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아올레시아
깊은 밤, 소녀는 밤을 한눈에 담았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자욱한 별빛을 그린 하늘이 아니었다.
“황가의 방계 자손이라.”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방계는 존재 자체가 금지된 걸로 아는데요…….”
이곳은 테레나 궁. 웬 낯선 이들이 아올레시아의 궁에 들어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아선, 이 궁이 비어 있는 줄 아셨나 보네요.”
“아아.”
분명 그녀의 앞에 선 여자는 제국 제일의 검이라 불리는 마리사였다. 휘날리는 붉은 머리가 그 증거였다.
“실수인 것 같네.”
아올레시아가 시선을 마리사의 뒤로 옮겨 당황해 눈을 데구루루 굴리는 여자를 바라봤다.
“반란이라도 도모할 생각인가요?”
아올레시아가 손끝으로 검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눈을 내리깔며 맑게 미소했다. 고갯짓을 따라 자색 은발이 달빛에서 요요한 빛을 드러냈다.
“안타깝지만 버려진 궁에도 주인이 생겼답니다.”
모두가 버려진 궁이라 알고 있는 테레나 궁은 얼마 전 새 주인을 맞이했다. 바로 아올레시아 그녀였다. 황제의 명으로 고향에서 억지로 끌려와 갇힌 「죽음의 후계자」를 모르는 건 그 자리에 없던 사람뿐이다.
“1황녀님. 처음 뵙는군요.”
가령, 윌터 왕국으로 잠시 떠나 있던 1황녀라거나.
아올레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1황녀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타국으로 떠났던 1황녀와 그녀가 데려온 남자는 방계손 「주신의 후계자」라…….’
저 남자는 다름 아닌 금기시된 방계 황손이었다. 미미하게 느껴지는 주신의 힘이 증거였다.
‘아무리 봐도 반란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데.’
남자의 머리는 금발이지만 색이 바랬다. 얼핏 황가의 상징인 고운 금발을 연상시켰으나 황제가 가진 찬란한 것과는 대비되는 색이었다.
또한 실루엣이 황제와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가 조금 다르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옆모습을 바라보며 아올레시아가 눈을 얼핏 찡그렸다.
저 남자는 황족이었을 누군가의 자손이 분명했고 제국은 방계 혈통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이 말인즉 1황녀는 감히 존재해선 안 될 자를 데려온 것이다.
“아, 저, 바, 반란, 반란?”
이름 모를 남자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한편, 1황녀는 이미 당황을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함박 미소를 띠었다. 마리사가 말리거나 말거나 뚜벅뚜벅 걸어온 1황녀가 아올레시아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알았니? 맞았어! 난 반란을 일으킬 거야.”
“황녀님!”
아올레시아가 놀라 1황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 끝으로 마리사가 홱 찡그리며 이마에 손을 얹는 모습이 걸렸다. 의도한 소리는 아니었다는 소린가.
“너 정말 똑똑하다!”
짐짓 입꼬리를 끌어 올린 1황녀가 아올레시아를 잡고 있는 손을 아래위로 크게 흔들었다. 그 행동은 아올레시아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계속되었다.
“……진심인가요?”
아올레시아가 겨우 충격에서 빠져나와 겨우 물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낯이었으나 무척이나 고왔다. 이에 1황녀가 작게 감탄을 토해 내며 말했다.
“진심이면 좋겠어?”
아올레시아가 침묵하자, 1황녀는 크게 미소했다.
“하하하. 물론 농담이야.”
그녀는 곧 소리 내어 웃었다. 얼굴에 걸친 유리알이 달빛을 반사하며 푸른빛을 띠었다. 1황녀는 제국민은 사용하지 않는 윌터의 물건을 얼굴에 걸치고 있었다. 안경이었다.
“하지만.”
1황녀의 동그란 유리알 안쪽에 찬연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자리해 있었다.
“언젠가 실현할 진심이기도 해.”
홍채 속에서 가늘게 일렁이는 금빛 사선, 그것은 참으로 예쁘고도 경이로운 빛이었다. 아올레시아는 당황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도대체……. 지금 이건 제정신으로 하는 말일까?’
이미 1황녀가 「주신의 후계자」라는 것은 아올레시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알다시피 황녀는 황위를 이을 수 없다. 이것은 법과 정의의 신 테미스가 수호하는 지엄한 국법으로 정해진 일, 그러니 이 황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뜻을 알 수 없었다.
‘황녀가 반란이라니.’
또한 제국엔 적법한 후계자가 이미 있었다. 아홉 살 난 카스토르의 힘은 날로 강해지고 있었으며, 강력한 후계자가 있는 이상 1황녀의 계승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올레시아가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그러는 너는 「죽음의 후계자」. 맞지? 죽음의 신전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 그렇지 않아도 네가 수도에 왔다는 이야긴 들었어.”
