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두 형제와 최악의 황제 ⑵
돌아가는 짐마차는 침묵에 잠겼다. 아니,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순찰대도 묵묵히 옆을 지키는 거겠지.
몇몇 이들은 슬쩍 눈치를 보기도 했다. 소릭스도 그중 하나였다.
“황녀님, 다음에도 탑을 방문하시겠습니까?”
“글쎄……. 소릭스 그보다 2황자가 자신을 따랐던 신관들을 설득해 주겠다는데. 믿어도 될까?”
물론 그가 직접 움직일 수 없으니 서신을 작성해서 보내겠다고 했지만.
<가엾은 이들이니, 나는 도와주고 싶어.>
율리안의 세력은 죄질이 심한 자를 제외하면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소릭스는 잠시 생각을 해 보는 눈치였다.
“그분의 인품을 생각하면 이 상황에서 황녀님을 속일 이유는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꿍꿍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만약 재방문 시에는 수월할 거라고 자신했다.
“로도스가 최면을 걸어 두었기에 한동안 황녀님 얼굴을 기억하는 자는 없을 겁니다. 한동안은 다시 방문하셔도 문제없을 겁니다.”
내가 율리안을 만나는 동안 소릭스와 메타가 순조롭게 탑을 정리했던 모양이었다.
‘한동안은…….’
마지막 순간 율리안이 마음을 바꾼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율리안에게 계승식에 대해 알려 주었다.
<폐하께서 형님께 황위를 물려주신다고?>
그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황위를 놓쳐서 아쉬운 마음은 잠시였고, 이내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을 따르는 이를 설득하겠다 제안했다. 어쨌거나 그도 걱정됐던 모양이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내 궁이었다. 소릭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돌아간 궁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나보다 먼저 들어왔던 건지 레베카가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하는 대신 레베카 옆에 그림처럼 서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아올레시아?’
화사한 드레스, 연한 보랏빛 머리칼을 틀어 올린 사람은 아올레시아였다.
“오랜만이구나.”
그녀는 표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놀람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뜻밖에 미소했다.
“어미가 딸을 만나러 오는데 이유가 필요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임을 나도 아올레시아도 알고 있다.
“저를 이 궁에 버려두고 한 번도 보지 않으셨던 분이 말인가요?”
“날 원망하니?”
난 고개를 저었다.
“그렇구나. 네게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찾아왔단다.”
아올레시아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시간이 지체되어서 오늘은 힘들 것 같구나. 다시 한 번 너를 찾으마.”
그녀는 고아하게 고개를 돌려 내게 인사했다.
“잠깐, 하려던 말이 뭐였는데요?”
현재 아올레시아는 수많은 열쇠를 쥐고 있는 이이기도 했다.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는 잠시 놀란 듯 이쪽을 향했다.
“하려는 말보다는, 제안에 가깝겠구나.”
그녀가 시선을 떨어트리며 읊조렸다.
“제안?”
“너를 가르쳐 주마.”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각성했지?”
귓가로 속삭이는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걸 아는 거지?’
아올레시아가 이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듯 내 어깨를 잡았다.
“죽음의 대신관은 후계자가 탄생했을 때 알 수 있단다.”
“알 수 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이곳에는 눈과 귀가 너무 많구나. 그러니 다음엔 조용한 장소를 알려 주겠니?”
“……그러죠.”
아올레시아의 꿍꿍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말처럼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 서신은 내 궁으로 보내렴.”
그녀는 손을 놓고 느리게 뒤로 물러났다.
“다음에 보자꾸나.”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멀거니 응시했다. 발걸음에 소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마치 그늘처럼.
“……어떻게 된 거야?”
“제가 막 돌아왔을 무렵에 찾아오셨습니다.”
레베카가 차분히 대꾸했다. 그녀가 돌아온 시간을 들으니, 얼추 세 시간이 넘었다.
‘그동안 날 기다렸다는 건데.’
내 각성은 극비였다. 그러니 아올레시아의 말은 진실이겠지. 불쑥 호기심이 들었다.
‘다시 만나면 자세히 알게 되겠지.’
그녀가 돌연 나를 가르치겠다 말한 이유를.
* * *
“대신관의 의무란다.”
며칠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궁금해 하던 걸 풀어 주었다.
“의무?”
“그래.「죽음의 후계자」가 탄생했을 때, 대신관은 극진히 모시지.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니까.”
“당신보다 더요?”
“물론이란다.”
그녀는 옅게 미소했다. 눈을 휘어짓는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언제부터 내 방이 비밀 회동을 가지는 장소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아모르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는 심기가 매우 불편한 얼굴이었다.
“불만 가지지 않기로 했잖아요.”
“장소를 내주겠다 했지. 그런 약속은 하지 않았다만.”
“흐응 안 속네.”
아모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그러다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보지 말거라.”
“왜요?”
“심장이 유난이지 않으냐.”
그는 턱을 괸 채로 픽 웃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우니.”
이번엔 내 쪽에서 말을 잃었다. 아니, 좋긴 한데……. 아올레시아가 빤히 보는 앞에서는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민망함을 느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던 아올레시아가 찻잔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우아한 입술을 떼어 냈다.
“내가 바로 봤다면 네가 택한 이는 저이니?”
“네, 맞아요.”
아올레시아가 나와 아모르를 번갈아 봤다.
“조금 놀랍구나. 난 네가 롬의 아이를 택할 줄 알았는데.”
“데인 말인가요?”
“그래. 너는 그 아이와 어린 시절에 접점이 있었으니까. 이것도 잊은 모양이구나.”
아올레시아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잊어버리렴. 쓸데없는 얘기니.”
현재 이곳은 아모르의 방이었다. 이 전날 아올레시아의 요청대로 조용한 장소를 찾았지만 녹록지 않았다. 일단, 결계를 칠 줄 아는 신관이 필요한데 아올레시아는 많은 사람이 있는 장소를 거부했다.
순찰대를 제외하자 자연히 남은 건 아모르였다. 아니 아모르 말고는 없었지. 그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결국 방을 내어줬다.
‘그런데 아모르는 왜 아올레시아를 언짢아하는 거지? 두 사람은 접점이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시작하자꾸나. 죽음의 힘이 어떤 힘인지 알려 준 적 있지. 기억하니?”
“불사.”
“그래.”
아올레시아가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딸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앳된 모습이었다. 아올레시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팔을 뻗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작은 단검이 들려 있다.
“어떤 것을 할 수 있느냐.”
“자, 잠깐.”
채 말리기도 검이 살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무슨 짓이에요?”
“죽음의 힘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힘. 그리고 이렇게.”
아올레시아가 눈짓했다.
“빠르게 수복한단다.”
흉측하게 벌어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흉터도 없었다. 새하얀 피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볼 것 없이 너도 할 수 있단다. 한번 해 보겠니?”
아올레시아가 단검을 내밀었다. 그녀의 표정은 몹시 태연해서 손에 들린 게 단검이 아닌 꽃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미쳤군.”
챙강. 어디선가 뻗은 넝쿨이 아올레시아의 검을 떨어트렸다.
“정상이 아닌 방법을 가르치고 있어.”
아모르가 아올레시아를 노려봤다. 어느새 넝쿨이 내 손목을 부드럽게 당기고, 휙 시야가 흔들리며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이건 죽음의 신전 내부의 일. 4황자께서는 관여하실 수 없습니다.”
아올레시아가 짐짓 눈을 휘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하던 것과는 다른 목소리였다.
“어차피 저 아이도 고통을 느끼지 않아요.”
“뭐?”
아모르가 정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난 난감히 웃으며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괜찮아요. 아모르.”
이걸 말하지 않았던가. 타이밍이 이상하게 됐다.
‘미래를 안다는 거나 죽음은 얘기해 놓고 왜 이걸 말 안 해서.’
일단은 수업이 먼저였다.
“그래서요? 아프지 않은 건 나도 알고 있어요. 앞으로는 수복이 빠르다는 건가요?”
“그렇단다.”
어쩐지 얼마 전 데로스가 목을 졸랐을 때 멍이 너무 빨리 사라진다 싶었다.
‘아모르의 약 덕분인줄 알았더니 이런 이유도 있었나.’
나는 아모르의 품을 벗어나 일어났다. 아올레시아를 찬찬히 바라보다 말고 팔찌를 벗었다. 빛이 휘감고 나는 각성 뒤의 모습으로 그녀를 마주 봤다.
“그래요. 난 또 무엇을 할 수 있죠?”
아올레시아는 대꾸가 없었다. 그저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닮았구나.”
“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신력은 충분한 것 같구나.”
“하지만 사용할 수가 없어요.”
“네 각성은 남들과 달랐어. 그러니 신력을 다루는 방법도 보통과는 다르지 않겠니.”
나를 보는 아올레시아의 눈에는 반짝이는 짙은 보라색 아지랑이가 가득했다. 원래 자색 눈동자인 그녀였지만 더욱 고요하고 그윽하게 보였다.
“신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데요? 그리고 나는 어떡해야 쓸 수 있죠?”
“신력은 기운이란다. 물리적인 것도 정신적인 것도 전부 가능하지. 너는 각성할 때 무엇을 생각했니?”
“……간절히 바랐어요.”
나를 절망하게 만든 이들의 불행을 그보다도 나와 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그렇구나. 그럼 너는 힘을 쓸 때도 간절히 염원하렴.”
소릭스가 나를 가르쳤을 때, 나는 그의 말을 반절도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히 그가 시키는 것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 수첩을 잡아 보겠니?”
그러나 나는 단 한 번 성공했었다. 일기장을 잡은 채 간절하게 원했을 때였다.
“일기장을요?”
“그래. 너는 그것을 잡는 편이 훨씬 수월할 거야. 지금은 말이다.”
지난 시간에도 일기장은 언제나 내 염원에 응했다. 간절히 바랐을 때 이것은 빛을 냈다.
눈을 뜨자, 은은한 보랏빛 기운이 나를 감싸며 휘휘 돌고 있었다. 기운이 뭉쳐서 나비의 형상을 했다. 어느새 수십 마리의 보랏빛 나비가 나풀나풀 움직였다.
“나비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동물이지. 죽음의 신의 사자이기도 했단다. 하지만 너는 이뿐만이 아니구나.”
아올레시아의 말처럼 보라색 나비 사이를 가로지르는 빛무리가 있었다. 선연한 금빛, 카스토르가 쓰던 빛을 떠올리게 했다.
“보이니? 네가 두 가지 힘을 가졌기에 힘의 형태도 두 가지를 띠었어.”
그녀는 내게 나비들로 모양을 만들거나 퍼트리는 등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게 했다.
‘나비나 저 금색 기운이나 움직이기 어려워.’
오래 하자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만.”
아올레시아의 눈동자는 더욱 짙어졌다. 문득 그녀가 보는 나의 눈동자도 같은 색일까 궁금했다.
“이제 넌 이 힘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연습을 하렴. 금세 익숙해질 거란다.”
“알았어요.”
아올레시아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려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의 흉터를 더듬었다.
“네가 가진 죽음의 힘은 내가 넘긴 것이지.”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후회하나요?”
“글쎄. 네가 「죽음의 후계자」로 각성할 줄 알았다면, 힘의 일부를 넘겨주지 않을 것을 그랬구나.”
나를 살리기 위해 흉터를 만들었던 사람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오직 내게만 이런 미소를 보였다.
“이제 와선 전부 소용없는 말이겠지.”
“사람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참 아이러니하게도. 주신의 힘은 미래를 읽고 미래를 알게 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죽음의 힘도 마찬가지다. 미치지 않는 것을 막았지만 처음부터 불행을 막아 주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죽음의 힘을 자각했다면 카스토르의 검 앞에서 비명을 삼켰을까. 이제는 생각해도 모두 소용없는 일.
“이 수업이 끝나고, 이곳을 나가면 난 너와 적이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요?”
“나는 황제가 바라는 것을 도울 거니까.”
아올레시아의 음성은 고요했다. 동시에 그녀의 창백한 낯이 한순간 선뜩한 미소를 그렸다. 고운 자색빛 눈에 선연한 증오가 피어올랐다.
“이유를 물으면 알려 줄 건가요?”
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지치고 건조한 미소 속에 증오를 드러낼 뿐이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흉터를 쓸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게 뭐지?’
몸속으로 뜨거운 것이 밀려들었다. 터질 것같이 몸을 부풀린 것은 몸속을 멋대로 타고 흘렀다. 그저 느낌뿐이 아닌지 어느새 나와 아올레시아의 머리칼이 허공에 나부꼈다. 물결처럼 이지러지는 머리칼 사이로 그녀의 눈이 보였다.
아모르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다가오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한 건 아닌가 보네.’
