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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실된 기억 (17/47)

10. 상실된 기억

돌 조각에 긁힌 몸은 팔이고 다리고 쳐다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더구나 피를 많이 흘렸다. 흘리다 못해 철철 넘치도록 뚝뚝 뿌리고서 그 몸으로 뛰기까지 했다. 그 몸을 하고서 궁전으로 돌아갔으니 오라비를 포함해 다들 발칵 뒤집혔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돌아온 날 빈혈로 졸도나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빨리 이 못난이를 치료해! 어서!>

그러나 플뢰온이 갖은 지랄을 하며 치료 신관을 데려온 덕분에 빨리 편해질 수 있었다. 끌려온 치료 신관은 ‘또 이렇게 다치셨단 말입니까’ 라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손 내려도 돼?”

무튼 일찍 치료해서 걱정을 던 것은 좋단 말이야.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느냔 말이지.

“시끄러워.”

애처로운 표정을 담고 플뢰온을 바라봤다.

“오빠,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내 체면과 나이를 고려해 줬으면 해.”

“시끄러워. 이래야 쪽팔려서라도 다신 안 하겠지. 응? 못난아.”

안 통한다. 그래서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고양이 흉내를 내 봤는데 왜인지 홱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건 오라버니가 그 좋아하는 체통과도 먼 일이라고.”

“젠장, 네 체통이지. 내 거냐?”

아무래도 그는 화가 나도 아주 단단히 난 듯했다. 그의 마음은 이해했다. 성치 않은 사람을 상대로 쥐어박을 수도 없고, 잔소리하자면 요리조리 피해 버리니 그로선 도리가 없었겠지.

“넌, 진짜, 아무리 죽는다지만……. 사람이 그러면 안 돼. 알아?”

“미안해.”

“젠장, 사과 말고 행동으로 좀 보여. 멍청아.”

그나마 데인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랄까.

“데인은 어디 갔어?”

“업무차 궁을 비웠다던데. 맡고 있던 곳에 굉장히 큰 일이 벌어졌다나. 무척 바빠졌다고.”

다행이었다.

결국 그는 팔이 아픈 척 낑낑대는 내 모습에 못 이겨 팔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분이 풀리지 않는지 제 머리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경험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분명 전과 같았으면 길길이 날뛰는 걸로 모자라 사흘 밤낮을 들들 볶았을 이들이 전과 같이 굴지 않는 이유엔 내 ‘비밀’이 한몫하는 듯하다. 죽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갔다는 말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한풀 꺾였으니까.

이걸 핑계거리 삼고 싶진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이해해 주려 애쓰는 행동에서 작은 감동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밖으로 꼭 나가야 해? 내가 전부 다 해 준다고 했잖아. 나 못 믿어?”

“아니 무슨 권태기 남자가 할 말을……. 음,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뭔데?”

“오빠, 난 지금껏 이 정도 하지 않고서는 내 죽음을 피할 수 없단 걸 알았어.”

레이 경과 플뢰온을 번갈아 보며 확신하듯 덧붙였다.

“그렇잖아. 죽음을 피하려면, 이 정도의 위험을 거쳐야 해.”

루스벨라와 카스토르가 만나는 장소를 찾은 건 앞으로 있을 죽음과 관련 있는 문제였다.

“나는 알았어. 이렇게까지 해야 피할 수 있는 걸.”

이 때문에 나는 반드시 그곳에 다녀와야 했다. 홀로 가서 문제가 됐을 뿐이지 어떻게든 가야 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상처 말인데, 이미 여태까지 죽음을 피하면서 무수하게 다쳤다. 작은 걸 두려워하면 더 큰 공포를 이겨 낼 수 없다. 죽음은 그런 문제였다.

“쉬울 리가 없다. 이거야?”

“요약하자면. 그런 얼굴 하지 말아.”

“시끄러워.”

최대한 그가 씁쓸하지 않게끔 담담하게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더욱 일그러지는 낯에 곤란한 기분이 되었다.

“젠장, 젠장……. 유피테르는 왜 네게만!”

글쎄. 그러게. 나도 궁금하다. 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난 괜찮아. 플뢰온. 어렵겠지만 날 이해해 줘. 궁 밖에 나간 걸로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 어쩔 수 없었으니까.”

