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낮과 밤의 교차로
우리는 아올레시아가 있던 정원에서 비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아올레시아는 길을 모르는 날 위해 비석이 있는 곳까지 동행해 주었다.
“혼돈의 신관을 적대하지 마렴.”
“혼돈의 신관?”
아올레시아가 내게서 숄을 건네받으며 끄덕였다. 혼돈의 신관이라면 신학 시간에 얼핏 들었으며 데인에게도 들은 적 있다.
“그들은 황실의 가장 큰 적 아닌가요? 모든 황족을 살해하는 게 목표인.”
“황실이 아니라 현 황제의 적이겠지.”
아올레시아가 숄을 한번 쓰다듬더니 천천히 어깨에 걸쳤다. 은은한 붉은빛을 띤 숄은 그녀에게 몹시 잘 어울렸다. 그녀는 우아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이 한눈에 보였다.
“현 황제를 적대하는 신관 전부를 가리켜 혼돈의 신관이라 부른단다. 그리고 신관들은 황제에게서 제 신전 혹은 가문에 그 이름이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주의하지.”
일종의 주홍 글씨라는 걸까. 역사책에서 읽은 적 있다. 역사 속 여러 독재자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 공통의 적을 먼저 설정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공통의 적을 만드는 것은 평화를 유지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비록 그렇게 얻은 평화는 불만을 억지로 눌러놓은 형태겠지만.
“아가. 초대 황제의 이야기를 알고 있니?”
“모를 리가요.”
“난 너와 카스토르를 보니 떠오르는구나.”
비석이 있는 숲은 무척 어두웠다. 아올레시아가 든 신등만이 희미한 불을 밝혔다. 하늘 위 달이 이토록 밝은데도 숲이 우거져 닿지 못했나보다.
“알고 있니? 초대 황제는 여성이었단다. 지금은…… 비밀이 된 사실이지.”
그녀가 비밀을 알려 주듯 사근사근하게 속삭였다. 벼락과도 같은 충격이 나를 관통했다. 그 어떤 역사와 신학 책에도 초대 황제의 성별은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으레 당연하듯 남자이겠거니 했던 터라 눈을 크게 깜빡였다. 여자는, 황제가 될 수 없지 않던가. 그런데 초대 황제가 여자였다니?
“주신이란 이름하에 자행된 집착은 사랑이라 불렸지. 주신의 상징은 금색 눈동자가 되었고.”
아올레시아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향한 곳은 내 뺨이었다.
“초대 황제도 너도 이 거대한 궁에 갇힌 신세구나.”
그러나 손은 닿지 못했고 허공을 머물 뿐 이내 손가락이 굽혀진다. 손은 끝내 내게 닿지 않았다. 아올레시아는 한 떨기 난초같이 은은하게 미소했다.
“초대 황제를 궁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은 ‘죽음’이었지만. 너는, 사랑으로 이 잔인한 궁에서 밖으로 나가길.”
그녀의 눈에는 아스라한 후회가 스쳤다. 나는 가만히 그녀가 잃은 것들을 떠올렸다. 가족과 친척 그리고 친우. 마지막으로 사랑하던 남자. 그녀는 모든 사랑을 잃었다.
“그렇게 초대 황제와 다른 결말을 보기를 바라마.”
“……사랑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 믿어요?”
“때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사랑이니까. 가장 위대한 신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지도 모르잖니. 꿈같은 이야기 같을지라도.”
정말 꿈과 같은 이야기라 생각한다.
“네가 맞이할 결말에 사랑이 함께하면 좋겠단 이야기란다.”
사랑을 잃은 자가 내게 사랑을 찾길 청했다. 나는 이마를 잔잔히 스치는 입술에서 축복을 떠올렸다. 신관의 키스는 축복이라고 했나. 가까이 온 탓에 어두워 눈을 마주할 수 없던 아올레시아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아 옅게 웃으며 뒤로 떨어졌다.
“돌아가면 죽음의 신과 신관에 대해 찾아보렴.”
* * *
“금기입니다.”
소릭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소릭스의 굳은 낯은 좀처럼 보기 힘든 편이었는데, 이를 보면 심각한 이야기긴 한가보다.
“왜 죽음의 신이 금기인데?”
“그건.”
“아냐. 소릭스가 알려 주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하아, 감사합니다.”
나는 슬쩍 다른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서관에서 찾아보지 뭐.”
물론 들으라는 듯 소리는 죽이지 않은 채였다. 흘끗 보니 소릭스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메타가 황녀님 멋져요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배를 붙잡고 낄낄낄 웃고 있는 건 덤이었다.
“그냥 알려 드려. 어차피 성년식에 전부 듣는 내용이잖아.”
“하지만.”
“뭐가 걱정이야. 도청은 네가 다 처리했다며.”
소릭스는 그래도 안 된다며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목 뒤를 벅벅 문질렀다. 그걸로도 모자라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황녀님. 지금부터 제가 알려 드리는 것은 절대 어디 가서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응.”
나는 한껏 진지하고 진중한 얼굴로 끄덕였건만 소릭스는 그래도 부족했던지 내게 맹세까지 받아 내고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2등위 신은 눈과 바다의 신입니다.”
“응. 알아.”
“그러나 사실 원래 2등위 신. 즉 주신 바로 아래에는 죽음의 신이 있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이 두 신은 형제였는데, 형인 주신은 사람과 이승을 다스렸고, 동생인 죽음의 신은 망자들과 저승을 다스렸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흡사 옛날이야기 같은 신화가 나와서 어리둥절했지만 난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칼타니아스에 내려온 신은 두 분류로 나눠집니다. 이승의 신이냐, 저승의 신이냐. 일종의 계열이자 신들이 속한 곳이라 보시면 됩니다. 또한 이건 현재에 이른 지금에도 알 수 있는데, 무엇에서 알 수 있느냐. 바로 ‘눈’입니다.”
“눈?”
“네. 혹시 황녀님, 신관들이 힘을 쓸 때 홍채의 빛이 변하는 것을 보셨지요?”
“응.”
“그리고 두 가지 변화를 보셨을 겁니다. 황금색과 보라색.”
“맞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나를 둘러싼 신관들이 능력을 쓸 때 눈이 변하는 것. 이를테면 카스토르나 메타가 금빛을 띤 것과 달리 소릭스는 보랏빛이었고 헤르난도 보랏빛을 띠었었지.
“금색은 주신의 계열 즉 이승에 속한 신을 말하며, 보라색은 죽음의 신, 저승에 속한 신을 말합니다. 이승과 저승이라고 나눴지만 딱히 이 색이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력의 척도는 등위를 따르지요.”
“그런데 왜 죽음의 신이 금기가 되었는데?”
“오래전 죽음의 신관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들은 죽음의 신관이란 이름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죠. ‘혼돈의 신관’이라 들어 보신 적 있을 겁니다.”
나는 여기서 튀어나올 줄 몰랐던 이름에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그렇다면, 처음 혼돈의 신관은 죽음의 신관들이었고 현재에 이르러선 황제의 반하는 모든 신관을 말한다? 이건가 보네. 소릭스는 진지하게 경청하는 내가 대견한 듯 눈을 살짝 휘며 말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주신에게 유폐된 자신들의 신을 되찾고, 이 신의 후계자를 황제로 세우는 것. 아울러 주신의 자손을 모조리 말살하는 것까지.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한 자들입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소릭스. 죽음의 신이 유폐되었다니?”
“그것이…….”
데굴 눈을 굴린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소릭스가 잠시 뺨을 긁적이다 말고 말했다.
“역사에는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추측하는 바로는 이렇습니다. 건국 시절 주신과 초대 황제 그리고 죽음의 신은 몹시도 화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음의 신이 사라졌고, 그 신은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네. 이를 두고 주신의 신관들은 저승의 신이 주신과 다툰 뒤 저승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죽음의 신관들은 자신들의 신이 주신에게 유폐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네?”
“예, 그렇습니다. 다만, 죽음의 신관들이 오래전 반란을 일으킨 것은 확실하니까요. 그렇기에 금기어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남아서 위협하는 자들이니까요.”
“혼돈의 신관이란 이름으로?”
“네.”
가끔 데인이나 플뢰온이 신학 시간에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얼버무리는 일이 있곤 했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 관한 이야기였나 보다. 그렇다면 이건 알고는 있되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이야기라는 걸까.
“소릭스. 혼돈의 신관은 그럼 역사 내내 위협적인 존재였어? 그러니까 반란을 자주 일으켰다거나.”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래전에 한 번. 그리고 3대 전쯤 성황 태양의 황제가 군림하던 시대에 한번 이렇게 있었지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이군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알려 주는 이유가 뭐야? 지금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잖아. 오래됐고.”
“그렇진 않습니다. 최근에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 말에 나는 건국제가 있던 날, 안의 모습으로 마주했던 혼돈의 신관을 떠올렸다. 여자 신관이었지. 위협적이었냐 하면 잘 모르겠다. 그녀는 여자들을 데려가 신력의 희생양으로 쓰는 것에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정당했으니까.
