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최후의 전쟁
칼타니아스 서쪽 에페소스는 거대한 황무지이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이 땅에는 신기하게도 거대한 숲이 있다. 숲과 황무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조합이지만 오래전 이곳에 머물다 사라진 신 디아나 덕에 이러한 기묘한 풍경이 가능했다.
제국의 신력이 차차 약해짐에 따라 숲도 조금씩 사라졌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4할 이상 줄었다고 하나, 황무지의 숲은 여전히 건재했다.
“대신관이시여.”
에페소스의 거주 구역은 숲 바로 옆이다. 숲은 신전이 있는 장소라 하여 신관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황무지에는 거대한 그물이 있었다. 혹자는 벽이라 부르나 모양이 그물같이 생긴 데다 튼튼한 철로 만들어졌기에 그물이라 부르곤 했다. 이 또한 오래전 사냥을 즐기던 신 디아나가 남기고 간 산물이다.
에전에야 사냥을 위해 쓰였으나 시간이 흐르고 차차 숲이 사라지며 국경을 가르는 벽의 역할을 했다. 이 그물을 통해 제국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는 있으나,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키는 신관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디아나의 신관들은 서쪽을 지키는 방패가 되었다.
“윌터 놈들 말이더냐. 아무래도 우릴 말려 죽이려는 모양이군.”
그러나 디아나의 신관이 서쪽에 머물게 된 이유는 한 가지 더 존재했다.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청색 머리가 굽이쳤다.
“정확한 위치는?”
“그들은 덫을 피해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동시에 전진하더군요. 3일 전보다 더 가까워진 셈이지요.”
“수도로 보낸 놈은 도착했다더냐.”
그녀는 여성치고는 매우 낮은 목소리였다. 사냥의 신 디아나는 자신의 대신관을 여성으로 한정했다. 현 황제는 여성 신관을 탄압했으나 여성으로만 이어지는 신마저 어쩌지는 못하여, 수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서쪽에 유배했다. 대신관 또한 황제와 충돌하는 대신 서쪽의 방패가 되기를 받아들였다.
“네. 아울러 보고서가 도착했는데…….”
황제는 이들이 남성을 신관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그렇기에 현 디아나의 신관들은 혼성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습니다.”
“그래, 황궁에서 초대장 날아왔었잖아. 즉위식한다고. 근데 표정이 왜 그러냐?”
“그게……. 황녀께서 황제가 되신 듯합니다.”
“뭐?”
대신관 아탈란테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태자는 어쩌고?”
계승식이 있다고는 그녀도 들어 알았다. 황태자가 즉위할 것이 당연했다. 여성 후계자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황제가 여성 후계자를 즉위하게 두었다니?
“선황은 서거하셨습니다. 황태자의 손에 살해당하셨다는 모양입니다…….”
보고하던 신관이 두루마리를 쥔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 대신관이 혀를 찼다.
“개판이군.”
아들이 아비를 살해하고, 막내 황녀가 오라비를 몰아내고 황좌를 거머쥐었다는 건가?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최강의 후계자를 이길 만한 힘이 있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런 이가 지금까지 금기시되던 여성 신관이라…….
“멋진 개판이야.”
대신관이 탁자를 치며 킬킬 배를 잡고 웃었다.
“이봐. 솔직히 말해 봐. 너희 나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냐?”
대신관이 거대한 활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글쎄요. 3일이 최대이지 말입니다.”
“그럼 안 되겠네. 수도에 한번 가 봐야 할 성싶은데…….”
대신관이 중얼거리며 천을 걷어 냈다. 창문을 대신한 천이 걷히고 황무지가 드러났다. 아탈란테는 거대한 활을 조준해 무성의하게 당겼다 놓았다. 그 순간 그녀의 귀에 억, 하는 단말마가 들렸다. 옆에 있던 신관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에 말에서 떨어지는 윌터의 병사가 보였다.
“척후병이군요.”
