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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의 기사님, 나의 검 (25/47)

15. 나의 기사님, 나의 검

“황녀님, 어서 오세요!”

달이 동동 뜬 밤이었다. 그리고 축제가 끝난 다음 날이기도 했다.

내가 사는 테레나 궁은 굉장히 넓었다. 그래서 순찰대의 인원을 전부 수용하고도 공간이 남았다. 정원 또한 쓸데없이 넓은 통에 관리되지 않은 땅이 있었고 우리는 이곳에서 조촐한 축하연을 열었다.

우리만의 축제였다.

“이게 소릭스가 구운 고기구요. 이게 제가 구운 겁니다. 어느 것을 드시겠습니까?”

“메타, 하나는 고기의 형체를 하고 있지 않은데?”

“이 숯덩이가 바로 소릭스의 작품이지요.”

메타가 낄낄낄 웃었다. 그 옆에서는 소릭스가 얼굴이 벌게져서는 얼른 메타의 손에서 숯덩이가 된 꼬챙이를 뺏으려 했다. 하지만 얄밉도록 잘 피해 내는 메타 때문에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졌다.

“소릭스가 대신해서 그라니우스의 부관이 되었다고?”

“네. 원래 순찰대에서 유일하게 문관과 무관을 겸하던 놈이었거든요. 다른 말로 잔머리가 휙휙 잘 돌아간다 이거죠. 거기다 집안도 따라 주고. 돈도 많을 걸요?”

“그래? 일등 신랑감이네.”

“그럼 뭐합니까. 고기나 태워 먹는 멍청, 으앗!”

메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로 검이 붕 하고 허공을 갈랐다.

“그만하지?”

소릭스가 검집을 든 채 찌푸린 낯으로 서 있었다. 메타는 다시 한 번 낄낄 웃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요리는 펜네가 끝내주게 잘했는데…….”

그러더니 그는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한동안 다시 맛볼 일은 없겠군요. 사랑 따라 먼 곳으로 사라진 놈이니 말입니다.”

“그렇지.”

잠시 생각에 빠진 메타는 꽤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있잖습니까, 황녀님.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글쎄.”

“저는 잘 모르겠어서 여쭙는 겁니다. 제가 거짓과 도둑의 신관이지 않습니까. 저 같은 사람은 타고난 의심 덕에 번번이 사랑도 연애도 못해 보는 경우가 다수거든요. 다른 말로 종족적 특성이랄까.”

“아아. 도둑의 신관들 의심병이 지병이라 할 정도지. 그만큼 사기꾼도 많고.”

“그래. 그래서 난 그 사랑이란 게 궁금하단 말이지? 펜네 그놈만큼 신중한 놈이 또 없었잖아.”

그런 펜네가 휙 빠져들 만큼 큰 힘을 가진 게 사랑이냐며 메타가 소릭스에게 물었다. 그도 딱히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닌 듯했다. 얼른 내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으니까.

“황녀님은 사랑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메타. 결례잖아!”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살기에 급급했거든. 메타는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이더니 짙은 눈동자에 짓궂은 빛을 띠었다.

“그럼. 마음에 두신 분이라거나. 없습니까? 황녀님께서 연애를 하신다고 하면 저도 그 사랑이란 걸 간접적으로나마 느껴 볼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

“네. 황녀님은 뭐랄까. 많은 것을 불신하는 느낌이거든요.”

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런 느낌인가? 슬쩍 메타에게서 눈을 떼어내며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랑이고 연애라. 순간 스쳐 지나간 얼굴이 있었다.

“어라.”

“뭡니까. 있는 겁니까? 저 눈치 빠른데.”

“메타!”

“아. 아니야.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얼른 지워 냈다. 나조차도 모르게 무의식으로 떠올렸기에.

“소릭스가 하는 음식은 더럽게 맛이 없는데 말이죠. 펜네가 요리는 정말 잘했는데. 아아.”

“1절만 하지 그래?”

나는 투닥투닥하는 그들을 보다가 고개 숙여 미소했다. 메타의 투덜거림은 그리움의 표현일 것이다. 펜네의 부재가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정체를 몰랐던 처음 볼 때부터 나를 아가, 아가, 부르며 다정하게 잘해 주었던 펜네.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정체를 알게 되어서도 나를 아껴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나저나 2황자님이 펜네가 그 자리에 오르도록 해 주셨다면서요?”

