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오빠의 결혼식 ⑴
누구에게든 눈을 뜨기 싫은 아침이 있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일이 왔다.
‘어째서 내일이 찾아온 걸까.’
나는 신음을 흘렸다.
누군가 누구에게든 공평한 축복이 시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순간은 달랐다. 흐르는 게 싫다. 아침을 알리는 모든 소리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사각사각 잎새가 바람에 부서지는 소리마저 그저 괴로울 뿐이다.
건국제가 끝난 지 일주일.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훅 지나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지낸 시간이기도 했다.
“하…… 땅파기도 오늘까지이려나.”
첫날로부터 10일간 이어지고, 그 뒤 후야제로 이어지는 건국제이니, 모든 축제가 끝나기까지 일주일 정도 남은 셈이다. 또한 그 일주일은…….
나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푸스스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느껴졌다. 시야에 담긴 것은 조그만 수첩이었다. 4년간 빠짐없이 함께한 일기장.
일주일 뒤, 그날은 사막의 공주가 나를 찌르는 날이다.
눈을 일기장에서 떼어 내 멍하니 방바닥을 바라본다. 지금이 몇 시일까. 조금만 시선을 옮기면 산더미처럼 쌓인 꾸러미들이 보인다. 전부가 내 앞으로 온 것이었다.
발신인은 하나하나 보지 못해서 모르겠다. 아마도 춤을 인상적으로 본 귀족이나 타국의 고위 관계자가 아닐까. 어렴풋이 듣기를 이 방뿐 아니라 다른 방을 가득 메울 정도로 들어찼다고 들은 것 같다. 잘은 모르겠다. 내내 잠에 빠져 지냈으니까.
“황녀님, 기침…… 하셨나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한나였다. 나는 대꾸 대신 창문을 흘끗 바라봤다. 아침, 두꺼운 커튼 사이로 손톱만큼 비친 빛에 눈이 부셨다. 천천히 눈을 뜨면, 구름이 엷게 덮인 하늘은 푸른색이었다.
“응. 한나.”
나는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오늘은 밖이 조용하네.”
「프리모 살바티오」를 끝내고 궁에 틀어박혀 지낸 황녀의 이야기는 일주일간 주인공이 연화에 등장하지 않음으로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어떠한 연회나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모든 초대를 거부하는 황녀를 두고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이 서쪽의 구석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던 황자들에게 쫓겨났다고 한다.
한나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황……. 황녀님. 오늘도 기다리고 계셔요.”
“그래? 오늘은 누구니? 아니, 누구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겠다. 셋 중 하나일 거니까. 그렇지?”
“…….”
그랬다. 나는 데인도 플뢰온도 레이 경도 만나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라거나 다음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정말 뭐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름 모를 감정이 나를 덮쳐 와 현실로부터 잠들게 했지. 그 이름은 체념일지도 모르겠다.
<아실리, 일어났어?>
일주일 전 눈을 떴을 때, 데인의 품이었다. 그 옆으로 일그러진 레이 경의 얼굴이 보였고, 헤르난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단, 쉬는 게 좋겠다. 그렇지?>
데인은 하고픈 말이 무척 많은 얼굴로 말없이 나를 궁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데인의 옆으로 보이는 검은 피부의 사람이라거나 그가 입고 있던 긴 흑의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나는 지쳐 있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 이 일주일간은 내게 휴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나는 많은 것을 견뎠다. 길게 지나간 4년 동안 늘 죽음을 마주했고,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결국에 수많은 기적을 빚어냈음에도 그것은 내게 드리운 불행을 완전히 벗겨 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서늘한 바닥의 감촉이 현실감을 가져왔다. 일주일 만에 나는 현실에 발을 디뎠다.
“한나, 식사를 준비해 줘.”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 식사요? 그동안 하녀들이 겨우겨우 억지로 권해야 먹었던 나였으니 놀라는 것도 이해했다. 다시 한 번 끄덕이자, 한나는 내가 물릴세라 얼른 뛰어갔다. 음식을 가지러 가는 것이리라.
