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빠의 결혼식 ⑵
돌아가자, 데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 한나를 통해 그에게 기다려 달라 전했는데? 텅 빈 응접실에서 비어 있는 의자를 바라보고 있자, 막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한나였다.
“데인은 어디 갔니?”
“황자님께선 급한 일이 있다 말씀하시곤 저녁에 다시 찾아오시겠다고 하셨어요.”
급한 일. 데인이 그리 말한 거라면 정말 바쁜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지킨 데인이었으니까. 새삼 미안함과 함께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온다. 소파에 앉아 천천히 이마를 짚었다. 그사이 한나가 차를 내오겠다고 말하기에 눈을 감은 채 끄덕인다.
“아직 한낮이네.”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나 소파가 푹신하고 눈감으니 잠이 솔솔 온다. 그런데 이 향기는 뭘까. 등을 푹 기댄 소파 어디선가 옅은 꽃향기가 느껴진다. 향수를 통째로 들이부은 것 같은 진한 향기. 익숙한 냄새, 그제야 조금 전까지 나를 기다렸던 남자를 떠올렸다.
“……데인.”
너의 향기구나.
꽃을 꼭 빼닮은 데인에게서는 꽃향기가 났다. 플뢰온에게는 묵직하면서 청량한 향기가 있었으며 레이 경에게는 미세한 철의 향이 났다. 이런 인위적인 꽃향기는 데인만의 냄새였다.
<당신은 알았으면 좋겠는데. 아니, 알아야 할 거야. 아가씨를 위해 그림자의 길로 뛰어든 누군가의 이름이지.>
데인의 사촌, 데로스가 말했다.
<데인 로웰 헤로토테스 칼타니아스. 7황자이며 ‘황제의 그림자’ 수장.>
이 향기는 자신의 민족이라면 누구든 알고, 누구든 가진 것이라고. 데인과 데로스가 같은 향기를 지녔던 것은 이런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오늘처럼. 온갖 더러운 일을 하는 곳이 우리 그림자야.>
그의 가문 전체가 황제의 수족이었던 걸까.
“황녀님.”
조금 뒤 차를 가져온 한나가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나가 보라고 말해 주었다. 물론 웃으면서. 여기 있어 봤자 전전긍긍한 얼굴을 볼 뿐이니까.
눈을 뜨자,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뜨겁겠지. 생각은 사람을 지배한다. 지금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보면서 식혀 두자 생각하는 것처럼 데인과 나 사이에도 식혀 둘 것이 존재했다.
“이제 뭘 하면 되더라…….”
일단, 순찰대와 그라니우스를 휘하로 두게 되었으니 이전보다 반경이 넓어졌다. 거기다 카스토르가 나를 감시하지 못한다는 이점도 얻었다. 반격의 서막치고는 좋은 출발이다.
그런데 왜일까 마음은 편치 않다. 이건 아마도.
“데인 때문이려나.”
천천히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동안 머리에 꽂아 둔 핀을 풀어냈다. 조금 엉키긴 했어도 긴 머리가 어깨를 타고 사르르 떨어진다. 그러고 보니 데인은 내 긴 머리를 참 좋아했다.
이제 그를 어떻게 봐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기대 있을 때였다. 벌컥 경첩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소리였다.
이렇게 힘주어 걷는 사람은 하나밖에 모른다. 색색대는 숨소리마저 플뢰온이었다.
“어쩐 일이야?”
그 말에 심술궂은 대꾸가 돌아왔다.
“허? 말이 떫다?”
“오라버니.”
“널 보는데 일일이 허락받아야 하는지 처음 알았다. 병아리 주제에.”
눈을 뜨자, 플뢰온이 있었다. 그는 허락도 없이 맞은 편 카우치에 푹 앉더니 팔짱을 꼬고 나를 홱 노려봤다.
“바쁘니까, 나 할 말만 한다.”
나는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지극히 그다웠기 때문이었다. 곧 허리를 숙여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는 알맞게 식어 있었다.
“너. 내가 오늘 얼마나 바쁜 줄 알아?”
플뢰온은 여유를 부리는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나는 미소했다.
“바쁘면 내일 오지 그랬어.”
“허어, 말 참 곱게 하신다?”
