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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짐승의 가면 ⑵ (16/47)

9. 짐승의 가면 ⑵

석양이 진다. 일찍이 어둑해진 거리에는 신력 등불이 자리했고 노점상 중에도 일찍이 등을 켠 곳이 있었다.

‘어째서 메타가 날 찾지 않는 거지?’

구경하는 것은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그렇다고 메타를 잊지는 않았다.

‘내게 건 추적 주술이 있으니 쉽게 찾아오리라 여겼는데…….’

메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 보는 게 타당하다. 곤란하네.

“광장에서 열리는 야시장이 장관이라더군요.”

“그런가요?”

“구경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무리고, 다음에, 다음을 기약해도 될까요?”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왔음에도 고단함을 견디지 못한 발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모르가 준 변신약이 참 효과가 좋아 갑자기 변신이 풀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운 빛 아래 이마가 땀에 잠겼을 뿐.

“바쁘신가요?”

“네. 일행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나는 좀 아쉬웠지만, 이 정체 모를 약이 얼마나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박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약속이 있습니까?”

“네. 저녁엔 다른 남자와 만날 거라.”

이 정도면 다시 묻지 않겠지. 적절하게 둘러댔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럼 내일을 약속할까요?”

그가 훅 치고 들어왔다.

“네?”

무슨. 완곡하게 거절한 거 몰라? 나는 얼른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아니 고하려고 했다.

“잠깐.”

“웁, 어, 어, 어딜 가요?!”

“따라와요!”

그가 휙 나를 이끌었다. 너무 빨라!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별수 없이 그의 손에 의지했다. 분명 빠르게 걸었는데 어느 순간 이미 나는 뛰고 있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숨이 차오른다. 엉뚱한 것을 밟고 넘어지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달렸다.

“이리로.”

좁은 골목, 그가 나를 뒤에서 안은 채로 입을 가로막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데 입을 막으니 답답했다. 등을 덮은 체온은 묘하게 현실적이어서 긴장을 불러왔다.

“……한 번만 더 뛰어요.”

손목이 잡혀 그에게 다시 이끌렸다. 옆으로 활짝 열린 가게 문을 지나며 드디어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저, 저게 뭐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우릴 쫓고 있다. 괴물 같아서일까. 쫓기는 광경이 몹시 비현실적이다. 기묘한 형상을 가진 사람들 뒤로 멀리 보이는 흥겨운 축제. 화려하고 흥겨운 세계가 좁은 골목을 몇 개나 지나서 경계 저 너머에 있었다.

“당신은 몰라도 되는 것이죠.”

그는 불이 전부 꺼진 어느 거주 구역 좁은 벽 틈에서 멈춰 섰다. 드디어 멈추게 되었단 생각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헤르난의 손이 손목을 단단히 감았다.

“지금부터 당신과 나의 모습을 감출 겁니다.”

“……네?”

우리는 겹쳐진 채 서 있었다. 석양빛 아래 헤르난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그는 내가 아닌 큰길 쪽을 바라봤다.

“실례하겠다는 소리입니다.”

헤르난이 나를 잡아당겼다. 놀랄 겨를도 없이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쌌다. 딸꾹. 숨을 크게 내쉬지 않으려 했지만 가쁜 숨 때문에 역부족이었다. 뺨에 닿은 가슴 안에서 쿵쿵 심장이 뛰고 있었다.

“쉿. 숨을 크게 쉬어요.”

곧 어깨를 붙든 손이 죄여 든다.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었을까.

“사라졌다!”

낯선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어디야?”

“기척이 사라졌어! 짐승이다! 잘못 본 게 아니야. 짐승 그놈이 분명해!”

“웬 여자와 함께였다고 합니다!”

품에 안긴 그대로 눈만 굴린다. 그곳에 동물도 사람도 아닌 기묘한 형상을 가진 생물과 법의를 입은 자들이 있었다.

괴생물체. 담색이었고 움직이는 모양새는 꼭 젤라틴 같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부리는 듯 보이는 회색 법의의 사람들. 머리 위에 쓴 가시나무 관이 뚜렷하게 보였다.

“짐승의 신관이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법의를 입은 사람이 쉴 새 없이 나타났다. 그와 나는 꼼짝도 못하고 좁은 골목에서 숨을 죽여야 했다.

“추적 주술을 쓸까요.”

“좋아. 얼른 찾아내!”

“넷!”

서로를 보며 쑥덕대던 그들은 단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침내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저쪽이다!”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남자마저 사라지자 골목은 다시 고요했다. 죄이던 팔이 느슨해졌다. 조금 안심해도 된다는 걸까? 그러자 달리는 동안 긴장했던 것이 한 번에 와르르 풀어진다.

“하아……. 미쳤어.”

그에게 기댄 채로 밭은 숨을 내쉬다 다리가 풀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픽 쓰러지려 했다. 커다란 손이 쓰러지는 나를 잡아당긴다.

“아직 쓰러지면 안 됩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약하기 짝이 없네요.”

본디 3분만 전력 질주해도 픽 쓰러지는 나약한 황녀의 몸인데 뭘 바라. 이 몸은 그 몸보다 코딱지만큼 나은 수준이었다.

“……너무하시네요. 저는 운동 같은 거에 쥐약이에요.”

“그런 것 같아 보이는군요.”

“……알면 데려오지 말았어야지.”

그에게 거의 기댄 상태에서 그대로 늘어졌다.

“이봐요. 나는 당신 말대로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었어요. 이 수선을 피웠으니까 말하세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달린 이유를 알아야겠어요.”

머리에서 빨래라도 삶듯 김이 나올 것 같다.

“헤르난.”

나는 오래전부터 당신이 궁금했어.

“당신은 누구죠?”

이마를 기대며 나온 말은 이미 허덕임에 가깝다.

“말해요. 왜 나를 끌고 왔어요?”

당신은 뭐야? 왜 비밀이 이렇게 많아?

그리고 왜 내게 낯선 모습만 보여 주는 건데?

“일단 숨부터 고르는 게 좋겠군요.”

이마를 기댔던 상태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어요.”

헤르난은 힘이 없어 주르륵 흘러내리는 나를 잡고 허리에 팔을 감아 안아 올렸다.

“저런. 살려 줬더니 짐까지 내놓으란 격인가요.”

가까이서 보는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짙고 어두워 보이는 하늘색이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말아요.”

그는 성의 없이 웃었다.

“제가 아는 분도 꼭 그렇게 말하던데.”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바라봤다.

“참 많이 닮았어요. 당신.”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았는데 이곳은 어쩜 이렇게 어둡기만 할 수 있을까.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골목에는 오직 나와 헤르난만 있었다. 이 순간 헤르난의 낯이 전부 보이질 않아서 불안했다.

“사실을 듣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유혹하는 듯 착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네. 말해 줘요.”

점차 어둠이 잠식하는 순간에도 하얀 머리카락만은 눈에 새겨지듯이 보였다.

“나는 당신을 납치해서 미끼로 쓰려 했습니다.”

잠깐 침묵 끝에 아픈 목이 완화되었다. 입술을 떼어 낼 무렵에 와아아 희미한 함성 소리를 들었다.

“이유 있는 친절이었군요.”

“놀라지 않네요.”

그가 눈을 살짝 접으며 미소했다.

“네.”

새삼 충격 받진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내게 잘해 주는 것부터 이상했으니까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줄곧 나를 의심했다. 그랬던 그가 수도를 안내했다. 당연히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이 이상했다. 왜 지금 빛바랜 보석을 쥐고 있는 기분이 들까. 반짝이는 보석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실망하고 있지?

“안. 지금 기분이 어때요?”

그가 낮게 속삭였다. 난 고개를 기울였다.

“왜…… 물으시는지 모르겠어요.”

누가 찬물을 끼얹은 것 같다.

“지금 당신은 꼭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에요.”