홀로 남은 나는 발을 디뎠다.
“너무 잤나.”
지나친 수면은 오히려 피로를 불러온다더니, 물에 젖은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하긴 지독하게 잤으니까. 뭐. 이건 인정하자. 나는 지칠 만했다.
“그럴 수밖에.”
나는 나를 너무 과신한 것인지도 모른다. 믿었다. 내가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으리란 것을. 희망찬 믿음은 아니다. 무엇이냐면, 내가 딛고 있는 것이 바닥이라고 착각해 버린 거였다.
하지만 더는 무너질 곳 없다 믿었던 곳이 사실은 텅 빈 지하 위에 세워진 아슬아슬한 집이었다. 카스토르라는 절망을 만나자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네가 가진 시간을 반복하는 능력. 그건 주신의 후계자만이 갖는 「저주」란다.>
카스토르의 등장과 함께 바닥은 힘없이 부서져 내렸다. 또 한 번 무저갱의 지하로 거꾸로 처박혔다. 수능에 실패하고 재수마저 실패해 세상에 너절하게 버려졌다 느낀 과거 어느 날처럼 끝을 알 수 없는 긴 절망이 나를 끌어당겼다.
<그 저주를 피하는 방법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지.>
함께 있자. 절망이 속삭였다.
<하지만, 알려 주면, 넌 나를 벗어날 거야. 그렇지?>
하나가 끝나고, 다른 하나가 찾아온다. 눈을 감았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죽음으로도 이 불행의 연쇄를 끊을 수 없다면, 무엇으로, 어떡해야 하는가. 그 답을 찾지 못하고 나는 꿈을 방황했다. 죽은 것처럼 잠만 잔 것이다.
과거 한 친구는 말했다. 사람이 자고 자도 잠이 쏟아질 때, 끝없이 잠을 자려 하는 것은 온몸으로 토해 내는 거부라고, 세상을 향해 소리 치고 싶은 스트레스의 증거라고.
“잠이라…….”
오래전 나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가장 쉬웠다. 특히 부담감을 느낄 때, 이 습관은 더욱 빛을 보았다. 아침 8시, 시험이 있을 때라거나 아침 회의에 맞춰서 일찍 일어나야 할 때 한 번을 늦어 본 적이 없을 만큼. 그러나 그런 내가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지냈다는 건. 보고 싶지 않은 게 많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불행이든 영원히 보지 않고 지낼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단둘, 너와 나만이 가지고 있지.>
카스토르는 나를 원한다. 그가 나와 같은 저주를 가져서? 내가 필요해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서슴없이 나를 40번 이상 죽게 했다. 아니 살해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기억난다. 기억은 잃은 ‘나’는 미친 황태자를 향해 겁 없이 말했다. 당신이 믿는 사랑의 방식은 결단코 사랑이 될 수 없노라고.
<주신은 황제를 사랑한 게 아니야.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어요.>
그가 내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확실하게 알았다.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와 나 둘 중 하나가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는 연장전 없는 완전한 승리를 원했다.
아니, 반드시 가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장점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안다. 일기장을 바라본다. 최악의 물건은 나와 삶을 함께 한 동반자였다. 좋든 싫든 나와 4년간 궤적을 그렸다. 한참을 일기장을 훑다가 책등을 툭툭 두드리고 쓸어 보기도 하면서 알고 있던 것들을 정리했다.
이곳은 책 속의 세상이다. 나는 아직 주인공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것들은 현실과 맞아 떨어졌다. 설사 내가 미친 사람이고, 책 속이라 믿는 것이라 하여도 내가 ‘책 속 내용’으로 아는 것들이 대다수 사실이라는 거다.
지금까지 살기에 급급했던 나이지만, 이젠 다르다.
레베카의 운명을 바꿔 버린 것처럼. 결국 그에게 반하지 않게 한 것처럼 악녀의 최후를 바꿨다면, 이것을 이용해 또 다른 인물의 끝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나아가 이 나라의 미래도.