방긋 웃자, 그가 눈썹을 씰룩이며, 곧 잘생긴 눈썹이 이마 쪽으로 치솟았다. 그는 짧게 날숨을 뱉더니 천천히 뱉었다.
“일어났다는 얘긴 들었다. 그래, 더럽게 처자더니, 행복했냐?”
침착하고 정갈한 어투였지만, 자세히 들으면 하나하나가 분노로 꽉꽉 들이찬 말들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가 헐레벌떡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아주 크게 한 방 터트렸지. 조영관이 보낸 서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네가 그자와 손을 잡고 뭘 하겠다고 들었는데.”
“그라니우스가 그래? 빠르네.”
“빌어먹을. 오냐. 마침 4행정청에 있었거든. 그리고 네가 뭘 지껄였는지 똑똑히 전해 들었지. 뭐 2황자랑 손을 잡아?”
이런. 나는 성의 없이 지껄였다. 그러고는 건조하게 미소했다.
“별말은 안 했는데.”
“별말을 안 하기는! 네가 실성한 거냐, 네 처지를 잊은 거냐? 정치에 황녀가 끼어든다는 게 무슨 소린 줄…….”
“알지. 그리고 나는 「후계자의 힘」을 가졌어, 오빠. 여기까지 들었지?”
그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을 보아 전부 전해 들은 모양이다. 사나움으로 무장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미미한 불안이 어려 있었다. 이건 파급력이 엄청난 일이었다.
현재 제국에는「후계자의 힘」을 가진 황자가 둘 있다. 황태자와 5황자. 그러나 후자의 존재가 없다시피 지워진 것은 황태자의 힘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5황자의 힘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의 뒤에는 2황자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순간, 또 하나의 후계자가 나타났다. 과연 이것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이 의미는 오빠가 더 잘 알고.”
“너 정말! 하, 됐다. 지나간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노릇이니. 한 가지만 묻자 무슨 생각이야?”
별생각 없다고 하면, 화내려나. 그런데 정말 카스토르를 끌어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아. 죽지 않는 것도.
“차 한 잔 마시고 갈래?”
나는 빙긋이 웃었다. 당장은 오라비가 바빠 보이니 나중에라도 말할 생각이었다. 물론 플뢰온은 속 터진다는 얼굴이었다. 가만 보면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좋아. 보아하니, 순순히 털어놓을 생각은 없다 이거지. 지금 바쁘니 이건 천천히 두고 보자고. 너.”
“응.”
하, 길게 한숨을 쉰 플뢰온이 제 머리를 흐트러트리더니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 이내 꾹 삼켰다. 연유를 묻자 궁 어디든 듣는 귀가 많다며 말을 아꼈다. 플뢰온답지 않은 퍽 신중한 모습이었다.
“아실리 로제.”
“응.”
“뭐.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뭐든 해 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플뢰온이 보인 반응이라고.
“……화 안내?”
“안 나겠냐? 네 멍청한 얼굴을 보고서 생각이 바뀌었어.”
조금 생경한 느낌이 들면서, 문득 돌아선 그의 등이 과거와 다르게 무척 넓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네가 지옥을 걷겠다는데 뭐 어쩌겠냐.”
“지옥이 아니야.”
그러자 그는 나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홱 고개를 기울였다. 오만하리만치 내려다보는 시선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가장 그다운 모습이었으니까.
“나와 그놈은 네가 무엇이든, 무엇을 하든 지지해.”
그는 다가온 내 머리를 거칠게 흩트려 놓았다. 머리칼 사이로 삐뚜름한 미소가 보였다. 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씻겨 나가는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탈피한 그는 어느새 청년이 되어 있었다.
“데인은 만났냐?”
“아직.”
그 말에 그는 순간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놈 만나 봐.”
“왜?”
“죽어 가고 있으니까.”
그 말에 잠깐 눈을 깜빡거렸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을 굴린다. 바깥 하늘의 색은 연한 하늘빛이었다. 아침 일찍 4행정청을 방문했기 때문인지 아직 그리 늦지 않은 오후였다. 오늘도 눈부시도록 맑은 하늘에서 눈을 떼어 내 다시 플뢰온을 바라본다.
“죽어 간다는 건 어떤 의미야?”
