다. 보고 싶지 않다.

“일기장 어딨어!”

데인은 나를 붙잡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상관없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소릴 질렀다.

“날 데려가! 어서! 당장!”

이윽고 가슴에서 보랏빛 빛이 터져 나왔다. 고사리 같은 손이 나를 잡아당겼다. 황무지가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내가 모르는 시간에서도 멀어지며 카스토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네가 알지 못하는 시간까지. 나는 시간에 울고 웃고 지배당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