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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짐승, 당신의 이름은 (28/47)

18. 짐승, 당신의 이름은

아모르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내가 말한 건 이런 게 아닐 텐데?”

그 말에 나는 발코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성마른 얼굴이 날 보며 살짝 풀린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잠시였다. 그는 내가 익히 아는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기도 했고, 전에 없이 불편함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허락한 것은 너 하나뿐이야. 이렇게 많은 인원을 허락한 적은 없는데?”

“다섯 명이 많은 숫자는 아니잖아요.”

소릭스가 데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서 메타가 간간이 의견을 낸다. 이곳은 아모르의 궁이었다. 그러나 그의 궁에, 그것도 그의 방에는 데인과 레이 경 그리고 소릭스와 메타까지 함께였다. 아모르의 심기가 불편한 건 이런 이유에서이리라.

“복작복작하군.”

그의 감상은 짧고 굵다. 거기에 담긴 불만이야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미 어젯밤 그가 허락한 일임에도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회의를 나누는 이들을 바라봤다. 이크. 나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순찰대 전부를 끌어들이지 않았어요. 물론 허락하지도 않았겠지만.”

“당연히.”

나를 바라보던 아모르가 왜인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필요하다면 그들도 들여보내 주지.”

어라. 이건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다. 아모르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쓸어내리고 있었다. 속을 가라앉히고 있는 걸까? 이 타이밍에 그가 화를 내도 내었을 순간이었는데, 어쨌거나 나는 아모르에게 부탁해서 그의 방에 데인과 레이 경, 그리고 순찰대 두 사람을 들였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황자님!”

“잘 부탁드립니다.”

조금 뒤 작전 회의를 마친 듯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깊게 고개를 숙인 소릭스와 메타에게 아모르는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그걸 보며 나는 지난 밤 아모르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나와 함께 밤을 보내요. 카스토르 그자는 날 어쩌지 못해.>

카스토르는 나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말이 맞겠지. 헤르난 또한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계약의 내용이 나를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했으니까. 그렇기에 확신했다.

<하지만 나 하나로는 부족해요. 오라버니.>

그러나 실질적인 힘을 가진 게 아닌 나는 그를 막을 순 없다. 헤르난 또한 강력한 신관이었다. 만약 카스토르와 헤르난이 함께 나타난다면 아모르 혼자 둘을 막을 순 없다. 그래서 아모르에게 데인과 경 그리고 순찰대에서 강한 두 사람을 함께 있게 해 달라 청했다.

<희생양을 늘리는 것에 불과할지도 몰라.>

아모르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밤에 찾아온다는 것은 곧 일을 은밀하게 처리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카스토르가 정말 막장으로 가겠다 결심하면 빛이 쨍쨍한 낮에 직접 찾아와서 아모르를 당당하게 찌르면 된다. 그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부터 이단 심문을 시작한다. 황녀, 8황비 아올레시아의 딸, 아실리 로제 아올레시아 칼타니아스.>

그러나 그는 나를 찾아와 찔렀을 때도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찾아왔다.

<나는 장차 이 제국을 짊어지는 몸으로서 네게 금기시된 사법사 및 혼돈의 신관과 내통한 죄를 묻겠다.>

그 이유가 진실이건 아니건 간에. 생각보다 머리를 쓰며 미친 황태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이 있는 광기라니 얼마나 무서운 애기인가.

<황제는 모든 힘을 쏟아 카스토르가 단 하나 그의 명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반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아올레시아의 얘기를 들었을 때 그에게도 제약이 있다는 걸 알았다. 카스토르는 황제와 정면으로 부딪칠 수 없다. 이걸 보아서 카스토르는 아모르에게 경고 정도만 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경고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일어나지도 못할 상태로 만들어 놓고 목숨만은 붙어 있다 할지 모를 이가 바로 카스토르였다. 아모르는 그걸 알아 덤덤했겠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자기 몸 하나 다치는 거에는 꿈쩍도 않는 그가 안쓰럽다. 그리고 속상했다.

나는 아모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끝 하나도 다치게 하지 않겠어요.”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을…….”

그는 한참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었다.

“뭐. 네가 내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모르는 내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내 뺨을 쓸어 만졌다. 어어. 잠깐, 지금은 백주대낮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의 눈동자가 진득하게 내게 따라붙었다. 지난밤이 떠오르며 흠칫 굳었을 때 누군가 성큼 다가왔다.

“아실리.”

허리로 단단한 손이 감기며 귀로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착 내려앉았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데인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눈동자는 뜻 모를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순찰 정비는 끝났는데.”

나도 모르게 허리를 휘감은 손을 잡으며 데인을 보자,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 뭐가 문제이냐는 듯 사르르 눈을 휘었다.

