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⑵
“안녕하세요. 점심 같이 먹어 줄래요?”
살랑살랑 봄바람이 이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루스벨라는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 내게로 졸졸졸 걸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 두 개가 달랑달랑 들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루스벨라 씨?”
“네. 편히 루스벨라라 불러 주세요.”
내가 이곳의 학생이었다면 선배가 옳은 호칭이었겠지만, 나는 견학 내지는 사신의 신분이었다. 루스벨라도 이를 아는 듯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반으로 찾아갔더니 도서관으로 갔을 거라고 해서요.”
“반? 제가 속한 반을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교복을 입고 계시지 않았잖아요.”
그녀가 검지를 입술로 가져가며 눈을 휘었다. 마치 순정만화 주인공이 할 법한 행동도 그녀가 하면 빛나는 그림 속 한 장면이 되는 것 같다.
“그럼 일단 1학년은 아닐 테고, 제게 전공을 말씀하지 않는 걸로 봐서 견학하러 온 분이 아니지 않을까 했어요. 직접 밝히셨잖아요?”
“아.”
그런다 해도 수많은 반 중 나를 어찌 찾았다는 거지? 그녀의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건지 발이 넓은 건지 몰라도 아무튼 영리한 여자였다. 나는 책 속 주인공을 다시금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제는 세월에 무뎌졌지만 이곳은 책 속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좀 오래 잊고 산 것 같다. 하기야 나는 본편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을 살았으니까. 또한 일기장과 죽음으로 삶이 뒤집어졌기에 루스벨라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한 건 최근에 들어서였다.
“도서관에는 무엇을 찾으러 가시는 건가요? 도와드릴까요?”
고개를 기울인 그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프예국에서의 4일째,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제는 루스벨라를 찾았다면 이젠 황제가 시킨 명을 이행할 차례였다. 눈과 바다의 대신관과 혼돈의 신관을 찾는 것. 일단 루스벨라가 약을 만들기 전에 실마리라도 찾아 둘 생각이었다. 루스벨라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일단 그거부터 먹을까요?”
“네?”
“그것, 먹자고 가져온 것 아닌가요.”
나는 도시락을 가리키며 생긋 웃었다. 루스벨라 요리 실력은 무난했던 걸로 기억한다. 또한 루스벨라가 이렇게 찾아온 이상 그녀에게 정보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여기에요.”
루스벨라가 데려온 곳은 어제 그녀를 구했던 공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낙엽이 팔랑팔랑 지는 고즈넉한 풍경이 가을 하늘과 썩 잘 어울렸다. 우린 한적한 벤치에 앉아 루스벨라가 가져온 도시락을 풀었다.
나는 루스벨라가 만든 도시락을 먹고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생각 이상으로 맛있는데? 이걸 평범하다고 한 남주는 어디 사는 뭐 하는 놈이지.
“맛있어요.”
중얼거리자 루스벨라가 기쁘다는 듯 볼을 붉게 물들였다. 이거도 먹어 보세요, 저거도 먹어 보세요. 지저귀는 목소리가 듣기 고왔다. 참 순진한 아가씨였다. 아니다. 하렘물의 여주인공은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워야 미모에서 먹고 들어가나 보다. 우리의 대화에서 본론이 나온 것은 음식이 반쯤 사라졌을 때였다.
“제게 약을 원하신다고 했잖아요. 어떤 것을 원하시나요?”
나는 그녀를 흘끗 보았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넥타르요. 모든 병을 고친다는 약이요.”
“……그거 전설 속에 나오는 약인데.”
루스벨라가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응,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잖아?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눈웃음을 보였다.
“안 될까요?”
“……그 약을 어디에 쓰실 건지 여쭤도 될까요?”
루스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약 ‘넥타르’는 정말 절박한 자들만이 찾는 약이라는 것을. 그것을 찾는 이들의 바람은 일종의 신기루와도 같았다. 루스벨라는 이걸 실현해 내고 말았지만.
“제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많이 아파요.”
나는 천천히 눈을 깔았다. 흐린 시야로 흰 바람 같은 사람의 모습이 내려앉았다.
“아주 많이요.”
이곳에 없는 아모르를 떠올리며 나는 문득 팔목을 문질렀다. 팔찌를 만지면 꼭 그가 대답해 줄 거란 쓴 착각을 삼키며.
“아주 많이 아파서……, 나는 그가 언제……. 내가 없는 곳에서 죽어 버릴까 봐 무서워요.”
본디 이 소설은 수많은 이들이 죽는 소설이었다.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왈칵 두려움이 앞섰다.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건강한 적 없던 사람에게.”
루스벨라가 칼타니아스로 갈 때까지 아모르는 살아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본편대로 진행된다면 아모르는 죽는다. 나는 정해진 사실을 바꾸려 하고 있다. 본편이 변해 운명이 비껴 나간다면…….
생명의 근원이라는 신력을 아주 많이 소진했다는 치료 신관의 말이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다.
