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아모르(amor)
“정말로 가시겠습니까?”
그날, 많은 것이 교차했다.
지금까지 쌓아 왔던 것과 품어 왔던 것. 걸러내지 못하고 오랜 시간 그를 괴롭힌 것. 조각은 여전히 건재한데 그럼에도 그날, 아모르는 줄곧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택했다.
“궁 밖을 나서는 것. 당신에겐 단 두 번밖에 없는 기회입니다.”
눅눅한 밤이었다. 유달리 습기가 차서 아침이 아님에도 이슬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모르는 내리 답을 기다리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새를 바라봤다.
“황자님.”
아마도 그는 아모르가 가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정말로 버리시겠습니까.”
염려가 섞여 퍽 다정한 헤르난의 목소리를 한 길로 보내며, 아모르는 돌연 오래지 않은 과거로 돌아갔다.
* * *
아모르는 지금의 그가 되기까지 수많은 나락을 겪었다. 세상일에 무뎌졌다. 동시에 그는 반발하듯 주변에 흥미를 느꼈다. 때로는 패악을 부렸다.
어린 하녀들에게 식사를 나르게 하고 당황하는 것을 즐긴다는 소문이 돌았다. 괴악하고 이상한 악취미를 가졌다고 들었지만, 그는 작은 아이들 특유의 생동감이 좋았다. 푸릇한 식물과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아, 아, 안입니다.”
어느 날 하녀 복장을 하고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소녀는 흥미로웠다.
하녀답지 않게 되바라진 것이 독특하다 싶더니 예법이 깃든 몸짓, 그리고 눈동자 색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황녀인가.’
황제의 옆에서 종종 보았던 여자, 아올레시아를 좀 닮았나 싶어 꼼꼼히 살펴봤다. 신기하게도 안의 눈동자는 때 묻지 않은 무구함 속에 특이한 것이 섞여 있었다. 종종 성인 하녀에게서나 보이는 권태가 보인다.
이윽고, 안이 카스토르의 이름을 꺼내는 순간에 그의 흥미에 불이 붙었다. 지금껏 그가 보았던 인간 대부분이 욕망에 찌들어 있어서일까.
“감히 청하건대, 황태자 전하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소녀가 당돌하게 재깔였을 때 그는 감탄했다. 소녀가 보였던 절박함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카스토르. 제 형이 바깥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지 모르지 않았다. 제 귀를 대신한 식물들로 들었다.
소문에는 카스토르가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이 섞여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행한 일이었지만, 자극적이고 더욱 강렬하게 극대화되어서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의 뜻이었다.
<카스토르가 본인 평판에 관심 없는 것에 더해 날로 흉악해지는 소문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따금 그의 부관이자 수호자인 헤르난이 한숨 쉬듯 던졌다.
그렇다고 제 형이 자비롭거나 따스한 사람인가 하면 그거야말로 절대, 아니었다. 이따금 짓는 미소를 제외하면 권태로운 얼굴과 좀처럼 표정 변화조차 없는 낯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알 수 없는 이라 멀리하게 했다.
그러나 사실 카스토르는 잔악성이나 잔혹함을 제외하면 큰 욕망이나 방향성을 보이지 않았다.
아모르가 본 10년 내내, 거대한 제국의 후계자이면서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나 야망 욕망 같은 당연한 욕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모르는 좀처럼 제 형의 잔악성이 아니면 그의 사고를 읽어 낼 수가 없었다.
형이 미소를 지을 때는 흥미로운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럴 때는 대체로 피를 불렀다.
“형이라…….”
이름조차 몰랐던 여동생이 카스토르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렇다면 빠른 시일 내 이 소녀는 죽게 될까?
“좋아, 알려 주지.”
아모르에게는 형제와 같이 정감 있는 단어들에 대한 관념이 희박했다. 채 누리기도 전에 모조리 잃었고, 누군가 그에게서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나타난 여동생이라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황녀란 딱 그 정도였다.
처음엔 그랬었다.
그 밤. 소녀가 자신을 찾아와 제 목숨을 살리겠다 독을 들이켜려고 하기 전까지 아모르는 한 번도 소녀의 이름을 떠올리려 해 본 적이 없었다.
“빨리 뱉어! 뱉으라고!”
지금까지 그에게 스쳐 지나간 사람들. 죽거나 죽어 가거나 울부짖던 모든 이들을 잊듯이 소녀도 그렇게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나 오라버니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는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잃을 것이고, 앞으로도 잃을 것이기에. 정을 주는 것에 의미가 없다 생각했다.
‘너도 곧 죽겠지. 여태 모든 이들이 그랬듯.’