웃음은 해결은 주지 않지만 위안은 주니까.

“빌어먹을. 쥐뿔도 반성 안 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 안 해? 이런 건 데인 그놈이 잘 조잘거리는데 하필 없어서……! 두고 보자. 울타리를 짓든가 해서라도 감금해야지.”

“애꿎은 데 돈 낭비할 생각 하지 말고 그 돈 네 궁 사람들 위해서 써라. 응? 가뜩이나 너 모시는 것도 고달픈데 복지라도 좋아야지.”

진지한 분위기는 무겁고 힘겹다.

“또 때리기만 해 봐. 나, 환자야.”

이번에야말로 레이 경이 제지했다. 아직 붕대 때문에 거동이 힘들어 그대로 레이 경 팔에 기대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황녀님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면 머리카락 사이로 무뚝뚝한 남색 눈동자와 시선이 스친다.

“확실히. 울타리를 만들어도 기어 나가실 분이죠. 제멋대로시니.”

이미 금지된 숲이라는 나의 통로를 알고 있는 바, 레이 경 말에는 뼈가 있었다.

‘지금 돌려 깐 거지?’

설마 내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고. 레이 경을 노려봤지만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한 번만 더 오늘처럼 다쳐 와 봐. 그땐 정말 이 궁 밖에다 벽을 지어 버릴 테니까.”

결국 저녁이 훌쩍 지나서야 플뢰온을 궁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는 돌아가면서도 협박 섞인 진심을 잊지 않았다.

“정말 꼬였다니까.”

나가지 말라는 말은 않았다. 그에게도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 덜컥 두려움으로 다가온 걸까?

어느새 하늘은 새까만 밤이었다. 일기장을 펼쳐 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곳은 정말 책 속 세계였어.’

시계탑의 ‘장치’는 책 속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했다. 그런데, 그렇지만. 이곳엔 책 속 내용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모르가 다정하고 상냥한 왕자님이 아니었을 때부터 엉키기 시작했던 실타래가 레베카에서 눈덩이처럼 크기를 불리고, 마침내 헤르난에게서 정점을 찍었다.

나는 왜 이곳에 태어난 걸까?

내 삶. 황녀 아실리 로제의 삶이 세계의 주인공 삶보다 가치 없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창조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난 그렇다고 믿는다.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 하는데, 저것이 방해된단 이야기지.>

카스토르는 힘을 써서 나를 잊게 하려 했다. 무엇 때문에? 그가 잊게 했던 기억은 내게 중요하면서도 또 그렇지 않기도 했다.

“헤르난이 나를 살리려 했다는 것…….”

충격적이지만 냉정히 말해서 현 상황을 변하게 하는 요소는 아니다. 40번 전부도 아니고 고작 몇 번 만나 나를 살리려 했던 건 지난 외로움을 가시게 해 주었으나 이 사실로 타격을 입거나 변하진 않았다. 그런데 왜?

“……넌 아니?”

일기장은 고요하다.

“묻지도 않은 건 척척 대답하더니, 이럴 땐 무척 조용하네. 치사하게.”

헤르난과 카스토르. 내게 새로운 문제가 주어졌다.

그나마 멀쩡한 손으로 책등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본 것도 같은데, 멍청한 내 머리로는 무수한 조각들 사이에서 아직 그림을 맞출 자신이 없다.

“아아……. 골 아프네.”

발코니에 푹 엎어지는데 사각사각, 밑에서 수풀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 소리가 들렸다.

“안 주무십니까?”

원한다면 그림자처럼 기척을 지워 낼 수 있는 사람이니 지금 소리는 일부러 낸 것이 분명했다.

“바람이 찹니다.”

고개를 들자, 발코니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는 레이 경이 있었다.

“잠이 오질 않네. 경은 왜 안 자.”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레이 경은 꼭 미니어처 같았다. 늘 나보다 큰 사람이었는데 내려다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턱을 괸 채로 낮게 미소했다.

“당신의 밤을 지키는 게 제 일입니다.”