<황녀님, 4황자님께서는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안 돼. 그러지 마. ……죽지 마.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봄을 선물하고 싶어요.”
아모르. 사실 나는 당신이 루스벨라를 사랑할 것이라 생각했다. 예정대로 루스벨라가 나타나 거짓말처럼 그녀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당신을 원망할 것 같지 않다. 당신은 이미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벌써 많은 것을 잃었고 잃은 당신이. 가진 것 없던 당신이 모든 것을 내게 주었는데, 내가 무엇을 망설일까.
느리게 눈을 떴을 때, 눈물이 흘렀다.
“나는 세상에 없는 것을 쫓아 이곳에 왔어요.”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왔다. 그리고 낯선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를 만났다.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한 글자, 다시 한 글자.
“이 순간에도 잃을까 봐 절박해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조급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마침내 반은 꾸며 내고 반은 진심인 눈물이 흘러내렸을 때, 루스벨라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아…… 실리라 불러도 될까요?”
왜일까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살짝 떨린 것처럼 들렸다. 루스벨라가 연민이 가득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끄덕였다.
“왜일까……. 당신은 남 같지 않아요.”
루스벨라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도자기처럼 하얀 낯빛에 가득 담긴 감정들이 뚝뚝 흘러내렸다. 선량한 주인공. 그녀는 나를 연민하고 있었다. 이 순간이 흡사 동화 속에서 뛰쳐나온 한 장면 같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이리 쉽사리 동조하기에 주인공인걸까.
“넥타르는 존재해요.”
루스벨라가 어렵사리 말했다.
“내가 만들어 줄게요.”
황녀인 나보다도 아름다우며 심성 고운 그녀가 이런 연민을 지나치긴 어려웠을 것이다. 마침내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다만, 이 약은 재료가 무척 까다로워요. 특히나 하나는 음……. 구하는 방법이 좀…….”
“뭐든 도울게요.”
“정말요?”
루스벨라가 짐짓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괜찮겠어요? 야간에 약초 금고를 뒤져서 훔쳐 와야 하거든요.”
나는 눈을 깜빡이다 풉 웃었다.
“많이 해 본 솜씨네요?”
“비밀이에요.”
모른 척 물었지만 나는 그녀가 이미 해 본 일인 것을 안다. 이에 루스벨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해사하게 웃었다.
“스릴 있겠네요.”
그녀는 그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루스벨라가 순진하긴 해도 그저 얌전하기만 한 아가씨는 아니었지.
그 뒤 그녀는 재료를 하나하나 알려 주었고, 나는 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도시락을 정리해 일어났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짧은 시간 안에 치마 위로 낙엽이 쌓였다. 내가 낙엽을 치우는 동안 가을 하늘을 바라보던 루스벨라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떼었다.
“그거 알아요? 넥타르는 칼타니아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약이에요. 서쪽 나라.”
익숙한 이름에 고개를 들면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루스벨라가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
“아스클레피오스? 의료의 신?”
루스벨라가 웃으며 끄덕였다.
“네. 칼타니아스에서 벗어난 아스클레피오스의 신관이 만든 것이 넥타르예요. 오랜 세월이 흘러 리프예국 학자들이 개량했고, 수백 년 동안 존재했지만, 어느 날 레시피는 사라졌죠.”
나는 눈물이 채 가시지 않은 물기 어린 눈으로 루스벨라를 보았다.
“잘 아시네요.”
내가 칭찬하자 루스벨라는 수줍게 웃다가 고개를 들었다.
“칼타니아스는 제 고향이니까요.”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예쁘게 휘었다.
……뭐?
번개처럼 내리꽂혀 온몸을 관통하는 것이 있었다.
“제 양모는 칼타니아스와 윌터 사이의 국경에서 저를 주웠다고 해요. 어린아이가 국경을 헤매고 있었다니, 이상하죠?”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는 내가 아는 이의 것과 다르게 다정했고 따뜻했다. 이 순간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주 어린 저는 국경을 넘어오느라 상처투성이였대요.”
잠시 틈을 둔 루스벨라가 생긋 웃었다. 과거에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전 기억도 나지 않지만요.”
칼타니아스 그리고 황금색 눈동자. 순간 등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렇군요.”
뭘까. 이게 뭘까. 뭐지? 생각나는 것들이 무수하게 많았지만 말로써 정리되지 않았다. 마치 언어로 된 강이 범람해 나를 덮친 기분이었다.
“그럼 당신은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인 셈이네요.”
루스벨라와 칼타니아스. 책 속 루스벨라는 사랑의 도피 장소로 왜 많은 나라 중 칼타니아스를 골랐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오지 않았기에 모른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네. 저는 그곳에서 태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순간 나는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제 고향인 셈이죠.”