이제까지 그랬듯 혹독하고 냉철한 형의 앞에, 여리고 작던 소녀라고 별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기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카스토르가 돌연 관심을 가졌을 때도 그저 눈감으며 알았노라 대꾸했다.
그는 소극적인 변덕을 부렸지만, 소녀가 살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형님 앞에서 살아난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아모르는 자신도 모르게 혀끝이 아릿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가슴 한 부분이 욱신거렸다.
왜?
<다녀왔어요. 황자님.>
그래 저 눈. 저 눈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다 죽어 버린 꼴을 하고 건조하게 재깔이는 낯이.
제 아픔도, 자신을 덮치는 수많은 위기도 전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떠들듯 툭 뱉는 입이.
<너. 왜. 눈이 죽어 있지?>
아이 티를 채 벗어나지 못한 소녀의 얼굴엔 이전에 보았던 무구한 아이다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선심 쓰듯 던진 그의 말로 소녀는 살았다. 그로 그녀는 큰 도움을 받았다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굳이 형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방관했고, 나서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불편은 커져만 갔다. 왜? 어째서?
소녀는 해를 거듭하며 담담하고 황폐한 빛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것이 그의 앞이기 때문인지, 그저 성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소녀는 황폐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우린 동료라며 소탈하게 웃었다.
그때마다, 아모르는 알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알고 있을까?
‘죽어 버린 눈으로 웃지 마라.’
네 그 미소는 바짝 말라 사막의 모래처럼 퍼석퍼석하다. 그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자신이 어찌 누군가에게 행복을 담을 수 있을까.
오랜 시간 카스토르와 함께 보냈다. 아니, 카스토르가 그를 키웠다. 카스토르의 성격, 버릇, 말씨, 말투, 손짓과 작은 고갯짓. 사고와 가치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형을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에게 조언할 자격은 더더욱 없으리라 생각했다.
<미래를 알아요. 그중에서도 주변의 죽음과 오직 나의 죽음을 알고. 어쩌면, 수많은 죽음을 거쳤을지도 모르죠.>
시체처럼 죽어 버린 눈으로, 담담하게 재깔이던 눈을 되새겨 보았다.
문득 생각이 나 트집 잡듯 공작 부인들을 불러내 억지로 시녀를 손에 쥐어 주던 날.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이전으로 더 거슬러야 할까.
돌고 돌아 그는 헤르난에게 말했다.
“그래. 나가게 해 줘.”
아모르가 고개를 숙여 작게 웃었다. 스스로도 작은 불씨를 느꼈다. 결국 천금 같은 기회를 버리고, 그는 인정했다.
“나는 나가겠어.”
아프면 아프다 말도 않고, 그저 바보처럼 앓고 마는 소녀를 향해서 줄곧 미루고 다시 미뤄 온 것.
“목적지는 테레나 궁.”
바야흐로, 가슴에 들어서 버린 의미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네가 죽어 버리면, 내 삶은 무채색이 되고 말겠구나.
그리고 평생에 약속된 두 번의 기회를 썼다. 밖으로 향하는 공기는 서늘하고 따뜻했다. 어느 봄처럼.
그때는 그저 안타까워, 가엾게 여긴 동정이리라 생각했다.
마음은 자꾸만 커져 가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이것을 몰랐다. 그를 괴롭히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감정이 물을 불린 스펀지처럼 몸을 불리고, 비대해져 가도 아모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끔, 문득 답답함을 느낄 때. 그럴 때면 의문만 커져 갈 뿐이었다.
아모르는 소녀가 방문하지 않을 때에 하루 종일 소녀를 떠올렸다. 그리고 소녀를 떠올리는 자기 자신을 생각했다.
필요하다 생각해 시녀를 주었다. 제 신력을 담은 성물을 주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이 행위에 대한 완전하고도 온전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를 파헤쳐 나온 답이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이라면? 어렴풋이 지각하는 그것이라면. 두려웠다.
줄곧 스스로에 대한 자아도 존재에 대한 욕구도 모두 놓고 살아 있되 흘러가는 대로, 죽은 것처럼 지냈다. 지금의 이 불씨를 보기 무서웠다. 아모르는 기대하는 법을 몰랐다. 가지고 싶은 욕구를 몰랐다.
