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각자의 사정 ⑴
가끔 생각건대, 운이 좋지 않은 날은 꼭 날씨가 화창한 것 같다.
“그래서 화창한 날이 싫은 건가.”
손에 쥔 서류를 의미 없이 훑으며 고개를 돌렸다.
수십 번 되풀이되는 시간으로부터 탈출한 지 3개월이 지났다. 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나는 새로운 직장과 동료들에게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여 새로운 곳의 시녀 겸 심부름꾼이 되었다. 과연 직장이라고 불러도 맞을지 모르겠지만.
3개월 전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제국의 제4 행정청 솔레토리움이었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안 됐을 때 깨닫게 된 건 내 위치가 상당히 애매하다는 점이었다.
<심부름꾼이라고? 여자애가?>
하녀와 시녀의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된 이곳에서 시녀이자 심부름꾼이라는 건 귀족이면서 평민이라는 말처럼 모순임을 알았다.
처음 이곳에 발령받았을 때, 뒤늦게 플뢰온과 데인 그리고 웬일인지 레이 경까지 나서서 거세게 기함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이걸 둘째치고라도 앞으로 황태자 곁에서 일하며 온종일 붙어 있을 생각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른다.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겼건만 또다시 생지옥이라니.
그러나 첫 출근을 하고 보니 내 직속상관은 카스토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황태자 궁이 아닌, 황태자와는 관련 없는 행정청으로 발령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제4 행정청 아벤티누스 솔레토리움. 나는 이곳의 가장 높은 직위인 ‘조영관’ 밑에서 접객과 잔심부름을 하는 일을 받았다. 차마 황녀에게 하녀의 직위는 내릴 수 없었는지 나는 시녀로서 일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4행정청이라니.’
조영관은 4행정청의 가장 높은 직위였다. 전생으로 말하자면 국토부 장관의 위치쯤 되는 것 같다.
나는 정체를 숨기고 시녀로 일하는 중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들 나름의 배려인지, 나이를 감안했는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 잦았다. 이건 꼭 장식용 인형이 된 기분을 느끼게 했다.
3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한 살 더 나이를 먹었다.
“환생해서도 출근이라니 멋지네.”
기지개를 켜며 창문을 바라봤다.
중앙의 행정청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앙 궁들은 곳곳에 금박을 입혀 놓거나 지붕이 금색이거나 눈에 띄게 화려한 멋을 부린 쪽이었다. 서쪽의 궁이 햇빛을 받아 멋스런 흰빛을 띠는 것과 비교된다.
내가 일하게 된 조영관의 집무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닥은 아모르의 방처럼 새하얀 대리석이었으나 문틀이나 창살 등이 번쩍 빛나는 금빛이었다.
“오, 왔느냐.”
볼 때마다 햇빛에 눈이 부시지 않으신가 하지만 굳이 상관에게 물을 질문은 아닌 것 같아서 하진 않았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조영관님.”
어쨌거나 카스토르의 낙하산으로 모시게 된 내 상관은 서른여덟쯤 되는 한창 때의 사람이었다. 뛰어난 신관인 사람이었는데,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는 첫날부터 알았다. 발령받은 날 보며 문짝을 부쉈으니까.
<장난합니까, 공작? 열두 살쯤 됐습니까? 이 쬐끄만한 걸 어디다 쓰란 말입니까!>
그는 마티스가 붓질해 그린 듯이 강인하게 생긴 야수파였다. 성인 남성의 평균치를 거뜬히 넘긴 체구를 가졌는데, 그 덕에 내가 작아 보이는 건 익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열두 살은 너무하지 않은가? 하베르미아의 달을 마지막으로 해가 바뀌며, 열네 살이 되었는데 말이다.
심드렁하게 그를 보고 있으려니 날 데려온 공작이 나서서 수습했다. 조영관은 문짝에 이어 협탁까지 죄 부숴 놓고서야 간신히 진정했다.
<황태자 전하의 명입니다.>
공작이 진정시켰다기보단 카스토르의 이름을 내세운 것이 컸지만. 사정을 듣고 나서 그는 아니꼬운 표정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물론, 순순히 받아들였다기에는 매우 형형한 시선에다 걷어붙인 소매 밑에서는 삼두근까지 꿈틀거렸다. 이러다 한 대 맞아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을 만큼 불만스러워 보였는데, 다행히 쫓겨나거나 하진 않았다. 비록 그가 억지로 수긍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막내야, 양피지! 거위 깃털!”
