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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아실리 로제, 플뢰데온 클라체, 데인 로웰 (9/47)

5.5 아실리 로제, 플뢰데온 클라체, 데인 로웰

어느 날, 머리를 빗겨 주던 하녀가 말했다. 제국에 꽃이 태어났다고. 가장 아름다운 미녀의 딸이 태어났단다.

“아! 얼마나 어여쁘실까. 장차 제국의 미녀가 되시겠지요!”

플뢰온은 멀뚱하게 거울을 보면서 빨리 지루한 빗질이 끝나길 기다렸다. 사실 그는 하녀의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 뒤. 잎새가 막 지던 계절이 바뀌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조금 먼 테레나 궁을 다녀왔던 어머니가 자신을 안아 주었다. 그때. 그날의 어머니 목소리는 작고, 가늘고, 잘게 떨고 있었다.

“플뢰온, 아가, 내 아가, 어리고 여린 것들을 가엾게 여겨 주렴.”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 장식, 거미줄처럼 떨리던 손가락, 차가운 뺨. 흰 천이 겹겹이 쌓인 이오니아식 키톤.

“그 애는 앞으로 좋은 말을 듣지 못할 거야. 안타깝게도……. 그건 아마 뺨 때문이겠지. 그 애의 탓이 아닌 흉터 때문에.”

어머니는 왜인지 아주 서글픈 얼굴이었다. 그가 처음 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약속해 주겠니? 훗날 보게 될 네 여동생에게 잘해 주겠다고.”

플뢰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테니까.

* * *

“오빠.”

아실리는 멍하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플뢰온을 불렀다.

“……당장 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인데, 당장 시험을 봐야 할 사람이 이러고 있어도 돼?”

“시끄러워.”

오늘은 플뢰온이 과제를 하는 옆에서 함께 공부하기로 한 날이었다.

황족은 남성 기준으로 열일곱에서 열여덟, 여자는 열여섯에 시험을 치르고 자신이 황족으로서의 자질을 갖췄음을 증명해야 했다. 성년 전 이 시험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통과하지 못하면 성년식을 치를 수 없었으므로.

그런데 아까부터 저 오빠가 도통 집중하질 못 하는 게 아닌가. 아실리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꺾어 올렸다.

“집중 좀 해. 내년에 또 치고 싶어? 그거 집안 망신이다. 망신.”

“조그만 게,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네.”

플뢰온이 이마를 툭 건드렸다. 저 이마는 동그랗고 뽀얀 게 보고 있으면 꼭 문질러 보고 싶다고 할까. 뽀득뽀득 소리가 날 듯했다. 정작 붉어진 이마를 붙잡은 아실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남의 이마 때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보는 게 어때?”

“누가 남이냐, 엉?”

“아야. 말, 말도 못해? 데인!”

아실리는 이 망할 오라비가 오늘 따라 좀 더 세게 꼬집지 않았나 생각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둘의 의자에서 두 뼘쯤 떨어진 곳에 앉아 책에 파묻혀 있던 데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곧바로 사태를 짐작하고 미간을 찡그린다.

“형, 해가 바뀌었어.”

뒤에 서 있던 레이는 아, 황자님이 또 시작이군 하고 생각했다.

“아실리는 열다섯이고 우리도 한 살씩 더 먹었지. 왜 형은 변하는 게 없는 거야?”

“뭐. 한결같음이 내 신조거든?”

“형의 신조에 당하는 아실리 뺨은 무슨 죄야.”

데인이 차분히 주장하자 플뢰온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쓸데없이 말을 잘하는 동생은 성가셨다. 그러다 시선이 아실리를 향한다.

‘……어라, 저게 언제 저렇게 빨개졌대?’

플뢰온은 가슴 한구석이 송곳으로 푹 찔린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야, 너, 그, 안 아파?”

“아프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황자님.”

“넌 조용히 해.”

플뢰온이 눈을 부릅뜨며 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얼른 아실리를 눈에 담았다. 어느새 뺨에 적신 손수건을 대고 있는 아실리를 보면서 플뢰온의 미간이 더욱 깊게 좁혀 들어간다.

송곳이 두 개, 세 개, 아니 셀 수 없이 늘어서 양심을 찔러 댔다.

‘아니, 저 계집앤 왜 피부가 더럽게도 약해서.’

사실 그렇게 세게 꼬집지도 않았는데, 늘 저 모양인 건 쟤 피부가 유난히 희고 약하기 때문이다. 꼭 얇은 종이처럼 바람에도 나풀대는 저 가녀린 모양새처럼 말이다.

플뢰온은 불만이었다.