1황녀가 끄덕일 새도 없이 바로 이어 말했다.
“아바마마가 널 여기 가둬 둔 모양이구나? 넌 인질이겠지.”
“……글쎄요. 황제께서 저를 왜 인질로 두시겠어요?”
아올레시아는 태연하려 애썼다.
“왜겠어. 「죽음의 후계자」는 「주신의 후계자」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신관이니까 그런 것이겠지. 무엇보다 지금은 사라진 죽음의 신은 본래 주신 다음가는 2등위 신이었잖아? 주신이 유폐해 버렸지만.”
“금기된 역사를 읊으심은 옳은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들었어. 죽음의 신전에 강력한 후계자가 태어났고, 그게 여자란 걸 말이야. 그래서 데려왔다지? 죽음의 신전을 견제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나 1황녀는 아올레시아의 차분한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았다. 아올레시아가 생각하기로 1황녀는 자신의 말만 좋을 대로 하는 사람인 듯했다.
“아바마마는 제국이 어지러워지는 걸 경계하는 분이니까.”
아올레시아가 눈치챈 것처럼 1황녀 또한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리고 그녀가 여기에 갇히듯 머물게 된 이유까지도 말이다. 아올레시아가 만만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1황녀가 손을 놓았다.
“근데 네 예상은 틀렸어. 우린 대단한 반란 모의씩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셋이서 반란이라니 우습잖니.”
1황녀의 동그란 눈이 휙 접혔다.
“그저 저 애에게 황궁을 구경시켜 주려고 잠시 들어온 거고, 금방 나갈 생각이었어. 아무리 나라도 이건 위험하거든.”
1황녀가 씨익 웃고는 아직도 멍하니 서 있던 남자를 아올레시아의 앞으로 끌고 왔다.
“자자, 너도 인사해. 아실론. 전에 말한 적 있지? 보라색 눈동자는 어떤 신관이라고?”
“주, 죽음의 신관?”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꽤나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좋아. 누나의 가르침을 잘 배웠구나. 빨리 인사하렴.”
“아, 안녕하세요.”
1황녀에게 떠밀린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아올레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저, 아실론이라 하고, 평민이라 성은 없습니다.”
귀로 내려앉은 음성은 나지막하니 노래하듯 편안한 음성이었으나, 그녀가 듣기에도 잔뜩 얼어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1황녀님과는 아주아주 먼 친척……입니다.”
달빛을 배경으로 역광을 쬔 남자의 실루엣이 점차 아올레시아의 시야로 들어왔다. 가까이서 남자를 본 아올레시아는 놀라고 말았다.
그는 얼어붙은 목소리로는 상상 못했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축 아래로 처진 눈동자는 촉촉했고, 이목구비가 조화로웠다. 다시 말해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할까. 뛰어난 미인들이 많다는 미와 사랑의 신관들에 익숙해진 아올레시아조차 인정할 만큼 말이다.
“방계라는 거죠?”
“네? 네네.”
꼼꼼히 뜯어보니 남자다운 것보다는 귀엽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이건 퍽 사내답지 못한 태도 때문이기도 했고, 또 고양이처럼 축 내려간 눈꼬리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다 눈동자는 금색과 갈색이 섞인 오묘한 색이다.
‘흐응……. 억울한 표정을 잘 지을 것 같은 얼굴이네.’
아올레시아가 조금 엉뚱한 생각을 했다.
“저기…….”
남자가 아올레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을 당당히 바라보는 아올레시아의 시선에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말씀하세요.”
아올레시아는 달빛 아래 남자의 얼굴이 상당히 붉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저는 평민이니 말은 편히…….”
왜일까. 남자가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귀까지 잔뜩 붉혔다.
“대화에 성은 필요치 않다 생각해요.”
“네?”
“신분에 연연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본래라면 황족인 저쪽이 윗사람이나 금기된 존재니 아올레시아가 높은 쪽이 맞았다. 그러나 이런 건 그녀에게 하등 상관없었다. 우물쭈물한 태도는 그녀가 딱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아올레시아도 예의를 담아 소개했다.
“반가워요. 아올레시아입니다. 죽음의 신전 후계자예요.”
그렇게 아올레시아가 예의상 미소한 순간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올레시아는 신기한 순간이라 생각했다. 마치 시간이 되감아진 것처럼 천천히 느리게 지나가는 이 순간이, 남자의 뺨과 귀를 걸쳐 물들이는 붉음이 꼭 봄에 흐드러진 꽃과 같다 생각할 때.
“저, 저!”
“……네?”
덥석. 남자가 들어 올린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가 굳은 낯으로 아올레시아를 응시했다. 덩달아 긴장한 아올레시아가 눈을 크게 깜빡였고, 이내 남자의 모양 좋은 입술이 떨어졌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돌이켜 보면, 아올레시아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던 시간은 진정한 친우와 만났을 때.