그런가. 잘 모르겠다. 순간이지만 울컥했던 느낌이 화를 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꼭 성공할 줄 알았던 주식이 폭락한 기분이거나 절벽 아래로 누가 떠민 기분이기도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화를 낼 이유가 없는데.

“거짓말. 이렇게 깜깜한데 내가 보인다고? 보이지 않잖아요.”

“보입니다. 나는 신관이니까요.”

어린아이는 쉽게 흥분한다. 제 한계를 모르고 놀다가 다음 날에 신열에 시달리곤 한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어리고 미숙했기에 한계를 모르고 만끽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아주 위험한 신관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건물을 무너트릴 수도 있고, 광장에 있는 이들을 단번에 죽일 수도 있고……. 당신도 아주 잘 보입니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반가워서 무심코 그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인지 잊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울고 싶어 하는 그 얼굴마저도.”

거짓말. 몸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펑펑 울 수 있게 될 리가 없다.

“……거짓말을 뻔뻔하게 잘 하시네요.”

“글쎄요. 거짓일까요?”

툭 건드린 손이 망토를 벗겨 낸다. 어둡지만 그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안.”

그가 숨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내가 이 수고를 들이는지 생각해 봐요. 내가 어째서 안, 당신을 구한 것인지.”

음성은 어느새 나긋하게 달라졌다.

“……모르겠어요.”

나는 아직도 당신이 내게 다정하게 대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한때 방관자였던 사내가 돌변한 이유도 모르는데 지금 다시 변한 그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을 리 없다.

“궁금하지 않아요. 지, 지, 집에 갈래요.”

그의 품에서 벗어나 뒷걸음질 쳤다. 환한 대로 쪽으로 가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헤르난이 몸을 돌려 입구를 막아 버렸다.

“안.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새 그는 나를 다정히 불렀다.

“비켜요.”

숨소리가 정적을 채우는 거리에서 언뜻 희미한 푸른빛이 보였다. 기울어지는 얼굴.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

“제가 아는 분과 비슷해서예요.”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바라봤다. 인상적인 하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나부끼고 있다.

“무슨 말이에요? 할 말이 그게 다라면 나를 보내 줘요.”

머리칼이 휙 뒤로 날아간다. 가지런한 눈썹 아래로 보이는 하늘색 눈동자. 아, 역시나 시선에 온도가 없다. 궁전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달달함에 젖어 있었다면, 지금은 재색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도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셨죠.”

“그분…….”

“네.”

‘그분’이라고 입에 담는 순간 헤르난의 낯이 꽃처럼 피었다. 그 일상적인 표정에 가슴이 묘하게 울렁였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닌데요.”

헤르난의 그분이 누구일지 짐작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내가 아닌가? 눈을 감았다.

“본래 미끼로 쓰려 해 놓고 누군지 모를 사람을 닮았다는 이유로…… 나를 살렸다고 하는 건가요?”

“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다쳤겠지요.”

그가 말하는 저들이란 조금 전 괴상한 젤라틴을 이끌던 회색 법의 남자들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이 상황에…… 묻는 것도 우습지만 물어도 될까요?”

“네.”

그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더는 어두운 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분을 사랑하시나요?”

“아니요.”

내가 보지 못한 시선을 가진 그가, 망설임 없이 모든 걸 드러내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꽃같이 웃었다.

“그분은 나의 성지聖地입니다.”

나는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일 것이 분명했다.

“내 세상에 달과 같은 그분을 경애합니다.”

기울어진 석양 속 누군가에 대해 말을 하는 얼굴은 행복을 담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전부 가진 것처럼 행복하게 미소한 헤르난의 낯을 보았다.

“경애……?”

“네.”

그는 대꾸를 바란 게 아니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나는 본래 사람을 싫어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모두 같아요. 그런데 당신은.”

가슴이 울렁거렸고 속이 아픈 것처럼 더부룩했다.

“이렇게 손을 잡아도 가까이 있어도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분과 비슷해서 끌렸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미지근한 온기를 띠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꼭 그냥 지나쳤던 진열장의 신발과 비슷한 대체품을 찾은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모든 것이 다른데도 닮았습니다.”

소름이 돋았다.

“미안하지만 도망은 포기해요.”

보랏빛 아지랑이를 품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깜빡이면서 홰홰 돌았다. 야생에서 마주친 짐승의 안광 같았다. 나는 얼른 뒤로 돌았다. 내딛는 것보다 잡히는 것이 빨랐다.

“놓치지 않을 거니까.”

그가 대수롭지 않게 손으로 나를 당긴다. 그의 얼굴을 앞둔 순간 그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지는 해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하나로 겹쳤다.

“그분 외의 사람에게 호의를 느껴 본 적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싫진 않습니다.”

난 그의 가슴을 꾹꾹 밀어내며 소리쳤다.

“다, 닮은 것 따위에 혹하지 말아요! 그분을 경애한다며!”

“아니요. 내겐 중요합니다. 처음으로 그분이 아닌 사람에게 심장이 뛰고 있어요.”

방만한 차림의 사내가 날것을 드러내며 고개를 기울인다.

“놓치기 싫습니다.”

그가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당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우아한 빛이 감도는 하늘색 눈동자가 가늘게 접힌다. 어둠 속에서 짐승을 마주한 듯 새파란 안광은 푸른얼음 같다. 홍채로 언뜻 보라색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더 높였다.

“우, 웃기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 사람을 사랑하잖아!”

“사랑? 사랑 따위일 리 없지 않습니까.”

그의 얼굴이 내려앉은 곳은 입술이 아닌 더 위. 부드러운 머리칼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이 얼마나 하찮고 순간뿐인 감정인데.”

서늘하고 낯선 감각에 놀라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고개를 든 헤르난이 날 가둔 채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을 갖고 싶은 욕심은 사랑이 아닙니까? 사랑은 욕망하는 것이니까.”

그가 내 손목에 입을 맞췄다.

“그러니 오히려, ‘사랑’은 이쪽이겠군요.”

나는 이 비슷한 대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얼굴도 느낌도 전혀 다르지만 그가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어야 했다.

그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어디에 반했지? 지금까지 헤르난이 봐 왔을 수많은 미인들과 비교했을 때 지금 ‘안’의 외양은 한없이 모자라다. 외양으로 사람을 낮잡는 건 별로 좋지 못하지만, 첫인상에 영향을 끼치는 건 인지한다.

“지금 날더러 ‘누군가’ 대신할 사람이 되란 건가요?”

아니, 소용없다. 이 눈이 돌아 버린 남자에게는 이성도 논리도 듣지 않음을 안다.

“네.”

나는 시선으로 내 얼굴을 더듬는 헤르난의 얼굴을 보았다. 사랑을 입에 담은 얼굴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온도가 없었다.

“이민자인 당신은 제국에서 어려움이 많겠죠. 많은 걸 주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국적? 돈? 사랑?”

헤르난은 숨소리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그 눈에 나를 담아요.”

달짝지근한 숨이 턱밑과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왜 나는 당신을 보면 갈증이 나지?”

그가 귀 바로 옆에서 속삭였다. 고개를 내리자 나보다 아래에서 눈만 들어 날 응시하는 헤르난을 보았다.

“미안하지만, 누군가의 대체라니 싫어요.”

내가 아는 모든 새하얀 꽃이 꼭 눈앞의 이 남자를 닮았다.

“당신의 그분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아시나요?”

“평생 모르시겠죠.”

그는 묘한 낯으로 대꾸했다. 내가 평생 모를 거라는 소리인지, 그가 평생 모르게 할 것이라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 나는 황녀 아실리 로제가 아닌 그와 처음 만난 여자 안이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실로 무례하다. 한 사람을 마음에 담고 그 사람을 잊지 못하겠으니 네가 그 자릴 대신해 달라고 하다니.

