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당신과 나의 광시곡 (20/47)

12. 당신과 나의 광시곡

카스토르가 입은 토가는 짙은 검정색이었다. 금실로 자수를 새겨 넣어 마치 금으로 된 사슬을 두른 것처럼 보였다.

검정은 무거움, 두려움, 암흑, 공포, 죽음, 그리고 권위. 지배자와 죽음을 애도하는 색으로 쓰였다. 제국에서 죽음이란 탄생으로 향하는 다리였다. 주신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의미했다.

금색과 검정색. 카스토르는 주신의 모든 색을 갖춘 완벽한 그의 후계자였다. 이 순간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은 모두 어릴 적부터 주신의 설화를 밥 먹듯 들어온 사람들. 그들의 눈에 카스토르는 신이 환생했다 믿을 정도로 완벽하게 주신에 부합했다.

“아실리.”

주신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순간 아실리는 설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를 지독히 사랑한 신. 주신이 손을 뻗는 순간 가지가 뻗어 나갔다. 아실리의 상상으로부터 시작해 그것은 뻗고 뻗어 소녀의 손목을 휘감았다. 마치 수갑처럼 손목을 옥죈 넝쿨이 점점 새까맣게 변했다. 그의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까맣게.

“아름답구나.”

“드레스가요?”

“……네가.”

카스토르가 손가락 사이로 집어넣고 손가락을 꽉 얽었다. 상체가 굽어지며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예뻐.”

그 순간 카스토르의 금색 눈동자로 금빛 바람이 불었다. 그가 자신의 신력을 퍼트린 것이다.

“몸에 힘을 빼.”

“윽.”

“어서.”

마주 잡은 손으로부터 녹색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곧 금색이 되었다. 그리고 무대 밖으로 튕겨 나가며 그것은 눈처럼 내리는 잎이 되었다. 누군가로부터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뒤로, 뒤로 점차 이어지는 환상의 풍경.

식물의 신, 텔루스. 모든 살아 있는 식물을 다루는 힘이 아실리에게서 펼쳐졌다.

무대는 피어나는 봄이었다. 검은 토가를 걸친 주신과 새하얀 옷을 걸친 소녀에서부터 기적이 차례차례 꽃처럼 피어났다. 이 계절에 피지 못할 꽃들이 피고 진짜보다도 더 진한 향기를 풍기며 무대를, 광장을 거대한 봄의 공간으로 피워 냈다.

와아아.

환호성. 그리고 감탄. 환희와 숭배가 교차하는 시간.

아실리는 손목에서부터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시작부터 이어진 고통은 점차 팔뚝과 어깨를 타고 머리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뜨거운 불이 붙은 것처럼 홧홧한 아픔을 느끼고 만다. 참아야 했다. 수백 개의 반짝이는 빛들. 망원경이 피어나는 조명을 반사한 빛이었다. 수백 쌍의 눈이 지켜보는 아래 자신의 표정이 드러나선 안 되었다.

아실리가 선택한 것은 주신과 황제가 함께 보낸 삶의 계절이었다. 그리고 광기가 지배하는 계절을 함께할 주신이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계절이라……. 과연. 힘들어 보이는구나.”

오만한 목소리. 묵직하고 장엄한 분위기여야 하는 이 무대에 더없이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음악이 무겁게 깔리는 구간이었다. 주신이 이름 없던 인간에게 최초의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아실리는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버틸, 만해요.”

아실리는 그의 가슴을 꾹 밀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거부감이 일었다. 그럼에도 몸은 음악에 맞춰 착실히 발을 밟았다. 이 무대가 어떤 무대인지 알기에,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이었다. 강렬한 햇살이 내려온 아래, 뙤약볕에 싱그럽게 돋아난 잎새가 익고 있는 신록의 계절. 아주 작은 나라에서 시작한 제국이 주변의 작은 부족과 연맹과 그리고 왕국을 무너트렸다.