“네!”
얼른 달려서 집무실 구석 책꽂이에서 잉크며 새 양피지를 날라다 책상 위로 가져왔다. 내가 낑낑대며 내려놓는 걸 보던 조영관이 크게 코웃음을 치더니 한 손에 전부 가져가 버렸다.
“이렇게 비실비실해서야 어디 써먹겠느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헤헤. 그 말은 전하께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예끼. 상관 놀리면 못쓴다. 지금 이 젊디젊은 나이에 전하를 뵙고 요절하란 말이냐?”
딱. 이마를 가로지르는 화끈한 손바닥은 고통에 면역된 몸에도 쓰라림을 안겨다 주었다.
‘아, 여기도 힘 조절 못하는 사람이 있네.’
이마를 잡고 끙끙댄다. 시간을 되풀이하며 여러 고통을 체험한 몸이지만 이 사람은 정의와 힘의 신관. 힘에 특화된 사람이다. 당연히 문을 부술 만큼 힘을 주진 않았겠지만 사람의 이마를 때리기엔 지나치게 강했다.
“아으…….”
더욱이 나같이 몸뚱이가 매우 여린 어린애라면 무지 쓰라리다. 이거 심하기로는 플뢰온보다 더 심한데. 어디 차가운 물건이 없나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는데, 이마 위로 서늘한 것이 와 닿았다. 위로 눈동자를 굴리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못 보던 사이 새 버릇이 생기셨습니까? 아동 학대로?”
타오르는 것 같은 적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한참 늦은 주제에 첫마디가 건방지지 않느냐? 부보.”
“아, 정말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 했잖습니까.”
남자가 투덜거렸다. 난 그의 머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숙여 나를 마주 보았다.
“안녕?”
씨익 웃는데, 꽤 상쾌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그래서 이 애는 누굽니까? 그라니우스 님께 이만한 딸이 있을 리 없는데…… 어라, 딸이에요?”
“누굴 쓰레기로 알아? 결혼도 안 했단 말이다!”
“흐음. 굳이 노총각이시라고 밝힐 필요야.”
주근깨가 햇빛 부스러기처럼 군데군데 흩뿌려진 얼굴이었다. 나이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남자는 조영관을 대상으로 자유자재로 놀림과 농담을 구사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저 유들유들한 성격을 보고 있으니 전생의 싹싹했던 직속 후배가 생각났다.
“그래서 이 꼬마 아가씨는 누구예요? 손님의 딸 같은데. 오늘 방문하신 분이 계셨던가?”
“네 눈은 장식이냐? 쟤가 입은 걸 봐라.”
찬찬히 나를 훑던 녹색 눈동자가 잠시 뒤 놀라움으로 번쩍 커졌다.
“아니?! 새로 들어온 심부름꾼이 얘에요? 너무 어린데? 열두 살짜리를 데려오면 어떡해요!”
“어허, 열네 살이란다. 듣기 실례지 않느냐.”
“네? 열네 살? 아니, 아니. 그럼 적당하긴 한데……. 잠깐. 어딜 봐서 열네 살이에요?”
“나한테 묻지 마라. 상부 지시니까.”
털이 숭숭 난 손을 들어 올린 그라니우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니, 대장님, 그런 지시쯤은 지위로 거절도 하고 그러세요. 원로원 후보에 조영관이면 충분히 그럴 자격 되시잖아요.”
“그럴 명분이나 있으면 좀 좋았게. 첫 번째 가지께서 내리신 지시다. 토 달지 마.”
이 나라에는 ‘신관이 곧 귀족’이라는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천 년이란 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금은 특수한 능력이 없어도 귀족이 될 수 있었다.
귀족의 지위는 분화되어 각각 신관 귀족인 ‘쿠룰루스’와 평범한 인간이자 귀족인 ‘플레비’로 나뉘었다. 그러나 아직 신관이 다수이자 기득권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조영관도 아주 높은 사람이라고 했다.
“말도 안 돼. 첫 번째 가지라니……. 대장님 그분과 멀리하기로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그만 묻고 일이나 해.”