나를 꽉 채울 것 같던 기운의 느낌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아올레시아가 뒤로 물러났다.
“나는 대부분 전해 준 것 같구나.”
“전하다니, 무엇을요?”
아올레시아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마치 진짜 표정을 가리듯 그녀의 웃음은 안개같이 희미하기 그지없었다.
“이만 가 보마.”
그녀가 돌아가고 방에는 나와 아모르만 남았다. 궁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아모르가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피곤하지 않아요?”
난 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가 눈썹을 휙 휘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오히려 피곤한 쪽은 너 아닌가? 신력을 오래 쓰면 체력도 소모돼.”
“그렇구나. 근데 체력이 소모됐다면 더더욱 저는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방에 가서 쉬란 말이 아닌가? 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무슨 생각인지 아모르가 피식 웃었다.
“자고 가든가.”
“……농담이 늘었네요.”
“농담 아닌데.”
그가 잡은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나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올려다봤다. 그가 고개를 깊게 숙여 나를 바라봤다. 코앞에 눈동자가 있었다.
“내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은 몰랐군.”
아마 이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단 것을 말할 터였다. 나는 찔린 듯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고의는 아니에요.”
정말이다. 겨를이 없었을 뿐이지. 아모르는 입꼬리를 비틀며 내 코끝에 입을 맞췄다.
“어쩐지 넌 함부로 몸을 굴리고 소중히 여기지 않더라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뭐, 이제는 상관없다.”
“아모르?”
“다치지 않게. 내가 지킬 테니까.”
그가 길게 입을 맞췄다. 눈을 뜨면, 그의 눈동자가 오래도록 내게 머물렀다.
“혹시 그동안 몸에 상처가 남거나 흉이 지지는 않았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칼에 맞은 상처는…… 시간이 돌아가면서 지워졌지.’
자잘한 상처는 아주 희미하게 남았다. 아모르가 약이라도 주려나 싶었다.
“오래전에 금지된 파수꾼에 물린 거요. 하지만 치료 신관의 치료를 받아서 희미하게 남았을 거예요.”
“그런가?”
그날을 기억하는지 아모르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 오라버니가 와서 치료해 줬잖아요.”
그날 그는 평생에 있는 단 두 번의 기회 중 하나를 썼었지. 나는 사랑스럽다는 듯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또 있냐구요? 음……. 오래전에 건물 잔해에 깔리고 등에 상처를 입었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치료 신관의 치료를 받아서 거의 안 남았을 거예요.”
“그런가?”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뺨을 만지는 내 손등을 배회했다.
“한번 보지.”
“……네?”
“농이다.”
깜짝 놀라 반문하면, 그는 어딘가 심술이 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내가 없는 곳에서 너무 다쳤어. 그리고……. 다른 남자와 있을 때 다쳤지.”
그의 시선이 꽂힐 듯이 나를 향했다.
“질투해요?”
“널 지키지도 못한 무능한 놈들을 욕한 거다.”
그가 시선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못한 나에 대한 원망도.”
이내 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나는 그의 뺨을 강제로 돌려 날 보게 했다. 그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지금 같이 있잖아요.”
“8황비는…… 네 상대로 데인 로웰을 말했지.”
“네. 그랬죠.”
“하지만 네 옆에 있는 건 나다. 로제.”
나는 웃었다.
“맞아요.”
아모르는 그제야 안심한 듯 시선을 온순하게 늘어트렸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제 머리를 비볐다.
꼭 나 아닌 이에게만 털을 세우는 고양이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모르의 동물은 하얀 여우였지.’
북극여우처럼 털이 복슬복슬해 보였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아올레시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 같아요.”
“바로 봤다.”
“왜죠?”
그는 나 아닌 누구에게든 까칠하며 날 선 예민함을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하지만 아올레시아를 보는 시선은 이와 달랐다.
‘왤까?’
생각해 보면 그는 아올레시아의 친우였던 아벤타 공작 부인과 친분이 있었고, 2황녀였던 솔레트디언 공작 부인과도 친분이 있었다. 물론 그걸 친분이라 본다면 말이다. 아모르가 시선을 피하며 툭 뱉었다.
“네게 무심하던 이 아닌가. 너를 버린 사람이다. 이제 와 네게 잘해도 좋게 보이지 않아.”
나는 눈을 깜빡이다 입을 뗐다.
“장모한테 잘 보여야죠.”
“뭐?”
“농담.”
나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내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모르 표정이 귀여워서요.”
“끔찍한 농이었다.”
“미안해요.”
“아니, 됐어. 순간 정말 잘 보여야 하나 고민했으니까.”
“……네?”
그가 내 허리를 꾹 안은 채 삐딱하게 웃었다.
“너는 이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고. 자각하나?”
그러고는 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이후 이틀, 혹은 사흘에 한 번씩 아올레시아가 날 찾아왔다. 장소는 언제나 아모르의 궁이었다. 그녀는 첫날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은 하지 않았고, 내 훈련을 봐 주거나 조언을 던지기만 했다.
“이렇게 자주 와도 괜찮나?”
“어차피 황태자 오라버니나 헤르난은 제가 오라버니에게 자주 방문했던 걸 알아요.”
아모르는 여전히 아올레시아를 살갑게 대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가 소 닭 보듯 보는 관계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끔 아모르가 아올레시아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움찔했다. 어느 날은 입을 오므리며 ‘장’ 하더니 얼굴을 문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이제 가르칠 건 없어 보이는구나.”
아올레시아는 이젠 자신이 필요 없을 거라고 선언했다.
“계승식에서 보자꾸나.”
마지막이라서인지 그가 아름답게 미소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났다. 난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다시 가져왔다.
“……조심히 가세요.”
그녀가 나를 보더니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돌아선다. 다시 돌아온 건조한 표정만큼이나 단호한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갔다.
“주인님, 눈과 바다의 대신관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며칠 뒤 레베카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발신인은 저 멀리 있는 대신관 폰투스였다.
“레베카. 이걸 숨겨 줘. 아니, 아니다. 태워 줘. 내용은 외웠으니까.”
“네.”
옷을 갈아입고, 오랜만에 만난 하녀들에게 치장을 받고서 밖으로 나가자 궁 앞에 순찰대가 도열해 있었다. 잠시 일렬로 선 이들을 보며 이제는 조금 멀게 느껴지는 풍경을 되새겼다. 도열한 검사들, 그리고 검. 그러나 그날과 다른 충성스러운 이들이 무릎을 꿇었다.
“갈까요?”
계승식 날이 밝았다.
* * *
거대한 홀. 나는 아직 이 홀의 이름을 몰랐다. 평생 다녀 본 곳이라고는 내 궁과 오라비 궁, 아모르 궁이 전부였다.
‘이전에 체쟌 왕자의 알현을 받았던 곳보다 더 크네.’
옆에서 레베카가 황궁에서 제일 큰 홀이자, 모든 신관이 모이는 대집회에 쓰이는 장소라 알려 주었다. 보통 예식이나 연회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면 이때는 연회의 주인일 경우다. 혹은 마지막으로 들어올수록 주인공이거나 주인공과 가까운 이들이다.
다시 말해 나는 황녀이니 내가 들어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반란으로 많은 수가 줄었다고 하지 않았어?”
“……수가 줄었지요. 이 중에는 죄질이 가벼운 자들도 참여했습니다.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했을 겁니다.”
소릭스가 대답했다.
“새롭게 황제가 되실 황태자 전하 눈 밖에 나선 안 될 테니까요.”
그는 호위로서 그라니우스와 순찰대들 대신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더불어 레베카도 아벤타 공작가의 자리가 아닌 내 시녀로서 옆에 서 있었다.
천천히 홀을 바라봤다. 막 들어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이곳의 기둥은 총 8개. 기둥의 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의자가 놓인 기둥은 단 두 개뿐이었다. 기둥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알았다.
‘꼭 나무처럼 생겼어.’
그리스식 기둥처럼 홈이 파여 있지만 아래위로 뻗는 대리석 모양이 흡사 멀리서 보면 나무 같았다. 천장에서 이어진 기둥의 선을 따라가면 끝에는 황제의 자리가 있었다.
‘이래서 가지라 부르는 걸까?’
다시 기둥을 봤다.
첫 번째 기둥은 거대한 참나무 같았다. 기둥 옆의 깃발에는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고, 깃발은 눈부신 황금색이었다. 기둥 앞에는 깃발과 마찬가지로 순금 의자가 있었다.
두 번째 기둥은 올리브 나무였다. 깃발에는 튼튼한 매듭과 올빼미가 그려져 있었으나 기둥 앞에 의자는 없었다.
세 번째 기둥의 깃발에는 날개 달린 모자가 그려져 있었고 깃발은 선명한 녹색이었다. 이 기둥에도 의자는 없었다.
네 번째 기둥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깃발에는 이삭과 잎사귀가 그려져 있었다. 기둥 앞에는 의자가 있었으나, 저 자리는 채워지지 않겠지.
‘아모르가 오지 못하니까.’
다섯 번째 기둥을 지나 여섯 번째 기둥을 바라봤다.
각각 붉은색과 갈색, 이리와 수레바퀴가 그려진 깃발 아래에 의자는 없었다. 그리고 한 곳에는 영원히 의자가 놓이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덟 번째 기둥은 어떤 나무일까. 앞의 깃발은 보라색이었다. 검은색 뿔잔과 나비, 수선화가 그려져 있다.
‘죽음의 신.’
황제에게는 7명의 황자가 있다. 한때 내 오라비라 믿었던 자들. 그러나 나는 황제의 딸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오래전 이곳을 떠났고, 누군가는 갇히거나 유폐되었으며, 누군가는 죽어서 다신 볼 수 없다.
마침내 남은 것은 첫 번째 가지와 여덟 번째 가지. 두 사람이었다.
난 나를 응시하는 수많은 시선을 지나 여덟 번째 기둥 아래 은으로 된 의자에 앉았다.
“긴장되시나요?”
말없이 앞만 바라보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레베카가 물었다.
“글쎄. 긴장보다는 조금 신기한 기분이다.”
더는 대중 앞에 나서는 게 꺼려지지 않는다는 게. 무섭지 않다는 게. 뒷말을 삼키며 웃었다.
“당신은 이 홀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가장 예쁜 사람?”
난 의아한 듯 반문했다. 각성 전 모습을 하고 있는 지금 그런 호칭이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레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런 아름다움만 있을까요? 사람은 때로 무너지는 집에서 아이를 구하는 사람에게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지요. 숭고함에 가까운 아름다움이겠지만요.”
그리 말하며 레베카는 모여 있는 이들을 응시했다.
“이 수많은 이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은 주인님이에요. 당신만이 제 삶을 바꿔 주었지요. 그런 분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요?”
“레베카에게 아름답다는 말은 훌륭하다는 뜻이구나.”
“네.”
그녀가 성장하지 못한 볼품없는 몸에 뺨에 긴 흉터를 가진 주인에게 말했다.
“아름다움은 당당함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어깨를 펴세요. 제 주인이십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을까? 아니다. 두려워하진 않았으나 체념했다.
“하하. 레베카 말이 맞네. 나는 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야.”
저 시선들이 나를 무엇이라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겠느냐고.
“잊었던 건 아닌데 다시 되새기게 됐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레베카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자리는 내 의자 뒤 왼쪽 자리였다. 시녀는 주인이 오른손잡이라면 오른쪽에 왼손잡이라면 왼쪽에 자리를 잡는다.
“레베카. 예식은 어떤 순서로 진행되지?”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입장 뒤, 황제 폐하께서 제국에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두 개의 신물이 등장한 뒤 연회, 쉼포시온이 시작됩니다.”
레베카가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연회가 무르익었을 즈음,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신물을 내리실 겁니다. 비로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시는 거지요.”
“그렇구나.”
식이 꽤나 오래 걸린다는 소리다. 나는 눈을 살짝 좁혔다. 이윽고 동쪽과 서쪽의 문이 닫혔다. 서쪽의 문은 황족만이 드나드는 문, 동쪽은 황족을 제외한 신관과 관리가 이용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이제껏 닫혀 있던 중앙의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살랑. 바람이 불었다. 실바람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 머리칼 사이로 막 들어선 두 사람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두 사람은 아니었다. 앞쪽의 노인은 작은 가마 위에 앉아 있었으니까.
‘저쪽이 황제인가.’
오래지 않은 날에 본 적 있다. 루스벨라가 있던 아카데미로 가기 전 알현했으니까. 황제는 그때와 비교하면 별다를 것 없어 보였다. 짧게 친 금발에 여전히 노쇠해 보이는 노인이었으나 금색 눈동자만큼은 형형한 빛이 돌았다.