땅은 나날이 커져 갔고, 초대 황제를 따르는 이들이 늘어났다. 주신의 사랑이 나긋하던 봄에서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된 것은 이때였다. 주신은 모든 것을 주었고, 대가 없는 사랑이 한여름 폭포처럼 쏟아졌다. 두 사람은 커다란 호수 앞에 서 있었다. 주신이 황제를 위해 만든 호수였다. 맑은 물이 튀며,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더없이 행복한 풍경. 싱그러웠다. 주신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네가 해석한 신화는 이런 것이니?”

카스토르는 쉼 없이 주변을 맴도는 황금빛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황금색. 태양, 신의 힘, 광명의 빛, 불사, 창조 이전의 빛을 뜻하는 색. 오직 주신을 가리키는 색이었다. 그리고 주신이 황제에게 주었던 색. 주신의 비호 아래 초대 황제는 점자 넓고 큰 땅을 가졌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찬란한 광기를 띠었다.

“사랑이라기엔 무겁구나.”

그 순간 아실리가 비틀거렸다. 보던 이들은 느끼지 못했을 아주 미약한 비틀거림이었다. 그마저 카스토르가 재빨리 움직여 받아 냈기에 겉으로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아실리는 익숙하지 않은 힘에 이를 악물었다.

“누가, 사랑이라고 했나요?”

담담하고도 차분한 목소리. 그녀는 이 순간 모든 연기를 집어던지고 말했다. 아니, 순진한 척 연기까지 하기에는 이 상황이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머릿속 또 다른 자신이 미쳤느냐고 비명을 질렀다. 저 남자에겐 머리를 조아려. 아직은 안 돼. 맞서지마. 그러나 이미 한차례 벗겨진 껍질을, 다시 뒤집어쓰기엔 늦어 버렸다.

‘당신과 내가?’

아실리는 입술을 비틀어 올려 웃었다. 왜일까. 그녀는 지금 이 이유 없는 증오의 의미를 몰랐다. 왜 자신은 카스토르를 미워하는 것인가? 미워할 이유가 있냐 하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평화로운 일상을 부수고 들어와 자신을 꿇리고 자신의 종 삼겠다 말한 남자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아니 전부였나?’

무엇이 빠졌다. 무엇이 빠졌지? 아실리의 생각이 흘러가는 동안 음악 또한 착실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어느새 악기들의 음률에 절정이 다가왔다.

“지금 네 모습을 보렴.”

제국은 이윽고 서쪽의 모든 나라를 차지했다. 신이 동쪽을 갖고 싶냐 물었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어렸던 황제 대신 성숙한 인간이 서 있었다.

이후로도 주신은 황제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강력한 나라와 황금, 재화와 튼튼한 말들.

지혜롭고 어진 황제 아래 뛰어난 신하들이 몰려왔다. 계절은 가을이었다. 풍요로 가득한 계절. 가을은 풍요로 무르익었다. 땅은 지나치게 풍요로웠다. 매해 풍년이었으며, 이삭은 잔뜩 무거워진 고개를 숙였다. 금빛 밀밭 한가운데 서 있는 소녀에게 주신이 말했다.

모든 것을 주겠노라.

“아모르는…….”

“아모르는?”

음악에 절정이 찾아온 것과 함께 춤도 절정을 맞이했다. 빠르게 흐르는 발동작. 쉼 없이 돌거나 발이 땅에 닿는 것보다 허공에 있는 것에 더 긴 시간을 보내는 구간이었다. 카스토르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네 성장을 보고 싶었나 보구나.”

이상한 일이었다. 아실리는 신력이 주는 고통 속에서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곧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알았다. 몸이 무거웠다. 마치 자신에게만 중력이 이상하게 작용하기라도 한 것처럼. 곧 가까워진 카스토르의 얼굴로 알았다. 카스토르가 가까워진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성장했다.

‘키가 커졌어?’

키가 자란 것이 느껴졌다. 키뿐만 아니라 팔다리도 길어졌으며 살랑 몸을 휘감는 머리카락 또한 더욱더 길었다. 몸이 무거웠다. 마치 주신과 황제의 계절처럼 자신도 성장한 모습으로 카스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네 모습. 그 아이는 아마도 보지 못 할지도 모르니까.”