아프다고? 아니면 끙끙 앓고 있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플뢰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두루마리며 정복 차림인 것을 보아선 바쁘다는 말은 사실이었나 보다.
“직접 만나서 물어봐.”
* * *
반나절이 지난 뒤, 데인이 나를 찾아온 시간은 석양이 막 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가 오기 한참 전부터 중정이 보이는 응접실에 앉아 정원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실리.”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던 발소리였지만 왜인지 오늘 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잘 지냈어?”
고개를 돌리자 옅게 미소를 건 얼굴이 보였다. 그의 등 뒤로는 막 고개를 조아리며 방을 나가는 하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달칵 문이 닫히면 응접실에는 그와 나 단둘뿐이었다.
“결례를 용서해.”
그는 밤이 가까워져 온 시간에 대해 사과했다. 그를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한 쪽은 나이니 사과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사과는 내가 해야지.”
데인은 은은한 미소를 건 채 내게 다가왔다. 그에게서 옅은 꽃향기가 났다.
“몸은 좀 어때?”
“걱정해 준 덕분에. 괜찮아.”
아픈 적도 없지만. 나는 길게 내려온 머리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그를 본 시간 동안 오늘처럼 어색했던 적이 없었는데.
문득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도망갈 곳도 없으면서 무작정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앞은 석양, 뒤는 데인. 사면초가였다. 나가도 어디로 갈지 막막할 거면서.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데인이 바쁘다고 며칠 뒤에 다시 찾아와 줬어도 되지 않았을까. 퇴근 시간에 피곤하지도 않느냐고 피로에는 발 뻗고 자는 게 최고인데. 결국 난 데인의 색으로 가득 찬 방 안에서 그를 마주했다.
“너야말로 피곤하지 않아?”
데인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를 마주한 채로 찬찬히 고개를 기울였다.
“응. 너를 만나러 오는 길이었으니까.”
데인이 그대로 눈을 깔았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안 되면 다시 모레. 언제까지든 기다릴 생각이었어.”
“왜?”
그가 난연하게 눈을 휘며 꿀처럼 단 미소를 걸었다.
“그냥. 보고 싶었어.”
“…….”
“너를 보지 못한 시간은 너를 보고 있어도 네가 보고 싶은 그걸 좀 더 깨닫게 된 시간이었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걸까. 그 말에 막 벌어지던 입을 꾹 다물었다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넌 늘, 오해를 부를 소리만 해.”
데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내 태도에 부러 말을 아낀 건지도 모르겠다.
“데인, 묻고 싶은 게 있어. 솔직하게 대답해 줄 거야?”
“응.”
데인은 찬찬히 웃었다.
“네가 원한다면.”
난 숨을 들이켰다. 지금 담는 질문이 평화롭던 우리의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덮어 둔다고 달라질까?
“데인, 네가 ‘황제의 그림자’였어?”
『루스벨라의 빛』에는 대부분의 주요 귀족이나 황족들을 언급했지만, 데인―7황자의 얘기는 보지 못했다. 왜일까. 나나 한나, 수많은 시녀와 하인같이 지나가는 배경에 불과했기에 나오지 않은 걸까?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가 나오지 않았기에 나는 그를 모른다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몰랐던 거지.
황제의 그림자. 그리고 그림자의 수장.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찌 하겠나. 줄곧 그는 다정했고 친절했으며 나 하나를 위했던 한 사람이었다. 둘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찾아오는 충격이었다. 지난 긴 시간 동안 그는 한 번도 내게 말한 적 없었기에.
의심이 들고 만다. 나를 속였어? 왜? 속인 게 아니라면 숨긴 거야?
불신이 뿌리를 박고 나를 삼키려 한다. 나는 언제부터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는 게 힘든 사람이 되었을까.
“응.”
아직 그에게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지만 의심이 든다. 카스토르가 심어 둔 의심임을 알면서도 돌은 쉴 새 없이 굴렀다.
카스토르와 헤르난, 그리고 아모르와 플뢰온. 그리고 레베카까지. 『루스벨라의 빛』에서 그들은 크고 작게 주인공과 얽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활자 위의 그들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물론 아모르처럼 책 속과 다른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알맹이는 내가 아는 그와 같았다.