난폭한 말조차 얼굴로 승화하는 그가 대단하면서 동시에 조금 서글퍼졌다. 대체 당신에게 사랑은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하찮게 저당 잡히는가. 감정은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헤어진 애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말라는 조언을 하곤 했다.

“헤르난, 미안하지만 당신이 귀찮고 순간적인 감정이라고 말했던 그 사랑. 나는 믿어요.”

낮이 긴 계절이라 차양 사이로 언뜻 석양이 보인다. 초조해졌다.

“정말 좋아한다면 진심을 담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단어 대신에.”

“…….”

왜 메타는 날 찾지 않는 거지? 정문이 몇 시에 닫힌다더라?

“당신은 내게 잘생겼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헤르난은 고개를 숙였다.

“굳이 호오를 가리자면 당신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내 손을 들어 올려 제 뺨에 가져다 대고 바다처럼 고요하고 짙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감정을 우습게 보지 말아요. 제가 정말 당신에게 반했다면 그건 더욱 해서는 안 될 말이었어요.”

우습지만, 나는 사랑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다. 내가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될 일은 평생 없으리라 믿으면서도 책 속 아모르의 사랑을 응원한다. 이 지경이 돼서도 사랑을 부정하는 사람만은 되지 못했다.

“날 보내 주세요.”

그는 책 『루스벨라의 빛』 속 전쟁에서 장군이자 영웅이요 폭군의 검이었다고 했다. 이 얼굴로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학살하고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까?

폭군을 따라서 놀라운 능력으로 공을 세웠다던 얼굴은 너무나 청초하고 유려해서 잔인한 일과는 어울리지 않게 보인다.

그가 직접 검을 휘둘러 사람을 해치는 광경을 보지 못했기 때문인지, 내가 봤던 그의 가장 잔인했던 모습이 단지 내가 죽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기만 했던 방관자에서 그쳤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다. 어쩌면 지금 그의 모습은 내게 가장 보여 주고 싶지 않던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서 놔요. 당신에겐 그분이 있잖아요. 날 보내 줘요.”

그는 미미하게 찌푸렸다. 한순간 낭패 어린 표정이었다.

“다그치는 모습조차 비슷하군요. 분명 향기가 다른데, 어째서?”

뭔가 뼈가 있는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의미를 알고 싶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동안 남아 있던 빛이 자취를 감추며, 초저녁 새파란 빛이 자리를 대신했다. 저쪽 차양 아래 빛이 닿지 못한 곳부터 그림자가 짙어지며 새카만 어둠이 몰려온다.

그는 잠시 날 빤히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기울여 미소했다.

“혹시 떠돌이 개를 길들이는 법을 아십니까?”

헤르난은 의미 모를 말을 토해 냈다.

“……떠돌이 개? 갑자기 무슨 말이죠?”

“인간처럼 말을 못하고 본능만 남은 짐승을 길들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먹이와 약간의 훈육과 체벌.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겠군요.”

나는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죽지 않을 만큼 채찍을 맞은 개는 파공음에도 꼬리를 내리고 복종합니다. 야성과 본능을 그렇게 억누르면서 집에서 얌전히 기를 수 있는 개로 탈바꿈하죠. 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

“이처럼 그분을 보기 전 내 삶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내가 속한 곳의 선조들은 전부 그렇게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나는 그분을 만났습니다.”

내 표정을 정확히 알아본 헤르난이 온도 없이 미지근히 웃으며 이어 말했다.

“말주변이 없어 그 순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따뜻한 봄에서 무척 아름다운 소풍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꽃이 그분을 위해 피고, 태양이 그분을 위해 하늘에 떴으며, 밤에는 달이 그분의 눈동자에 오래도록 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그분을 경애하라 종용했습니다. 처음 본 날, 짧고도 긴 순간 그분을 담았습니다.”

행복. 지금 그가 그린 표정을 정의 내리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 대해 말을 하는 얼굴은 행복을 담고 있었다. 그는 대꾸를 바란 게 아니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그분은 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대신이 아닙니다.”

물처럼 고요하고 맑은 시선이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나는 비교도 안될 만큼 우위에 있는 경애하는 ‘그분’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렇게 들렸어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표정 또한 동화 속 요정처럼 아름답다. 나는 목구멍이 콱 막히며 버석버석 황폐해지는 속을 느꼈다. 가슴이 울렁거렸고 속이 아픈 것처럼 더부룩했다.

“헤르난.”

밉고도 안타까운 사람.

그에게서는 은은하면서 달짝지근한 향기가 났다. 살아 있는 것의 풋풋한 냄새가 함께였다.

“당신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헤르난은 담백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눈빛이었지만 밑으로 깔린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안’이라는 여자를 보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누군가를 보고 있다. 그래서 나를 거울처럼 투영하는 눈은 열기와 애수를 담았다.

어째서일까. 이전이라면 냉정하게 뿌리쳤다.

하지만 남들이 즐겁게 살고 행복한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본 지금은 나도 그렇게 한번쯤 살고 싶었다. 조금 아프고 달콤한 기분이었다. 마치 나도 평범하게 삶을 누려 볼 것처럼.

손목에 둘둘 묶어 놓은 작은 손가방 끈을 쥐었다가 놓았다. 바삐 달리는 중에도 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일기장의 묵직한 무게가 내게 사실을 일깨운다.

나는 지금 궁전의 공주님이 아니다. 그러니 지금 난 돌아가야 한다.

“당신이 내게 한 말은 아주 무례했다는 걸 알았으면 하네요.”

난 헤르난 앞에서 낯선 모습을 한 ‘안’이라는 여자였고 그저 오늘 처음 만난 근사한 미남이 괴한에게 쫓기는 위험한 사람이었고, 나를 미끼로 삼으려고 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어서 당황스러운 평민 여자였다.

낯선 탈을 뒤집어쓰고서야 단면을 볼 수 있었다니 아이러니하다.

잠시지만, 내가 아닌 사람이 되어 느껴 본 로맨스는 달콤하긴 했다. 과연 이걸 로맨스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군요. 당신을 위협 중인데.”

“강도를 만나면 도리어 침착해지란 말이 있듯이. 그런 척하는 걸지도 모르죠.”

헤르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안에서 흔들리는 건 역시 호기심일까. 헤르난은 취향조차 부숴 버리는 미남이었다. 거기에 음울함이 더해지니 가히 여심을 쥐고 흔들어 놓는 남자가 있었다. 왜 지나가던 남녀가 그의 얼굴에서 그토록 눈을 떼지 못하였는지 절실히 이해했다.

“잘생겼네요. 그렇지만 당신은 못 먹는 감이야.”

“감?”

“신 포도라고. 당신은 내가 가질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지금이 애달프리만치 달콤하고 애타게 쳐다보던 궁 안에서의 얼굴보다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 말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더 갖고 싶게 하는군요.”

한편으로는 어느 쪽이든 책 속에서와는 다른 그의 모습이 살짝 불안했다.

피식, 그가 미소 지었다.

“당신의 일행은 지금쯤 돌아갔다고 봐도 좋겠군요.”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은데, 아무래도 순찰대원들에게 문제가 생겨도 아주 단단히 생겼다고 보는 게 맞겠지? 일이 꼬였다. 황녀의 실종은 비단 테레나 궁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무어라 속삭이는 순간 어디서 두두두두다다 하는 땅울림이 들려왔다. 가까워지는 이건 분명 발소리였다.

“쉿.”

그것도 단 한 사람이 아닌 아주 여러 사람의.

‘설마 아까 그 사람들인가?’

짧은 순간 예상한 것이 맞았는지 헤르난이 나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저들을 따돌리고 오겠습니다.”

“잠깐. 헤르난!”

나는 그의 옷자락을 쥐었고, 그는 퍽 부드럽게 그 손을 떼어 냈다.