달빛의 경계선으로 레이 경이 걸어왔다. 2층 발코니를 사이에 두고 비스듬한 수직선으로 마주한 경을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이던가. 여러 번 리메이크되었는데 무지무지 예쁜 배우가 나오던 판이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딱 지금과 같았다.

“경은 책을 좋아하나?”

운명을 기다리던 소녀 앞에 거짓말처럼 잘생긴 청년이 등장해 첫눈에 반했다며 발코니를 사이에 두고 수작을 부리는 장면. 애석하게도 수작을 부리기엔 너무 무뚝뚝한 기사님이 앞에 있었다. 나는 턱을 괸 그대로 입을 말아 올렸다.

“주인공 해 볼 생각 있어? 로미오라거나.”

“로미오가 누굽니까.”

나무 그림자가 그의 표정을 일부분 감춰 버렸다. 다만 그의 머리카락 일부는 초저녁과 밤 사이 하늘의 색처럼 은은하게 빛을 반사했다.

“내 남자 주인공.”

“……연모하는 분이라도 생겼습니까?”

“책 속 주인공인데.”

말해 놓고 보니 상당히 웃겼다. 지금 책 속 인물에게 책 속 인물을 언급한 거지? 이곳에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책임에도 그저 웃겨서 키득거리며 한참 웃었다. 어둠 속에서 레이 경이 살짝 찌푸린 것 같기도 했다.

“뭐. 난 주연은 별로더라.”

하지만 부른들 레이 경은 주인공이 될 수 없고, 또한 나도 어여쁜 여자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있잖아. 경은 내게 숨기는 모습 없어?”

헤르난처럼 말이다. 원체 충격적이라 잊히지 않는다. 만약 레이 경에게 그처럼 저 모습에 반대되는 모습이 숨어 있다면? 나름 큰 충격일 것 같다.

“그냥 던진 말이니까 너무 고민하진 말고. 그냥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고.”

“숨기지 않는 게 좋은 남자 기준입니까?”

“거창하게 남자까지? 뭐, 그래. 솔직한 사람이 좋겠다.”

난 곰곰이 생각해 보다 말했다.

“숨기는 것이 많은 거보단 그쪽이 좋아.”

이미 내가 가진 비밀이 너무 많아서 상대의 것까지 함께할 여력이 없을 테니까. 의심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좋겠다 싶었다.

“당신께선 솔직하지 않으시면서 상대에겐 그러길 바라시는군요.”

“약았다고?”

“네.”

그의 거침없는 솔직함에 뜨끔했다. 생각해 보면 약긴 약았지.

“정말 경은 너무 솔직한 사람이라니까. 어쩔 수 없지. 틀린 말은 아니니까.”

속을 들켰다는 멋쩍음에 뺨을 슬슬 긁적였다.

“좋아.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말해야겠네. 조금 이따가 나 어딜 좀 다녀오려 하거든. 금지된 숲에.”

“……안 된다고 해도 다녀오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만.”

“잘 아네?”

그러자 시선이 아플 정도로 쿡쿡 나를 찔러 왔다. 이틀 전 그 난리통을 겪고도 잘도 그러는구나 하는 듯한 시선.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괜찮아.”

“……확실히 황녀님은 실종자가 대거 발생하는 숲을 아무렇지 않게 다녀오셨죠.”

“맞아. 금지된 숲은 위험하진 않아. 뭐 그것도 열에 한 번쯤은 돌발 상황이 있기 마련인데……. 이게 가끔은 나를 지켜 주거든.”

난 일기장을 톡톡 건드리며 레이 경이 잘 보게끔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가끔은.”

대체로 안전했지만 가끔 뒤통수를 얻어맞는 일이 있곤 했다. 카스토르를 만난다거나.

“가끔이 아닐 때는 위험하다는 거군요.”

난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위험은 대부분 금지된 숲 근처에서 일어나지. 파수꾼 알지?”

“네.”

“‘가끔’이 아닐 때 경이 나를 지켜 주면 좋고. 어차피 이젠 금지된 숲이 아닌 모든 곳에서 날 쫓을 거잖아? 거기다…….”

말을 멈췄다가 차분하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이어 말했다.

“지금처럼 꾸밈없이 날 봐 주면 더욱 좋고 말이야.”