그런데 데인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중앙 궁 소속, 정보관 ‘황제의 그림자’. 그리고 그곳의 수장이지.”
환생한 뒤로 나는 늘 이 세계를 방황했다. 아실리 로제도 과거의 현대인도 아닌 애매한 곳에 서서 어느 것도 되지 못한 채 주저하는 이방인이었다. 동의 없이 나를 데려다 둔 이 세계는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난 끊임없이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 싸워야 했다. 평화는 멀었고, 안심하고 적응하면 어느 날 이 세계가 갑자기 내게 이젠 네가 필요 없다고 나를 잡아 끌어낼까 봐 무서웠다. 갑자기 나를 데려왔으니 이젠 필요 없다고 나를 지워낼까 봐.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이 나였다.
그런 내게 늘 위안과 믿음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데인 너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다. 몇 년 뒤 멸망할 거란 사실을 혼자 아는 채로 사는 삶은 절벽 위에서 매일매일 아래를 보는 것과 같았다. 너는 그런 내게 평화를 가져다준 사람이었다.
너는 늘 내게 빛이었다.
그리고 데인에게서 들려온 대답에 나는 마른 눈을 꼭 감아 버렸다.
“4년 전. 하베르미아의 달.”
821년, 40번의 죽음을 겪었던 해였다.
“……왜?”
일기장을 얻고 죽음을 마주하고서도 그는 언제나 당연한 것처럼 무조건적이고 이유 없는 보호와 믿음을 내게 주었다. 아무런 말이 없는 나를 향해서도 괜찮다고 날 위해 지나가지 않는 밤이 되겠다 말한 사람. 그런데 왜 너는, 가장 깊은 그림자 위에 있어?
“말하지 않을래.”
“왜?”
“널 아프게 할 거니까.”
데인은 힘없이 웃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곤란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의 흐트러진 옷이나 헝클어진 머리칼 그리고 눈 밑에 자리 잡은 피로의 흔적을 보았다.
석양은 점점 색이 엷어지고 있었고 붉은 물에 탄 잉크처럼 검푸른 색이 하늘을 적시고 있었다. 끄트머리에서 번진 검푸른 파도가 석양을 덮친다. 빛이 퍼지며 하늘은 저녁을 맞이했다. 평화롭게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나는 숨을 색색 내쉬었다.
“아프지 않아.”
데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곤란하다는 표시였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데인의 손은 몹시 차가웠다. 카스토르의 손도 몹시 차가웠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긴장으로 인한 것임을 알았다.
“화났어?”
“아니. 그리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아프지도 않을 거야. 데인, 네가 하는 말이니까. 그러니까 내게 뭐든 말해 줘.”
데인은 내 눈을 피하고, 나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복잡한 마음인 듯했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켰다. 비밀을 토로하는 자에겐 준비가 필요함을 알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가 그랬듯 기다렸다.
“……널 지키기 위해서였어.”
“날 왜 지키는데?”
그 말에 데인은 조금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잔인하네.”
그가 짧게 중얼거렸다.
“네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너는 알까?”
“데인.”
“그렇게 보지 마, 아실리. 울고 싶어지니까.”
거짓말이었다. 그는 괴로운 듯이 웃고 있었지만, 울음기는 보이지 않았다. 데인은 내가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는 자신의 손으로 나를 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며 빈틈없이 맞물렸다.
“우린 진짜 남매가 아니잖아.”
바람이 불었다. 데인과 내 머리칼을 마구 흩뜨려 놓고 지나간 바람은 데인의 눈을 보지 못하게 했다. 한없이 흩날리는 머리칼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데인의 손에 쥐였던 내 손이 불가항력처럼 빠져나갔다.
“아실리.”
데인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내 손을 잡았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
이 세계로 온 후로 충격적인 일이 너무나 많았기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충격에서 덤덤해졌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공포를 이미 수십 번 겪었기에 이루어 낸 불쾌한 쾌거였다.
하지만 그런 나도 아올레시아에게서 내가 현 황제의 친딸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고 할까. 야구 방방이로 뒤통수를 거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 얼얼함이 아직도 남아 있을 정도였다.
설마하니, 내가 황제의 딸이 아니었다니. 그럼 내가 오빠라 믿고 있던 사람들 전부 남이란 소리잖아.