‘아니다. 이전보다 탁해 보이기도 한 것 같은데…….’
황제가 앉아 있는 가마는 이쪽의 휠체어나 다름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2인승이란 거겠지. 그의 옆에는 아올레시아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쳐다봤으나, 시선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가마가 천천히 다가오며 사람들의 물결이 치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 파도를 만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마침내 가마가 기둥을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일 때였다. 가마 뒤에서 느릿하게 걸어오던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카스토르.’
새카만 머리칼을 높이 올려 묶은 황태자가 있었다. 가마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줄곧 나를 바라본 듯했다. 천장의 태양을 박아 넣은 것처럼 찬연한 황금색 눈동자가 오로지 나를 향해 있다. 마치 나 이외의 이는 보이지 않다는 듯이.
난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들라.”
사람들이 일시에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얼마 전 난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짐은 아주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몇몇 이들은 황제의 옆에 앉은 아올레시아를 보고서 눈을 찌푸렸다.
“짐은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내 손으로 막아서야 했지. 이런 천인공노한 일을 부추긴 자를 찾아내 처형대에 올렸다.”
처형대, 순간 스쳐 지나가는 선명한 기억에 이를 악물었다.
“유피테르의 천국에 반란자는 반기지 않는다.”
난 일그러진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분을 참았다.
‘율리안을 감싸기 위해 플뢰온을 처형시켰다.’
황제는 플뢰온을 살해했다. 반란에 실패한 이들이 받는 벌은 모두에게 공평해야 했으나 플뢰온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다. 이처럼 모든 일의 원흉이 눈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니, 지금은 참아야 해.’
눈을 뜨며 조금 전보다 차분한 눈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황제는 가마에서 내려섰다. 조금 굽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큰 키였다. 노쇠하지 않았다면 꽤 위협적으로 보였을 테지.
그가 의자 앞에서 멈춰 섰다. 이곳의 모든 사람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자리였다.
“다행히 악독한 반란자는 지하 가장 아래에 구금되거나 모조리 처형당했지. 조금 어수선했으나 다시 평화를 되찾으리라 믿는다.”
황제가 천천히 좌중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웃었다.
“이전처럼. 제국은 평화로울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황제의 말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반란을 제압할 만큼 그의 힘이 건재하니 다시는 반란을 용인치 않을 것이다.
“두 번은 허락하지 않는다.”
회장은 고요했다. 분위기는 돌을 내려놓은 듯 무거웠다. 황제도 이를 알았는지 표정을 풀어냈다.
“이런 짐이 말이 길었군.”
황제가 착석했다. 아올레시아가 당연하다는 듯 그의 옆에 앉았다.
“오늘은 몹시도 즐거운 날이 아닌가.”
오만한 군주의 미소였다. 그러나 가까이 있던 나는 알았다.
‘눈이 웃고 있지 않다.’
입술을 끌어 올렸으되, 황제의 눈은 건조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대중을 응시한다.
“그만 식을 시작하지.”
황제의 눈짓에 기다렸던 시종이 누군가를 안내했다.
“오늘 이 자리를 비운 지혜의 대신관 대신 이 위대한 예식을 진행하게 될 풍요의 여신 키벨레의 종입니다.”
하늘하늘한 튜닉을 걸친 신관이 말했다.
“이 자리에 모두 모인 신관을 대신해 계승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지혜의 대신관, 율리안의 외조부였던 이는 사망했다. 그 자리를 동생인 이가 맡았으나 이 자리에 나설 수 없음이 당연했다.
‘반란을 일으킨 신전이니까.’
황제는 이처럼 반란을 주동한 신전이라도 극소수의 신관은 살렸다. 명맥을 끊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황제의 앞에는 어느새 커다란 제단이 솟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없었던 것인데, 신력을 이용한 듯했다.
시종들이 제단 위로 처음 보는 잎사귀와 각종 과실, 그리고 천에 돌돌 묶인 어린 양을 바쳤다. 황제가 제단을 보며 무어라 웅얼거리자, 제단 옆의 땅이 솟구치며 그 사이로 새파란 구슬이 드러났다.
신비로운 빛이 요동치는 수정. 언젠가 아올레시아와 보았던 수정과 비슷한 색임을 깨달았다.
“저건 제국 지하에 있는 수정의 일부입니다. 계승식에서 일부만 드러내 제를 올리지요.”
레베카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황제 폐하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시겠습니다.”
풍요의 신관의 말과 함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를 올린다니?”
“황제는 주신과 함께하는 자리이므로, 그 자리가 바뀔 때에는 주신께 제를 올려 허락을 구합니다.”
레베카가 속삭여 대답했다.
“황실이 건재하다고 보이는 거예요.”
이어 함께 들었는지 소릭스가 끼어들었다.
“제를 올린다고는 하나 황제의 신력을 선보이는 자리나 다름없어요.”
그의 말처럼 황제가 제물에 손을 뻗었다. 그 손이 기이한 황금빛에 휩싸인다. 어느새 그는 손에 짧은 검을 쥐고 있었다. 황제가 손에 쥔 단검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것은 번쩍 번개처럼 변해 제단에 꽂혔다.
매애애애애―
어린 양이 길게 울었다. 목이 꺾인 양은 다신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양의 피가 과실과 잎을 적신다. 그 순간 눈부신 황금빛이 회장을 지배했다.
‘눈부셔.’
눈을 가리며 가까스로 뜨자, 춤을 추는 아지랑이가 보였다. 마치 태양을 가져온 듯 선연한 빛이 아름답게 춤을 추었다. 마치 황금의 시대가 도래한 듯 빛은 찬란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빛이 사그라졌다.
“……너무 약합니다.”
소릭스가 중얼거렸다.
“약하다니?”
“본래 주신이 신관이 내는 신력은 이것보다 훨씬 찬란합니다. 이 홀을 가득 메우고 온종일 버틸 만큼요. 하지만 지금은…… 전대의 반도 되지 않아요.”
“폐하의 힘이 약하다는 거야?”
“그 정도가 아니에요. 황녀님.”
소릭스는 다시 회장을 지배한 빛을 보며 말했다.
“저는 보입니다. 이건 매미의 울음소리처럼, 반딧불이의 빛처럼, 마지막이기에 아름다운. 슬프고 처연한 빛이에요.”
어느새 소릭스의 눈은 선명한 보랏빛을 드러냈다.
‘힘까지 사용해 보았다면 거짓이 아닐 텐데.’
나는 황제를 보았다. 나만 보았을까? 순간이나 황제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옆에 있던 아올레시아가 재빠르게 잡아 주었다. 멀리서 보면 그녀로 인해 흔들렸다 생각할 정도로 잽싼 동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빛에 속겠지요.”
소릭스의 말처럼 대부분의 신관이 몽롱한 눈으로 빛을 응시했다. 이어 소리가 터졌다.
“제국에 무한한 번영을!”
“위대하신 뿌리, 황제 폐하 만세! 이 제국은 영원하리!”
“만세, 만세, 만만세!”
모두가 찬양했다. 황제의 신력을, 회장을 가득 채운 신력에서 앞으로 영원할 권력을 바라봤다. 압도적인 힘에 매료된 이들은 하나둘씩 무릎을 꿇었다. 조금 전과 다른 자발적인 복종이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관과 반지를 가져오라.”
그의 눈으로 휘휘 금빛이 회오리쳤다.
건장한 신관이 조심스럽게 거대한 쿠션을 가져왔다. 한 사람이 허리쯤 오는 대리석 기둥을 내려놓고, 다른 이가 쿠션을 내려놓았다.
부드러운 천 위에 금으로 된 월계관과 자그만 지팡이가 있었다.
“「주신의 관」과 「약속의 반지」입니다.”
“……반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소릭스, 저거 한쪽은 지팡이로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야?”
“적법한 후계자가 손에 쥘 경우 반지가 됩니다.”
지팡이 쪽을 보던 소릭스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저 신물은 그냥 보여 주기만 할 뿐 후계자의 손에 쥐여 주지는 않았습니다.”
“왜?”
“말씀드렸듯 황제는 힘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했으니까요. 아주 오래전에는 저 신물이 후계자의 자격을 시험했다고 하지만요.”
소릭스의 말에 따르면 최근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단다. 전대, 전전대 황제의 계승식에서도 그저 한 번 비추고 말았다고.
“이젠 그저 상징적인 신물일 따름이지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왜일까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들었다.
‘카스토르가 조용해서인가…….’
흘끗 옆을 바라보면 카스토르가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국에는 신이 함께한다. 풍요는 이어지노라.”
가장 높은 자리에서 모든 이들을 돌아본 황제가 말했다.
“앞으로도 제국에는 무한한 광영이 함께하리라. 이 제국은 지지 않는 태양이다!”
“폐하를 따르옵니다!”
황제가 계단을 내려갔다. 한 단 밑 신물 앞에 멈춰 선 황제가 돌연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는 내려오라.”
순간 회장이 웅성거렸다. 나 또한 조금 놀라 황제를 바라봤다. 레베카가 말해 준 식순에 따르면 황제의 선언 뒤로 연회가 이어져야 했다. 그리고 연회 중간이나 끝 무렵에야 황태자를 불러 황위를 물려준다고 했는데.
카스토르가 지금껏 고정되었던 시선을 돌렸다.
그의 움직임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어느새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그를 주시했다.
“명을 따릅니다.”
카스토르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아 있는 아들 중 3황자와 7황자가 사라졌고, 남은 4황자는 병을 앓아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네가 짐에게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식이구나.”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카스토르가 무릎을 굽힌 채 웃었다.
“폐하께는 한 사람 더 남아 있지 않습니까. 사랑스런 황녀 말입니다.”
순간 카스토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섬뜩한 기분이었다.
‘무슨 소리야.’
적어도 내가 황제의 딸이 아니란 사실은 황제와 나, 카스토르까지 알고 있다.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황제의 시선 또한 나를 향했다.
“짐은 계집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황제의 시선은 마치 고깃덩어리를 재단하듯 차갑고 냉정했다.
“그렇습니까?”
카스토르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는 무릎을 꿇었으나 위를 바라보는 그에게서 복종하는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쉬우시겠습니다. 아버지. 평생 사랑하고 아끼셨던 율리안을 대신해 제가 이 자리에 있으니.”
“말조심하라. 그건 반란자의 이름이다.”
“당신이 아낀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카스토르의 목소리는 나른했고 긴장감이 없었다.
“아. 한때, 저를 사로잡기 위해 제물로 썼던 이름이기도 하던가요?”
카스토르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아주 오래전에 저는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는 선량한 형이었지요. 아주 오래전에 말입니다…….”
“카스토르.”
황제가 강하게 불렀다. 신관은 오감이 비신관에 비해 뛰어나다. 꽤 먼 거리라 해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 또한 이렇게 선명히 듣고 있으니까.’
황제가 타는 듯한 시선으로 카스토르를 내려다봤다.
“네 무례는 이것이 마지막이면 좋겠구나.”
“당신의 뜻대로.”
두 부자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제가 입고 있었던 망토를 풀어냈다. 이어 아래로 걸친 토가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오직 황제와 후계자에게만 주어진 색, 붉은 토가를 걸친 두 사람이 마주했다.
“지금부터 위대한 주신의 뜻에 따라 세 가지를 묻겠다.”
황제가 손을 휘두르자 손에 쥔 단검이 긴 검이 되었다. 황제는 긴 검을 들어 올려 카스토르의 어깨 위로 올렸다.
“황태자는 스틱스강과 유피테르의 천국에 생명을 걸고 대답하라.”
“명을 받듭니다.”
카스토르의 고개가 떨어졌다.
기묘했다. 평생 카스토르가 누군가에게 무릎 꿇는 일을 보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래서일까 이 풍경이 몹시 생경하게 느껴졌다. 더불어 이상했다. 그는 왜 이토록 얌전한가?
“너에게 제국은 어떤 의미인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질문이었다.
아니, 어찌 잊을까.
“저를 태어나게 만든 나라이지요. 이 땅에는 신이 있고, 신은 인간을 사랑합니다.”
카스토르가 언젠가의 나처럼 무릎을 꿇은 채 대답했다. 그 순간 황제의 발밑에서 눈부신 빛무리가 피어올랐다. 바닥에 그려진 것은 기묘한 도형이 합쳐진 주술진이었다.
“진실 여부를 가리는 주술진입니다. 저기서 모두 솔직하게 대답하면 계승되는 것이지요.”
옆에서 소릭스가 설명했다.
“사실 정상적으로 성년식을 치르셨다면 황녀님께서도 저 질문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소릭스를 쳐다봤다. 나는 이미 저 질문을 받아 보았다. 그리고 대답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나를 죽였던 이가 그 질문을 재현하고 있다.