‘아니, 왜 그토록 먹이는데, 왜 살이 안 쪄?’

살집은 부와 명예의 상징이며, 풍요로움을 뜻했다. 물론, 문화 강국인 윌터의 문화가 제국에 넘어오면서 허리를 조이는 드레스를 입느라 여성 귀족 사이에 몸맵시를 살리는 운동 따위가 유행한다고는 하지만, 고고한 황족과는 먼 얘기였다.

그러니까, 저 계집애가 먹다 못해 굴러다닌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할 터였다. 그런데, 아실리는 꼭 찌지 못하는 체질인 것처럼 먹어도 무게가 늘질 않았다. 오죽하면 제 한 손에 팔뚝이 잡힐까!

“너 말이야.”

플뢰온이 아실리의 뺨을 잡고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아실리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저를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까…… 너 예전에는 조금만 잡혀도 죽는다고 울었잖아?”

“내가 언제 울었어.”

“아니, 그래, 아무튼! 잠시라도 잡혀 있으면 바로바로 저놈을 불렀으면서. 왜 미련하게 잡혀 있어?”

아실리는 잠깐, 내가 피해자가 아니고 가해자였던가 생각했다. 하도 플뢰온이 당당하게 나오니 할 말이 없어졌다. 이 오라비, 내가 어디서 맞고 와도 왜 짧은 치마 입었어, 왜 늦은 시간에 나갔어 탓할 사람일세.

“됐어. 아프지 않으니까. 바보. 오빠야말로 힘 조절이나 좀 해. 다른 여자는 기함할 걸.”

아실리가 그의 손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플뢰온은 잠깐 인상을 구기면서, 저 말이 뭔가 걸리지 않았나 생각했다.

‘다른 여자는? 자긴 안 그렇다는 거야?’

그러나 도무지 뭐가 걸린 것인지 잡지 못해 답답함을 느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 아실리는 데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 심술궂은 오라비 옆에서는 아무리 아프지 않더라도 뺨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데인은 아실리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뺨은 괜찮아?”

“으응, 별거 아니야.”

검에 베이는 것에 비한다면야. 그녀는 늘 그렇듯 가볍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데인?”

그리고 그녀는 예쁘게 접힌 데인의 눈이 퍽 진지한 것을 보며, 놀랐다는 듯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네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해서. ……속상해.”

그녀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는 데인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난 정말 괜찮아. 플뢰온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뭘.”

“형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닌 게 맞지만 네 뺨이 이렇게 달아오른 일은 요즘에 들어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

플뢰온과 다르게 데인은 이미 빠르게 눈치채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고통에 무뎌진 아실리를 말이다.

플뢰온은 원래 제 힘을 체감하지 못하고 그녀를 괴롭히긴 했지만, 아실리는 현명하게 대처해 왔다. 그래서 2년 전까지 아실리의 뺨은 이렇게 부풀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부딪히거나 넘어진 것에도 무디지 않았었다.

언제부터 일어난 일이었나 가늠하던 데인이 한 구간을 짚어 낸다.

‘2년 전.’

자신이, 사저에 갔던 일주일.

변화는 미묘했지만, 오랜 세월 함께한 그는 금방 눈치챘다. 둔한 플뢰온이야 여태껏 조금 이상한 정도로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영리한 데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실리가 이상해졌다고.

한편 데인의 막 어깨에 기대어 앉아 있던 아실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쭉 방 안을 훑어보았다. 바닥에 둔 화로 옆으로 동그랗게 모여 있었다. 모두가 그녀에게 가장 따뜻한 자리를 양보한 탓에 등으로 따끈하다 못해 후끈후끈한 열기를 느꼈다.

데인은 곧 넌 곧잘 감기에 걸리니까 걱정된다며 어디서 가져온 숄을 아실리에게 걸쳐 주었다. 막 덥다고 생각했던 아실리였지만, 얌전히 덮어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루가 늘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느닷없이 중얼거리는 아실리의 말에 막 화로 위로 구워 먹는 과자를 가져오던 레이와 빨리 구우라고 닦달하던 플뢰온이 눈을 껌뻑이며 이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뭐가?”

“이런 하루라면, 반복되어도 좋을 것 같다고.”

그녀는 아주 멀게 느껴지는 얼굴로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데인과 플뢰온은 같은 생각을 했다. 한쪽은 명확하게, 다른 한쪽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상을 잡았다. 두 사람은 눈짓을 주고받았다.

“너 말이야, 굉장히 오해를 살 말을 했다는 거 알고 있냐?”

“으응?”

아실리는 플뢰온을 응시했다.

