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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건국제 Ⅱ (19/47)

11. 건국제 Ⅱ

사극이나 시대물에서는 왕이나 높은 사람이 상석에 앉아서 내려다봤다. 그런데 왜 그녀는 높은 곳에 앉아서도 높은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레베카는 무릎을 꿇고 있어도 우아함이라거나 위압이 철철 넘쳐흐르는데 말이다.

“레베카……. 제발 일어나.”

그렇게 생각하며 아실리는 도리어 쩔쩔매면서 레베카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몇 번을 말씀드렸나요. 익숙해지셔야 한다고.”

글쎄, 아무리 몇십이고 몇백의 대신 앞에 나설 거라고는 하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익숙해질 일일까?

껍데기야 어찌 됐든 그녀의 알맹이는 전생의 소시민을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스스로 황녀라고 자각할 만한 일이라곤 연회에 다녀온 것밖에 없었다.

“하아……. 천천히 익숙해지시지요.”

레베카도 그를 알아서인지 아실리에게 실제에 가까운 체험을 시켜 주려 했다.

‘아니, 고맙긴 고마운데…….’

레베카의 노력은 고맙지만 접견실에서 열 명쯤 되는 신관과 레이 경, 거기에 레베카까지 주르륵 꿇고 올려다보는 광경은 영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아니, 좀 애매하다. 그녀는 곧 무대에 선다.

‘무대는 수만의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이지 섬김과는 영 멀단 말이야…….’

그런데 왜 누가 꿇고, 올려다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솔직히 그녀가 상석에 앉을 일이 뭐가 있겠나. 그녀의 위로 황자만 일곱이 있을 것을.

어쨌거나 시키니까 하긴 하는데, 딱딱하게 굳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렉스가 감격해서 쳐다봤다.

“위엄이 넘치십니다. 황녀님!”

그가 경망스럽게 속삭이고서야 아실리는 아, 저들이 보는 것에 착각 렌즈가 끼었구나 생각했다.

저들 눈엔 굳어 있는 모습이 오히려 적응한 걸로 보였나 보다. 현재 그녀의 속은 아주 쭈구리가 되어서 설설 기는 기분이었다.

“의상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실리는 레베카의 낯을 보며 끄덕였다. 레베카가 수도의 유명 의상 담당자들을 전부 끌어 모아 닦달해 만들었다던 예복은 플뢰온의 아낌없는 돈지랄에 힘입어 여느 것과는 다른 품질로 완성되었다.

‘아니……, 옷만 퀄리티가 높으면 뭐 하냐고.’

입는 사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대우였다. 옷에게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틀 뒤부터는 기술자를 겸한 신관들과 함께 직접 나가서 맞춰 볼 예정입니다. 주인님.”

리허설이었다.

“으응, 근데, 여기 모인 이유가 따로 있지 않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자 신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내려놓은 건 작은 모형이었다. 광장과 무대를 세팅한 듯 모형은 매우 섬세했다.

‘와……. 멋지다.’

작게 감탄하는 아실리를 보고서 신관 중 하나가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부, 부, 불카누스의 사제라면 이 정도 기본이지요!”

아실리가 생긋 웃었다. 다 큰 남자가 수줍어하는 모습이 퍽 귀여워서였다. 그러자 신관들이 앞다투어 이건 제가 만들었습니다! 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푸핫, 다들 천천히 얘기해. 천천히.”

그녀는 연예인 삼촌 부대를 보는 듯한 열기에 놀라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이 먹은 아저씨들이 귀엽기도 참 힘든데. 진짜 귀엽네. 이 사람들.’

그러던 중 아실리는 뺨을 쿡쿡 찌르는 시선에 이끌리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플뢰온과 마주쳤다.

“……왜? 할 말 있어?”

플뢰온이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데인은 어디 갔어? 안 보이네.”

“그놈은 바빠. 2황자 형님이 불렀다나.”

“그래? 별일이네.”

2황자는 데인과 같은 곳에서 일하지만 맡은 일이 전혀 달라 거의 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데인은 ‘형임에도 참 낯선 사람이다.’ 이렇게 말한 적 있었다.

‘제국에서 적잖이 위치를 차지한 그가 데인을 불렀다니.’

쉬이 지나갈 일이 아닌 듯했다. 물론 그녀가 생각해서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신성한 무대에 걸맞은 장식이나 인원 구성, 대부분의 일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건 전부 불카누스의 열렬한 투자와 공작가의 아낌없는 정보…….”

“됐고. 본론부터 말해.”

플뢰온이 말을 끊었다.