뒤에서 바람이 불어와 나와 루스벨라의 머리카락을 흔들어 놓았다. 같은 색이나 전혀 다른 색이었다. 그녀의 금빛 머리는 막 순금을 녹여 틀에 넣어 놓은 듯 무척이나 반짝였으며 나는 바스러지는 금색이었다. 또한 그녀는 결이 좋은 생머리였고 나는 곱슬머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칼타니아스의 핏줄이었다. 정확히는 황가의 핏줄. 확신했다. 아니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칼타니아스, 황금색 눈동자, 목숨의 위협을 받은 어린아이. 황가의 핏줄이 아니고서 어찌 이런 일을 겪겠어.
먼 곳에서 종탑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루스벨라가 곤란한 얼굴로 종탑을 바라볼 때였다.
“루스벨라!”
내가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루스벨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내 시선도 함께 돌아간다. 먼 곳에서 한 남자가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남자. 그를 본 루스벨라의 얼굴에 함박 미소가 떠올랐다.
“슬론!”
슬로레니안. 『루스벨라의 빛』 속 남자 주인공이었다.
달려간 루스벨라가 두 팔을 벌린 남자에게 안겼다. 빙그르 도는 치마가 팔락거리며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연인의 모습은 가을에서 봄을 그려 냈다.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들춰내자 루스벨라가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루스벨라를 안고 있던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 눈은 무심히 떨어져 나갔다.
“……남자 주인공.”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루스벨라의 하나뿐인 사랑. 그의 모습은 동생인 체자르니안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동생이 눈이 처진, 순한 강아지였다면 형인 그는 커다란 도사견에 견줄 만한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루스벨라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끌어 올리며 들어 올린 손을 흔들었다. 완전히 멀어진 그녀를 뒤로하며 천천히 떨어트린 고개, 시선은 일기장을 향했다.
가슴에 쉼 없이 파도가 치고 있었다.
루스벨라가 칼타니아스 출신이다. 이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일기장은 나를 루스벨라에게 인도했다. 그렇다면 일기장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얘기인가? 만약, 루스벨라를 알고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하길 바란단 말인가.
눈을 감았다.
“속 시원하게 말을 해 봐.”
왜 나는 이곳에 태어났어?
일기장이 희미한 빛을 흩뿌렸다. 마치 머나먼 땅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듯이. 펼쳐도 아무것도 없는 일기장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젠 어떡해야 할까.
첫 번째 목적을 이뤘다. 루스벨라를 찾고 아모르의 약을 구하는 것. 사실상 목적을 이뤘으니 완성된 약을 얻을 때까지 루스벨라에게 볼일은 없다. 그러나 가슴을 간지럽히는 이것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 온 감정이었다.
어째서 줄곧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루스벨라의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제국에서 금색은 주신의 힘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진다. 왜일까. 지금 여기에 대한 진실이 성큼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알지 못할 것 같았다.
왜, 나는 일기장을 얻었는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 순간 내게 답을 줄 이가 떠올랐다.
<남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 그리고 신장이 거대하고?>
데인이 표정을 굳히게 했던 사람, 그는 궁금해하는 내게 말을 아꼈다.
<음, 아실리. 그 사람은 칼타니아스의 3황자야.>
오래전 제국에서 추방된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마지막 바람의 신관, 마지막 신관이란 이름이 내게 많은 것을 상기시켰다.
아모르와 헤르난. 그들 또한 최후의 신관이었다. 동시에 황제의 지척에서 고통받거나 고통을 감내한 이들이기도 했다. 마지막 신관들이 갖는 공통점은 황제의 관심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황제에게 숨겨져 있을 자식이라거나 이런 것들.
3황자 아벨 클라우드. 그를 찾아야 했다.
* * *
이곳은 너무나도 넓어 마음만큼 빨리 가진 못했다. 하지만 한참을 물어물어 나는 조교실 앞에 도착했다. 시선이 문패에 적힌 이름에서 미끄러져 복도를 향했다. 막상 찾긴 했지만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아서였다. 문 앞에서 잠시 손을 쥐었다가 폈다. 어느새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주홍색이었다.
나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달칵 문이 열리며 실바람이 스친다. 눈을 뜨자, 아벨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그의 모습 뒤로 서산으로 지는 석양이 보였다.
“네가 노크를 하다니 별일이네.”
그는 나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서류 쪽에 코를 박듯이 숙인 아벨은 무엇이 불편한지 주름이 잔뜩 진 얼굴이었다.
“뭐야. 키세스. 너 왜 대답이 없어? 서류는 저녁까지 주겠…….”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암녹색 눈동자가 놀람으로 커진다.
“어라.”
그가 서류를 툭 떨어트렸다.
“음, 그러니까, 넌. 아실리?”
굵고 긴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고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네. 저를 아시나요?”
아벨은 턱을 괴고 침묵에 잠겼다. 아마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앉아 있는 그는 키가 몹시 컸지만, 마른 편이었다. 손은 무척이나 커 눈썹을 긁적이는 손은 나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알고 있다고 할지……. 본 적은 있지.”
일어난 그가 성큼 다가왔다. 나는 움찔했다.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뭐랄까. 내가 널 본 건 네가 아주 작은 아기였을 때야. 나는 어렸고 너는 더욱 어렸지.”
“어렸을 때요?”