“그런데 왜 이걸 성년식에 알려 주는 건데?”
“황족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함이죠. 공통의 적이 있다는.”
“아아.”
내가 오래전 좋아했던 모 마법 학교 영화에는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악당이 나온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자는 그 사실로서 공포와 악명을 얻고 그렇게 퍼진 공포는 사람들을 잠식했다. 그렇다면 혼돈의 신관이 금기가 된 것은 이와 비슷한 일이 아닐까?
황제는 먼지 묵은 공포를 꺼내 새로 되새기게 하면서 제 정적들을 하나하나 해치운 거고. 이걸로 보았을 때 황제는 결코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활하고 수를 읽을 줄 안다고 할까. 그것이 최악의 수였지만 말이다.
황제가 원하는 결말은 제국이 멸망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도 그렇다. 하지만 황제는 수단이 글러먹었다. 최악의 방식으로 최선의 결과를 내려 했으니 그 아래서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비틀린 것들을 바로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솔직히 종잡을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만약 평화와 행복이 조립식 책장이라면 지금 제국은 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조립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대로 맞춰지지 못한 채 멸망이란 통으로 폐기되는 수순만 남았을지도.
“소릭스. 초대 황제 말이야. 모든 책에 성별이 밝혀지지 않았던데 왜 그런 거야?”
“아. 초대 황제는 신처럼 신성시 여겨지는 존재니까요. 음, 정설로는 남성이라고는 하던데. 오래 전 야사 기록을 보면 여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무래도 여성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렵죠.”
“어째서?”
“초대 황제부터 시작된 제국의 법전은 법과 정의의 신관이 수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전에는 여성이 황제가 될 수 없단 사실이 명확하게 규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 여성이었다면 이런 법이 제정될 리 없으니까요.”
“확실해?”
“네?”
“확실하게 적혀 있는지 궁금해서. ‘알려져 있다’고 했는데, 그건 그냥 소문에 불과하단 거잖아?”
그러자 소릭스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 네…….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제국의 법전은 법을 수호하는 신관, 즉 재판장과 황제만이 열람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법의 신관은 ‘공정함’을 유지하는 것이 신관이 되는 조건입니다. 그렇기 다들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지요.”
“흐응, 그렇구나.”
곧 집무실에 레베카가 들어오며 얘기는 거기서 끊겼다. 사실 레베카가 들어도 별 상관없었는데 소릭스는 그렇지 않았던지 슬쩍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것을 보며 괜히 금기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혼돈의 신관을 적대하지 말라는 아올레시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올레시아는 죽음의 신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안에도 그 힘이 있다는 걸까.
<네가 미치지 않은 건 내 힘 덕분인 듯하구나.>
나는 정말로 미치지 않은 거구나. 그동안 스스로 다짐하던 것이 사실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 *
“2황자님께서 오후에 찾아오실 겁니다.”
난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볕이 좋은 오후였다. 지금 한 2시쯤 되었나. 아마도 레베카가 말한 오후란 한 5시쯤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제국은 맑은 날씨가 쭉 이어졌고, 그에 따라 낮이 긴 편이었다.
낮이 길다는 건 활동 시간이 길다는 얘기기도 하다. 직장인에겐 딱히 반갑지 않은 사실이지. 더군다나 메타나 소릭스를 봐. 낮이든 밤이든 이곳에 붙박이처럼 있으며 일하는데 말이야. 과거 나라면 질색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오늘 오후래?”
“업무를 마치고 오시려는 모양입니다. 혹 바쁜 일이 있으신지요?”
“이거 읽어 봐야 해서.”
책을 들고 흔들자, 레베카가 살며시 찡그렸다. 『다양한 신관과 저주 그리고 대가』 책 제목을 소리 내어 읽으며 고랑이 더욱 깊게 패였다. 대체 이런 걸 읽어 무엇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주변인 중에 신관이 많잖아.”
“이해는 합니다만, 최근 들어 부정적 영향을 끼칠 만한 내용만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같이 저주나 저주로 사망한 이들 혹은 불운한 삶에 관한 책들이지 않습니까.”
“시너지 효과지. 시너지. 불운에서 난 이렇게 극복해야겠다 싶은?”
“……시너지? 가끔 주인님은 엉뚱한 소리로 말을 돌리려 하십니다.”
어라, 들켰나 보네. 그녀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자 레베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옆으로 아무렇게나 둔 책들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하나를 들어올렸다.
“각성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아. 그렇지. 다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러자 잠시 입을 다문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레베카는 손에 든 『신관의 각성과 자격 요건』이라는 책을 펼쳐보았다. 어쩐지 그 모습이 더없이 진지해서 그녀도 평소 신관과 신력에 대해 관심이 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똑똑.
그때였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한나가 들어와 말했다.
“7황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네. 응접실에 계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데인이? 평소 같았으면 하녀를 거치지 않고 들어왔을 데인이 굳이 한나를 통해 방문을 알렸다는 것이 참 의아했다. 더군다나 집무실이 아닌 응접실이라. 어쨌거나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응접실로 향했다.
“데인.”
볕이 잘 드는 난간에 앉아있던 데인이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인지 데인은 모처럼 셔츠 차림에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맨 채였다. 어라, 최근 들어 꼭 제국식 전통 복장인 튜닉만 고집하더니 어쩐 일일까.
“아실리.”
이제는 꽤 덥다 싶은 뜨거운 하늘 아래 데인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반갑다는 듯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여 보인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실크로 된 부드러운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데인의 모습이 그렇게 가려졌다 드러났다 다시 가려지기를 반복했다.
“바로 집무실로 오지 않고서.”
나는 멈칫했다가 자연스러운 척 카우치 쪽으로 걸어가 천천히 앉았다. 데인이 잘 보이는 방향이었다. 그는 여전히 테라스 난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시선과 뒤로 보이는 맑은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쉬는 것도 좋으니까.”
하지만 데인은 저런 맑은 하늘보다는 해가 막 저물고 어스름이 질 무렵의 하늘이 더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내가 집무실로 찾아가면 넌 여전히 무슨 일이든 했을 거야.”
“그렇지.”
이것저것 바쁠 때니까. 여러 가지로 내게 지워진 것을 생각하면 그렇긴 했다. 데인은 알 만하다는 시선으로 천천히 눈을 휘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불렀어.”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네가 나만 오롯이 봐 주잖아.”
“데인.”
나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가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옮겼다. 세상에나 하면서. 허벅지에 올려 둔 손을 의미 없이 꼼지락 움직여 본다. 이거 완전 작정하고 꼬시려는 멘트 아닌가?
“이전부터 느꼈지만, 네가 내게 했던 말들 다 의도하고 던지는 거지?”
“어떤 의도?”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했다. 휘어진 눈에서 나는 기어코 긍정을 찾아냈다. 아울러 그는 빙빙 돌려 말해서는 대꾸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직구를 꺼내 들었다.
“너 나 꼬시는 거잖아.”
이것이 데인이 원했던 바임을 알면서도.
“아니야?”
이제는 던질 수밖에 없다. 도망가고 피하기만 해서는 서로 더 힘들어질 뿐이었으니까. 데인의 말을 기억했다. 그는 내가 꺼려하고 피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자를 버리고 내게 왔다.
“들켰네.”
그것이 위험을 동반한 일임을 알면서. 누구보다 영리한 그는 그것을 버렸다. 그리고 이를 내게 말하는 것을 통해 내가 느낄 것마저 생각했을 거란 걸 알았다.
“어떡하지, 아실리? 내 마음을 전부 들켜 버렸어.”
그가 웃었다.
“너무 부끄러운걸.”
거짓말. 데인은 그가 ‘그림자’임을 안 순간부터 숨기려 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 치밀하게 숨겨놓고서 그는 드러내기로 결정하는 순간엔 망설임 없이 전부 드러냈다. 지금처럼. 화롯불의 불처럼 강렬하고 보석같이 아름다운 눈동자로 모를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을 드러냈다.
언제부터일까, 그리고 왜 나였을까. 수많은 의문들이 혀끝에 맴돌았다. 그리고 이 바람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는 무엇이든 알려 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서웠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일까 봐.
나는 이미 나를 사랑하는 남자에게 거절을 건넸다. 그리고 그토록 담담하고 우직하게 나를 지켜왔던 기사님에게 거절을 말하는 순간, 나는 거절 말고는 줄 수 없던 사실에 설움을 느꼈다.
수십 번 죽음을 겪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보는 것은 황폐해진 황무지를 다시 일구는 것과 같았고 나는 서툴렀다. 한때 알았지만 잊었던 것을 다시 배워 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이들은 기다릴 새도 없이 내게 사랑을 고했다. 애달파서 눈물이 나는 그런 사랑을.
