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자와 이리의 티 파티 ⑴
“잠 못 잤냐?”
날 툭 건드려 깨운 사람은 플뢰온이었다.
‘분명, 레베카에게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았을 텐데?’
이 궁에 와서 레베카가 행한 일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행동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플뢰온은 내가 레베카와 칼타니아스 문화사를 토의하는 내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레베카. 오라버니들 쫓아낸 거 아니었어?”
“당신의 시녀로서 어찌 황자님을 쫓아내겠습니까.”
그녀가 서늘하게 대꾸했다.
“다만, 유의미한 조언을 드렸던 듯한데…… 어디론가 사라진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데인은 알아들었는데 플뢰온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다는 소리구나. 하긴 우리 큰 오라버니가 눈치를 성층권으로 발사하신 인간이긴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책을 덮었다.
요 며칠간 내 주변을 하이에나처럼 빙빙 맴도는 플뢰온 때문에 성가셨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죽치고 앉아 있다가 저녁쯤에나 돌아가는 것이다.
“데인은 엄청 바쁘던데. 오빠는 일 없어?”
“해 놓고 왔다.”
“솔직히 말해 봐. 잘렸지?”
“아니거든?”
아니기는.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저 성질머리에 궁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
“알았다. 그럼 분을 못 이겨 뛰쳐나온 거지? 잘 들어 플뢰온. 어른이자 사회인은 잘못에 물러날 줄도 알고, 인정하며 사과할 줄도 알며 관용을, 윽!”
“또 그런 건조한 낯짝으로 속을 긁지? 엉?”
저기요. 레베카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거든? 이 눈치 없는 오라버니야.
잠시 멍하니 보던 레베카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6황자님! 다 큰 황자님께서 황녀님의 뺨을 꼬집다니요!”
그러나 이후로도 플뢰온은 내 뺨을 붙들었다가 내 시녀님에게 크게 혼쭐 아닌 혼이 났고, 어느새 그의 손에는 『초보자도 쉽게 알 수 있다 ~마담 산드라의 신사 예법~』이라는 책이 들렸다.
“아실리, 네 시녀는 너무 건방져.”
플뢰온이 다분히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네가 할 소린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건방지다고 했냐?”
당연한 소릴.
“오빠도 레베카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니까 얌전히 수긍하고 그 책 읽는 거잖아?”
레베카에게 배운 스킬 중 하나인 경멸하는 눈으로 흘끗 내려다보자 그가 왈칵 찌푸린다. 아니, 찌푸렸나? 그보다는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인데.
“이거 봐. 벌써 이상한 걸 배웠다고! 젠장. 내 병아리 같던 새끼가…….”
“시끄러워. 누가 병아리야?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너 일 너무 못 한대? 진짜 쫓겨났어?”
“아니라니까!”
신경질적으로 지껄인 플뢰온이 무릎에 얹어 놓았던 책을 세워 들었다. 대꾸를 피하겠다는 행동이었다. 이쯤 되면 털어놓을 텐데. 그답지 않게 의뭉스럽게 넘기다니?
“……6황자님과 7황자님은 상당히 다른 성격이시군요.”
레베카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플뢰온을 비꼬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 말을 알아들었다면 이곳에 있지 않았겠지. 흘끔 그를 쳐다보자, 그는 한쪽 다리를 꼬고서 한 손을 괸 채 책장을 넘겨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껍데기 하나만큼은 우아하고 완벽한 오라버니였다.
“교육 경과가 순조롭습니다. 곧 있을 티 파티도 문제없겠어요.”
“응. 일주일 뒤랬지?”
“예.”
그러고 보니 오늘은 레베카가 독설을 안 하지 않았나? 내가 정답을 맞힌 횟수가 늘어나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뿌듯한 마음으로 턱을 괴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문득 그녀의 옆모습에서 생각난 질문이 있었다.
“레베카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이상형이라면, 미래의 지아비 상 말씀이신가요?”
“뭐, 그런 거? 왜, 꿈꿔 본 적 있잖아. 소설에서 나오는 멋진 용사님이나 잘생긴 왕자님.”
여태까지 이걸 묻는 걸 깜빡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물론. 레베카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든 간에 절대 거기에 카스토르를 끼워 넣지 않을 생각이니까.
‘그러니 사전 조사는 필수지.’
사람 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지만, 그녀를 너절한 폭군에게서 구하기 위해서라면 철저한 세뇌와 선동과 날조는 기본이지.
“응, 말해 봐? 응?”
의아함이 짙은 레베카의 낯을 보며 순진한 척 눈을 깜빡거렸다.
“어떤 의미로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데요.”
그녀는 긴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님, 평민 계집아이나 가질 상상은 버리세요. 그건 의무를 자각하지 못한 어린 여자아이나 할 법한 소리랍니다.”
“상상?”
그녀는 천천히 눈을 깔았다가 짧은 한숨을 쉰다.
“네. 저나 황녀님같이 이미 미래가 정해진 아녀자에게 필요한 것은 결정되어 있습니다. 바로 지아비를 하늘같이 모실 절개와 꽃 같은 미소, 가문에 먹칠하지 않을 완벽한 예법이지요.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사내를 홀리기에 적당한 멍청함은 필요하다 여겨집니다만, 황녀님은 그 정도가 심하신 듯합니다. 진심으로 황녀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순간, 나와 레베카 사이에 거대한 얼음벽이 지어진 줄 알았다. 어찌나 싸늘했던지, 당장 붕대를 둘둘 감고 있던 팔로 살짝 소름이 돋았던 것도 같다. 그렇게 한심하게 볼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정말 세 살 난 아이 보듯 철없게 보니까 조금 오묘해진다.
‘뭐, 레베카가 나를 한심하게 보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나는 차라리 발랄한 무식을 밀고 가기로 했다. 이런들 저런들 결국 목적지에만 도달하면 되는 거니까.
“그럼 레베카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미래의 지아비라거나, 어떤 분과 결혼할까? 하는 상상.”
“저는 공작가 외동딸입니다. 이것으로 모든 대답이 되죠. 현재 공작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제한적입니다. 예상 가능한 범위이죠. 어차피 혼인은 아버님이 정해 준 대로 따르는 것이 상식 아닌가요?”
“웅, 생각은 할 수 있는 거잖아? 상상은 자유랬고……”
“그 또한 의미가 없다 생각합니다만. 어차피 정해 준 곳과 결혼하여 가문의 번창을 비는 게 아녀자입니다. 지아비를 따르며 잘 살면 그만인 것을요.”
으음, 이건 뭐랄까. 철벽은 철벽인데, 다른 의미로 철벽이다. 기왕 아름답고 귀히 태어났으니 담뿍 사랑받고 연애 소설에서 ‘어머, 나 이런 왕자님과 결혼할 거야!’ 싶은 꿈을 꿔 봐도 좋으련만, 벌써부터 풍파를 다 겪은 듯한 소리나 하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귀하기 때문에 더욱 철저한 교육 속에서 자란 걸까?
‘다른 꿈은 꾸지조차 못하게 말이지.’
상류 귀족 여성은 시야가 극히 좁다. 또래 평민들보다도 더욱 그렇다. 태어나 받은 건 꾸며진 아름다움과 달콤한 디저트. 그리고 함께 교육받는 지아비와의 결혼관.
모든 교육은 그녀들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올곧이 인지하게 한다. 뭐, 고대니 중세를 배경으로 삼은 로맨스 소설 내 세계관이 거기서 다 거기겠지만.
“레베카는 선택해 본 적이 없어?”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선택?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드레스나, 머리 장식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번 고르곤 합니다만.”
“그런 것 말고, 레베카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 이를테면 나와 같은 주인을 고르는 것.”
그것도 네 선택이 아니었지.
내가 말하고자 한 점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미미하게 찌푸린다. 확실히 머리가 좋은 시녀님이다.
나는 선선하게 웃으며 방향을 살짝 바꿨다.
“이상형이란 거, 별거 아닌 것 같아.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 뿐이잖아. 레베카는 어때? 언젠가 만날 상대가 어떤 머리색이면 좋겠어? 검은색? 푸른색? 회색? 그리고 성격은? 똑똑했으면 좋겠어?”
“……아뇨. 저는 너무 똑똑한 사람은 싫습니다.”
“왜?”
“오래 살지 못할 테니까요.”
그녀는 떨떠름한 낯이었지만 피하지 않고 대꾸해 주었다. 그러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새카만 홍채가 혼란스럽게 일렁인 것도 같았다.
오래 살지 못한다라. 조금 안타까웠다. 그녀도 이곳의 생리를 알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밝은 것만 봐도 모자랄 나이에 이미 암중 모략 따위에 밝다는 얘기다.
“그리고? 또 있어?”
“적당히 잘 웃고 다정하고 사근사근하면 좋겠군요.”
“또?”
“외모는 딱히 상관없습니다. 어두운색보다는 밝은색이 좋겠지요. 아버님처럼 금발이어도 좋고.”
“응.”
“그리고 저를 위해 어떤 일에도 뛰어들 수 있는 남자면 좋겠습니다만……. 계산적이고 만용은 아니었으면 합니, 잠깐.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죠?”
그녀는 섬섬옥수로 관자놀이를 짚더니 곧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제대로 회의를 느낀 얼굴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릴 것 같았으나 그랬다간 정말 북풍한설을 마주할 것 같아서 꾹 다문 입술을 떼어내 명랑하게 소릴 꾸며 냈다.
“레베카.”
“예.”
“나 밝은 금발인데.”
“예.”
“눈동자 색도 밝아. 잘 웃어. 음, 또 레베카를 구했고.”
“예, 그런데요?”
“나 레베카 이상형이야?”
“……예?”
말문이 막힌 듯 레베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너희 뭐 하냐?”
한 걸음 떨어진 곳. 플뢰온이 몹시도 해괴한 것을 보듯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봤다.
“신경 꺼. 오라버니.”
플뢰온을 무시하며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공 들인 시간만큼 소중해진다고 했지.
발을 달랑달랑 흔들며, 꽃받침 하듯 턱을 괸 낯에 활짝 미소를 틔웠다. 나를 보며 레베카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내가 본 얼굴 중 감정이 가장 소란하게 변하는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제 미래 지아비에 대해서 질문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응, 근데 나랑 비슷해.”
“어딜 봐서, 하. 아닙니다.”
“나도 레베카를 위해 뛰어들었잖아!”
“그러니까, 저는 계산속이 밝은 사람이 좋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럼 더더욱 난데? 난 아쉽다는 듯 한숨지었다.
“흐응, 아쉬워라. 나는 셈에는 밝지 못해.”
“……계산속은 수에 밝음이 아닙니다.”
알아. 간만에 유쾌해지는 기분을 참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죽음이니 생존이니 하는 것들에 치여 느껴 보지 못했던 작은 빛이었다.
그녀는 지금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나는 레베카의 손을 그대로 꼬옥 쥐면서 빙그레 웃었다.
“레베카, 책에서 봤는데 구한 것에는 책임이란 게 따른대.”
나는 눈을 예쁘게 접어 웃고 생글거렸다. 참 신기하게도 억지로 밝은 척을 하고 있으려니 마음에도 작게 볕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따뜻했다. 그러면서 꼭 동화 속 용을 무찌르고 공주님을 구하는 용사가 된 기분이었다.
나의 공주님이 될 레베카는 용을 용이라 느끼지 못하지만, 뭐 어떤가.
이미 몸을 바친 전적이 있는 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흔들리던 검은 눈동자가 붕대를 둘둘 감은 팔로 향하는 것을 봤으니까.
“난 지금부터 레베카를 책임질게.”
“그거, 무슨 책이었습니까.”
“음. 로맨스?”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다. 이 세계는 로맨스가 맞고 나는 너와 네 배경을 이용하려는 생각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네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오롯이 진심이니까.
“주인님. 그거, 갖다 버리세요. 당장.”
당황한 듯 낯을 구겼던 레베카가 서늘하게 외쳤다. 난 그런 레베카를 보면서 고개를 샐쭉 기울였다가 배시시 웃었다.
“아냐. 나만 믿어. 행복하게 해 줄게!”
어서 내게 반해 줘. 악녀님.
넌 죽지 않는 미래를 걷게 될 테니까.
마치 화창한 날 풀밭에 데굴데굴 구르는 강아지처럼 순진하게 웃어 버렸다. 눈꼬리를 접어 늘어트린 나를 보면서 레베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구제할 길이 없네요.”
서늘한 목소리. 긴 한숨. 다시 혀를 차는 소리. 하지만 들어 올린 손가락 사이. 처음으로 당황한 듯 봉숭아처럼 물들인 눈가를 본 것도 같았다.
* * *
확실히, 『루스벨라의 빛』의 작가는 본업에 태만했던 것 같다. 아니면 미남의 기준이 에베레스트 정상보다 높았거나.
“황녀님을 뵙습니다.”
흰 머리가 진주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막 봄이 되는 계절에 더없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안녕하셨습니까.”
대체 루스벨라가 눈이 얼마나 높은 건지 모르겠다. 남주가 어느 정도길래 헤르난데즈를 두고 겨우 ‘잘생겼다’로 퉁쳤단 말인가.
‘하긴 눈을 세척하고 쳐다보고 싶을 만큼 잘생긴 데인을 쓸모없는 엑스트라 취급했지.’
아모르조차도 귀여운 강아지로 표현해 놓지 않았던가. 그러니 작중에서도 수려한 미인이라 표현한 사람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 헤르난데즈는 잘생겼다.