“야, 이 미친놈아!”
“꺄악! 마리사, 때리지 마!”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때였다.
* * *
“황제가 황녀를 리프예국으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아올레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눈앞을 가득 메우던 그리운 얼굴이 사라지고, 대신 그곳에 단아한 여성의 얼굴이 자리했다.
“그곳에는 눈과 바다의 신관이 있지 않습니까?”
눈앞에는 6황비 이오스테가 있었다.
“그렇지요.”
아올레시아는 마치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았다는 듯이 이오스테를 향해 빙긋 미소했다.
“눈과 바다의 대신관은 그대와 연관이 깊은 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이오스테는 한때 불카누스란 대신전의 후계자였던 자로 뛰어난 두뇌와 눈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많은 것을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이오스테께서는 제가 일부러 황녀를 눈과 바다의 신관에게 보냈다 생각하시는 군요.”
“네. 그자는 한때 당신을 열렬히 사모했던 자였으니까요.”
수천 년 전부터 죽음의 신전과 눈과 바다의 도시는 각별한 교류를 나누었다. 그들의 신들이 서로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지하를 다스리는 죽음의 신은 주신과 형제로 그와 대등하게 여겨지는 존재였다. 눈과 바다의 신은 죽음의 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런 군신 관계는 신관 사이에도 이어져 눈과 바다의 신관은 늘 죽음의 신전에 충성을 다하곤 했는데, 눈과 바다의 대신관 폰투스라면 죽음의 신전에 유달리 더 충성했던 자였다.
‘유명했지.’
그자가 아올레시아에게 푹 빠져 앞뒤 가리지 않고 구애했던 사실은 소문에 무지한 이오스테도 알 정도였다.
‘물론 20년도 전에 이야기지만.’
아무튼 간에 이 시기에 황녀를 밖으로 내보내다니, 황제의 명이라고 하나 이오스테는 믿지 않았다.
“이대로 황녀를 멀리 떠나보낼 생각이십니까?”
황제를 제 손 안에 두고 좌지우지하는 여자다. 수를 쓰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아올레시아는 미소만 깊이 지을 뿐 도통 입을 열질 않았다. 이오스테가 눈썹을 조금 치켜세웠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입을 떼어 내려 할 때, 아올레시아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당신은 어떤가요? 황녀가 멀리 떠나길 바라나요?”
아올레시아의 목소리는 이성을 유혹하듯 녹진했지만, 물기 마른 모래처럼 어딘가 건조했다.
“글쎄요. 가능하다면.”
이에 이오스테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아실리 로제, 그 어린 황녀. 비록 자주 얼굴을 본 것은 아니나 오래도록 곁에서 돌본 아이였다. 자주 보지 않은 까닭은 소녀를 보면 여러 감정이 교차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비극을 맞이하는 편보다는 낫다 여겨집니다.”
“당신답네요, 이오스테.”
“허어. 그건 무슨 뜻이십니까?”
이오스테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 아올레시아를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엔 단아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사실 누구든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6황자 플뢰온의 눈매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알아차리곤 했다. 정작 이오스테는 플뢰온을 보며 오래전 황제의 손에 죽은 그녀의 오라비를 떠올렸지만.
“그저 당신은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으니 다른 이에게는 가차 없이 말했으려니 하는 거랍니다.”
그러나 날이 선 시선임에도 아올레시아는 그 시선을 차분히 받아넘겼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어 보이며 이리 말하기까지 했다.
“그대는 그대의 아이에게도 정을 내어 주지 않는 사람이니까. 황녀를 아끼는 그대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그건 타인의 호의를 믿지 않는 이오스테의 성격을 꿰뚫는 말이었다. 이오스테가 이내 눈을 깔았다. 그녀는 말을 할까, 여기에 대해서 고민했다. 곧 이오스테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남 일같이 말씀하지 마십시오. 황녀는……. 그대의 딸입니다.”
“그런가요?”
이오스테가 차분하게 아올레시아를 올려다보았을 때, 아올레시아는 변함없는 얼굴로 미소하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해요.”
그 말에 이오스테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로 한숨 같은 긴 숨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어째서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겁니까.’
그녀는 한탄하는 동시에 감탄했다. 지금 이 감탄은 눈앞의 여자가 몹시도 아름다웠던 탓이다.
미와 사랑의 여신의 신관이 가장 아름답다 하더니……. 아침의 유리를 조각내 심어 둔 것처럼 은은한 은발은 마치 누구도 밟지 않은 새하얀 설원을 보는 기분이었다. 달빛을 조각조각 썩둑 썰어 곳곳에 숨겨 둔 것일까. 신비로운 매력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때로…… 너무 아름다운 것은 슬픔을 불러오는구나. 이것은 내가 그녀의 연유를 알기 때문인가.’