레이 경을 거절하며 내게도 남은 애달픔을 채 수습하지 못한 채 나는 데인을 맞이했다.
“데인. 있잖아 나. 나를 낳아 준 사람을 만났어.”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누구라도 탓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올레시아?”
“응. 그 사람. 평생 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이 나를 알고 있고, 또 아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게 신기하고 생경했어.”
하지만 나는 안다. 데인이 이 마음을 말하는 날이 언제가 되었든 나는 놀라고 당황했을 것이다. 한때 그것을 생각조차 못해 본 사이였으니까.
“지금 네가 그래. 너는 그 사람과 반대로 이제까지 내가 알았지만, 최근 몇 주를 시작으로 모르는 사람이 된 것처럼 어색해. 그런데, 이건 네가 의도한 거야. 그렇지?”
나는 짙은 확신을 담은 눈으로 데인을 보았다. 데인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곧이어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살짝 웃었다.
“맞아. 그렇지 않으면 넌 영원히 이쪽을 봐 주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그 말을 꺼낸 걸 후회해?”
“아니. 언제고 난 말했을 거야. 아니 흘러넘쳐서 주체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지. 그저 조금 더 빨리 말하지 못했기에…….”
성큼 걸어온 데인이 의자 옆을 짚었다.
“아쉬울 뿐.”
그는 볕을 받아 더욱 밝은 빛을 띤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뒤로 물러나는 게 좋을까. 얼굴로 음영이 지며 그의 잘생긴 낯이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실리.”
그는 내 손을 잡고 들어 올려 천천히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횃불처럼 도드라진 붉은색 눈동자로 나를 담았다.
“난 어쩔 수 없는 건 후회하지 않아.”
곧이어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에라도 네가 내 마음을 알았으니 됐어.”
내가 아는 데인은 늘 소년 같았지만, 나이보다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모르는 것이 없던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서서 말하는 데인은 더는 소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청년의 모습으로, 가면을 던진 어느 밤처럼 온화하고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린 남매가 아니지. 너는 줄곧 우리가 남매라고 생각했으니까. 받아들이는 과정도 필요하리라 생각해.”
“데인.”
데인은 대답 대신 살짝 웃었다. 그는 조금 서글픈 듯했다.
“하지만 아실리.”
내 손끝을 쥐었다가 놓으며 데인이 나를 불렀다. 그는 천천히 내 얼굴 구석구석을 보며 잠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는데, 왜일까 그의 표정을 본 순간 이 손을 놓고 얼른 피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를 살려 왔던 어떤 직감 같은 거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네가 왜 기억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렘이 아닌 어떤 경고 같은 이유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너는 이미 오래전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어. 8황비 아올레시아는 너와 내가 함께 있을 때, 네게 직접 말했거든. 네가 황제의 친딸이 아니라고.”
무슨 소리야? 나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누가 갑작스럽게 한 대 때린 것처럼 온몸이 저릿했다.
“무슨 말이야? 나는 그런 기억이…….”
“없지. 넌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없잖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랬다. 나는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단순히 어릴 적이라 그렇다고 하기엔 나는 책 『루스벨라의 빛』 한 페이지, 한 글자마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굉장한 기억력으로 어린 날을 통째로 잊어버렸다?
이 순간 벼락같은 충격이 나를 관통했다. 확실히 이상했다. 수상했다. 나라는 존재는 모순적이었다.
“네가 여섯 살, 그리고 내가 여덟 살이던 날이었어. 너는 내게 너를 ‘안’이라 불러 달라고 했지.”
“……안?”
“그리고 넌 네가 스물여덟이라고 말했어.”
소름이 돋았다. 스물여덟, 전생의 내가 죽었던 나이였다. 무슨 말이야. 무슨 얘기냐고. 헤르난 앞에서 안이라 불러 달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난 무슨 생각을 했지? 별생각 없이 튀어나왔던 이름이었다.
“너는 역병을 피해 서쪽 영지에 다녀온 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어. 그래서 지금까지 나도 말하지 않은 거야.”
“내가 그거 말고도 다른 얘길 한 적이 있어?”
“있어. 여섯 살의 너는 내가 모르는 이곳에 없는 단어들을 말했어.”
이곳에 ‘없는’ 단어들. 데인은 굳이 없다는 말을 강조했다. 스멀스멀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팔다리를 꼼짝할 수 없었다. 나의 충격을 알아챈 걸까. 눈앞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데인은 내 눈을 가린 채로 나를 불렀다.
아실리. 그 이름이 순간이지만 낯설게 들렸다. 데인이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데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간절한 사람처럼 그의 손목을 꼭 쥐었다.
“데인. 지금 내가 이해하기 힘들어서 그런데 혼란스러워.”
“아실리.”
“안? 왜 내가 네게 그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어?”
“……너는 좀처럼 발음하지 못하는 날더러 그렇게 불러 달라 했어. 끝부분만 따온 이름이라고.”
이 세계는 책 속의 세계였다. 나는 책 속 세상에 환생했고, 세계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줄곧 책 속 내용을 아는 이방인으로서 이곳에 머물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과거에 사랑했던 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빠. 친구. 나와 함께했던 직장 동료. 심지어 애지중지했던 내 사랑스런 강아지마저도.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내 이름. 내 이름이 뭐였지?
“데인. 내 이름이 뭐였지?”
“아실리.”
생각해보면 나는 흐릿하게 남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겼다. 『루스벨라의 빛』 지문 하나까지 기억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서는,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것이 한 줌 수증기로 기화하는 것은 그저 그러려니 사라지는 것이라 여겼다. 내가 기억하지 못 한 게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고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더 충격이었다.
나는 대체 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걸까? 무엇을 위해? 왜? 데인이 무어라 더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냐고?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다. 죽었다 살아온 적이 있는데 이따위 충격이 대수일까. 다만, 가슴이 답답했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내가 과거의 세계에서 이곳에 다시 태어난 것.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지식들. 백화점, 비행기, 자동차……. 이 세계에 없는 것들. 모든 것을 기억했지만, 단 하나 나와 관련한 것들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희미하게 평범한 어떤 인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나는 아빠가 있었고, 친구가 있었고, 개를 길렀다. 직장에 다녔으며 고달픈 생활에 찌든 월급쟁이였다. 그러나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내 키는 어떠했는지 어떤 머리를 했고 어떤 생김새였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언젠가 과거에서 본 애니메이션에서 이름을 뺏긴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 내가 그런 처지인 걸까? 예전 세계로 돌아가길 바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것들 그것들을 동의 없이 지워 버린 이 세계는 내게 무엇을 바랐기에 내게만 자비를 모르는가.
“아실리. 괜찮아.”
“데인.”
“그때의 넌 내게 괜찮을 거라고 했어.”
괜찮다니. 무엇이? 기억이 텅 비었고 과거의 내 이름과 내 모습을 잃었고 그 자리에는 읽었다 보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책의 내용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걸. 그리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려 이제는 찾고자 해도 찾지 못할 기억이라면 어떡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던 너는 괜찮다고 했어. 자신은 곧 사라질 거고 잊을 거라고 했어. 생각해 보면 그때 네가 내게 괜찮을 거라 말을 한 건 지금을 위해서였나 보다.”
데인이 내 뺨을 감싸며 눈을 마주쳤다. 나를 안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색색. 평온한 그의 숨소리에 맞춰 점차 떨리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그는 이 모든 걸 이해하는 사람처럼 그러나 연민을 담고 조금의 서글픔을 담아서 내게 말했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눈동자를 사르르 접으며.
“나를 통해 괜찮다고 전하기 위해서.”
밤과 같은 낮이었다.
“데인 넌 무엇을 알고 있어?”
볕이 이리도 쨍쨍한데 이곳만 해가 저문 것처럼 어두웠다. 아니, 내가 그리 느끼고 있나 보다. 지금 이 순간이 밤이길 바란다. 그저 잠든 사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가며 새 아침이 찾아오길 바라니까.
그러나 지나가지 않는 낮이었다. 나는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아실리. 나는 머리가 좋아.”
“……알아.”
데인은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들 정도로 좋았지.”
그는 내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나를 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네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했어. 네가 원래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너도 이 세계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 그리고 네게는 스물여덟의 ‘안’의 모습과 또 다른 모습이 있었다는 것도.”
“또 다른 모습?”
“네게는 여섯 살 나이 그대로 아실리라는 모습과 스물여덟 안의 모습이 공존했어. 여섯 살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가도 다음 날이면 안의 모습으로 아이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했지. 너는 스스로 네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말했어.”
어린 나에게 아실리와 안, 즉 과거를 기억하는 내가 공존했다고? 데인은 내가 충격 받지 않게끔 하나하나 단어를 골라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순 없었지만,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그를 위해서라도 차분하려 애썼다.
