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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플뢰데온 클라체 (13/47)

7.5 플뢰데온 클라체

낭창낭창한 아카시아 나뭇가지가 흐드러진 중정 앞으로 도열한 흰옷의 남녀들. 나이 든 여자의 뒤에서 마침내 내민 얼굴은 너무나 작아 꼭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네 여동생이란다.>

얼굴을 찌푸렸다가 찬찬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나보다 한참 작은 어린애잖아.’

눈앞에서 억새풀처럼 연한 금발이 실타래처럼 한들거렸다.

<너무 징그러워. 전염병이야?>

그날 터무니없는 상처를 주고서도 제 잘못을 알지 못했다. 무심했고, 태연했다.

플뢰온은 늘 꿈을 꾼다.

‘……또 꿈인가.’

그는 그날 그 장소에서는 자각하지 못했던 파편들이 훗날 거대하게 몸을 불려 돌아올 줄은 몰랐다. 책임을 모르는 아이는 제가 저지른 일에 무지했다. 마침내 지난 과오를 깨달았을 때, 남은 것은 지난 기억들이 자신을 찔러 대는 아픔뿐이었다.

‘나는 밖에서 떠들어 대는 역겨운 대신들과 다를 것이 없구나.’

그때부터 괴로워했다. 하루하루 찾아갔던 날들이, 쏟아 낸 퉁명스러운 말들이, 여동생에겐 모두 상처가 되었겠구나. 그러나 괴로워하면서도 궁을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갓 태어난 새끼 새처럼 보송보송한 솜털이 가시지 않은 소녀를 송곳 같은 정으로 찔렀다. 매 순간 후회하고 진심 아닌 말들을 쏟아 냈다고 수없이 속삭였다.

플뢰온은 눈을 떴다. 수많은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마지막에야 나는 네게 도움이 됐을까?

청년은 마지막 순간, 눈을 감았다. 너는 잊었지만, 나는 잊지 못했던 속죄를 위해서.

* * *

―9년 전.

소녀가 역병을 피해 떠나간 자리. 플뢰온은 매일같이 하얗고 커다란 궁을 향했다. 황녀가 떠난 궁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고개를 들면 지붕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 같으면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언젠가 거짓말처럼 나타날 소녀를 기다리면서 플뢰온은 사과를 곱씹었다.

“흠흠, 내가 좀 말이 심했어. 잊어버려. 알았냐? 아. 이게 아닌데.”

기다림은 길었다. 쓰고 매웠다. 제 어머니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플뢰온이었기에 아린 감정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건 죄책감이란 감정이었다.

여동생을 기다리는 시간은 모래를 손에 쥐는 것과 같았다. 헤아려 보려 해도 손 안을 스르륵 빠져나가고 만다. 그는 심장에 들어간 조각을 얼른 꺼내어 편해지고픈 마음이었다.

언제쯤 돌아올까.

1년하고 1개월이 되던 무렵 플뢰온은 그곳에서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소년을 만났다.

“넌 뭐야.”

플뢰온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작은 소년이 눈을 깜빡거렸다. 막 심은 어린 나무 밑동 같은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한들거렸다.

“야. 누구냐니까.”

소년의 눈동자는 소녀의 궁 지붕처럼 아주 새빨갰다.

‘사내자식이 더럽게 예쁘네.’

플뢰온은 소년이 꼭 어머니가 보여 준 그림 속에서 톡 튀어나온 것같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와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

몹시도 높고 가냘픈 목소리였다. 플뢰온은 어쩐지 심술을 부리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소년들 사이로 여린 미풍이 불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어.”

“나도.”

소년이 살며시 웃었다.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어.”

데인과 플뢰온의 첫 만남이었다.

“6번째 가지, 이리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

“얼마 전 11번째 생일을 맞이하셨지요? 축하드립니다.”

코끝에 꽃향기가 스쳤다. 플뢰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망할 꽃향기.’

그는 향기가 싫었다. 그는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많았다. 지금 이 장소도 마찬가지다. 그는 눈앞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또래 영식을 심기 불편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꺼져.”

“네, 네, 넷?”

“병신인가. 말귀 못 알아들어?”

영식을 쫓아낸 플뢰온이 다리를 꼬았다. 무릎까지 오는 바지에 린넨 셔츠 단추가 달린 조끼를 입고 어린이용 크라바트를 맨 그였다. 가벼운 바람에 깃이 흔들리며 턱을 간지럽힌다.

작은 파티장에는 제국식 차림의 아이와 플뢰온처럼 왕국식 정복을 입은 아이로 가득했다. 플뢰온은 그냥 자리를 비울까 하다가 참았다.

‘욕하겠지.’

제 명예를 떨어트리는 일이 곧 신전과 어머니의 이름에도 누를 끼친다.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아오, 짜증나.’

제멋대로 사는 플뢰온이었으나 해서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알았다.

“레베카 에일린 폰 아벤타라 합니다.”

어찌 됐건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상석은 플뢰온이 차지한 자리였고,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함께한 데인과 이곳에 앉아 인사를 받는 처지였다.

‘꼭 새장 속 새가 된 것 같군. 기분 더럽게.’

그는 눈만 굴려 막 고개를 들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소녀를 응시했다. 불꽃이 서린 것처럼 붉은 머리칼. 순도 높은 적발은 아벤타 고유의 상징이었다.

“아벤타의 적녀가 6번째 가지, 존귀한 이리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7번째 가지, 화차와 마가목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데인이 흰 소매를 팔랑팔랑 흔들며 소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사자의 가문에 영광이 함께하길.”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말이 없는 플뢰온을 보았는데, 카우치에 파묻혔던 플뢰온이 한쪽 눈만 찡그렸다.

“진짜 존귀하다고 생각하냐?”

“……소녀가 무지하여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레베카의 유려한 낯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레베카의 흰 얼굴은 아이답지 않게 침착한 구석이 있었다.

“당신께서 존귀하지 않으시다면 그 누구를 존귀하다 칭하나요?”

“…….”

플뢰온은 레베카를 빤히 쳐다봤다. 딱히 그녀를 괴롭히자고 꺼낸 소리는 아니었다.

“됐어. 가 봐. 쓸데없는 헛소리니까.”

그가 손을 까딱이며 성의 없이 흔들었다.

‘이상한 사람.’

레베카가 살짝 의문을 가졌다가 지워 냈다. 그녀가 물러나자 크고 작은 가문의 이들이 뒤를 이어 고개를 숙였다. 플뢰온은 건성으로 끄덕이거나 성의 없이 넘겼다.

<역시 6황자님은 오만하시네요.>

아이와 함께한 성인 신관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신관도 아니면서 불카누스의 모든 것을 물려받으실 분이잖아요.>

<6황비님께서 미치지 않으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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