“그래. 누님을 따라 아올레시아 님의 처소를 방문한 적 있어. 그분과 함께 짐승의 도시에도 간 적 있지.”
그가 건네는 목소리는 초여름 숲의 바람처럼 꽤나 상쾌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크게 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고 말이야.”
내 앞에서 멈춘 그가 곤란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도 나이가 먹긴 했나 보네. 영감님이나 할 생각이 들다니. 이런. 좋지 않아…….”
그는 눈썹을 한 번 더 긁적이는가 싶더니 나에게 휙 입꼬리를 휘어 웃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손을 뻗었는데, 나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내가 물러날 새도 없이 그가 날 들어 올린 것이다.
“저……저기? 자, 잠깐…….”
“아. 미안, 미안.”
잠깐, 하고 중얼거리는 내게 그가 사과했다.
“이렇게 해야 잘 보일 것 같아서.”
굵은 목소리라 속에서부터 울리는 울림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도망칠 곳 없는 직선 같았다. 그는 나를 들어 올린 채 한참을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얼굴 속 얼핏 보이는 진득한 시선. 명절날 혹은 모임에서 부친의 친구들이 나를 보던 시선과 비슷했다.
잠시 뒤 그는 감상에 사로잡힌 듯 표정이 묘해졌다. 나를 찾기보다는 내게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래. 지금 시간에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뭔데?”
자세를 고치고, 나를 편안히 안아 든 그가 말했다.
“그건…….”
“수업에 관련한 건 아니잖아. 그렇지?”
아벨이 비죽 입을 휘며 살짝 덧니가 살짝 드러났다. 그 모습은 재미난 것을 떠올린 악동과도 비슷했다. 이미 그도 내가 수업을 3일째 들어가지 않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굳은 얼굴로 입을 떼어 냈다.
“물어봐 주셨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게요.”
나는 그의 옷을 살짝 쥐었다. 그러자 웃고 있지만 진지한 눈이 내게 닿았다. 당장 자세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의외로 편안했기에 잠시 넘기기로 했다. 더욱 급한 것이 있었으니까.
“이곳에 「주신의 후계자」가 있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아벨의 눈이 조금 전처럼 커진다.
“아니?”
돌아온 대답은 힘이 빠질 정도로 담백했다.
“정말 없어요?”
“……맹세해. 이곳에 10년 넘게 있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내게 자리했다.
“지금 너를 제외하고.”
“……저요?”
그가 퍽 개구지게 미소했다.
“그래, 너. 네게서 기운이 넘치다 못해 흘러나오는 이 힘은 주신의 힘이야. 「주신의 후계자」 맞지?”
그 말에 나는 움찔 떨었다. 그를 쳐다보자 그가 씩 눈을 휘었다. 나를 단단하게 안고 있는 팔이 문득 불편하게 느껴졌다. 우습게도 이 짙은 눈동자 속에는 나를 낯설어하는 모습과 익숙하게 느끼는 모습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던 것이다.
“맞아요. 나는 「주신의 후계자」예요. 하지만 아직 「각성」하지 못했고…….”
“곧 하겠네.”
“네. 곧 할 거고…… 네?”
“아냐, 계속 얘기해.”
나는 그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데인과 레이 경은 신관이 아니다. 그렇기에 물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곳에 와서 한 여성을 만났어요. 이름은 루스벨라. 금색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요. 약학부고 약초와 의학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칼타니아스 출신이에요. 어릴 적에 도망 왔다고 했어요. 당신이라면 여기서 뭔가를 깨달았을 거예요. 그렇죠?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흐음. 그 여성이 주신의 신관이다?”
“네.”
바로 그거다. 내가 끄덕였다.
“당신도 알겠지만 제국에서 금색 눈동자는 결코 흔치 않아요. 아니, 황족밖에 없죠. 그런데다가 본인 입으로 제국 출신이라고 했으니.”
“황족이나, 혹은 황족과 관련 있는 이다?”
신관은 본능적으로 「주신의 힘」을 느낀다. 소릭스는 이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아벨은 바람의 신관이라 했다. 그러니 이상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너는 그 여성에게서 힘을 느꼈니?”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그가 피식 웃었다.
“사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방계의 후손에서도 「주신의 후계자」가 나오기도 해.”
“루스벨라가, 아니 그 사람이 방계의 후손이라는 말이에요?”
“현 황제의 슬하에 사생아는 없어. 확실해. 그러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아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흘끗 나를 보더니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황제는 자신의 핏줄을 절대 밖으로 돌도록 두지 않아. 그리고 황제의 피를 잇지 않은 건 오직 너뿐이지.”
“……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고 있죠?”
“내 누나인 2황녀 에리스가 네 모친 아올레시아와 친우였으니까. 그리고 네 아버진 좋은 형이었어. 나에겐 말이야.”
“아버지?”
“아실론, 그 사람도 방계였지.”