보통이라면 보이지 않겠으나 신관의 신체 능력은 월등했다.
“그래. 결계가 사라지고 더욱 판을 치고 있네.”
“이대로라면 거주 구역까지 금방입니다.”
“뭐. 아직까지는 유능한 전략가 덕에 버티고 있으니 망정이지.”
황무지 너머 언덕에 윌터의 군사가 나타난 지 딱 5일째였다. 그들은 새까맣게 몰려와서는 어쩐 일인지 바깥에서 서성였다. 아탈란테는 그들이 결계 밖에서 대기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들이 무엇을 기다렸는지는 금방 나타났다. 얼마 뒤 결계가 사라졌으니까.
‘그것도 계승식에 맞춰서 말이지.’
그러나 에페소스의 반항이 만만치 않아 그들은 섣불리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신의 그물 덕택이었다.
“저 그물을 이렇게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지.”
“여신의 안배이지요.”
“흥. 여신께서 이딴 일에 쓰라고 주셨겠느냐. 신성 모독이니라, 인마.”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이 먼 황무지를 향한다. 결계는 사라졌으나 신의 힘은 여전히 땅에 머물러 있다. 이는 아주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윽고 황무지로 수십의 무리가 나타났다. 조금 전 척후병이 속했던 척후 부대이리라.
아탈란테가 다시 활을 들었다.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 순간 그녀의 청색 눈에서 자색 불길이 일었다. 비가 내렸다. 그녀가 선택한 땅에 화살이 비처럼 내렸다. 자비 없는 화살이 침략자에게 벌을 내린다. 성물 녹틸루카의 능력이었다.
“대신관님의 활은 언제나 백발백중이로군요.”
“아니. 하나…… 아니, 둘 놓쳤다.”
그녀는 한 부대를 전멸하고도 후련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이상해.’
그녀가 활을 쏜 순간 묘한 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단 두 사람을 맞추지 못했다.
‘대체 이 힘은 뭐지. 내 힘을 무위로 만들다니.’
가장 후미에 있던 두 사람. 둘 다 새카만 망토를 입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주신의 힘이 느껴진 거지?’
힘을 무로 만드는 힘은 하나밖에 없다. 모든 힘을 통제하는 힘. 하지만 어째서 윌터 왕국에서 후계자의 힘이 느껴진단 말인가?
“……보고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활을 내려놓은 그녀가 중얼거렸다. 길게 땋은 청색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서 그를 불러와.”
“누굴 말씀하십니까?”
“그 왜, 귀신같이 좋은 방법 생각해 내는 걔 말이다.”
“네!”
아탈란테는 신관이 놓고 간 보고서를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나저나 황제란 말이지…….”
디아나의 신관은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다. 이곳에 그들을 유배한 이가 황제였으니까.
‘버티는 건 최대 한 달.’
그러나 어차피 군대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황제를 알현해야 한다. 그녀가 됐든, 그녀의 수하가 됐든.
“황제가 여성이라. 중앙의 고리타분한 놈들이 쌍수 들고 반대하지 않으려나.”
그녀가 저 멀리 윌터의 진영을 보며 중얼거렸다.
* * *
나는 불현듯 눈을 떴다. 벌떡 상체를 세우자 등 뒤가 흥건했다. 잔뜩 긴장했을 때나 나올 법한 식은땀이다. 나는 이마를 닦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뭐였지?’
분명 누군가 나를 불렀는데, 그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늘을 보자 깜깜한 밤이었다. 이런 시간에 나를 부를 이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계승식 이후 어수선한 시기라 경비가 더욱 강화된 지금에는 더더욱.
“무슨 일인가.”
함께 누워 있던 아모르가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고개를 저었다.
“분명 누군가 불렀는데……. 잘 모르겠어요. 환청인지.”
탁자에 놓아둔 일기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루스벨라인가?’
그러고 보니 각성 전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지 않았던가.
‘플뢰온이 죽던 날,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에 울렸지.’
