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각자의 사정 ⑵
새벽에 우는 새가 짹짹 지저귄다. 이른 아침, 종소리보다도 빨리 일어나는 이유는 중앙 궁이 아침에 출발하는 짐마차를 타야 할 만큼 멀기 때문이다.
이제 성장은 글렀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사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키야 무슨 상관이겠느냐마는.
“아무도 없네.”
조영관의 집무실은 아주 넓었지만, 아모르의 방만큼은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은 그의 잉크나 양피지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 놓는 일이었다.
방에는 그라니우스가 쓰는 커다란 책상이 있었고, 중앙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손님이나 부하가 왔을 때 이곳에서 차를 마시곤 했다. 문 쪽으로 좀 더 가면 작은 공간이 있어서, 잉크나 양피지가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분명 그라니우스가 책상 서랍을 여는 모습을 봐 뒀었다. 열쇠를 넣어 돌리는 서랍은 꼭 맞는 열쇠를 좌로 3번 돌리면 비밀스러운 공간이 나왔다. 나는 그가 종종 그곳에 몇 개의 서류를 넣어 두는 걸 보았다.
우습게도 열쇠는 늘 책상 위에 올라가 있다.
나는 일단 비밀 서랍을 두고 다른 서랍부터 활짝 열어 이곳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로시설’, ‘시장’, ‘계량’, ‘공공사업’, ‘공공 오락’ 분류별로 나뉜 양피지들을 이리저리 갈라보다가 금박을 입힌 작은 칼을 발견했다.
‘면도칼이네.’
아마도 그라니우스가 쓰는 면도칼인 것 같다. 두 번째 서랍에는 손수건과 깃털 펜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다른 서랍에는 자주 쓰는 수첩과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어디에도 내가 찾는 「목걸이」는 없었다.
서랍을 닫고 이번엔 책상 위에 놓인 열쇠를 잡아 비밀 서랍 구멍에 넣어 천천히 돌려본다. 그런데, 도통 힘을 줘도 열쇠가 돌아가질 않았다. 설마, 손을 내려다본다.
“……이거, 맞춤 제작이었어?”
황망했다. 그러고 보면 그라니우스가 어디 보통 힘을 가진 사람이었던가.
‘첫날에 문짝을 부수던 사람이었지.’
힘의 신관에게 맞춰 나온 물건이라니. 정말,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돌렸는데도 돌아가질 않았다. 울컥 억울함이 차오르면서 열쇠를 잡고 낑낑대는 이때.
발소리가 들렸다.
아침이라 사방이 조용하여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구멍에 꽂힌 열쇠를 보다가 재빠르게 빼내서 책상 위에 올려 두고는 흐트러진 의자 위치를 바로잡고 서둘러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막 던져뒀던 걸레를 잡는 순간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허어? 일찍도 왔구나.”
평생 펜이라곤 붙잡아 보지 않은 것 같은 체격에 수염까지 길게 기른 내 상관은 뜻밖에 굉장히 성실한 사람인 듯했다. 일찍 나온 나만큼이나 출근이 일렀으니까.
성실한 정치가라니 전생의 정치인들과 비교했을 때 꽤나 어색하게 느껴질 법한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그에게 밝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라니우스 님.”
아, 오늘도 실패다.
“당신께서 제게 정보를 주셨으면 합니다.”
약 15일 전, 헤르난데즈가 내게 대뜸 적진 한가운데서 스파이 역할을 요구했을 때, 나는 잠시 그가 제정신인가 의심했었다.
‘지금 백치인 황녀에게 첩보 작전의 스파이 역할을 시킨 건가?’
나를 적진에 던져두고 정보를 알아 오라고? 카스토르 밑에서 온갖 참살은 보고 다녔을 헤르난데즈도 정상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니 이런 미친 소릴 하는 거겠지.
“뭐야. 지금 나한테 이상한 일 시키는 거죠?”
“설마요.”
헤르난데즈가 부드럽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흰 눈송이 같은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황녀님께서는 그저 지금 하던 그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이 얘기를 꺼낸 것은, 황녀님이 제게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반문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예. 당신께서 보신 것, 방문한 사람, 그날 조영관이 했던 일.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기록하셔도 좋고 직접 들려주셔도 좋고요. 당신께선 그저 ‘눈’이 되어 주시면 됩니다.”
즉 감시 카메라처럼 모든 정보를 담되, 분류는 자신이 하겠다는 거다. 살아 있는 CCTV가 되란 소린가. 아마도, 순진무구한 백치라면 제가 본 대로 가리지 않고 말할 테지?
조금은 수긍이 가는 한편 여전히 멍청한 어린 여자애의 눈을 빌릴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왜 내가 굳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건데?”
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치 불편하시게 하여 송구스럽다는 듯이. 저 깍듯한 예의를 보며 잠깐 혼란에 휩싸인다. 사실 그의 태도는 여러모로 이상했다. 황족 다음으로 높은 직위를 가진 공작이 굳이 힘없는 황족을 향해 저자세일 필요는 없는데.
“하기 싫어.”
연한 물빛을 담아 놓은 밝은 눈동자는 내가 불평하는 내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고, 말을 마친 내게 나직하게 물었다.
“황녀님께서는 이곳을 나가고 싶으십니까?”
“당연하잖아요. 나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지 않아.”
“황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실 때, 전하께서 전하라 하신 전언이 있습니다.”
“오라버니가?”
잠시 맑은 푸른빛 눈동자가 의미 없이 바닥을 응시한다. 어쩐 일인지 잠시 망설였던 그는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그곳에서 나오고 싶다면 내게 ‘스켈로스의 목걸이’를 가져오렴.」”
입술은 헤르난의 것을 빌리되, 말은 카스토르의 것이었다. 처음 들어 보는 단어에 눈을 깜빡인다.
“스켈로스의 목걸이가 뭐죠? 보석인가요?”
“아니요. 그것은 조영관만이 가지는 인장입니다. 목걸이이자 도장이며 힘의 신전의 성물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옥새라거나 국회의원 배지 같은 건가? 이게 왜 필요한 건데? 조영관 집무실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이야길 들으며 더 황당해졌다. 그걸 지금 날더러 가져오라고? 시선을 내리자 곱게 나뉜 정수리가 보였다.
난 터져 나올 것 같은 의문을 꾹꾹 눌러 담고 한마디로 대꾸했다.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나요. 무릎 꿇고 뭐하는 거예요. 다리 안 아파요?”
어떻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생각하면서.
다시 조영관의 방.
그라니우스는 일을 하는 동안 좀처럼 말이 없는 사람이라 둘만 있는 집무실은 고즈넉한 침묵으로 채워진다.
오늘로 약 15일째, 그의 집무실을 뒤져 보다가 오늘 막 벼르고 벼르던 책상을 공략했는데 처참하게 실패한 것 같다.
여기에 있을 거다. 딱 확신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영관의 직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물건이니 아주 은밀한 곳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를테면 비밀 서랍 같은 곳.’
그런데 튼 것 같지. 솔직하게 말해서 게임 퀘스트처럼 띠링! 보물을 찾았습니다까지는 바라지 않았으나 적어도 서랍 정도는 열게 해 줄 순 없는 거냐고.
당장에 정보를 모아 오라는 것도 무슨 얘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꺼내라는 건지 헤르난데즈의 의도를 도통 모르겠다. 죽음을 벗어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미로 속에 갇혀 있었다.
내가 백치에 뇌가 청순한 순진한 아가씨라는 가정 하에 이건 그냥 자폭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그 물건을 어찌어찌 찾아서 훔쳐 냈는데 성공했다 치자. 그럼 당장 누구를 의심할까? 5년씩, 10년씩 근무한 이곳 사람들과 두 달짜리 심부름꾼. 나라도 나를 가장 먼저 끌고 갈 것 같은데, 그때가 돼서 헤르난데즈나 카스토르가 던져뒀으면 뒀지 절대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진 않단 말이지.
아니, 확신한다. 둘은 망설임 없이 나를 버릴 거라고.
더구나 조영관의 상징을 가져오라니. 곱게 보이지 않는다. 황태자씩이나 돼서는 남의 목걸이나 탐내는 게 정상인가.
“막내야, 옆방에서 양피지를 가져오너라!”
“네!”
집무실 옆 공간에서 양가죽으로 만든 것들을 골라 낑낑대면서 들고 가는데, 발을 헛디뎌 양피지가 쏟아졌다. 그 순간, 양피지가 둥실하고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눈 깜빡할 새 책상에 열 지어 자리 잡았다.
눈을 깜빡거리며 돌아본 곳에 예쁘장한 갈색 머리 청년이 손을 흔들고 있다.
“안녕, 아가야.”
“앗. 안녕하세요, 펜네 님.”