내가 더듬거리며 따라하자 아실론, 하고 그가 다시 말해 주었다. 아마도 내 친부의 이름이었을 것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방계는 대체로 힘이 약해. 주신의 후계자라지만 그 힘이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인 경우도 있고. 나는 네가 말한 힘을 느끼지 못했어. 그리고 내 눈을 속일 수 있는 힘은 미치도록 강대한 힘이거나 미약해서 채 느끼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야. 하지만 전자라면 결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죽었을 테니까. 적어도 1황자, 아니 지금은 황태자구나. 아무튼 황태자 정도가 아니라면 살아남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황제에게?”
“그래. 네 부친처럼.”
그가 대답 대신 미소로 응수했다. 그 침묵은 긍정이었다.
“황제는 제국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치광이야. 힘에 대한 집착은 날로 커졌고, 현재에 이르러 광기에 가까운 집착이 되었지. 네 아버지는 거기 희생된 사람이었어. 과거 방계는 죽는 게 당연했어.”
“그 사람은 살아 있어요. 그리고 금색 눈동자를 가졌고.”
“도망쳤다며. 어린애가 국경까지 갈리는 없으니 부모가 도망가게 한 거겠지. 아마도 그 부모 중 하나는 유폐된 황족이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마음에 걸리는 가시를 채 빼내지도 못했는데 그가 먼저 떼어 내는 바람에 입을 꾹 다물게 됐다.
“황궁에서 온 너라면 알고 있을 거야. 4황자, 평생 유폐된 내 동생을.”
아모르의 얘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지금 아모르 얘기가 나오는 거죠?”
“마찬가지기 때문이지.”
“무엇이요?”
그가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이상하지 않아? 왜 한 대에 한 명씩 「주신의 후계자」가 나타났을까.”
그건 언젠가 나도 느낀 적 있는 의문이었다. 내 표정을 알아챈 듯 아벨이 말했다.
“나머지를 가둬 놓은 것. 놀랍게도 제국 어딘가에는 후계자의 힘을 가진 자들을 감금시켜 놓은 땅이 존재해. 그 땅에는 살아도 산 것이 알려져서는 안 될 이들이 살고 있었지. 그리고 가엾은 이들의 끝은 늙어 죽거나 수정의 제물이 되거나 둘 중 하나.”
그는 차라리 그곳에서 늙어 죽는 편이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며 읊조렸다. 그의 씁쓸한 미소에 나 또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성은 윗대 누군가의 후손일지도 모르지.”
진실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 속 실마리를 알게 되었지만 왜일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럼 그녀에겐 힘이 없다는 거예요?”
“글쎄?”
“뭔가 알고 있는 표정이네요.”
그가 풋 웃으며, 예리한 걸 하고 중얼거렸다.
“「주신의 후계자」가 가지는 힘의 특징 중 하나는 이성과 동성을 불문하고 사람을 홀리는 것이지. 혹시 그 여성은 아주 매력적이지 않던?”
그야 아름답긴 했지……. 작중 최고 미녀였으니까. 그의 말을 듣던 중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마성’. 누구든 루스벨라를 보면 빠져들고 말았다는 서술.
설마.
“그 매력이란 힘의 세기에 상관없이 존재해. 사실 가장 무서운 힘이기도 하지.”
내가 아는 『루스벨라의 빛』이 하렘 소설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던 걸까. 아니, 그런 것이 분명하다. 「주신의 후계자」들에게 정녕 ‘마성’이 있다면. 나는 카스토르를 끝내 두려워하며 그를 우러르는 대신들을 떠올렸다. 그토록 증오했지만 녹아들 것처럼 달콤하다 느꼈던 그의 목소리도 함께.
“정리하자면 아주 약한 힘을 가진 이들에게 있는 것이기도 하단 거지.”
퍼뜩 정신을 차리자 아벨의 진득한 시선이 눈앞에 있었다. 꼭 나를 두고 말한 것 같아 난 고새를 숙이며 건조하게 뇌까렸다.
“……나에겐 없어요.”
“글쎄?”
아벨이 나를 고쳐 안으며 툭 이마를 기울였다. 이마가 부딪쳤다가 금세 떨어진다.
“적어도 10년 이상 떨어져 지낸 내게서 단숨에 네가 원하는 이야기를 끌어낸 게 무엇이라 생각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런 말 낯간지러워서 못하는데.”
“네?”
날 향한 아벨의 시선은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이었고 동시에 낯설었다.
“귀엽게 자랐구나. 이상한 기분이야.”
장난 같은 그 말에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째서일까 문득 플뢰온이 생각났다. 낯선 이에게서 플뢰온이 겹쳐 보인다니 생경한 느낌이라 생각하면서.
“너는 내 여동생이야. 너를 사랑스럽게 자라도록 지켜 준 사람이 궁금하다. 조금 아쉽기도 해.”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내게 과하게 보이는 호감이 바로 주신의 후계자가 가진 힘 때문이라는 거죠?”
그가 우습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학습 능력이 빠른데.”