일기장을 통해 내게 말을 전달할 수 있는 걸까?
“환청이라, 신관에게 일어나는 일 중 우연은 없다는 말이 있지.”
잠시 고민하던 아모르가 말했다.
“그럼…….”
“보통 신관이 듣는 말은 신의 뜻이다. 신이 남긴 말이지.”
하지만 내게 힘을 준 두 신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땅에 깃들고, 하나는 수정에 녹았으니까.
“사람의 음성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를테면 성물을 통해 남긴 거라거나.”
“그럴 가능성도 있지. 나만해도 식물을 통해 뜻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가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제 진정이 좀 되었나?”
“아…….”
그의 손이 눈가를 어루만진다. 눈을 스친 손 뒤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네. 괜찮아요. 이런 것쯤이야 익숙한걸.”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난감한 듯 눈을 조금 찌푸렸다.
“이런. 잘 안다 이건가.”
이내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며 그가 머리를 붙였다.
“내가 그런 말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날숨이 코를 간지럽혔다. 그는 코끝에 가벼이 입을 맞추고는 이어 말한다.
“속상하다는 것도.”
“으응, 미안해요. 읏?”
그가 그대로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맨살에 그대로 닿는 숨에 움찔 어깨가 떨렸다.
“미안하다니. 그럼 하던 일, 마저 해도 되겠지?”
“자, 잠깐만. 아모르.”
“싫어. 못 참아.”
레베카가 준비한 침의는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이었다. 물론 그녀는 누군가 내 어깨를 파고들 거라고는 생각 못한 채 주었겠지만.
“잠깐, 잠깐잠깐. 잠깐만요!”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가까스로 그의 입을 막고 눈을 마주했다.
“지금 몰래 들어왔다는 자각은 있는 거죠?”
바깥에는 호위를 맡은 순찰대가 있다. 당연히 옆방에는 레베카가 있고.
“물론.”
그가 입을 가로막힌 그대로 눈을 야살스레 휘었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하고 있지 않나.”
그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아, 아모르가 이런 표정도 할 줄 알았나?’
당황하는 사이 손이 미끄러지며 그의 손에 안착했다. 손끝에 입 맞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다른 손이 허리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붙들었다. 그는 입술을 가져다 대며 치마 아래 드러난 하얀 다리를 쓸었다.
“내일은 홀에서 회의가 있지?”
“네? 으읏, 네.”
“그런데, 언제까지 내게 존칭을 붙일 셈인가?”
“아…….”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전까지 황녀였다면, 이제는 황제였다. 내 쪽이 그보다 신분이 높았다. 그가 목 아래 입술을 눌러 붙였다. 따뜻한 숨이 간질간질하다. 생경한 감각에 뺨이 발긋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 그대는 이제 눈앞의 황자보다 높은 분이 아니신가.”
“……그렇지만 자각이 안 드는걸. 내내 수습만 했으니까요.”
“이젠 익숙해져. 얼른.”
“아, 음. 그럴게…….”
어설프게 말꼬리를 늘린다. 그러자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내 입술을 톡 쳤다.
“따라해. 그러겠다.”
“그러겠…… 다?”
“옳지. 그리고 사랑한다.”
“사랑한…… 아모르?”
“그래.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만족한 듯 눈을 접었다. 이내 입술이 내려앉았다.
“언제 어디서든 함께하마.”
입맞춤이 녹진하게 입술을 녹였다. 그가 잠시 떼어 내며 속삭인다. 그리고 다시 이어졌다.
“사랑스러운 로제. 나의 황제시여.”
* * *
다음 날. 계승식이 일주일이나 흐른 뒤, 겨우 홀의 정비가 끝나고 드넓은 홀에 다시 한 번 신관이 모였다.
“혼돈의 신관과 손을 잡다니요!”
이전보다 신관의 수는 줄었다. 그날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 자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날과 달리 중요한 대표 격 인사만 모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관 귀족 외에도 비신관 인사들도 함께였다. 행정직 요직 중에는 더러 비신관 귀족이 있었다.