“안은 내게 자신이 곧 기억을 잃을 거라 말했고, 그건 맞아떨어졌지. 그리고 다신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말도 했고. 그것도 맞는 말인 것 같네.”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는 서글프고 연민하는 낯으로 길을 잃은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데인과 언제 처음 만났더라? 역병을 피하기 위해 갔던 서쪽에서 다시 궁으로 돌아올 때 그는 내 궁 앞에 있었다. 데인은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당연하게 내 곁에 있었다. 그와의 첫 만남이 기억나지 않는 건 그저 시간 속에 무뎌졌던 거라 생각했다.
“나는 네가 준비되었을 때 말을 하려고 했어.”
데인은 시선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담담한 공기가 우리 사이를 지배했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지금 이걸 내게 말하는 건.”
나는 잠시 침묵 뒤로 다시 이어 말했다.
“내가 준비되었다고 생각해서?”
데인은 미소했다.
“아니. 더는 참지 못해서.”
살짝 시선을 돌리자 데인의 어깨에 눈부시도록 밝은 태양이 걸려 있다. 커튼이 흔들리고 있고 태양이 가려졌다 나타났다 다시 가려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는 말하지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이 마음을. 그리고 이 마음이 시작된 시간을.”
“데인.”
그는 내 부름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아실리. 무엇이 하고 싶어?”
데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잔잔한 붉은색 눈동자가 자리했다.
“나는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어.”
내 뺨에 손을 얹더니, 그가 부드러이 미소한다.
“복수하고 싶어? 증오하는 이를 네 눈앞에 데려올게. 평화로운 삶을 원한다면, 이 궁이 영원히 네게만 주어지도록 해 줄게. 그리고 모든 것이 싫다면 저 멀리 석양이 지는 곳에 너를 데려다줄게.”
“궁 밖으로?”
“궁 밖으로.”
솜털까지 바르작 서는 느낌이었다. 부드러운 손에 어쩔 줄 모르고 뒤로 물러나자, 물러난 만큼 데인이 다가왔다.
“나 이제 맨손이야 아실리.”
“그림자를 그만둬서?”
“응.”
데인은 달콤하게 웃었다.
“이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는 눈 위에 떨어진 동백꽃과 같이 붉은 눈동자로 나를 담은 채 속삭였다. 잎새의 스침처럼 고요하고, 부드러운 천처럼 나긋한 목소리였다.
“네가 안의 모습이었을 때부터. 나는 네게서 눈을 뗄 수 없었어. 어쩌면 한 순간도 너를 놓지 않고 이 가슴에 담아 왔는지도 몰라.”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나로부터 시작한 감정이라니. 과연 그때의 안이 지금의 나와 같을까?
“데인. 사람들은 나와 네가 남매인 줄 알고 있어.”
“괜찮아. 모든 비밀은 밤이 품을 거고 나는 너를 감싸 안는 밤이 될 거야.”
모든 비난은 그가 듣겠단 소리였다. 난 고개를 저었다.
“낮이 싫다던 네게 난 영원한 밤이 되어서 곁에 머물게. 누구도 널 비웃지 않는 곳으로 널 데려가고 싶어.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한낮의 하늘 아래 밤이 되겠다는 그가 나를 자신의 그림자 속에 가둬 두고 말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마디만. 한마디만 해 줘, 아실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게.”
그럼에도 나는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아.”
혹할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수락한다면 그는 무엇이든 해 줄 거라는 그런 확신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아플 정도로 쏟아지는 데인의 마음에 미안하지만, 그건 초콜릿을 한 번에 삼킨 기분이었다. 아리도록 달고, 달지만 씁쓸한 느낌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기분. 고요한 밤 같던 분위기가 산산이 깨진 사이로 시리고 차가운 현실감이 찾아왔다.
내가 복수하겠노라 말하면 그는 카스토르를 눈앞에 데려오겠지만, 데려온 그는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겠지. 이 궁이 영원히 내게만 주어지게 하겠다고? 그 대가로 황제에게 지불하는 건 데인이었다. 나를 도망가게 하는 것도. 이 모든 짐은 그가 모두 지겠노라 말했으니까.
“데인.”
잘 모르겠다. 내가 이토록 과분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건지. 나는 희생하는 것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지난 시간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으니까. 그렇다고 모든 걸 버리고 피하고 싶진 않았다. 난 도망가고 싶은 게 아니야. 그저 이 순간 모든 것이 안타까웠다.
그가 나와 같이 되지 않길 바란다. 진심이었다. 아프도록 괴로웠던 시간들을 지나 황폐해진 나는 비참하고 볼품없었으니까. 그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이를 담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 말한 그에게 결례였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데인은 뺨을 쥐었던 손을 놓고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뺨으로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손을 쥔 그대로 숨결로 간지럽히더니 손끝에 그리고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나는 여기 있어.”
그가 가슴에 내 손을 쥔 채 꾹 눌러 잡았다. 손끝에서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혼란스러울 때 늘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네 습관을 알아. 기다릴게.”
그는 한참 뒤에야 이어 말했다.
“내게 반해 줘, 아실리.”
숨결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며 떨어진다. 그가 가까운 거리에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행복만 안겨 줄게.”
* * *
“2황자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율리안과 나 사이를 방해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다. 그가 바쁘거나 내가 자리를 비웠거나. 율리안과의 만남은 오늘도 불발되었다. 영영 보지 못할 사이인가? 그건 곤란한데.
“하긴. 2황자면…….”
율리안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긴 하지. 현재 공식적으로 앓아누운 상태의 황제를 대신해 황태자가 집정하지. 그 황태자는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하지, 거기다 강력한 후계자의 힘을 갖췄으니. 책 『루스벨라의 빛』 속에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카스토르를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율리안도 바쁘겠네. 아니 가장 바쁜 시기겠어.”
카스토르 그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갖췄다곤 하나, 그는 적아 구분 없이 살해하고 다니는 미친 황태자였다. 율리안은 인망으로 사람들을 하나둘씩 제 편으로 만들었고, 지금에 와선 대부분의 고위 신관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카스토르의 편인 건 아니었다. 그저 율리안이 ‘비신관’이란 것에 못마땅해 하는 세력이었을 뿐. 이마저도 소수였다.
원작까지 어느 정도 남았더라?
루스벨라 등장까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일단, 율리안이 반란을 준비하는 중이거나 이미 준비된 상태일 것이다. 어떡하면 여기 끼어서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신뢰를 쌓으려면 일단 한 번은 마주해야 할 텐데.
『루스벨라의 빛』 속 율리안의 반란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다. 루스벨라가 제국에 도달했을 때, 율리안은 이미 반란에 실패해 북쪽 탑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곳에 감금된 루스벨라를 만나 그녀를 측은히 여기고, 그녀의 탈출을 돕는다. 이미 그때 율리안은 사랑하는 아내도 충신도 모두 반역죄로 처형당한 지 오래였고, 그 홀로 살아남은 상태였다.
카스토르는 어째서 율리안만 죽이지 않았을까?
머릿속 내용으로 있을 때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곱씹어 보니 이상했다. 카스토르는 반란과 관계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시켰다. 루스벨라는 율리안을 통해 단두대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끔찍했노라고. 율리안은 반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왜일까…….”
제국의 상황은 벼랑 끝에 매달린 손수건과 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답은 사소한 곳에 있지 않을까?
수없이 시간을 반복한 나는 안다. 미래로 향한 길은 항상 보잘것없이 작은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율리안에게 바람맞았겠다. 여기에 대해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렇게 응접실에서 나와 홀로 궁의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제국의 8번째 가지를 뵙습니다.”
나는 누군가와 마주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사람은 아벤타 공작 부인? 오랜만에 만나는 이였다. 그녀는 우아하게 허리를 펴며 미소했다.
“아벤타 공작 부인?”
“못 본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지셨군요.”
나는 눈빛으로 감사를 표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대가 왜 여기 있죠?”
그러나 묻는 순간 바로 알았다. 레베카를 보러 온 거구나. 그녀가 향하던 길은 궁의 정문과 이어진 길이었다. 이미 만나고 온 뒤였나 보다.
“제 딸아이를 보러 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천천히 끄덕이자, 부인이 다시 한 번 웃었다.
“당신의 눈이 제 오랜 친우와 무척이나 닮아서 놀라고 말았습니다. 외람되지만, 고귀한 피는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구나. 새삼 느낍니다.”
아올레시아의 얘기를 담은 부인의 얼굴은 어딘가 아련한 빛을 띠었다. 아벤타 공작 부인이 아올레시아와 비슷한 연배였던가. 아올레시아는 1황녀, 그리고 2황녀와 친우였다고 했다.
“부인도 제 모친과 친우였습니까?”
“네. 그러했습니다.”
부인이 나지막하게 수긍했다.
“이제는 더는 그렇게 부르지 못하지만. 황녀님, 혹시 제국의 성녀를 아십니까?”
“마리사……. 라는 이름의 성녀 말인가요?”
“네. 그녀는 제 남편과 남매입니다. 마리사 쪽이 누나이지요.”