이윽고 한나가 들어왔을 때, 나는 결심을 굳혔다.
“황녀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여기.”
음식을 와구와구 먹어 치운 나는 한나에게 지금 기다리고 있는 데인에게 내 말을 전하게 했다.
“기다리시라고요?”
“응.”
황녀님은 어디 가시냐고 한나가 물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나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한나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다녀올 곳이 있어. 뒷문에 마차를 준비해.”
그러고서 한나를 내보냈다.
옷을 갈아입고 레나와 하이나를 불러 단장을 끝낸 뒤 나는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에 서 있던 마차를 타고, 열심히 달려 향한 곳은 4행정청이었다.
“아니, 후문 말고. 정문으로 가 줘.”
늘 가던 후문 대신 정문을 말한 나를 흘끔 보는 것 같았지만, 마부는 말없이 말을 돌렸다. 그는 데인이 데려온 입이 무거운 자였다. 데인. 잠깐 그의 이름을 담는 순간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꼭 한순간에 불이 꺼진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힘이 좀 났나 싶었는데 말이다.
행정청 신료들은 갑자기 나타난 내 모습에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었다. 드레스 차림에 우아하게 걸어가는 나를 하나둘씩 휘둥그레 뜨고는 바라본다. 나는 경악과 놀람이 꽃처럼 깔린 길을 사뿐사뿐 밟고 걸었다.
“그라니우스.”
마침내 도착한 조영관의 집무실에서 놀란 얼굴의 펜네와 소릭스를 마주했다. 아, 마침 소릭스도 있구나. 잘됐다. 시선을 돌린 곳에 그라니우스와 마주했다.
“순찰대(케레스) 신관들을 전부 소집해 줘.”
역시 수장인 것인지. 그라니우스가 금방 되물었다.
“전부 말입니까?”
“응.”
날 보는 그라니우스는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앞선 얼굴처럼 변화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어, 저, 어, 하는 소리. 소릭스가 나와 그라니우스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도 같았다. 짧아진 내 말에 놀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잠시 뒤, 모든 순찰대원이 영문도 모르고 조영관 집무실에 모였다. 평소 임무로 연무장이나 외성 밖에 머무르는 그들이기에 집무실에 어색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색해한 것은 조영관 옆에 말없이 서 있는 내 모습이었다.
옷차림은 사람을 만든다. 옷이 날개다. 이 말과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 옷은 날개를 단 것처럼 나를 쉽게 다가올 수 없게 보였겠다. 설명 대신 옅게 웃어 보인다.
아마도 그라니우스는 내 뜻을 눈치챈 것 같다. 역시 연륜이라는 걸까. 펜네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고, 소릭스는 미소가 싹 빠진 얼굴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디뎠다. 허리를 꼿꼿하게, 목을 바로 하며 눈으로 그들을 찬찬히 훑었다.
<가장 고귀하신 주인님, 이것이 당신이 익숙해져야 할 자리입니다.>
그래, 레베카. 이것이 앞으로 내가 걸을 길이라면, 기꺼이 걸을게.
“안녕하세요. 여러분. 다시 인사할게요.”
상냥한 목소리에 부장인 초소네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뺨의 반창고는 떼어 낸 지 오래였다. 아니, 오늘 종일 붙인 적 없었다. 이 모습이 나니까.
“제국의 8번째 가지.”
나는 차분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서 자애롭게 웃었다.
“8황녀 아실리 로제입니다.”
이게 나라고. 그들에게 각인시키듯 웃고 있는 동안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누구도 꺼내지 못했다. 나를 예뻐하던 자들은 각기 눈을 부릅뜨거나 시선을 늘어트리거나, 입을 가로막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전부 경악이나 놀람을 담고 있었다.
“모두.”
난 고개를 기울이며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당황한 중에 미안하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
내 말이 짧아졌다.