아모르의 얘기였다. 이 성장이 아모르가 바란 것임을 알았다. 더는 소녀와 주신이 아닌, 여인과 주신으로서 두 남녀가 마주했다.

“말해 봐.”

카스토르가 고개를 기울여 웃었다. 그에게서 묵직한 향기가 풍겨 왔다.

“주신이 한 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럼 무엇이 사랑이니?”

빙글빙글 도는 동선을 따라 하늘거리는 치마가 곡선을 그렸다. 왕국식 동그란 컵케이크 같은 드레스가 그리는 것과는 다른 부드러운 호선. 이윽고 멈춘 그녀를 따라 주신이 뒤를 이어 그녀의 허리를 사로잡았다. 뺨을 스치고 지나간 나뭇잎은 진한 붉은색이었다.

음악이 절정을 지나며 더욱 빨라졌다. 주신의 풍요로운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황제에게 사랑하는 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주신을 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의 반려는 주신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대체 뭐죠?”

주신은 대가를 요구했다. 황제가 입은 것, 황제가 먹은 것, 황제의 목숨, 그리고 황제가 사랑하는 이들. 생명에 대한 대가를.

“너.”

아실리는 생각했다. 이것은 사랑인가? 역사상 수많은 황녀들이 해석했던 것. 주신이 준 것은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붉고 강렬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 모든 것을 주고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사랑인가?

주신의 요구를 황제가 거부했다. 제국에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서리가 내렸다. 북풍이 부는 하늘, 이삭이 썩어 가고 비쩍 마른 과실이 열렸다. 땅이 죽어 갔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어지는 흉작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황제는 선택해야 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황제는 신의 대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황제는 평생 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정복했던 땅을 밟지 못했고, 그토록 사랑했던 호수를 가지 못했으며, 그토록 사랑하던 대지와 창공을 창문 하나로 바라봐야 했다.

“네가 느끼는 고통, 그건 지금 아모르가 느끼는 고통이지.”

역사는 황제를 신에게 도전한 오만한 인간으로 기록했다. 신의 사랑을 받은 유일하고도 하나뿐인 인간.

“신력을 나눠 준다는 것은 곧 영혼의 반쪽을 준 것과 마찬가지야.”

“거짓말, 축복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축복? 누가 제 생명을 축복으로 나눠 주던가?”

무대에 마지막 계절이 불어왔다. 차갑고 시린 한풍이 불었다. 금빛 머리칼과 새까만 머리칼이 엮일 것처럼 거칠게 흔들거렸다.

음악은 마지막 장에 이르며 천천히 느려졌다.

마지막 장은 초대 황제의 죽음을 예견하는 애도의 곡이었다. 겨울, 풀들이 바짝 말라 사그라지고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리웠다. 새하얀 눈이 내렸다.

“주신의 후계자는 미래와 진실을 보게 되지.”

담담한 장송곡 아래 카스토르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아실리를 들어 올리고도 전혀 흐트러짐 하나 없이 그녀를 끌어당겨 이마를 마주했다. 맞대어진 이마 아래, 길고 검은 눈썹이 느리고 차분하게 깜빡이고 뜨였다.

“내가 본 ‘미래’에서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는 헤르난이었단다.”

발밑에 차가운 눈이 쌓였다. 눈은 여인의 새하얀 옷과 무척이나 어우러졌다. 숭고, 순결, 단순함, 순수함, 깨끗함. 초대 황제의 하얀 드레스는 고독, 공허 그리고 해방감을 내포한다.

“또 다른 ‘미래’는 데인 로웰이었지.”

주신이 죽어 가는 황제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황제는 져 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지 않는 제국을 만들어 달라고. 주신은 그 소원을 받아들였다.

“그건, 용납하지 않아.”

미래. 아실리는 하나를 떠올렸다. 제 손에 주어진 기이한 일기장. 카스토르와 그녀는 같은 미래를 본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죽음의 위기도 보았을까? 그럼 이유도 아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녀는 죽음을 읽는가?