“돌아와서 듣겠습니다. 이곳에 잠시 내 신력을 걸어 두고 갈 겁니다.”

푸른 홍채 안 휘휘 도는 회오리 속에 위험한 보랏빛이 스며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경고하는데, 움직이지 마세요. 위험하니까 여기 그대로 있는 편이 좋을 겁니다.”

헤르난이 내 옆의 벽을 짚으며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다시 한 번 나를 복잡한 눈으로 보고는 골목 밖으로 뛰어나간다.

“저기다! 잡아!”

한동안 밖이 몹시도 소란스러웠다. 저기다. 쫓아. 죽여! 흡사 영화 속 추격 신에 어울릴 법한 큰 언어들이 오고 가며 기이한 빛이 내가 있는 골목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음은 점차 멀어지고 이내 침묵으로 잠겨 든다.

‘전부 헤르난을 쫓아간 걸까?’

너무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헤르난은 이곳에 있으란 경고를 주었지만 마냥 그를 기다릴 수는 없다. 나는 돌아가야 했고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무엇보다 헤르난이 내게 보인 호감은 호감이라기엔 소름 돋는 종류의 것이다. 고비를 넘어온 감으로 보건대 돌아온 그는 나를 얌전히 보내 줄 것 같지 않다.

고개를 쑥 내밀어 보았다. 고요한 골목이 보였다.

“……돌아가자.”

싸움의 흔적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오크통들이 산산조각 나서 파편만 남아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홈이 파여 있었는데, 손가락 두 마디만큼 푹 파인 흔적은 흡사 거대한 짐승의 손톱자국 같았다. 소름이 돋는 것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걸었다.

‘……노랫소리다!’

낮에 들어본 음률을 쫓아 걸어갈수록 노랫소리가 가까워진다. 대로가 지척에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누군가 머리카락 하나만 잡고 들어 올린 것처럼 묘하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거기, 아가씨!”

고개를 돌리자 포근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나를 불렀다. 내가 있던 골목 쪽에서 걸어오는데 모로 보나 평범한 차림새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구머니나, 세상에! 혹시 이곳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외출했다 돌아왔더니 우리 집 앞이 엉망이 됐지 뭐야! 원, 지금 무서워서 야시장 쪽으로 가는 길이야. 아가씨는 알아?”

“아뇨, 저도 잘. 싸움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요…….”

“싸움?”

“네. 추측이지만.”

무서웠다며 호들갑 떠는 여자의 모습은 푸근해 보이고, 전생의 주인집 아줌마와 비슷한 연배였다. 나는 그녀가 내 옆으로 올쯤에 완전히 긴장을 풀어 버렸다.

“먼저 살펴본 우리 아들 말로는, 흰 머리 남자가 그렇게 만들었다던데……. 신관인가? 막 거대한 손톱 같은 걸 꺼냈다고 하던데. 봤어요?”

“네? 네네. 커다란 손톱자국 말이죠?”

일순 여자의 손이 멈칫했다. 잘못 봤나?

“그래! 손톱자국!”

여자는 웃고 있었다.

“어휴, 요즘 세상이 흉흉하다더니 아가씨처럼 예쁜 아가씨도 조심해.”

“네? 하하하…….”

여자가 투박한 손으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 모습이 김장 김치를 가져다주던 주인집 아줌마와 겹쳐 보여 막 고맙다 건네려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웃다 말고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몸이 억지로 돌아간다. 여자가 내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고 있다. 자연히 시선도 따라간다. 머릿속이 회전한다.

‘조금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 않았나?’

그런데 ‘손톱자국’이라는 말에 대답했다…….

“이런. 생각지도 않은 대어를 건졌네.”

영화 속 CG처럼 껍데기가 퍼즐처럼 부서진다. 중년 여성의 모습을 탈피한 젊은 여자가 어깨에 힘을 주어 웃었다.

“아가씨가 짐승의 신관과 함께했다는 여자 맞지?”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10분에 한 번은 볼 법한 수수한 얼굴이었다.

“결계 속 흔적이 보였다니, 평범한 인간은 아니구나. 아가씨?”

그러나 가시나무로 된 관. 목에서 흔들리는 목걸이. 낯익은 물건이라 생각한 순간 여자의 옆으로 거대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쏟아지는 소름에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지만, 난 알아봤다. 조금 전 나와 헤르난을 쫓던 괴상한 젤라틴 덩어리 같은 괴물이었다.

“아가씨. 상당히 질이 나쁜 놈이랑 함께하는구나. 그놈이 어떤 놈인지 모르기 때문인가? 아니면 알면서? 그 반반한 얼굴에 반해서?”

여자는 갓 서른을 넘겼을 법한 얼굴로 구수한 느낌이 드는 말씨를 구사했다. 여자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녀의 손짓에 바닥으로 엎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든 젤라틴 덩어리가 나의 발을 붙들었다. 옴짝달싹 못할 처지에 황망한 낯으로 그녀를 보았다.

“용기 있는 아가씨네. 눈이 전혀 날 두려워하지 않아.”

그녀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난 품에 있는 손가방을 꽉 껴안았다.

“누구죠? 당신은?”

“하하하. 날 무슨 악당처럼 보는데 말이야. 난 아가씨를 구원해 주러 온 사도라고 할 수 있지.”

여자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크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뭐랄까 나이깨나 먹은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꽤 황폐한 얼굴이야. 고생 좀 하며 살았나 봐?”

그녀가 휙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듣지 못했어? 수도에서 연신 사라지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상한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다리가 꽁꽁 묶여 있는 상황인데도 여자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붙잡은 것도 도주를 막기 위해서일 뿐, 해치지 않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 얼굴을 보아하니 아는가 보네. 그럼 잘된 일이야. 거기엔 꽤 재미난 사정이 숨겨져 있거든.”

“사정이라니요?”

한차례 찡그린 여자가 진한 웃음을 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아가씨를 해칠 생각이 없어. 오히려 도운 거야. 짐승의 신관이 무어라 속삭이던? 그건 진실이 아니야. 왜냐고? 아가씨를 납치범들에게 던져 줬을 테니까.”

“어떻게 확신하죠?”

“나는 무지개와 환상의 신관이야. 지금은 모두 죽고 다섯 사람만 남았지만. 스틱스강에 내 신과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신관의 맹세쯤은 알고 있겠지?”

도리어 친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호감이 느껴졌다.

“시간이 조금 있으니. 아가씨에게 진실을 알려 주려 해. 지금 이 납치, 실종 사건의 전말을.”

여자의 말이 조금 전부터 묘하게 나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무차별 연쇄 실종 사건.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말이야. 사실 수십 년간 사라지는 여자는 정해져 있거든. 바로 「신관의 자질을 가진 여자」이지.”

몹시 혼란스러운 내 표정이 걸렸는지 여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 어린 양을 위해 잠깐 역사 강의를 해 볼까?”

여자는 수수한 얼굴에 핏기 없는 입술을 그러모아 빙긋이 웃었다.

“신력은 건축, 기술, 농사, 예술 모든 분야에 공통으로 사용되는 힘. 이 원천이 어디서 나오는 거지?”

“……황제?”

“맞아. 바로 황제야. 정확히는 황제만이 다룰 수 있는 주신의 수정이지. 그런데 현재 역사상 최약체라 불리는 황제는 기이할 정도로 이상한 법을 다시 끌고 왔어.”

“……여자는 신관이 될 수 없다.”

“정답.”

여자가 방긋 웃었다.

“힘이 오직 여자로만 계승되는 신관은 제외야. 과거 이 법에 신전들은 각기 달리 대응했었지. 불카누스처럼 무시하고 멋대로 하는 곳도 있지만 황궁은 그들에게서 유일한 ‘여성’ 후계자를 강탈하는 것으로 그들의 기반을 무너트렸어. 본보기를 보여 준 거였지. 거역하면 이리 될 거라고.”