“안녕하지 못해요.”
그의 인사에 한참 늦게 성의 없이 대꾸했다.
예쁜데 잘생겼지. 미남이긴 정말 미남이었다. 고작 나무 아래 섰을 뿐인데 눈이 부실 지경이다. 곳곳의 하녀와 시종들이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피곤하신가요?”
그는 요즘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한 내 낯을 바로 알아봤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요. 피곤하지 않아요.”
“고민이 있어 보이십니다.”
솨아아,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어 놓을 때, 그는 꼭 파도가 부딪혀 만든 깃털 같았다. 살랑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어째서 그가 솔레토리움 궁 앞에 서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내게 꽂히는 뚜렷한 시선이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 짐작케 한다. 느낌뿐이지만 목적이 나인 것 같지.
“고민이 있어요. 공작.”
그를 흘끔 쳐다보고 나직하게 대꾸했다.
“무엇인지 여쭤도 될까요?”
“어째서 공무에 바쁠 공작이 솔레토리움 궁 앞에 서 계시나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미남이라. 예전 내 판타지 속 로망 탑 파이브였는데. 언젠가 실현되길 바랐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런데 실현되었음에도 무척이나 담담하다.
저 사람이 싫다.
“다가오지 마세요.”
알아차렸을 때, 그가 뻗는 손을 피해 뒷걸음 친 뒤였다. 그러나 그는 내 거부에도 그저 옅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붕대 쪽을 흘끗 바라보면서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황녀님을 그리 만든 사람은 잡히지 않았습니까?”
……사람이 아닌데. 주변에는 대충 계단에서 넘어졌다고 했지만 그만은 남다른 상처인 걸 알아봤다.
정색한 모습은 서늘한 느낌에 가깝다. 눈을 찡그린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 헤르난데즈는 꺾어 올렸던 눈썹을 내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계단이 가파릅니다. 손을 잡아 드려도 될까요.”
그가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왜 공작의 손을 잡아야 하죠?”
당장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였다면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밀어진 손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지시기라도 한다면 무척 마음이 아플 겁니다.”
“……고작해야 10개뿐인 계단을 에스코트라도 하겠다니. 이런 곳에서 넘어지는 바보는 아니에요, 공작.”
기다렸다는 듯이 무시하고 지나간다. 그러나 계단을 울리는 걸음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우뚝 멈춰 선다. 따라오던 소리도 멈췄다.
“황녀님.”
“시끄러워요. 자꾸 그렇게 부르지만 말고 내가 원하는 배려를 해 주겠어요?”
“어떤 배려 말씀이신가요?”
“당신이 사라지는 거요.”
휙 돌아선 내가 그를 지나쳐 올라갔다. 두 계단 위에서 그를 살짝 돌아보면서 나는 웃었다. 고개를 숙여 타인에겐 들리지 않게 속닥이다시피 말했다.
“당신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사라져요.”
차가운 한기가 발바닥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곳만 겨울이 찾아온 것처럼. 삽시간에 얼어붙은 분위기에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여기서 당장 그가 상처받고 물러나 준다면 도리어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못된 말들에 상처 입고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나타나면 이 시간이 내가 죽었던 시간과 별개의 공간임을 자각하게 된다. 혼란스럽고 서글프고 비참했다.
“여기서 신분을 숨기느라 애쓰고 있는데, 눈에 띄게 해서 곤란하게 할 셈인가요? 참으로 몹쓸 사람.”
잠깐 저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가 매듭을 풀듯이 풀어 버렸다.
‘알고 있어. 그는 기억하지 못해.’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나를 죽인 건 아냐.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담담하게 가라앉힌다. 그를 내버려 두고서 행정청 안으로 휙 들어갔다. 그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는지 내 알 바가 아니다.
‘다신 보지 말자.’
그랬었는데.
“황녀님?”
펜네는 도통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내 시선을 쭉 따라가던 그는 알 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황녀님께서도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니야.”
펜네가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저만한 미남은 보기 드물죠.”
그가 띄운 부드러운 미소는 덕심을 불태운 여동생을 보는 다정한 언니의 것과 비슷했다.
‘그거 아니야, 펜네.’
어디서부터 짚어 줘야 할지 모를 오해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디볼로 공작님은 흠모치 않는 여성을 찾기가 더 힘듭니다.”
“아니야. 펜네. 그만해.”
뭔가 소외감이 든다.
나는 방 한쪽을 노려봤다. 공부를 하려고 앉았는데, 왜 갑자기 헤르난데즈가 나타난 거지? 더구나 그라니우스도 그를 내버려 둔다. 덕분에 그는 저 멀리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을 수 있었다.
‘아니, 조영관은 2황자 파(예정)이고 저 사람은 황태자 호위 기사잖아. 여기 있으면 안 될 사람 아니냐고.’
때마침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피피오 아실리!”
“소릭스!”
타이밍 좋게 나타나 준 소릭스 덕분에 공기가 상쾌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쪽으로 도도도 달려온 소릭스는 책상에 손을 얹고 나를 향해 방글거렸다.
“열심히 공부하고 계셨어요?”
“물론이죠.”
오늘은 소릭스가 공부를 돕겠다고 약속한 날이었다.
“헉. 이봐, 펜네.”
나를 바라보던 소릭스가 돌연 놀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뭐야? 저분 공작 아니야? 감사일이 오늘인가? 펜네. 넌 알아?”
“감찰이라던데.”
“아아. 또 누가 눈 밖에 나려나 보지?”
까마귀처럼 책상에 쿵쿵 머리를 박고 찡그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펜네와 소릭스의 대화에서 뭔가 알고 싶어 하던 게 스쳐 간 느낌이었다.
“아니, 어째서 조영관께선 저 사람을 쫓아내지 않는 거죠? 불청객이잖아요.”
“쫓아내다니요? 공작님…… 을요?”
펜네가 눈을 크게 깜빡거린다. 난 입을 합 다물었다.
“……아니……. 어쨌든. 여기 올 분은 아니시잖아요.”
“피피오, 목소리가 큰 것 같습니다만 쫓아낼…… 아무튼 돌려보낼 이유와 명목이 부족하지요. 지금 저분은 공무 중이시니까요.”
“공무?”
“네. 감찰관이니까요. 갑자기 나타나도 어쩔 수 없죠.”
난 어렴풋이 3년 전 일을 떠올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헤르난이 이곳에 불손한 움직임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그의 소속에 대해 대충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저는 제국의 신관 및 관리들을 임의로 감찰할 권한을 갖습니다.>
아마 황태자 직속 기구 딕타토르라고 했던가. 심심하면 찾아가서 깽판을 부릴 수 있다. 이거지? 이거 참으로 카스토르와 쿵짝이 맞아떨어지는 단체네. 권한이 강대하게 미치면서 행정 기구 성질에서는 벗어난 곳이라니.
책 속에서 딕타토르가 무어라 했는지 다시 떠올랐다. 하는 일은 감찰이나 첩보지만 개인 무력 단체이기도 했으며, 훗날 카스토르의 독재에 힘을 실어 주는 세력이기도 했다. 특히나 전쟁에서 이들이 보여 줬던 무용이 대단했었다.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헤르난이 그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무슨 상관이겠나. 볼 때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낯이 방 한구석에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소릭스를 끌어다 내 오른쪽에다 억지로 앉혔다. 긴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면 아침에 으르렁댄 게 소용없잖아.’
그와 후원에서 이야기를 나눈 뒤로 꼬박 2주간 그는 나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궁으로 찾아오지 않았을 뿐 꽃이나 선물 따위를 꼬박 궁으로 보냈고, 오늘에 와서는 외출을 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헤르난이 자주 찾아오면 내게 전혀 좋지 않았다. 카스토르가 그의 부재를 이상히 여겨 알아볼지도 모르니까. 만약 그와 내가 관계되어 있다는 걸 알면 흥미로워하겠지.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솔직히 그 미친 작자를 예상 범위 안에 두다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수십 번 카스토르와 마주한 내게는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간단했다. 그는 흥미를 가지고 나를 살렸다. 훗날 애절했던 루스벨라에 대한 사랑조차도 ‘흥미’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이 몸으로 행정청에 가신다고요?>
레베카는 나를 뜯어말렸다. 그렇지 않아도 내 팔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는 눈치였는데, 여기에 내가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강력하게 반대를 외쳤다. 며칠 뒤 있을 티타임에 지장을 준다는 논리였지만 걱정해 주니 기분 좋았다.
그래도 나는 마냥 쉴 수 없는 처지였다. 플뢰온에 레이 경까지 쌍수를 들며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왔건만.
“……이럴 줄 알았으면 레베카 말을 들었어야 했어.”
“레베카?”
“친구에요.”
소릭스라 생각하고 대답하는데, 소릭스가 생경한 낯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흰머리와 반듯한 낯이 보였다.
“신기하네요. 제가 아는 사람도 같은 이름이거든요.”
“……그래요?”
당연히 아는 사람이겠지. 왈칵 인상을 찡그린다. 우릴 번갈아 보던 소릭스가 살짝 끼어들었다.
“와, 공작, 저 알죠? 순찰대 케레스 부대장 소릭스 녹타 에메데우스입니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예. 유명한 칸바누스(눈眼과 올빼미의 신)의 후계를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헤르난데즈가 선선히 웃었다. 그러나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렇지만 그 미소가 날 보는 순간 순식간에 변화를 거쳤다.
‘설마. 아는 척하지 않겠지.’
옆에서 펜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서 저분이 저렇게 웃는 분이셨나 중얼거린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었나?’
난 고랑이 팬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펜네. 수업요.”
책상을 툭툭 치면서 그를 바라보자 펜네가, 아! 하면서 하던 설명을 이어 갔다.
“근데, 여기 적혀 있는 「황제의 힘은 심장의 고통」이란 문구는 무슨 뜻이에요? 문학적 의미?”
“뜻 그대로입니다. 아, 피피오는 신관이 아니라서 모르겠군요.”
“……피피오?”
헤르난이 작게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앗, 그럼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네. 소릭스 부탁해요.”
나는 애써 옆을 뚫는 듯한 시선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부러 소릭스를 주시했다. 소릭스는 소년처럼 풋풋하게 웃으며 입을 떼었다.
“주신과 직접 계약했던 초대 황제께서 통치하셨을 때, 제국은 건국기이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고 하죠? 그때는 모든 신관의 힘이 어느 때보다 강력했던 시기였고 실로 대단했다고 해요.”
“들어 본 적 있어요. 예전에는 다들 그랬다고. 그런데요?”
“이 땅에 주신이 축복을 내렸잖아요? 황제 폐하는 주신의 후계자이시고요. 주신의 힘을 유지하는 건 오로지 황제 폐하의 능력에 달려 있단 얘기에요.”
“음, 그러니까 황제의 힘은 일종의 동력이라는 것이죠? 황제 폐하 개인의 힘이 셀수록 신관들도 강력한?”
“네! 똑똑해요. 피피오.”
그는 싱그럽게 웃고는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거랑 심장이랑 무슨 상관이죠?”
“음, 맹수는 먹이가 어디에 있는지 냄새로 알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모든 신관은 본능적으로 황제의 힘을 느껴요. 힘의 ‘근원’이니까요. 정확하진 않지만 주신의 후계자를 본 순간 강한 존재감을 느껴요. 우리는 그걸 「심장의 고통」이라 부르죠. 그리고 황제께서는 반대로 모든 신관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요.”
“통제권이라면?”
“황제 폐하와 후계자, 즉 황태자 전하를 해칠 수 없게 하는 주술이죠. 설사 그분께서 저를 위협하거나 죽이려 하신다고 해도요.”
“아니. 그게 가능해요?”
“네. 태양이 가뭄을 가져왔다고 해서 태양을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잖아요? 불가하다 생각하게 돼 버리는 거예요.”
뭐 그리 무시무시한 관계가 다 있어? 나는 헤르난의 시선도 잊고 입을 살짝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어쩐지 이 나라가 천년 동안이나 망하지도 않고 유지된 이유를 알 것 같다. 까마득한 세월이 눈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소릭스의 쓰다듬을 받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확실히 이론만 배우던 신학 시간보다 그에게 듣는 얘기가 좀 더 알기 쉽게 다가왔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 황제 폐하의 힘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요.”
“으음, 글쎄요…….”
“황, 아니 피피오, 그런 질문은 궁에서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소릭스 대신 펜네가 쩔쩔매며 대꾸하는데, 그를 잘라먹는 목소리가 있었다.
“‘역대 최약’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헤르난데즈였다.
“그래서 모두가 황태자 전하의 즉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용하고도 여상한 말투였다. 소릭스 또한 조심스럽게 동조했다.
“그…… 렇죠. 그분의 힘은 실로 엄청나니까요……. 저는 그분을 뵌 적 있는데. 그토록 강한 충격은 처음이었어요.”
“아마 당신이 강력한 신관이라서 더 그렇게 느꼈을 겁니다. 소릭스.”
“네, 그렇겠죠……. 으으, 잊을 수 없던 고통이었던 걸요.”
헤르난은 몹시도 담담한 낯빛이었다. 그러나 부드럽게 웃는 시선은 한곳을 향해 있었다. 불현듯 깨달았다. 헤르난의 시선은 쭉 내 어깨 위, 소릭스가 걸친 손으로 향해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피피오?”