“언제고 진심이 아닌 적 없었습니다만.”

한 걸음 다가온 그가 달빛의 경계로 완전히 들어왔다.

“앞으로도 그러겠지요.”

담담한 얼굴에서 체념이 느껴졌다.

“어찌 당신을 이기겠습니까. 당신이 변하면 변한 대로,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 대로.”

“않는 대로?”

“지킬 뿐이죠. 그러니 절 이렇게 만드신 걸 책임지십시오.”

청색 빛이 짙게 감도는 눈동자에는 은은한 달이 떠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경을……?”

“네.”

빙글 눈을 굴려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대꾸했다.

“음…… 그거 참……, 여러 의미로 들리는데.”

어떻게 해석하든 당신의 자유라는 양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눈동자 속에 뜬 달에서 눈을 떼어 하늘의 진짜 달을 향했다. 독야청청 뜬 달은 새까만 바다 위에 홀로 표류하는 하얀 배였다. 새까만 물결 위로 오직 홀로 외롭게 존재하는 것. 오늘은 먹구름이 집어삼킬 듯이 다가온다. 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 순간 보고 싶고, 궁금하고, 걱정되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아모르. 달을 닮은 사람.

* * *

공간을 웅장하게 차지한 비석을 통해 빈 공터로 내려섰다. 잠시 뒤 작은 수풀을 헤치고 나는 아모르의 궁에 도착했다.

‘또. 잠겼어.’

그가 날 위해 늘 열어 두곤 했던 문은 오늘도 잠긴 채 나를 맞이했다. 문을 묶은 담쟁이 넝쿨이 오늘따라 쇠사슬 같다.

“오라버니.”

문을 두드렸다. 직접 잡아당기고 싶지만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식물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쩐지 이럴 것 같긴 했지만.”

오늘은 단단히 각오했다.

“오라버니.”

두 번째로 그를 불렀다.

“듣고 있죠? 듣고 있잖아요.”

무시하고 있지만 분명 듣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외면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라버니.”

세 번째, 목소리에 물결이 치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담았다.

“오라버니…… 제발.”

그리고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떨구는 순간 손목을 휘감은 넝쿨이 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넝쿨은 의지를 갖추고 바닥을 그었다. 아모르의 의지이자 그의 답이었다.

―돌아가.

대답은 간결했다.

“이…… 이 오라버니가 정말……!”

서러움이 복받친다. 걱정 또한 함께 밀려온다. 왜 날 거절하는데? 왜 피하냐고.

“엣취!”

불현듯 한기가 들었다.

“오라버니……. 나 춥단 말이에요.”

공기가 차갑고 바람이 부는 데다, 어둡고 조금도 빛이 닿지 않았다. 늪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멍했다. 종일 시달렸다. 피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란 말이야. 심통이 난 속과 달리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럼에도 잎사귀만이 바람에 사각사각 소리 내어 대꾸할 뿐이었다.

“정말 이럴 거야?”

어느새 내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지다가, 나조차도 겨우 들릴 웅얼거리는 소리처럼 작아졌다.

문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을 때 숄이 무언가에 걸려 부욱 긁히고 찢어졌다. 한데 피곤하고 지친 상태라 아무렴 어떠나 싶었다.

“오라버니, 나오지 말아요.”

그래, 댁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고. 오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마음대로 해. ……난 오라버니가 만나 줄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거니까.”

바람이 불며 매달린 넝쿨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파도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잠깐 숨을 들이켰다가 목소리와 함께 내쉬었다.

“나 알죠? 나 한번 하고자 마음먹은 건 꼭 하는 거. 내 고집 알 거야. 우리의 첫 만남을 잊지 않았을 테니까.”

세운 무릎에 턱을 얹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나 어두운 거 싫어하는데…….”

웅크려서인지 그나마 어둠 속에서 덜 추웠다. 왜일까 은은한 향기가 난다.

“그래, 끝까지 나오지 말아 봐. 감기 걸려서 된통 고생하는 사람은 나지, 오라버니가 아니니까. 에취!”

다른 손으로 눈 위를 덮었다. 차가워진 손끝에서 여물지 않은 계절의 향이 눈가에 얹혔다.