이제는 대답하는 이로서.
황제의 질문이 이어졌다.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황제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를 만들어 내신 분이지요. 저는 폐하로 하여금 태어나 폐하의 뜻 아래서 살았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잠시 눈썹을 휘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얼굴 위로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마지막으로.”
그 순간이었다.
“마지막은 제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뭣?”
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제가 질문 드리지요, 아버지.”
카스토르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버지. 당신에게는 황제의 자격이 있습니까?”
카스토르가 고개를 기울인 채 찬찬히 미소를 흘렸다.
“무엄하다. 신성한 예식 중에 무슨 짓이더냐!”
키득. 카스토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없겠지.”
그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황제의 자격은 곧 신이 내려준 신력. 아버지에겐 신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섬뜩했다. 회장이 술렁였다. 황제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감히 계승식을 망치다니, 어서 네 죄를 알고 다시 앉지 못하겠느냐!”
“아버지께서 증명하신다면 기꺼이 앉아 드리지요.”
“증명? 이 대제국의 황제인 짐이 무엇을 증명하란 말이냐.”
카스토르가 뒷짐 진 채 느른히 웃어 보였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지금 바로 손을 뻗어 저것을 잡아 당신의 자격을 증명해 보이시지요.”
카스토르가 가리킨 것은 그들의 바로 옆 신물이었다.
“저것은 오직 적법한 자만이 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의 눈이 휘어졌다.
“여기 모인 이들에게 당신이 건재함을 알려 주세요. 그 뒤엔 어떤 벌도 달게 받지요.”
카스토르가 제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눈동자는 선명한 금색이었다. 지금 그를 노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황제의 것처럼. 신관들이 웅성거렸다. 황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자 술렁임은 더욱 커졌다.
“아버지. 의심이란 물에 떨어진 잉크와 같아서 한번 떨어진 뒤에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마는 것이지요.”
마치 지옥 저편에서 악마가 속살거리듯 카스토르가 속삭였다.
“그저 한 번만 손을 뻗어 증명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상황은 카스토르가 잡아 버린 뒤였다. 황제는 찡그리더니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거센 충돌과 함께 황제의 손이 튕겨 나갔다.
“시, 신물이?”
“시, 시, 신물이 황제 폐하를 거부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경악이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카스토르가 광소를 터트렸다. 허리를 잡고 웃음을 터트린 그가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검은 머리칼이 느슨히 풀어져 흘러내린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네가 한 짓이지?”
황제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얼른 이 간악한 장난질을 풀지 못하겠느냐!”
황제가 노기와 함께 빛을 일으켰다. 황제의 거대한 신력이 그대로 카스토르를 덮쳤다. 그러나 카스토르에게 떨어진 순간 그것은 공중에서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하하하. 아버지. 당신은 저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카스토르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미소를 그렸다.
“저건 황족 중에서도 특별한 저주에 걸린 자만이 잡을 수 있지요.”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수명을 바쳐 저걸 잡았으나……. 이후엔 어림도 없습니다. 어찌 지옥을 헤쳐 오지 않은 자를 인정하겠습니까.”
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특별한 저주.’
시간을 반복하는 저주를 말한다. 저 신물은 그 산지옥을 헤쳐 나오지 않고서는 절대 잡을 수 없노라고.
카스토르가 황제에게 성큼 다가갔다.
“당신은 실수했어. 나를 쥐었으면, 고삐를 좀 더 꽉 조였어야지.”
카스토르가 여기까지 겨우 들릴 법한 소리로 속삭였다.
“너!”
“하하.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아버지.”
그 순간 황제에게 들렸던 검의 주인이 바뀌었다.
푸욱. 검은 제 주인의 가슴을 찌르고 등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화,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를 찔렀다!”
아수라장이었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넘어져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는 열리지 않는 문을 잡고 소리쳤다. 카스토르는 회장에 고요히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뺨에 튄 피를 닦아 냈다.
“역시 이 제국은 그대로 멸망하는 편이 좋겠어.”
카스토르는 쓰러진 황제 앞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부신 빛이 개화했다. 조금 전 황제의 빛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고 위압적인 빛이었다.
“아아. 참으로 오래 걸렸다.”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다들 여기서 죽어 주겠나?”
검이 사람을 베었다. 피가 튀었다. 붉은 피비린내.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러나 누구도 반항하지 못했다. 아니 신력에 사로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여져.’
곁눈질하자 마찬가지로 꼼짝하지 못하는 소릭스와 레베카가 보였다.
‘혹시 주신의 힘은 같은 주신의 신관에게 통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이곳에서 오직 나만이 움직일 수 있다. 어느새 반 이상의 사람이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은 모두 죽었나? 급히 살폈다. 신음하는 이들을 보면 아닌 듯했다.
‘왜 멈춘 거지?’
카스토르는 감흥 없는 눈으로 풍경을 응시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그의 눈이 거짓말처럼 나를 향했다.
“아실리.”
그의 눈으로 여태와는 차원이 다른 광기가 일렁였다.
“이 궁에서. 모든 게 사라지면 넌 나만 바라볼까?”
그가 포효하듯 속삭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러나 카스토르에겐 내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홀의 중앙까지 가 있던 그가 한순간에 내 앞에 섰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갈 일은 없어.”
주먹이 꾹 쥐어졌다. 눈을 들어 사방을 훑는데 돌연 나를 잡는 손이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카스토르였다.
“이젠 오라비라 부르지 않나?”
그가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흑단 같은 머리칼이 사르르 쏟아진다.
“어차피 당신은 진짜 오라버니도 아니잖아?”
그 말에 레베카가 움찔했다. 소릭스도 놀란 눈이었다.
“알았구나.”
“모르길 바랐어?”
나는 그에게 턱을 잡힌 채로 웃었다.
“모르길 바랐다면 철저히 숨기지 그랬어? 내가 알고자 하니 진실은 여기저기서 내게 속삭여 주던걸.”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가 진짜가 아니란 걸 당신은 알고 있었지.”
카스토르가 피식 웃었다.
“맞아.”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 세찬 기운이 회오리쳤다.
“난 네가 알길 바랐고. 모르길 바랐지. 이대로 새가 되어 내 새장 속에 있어 주길 바라기도 했단다.”
건국제의 밤, 그는 나에게 자신의 궁에서 평생 새처럼 살아 달라 말했다. 부족함 없이 채워 줄 테니 평생 갇혀 있어 달라고.
“기억을 잃은 널 보며 이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웃는 너는 퍽 사랑스러웠으니까.”
그가 턱을 잡아당겼다. 긴 손가락이 턱밑에서 목젖까지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역시 모든 걸 기억하고 이렇게 나를 바라봐 주는 편이 좋구나.”
손가락만 닿았을 뿐인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찔하게 쏟아지는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실리. 나를 증오하나?”
“무슨 소릴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손을 모은 채 해사하게 웃었다. 긴 시간 나는 네게 이딴 미소를 꾸며 냈지.
“제게 어떤 답을 바라시나요?”
나는 가녀린 백치 목소리로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조롱하듯 웃으며 덧붙인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알 텐데.”
그가 천천히 턱을 들어 올렸다. 억지로 시선이 마주쳤다.
“오라버니 당신은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나는 표정을 싹 지워내며 말했다.
“카스토르 드제.”
이름을 담자, 그의 눈이 미미하게 굳었다.
“증오해.”
하베르미아의 달처럼 그가 검을 든 채 나를 마주한 지금, 나는 그날의 나와 전혀 다른 낯으로 웃었다.
“당신을 향해 오라버니라 입에 담은 순간마다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
살아남기 위해 백치를 흉내 냈다. 나를 죽인 살인자를 좋아하고 아끼는 척했다. 이 얼마나 처절한 생존인가.
나는 네가 낳은 괴물이다.
그러니 넌 날 똑바로 마주해. 네가 어떤 인간을 만들었는지.
나는 내 한목숨 지키기보다 나로 인해 죽은 이들이 가엾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속죄하기 위해 버텼다.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은 적이 없어.”
내 삶을 망친 잔혹한 살인자.
“당신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마침내 이 피비린내 나는 풍경에서 나는 진심을 토해 냈다.
“한때 내가 바랐던 소원과 같구나.”
카스토르가 빙긋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더욱 세찬 바람이 그의 홍채 안에서 휘휘 돌았다.
“한때 사랑하는 이들이 모조리 몰살당하고, 칼을 휘두른 이들이 선택을 종용했을 때 나는 차라리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었지.”
그가 황홀할 정도로 낮고 아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내 뺨을 사로잡았다. 진득한 피가 묻어 있는 손이었다.
“어때? 보렴. 아실리 너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단다. 아무도 반복한 시간을 몰라. 기억하지 못해.”
이건 나를 유혹하는 말이다. 나를 조롱하는 말이다.
‘동요해서는 안 돼.’
그러나 나는 참지 못하고 토해 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그래. 너는 내가 만든 사람이야.”
카스토르가 낮은 목소리고 속살거리며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 앞으로도 반복할 시간이 두렵지 않니? 나는 이 제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란다. 수천 번 죽고 살아난 나는 멸망을 위한 최고의 도구이지. 너는 막을 수 없어.”
그가 내 손을 잡아 손끝에 입을 맞췄다.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새가 되어 줘. 무엇이든 해 줄게.”
그의 뺨에 튄 핏자국이 선명했다.
“널 위해 짖을 짐승이 필요하나? 내가 되어 주지. 널 위해 세상 모든 보화를 가져다줄게. 나를 본다고 말해.”
카스토르의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멸망한 땅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그는 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네게 알려 주지 않았던 주신의 진정한 힘을 보여 주마.”
그의 발밑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나는 수정에서 기묘한 황금빛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어 바닥으로 수십, 수천의 도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도망쳐!”
“사, 사람이 살아난다!”
검에 찔려 신음하던 이들이 일어났다. 심지어 다리를 베여 뼈가 보이도록 피가 철철 흐르는 자마저 일어나 검을 들었다.
“이, 이, 이러지 말게! 우린 같은 신관이잖나!”
다시 일어난 자들은 검을 들어 동료를 내려쳤다.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가 검을 들자 신관들은 더욱 우왕좌왕하며 흩어졌다. 몇몇 이들은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이들은 최고의 신관이었으나, 동료를 찌르는 데는 망설임이 앞섰다.
“제, 제발 이러지 마시오!”
또한 그들의 적은 조금 전까지 동료였던 자를 거침없이 베었다. 그렇게 쓰러지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었다. 초점 없는 시선, 몽롱한 얼굴.
나는 황급히 카스토르를 바라봤다.
“어떠니, 아실리.”
“당신…….”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신음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검을 꽂은 소릭스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이 힘에 저항하는 듯했다.
“안 돼. 안 돼……. 도망치세요, 황녀님…….”
문뜩 회장을 둘러보자 곳곳에서 주저앉은 채 저항하는 순찰대가 보였다.
“너를 향한 충성심이 대단하구나.”
“이러는 이유가 뭐야?”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러지 않아도 당신은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몰살시킬 수 있잖아. 대체 생명을 가지고 노는 이유가 뭐야!”
카스토르는 이들을 모조리 한칼에 죽일 수 있었다. 굳이 이 잔인한 풍경을 만들어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단 얘기다.
“저기 보이니?”
카스토르는 천천히 웃으며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시선을 쫓아가면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황제가 있었다.
“황제는 아직 죽지 않았단다. 급소를 비껴서 찔렀거든.”
내 옆에 살짝 앉은 카스토르가 내 어깨를 잡더니 속닥였다.
“아들을 바쳐서, 죄 없는 목숨을 바쳐서 이 제국을 유지하려 했던 욕심 많은 인간이 어떤 풍경에 가장 공포를 느낄까?”
카스토르는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모든 신관이 죽어 갈 때지. 신관의 몰락은 곧 이 나라의 몰락. 그리고 제국의 몰락.”
황제가 눈을 부릅뜬 채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울러 핏발이 선 눈으로 움찔움찔 간헐적으로 떨었다. 마치 카스토르가 말한 것을 듣고 있는 듯이.
“최고의 복수는 눈앞에서 가장 아끼는 걸 부숴 버리는 것이지. 주신은 모든 신들의 왕. 따라서 후계자인 우리는 신관을 조종할 수 있단다.”
역대 최강의 후계자라 하였던가, 그 이름에 걸맞게 그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오래전 그는 정신을 파고들어 내 것이 아닌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 힘이 더 강해지면 제압해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던 건가.’
카스토르가 느긋이 관망하는 이 순간에도 또 한 사람이 쓰러졌다.
“아실리.”