나는 희미하게 웃던 6황비님을 떠올렸다. 아주 어린 시절에나 잠시 봤던 얼굴이었다.

“24신이나 있어. 신관이 어느 정도 황제를 견제해야 정상이지.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공포 정치를 펼친 현 황제의 행태로 인해 눈과 바다의 신관을 제외한 모든 신전이 황제의 발밑으로 엎드렸지. 이 시점에 반항은 의미가 없어. 결국 가장 약한 신력을 지닌 황제가 잔혹과 잔인성으로 가장 큰 황권을 지니게 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

“…….”

“자, 문제야. 여기서 끌려간 여자들은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됐을까?”

그래서 지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낯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어 어깨를 떨었다.

“나와 관련 있나요?”

날 만족스럽게 바라본 여자가 툭 내던지듯 한마디 했다.

“언제부터인가 황녀는 황제가 될 수 없게 됐다. 더는 제국에 여성 황제가 나타나지 않아.”

그리 말하며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과거 후계자의 힘을 가진 황녀는 어떻게 되었나? 이조차 아무도 모르지.”

“…….”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단다. 닥치는 대로 신력을 지닌 여자들만 납치한 그들이 어디로 갔느냐.”

천천히 뻗은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황궁이지.”

손가락이 향했던 방향을 멍하니 따라갔다. 다시 돌아보니 여자가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황궁에는 오직 황제만이 다룰 수 있는 태초의 수정이 있다. 황제는 이 수정을 매개로 제국의 모든 신력을 좌지우지하는 ‘심장’이 된다. 신관이라면 누구나 아는 말이지.”

여자는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수정을 사용하려면 황족만이 가지는 「후계자의 힘」이 필요해. 그러나 그 수정에 담긴 성질은 신력이야. 황제는 반드시 거대한 바다를 그곳에 담아 놓아야 해.”

범죄자에게는 자신의 죄를 떠들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했다. 그런 타입인 걸까? 그러나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들었다. 그런 나를 두고 여자는 웅장한 연설을 하듯 점차 소리를 높였다.

“보통 황제들은 태어나면서 강력한 신력을 타고나기에 수정에 힘을 불어넣고, 제국의 모든 힘을 대수롭지 않게 관리하지만 그렇지 않은 황제는 모자란 힘을 비윤리적인 힘으로 충당한다.”

순간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황제의 모습이 머리 위로 덧그려졌다가 스러져 갔다.

“수정에 신관을 제물로 바치면 수정의 신력이 늘어나지. 이를 위해 황제의 휘하 집단. ‘황제의 그림자’는 여성들을 납치해 제물로 바쳐. 신관 후보인 여성들을 말이지.”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모든 것이 얼떨떨했다. 여기에 헤르난은 또 어떻게 관련된 건지, 나는 왜 여기서 이런 소릴 듣고 있는 것인지, 지금 묶인 이 상황 전부.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이대로 그놈에게 끌려갔다면 아가씨는 그 수정의 일부가 되거나 사로잡혀 평생 착취당하는 처지가 되었겠지. 그러다 늙거나 약해지면 어느 귀족의 첩이 되어서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았을까?”

“어째서?”

“신관의 밑에서 신관이 나온다는 정설을 믿는 자들이니까.”

침묵 속에서 침이 꿀꺽 넘어간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소설이나 만화에서, 이런 장면에 정체를 물으면 악당의 정체만 독자에게 알려 주고 물어본 사람은 슥삭 처분당했다. 나는 그 전철을 밞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묻고 말았다.

<데인, 이게 뭔지 알아?>

조금 전부터 그녀의 가슴에서 작게 흔들리는 저거. 신경 쓰였다.

<혼돈의 씨앗이란 거야.>

잠깐 입을 다물었던 여자는 찬찬히 나를 훑으면서 길게 숨을 쉬었다.

“난 혼돈의 신관이기도 하단다.”

재미있다는 듯 나를 보는 얼굴 뒤로 찡그림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긴 숨 뒤로 아주 느린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중 과격파라 불리는 ‘가시나무 관’이지. 아, 참고로 우리는 신관이 되는 데 성별의 구분을 두지 않는단다.”

여자가 제 목걸이를 쥐고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이 전부를 아가씨에게 알려 주는 이유는.”

“…….”

“아가씨는 우리와 함께 갈 거기 때문이야.”

나를 찾아온 암살자들. 레이 경이 때려눕힌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주워 들었던 목걸이. 그게 지금 여자의 목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분다.

“누구 맘대로?”

큰 천을 대충 두른 것 같은 법의 소매 밑으로 여자의 손가락이 뻗어 나왔다. 뺨과 반창고를 스치는 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아가씨에게서 희미한 신력의 흔적이 느껴져……. 외양은 이민자인데 말이야. 혼혈인가?”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겠죠.”

“꽤 앙칼지구나.”

여자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휘었다.

“내 능력은 환상을 보여 주지.”

장판처럼 반질반질하던 눈동자가 점차 혼탁해진다.

“혼돈의 신관은 죽음의 신전을 필두로 한 버려지거나 멸망한 신전들의 연합.”

요요하게 일렁이며 여자의 눈동자를 반 이상 차지한 짙은 보랏빛은, 지금까지 홍채의 일부를 차지했던 다른 신관의 눈동자와는 느낌을 달리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황실의 전복. 모든 후계의 말살.”

바꿔 말하면, 반란이었다.

“우리는 기회를 노리고 있어. 최근 납치 횟수가 늘어났다. 왜일까?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지.”

“어째서죠? 황제에게는 후계자가 있는데.”

“호오, 그런 것도 아니? 강력한 황태자는 그저 지켜보기만 한단다. 간간이 짐승의 신관을 보내 관리할 뿐.”

“……헤르난이 납치범이라고?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냐.”

그 순간 여자의 눈동자가 변했다.

“납치범 ‘황제의 그림자’는 황제의 은밀한 비밀 기관이야. 이들의 행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지. 납치하는 자와 관망하는 자. 둘 중 관망하는 자가 네가 함께했던 짐승의 신관이야. 하지만 ‘방관’도 죄라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여자의 눈은 어둠을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처럼 이글거렸다.

“네 말대로 짐승의 신관은 딱히 납치에 끼어들지 않아. 하지만 우리를 가만두지도 않지. 그 마약에 찌들고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작자는 우리로서도 처리해야 할 골칫덩이야.”

요요한 보랏빛이 혼탁해지며 원래의 갈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황태자와 그자가 우리의 목표에 가장 큰 걸림돌이지. 아직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구나. 영 의심이 많은 아가씨야.”

난 입술을 꾹 깨물며 여자를 응시했다.

“나, 난 신관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몰라요.”

“아가씨에겐 신관의 자질이 있어. 내가 자취를 숨겼음에도 싸움의 흔적을 알아본 것이 그 증거야.”

침착하자. 조금만 더 틈을 보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라.

“도망가려고?”

그러나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가씨. 난 지금까지 납치당했거나 납치될 뻔한 모든 여자에게 이 얘길 해 줬어.”

“…….”

“여기까지 말해 줬는데 이렇게 차분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나는 참지 못하고 토해 냈다.

“황제가 사라지면, 제국도 멸망하잖아!”

“어머, 그런 것도 알아?”

여자는 신기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제국은 ‘황제’ 없이 지탱될 수 없지. 하나 황제와 황태자가 반목하는 지금이 우리에겐 최고의 적기.”

그녀의 눈이 섬뜩한 빛을 냈다. 고개를 돌려 먼 골목 쪽을 한 번 슬쩍 넘겨다보고,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우린 머지않아 손에 넣을 거란다. 황제를 대신할 ‘그 사람.’”

“…….”

“또 다른 후계자를.”

여자는 흡족한 얼굴로 혼자 고개를 주억이더니 고개를 기울여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화는 여기까지야.”

