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데인 로웰
날 때부터 기었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날 때부터 빨리 걸었던 자가 있고, 심지어 누구보다 빨리 말을 구사하는 자가 있다. 이것이 지능에 해당하는 영역이라면 데인 로웰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이였다. 그러나 천재는 행복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그는 행복이란 단어를 배우기 전에 행복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먼저 깨우쳤다. 이 또한 그가 너무나 머리가 좋았기에 깨달은 사실이기도 했다.
데인의 모친, 7황비는 방랑벽이 심한 여자였다. 그들의 뿌리가 집시임을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외조부는 롬의 수장이었고, 롬의 수레바퀴가 제국에 정착하기를 바랐다.
“싫어요! 싫어요, 아버지!”
데인의 모친은 황제와의 결혼을 죽도록 거부했다. 얽매이는 건 딱 질색이었다.
“그냥 우리 돌아다니며 살아요. 네? 선조들처럼 그리 살아요. 제발.”
그러나 롬의 수장의 생각은 달랐다. 방랑하는 삶이란 철없는 딸의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방랑하며 무예와 기예를 팔았다. 때로는 남녀 가리지 않고 몸을 팔았다. 그 과정에서 핍박받고 조롱당해도 반박조차 없이 빠르게 자리를 피해야 했다.
어렴풋이 그 삶을 기억하는 롬의 수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그의 딸은 황제와 혼인했다. 그것을 대가로 롬의 수레바퀴는 황제의 비밀기관 ‘황제의 그림자’가 되었다.
이미 그들이 무수히 해 왔던 일이기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를 포함한 원로들뿐만 아니라 젊은이들도 그러했다. 그리고 이들은 데인의 모친의 희생을 당연시 여겼다.
제국은 사계절이 따듯한 나라였다. 매해 곡식은 풍성하게 영글어 풍년이니 먹을 것이 부족할 일이 없다. 부족함이 없으니 자연히 사람들도 여유롭고 베풀 줄 알았다. 이것이 지나쳐 사치스럽고 향락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롬에게 적격이었다. 원래 이들은 기예와 예술에 뛰어난 집시들이었으니까.
데인의 모친은 온갖 역정을 내며 혼인했으나 누구보다 빠르게 황궁에 적응했다. 방랑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모친은 황제를 본 순간 사랑에 빠져 버렸다.
‘난 황제 폐하를 사랑해. 나만 봐 주셨으면 좋겠어!’
칼타니아스 황족, 그중에서도 주신의 힘을 가진 이들은 타고나길 남을 끌어들인다. 불행히도 데인의 모친은 이 힘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는 체질이었다. 아니 그녀의 마음이 이를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이끌림은 힘에서 시작했으나 마음은 진심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내가 낳은 아이가 신관이 아니라니!’
그녀는 황제의 눈에 들고 싶었다. 이미 그녀 말고도 6명의 황비가 있었다. 초조하던 중에 그녀가 낳은 아이는 신관이 아니었다.
황제는 신관인 아이만 총애했다. 가뜩이나 신관이 아니기에 황제의 눈에 들지 못했던 7황비이다. 그녀의 집착은 데인이 비신관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광증으로 도지고 말았다.
“네가! 네가 신관이 아니라서!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거야. 내가 왜! 왜!”
데인의 모친은 막 기기 시작한 데인을 구타했다. 데인의 팔다리가 연약한 것은 그녀에게 고려되지 않았다. 데인은 불행히도 너무나 똑똑한 나머지 모친의 모순된 면을 이해하고 말았다.
“흐흑, 아가, 아가 미안해……. 네 탓이 아닌데. 네 탓이 아닌데…….”
악귀처럼 그를 때리다가도 밤이 되면 그를 붙잡고 흐느껴 울었다. 본디 방랑벽이 심한 여자였다. 갇혀 지내며 상사병까지 앓게 되자 광증과 편집증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모친은 결국 정신을 놓고 말았다.
“흐응, 흐응, 어여쁜 우리 딸. 엄마가 예쁘게 머릴 묶어 줄게.”
“……난 딸이 아니에요. 어머니.”
“그럼 엄마도 좋아해. 우리 예쁜 딸!”
데인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모친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목까지 긴 그의 머리를 묶었다, 다시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그는 그녀가 싫증 내기를 기다렸다가 몰래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 모습 뒤는 아마 패악을 부리실 때니까.’
모친의 조울증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다. 기억도 퇴화하며 데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때론 그를 딸처럼 대했다. 오늘도 그녀의 손아귀에 못 이겨 데인은 원피스를 입었다. 그러나 워낙 아름다운 얼굴이었기에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어머니는 네가 모시거라. 할 수 있지? 쯧, 들어가려 하는 하녀가 없으니.>
이미 7황비 궁에는 하녀도 오지 않은 지 오래됐다. 나오는 족족 모친이 패악을 떨어 쫓는 데다 롬은 뒷배라고 보자니 아직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롬의 사람을 보내지 않는 건 그마저도 아깝기 때문이겠지.’
데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정원으로 향했다.
<너는 롬의 하나뿐인 후계자다. 반드시 우리 롬을 제국에 정착시켜야 한다. 알겠느냐?>
여덟 살이 되며 그는 더욱 많은 걸 알았고, 추측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자신의 능력은 숨기는 편이 더욱 낫다는 걸 알았다. 이미 무심코 튀어 나간 그의 발언으로 주변에서 예사롭지 않게 보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귀찮네.’
데인은 조용한 것이 좋았다. 어릴 적부터 모친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원은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뭐지? 어린애?’