카스토르가 미끄러지듯 나를 응시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던 자들은 남김없이 죽을 거다.”
왜인지 이 순간 건국제가 스쳐 갔다. 기억을 되찾는 순간 그가 나를 붙잡고 내게 했던 말들이었다.
<……넌 제 발로 내게 오게 될 거야. 미래를 아니까.>
그가 봤던 미래는 지금을 뜻했던 걸까. 많은 이들이 죽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지금, 저들 사이엔 내가 사랑한 이들이 있었다. 아니, 사랑하는 이가 아니더라도 나는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그냥 보지 못한다.
“카스토르.”
나는 지그시 물었던 입술을 떼어냈다.
“저 잔인한 짓을 막을 방도가 있어?”
“어떤 것 같으니.”
“있으니까 계속 내게 죽음을 강조하는 거야. 그렇지?”
카스토르는 대꾸 대신 웃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곳곳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가득했다.
“……내가 당신의 것이 되면 무고한 이들은 살려 줄 거야?”
“며칠 더 사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그리해 주마.”
카스토르는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멸망한 땅에는 아무도 살지 못해. 너와 나 말고는.”
그는 허리를 숙여 소중한 것을 다루듯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이 땅에 너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까.”
온도가 다른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와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카스토르. 그 삶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네가 부른 내 이름은 무척 달콤하구나. 영원히 듣고 싶어.”
“카스토르.”
내 인생에 가장 증오스러운 이름, 부를 때면 이를 갈고 칼을 갈았던 이름. 나는 검을 들지 않으려 애쓰는 소릭스를 바라봤다. 옆에서 주저앉은 채 스스로를 향한 검을 버티는 레베카를 보았다.
시선이 카스토르에게로 돌아간다.
“나를 사랑해?”
그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당신은 내가 울어도, 빌어도 나를 외면했지. 그럼에도 언제나 찾아와 나를 죽였어.”
나는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뺨을 문질러 보았다. 반쯤 굳은 피가 손가락에 묻었다.
그가 나를 죽였던 순간부터, 그를 향해 복수를 품었던 순간까지. 나는 천천히 그를 닮아 가고 있었다. 내 목숨을 이용해 미래를 바꾸고 내 생명을 이용해 사람을 살리려 했다.
‘사실 지금 이 풍경도 아연하게 느껴져.’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 갔다.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은 소중하다. 그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왜 소중했더라.
“당신에게 포기를 배웠고, 체념을 배웠지. 어느새 악과 깡만 남아서 하루를 살았어.”
어느 순간부터 이 부분이 무뎌졌다. 그리고 나는 내 생명을 파리 목숨 취급하며 도외시했다. 내 곁에는 플뢰온이 있었고 데인, 레이, 레베카가 있었다. 그러나 이토록 다정한 이들이 함께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던 거다.
“이러다가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 천천히 무뎌지다가……. 당신이 원한 것도 이런 거겠지.”
이제는 조금씩 네가 보인다. 도통 종잡을 수 없던 폭군, 잔인한 살인마. 네가 보인다. 그리고 네가 보인다는 뜻은 내가 변했다는 얘기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했던가.’
너를 잡으려다 너의 일부가 내게 물들고 말았다.
“하지만 카스토르.”
내 손끝에서 시퍼런 보랏빛이 꽃처럼 피었다. 차츰 퍼지던 빛이 강렬한 스파크를 만들어 냈다. 파지직! 카스토르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너와 나는 비슷하지만 끝내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어. 왜인지 알아? 절망스러울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어.”
그 순간이었다. 보랏빛 빛무리 사이로 신비로운 녹색이 파고든다. 문틈에서 수백 개의 넝쿨이 뻗어 들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다시 창문에서 천장에서 심지어 벽을 뚫고 튀어나온 넝쿨이 모든 신관을 사로잡았다. 이에 멈추지 않고 반항한 자들은 바닥을 뚫고 나온 뿌리에 사로잡혔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이 피비린내 나는 풍경을 뚫고 저벅저벅 걸어온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튜닉, 신비로운 은하늘빛 머리칼이 움직임에 따라 곡선을 그렸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윽고 모든 식물이 개화한다.
“형님.”
식물이 만개한 풍경. 홀로 서 있는 자는 아모르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계단 위에 서 있는 카스토르를 응시했다.
“아모르.”
카스토르의 부름에 아모르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날 선 미소가 스친다.
“네 번째 가지, 아모르 노테 칼타니아스. 계승식에 조금 늦었습니다.”
아모르의 눈이 느릿하게 회장을 향해 돌아간다.
“이미 계승식이 아니게 된 것 같지만 말입니다.”
슬쩍 풍경을 훑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은 살아 있는 자와 시체가 나뒹구는 산지옥이었다. 아모르가 허공에 손을 긋자 꽃이 피어난다. 식물의 푸릇한 향기가 피비린내를 가렸다. 나는 아모르의 배려임을 알았다. 겨우 숨을 토해 냈다.
‘제시간에 와 주었구나.’
나를 본 아모르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그가 내게 다가오려 할 때였다. 눈부신 금빛이 일더니, 눈앞을 새카맣고 붉은 천이 가렸다. 카스토르였다. 그의 옷자락이 너울처럼 허공에 휘날렸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아모르.”
내 앞을 막아선 채 그리 말한 카스토르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눈 깜빡할 사이에 카스토르는 아모르 앞에 서 있었다.
“네 모습이 많이 변하여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구나.”
쾅.
카스토르의 금빛과 아모르의 식물이 부딪쳤다. 아모르를 막아선 식물이 그대로 바스러지며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모르는 카스토르를 마주하며 삐딱하게 웃었다.
“형님이 익히 알던 골골대던 만신창이 모습이 아니라서 말입니까?”
그 순간 세차게 몰아친 금빛 바람이 아모르에게 화살처럼 쏟아졌다. 아모르의 손짓에 땅이 흔들리고 식물이 일어났다. 이어 후드득 새카맣게 탄 식물이 떨어졌다.
“인사가 과하지 않습니까?”
아모르가 태연히 말했다.
“잊으셨습니까? 이 땅에 남은 신관 중에서 형님을 제외하고 신력이 가장 강한 이는 저라는 것을.”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아모르의 뺨에 실선이 그어졌다. 그 사이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그럼 물론이지. 어찌 잊을 수가 있겠니.”
카스토르가 마주 웃었다.
“매일매일 해독제를 마시지 못하면 죽고 마는 가엾은 내 동생. 내가 살린 내 동생인데 너를 어찌 아끼지 않았겠니.”
“당신의 연민에 기생해서 구차하게 살았던 거겠죠.”
“연민? 아아,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
카스토르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두 사람 사이의 빛이 자욱해진다.
“내 너를 아낀 건 사실이란다. 아모르. 너는 이렇게 나를 등지고 말았지만.”
카스토르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새 카스토르의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아모르가 눈을 찡그렸다. 그는 삐딱한 미소를 걸었다.
“제가 배신했다 말하고 싶으십니까?”
“그래. 너도 황제의 희생자였지 않았니?”
아모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었다. 아모르의 눈으로 잠시 일렁임이 지나간다.
“그렇군요. 형님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아모르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로제를 따르기로 한 이상 그런 것쯤은 잊을 수 있습니다. 미래를 걷고 싶으니까요.”
아모르의 옆으로 싱그러운 녹색빛이 피어났다.
“더는 과거에서만 살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증명하듯 아모르는 자신에게 검을 겨눈 카스토르를 똑바로 마주했다.
“평생 황제를 증오했고, 그날 학살에 앞장섰던 유스난과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나를 죽게 두지 않는 당신이 미웠지요.”
과거 아모르도 카스토르를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군사가 들이닥치고 어머니와 궁의 모든 이를 살해하던 날, 마치 나의 하베르미아의 달처럼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던 살해자의 눈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둘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기에 누군가 잠들면 흔들어 깨울 수 있었다. 악몽에 물들지 말라고. 체념하지 말라고.
“그러나 이제는 형님에게 감사합니다.”
아모르는 낯을 풀어내며 부드럽게 미소했다.
“형님 덕에 이날까지 살아 로제를 만났으니까요. 태어나 처음으로, 살아 있음에 감사를 느낍니다.”
아모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는 로제와 형님이 가진 저주를 알게 되면서 하나를 더 알았습니다.”
뒤이어 날 선 시선으로 카스토르를 바라봤다.
“어째서 율리안 형님은 반란을 일으키고도 죽지 않았을까요?”
아모르의 목소리는 한겨울 서리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북쪽 탑에서 보았던 율리안을 떠올렸다.
<폐하께서는 나를 아끼셨지. 아주 강력한 후계자가 있음에도 비신관인 나를 아끼셨어.>
그는 내게 황제가 하려 했던 영혼의 이동을 알려 주었다. 카스토르가 황제를 찌르지 않았다면, 카스토르보다 더한 괴물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황제.
죄 없는 이들을 사로잡아 제물로 바치며 아들들마저 제물로 삼았다. 모든 걸 이 제국과 무한한 번영을 위해서라 말하는 황제. 사람으로서 황제로서도 끔찍한 이였다.
“어릴 적부터 형님은 율리안 형님을 보려 하지 않고, 율리안 형님은 제게 형님 소식을 묻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아모르가 오랜 악연의 귀퉁이를 풀어냈다.
“이젠 알았습니다. 형님이 제게 매일같이 찾아왔던 건 저를 율리안 형님 대신할 동생 삼았기 때문이었고, 그동안 저는 누군가의 대역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아모르는 담담히 진실을 고했다.
“형님은 제게서 율리안 형님을 보셨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구나.”
카스토르의 목소리는 낮았다. 학살에도 여유를 잃지 않던 카스토르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오래전 그라니우스에게서 들은 적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선량하고 현명한 황자였던 형님이 율리안 형님을 몹시도 아끼셨다는 말을 말입니다.”
잠시 말을 멈췄던 아모르가 숨을 들이쉬며 이어 말했다.
“꼭 쌍둥이 형제처럼 아꼈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나 이건 카스토르의 역린이었을까. 카스토르는 어느새 미소마저 지운 채 아모르를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흉흉한 기세였다.
“율리안 형님은 다정하고 선량하십니다. 성군의 자질을 지녔다 들었던 이야기는 사실 오래전 형님을 두고 하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모르는 그치지 않고 이어 입을 떼었다.
“어떻습니까, 형님. 시간을 반복하며 형님은 망가지는 동안 그대로 있는 율리안 형님이 미웠던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 아모르를 향해 폭발적인 기운이 쏟아진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난폭하고 거대한 크기였다. 나는 놀라 아모르를 바라봤다.
“쿨럭.”
쾅. 굉음이 터졌다. 연기가 가시고 거대한 구덩이 중앙에서 아모르가 거센 기침을 토해 냈다. 바스러진 줄기로 보아 공격을 막았지만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재미있구나.”
아모르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는 카스토르를 향했다. 쾅! 다시 한 번 굉음이 두 남자 사이를 갈랐다. 먼지를 가르고 나타난 이는 카스토르였다.
“나를 분노하게 하려 한 거라면 반쯤 성공했다 말해 주고 싶구나. 아모르.”
카스토르가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더는 전과 같지 않았다. 그의 옆으로 흉흉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분사되었다.
두둑. 두둑!
“푸, 풀린다!”
아모르가 묶어 두었던 식물이 타들어 갔다. 조종당하는 신관들이 다시 일어났다. 풀려난 이들은 다시 검을 잡았다.
“큭. 안 돼!”
아모르가 이를 악물며 다시 식물을 일으켰다.
“아모르. 이 자리에서 너도 함께 죽는 쪽이 좋겠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 소릭스에게 다가갔다. 소릭스는 넝쿨에 묶인 채 여전히 팔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릭스.”
“크흑, 괜찮으, 십니까. 황녀님.”
나는 떨고 있는 팔에 손을 올렸다. 현재 소릭스는 카스토르의 힘에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나만이 태연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카스토르의 눈을 본 순간 무언가를 느끼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이로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빠르게 알 수 있었다.
‘카스토르의 힘이 내게는 미치지 않아.’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카스토르의 힘을 몰아낼 수 있는가?
아올레시아는 내게 힘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쳤다. 나는 일기장을 한 손에 잡고 소릭스의 팔에 집중했다. 곧이어 희미한 보랏빛이 점차 강해지더니 소릭스의 팔을 휘감았다. 이어 빛에 잠긴 소릭스가 눈을 떴다.
“화, 황녀님. 이제 괜찮습니다!”
그의 오른팔이 뜻대로 움직이는 듯했다. 이어 레베카를 잡으려 할 때였다.
“멈추십시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장검이 눈앞에 있었다. 시선이 목을 겨눈 검을 따라간다.