“2황자도 간신보다는 왕실 쪽을 돕고 싶어 했으니까.”

“황제 폐하의 눈치를 봐서 못한 거고요?”

“그렇지.”

2황자는 이곳에 드문 정상인이다. 그라면 성격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아하시야 쪽을 돕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의 뜻에 반해 총애를 잃을 수는 없으니 숨죽여 있었던 것이고. 가만 보면 2황자가 책 속 내가 아는 모습과 가장 일치하는 것 같다. 얼굴 한번 본적 없는데 그의 행적을 척척 맞추는 것도 그렇고.

막 고개를 드는데 눈앞에서 커다란 자루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포도주를 담는 자루였다.

“황녀님, 황녀님도 한 잔 하시겠어요? 조영관께서 아끼던 포도주를 푸셨답니다!”

포도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나도 마실래.”

잔을 받고 얼른 데인과 플뢰온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플뢰온은 레베카랑 있고, 데인은 저 멀리 그라니우스랑 있네. 잘됐다. 다행히 내 자린 북적북적한 사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얼른 입에 머금었다. 성인이 돼서 술 한 모금 대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야 하면서.

“아. 달다.”

“그렇죠? 이게 달다고 마구 마시면 안 돼……. 어어. 황녀님!”

“응?”

마침 목이 말라 꿀꺽꿀꺽 마셨는데, 잔을 내리고 나니 소릭스가 무척 당황한 낯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순찰대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뭐지?

“이거 꽤 독한 술인데……. 괜찮으세요?”

“어어. 나 멀쩡한데…….”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이상 없는데? 하긴 마시자마자 취기가 확 오르겠느냐만. 이 몸은 과거의 내 몸보다 술이 더 센가 보다 했다. 얼른 한 잔 더 달라 내밀자 처음에는 저어하던 순찰대들도 보채는 횟수가 늘고, 함박 미소를 지어 주자 흥이 올라서는 함께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판이 시작됐다.

“황녀님께서는 네? 무척이나 귀여우시다 말입니다!”

“아닙니다! ‘사랑스럽습니다’라고 해야지, 임마!”

“그게 그 말 아니냐?”

취한 것은 아니었으나 흥이 잔뜩 오른 이들의 목소리가 절로 커지는 밤이었다. 황녀의 매력은 이거다, 아니다 이거다. 나는 그들의 낯 뜨거운 찬양 배틀을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팔불출 같긴 했지만 딱히 싫진 않았다.

“아아. 미쳤군. 황녀님, 저 무식한 치들의 결례를 용서해주세요.”

“괜찮아. 소릭스. ”

오히려 과도하게 예의를 차리면 더 불편하더라고. 피식 미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이런 격 없는 게 좋아. 이런걸 보면 나는 참 윗자리에 앉기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긴 한가 봐.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보다 이렇게 눈을 마주하는 게 편한 걸 보니.”

그 말에 소릭스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술잔을 든 채로 쪼그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렇지 않아요. 결국 황녀님은 모두를 따르게 하셨으니까요.”

그가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물론 편하게 대해 주시는 황녀님이 좋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당신을 따르기로 한 것은 황녀님 모습 그대로를 존경했기 때문이에요.”

존경해? 날? 왜? 가만 보면 이들에게서 묘한 확신을 받곤 하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의 말에 더욱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지만 나는 미소로 끄덕여 주었다. 술이 있고 밤이었고 좋은 분위기였다. 굳이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만의 파티는 쭉 이어졌다. 흥과 웃음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또 기울여 몇 잔인지 세지 못할 잔이 넘어갔을 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황녀님.”

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다. 레이 경? 경인가? 그런데 왜 앞이 조금 흐릿할까.

“경이네.”

“네. 잠시 산책함이 어떠실까 합니다.”

“왜? 나한테 할 말 있어?”

나는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니면 데이트?”

그러자 레이 경은 잠시 굳는가 싶더니 예의 담담한 낯으로 돌아왔다.

“지금 본인의 모습을 보고도 할 말이 없으십니까?”

그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나는 그의 옆에서 걷고 있었다.

“발밑이 어둡습니다.”