“이 궁은 전통식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중정이라거나 침입할 수 있는 경로가 아주 많아. 그래서 궁 전체를 호위하는 건 어렵고 범위를 이 방을 중심으로 좁혔어. 기척을 알아채는 건 바깥 경비를 맡은 자들이 할 거야. 침입자가 짐승의 신관같이 아주 뛰어난 신관이라면 기척을 알아챈 순간 그 자리에는 없을 테니까. 전투는 아마 여기나 여기.”

“으응. 데인 저기, 지도를 꼭 이렇게 봐야 해?”

“여길 봐야지.”

앞에 있던 아모르의 얼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설계도가 대신했다. 귀로는 데인의 설명이 계속 쏟아졌다. 데인의 설명은 무척 사무적이었다. 나는 복잡한 설계도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전투 장소로 넓은 곳은 안 된다는 거지?”

“그렇지. 넓으면 짐승의 신관이 활용할 공간이 넓어져. 그의 능력에 유리하기도 하지. 몇 명이 되었던 우리가 불리한 건 사실이니까. 최대한 유리한 장소에서 싸워야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아아. 가져왔어.”

이곳에 오기 전 불카누스 신관들에게 급히 부탁한 것이 있었다. 플뢰온을 통해서 뜻을 전했는데, 좀 걱정되는 것이 분명 내 뜻이 곱게 전해지지는 않았을 거란 거다.

“형이 렉스를 엄청 닦달해서 만들었다고 해.”

아. 역시나.

말이 닦달이었지 아마도 노예가 주인에게 무급으로 부려먹듯이 쪼아댔을 게 분명했다. 덕분에 부탁했던 물건이 빠르게 완성된 건 좋았지만. 그들에게 좀 미안하네.

“직물과 거미의 신 아라크네의 신관이 만든 것에다 불카누스 신관이 신력으로 강화한 것이야. 네가 말했던 거지. 그런데 아실리, 이런 게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아아. 내 궁에 아라크네 신관, 아니 신관 자격을 가진 하녀가 있어서…….”

나는 말하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보던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모르의 눈동자였다. 아모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제 다리를 하나 접어 팔을 기대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기울어지며, 시선이 다시 나를 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내가 아닌 옆으로-.

“음, 어.”

“아실리?”

내가 말문이 막혀 음, 어, 하는 소리만 반복하자 데인이 설계도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한번 돌아보더니 귀로 살짝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형님.”

이미 들어오면서 인사를 했던 두 사람이나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아모르가 고개를 까딱였다.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지 모를 일인데.”

“소식이 늦으시군요. 저는 그림자를 그만둔 지 꽤 되었습니다.”

아모르가 눈썹을 씰룩였다. 데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만둬?”

“네. 앞으로 저희가 밤에 뵐 일은 없겠네요.”

한 사람은 황제 아래서 해독제 없는 독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황제의 그림자였다. 서로 모를 리가 없는 사이였구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 구도가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이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는 뭐랄까. 오래전 내가 버렸던 꿈을 하나 실현한 기분이자 설마하니 내가 될 줄 몰랐던 상황에 당황스러운 기분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정말 묘한 구도였다.

잠시 말이 없는 동안 나를 제외한 두 사람에게선 말없이 많은 것이 오고 갔나 보다. 한 사람은 더욱 깊이 미소했고, 다른 한 사람은 미간에 팬 고랑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형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궁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신 것은.”

여전히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데인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나긋하고도 나른한 시선이 옆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보지는 못했지만, 바로 옆에서 머리카락이 사라락 흩어지며 바람 소리가 들렸다. 데인은 웃는 것 같았다.

“제가 그림자를 그만둔 것과 같은 이유인가 보군요.”

데인이 날 바라본 그 순간 허리에서 데인의 손이 떨어졌다. 바닥에서 뻗어 나온 넝쿨 줄기가 데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래.”

아모르가 성마르게 피식 웃었다.

“그런 모양이군.”

천천히 데인과 나를 번갈아 보던 그의 시선은 어쩐지 타는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 * *

밤이 찾아왔다.

“오라버니.”

묘한 느낌이었다. 악몽이 잠식해 잠들지 못하는 밤에 늘 홀로 테라스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밤이 내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끝내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그런 밤. 나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아모르를 찾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밤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방에 한데 모여 있었다.

데인은 천장을 소릭스와 메타는 각각 복도와 창문을 맡았다. 처음에 데인이 천장에 들어간다고 해서 놀랐었는데, 알고 보니 궁의 구조상 천장 위는 텅 비어 있었고 보통 비밀 호위를 할 때 검사들이 이 공간에서 대기한다고 한다.

그리고 레이 경은 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던 아모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내 부름에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오늘 헤르난이 찾아올까요?”

아모르는 짐승의 신관이 찾아올 거라 했지만, 그것이 언제라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그도 언제라고 확신하지 못한 듯했다.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그는 담담한 낯으로 말했다.

“내일도 아니라면 다음 날에는 오겠지.”

묘하게 확정적인 목소리였다. 아니 그는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소를 나눴던 이가 검을 겨누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것도 이전의 모습이 아닌 이지를 잃은 모습으로 말이다. 말없이 테라스 쪽을 보는가 싶던 아모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 이토록 많은 숨소리가 자리한 건.”