‘비신관은 배려하지도 않는군.’
그들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신력을 가시화시키는 몇몇 신관 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은 역사 내내 제국의 반역자였습니다. 언제고 황실의 뒤를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자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런 자들과 손을 잡다니 인정할 수 없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이는 창과 방패의 대신관이었다. 이들은 검의 신전과 함께 무력 집단의 일이순위를 다투는 신전이었다.
“거기다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신전인 눈과 바다의 신전이 혼돈의 신관이었다니, 한 번 배신하는 것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습니다. 폐하, 이런 배신자들을 어찌 믿으십니까? 이들이 언제 다시 배신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나이 든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의 신 이나코스의 대신관이었다. 그 옆에서 함께 끄덕이는 자는 안개와 새벽의 신 아우로라의 대신관으로 둘 모두 온건한 성향을 지녔다.
나는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신관은 아모르와 헤르난인 걸 알려 줄까, 아니면 혼돈의 신관이 더는 배신할 일은 없다고 말할까 고민했다.
‘들을 얼굴이 아니네.’
좀 더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그러자 폰투스가 앞으로 나섰다.
“눈과 바다의 신전 대표로서 말씀드리지요. 먼저 저희가 앞으로 황실을 등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나를 비롯한 혼돈의 신관 전체가 바라는 후계자께서 황제가 되셨으니 말입니다.”
저주가 풀리지 않은 그는 여전히 소년의 모습이었다.
“아니면 스틱스강에 대고, 맹세를 해 드오리까?”
그러나 누구도 그를 얕잡아 보지 못했다. 눈과 바다의 신관만이 가진 서늘한 기운이 그의 주변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누군가의 팔다리를 얼리는 것이 먼저일 것 같은데.”
그 말과 동시에 쩌저적, 회의 탁자에 얼음 꽃이 피었다.
“탁자 얼리지 마. 폰투스.”
낮게 주의를 주자, 폰투스가 실례했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날 향해 살짝 낯을 풀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이 소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창과 방패의 대신관에게 들을 줄은 몰라서 말입니다.”
“무어라?”
“반역자가 반역자를 매도하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 아닙니까?”
그가 서늘하게 시선을 빛냈다.
“우리가 오래전에 실패했다면 그대들은 최근에 실패한 일일 텐데.”
그 말에 창과 방패의 대신관이 숨을 삼켰다. 이 자리 대부분은 2황자의 난을 따랐던 신관이었다. 폰투스는 좌중을 돌아보며 힘 있게 말했다.
“스스로 떳떳한 자, 혼돈의 신관을 향해 검을 던지시지요.”
언젠가 그는 더는 황제의 만행을 두고 보지 못했기에 혼돈의 신관이 되었다 했다. 그러니 가엾은 이들을 불쌍히 보아 달라 말했다.
“그대들 대부분은 이 제국 뒤에 추악한 진실을 알았을 터. 하면 최악의 황태자가 즉위하는 것이 옳았던 것인지?”
폰투스가 조용조용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작은 목소리는 공간을 압도했다. 한마디로 공간을 지배한 그는 돌연 시선을 한 쪽으로 옮겼다. 시선을 따라가면 한 사내가 있었다.
“그대는 어찌 생각합니까. 지혜의 대신관.”
그러자 시선을 받은 사내가 머리를 들었다.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아주 앳된 사내였다.
‘저런 이가 대신관 중에 있었나?’
“갑자기 제게 물으실 줄은 몰랐으나 질문을 들었으니 답을 해 드려야겠군요.”
굳이 앳되었다 표현한 건 나이가 지긋한 신관과 대신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아모르와 레베카가 주었던 정보를 뒤적이다가 알아냈다.
‘죽은 율리안의 외조부를 이어 대신관이 되었다고 했지.’
나는 툭툭 옥좌를 두드려 레베카를 불렀다.