음악이 낮게 가라앉았다. 동작은 차츰 느려졌다. 아실리는 죽어 가는 황제가 되며 숭배하듯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를 끌어안은 신은 슬픔에 잠겨 황제의 죽음을 애도했다.

“……초대 황제는 죽어서야 완전히 벗어난 거라 생각해요.”

아실리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신의 집착에서.”

하지만, 자신은 죽어서 이 남자에게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왠지 그건 아니리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마지막 계절.

황제가 죽음을 앞둔 해. 그해 겨울은 주신의 광기가 지배하는 겨울이었다. 주신은 죽음을 앞둔 황제의 곁에 누구도 있지 못하게 했다. 사랑하는 반려도 자식도 충성을 다한 신하도. 황제의 곁을 지킨 것은 오직 하나. 주신이었다.

“주신은 사랑을 한 게 아니야. 사랑이 아니라, 광기이며. 집착이에요.”

당신처럼.

죽어 가는 황제가 천천히 제 면류관을 벗어 들었다. 순간 조용하던 관중이 술렁였다.

두 쌍의 뱀이 얽힌 가시나무 면류관. 뱀은 주신의 동물을, 가시나무는 신이 황제에게 요구한 계약을 상징했다. 그리고 소녀가 한 행동은 그 관을 신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의 이유를 몰라. 하지만, 황제처럼 살지 않아.’

“나는 신의 이유를 몰라요. 그러니, 나는 황제처럼 살지 않겠어요.”

카스토르의 눈이 번쩍였다.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지는 황금빛이었다. 그의 주변으로 희미한 금빛 바람이 불고 있었다.

“신을 거역하겠다?”

“나는 황제가 아니에요.”

음악의 끝에서 두 남녀는 고개를 마주했다. 긴긴 말을 대신해 침묵을 가면처럼 쓰고서 마주한 두 남녀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시선을 싣고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가 신에게 면류관을 씌웠다.

장엄한 장송곡이 끝났다.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 내리깔렸다. 대중은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역사상 처음 있는 끝이었다. 보통 무대의 끝은 몹시도 화려했다. 그렇지 않은 무대에 당황한 사람이 태반이 넘었다.

그때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작은 보랏빛은 점차 커지며 희미하게 넘실거리던 황금빛을 모두 삼켜 버리고 비처럼 폭발하듯 터졌다. 팔랑팔랑, 앞줄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감탄이 터졌다.

나비였다.

빛은 수백, 수천의 나비가 되어 커다란 광장을 장식했다. 신비로운 자색에 눈을 빼앗기고 이윽고 나비가 산화하며 하늘에 거대한 분수령이 생겼다. 휘몰아친 빛이 은하수를 장식했다. 언젠가 사진으로 보았던 북극광보다 아름다웠다.

아실리는 몽롱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자신이 한 일일까? 아니면 아모르가? 하지만 마지막 겨울 눈이 그치고 어둠이 깔린 순간 팔찌는 빛을 잃었다. 똑똑히 보았다.

점차 시야가 낮아진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아실리는 지친 눈으로 아름다운 수를 놓은 하늘을 바라봤다.

펑!

기다렸다는 듯이 불꽃이 쏘아졌다. 불카누스의 저력이 하늘을 수많은 불꽃으로 장식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하늘에 제국민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광장 곳곳에서 수많은 꽃과 나무가 피어나 자욱한 향기를 피웠다. 아실리가 팔을 쳐다보자 팔찌에 다시 녹색 빛이 감돌고 있었다. 천천히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연기는 하지 않기로 한 거니?”

선명한 경고 조를 띤 황홀한 목소리. 아실리가 지친 얼굴을 들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녀는 땀방울이 떨어지는 턱 끝을 손등으로 훔치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어쩔 작정이신가요.”

* * *

춤은 그 어느 때보다 대성공을 이뤘다.