그러나 이오스테가 느끼기에 아올레시아의 아름다움은 생기가 사라진 식물이었다. 누군가 허락 없이 뽑아 버린 나무, 죽어 버린 인형. 그래, 섬세하게 만들어진 유리 조형물 같았다. 그리고 이오스테는 이런 느낌을 알고 있었다.
평생 스스로를 바라보며 느꼈던 것과 같았으니까.
“아올레시아. 나는 그대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했습니다.”
자신의 두 손을 응시한 이오스테가 조소했다.
“그 아이의 교육부터 그 아이의 내성의 일. 또한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도록 뒤를 알게 모르게 봐주었습니다. 내가 찾지 못하기에 내 아이가 정을 붙이게 했습니다.”
“네. 그러했지요, 이오스테.”
이오스테가 잠시 망설였다. 이내 날숨과 함께 진심을 토해 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그대의 아이를 어여삐 여기고 정을 주었습니다.”
오래전 이오스테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아올레시아였다. 황제를 함께 원망하고 미워하자고 그리 말했다. 이오스테는 그 손을 잡았다.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절망스러웠으니까. 그때부터 이오스테는 깊은 절망에서 자신을 건져 낸 여자, 아올레시아가 시키는 것을 그대로 따랐다. 거기엔 아실리 로제에 대한 것들이 전부였다.
“정이라……. 황녀가 그리도 사랑스럽던가요?”
아올레시아는 망치와 모루를 잃고 슬퍼하는 이오스테를 알고 있었다. 위로는 적절했고 충성스러운 그녀를 얻었다. 이젠 그녀도 이유를 들을 차례였다. 이오스테가 꼿꼿이 등을 세운 채, 아올레시아의 답을 기다렸다.
“모든 걸 잃은 그대에게 채워질 만큼?”
아실리 로제는 분명 그녀의 아이임에도 아올레시아는 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오스테가 느끼기에 이것은 억지로 정을 떼 놓으려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이다가도 때론 정말 무감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글쎄요. 사랑스럽다……. 그 표현의 뜻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올레시아.”
“네.”
“그 아이는 황궁의 유일한 꽃이라 불립니다.”
“네. 그러하지요.”
지금의 아올레시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제 딸에 대한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왜 그 아이는 꽃으로 불려야 합니까?”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사람은 그저 가만히 피어 있는 꽃이 될 수 없습니다.”
아실리 로제는 태어나면서 이미 많은 것이 정해져 있었다. 전부 아실리 로제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녀는 드레스를 입을지 다른 옷을 입을지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방만하거나 멋대로 굴 자유를 잃었다. 한 마리 우아한 백조처럼 시선과 몸짓을 통제하며, 조신하고 얌전하게 자신을 정제하는 과정을 거쳤다.
“모두가 그 아이를 ‘꽃’이라 부를 때, 나는 홀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가요?”
언젠가 정해진 혼처를 위해 가다듬는 영애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이었다. 창살 없는 뇌옥. 채 여덟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받는 수많은 교양 수업을 바라보며 이오스테가 느낀 것이었다.
“이런 나의 마음이 곧 당신의 마음이 아닙니까? 나는 당신과 내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 또한 신관이기에 이곳에 끌려와 모든 걸 잃고 황제의 첩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는 황녀입니다. 황녀가 걸을 길이 우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미 오래전 황제에게 찬란한 미래를 잃었다. 그때 모든 희망을 잃었다. 그녀와 아올레시아는 절망으로 승화된 자들이며 아실리 로제는 잃을 것이 예고된 이였다.
“설사 혼사를 치른다고 해도 황녀의 끝은 제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오스테의 고향 불카누스의 신전은 모든 것에서 자유로웠다. 그곳에선 그녀에게 무엇 하나 강요하지 않았다.
예쁜 미소, 하얀 손, 아름다운 드레스……. 전부 이곳으로 오게 되며 강요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변했다. 그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그녀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가 되었다.
‘불카누스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에……. 낯설었다.’
아실리에게 느끼는 이것은 그녀가 누군가의 어미이기에 느끼는 걸까? 모르겠다. 그녀는 아실리가 안타까웠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녕 누군가의 어머니이고 시녀들이 그토록 강요하던 모성애 때문인가?
아니. 이오스테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모정이 없는 사람이다.
‘신력을 가진 여자가 죽지 않으려면 황제의 첩이 되는 세상이다.’
아올레시아도 이러한 기분을 알 것이라 생각했다. 억지로 낳은 아이를 사랑해야 하는가? 글쎄, 이오스테는 살아갈수록 모정이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제국에 환멸을 느낍니다.”
이오스테가 고개를 들었을 때, 청명하고 고운 낯이 바로 앞에 있었다.
“아올레시아,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는 때때로 아올레시아를 볼 때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득하고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많은 것을 잃은 자만이 공감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조차도 말이 없군요. 답답합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이오스테는 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가는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가슴 한편에서는 연민과 동정이 일었다. 그녀의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초연한 저 표정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오스테.”