물론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한다. 환생을 인지한 나로서는 처음부터 황제도, 나를 낳은 아올레시아도 부모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플뢰온과 데인은…… 글쎄 전생의 나는 외동이었기에 형제가 있다는 느낌을 모른다. 하지만 둘 모두 소중한 이들임에 분명했다. 그러니까 함께한 시간 속에 차곡차곡 쌓인, 혈육을 떠나서 소중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환생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내 얘기일 뿐. 이 세계에서 정상적으로 나고 자란 데인이라면 어떨까. 여동생이라 믿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남이라고 들었을 때.
“아주 오래됐어.”
데인이 웃었다. 이상하다. 그는 수 분 전과 하나 다를 것 없이 웃는데, 나는 다르게 느끼고 있다. 지금 눈앞의 데인은 낯설게 웃고 있었다. 깍지로 단단히 얽힌 손이 낯설었고, 부드러이 웃는 얼굴이 낯설었고,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이 낯설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던 건 네가 충격을 받을 거라 생각해서였어. 넌 분명 충격을 받고 나와 형을 멀리할 게 분명했으니까.”
“난 그렇지 않아.”
“아니. 넌 변하는 걸 싫어하잖아.”
나는 움찔 떨고 말았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이어서였다. 나는 변화가 싫었다. 안주하고 싶었다. 일기장을 얻기 전에도 나는 이 구석진 궁에 만족했으며 감금에 가까운 생활에 순응했다. 일기장은 강제로 나를 변화 속에 끌어들였지만 나는 늘 안정을 갈구했다. 변화는 싫었다.
“그래. 그건 사실이야. 그러니 네가 내 혈육이 아니라고 해도 변하는 건 없어.”
“그럴까? 그럼 넌 달라진 나를 받아들일 수 있어?”
나는 단호히 말했다.
“뭐가 달라지는데?”
하루아침에 남매가 아닌 남이 되었다고 해도 첩첩이 쌓인 시간이 도망가지 않는 한 우리의 관계는 여전했다.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걸까? 이럴 땐 조금 답답하다. 『루스벨라의 빛』에서 유일하게 묘사되지 않았기에 이럴 때 데인이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마음일지 짐작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실리.”
데인은 빙긋이 미소했다. 그 미소는 조금 서글프게 보였다.
“내가 볼 때는 너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외면하고 있어.”
“내가 뭘 외면하는데?”
“말하길 바라?”
“말해.”
“내 마음.”
나는 멈칫했다.
“……짐작하고 있잖아.”
“…….”
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차차 검은색에 물든 것처럼 그림자에 잠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데인의 눈동자는 선명히 보였다.
“너는 잔인하지만, 그런 너마저 좋아해.”
데인은 미소를 걸은 채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엄지로 깍지를 낀 내 손등을 쓸었다가 천천히 풀어냈다. 그리고 데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나긋하며 낯설었다.
“내가 네게 했던 모든 말들은 진심이야. 네가 기억하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지난 시간 내내 다정했던 데인을 떠올렸다. 어느 날은 친한 친구 같고 또 어느 날은 사이좋은 남매 같았으며 또 어느 날은 저 아름다운 미모로 홀린 듯 설레게 했던 데인을.
난 데인이 지금껏 내게 우리가 남매가 아니란 사실을 숨긴 이유에 아주 큰 이유가 있을 거란 걸 알아 버렸다. 지금 짐작하는 걸 쉬이 꺼낼 수 없었다. 꺼내는 순간, 난 후회할 거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남매였지만, 데인은 언제나 경계를 지켰다. 한없이 함부로 굴곤 했던 플뢰온과 달리 나를 먼저 앉혔고, 가장 커다란 케이크 조각을 내게 주었다. 어쩌다 속옷이나 다름없는 슈미즈 차림으로 튀어 나가면 가장 먼저 옷을 덮어 주곤 고개를 돌리던 그였다.
나는 비로소 파도처럼 덮치는 위화감을 느꼈다. 눈앞의 더는 오빠가 아닌 남자를 바라보는 동안, 경고등이 아찔할 정도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데인 그건.”
“그만.”
데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스쳤다. 주춤 뒤로 물러나려던 나는 의자가 있음을 간과하고 넘어졌고, 털썩 의자에 강제로 앉혀졌다.