“이런 재미없고, 지루한 하루를 반복해 뭐 할래?”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은 플뢰온이 퍽 고고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참, 뒷동네 깡패 같은 행동마저 그가 하면 한 폭의 그림이 되는구나.’

이어, 다시 한 번 아실리의 뺨으로 올라간 오라비의 손은 이전처럼 난폭하지 않았다.

“앞으로, 너랑 나랑 사는 한 지겹도록 반복할 게 이런 날이고.”

“…….”

“그 무수한 날 중에는 더 재밌고 신나는 하루가 많을 거다 이 말씀이야. 알겠어?”

“……으응, 그렇겠지.”

“내 말 안 끝났어.”

플뢰온이 그녀의 양 뺨을 잡고 눈을 맞췄다.

“언제부터인가 자꾸 네가 흐리멍덩하게 웃는데 말이야.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지고 있다는 걸 알긴 해? 웃어. 너는 그나마 웃을 땐 예…… 아니, 그래, 덜 못생겼으니까 웃으라고!”

“형, 요점이 어긋났어. 막 감동적일 뻔했는데.”

데인이 키득키득 웃으며 재깔였다.

“6황자님께서 하는 일들이 모두 그렇지 않습니까.”

레이마저 잊지 않고 무뚝뚝하게 이죽거렸다. 당연한 수순처럼 플뢰온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실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런 게 뭐가 중요해? 너는 다음부터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고! 데인 너는 그만 웃고! 레이 저놈은 얼른 잘라 버려.”

“제가 잘리면 황자님은 누가 지킵니까?”

레이가 잘 구워진 과자를 내밀며 묵묵하게 웃었다. 플뢰온은 눈썹만 치켜 올리며, 턱을 괸 자세 그대로 비뚜름하게 웃었다.

“건방지긴. 건방진 종놈이야 저건.”

“건방진 호위라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종놈에게 검을 배우시지 않습니까?”

“캭, 너, 너, 그거 비밀이라고…….”

“아, 비밀이었습니까?”

플뢰온의 얼굴이 벌게진 것과 함께 레이가 뒤로 훌쩍 뒷걸음질 쳤다. 긴 목검이 레이가 있던 자리를 내려쳤다. 붕, 살벌한 파공음.

그러고 보니 아실리는 언제부터인가 탁자 옆에 놓여 있던 목검의 존재를 떠올렸다. 운동을 그토록 싫어하던 플뢰온이 잘도 검술을 배우는구나. 싶었다. 그것도 저 앙숙인 레이에게 말이다.

“말씀드렸지만, 황자님. 내려치기는 좀 더 팔에 힘을 주고, 이렇게.”

“시끄러워! 너! 네가, 유능하다는 것 전부 거짓말이지?!”

“재능이라곤 하나 없는 황자님을 여기까지 끌어 올리지 않았습니까. 유능한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유능한 거죠.”

플뢰온의 방은 마구 드잡이를 해도 남을 만큼 널찍했다. 레이는 플뢰온의 어설픈 동작들을 피하면서 깨질 만한 것들을 미리 잡아 내려놓는 기예마저 보였다.

아실리는 그걸 보면서 과다를 먹다 말고 쿨럭거렸고, 데인은 킥킥 웃음을 터트리며 아실리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변함없네, 둘은.”

“그렇지.”

“긴 시간 동안 변함이 없어.”

아실리의 중얼거림에 데인은 포근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실리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잡은 데인이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데인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네가 무엇을 숨기고 있어도 좋아.’

아실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천천히, 곱씹듯 시선이 타고 내려갔다.

데인은 잠시 가늠할 수 없는 것을 눈에 가득 담았다가 곧장 흩어 놓으며 놀랍도록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도, 나도.”

* * *

확실히, 아실리는 이상해지긴 했다. 그건 분명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더욱 이상해졌다.

<말도 안 돼.>

어느 날부터 말도 안 돼,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음 날부터인가 못 보던 수첩을 들고 다녔다. 손바닥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에 갈색 가죽을 덧입힌 그것은 수첩 같기도, 아실리 또래가 쓸 법한 일기장 같아 보이기도 했다.

데인과 플뢰온은 저걸 두고 일기장이냐 수첩이냐 의논을 했다. 무엇이 됐든 아실리에게 퍽 소중한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왜냐하면, 언제나 품에 소중히 안고 다녔으니까.

‘마치 사라지면 안 된다는 양 말이지.’

아실리는 예전처럼 웃는 것 같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무엇이 다른지 콕 집어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다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실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다.

“형, 찾았어?”