도무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헤르난데즈를 쳐다봤다. 헤르난데즈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저 잠깐, 알죠?”
“아……. 다녀와요!”
헤르난데즈를 주시하면서 말하곤 방을 나섰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서 흰 복도에서 벗어나 인적이 드문 후원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머리가 울렁거리면서 속이 갑갑하고, 복잡했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공터에 이르자 나는 뒤로 홱 돌아보았다.
“무슨 꿍꿍이야.”
그리고 헤르난데즈를 노려보았다. 과거 악몽 같은 날들은 내게 어떤 교훈을 뼛속까지 새겨 넣었다. 궁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믿을 수 없으며,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라는 현실을.
“갑자기 불러서 놀랐나요? 왜 말이 없죠?”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미소가 바람에 나부끼는 잎사귀처럼 흔들렸다. 나는 천천히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날을 생각했다. 그가 내게 무릎을 꿇고 미소를 보고 싶다고 한 날을.
“당신, 이용해 달라고 했던가요?”
“네. 그러했습니다.”
당신은 참 나쁘다. 그리고 목을 긋는 검만큼이나 잔인하다.
“그럼 지금 이용해 달라고 내게 시위라도 해요? 내가 배우는 이곳까지 와서?”
“그렇지 않습니다, 황녀님. 지금 제4 행정청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위험? 당신이 내 곁을 배회하는 것보다?”
헤르난데즈의 행동을 카스토르가 모를 리 없다. 나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일그러트렸다.
“당신과 있으면 오라버니와 다시 만날 것 같아요.”
그래, 내가 지금 유난스럽고 심히 조심스럽게 군다고 알고는 있다. 하지만 더는 죽고 싶지 않으니까 당연한 거다. 조심해서 나쁘진 않잖아? 왜 차근차근 쌓아 가는 나를 방해하는 거야. 왜.
“황녀님, 언젠가 제가 제4 행정청에 불손한 움직임이 있다 말씀드렸지요. 기억하시나요?”
“그게 뭘 어쨌다고? 나와 상관없는 문제를 가져오지 마.”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렇습니다. 아니 황녀님으로 인해 더 위험해졌습니다.”
“뭐?”
나는 허튼 소리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는 내 시선을 묵묵히 받아 내며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영관 그라니우스는 당신의 보호를 이유로 중립에서 벗어나 2황자님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불화의 씨를 남겼지요. 아니, 사실 그는 그때 그렇게 요란하게 움직여서는 안됐습니다. 결국 지금 당신을 위험하게 했으니까요.”
그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가 떼어 내면서 잠깐 웅얼거렸다.
“쓸데없이 말이죠.”
아주 잠깐이지만 선득한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돌풍이 우리 사이를 휩쓸면서 흰 머리가 나풀거렸다. 다시 머리칼이 내려앉은 얼굴은 내가 알던 나긋하고 부드러운 낯으로 돌아와 있었다.
“물론 그라니우스 또한 갑작스럽게 움직이려던 생각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곳에서 당신의 신분을 감춘 것은 좋은 선택이었지만요. 혹 솔레토리움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무슨 소리야.”
“솔레토리움은 2황자 전하께서 계신 궁을 제외하면 신관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이곳은 한때 중립이었을 때보다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솔레토리움을 차지하려는 자와 그저 충돌을 원하는 자 그 사이에 이득만 갈취하려는 자가 한데 묶여 이곳에 스며들었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황녀님, 한 번도 보지 못하셨습니까?”
헤르난이 천천히 그러나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암살자를.”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할 말을 잃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헤르난은 날 보며 쓰게 웃다가 시선을 깔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신께 암살자라니 말도 되지 않지요.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당신을 죽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럼?”
“당신이 죽음으로서 야기되는 충돌과 분노를 원하는 것이지요.”
“……누구의?”
“하나는 당신을 보호 중인 조영관 그라니우스. 그리고 하나는…….”
솨아아아―
바람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잠겨 버렸다. 머리카락이 마구 부딪히고 흩날린다. 나는 그가 일부러 뒷말을 작게 흐렸음을 알았다.
‘내가 알기를 원하지 않는 거다.’
색소가 전부 빠져나간 흰색 머리는 나부꼈고, 나는 사이로 언뜻 보이는 말간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내 헤르난은 눈을 접어 흐리게 웃었는데, 생판 모르는 낯선 이를 보는 기분에 잠깐 사로잡혔다.
아니, 이건 옳지 못한 말이다. 나는 그를 모른다.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그를 제대로 안 적이 있었던가? 그의 눈동자에는 보랏빛 아지랑이가 지금 부는 바람처럼 홰홰 돌아가고 있었다.
‘나를 망쳐서 그라니우스의 분노를 사겠다는 건가.’
쉽게 말해 파벌 싸움에 끼어든 꼴이었다. 아니 끼어든 것도 아니지 내가 죽으면 그라니우스의 분노는 어디로 향하지? 2황자? 황태자? 조각들을 기워 맞췄다. 알 것 같으면서 또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나는 또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나는 위험하지 않아. 이미 내게는 유능한 호위 기사가 있어.”
그리고 ‘일기장’이 있다. 죽음으로 이끌지언정 죽음을 알고 피할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이다. 이 순간 한 번도 암살자의 얼굴 따위 보지 못했다는 의문스러운 사실을 뒤로 제쳐 두었다.
“곧 나타날 이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데?”
“신관입니다. 강력한.”
그가 확신하듯 말했다.
“당신의 호위 기사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신관의 기척은 신관만이 알 수 있지요. 저는 이쪽으로 특히 특화된 사람을 압니다.”
나는 안개 사이에 갇힌 것처럼 흐릿한 머릿속을 게워 내려고 애쓰면서 흐읍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누군데?”
눈을 올리자 그가 하늘과 어울리는 낯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접니다.”
그가 웃는 순간 잠깐 잎사귀 따위가 반짝이며 예뻐 보였던 것도 같다. 자신을 자랑하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확실히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남자였다.
“당신이 나를 지키겠다? 우습네. 필요 없어.”
“당신 옆에는 유능한 신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 내겐 4황자 오라버니가 있어.”
“그분이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웃으며 날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늘색 눈동자에 보랏빛이 번졌다. 카스토르와 소릭스라는 예시를 보았다. 신관의 눈동자가 다른 색으로 섞여 이지러질 때는 능력을 쓸 때였다.
‘헤르난은 어떤 능력을 가졌지?’
어느새 그가 다가와 손을 잡았다.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이 여리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절대, 이 거리를 넘지 않겠습니다.”
그가 내 손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약지에 꼭 눌러 붙인 체온이 낯설게 느껴진다.
“신관이 쓰는 독은 신관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어 말하는 신관의 능력들은 도무지 나 혼자서는 피할 수 없는 종류였으니까.
“그러니 저는 딱 여기까지만,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시퍼렇게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을 마두 뒤흔들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그는 무언의 허락에 부드럽게 웃었다. 확실히 그는 계산적이었다.
“욕심으로 당신을 잃기 싫으니까요.”
* * *
그날 밤 돌아온 나는 가장 좋은 방으로 옮기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고 하면 아올레시아가 쓰던 침실이었다. 레베카는 이제 주인도 바뀌었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이 될 때까지 하녀들과 함께 아올레시아의 방을 정리했다. 말이 정리지 나와 레베카는 하녀들이 일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무거운 걸 들고 끙끙거리는 하녀를 보고 있으려니 아오지 탄광의 몹쓸 감독관이 된 기분이어서 씁쓸했다. 그렇다고 도울 수는 없었다. 레베카의 호령이 내가 아닌 하녀를 향할 테니까.
“비켜, 이건 내가 들게.”
“와. 역시 테베! 궤짝은 거뜬히 드네. 소도 들겠어!”
“오냐. 황소도 번쩍 든다. 비켜.”
하녀들 사이로 독보적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정원을 돌보는 하녀인 테베였다. 그녀는 하녀 셋이서 끙끙대던 궤짝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어깨에 짊어지고 갔다.
평범한 체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힘에 입을 쩍 벌리고 있자, 한나가 슬쩍 속삭인다.
“황녀님, 제가 지난번에 얘기한 테베에요. 외할아버지가 힘의 신관인 친구요.”
“힘의 신관?”
이제는 보호자가 된 그라니우스가 힘의 대신관이 아니었던가?
‘문짝 정도는 쉽게 부숴 버렸던 괴력의 소유자였지.’
음, 힘의 신관의 ‘힘’이란 성질을 알 것 같다.
테베의 활약으로 짐 정리는 하루 만에 끝났다. 정리는 결국 오래 살았던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은 물건이 꽤 많았다. 그중에는 보석도 있었다.
‘아올레시아는 왜 이 값진 것을 버리고 갔지?’
레베카마저 이걸 왜 두고 갔지 하는 얼굴이었으니, 아올레시아는 간소한 짐만 챙겨 이곳을 떠난 것 같았다.
‘황제가 더 좋은 걸 사 주리라 생각했을지도.’
마지막으로 옷장을 정리하기로 하고 옷가지를 전부 꺼내어 옮겨 두는데, 레베카가 벌떡 일어났다.
“잠깐, 너 그거 이리로 가져오겠니?”
한나는 몹시도 긴장한 걸음으로 다가와 들고 있던 드레스를 내밀었다. 레베카는 한나가 든 드레스를 만져 보며 세심하게 들여다보다가 작게 웅얼거렸다.
“왜 그래, 레베카?”
“주인님, 이 드레스 장인의 명품名品입니다.”
명품? 프X다, 구X, 샤X? 순간 전생에 잊고 있던 이름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음, 그래. 명품이 그 명품은 아니겠지.’
제국 전통 옷인 ‘이오닉 키톤’이다.
“예복이네요. 연회용입니다.”
드레스는 하늘하늘하고 속이 살짝 비치는 소재에다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 몹시도 부드러웠다. 가슴 쪽이 푹 파여 시원해 보인다. 무엇보다 한 겹 덧댄 천에는 몹시도 화려한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보통 세밀한 것이 아니었다.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한 땀 한 땀 수놓았다는 게 느껴진다.
“어머, 황녀님. 목걸이도 한 벌인가 봐요. 어쩜…….”
“백금이군요.”
한나의 말처럼, 드레스 위로 걸쳐진 목걸이가 장식의 묘미였다. 백금으로 된 얇은 판 가운데 루비가 우뚝 박혀 있으며 조금 심심하다 싶은 세공에 루비가 더해져 화려한 꽃처럼 피워 내고 있었다. 줄은 황금이었다.
“오래전 죽은 장인의 작품이네요. 이건 돈으로 환산하지 못할 겁니다.”
“와아…….”
나는 안목에는 자신 없지만, 확실히 내가 가진 어떤 옷과 장신구보다 좋아 보였다. 명화를 봤을 때 잘 알지 못하지만 ‘아 대단한 그림이구나’ 느끼듯 지금 이 옷에 느끼는 감정이 그러했다.
‘이런 옷마저 버리고 간 아올레시아가 대단하게 느껴지는데.’
으음, 역시 아올레시아. 범상치 않은 사람이구나.
“이건 남겨 두는 편이 좋겠군요. 부르는 게 값일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해 둔 아올레시아의 옷들은 기혼자가 입는 ‘스톨라’거나 지나치게 푹 파여 있어 나와는 대부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이 옷만큼은 내 나이쯤 되는 소녀가 입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레베카는 옷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어 말했다.
“새 옷이군요. 한 번도 입지 않았어요.”
과연. 목걸이의 고정 장치가 그대로였다. 나는 더욱 의문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정리가 끝났다. 하늘은 어느새 깜깜한 저녁이었다.
“주인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레베카는 알면 알수록 가진 것이 많았다. 일단 유일한 공녀로서의 직위, 이미 나보다 앞서 사교계에 나가 다져 놓은 입지, 그리고 부친의 사랑. 아벤타 공작의 정치적 위치가 어떠한지 모르나 오늘 헤르난에게 들은 얘기 때문인지 오늘따라 그녀가 눈에 밟혔다.
“……팔은 어떠십니까?”
“웅. 그냥 그래.”
최근에야 알게 된 건데 레베카는 내 상처를 보며 누그러지는 얼굴을 한다. 그건 길고양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태도 같다. 길고양이를 귀여워할 수는 있지만, 집 안에 들이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생각을 거친다.
그녀는 때때로 복잡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나를 믿어도 될까 의심하면서 동시에 다가온다. 그걸 보면서 비록 그녀가 여기 오게 된 꿍꿍이는 찾지 못했으나,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있으면 알게 되겠지. 왜 시녀가 된 건지.’
사실 그녀가 직접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붉은 머리 아가씨를 보며 피식 웃었다.
“……무엇을 쓰고 계셨습니까?”
“4황자 오라버니께 편지. 오른손으로는 조금 힘드네.”
“……주인님께선 왼손잡이셨지요.”
“응.”
불편해 죽겠어. 우는 시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하필 글 쓰는 손을 다칠게 뭐람. 깃털 펜은 펜촉이 얇아 몹시도 섬세한 움직임을 요구했다. 붕대를 감고 있는 팔로는 무리였다.
“……대필이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해 드릴까요?”
레베카가 괴발개발 그림인지 모를 글씨를 보며 물었다.
“이상해?”
좀처럼 시간 외 근무를 하지 않는 시녀님이 자발적으로 나설 만큼 별로인가 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다 낫고 쓰지 뭐.”