어라, 그럼 레베카의 고모란 얘기잖아?
레베카는 그런 얘길 꺼낸 적 없다고 했더니 공작 부인은 그럴 거라고 했다.
“마리사는 성을 버렸습니다. 아벤타의 이름 대신 검의 신관으로만 살고 싶어 했으니까요.”
가만 마리사랑 공작 부인이랑 친구고, 마리사가 아벤타 공작의 누나라고 했으니까. 그럼 공작 부인은 연하와 결혼한 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능력자셨구나. 공작 부인의 나긋한 미소를 보며 나는 곧 얼굴을 다시 진지하게 굳혔다.
“그리고 마리사는 죽은 첫째 황녀님의 우니카였습니다.”
“……레베카처럼 말인가요?”
우니카. 레베카가 지닌 직위의 이름이다. 시녀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네. 시녀 말입니다. 그리고 호위 기사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런 첫째 황녀 전하와 마리,사 그리고 둘째 황녀님. 저와 아올레시아까지 다함께 어울렸던 친우였습니다.”
부인은 아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했다. 후회와 회한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죽은 황녀와 황제의 첩이 된 아올레시아. 지금 그들을 생각해 보면 짐작 할 수 있었다.
“저는 가문의 일에 무지한 아녀자입니다. 그러나 레베카를 당신의 시녀로 보낸 것은 오래전 친우에 대한 속죄였습니다.”
“레베카는 아벤타 공작의 명으로 황태자와 관련된 소문과 진상을 알기 위해 제게 왔다고 했어요.”
“네. 제가 그리 말했으니, 그 아이는 그렇게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진짜 이유를 비밀에 붙였습니다. 첫째 황녀 전하와 관련된 모든 것은 함구되어야 하니까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공작 부인의 머리칼을 살짝 흩어놓았다.
“제가 그분과 친우였던 것도.”
부인은 화사한 색감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에 걸맞지 않은 슬픈 얼굴로 이어 말했다.
“마리사는 인생의 동반자였던 첫째 황녀님을 잃고 손가락을 잃었습니다. 검의 대신관 자리에서도 내려와야 했지요. 그 비극이 반복되지 않길 바랍니다.”
“내가 죽지 않길 바라는 건가요?”
“네.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부인이 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나를 담았다. 나는 오래전 내 예법을 가르치는 데 무척 열심이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마리사와 달리 황녀님과 제 딸아이는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녀를 본 적 있어요.”
제국의 성녀, 마리사는 내게 빠짐없이 친절했다. 그녀의 성격인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내게 뜻 모를 호의를 베풀었다.
“그녀가 내게 친절했던 이유는 공작 부인과 같이 생각해서인가요?”
“아마도. 마리사도 황녀님을 보았다면 그리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죽은 황녀님이 생각나셨겠지요.”
그건 묘했다. 사람이 아주 꽉 찬 시내 변을 걷고 있는데, 어깨로 스쳐 가던 행인이 대뜸 나를 잡고 ‘나는 당신을 알아요.’ 외치더니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을 한 행인을 본 기분이었다. 내게 아벤타 공작 부인은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황녀님께서는 혼기가 꽉 찬 나이이시지요.”
그녀 또한 더는 꺼낼 생각이 없는지 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좀 엉뚱한 감이 있었지만 나는 살짝 끄덕였다.
“그렇죠.”
“송구하나, 마음에 담아 둔 정인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한 발짝 다가온 부인이 나긋하게 물었다.
최근에도 이 질문을 받아 본 것 같은데. 최근 들어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은 건 착각이 아닌 것 같다. 이 화제가 영 반갑지 않았지만, 부인을 무시할 순 없었다.
“있었으면 좋겠지만…….”
메타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떠올렸던 얼굴이 있었다. 왜일까, 이 순간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슴이 아려 왔다.
“애석하게도 아직 없네요.”
메타는 내가 하게 될 사랑이 궁금하다고 했다. 대체 나는 어떤 사람을 사랑할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그건 가벼운 궁금증일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그의 눈은 퍽 진지했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진지해지고 말았다.
“중간에 가벼이 두신 침묵은 혹 있지만 확신하지 못한 것입니까?”
다른 이들이 보는 나는 담담하고 건조했다. 나도 이걸 인정했다. 마음에 황무지밖에 남지 않아 새순이 돋지 못한 채 그저 건조한 겨울만이 머물렀으니까. 그러나 변화는 아주 천천히 찾아왔다.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변하고 싶다는 내 바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변화를 느낀 것은 기억을 다시 되찾았을 때부터였다.
“부인. 뜬금없지만 말예요. 사랑이 뭔가요?”
나는 우습게도 메타가 내게 물었던 것을 공작 부인에게 물었다. 뭔가 철학적인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고 그저 가볍게 물은 것이었다. 공작 부인은 깃털처럼 포근하게 미소했다.
“사랑의 신은 사랑을 두고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그리고 마주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녀는 비극을 옆에서 바라본 자였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기에 타인인 나를 위해 진지한 조언을 건네는 것이리라. 그녀는 어쩌면 레베카를 이렇게 보았을까. 무척이나 자애로운 얼굴로 이렇게.
“위를 보며 우러르는 사랑, 아래를 보며 연민하거나 끝없이 베푸는 사랑, 그리고 마주보며 함께 지향하는 사랑. 그리고 하나 더 시야를 뺏어 제 안에 가두는 사랑.”
부인은 나를 보며, 아름답게 미소했다. 나는 그녀의 깊은 눈에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흔적과 그녀가 가진 세월의 무게를 읽어 냈다.
“황녀님께서는 어떤 것이 황녀님의 사랑이라 생각하십니까?”
오랜 침묵이 이어졌으나, 부인은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답은 황녀님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후회하게 될까 봐 무섭네요.”
부인은 살짝 웃으며 그럴 일은 없을 거라 말했다.
“부인은 내가 행복해지리라 확신하시는 것 같군요.”
“레베카. 간만에 만난 제 딸아이는 더욱 현명한 여성이 되었더군요. 전부 황녀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부드러운 얼굴은 묘한 확신이 서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아올레시아의 딸이라서?
“당신은 현명하신 분이니까요.”
마리사가 첫째 황녀의 시녀. 그리고 조카인 레베카가 내 시녀……. 새로 알게 된 것과 그녀의 조언이 어지럽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모르는 공작 부인은 그대로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조언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 * *
밤이 황궁을 뒤덮는 시간에 황궁은 어떤 시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해진다. 황실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어둠 속 황궁을 걷는 것은 지양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엄격하게 지켜지는 곳이 바로 4황자 아모르의 궁이었다.
“하아…….”
아모르는 또 한 번 침대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몇 번째인지 몰랐다. 어느 날부터 시작된 꿈은 수차례 그를 찾아왔다. 눈감으면 꿈을 꿨다.
“……아실리.”
꿈속에서 그가 몰랐던 시간이 펼쳐졌다. 반복해서 보는 것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그녀는 울었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구슬프게 울었다.
‘너는 대체…….’
이유를 물어도 꿈속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모르는 침대 머리를 손으로 잡아 몸을 지탱했다. 그러고는 일어났다.
<절대 나갈 수 없을 거야.>
창문을 연 순간 손끝으로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마도 카스토르가 펼쳐 뒀을 결계일 것이다. 아모르의 손이 창틀을 힘주어 잡았다. 아모르의 눈에 홰홰 도는 보랏빛이 바다처럼 일렁였다.
<오라버니. 난 후회하지 않아요.>
이 순간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당장 바라볼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갈급함이 그의 목을 졸랐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나간 순간, 후회할 거야. 아모르.>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파편은 없었다. 무형의 결계가 깨졌을 뿐.
* * *
깊은 밤. 달이 하늘 위에 자리한 으슥한 시간이었다.
나는 잠들지 못하는 밤을 자주 맞이했다. 오늘도 다르지 않아 눈을 뜬 채로 어둠을 응시한다. 사방이 고요했다. 귀 기울여도 내 숨소리가 전부인 그런 고요함 속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테라스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을 끈으로 묶고, 테라스로 나가 본다. 나무가 솨아아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대로 일기장을 들어 올린다.
“너는 대체 뭘까.”
질문은 시간이 갈수록 탑처럼 쌓여만 가는데 끝끝내 침묵을 지키는 네가 야속하기도 하다. 아니 너라고 불러야 할지 이것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기장의 책 끝을 훑어 내린다.
“너는 내 모습을 하고 있었어. 그렇지?”
분명 헤르난과 지하에 갇혀 잠시나마 보게 된 일기장의 모습은 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만나며 나도 모르게 청했던 이름. 나는 안, 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안. 하고 다시 중얼거려 본다.
―네가 날 볼 수 있다는 건, 머지않았다는 거야.