“오빠, 좀 더 사근사근하게 말을 하는 게 어떨까. 오빠의 부관이라며.”

그러자 기술자 대표로 설명을 이어 가다 말고 렉스가 감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실리는 생긋 웃었다. 인간관계든 비스니스든 곤란할 때는 웃는 게 최고다. 거기다 불카누스 신관들은 플뢰온에게 끌려온 열정 페이 피해자들 아닌가.

“황녀님을 위한 모든 것이 불편 없이 준비되어 가는데…….”

“가는데?”

가만 보면 첫째 오라비에게는 상도덕이란 게 없다. 상식을 심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다른 말로 양심이라고 들어 보셨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큰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문제?”

아실리는 플뢰온을 흘끗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예.”

렉스가 조금 곤란하다 싶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꺼냈다.

“아벤타 공작가는 검의 신관들입니다. 그리고 불카누스는 대장장이이고요. 무대의 부가적인 요소를 꾸미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무대 자체를 장식하는 신관은 줄곧 꽃의 신관과 눈과 바다의 신관, 그리고 강의 신관이었던지라…….”

“화려함이 부족하다?”

“네. 그리고 신력도요.”

요컨대 메인 요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곤란하다 이거지?”

“네.”

그녀의 할머니뻘 되는 황녀가 지금은 세상에서 없어진 불의 신관을 데려다가 세상 화려한 불꽃놀이로 하늘에 수를 놓았다고 들었다. 이와 같은 큰 한 방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사실 메인 요리를 불의 신관이나 꽃의 신관, 눈과 바다의 신관처럼 강력한 신관들이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신물인 무대를 쓰기 위해서는 강력한 신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장치의 신력을 맡아 줄 신관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자동차의 엔진과 같은 역할이다. 강력한 신관이 많은 신력을 불어넣을수록 무대는 생동감 있고, 더 화려하게 피어난다.

“강력한 신관을 부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배경이 필요하거나 그들을 부릴 만큼의 돈이 필요한데…….”

문제는 이들 신관이 이미 돈으로 부릴 수 없을 정도로 풍족하다는 사실이다. 레베카와 플뢰온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고심하는 얼굴이었다. 하나 아실리는 그들의 고민이 무색해지게 이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저기.”

그녀는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음에도, 입술은 착실히 준비된 말을 토해 냈다.

“메인이 되는 ‘동력 신관’이라면 걱정할 것 없어. 그건 내 오라버니가 해 줄 거야.”

이상하게도 그녀는 말을 꺼내면서 차분해졌다.

“오라버니시라뇨? 두 분 황자님께서는 신관이 아니신 걸로 압니다만…….”

본래 붕붕 뜨고 싶게 뜨고 가라앉는 성격은 아니긴 했지만 왜일까. 그녀 스스로 느끼기에 의아할 정도로 차분하고 침착했다.

아실리는 녹색의 잎이 겹쳐 그려진 비단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이건 뭡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주인님.”

“응응. 다들 진정해.”

신관들과 플뢰온, 레베카까지 한데 섞인 목소리를 한길로 흘리며 그녀는 씨익 웃었다.

이 순간 아실리는 오래전, 보고서를 제출할 때 획기적인 생각을 해냈다는 고취감에 푹 빠졌던 신입 사원 시절이 생각났다. 그땐 참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와장창 깨지는 데 단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새로 시작하는 느낌이 몹시도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상쾌한 기분을 반겼더라?’

아실리는 고개를 들었다.

“물론, 내가 말한 오라버니는 데인도 플뢰온도 아냐. 바로 4황자 아모르 오라버니시지.”

“4황자님이요? 그 늘 편찮으신?”

“응. 어느 신전인지 밝힐 순 없지만 그분은 강력한 신관이셔. 렉스 말대도 그분이 몸이 편찮으시다는 얘긴 들어 봤을 거야. 그래서 직접 나서는 대신 내게 이걸 주셨고.”

그녀는 아모르가 준 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함께해 주기로 하셨어. 잘은 모르지만 신력이 담긴 물건이래.”

“설마. 신력 전이 장치인가요?”

“응. 이걸 매개로 직접 동력 신관을 맡아 주시기로 했어. 좋지?”

동력 신관. 아모르는 기꺼이 가장 고되고 힘든 메인 요리를 맡아 주기로 했다.

신관들은 뜬금없는 황자의 등장과 그가 동력 신관이 된다는 말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러면서 한마디 꺼내지도 못했다.

‘신분이 깡패구나.’