레베카가 차와 약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가 약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뒤로부터 내가 약과 함께 수면제까지 먹는지 꼼꼼히 지켜보고선 돌아갔다.
‘끙, 큰일이다.’
오늘에야말로 아모르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낮에는 교육이 있으니 레베카가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밥 먹듯 드나드는 플뢰온까지.
결국 아모르를 찾아가려면 밤이어야 하는데, 밤에는 꼼꼼하게 약을 먹이는 시녀님 덕에 꼼짝없이 잠들어 넘기길 수차례. 나는 며칠 전 팔을 다친 그날 밤으로부터 아모르에게 아무런 말도 서신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아모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모르,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나는 아모르에게 정원을 부탁했지만, 개가 나타날 거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었다. 그가 화를 낼 것 같기도 했고,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면 곤란해질 테니까. 그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에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알면…….
눈앞에 선연했다. 거기다 이렇게 며칠씩 미루고 말았으니…….
“……오라버니, 듣고 있죠? 나 정말 어쩔 수 없는 거라구요.”
창밖의 나무를 향해 말을 걸어 보지만, 나무는 말이 없다. 팔목에 매인 아모르의 팔찌를 손에 쥐었다가 편다. 서신조차 없으니, 그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답답하네.”
강한 수면제가 나를 수마로 이끌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우리는 대화조차 힘들구나. 그제야, 미안함이 물밀듯 몰려왔다.
* * *
“으응, 추워…….”
수면제를 먹고 푹 잠이 든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사방이 아주 깜깜한 밤이었다.
“으. 한나가 닫지 않았나……?”
발코니의 문이 아주 활짝 열려 있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핑, 도는 현기증에 미간을 찌푸린다.
“약이 안 맞나…….”
겨우 팔 조금 다친 것치고 불편함이 너무 크다. 물론 조금 다쳤다는 내 의견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 과다 출혈만 아니었어도 지금보다 움직일 만했겠지.
<8번째 가지시여. 부, 부, 부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상처를 바로 낫게 해 드릴 순 있으나 그리하면 면역력이 떨어지십니다. 그러니 약과 병행하려 합니다.>
신관이 하얀 바탕에 노란 줄이 죽죽 그인 법의를 덜덜 떨며 말했다. 그 신관 플뢰온에게 끌려와서 제정신이 아니었지. 마취가 풀리려는지 왼팔에서 미약한 욱신거림이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이불을 거둬 내며 열려 있는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시간상 오전 3시쯤 되었을까? 창문으로 반짝거리는 별과 푸른 달이 보였다.
“닫을까. 추운데.”
몸을 일으키는데 바닥에 디디려는 몸이 도로 고꾸라졌다.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긴 느낌이었다.
“……넝쿨?”
막 눈이 어둠에 익기 시작한 가운데 녹색 식물이 눈에 띄었다. 한 군데가 아니었다. 침대 위, 베개 옆. 침대 밑, 옆으로 옮겨 가 카펫, 탁자 옆, 궤짝 위, 그리고 다시 창문으로. 봉긋이 피어난 잎사귀가 있었다.
“꽃이다.”
발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에 고개를 숙인다. 넝쿨에서 꽃잎이 비처럼 흩날린다. 식물이 살아 움직이며 싹을 움트고 꽃을 피워 냈다. 잠깐 사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정원이 생겨났다. 나는 잠시 이 꽃과 나무의 향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발코니 기둥 옆으로 흰 토가 자락이 거친 바람에 펄럭거렸다.
“이제 내가 보이나?”
아모르가, 꽃과 나무와 그윽한 향기가 휘날리는 곳에서 오로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양 창문에 기대어서 날 보고 있었다.
흐트러진 옷차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헐렁한 튜닉에 흰 천을 대충 이불처럼 둘둘 갈아맨 차림이었다. 헐렁한 옷 사이로 선명하게 도드라진 쇄골이 보인다. 옷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드러난 목선이라거나 핏줄이 몹시도 새하얬다.
“……오, 라버니.”
시선이 마주치자 아모르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대로 나를 쭉 훑었다.
그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비틀비틀. 평평한 땅임에도 그는 잘 걷지 못했다. 꼭 처음 내딛는 걸음처럼 외줄 타듯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평소보다 더 창백한 낯이었다.
“괜찮아요?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조용히 해.”
마침내 내게 도달한 아모르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콜록콜록 거친 기침을 하며 비틀댄다. 벌떡 일어난 나보다 넝쿨이 빨랐다.
“하…….”
기침이 멈췄다. 잠깐 제 손바닥을 보는 것 같던 그는 손을 뒤로 숨기면서 고개를 들었다. 잠깐 손바닥에서 새까만 것이 보인 것도 같았다. 뭐였지? 그러나 그가 오만한 낯으로 나를 붙들면서 마주 보게 했다. 나를 샅샅이 훑는 시선이 데구루루 내려가 붕대를 칭칭 감아 놓은 팔로 향했다.
“꼴 한번 보기 좋구나.”
멍하던 시야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왜 네가 여기 있어?’
아모르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감시 속에 자신의 궁에 갇힌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오라버니?”
어리둥절한 얼굴이 만족스러웠던지 곧 그가 화사하게 지는 꽃처럼 그렇게 웃었다. 밤이라 지독하게 잠긴 음성, 발갛게 달아오른 눈꼬리. 힘없는 미소가 오히려 덧없고 퇴폐적으로 다가왔다.
“낯짝 한번 보기 힘들어. 기어이 내가 찾아오게 해. 안 그래?”
그가 조용하고 나긋하게 말을 붙였다.
“오라버니가 왜 여기 있어요? 날 찾아온 거예요?”
“글쎄.”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거 말고,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아모르는 천천히 침대 기둥을 짚고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손으로 사르르 떨어져 내린 하늘빛 머리칼을 살짝 치워 내자 달빛 아래 인위적으로 그려 낸 천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네 입으로 듣고 싶은데.”
머릿속으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들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화…… 났어요?”
아모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장 할 말이 많은데 정리가 되질 않아서 어느 것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한동안 침묵이 잎사귀처럼 사박사박 내려앉았다.
그에게 미안한 것이 있던 나는 이불을 꽉 쥐었다 놓으면서 그의 눈썹 사이를 의미 없이 응시했다. 혼자 재잘재잘 떠들었다.
“죄송해요. 빠, 빨리 찾아가고 싶었는데!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시녀랑 6황자 오라비가 붙잡고 있어서요. 밤에는 수면제에 빠져서 잠들었고……. 말하다 보니 변명 같은데, 음.”
“죽으려 했더구나.”
아모르가 딱 잘라 끼어들었다.
“잘도.”
그가 픽 웃으며 비웃듯이 말했다.
“네 입으로 동료라 지껄였다.”
그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희미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화가 난 걸까?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기울이면서 웃음기를 싹 지워 내는 아모르를 보았다.
“뭐가?”
희미한 색채 때문인지 달빛만 아스라이 비추는 공간에 그는 옅은 안개처럼 서 있었다. 어쩐지 내 공간에서 아모르를 보려니 몹시도 생경하고 낯설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죽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죽으려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서늘한 분노와 서글픔을 녹색 눈동자에 담았다. 그마저 자존심 상한다는 듯 희미한 울분이 엉킨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엇에 화가 났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은데, 그는 말하고 싶지 않아 보인다.
아모르가 혀를 차며 긴 숨을 토해 냈다.
“너와 얘기하다 보면, 네 그 멍청함에 질식할 것 같다.”
흐릿한 녹빛 눈동자가 정제되지 못한 무언가로 일렁이고 있었다.
“잘 구해 줘 놓고. 화내지 말아요. 잘 살았는걸.”
“입 다물어.”
검지로 내 입을 가로막은 아모르가 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냉정하게 일갈했다. 손끝은 차가웠다. 지금 아모르는 분명 심기가 뒤틀려 있다. 마치 내가 그를 살리러 갔던 날처럼. 난 그의 손가락을 잡아서 아래로 내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역시, 미리 말해 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거죠?”
분명 잠깐은 위험했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하지만 난 오라버니가 구해 줄 거라 믿었고, 내 호위 기사를 믿었어요. 결국 나는 살았고, 지난 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모두가 제때 와 주었고 나와 레베카는 죽지 않았다. 나는 살아서 그를 보고 있으며, 그는 지금 내 궁에 있다. 지금은 그 사실이 더 중요하다.
치미는 분노를 풀러 이곳까지 행차한 걸까? 그 성질머리 정말 대단하다.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의 시선이 자꾸 팔 언저리에 머물렀으니까.
“아프지 않아요.”
나는 팔을 붕붕 휘둘렀다.
“마취약을 다발로 먹어요. 멀쩡히 살아 있는 걸요.”
그의 미간이 삽시간에 찌푸려진다.
“……너덜너덜해진 걸레 꼴로 살아남은 걸 잘도 살았다고 말하는구나.”
당장 낫지도 않을 상처 따위를 들여다볼 때가 아니었다. 왜 그가 여기까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알아야 한다. 혹 이것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면 몹시도 위험했다.
카스토르가 어떤 인간인가. 형제조차도 썰어 버리는 인간이었다. 아모르가 모를 리 없다. 그 못지않게 카스토르를 아는 사람이 나였다. 이렇게 희희낙락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야말로 오라버니가 걱정된다고요.”
옷자락을 더듬어 소매 속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갑다. 이 몸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몸도 약하면서.’
순간, 그가 감기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무슨 사람이 화를 내러 여기까지 온담. 누가 멍청한지 모르겠어요.”
걱정된다. 지금 네 몸 상태라거나 네가 여기 온 이유도. 다친 사람은 난데 어째서 멀쩡한 아모르를 걱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결계인지 감시인지는 몰라도, 책 속 아모르가 루스벨라에게 ‘자신은 밖으로 나가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라고 언급했었다. 이제야 떠올라 버렸다.
‘분명, 내가 아는 아모르는 평생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처지였어.’
그저 웃어넘기려 했던 것이 왈칵 두려움으로 범람했다. 그제야 초조해졌다. 나는 더는 누가 다치고 죽는 일을 견딜 수 없다.
“답답하게 하지 말고 얼른 말해요. 이곳에 와서 위험해진 거예요? 아니죠? 죽는다거나, 네?”
“죽어? 누가?”
나긋한 눈이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감정이 고인 눈동자가 밤바다처럼 고요하게 일렁거렸다. 그는 내게 사로잡힌 손을 떼어 내지 않으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건조한 목소리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면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제대로 말해요. 정말 안전한 것 맞아요? 내일 찾아가면 무탈하게 볼 수 있는 거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잖아?”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요! 나는 오라버니가 걱정된다고 했잖아요.”
그의 옷을 벼랑 끝에 내몰려 겨우 잡은 밧줄처럼 잡고서 간절하게 말했다. 부탁이니까 네가 안전하다고 해. 어서!
“이대로 돌아가서 다치면 어떡해요? 왜 밖으로 나온 거예요? 내가 못 미더웠어요? 나 찾아가려 했단 말예요. 무슨 사람이 화를 내려 여기까지 찾아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전한 것 맞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곳에 평생 머물 줄 알아요. 당장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지 않으면 안 보낼 거예요.”
그의 눈에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 넘칠 듯 일렁거렸다.
아모르는 재미있다는 듯 성마른 손길로 자신을 잡은 손을 쓸며, 느른하게 웃었다.
“네가 보내지 않으면? 나랑 평생 살 건가?”
아니. 내가 죽어서라도 널 구하겠지. 담백하게 응시하면서 그를 잡아당겼다.
‘너는 내가 구했어.’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수십 번 그를 살렸다. 그는 기억하지 못해도 살리며 마주한 기억이 내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너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어쩌면 나보다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잘 들어요.”
나는 아모르의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새지 않고 전부 새겨듣도록,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이미 오라버니를 한 번 구했어. 내가 구한 목숨 함부로 굴리지 말아요.”
내가 구했어. 죽게 두지 않아.
고요한 눈으로 말없이 나를 쳐다보던 아모르는 뺨에 얹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잡고는 천천히 아래로 늘어트렸다. 직시해 오는 눈동자가 물처럼 깊고 말갛다.
“내겐 두 번의 기회가 있었어.”
“기회?”
그는 잠깐 창문 밖을 보는 것 같았다. 나무가 솨아아,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낯을 조금 누그러트렸다.
“평생,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
기회라니? 나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아모르가 말한 기회라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책 속에서 그런 사실을 읽은 바가 없다.
‘아니, 기억하지 못하나?’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루스벨라를 만날 무렵에 그는 이미 기회를 다 써 버린 뒤였을까? 초조하게 올려다본 아모르는 초연한 기색이었다.
“자세히 말해 봐요.”
“방금 말한 그대로다.”
긴 하늘빛 속눈썹에 하야스름한 달빛이 쌓여 있었다. 희미한 밤하늘 아래서 보는 아모르는 평소보다 더 창백했고 밤사이 내린 눈처럼 고즈넉하게 보였다.
후회하는 걸까?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이 콱 막혀 온다. 아니,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거다. 평생에 단 두 번이라니. 그건 너무 잔인하니까.
“……돌아가요.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내 의도는 묻지 않나? 궁금하다더니.”
“안 들을래요. 오라버니는 그날 나를 구했고. 그걸로 됐잖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쯤 늦었지. 미리 말하지 않았던 누구 때문에.”
그가 손을 놓았고, 픽,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뒤늦게 치료나 하러 온 거고.”