나는 그라니우스를 바라봤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그는 나를 따르겠다 했다. 나는 결혼하면 남이 되는 황녀라고 하는 내 말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신은 아주 젊을 적 이미 최고 직위를 누렸습니다. 더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지 않지요. 그러니 금방 가실 분을 보필하는 것 정도야 괜찮지 않습니까?>
지금 그의 회색 눈은,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글쎄, 그라니우스의 생각이 맞을 진 모르겠다. 나는 살기 위해 다시 움직였으니까. 아니, 이젠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사는 길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 돼 버렸다.
“그라니우스는 나를 따르겠다 했네.”
원작을 바꾼다. 아니, 사실 원작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몇 년이 지나도 생생한 기억이라니. 이거야말로 미친 증거가 아니냐고 나를 다그쳐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앞을 바라봤다.
“그대들에게도 묻고 싶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삶의 원흉, 카스토르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거다. 그가 원작에서처럼 황제가 되지 못하도록. 그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황자가 아닌 황녀야. 나를 따를 건가?”
내게 주신의 힘이 있다고 하여도 현실적으로 나는 그를 대신해 황제가 될 수 없다. 제국은 황녀가 황제가 될 수 없게 했으니까. 그러나 내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2황자.
책 속에서 루스벨라를 제외한 모든 것을 가졌던 황제. 그러나 그 결핍을 못 견디고 끝내 나라를 멸망케 했던 폭군. 너는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 내 삶을 망치러 온 그에게서 모든 걸 앗아 간 뒤 혼자 남은 그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것이다.
“황녀님, 감히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순찰대장 초소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당신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제가 생각한 그것입니까?”
나는 팔짱을 낀 채 부드러이 웃었다. 침묵을 대신한 긍정에 찬란하다 싶은 흰빛이 이방을 휘감았다. 흥분을 참지 못한 누군가의 신력이 은은한 빛을 품었던 것이다. 이윽고 초소네가 떨림과 함께 상체를 숙여 무릎을 꿇는 것으로부터, 수십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숙인 것은 장관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천천히, 물결처럼 찾아왔다.
“나는 앞으로 2황자를 황제로 추대할 거야.”
미래는 바꿔 버리면 그만이다. 카스토르, 너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거야. 카스토르를 제외하면 황제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2황자 율리안이었다.
“반대한다면 지금 여기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 황태자에게 직접 고해도 상관없어.”
카스토르에게는 황태자의 자리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스스로를 그리 만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빼앗아 2황자에게 주겠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어영부영 허리를 숙였지만, 현실감이 오지 않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한 이 순간 이채가 스쳤다.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
누군가 헉 숨을 삼켰다.
“입에 담는 순간 죽는 이름이라 하였지. 이것이 옳다 생각하지 않아.”
나는 오늘 아침 내내 생각한 말을 적절히 뇌까렸다. 쉬이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또 두려웠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나는 황태자에게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 여기 있는 조영관이 나를 살리지 않았다면 그대들이 본 것은 내 비석이겠지.”
더는 이 상처처럼 숨기지 않고 나를 드러내겠다. 나와 수많은 선량한 사람이 잿더미가 되는 꼴을 지켜보지 않겠다고.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살해 시도를 받았어. 나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후계자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네.”
시도가 아니라 정말로 죽었지만.
담담히 읊는 동시에 그들을 찬찬히 훑는다. 내가 살해당할 뻔했다는 말에서 얼핏 분노를 읽었다. 나는 다시금 말끝을 높였다. 정중하되, 쉬이 볼 수 없는 분위기가 묻어나도록. 레베카처럼, 플뢰온처럼.
“정의를 수호하는 그대들에게 묻겠습니다. 이리 미친 황태자가 황제가 되어, 황권을 쥔다면 강력한 신력이 있어 무엇 하겠습니까.”
기묘한 위압이 공간에 존재했다. 나조차도 이해 못할 박력이 내게 있다. 이것은 내게는 의미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왜일까 말할수록 힘이 실렸다.