그리고 바람이 살랑이며 머리칼을 스친 순간 모든 미소를 싹 지워 냈다. 이어 목소리가 사무원같이 건조하고 단호하게 변했다.

“한숨 자 둬.”

“잠깐, 잠깐만요!”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거야.”

그녀는 내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말만 던지고 돌아섰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젤라틴이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잠깐, 싫어!

생긴 것은 꼭 푸딩 같았으나 느낌은 물에 잠긴 느낌과 비슷했다. 발버둥 쳤지만 점차 올라와 배를 넘어 상반신까지 침범했다.

어떡하지? 그냥 죽을까? 그러나 당장 죽을 수단이 없다는 게 문제다.

‘혀를 깨무는 건 별로던데…….’

문득, 태연하게 죽음을 생각하던 나를 깨닫곤 헛헛한 웃음을 터트렸다. 항상 이런 식. 일기장을 얻은 순간부터 무엇 하나 내손대로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이게 나를 미치게 한다.

왜? 왜 나는 항상 힘없이 당하는데?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일들을 겪고도 아직 내가 정상이란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이미 미쳐서 그런 판단조차 못하는 걸까?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살고자 발버둥치는 나는 지극히 인간적이었으니까.

‘일기장!’

뭐라도 좀 해 봐. 나는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품속의 일기장을 꽉 부여잡았다. 젠장, 개 같은 일기장. 내 삶에 멋대로 나타나서 휘두를 거라면 적어도 너 말고는 휘두를 수 없게 하란 말이야! 제발!

그 순간 눈 속에서 횃불처럼 무언가 반짝하고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쾅. 거대한 폭발음이었다. 폭음에 깜짝 놀라 아래를 봤다.

막 목 아래까지 올라왔던 젤라틴이 그대로 조각조각 흩어져 돌바닥에 뒹굴었다. 젤라틴은 다시 한 번 내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눈에서 홧홧한 고통이 느껴지면서, 다시 한 번 젤라틴을 향해 거대한 힘이 모여들었다.

‘쏴 버려.’

쾅. 굵게 쏘아진 빛이 젤라틴을 찍어 눌렀다.

“뭐, 뭐야? 너!”

나를 감싼 빛. 그 빛은 자욱한 보라색이었다.

“저기다!”

“붙잡아!”

손가방의 찢어진 천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난 빛을 보았다. 카스토르와 만났던 밤, 그를 극렬히 거부하던 빛과 같은 색이었다. 본능적으로 일기장이 내게 대답한 것을 알았다. 천천히 입을 떼었다가 찾아오는 극심한 두통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망할.”

순간순간 시야가 어둠에 뒤집혔다. 다시 불이 켜지듯 눈앞의 풍경을 담아냈다가, 곧이어 전원이 나간 것처럼 점멸했다.

<훌쩍. 훌쩍. 살고 싶어.>

어둠 속에서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빛 사이로 나는 자그만 아이가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왜? 왜 아픈 거야?>

막 수확한 밀알의 색처럼 바랜 금색 머리칼을 등까지 늘어트린 소녀는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엉엉 울다가 나를 올려다봤다. 눈물로 젖은 뺨과 목, 둥글게 감싸 안은 통통한 팔까지. 생채기와 멍으로 가득한 소녀의 모습에 잠깐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소녀는 끈질기게 이쪽을 바라봤다. 아니, 시선이 묘하게 빗겨나가 나를 보는지 허공을 응시하는지 헷갈렸다.

<이건 뭘까?>

꼭 내 옆에 무언가라도 있다는 듯이 진득한 시선에 고개를 돌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환상은 거기까지였다.

눈을 뜨자, 여전히 고요한 골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돈의 신관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잘게 잘린 푸딩 덩어리 잔해 사이로 또 다른 남자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조금 전 여자 뒤로 들렸던 희미한 고성을 지른 사람들이었다.

“부대장님, 혼돈의 신관과 함께 있던 여자입니다 아무래도…….”

“그래, ‘자질’을 지녔다 이거지?”

“어린애 같은데, 일단 로브를 벗겨 볼까요? 성의 놈들에게 넘겨줄 수 있다면.”

“말조심해, 멍청아!”

“뭐 어때. 아무도 없잖아?”

덩치 큰 남자가 나를 응시했다. 담담하고 무기적인 시선. 나는 덜덜 떠는 손으로 손가방을 끌어안았다. 왜인지 힘이 쭉 빠지고 나른했다.

‘조금 전 일기장이 뿜었던 빛과 관련 있나?’

상황이 전혀 좋지 않았다.

<자, 문제. 여기서 끌려간 여자들은 어디로 갔으며, 어떻게 됐을까?>

헤르난은 누군가에게 쫓겼다. 황제를 싫어하는 혼돈의 신관은 진실을 말했다. 비밀 기관 ‘황제의 그림자’가 명을 받아 신관의 자질을 가진 여자들을 납치했다고.

그렇다면 지금 혼돈의 신관을 쫓아낸 이 무리는 누구인가.

“황제의 그림자…….”

아무래도 이들이 진짜 납치범인 모양이다.

나를 구출한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기장은 잠잠해졌고, 불에 데는 듯 홧홧했던 눈동자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도움은 1회용이라는 듯이.

<어째서 이렇게 무모하신 겁니까?>

그건 내 탓이 아니야, 경.

“뭐 해? 빨리 데려와!”

……어쩐지 생전 처음 남의 피를 뒤집어쓰고 달달 떨던 날이 떠올랐다. 검을 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수십 쌍의 눈이 나를 향한 지금. 그날과 비슷한가 싶기도 하다.

“부대장, 저 계집 웃는데요?”

어째서 내 삶은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불행은 복리인가? 그렇다면 묻고 싶다. 다 갚고 나면 무엇이 남느냐고.

“미친 건가? 상관없지. 일단 잡아.”

“네.”

소릭스, 들리나요? 메타는요?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거예요. 지금 나타나 주면 누구든 파트로누스 자릴 줄게요. 그러나 소릭스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사내가 손을 뻗었다.

“이거 놔!”

몸부림 속에서도 점차 힘없이 시야가 감겼다. 억센 손에 와르르 쏟아진 가방 속 물건 중 팔찌가 눈에 띄었다.

“아…… 모르…….”

속삭이면서 손을 뻗는다. 애석하게도 팔찌는 누군가의 발에 치여 굴러갔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초저녁 새하얗게 뜬 달이었다. 아, 모두 걱정할 텐데.

눈이 감기던 그때였다.

“이런 곳에서 주무시지 마십시오. 감기 걸립니다.”

몹시도 그립고 그리웠던 목소리가 일깨웠다. 고개를 든 순간 흑색과 남색이 뒤섞인 망토 자락이 그의 등 뒤로 너울너울 흔들렸다. 차마 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어둠 속에서 남빛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그 사이로 레이 경이 있었다.

“……경, 혹시 부마에 관심 있어?”

담담하던 얼굴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띄운다. 대체 이 검사님은 어디서 위기 순간만을 골라서 나타나는지.

“안아 줘.”

그가 한숨을 쉬며 나를 들어 올렸다.

“저기다! 잡아!”

“제길, 다들 도망쳐”

그의 품에 안긴 채 순찰 대원들이 남자를 제압하는 광경을 봤다.

“피피오!”

난투 속 다급히 다가온 사람은 메타였다.

“어디 있었어?! 신호가 잡히질 않았어! 꼭 네가 증발한 것처럼.”

그는 어째서인지 낮부터 내 신호가 잡히질 않았다며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던 당혹과 함께 사과를 건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약 때문인가.’

나는 손가방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모르가 그러길, 신관의 힘은 더 강한 힘으로 덮인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아모르의 약이 메타의 힘을 덮었거나, 헤르난이 몸을 숨긴다며 내게 건 힘 때문에 메타의 힘이 제 기능을 못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날 찾지 못했던 거고.