오래전 거대한 이기심에 물든 황제의 손 아래 소년은 망가졌다. 그는 강요를 알고, 묶어 두는 방법을 알았으며, 소유와 타락한 욕망을 알았다. 그의 세상은 편협하고 난폭하며 폭력과 억압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식물은 토양의 영양에 따라 만개하기도 하고, 채 피지 못하고 죽기도 했다. 그가 가진 대지는 이미 오래전에 오염되어 쓰지 못할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쉬이 묻지도 바라지도 못했다. 다가오는 위로에 답하지 못했다. 소녀에게 솔직한 자신은 적어도 망가지고 어그러지고 엉망이어선 안 됐다.
애정에 대해서 온건하고 온전한 방법을 몰랐다. 그는 소녀에게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가둬 두지도 않고 억지로 가지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보기 싫은 것을 보게 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감정을 쏟았다.
그랬다.
족쇄와 철퇴 같았던 욕망 속에서 방치된 소년이 사랑을 알기란 어려웠다. 그를 구성하는 태초의 기억에 악의가 스며 있기 때문이었다.
아실리에게 약을 건네고 돌아오는 오솔길. 코끝에 풀 내음이 스쳤다.
‘곧, 봄인가…….’
아직은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하지만 꽃 피는 계절이 오는 것에 대해선 그에게 속삭이는 식물 소리 때문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아모르는 나뭇가지 끝에 달린 겨울눈에서 눈을 떼어 내며 창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 * *
이것은, 그를 구성하는 태초의 기억이다.
“오늘도 먹지 않니?”
감았다 뜨면 작은 소년과 그 앞으로 훌쩍 키가 큰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있었다.
“네가 줄곧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녀들에게 들었단다.”
“…….”
카스토르는 수저를 놓고 턱을 괸 채 심드렁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릇을 던져서 하녀가 다쳤다지. 네 손은 다치지 않았니?”
어린 날의 그와 형이었다.
“아모르, 날 보렴.”
작은 아모르는 텅 비어 있었다. 눈부시도록 따뜻했던 추억은 상실 뒤에 가시가 되었다.
이때 그는 죽어 간 이들을 떠올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이미 그를 구성했던 다정한 세상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남김없이 격랑에 휩쓸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아모르는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차갑게 식어서 다시는 뜨지 않는 눈과 움직이지 않는 손을 보며 영영 보지 못하는 이별을 죽음이라고 체득한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하늘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바라봤다. 온도 없는 시선 속에는 다분한 권태가 묻어 나왔다.
‘흐음. 어쩔까.’
둘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서로 다른 색을 가진 형제의 차이는 비단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뿐만은 아닐 것이다.
“있잖아. 힘이 불안정할 시기에 잘 먹어 두는 게 좋아. 넌 막 각성했잖니?”
“각……, 성?”
흐린 회녹색 눈이 굴러 카스토르의 얼굴을 향했다.
“그래. 신관은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긴 한데, 그건 네 생명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짓이란다.”
“…….”
“넌 가뜩이나 병을 앓고 독에 중독되었잖니?”
그렇게 말하는 카스토르는 아모르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카스토르의 흰 얼굴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아모르.”
사람들은 그의 형을 피의 황태자라 불렀다. 고작해야 그와 다섯 살 차이 나는 소년은 이미 이전부터 다른 이름보다 앞서 그렇게 불리었다.
“앞으로 네 삶은 고통스러울 거야.”
하루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녀 하나를 죽이고서.
“넌 절대 고통을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을 거고.”
“…….”
“너는 나와 형제야. 아모르.”
형제. 형제라고 했다. 그의 궁에 있던 사람들을 죽이라 한 소년이 형제라고.
아모르는 잠깐 울컥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밭은 숨을 들이쉬다가, 곧 숨소리를 토해 냈다.
“흐, 어머니…….”
울음 섞인 엷은 소리였다.
“흐, 흐흑…….”
카스토르는 어느새 눈물이 번져 나무 밑 이끼처럼 번진 흐린 녹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툭, 아모르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죽고 싶으니?”
울다 말고 아모르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날의 밤. 피 웅덩이를 밟고 자신에게 속삭였던 카스토르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물기 어린, 지독한 두려움과 서툰 분노를 담은 시선에 카스토르가 선선히 미소했다.
“죽기를 바란다면 그리하렴.”
그때와 같이 나긋나긋하고도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는 죽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카스토르는 당장 아모르가 고개를 끄덕이면 해 줄 생각이었다.
“때로 사는 것이 지옥이며 선택한 죽음이 축복일 때가 있거든. 억지로 사는 것만큼 비극이 또 어디 있을까?”
신력은 신관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커다란 것이다. 이 때문에 뛰어난 신관은 타인에게 신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는데, 보통은 이 형태를 ‘신관의 축복’이라 불렀다. 아모르는 지금 이 충만한 성력이 카스토르의 것임을 알았다.