“헤르난.”
새하얀 제복을 걸친 헤르난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카스토르의 명이야?”
“…….”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쓰게 웃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오늘도 인형처럼 대꾸하는 당신이 이제는 익숙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당신의 이런 모습이 낯설다. 지나 버린 시간에서 이런 위기가 오면 거짓말처럼 당신이 나타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당신은 항상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모르겠어.”
나는 당신만 바라보면 아프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
목소리가 흐려졌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헤르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어 그의 검을 손으로 잡았다.
“내가 참 나빴어. 그렇지?”
한 번만 당신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 줄 걸. 조금만 더 빨리 들어 줄 것을. 이제는 적이 돼 버린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서 애달프다.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
검을 꽉 쥐자, 뒤이어 피가 뚝뚝 흘렀다. 고통은 없었다.
“당신은 반드시 불행했던 만큼 행복해야 해.”
나는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움찔했다.
“그래서 이 제국은 멸망해서는 안 돼.”
“…….”
나는 당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금에서야 당신을 보며 웃게 되었다.
“당신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웃는 걸 보고 싶으니까.”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표정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다가오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막으라는 명은 받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나는 헤르난의 목뒤로 팔을 감았다. 그리고 꽉 안았다.
“미안해.”
순간 그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내 팔을 떼어 내려 하던 때였다. 눈부신 빛이 밧줄처럼 그를 붙들었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 줘.”
주저앉은 헤르난을 두고 소릭스에게 달려간다.
“소릭스. 괜찮아? 몸은?”
“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시녀님과 뒤는 제게 맡기고 얼른 가세요!”
소릭스가 검을 들며 말했다.
“괜찮겠어? 저건 잠시 묶어 둔 거라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나는 꽁꽁 묶인 헤르난을 보며 말했다. 어쩌면 각성한 지금 헤르난의 저주를 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나 당장은 시간이 촉박했다. 소릭스가 내 손을 다급히 잡았다. 그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네. 어떻게든 막겠습니다. 황녀님은 가세요. 시간이 가까워졌어요!”
난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고개를 돌렸다. 카스토르와 아모르의 얼굴이 한 번에 보였다. 이미 홀은 엉망이었다. 바닥에 구덩이가 파였으며 잘게 찢어지거나 바스러진 식물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또 한 번 빛이 터지며 먼지가 일어났다. 눈을 뜨면 카스토르가 멀쩡한 모습으로 검을 겨눴다.
“어찌 저주를 풀어 낸 모양이구나. 하지만 너 하나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순 없을 텐데?”
잠깐 사이에 아모르는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모습이었다. 아모르는 피를 닦으며 피식 웃었다.
“제가 언제 혼자 왔다 말했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카스토르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거대한 소리가 땅을 울렸다. 나만이 느낀 건 아닌지 카스토르가 재빨리 문을 향했다.
“……쿨럭, 제가, 후. 시간을 끄는 역할을 잘 수행한 모양입니다.”
아모르가 삐딱한 웃음을 걸며 읊조렸다.
“이 순간을 위해서.”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니, 문이 부서져 내린다. 먼지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이들이 와르르 들어왔다.
“제국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드넓은 홀에 끝없이 신관이 가득 찼다. 그들은 상처 입은 자를 수습하거나 아직 쓰러지지 않은 신관을 제압했다. 가장 앞에 있던 자가 이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눈과 바다의 대신관 폰투스, 주군의 부름을 받아 도착했습니다.”
자욱한 먼지바람이 이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 진정한 후계자이시여.”
이윽고 먼지가 잦아들자 수십, 수백의 신관이 병장기를 들고 서 있었다. 폰투스가 신호하자 몇 백이 될지 모를 병장기의 끝은 카스토르를 향했다. 그는 본능과도 같이 날 응시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교차했다.
언제고 나를 내려다봤던 남자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디뎠다.
“보여 카스토르?”
나는 빙그르 돌아서 치마를 붙잡았다. 찡그렸던 표정은 언제 있었다는 양 사라진지 오래였다.
“네가 기다렸듯 나도 이 순간을 기다렸지.”
카스토르가 움직이려는 순간 수십의 식물이 그를 덮쳤다. 금빛에 모조리 타고 말았지만 내가 도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네가 멸망을 바란다면 나는 막겠어.”
나는 손을 뻗어 「주신의 관」을 들었다. 난 관을 든 채로 천천히 망토를 벗었다. 그 순간 아스라한 보랏빛이 몸을 휘감고 눈을 떴을 때 시야가 달라졌다.
“난 이 제국이 멸망하길 바라지 않아.”
카스토르가 눈을 부릅떴다.
<여성은 황제가 될 수 없습니다.>
누가 그래?
그 법은 누가 만들었지?
월계관은 놀라울 정도로 내 머리에 잘 맞았다. 황제의 반지를 손가락에 집어넣었다.
“카스토르.”
피와 영광,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순간이 찾아왔다.
“이번엔 내가 이겼어.”
나는 느릿하게 시선을 내리깔아 놀란 눈을 한 카스토르에게 웃었다.
“내가 황제야.”
반지와 월계관은 거짓말처럼 내 몸에 맞춰 줄어들었다. 마치 내가 쓸 것을 알았다는 듯이.
신기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반쪽짜리 백치 황녀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나는 웃음을 토해 냈다. 무엇을 위한 웃음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얼굴을 바로하며 또렷한 눈으로 회장을 응시했다.
홀은 제압당한 이들이 토해 내는 짐승 같은 신음을 제외하면 고요했다. 카스토르는 계단 밑에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게 네가 원하는 미래.”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광기를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시선이 알 수 없는 것을 담고 나를 향했다. 집요했다. 그 지독함에 눈을 찌푸렸다.
“아실리. 네가 바라는 미래에 나는 없나?”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금빛이 진동했다. 표정과 달리 동요했다는 증거였다.
“있길 바랐어?”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집어치워. 그런 미래는 천년이 지나도 오지 않을 거야.”
“하하. 하하하하.”
카스토르가 비틀거리며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구나.”
그는 손으로 얼굴을 짚은 채 말했다. 움찔. 그를 둘러싼 병장기의 간격이 좁아졌다. 신관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착각했어.”
카스토르가 얼굴을 짚은 채 고개를 젖혔다. 나른한 자세에 비해 기세가 흉흉했다.
“처음부터 다 죽이고 나서 널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의 앞에 있던 수십의 신관이 뒤로 날아갔다.
“넌 모든 걸 잃고 나서야 나를 택할 테니까.”
자욱한 금빛 안개가 그를 둘러싼다. 땅이 흔들렸다. 기다릴 필요가 없었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카스토르의 머리가 너울너울 흔들린다. 홀 전체가 진동했다.
“포위를 멈추지 마라!”
폰투스가 외쳤다. 신관들이 이를 악물고 창을 들이밀었다.
쾅.
그러나 또 한 번 빛이 터지며 사람이 나뒹굴었다. 자욱한 먼지가 가득했다. 그 사이로 카스토르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천장에서 넝쿨이, 땅에서는 뿌리가 튀어나와 카스토르의 팔다리를 억압했다.
“아실리.”
꽁꽁 묶인 카스토르가 그대로 웃었다.
“각성했을 줄은 몰랐어. 완전히 예상 밖이야.”
그는 마치 축하라도 하듯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이 주먹을 쥐었을 때였다.
“이리 올려다보는 너도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빛이 모든 식물을 태워 버렸다.
“좋아. 나도 모든 패를 보이마.”
계단 중간에 멈춰 선 카스토르가 고갯짓했다. 그러자 누군가 천장에서 그의 옆으로 내려섰다.
“이 순간만 기다렸습니다.”
데로스였다. 그는 계단 위에 선 나를 흘끗 보는가 싶더니 카스토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디 한번 볼까. 내가 그린 미래와 네가 그린 미래 중 어느 쪽이 실현될지.”
사라지는 데로스를 보는 대신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한 카스토르는 한 걸음 더 좁혔다.
쾅. 쾅. 쾅! 누구도 집중하지 않았던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궁금하구나.”
두 번째 가지를 뜻하는 기둥은 홀을 떠받치던 가장 큰 기둥 중 하나였다. 천장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이어 다시 굉음이 터지고 또 하나의 기둥이 무너졌다. 황급히 신관들이 나섰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돌 부스러기가 쏟아진다.
“이 궁은 곧 무너질 거야.”
카스토르는 여유를 모두 잃은 채 광기만을 남긴 눈으로 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살아남는 건 몇이나 될까?”
일기장에서 피어난 보랏빛 나비가 내게 쏟아지는 돌을 막아 냈다. 그러나 모든 이를 지킬 수는 없었다. 카스토르가 천천히 돌아섰다.
“어딜 가는 거야!”
천장이 부서지고 돌이 떨어지는 사이 그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내 마지막 남은 양심과 이 제국의 중심을 없애러 갈 거란다. 나를 쫓겠니?”
전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나머지는 확실히 알았다.
‘수정을 부수러 가는 거야.’
이 제국을 지탱하는 수정, 지하의 수정을 부수러 가는 거다.
“위험합니다, 황녀님!”
그 순간 거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거대한 천장 조각이 떨어져 내린다.
“황녀님!”
쩌저적. 모든 돌조각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괜찮으십니까?!”
돌아보면 숨을 헉헉 들이마시는 폰투스가 보였다.
“폰투스, 카스토르는 지금 수정을 부수러 가는 거야!”
“수정이 부서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어디선가 단검이 떨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백 개의 단검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황제의 그림자!’
폰투스가 이를 악물고 검을 노려보자 검이 허공에서 모조리 얼어붙었다. 그사이 허공에 뜬 신관들이 천장에 숨은 황제의 그림자들을 찾아내 떨어트렸다. 그러나 폭음이 한 번 더 터지며 멈췄던 붕괴가 이어졌다.
“로제, 얼른 가.”
아모르가 말했다. 그가 뿌리와 줄기를 일으켜 그림자들을 포박했다. 그는 이어 입으로 병뚜껑을 열어 상태가 심각한 자들에게 뿌렸다.
“나는 여길 수습하고 쫓겠다.”
아모르와 짧게 시선을 교차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와야 해요.”
“물론이지.”
카스토르가 간 길을 쫓아 홀의 서쪽을 가로질렀다. 눈앞이 휙휙 스쳐 간다. 나를 노리던 검이 있었다.
“황녀님,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어느새 정신 차린 순찰대가 내 앞과 뒤를 맡아 길을 열었다.
“잘 부탁해. 다들.”
난 이를 악물고 뛰었다.
홀을 나서자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평화로웠다.
‘붕괴가 복도까진 이어지지 않은 건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카스토르가 간 길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카스토르인지 수정인지 모를 거대한 기운이 느껴져.’
신관은 의식하지 않아도 주신의 신관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쪽이 수정인지, 카스토르인지 몰라도 이 길로 가면 만날 수 있다.
복도의 반을 지나고 속도를 올릴 때였다. 나는 본능과도 같이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가실 수 없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이는 헤르난이었다. 그가 장검을 든 채 나를 막아서고 있었다.
“……어쩐지 홀에서 당신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니.”
나는 우는 얼굴로 웃었다.
“당신의 추적이 필요 이상으로 빠를 시 당신을 막아서라 명했습니다.”
헤르난은 인형처럼 입을 뻐끔대며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헤르난. 그렇게는 안 될 거야.”
내게 응답하듯 일기장이 희미한 빛을 드러냈다. 조금 전 각성하기 전 모습이라면 모를까 제 모습을 찾은 지금 제약이 사라졌다. 내게서 뻗어 나간 보랏빛 나비가 헤르난을 포위했다.
“저는 짐승의 신관. 이 정도로 약한 힘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헤르난은 녹록하지 않았다. 앞을 가린 나비가 검에 베여 사그라진다. 그러나 흩어진 나비가 다시 뭉치며 그의 팔을 꽁꽁 묶었다.
“또한 같은 방법은 통하지 않습니다.”
헤르난이 기다렸다는 듯 속박을 풀어냈다. 그가 일으킨 바람에 나비들이 사라진다.
‘포박은 안 된다는 건가.’
한시가 급했다. 언제 수정이 부서질지 모른다. 당장 헤르난에게 뺏길 시간이 없었다.
‘이 방법은 어떨까.’
그가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흰 물결이 가까워졌다. 나는 다시 한 번 나비를 일으켜 그의 눈을 가렸다. 그러나 보이지 않고도 안다는 듯 검이 뻗어 왔다.
일기장이 기다렸다는 듯 날 보호하기 위해 빛을 뿜었으나 나는 그 빛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빛을 걷어 내자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푹.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금속이 살을 꿰뚫는 소리였다.