“……미안해. 피피오.”

일단 레이 경을 보고 딱히 무어라 말이 없는 걸 보면 내 정체를 안 건 아닌 것 같고. 그저 정말 미안한가 보다. 나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메타가 다시 돌아갔다.

“경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당신께서 오지 않아서 찾으러 나섰습니다. 그러다 순찰대를 만나서 따라왔고요.”

“……그렇구나.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하늘을 보니 깜깜했다. 그 말인 즉 뒤집어진 건 순찰대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황녀가 빠져나갔다고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른다. 일이 이 이상 커지면 않았으면 한다. 사라지는 쪽이 좋을 것 같다.

‘순찰대와 같이 황궁으로 돌아가면 수상할 테니.’

레이 경 또한 그게 좋다고 생각했는지 몰래 자리를 뜬다. 우린 잠시 뒤 한적한 길을 걸었다. 정확히는 그에게 안겨서.

“야시장이 유명하다고 했는데.”

“……그 말이 나오십니까?”

혼잡하지 않은 길을 택해서 가다 보니 시장을 구경할 일은 없었다.

“경,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

“지금 나. 내 얼굴이야?”

레이 경은 이상하다는 듯이 한쪽 눈썹을 꺾어 올렸다.

“낮보다 조금 초췌해지셨지만, 제가 아는 그 얼굴입니다만.”

“아. 역시 풀린 건가.”

대체 언제 풀린 걸까. 추측하기론 일기장이 기묘한 빛을 뿌리며 젤라틴을 해치웠을 때가 아닐까. 어쨌거나 대단한 약이다.

‘거의 종일 변신하게 해 주는 약이라니.’

눈 감고 편히 기댔다.

“지친다.”

“앞으로 더 지치실 예정입니다.”

“뭐? 왜?”

눈을 번쩍 떴다. 날 보며 담담히 웃어 버린 레이 경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인지 아주 고소하다는 듯이.

“황자님들이 아셨습니다.”

이런.

* * *

“왔니?”

데인은 사근사근한 낯으로 반겨 주었다. 망했다. 지금 날 보는 눈이 따갑고 공기가 소름 돋도록 차가운 건 착각이 아니겠지.

“이리 와. 이 망할 못난아.”

플뢰온까지 함께였다. 살벌한 플뢰온의 시선을 피해 착잡함에 사로잡혔다. 슬그머니 데인 옆에 슬쩍 엉덩이를 비빈다. 나를 보는 플뢰온과 레이 경의 얼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변했다.

“많이 늦었어. 아실리.”

데인은 변함없이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귀로는 이 음성이 네 죄를 네가 고하렷다로 변환해서 들려왔다. 내가 밖으로 나간걸 알고 있을 텐데 데인은 왜 태연한 낯일까.

화났나?

나는 단 한 번도 데인이 제대로 화를 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데인.”

“오늘 여기서 널 기다렸어.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물어 줄래?”

“……언제부터?”

난 고개를 돌려 레이 경이 서 있는 쪽을 보는 체했다.

“오후 4시부터.”

작게 중얼거리는 나를 향해 데인이 대꾸했다. 최소 5시간 이상 기다렸다는 이야기였다. 난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차를 마셨어. 2잔이 3잔이 되고 주전자를 비울 때쯤, 겨우 2시간이 지났더라.”

데인이 짤막하게 뇌까렸지만, 그 말에는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왜 넌 오지 않을까? 단순히……. 늦을 뿐이라고 생각하려 했지. 하지만 곧 그 생각은 걱정이 됐어.”

데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점점 날은 저물어 가고, 별이 뜰 때쯤 덜컥 겁이 나더라.”

“…….”

“네가 다쳤을까 봐.”

“…….”

“아실리, 내가 정말 무서웠던 순간은, 그럼에도 내가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거였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네가 다쳤을 때 나는 이를 모른다는 걸 알게 됐을 때였어.”

다정한 오라비는 다그치지도 혼쭐을 내지도 않았다.

나는 잠시 아득함에 숨을 삼켰다.

어째서인지 다정하면서 담담히 읊조리는 것이 마구 혼내는 것보다 크게 다가왔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데는 폭풍 같은 플뢰온의 꾸지람이 아닌 데인의 햇살이 이겼다.

“……잘못했어.”

내 잘못은 없다. 그럼에도 미안했다. 데인 너는 걱정마저 성실했겠지.

“너는 알까? 네가 수도 밖으로 나갔다가 그대로 사라졌다는 얘길 듣는 순간 심장이 멎었던 기분을. 당장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수도를 뒤집어엎고 싶었어.”

눈을 뜬 데인이 날 바라봤다.

“규칙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네가 답답했다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는 거겠지. 누구도 너를 강제할 순 없어. 하지만 아실리…….”

데인이 내손을 쥐었다.

“난 네가 편히 털어놓기를 바랐어. 힘든 일은 함께 나누기를. 아주 오랫동안. 하지만 나는 네게, 이렇게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어?”

데인이 옅게 숨을 쉬었다.

“아니야, 데인.”

이 순간 황제도, 헤르난과 혼돈의 신관도 떠오르지 않았다.

“저놈이 더럽게 얌전히 말하긴 했지만 나도 저 생각에 동의해.”

플뢰온이 거칠지 않는 어투로 툭 끼어들었다.

“넌 혼자 사냐? 아니면 우린 안중에도 없는 거냐?”

그 말이 푹 가슴을 찔렀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질문에 답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데인도 내게 소중해. 전부.”

생각했던 것보다 다급한 목소리에 나도 놀라고 말았다.

“너희가, 내게…….”

보잘것없을 리가 없잖아.

나는 끔찍한 악몽을 헤쳐 나왔다. 더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를 안다. 눈물도 행복도 사라져 황폐해진 세상. 40번의 죽음 끝에 마침내 도달한 미래에 단비 같은 너희가 있었다. 내게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사람들.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아니었어.

“널 탓하려는 것이 아니야.”

다정한 오라비.

“들…… 어 줘. 데인.”

조심스럽게 감싸 오는 손마저 다정했다. 그 사근사근한 감정에 기대어 절대로 꺼낼 수 없던 것이 고개를 내밀었다.

“오늘 나, 축제를 봤어. 시장을 구경하며 맛난 것을 사먹고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봤어. 고기 꼬치도 먹고 커다란 광장에서 분수도 봤어. 마주 보는 사람마다 전부 행복해 보였고 나마저 행복해지는 풍경 속에서 들었던 노랫가락이 잊히질 않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얼굴은 엉망이리라고.

“있잖아, 데인. 그런데 지금 말한 모두를 나는 평생 동안 볼 수 없잖아. 원래라면 그렇잖아.”

아득한 시간 속에 버려두고 왔던 자유로움이 오늘 그곳에 있었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행복. 입속으로만 그 말을 되뇌어 보았다. 누구도 정확히 의미를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무엇인지는 아는 것. 하나쯤은 기억을 품고 사는 것.

그러나 나의 희망은 고치이며 알이었다. 나비가 깨어난 순간 사라진다. 알은 새가 태어난 순간 깨지고 마는 것이었다.

내가 품은 희망은 너무 오래 고였고, 너무 오래 혼자서만 품어서 썩어 버렸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 여겼다. 스스로 무엇을 바라는지 몰랐다. 분수대 앞에서 무지개를 보기 전까지 나는 내가 자유를 원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죽고 살아남고, 살아남는 이 삶이 너무 당연해서.

“네가 이곳을 나가길 원했다면 난 그리해 줬을 거야. 어떻게든.”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 지으려 애쓰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 위해 맥없는 말들을 던진다.

“나 도망가게 하면 데인은 무슨 죄인데? 황녀 탈제국 방조죄?”

“농담하는 것처럼 보여?”