갑자기 낙하산이랍시고 나타난 이가 황자였으니 더욱 그렇겠지. 그들 또한 달리 방법이 없다 느꼈는지 하나둘씩 수긍했다.

그러나 끝내 끄덕이지 못한 두 사람이 플뢰온과 레베카였다.

“안 됩니다.”

“안 돼!”

아실리는 그 둘이 이렇게 나올 걸 예상 못한 바는 아니어서 태연히 그들을 설득했다.

“저기, 나 4황자 오라버니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다 생각해. 그리고 참고로 거부하면 당일에 잠적해 버릴 거야.”

“협박이냐?”

“농담이지. 아무튼 각오가 이렇다고.”

언제부터 이렇게 간이 커졌을까. 폭군에게서 죽기 살기로 살아남았을 때부터인가? 아실리는 자신의 배를 쭉 갈라 보면 간이 퉁퉁 불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실리는 그들에게 천천히 아모르와 만나게 된 계기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 이어 온 만남에 대해서 차분히 털어놓았다. 플뢰온은 어렵지 않게 일기장이 관계된 내용이란 걸 알아챈 것 같았다. 레베카만은 여전히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수긍했다.

“4황자 오라버니는 여태까지 내게 아주 많은 도움을 주셨어. 너무너무 좋은 분이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귀띔해 준 것부터 해서 지금 보고 있는 레베카 또한 그를 통해서 알게 되지 않았던가.

늘 불행에 시달린다는 비슷한 처지여서일까.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래, 고마운 사람인데 왜일까…….’

아실리는 고맙다는 말을 곱씹을수록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훌훌 털어 내면서 고개를 바로 세웠다.

“걱정하지 마. 전부 잘될 테니까!”

레베카와 플뢰온은 그녀를 오래 잡고 있으려고 했지만 각기 정말 바빴던 탓에 그들을 찾는 이들의 부름에 금방 돌아가야 했다.

하는 수 없이 둘은 재촉을 뒤로 미루고 돌아갔는데, 이들 중 플뢰온은 궁을 나서기 직전 돌연 아실리를 잡았다.

“너, 이상해.”

아실리는 눈을 가득 채운 잿빛 머리와 한들거리는 머리카락 아래로 짙푸른 눈을 바라보면서 의아함이 들었다.

‘이상해? 뭐가?’

플뢰온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눈동자를 꽤 오랫동안 바라봤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여동생은 말이 없는 그가 이상한 듯 빤히 마주보면서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뭐가 이상해?”

플뢰온은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촉이 좋다거나 감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니, 데인이나 망할 기사 놈의 말을 듣자하면 느린 편이라고 했던가.’

제가 눈치 없다는 사실을 굳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일부는 수용하는 플뢰온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해.’

며칠 전이었나. 사흘, 아니 나흘쯤 된 것 같다. 여동생이 묘하게 달라졌다고 알게 된 게.

젠장, 플뢰온이 욕을 뱉었다.

‘이런 건 데인 그놈의 주특기지 난 잘 모른단 말이다.’

그나마 도움을 청하고자 한 곳이 저 무뚝뚝한 검사 새끼였건만. 저놈의 주둥이는 확실치 않으면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는 무거운 주둥아리인걸.

플뢰온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확신이 없는데 마구 몰아붙일 수는 없으니까.

“플뢰온?”

무엇보다도 속없이 웃는 저 얼굴이 싫지 않았다.

“뭐야. 왜 말이 없어? 내가 너무 예뻐서 할 말을 잃었나.”

기억하는 한 어딘가 건조하고 메마른 시선으로 허공을 보던 여동생이었다. 미소마저 겨울 가지처럼 처연하고 희미해졌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맑은 웃음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생각했다. 그러니 굳이 초를 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개소리.”

“앗. 잠깐.”

아실리가 뒷걸음질 쳤다.

“피해?”

플뢰온이 찡그렸다.

“뭐야. 그럴 땐 통보가 아니라 이유를 말해 줘야지. 4황자 오라버니 때문에 삐졌어?”

“삐지긴 누가!”

역시, 이런 건 제 특기가 아니다. 그는 데인의 자리가 절실해졌다.

* * *

며칠 뒤, 본궁. 중앙 궁에서 대단히 길고 화려한 행렬이 궁을 찾아왔다.

“고귀하신 8번째 가지, 황궁의 꽃을 뵙습니다.”

레베카도 오라버니들도 신관들도 모두 수도의 무대를 실측하러 간 참이었다. 맞이한 것은 아실리와 하녀들뿐.