“나는 힘없는 황녀지만, 광기가 지배하게 두지 않겠습니다.”
누군가 입을 열면 깨져 버릴 얇은 유리 같은 침묵이 존재했다. 눈을 굴리면, 더는 나와 마주치는 자는 없었다. 조금은 외롭다 생각했다. 앞으로 내가 보게 될 풍경이구나.
“나는 그대들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습니까.”
그 순간, 그라니우스가 쿵, 내게 무릎을 꿇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황녀님.”
그가 내게 했듯, 나는 그의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
수십 번 죽었다 살아난 나는, 수백 번의 죽음을 피했고, 마침내 내가 가장 잘하게 된 것은 미래를 바꾸는 일이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죽게 될지도 모른다. 지키는 것은 내 몫이겠지. 엎드린 이들을 잠깐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지워 내고는 말했다.
“사막의 공주를 만나겠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로.”
결심했다.
<널 원해. 그러니 내 것이 되렴.>
마침내 홀로 남은 너에게서, 네가 알고 있는 진실을 갈취할 것이라고.
* * *
“황녀님, 마차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돌아가는 나를 배웅한 것은 소릭스였다. 순찰대 사이 치열한 물밑 다툼이 있던 것 같았는데, 승자는 그인 모양이다.
그와 함께 걷는 길은 밝은 낮이었다. 의외로 그는 서슴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좋죠?”
그러고는 영화 속 신사처럼 늠름하게 나를 에스코트했다.
“제국이야. 항상 날씨가 좋잖아요.”
“편히 말씀하세요. 피, 아니 황녀님이라 불러야겠죠?”
나는 시선을 뻗어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바라본다.
“그래. 소릭스.”
지금 그의 행동은 첫 연회에 가는 아가씨에게 하듯 배려가 넘쳤다. 정말, 갓 스물이 된 아가씨였다면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누구든 미소 짓게 하는 남자였으니까.
“오늘 황녀님께서 들어온 순간 묘한 느낌을 받았어요.”
“묘한 느낌?”
“눈이 조여 오듯 아프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요.”
소릭스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나긋하고 공손한 목소리였다.
“살면서 단 두 분 앞에서만 느꼈던 느낌입니다. 이걸 황녀님께 받았어요. 초소네 대장도 느꼈겠죠.”
“「후계자의 힘」을 말하는구나.”
“네.”
우스운 일이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느낌이라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소릭스는 곧 말했다. 자신과 초소네는 특히 신력에 예민한 자들이었기에 느꼈던 것이라고. 내 신력의 수준은 예민한 자들만이 느끼는 긴가민가한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각성」이 머지않은 겁니다. 보통 좀 더 어릴 때 나타나지만, 황녀님은 성년이 돼서야 나타난 굉장히 희귀한 축이시고요.”
그러니까 지금 내 상태는 ‘대기 중’인 모양이었다. 신력은 존재하지만, 이걸 형상화할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은 정도. 보통 어리고 미성숙한 신관 후보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한다.
“혹시 그동안 특별한 증상이 없으셨습니까?”
“증상?”
“이를테면 두통이 강하게 오거나, 눈 쪽이 아릿하게 아프거나.”
“아.”
“있었나 보군요? 그게 신관 후보들이 겪는 각성 전 고통입니다.”
줄곧 나를 괴롭혔던 두통을 떠올린다.
‘그래서 아팠던 걸까.’
나도 모르게 이마를 더듬었다. 어쨌거나 정식 신관이 된 건 아니라는 건데.
“그러면서 잘도 충성하겠다고 했네. 다들?”
소릭스가 씩 웃었다.
“초소네 대장과 제 안목을 믿은 게 아닐까요?”
“그런가.”
“아니요. 농담입니다.”
소릭스는 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기울여 나를 응시했다.
“황녀님께는 이분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게 하는 힘이 있어요. 저뿐 아니라 모든 순찰대가 느꼈을걸요.”
그는 힘주어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말했다. 꼭 내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저는 이것이 당신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신력?”