마치 무게는 느껴지지도 않는 양 가볍게 나를 안아 들고 있는 남자가 웃었다.
“귀여운 아가가 이제 놀라 주지도 않네.”
그라니우스의 수석 부관인 남자가 푸스스 웃으며 나를 보는 것과 함께 눈짓했다. 허공에 떠 있던 나머지 물건들마저 책상 위로 얌전히 정돈되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덩달아 웃어 보였다. 몇 달을 보다 보니 이젠 당황할 새나 얼떨떨할 것도 없다.
“벌써 세 달째 저를 이렇게 띄워 주신 걸요? 아무리 구름과 깃털의 신관의 힘이라지만, 저 무겁지 않아요?”
“흐음, 깃털 세 개쯤 안고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천천히 날 안은 그대로 그라니우스 쪽으로 걸었다.
펜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구름과 깃털의 신관으로 모든 사람과 물건을 공중 부양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업무 능력 또한 뛰어나 평민에다 젊은 나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보좌관까지 출세한 관리였다.
이곳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를 매우 좋아하는 성격의 이 남자 덕분이라 봐도 좋았다. 지금처럼 툭하면 안아 드는 것만 제외하면 퍽 좋은 사람이었다.
“거 애 데리고 장난치지 말고 왔으면 일을 해. 일을.”
“아니, 아델리스. 망할 치안부서 순찰대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누군데요? 저보다 솔레토리움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주십시오. 잠시, 휴식하는 시간마저 관리받아야 합니까?”
“허어?”
펜네는 나를 안은 그대로 투덜거리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손을 대지 않고 그라니우스에게 날려 보냈다. 팩스도 아니고 졸지에 종이만 받아 보게 된 그라니우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휴식은 네 생각이고, 애가 불편해하는 게 안 보이냐? 네놈이 결혼을 못 하는 조계율의 신관이라 해도 말이야. 남의 귀한 집 딸에게 추근거리면 되겠어?”
“뭐가 불편하답니까?”
펜네가 불평하자 그라니우스는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렸다.
“네 나이를 생각해야지.”
“아델리스, 누굴 노년 취급하십니까? 저 아직 서른도 안 됐습니다.”
“안 들려. 어린 여자애를 좋아하는 부관은 사양이야. 이참에 사무실을 지하 감옥으로 옮겨 줄까? 종신 근무해 볼래?”
“누가 추행했다는 겁니까? 무서운 소리 마십시오. 아델리스야말로 어디서 이런 깃털 같은 여자애를 데려다 하는 일이 이게 뭡니까? 양피지같이 무거운 걸 들게 하는 게 누구신데요. 이 예쁜 눈을 보시죠. 다른 궁에선 훌륭한 시녀로 대접 받았을 겁니다.”
“심부름꾼으로 온 애를 심부름에 써먹지 않으면 어쩌라고?”
솔직히 비교군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나는 남들보다 꽤 늦게 자라는 편인 것 같다. 이곳에 온 뒤로 좀처럼 제 나이로 봐 주는 이가 없는 걸 보니.
“내려 두고 이쪽으로 와!”
“네, 네, 네. 솔라타 쪽에서 온 전보입니다.”
바닥에 발을 딛는 것과 동시에 펜네가 나를 스쳐 가며 들고 있던 서류들을 둥둥 띄웠다. 2황자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들으려 하지 않아도 조영관 그라니우스의 목소리가 원체 커서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빼곡하게 적힌 걸 줄이자면, 병력 좀 차출해 달라네요.”
“또? 2황자님도 참 날강도 같은 짓을 하시는군.”
“어디 그분 탓이겠습니까? 휘하 가문이 유난인 것을요.”
“그놈들은 손이 없어? 왜 우리 애들을 저들 뒤처리 못 한 것에 써먹으려 들어?”
“뭐, 그거야 저희 궁이 가장 신관 병력이 많은 곳이니까 그렇겠지요?”
“웃기는군. 원로원 아래 1, 2, 3청은 피하고 만만한 곳이 여기겠지. 우린 수도 행정 부서라고, 행정!”
“아니, 제 생각에는 조영관께서 문짝쯤은 혼자 거뜬히 부술 수 있는 행동파란 것에서 글러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싸움인지 논의인지 모를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본분에 맞게 차를 우려내고 있었는데, 막 끓는 물을 담았던 포트가 손을 휙 빠져나간다.
“잘 마실게.”
포트가 마찬가지로 날아간 찻잔 위로 홀로 우아하게 찻물을 쏟아 냈다.
“어쨌든, 저희가 2황자님 일을 굳이 도울 필요가 있는가를 두고 순찰대들은 대부분 회의적이에요. 그분께서는 음, 상당히 훌륭한 분이시만…….”
“신관이 아니시지.”
“네, 그거예요. 신의 은혜를 입지 못한 것. 비신관인 황족이 권력을 쥐는 일은 거의 없었잖아요? 그분께선 상당히 희귀한 경우시지요. 그 점이 뛰어난 능력, 훌륭한 성품에도 좀처럼 순찰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이유가 되고 있어요. 신관도 아닌 황족이 어떻게 신관의 일을 알겠냐면서요.”
“그렇다고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지. 너무 강대한 힘은 오히려 그네들의 방해가 되니까?”
그라니우스가 관자놀이를 꾹꾹 찔렀다. 생긴 건 어느 산에 거대한 산채를 지어 놓고 호령할 법하게 생겼는데, 저런 모습을 보면 지성파 같아 보여서 퍽 신기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라니우스가 이쪽을 보며 자상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결국 어느 쪽 파이가 더 크냐. 눈치 싸움이지.”
2황자의 이름은 율리안 폴룩스 루체 칼타니아스. 제국 관리 중 최고 지위를 가진 집정관 라할테미시스의 외손자였다. 그의 외가는 법의 신전 겸 대대손손 권력의 정점을 차지했던 이들로, 혈통으로 따지자면 그는 가장 뛰어난 후계자였다. 지금도 외척의 뒷배를 등에 지고 황태자의 지위를 위협하는 황자였다.
책 속 인물 중 가장 존재감이 뚜렷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 지체 없이 카스토르이고, 그런 그의 라이벌이라는 점에서 2황자도 보통 사람은 아닐 게 분명했다. 그만하면 능력도 나쁘지 않아서 황태자의 자리를 아슬아슬한 곳까지 따라잡았다고 읽었는데. 뭐, 결국은 카스토르에게 짓밟힌 비운의 인물이 되었지만.
금실 같은 고운 금발을 길게 늘어트린 아주 정석적인 왕자님 상이라고 알고 있다. 남주의 미모에 면역된 루스벨라가 잘생겼다 인정한 사람이 헤르난데즈이고 그 다음이 2황자다. 이로 봐서 매우 잘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솔직히, 나와 볼 일이 있을까 싶지만.’
꽤나 비중을 차지했던 2황자의 성격이나 사건 따위를 회상하며 어느덧 돌아가는 부관 펜네의 뒤를 졸졸 따랐다.
“잘 마셨다.”
“헤헤, 서툰 솜씨지만 좋아해 주셔서 기뻐요.”
사실 조영관이나 지금 나를 안아 든 남자나 나를 매우 어린아이로 취급하는데, 나는 성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이곳의 성년은 열여섯 살 혹은 열일곱부터였으니까.
펜네는 나를 예뻐하는 다른 청년들처럼 다정한 눈으로, 나를 허공으로 떠올려 손이 닿지 않게 안아 들었다.
내 나이를 듣고서 믿기지 않는단 얼굴을 하더니 그 후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귀여워하지만 조심스러워한다.
“가 볼게. 또 보자.”
“네.”
그가 돌아가고 다시 조영관 그라니우스와 나 둘만 남았다. 집무실은 포근한 오후의 햇살이 합쳐져 몹시도 나른하고 따뜻했다.
이럴 때면 죽었던 일이 전부 거짓말 같다. 비록 어떤 의도로 이곳에 던져졌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볕이 드는 잔잔한 공기가 평화로워서 잠시 이렇게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피하고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현실을 마주 보았다.
이틀에 한 번씩 찾아오는 헤르난데즈에게 아는 것을 털어놓고, 카스토르가 말한 물건을 찾는다. 이곳의 불민한 움직임은 무엇인가? 헤르난데즈는 무엇을 원하는가? 카스토르는 언제 또 날 찾아오는가? 휴식은 없었다. 얼마 전 헐떡이며 제출한 답안지가 사라지고, 새로운 시험에 직면했으니까.
나는 쓰레기를 옮겨 담으며 물끄러미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 당면한 과제는 목걸이였다.
‘어떻게 물건을 찾지?’