나는 씩 웃었다.
“눈을 가리면 일단 검을 뻗을 것 같았어.”
제대로 싸우자니 난 미숙했으며, 언제 카스토르가 수정을 부술지 모를 상황이었다.
검에 팬 홈을 따라 붉은 핏줄기가 이어진다.
“당신을 꼼짝 못하게 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거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은 꼭 눈물 같았다.
“……아프진 않아.”
나는 한 손을 더듬어 일기장을 쥐었다.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나는 이제 이런 것쯤은 아프지 않은 「죽음의 후계자」이기도 하다는 거야. 당신 없는 사이에 나는 아주 강해졌어. 헤르난.”
강해지고도 해결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카스토르는 주신의 힘으로 신관을 조종했어.’
이 검을 뽑으면 출혈량이 커진다. 아프진 않지만 죽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헤르난은 이 검을 뽑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꼭 조종이 아니라도 좋다. 헤르난을 이대로 자리에 멈추게만 해도 좋으니까 제발 듣게 해 줘.
난 일기장을 꾹 쥐었다.
“헤르난 당신은 지금껏 나를 구했지.”
카스토르의 방에서, 납치되었을 때 무너지는 천장에서, 그리고 건국제 날 탑에서. 헤르난은 온도 없는 시선으로 검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리고 지금 이것까지 포함해 나를 세 번이나 해쳤어. 하지만 괜찮아. 모두 용서해 줄게.”
왜일까. 이제는 보라색이 된 눈동자가 한순간 떨린 것도 같았다.
“바로잡으면 되니까.”
눈을 감았다. 제발 내게 길을 알려 줘. 나는 어떡하면 그를 돌려놓을 수 있지? 일기장을 꾹 눌러 잡았을 때였다. 여느 때와 다른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을 뜨자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있었다.
‘뭐지?’
조금 전까지 정원이 보이던 복도는 온데간데없이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다.
‘흡사 일기장 속 공간 같아…….’
그때였다. 눈앞에서 거대한 바람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짐승이 눈앞에 있었다.
「나를 깨운 자. 그대는 신관인가?」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짐승은 압도적인 크기의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목소리가 머리에 웅웅 울렸다.
“이게 무슨……. 그쪽은 뭐죠?”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나는 얼른 주변을 돌아봤다. 다시 봐도 깜깜한 공간이었다.
“저는 나가야 해요. 돌려보내 주세요!”
「바깥의 일을 걱정하나? 염려 마라. 이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바깥에선 찰나일 뿐이니.」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짐승, 짐승의 눈동자는 짙은 보라색과 푸른빛이 섞인 오묘한 색이었다.
「묘한 아이로구나. 신관이면서 신을 만나지 못했나? 가만…….」
짐승이 머리를 갸웃했다.
「너는, 오호라. 두 신의 축복을 받았구나. 혹시 칼타니아스의 딸이더냐?」
칼타니아스, 이는 초대 황제의 이름이었다.
“아니요. 나는 그녀의 딸이 아니에요. 누구이신 모르나 그로부터 2천 년이 흘렀어요.”
짐승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런. 봉인된 동안 그렇게 흐르고 말았나. 어쩐지 갈수록 힘이 약해져 가더라니.」
짐승이 커다란 발톱으로 제 턱을 긁적였다.
“당신은 누구죠?”
「알면서 묻는구나.」
짐승이 커다란 몸을 일으켜 다리를 뻗었다.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나는 전쟁과 짐승의 신, 마르스. 오래전 주신의 의지에 반하는 사고를 일으키고 인간의 몸에 봉인됐지.」
“인간의 몸에?”
「정확히는 대대로 가장 강한 짐승의 신관의 몸에.」
짐승의 거대한 동공이 굴러 나를 향했다.
「그나저나 두 신의 사랑을 받는 자여, 너를 보니 많은 생각이 드는 구나. 내 생전 두 신의 힘을 가진 이는 칼타니아스 말고는 다신 보지 못할 줄 알았건만. 그래, 너는 어느 쪽이더냐?」
웅웅 거대하게 울리는 낮은 음성이 알아듣지 못할 것을 물었다.
「칼타니아스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죽었지.」
“어느 쪽?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짐승의 신이라면 부탁이 있어요!”
오래전 신화로만 남은 일 따위 관심 없다. 나와 같은 힘을 가진 초대 황제가 어쨌단 말인가?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일 뿐.
나는 거대한 짐승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지금 당신을 담고 있는 몸이 이지를 잃었어요. 그를 원래대로 돌려주세요.”
「광폭화를 말하는 건가?」
나는 끄덕였다. 그러자 짐승이 커다란 머리를 들이밀었다. 잠시 놀랐지만 내 얼굴만 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자는 네가 아닌 다른 자를 따르고 있구나. 원래 주인인 너를 따르게 해 달란 말이지?」
어렵지 않다는 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나는 그의 주인이 되길 원치 않아요. 그를 원래대로. 자유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돌려주세요.”
「어째서지? 너는 동반자가 아닌가. 이자는 너를 사랑해. 영원히 너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졌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바라지 않는다. 신이 제멋대로 정한 운명에 휘둘리는 게 어찌 정상적인 사랑이란 말인가.
「오직 너만을 사랑하며 네 말이라면 지옥까지 따를 짐승이 생긴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닐 텐데.」
나는 울컥 참지 못하고 새하얀 털을 움켜잡았다.
“닥쳐! 헤르난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야.”
아모르가 그랬다.
<혹시 각성하면서 신을 보았나?>
신관은 각성하면서 신을 보게 된다고. 그렇다면 신관은 신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듣나?
‘운명이 이렇게 가혹하다는 걸?’
늘 생각했다. 이곳에는 신이 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 아니, 인간을 위한다는 말로 한 인간의 운명을 잔인하게 유린했다. 나도, 아모르도, 그리고 헤르난도.
“신이 깃들어 영원한 제국? 웃기지 말라고 그래. 이곳은 인간의 세상이야. 미래를 알고 죽음을 알고 누군가는 병을 앓고 누군가는 영원히 자기 자신을 잃고!”
털을 붙잡은 채 소리쳤다.
“그따위 힘. 사라지라 그래.”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거대한 동공을 향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딴 힘없이도 내가 다스려 보일 테니까.”
제국의 수정, 모든 원흉은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영원한 신의 힘. 영원에 집착한 황제가 비극을 일으키고 세 명의 괴물이 탄생했다.
나와 카스토르, 루스벨라.
괴물들의 시대는 나로 종식시킬 것이다.
“모든 대가는 내가 안고 가. 그러니 당신은 헤르난을 돌려내.”
「신에게 명령하는 자라니. 칼타니아스의 핏줄은 어찌 다들 이런 것이냐?」
짐승은 투덜거렸다. 그러나 짐승의 눈꼬리가 순간 부드러이 감겼다.
「그녀 손에 사로잡혀 그녀의 짐승이 되었으니 이 또한 운명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를 보지 못함은 신이라 하여도 마찬가지이니.」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는 칼타니아스가 아니지만 그녀의 후손. 오래된 맹약에 따라 나는 두 신의 사랑을 받는 네 명을 따르겠다.」
짐승의 눈동자가 나를 진득하게 바라봤다. 그 순간 발밑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거대한 원을 그렸다. 원 중심에 선 내게 짐승이 물었다.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헤르난이 이 운명에서 완전히 벗어나길 바라.”
「들어주겠다. 대가는……. 네 신력으로 하지.」
“영원히 사라지는 건가?”
「아니. 기다리면 다시 돌아올 신력이다. 나처럼 자비로운 신을 만난 것에 감사하도록.」
짐승이 더욱 가까이 다가와 이마를 댔다. 그의 힘이 밀려들어 오면서 나는 나를 구성하는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슬은 끊어졌다.」
빛에 에워싸인 짐승이 말했다. 나는 왜인지 이 공간이 금방 사라질 것이란 걸 느꼈다.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시대를 바꾸려 하는가?」
“그래.”
빛 사이로 짐승의 음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칼타니아스는 신의 힘으로 새 시대를 열고, 그녀와 같은 운명의 네가 종막시키는구나.」
시야가 아득해졌다. 이 공간에서 나가려는 모양이다. 나는 차츰 멀어지는 짐승에게 물었다.
“나를 원망해? 당신도 신이잖아.”
「글쎄. 내가 네게 칼타니아스와 같이 되길 바란다면 들어줄 텐가?」
“아니. 나는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야.”
「그래. 너는 칼타니아스와 다른 인간이다. 신은 변하지 않으나 인간은 변한다. 그러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버리고 가는 게 맞는 일이겠지.」
어느새 우리가 있던 공간도 유화처럼 녹아내렸다. 짐승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너는 신의 시대의 마지막 황제로구나.」
한순간 짐승이 사람처럼 보였다. 긴 튜닉을 걸치고 아주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잘못 봤나?’
눈을 깜빡이자 정말로 눈앞에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헤르난이었다.
“……헤르난?”
그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순간, 그의 뺨으로 뚝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코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헤르난.”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정말 헤르난이야……?”
그가 내 손을 뺨에 댄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침내 그가 눈을 떴을 때, 그곳에 자리한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네. 황녀님.”
그의 목소리를 듣자 울컥, 안쪽에서 북받쳐 올랐다.
“……저입니다.”
깨끗할 정도로 맑은 푸른색이었다. 한때, 여름의 호수를 떠올렸던 그때 모습 그대로 그가 나를 응시했다.
“정말, 당신이구나…….”
흐려지는 시야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정말…….”
나를 쥔 그의 손이 더욱 꽉 나를 붙잡았다. 이젠 알 수 있다. 이 순간에도 아프지 않게 잡는 그가 정말 헤르난데즈라는 걸.
“돌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울음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더는 내게 검을 겨눈 당신이 아니라서…….”
그 말에 헤르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죄송합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아니야.”
그러나 그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를 위로하려고 한마디 더 꺼내려 한 순간이었다. 그가 내 허리를 잡아당겼다. 눈 떴을 때, 그의 품 안이었다.
“저는 어째서 당신에게 매번, 끔찍한 죄를 짓는 것입니까.”
“헤르난? 일단 괜찮으니까 이것 좀 놓고 이야기하자.”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불편했다. 하지만 이내 내 목에 얼굴을 파묻는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짐승의 신께서 마지막이라며 제게 한 가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가 얼굴을 묻은 채 낮게 웅얼거렸다. 뭉개진 목소리가 차차 선명해졌다.
“아니, 제가 잊고 있던 기억이라 하더군요.”
나는 어깨를 토닥이던 그대로 멈칫했다.
“이 시간의 저는 기억할 수 없고 기억해선 안 되는 것이지만 마지막이기에 주는 선물이라고.”
“……아니. 아니. 그건 선물이 아니야.”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더는 말하지 마 헤르난.”
어느새 젖어 들어가는 어깨가 느껴졌다. 나는 억지로 그의 팔을 풀어냈다. 그러나 그의 팔이 더욱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는 꼭 어미에게서 떨어지기 싫은 어린 짐승처럼 나를 감쌌다. 꽉 안는 그의 체온이 아플 정도로 느껴졌다.
결국 수 초 뒤에야 나는 그를 떼어 냈다. 울어서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이 보였다. 나는 붉어진 눈을 손으로 가려 주었다.
“잊어.”
눈물마저 청초하고 아름다운 남자였다. 손 아래로 채 가시지 않는 눈물 줄기가 흘렀다.
“당신이 감당할 것이 아니야.”
어째서 이제야 당신이 내 죽음을 떠올렸단 말인가.
“사과는 의미 없던 것이었군요. 기억 못하는 자의 사과가 얼마나 공허하셨을지…….”
나는 나머지 손으로 그의 입마저 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니. 아니야. 헤르난.”
“죽음을 방관했다는 이야기가 이런 것이었군요. 사과를 해선 안 될 일이었습니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덮었다. 나는 나를 위해 우는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워 웃었다.
“나는 동정받을 삶을 살지 않았어.”
당신은 당신의 삶만으로도 버겁고 힘들었을 사람이다.
“그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이 있어. 헤르난. 그만 울어.”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착하지.’ 하고 장난처럼 덧붙인다. 그는 내 손을 꾹 눌러 잡았다.
“당신의 명을 따릅니다.”
이제 그는 명을 따를 필요가 없는데도 그리 말했다. 이윽고 손을 떼어 내자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눈이 보였다. 꼭 비 온 뒤의 하늘처럼 물기 어린 눈이었다. 하지만 청명한 눈동자는 더는 울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카스토르는 2황자님과 5황자님과 함께 있을 겁니다.”
그가 내 손을 잡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헤르난이 방의 위치를 말했다. 나 또한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한 힘이 함께야.’