“더는 말, 하지 않는 게 좋겠어.”
데인이 손을 뻗어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 그대로 허리를 구부렸다.
“내가 무슨 소릴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나른했으며, 많은 걸 참고 있는 듯했다. 데인이 절제하는 모습에서 오히려 치명적인 어떤 느낌을 받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참고 있는 데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뛰거나 설렘과는 다른 두근거림이 쉼 없이 심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을 알고 있다. 한때, 아주 오래전 과거에서 내가 했던 것이 사랑이라면. 이제 더는 가슴에 품지 못한 것이 사랑이었다.
“네게 바라는 건 없으니까.”
그가 의자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사르르 떨어지는 갈색 머리칼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데인의 목소리는 이슬을 머금은 꽃처럼 푹 젖어 있었다.
“다만, 앞으로 우리 관계는 조금 달라질 거야.”
* * *
시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아주 많았다. 드레스를 고르고, 장신구를 맞췄으며 그렇게 맞춘 드레스를 갖춰 입고 연회에 나갔다.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수많은 이들을 한곳에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홀에선 매일매일 향락적인 연회가 열렸다.
나는 끊임없이 자잘한 티 파티와 연회에 초대받았다. 몸이 모자랄 정도였다. 레베카가 초대장을 쥐고, 버리고 버려도 쌓이곤 한다며 낮게 혀를 차는 것을 보곤 했다.
“무슨 생각해?”
데인이 내 손끝을 잡았다 놓으며 물었다.
“레베카 생각.”
“늘 곁에 있는 사람을 또 생각하곤 해?”
“으응, 주인을 잘못 만난 시녀가 어디까지 고생할 수 있나 보는 기분이라서.”
그 말에 데인이 피식 웃었다.
“공녀가 부럽네.”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는 모습이 내 심장을 꾹 찔렀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데인.”
“응.”
“내가 죽은 듯이 잠만 잘 때 레베카가 나를 대신해 나갔다며?”
“그랬지.”
다리를 꼰 채, 나른하게 턱을 기댄 데인은 조금 뒤 살포시 미소했다.
“네가 파트로누스를 해 줬다고 들었어. 고마워.”
“그 인사는 나보다는 형에게 가야지.”
정오의 햇빛이 그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의 부드러운 진갈색 머리칼이 살랑하고 흔들거린다.
“형이 아벤타 공녀를 에스코트했으니까.”
데인의 머리 위엔 7황자를 상징하는 7개의 황금 잎이 달린 월계관이 있었다. 최근 데인에게서 중세 유럽 복식의 왕국식 복장보다 제국 전통식을 더 자주 보는 것 같다. 분명 데인은 왕국식을 좋아하는데.
“플뢰온이 레베카의 파트로누스였단 말이야? 상상이 가질 않는데.”
한낮의 햇살이 강해서 나는 눈을 찡그렸다. 그러자 이마로 닿는 손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아.”
손을 들어 올린 데인의 시선이 잠깐 내 얼굴에 머물렀다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웃었다. 지금 그를 피한 것에 그가 머쓱해하지 않도록.
그날 이후로 데인과는 묘한 거리가 생겼다.
난 데인에게 묻지 못하고 억지로 묻어 둔 게 있었다. 그가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이기도 했다. 날 빤히 바라보던 데인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예쁜 웃음이었다.
“응. 형이 줄곧 공녀의 파트로누스였지. 어제 내가 네 파트로누스로 갔던 것처럼.”
“아하.”
그러고 보니 사흘간 플뢰온이랑 데인이 번갈아 가면서 내 연회 파트로누스를 했다. 내가 그의 파트로누스를 한 것이 아닌, 그가 내 파트로누스가 되었다 말하는 점이 데인다웠다.
최근 연회들을 떠올린다. 둘은 극과 극의 대비를 보이는 파트로누스였는데, 일단 플뢰온은 지독한 잔소리꾼이었다. A부터 Z까지 하나하나 따져서 꼼짝도 못하게 하는 피곤한 스타일이었다면, 데인은…….
<마셔 봐.>
술을 들고 있던 나에게 데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대신 아침에 어디서 눈을 뜨게 될지 몰라.>
<어, 어?>
<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