아마도, 그 열쇠로 여는 서랍에 답이 있을 것 같은데. 사각사각 펜이 양피지를 긋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라니우스는 손을 움직이는 것 말고는 참으로 고요하게 움직였다.
“막내야.”
“네?”
막, 서류를 넘기던 그라니우스가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그거 눈에 띈다.”
막 쓰레기를 비우던 나는 그라니우스를 돌아보며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눈에 띄어? 뭐가? 무엇이? 굉장히 두서없는 말 같았다. 순간, 그라니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뒤로 번쩍이는 금빛 창틀에서 카스토르의 황금안을 떠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베르미아의 10일을 기다리던 시간처럼 성큼 다가오는 불안을 느끼면서 고개를 완전히 들었다.
“네 목의 그 목걸이. 몰락 귀족의 여식이 하기엔 너무 값비싼 목걸이구나.”
“…….”
명절날 털털하게 웃던 노총각 삼촌처럼 그저 수염 난 중년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저 높은 산처럼 위엄을 띠고 잔잔하게 웃었다.
“네 그럴듯한 연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난 레이 경이 준 목걸이를 꽉 움켜잡다가 혼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순진하게 그를 응시했다. 순진한 체하자고. 그러나 인자한 것 같던 조영관의 눈에서 엄격함을 보고 깨달았다. 그는 조언한 것이었다. 이윽고 덧붙인 말에서 나는 비로소 그가 제국에서 손꼽는 최고 직위 정무관임을 깨달았다.
“모쪼록, 나는 황녀님께서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몸이니 말이다.”
* * *
“이런 일이 있었어요.”
막 과자를 입에 가져가던 아모르는 먹는 대신 그것을 내려놓고 비웃듯이 툭 던졌다.
“뭐야, 세 달 만에 들킨 거냐?”
“들킨 건지 아닌 건지 저야 모르죠.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요.”
“첫날에 문짝을 부쉈다며? 조영관 그라니우스의 불같은 성격이야 익히 알고 있어. 하지만 단순히 데려온 아이가 계집인 걸로는 그 정도로 화내거나 하지 않아. 네가 추측한 쪽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라니우스 님을 잘 아시네요.”
“한때 내 궁의 나무도 두엇 꺾어 놓고 갔으니까. 황소고집이야.”
하베르미아의 달 10일로부터 약 네 달.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모르를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겪은 것을 모조리 털어놓으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처음, 그라니우스에 대해 묻는 나의 방문에 짜증을 내며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버럭 화를 냈던 아모르는 방문이 두 번째가 되고, 세 번째가 되자 체념했다.
그렇게 너는 떠들어라 나는 무시하련다는 식이다. 하지만 약 네 달이 지나가자 다시 의문이 치켜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라니우스가 왜 오라버니 궁의 나무를 꺾어요?”
“나를 회유하려 했으니까.”
“회유?”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간에 그에게는 밉보이지 않는 게 좋을걸.”
식물을 사랑하는 신관답게 꺾인 나무 얘기에서 이를 갈 듯 말했던 아모르는 고개를 돌려 턱을 괴고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건데?”
“그러면 안 되나요?”
“말 흐리지 말고.”
아모르가 미려한 낯에 주름을 만들며 내 이마를 툭 짚었다가 떼어 냈다.
“똑바로 말해.”
서툰 변명이나 어설픈 꼬리잡기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였다.
“으음, 글쎄요…….”
43번째 하루, 더는 의미 없는 시간이라 생각하여 아모르에게 내숭이랄 것도 없이 막돼먹게 굴었던 하루 그대로 시간이 넘어간지라 나는 이미 아모르 안에서 얌전한 아이기도 글러 먹은 상태였다.
“제가 유일하게 저로 있는 시간이기 여기에서뿐이기 때문일까요?”
더군다나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막 대할수록 아모르는 더 편안한 모습을 보여 줬다. 다정하진 않았지만 자연스러웠다.
“좀 봐주세요. 이렇게 막말하는 것도 이곳에서뿐이라고요.”
“달리 말하면 내가 쉬운 사람이고?”
“어라, 그렇게는 말 안 했는데.”
저를 놀리는 걸 알아챈 아모르가 눈을 가늘게 좁힌다. 그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휘리릭 감긴 넝쿨이 내 손을 들어 올려 정확히 내 이마를 때렸다.
“……와, 이런 소심한 복수는 오라버니만큼은 하지 않으실 줄 알았는데.”
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마만을 노리는 걸까. 반듯하게 까져서 때리기 좋은 걸까. 이마를 만지는 사이, 턱을 괸 아모르가 콧방귀를 끼며 손을 퉁겼다.
철썩, 잎사귀가 달라붙은 이마에서 박하사탕을 삼켰을 때의 청량함이 느껴진다.
“흥, 나 말고 너로 속 썩이는 사람이 또 있나 보지?”
“있어요. 플뢰온이라고.”
“알아. 6황자.”
거,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이마를 문지르는데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평화롭다. 평범한 일상인 것만 같다고. 아직 카스토르는 어떤 꿍꿍인지 속을 모르겠고, 이틀에 한 번씩 그의 측근이 찾아오는데 지금 아모르 방 안에 있는 때만큼은 참 평화로운 시간이라고.
고개를 돌려 푸른 식물들을 본다.
“……이게 바로 피톤치드의 힘인가.”
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아모르의 식물들을 바라본다. 그날 밤에도 있었던 식물이다.
그 순간 눈앞이 까맣게 덧칠되며 수십 번 되풀이했던 시간이 덧입혀졌다. 매일 밤, 아모르를 찾아서 그를 살렸던 시간이었다. 절박했고 간절했던 나를 바라본다.
약 네 달 전. 드디어 되풀이되던 시간을 벗어났던. 한동안 살아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또 죽으면 어떡하지? 그때, 나는 망가지지 않을 자신이 없는데. 지겹던 되감기를 벗어나 살아 움직이는 한나와 하녀들을 보면서 매일 감격에 사로잡혔지만, 동시에 지독한 공포에도 사로잡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뒤로 덧입혀지는 지나간 죽음의 잔상을 보았고, 그건 깨어 있을 때 꾸는 악몽이었다. 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 그 시간의 그들은 어디로 갔지? 이미 죽은 사람이 있는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어쩌면 죽은 채 흘러가는 시간도 있는 것이 아닐까.
늪처럼 빠지는 생각 속에서 단 하나만이 작은 빛처럼 내게서 반짝였다.
아모르.
약 마흔 번의 하루 동안 카스토르의 검에 죽고 살아나 다시 그를 구하러 갔을 때,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아모르는 나를 들여보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상하지, 한번쯤은 나를 거절할 법도 싶은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수한 기억 속에서 그만이 똑같았다. 그것이 지하 방에 스민 햇빛처럼 나를 적셨다. 시작이 치밀한 계산속이었고 훗날 체념과 함께 관성처럼 이어 가던 짓일지언정 그를 살렸고, 수십 번 되풀이하며 내가 살렸던 사람이었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아모르는 밤보다도 조금 편안한 얼굴로 나를 본다.
잔잔한 공기. 살랑대는 잎사귀. 풀내음. 막연하게 먼 미래를 그려 본다. 그 미래에 나도 너도, 내가 사랑한 이들 모두 살아 있으면 좋겠다.
아니, 나는 더는 나로 인해 죽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바라고 있다. 비록 이 세계의 좋은 것에는 주인공 전용 잠금 쇠가 걸려 있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그러니 난 늘 생각을 해야 한다.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카스토르를 대비하고 살아남기 위한 단서를 포착하도록 그리고 언젠가 지옥 같은 전쟁이 일어날 이 땅을 빠져나가기 위해 살고자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오라버니, 앞으로도 제가 살려면 어떡하는 게 좋을까요?”
“왜 네 살길을 나한테 묻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조금 처연하게 웃었다.
<모쪼록, 나는 황녀님께서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몸이니 말이다.>
헤르난과 그라니우스는 각각 단서를 던져 주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난 배경이 없잖아요.”
그런데 나는 받쳐 주는 배경도 없고 변변찮은 정보도 없다. 애석하게도 내가 아는 정보는 전부 모두 아주 먼 미래의 일이니까. 그래서 아모르의 도움이 필요하다.
모든 정보를 손에 쥔 식물의 신관이자 내가 살린 이 남자의 도움을 받으면 빈털터리가 된 나라도 숨 쉴 구멍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데인과 플뢰온 앞에서도 못 보였던 속마음을 드러내 솔직하게 울상을 지어 보였다.
“저 불쌍하지 않아요?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았는데 이제 적진에서 스파이 노릇을 하게 생겼다고요.”
“네 운명이려니 해.”
그는 창백한 낯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늘색 머리를 쓸어 올리는 것과 함께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성마르게 대꾸했다. 두통이 오는 모양인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모양새가 퍽 안쓰러웠다.