환호가 광장을 메웠다. 너무도 거대한 소리에 돌아가던 소녀는 귀를 막아야 했다. 멀리서 수없이 제창되는 자신의 이름. 수많은 제국민이 황녀를 입에 담고 불렀다. 성스럽기보다는 친근했고 또 숭배 같기도 했다.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흘끗, 돌아보자 무대 위로 대기했던 춤과 노래의 신관들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황궁 소속 신관들로, 황녀의 「프리모 살바티오」 뒤로 제국의 역사를 기리는 군무를 추는 자들이다. 그들을 본 순간 아실리는 완전히 제 역할이 끝났음을 비로소 느꼈다.

인파 사이에서 원이 그려졌다. 사람으로 만들어진 원. 그것은 곳곳에 걸쳐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것은 올해의 바람잡이들이었다. 그들은 앞장서서 제국 전통 춤을 멋지게 소화했다. 아름다운 남녀 무희들을 따라 제국민이 춤에 빠져들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이 즐기는 축제였다.

이 축제가 얼마나 흥겨웠느냐에 따라 그해 길흉을 결정했다. 또한, 「프리모 살바티오」를 춘 황녀의 이름을 드높이는 자리기도 했다. 2백 년 전 불의 신관과 함께 가장 성공한 「프리모 살바티오」를 보였다 전해진 황녀는 그 뒤로 북쪽의 강대한 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이를 두고 레베카는 이리 말했다.

평생 이름이 없던 황녀가 유일하게 색을 찾는 시간.

아실리는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지친 나머지 헛웃음이 터진 것일지도 모른다. 새삼 자신의 처지가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고. 웃어 버린 아실리는 그만 자신의 곁에 아직 남아 있던 남자의 존재를 잠시 잊고 말았다. 그리고 제 웃음에 못 이겨 비틀대는 그녀를 잡는 강한 손이 있었다.

“긴장을 놓을 때가 아니지.”

“오라버니.”

소녀가 중얼거리듯 남자를 불렀다. 어딘가 멍한 표정에 카스토르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리고 카스토르가 멈추고 행한 행동에 뒤를 따르던 검사와 시종들이 입을 막았다. 황태자께서 황녀를 향해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했다. 헉, 숨을 들이켜는 자도 있었다.

카스토르가 한껏 가까워진 얼굴에 끓는 것 같은 목소리를 담았다.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서 채 식지 않은 열이 느껴졌다.

“아실리 로제, 사냥이 가장 쉬울 때가 언제인지 아나?”

“…….”

“바로, 상대가 모든 긴장을 풀었을 때. 지금 같은 때지.”

빛을 잃었던 눈동자가 제 색을 되찾았다. 놀람과 당황으로 범벅된 아실리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프게 죄인 손을 바라봤다. 조금 전 무대에서처럼 얽혀 있는 손가락을 본 순간, 얼른 손을 뿌리쳤다.

‘물러나.’

카스토르의 눈짓에 모든 시종과 검사들이 물러났다.

“자, 잠깐 지쳐 넋을 놓았어요.”

“그런가?”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커다랗게 자리 잡은 것은 단연 카스토르를 속여 온 것이었다. 백치 흉내로 위기를 모면한 순간부터 그녀는 쭉 순진한 연기를 억척스럽게 해 왔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들킨 지금 그를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실리를 아는 듯 카스토르가 픽 고개를 기울인 채 웃었다. 시선 끝에 그의 옆선이 걸렸다. 이내 숨을 꿀꺽 삼킨 아실리가 고개를 완전히 돌렸다.

텅 빈 공동에 남겨진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했다.

“모든 진실을 꿰뚫는 힘을 갖고 있다는 말 기억하나? 내가 갖고 싶은 건 결여된 네가 아니야.”

“……결여된?”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잃었다. 익숙한 표현이었다. 그녀는 성녀 마리사가 그리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엇인가 숨기는 것처럼 의뭉스러웠던 아모르와 묘하게 자신이 달라졌다며 무심히 뱉었던 주변인들의 말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리고 아실리는 얼굴을 흐렸다.

“누가, 무슨 자격으로 온전한 나를 정하는 거죠?”

자신은 문제없다. 그렇게 믿고 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웃고 행복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변은 끊임없이 그녀에게 되새기게 했다. 너는 변했고, 잃었고, 결여되었다.