그가 나를 잡은 손을 조심스레 이끌었다. 마치 에스코트하는 신사처럼 퍽 부드러웠다. 늘 투박하던 그와는 어울리지 않아 미소를 터트린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일까? 고개를 들자 나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이 꼭 공기 중에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축제가 열리는 곳에서 조금만 떨어졌는데도 매우 고요했다. 나는 레이 경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원피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이제야 내가 긴 치맛자락을 가진 원피스 차림인 것이 생각났던 탓이다. 하지만 이미 끝자락이 까만 걸 보니 늦은 것 같다.

레이 경은 조금 더 걷는가 싶더니 숲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멀리서 희미하게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자꾸 눈앞이 흐리네. 잠도 오고.

나는 잠시 눈이 시려서 눈을 비볐다. 그렇게 시렸던 기운이 가시고 눈을 뜨자 어두운 곳에서 더욱 짙은 빛을 띤 머리카락이 보였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이상하네. 난 멀쩡한데. 나는 레이 경에게 대꾸하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거의 없는 하늘이다. 오로지 청명한 달만이 남자 세상을 향해 푸른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경도 예쁘고 나무도 예쁘고 하늘마저 예뻐 보이네.

“내 정신은 언제나 멀쩡했어.”

나는 경의 손을 잡아 아무렇게 손가락을 들게 했다.

“이거 봐 봐. 네 개. 맞지?”

“……세 개입니다.”

“어라.”

그런가. 내 눈에는 네 개로 보이는데? 에이, 설마. 레이 경이 이런 장난도 칠 줄 아나 보네. 돌아보자 주변은 나무와 나무를 잘라낸 밑동이 가득했다. 나는 흔들거리는 시야를 뒤로하며 나무 밑동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앉고 보니 발이 조금 답답했다.

“나 발이 아파. 오늘 한나가 새 신을 신겨 주었는데, 부르튼 모양이야.”

레이 경을 보지 않은 채 찌푸리며 말했다.

“아파.”

다리를 쭉 들어 발목을 꺾었다가 풀었다가 다시 꺾기를 반복했다. 불편한 신을 신고 걸었더니 발을 삐기라도 한 걸까. 발뿐 아니라 발목도 살짝 아린 느낌이었다. 무릎을 세워 발목을 보려 하는데 눈앞으로 동그란 머리가 보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레이 경은 내 발목을 가져가더니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삐진 않은 것 같습니다.”

보고 나면 제자리에 가져다 둘 법한데, 그는 내 발목을 잡은 그대로 말했다. 뭐 딱히 아픈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경을 본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참 오랜만에 경과 둘이 있는 것 같아.”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때는 레이 경과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꽤 됐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 사람이 늘었고, 자연히 레이 경과도 멀어진 것 같았다. 아니 본디 말수가 적은 그였으니 나눈 말수는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여기 낯이 익은데. 경이 막 암살자를 얍얍 물리친 곳인가.”

“얍얍은 뭡니까.”

“흐―.”

그러고 보니 이 숲은 레이 경이 언젠가 내게 무릎을 꿇고 검의 맹세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레이 경을 향해 건국제 파트로누스가 되겠냐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했지. 새삼 그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경.”

그에게 발목을 잡힌 채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말을 뱉을 때마다 입에서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포도주가 아직도 입에 남은 것일까. 혀를 굴릴 때마다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 걸 그동안 데인과 플뢰온만 독차지했다니 참 너무했네. 그러고 보니 난 내가 있던 세계에서 소주나 막걸리를 그대로 부어 먹는 걸 좋아했는데 언제 이런 어린애 입맛이 된 걸까.

자꾸만 고개가 미끄러져 손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레이 경의 눈동자가 눈앞에 있다. 진중한 남색 눈동자. 아마도 평소라면 하지 않았던 말이 지금이라면 나올 것 같다. 참 이상하게도.

“경. 나 좋아해?”

잠시 침묵이 돌았다. 레이 경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건 술김에 꺼낸 충동적인 말입니까?”

레이 경에게 이런 말을 꺼낸 건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레이 경을 보며 우리가 함께했던 무수한 시간들을 돌이킨 순간 퍼즐이 맞춰지듯 깨닫게 되었다. 아니, 그동안 알고 있었지만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그러자 그가 담담한 낯으로 대꾸했다.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는 내 발목을 부드러이 잡고 있었다. 난 당황조차 하지 않는 레이 경이 신기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 추측일 뿐이야. 그러니 내가 잘못 짚은 거면 너무 노여워하지 않길 바라.”