먼 곳을 바라보던 아올레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낮에 뜬 달처럼 은은한 머리칼이 석양빛을 화사하게 반사했다. 아올레시아가 천천히 입을 떼어 냈다. 유혹하듯 살살 휘던 눈웃음을 지워 낸 낯은 정제된 우물의 물처럼 깨끗했다. 바꿔 말해 속이 훤히 보이는 통처럼 텅 비어 보였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답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대를 답답하게 만들었을 줄은 몰랐어요.”
아올레시아가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반란은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나요?”
그 말에 단아하던 이오스테의 표정이 순식간에 찡그려졌다, 그녀가 고개를 휙 치켜올렸을 때, 경계 어린 눈동자가 아올레시아를 향했다.
“알고 계셨군요.”
“그럼요. 어찌 모르겠어요.”
아올레시아는 새벽별처럼 시리게 미소했다.
“그대가 제게 연락이 뜸해진 순간부터 알게 되었답니다. 기다리는 데 지친 당신이 2황자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걸요.”
찡그린 표정의 이오스테가 테이블 아래의 손을 쥐었다가 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꺼낼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아.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모르시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이오스테는 황제의 언급에 당황했다.
“당황한 얼굴이기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답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내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해 줬잖아요?”
사실이었다. 이오스테는 아올레시아와 손을 잡은 순간부터 그녀가 시키는 일을 전부 해 왔다. 플뢰온과 아실리가 가까워진 것은 이오스테의 공이었다. 쌍둥이 형과 사이가 틀어진 아이는 여동생에게 집착하듯 정을 쏟아 주었다.
“초조했겠지요.”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지 어떤 결과를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깜깜한 어둠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이오스테가 믿었던 것은 아올레시아의 상실감과 증오였다. 지금도 그 믿음은 남아 있었다. 잃은 자만이 믿을 수 있는 확고한 감정이었다.
“어찌 탓을 할까요……. 허무하고, 허탈할 순간에 다가온 기회는 무엇보다 달콤함을 아는 것을요.”
하지만 이오스테는 지쳤다. 너무 오랜 세월을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지쳐 가던 이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2황자의 제안은 사막을 방황하던 방랑자에게 떨어진 한 줄기 물처럼 아찔하도록 달콤했다.
<반란을 도와주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명단을 보았을 때 이 정도면 어쩌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력한 신관이 한데 뭉쳤으니까. 사실 그 순간에도 아올레시아가 떠올랐다.
‘그녀는 황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오스테가 정말로 아올레시아의 뜻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이오스테는 영리했기에 아올레시아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너무나 이상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라게 되는 것이며 어쩌면 이오스테가 죽기 전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능성이 적었으며, 너무나 멀었다. 결국 그녀는 가까이 있는 차악을 택했다.
“네. 사실입니다. 3개월 전 저는 반란에 찬성하였습니다.”
침묵을 깨트리며 이오스테가 순순히 수긍했다. 어느새 그녀는 차분한 표정을 되찾았다.
“불카누스는 5일 뒤 2황자 율리안의 반란에서 앞장설 것입니다.”
반란이라,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해도 된다. 복수는 정당했다. 한때 이오스테는 누구보다 자유롭던 대장장이였다. 영혼을 잃은 그녀는 누구에게 호소할 것인가?
망치와 창작으로 영혼이 행복했던 삶. 굳은살과 터지거나 부푼 물집으로 가득했던 손은 새하얗게 변했다. 이제는 그 자리에 추억만 남아 자리하고 있었다. 흉터마저 사라진 손에서 그녀는 망치를 잊었다. 억지로 잊게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망설이던 이오스테가 눈을 감으며 덧붙였다.
“당신에게 말할까 망설였습니다.”
지난 세월은 이오스테에게 살아 있되 죽어 있는 시간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처연한 여정이었다.
“당신이 당장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한다면 나는 곧바로 사형대로 끌려갈 테니까요.”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그저 의미 없이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견디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차마 정신을 놓지 못했던 것은 황제를 향한 시리도록 선명한 원한 때문이었다.
<우리 불카누스의 이리들은 이 땅에서 너를 앗아 간 순간을 잊지 않았다.>
그녀도 불카누스의 대장장이들도 그를 향한 원한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딸, 신의 망치는 언제나 네 뜻을 따를 거란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오랫동안 원망을 품고 부유하던 사람이 그녀였다. 그러니 어찌 복수를 탓하는 자가 있을까.
<안녕하세요, 이오스테.>
이오스테는 아올레시아가 말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함께 복수할래요? 자살로 떠나는 여정이겠지만. 괜찮잖아요. 잃을 것도 없는 나와 당신이니까요.>
한때, 이오스테는 죽은 눈으로 인형처럼 아름답게 미소하는 여자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살아 있되 죽어 버린 자는 동족을 기꺼이 알아보는 법이었다.