데인은 웃어 버렸지만 그 웃음은 전과 같지 않았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알려 주길 바라?”

“아니. 탈출이라면 플뢰온도 제안했어.”

다 싫으면 멀리 떠나서 살라고. 난 초탈하게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래. 내가 어떻게 그걸 바라.”

그럴 수 있을까? 너희를 좋아하고 아끼던 마음은 결코 지울 수 없다.

“그런 게 아냐, 데인. 난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거야.”

축제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며 느꼈다. 사람은 함께하며 행복해진다.

“황녀며 이름이며 모든 걸 버리면? 지겹도록 죽음을 피하며, 나 하나 안위를 챙긴 채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럴 순 없어. 혼자 행복할 순 없다는 걸 알아 버렸으니까.”

아마 일기장에 너와 이곳의 누군가 이름이 적히면 난 참을 수 없이 괴로워질 거야.

“데인. 너와 플뢰온을 잃으면 난 분명 견디지 못할 거야.”

위장할 수 있는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다들…… 내 얘길 들어 줘.”

수십 번 죽었다가 살아난 순간 인간이길 바랐다. 난 괴물이 아니라고. 애정을 갈구했다. 이제 와서 비정한 인간은 될 수는 없다. 되고 싶지 않다. 그 모습은 나를 죽였던 카스토르의 모습이니까.

“내겐 비밀이 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서글피 웃는다. 어디까지 꺼내질지 모를 슬픔을 담담히 꺼내기 위해.

“나는 열두 살에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겪었고, 이건 아마 평생 가도 말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오랫동안.”

손으로 일기장의 책등을 쓸어내리며 끊어질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꺼내는 건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냐?”

침묵하던 플뢰온이 물었다.

“글쎄……. 달라진 건 아닌 것 같아.”

끔찍한 기억을 이들이 알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눈 감으면 아주 하얗기만 한 공간이 펼쳐진다. 수십의 도열한 검사들과 바람에 너울너울 흩날리던 검은 머리칼. 마지막 하녀가 명을 달리한다. 저벅저벅 발소리. 그 꿈을 수백, 수천 번 꿨다.

<네게 난 어떤 의미지?>

어쩌면 나는 지금의 결정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만 웃고 싶어진 건 지금 속이 후련한 탓에.

“난 미래를 알아.”

그 말과 함께 빠르게 덧붙였다.

“주로 죽음과 연관된 아주, 불길한 것을.”

데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열세 살부터 줄곧 나의 죽음을 봤어.”

그 표정은 서글퍼 보이기도 했고 측은히 여기는 것 같기도 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초연하고 무덤덤해 보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나치게 어른스러웠던 오라비다. 가끔 먼 곳을 바라보며 한 번씩 나이에 완벽히 걸맞지 않은 표정을 짓곤 했다.

지금처럼.

“그리고 난 아주 많이.”

태양같이 빛나던 눈이 오롯이 나를 바라보면서 조금 더 또렷하게 뜨기 시작했다. 나는 몰랐던 조각과 내가 알 수 없던 태엽이 데인에게만 돌아간 것 같았다.

“앞으로도 볼 거야. 나와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고 있었어.”

너무 태연자약한 그의 대꾸에 당황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난 몰랐는데?”

“형이잖아.”

“저도…… 몰랐습니다만.”

“레이잖아.”

내 머리가 그렇게 돌인가 고민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그 반응이 정상적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고요히 미소 짓는 데인을 황망히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딱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넌 왜 놀라지 않아?’

데인은 그저 그래 왔듯 나를 잡아당겨 내 뺨을 그러모아 쥐었다. 퍼즐 조각을 맞춘 그는 기뻐 보이지 않았다.

“힘들었지?”

데인은 다정하고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데인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이상한 거잖아.”

“이상하지 않아.”

데인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도 몰랐다.

“……내가 죽는 걸 알아도?”

순간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이상하지 않아. 네 잘못이 아니잖아.”

나는 천천히 데인을 바라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언어가 되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며 사그라진다. 달싹거린 입을 끝내 열지 못했다.

입천장도 목구멍도 뜨거운 수프에 데여 버린 것처럼 뜨겁다. 열기를 삼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그를 응시한다.

처음 받은 위로는 벅차고 슬펐다. 이제야 들어서인지, 생각만큼 와닿지 않아서 슬펐다.

함께 헤쳐 나가는 아모르와는 나눌 수 없는 말이 있다. 우리는 서로 동정하지 않기 위해서 아픔을 꺼내지 않았다. 자연히 위로도 없었다. 아모르와 나는 암묵적으로 세운 규칙을 강제하지도 않았으나 이를 따랐다.

그렇기에 동료가 될 순 있어도 기대는 고목은 되어 주지 못했다. 서로의 처지가 나쁘고 바쁘고 험했으니까. 아니, 어쩌면 나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실시간으로 당황하는 플뢰온의 반응에서 데인이 지나치게 태연하다고 알았다. 플뢰온은 이쪽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얼굴로 뺨을 쓸어내렸으니까.

“막을 방법은 있는 거지?”

“……피하면 돼. 난 그렇게 살아남아 왔어.”

생각보다 모든 얘기가 술술 얘기가 끝났다. 처음 아모르에게 털어놓았을 때 무척이나 망설였고 고뇌했던 것에 비하면 쉽게 튀어나왔다. 너무 쉬워서 김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것도 경험이라는 걸까.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실 아직 그들에게 털어놓지 않은 죽음에 대한 사실은 천천히 토로할 작정이었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털어놓지 못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를 자기 자신보다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면 지금 충격에 얼마나 더 강한 충격을 줄지 몰랐다.

그렇기에 내가 미래를 본 사실에 적응한다면 다음은 용기를 내서 꺼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아직은 쉬이 상상할 수 없지만. 무엇이든 단계를 밟아 바라보는 게 좋겠지. 그래도 미래를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후련했다.

눈을 뜨고 내 일기장을 관찰하는 플뢰온과 레이를 보았다.

“……이 뒷장에 미래가 적혀 있다는 겁니까.”

“정말 안 보여……?”

“네. 제 눈엔 그저 빈 낱장일 뿐입니다.”

나는 심각해진 낯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짜 안 보이는구나…….”

일기장을 보여 주며 알게 된 사실인데, 타인에게 이 수첩은 평범한 일기처럼 보였다.

‘평범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자, 테이블 너머로 홀로 고민에 빠진 데인의 유려한 옆모습이 보였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평범한 황녀의 일기장이고 일상만을 기록했고, 죽음에 대한 문장은커녕 밥 먹는 얘기나 보인다고 한다. 내일이나 내일 모레 페이지는 빈 낱장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너만 볼 수 있다니 왜지?”

한창 뒤적거리던 플뢰온에게서 일기장을 돌려받았다. 그는 착잡한 눈으로 책등을 응시했다.

“이거 혹시 신력으로 만든 물건 아니냐?”

“아니, 형. 이런 물건이 있단 얘기는 처음 들어.”

이거 아모르에게도 안 보였던 건데. 안 보이길 잘했다. 이상한 취급받을지도…… 아니 아모르는 나를 이미 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던가.

“하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데인이 턱을 살살 문질렀다.

“신의 성물과 신물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고 사장된 것이 훨씬 많아. 그러니 이것도 그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파라락. 데인이 다시 펼쳐도 나에겐 선명하게만 보이는 일기들. 문장은 정확히 내일 날짜부터 쭉 1개월 반 뒤 일이 소상히 쓰여 있을 거였다.

‘이게 내게만 보인다는 거지?’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았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제외한 사람의 눈에는 지극히 평범한 일기로 보이는 것일까? 의구심은 커져 간다.

사실 나는 이게 무엇인지 이미 카스토르에게 들은 적 있었다.

<그건 성물이다.>

<성물?>

<그래. 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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