몸이 좀 무거운 것 같기도 하다. 바람이 등골을 싸늘하게 훑고 간다. 몸이 파르르 떨었다. 꽤 적적하니 노래라도 불러 볼까. 하지만, 아냐. 깜빡깜빡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시선으로 넝쿨이 살아 있는 듯 움직인 것 같았다.

아모르.

고개를 들자 넝쿨이 물러나는 게 보였다. 천천히 넝쿨을 잡고 일어나면, 마침내 부드럽게 열린 문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꽁꽁 언 몸으로 뛰다시피 걸어 그의 방에 도착했다.

“뭘 그렇게 노려봐. 인사도 안 하나?”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무릎에 턱을 괴고 있던 그는 문이 열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과 함께 삐딱하게 턱짓했다.

“이리 와.”

“갈 거예요.”

뒤에서 문이 스르륵 저절로 닫히며 조금 소름 돋는 소리를 남겼다.

“그런데 여기…… 왜 이렇게 춥죠?”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밖이나 방이나 온도 차가 없었다. 활짝 열린 발코니의 문을 바라본다.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감기 걸려요.”

흘끗, 아모르는 날 보더니 빤히 응시했다.

“네가 할 말은 아닌데.”

그가 성의 없이 툭 뱉었다. 엣취. 이어진 내 재채기에 위에서 아래로 훑는 시선이 노골적인 빛을 띠었다.

“그러니까 더 빨리 열어 주지 그랬어요.”

“분명히 돌아가라고 말했는데, 억지로 고집부린 사람이 누구였지?”

맞다. 그는 내 고집에 못 이겨 열어 주고 만 거나 다름없다.

“여태까지 날 안 봐 줬잖아요.”

그렇지만 나도 가끔은 울분을 털어놓고 싶다.

“매일 봐야 하는 건 아니잖나.”

“왜 그리 야박하게 말해요?”

이래저래 많은 일을 겪었고 몸은 무겁고 피곤했다. 숨길 수 있지만 아모르는 속일 대상이 아니었다.

“오라버니.”

기분 탓이 아니라면 아모르는 평소보다 더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 경계는 전염되었다. 나는 처음처럼 날이 바짝 선, 성마른 낯을 바라보면서 움직일 줄 몰랐다.

“왜 그렇게 나를 봐요?”

억지로 다가가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어쩐지 섣불리 다가가면 그가 나를 내칠 것처럼 느껴졌다. 치마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디 아파요?”

아모르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물을 가치가 없는 질문이로군. 답을 알고 있잖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평소보다 더 아픈 것 같단…….”

“착각이야.”

아모르가 단호하게 끊어 냈다.

“왔으면 용건을 말해.”

비약이 지나친 걸지도 모른다. 그가 굳이 내게 이럴 이유를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화나게 했다면 그는 이런 노골적인 무시가 아니라 나를 끊어 낼 사람이었다.

“오라버니.”

“잠깐, 거기서 말해.”

“아니야. 피곤하더라도 얼굴 보고 들어요. 할 말이 많으니까.”

“다…… 오지 마!”

아모르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아모르가 나의 방문을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받아 주던 사람이었다.

난 그를 알고, 그는 나를 안다.

난 단숨에 그 앞에 섰고, 그는 날 막지 않았다. 이 방 안에서 가장 어두운 곳은 침대였다. 달빛을 등진 그를 바라봤다.

“……거짓말쟁이.”

오래지 않아 눈은 어둠에 익었다.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 억지로 얼굴을 가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 들켜 버렸다.

“날 봐요.”

그는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나를 바라봤다. 울긋불긋 엉망이 된 얼굴. 그의 손을 잡아 힘을 주어서 꽉 잡았다. 손은 뜨거웠다. 불덩어리를 잡은 건지 모르겠다.

그가 들숨을 들이켤 때면 나의 날숨이 흘러나왔다. 깜깜하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우리의 호흡 소리는 불협화음을 이뤘다.

“아…….”

거친 숨결. 만지지 않아도 미지근한 열이 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서 전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그가 창문을 열어 둔 것도, 나를 가까이 오지 않게 한 것도.