난 말하다 말고 레이 경을 바라봤다. 곧이어 눈을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하긴 나처럼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누가 사랑하지 않겠냐만.”

“누가 그럽니까?”

“순찰대 사람들이.”

“…….”

“왜. 아니야?”

누가 그러길 최선의 공격이 곧 방어라 했다. 장난스런 미소와 함께 건네니,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리는 그가 보였다. 반쯤 그림자에 가려진 낯에서 난 처음으로 고뇌하는 표정을 보았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제가 여기서 당신을 사랑스럽다 말을 하면, 인정하는 꼴이지 않습니까.”

참 신기하다. 이제껏 나와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한 이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 물론 경이 직접 내게 건네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 짙은 시선에서 아플 정도로 전해져왔다.

머릿속에 저장된 무수한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이 내가 되는 날도 오는구나. 이게 참 이상하다. 기뻐해야 할 일인데, 기쁘지 않은 건 왜일까. 오히려 나는 좀 서글펐다.

내가 가는 길은 가시밭길일 게 분명했는데 나를 따르겠다 말하는 이들이 가여웠고 안타까웠다. 나를 사랑한다 말하는 이 사람에게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것도 슬퍼서.

“경. 있잖아.”

눈을 감고 일기장을 얻기 전의 나를 떠올린다. 나이와 맞지 않은 몸을 가졌지만, 그래도 나름 밝았고 행복했던 날을 누렸던 나를.

“아주 오래전의 나였다면―.”

그대로 자랐다면 나는 어땠을까. 정말 아무 신력도 없어서 황제도 나를 노리지 않고, 평범하게 자라서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어쩌면 결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우개로 내가 가진 모든 불행을 지워 본다. 만약 그랬다면.

“경을 사랑했을지도 몰라.”

평범하게 자랐다면 나는 카스토르도 아모르도 만나지 않았을 것이며, 데인과 플뢰온이 남매가 아니란 사실도 몰랐을 것이고. 결국 나는 주변의 누군가와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뭐 혼자 살았을 가능성도 배제치 못하겠지만. 누군가를 만났을 것 같긴 하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부터 울타리가 넓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레이 경을 보며 자라 레이 경과 함께했을 것이다. 묵묵하게 나를 지켜 온 이 사람을 좋아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러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때의 내가 했을지 모를 선택 또한 할 수 없다.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

레이 경과 플뢰온과 데인과 함께했던 나날을 떠올린다. 그때는 몰랐던 행복의 부스러기들을. 우습게도 레이 경은 그날과 전혀 다름없는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모두가 변할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선 이 기사님은 나에게 서글픔을 일으킨다.

“경은 내가 되지 못한 이상을 떠올리게 해.”

그렇기에 레이 경은 될 수 없다. 레이 경이 되면 나는 아프고 괴로울 것이다. 내가 이토록 속이 좁아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고 질투했기에 이기적인 나는 레이 경을 밀어냈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더라도 경은 될 수 없을 거야.”

모든 것은 이기적인 나로 인한 것일 뿐. 레이 경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를 바라봤다.

“당신은…… 결국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하게 하시는군요.”

어째서 나는 이 절절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 이토록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같은 것을 줄 수 없다는 사과와 안타까움을 담아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거칠었다.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손을 그가 잡았다.

“당신을 따르기로 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당신께서 역병을 피해 서쪽 영지로 오셨을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소년병으로서 전쟁에 참여한 뒤 서쪽으로 차출되어 병사로 있었습니다.”

내가 역병을 피해 서쪽으로 간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기억조차 희미하던 때에 그는 나를 만났노라 말하고 있었다.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그 만남을 기억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그에게 더욱 큰 상처를 안겨 줄 것 같았다.

“경. 나는.”

“기억하지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짙은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일렁인다. 그의 눈으로 오랜 회한이 지나갔다. 나는 후회하는 이의 눈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은 후회하고 있지 않았다. 달빛 아래 어떤 밤이었다. 그날 나는 레이 경에게 내 「프리모 살바티오」 파트로누스가 되어 달라 요청했다.

<그러니까 왜? 왜 나와 함께하지 않는 거야? 「프리모 살바티오」를 함께하는 것은 출세의 지름길이잖아. 경은 출세가 싫어?>

<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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