“네.”

“처음이야.”

그 또한 신관이라서 그런지 기척에 예민한 모양이었다. 천장에서 대기하는 데인과 말없이 문을 지키는 레이 경 그리고 창문과 복도에 있을 소릭스와 메타까지 모두를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다른 말이지만, 그런 날이 있더라구요. 혼자 잠들기 싫은 밤. 누구라도 함께하고 싶고 숨소리가 필요한 날 말예요.”

“네가 그랬듯?”

나는 웃으며 순순히 인정했다.

“네. 제가 그랬듯.”

그래서일까. 이 순간 내 침실도 아니건만 내 사람으로 꽉 채워진 방이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일기장과 함께했던 밤이 아닌 누군가의 숨소리가 함께하는 밤. 잠시 상황을 잊고 만끽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약’은 드셨나요?”

이 순간 소릭스와 메타 그리고 데인과 레이 경 모두가 듣고 있을 걸 생각해 돌려 말했다. 아모르는 그런 날 흘끗 보더니 별 말 없이 끄덕였다.

“마치 내가 이곳을 나가지 못할 거라 확신하듯이.”

그 말을 하는 아모르의 표정은 딱 짚어 이거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결계를 치던 날 형님은 내게 10일치의 약을 남겨 두고 가셨다.”

지난 10년이 넘도록 카스토르는 매일매일 아모르에게 들러 약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모르에게 일상이었겠지. 원래 일상에서 하나만 빠져도 어색한 법이니까. 톱니바퀴가 하나 빠진 시계처럼 맞물리지 않는 그 기분을 안다.

“한데.”

잠시 곱씹어 보는 듯하던 아모르가 묘한 말을 꺼냈다.

“……가져다준 약의 맛이 조금 이상했지만.”

“설마,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아니.”

아모르가 고개를 저었다.

“독은 아니었어.”

그는 식물의 신관이자 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독이 아니라 하는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아모르는 찝찝함을 지우지 못한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저 맛이 뭐랄까. 전과 같지 않게 연하다고 해야 할까…….”

그가 다시 한 번 이것에 대해 말하려던 때 치지직 마치 고장 난 브라운관에서 나올 법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아모르가 여기 있는 이들을 비롯해 바깥에서 보초를 선 순찰대들 전부에게 나눠준 팔찌로 부터였다. 내게 준 것과 모양은 달랐지만 역할은 같았기에 곧바로 초소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척이나 거친 목소리였다.

―나타났습니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숨을 헐떡이는 소리.

―크윽……! 조심하십시오. 너무 빠릅니다……! 벌써 1관문을 통과해서 정문으로 향했습니다!

쾅-! 통신을 통하지 않아도 창문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커다란 소리였다.

―젠장. 그는…… 믿을 수 없이-.

팔찌에서 초소네의 목소리가 지직지직 끊기며 토해 냈다.

―강합니다!

헤르난. 그가 오늘 밤 이곳에 정말 나타났다.

* * *

천장은 무척 어두웠다. 그러나 좁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락방처럼 꾸며진 곳에는 간단한 의자와 간이 책상이 있었다. 데인은 그곳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로 보이는 정원은 고요했다. 식물의 신관이 거주하는 곳이어서인지 녹음이 우거진 숲은 순찰대가 숨기에 유리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침입자 또한 몸을 숨기기에 유리하다는 소리다.

데인이 훑는 곳은 각기 특히 나무와 넝쿨이 우거져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데인이 고개를 돌려 책상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그의 손이 책상을 향했다.

‘들어오게 될 길은 아마도 이곳과 저곳…….’

보통 천장과 지붕 사이의 이런 빈 공간은 비밀스런 호위들이 차지하는 게 다반사이나 데인의 경우는 달랐다. 데인이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그중에서 이곳으로 오는 최단 루트는…….’

그가 물끄러미 보고 있는 것은 궁을 샅샅이 그려 놓은 설계도였다.

‘여기.’

데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초소네 경이 있는 길.’

천천히 양피지가 아래로 내려갔다. 데인의 눈은 양피지를 응시하고 있지 않았으나 설계도는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1층에는 거대한 공동과 중정. 2층은 긴 복도.’

데인은 굳이 오래 보지 않아도 모든 것을 기억했다.

그러다 그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바닥의 무늬를 의미 없이 응시했다. 아실리가 그에게 부탁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데인 더는 희생자가 생겨나선 안 돼.>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데인은 그녀가 그를 무릎 꿇려 어떤 잔인한 부탁을 하더라도 기꺼이 따를 것이다. 불구덩이에 뛰어들라는 부탁일지라도 말이다.

<나와 같은 희생양 말이야. 부탁해. 그렇지만, 내키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좋아.>

그러나 데인은 알고 있다.

<모순적인 걸 나도 알지만 4황자 오라버니를 도와드리고 싶으면서 네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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