“선배로서 조언해 줄 생각은 없으신가요?”
“선배?”
아모르는 중얼거리며 비쩍 마른 얼굴에 광대가 도드라지게 웃었다.
“살아남은 동지요.”
“말했잖아. 개처럼 이어 가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그만. 백치 흉내를 내서라도 살아남은 건 네 선택이었어.”
나는 건조하게 재깔이던 아모르를 보다가 천천히 그의 뒤로 시선을 옮겨 갔다.
“책임을 오라버니에게 지우려던 건 아니에요.”
“알아.”
피로한 내 얼굴과 병약하여 예민함이 느껴지는 아모르의 얼굴은 닮았다. 우리가 겪은 경험이 그렇게 만들었다. 언제 죽을지 몰라 핏발을 세우고 피부가 푸석푸석해지도록 밤을 지새우고 무력한 공포 앞에서 살고자 의미 없이 날갯짓했던 날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전부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었지.
전생에서는 아플 때 병원을 가고, 강도는 경찰을 찾으면 됐는데, 내가 받았던 무자비했던 폭력과 폭압은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말을 하면 좋을까.
나는 안다. 우리 사이는 조금 말랑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는 것만큼 바뀐 것은 없다고. 아모르는 카스토르와 내가 천칭에 오르면 주저 없이 카스토르를 택할 거다. 그건 아모르에게 카스토르가 찍어 놓은 낙인이다. 내가 그랬듯이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굴레이기도 했다. 그를 이해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그 굴레를 어떻게 벗게 해 줄지 모르겠다. 또한 나도 당장 나 살기에 벅차니까.
그럼에도 그가 조금만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도 함께.
“많은 것도 필요 없어요. 그냥 조금이면 돼요.”
아모르는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쪼그려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도와주세요.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지내는 건 그래요. 차갑고 힘이 들거든요.”
그는 입술을 몇 번 말할 듯이 달싹이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너는, 왜 내게 그런 것을 스스럼없이 말을 하는 거지?”
“음, 그야 우린 동지잖아요?”
“동지?”
나는 아래를 의미 없이 응시했다가 옅게 웃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뱉었다.
“오늘도 살아남은 동료예요.”
비록 한 배를 탄 건 아니지만, 같은 풍랑을 만나 헤쳐 가는 사이지 않나. 카스토르라는 거대한 폭풍 앞에서 너도 괴로웠고 나도 괴로웠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폭풍 안에서 무찌를 힘을 쌓고 피해 가는 방법을 강구하면 안 되나.
여전히 너무나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한 번은 살았으니까 어쩌면, 두 번은 조금 더 쉽게 갈 수 있지 않겠냐고.
“동료 같은 소리.”
까칠한 낯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조금 느슨해진 눈매가, 더는 독설만을 퍼붓지 않는 네 말이 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 믿고 싶게 한다.
너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무수한 시간에 아주 작은 보상을 느낀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만 기억해도 좋으니 잠시라도 네가 나를 편안하게 느꼈으면 좋겠다. 당신도 나도 이 편안한 시간이 조금이라도 오래갔으면 하고.
“……솔레토리움은 황태자 쪽도 2황자 쪽도 아닌 유일한 중립 지대다. 그래서 가장 이권 다툼이 심한 곳이야. 신관이 많으니까.”
“몸 엄청 사려야겠네요.”
아모르가 끄덕였다.
“그라니우스는 공평한 작자이다. 그리고 뛰어난 위정자지. 너를 죽지 않게 보호는 할지 모르겠으나 다치지 않게 지켜 주진 않을 거다. 판단은 네 몫이야.”
나는 눈꺼풀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차라리 솔레토리움에 가게 된 게 잘된 일일 수도 있다. 그라니우스는 실수로 독을 먹은 부하를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었다. 그 위치까지 간 사람치고 정이 많고 아랫사람을 끔찍이 여기는 편이지.”
“그럼 그의 호감을 사면 저는.”
“그래. 앞으로 나날이 편해질지도 모르지.”
아모르는 몹시도 피곤한 사람처럼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만으로 창문을 닫았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몰라.”
아모르는 내겐 관심 없는 것처럼 먼 곳을 응시했고, 옅은 풀빛 눈동자를 둘러싼 긴 눈썹이 팔랑거렸다.
“그의 호감을 사는 것. 꼭 너만 한 조카가 있다 하였으니 잘하면 그 밑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불만스런 목소리일지언정 그동안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던 얘기들이었다. 고맙다고 중얼거리는데, 아모르는 짐짓 얼굴을 괴괴하게 찌푸리며 비웃듯이 뇌까렸다.
“네가 제일 잘하는 것이 동정을 사는 짓 아니었나?”
“오라버니는 저를 동정했나요?”
“…….”
두 달이 지난 지금 아모르는 나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느끼게 되었을까. 샘솟는 궁금증을 꾹 참았다.
잠시 뒤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며 문을 나설 때까지 아모르는 턱을 괸 채, 바닥을 응시하며 말이 없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기 전에 돌아서서 말했다.
“맞다, 어때요? 저 시종 옷이 퍽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는 매우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곧이어 아니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녀면, 드레스를 입을 생각을 해.”
잠시 침묵했던 그가 다시 툭 뱉었다.
“얼굴에도 혹 그만 달고.”
그가 비웃었다. 이 혹은 며칠 전 그라니우스가 힘 조절을 못 해서 생긴 건데, 어떻게 설명해야 좋으려나.
눈을 깜빡거리면서 창백하고 고운 얼굴을 담아냈다. 햇빛에 찬란한 얼굴은 오랜 병치레와 독으로 엉망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참 잘생겼다.
아모르가 건강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을 가지지 않았을까. 루스벨라가 나타나면서 만들어질지도 모르지. 그건 좀 아쉽겠다. 그때 나는 여기 없을 테니.
지금도 은은한 풀내음이 언뜻 그를 편안하고 보송보송한 것처럼 보여 주니까 여주인공의 마법까지 거치면 사랑에 빠진 이 남자는 꿀처럼 달콤한 미소와 목소리를 가질지도 모른다고.
어쩐지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네 이상한 능력이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잖아.”
“아, 그거. 없어요, 이제.”
나는 마치 동네 마실 나간다고 말하듯이 여상하게 대꾸했다.
“오라버니를 살린 이후로 사라졌어요.”
반쯤은 거짓말이 섞이긴 했지만 찔릴 일은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니까. 놀란 눈동자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네 달 전. 살아남은 이후, 일기장은 백지가 되었다.
* * *
“좋은 아침이야, 아실리.”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예고하는 일기장이 없어지자, 후련함을 느끼는 동시에 갑자기 세상 밖으로 던져진 스무 살 적이 생각났다.
“응, 데인 오빠.”
이상하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인데. 석 달하고도 일주일. 나는 멋대로 나타나서는 내 미래와 시간과 하루를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던 일기장이 사라지자 아쉬워하고 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데인과 플뢰온과 수업을 받으며 수업이 아닌 다른 생각에 빠졌다. 일기장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발밑이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 내는 게 먼저이려나.
‘이럴 때, 램프의 요정처럼 무엇이든 답해 주는 요정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당장 가까이 지내는 오빠들과도 소원한 참이었다. 하품하며 흘끗, 데인 쪽을 곁눈질한다. 반듯한 옆모습. 책에 빠진 데인은 빤히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와 가까운 듯 미묘한 거리감이 생겨서 담소하는 티타임보다 그저 옆에 앉아 있을 뿐인 수업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건 내가 제4 행정청으로 가게 된 날, 크게 싸웠기 때문이겠지.’
일기장. 그 정체 모를 것에 휘둘려, 죽고 죽는 것을 반복했었다. 그러나 나는 데인에게 이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믿을 수 있을까? 나조차도 누군가의 입으로 들었을 때 믿지 못할 말인데. 증거마저 사라졌다.
‘완전히 깨끗하게 말이지.’
텅 빈 일기장을 만지작거렸다.
카스토르에게서 살아남과 동시에 모든 기록이 사라지면서 일기장은 처음 발견했을 때와 같이 백지로 변했다. 만약, 내가 수차례 반복을 겪지 않았다면 그냥 수첩으로 알았을 것같이 아주 고요하게. 그렇게 나는 내 과거를 증명하는 증거조차 잃은 셈이었다.
힘들다.
인생은 자력 구조라 했고, 스스로 내일도 살고 모레도 살고 5년 뒤까지 살아남아서 멀리멀리 도망가고 싶은데, 머릿속의 본능이 그러려면 당장 카스토르부터 어떻게 해야 할 거라고 속삭였다.