천이 스르륵 내려가며 그의 어깨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네. 내가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까 치료 같은 거 말고 당장 돌아가요.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응? 어서 가요. 제발.”
이처럼 소중한 기회를 겨우 내 상처 따위에 낭비하지 마. 내가 뭐라고 그걸 써? 어차피 죽었다 살아나면 나을 상처라고. 난 정말 아무렇지 않단 말이야.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당장 그가 내게 해 준 것이 까마득해서. 아득하다.
<너는 언젠가 내게 동료라 말했지.>
나는 아모르가 내게 마음을 전부 주었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내게 아직 거리감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해했다. 내가 당장 헤르난을 믿지 못하듯 아직 아모르도 나를 재단해 보고 있을지 모른다. 서글플지언정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 밑이 시큰한 지금 외치고 싶어졌다. 지금 네 얼굴은 꼭 다른 걸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네가 죽었을 때보다 네가 살아 있을 때 덜 아플 것 같으니까.>
하고 싶은 말들이 꾹꾹 차올랐지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은 가늠할 수 없이 깊어 나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죽어 버린 낯으로 사과 받아도 하나도 기쁘지 않아. 화만 날 뿐이지.”
“…….”
감이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하던 아모르에게는 원 의미로 들리지 않음을 안다.
“내 능력은 사람을 죽이는 독을 만든다. 독과 약은 종이 한 장 차이지. 나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사람을 살리는 약 또한 만들 수 있다는 소리야.”
그가 침대로 손을 뻗었다.
“너는 늘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떠들지. 정말 날 알아?”
신기하게도 그가 손을 뻗는 자리로 넝쿨이 피어나더니, 생전 처음 보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작고 풋풋한 열매는 건드리지 않아도 톡 터져 버렸다. 떨어져 내리던 액체는 단단하게 뭉쳐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아모르는 다른 꽃, 다른 나무로 몇 번을 반복해 액체를 뭉친 덩어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천천히 원래의 까칠한 그로 돌아와 메마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얼굴이 한참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내 입 안에 방금 만든 덩어리를 집어넣었다.
단단하던 덩어리는 금방 액체가 되었고, 꿀꺽 삼킬 때까지 아모르는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았다. 끝까지 손가락을 내 입술에서 떼어 내지 않았다.
“욱.”
“뱉지 마. 뱉으면 화낼 거다.”
뒤늦게 목구멍이 홧홧해졌다. 배 속에서부터 식도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목을 잡고 끙끙대는 짐승처럼 아모르에게 매달렸다. 가녀려 보이던 그는 의외로 나를 굳건히 버텨 냈다. 그가 나를 쓰다듬은 것도 같았다.
아픔이 잦아들고, 아모르는 떨어지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써요.”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지. 평생 감사하도록 해. 어느 누구도 먹지 못할 것을 먹었으니까.”
그가 미소를 틔웠다. 조금 부끄러운 것도 같다. 애도 아니고 약이 쓰다며 끙끙대는 꼴이라니. 씁쓰레한 입맛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눈을 뜨자 기울어진 낯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이유를 말해 봐.”
조금 전 누그러트렸던 얼굴은 모두 착각이었다는 양 부드러웠던 얼굴이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매서워졌다. 나는 착잡해졌다.
‘조금 전까지 부드러운 게 딱 보기 좋았는데.’
날이 선 시선과 목소리를 그대로 받으면서 나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서릿발 같은 경고가 앞섰다.
“설마하니, 대충 얼버무릴 생각은 마. 정말로 화를 낼지도 모르겠으니까.”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굳이 거짓을 꾸며 낼 필요가 없었다. 절반의 진실을 아는 아모르다.
“오라버니는 이미 아는 걸 거짓을 말해 뭐 하겠어요? 알고 계시겠지만 나는 미래를 알아요. 그래서 그날 개가 나타나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째서 피하지 않았지?”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꼭 거기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네. 그래야만 했죠.”
난 서글피 웃었다.
“나는요. 내 죽음뿐 아니라 주변의 죽음도 봐요. 우습게도…… 나만 아는 미래에서 내가 그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 버려요.”
“…….”
“나는, 그렇게 둘 수 없었어요. 중요한 사람이니까. 오라버니, 제 시녀는 그날 제가 구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모르겠어요?”
그가 계속 해 보라는 듯 눈썹을 우아하게 꺾어 올렸다. 순간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어 내야 했다.
“나는 내 미래를 보는 힘을 이용했어요. 나는 레베카, 내 시녀의 마음을 얻어야 했으니까.”
“……생명을 구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백컨대 난 전생에서부터 솔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늘 스스로를 숨기고 감춰 왔던 나는 지금처럼 진실을 고하는 순간이 고역스럽고 힘들었다.
껍질이 모조리 벗겨져 날것이 된 듯 뺨이 달아오르고, 귀가 뜨거웠다.
이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렵다. 만약 시간이 돌아가 오늘이 전부 없었던 일이 돼 버리면, 다시 고백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어 버리겠지.
나는 아모르에게 미래를 알고 있노라 말하던 날 내 모든 용기를 끌어다 썼다. 다행히 그날은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날의 망설임을 지우느라 모든 용기를 끌어다 써서 앞으로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일이 다시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가 나를 탓하지 않았으면 했다. 너는 내 유일한 동지니까. 동지인 네가 소중하니까. 내 용기를 없던 것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나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조금 빠르다 싶은 어조로 말을 띄웠다.
“오라버니는 나를 탓하지 말아요.”
나라고 편해서 자처한 길은 아니었어.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냐고. 그렇지만,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치켜드는 거북함을 삼켜 낸다.
“어쩔 수…… 어쩔 수 없잖아요? 오라버니는 눈앞으로 다가온 빛을 포기할 수 있어요? 아른거리는데? 결국 오라버니도 매일 독을 먹으면서 악착같이 살잖아.”
나도 너처럼 독하게 마음먹은 거야. 레베카는 중요한 장기 말이 될 거거든.
레베카에게 가진 개인적 감정이나 측은함을 제외하고서라도, 당장 황녀로서 성년식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아직 무지한 세계를 헤쳐 가는 데 그녀는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그녀를 내 편으로 두면 이득이다. 그래서 그녀에겐 잔인하다 싶은 일을 벌였다.
“이렇게까지 이해득실과 계산을 따져 가며 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처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괜찮았던 적이 없었다. 나는 울 것처럼 눈을 가렸다.
“봐요. 나 좀 봐. 오라버니. 이 손 보여요?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손에 쥔 건 겨우 한 줌인데, 그 한 줌조차 지킬 힘이 없어…….”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득실을 계산한 나는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했던 일기장과 같다. 그렇지만 외면했다. 인정해 버리면 지나간 내 삶이 너무 불쌍했으니까. 언젠가 다시 찾아올지 모를 카스토르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래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건 네가 다그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탁이니까 너만은 나를 탓하지 마. 그렇게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지 마. 제발.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너무 멍청해서 할 말을 잃게 하는군. 미쳤어. 미친 게 분명해. 네 이유는 전혀 정당하지 않아. 순 엉터리다. 그까짓 시녀 마음이 뭐라고 몸을 다쳐!”
그가 왈칵 터트리듯 소리를 높였다.
“어리석어!”
그는 분에 못 이겨 얼굴을 문지르며, 날카롭게 혀를 찼다.
“그럼 내가 어떡해요? 내 편이 가지고 싶은데! 나는 내 편이 필요하고, 많아야 해요. 또 강해야 해. 그런데 가진 건 겨우 이 몸뚱이뿐인데!”
고개를 들자, 아모르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지만 콜록거리는 긴 숨결이 피부를 스치는 것 같았다.
“내가 있잖아!”
“거짓말. 오라버니는 날 의심하고 있잖아요!”
아모르가 짜증스러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짚었다. 순간 돌풍이 휙 불며 커튼이며 머리카락이며 모두를 휩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며 커튼처럼 드리운 머리카락을 치워 냈다.
아모르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 잠깐 파도에 쓸려 나가는 모래처럼 덧없게 보였다.
천천히 아모르에게로 손을 뻗는데 순간 손목이 휙 잡혔다. 나는 손목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나를 잡은 아모르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궂은 하늘 같기도, 동화 속 물레 바늘 같기도 했다. 아주 까칠하고 서늘한 낯으로 웃고 있었다.
“너. 네게 마음 전부 주면 앞으로 이런 짓을 하지 않을 테냐?”
그를 보면서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화가 난 게 아니었나. 왜 지금 표정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는 마치 범람하는 서글픔에 잠겨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대답해. 내가 마음 전부 주면.”
그가 낮고 날카롭게 으르렁거렸다.
“다신, 계집애 하나 구하겠다고 뛰어들지 않을 거냐고.”
마음이 소란스럽다. 당신은 나를 아직 경계하지 않았어? 완전히 그 마음 다 주는 대신 재어 보고 있지 않았냐고. 녹빛 눈동자가 달빛에 반사되어 여리게 보였다.
‘아직 저렇게 매서운데.’
그가 내게 약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약해져도 괜찮다. 기대도 괜찮다. 하지만 방금처럼은 싫다. 네가 울상 지으면 정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것 같으니까. 너는 나더러 어찌하라고. 내가 어떻게 이용할 줄 알고 내게 전부 풀어내 보이는 거야.
“됐다. 잊어버려.”
멍청하니 눈을 깜빡거리는 나를 보면서 아모르는 금방 져 버릴 꽃처럼 그렇게 웃었다.
나는 그에게 더는 가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는 아직 내게 경계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던 걸까?
그는 평생을 자신을 이용한 사람들의 손에 갇혀 지내 왔다. 솔직히 그의 사정을 생각했을 때 내게 아직 의구심을 품고 거리를 둔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쓸데없는 소릴 지껄였어.”
그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움푹 도드라진 쇄골 밑으로 푹 보조개 같은 것이 파였다.
“그만 가 보겠다.”
그의 피부는 달빛 아래서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빛을 내었다. 그는 창문 밖 멀게 보이는 숲을 바라보다가 곧 내게 시선을 향했다.
“상처는 2시간이면 나을 거다. 참고해 둬.”
눈을 내리깔며 아모르가 손을 놓았다.
“오라버니는요? 오라버니는 다치지 않나요? 이대로 안전해요?”
열려 있는 창문으로 바람이 쌩하니 불면서 그의 흰 옷자락이 깃털처럼 나풀나풀 휘날렸다. 눈을 뜨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모르와 그의 옆으로 새하얀 새가 퍼덕이며 날고 있었다. 낯익은 새였다.
“네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전부 ‘그’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모르가 손을 뻗어 새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아모르 어깨 위로 올라간 새는 부리로 그를 콕 쪼았다가 구르륵 구슬피 울었다. 꼭 한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머리를 들어 올린 새가 나를 보았을 때, 새의 눈동자를 보았다. 아주 선명하리만치 푸른 하늘빛이었다.
“……저 새는 뭐죠?”
“나를 감시하는 자. 그리고…… 오늘 만행을 눈감아 줄 사람.”
구르르륵! 새가 세차게 울면서 그를 콕콕 쪼았다. 아모르는 새를 바라보며 풋 비웃듯 웃음을 터트린다.
“이자만 입 다물면 모르는 일이거든. 안 그래?”
“이자…… 사람?”
그러고는 건조하고 나긋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사람.”
나는 익히 알고 있는 새를 보며 혼란에 빠졌다.
“새가 사람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글쎄.”
환상처럼 피워 낸 식물의 정원 안에서 아모르는 꼭 꿈처럼 흐리고 옅게 웃었다. 비록 그 눈이 심해처럼 서늘하게 가라앉아 차가워 보였지만.
엷은 하늘빛 머리칼이 흔들거리는 동안 그는 지상에 내려온 선인仙人 같아 보였다. 돌연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린 그는 꽃과 나무와 넝쿨의 요람이 된 방 안을 훑었다. 그가 까칠하고 사납게 웃었다.
“형님의 ‘귀’와 형님의 ‘눈’이 이곳에 있구나.”
새가 날개를 퍼덕였다. 그가 픽 웃는 것과 함께 고개를 기울인다.
“형님의 눈과 귀가 여기 너를 위해 모였으니―. 너도 어지간히 대단한 여자구나.”
푸른 달빛 아래서 가장 곱고 예쁜 잎사귀를 닮은 아모르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떼는 순간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식물이 오그라들었다. 그의 시선이 따르는 대로 넝쿨은 물러났고 꽃은 시들었으며, 마침내 그는 꽃과 나무의 무덤에서 천천히 눈을 깜빡거린다.
“이 새의 정체는 곧 알게 될 거야. 스스로 밝히겠지.”
모든 식물들이 사라진 공간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떨어진 잎이나 가지 따위가 조금 전까지 이곳이 자유로운 정원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한 가지만 알려 줘요.”
가슴이 울렁거렸지만,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그가 고통을 딛고 이곳에 온 게,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아모르가, 네가 정녕 이곳에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오라버니는 이제 진심으로 날 좋아해요?”
“…….”
그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떨 것 같아?”
팔랑팔랑. 채 지지 않은 꽃잎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내 친절은 여기까지야.”
* * *
3일 뒤 있을 티타임 준비가 얼추 되었다. 레베카는 나와 함께 최종 점검을 해 보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다른 주제를 꺼냈다.
“건국제가 두 달 남았습니다.”