오래전 책 속 구절이 거짓말처럼 내게로 흘러들었다.

「병약하고 다정한 황자님은 극심히 앓았다.」

루스벨라에게 선물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주는 데 힘을 소진한 미련한 황자님은 그 대가로 크게 앓아누웠다.

<이게 꼭 필요할 거야.>

책 속의 그가 지독히 앓았던가? 그랬다. 그때 며칠이고 앓다가 더 쇠약해졌던가. 그래, 그는 내게 약을 주었다.

“……나, 나 때문이죠?”

“착각도 지나치면 병이라더니.”

나를 변화시켰던 약. 위기를 넘기게 했던 약. 그 약을 내게 주었기 때문에 그가 지금 아프다.

“……아니야.”

마침내 드러난 붉은 기 가득한 얼굴이 선선히 웃었다.

“아니니까. 그 얼굴 집어치워.”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스스로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어째서? 왜!

나는 다급히 바닥의 러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금부터 진실만 말하기로 약속해요.”

“너. 이거 놔.”

“속일 생각 말아요. 내게 준 약을 만들어서 아픈 거죠? 말해요. 그런 거잖아.”

“…….”

그가 열에 들뜬 숨을 토해 내는 순간 내 숨도 끊어졌다. 자책이 몰려왔다.

“정말……. 나 때문이구나.”

파르르, 싸늘한 공기에 몸을 떨자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고갯짓했다. 커튼이 고요하게 제자리로 내려왔다. 쾅.

그는 닫힌 발코니를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 얘긴 됐어. 네 얘길 해 봐.”

“싫어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해.”

그는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천천히 침대 머리에 기대며 고개를 기울인다.

“무어라 더 하면 쫓아내겠어.”

그는 별수 없이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치사해요.”

할 말이 많다. 그러나 당장 그가 아픈 걸 빼놓고서 할 말이라곤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아모르는 내가 황궁 밖으로 나간다는 말을 듣고 나서 약을 건넨 거였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내 얼굴을 알지도 모르는 사람. 어쩌면, 헤르난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실 약의 효능은 별 게 아니다. 대단한 힘을 쏟았다고 보기엔 부족하다. 그런데 이걸 위험할 때 쓰라고 했다.

내가 내 모습 그대로 헤르난과 밖에서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았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헤르난의 또 다른 모습을 알고 있었다고? 그걸 걱정했고?

“밖에서 공작을 만났어요. 밖은 축제 준비에 한창이었는데, 생각지 못했던 헤르난이 있었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난 그가 있는 곳에 납치됐어요. 오라버니 그 사람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든 얼굴이었어요…….”

“이해하기 힘든 얼굴?”

끄덕였다.

“궁 안에서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요. ……뭐랄까, 사람이 변한 느낌. 얼굴만 같고 알맹이는 다른 사람이요.”

나는 천천히 흐린 미소를 지었다.

“내 주변의 비밀을 알수록 암흑 속에 빠지는 것 같아요.”

성녀란 사람을 만났고, 끝내 헤르난이 정체를 알아 버렸다.

‘나도 알아 버렸지.’

그가 나를 구하려 했다는 사실은 나를 불행하게 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비밀을 알고 싶은데. 비밀을 알수록 무서워요.”

“왜?”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요.”

그는 나를 죽이지도 않았지만 살리지도 못했다. 이제 와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유감스럽고 곤란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하나둘씩 알수록……. 모른 척하고 싶어져요.”

수많은 혼란과 충격 속에서 난 그를 미워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용서하지도 못했다. 결국 어중간한 회색에 올려놓고 모른 척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럼 그렇게 해.”

이제는 아모르가 왜 약을 주었는지, 어떻게 나와 헤르난이 만날 줄 알고 주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았다.

전부 아는 게 좋지만은 않다. 미래를 알고, 죽음을 알고, 나아가 나라의 멸망조차 알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아주 적었다.

“왜 난 여기 있는 걸까요.”

나는 늘 궁금하다. 이토록 많은 걸 짊어졌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불행하기만 한 건지.

“오라버니.”

감당하지 못할 것들을 안게 된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넘어지면 다신 일어나지 못할까 봐 무섭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얘기도 참 많았는데 지금 오라버니 얼굴은 이 말이 쏙 들어갈 정도로 너무 아파 보여요.”