꼬물꼬물 작은 등이 움직였다. 그에 따라 작은 그림자도 함께 요리조리 움직였다. 기묘한 광경에 데인은 책을 든 그대로 멈춰 섰다. 갑자기 튀어나온 소녀는 그런 데인을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헐, 대박.”
아니 말을 건 건 아닌 듯했다. 소녀는 흙을 만지던 손 그대로 입을 가렸다.
“겁나 예쁘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얼른 탈탈 손을 털었다. 미인 앞에서 이런 추태라니 중얼거리기도 했다.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조금 구분 안 되긴 한데, 치마를 입었으니 여자애겠지.’
소녀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안녕, 아가야?”
데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아가? 누가 아가란 말인가. 데인은 올해로 여덟 살이었다. 그는 또래보다 살짝 작은 편이나 많이 모자란 편은 아니다.
반면 저 소녀, 아니 소녀라 불러도 좋을지 모를 어린애는 어떤가. 네 살? 다섯 살은 되었을까? 통통한 볼 살에 아직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걷는 게 용하다 싶은 외양이었다.
“다섯 살은 됐니?”
“실례야. 여섯 살이거든.”
소녀가 새침하게 팔짱을 끼며 웃었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데인이 알기로 저 나이대 아이들은 아직 움직임이 좀 부자연스럽다. 롬의 아이들만 보아도 그랬다. 한창 배울 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녀는 무척 자연스러웠다. 더구나 어휘마저도 나이답지 않다.
“넌 누구야? 이름은 뭐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던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여기 주인이니?”
“그래. 그렇다고 해 둘게.”
“어머나, 세상에. 멀지 않은 곳에 이런 미인이 있었다니!”
“뭐?”
“언니라고 불러 볼래?”
데인은 잠깐 소녀가 그의 어머니처럼 정신을 놓아 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머니 덕분에 의학 지식도 갖춘 어린 천재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눈빛이 또렷해.’
그럼 제정신으로 이런다는 건데. 데인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듯 소녀를 보았다. 한편으로는 뛰어난 자, 천재들의 호기심이 말랑말랑 피어올랐다.
“나는 남자야.”
“아하. 그래?”
소녀는 잠시 턱을 짚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홀로 무언가 깨달은 얼굴이었다.
“뭐, 남자도 치마가 입고 싶어질 때가 있는 거지. 이해해. 누나는 눈이 깨어 있는 사람이야.”
“……크게 오해한 것 같지만 넘어갈게.”
그러자 소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데인을 바라봤다.
“되게 나이답지 않네. 너 애늙은이란 소리 많이 듣지? 아니다. 그거랑은 좀 다른 느낌인데 뭐지.”
“그건 뭔데?”
데인은 자신이 모르는 단어가 있다는 데에 호기심을 느꼈다. 소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 나 이만 가 봐야 해. 몰래 나온 거거든. 늦으면 한나인가, 걔가 울어.”
“잠시만, 너! 이름이 뭐야?”
소녀가 빙그르르 돌았다. 데인이 잠시 당황했을 때였다. 소녀가 다시 반 바퀴 돌았다.
“누나 이름 함부로 묻는 거 아니다?”
소녀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농이었다며 다시 한 번 웃었다.
“나는 아실리, 아니다.”
잠시 멈칫하며 망설이던 소녀는 이내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안’이라고 불러 줘.”
* * *
소녀와의 첫 만남은 인상 깊게 남았다. 데인은 그 이후로도 소녀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정원에 나갔다.
소녀는 간헐적으로 궁에 나타났다.
“안녕, 생각해 보니까 네 이름을 듣지 못했더라고.”
“데인. 데인 로웰.”
“데인?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내가 아는 엄청 잘생긴 사람도 데인이었는데.”
안의 취미는 쪼그리고 앉아 한참 동안 데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거였다.
여섯 살이라고 들었지만 소녀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톡 치면 떨어질 것같이 커다란 눈이 처음 자신을 향했을 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차츰 그 시선에 적응했다.
“너 있잖아. 크면 내 이상형이 될 것 같아.”
“푸웁!”
데인이 마시던 물을 뱉었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던 데인이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봤다.
“도대체 그런 말은 누가 가르쳐?”
“그거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의술의 학문과 실제적 사항의 재조립』? 이런 걸 어느 여덟 살이 읽니?”
처음엔 데인이 겉멋이 들어 이런 어려운 책을 들고 다니나 했던 안이다. 왜, 어린애들은 부모가 뭘 하든 따라 하려 하니까. 그러나 같이 지내면서 알았다.
눈앞의 소년은 모든 걸 알고, 이해했다. 이 어려운 책을 이해했고 그녀가 던지는 애환도 유심히 관찰하다가 이해했다.
“에고고. 삭신이 쑤시네. 네 궁은 너무 멀어. 이정도 거리는 자전거로 딱인데.”
“자전거?”
몇 번 안의 설명을 듣더니 어느 날 데인이 내민 걸 받고 얼마나 놀랐던가.
“지난번에 말한 자전거. 이렇게 생겼어?”
“……와. 세상에 마상에. 이러지 마. 우리 못 본 것으로 하자. 내가 차원 간에 깽판 놓는 사람이 된 것 같으니까.”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비비는 안을 보고 난 데인은 다신 같은 행동을 하진 않았다.
<미친놈. 미친놈이야. 어떻게 하루 만에 저걸 다 외워! 저 새끼는 사람이 아니라고!>
<괴물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