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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붉은 눈물 (21/47)

13. 붉은 눈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남자를 바라보면, 조금씩 올라가는 입꼬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니. 공기마저 멈춘 것 같이 느껴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있었다. 기억이 휘몰아치며 자리 잡았다.

기억이 돌아왔다.

책꽂이처럼 비었던 기억에 악몽이 채워진다. 기억이 돌아오며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을 겪었다. 죽고, 또 죽고, 죽었던 나날들. 찰나에 마흔 번 죽음이 지나가며 토할 것 같은 감정들이 빈자리를 빠르게 메우기 시작했다.

펑.

최후의 불꽃이 터졌다. 황녀를 상징하는 보랏빛이었다.

탑 아래서 사람들은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무척이나 화목하고 즐거운,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다운 노래를. 그들은 아름다운 황녀를 찬양했다.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는 엉망진창이 그림자 속에서 숨죽여 웃는다.

아아. 눈물 줄기가 뺨을 가로질렀다.

“최악의…….”

나는 우는 채로 웃었다.

“개새끼.”

순금을 녹인 것처럼 찬란한 금색 눈이 일그러져 일렁이고 있었다. 남은 불꽃 흔적에 반사되어 다채로운 색깔이 섞이고 있었다.

<너와 나만 아는 세상이 있어. 이제 그만 기억해 주길 바라는 세상이.>

눈을 감았다. 미친 생각이 아니길 바랐다. 아니, 모를 수가 있어? 저 말의 뜻 말이다. 카스토르 스스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내가 알기를 바라서 그렇게 말했다. 일기장의 페이지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목이 죄어 오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당신, 모두 알고 있었구나.”

이를 아득 문 사이로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간다.

“내가 죽은 날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어.”

카스토르는 황홀하게 웃었다.

“죽음은 너만이 반복했던 것이 아니란다. 나도 한때 했었지. 너를 발견하기 전까지 지독하게 길고 긴 시간을.”

반복했다고. 카스토르는 40번의 죽음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릴까. 기억이 돌아오며 미쳐 버린 건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커지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너와 나만이 아는 세상이 있다 하지 않았니.”

믿고 싶지 않았다.

나를 지옥에 빠트린 자가 자신도 나와 같은 지옥에 살았노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러고는 비밀을 말하듯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이.

“시간을 반복하는 이유를 아니?”

고요한 목소리. 조용한 공동에 더없이 잘 어울렸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면, 어느새 검을 주워 든 카스토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안다는 말이야?”

그는 검을 거뒀지만,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다. 카스토르의 발밑에서 쓰러진 남자가 움찔하고 경련하는 것 같았다.

“그래.”

사위가 어두워서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이런 깜깜한 어둠 속에서 카스토르는 건물의 그림자에 잔잔히 녹아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냈다.

“정말, 당신은 시간을 반복하는 이유를 안단 말이야……?”

“…….”

나는 천천히 벽을 더듬었다. 카스토르와 시선을 맞대면서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 손을 더듬었다.

“궁금하지 않니?”

“궁금해. 하지만 당신이 거짓을 말할지 누가 알아?”

나는 나직하게 말하면서 손은 열심히 뒤를 더듬었다. 몇 개의 벽돌을 더 더듬었을 때였나.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벽돌이 뒤로 밀려 생겨난 공간에서 나는 원하던 것을 잡았다. 손끝에 걸리는 느낌은 가죽 같았다. 손에 착 달라붙으면서도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거짓이라……. 난 네게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 없단다.”

카스토르가 차분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쥔 칼을 흔들었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을 흩뿌리는 눈동자가 돌아간다. 의미 없는 동작에 몸이 절로 떨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카스토르는 쓰러진 사내를 보고 있었다. 그저 제 일에 충실했을 뿐인 이름 모를 병사였다. 이대로 미쳐 버린 미래의 폭군 손에 죽는 걸까?

어느새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내가 널 죽인 이유 또한 말해 줄 수 있지.”

악단들이 연주하는 춤곡과 사람의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조금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노랫소리는 줄을 이었다. 아마도 밤새도록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가장 흥겹고 행복한 축제, 그 속에서 나는 까마득한 그림자 속에 빠진 것 같았다.

“날 죽인 이유…….”

“그래.”

오늘 루스벨라와 그가 만났을까? 만났던 거였으면 좋겠다. 책 속 그가 스스로 구원이라 말했던 주인공을 만나서 원작대로 반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주인공이 그에게 당신은 잘못이 없다 말할 때, 그가 저지른 수많은 죄 중에 나 또한 있었을 거니까.

그 달콤한 기만에 빠져 실컷 허우적거렸으면 좋겠다. 네가 책 속처럼 지독한 갈증에 빠져 버렸으면. 원작은 과연 이어지고 있는 걸까? 이어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모르겠다.

나는 내가 있는 이곳, 책 속의 한 장면 속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보지 않아도 절로 얼굴이 흐려졌음을 알았다.

「텅 빈 시계탑.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곳에서 축제의 향연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외로운 남자의 눈에 여자가 가득 담겼다. 여자는 반짝이는 별처럼 웃었다. 여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루스벨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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