“노려볼 힘이 남아 있다는 건……. 감정이 죽지 않았다는 얘기구나.”
신력이 지독한 허기를 물러나게 하고 흥건히 적셨다. 그렇게 굶었던 소년의 몸은 스펀지처럼 신력을 흡수했다.
제 머리칼을 툭툭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스토르가 식은 게 분명한 그릇의 뚜껑을 덮었다.
“그건 나쁘지 않아.”
그는 고개를 들어 빙그레 미소했다.
“받으렴.”
그리고 그가 꺼낸 것은 작은 주머니였다. 아모르가 삼킨 독의 해독제였다.
“언젠가 죽기를 각오하면 내게 말해. 나는 너를 꽤 좋아한단다.”
팔랑팔랑. 카스토르는 편안한 튜닉 차림이다. 잔뜩 헝클어지고 단추도 채 잠겨 있지 않은 채였다.
“자, 잠깐.”
아모르는 사라지려 하는 카스토르의 소매 끝을 잡았다. 그러고는 따지듯이, 그러나 애원하듯이 물었다.
“왜 나를 살, 살려 두는데? 왜 자꾸 살려 줘?”
아모르는 두려우면서, 동시에 흐느껴 울었다.
“나도, 어머니처럼, 흐끅, 로벤테누스 경처럼 죽일 거잖아.”
“그래. 살고 싶구나.”
“아니야. 아니야……! 왜, 왜 나만……!”
아모르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나도 죽을 거라고. 자신을 빼고 모든 사람이 죽었다. 자신만 살아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너만 살았느냐고? 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냐, 아모르.”
“…….”
“너와 나. 누구도 태어나길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잖니.”
카스토르는 죽고 싶으면서 살고 싶은 아모르의 심정을 알아챘다.
“우리가 원해서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듯. 앞으로도 네 앞에는 수많은 부조리가 나타나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아모르는 살고 싶었다. 끝내 살아서 희미한 꽃향기를 오래 맡고 싶고 오래도록 계절을 보고 싶었다. 이런 자신이 나쁜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리하렴. 살고 싶으면 사는 거야.”
카스토르는 소매를 잡은 작고 여린 손에게 미소와 함께 대꾸했다.
“나는 작고 여린 것을 아낀단다.”
카스토르는 아모르가 원한다면 정말 죽게 해 줄 생각이었다. 아모르를 죽였다간 황제가 가만있지 않겠지만 뭐 어떠랴. 파들파들 떠는 제 동생의 어깨를 바라보면서 카스토르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를 거역하지 않으면, 내 너를 버리지 않을게.”
아모르에게 있어 잊지 못할 낙인과 같은 기억이었다.
* * *
이미 카스토르라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받은 아모르가 처음과 같이 다정한 소년이 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크으윽……!>
살아가는 대가로 얻은 고통은 어린 몸을 좀먹고, 새벽 내내 몸부림치다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눈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파묻으며 모든 것을 원망했다. 삼키지 못한 분노와 너덜너덜해지는 몸을 가지고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그럼에도 왜 난 죽고 싶지 않은 걸까. 원망하면서.
그래서 아실리가 처음 원망을 쏟아 냈을 때 그는 그녀를 이해했다.
“오라버니는 나를 탓하지 말아요.”
숙여지는 머리를 따라 밀이 빼곡한 들녘의 색을 품은 금발이 사르르 떨어졌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었다.
아모르는 잠깐 내밀던 손을 멈췄고, 시선은 허공을 헤맸다.
‘어딜…… 잡아야 할지 모르겠어.’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체구의, 떨고 있는 어깨는 너무 가녀려서. 잡으면 파스스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잖아요?”
쉬이 잡지 못한 채 흐른 침묵 뒤를 끊어질 듯이 가는 목소리가 이었다.
“오라버니는 눈앞으로 다가온 빛을 포기할 수 있어요? 아른거리는데? 결국 오라버니도 매일 독을 먹으면서 악착같이 살잖아!”
언제나처럼 담담하던 목소리가 아닌 마구 떨리며 흔들리는 목소리가, 소년 또한 마구 뒤흔들었다.
“봐요. 나 좀 봐. 오라버니. 이 손 보여요?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소녀는 늘 모든 것에 초연한 것처럼 굴었다. 늘 대수롭지 않게 지껄이는 낯이 실제로도 그녀가 그럴 것이라 믿게 했다.
<전 괜찮아요.>
아모르는 소녀가 세뇌하듯 피워 내는 미소를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밥 먹듯 재깔이는 그 괜찮다는 말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 꼭 울 것처럼 눈을 가려 버린 손을 깨달았다.