나는 몹시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레베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 티타임 얘기하던 중 아니었어?”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기에 드리는 말이랍니다, 주인님. 파트로누스 말이죠. 당장 지금 구하는 것도 많이 늦으셨답니다.”
그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날 내려다보며 서늘한 주의를 주었다.
일주일 전 레베카는 건국제 이야기를 넌지시 흘리면서 내게 파트로누스를 누구로 하겠느냐 질문했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던지라 한 번 생각해 보겠다고 대충 대꾸했는데, 오늘 다시 물어 온다.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지금 당장 필요해?”
나는 펼쳐진 책으로 시선을 의미 없이 던지며 물었다.
“괜찮은 남자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게 말해도 모르겠는걸.”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으셔요. 하룻밤 즐겁게 보낼 놀이 상대이니까.”
레베카. 너 고작해야 나보다 두 살 많지 않았니? 방금 레베카에게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는데.
“우웅. 그렇게 말해도…….”
장장 17년간을 궁에 갇혀 지내다시피 한 황녀가 아는 귀족이 있겠느냐고.
그러나 사뭇 비장한 레베카는 나름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낯이었다.
“지금껏 굳이 여쭤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미 구해 두신 것 아니었나요? 솔레토리움에는 젊고 실력 또한 갖춘 관리들이 많다 들었습니다.”
“으응?”
“설마, 없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아무래도 제4 행정청에 나가는 걸 그곳의 귀족들과 연이 닿아서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따지고 들면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사람들이 진짜 나를 모른다는 게 문제겠지. 펜네라거나 소릭스라거나. 괜찮을 법한데. 레베카의 기준은 턱없이 높다.
“황녀님의 신분에 걸맞은 고위 관리이거나 이름 높은 신관이어야 합니다. 혹 알려져 있지 않아도 실력이 받쳐 준다면 괜찮습니다. 없습니까?”
“……그라니우스?”
은근히 적절한 인선이라 생각했건만 레베카의 다음 말로 싹 지워졌다.
“그라니우스 님이요? 혹, 아델리스 쿠룰루스 말씀이십니까? 농담이시겠지요! 황녀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폭은 이십 대 남성까지란 말입니다! 그분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아, 나이 차까지 보던가. 생각보다 까다롭다.
“그라니우스가 별로야?”
“아니! 나이 차가 아니라 혼기가…… 하. 됐습니다. 이 순간 더는 제가 주인님을 한심하게 여기지 않게 해 주세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그녀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새파랗게 대꾸했다.
“이건 호오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조영관의 위치는 주인님의 상대로 손색없습니다만, 좀 더 가능성 있는 사람을 골라 주시겠습니까?”
“가능성이라니?”
“당연한 거 아닙니까. 혼인이지요.”
“혼인? 결혼?”
내가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정해 준 사람과 평생 살게 되다니. 내 처지를 익히 알지만 그럼에도 이럴 때는 생경하다. 아마존에서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던 사람이 베르사유 궁전에 떨어진 기분이랄까.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에 무도회를 앞두고 있었다. 복잡한 기분이다.
“으으으음. 파트로누스…….”
입을 우물거리며 미적대고 있는데, 엉뚱한 곳에서 답이 들려왔다.
“뭐야, 왜 고민하는데? 공작이 있잖아.”
“……공작?”
레베카가 중얼거렸다.
나는 황급히 소파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삐딱하게 기댄 플뢰온이 있었다. 나는 입모양으로 닥치라는 말 따위를 뻐끔거렸다.
“너, 공작이랑 교제하잖아?”
눈치챌 오라비였으면 이곳에 있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아, 정식으로 교제한 건 아닌가?”
“아니야!”
저 도움이라곤 전혀 안 되는 인간 같으니라고! 나는 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플뢰온은 고개를 기울이다가 생각 없이 툭 뱉었다.
“근데 데이트했으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
“이게,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주인님!”
레베카가 질겁한 얼굴로 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내게서 답을 듣기는 글렀다 판단했는지 플뢰온 쪽으로 휙 돌렸는데, 플뢰온은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손을 들어 보였다.
“디볼로 공작. 쟤 좋아하잖아.”
레베카의 눈이 작아졌다가 커졌다가 다시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오해가 순조롭게 깊어졌다는 알림이 울린 것 같다.
“주인님?”
“으응? 아냐. 아니라니까! 오라버니가 마음대로 지껄이는 거야!”
“뭐야, 그럼 그날은 뭔데? 그놈이 너를 일방적으로 쫓는.”
“넌, 입 다물어 줘.”
닥쳐 줘. 누구랄 것도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조용하게 서 있던 한나마저 무언의 긍정을 띠고 있다. 아니 잠깐. 너마저? 스쳐 가는 배신감에 얼굴을 쓸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옆으로 내리꽂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레베카가 입을 달싹였다가, 천천히 입 밖으로 말을 꺼낸다.
“한 번만 여쭙겠습니다. 혼인을 약속하셨습니까?”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터져 나온 건 여전히 의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무슨 소리야. 공작이랑? 아냐, 아냐. 그냥 몇 번 만났고, 그걸로 사귄 건.”
“가지고 놀았냐?”
“아니야!”
이 오라버니가 정말!
“부탁이니, 약혼 사실은 직접 듣게 해 주세요.”
“……아니라니까.”
나는 한참 동안 변명과 오해와 착각을 설명하고 나서야 레베카의 깊은 의심을 해소시킬 수 있었다. 하, 이게 다 저 오라비의 입방정 탓이다.
“파트로누스, 오라버니도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만……. 정말 황자님으로 괜찮으신가요? 좋은 기회가 될 텐데요.”
레베카가 말한 좋은 기회란 더 괜찮은 신랑감, 더 좋은 가문, 더 뛰어난 능력 따위의 조건이겠지. 전통으로 정해진 황녀의 춤. 건국제에서 가장 먼저 무대에 선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어떤 통치자도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조건 말이지.’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야. 나한텐 너무 먼 얘기야 아직.”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느지막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연회’, ‘밀회’, ‘하룻밤의 상대’……. 혀끝에 에이는 이토록 달달한 감정이라니.
제국 전통 연회는 향락적이고 퇴폐적이며 문란하다. 제국은 이천 년이나 비옥한 토지를 소유했고, 작물은 언제나 넘치며 풍요로웠다. 잉여 산물은 문화생활에 즐거움으로 쓰이는 법. 온갖 곡주와 과일주, 특히나 와인과 같은 주류 산업이 제국 전반에 걸쳐 발전했다. 이날까지 술은 제국 연회에 빠지지 않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다만 도가 지나쳐서 황금을 포도주에 담가 버리는 미친 짓을 한 적도 있다던가.’
이토록 사치스러운 문화에 반발하며 들어온 윌터의 문화는 엄숙하고 정갈했다. 와인 대신 홍자가 든 찻잔을, 푹 익은 포도 대신 간단한 다과를. 아기자기한 다과회가 젊거나 어린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젊은 층은 새 문화에 길들여졌다.
마치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각종 신조어와 신진 문화에 길들여진 청년 세대와 최신 기기가 낯선 기성세대의 충돌과 같다. 현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은 과도기를 걷고 있었다.
“하여, 폐하께서는 즉위하시고 10년 뒤 정식으로 윌터의 문화를 인정하고 화합을 추구하게 됩니다. 반대했던 보수파 신관들은 더는 막아 본들 소용없다 여기고 동의합니다. 이때부터 제국의 제례에 신문물이 도입되었지요. 그리하여, 행정에도 여러 변화를 거치게 됩니다.”
펜네가 나긋나긋하게 설명하면서 내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가리켰다.
“피피오가 입고 계신 복식은 전통식이로군요.”
“네.”
꽃봉오리처럼 잔뜩 부풀린 윌터의 드레스는 이미 젊은 여성 귀족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고, 하늘하늘한 그리스식―전통식 드레스의 위치를 위협했다.
“전통 연회(쉼포시온)의 경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모여 즐기는 자리입니다. 반면, 윌터의 문화는 소규모로 소소한 모임을 지향하는 편이지요.”
“정반대로군요?”
“예. 학술회처럼 남성 귀족은 같은 남성 귀족과, 티타임은 귀부인은 귀부인끼리 담소를 나누며 각각의 교양과 학식을 나누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티타임에 초대 받으셨다고 하셨지요?”
“으응, 그래요. 나 윌터식 드레스는 처음 입어 보는데 걱정이에요.”
“피피오라면 잘 어울릴 거예요!”
소릭스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도 이토록 귀여운 걸요.”
“고마워요, 소릭스.”
소릭스는 내 미소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했다.
“으음, 그냥 하는 말이 아닌데. 그렇죠. 공작? 공작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러자 헤르난데즈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피피오에게 어떤 옷이 어울릴 것 같아요?”
소릭스를 볼 때는 사무적이던 낯이 내 얘기가 나오자 얼음이 사르르 녹듯 부드럽게 풀어진다.
“무엇이든. 어울리지 않는 게 없을 겁니다.”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예쁘게 접혔다. 나는 미미하게 낯을 찌푸리며 고개 돌렸고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헤르난데즈는 그날 말했던 대로, 내 주변을 돌면서 나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에 불필요한 접촉은 없었다. 한결같이 거리를 지키는 그는 언젠가 내 죽음을 무심하고 서늘하게 보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흘끗 보자, 담백한 낯이다. 이전 절절했던 맹세가 꿈이었던가 싶다.
‘이곳에 ‘불온한 세력’이 정말 존재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지킨다고 말 했지만,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으니까. 그를 이용하려고 마음먹고 나니 믿지 못하는 게 문제다. 속내를 모르겠으니까.
한참 수업을 이어 가는데, 그라니우스가 나를 불렀다.
“막내야.”
호칭을 제외하고 말을 짧게 줄인 걸로 보아 소릭스를 신경 쓴 것 같았다.
“곧 티타임에 참가한다고?”
“네.”
“그, 이런 말 이상하겠지만 말이다…….”
그는 흐음, 소리 내어 나를 바라보다가 어울리지 않게 소릴 죽여서 내게 속삭였다.
“정말 ‘다과회’인 것이냐? 혹시 다과회가 아니고 ‘연회’는 아니겠지?”
“네. 다과회에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나는 그에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물었다. 그라니우스는 침음에 잠겨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공작, 아니 아는 부인이 여는 소소한 파티라 하였어요. 제 ‘친구’가요. 인원도 5명을 넘지 않는다고 했고요. 혹 실수할까 염려하시는 거라면 안심하세요. 아시다시피 제 ‘친구’는 조영관님도 익히 아는 사람이잖아요?”
“그래……. 걱정이 과했나 보구나.”
그의 얼굴이 꼭 안도에 가까운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가 곧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고는 부탁이니 한동안 연회는 참석하지 말라고 내게 부탁했다.
“티타임에만 참석해야 한다. 알겠지? 조심해서 다녀오고, 꼭 집에만 있어 다오.”
“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나는 끄덕이고는 의문에 잠겼다. 그가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나는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황족이라 연회에 참석하지 못할 텐데 말이다.
‘혹 기어이 나를 초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를까.’
그러나 황궁의 적법한 규칙을 어겨 가며 나를 초대하려는 간 큰 귀족은 없을 테다. 혹 있더라도 황족 정도일 텐데……. 내게 흥미를 가질만한 사람이, 그래 카스토르가 있겠지만. 그는 성격상 연회를 주최할 인물이 아니다. 또한 일기장에 카스토르 얘긴 없었으니 안심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런 걸로 안심하는 내가 싫지만…….’
책상으로 돌아오니 소릭스가 반짝반짝 웃고 있었다.
“피피오! 함께 대련장에 가지 않을래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펜네로 보아 말리는 데 실패한 모양이다. 나는 조금 미안함을 담아 웃었다.
“미안해요, 소릭스. 어쩌죠? 나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 해요.”
“정말인가요? 끙…… 할 수 없지요. 그럼 공작님이라도…….”
“저 말입니까?”
소릭스에게 콕 지목당한 헤르난데즈가 우아하게 반문했다.
“네! 저와 한 번만 대련해 주시면 안 될까요?”
헤르난은 내 요청에 따라 솔레토리움 내에서만 곁에 머무르기로 약조했다. 따라서 내 귀가 시간에 칼같이 돌아가는 그였다.
“공작 같은 뛰어난 신관의 실력을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사실 그는 내 궁에서까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플뢰온이 있었으므로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순순히 물러난 헤르난은 내 귀가 시간에 맞춰 자신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곤 했다.
“염치없지만 안 될까요?”
그는 나를 제외한 이곳 사람들에게 정을 두지 않는 것 같았고 소릭스의 청을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는 이쪽을 보면서 조금 고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네? 네네? 기왕이면 승낙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순찰대 사람들이 공작을 매우 보고 싶어 하거든요.”
투명한 그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 다시 소릭스를 보았다. 그는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고개를 기울였다가, 사무적으로 웃는다.
“……좋습니다. 함께하지요.”
“정말입니까? 대장이 몹시도 좋아하겠군요!”
“그렇습니까? 아, 작은 아가씨.”
“네? 네?”
나를 바라본 헤르난의 눈이 휘어졌다.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네, 공작님도.”
나는 떨떠름하게 끄덕였다.
“예.”
그는 늘 나에게 하듯 나긋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맑은 호수같이 푸른 눈은 줄곧 내 어깨를 잡은 소릭스의 손을 보고 있었다.
* * *
마차가 정지했다. 지나가던 풍경이 멈췄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온기를 품은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원피스 단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손을 누군가 부드러이 잡았다.