이제 당장 내일 죽는다는 예언은 사라졌지만 대신 나는 미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신경 써야 할 것도 조심해야 할 것도 너무나 많은데, 몸은 하나고 그 몸마저 생각만큼 움직여지질 않아서 피로가 해소되기는커녕 쌓이고만 있는 것 같다. 하늘로 쌓아 올렸다던 바빌론의 탑처럼 내 스트레스도 쌓이다 쌓여서 와르르 무너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며칠 뒤 새가 짹짹대는 오전.
중앙 궁으로 향하는 짐마차에 올라탔다. 서쪽 궁과 중앙 궁 사이의 물자를 옮기는 마차는 황녀가 몸을 싣기에 허름한 편이나 시종이나 하녀들은 종종 애용하는 탈것이었다. 그리고 근 네 달간 나는 홀로 출근하는 대신 불편한 객과 함께였다.
“나올 필요 없대도.”
나는 부득불 내 출근길에 동행하는 레이 경을 아니꼽게 올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 경은 마치 남인 양 반대편 구석에 등을 기대고는 눈도 뜨지 않고서 대꾸했다.
“이게 제 일입니다. 귀하신 분.”
‘황녀님’이라는 호칭을 두고서 굳이 귀하신 분하고 부르는 것은 그의 불만을 드러낸 동시에 보는 눈을 신경 쓰라는 조언이었다. 이를테면 이 얇은 천을 사이에 둔 마부라거나.
“검사님께서 이리 멀리 나오시면 소중한 황자님들은 누가 지키나요?”
“그분께서 더 소중하신 분을 모시라고 보내시더군요.”
허리에서 풀어 앞으로 검을 안고 있는 레이 경의 모습은 느긋하게 보이면서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보였다. 놀러 가는 것인지 모를 그 모양새에 절로 혀가 차이면서 난 뚱하게 머리를 괸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똥고집.”
“누가 할 소리입니까.”
황녀라고 조심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이 툭 뱉어 낸 레이경은 곧 머리까지 기대어 눈을 감았다.
벌써 한 달이나 된 그의 동행에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데인이나 플뢰온과 함께였던 것과 달리 단둘이서 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하지만 저 불성실한 검사님은 내 불만이라든가 불평이라든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앞으로 수업에 뜸하게 나오신다 들었습니다.>
제4 행정청에 나가게 된 뒤로 선생은 가끔은 안타깝고, 두려움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내 궁에서 있던 소란을 아는 모양이었다. 말없이 수업 시간을 오후에서 이른 아침으로 옮겼고 심심찮게 결석해도 그냥 족족 넘겨 버리는 것 같았다. 오늘도 수업 중간에 나가는 날 향해 깍듯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차마 잘 다녀오시란 말은 나오질 않나 보다.
이처럼 카스토르가 다녀간 뒤로 사람들은 묘하게 달라졌다. 그건 레이 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행정청으로 들어가고 나서 레이 경은 나와 동행을 자처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근처 자유 훈련장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했나.
‘아니, 검사단에서 쫓겨났다면서 그곳을 이용할 수 있긴 해?’
지금까지 정다운 교류 하나 없던 레이 경과 나 사이에 묵묵히 기다리는 행동이 더 불편하게 하는 걸 알기나 할까.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짐마차가 멈췄다. 레이 경은 짐승처럼 날쌘 동작으로 사다리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나도 내리려고 보니 보통 달려 있던 사다리가 없었다.
“저런. 내리는 데 애를 먹는 것 같군요. 도와드릴까요?”
먼저 뛰어내렸던 레이경이 위로 얼굴만 삐죽 내민 채 히죽 웃었다. 건수 잡았다는 듯이 팔을 괸 얼굴 위로 얄밉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아가씨, 여기에 제 손이 놀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사람이 개과천선하거나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전부 데드 플래그였는데, 레이 경 어디 사채라도 쓴 걸까? 마치 저 아니면 어떻게 하겠냐는 듯이 팔을 벌리면서 말이다.
지금이라면 레이 경을 향해 두꺼운 전공서를 내려치면서 돌아와요 레이 경! 하고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키진 않지만 기꺼이.”
가끔 뭐든 간에 쟬 보면 던지고 싶어진단 플뢰온의 말을 이해하면서 난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경, 미리 말하는데, 나중에 가서 나 때문에 지루했다느니 그런 소리 말고 심심하면 먼저 가도 좋아.”
“명심해 두도록 하지요.”
그는 날 안아 든 채 소탈하게 웃다가 속삭인다.
“그럼 오늘도 무탈히.”
무탈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피폐물을 좋아했다. 덤으로 추리물도 좋아했다. 하지만 한 번도 피폐물이라거나 추리물 속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개를 모조리 해 보게 생긴 것 같다.
쨍그랑. 막 그라니우스가 아끼던 유리잔이 깨졌다.
솔직히 피폐 로맨스에 환생한 걸로 모자라 40번 넘게 회귀했다. 피폐라는 능력치가 있다면 최고 능력치를 달성하다 못해 마스터했지 않았나 싶지만,
추리는 글쎄. 지금부터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고 오늘로 레벨 업 해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시간 전. 보통 집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나는 주로 오자마자 창문을 열었고 간밤에 쌓인 쓰레기를 비우거나 한 번씩 집무실 구석에 놓인 갖가지 술병을 치우는 일부터 했는데, 오늘은 그보다 다른 일부터 하게 될 것 같다.
집무실에는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으니까.
“음, 누구세요? 그라니우스 님의 손님이신가요?”
일단, 만약에라도 실례를 범했다간 큰일이니 먼저 물었다. 아무리 봐도 저 검은 옷이라거나 눈구멍만 뻥뻥 뚫어 놓은 복면이라거나 검은 부츠까지 풀 세트 장착한 분의 성함은 도 씨라거나 도 선생 같지만, 나는 패션에 관대한 사람이니까 만약을 대비해 차를 꺼낼 생각도 했다.
한참 조영관의 책꽂이 앞을 뒤지고 있던 정체 모를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서 흠칫 놀란다. 그걸로 봐서 상당히 집중했던 모양이었다. 책상이며 바닥이며 아주 작정을 하고 어지럽힌 듯, 도무지 제자리에 있는 물건이 없었다.
유리로 된 것들은 바닥에 전부 파편이 되어 흩어져 있어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저 엉망이 된 책장은 다 내가 치우겠지? 이러면 안 되지 싶으면서 자꾸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도둑이냐, 강도냐.”
나를 쳐다보는 눈은 아주 차가웠고 처음 보는 푸른색이었다. 차라리 광기에 물들었다면 카스토르다 생각하고 욕이라도 해 볼 텐데 그는 정말 냉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것 같았다. 죽일까?
검집을 건드리는 걸 보아 심상치 않다. 남자의 시선이 나무처럼 타고 올라간다. 짐승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보자마자 나는 저 사람이 나를 죽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남자가 땅을 박차며 이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닥으로 부딪힌 몸을 느낄 새도 없이 컥, 숨이 조여 왔다. 나는 80미터에 17초나 걸리는 운동치였는데, 이번 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목을 거머쥔 손에 얼마나 힘을 준 건지, 거칠게 숨이 컥컥 넘어가며 금방 현기증이 느껴진다. 칵, 새된 짐승 같은 소리를 냈던 것도 같다.
“크읍. 큽, 그, 라니우스…….”
오늘은 그라니우스가 좀 빨리 오지 않나. 아주 잠깐, 왜 내 인생엔 이럴 때 멋지게 나타나는 검사님 하나 없나 생각했다. 도무지 내 나이를 배려하지 못한 처사에 고통스럽고 깜짝 놀랐으며 짜증이 났다.
왜, 왜, 나만!
목이 짓눌린 채, 손을 더듬다가 냅다 잡힌 것을 남자의 팔뚝 안쪽에 꽂아 넣었다. 크윽,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들리고 목을 죄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나는 그대로 남자를 밀치고 기어서 밭은기침을 토해 냈다. 관자놀이와 폐가 꽉 죄인 듯 아파서 들어가는 숨도 나가는 숨도 아프게 느껴졌다.
“컥, 다, 당신…….”
이 새끼. 너 도둑이지? 그 말이 나오질 않아 나는 거칠게 숨만 내쉬었다. 막 손을 수습한 남자는 피를 뚝뚝 떨어트리면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푸른 눈이 재빠르게 방 곳곳을 훑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갔다.
“거기 서!”
창문! 약 10초 늦게 창문에 도착한 나는 이미 뛰어내려 저 멀리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뒤를 본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이곳은 2층 창문이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죽음에 길들었던 나는 어떡할까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뛰어내리고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기장, 사라졌지? 비록 더는 살아나지 않겠지만 아직 내겐 고통에 무딘 몸이 있다.