카스토르의 힘 옆으로 어떠한 힘이 느껴졌다. 약하지만, 분명 주신의 힘이다.
‘이건 5황자의 힘일까?’
인상을 찡그리는데 헤르난이 이어 입을 떼었다.
“카스토르가 2황자님과 5황자님을 상대하는 동안 수정에 먼저 가셔서 대비해도 좋을 겁니다.”
의문을 느끼고 그를 바라봤다.
“대비라니?”
“네. 황녀님은 성물의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수정은 카스토르보다 황녀님을 먼저 따를 겁니다. 황제와 후계자를 우선순위로 따르는 성물이니까요.”
“약식이지만 내가 황제가 되어서?”
“예.”
헤르난은 두 가지 안을 말했으나 선택은 내게 맡겼다. 곧바로 율리안을 상대하는 카스토르에게 갈 것이냐, 수정으로 곧장 향할 것이냐.
“시간이 있다니 빠르게 물을게. 헤르난, 이전에 카스토르는 율리안 앞에서 살인을 하지 않는다 했어. 이게 무슨 말이었지?”
어느새 나는 존칭을 전부 생략한 채 말했으나 헤르난은 당황하지 않고 끄덕였다.
“제가 카스토르를 처음 만났을 때입니다. 그는 제게 이 땅을 멸망시키는 게 목표라 말했습니다.”
“그건 알아.”
“이후 그를 따르며 저는 카스토르를 향해 이전으로 돌아와 달라는 몇몇 나이 든 신관을 보았습니다. 하나 그들은 카스토르의 변화를 입에 담는 순간 모조리 죽었습니다.”
헤르난은 이런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율리안 님은 카스토르의 변화를 입에 담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분이셨습니다.”
“변화라면…….”
“어린 시절 카스토르가 아주 현명하며 사려 깊은 황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헤르난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복잡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카스토르는 그동안 율리안 님의 어떤 말에도 그분을 살해하지 않았습니다. 후계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그분이 없는 편이 이득인데도. 그분을 죽이는 순간 더는 감히 나설 사람이 없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오히려 카스토르는, 율리안 님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빠르게 말을 마친 헤르난이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았다. 그가 떨어트렸던 검을 잡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굉음이 터졌다. 내가 뛰어나온 홀이 있는 방향이었다.
‘다시 한 번 폭발이 일어났나?’
헤르난도 이를 느낀 듯 복도 끝을 향해 눈을 좁혔다.
“데로스군요. 황녀님, 저는 그가 또 어디에 불의 성물을 설치했는지 압니다.”
그는 불의 성물이 큰 폭발을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일단 알았어. 나는 이대로 수정이든 카스토르든 가 볼 테니까 저 뒤를 수습해.”
“네.”
“수습하고 빠르게 이쪽으로 와 줘. 아모르도 함께.”
왜인지 그가 살짝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이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예. 명을 따릅니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가 무릎 꿇은 채 치맛단 끝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운 당신을 위해서.”
그는 그대로 일어나 달려가 버렸다. 너무나 빠른 속도라 무어라 말할 새도 없었다. 어느새 복도 저 끝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도 등을 돌렸다.
이제는 선택해야 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일렁이는 힘이 눈에 보일 것처럼 느껴진다. 하나는 멀지 않은 방, 다른 하나는 까마득한 지하.
눈을 뜨니 어느새 갈림길 앞이었다.
나는 한쪽을 택해 달렸다.
* * *
인생은 항상 선택지였다.
죽거나 살거나.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 왕자처럼 나는 늘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닌 적이 없었다. 선택하지 않거나 포기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내 죽음은 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아픔과 죽음을 동반했다. 가장 처음 죽었던 날인 하베르미아의 달처럼 말이다.
억지로 주어진 선택지는 고통스럽다. 차라리 이 삶을 끝내고 싶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더라도 다시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온다.
반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나를 지탱하게 했던 이들은 나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수없이 반복하는 끝에서 지쳐 가던 내가 하녀들에게는 끝내 다정했던 이유는, 플뢰온과 데인에게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이유는.
‘변한 나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반복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사람들. 모두가 그대로인 세상에서 나 홀로 변해 버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음을 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사랑하는 이들에게 손 내밀지 않았다.
‘카스토르.’
이 순간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인간다움이 한 톨 남지 않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수천 번 반복했던 당신은 나보다도 더 마모되었을 것이다.
<내 마지막 남은 양심과 이 제국의 중심을 없애러 갈 거란다. 나를 쫓겠니?>
내게는 플뢰온과 데인이 있었다. 그렇다면 카스토르 당신에게는 누가 있었나?
율리안이다.
벌컥 문을 열었다. 길게 숨을 들이켜며 앞을 응시했다. 털썩. 눈앞으로 쓰러지는 형체가 보였다.
‘누구지?’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흐트러지는 새카만 머리칼이었다.
‘카스토르? 아니야.’
아니다. 머리칼이 짧고 체구가 작았다. 고개를 들자 카스토르가 보였다. 그의 앞으로 벽에 등을 붙인 율리안이 보였다.
‘이 사람은…… 5황자인가?’
5황자는 황족 중에 카스토르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황자였다. 좀처럼 바깥으로 나오지 않아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지만. 자세히 보니, 아주 앳된 얼굴이었다. 그의 옆으로 유리알이 깨진 안경이 보였다. 고개를 든다.
“아실리.”
카스토르가 반갑다는 듯 나를 불렀다.
“조금 전 헤르난과 사슬이 끊어진 걸 느꼈는데 네가 한 일이겠구나?”
어째서인지 아주 어두운 방이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은 카스토르의 얼굴에 사선 모양을 그렸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웃었다.
“헤르난은 두 가지 얘기를 해 주었을 것인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수정에 가거나 나를 찾아오거나. 두 가지였을 텐데.”
카스토르는 정확히 짚어 냈다.
“나를 택한 거니?”
그는 피로 적신 검을 늘어트리며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형님…….”
하얗게 질린 율리안이 카스토르를 부른 순간이었다. 카스토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얼른 손을 뻗었다. 손을 따라 펼쳐진 자색 나비가 순간 카스토르의 손을 휘감았다.
“율리안, 2황자가 당신의 마지막 양심이지?”
그의 침묵은 긍정을 대신했다. 후드득. 나비가 만들어 낸 사슬이 하나씩 끊어지고, 다시 내가 만들어 내는 힘겨루기가 계속 이어졌다.
“네가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고 너를 반기려 했는데 말이다.”
카스토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넌 예상을 벗어나곤 해.”
카스토르는 반항을 멈추고 붙잡힌 채로 나를 응시했다. 집요할 정도로 광기 어린 시선이었다. 그가 천천히 미소를 덧그렸다.
“맞아. 여기 있는 내 동생은 내게 마지막 남은 양심이란다. 평범한 인간일 때부터 남은 마지막 마음이기도 하겠구나.”
그는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했다.
“한때는 아주 우애 좋은 형제였지. 아실리, 이전에 나는 시간의 반복을 벗어나는 방법을 안다고 했다. 그 저주를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니?”
난 각성했지만 저주에서 풀려난 것은 아니었다. 카스토르는 마치 이를 안다는 듯이 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이 손으로 살해하는 것이지.”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와 내 기운이 뭉치고 뭉쳐 일으킨 충돌이었다.
쾅.
이미 창살이 우그러지고 유리는 깨진 지 오래였다. 그와 내 신력은 마치 상극이라도 되는 듯 이어 충돌을 일으켰고, 그 충격에 기둥에 금이 갔다.
“큭. 안 돼!”
본능적으로 폭발의 여파를 짐작했다.
‘이 방만 무너지는 게 아냐!’
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황급히 힘을 바닥으로 끌어모았다.
‘퍼지면 황궁이 무너진다. 충격을 지하로, 지하로 바꿔야 해.’
저적저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금이 간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곧이어 땅 밑이 와르르 무너지고 한없이 추락했다. 몸이 허공을 부유했다. 다가올 충돌을 생각해 머리를 보호하고 웅크렸다.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에는 아무리 나라도 거센 통증을 느꼈다.
“콜록콜록!”
난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율리안. 율리안은 살아 있나?’
등을 희미하게 파고든 고통을 이겨 내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새카만 공간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방과 달리 안이 훤히 보인다. 중앙에서 거대하게 어둠을 밝힌 거대한 광구 때문이었다. 벽으로 그림자가 일렁인다.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하는 신비로운 빛, 나는 이 빛을 알고 있다.
‘맙소사.’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여긴……. 황궁 지하?”
거대한 수정이 눈앞에 있었다. 바닥은 온통 돌과 부스러기로 가득했다. 자욱한 먼지바람이 가라앉자 빛이 더욱 도드라졌다.
‘그 방 지하에 수정이 있었다니.’
카스토르는 의도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 고려했을 것이다.
‘수정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을 테니까.’
아직 떨어진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카스토르와 율리안을 찾아 시선을 굴렸다.
그때, 수정 옆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덕분에 일이 쉬워졌구나. 아실리.”
카스토르였다. 그는 한손에 율리안의 멱살을 쥔 채였다.
‘설마 율리안을 살린 건가?’
주신의 후계자인 카스토르와 「죽음의 후계자」인 나는 이 정도 추락에도 죽지 않는다. 하지만 율리안은 비신관이다. 수정 빛에 드러난 율리안은 군데군데 생채기가 있었으나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를 보자마자 몰래 보냈던 보랏빛이 그의 검에 갈라져 사라진다. 마치 내 수를 읽은 듯이 빠른 손속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율리안이 움직이지 않아.’
그는 기절한 것인지 눈감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나 카스토르가 든 검은 금방이라도 율리안을 벨 것 같았다.
“율리안은 기절했구나. 이대로 죽으면 너무나 편안한 죽음일 테지.”
반쯤 어둠에 잠긴 그가 웃는 듯했다.
“율리안을 죽이면 네게 무엇이 남는데?”
카스토르는 검을 멈췄다.
“남기기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니란다.”
그리고 율리안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하지만 쓰러진 그를 향한 검은 여전했다.
“오히려 남김없이 없애기 위해 하는 일이지.”
그가 고개만 돌려 나를 향했다.
“저주 얘기를 하다가 말았구나. 그렇지? 너도 모든 걸 아는 편이 좋을 테니.”
그 말에 흠칫하고 손을 떨었다.
“이 저주가 어디서부터 유래되었을지도 알면 좋겠구나.”
천장을 바라보니 얼마나 떨어졌는지 짐작도 못할 정도로 깊었다. 꺾었던 고개를 바로 하며 그를 향했다. 수정의 오묘한 빛이 얼룩진 얼굴로 그는 입을 떼었다.
“오래전 주신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초대 황제에게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부여해 시간을 반복하게 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해, 언젠가 자신을 택하도록.”
그는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던 진실을 말하며 녹진하게 미소했다.
“초대 황제는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반려를 이용해서 저주를 벗어나고, 벗어난 뒤에 소원을 빌었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수없이 많이 들었던 초대 황제 이야기였으나 카스토르 입에서 나온 것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면의 이야기였다.
“더는 주신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주신을 이 땅에 머물게 하자. 그렇게 나온 소원이 이것이었지. ‘당신이 이 땅에 머물면서 이 땅을 영원히 번영하게 해 달라.’”
수많은 역사가들이 찬양했던 황제의 마지막 소원. 그 소원에는 절박하고 추악한 진실이 숨어 있었다. 마침내 껍데기가 부서지고 새빨간 이면이 드러났다.
그의 눈동자로 더욱 거친 금빛 기운이 휘몰아쳤다.
“후손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은 소원 덕에 이후 황족은 끔찍한 저주를 겪었어. 힘은 차차 변질되고 저주는 악몽이 되었지.”
카스토르의 눈에서, 더욱 거센 광기가 해일처럼 일어났다. 그는 이제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천 번 주변인들이 죽었단다. 그리고 이 저주는 어린아이에게 세상이었던 이를 죽이게 했지. 그 속에서 형제도 우애도 덧없는 것이 되더구나.”
그 속으로 처음 보는 표정이 드러났다.
“아실리. 같은 처지에 놓인 자가 왜 필요한지 아니? 아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의 눈은 이제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정신을 잃은 동생을 향했다.
“율리안. 내 아우는 말했듯 내게 마지막 남은 양심이었단다. 수천 번 반복 속에서 변함없는 아우가 참으로 애처롭고, 사랑스러우며.”
카스토르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서 들렸다.
“증오스러웠지.”
심장이 거세게 울렁거렸다.
<……카스토르를 좋아해요?>
<응? 그 말은 이상하구나. 형님인데 어찌 싫어할 수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