“데인?”
그곳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아실리.”
새빨간 장미처럼 농익은 붉은 눈동자가 반가움을 띠었다.
“어쩐 일이야? 그동안 아주 바빴다며.”
“사실 아직 바빠. 슬프지만.”
데인의 목소리는 나른한 느낌이 있었다. 그 고요하고 느른한 미성에 잠깐 소름 돋는다. 그는 그런 내가 재미있다는 듯 다정하고도 예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 안 보고 싶었나?”
“응. 그랬던 것 같은데.”
“이런, 섭섭한데.”
그가 짓궂게 속삭였고, 나는 장난치듯 끄덕였다. 곧 데인이 고개를 숙여서 잘 익은 포도같이 매혹적인 웃음을 함빡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그의 뺨을 스쳤다.
“못 당하겠어.”
데인은 중앙 관리들이 입는 짧은 예복에 클레미스를 걸치고 있었다. 황족 고유의 색을 띤 긴 천을 걸친 모습은 신전의 벽화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오늘도 미모가 열 일 하는구나.’
오랜만에 보는 유려한 얼굴을 새기듯 주섬주섬 담았다. 겹겹이 겹친 천이 바람에 물결처럼 부드럽게 나부낀다. 그는 긴 소매가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틀어잡았다. 황족을 상징하는 머리 장식이 바람결에 흔들거리며 금빛 잔상을 남겼다.
나는 그가 일을 하다가 도중에 나왔음을 알았다. 그래도 혈육이랍시고 바쁜 와중에도 찾아와 준 거구나 싶었다.
“요즘, 왜 그렇게 바빠? 그리고 대체 레이 경이랑 뭘 하는 거야?”
어리광 부리듯 묻자 데인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함께하는 미소가 봄볕처럼 다정했다.
“알려 줄까?”
나긋나긋하게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미풍이 마음에도 들어온 것 같았다. 난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가끔 너무 어려운 소릴 하니까 네가 말해 줘도 난 모르겠지.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지?”
“물론이지.”
“플뢰온은 일하던 궁에서 잘린 것 같더라. 할 일이 없으니까 내 궁에 매일 나타나고 있어.”
“그래? 형은 한 번씩 멋대로 행동할 때가 있잖아. 네가 보고 싶었나보다.”
“……플뢰온이? 차라리 레이 경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그래. 그걸 믿겠다.”
내가 질색하자 데인이 허리를 숙여 웃음을 톡 터트렸다. 나나 플뢰온과 다르게 데인은 어릴 적부터 우수한 재원이었다. 무엇이든 잘 해내며 늘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함께했던 황자 수업이 그러했다. 그는 여러 행정청에서 동시에 러브 콜을 받았으며 플뢰온의 성년식을 도운 것도 데인이었다.
새삼스러운 박식함이 아니어도 그를 특정 지을 수 있는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우는 소리 한 번 없이 모든 것에 다정하고 담담한 태도다. 기억하는 순간부터 그는 늘, 오묘한 성숙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어른에서 시작한 듯이 말이다.
“공작 부인의 티타임에 초대 받았다며?”
“벌써 거기까지 소문났어? 플뢰온이지?”
데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잔잔한 얼굴에 미소가 깊게 패였다가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들었다.
“첫 참가잖아. 네 첫 파티는 성년식 이후가 될 줄 알았어.”
“아쉬워?”
데인이 천천히 눈을 깔았다.
“조금.”
낯을 덮었던 미소가 조금 서글프게 변했다.
“이제 와서, 더 늦추면 안 되겠지. 부탁해도?”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 나는 대꾸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일찍이 나가 본 데인은 알고 있겠지. 배경이 없는 힘없는 황족이 어떤 처지인지.’
또한 내가 겪게 될 현실을 느끼고 있다. 알다 뿐일까 아주 생생하고 또렷하게 경험했지. 그의 심경에 잠시 이입해 보다가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난 빨리 나가 보고 싶어.”
이건 내가 원하고 말고의 일이 아닌걸.
“궁금하단 말이야. 바깥세상은 어떨까?”
의무는 한참 뒤로 미뤄 두고 너희와 안온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때는 나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때가 있었어. 지금도 눈앞으로 내가 갈 수 없던 길이 꿈으로 펼쳐지곤 해. 어떡하면 먼 미래의 멸망으로부터 이 오라비와 내 한 몸 빼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간. 다정하고 눈물 날 만큼 평화로운 날들.
평범하게 성장했다면 느지막이 성년이 되었겠지. 한나와 유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도망칠 자금을 야금야금 모으고, 혼인은 열여덟 살 마지막 달까지 버틸 거라고 뻔뻔하게 외쳤을 테지.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
눈을 감으며 지워 냈다. 이미 영원히 지워진 미래였다. 가지 못한 길. 박탈된 선택지는 눈물이 날 만큼 다정했다.
“축하해 주지 않을 거야? 내 첫 ‘티타임’인데?”
생긋 웃으면서 붉은 꽃잎같이 선연한 눈동자를 바라본다. 나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 안 했어, 데인. 그 하베르미아의 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무너지고 망가지고 무뎌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지.
나는 지독한 향수로 악취를 숨겼던 유럽의 귀족처럼 화사한 미소로 너덜너덜해진 나를 숨겼다.
데인은 새하얀 손으로 눈꼬리를 쓸면서 웃었다. 축하해.
“첫 참가로는 연회보다 다과회가 나을 거야. 공작 부인이라 안심이야.”
“으응, 그런 것 같아. 공작 부인은 좋은 분이고. 근데 연회라니? 연회부터 참가하는 사람도 있어?”
“나랑 형은 그랬지.”
나는 놀라 눈을 깜빡거리면서 데인을 올려다봤다.
‘연회라면, 전통식을 말하는 걸 테고.’
그런 자리에선 물 대신 와인을 마시지 않던가? 대단하다. 미자를 데리고 술을 마시다니. 몹쓸 나라 아닌가.
“3일 뒤에도 가게 될 거야.”
“연회에?”
“응. 황후 폐하께서 주최하는 연회에 나랑 형 둘 다 초대받았거든.”
“어쩐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얼굴이네.”
“조금 그래.”
데인은 괴로운 사람처럼 웃었다. 더 묻고 싶었지만 데인이 이 화제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그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데인이라면, 분명 연회의 꽃이 될 거야.”
“꽃?”
“아마 데인보다 예쁜 아가씬 없을 테니 말이야.”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년이 되고 농염하게 성장한 내 오라버니는 그 파급력이 가히 무서워질 지경까지 성장했다. 이제는 ‘시선으로 하녀 여럿을 쓰러트렸다더라’라는 확장판으로 진화한 지 오래였다. 과연, 심장에 가히 위험한 미소다.
눈꼬리가 사르르 휘어지면서 나를 향했다.
“왜 없어, 여기 있는데?”
나는 미미하게 찡그리며 그의 눈을 가려 버렸다. 어릴 적부터 누누이 말해 왔지만 데인은 이런 시선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장난치지 마. 설렌다니까.”
“장난 아니야.”
데인이 내 손을 잡아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난 언제나 진심이지.”
데인은 농익은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눈을 덮은 속눈썹은 나보다도 긴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참 빨라.”
그는 하늘을 바라봤다. 바람에 데인의 보드라운 갈색 머리가 흩날렸고 그가 입은 흰 옷자락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에 치맛단을 내리눌렀다. 이내 그의 얼굴에 잘게 잔웃음이 자리했다.
“네가 동생이라서. 아쉬워.”
“언젠가 헤어지니까?”
데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긋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돌아와 나를 관찰하듯이 훑었다. 유달리 팔 쪽을 살피는 그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데, 데인이 툭 던졌다.
“아프지 마. 시녀를 구하려는 마음은 좋아. 그렇지만 네가 다치면 슬퍼.”
잠깐 멈칫했던 나는 이내 차분하게 대꾸했다
“……플뢰온이지?”
데인이 소리 없이 미소했다. 플뢰온이 전부 불었네. 전부 얘기했어. 입마저 가벼운 인간이다. 은근슬쩍 빠져나오려는 시도에 데인이 손을 잡아당겼다.
“이제 괜찮다니까?”
“알았어.”
그는 꼼꼼하고 침착하게 확인했다. 그러더니 이어 부드럽게 말했다.
“네 몸인데 걱정은 내가 더 하는 것 같아.”
늘 나를 여리고 보드라운 것을 보듯이 바라보는 데인이다. 하지만 그는 나보다 스스로를 먼저 생각했으면 했다. 늘 나만 걱정하니까.
‘아니, 내가 걱정시킨 걸까.’
말없이 미소로 대꾸하는 데인의 모습을 보며 이번엔 내가 손을 잡았다.
“나도 네 걱정 해.”
울룩불룩한 뼈마디가 느껴진다. 어느새 그의 손이 이렇게나 커졌고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돌연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훌쩍 커 버린 청년이 있었다.
‘언제 이렇게 컸지?’
낯설었다. 아니 내가 크지 않은 건가? 나와 비슷한 데인이었는데 2년 사이 내가 데인을 올려다보게 만들어 버렸다.
‘만약 죽지 않았으면 난 더 컸을까?’
가지 못했던 길을 생각했고, 그런 나를 바라보던 데인은 쓰게 웃었다.
“난 늘 네가 걱정이야.”
그의 미소는 가장 예쁜 단풍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처럼 아름다웠다. 일렁이는 눈동자로 잠깐 낮고 탁한 것이 어린다. 들어 올린 손이 뺨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책망하듯이.
“너는 늘 앞만 보니까. 뒤에는 누가 있고, 옆에는 누가 있는지 보질 않아.”
침잠하던 것이 붉은 눈동자에서 사라졌고,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빠르게 사라진 자리를 채웠다. 데인은 늘 그렇듯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하게, 꽃이 피어나는 봄처럼 웃었다.
“나는 늘 네 뒤에 있어. 아실리.”
느릿하게 뜨는 선홍색 눈동자는 벽난로의 불처럼 따듯하게, 기사와도 같이 견고한 무언가를 품은 듯 단단하다.
데인이 손을 놓고는 눈을 농홍하게 휘어 내리깔았다.
“첫 티 파티, 잘 다녀와.”
* * *
“네 시녀, 일처리 하난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 혀를 내두를 정도야.”
예법이나 준비 따위에 몹시도 깐깐한 플뢰온에게 있어 이건 꽤나 큰 칭찬이었다. 그래. 오라비가 내 시녀님을 좋게 생각해 준다니 반길 일이고 기쁘긴 한데, 그와 별개로 내 궁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오는 그가 이상하게 보였다. ……진짜, 잘린 건가?
“오라버니, 진짜 솔직하게 말해 봐. 따돌림이라도 당하고 있어?”
“뭐?”
“오라버니 성격에 한 번쯤 겪을 일이라곤 생각했어. 하지만 이런 식의 도피는 좋지 않, 읍.”
“좀 얌전해졌나 싶었더니. 또 이상한 소릴 지껄이지?”
“읍, 읍, 하! 그럼 자꾸 내 궁에 나타나는 이유가 뭔데?”
가뜩이나 내일 티 파티로 머리가 복잡한데, 이 오빠까지 날 걱정하게 한다. 성숙미를 물씬 뽐내는 낯은 완연한 성인의 것에 가까웠건만 나이를 먹어도 성격만은 여전했다.
“너, 티 파티에 가는 것 맞지?”
“그럼 내가 어딜 가겠어? 다들 왜 그걸 묻는 거람.”
그는 여전히 깐깐했고 패악을 부리며, 말을 막 뱉는다. 뱉은 행위에 후회를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황족이란 이름에 가장 걸맞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오라비를 보고 있으면 철없는 재벌 2세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됐어. 아니, 되긴 뭐가 됐어!”
“깜짝이야. 왜 소릴 질러? 왜 혼자 오락가락해? 머리 아파?”
플뢰온은 왈칵 찡그리며,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뺨을 콱 잡아 버렸다.
“너. 대체, 왜 갑자기 파티 따위에 참가하겠다는 거야? 응? 굳이 그딴 데 안 가도 나나 그놈이 부족한 것 없이 키웠잖아. 응?”
“키우긴 누가 키워. 좀 놔줄래?”
그가 뺨을 마구 쥐고 흔들다가 허리를 숙여 나와 깊숙이 눈을 마주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티타임 따위는 관둬!”
“으으, 우, 하! 무슨 말이야, 갑자기 어떻게 관둬?”
“넌, 정말 고집불통이다!”
“누가 할 소릴.”
그의 손을 떼어 내고 흘겨보는데, 이마로 길고 긴 숨이 느껴졌다.
“하……. 이상하지. 어딜 보나 이 멍청한 낯은 그대로인데. 넌 꼭 알맹이만 바뀐 것 같다.”
힘이 빠져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굳었다. 그러나 이내 흐리게 웃고 말았다. 그러게. 이제 너마저 눈치챌 만큼 나는 무뎌진 거구나.
“걱정하지 마. 플뢰온,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누, 누가 너 같은 못난이를 걱정한대?”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가 잔뜩 배배 꼬인 목소리로다가 더듬거렸다.
“오히려 이 못난 면상을 보는 호네스투스에게 미안하거든?”
“정말, 나이를 먹어도 그 못된 말버릇은 여전하구나. 넌 정말 할 일 없는 한량 같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진짜 속 편해 보여.”
“하, 그러냐?”