“아무렇지 않아. 앉아.”

누가 봐도 나 심각할 정도로 아파요 하는 얼굴을 하고서 성마른 낯으로 고집을 피우는 그에게서 나를 본다.

데인과 플뢰온, 그리고 레이 경이 날 바라볼 때 이런 기분일까?

“그런 얼굴은 아무리 잘생겨도 설득력 없다고요.”

“앉아.”

“아니, 쉬어요.”

당신은 볼수록 나와 정말 닮았다. 생각하는 것도, 메마른 성격도, 그럼에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고집부리지 말고요. 네?”

“…….”

언제나 의연하고 이기적인 사람이고 싶었다. 내 불운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주변의 작은 희생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정도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 불행이 가엾고 힘들고 지겨울 정도로 아픈데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고 만다. 이 순간 힘겨워 보이는 아모르에게 그냥 돌아가겠다 말을 던지고야 마는 것처럼.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아모르가 내 손을 꽉 잡아 왔다.

“네 할 말만 늘어놓고 가지 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어둠 속에서 손은 꽉 죄여 오고, 나는 아모르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라버니 얼굴은…….”

“시끄러워.”

그의 고개가 푹 숙여지며, 동그란 정수리가 고스란히 보였다. 열에 달뜬 그는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

“오라버니…….”

어두웠지만 나는 그의 이마를 찾아 조심스럽게 짚었다.

“조금 더…….”

기분 좋은 걸까. 그가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 쪽으로 내리더니 그대로 감았다.

“걱정했다.”

“…….”

“걱정했다고. 널.”

우리는 걱정에 서툴렀다. 나는 표현을 잊었고 아모르는 낯설어했다. 지금 그의 목소리에서 그런 서툰 감정이 느껴졌다.

“네가 밖으로 나가면 널 보호하기 힘들어져.”

모든 식물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그이지만 범위는 궁 안으로 한정 짓는다고 했다.

그건 한 번에 수백 개의 수화기를 들고 듣는 일과 같다. 오래 지속하면 피곤하다고. 더욱이 이 능력에 들어가는 신력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배가 된다. 가뜩이나 약한 몸에 부담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는 그였다.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어요.”

“무리를 생각할 상황이었나.”

아모르가 퉁명스럽게 뱉었다.

“내가 준 팔찌는 엉뚱한 소리만 들려오지.”

“음, 미안해요. 그거 잃어버렸어요…….”

납치범들을 피해 도망가던 중에 사라졌지……. 화를 낼 것 같던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것 같았다.”

웬일인지. 아파서일까, 아모르가 너그러워진 것 같다.

“헤르난데즈는 짐승의 신관이야. 얼굴을 가리는 정도로는 피할 수 없었어.”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역시 오라버니는 내가 그 사람과 마주칠 줄 알았던 거군요.”

“그래. 그는 황성 밖으로 자주 나가는 편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까칠했으나 차분했다.

“네가 본 그대로 밖에서의 그는 아주 위험하지. 넌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엮이려고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오산이었다. 그의 모습을 봤겠지?”

확실히 그는 궁 안에서와 너무나 달랐다.

“짐승의 신관은 갈망과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기 때문에 억제자가 없는 밖에서 그는 고삐 없는 황소와 같아. 고대 짐승의 피 때문에 본능과 충동에 사로잡힌 불쌍한 신관이지.”

“궁 안에서는 카……, 첫째 오라버니가 그 역할을 한다는 건가요? 억제를?”

“그래.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다는 소리가 뭔지 알아? 수틀리면 누구든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거야.”

아모르의 눈 위에서 손을 뗐다. 무의식적으로 일기장을 건드렸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헤르난데즈 스스로도 말하지. 억제자가 없을 때 자신은 그저 난폭한 짐승에 가깝다고.”

침대 머리에 기대어 내려가는 고개. 이마 위로 사르륵 연하늘빛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병을 3개씩이나 준 건 돌아간 네가 하나쯤은 시험 삼아 먹어 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너라면 적절히 쓰리라고 믿었지.”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약을 먹을 만한 겨를이 있다면 몇 분을 다투는 긴급한 상황은 아니겠구나. 내가 생각한 건 딱 이 정도였다.”