“아니! 어딜 간 거야 이 망할 계집애가!”

데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멈춰 선 채 턱을 잡고 고민에 잠겼다.

금세 걸음을 옮긴 곳은 테레나 궁 주방이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작은 소녀를 잡아 물었다.

“아실리와 옷을 갈아입었어?”

“네, 넷?”

“오늘도 옷을 갈아입었냐고 물었어.”

일 년 전, 제4 행정청에 시종으로서 가게 된 이후로 아실리는 줄곧 이 작은 소녀의 옷을 빌려 입었다. 몸집이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이후 데인은 아실리가 쉬는 날 종종 하녀의 옷을 입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아뇨…… 죄송합니다! 황자님! 잘못했습니다!”

“사과는 됐으니까, 똑바로 말을 해 볼래? 오늘 아실리가 너와 옷을 갈아입고 나갔니?”

“황녀님은 오늘 도, 도서관에 가신다고…….”

책을 잔뜩 지고 갔다는 말에 데인은 순간 바로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황궁 도서관은 절대 걸어서 갈 수 없는 거리야.’

도서관 옆이 제4 행정청이다. 아실리는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 도대체, 그 작은 몸에 책까지 이고 어딜 간 거란 말인가.

누군가 어깨를 짚었다.

“레이?”

데인은 줄곧 따라온 레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확실해?”

데인이 처음 보는 얼굴로 내리깔아 속삭였다.

“거짓말은 절대 안 될 거야.”

선홍의 눈동자가 일순간 위험한 빛을 드러내며 레이에게로 향했다. 레이는 그 시선을 받아 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아마도.”

레이가 굳은 얼굴로 뇌까렸고, 데인은 끄덕였다.

―금지된 숲.

초대 황제로부터 쭉 내려온 신비한 숲은 황궁 내에 있으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구역이었다.

서쪽 궁 영역 옆에 위치했지만, 서쪽의 영역은 아닌 곳. 이천 년간 제국과 함께한 숲은 무수한 전설과, 소문과, 악명을 함께 낳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영원히 길을 찾을 수 없는 미로, 수없이 많은 실종자들의 사연이었다.

‘금지된 숲과 가장 가까운 궁이 아실리의 테레나였지.’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멀지 않아, 울타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조그만 몸을 봤을 때, 비로소 초조함이 안도로 돌아왔다.

“……거 보세요, 여기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레이는 장난처럼 덧붙였지만,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개의 목을 그었다. 섬광과도 같은 궤적 뒤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전부 찰나간의 일이었다.

레이는 아실리에게서 얼른 개를 가려 버렸다.

“……보지 마십시오.”

데인은 레이의 말에 맞춰 타이밍 좋게 아실리의 눈을 감싸며, 그녀의 눈에서 개를 가려 버렸다.

“……뭐 좋은 거라고 보신답니까?”

화풀이라도 하듯 검을 휘두르는 레이를 보면서 데인은 쯧 작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자신도 아실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는 땀으로 젖은 뺨을 어루만지면서 차라리 아실리가 울었으면 했다.

“한참 찾았어. 아실리.”

덜덜 떨리는 몸은 충분히 그녀가 놀랐음을 말해 주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떨어트렸다. 이 순간에도 건조하기 짝이 없는 손바닥이 안타까워서.

‘네가 말해 주면 좋겠어. 뭐든지…….’

떨림이 잦아들며 반나절 내내 그토록 바라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데인.”

데인은 잠깐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듣기 좋은 울림이었나 생각했다. 그는 품에 안긴 아실리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놀란 자신의 손도 같이 진정되길 바랐다. 그래, 막 개에게 잡아먹힐 뻔한 아실리를 보는 것은 너무 괴로웠다.

“이런 곳에 있으니, 한참 찾아도 없죠.”

피 묻은 검을 탁탁 털고 다가온 레이가 핀잔을 주었다.

아실리는 가까운 나무로 걸어가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홱 들어 주변을 살폈는데, 떨어진 것으로 시선을 주는 모양새였다.

그 순간, 데인은 아실리에게서 터져 나온 중얼거림을 들었다.

“……또 죽는 줄 알았다.”

‘……또 죽다니?’

데인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무수히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가, 다시 지워 냈다.

“저희가 딱 10초만 늦었어도 스틱스강을 건너셨을 겁니다. 실종자가 들끓는 금지된 숲은 황녀님 묫자리로는 그다지 좋은 자리가 되지 못합니다.”

“레이.”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도대체 황녀님은 어딜 그리 뻘뻘거리며 돌아다니시는 겁니까? 찾기 힘들게. 이번도 그렇습니다. 데인 황자님과 제가 얼마나 찾아다닌 줄 아십니까?”