‘아마 어디 부러지지만 않는다면 쫓아가거나 소리 정돈 지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어떡하면 덜 다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그 순간 바람이 휙 불어 나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아가?”
“펜네 님!”
나는 펜네에게 고맙다고 할 새도 없이 남자가 도망친 쪽을 보았다. 늦지 않았다! 일직선 길의 끝에서 막 모퉁이를 돌던 검은 옷의 끝자락이 보였다.
“저거! 저 사람! 잡아야 돼요! 도둑이야! 그라니우스 님 집무실에서 물건을 훔쳤어요!”
펜네가 나보다 더 허둥대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베테랑 신관이었다. 날더러 여기 있으라고 한 뒤 재빠르게 제 몸을 띄워 남자가 사라진 모퉁이로 날아갔다. 눈으로 붙잡지도 못할 속도에 쯧쯧 혀를 차며 감탄하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아.”
하아, 뒤늦게 온몸이 뻐근했다. 실실 헛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데.”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어쩌면,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이 몸으로 환생했다면 40번이나 죽지 않고도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인제 그만 나는 내가 멍청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 보다.
아니, 처음부터 환생 따위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정말 『루스벨라의 빛』 속에 태어나게 해 줄 거라면 좀 더 좋은 생도 많았잖아. 나는 전생에 나름 착하게 살았다.
물론 사람이 늘 착하게 살 수만은 없어서 가끔 쓰레기도 버리고 무단횡단도 하고 술 먹고 행패도 부렸지만, 가끔 기부라거나 봉사라거나 한겨울 구세군 냄비를 지나치지 못했거나, 착한 일을 소소하게 했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인생이 구르고 또 구를 이유는 없지 않은가.
“분명 그 목걸이였지?”
너무했다. 이 심부름꾼의 일에서 좀 벗어나 보려고 한 게 죄인가? 눈앞에서 뺏긴 기분이 참담했다.
‘하아. 망할. 눈앞에서 빼앗길 줄이야.’
그건 나를 카스토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게 해 줄지도 모를 중요한 물건이었다. 내가 반달이 걸려도 찾지 못한 걸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 몰라도 눈앞에서 홀랑 뺏긴 기분은 아주 더럽고 허탈했다.
“아가, 괜찮니? 나와 함께 치료하러 가자꾸나.”
돌아온 펜네가 나를 안고, 집무실로 향했다.
조금 뒤 좀 이르다 싶은 아침에 조영관의 집무실에는 순찰대들이 모여 있었다. 그라니우스를 포함한 지금 출근한 이들이 전부 모인 듯했다.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목을 쓰다듬으며 간간이 조영관과 이름 모를 중년, 청년들의 질문에 답하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어.”
고작 몇 분 전력 질주했다고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몸을 보니까 정말 이 몸은 답도 없는 것 같았다.
‘일단은 부러지지 않았으니까 다행인가…….’
그나마 침입자가 2층에서 뛰어내려서 망정이지 그대로 조영관 집무실에서 뛰어내리고 펜네가 나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로 다리 하나쯤은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깍지를 끼고 침묵한 그라니우스를 쳐다보았다.
“아델리스, 없어진 것은…….”
평소 그라니우스는 생긴 것과 달리 꽤 깔끔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집무실은 눈 뜨고 볼 수 없게 아주 엉망이었다. 이게 그의 분노에 단단히 한몫한 것 같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가 도열한 사람을 훑는다. 오른쪽부터 왼쪽 끝까지. 분노는 뜨겁지만은 않았다. 서늘하고 조용하며 깊게. 방을 꿰뚫는 시선이 얼음송곳 같았다.
쭉 침묵을 이어 가던 그가 드디어 입을 떼었다.
“막내야, 다친 곳은 없느냐?”
그는 그래도 내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 그런지 부하들의 질문을 깡그리 무시한 채 가장 먼저 내 안부를 물었다. 묻는 건 좋은데,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다. 청년이고 중년이고 다들 어리둥절해서는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괜찮……”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아델리스.”
나를 대신해 대답한 것은 펜네였다. 어느새 소릭스 등 몇 번 얼굴을 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 수상한 자를 보고 막내가 뒤쫓았다고?”
“예, 2층에서 떨어지는 걸 제가 받았고, 제가 달려갔을 땐 이미 도망친 후였습니다.”
“저랑 잠시 붙었는데 꽤 강한 실력자였습니다. 제 생각엔 아무래도 콘셀레티오(도적들의 신) 신관인 것 같습니다.”
“메타.”
“네! 도둑의 신관 납셨습니다. 흔적을 보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
뭔지 모르겠지만 다들 하나같이 침음에 잠겨서는 나는 모를 법한 말들이 오고 간다. 휙휙 스쳐 가는 용어들을 가늠해 보다가 목을 쓰다듬었다.
“아…….”
그저 만지기만 했는데 따끔거리면서 조금씩 커지는 것 같다.
때때로 어떤 고통은 교통사고의 사고 후유증처럼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난다던데 지금 내가 겪은 게 이런 걸까. 한숨을 쉬었다.
플뢰온한테 혼나겠네.
“집무실에 보관하던 것들은 모두 무사하다. 기밀 쪽도 무사해. 다만, 쥐새끼는 엉뚱한 것을 훔쳐 갔더군.”
전날 내가 열쇠를 가지고도 낑낑대며 열지 못했던 서랍은 반쯤 파손되어 있었다. 그가 서랍에서 줄이 길게 이어진 금편 같은 것을 꺼냈다.
“그건…… 스켈로스의 목걸이군요.”
“그래.”
자잘한 보석이 붙어 있는 그것은 태양의 조각처럼 번쩍번쩍한 금빛을 드러냈고 온전하지 못한 형태로 보아 부서진 것 같았다.
“온전히 들고 가지 못하고 반으로 부숴서 가져갔더군. 이 목걸인 신관의 증표. 지금쯤 저주로 몸이 엉망이 되었을 게지.”
……저주?
“예. 그럴 겁니다. 아주 중요한 신물은 신관들이 별도의 저주를 걸어 놓고서 주인이 아닌 자가 손을 댔을 때, 심한 손상을 입게 하니까요.”
마치 방범 벨과 같은 기능이 저것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라니우스의 손에 들린 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뭐야, 반은 남아 있었어? 그럼 저걸 가져다가 헤르난데즈에게 줄 수 있을까? 나도 저주 받으려나.
“일단 경계를 강화하고 수상하다 싶은 놈은 전부 잡아들여. 펜네는 소릭스와 함께 몽타주를 작성하도록.”
“네.”
깍지 꼈던 손을 풀어낸 것과 함께 그라니우스가 모여 있던 사람을 해산시키고 모조리 밖으로 내보냈다. 그 과정에서 펜네와 소릭스는 나를 데려가 치료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왜인지 조영관이 나를 잡아 둬서, 집무실엔 그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황녀님.”
그가 처음으로 나를 제대로 불렀다.
“괜찮으십니까?”
막 바닥을 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미지근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커다란 의자를 꽉 채워 앉은 그라니우스는 사람이되 단단한 바위 같았다.
“아무도 없으니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얼마 전 내 정체를 정확히 말하던 그를 생각해보면 하릴없이 농을 던지거나 정겨운 삼촌인 양 다정한 모습 뒤로 그는 무겁고 단단한 자신을 숨겨 두고 있나 보다. 제련된 철처럼 한 단체의 장이라면 이런 위엄을 기본으로 가지는 걸까.
“……네. 괜찮아요. 별거 아니었는걸요.”
이럴 때면 나는 황녀로 태어나되 영혼은 여전히 소시민에 가까운 을인 것 같다. 군림도 싫고 억압도 싫다.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이 하나가 되게 어렵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다치는 일이야 제 소관이 아니라 생각하였지만, 귀하신 분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단 점에서 사과드려 마땅한 일이겠지요.”
“2층에서 떨어진다고 죽지 않아요.”
떨어져 봐서 아는데라곤 말할 수 없으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침입자 때문에 심하게 다치고 떨어졌는데도 말입니까.”
사실 펜네가 말할 때 침입자가 나를 떨어트린 것처럼 말을 했는데, 사실 직접 뛰어내린 거니까. 모르는 모양인데 굳이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군데군데 백발이 섞인 머리카락을 가진 그는 침잠하는 눈을 하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황태자 전하가 그리 가르치셨습니까?”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태자? 카스토르?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걸까?
‘아, 카스토르가 나를 이 자리에 추천했었지.’
그라니우스는 내가 카스토르의 예쁨이라도 받는 줄 알았던 걸까. 그거야말로 좀 끔찍한 얘긴데.