“손에 쥔 건 겨우 한 줌인데, 그 한 줌조차 지킬 힘이 없어…….”
충격이 마구 그를 헤집어 놓았다. 아릿하고 울컥하는 감정이 그를 파고들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너무 멍청해서 할 말을 잃게 하는 군.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네 이유는 전혀 정당하지 않아. 순 엉터리다. 그까짓 시녀 마음이 뭐라고 몸을 다쳐!”
왈칵 터트리듯 소리를 높였다. 지금 폭발할 듯 터지는 감정을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었다. 가진 게 몸밖에 없다는 그 말에 왜 이다지도 화가 나는지 그는 몰랐다.
지금까지 인내하고 참고 또 참아 내는 계절과 시간 속에 있었다.
그래서 토해 낼 줄도 폭발할 줄도 모르고 저를 꽁꽁 숨기고 포장하는 법만 알았다.
‘왜, 왜 네 편이 없어? 왜!’
오랜 시간 참아 온 소년은 그래서 몰아붙이기만 했다.
‘내가 있는데!’
마구 끓는 감정에 휘둘려 어쩔 줄 몰랐다. 겨우 시녀란 계집의 마음 하나 얻고자 제 몸을 다치고도 아픈 줄 모르는 소녀가 미웠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소녀가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보다 더욱더 싫었고 끔찍하게 싫었다.
“대답해.”
소녀의 뺨과 코.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마주하며, 짓씹듯 토해 냈다.
“내가 마음 전부 주면. 다신, 계집애 하나 구하겠다고 뛰어들지 않을 거냐고.”
대답해. 왜? 널 보는 나는 갈증이 나고 마는 거냐고. 지금 끓는 이것은, 그가 아는 저속한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왜 그는 가슴이 아픈가?
무엇이든 해 주고 싶다. 기뻐 웃는 모습을 보고 싶고, 네가 어쩔 줄 몰라 할 정도로 행복해져서 더는 울지도 못하는 눈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왈칵 겁이 났다. 뜨거워진 머리로 생각하고 묻고 표현을 찾고 다시 고민했다.
세상에 어여쁜 것을 전부 따다 네 앞에 두어도 모자랄 것 같은 이 기분은.
눈감으면 떠오르고 마는 네 얼굴은.
답을 알고 있잖아?
‘그렇지 않아.’
거짓말.
아모르, 세상은 이를 무엇이라 부르지?
* * *
소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끔씩 담담하고 모든 것에 대수롭지 않던 얼굴이 안타까운 연민에 물들 때가 있었다.
“내 주변엔 안타까운 것이 너무 많아요.”
모를 수가 없는 빈도로 스쳐 가니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나 말인가?”
“꼭 오라버니만을 얘기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포함되기는 하죠.”
다른 누군가 그를 연민하면 당장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가만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에겐 그런 마음이 도통 들지 않는 것 역시. 턱을 괸 아모르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스르륵 기울였다.
“그럼 연민과 동정 대신 다른 걸 주지 그래.”
그의 손 대신 움직인 넝쿨이 소녀를 자신과 가까운 곳으로 이끌었다.
“제가 오라버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데요?”
소녀는 단정한 낯으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글쎄.”
문득, 생각했다.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다면, 답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름.’
아모르는 보일 듯 말듯 웃다가 바짝 마른 입술을 뗐다.
“이름을 불러 봐.”
“…….”
“아모르― 하고.”
소녀는 난처하게 웃었다. 끝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소녀는, 가슴 아프도록 말갛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내 그녀는 얼굴을 굳히며 담담하게 거절했다. 굳이 고집 세울 일이 아님에도.
그건 꽤 색다른 변화였다. 지금까지 제게 동정하듯 약하게 굴던 소녀가 처음으로 단호하게 그걸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를 관철시키면 무언가 달라지며, 오랫동안 헤매고 찾아왔던 것에 답이 될지도 모른다.
“불러, 줘.”
“……안 돼요.”
왜일까. 작지만 단호하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하게 들려서, 아모르는 조금 더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름이라.’
이때까지 아모르에게 큰 뜻을 가지지 못했다. 이제는 희미해진 모친이 불렀던 이름이었다.
너무 한순간에 겪어 꿈만 같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빨리 죽어 버린 어머니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늘 꿈에 등장했다. 그래서 한때는 복수를 꿈꾸기도 했다. 어머니를 죽인 남자, 유스난 폰 디볼로를 향해서. 그러나 날이 갈수록 칼날은 무뎌졌다.
<짐승의 신관이 전부 죽었다고?>
<네. 제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황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