[기억하려 하지 마. 넌 그대로 행복해져.]

정작 ‘나’는 스스로에게 기억하지 말라 전했음에도. 아실리는 자신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생각했다. 구구절절 적혀 있던 편지의 핵심은 단 하나였다. 카스토르를 조심하며, 기억하지 말고, 그대로 행복해지는 것. 하지만 아실리는 이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잊고 있죠?”

조각이 빠진 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렇게 아실리는 아모르에게 물었던 것을 카스토르에게 물었다. 똑바로 쳐다보는 자색의 눈동자에서 숨길 수 없는 말간 순진함이 묻어났다. 이에 카스토르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고분고분한 것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그리고…… 내게도.”

맨살에 토가를 걸친 남자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야릇함이 드러났다.

“내기할까?”

“……내기?”

카스토르가 천천히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금색 눈동자로 위험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미래를 아는 것은 나뿐이 아니야. 그렇지?”

사실이었다. 이 순간 놓고 온 일기장이 그려지며 손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인 깨달음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언제부터 일기장을 손에서 놓고 다녔지? 분명 어떤 일이 있어도 손에서 놓지 않던 자신 아닌가.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곧 너와 내가 갈 저녁 연회에서 사람이 죽을 거야.”

“누, 누가.”

“왜 모르는 척이지? 이건,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찬연한 금색 홍채 속에 광폭한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은 것이 그의 눈동자 속에 떠올랐다.

“그 사람이 죽는 걸 막아 봐.”

그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과 함께 아실리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리인가, 하는 혼란이 함께였다.

“그걸 막게 되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덤으로 ‘진실’도.”

“진실‘도’?”

“내게 원하는 것이 있잖니.”

선선한 대답에 혼란은 가중되었다. 어째서? 카스토르가 득을 보는 것이 없는 내기였다. 또한 너무나 뜬금없기도 했다.

아실리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올려다보자 카스토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눈을 휘었다. 그러나 잠잠해 보이는 낯과 달리 눈동자 속에 흉폭한 기운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저를 완전히 놓아주는 거라 하여도 들어주실 건가요?”

“물론.”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토록 광기로 물든 눈을 하고서 이성적이며 정제된 모습을 보이는 카스토르에 대해서.

“실패하면.”

아실리 눈에 그는 마치 그녀가 실패할 것을 확신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 결과는 미리 알려 주지 않는 쪽이, 재밌겠구나.”

눈을 깜빡이는 사이, 보게 된 것은 멀어지는 등이었다. 아실리는 참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다리가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웅웅 귀를 울려대고 있었다.

―그럼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 * *

쾅.

별안간 거칠게 열린 문에 가까이 있던 레나와 하이나가 ‘히익.’ 하고 놀랐다. 겁이 많은 레나는 뒤로 발라당 넘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제 주인이라는 것에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어째서? 황녀님께선 이렇게 다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올 분이 아니었다.

막 말을 걸려 했던 하이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들어온 주인의 낯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실리는 곧바로 레베카를 찾았다.

“레베카, 내 일기장 갖고 있지?”

“네? 네. 무대 전에 맡기신 거라면…….”

“이리 줘.”

레베카에게 일기장을 받고 빠르게 펼쳤다. 대체 주인께서 무엇을 하시나 호기심과 걱정 가득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였지만, 아실리에게는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빠르게 넘어가던 페이지가 한곳에서 멈췄다. 오늘 날짜였다.

[무사히 「프리모 살바티오」를 끝내고, 저녁 연회를 맞이했다.

이곳에서 난 처음으로 ‘엄마’를 만났다. 엄마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사람.

(중략)

이웃나라에서 온 왕자님과 얘기를 나눈 지 10분 정도 되었나. 언뜻 가장 높은 가지에 걸린 초승달이 보였다.

이때,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바라본 곳에 어떤 남자가 쓰러져있었다. 제국 전통 옷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제국의 귀족이 분명했다.

누군가 신관! 하고 소리친다. 그때까지 나는 꽝꽝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사람이 죽는 걸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무서웠어…….

그때, 누군가가 다시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가 죽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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