“아니요. 당신만의 능력이요.”
나만의 능력, 그 말은 굉장히 특별한 것처럼 느껴졌다.
“소릭스.”
나는 나긋한 그의 얼굴을 보다 말고 미소를 걸었다.
“혹시…… 알고 있었어?”
그제야 나는 소릭스가 지나치게 침착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빠르게 차분해졌다는 건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을요?”
“내 정체.”
잠깐 당황하던 소릭스가 순순히 인정했다.
“네. 솔직히 짐작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와 메타나 초소네 대장 정도요.”
그의 대답은 미소만큼이나 담백했다.
“……어떻게?”
“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소릭스가 웃으며 말했다.
“펜네, 그 작자의 어설픈 연기에 속아 넘어가는 건 순찰대들밖에 없을 거라고요.”
아무래도 펜네의 태도가 영 수상쩍었노라고 말했다. 사실 순찰대는 머리를 쓰는 자와 힘쓰는 자의 구분이 명확했다. 대부분이 그라니우스 같은 힘의 신관이었고 힘쓰는 데 바쁜 다른 순찰대원과 달리 명문 귀족가의 자제 출신인 소릭스나 뒷골목 출신이라 눈치가 빠른 메타, 그리고 순찰대장인 초소네는 짐작하고 있었다고.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황녀님.”
나는 멈춰 서서 소릭스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고요한 눈동자에 깊고 담담한 것을 품고 있었다.
“당신이 「주신의 후계자」라는 사실은 당신을 따르게 된 수많은 이유에 지나지 않아요. 저희는 오래전부터 황녀님을 아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동네 성격 좋은 오빠 같던 모습에서 그가 나보다 훌쩍 큰 연상임을 알았다.
“저희에게 당신은 이미 특별한 사람입니다. 다들 동의할 거예요. 처음 메타는 저건 조영관께서 어디서 주워 온 어떤 영애냐고 투덜거리더니, 어느새 당신에게 푹 빠지고 말았어요. 대장은 황녀님이 안 계실 때 귀가 따갑도록 황녀님 얘길 해요.”
그는 새의 지저귐처럼 낭랑하게 말을 이었다. 햇빛에 부딪친 그의 뺨이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 소릭스는 다른 사람 같네.”
제국의 날씨는 언제나 맑다. 그러고 보니 기억을 잃은 ‘나’는 이 맑은 날씨를 좋아했던 것 같다. 깜깜한 내 미래와는 다르게 밝아서인가? 우습지만, 일기장을 얻기 전까지 난 이 사계절 내내 맑은 이 하늘을 몹시 좋아했다. 이젠 증오스럽게 여기지만.
“피, 아니 황녀님께서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그가 습관처럼 나를 피피오라 부르려던 것을 바꿔 나를 불렀다. 잔잔한 부름에 비어 있던 가슴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눈이 마주친 그가 여름 바람처럼 미소했다.
“처음에는 이름을 숨긴 고귀한 아가씨가 아닐까 했어요.”
“응.”
“그리고 머지않아 황녀님임을 알았어요.”
“어떻게?”
“4년 전 그날, 황태자 전하 궁에서 저는 깨어 있었으니까요.”
걸음을 멈췄다. 나를 따라 걸음을 멈춘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황태자궁에 끌려갔던 그 날. 말할 수도 보지도 못했지만. 황태자 전하가 부르는 황녀님의 이름만은 똑똑히 들었어요.”
나를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 왜 그가 나를 배웅하려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는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다.
“황태자 전하의 광기에서, 당신은 나섰습니다.”
“소릭스.”
“4년이 지난 지금에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손을 잡았다.
“저를 살려 주려 하신 것 감사해요.”
그의 미소는 고요했다. 미소 짓는 주름을 따라 햇빛 부스러기처럼 흩어진 주근깨가 유난히 반짝였다.
“눈眼과 부엉이의 신관 소릭스, 이 순간부터 나는 당신의 눈이 되겠습니다.”