“말릴 리가 없잖아요. 이오스테.”
아올레시아가 그날처럼 화려하게 미소했다.
“저야말로 바라 마지않은 소원인걸요.”
볕 아래 드러난 아올레시아의 얼굴은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 보이는 배우의 것과 닮아 있었다. 이오스테는 이 아름다운 여자가 누구보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남자에게 가장 비참한 죽음을 선사하자.”
아올레시아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과 함께 이곳은 그녀의 무대가 되었다. 저 비치는 석양은 기꺼이 그녀만을 비추는 훌륭한 조명이었다.
“쓰레기에겐 쓰레기 같은 고통을. 지옥불이 천국으로 느껴질 고통을.”
아올레시아가 낭랑하게 읊조렸다.
“황궁이 불에 모조리 타 버리고, 개돼지처럼 끌려온 황제가 그가 죽인 여자들의 가족에게 돌팔매를 맞고, 결국은 가장 비참하게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반란이 성공한다면 그리될 것입니다.”
“네. ‘성공’한다면.”
반을 접어 화사하게 웃는 아올레시아의 눈은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친애하는 이오스테, 복수는 가슴을 뜨겁게, 머리를 차갑게 식혀 하는 것이라 하였지요. 그대는 모든 것을 계산해 보았나요?”
글쎄, 냉정하게 따질 시간이 자신에게 있었던가?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황제는 죽어 가는 몸입니다.”
“황제는 주신의 신관이랍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물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끝을 오래 남겨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당신이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이오스테의 눈에는 첩첩이 쌓인 증오가 새파랗게 빛을 내보이고 있었다.
어째서 이 여자는 이렇게 태연한 걸까? 자신은 허탈하고 체념하고 허무해져 결국은 견딜 수가 없는데. 어쩌면 이 여자는 일찍이 먼저 거쳐 초연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오스테 그녀가 그러하기엔 수십 년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는 검붉은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아올레시아.”
이것은 불붙은 수레고 마차였다. 멈출 수 없었다. 결국은 자신을 잡아먹는 화마가 된다 해도.
“저는 이 분노에 모든 것을 맡길 것이며…….”
설사, 그녀의 아들마저 잡아먹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해도.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다.
떠나기 전 이오스테가 말했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아올레시아가 가만히 이오스테를 보았다.
“……그러네요.”
이오스테는 그녀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을 읽어 냈다. 아쉬움이라니. 이 여자가 그런 감정도 가질 줄 알았던가. 아올레시아가 양손으로 이오스테의 한 손을 붙잡았다.
“이오스테. 나는 당신을 좋아했어요.”
손끝이 차가웠다. 목소리는 나붓하게 내려앉았다.
“지금에 와서 말린다고 한들, 들리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그러면서 짓는 미소는 지는 꽃처럼 덧없이 보였으며, 바스러지는 잎처럼 약했고 희미했다. 왜일까, 이오스테는 그 모습에서 황녀를 떠올렸다. 어쩌면, 황녀가 각성한다면…… 아올레시아를 닮게 될까?
“황제를 쉽게 보지 마세요. 많은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당신과 나. 모든 후궁에게 했던 악랄한 힘을 잊지 마세요.”
언제인가부터 미소 짓지 않게 된 아실리 로제와 그녀의 친모는 꼭 닮아 있었다.
“부디 최후의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조언입니다.”
이오스테와 아올레시아, 두 여자는 10년도 더 전에 만나 함께 증오와 원망을 다졌던 동료이자 동지였다. 비록 이오스테는 그녀가 바라는 바를 끝까지 모른 채로 헤어지게 됐지만, 그녀를 연민했다. 아마도 아올레시아 또한 그럴 것이라 믿었다.
“죽음 앞에서 행운을.”
아올레시아가 농염하게 웃으며, 이오스테의 찬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손에 찬 반지는 3개. 아올레시아는 반지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어딘가 요사스런 시선과 다르게 행위는 무척이나 경건하게 느껴졌다.
‘이오스테. 가엾은 사람…….’
신관의 키스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마지막으로 동료에게 보내는 안위를 바라는 것이었다.
“부디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아올레시아는 끝내 그 반란이 실패로 그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 * *
“그대는 참 잔인한 사람이야.”
한참을 이오스테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른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어쩐 일이신가요. 전하.”
아올레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 온 것인지 모를 흑발의 사내가 서 있었다.
“아무것도. 구경이랄까.”
카스토르였다.
“몇십 년간 함께했던 여자가 죽음으로 가는 길을 막지 않는 모습이 흥미로웠어. 아주 잘 보았지.”
곧 바람이 불며 남자의 긴 머리가 어깨 뒤로 흩날렸다. 날렵한 선을 그린 턱과 뺨 위로 머리카락 몇 올이 힘없이 부딪쳤다. 카스토르는 금빛 눈을 옅게 휘었다.