아실리가 인상을 옅게 찡그렸다.

“안 죽었어.”

“네. 저희가 와서요.”

“응. 죽을 뻔했지만. 안 죽었어.”

아실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얼핏 데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생긋 웃었다.

우연이었겠지만, 청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데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넌 왜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거야?’

찢어진 손바닥은 가시에 긁힌 것임에 틀림없다. 아프지 않은 척 웃을 수준이 아니었다.

고통은 문제가 생겼음을 알리는 가장 예민한 신호이다. 따라서 민감할수록 대처 또한 빨라지므로 생존과도 직결되며, 가장 본능적인 감각이 아픔을 느끼는 신경이다.

데인은 자신이 예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실리가 이 문제에 둔감했다.

얼마 전 수를 놓다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멀뚱하게 있던 아실리를 떠올리면서 데인은 음울하고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설마하니 저나 황자님이 올 줄 알았다느니. 누군가는 와서 어떻게든 살았을 거라느니. 또 그 소리 하려거든 관두십시오. 여기가 얼마나 외진 곳인지 알고서 하는 소립니까?”

“안 죽을 줄 알고 있었어.”

“네?”

방금, 그녀는 정말로 죽을 위기를 거쳤다. 금지된 숲을 지키는 파수꾼의 악명은 데인조차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금지된 숲과 울타리를 지키는 커다란 짐승. 오로지 황제만을 섬길 뿐 피아의 구분 없는 저 맹수는 방금까지 아실리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 했다.

그런데, 왜?

‘너는 아무렇지 않아?’

데인의 선홍색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비춰 보는 아실리의 마음과 아실리가 담아 둔 것을 그대로 반사해 낼 것처럼.

데인은 한 손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레이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아실리를 나무라고 있었다. 그때였다. 희미하게 대꾸하던 아실리가 고개를 들면서 생긋 웃었다.

“데인 고마워.”

그것은 언젠가 그가 한나를 대신해서 간식을 가져다주었을 때 얼굴이었다. 그녀에게는 그와 같은 무게였다고, 데인은 짐작했다.

‘아실리, 너는 무엇을 숨기고 있어?’

하지만 그는 이렇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실리가 대답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숨기고 있는 것이 있냐는 질문에 아실리가 고개를 끄덕이면 슬플 것이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해도 슬플 것이었다.

“뭘 그렇게 웃으십니까. 사람 걱정은 다 시켜 놓고.”

아실리는 척 보아도 레이의 말을 대충대충 넘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떨어졌던 책을 주워 들었다. 데인은 둘둘 말린 책 위로 적혀 있는 표제어를 보았다.

『금지된 숲』, 『오래된 신과 사라진 유적』, 『쉽게 보는 제국의 신화』 참으로 정직한 제목이었다.

아실리가 이곳에 일부러 왔노라고 쉽게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미안해.”

분명, 흐릿하게 웃는 아실리는 놀라지 않아 보였지만, 몹시도 지친 눈치였다. 데인은 레이를 살짝 잡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자.”

아실리는 볕을 반사하는 빛에 눈을 찡그리면서 지붕을 바라보았다. 언뜻, 외벽만큼이나 새하얀 새를 본 듯 했다. 벽과 헷갈렸는지도 모르지만.

“조심해서 가. 데인. 레이 경.”

아실리가 나긋나긋한 봄처럼 활짝 웃었다.

데인은 평소같이 웃지 않았다.

식은땀이 눌러 붙은 그녀의 이마가, 푹 젖은 등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어째서 너는 그토록 담담하게 웃을 수 있는 거냐고.

선홍색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데인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응, 잘 자. 내 아실리.”

* * *

아무 장이나 펼쳤을 뿐인데 놀랍게도 오늘 일을 겪은 듯 생생하게 쓰인 일기.

[비밀을 파헤치려 금지된 숲으로 가던 길에 암살자를 만나 죽었다.]

꿈틀, 첫 글자부터 스며든 빛의 파동이 열을 지나고 곧이어 페이지 전체가 빛으로 물들었다.

솨아아―

꿀꺽, 아실리는 침을 삼켰다. 침이 넘어가는 소리. 페이지는 고요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깨끗해진 양피지 위로 천천히 글이 떠올랐다. 새로 나타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이었다.

[823년 하베론의 달 7일

사냥개를 따돌리는 데 실패했다.

그대로 도망치다 죽을 뻔했지만……, 다행히 날 찾으러 온 7황자 오라버니와 그의 검사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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