순찰대원들은 각기 자신만의 병기를 사용했다. 검이 있는가 하면 창이 있었고, 메타처럼 글라디우스와 단검을 함께 쓰는 사람도 있었다. 검을 쓰는 자들답게 이들의 인사는 검을 아래로 내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검 끝을 심장께로 가리키는 것은 ‘나는 당신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이며. 또한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
나는 내 쪽으로 내밀어진 손잡이를 바라본다.
“모든 순찰대, ‘케레스’를 대표해 맹세합니다.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소릭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적갈색 머리칼이 붉은 바람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의 뜻입니다.”
살랑거리는 머리칼 아래 선명한 녹색 눈동자. 녹색 물에 보랏빛 잉크가 떨어진 것처럼 끝에서부터 물들어 가는 눈동자가 있었다.
“폼 잡기는.”
소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툭. 땅위로 떨어져 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메타?”
메타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힌 소릭스를 아니꼬운 듯 흘겨보다 픽 비웃었다. 그러더니 내게 몸을 돌렸다.
“저 녀석이 순찰대를 대표하겠다 박박 우기더니 좋은 역할은 전부 차지했군요.”
“무슨, 모함하지 마.”
“보십쇼. 평소에도 아부와 가식으로 무장한 친구긴 했지만.”
메타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장난기를 담고 휘었다.
“말투가 돼먹지 못해도 이해해 주십시오. 아직은 당신에게 경어가 익숙하질 않아서 말입니다.”
그는 피부가 검어 하얀 이가 도드라지게 보였다.
“그런데 메타는 여기 어쩐 일이야?”
내 표정을 눈치 챈 듯 메타가 말했다.
“피, 아니, 황녀님. 황녀님께 전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어색하게 말을 잇다 말고 뺨을 긁적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편히 말해도 좋다 했다. 이들에게 공손한 태도들 바라서 밝힌 것은 아니었으니까. 공식석상에서 이름을 막 부르는 정도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다.
메타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냉큼 받아들였다.
“그럼 익숙해지기 전까지만 편히 말 하겠습니다? 나중 가서 딴말하기 없기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메타가 성큼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그림자에 가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
“그건…….”
“저 소릭스 녀석이 결심했다는 증거이죠. 혹시 황태자의 눈에 대한 얘길 들어본 적 있어? 아니 있습니까?”
경어와 반말이 이상하게 섞인 말투를 지적하는 대신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삐이익!
푸드득 홰를 치고 있는 새가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래로 갈수록 푸른색을 띤 깃. 익숙한 새였다.
“……헤르난?”
헤르난의 새였으니까.
“어? 아십니까? 이게 황태자의 눈이란 거죠. 지금까지 아델리스께서 중립을 유지했기에 그대로 두었지만, 2황자의 세력 안에 든 이상 황태자의 눈과 귀를 그냥 둘 필요 없다 이 말씀. 아무튼 조영관께선 꽉 막힌 것 같다가도 결정 한번 시원시원하다니까. 그리고.”
메타가 흘끗 눈짓했다.
“이걸 감지하는 게 이 소릭스 녀석의 능력. 모든 감시와 도청을 감지하고 위치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요.”
“감시?”
“네. 지금까지 숨겨 뒀던 감시를 알아보는 능력을 쓴다는 거고. 요컨대, 황녀님 당신이 감시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지.”
난 잠깐 망설이다 물었다.
“그럼 왜 지금까지 그냥 둔 거지?”
“그동안은 조영관 허락이 없어 쓰지 못했던 거지요. 자칫 이 녀석이 위험해질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눈과 부엉이 신관 중에서 대신관급에 가까운 자들만 쓸 수 있는 능력이라. 누가 이런 능력을 가만두겠습니까?”
“하지만 메타, 너희는 헤르난을 좋아했잖아.”
“아아. 황태자 전하와 별개로 그는 좋은 사람이긴 했지요.”