“당신은 참 지독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나?”
귀를 녹일 것처럼 황홀한 그의 목소리가 인정하라는 듯 부추겼다.
“제 속을 어지럽히실 의도라면 그만두시지요. 황태자 전하.”
아올레시아가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비웃음이었다.
“제게 별 의미 없으니까요.”
높낮이 없이 단조로운 아올레시아의 대꾸에도 카스토르의 눈웃음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시답지 않다니. 너무 정이 없지 않나.”
성큼 다가온 카스토르가 아올레시아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그는 태연한 눈을 하고서 아올레시아를 바라보았다.
“동료에겐 좀 더 속을 털어놓아도 좋아. 그대와 나는 내 아바마마를 함께 증오하는 동료가 아닌가.”
“흐응, 정이 넘쳐 나는 동료는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요. 쓰레기와 쓰레기가 가장 큰 쓰레기를 치워 내기 위해 결합한 썩은 동맹이니.”
아올레시아의 행동과 표정에는 조금 전 이오스테를 대한 것과 다르게 교태가 가득했다. 카스토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황제의 앞에서 꾸며 내는 모습과 같았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아올레시아를 바라보며 카스토르는 조금 다른 말을 꺼냈다.
“왜 6황비에게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가 율리안의 반란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 아이와 약속했단 걸 그대도 알고 있을 텐데.”
“말해 줄 의무는 없지요.”
“6황비가 좋아했을 텐데?”
아올레시아가 눈을 내리깔며 비웃었다.
“……전하께서 나서지 않아도 반란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전해야 했단 말인가요?”
죽어 가는 황제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그녀라고 황제의 악랄함을 모르겠나. 왜 찢어 죽이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그 긴 세월 동안 황제의 ‘최후의 수’를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해 움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카스토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설사 이오스테에게 말해 준다고 하여도 율리안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올레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
카스토르가 눈만 굴려 그녀를 응시했다. 권태가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귀찮다는 시선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아올레시아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본디 황태자는 누구에게든 이런 모습이었으니까.
“전하께서는 아직 폐하를 증오하십니까?”
“그래.”
단호한 음성이었다.
“율리안 님을 미워하십니까?”
“그래. 따분한 질문이구나.”
카스토르는 감흥 없다는 눈으로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럼 여전히 저희는 동료로군요.”
아올레시아는 조소했다. 황제는 아올레시아에게 집착했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서 말이다. 이밖에도 제 아들이자, 강력한 주신의 후계자인 황태자에게도 집착했다. 그의 힘을 제 손안에 넣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 카스토르에게도 애정을 빙자한 끔찍한 짓들을 자행했다.
황제의 아들은 신기하게도 제 아비처럼 자랐다. 아니, 이전까지는 황제를 향한 증오를 제외하면 모든 것에 무심하기 짝이 없는 이라 생각했었으나 이젠 달랐다. 그는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 광기 어린 황태자. 우습게도 이 남자가 단 하나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딸, 아실리 로제였다.
“아아. 그렇지. 동료. 껍데기만도 못한 동료 말이지.”
카스토르는 아올레시아를 보지 않은 채 미소했다. 차라리 저잣거리 아무나 잡아서 맺더라도 당신과 나보다는 낫겠다며 감흥 없이 읊조렸다. 그의 얼굴엔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띤 미소가 흐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죽일 때가 아니면 늘 이런 낯이었다.
“전하께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국의 멸망.”
카스토르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저 또한 그렇답니다. 여전히.”
팔을 괸 채 먼 곳을 보던 카스토르가 천천히 아올레시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여인이 저 몰래 무슨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
카스토르는 이성적인 머리로 그리 결론지었다. 보통은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있었으나 아올레시아처럼 죽음의 힘을 가진 이들은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런 것들은 가만있어도 알게 되곤 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시시하고 무감하게 느껴졌다.
이상한가? 아니, 사실 그가 정상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타인에게는 어긋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잘은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카스토르의 눈으로도 스스로 딸을 아끼는 듯하면서 동시에 사지로 모는 아올레시아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과연 저 여자는 자신의 딸을 사랑하고 있나? 그는 사랑을 모르기에 짐작할 수 없다.
‘아아.’
이 아슬아슬한 시기에 반란의 증거를 가져오라며 타국으로 보내다니. 설사 가져오지 못하면 황제가 재미 삼아 살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곧바로 수정의 제물로 바쳐 버릴지도 모르고.
‘그렇게 두지 않겠지만.’
카스토르가 픽 웃었다.
누구도 그를 이해 못하면 어떠한가. 그가 넘어선 광기는 이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광기와 불가해에 있는 것이 자신이거늘. 그렇기에 단 하나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라고 있다. 바로 아실리 로제를.