진중하고도 상쾌한 웃음소리가 귀를 선명하게 울렸다. 그를 보며 무어라 더 꺼내려고 할 때였다. 끼이익, 경첩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학자님, 키세스 학자님께서 찾으시던데요.”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작은 소년이 있었다. 키는 나보다 조금 더 클까 싶은 왜소한 체격의 소년이었다. 소년의 흔들거리는 남색 머리카락을 보던 나는 돌연 이 요상한 상황에 대해 자각했다. 조교에게 안겨 있는 학생이라니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내가 버둥거리기도 전에 소년이 먼저 입술을 열었다. 태연한 목소리였다.
“아이참. 또 그러시네, 학자님.”
그러고는 상큼하게 미소하며, “학자님 그러다 잡혀가요.”라며 직구를 날렸다.
“귀여운 학생들만 보면 휙휙 끌어안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렸잖아요.”
그에 아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홱 찌푸렸다. 꽤나 준수했던 그의 얼굴이 인상파 초상화처럼 변했다.
“어서 내려 주세요. 당황했잖아요.”
그 순간 아벨이 나를 내려주었다. 아벨이 내려 주자마자 나는 얼른 그와 떨어져 치마를 툭툭 털었다. 이렇게 휙 들려 본 건 레이 경이나 소릭스 말고는 없던 일이라 꽤나 민망하고 어색했던 탓이다. 그것도 몇 년 전의 일이었고.
“안녕하세요.”
내가 또르르 시선을 굴리자 소년은 태연하게 웃으며 나를 향했다.
“저와 같은 반 맞죠? 그러니까 제국의 황녀님?”
“네? 아. 안녕. 맞아요. 아실리 로제예요.”
“아실리.”
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처음 체쟌 왕자와 교실에 들어갔을 때 본 소년이었다. 그 뒤로 들어가지 않아 잊었지만. 그때는 그저 평범한 인상이라 생각했건만, 가까이서 본 인상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제 이름은 폰투스예요.”
눈처럼 새하얀 얼굴, 그리고 양쪽 눈동자의 색이 미묘하게 차이가 났다. 청색과 조금 연한 청색. 마치 바다의 구간을 나눠 각기 담아 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저도 칼타니아스 출신이에요.”
그의 손을 마주 잡는 순간 손바닥을 파고드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마치 얼음을 잡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냉기가 폰투스의 손바닥에 감돌고 있었다. 폰투스를 바라보자 그는 내 표정을 눈치챘다는 듯 빙긋 웃었다.
그 순간 소년의 색이 다른 눈동자에서 기묘한 보랏빛이 솟구쳤다. 아,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내가 수없이 보았던 것이었다.
신관의 힘이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었다. 3황자와 함께 있는 신관,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와 냉기. 나는 황급히 뒤로 뒷걸음치다가 돌아서 문고리를 잡았다.
“가, 가 볼게요. 오늘 고마웠어요.”
아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른 등을 돌렸다.
“그럼, 아실리.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돌아서는 나에게 아벨이 말했다. 뒤돌아보자 책상에 기댄 아벨과 그 옆으로 고요히 서 있는 폰투스가 보였다.
“또 봐요. 황녀님.”
커튼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아벨의 시선이 잠시지만 폰투스를 향했다. 왜일까. 두 사람은 조교와 학생의 관계일 텐데 아벨이 그의 눈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하나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까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을 모른 체하며.
폰투스는 마지막 순간 입모양으로 내게 중얼거렸다.
<찾아갈게요.>
그러나 이미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방을 빠져나오고 나서도 한참을 걸었다. 그제야 나는 손을 바라본다. 손바닥에서 채 녹지 못한 서리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곧 물이 된 것이 카펫에 녹아들었다.
나는 눈과 바다의 대신관을 찾은 것 같다.
아니, 찾았다.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이건 오래전 아모르 앞에서 독이 든 차를 들이켰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때 나는 죽기 전 내가 되살아날 것임을 어렴풋이 알았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확신. 지금도 그러했다. 조금 전 본 소년은 눈과 바다의 대신관이다.
하지만 어째서 저런 모습이지? 내가 알기론 그는 삼십 대를 훌쩍 넘긴 성인이었다. 출발하기 전 소릭스로부터 들은 것이니 분명했다.
그날 저녁, 나는 데인에게 얼른 이 사실을 알렸다.
“아실리, 그들은 이미 너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데인에게 말했더니 놀랍게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름 또한 일치한다고. 이미 데인은 혼돈의 신관 흔적 또한 발견한 뒤였다.
“3황자와 눈과 바다의 신관이 손을 잡은 거야? 어째서?”
“모르지.”
그 말을 하는 데인의 얼굴은 착잡해 보였지만, 금방 사라졌다.
“……아니. 알 것 같지만.”
이제 나와 데인이 찾을 것이 바뀌었다. 대신관 ‘폰투스’가 어째서 나와 비슷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의 해답과 반란 모의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아실리, 물질적인 증거는 내가 찾을 테니까. 너는 폰투스를 만나되,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안전을 기해 줘.”
“데인.”
데인은 단호했다.