“전하의 아래 있기엔 아쉬운 검사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검사였기에 좋아했다는 건가. 사실 카스토르의 눈에 띄어선 곤란한 능력이었기에 소릭스의 능력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이해했다.
나는 메타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새를 바라보았다.
“제국 곳곳에는 이런 새가 있지요.”
푸른 깃을 가진 새는 메타의 손에서 도망가려는 듯 날갯죽지를 퍼덕인다.
“다들 알면서 쉬쉬합니다. 황태자의 눈을 건드리고 살아남을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신관 능력인가…….”
“맞습니다. ‘그분의 눈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 거지요.”
가까이 가려 하자 메타가 뒤로 물러났다.
“위험합니다.”
그러나 경고에도 나는 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각 신관에게는 궁극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신관의 최후를 가리킵니다.>
푸드득. 몸짓이 어딘가 처연했다.
헤르난. 당신인가.
나는 일주일 전 헤르난과 마주했던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밤으로 돌아갔다. 바닥에 그려진 주술진이 낮처럼 환하게 빛났던 그날 헤르난이 울고 있는 내게 속삭였다. 마지막이라며, 사랑한다고 고백한 남자가 사랑의 종지부를 찍었다.
<짐승의 신관은 ‘복종’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폭주라고 부릅니다. 자아의 완전한 상실이죠.>
마치 자기 자신을 닮은 흰빛을 두른 채 남자는 아침 첫 햇살처럼 반짝이고 흐릿하게 웃었다. 당신과 마지막이냐고 묻자 헤르난이 말했다.
<글쎄요. 아마 나는 돌아오지 못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헤르난의 품에 뛰어들어 그의 멱살을 꾹 쥐었다. 왜냐고,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그만두라 말하고 싶었다.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어째서인지 흰빛이 입을 막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다음 저를 볼 때, 제가 아닐 겁니다. 이지를 잃고 명을 수행하는 짐승일 뿐.>
뻐끔뻐끔 입을 열려고 애쓰는 동안, 차츰 눈이 감겼다. 이상한 일이지. 그가 마침내 나를 포기했다 말하는데 나는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눈물을 쏟아 냈다. 이유 모를 서러움에 몸서리치면서.
“황녀님!”
고통에 눈을 떴다. 어느새 나는 새를 만지고 있었고, 사나운 새가 내 손을 쪼아 버린 것이다. 옆에서 소릭스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손으로 붉은 피가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한때, 내게 온순했던 새는 지금 기억하는 것과 다르다.
“이 새는 짐승의 신관과 시야를 공유합니다!”
“그리고 디볼로 공작이 완전히 적이 되었다는 이유도 되겠군요.”
새를 바라보자, 메타가 냉큼 말했다.
“……새를 놔줘.”
“네? 하지만 죽이는 쪽이…….”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이 보며 소릭스의 손에서 내 손을 떼어 냈다.
“놔줘.”
메타와 소릭스가 서로를 보더니 곧 새를 놓았다. 납득했기보다는 내 눈치를 본 것 같았다.
“죽이면, 도리어 눈에 띌 거야.”
그러자 그제야 메타가 끄덕인다. 그러고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 말했다. 마침내 그의 손을 떠나, 새가 홰를 치며 날아간다.
<이 새는.>
더는 카스토르가 날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그를 떠올린다. 대신 그가 잃은 것은 자아인 모양
이었다. 그 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 알았다.
<저나 마찬가지인거죠.>
스틱스강의 맹세는 절대적이었다. 헤르난 덕분에 난 직접적인 위험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나 다름없다. 카스토르는 전처럼 나를 죽일 수 없다. 헤르난이 맹세로 그를 묶어 버렸으니까.
“……어째서야.”
헤르난. 마지막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희생 위에 놓인 길은 반갑지 않다. 그는 그렇게 내게 빚을 지웠다.
손목을 문지르고 있었지만, 상처는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왤까. 가슴이 아팠다. 나는 푸드득, 멀리, 멀리 날아가 푸른 하늘로 사라지는 새를 보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