“그대는 그대의 딸의 원수와 오랜 동맹을 맺고 지금도 그러하지.”
검은 머리카락이 까만 밤처럼 의자에 내려앉았다. 카스토르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느슨한 금빛 시선이 아올레시아를 향했다.
“그대야말로 괜찮나? 당신의 딸이 나를 지독하게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올레시아는 대꾸 대신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했다. 그 모습에 카스토르는 막 피어오르던 흥미를 다시 잃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 눈동자.
아실리 로제와 같은 색의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잠시지만 저 눈동자만 떼어 내 가져갈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의 검은 눈알만 도려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필요한 패였다.
광기는 가끔 이성을 잠식한다. 그 선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아……. 재미없는 시간의 연속이겠군.”
아실리 로제가 이곳에 없다. 카스토르는 길게 한숨지었다. 무료한 짐승의 포효였다. 그것마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아올레시아가 카스토르를 바라봤다. 느리게 깜빡이는 금색 눈동자는 먼 지평선을 향해 있었다. 색은 황제의 것과 같다. 찬연한 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저는 시간을 반복했어요. 카스토르에게 죽어서요.>
카스토르의 말처럼 카스토르는 아실리에게 다시없을 증오스러운 원수였다. 아올레시아에게 황제가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아올레시아는 환멸을 드러내는 대신 미소를 입에 건 채 가만히 마주 보는 쪽을 택했다.
<모든 아이는 사랑스럽답니다. 누구에게나 모성애가 있어요. 아올레시아 당신에게도요.>
한때, 아올레시아는 아실리 로제가 그대로 죽어 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 속에 있던 아이를 그대로 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아이를 갓 낳았을 때, 왜인지 아이는 죽을 것처럼 헐떡였다.
<이분은 신관이십니다. 그러나 신력이 없습니다. 황비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죽기를 바랐지만, 정말 죽는다고 하니 왜일까. 아올레시아는 어느새 2황녀인 에리스에게 빌어 짐승의 도시에 와 있었다. 그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때까지도 죽기보다는 살아서 제국의 멸망을 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전하. 저는 그 아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답니다.’
아올레시아는 제국의 멸망을 바란다. 이것은 그녀의 오랜 소원이자 바람이었다. 죽기 전까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녀의 딸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해도 말이다. 아올레시아는 아실리 로제를 사랑하지 않았다.
마음이 변한 것은 여섯 살 난 아실리 로제와 재회했을 때였다.
<나를 낳아 준 사람이라고 해도, 나를 사랑할 의무는 없어요.>
왜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올레시아는 사랑을 시작했다. 딸이라서 사랑한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람을 향한 사랑이었다.
<엄마란 건……. 당연한 이름이 아니더라고요.>
누구도 건네지 못한 그 말을 딸이자 딸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들었기에. 소녀는 자신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내가 이 순간을 잊어도 이해하세요.>
혜성이란 죽어 가는 별의 단말마라 하였다. 아올레시아는 오래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혜성이었다. 무엇도 그녀를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올레시아는 마음을 바꿔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만약, 그녀가 이 어긋난 모든 걸 바꾸고 싶어 한다면, 그것을 할 수 있는 도약의 발판 정도는 마련해 주기로.
‘아가, 모든 것은 네 선택에 달렸단다.’
곧 흥미를 잃은 카스토르가 돌아갔다. 창문 밖, 멀어지는 검은 그림자를 보며 아올레시아는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알고 있을까? 현재 자신의 모습을.
황제로 인해 괴물이 되어 버린 사내는 제 모든 것을 한 가지에 쏟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가 아올레시아에게 하는 행동과 같았다. 지독하도록 음습하고 더러운 핏줄이다.
“……제 딸이 당신을 증오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올레시아가 카스토르가 앉았던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찌 모르나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요.”
오래도록 텅 빈 자리를 바라보던 아올레시아는 참았던 감정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깊어 오히려 차분하고 조용하게 빠져나왔다.
<황제는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고, 내 언니를 죽였어. 그런데도 가겠다고?>
오래전 사랑하던 남편이 죽고, 친우였던 1황녀마저 죽은 날. 2황녀이자 바람의 신관인 에리스가 말했다. 어째서 모든 걸 망친 사내의 옆으로 가는 것이냐고. 차라리 자신과 함께 먼 곳으로 가자고 빌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고 에리스는 모든 힘을 박탈당한 채 공작저로 팔리듯 끌려갔다. 그녀의 동생인 3황자 아벨 클라우드만이 겨우 제국 밖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남겨진 아올레시아의 처지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아이의 복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올레시아는 모든 것을 앗아 간 황제의 옆에서 미소했다. 팔짱을 끼고 입을 맞추며, 안겼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입 안의 혀처럼 굴었다. 어느새 그녀에게는 이름이 생겼다.
<딸을 버린 비정한 요부.>
<뱀같이 요사스런 년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