“난 내 몸을 지킬 수단이 있지만, 너는 그렇지 않잖아. 레이가 들어가지 못하는 강의실에서 넌 무방비한 상태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힘겹게 끄덕인다.
“알았어.”
반란. 사실은 황제 좋은 일 시켜 주고 싶지 않은 게 진심이었으나, 빨리 돌아가려면 찾는 수밖에 없다.
“증거라…….”
과연 무엇이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데인은 이 두 집단 사이에 나눠 가진 것이 있을 거라고 했다. 이걸 찾으면 된다고. 데인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눈치였다.
다음 날, 나는 더는 학교 곳곳을 헤매지 않고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은 빠르게 지나갔고, 금방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증거요?”
눈을 뜨자 데인의 잔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루스벨라의 유려한 낯이 자리했다. 나는 먹다 만 빵을 다시 입에 넣으며 슬쩍 웃었다.
“네. 오빠랑 게임을 하는데, 오빠가 숨긴 물건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아하. 숨바꼭질 같은 거군요?”
“그렇죠. 찾을 게 물건이지만요.”
루스벨라는 들고 있던 빵을 내려다놓고 고민에 잠겼다. 점심이라 함께 식사를 하는 참이었다.
“으음, 어디에 있을까.”
“저 대신 고민해 주시는 거예요?”
“그럼요, 아실리! 저도 고민해 볼게요. 그러니까…….”
그녀의 머리칼 위로 가을 햇살이 내려앉았다. 반사광에 눈이 부셨다. 꼭 금빛 비단을 길게 늘어놓은 것 같은 머리칼에 감탄을 흘린다.
“음, 아실리. 가까운 곳을 뒤져 보면 어때요?”
“가까운 곳이요?”
“네. 사람은 중요한 것을 자신과 가까운 곳에 두는 법이거든요.”
“아…….”
가을바람이 서늘하고 시원한 느낌을 남기며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루스벨라는 흔들거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보물을 숨기는 곳은 스스로에게 가장 익숙한 곳이겠지요.”
그런가.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반란 증거를 숨겨 둔 곳이 아벨의 조교실이 될까? 아니면 기숙사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거주하는 학자들은 급수에 따라 개인 집을 소유하거나 보통은 전용 기숙사에 머무른다고 했다. 그리고 아벨이 아니더라도 폰투스라는 소년의 방에 있을지도 모르고. 생각이 깊어질 무렵 루스벨라가 나를 불렀다.
“아참. 아실리, 혹시 이틀 뒤 시간 괜찮아요?”
“이틀 뒤요?”
이틀 뒤면 이곳에 머무르는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 날 꼼짝없이 이곳을 떠나야겠지. 루스벨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쉿,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틀 뒤, 약초를 가지러 가요.”
“아. 그럼.”
“네. 오늘부터 이틀 뒤 밤에 완성된 ‘넥타르’를 줄게요.”
루스벨라가 가볍게 덧붙였다.
“재료가 전부 갖춰졌을 때, 만드는 건 2시간이면 충분하거든요.”
나는 슬쩍 주변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약은 확실히 얻었다. 남은 것은 반란 증거를 찾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일이 너무 술술 풀리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착착 진행되는 중인데, 목뒤가 어쩐지 섬뜩했다. 사실 일주일 안에 무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에 불안을 느끼는 건 내가 불행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루스벨라, 괜찮다면 우리 말 편히 할래요?”
루스벨라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아니 많은가? 사실 이것도 추측이다. 졸업반이니까 그렇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그녀가 정확히 몇 살이었더라……. 나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향기를 물씬 품은 성숙한 낯이었다. 그런데 찬찬히 보았을 때, 앳된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말이요?”
“네.”
내가 말을 건네자 그녀는 잠시 눈을 굴리는가 싶더니 해사하게 미소했다. 꿀을 담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가 휘어지며 끄덕였다.
“좋아요. 아니, 좋아.”
루스벨라와 약속을 한 뒤 헤어진 길이었다. 나는 걷다가 문득 책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돌아가자 루스벨라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어라? 아직 돌아가지 않은 건가.
그러고 보니 옆에는 남주인공이 함께였다. 그녀는 물끄러미 교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하고 나긋한 낯으로 보던 그녀가 한순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때, 슬로레니안이 루스벨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탁.
루스벨라가 그 손을 쳐냈다.
“……각…… 지 마.”
그러고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무어라 중얼거렸다. 순간 바람이 불어 머리칼이 얼굴을 가렸다. 루스벨라의 표정을 한순간 놓쳤다.
“……져!”
머리칼을 다시 쓸어 올렸을 때, 루스벨라는 슬로레니안에게 안겨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들이 먼 곳으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책을 챙겼다.
왜인지 루스벨라가 소리를 높인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라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갈등이 없던 것도 아니었으니.
‘두 사람도 싸울 때가 있는가 보네.’