그날 내 모습을 한 일기장은 내게 그리 말했다. 무엇이 머지않았다는 걸까? 그 말을 증명하듯 일기장은 아하시야의 일 뒤로 더는 일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내게 직접 말을 걸었지. 신기한 일이다. 지금 나는 볼 수 없음에도 내 앞에 문이 하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문만 열면 마침내 몰랐던 나머지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그런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오늘 밤도 잠들긴 그른 것 같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새까만 하늘에 별이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천 위에 수놓은 듯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천천히 달을 담았다. 새파란 빛을 띤 달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지난 4년간 내 삶에서 밤은 아모르와 함께였다.
천천히 돌아서자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방이 한눈에 보였다. 어둠에 잠긴 방. 이상한 일이다. 혼자 자는 건 익숙한 일이었는데, 방이 무척이나 휑하고 외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걷고 싶다. 산책이라도 할까. 하지만 내일도 할 일이 무척 많은데. 그렇지 않아도 레베카가 황녀의 눈 밑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를 했다. 억지로라도 누워 잠을 청하면 오지 않을까 싶을 때 바닥에 그려진 희미한 녹색 빛을 보았다. 빛을 따라가 보니 내 팔에 있는 아모르의 팔찌였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빛이 나지 않았던 팔찌였다. 아모르와 마지막으로 통신한 뒤 평범한 끈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지금 어째서 빛이 나는 것일까? 혹시나 아모르에게 어떤 변고라도 생겼을까 걱정하던 차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귀 뒤로 넘겼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흐트러질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가는 레이스로 만들어진 커튼이 크게 펄럭였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를 가린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바람결을 타고 느껴지는 들판의 냄새와 연한 풀내음.
바람이 불기 전 하나였던 숨소리는 둘이 되었다.
“오라버니?”
나는 이 향기를 알았다. 아모르 말고는 느껴 본 적 없다. 그렇기에 그를 작게 불러 보았다. 그러나 듣지 못한 걸까? 아모르가 맞는데. 나는 여전히 눈을 가린 손을 잡은 채 할 말을 골랐다.
“어떻게 나오셨어요? 나와도 되는 거 맞죠? 나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
어깨에서 훈풍이 느껴졌다. 내 허리를 감은 팔이 힘을 주었다. 그는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서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이제 괜찮은 거예요?”
그러나 명랑한 척 물어본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전부 괜찮아져서 나 찾아온 거다. 그죠?”
그렇지 않다는 걸. 그의 몸은 뜨거웠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이를 모른 척한 채 나지막한 음성을 흘렸다.
“사실은 나도 보고 싶었어요.”
바람이 멎었다. 흔들리던 옷과 휘날리던 머리카락이 잠잠해진 걸 느꼈다. 그러나 여전히 앞은 깜깜했다. 나는 시야를 침범했던 손을 부드럽게 아래로 내렸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다 말고 멈칫한다.
“오라버니?”
아모르는 말이 없었다. 그가 더욱 강하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깊게 파묻었다. 나는 그의 정수리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오라버니.”
몇 번이나 달싹이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 낸다. 떨어지지 않던 혀를 간신히 움직여 말했다.
“왜 울어요?”
그는 처음 볼 때부터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혹여 넘어져 크게 다칠까 걱정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이나 삐딱하게 나를 쳐다보는 얼굴, 그 아래로 도드라진 창백한 피부. 그러나 신관이었기에 비신관보다 몇 배는 강한 근력을 가진 모순된 사람. 그는 아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니까 몸이 아닌 정신 말이다.
그는 강했다. 약을 매일매일 마시지 않으면, 죽음이 찾아올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모르는 의연했다. 내 병은 옮는 게 아니라며. 오히려 겨울 가지처럼 마르고 건조한 낯으로 성마르게 조소했다.
“오라버니.”
그런 그는 언제나 강해 보였다. 모든 것이 그를 흔들어 놓아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뿌리박고 선 나무 같았다.
그런데 왜?
그의 팔은 이 순간에도 허리를 옥죄며 이젠 떼어 낼 수 없는 힘으로 나를 감싸 안고 있었다.
“얼굴을 보여 줘요. 응?”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자, 거짓말처럼 손이 떨어졌다. 나는 완전히 돌아서서 아모르를 볼 수 있었다.
“아실리.”
눈 밑이 새빨간 그는 처음 보는 엉망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왜 그래요. 왜? 무슨 일 있는 거죠? 일단 아파 보이니까 닦고 얘기해요. 네?”
나는 그의 새빨간 눈 밑을 손으로 쓸어 주려 했다. 그러나 그 손이 아모르의 손에 잡혀 그대로 끌어당겨졌다.
“너는 왜.”
그가 손을 잡아 쥐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의 눈빛이 절절해 나는 외면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은 몹시도 차가웠다. 아마도 오래도록 밖에 있었던 것 같다. 나를 보러 와서 한참을 밖에 있었던 걸까? 왜? 입술이 떨어진다. 이마를 툭 마주한 그에게서 선명하게 떨어지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아. 어떡하지? 정말 아픈가? 그가 아프지 않고서야 울 리가 없다. 이마로 달아오른 열기가 느껴졌다. 턱 끝으로 뚝 떨어지는 눈물. 닦아 주고 싶었지만, 붙잡힌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발만 동동 굴렀다.
다시 한 번 그가 길게 입을 맞췄다. 속눈썹 끝에 동그랗게 맺힌 눈물이 애처로웠다. 그가 손을 놓고 떨어졌다.
“너는 왜 늘.”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어 아모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툭툭 흘러내리는 그의 하늘빛 머리카락만 달빛을 은은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뚝뚝. 눈물은 쉴 새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다는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막 어깨에 손을 올리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너는 전혀 괜찮지 않은 일에도, 상황에도 언제나 의연하게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웃었기에.”
아모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그게 싫었어.”
그는 내가 보았던 얼굴 중 가장 아픈 얼굴을 하고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건.”
아주 꽉.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구나.”
목소리만 들려오는 데도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가 말하지 않은 걸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를 안아 주었다. 등을 쓸며 나를 꽉 채운 체온에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위태로운 목소리가 꽉 눌린 채 튀어나왔다.
“잠이 오지 않아서.”
“……잠이 오지 않아서 온 거예요?”
“그래.”
아모르가 나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네가 보고 싶어서.”
그만 그가 얼굴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아모르가 나를 풀어주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 밑이 열이 오른 사람처럼 붉었다. 그리고 피로가 느껴졌다.
“사실은 아실리. 나는 꿈을 꿨어.”
“꿈이요?”
“네가 한때 내게 기억해 달라 부르짖었던 시간들.”
“……오라버니.”
“네…… 가 기억해 달라 외치는 것을 꿈에서 보았다.”
나는 멈칫했다. 혀가 굳어 버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모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한쪽 머리에서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것이 틀리길 바랐다. 아니 정말 바랐나? 정말?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서. 너무 늦게 대답해서.”
과거 아모르를 붙잡고 무수히 기억해 달라 간절하게 외쳤다. 오라버니 한 번만 기억해 주면 안 되냐고. 제발.
수없이 제발을 외치며 바랐던 바람은 한 번의 반복이 수십 번의 반복이 될 동안 무뎌지고 사라졌다. 나만 아는 기억이라 생각했던 기억은 카스토르가 알고 있었다. 나를 죽인 사람과 죽은 나만이 아는 기억이었다. 그것이 나락으로 날 이끌었다. 그리고 아모르는. 아모르는…….
“기억했어.”
그날 끝내 닿지 못했던 바람을 들고서.
“전부.”
말했다.
만약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 있다. 그 사람은 나를 기억하겠지. 그리고 수없이 죽은 나를 기억해 주겠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난 아마도 도와달라고 빌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반복을 끝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누가 도와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겠지. 그리고 반복 속에서 그저 알아주길 바라는 걸로 변할 것이다. 과거 내가 그러했으니까.
그냥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었다고.
<기억해 주길 바라는구나. 너와 나만 아는 세상을.>
카스토르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나를 죽인 자가 무한히 죽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이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것은 나를 절망하게 했다. 잊기 위해 나는 더 발버둥 친 건지도 모르겠다.
지독히도 외로웠던 시간들.
“정말…….”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인다. 떨어지지 않는 말을 겨우 꺼낸다.
“정말 기억한다고요. 날?”
그날 내 외침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비명이 몇 번이고 시간의 침묵에 삼켜졌다. 내가 가진 것은 사람도 물건도 아닌 것 같은 일기장이었다. 이 일기장만이 나의 동반자였다. 나를 절망에 빠트린 주범이자 이 반복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 아이러니했다.
“정말, 정말인가요?”
왜 이제야 기억해 냈느냐는 원망도 어째서 네가 기억하게 되었나 이유를 물어볼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이것이 정말이냐는 간절한 질문밖에 없었다.
“그래.”
아모르는 그런 나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봤다.
“전부 기억해.”
그는 길을 잃은 것처럼 헤매는 나의 옆에서 꼭 함께 헤매는 사람처럼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공기는 무척 차가웠으나 그의 품은 여지없이 따듯했다.
