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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신은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 (10/47)

6. 당신은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

“다음은 회계에도 살짝 손을 대 보시지요. 황녀님께서는 셈에 밝고 총명하시니,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라니우스가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으으음, 저기. 그라니우스? 이거 펜네가 보던 것 아니야?”

“허허, 네. 틀리셔도 펜네가 모두 해결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자 펜네가 고개를 들었다. 일을 얹는 그라니우스를 보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찡그리며 미간을 짚었다.

“아델리스. 제 업무는 이미 과부하란 걸 알아주시겠습니까?”

“그렇다는데?”

그러나 그라니우스는 그를 본체만체, 턱을 괴고 오로지 나만 응시하며 웃었다.

“알 게 뭡니까.”

펜네는 체념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항상 아랫사람이 고생하는 법이죠. 제가 과로사하면 순찰대, 몸만 굴리는 그 멍청한 작자들이 뼈 빠지게 고생할 테니 그걸 위안 삼을렵니다.”

그라니우스의 집무실에서 배우기 시작한 지 1년째. 그들은 내게 수도 행정에 관한 전반적인 이론과 실무를 가르치고 있었다.

<제 업무를 익혀 보시겠습니까.>

황태자 앞에서 황녀님을 맡겠다 선언한 이래, 그는 내가 열여섯이 될 때까지 나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 생일이 지났을 쯤 돌연 나를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은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나를 가르쳤던 스승에게서 내가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단다.

그 즉시 교육이 시작되었다. 경영, 경제, 세무 분석 등 상당히 전문적인 분야의 지식들이었다.

도대체 스승에게 무슨 소릴 들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릴 적 언어를 일찍 깨우친 게 와전된 듯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그라니우스는 나를 가르치는 데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쓰임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 볼까.’

나는 ‘황녀’였다. 요리로 이르자면 ‘황족’이란 고급 요리에 맞지 않는 하급 재료. 이미 장성하여 세력을 키운 형제 사이에서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고, 외가가 없어 든든하게 뒷받침해 줄 외척도 없다. 스승의 꼼수로 데인, 플뢰온과 함께 수학했지만 내가 받았던 교육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제국의 꽃이 어떤 자리인 줄 아십니까? 그렇게 흉측한 얼굴이지만…… 당신께서는 내로라하는 신부이십니다.>

또한 어린 시절 예법 선생에게서 무수하게 들었던 말과, 오라비의 교육과는 매우 다른 교육 과정을 보면서 나는 내 역할을 똑똑히 깨우쳤다.

이곳은 똑똑한 여자가 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략결혼이라도 결혼이 여성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미래였다. 여성이 가문을 수호하는 수단이거나 권력을 잡기 위해 기꺼이 도구가 되는, 로맨스 특유의 중세 및 고대 사상이 짬뽕된 시대답다고 할까.

여성은 최고의 신부가 되기 위해 키워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래전 플뢰온이 예법 선생을 쫓아내기 전까지 여타 다른 영애들처럼 예법과 교양, 그리고 악기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끔찍합니다!>

예법 선생은 나를 참으로 싫어했고, 나를 괴롭히려 들었다. 훌륭한 호네스투스(귀부인)였던 그녀의 눈에는 가장 고귀해야 할 여자가 흉측한 흉을 가진 것이 제국의 재앙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당신은 더욱 정숙하고 조신하게 있어야겠군요. 얼굴이 끔찍하니까.>

현 황제의 치세 아래 쇠락했단 평을 받고 있지만 칼타니아스는 여전히 건재한 제국이었다. 제국에서도 유일한 황녀는 시장에서 최고 등급의 신붓감이었다.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는 영원한 라이벌 윌터 왕국부터, 겨우 5년 전까지 전쟁을 치르던 북쪽의 나라까지. 황녀는 교류의 수단으로 써먹기 좋았다.

내가 말한 게 아니고, 나를 가르치러 온 예법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여자에게 배움이라……. 똑똑할 필요는 있으나 사내 앞에서 멍청하게 굴기 위한 머리일 뿐입니다.>

유능한 여성 관리가 아주 없진 않았지만 남성 9할이란 비율은 압도적이어서, 피라미드처럼 꼭대기 층은 남성이 전부 차지한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그저 여성은 파티에서 사근사근히 웃고 내조에 힘쓰길 바라는 나라.

여기에서 내가 행정을 배워 봤자 그라니우스에게 득 될 것은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황녀님께선 미성년이시고 성년이 되기까지 활동에 제약이 있다는 말씀은 옳습니다. 하지만, 제약은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도 껍데기죠.>

<껍데기?>

<이미 황자님들께서는 각기 재능에 따라 고위 관리 옆에서 실무 능력을 쌓으십니다. 황녀님 또한 그리하지 말라는 법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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