다시 돌아가는 길은 한적했다. 루스벨라와 함께 점심을 먹는 곳은 한적한 공터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시선을 즐기지 않는 듯했다. 하기야 가만히 있어도 이성이 줄줄이 줄을 이어 호감을 표하는데 티는 내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텅 빈 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을 때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솜털이 오소소 일었다. 다시 한 걸음 발을 딛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든다. 나는 길을 딛는 발소리가 하나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누구세요?”
돌아보자 여전히 한적한 길이었다. 정말이지 이곳은 쓸데없이 넓구나.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양옆 숲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각각 세 명씩, 합이 여섯이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사람이 회색 로브를 벗었다.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쓴 가시나무 면류관을 곧바로 알아봤다. 그리고 가슴에서 흔들거리는 목걸이. 너무나도 익숙한 형태였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겠어요?”
여섯 명의 사람 중 하나가 말했다.
“……당신들,「가시나무 왕관」?”
“네.”
중년 여성은 혼돈의 신관 표식을 숨기지 않았다.
“저희 정체를 아셨으니 저희가 당신을 애타게 찾았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당신들이 나를?”
“이런.”
여성이 낭패라는 듯 살짝 미소했다.
“이건 모르셨군요.”
“당신들…… 무슨 꿍꿍이야.”
“아무것도. 그저 당신을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낭패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렇게 맞닥뜨리다니. 어느새 나머지 이들이 빈틈없이 내 주위를 메우고 있었다. 내가 일기장을 콱 부여잡았다. 그와 동시에 일기장에서 희미한 빛이 피었다. 아지랑이는 보랏빛과 금빛을 띠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 어째서 늘 보랏빛이던 아지랑이가 금빛 또한 함께 띠는 걸까. 그러나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경계하지 마시길.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경계를 지우지 못한 내 얼굴에 여자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뒷목에서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서자 놀란 듯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 정도 충격은 그저 아릴 뿐이었다.
“아시나요? 당신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 능력은 죽음의 후계자가 가지는 능력이랍니다.”
어느 순간 다가온 여자가 내게 손을 뻗었다.
“흣, 너희…….”
목으로 가냘픈 손이 둘러지며 무엇인가 코를 막았다. 꽃 수천 송이를 녹인 것처럼 지독한 꽃향기였다. 아, 나는 이 향기를 알고 있다. 몽롱해졌다.
그렇게 점차 시야가 저물어 가며 나는 기절했다.
* * *
깜깜한 하늘 아래, 나는 자욱한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수십 번 악몽을 꾸면서 얻은 능력이 있다면 바로 꿈속에서 꿈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내 꿈은 늘 하얀 궁의 복도를 걷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조금 달랐다.
늘 겪었던 죽음의 꿈이 아닌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와…….”
원목으로 된 책꽂이는 내가 아는 것과 달랐다. 나는 몹시도 현대적인 책꽂이를 보며 새삼 반가움을 느꼈다. 조금 고개를 돌리자 낡은 책상과 손잡이가 헐거운 서랍장. 옷걸이에는 즐겨 썼던 모자가 걸려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내 방’일까. 아니 이 세계에서 태어난 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 내가 가장 아끼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소설들에 풋 하고 웃었다. 나는 책꽂이를 한번 쓸어 보다가 책 사이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루스벨라의 빛』.”
번쩍번쩍한 금박이 예사롭지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읽었다. 어차피 전부 아는 내용이겠지만, 내가 조금 전까지 살고 있던 세계가 책의 형태를 한 것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렇게 막 첫 장을 넘길 때였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다.
“뭐해?”
잠시 누구일까 한참을 바라봤다.
“아. 그냥.”
이상했다. 분명 나에게 말을 건 목소리는 나와 오래 알았고 친했던 친구였는데,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얼굴에만 하얗게 처리를 한 것처럼 흐릿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없기는.”
꿈이라서 그렇겠거니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손을 급한 것처럼 휙휙 까딱였다.
“라면 끓였어. 분다. 어여 먹으러 와!”
“아, 잠깐. 나 이것만 읽고.”
그러자 내 손을 잡아당기던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뭘 읽어?”
“어? 당연히 이 책…….”
“뭘 읽었다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데.”
고개를 휙 들었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꽂이는 여전히 자리해 있었다. 그러나 책은 빈틈없이 맞물려 있었다. 내가 조금 전 뽑았던 책도, 뽑아진 자리도 없다.
조금 전과 같은 방 안에 단 하나, 『루스벨라의 빛』만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내리자 손에는 다시 책이 들려 있었다.
“여기 있어!”
책은 있다.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 외쳤을 때 『루스벨라의 빛』 책이 눈앞에서 빛으로 산화하며 산산조각 부서진다. 그렇게 책이 사라지고 껍데기가 벗겨진 곳에는 다름 아닌 일기장이 있었다.
“일기장…….”
일기장은 허공에 떠 있었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광택 없는 가죽 표지를 쓸었다. 희미한 보랏빛, 그리고 다시 황금빛이 함께했다.
일기장. 그것이 스르륵 펼쳐지며, 글씨를 덧그렸다.
[깨어날 시간이야.
진실이 머지않았어, 아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