“어째서 그런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떨어져서 아프진 않은 건 아니지만 참을 만한 고통이란 걸 안다. 그러니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카스토르가 가르친 건 아니지만, 카스토르가 이런 걸 알도록 몰긴 했으니까.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참으로 담담하시군요. 조금 전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사람답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렇게 보이십니다.”
대꾸할 말이 없어 눈만 데구루루 굴린다. 나는 그렇게 눈을 깜빡이며 두 달 내내 보았던 그를 한번 찬찬히 뜯어봤다. 항상 올려다봐서 몰랐지만, 마주 본 눈동자는 그가 주는 위엄에 비해 따뜻하고 믿음직스럽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바람에 새하얗게 펄럭이는 토가를 보던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이미 들킨 것 같아서 당신께만 털어놓는 거지만요. 난 사실 그리 놀라지 않았어요.”
나는 순진한 표정을 지우며 놀라지 않은 얼굴 그대로 그에게 낯을 보였다. 이미 겁먹은 연기하기도 글렀으니까.
그라니우스는 잠시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날 바라봤다. 입을 다물었다가 떼어 낸다. 그가 천천히, 하지만 묘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황태자 전하께서 이 궁에 당신을 데려오셨을 때 저는 그분께서 당신을 두고 미리 신관으로 키우려고 하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가요?”
“네. 대부분 황족은 날 때부터 신관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자질을 띠고 있지요. 그러나 당신께는 소질이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담담히 수긍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저는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께서 데려오신 당신이 저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합니다. 당신은 이곳에 올 사람이 아니십니다……. 어째서 귀한 황녀님을 데려다 궂은일을 시키신단 말입니까?”
그거야, 귀하지 않으니까?
잠시 말을 끊었던 그라니우스는 한숨을 내쉰 것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신관이면서 태초의 뿌리를 이은 첫 번째 가지이신 그분이. 그토록 총명하던 어린 시절 모습과 지금이 어째서 다른 걸까요.”
“……어릴 때와 달랐다고요?”
“네. 달랐습니다. 그분은 그저 순진하고 총명한 분이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변하셨지만 말이지요.”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카스토르의 어린 시절이라. 처음 듣는 얘기였다. 책 속에서 그는 언제나 어른이었으니까. 나는 대꾸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얘기가 아니겠군요.”
굳이 내가 끼어들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도 그냥 담담히 말하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에.
“제게는 황녀님보다 조금 어린 조카가 있습니다. 제 여동생의 아이지만 난산이었지요. 귀하게 자라 맛있는 것, 좋은 것, 귀한 것을 손에 쥐고 있었고 그것이 당연했습니다. 황녀께서는 제 조카보다 딱 두 살 많으십니다. 그런데 황녀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황녀님에게서 어린아이가 보일 법한 욕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황녀로서 분명 귀히 자라셨을 텐데 서툰 청소도 차를 끓이는 잡무도 묵묵하게 하십니다. 그 인내는 무엇에서 오는 것입니까?”
나는 대꾸 대신 그를 응시했다. 말할 것을 골라내고 입속으로 굴려보다가 입 밖으로 조금 날것을 내보냈다.
“그 말은 제가 떼를 쓰지도 않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으니 이상하단 말씀이네요.”
“그 모습마저 나이답지 않으십니다.”
“음, 조금 일찍 철이 들거나 어른스럽게 보이려 애쓴 것이 그리 보일 줄은 몰랐어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그가 하려 했던 이야기를 이해했다. 그는 나를 부족한 것 없이 귀하디귀하게 자란 공주님으로 알고 있었겠지. 그런 그의 눈에는 갑자기 나타나, 손님도 아닌 허드렛일 하는 아이 취급을 받는데도 불평이나 불만 하나 없는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이해 못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반대로 말해 어느 날 갑자기 귀한 회장 아들이 떡하니 나타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커피를 나르거나 상사의 감정 받이가 되는데도 구김 없이 무척이나 씩씩하다면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테니까.
나름의 결론을 내린 나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그라니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신의 눈으로 보기에 황녀님께서는 이미 눈이 죽어 있습니다.”
<왜 눈이 죽어 있지?>
잠깐 놀라지 않으려 찡그렸다가 대꾸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들어본 말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모르가 했던 말이었다. 잠시 시선을 내려 바닥을 의미 없이 응시했다. 그라니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간다.
“그분이 어린 당신께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군요.”
왜일까. 그 말은 카스토르를 비난하면서 동시에 나를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쉬십시오.>
나는 반차를 얻었다. 웬 낯선 침입자에게 목을 졸린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짐마차는 이따 노을이 지는 시간 하나뿐이라 행정청에 빈 방을 하나 얻어 소파 위에 가만히 누워 있게 됐다.
멍하니 누워 시간을 보내던 나는 벌떡 일어나 거울 앞으로 섰다.
“아, 큰일 났다.”
그래도 잠깐 새 잡혔던 거라 손자국 같은 건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웬걸. 거울을 보니 벌써 목에 퍼렇게 멍이 들기 시작한 게 보였다. 만지니까 쓰라리다.
“한나가 보면 난리 나겠는데…….”
그나마 소릭스나 펜네같이 나를 예뻐라 하는 사람이 남아 있었으면 어떻게 치료라도 해 볼 텐데 그들은 몽타주를 만들러 갔고, 갑자기 난입한 침입자로 다들 바빠 보여서 조용히 약초랑 붕대만 얻어오긴 했는데……. 문제는 내가 이런 걸 혼자 해 본 적이 없다는 거다.
“……가정 시간에도 이런 건 안 배웠는데.”
전생엔 이렇게 다쳐 본 적이 없고, 다쳐도 3분 거리에 병원이 있었지. 직접 치료할 일이 얼마나 있었겠나. 거기다 약초는 더더욱 볼일 없다. 얼마 전 죽고 반복하던 시간에는 고통이 곧 죽는 일이라 말끔하게 다시 태어나면 그만이었다. 이제야 내가 상처 하나 치료할 줄 모르는 어린애라는 걸 알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되다니 씁쓸하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 되게 씁쓸하네.”
당장 난 아프고, 나를 걱정해 줄 사람과 치료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내 공간은 여기서 너무 멀다. 돌아가면 한나가 있고 베스가 있고 데인과 플뢰온, 유모가 있겠으나 이곳엔 아무도 없다. 자취할 때 가장 중요한 철칙이 절대 아파선 안 된다는 거였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 있을 때 아프면 더 아프고 더 외롭고 더 힘드니까.
지금처럼.
아무리 무뎌져도, 여전히 외롭고 아픈 건가 보다.
왜, 지금 아빠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이젠 완전히 전생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직 남아 있었구나. 나 이렇게 아프다고. 나 이렇게 힘들다고.
“……나 모르는 사람한테 목이 졸렸어.”
“정말입니까?”
낯선 목소리 쪽으로 돌아봤다. 경악한 얼굴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헤르난?”
“황녀님! 사실입니까? 누가 당신의 목을 졸랐다는 것이?”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붕대와 약초를 뺏어 가며 빠르게 지껄였다.
“아니, 저기, 여긴 어떻게.”
“아델리스께서 절 불렀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닌 것 같군요.”
아니, 나한텐 중요한데. 많이. 그라니우스가 헤르난데즈를 불렀다고? 왜?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헤르난데즈에게 의문 섞인 시선을 던졌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응답해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급한 대로 실례하겠습니다.”
사락, 풀어놓은 머리와 손이 부딪히며 귀 바로 옆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그는 곧바로 나를 바닥에 앉히고서 붕대를 손에 들었다.
“아프시면 절 잡으세요.”
그는 내 다른 손을 자신의 허벅지를 잡게 했다. 얼떨떨하게 그를 보는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훅 숨을 삼켰다.
“잠깐.”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헤르난데즈에게서 포근한 이불 내음과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상쾌하고 기분 좋은 향이 났다. 잠깐 너른 들판 위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는 상상을 했다.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시간을 소요했고, 치료는 눈 깜짝 할 사이 끝나 있었다. 워낙 조심스러운 손 탓에 붕대를 감으면서도 거의 아프지 않았다.
“하…….”
그러나 난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앞을 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가까웠다.
“사정을 알았다면, 좋은 약이 있었을 텐데, 이런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는 처음 듣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난 목을 만지며 찡그린다.
“내일 되면 새카만 멍이 들 겁니다.”
“괜찮아요.”
그쯤은 예상했으니까. 피곤해서인지 백치 흉내가 힘들었다. 언제쯤 집에 가면 되려나 창문 너머로 막 지는 노을로 흘끗 시선을 주는데, 그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가지 않는 거지?
“……붕대는, 아프지 않으신지요.”
“응. 아프지 않아.”
헤르난데즈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은 잡혔습니까?”
“으음, 잡히지 않았다고 들었어.”