아실리는 눈이 멀 정도로 화려한 가마를 보며 순간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일 이 자리에 레베카가 있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쨌거나 그녀의 공식 파트로누스를 가로챈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미 그녀가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간 도도한 낯이 묘해졌다가 일그러졌다가 혹은 안타까움에 물든다. 다채로운 표정이 그 증거였다.

<어째서입니까?>

글쎄. 모든 걸 털어놓았을 때 그녀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너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고한 사람이었으니, 동정과 연민을 모욕으로 받아들일 사람이었다.

그래서 네가 좋다고 하면 조금은 예쁘게 봐 주려나?

아실리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름답고 도도한 시녀님. 황녀보다 더 황녀 같은 우아함으로 무장하고 맡은 일에 주저하지 않으며, 언제나 당당한. 끝내 나를 따르기로 결정한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만연한 봄이었다. 궁전 앞 아카시아 나무에는 흐드러지게 꽃이 만개해 꽃잎이 흩날렸다.

“모두 물러나게.”

소녀는 가마에 앉은 그대로 봄의 눈이 내리는 광경을 그대로 바라보다가 양손을 잡은 그대로 배시시 웃어 버렸다.

‘그래, 내 삶이 불행했던 게 하루 이틀 일이었나.’

굳이 자신과 레베카를 두고 쑥덕거릴 밖의 반응이 아니라도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조금 있으면 찾아올 건국제나 지금쯤 그라니우스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을 사막의 공주까지. 멈춰서 만끽하거나 즐길 시간도 없었다. 바짝 쫓는 불행과 일기장은 언제나처럼 소녀를 부추기고 있었다.

가마에 올라타 흔들거림에 차차 익숙해질 무렵이었을까,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가마가 꽃잎을 꼬리 삼아 살랑살랑 내려놓은 길 끝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귀하신 첫 번째 가지를 뵙습니다.”

“다시 만났구나. 내 아실리.”

카스토르였다.

“이리 오렴.”

그는 기사 대신 아실리를 직접 안아서 내렸다.

“잘 지냈니?”

“……네.”

떨어지지 않은 그대로 나른한 숨이 황홀한 목소리와 함께 귀를 적신다.

“널 기다렸단다. 쭉…….”

건국제 15일 전.

“……영광입니다. 오라버니.”

본격적인 무대 연습의 시작이었다.

* * *

처마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길을 뚫는 용도로 만든 배관에서 나는 소리이리라.

바람이 불었다. 빛을 머금은 커튼은 찬연한 흰빛을 품었다. 바람이 들춘 커튼 뒤로 화가의 캔버스처럼 수채화를 그대로 옮겨 둔 것 같은 하늘이 드러났다

눈부시도록 찬란한 하늘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하늘.

‘곧 아실리가 올 시간인가.’

카스토르는 가끔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질 때가 있다. 창문에 등을 기대 나른히 숨을 토해 냈다.

오래전, 황제가 정성을 들였던 궁이 있다. 황제 자신이 기거하는 궁과 황태자 궁 솔레 헬리오스페라였다.

이곳은 방마다 계절의 신들을 상징하는 조각이 있다. 달마다 회전하며 돌아가는 홀의 천장은 불카누스 당대 최고의 기술자가 지었으며, 꽃의 신관, 향수를 다루는 롬의 조향사들의 합작품이다.

완공 당시 어린 황자에게 하사하기에 과분한 것이었다.

‘쓸데없는 짓 아니던가.’

카스토르는 비웃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걸었다.

“저, 전하.”

“산책하지.”

황궁, 도무스 아우레아가 있는 땅은 수천 년 전 텅 빈 황무지였다. 특히 중앙 궁이 있는 곳은 늪지대였다. 그러나 주신의 은혜로 땅이 뒤집히고 초대 황제는 천혜의 도시를 세웠다.

늪지대였던 탓에 본디 이 땅에는 깨끗한 물이 없었다. 주신은 늪 말고는 작은 연못조차 없는 이곳에 눈과 바다의 신으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켜 거대한 인공 호수를 만들었다.

눈과 바다의 신은 범람하는 도시 세베테이아에 터를 잡았다. 서쪽의 호수와 동쪽의 언덕, 그리고 북쪽의 산. 모든 게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신이 이 땅에 내린 기적의 상징으로서 이곳에 있었다. 신과 신관이 건재한 한 영원히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산이 생겨나고 호수가 생겼다. 모든 것은 단 한 사람. 신이 지독하게 아끼던 한 사람을 위해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나이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

<저의 후손까지 이 영광을 누릴 수 있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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