“새로 지혜의 대신관이 된 사람은 죽은 대신관의 동생이라 하지 않았어?”
작게 눈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나이에 의문을 느끼셨겠지만 동생 맞습니다. 죽은 이의 부친이 뒤늦게 나이 차가 큰 늦둥이를 보았다 합니다.”
소리 죽인 의문에 레베카가 대답했다.
“사생아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지혜의 대신관의 부친이 아주 늦게 아들을 하나 더 봤다는 건가.
‘지혜의 대신관도 핏줄에서 핏줄로 이어지는 힘이었지.’
강한 힘일수록 핏줄로 연결된다. 3등위 신인 지혜의 메티스 또한 그러했다. 반란으로 여태 황가를 제외하면 제일 지위가 높았던 지혜의 대신관 일가는 풍비박산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살아남은 자 중 그나마 가장 힘이 강한 자가 이어받았겠지. 하지만 저 얼굴로 율리안 할아버지 격이라니…….
“더구나 신관은 대부분 젊음을 오래 유지합니다.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많은 이입니다.”
그럼 저기 나이 든 대신관은 왜 저러하느냐 물으려다 말았다. 생각해 보니 오래 살았겠구나 싶었다.
“폐하.”
지혜의 대신관이 나를 불렀다.
“지혜의 대신관 디케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조금 전, 나와 레베카의 대화가 그들 귀에도 들렸겠지만 모른 척할 거다. 이게 다 권력이다. 내가 고개를 까딱여 허락하자, 안경을 걸쳐 쓴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저 안경이 날카로운 낯을 가리기 위한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준비에 돌입해야 할 시기입니다. 한시가 바쁜 시간이지요. 신은, 혼돈의 신관과 손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다 봅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소리인가. 나는 계속해 보라는 듯 남자를 응시했다.
“한데, 신에게는 약간의 의문이 있습니다. 긴 역사 동안 제국은 장자 계승이 원칙이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후계자가 장자였음은 부정할 수 없지요.”
나를 따르는 이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지만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후계자가 없던 때에는 부득이하게 강력한 신관이 잠시 제위에 올랐다고 하나, 폐하의 위로는 아직 살아 계시는 황자님께서 계시지요. 그리고 한 분께서는 강력한 신관입니다.”
“나 말인가?”
옥좌 오른쪽에 편히 기대어 서 있던 아모르가 나른하게 말을 던졌다. 아모르의 얼굴에 미미하게 짜증이 어렸다.
“저런 황자님, 언짢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대신관은 아모르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시 나를 향했다.
“폐하, 저는 원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명하신 황제께서는 지혜의 대신관이 재판을 함께 관장함을 아실 터입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나 저희는 완전히 원칙을 무시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봐, 지혜의 대신관. 그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지금껏 침묵하던 그라니우스가 끼어들었다.
“저런. 힘의 대신관께서는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는 군요.”
“그래. 전쟁을 앞두고 시시콜콜 하찮은 시비를 거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데.”
“시비라니, 그리 들렸습니까? 그럼 좀 더 명확하게 말해 볼까요.”
지혜의 대신관은 그라니우스가 부숴 버린 탁자에서 눈을 떼어 내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는 다갈색 머리를 가진 남성이었다. 얼핏 햇살에 비친 머리칼이 금빛 줄기를 품은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안경 아래 보인 눈은 서늘하여, 계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법전에는 대원칙이 적혀 있습니다. 여성은 황제가 될 수 없다.”
모든 이가 숨을 삼켰다. 설마하니 내 즉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가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선황께서 정하진 원칙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이미 나를 폐하라 부르면서 나의 정통성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나를 끌어내릴 방법은 없다 봐도 좋았다. 순전히 조롱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바쁜 시국임을 강조하면서. 묻고 싶은 건 마음껏 묻는구나.”
레베카가 조언했다.
<황제가 되셨으니 몸가짐과 행동은 더욱 달라지셔야 합니다.>
<어떻게?>
<위엄을 가지셔야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