나는 잠시 헤르난데즈가 나를 추궁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웬걸 그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당신은 무서우면 무섭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는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새겨 달라는 듯이.
“무서우셨습니까?”
난 괜찮은데.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일은 좀 더 어리광 부리고 아픈 척하고 엄살 피우는 그런 쪽이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네. 나 무서웠어.”
한쪽 무릎을 굽힌 헤르난이 내 앞에 몸을 숙여 앉았다. 그가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고 말했다.
“솔레토리움 순찰대는 유능하니까 곧 잡힐 겁니다.”
나는 어떤 대꾸를 하면 좋을지 몰라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는 근 네 달 내내 항상 나를 볼 때면 늘 이렇게 나보다 눈높이가 낮은 곳에서 나랑 똑바로 눈을 마주하곤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곳에 그가 나타날 거라고 예상치 못한 데다 이런 반응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그냥 당황한 채로 있고 싶었다.
“귀하신 당신께 손을 댄 것을 평생 후회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진…….”
그러나 헤르난은 나를 그리 두지 않았다.
“아니요. 당연한 겁니다.”
흠칫, 몸이 떨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물렸다.
“당신은 마땅히 그런 대우를 받고, 응징할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권한?”
“저를 부리십시오.”
“부리라니…….”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헤르난데즈가 자신의 이마로 내 손등을 가져다 댔으니까.
“……어떤 처벌도 당신께서 그 순간 무서웠던 만큼 응징이 되지는 않겠지요.”
참 이상한 일이다. 내 눈에 그가 정말로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왜?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그건 한나와 데인과 플뢰온이 될 거고 레이 경이 되었지. 헤르난은 아니었다.
“걱정했습니다.”
왜 당장 쓸쓸하게 진심인 것처럼 나를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어요.”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호수같이 투명한 색채를 띤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의심하기 전에 나는 내 역할을 해야 한다. 그는 카스토르의 검사니까.
“그랬구나. 걱정해 줘서 고마워.”
공작의 의심이 곧 카스토르로 하여금 다른 마음을 먹게 할지 모른다.
사실 카스토르에게 당한 일이 없었다면 나는 헤르난을 달리 생각했을 것이다. 본디 책 속에선 참 충정 깊고 괜찮은 남자였지.
“앞으로는 당신의 경호에 신경 쓰겠습니다.”
루스벨라를 좋아했지만 그 흔한 고백 하나 없이 깔끔하게 포기했고, 주군을 위해 도망가는 여자를 붙잡아 왔었다. 태양을 향해 자라는 해바라기처럼 카스토르를 위해 삶을 내던진, 오직 하나만을 숭배한 사람이었다.
책 속의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괜찮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는 붕대가 둘둘 감겨진 목을 만진다. 아픔이 어렴풋하다. 난 이제 목이 졸려도 아프지 않아. 무뎌진 고통은 당신의 주인이 만든 작품이었으니까. 왜 네가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차라리 너도 카스토르도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다고 생각한다. 평생 좁은 궁에 갇혀 지낼지언정 이곳이 책 속 세계인 것도 모르면 좋았겠다고.
“당신은 처음 본 모습과 많이 다른 사람 같아.”
“첫인상 말씀이십니까?”
“응. 10일에 공을 보았을 때, 아주 냉정한 사람 같아 보였거든.”
그건 이중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수십 번의 하루 동안 그는 내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늘 카스토르의 옆에 서 있었을 뿐이었지만. 죽음을 40번이나 바라보는 시선이란 쉽사리 잊히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설사 당신이 아주 조금이라도 내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해도.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냉정하다라…….”
아마 사람의 3대 욕구를 식욕, 수면욕, 살인 충동으로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카스토르다. 그 사람의 충성스런 검사를 올려다보자 조금 울컥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해지며 침착하게 그를 직시할 수 있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이 순간에도 그가 명하면,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이겠지.
“왜 나한텐 그렇지 않아?”
“당신께 냉정하지 않은 이유 말씀입니까?”
“응.”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그럼 나는 왜 여기 있어? 오라버니를 도우려다가 다쳤어. 이것도 당신과 오라버니의 뜻인지. 난 지금 혼란스러워.”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의미 없이 바닥을 응시했다.
“……카스토르의 뜻일진 몰라도 제 뜻은 아닙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더는 이 뒤숭숭한 공간에 이 사람과 있고 싶지 않아졌다. 막 남은 약초와 붕대 따위를 치우던 헤르난이 옅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왜 제가 냉정하지 않으냐 물으신 거라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왜 제가 그리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맑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저는 당신께서 생각하는 것보다 이전부터 당신을 먼저 봤습니다. 황녀께서 본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제가 다릅니까?”
아주 많이.
“음, 뭐랄까. 이렇게 웃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했죠. 그날 무섭게 서 있기도 했고.”
내 죽음을 바라봤지.
“되게 똑똑해 보였는데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대답도 못하고.”
“하하…….”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를 향한 눈에는 어쩐 일인지 다정한 온기로 가득했다.
“궁금해하는 것에 말을 해 드리지 못한 것은 정말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약속한 듯이 헤르난데즈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맑은 눈동자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헤르난은 오라버니 검사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하하하, 헤르난이 작게 소리 내면서 호수에 핀 백합처럼 청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미풍처럼 옅은 미소를 짓는 맑은 눈동자 안으로 서글프고도 기묘한 뜻을 모를 것이 스쳐 지나갔다.
“예. 10년을 모셨지만 그의 뜻은 늘 그렇습니다. 저로서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요…….”
떡밥을 던지듯 의미심장한 말들이 지나갔음을 알지만 좀처럼 깊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신을 믿지 않아.
체온이 떨어져 나간 손가락이 잠시 허전하다고 생각하다가 손을 꽉 쥐었다. 피곤하다.
“하지만, 황녀님.”
어지러움에 눈을 감는데, 막 일어나려는 헤르난데즈에게서 작은 속삭임이 떨어져 나왔다.
“저는 당신께서 다치는 것을 한 번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 * *
해가 진 차고에는 짐마차가 쭉 서 있었다. 이미 먼저 와 있었던 레이 경이 마차에 기대어 있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오셨습니까?”
짙은 남색 눈동자가 노을에 푹 잠겨 있다.
“응.”
대충 대답하며 마차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멈칫하고 말았다.
“……이거 사다리는?”
“마부가 이르길 부서졌다고 하더군요.”
그가 옅게 웃으며 어깨를 내밀었다.
“빌리시겠습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불만스럽게 뇌까리자 그는 정 싫으시다면 엎드려 있을 테니 밟고 올라가란 말로 나를 기함하게 했다. 기어이 엎드리려는 경을 겨우 붙잡아 매달렸다. 겨우 짐마차 하나 오르는데 이런 실랑이라니 이쯤 되면 누가 상전인지 모를 일이다.
“피로하십니까?”
“당연하지. 난 아직 열네 살이라고. 노동에 찌들기엔 이른 나이야.”
그런데 이미 죽는 것에 적셔져 버렸지. 이번 생은 모로 보나 이미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곳이 책 속 세상이었을 때부터, 정체를 알 수 없던 일기장이 손안에 들어와 나를 휘두를 때부터 나는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못 보던 상처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군요.”
“잘 아네.”
괜히 옷깃을 만진다. 목이 아니라 팔뚝이나 허벅지 같은 곳이면 어떻게 가려 보겠는데, 이건 어떻게 가릴 수조차 없다.
조금 뒤, 마차가 출발했다. 태운 것이라곤 나와 레이 경, 약간의 짐뿐인 짐칸은 바퀴 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침묵 속에서 잔잔한 졸음을 느낄 무렵 레이 경이 여상하게 말했다.
“황녀님.”
“왜.”
“당신께서는, 어째서 황자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오는 것입니까.”
그답게 조심스러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라서 눈감은 채 피식 웃었다.
‘아무렇지 않게도 물어보네.’
묻지 말랬더니 상처에 대해 묻는 대신에 다른 걸 물어본다. 더구나 한 달 내내 하녀장과 유모와 한나와 그리고 플뢰온이 묻지 못한 걸 참 잘도 묻는구나 싶었다.
문득 피투성이가 된 한나를 옮길 때 플뢰온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내 사저에서 돌아온 데인이 나를 보며 처음으로 화를 냈을 때를 떠올렸다.
<가지 마.>
눈처럼 희고 고운 공작이 나타나 나를 데려가던 날. 어린 오라버니가 예쁜 얼굴을 흐리며 나를 붙잡았을 때, 나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가지 마. 네가 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아볼게. 왜 그렇게 웃는 거야…….>
데인 왜 그래? 우린 죽지 않고 다시 만났잖아. 기뻐해야지.
<왜? 어째서?>
<잠깐 사저에 다녀온 것뿐인데 더는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같이 느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