어둠에 가려진 눈동자는 겨우 녹색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서 피하란 말이었지, 네가 이렇게나 엉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넌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일기장을 만지던 손이 멈췄다. 결국 그는 내가 헤르난과 마주치지 않길 바랐고, 만나더라도 피하길 바랐다는 소리였다. 고작 이를 위해 제 힘을 소진해 가며 수월하게 할 도구를 만들었고, 앓았다.

“하나의 신력을 상쇄시키려면 그것과 비슷하거나 더욱 강력한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했죠?”

“그래.”

책에서 보길 짐승의 신관은 더없이 뛰어난 신체 능력과 오감, 짐승과도 같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건 일종의 그들만의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아모르가 이토록 아픈 건 헤르난이 녹록지 않은 신관이기 때문이다.

“그 약은 강력한 힘을 쏟아 낸 거군요.”

“그래.”

헤르난의 눈을 속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테지.

“……결국, 헤르난데즈에게서 날 숨기겠다고 오라버니가 아픈 거네요. 나, 나 때문에?”

눈앞이 흐렸다. 그에게 미안하지만,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를 아프게 해서까지 급한 건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래.”

“…….”

“네가 다치는 걸 보기 싫었으니까.”

나는 입을 벌렸다.

“……내가 하고 싶었고. 그리했을 뿐이다.”

그치고는 너무 직설적이고 솔직한 말에 하려던 말 잊어버렸다. 전부.

“헤르난과 마주치는 건 신분을 숨기고 나간 네게 곤란한 일이지. 그놈은 늘 실실거리는 것 같아 보여도 강한 신관이다. 그런 놈의 눈을 속이는 건 생각보다 꽤 까다로운 법이라 애먹은 거고. 지금 골골거리는 건 너와 아무 상관없어.”

“그건…….”

한참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그건 날 걱정한 거잖아요.’

“왜.”

문틈으로 스민 바람에 커튼 자락도 함께 춤을 추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요?”

“헤르난은 중요한 일을 맡고 있어. 그런데 황녀인 네가 나타나면 어떨까?”

“나를 해치려 할 거다?”

“그래.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비밀을 알게 된 황족은 성가시다. 헤르난이 아니라도 다른 놈들이 널 가만두지 않았겠지. 헤르난을 대장이라 부른 자들. 네가 본 자들은 비밀 기관 ‘황제의 그림자’다.”

“알고 있어요. 그들끼리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사실 혼돈의 신관에게 들었지만.

“현재 수도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부 그들의 짓이야. 그러나 2황자 형님마저도 어렴풋이 이상하다고 느낄 뿐 실체를 잡지 못했어.”

그 말은 꼭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느끼게끔 하잖아.

“하지만 난 알고 있잖아요. 아무 힘도 없는 황녀인데요.”

“네가 조영관과 손을 잡은 뒤로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아모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헤르난의 측근들은 네 얼굴을 알고 있지.”

“그들에게 얼굴을 들킬 필요는 없다. 그래서 헤르난마저 속이게 한 거라고요?”

“그래. 밖에서 그놈을 보는 건 네게도 달갑지 않은 일 아닌가? 가장 좋은 일은 마주치지 않는 거겠지만 네가 나가는 이유를 듣고 그건 어렵겠다 싶었지. 그리고 헤르난이 아니라도 그의 부하는 언제든 볼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알고 계셨군요. 밖의 헤르난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진 않아.”

여자 하나를 잡고 남자 다섯이서 끌고 가던 장면은 아주 좋지 않은 더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사실 여기 오기 전 납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궁리했는데. 내가 너무 간과했던 것 같다. 책 속 아모르는 황태자와도 2황자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곳이 정말 책 속이라면, 내가 아는 다른 내용도 사실이 된다. 성격 하나가 다르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내게 마음을 주었지만 책 속 아모르의 포지션은 카스토르의 우군이고, 여전히 카스토르에게 생명을 의지하고 있다.

<2황자다!>

<나는 제국의 성녀. 베아트리체 마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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