“미안해.”
그는 한 음절, 한 음절 꽉 눌러 말했다.
“이제야 기억해서.”
그는 다시 한 번 되풀이한다. 그 순간 눈 밑이 홧홧했다.
<차라리 울지 그래.>
한때 아모르는 나를 답답해했다.
<그런 죽은 눈으로 말해 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어째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며 울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대꾸할 수 없었다. 나도 이유를 몰랐으니까. 내가 어째서 울지 못하는 것인지 나도 몰랐다.
가슴 속에 커다란 돌이 있었다. 그것은 물이 나오는 샘을 막았다. 그래서 황폐해진 땅은 황폐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나를 불쌍히 여겨 비를 내려 주었지만, 그 사랑은 소나기였다. 무척이나 다디단 설탕 같은 비였지만 다시 황무지가 되고 마는. 물은 돌 아래서 흘렀다.
<넌 언제나 울지도 웃지도 않는 표정이야.>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어.
“오라버니…….”
모두가 내게 울어 달라 말해도 그들의 염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은 오래전 우는 법을 잊었기 때문이다. 왜 누구도 묻지 않지?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어. 지금의 내 모습도. 내가 잃어야 할 것들도.
“나는 원, 원망하지 않아요.”
원망하면 앞으로 갈 수 없으니까.
“후, 후회하지도 않아요.”
후회하면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까.
“울면, 울면 안 돼요.”
약해지니까.
“괜찮아.”
나를 꽉 채우는 이 체온이 따뜻하면서도 멀었다. 아니, 생경했다. 가슴 속 돌이 흔들리는 이 기분은 아모르의 한마디가 오랫동안 굳건하게 자리했던 돌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울어도 돼.”
오랫동안 사람들은 내가 울어도 눈물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시간이 되돌아가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무지한 이들을 보며 나는 눈물을 멈췄다. 나는 어느 날부터 울지 않았다.
“네가 우는 이유를 아니까.”
누구도 내 죽음을 슬퍼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내가 내 죽음을 슬퍼하지 못했다. 되풀이 되는 시간 속에 내 죽음은 추모 받지 못했다. 수증기처럼 기화된 나의 죽음은 악몽이 되었을 뿐이었다.
주르륵. 뺨을 타고 하나씩 눈물이 흘렀다.
“아…….”
뺨을 가리려던 내 손이 부드러운 손에 붙잡혀 막혔다.
“괜찮아.”
버릇처럼 닦아 내려던 손이 멈췄기 때문일까.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렀다. 뚝. 뚝뚝. 언제부터 내게 이렇게 눈물이 많았지? 차마 가늠할 수 없을 정도 뺨을 타고 흘렀다. 쉴 새 없이. 아모르는 나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며 뺨을 감싸 안았다.
“미안하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눈물이 똑 떨어졌다. 그러나 눈물은 그 뒤를 쉬지 않고 동그랗게 맺힌다.
“위로에 서툴러서.”
그의 손가락이 눈물을 닦아 내면 그 자리를 또 다른 것이 채웠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닦아 냈다.
“태어나 한 번도 누굴 위로해 본 적이 없어.”
그랬을 것이다. 아모르를 둘러싼 환경은 어린 그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잔인하고 잔혹했을 것이니까. 그는 오랫동안 학대 속에 방치되었다. 외로움을 알고 고통을 알며 그에게 그것이 당연해지는 오랜 시간이 있었다.
아모르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를 보면 그의 녹색 눈동자가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아모르는 왜 내 죽음을 기억한 것일까? 직접 죽는 걸 본 사람이라서? 강한 신관이라서? 기억해 낸 것이 아모르여서 다행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연민했다.
“오라버니.”
내 죽음은 하나같이 외롭고 불행했다. 아모르는 외롭고 불행한 순간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 타인을 통해서 불행을 본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저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어요.”
내 세계에서 사랑받고 행복했던 몇 안 되는 기억을,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고 내 모습과 나의 이름을.
“아주 많이.”
데인, 플뢰온, 그리고 레이 경과 함께했던 추억을, 한나를 다정하게 불러 주는 법을, 활짝 웃는 법을. 슬플 때 엉엉 우는 방법을.
“잃었어요.”
달이 무척이나 밝았다. 제국의 달은 항상 동그란 모양을 유지해서일까 늘 이렇게나 밝았다. 그래서 팔랑거리는 그의 깜빡임마저 한눈에 보였다.
“오늘 이렇게 울었더라도 나는.”
이렇게 오늘 밤을 눈물에 적셨더라도 나는 일어나야 했다.
“일어날 거예요.”
술에 취했다고 평생을 누워 지내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술에 잔뜩 취했더라도 다시 일어난다. 눈물에 취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로 웃었다.
“잃는 게 싫어서 쉼 없이 달렸어요.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이 나에게만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싫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늦었다고? 아니 그런 건 상관없다.
“말해 줘서요.”
그가 그저 말해 준 것만으로도 구원이 되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나만이 이해했던 그 세상에 누군가 발을 디뎌 준 것만으로 나를 짓눌렀던 돌이 움직였다. 도피도 망각도 소용없던 것이 한 명의 이해자를 만난 것만으로.
“나는 많은 걸 지키고 싶어요.”
내 세상에 비가 내렸다.
“구하고 싶어요.”
이제는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닐 것이다. 쏴아아 쏟아져서 땅을 흠뻑 적시며, 새순이 돋을 것이다. 나는 그 새순의 이름을 모르지만, 아마도 곧 알게 되겠지. 잃었던 눈물을 되찾은 것처럼 하나하나. 차근차근하게.
“살릴 거라고 했잖아요? 오라버니의 병을.”
이 순간 처음 아모르를 살리러 뛰어갔던 날을 떠올린다. 절박하게 당신을 살리기 위해 뛰었던 밤. 그저 당신이 살아 주기를 바랐다. 당신도 살고, 나도 살고. 그리고 나는 지울 수 없는 악몽을 새기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한 번도 변한 적 없다.
“고쳐 줄게요.”
모두를 살리겠다고. 잃는 것은 하베르미아의 달 10일. 그 하루로 족했다. 수십 번 반복된 하루 같은 일은 다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있는 오라버니와 내 사람들을 구할 거예요.”
이때까지 『루스벨라의 빛』 속 루스벨라는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이곳이 정말 책 속일까? 오래도록 품은 호기심을 풀 수만 있다면 좋은. 끝내 만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를 만나야 했다.
<식물의 신관과의 아들은 날 때부터 지병을 앓았고.>
아올레시아의 말처럼 아모르는 원인 모를 병을 앓았다. 그리고 황제가 먹인 독이 그를 매일매일 잠식했다. 루스벨라는 아모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 그 약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모든 방법을 알아요. 그리고 더는 지체하지 않을 거예요.”
진실은 나에게 훌쩍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준 충격은 벼락같이 나를 관통했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멈춤 없이. 나를 향한 불행이 화살처럼 꽂히더라도, 거기에 굴복해 꿇는 것이야말로 나를 불행에 처박은 신 그리고 카스토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리라.
“너는.”
아모르는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아무런 말도 않았는데도. 멋대로 정리를 해 버리는구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당황했기도 했겠다. 갑자기 눈물 뚝뚝 떨어트리다 말고 아모르의 병을 고쳐 주겠다고 한 꼴이니. 그러나 생각난 것을 어떡해. 그리고 이제 그에겐 숨길 것도 없고 숨긴 것도 없는 걸.
“싫어요?”
나는 그의 말에 뜨끔하긴 했지만, 담담한 표정에 숨기며 말했다. 그러자 아모르는 희미하게 웃는가 싶더니 다가와 상체를 살짝 숙였다.
“싫을 리가.”
아직도 불그스름한 아모르의 눈 밑이 고스란히 보였다.
“너는 늘 멋대로 내게 밀려 들어와.”
그는 깜빡임이 고스란히 보이는 거리에 멈췄다.
“나를 잠기게 했지.”
음영이 진 섬세한 얼굴은 꼭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인 그림 같았다. 처음 볼 때 그는 소년 같기도 청년 같기도 한 묘한 중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데인이 소년미를 품은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아모르는 날카로운 상을 하고서 말과 행동에 묘한 소년다움을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이 순간은 그저 완연한 청년으로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제야 아모르와 나의 자세가 신경 쓰였다.
“오라버니. 지금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너무 가까워요.”
가까스로 그의 얼굴을 피해 말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왜.”
정수리로 훈풍이 느껴졌다.
“떨리기라도 하나?”
고개를 돌리면, 그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어색할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한 아모르가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런데.”
끈적끈적한 침묵이 뺨과 목으로 달라붙었다.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면 꼭 다시 입술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오, 오라버니는……. 내게 비밀이 없나요?”
그러나 사실 아모르가 내게 비밀을 만들어도 좋았다. 그건 나를 속이기 위함이 아닐 테니까.