그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비죽이 웃었다. 그러나 한순간 그의 표정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이내 그가 내 이마에다가 꿀밤을 놓았다.
“너 내 어머니가 ‘불카누스’의 후계자인 거 알지?”
이마를 문지르는 나를 바라보면서 그는 심드렁하게 말을 붙였다.
“알아. 그게 왜.”
미안함이라곤 한 줌도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깡패지. 깡패야.’
나는 그를 담담하게 흘겨보았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이 성질머리에 대해선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래. 세상에는 갱생 불가라는 단어가 있으니까.
“내가 돈이 썩어 넘칠 만큼 많거든?”
“그거야.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아.”
“아니, 모르고 있잖아.”
8번째 신 불카누스. 대장장이와 광맥의 신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대장장이를 수호하며, 이들이 가진 땅엔 온갖 광물이 나오는 광맥이 함께했다. 따라서 헤아릴 수 없는 부자였다.
금과 다이아몬드, 루비와 사파이어 종류를 가릴 것 없이 풍부한 자원에 그것을 자체적으로 세공하고 제조할 능력까지 갖췄으니 걸어 다니는 보고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매우 폐쇄적인 곳이었다.
플뢰온이 삐딱한 목소리로 잘근잘근 씹듯이 말했다.
“너 하나 책임질 능력은 있다. 망할 병아리야.”
“……지금 나한테 청혼한 거야?”
보진 않았지만 지금 내 얼굴은 플뢰온만큼이나 찡그려졌을 게 분명했다.
“내가? 미쳤어?”
“방금 그랬잖아?”
“내 이상형은 더 크고 더 살집 있고! 더 사근사근한 여자거든?”
“누군 좋댔어?”
“허, 기가 막히는군. 야, 어떤 미친 놈팡이가 널 데려가겠냐? 아니. 아니지. 놈팡이가 데려가면 안 되지! 망할. 너 얼른 혼인이나 해!”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나 아직 성년식도 안 치렀거든?”
“빌어먹게 깨 쏟아지는 모습이나 봐 주려고 했더니.”
“필요 없어. 누가 부탁했어? 그리고 그게 내 맘대로 된대? 오늘따라 이상한 소릴 해.”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굳이 싫어하는 걸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면 나보다 훌쩍 큰 오라버니가 있었다.
“망할 병아리! 생각해 줘도 꽥꽥대는 것 좀 보라지. 도무지 예뻐할 구석이 없어!”
난 입을 살짝 벌리면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나는 날 위해서 돈 안 써! 근데 너한테는 아깝지 않다고. 이걸 꼭 말로 해? 나 돈 더럽게 많다고!”
플뢰온의 외가에 대해서는 이름만 알았지 그리 큰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그저 어렴풋이 그가 돈이 많구나, 부자구나. 느낄 뿐. 더군다나 그가 직접 이렇게 얘기를 꺼낸 것은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야 퍽 자랑스럽게 우리 외할아버지가 거부라며 우쭐대면서 꺼내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물어 버렸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가 뜬다. 나는 잠자코 플뢰온이 뭔가 대꾸를 하길 기다렸다.
“하긴, 나만큼 속 편한 황자 새끼가 어디 있겠냐?”
그는 자조했다.
“정말로 속 편한 새끼지.”
나는 무어라 꺼내려고 입을 달싹였다.
쨍그랑! 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에 절로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 깨어진 사기 조각의 파편과 당황한 하녀가 있었다.
‘레나.’
이전 플뢰온에게 호되게 호령을 맞은 바 있는 레나는 내 오라비를 극도로 무서워했다.
“뭐야. 지금 감히 내 앞에서 찻잔을 깬 거냐?”
훈훈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플뢰온은 목까지 빽빽하게 잠근 셔츠를 잡아당긴다 싶더니 권태로운 표정으로 삐뚜름하게 웃었다. 상대가 좋지 않았다.
‘차라리 데인이나 나라면 좋았을 것을.’
짜증과 노기가 어린 눈동자가 벌벌 떠는 레나를 향했다. 서늘하고 비릿하게 웃다가 홱 고개를 치켜드는 그였다.
“이봐, 너.”
무어라 하기도 전에 플뢰온이 바닥을 가리키며 단조롭게 명령했다.
“죄인 주제에 뭐 하는 거냐. 꿇어.”
레나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릎을 꿇고 앉아 허리를 숙였다. 플뢰온의 손짓에 레나가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벌어진 상황에 입을 벌렸다가 황급히 닫으며 벌떡 일어났다.
“플뢰온!”
“뭐. 아무것도 안했잖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앞으로도 안 해. 아무것도.”
플뢰온이 느릿한 손놀림으로 목 뒤를 주무르면서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망할 하녀를 때리기라도 하면, 넌 화를 낼 거니까. 안 그래?”
부드럽다 싶은 얼굴로 픽 웃던 그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도 내 탓이라고 해 봐. 어? 내 성질이 못된 거라며 하녀를 감싸 보시지?”
“……안 그래.”
과거 무작정 하녀를 감싸기만 했다가 호되게 화를 겪었던 것이 1년 전 일이었다.
그날은 플뢰온, 데인과 함께 야외에서 식사를 했던 날이었다.
<평소보다 더 예쁘게 하고 와. 알겠냐?>
플뢰온의 협박에 못 이겨 안 입던 화사한 드레스를 입었던 날. 드레스에는 좀이 먹지 않도록 특수한 핀을 달아 두는데, 드레스를 내오던 하녀가 실수로 핀을 제거하는 걸 깜빡했다. 난 식사 중 찔렸다. 하필 흰색이라 금방 피로 물든 드레스를 본 플뢰온은 그날 대노하여 테레나 궁을 뒤집어 놓았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오냐오냐하니까 해이해진 거라고!>
이미 내가 하녀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몹시도 싫어했던 플뢰온이었다. 솔직히 분노는 타당한 것이어서 반박할 수 없었다. 상처가 크게 나는 바람에 그날 그는 몇 년 치 분노를 토해냈다. 다른 황족에나 타 귀족에게 당연한 매질 따위를 하지 않는 나를 두고 황토처럼 물러 터진 것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나는 얌전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알아. 레나가 잘못한 거야. 그만해. 응? 내가 나중에 따끔하게 혼낼게.”
“하. 네가?”
퍽이나 그러겠다는 듯 플뢰온이 삐딱하게 비웃었다.
“내 병아리는 늘 말뿐이지. 안 그래?”
그가 비스듬히 목을 꺾으면서 시선을 들어 올려 오만한 눈빛을 흩뿌렸다. 변성기가 지난 목소리는 낮고 우아했다. 그는 그대로 손잡이에 기대서 나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레베카를 향했다.
“봤겠지, 시녀. 아니 아벤타 공녀. 네 주인이 이렇게 무른 꼬맹이라고.”
레베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명심해. 그 티 파티에서 욕보이게 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나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황자님.”
처음부터 이걸 노렸나?
“아벤타 공녀. 그대가 무엇 때문에 하잘것없는 내 동생의 궁으로 온 것인지, 네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궁금하지 않아.”
플뢰온은 은연중에 레베카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내게 중요한 건 내 병아리 새끼가 멀쩡하게 서서 멀쩡한 얼굴로 웃고 있는 거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한낱 다과회 따위로 못난이의 미소가 사그라지길 바라지 않아. 네 역할이 크고도 지대하겠지.”
경고였다. 자칫 내가 곤욕을 치르면 레베카에게 책임을 물으리라는 경고.
“알아들었겠지.”
그에 레베카는 부챗살 같은 속눈썹을 팔랑이며 아름다운 낯으로 부드러이 웃고는, 태가 나는 몸짓으로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말씀 명심하지요.”
그리고 그녀는 펼쳤던 시집을 천천히 닫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올리곤 눈을 굴려 나를 향했다.
“솔직히, 제 주인님께서는 황자님의 반만 닮으셨다면 이렇게 불안하지 않을 텐데요.”
“그렇지. 난 위대해.”
꽃잎으로 담근 듯 붉은 입술이 살짝 조소를 담았다.
“황자님 같은 분이 옆에 계셨는데, 조금 의아하네요.”
“아아, 말을 죽도록 들어 처먹지 않거든. 몰랐나?”
둘이 언제부터 이렇게 살가웠다고 신랄한 앞담을 앞다퉈 주고받는가.
‘확실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겠다.’
시중인 알기를 저 발닦개 정도로 아는 플뢰온의 특권 의식이나, 흐트러짐 한번 없던 고아한 공녀님의 고고함도 양옆에서 이러고 있으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주인님은 확실히 무릅니다.”
“으응?”
“정이 많다고 할까요. 네, 물러요. 황자님 말씀대로 아랫사람에게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황자님의 모습은 본받아 마땅합니다.”
“으음, 정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니야?”
“글쎄요, 사람을 정으로 다스릴 수 있다 생각하십니까?”
“……못해?”
그녀는 늘 그렇듯 새하얀 낯에 얼음보다 차가운 미소를 걸며 대꾸했다.
“이용당하기 쉬운 사람은 다정한 사람입니다. 누구에도 주지 마세요. 마음을.”
레베카가 우아하게 부채로 날 가리켰다.
“현명한 숙녀는 가장 차가운 얼음을 품고 태양처럼 찬란하게 웃는 법입니다. 미소는 다정하게, 마음은 차갑게. 저는 주인이 휘둘리길 바라지 않습니다. 성숙하고 어려운 주인이 되어 주세요.”
“레베카.”
“잊으신 건 아니시죠? 당신은 제 주인으로서 참여하십니다.”
“레베카. 으음. 영원히 차가운 것은 없어.”
레베카는 맥락을 짚지 못하는 나로 인해 한숨을 쉬고 싶은 낯이었다. 나는 슬쩍 무시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오라버니는 아주 못돼 먹은 사람이야. 그렇지만, 몇 년에 걸쳐 변했어. 내 오라버니는 하녀를 때리던 몹쓸 사람이었거든.”
“누가 몹쓸 인간이야?”
플뢰온의 항의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응. 당연하다는 건 때로 변하기도 해.”
플뢰온을 지목했던 내 손이 레베카를 가리켰다.
“이 세상에는 당연한 것은 없어.”
죽음 끝에 아무것도 없다 말했지만 그렇지 않았듯이. 나는 절대적인 게 없음을 알고 있어.
“모든 건 변해.”
나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면서 생긋이 웃었다.
“하지만 레베카가 있으니까 전부 괜찮아.”
“어째서죠?”
“네가 내 곁에 있는 건 변함없을 테니까.”
그녀는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당신이 디딜 곳이 그리 녹록지 않은 바닥이라 해도 말입니까?”
“그것도 레베카가 있으니까 괜찮아.”
내가 레베카처럼 행동하고 플뢰온처럼 굴 수 있을까? 아니 못한다. 차라리 면전에서 욕을 듣고 고스란히 넘기는 거라면 자신 있는데…….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 말할 수는 없다.
“어쩜 이렇게 닮지 않을 수 있는지…….”
레베카는 화사한 낯으로 빈정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말 한심할 정도로 속없는 소리군요. 제가 당신을 해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웅, 그건 안 되는데.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
“정말이지, 속편한 주인님.”
그녀는 웃으면서 턱을 괸다.
“당신이 원한 것처럼 순진하고도 순수하게 세상이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눈만 굴려 피어난 꽃처럼 예쁜 낯에 고정시키곤 눈을 둥글게 휘었다.
‘글쎄. 내게 이 세상이야말로 가장 잔혹하고 잔인하다 생각하는데.’
난 희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여리고 어리석은 것을 보듯 희미한 동정으로 검은 눈동자를 물들였다.
“좋습니다.”
레베카는 웃는 것마저 겨울 서늘한 호수와 아름다운 얼음 조각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나 나는 잠깐, 그 흑요석같이 진한 홍채에서 바람이 그친 고요함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내 희고 가는 손이 내 머리칼을 나긋하게 귀 뒤로 넘겼다.
“한 번쯤 꿇어 드릴 테니.”
레베카가 호선을 죽 그어 꼬리를 매혹적이게 끌어 올렸다.
“저런 점은 닮아 주세요.”
그녀는 흘끗 플뢰온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이 내 뺨에 닿아 실오라기를 떼어 냈다.
‘반은 넘어온 것 같지?’
그녀와 함께 차를 들며 판단했다.
꼭 구름과 해의 내기 같다. 이솝우화처럼 나는 그녀를 녹이거나 돌풍을 일으키거나. 나그네의 옷은 얼마나 벗겨졌을까.
‘내 편이 되어 줘, 레베카.’
얼음으로 겹겹이 쌓인 옷을 벗겨 내고, 가로막은 벽을 딛고, 장미꽃같이 화려하고 꽃보다도 아름다운 시녀님이 내게 길들여진다면. 껍데기 속에서 드러난 진심은 얼마나 값질까.
목 뒤로 넘어가는 향을 느긋하게 맡으면서, 차분히 저물어 가는 석양을 본다. 고즈넉하게 저물어 가는 하늘.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집무실. 석양보다 붉고 화려한 시녀. 평화는 잘게 잘린 파편처럼 잠시 머무른다.
“레베카, 널 만나서 다행이야.”
정말로. 나는 고요하고도 요요하게 젖어든 검은 눈동자를 보며, 작고 수줍은 물매화처럼 풋풋하게 웃었다.
“내일 잘 부탁해.”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그건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내일도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희미한 체념.
살고자 하는 의지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