데인이 포근한 그늘이었다면 아모르는 한결같이 머문 나무였다. 아니 결만 거칠 뿐 아낌없이 내게 주었던 나무. 나는 이 안쓰럽고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짐작하고 묻는 걸까.”
“있었어요?”
“아.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까.”
아모르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소리 없이 웃었다. 고개가 천천히 떨어지며, 사르르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머리끝을 건드려 보았다. 손끝에서 하늘색 실이 스치고 지나간다.
“아마 곧 짐승의 신관이 날 찾아올 거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 오려고 형님이 친 결계를 뚫고 왔어.”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내가 아는 짐승의 신관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찾아온다는 그 말이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헤르난?”
아모르는 고개를 저었다. 무척 단호한 낯이었다.
“아니. 그건 헤르난이 아니야. 그저 이지를 잃은 자일 뿐. 이성도 사고도 할 수 없는……. 그런 자를 헤르난이라 하기엔 그가 가엾지.”
“오라버니.”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씁쓸한 빛을 띠었다.
“어째서 그가 오라버니를 찾는 거죠?”
“글쎄.”
아모르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아마도 그 또한 헤르난이 더는 그의 모습이 아니며 이지를 잃었다는 걸 알았나 보다. 아모르에게 헤르난은 소중한 사람이었을까? 그렇다면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기야 난 이미 헤르난과 아모르가 함께 있던 걸 봤잖아. 헤르난과 아모르는 특별한 사이 같아 보였다. 친구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잘 아는 그런 사이. 잘 모르는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모르가 느끼는 씁쓸함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심장에 큰 짐이 얹어진 느낌이었다. 헤르난이, 아니 이지를 잃은 자가 아모르를 찾는다. 그건 카스토르의 명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돌아가면 아모르는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 잔잔하고 평화로웠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풍랑이 몰아닥쳐 심장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나는 그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곳에서 나와요.”
아모르의 궁은 거대한 그만의 성이었다. 누구도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 그러나 그 성은 누가 만들었지? 욕심 많은 자가 탐욕으로 만든 곳이었다. 황제가 비극을 초래하고 카스토르가 그 비극을 이어 가게 했다.
“헤르난이 다녀갈 때까지 며칠 만이라도요. 네?”
나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아모르는 카스토르가 전하는 약을 매일 마셔야 했다. 그 해독제가 그의 매일매일을 잇게 하는 생명줄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간다면? 돌아가면 그가 다칠 게 뻔했다.
“아실리. 나는 그곳을 벗어날 수 없어.”
“네. 알아요. 하지만.”
모든 이들이 내게 이곳에서 도망가게 먼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모르야말로 먼 곳으로 데려다주고 싶은 이였다. 당장이라도 그를 먼 곳으로 데려다주고 싶었다.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힘도 없을뿐더러 아모르가 가진 병과 독은 먼 곳으로 데려간다고 해서 나아질 게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루스벨라를 만나 그의 약을 가져올 때까지 그는 안전해야 했다.
“아니. 난 죽지 않아.”
그는 단정 짓듯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그 모습이 꼭 금방 사라질 풍경 같아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루스벨라의 빛』 속 4황자 아모르는 본디 죽는 인물이었다. 원작을 안다는 건 이렇다. 누가 죽을지 알며 그것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초조해진다.
“어째서 오라버니는 그렇게 태연해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거. 참 익숙한 말인데.”
아모르의 손이 뺨을 쓸어내렸다. 나는 지금 연민 어린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모르와 나는 많은 것이 닮아 있었다. 같지만 다른 불행을 겪은 것도 그 불행에 순응해 나는 건조하리만치 무던해졌고, 그는 도리어 성마른 사람이 된 것도 불행이 초래한 결과였다.
“내가 언젠가 네게 했던 말 아닌가.”
선선한 그의 미소에 나는 도리어 서글픔을 느낀다. 그의 이런 미소를 안다. 체념이 깃든 미소였다.
“좋아요. 뭐든 좋으니까 얘기 좀 해요.”
그러나 그의 미소에선 후회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 달빛 아래 미소하는 그는 손대지 못할 고결함이 느껴지는 아주 오래된 그림 같았다.
“나는 오라버니가 죽는 것도 다치는 것도 싫어요.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아.”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떤 상황에서든 빠져나갈 방법은 있다. 지난 시간 무수히 되풀이한 시간 속에서 배운 교훈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방법을 강구해요.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방법?”
“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하나를 떠올렸다.
“헤르난은 카스토르의 명으로 오는 거죠?”
아모르는 황제의 총애 또한 받고 있으며 율리안도 주목하고 있는 황자다. 아올레시아에게서 카스토르가 황제의 뜻을 표면적으로나마 거스르지 않다는 걸 알잖아?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럼 오라버니 궁에 내가 함께 있을게요.”
“……뭐?”
“카스토르 그자는 날 어쩌지 못해. 그러니까 밤에 함께 있어요.”
그러자 그는 순순히 내게 다가오며, 피식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아실리.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줄 알아?”
무슨 말? 지금 카스토르를 막을 수단을 강구하고 있지 않은가. 밤이 관건이다. 낮은 카스토르도 황궁에 있을 눈을 생각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랑 같이 살자고?”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혼인도 나쁘지 않지.”
내가 눈을 크게 깜빡이자 아모르는 손으로 내 뺨이며 귀밑머리를 쓰다듬었다. 떨어지는 손이 얼떨떨했다. 평소 담백하던 접촉과는 다르게 다분히 의도적인 접촉이었다. 내가 주춤 물러나려 하자 그는 알아챈 듯 거리를 더욱 좁혔다.
“장난 칠 때가 아니잖아요.”
그가 눈을 접어 미소했다. 하얀 낯에 날카롭던 인상이 잠시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말의 파급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내가 네게 장난을 친 적이 있던가?”
다시, 지금이 장난칠 때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장난이라기에는 눈빛이 무척 진지하여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라버니.”
결국 나는 침묵 뒤로 입술을 겨우 떼어 냈다.
“아아.”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 내 뺨을 만지작대던 그는 다시 한 번 불리고서야 멈췄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왜 내게 이토록 잘해 주나요?”
“사랑에 이유가 필요한가?”
시리도록 맑은 녹음의 눈동자가 나를 담았다.
“그럼 어째서 오라버니는 내게 이곳을 떠나라고 하지 않나요?”
“네가 떠나지 못함을 아니까.”
이 순간 적합하지 않은 질문이었음을 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불행에서 도망가기를 권했다. 나도 아모르에게 그리 권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한시가 급한 그의 앞날에 대해 도모하는 것이 먼저였지만, 불쑥 치켜든 궁금증이 고개를 먼저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내 눈을 흔들어놓았다.
“너는 언젠가 말했지. 너와 나는 동료라고.”
아모르는 순순히 대답을 했다. 오래전 내가 그를 보며 꺼냈던 말을 입술에 담으며 또한 그답지 않은 나긋한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난 너를 위해 무엇이든 줄 수 있고, 거기엔 네가 이곳을 벗어나 아주 먼 곳으로 가는 방법도 있겠지. 그러나 네가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
그의 손가락이 이제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스치고 눈 밑을 쓰다듬었다. 감정이 듬뿍 묻어난 손에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네가 바라보는 세상이 곧 내가 보는 세상이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고는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코앞에서 숨결이 느껴진다. 이 순간 이 경건한 분위기이면서 이상하게도 녹진한 끈적끈적한 것이 뺨에 달라붙는 것 같은 건 그의 뚫어질 것 같은 시선이 날 보고 있기 때문인가 보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네가 살아 있어 주는 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따뜻한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힌다.
“널 보니, 욕심이 나.”
욕심, 그 말이 입술에 녹진하게 녹아 사라진다. 그가 입술을 떼었다 다시 붙이며 놀란 눈을 한 내게 다시 말했다.
“알아?”
등 뒤로 문이 느껴졌다. 다시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살짝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를 바라보자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흐린 표정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평생 그 무엇도 욕심내 본 적이 없어.”
씁쓸함이 남아 있는 말이었다. 바람이 불며 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감긴다. 그는 흩날리는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려 보았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한 마디씩 힘주어 말했다.
“널 만나 살고 싶어졌다는 이야기야.”
“오라버니.”
“그러니까 난 죽지 않아. 아실리.”
그는 손을 떼어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나를 한눈에 담으려는 것 같았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는 내가 보았던 그의 어떤 모습보다도 홀가분해 보였다. 동시에 잔잔한 열기로 일렁거리는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미지근한 듯 뜨거운 시선이 나를 담는 순간 꼭 서늘한 천이 목뒤를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네가 내 궁에 오겠다면, 널 지키면 되는 건가.”
상황은 아무것도 좋아진 것이 없는데, 그가 느긋하게 말을 건넸을 뿐인데 모든 것이 잘 풀릴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아모르는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조금은 까칠하던 얼굴을 부드러이 풀어내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