갈색 머리 청년은 차마 황태자 상대로 농이나 불만을 던질 수는 없었는지 황당함 반, 놀라움 반쯤 될 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흡사 회장님 아들이란 소문이 폴폴 도는 복사조차 못하는 신입 직원을 보는 눈이랑 비슷했다.
또다시 보면 묘한 동정이라거나 연민이 함께 담긴 시선이었다. 멋대로 해석해 보자면 막 해체될 도살장의 소를 보는 눈?
‘흐음, 여기도 카스토르의 공포가 익히 미치면서 지배하는 곳인 모양이네.’
하긴 자기 눈을 벗어난 곳에 나를 데려다 둘리 없다곤 생각했지만.
‘왜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걸까?’
3개월 내내 황태자가 보이지 않으니 안심하는 동시에 미묘한 초조함이 일었다.
언제 또 나타나서 내 인생을 망쳐 놓을지 몰라.
끔찍했던 기억은 3개월이 지났다 하여 흐려지거나 희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첩첩이 쌓인 되풀이되었던 시간들이 퇴적물처럼 가슴과 머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억지로 짊어진 짐이었다. 불안도 초조함도 무력감도 전부 카스토르가 안겨 주었다. 카스토르가 억지로 채워 버린 족쇄였다.
질끈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뜨자 나를 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흐음, 전하의 지시라니 그러려니 하는데 말이죠. 이 애, 묘한 느낌이네요.”
가타부타 말이 없이 나를 올곧이 응시하는 눈은 빽빽한 침엽수림을 떠올리게 하는 선명한 녹색이었다.
‘꼭 유리구슬 같네.’
아모르와는 또 다른 녹색이었다. 그 순간 나를 바라보던 눈이 고양이처럼 가로로 샐쭉 찢어졌다. 짐승의 안광 따위에서 느껴질 법한 것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 이것도 능력인가?
그의 홍채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노란빛에 카스토르와 비슷한 능력인가 싶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잔뜩 긴장했지만, 조금 지나는 동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주입되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그날과 달리 정신이 흐려지지도 않았다.
“흐음…….”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의 평범한 녹색 눈동자로 돌아오는 것과 함께였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라니우스가 서류를 내려 두고서 물었다.
“뭔가 느껴지더냐?”
“아뇨……. 느껴지진 않는데, 또 느껴지지 않는다고는 못하겠네요. 이 애 뭐예요? 신관 후보인가? 신관의 힘이 있긴 한데, 후보치곤 힘이 너무 미진한데요.”
“심부름꾼이라니까.”
“누가 심부름꾼을 여자애로 써요. 서류보다 무거운 건 들지도 못하겠는데.”
“따지려거든 전하께 따지려무나. 공작이 오며 가며 간간이 가르치는 걸 보면 어딘가에 써먹으려 데려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난 모르겠으니 네가 챙기던가 해.”
“거, 막 출장 마치고 돌아온 부하에게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나긋이 들어 올린 남자는 곧 내 머리 위로 올려놓고 쓰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구나? 난 소릭스 녹타야. 편하게 소릭스라고 불러 줘.”
보통 다정하고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시선을 맞춰 주는 배려를 보이곤 하던데, 나는 그를 물끄러미 보며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말을 골랐다.
“부보가 아니구요?”
방금 들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순진하게 대꾸하자 살짝 눈을 찡그린 소릭스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안 된다는 듯이.
“좀 봐주라. 그건 ‘올빼미’를 낮잡아 부르는 이름이거든. 비하하는 명칭이야.”
“비하요?”
“응, 나는 눈眼과 올빼미의 신 칸바누스의 신관이거든.”
그는 친절하게 자신의 눈을 가리키고 자신의 능력은 ‘다른 신관의 힘을 알아보는 힘’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처럼 입은 사람은 거의가 신관이야.”
그는 얇고 속이 비치는,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재질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옷깃이 둥근 흰색 옷을 받쳐 입었으며, 등에 흘러내린 천을 어깨에 동그란 금색 핀으로 고정시킨 차림이었다. 예전 교양 과목으로 서양 복식사를 배울 때 고대 그리스 부분에서 본 적 있는 모양새였다.
“여기 보이지? 이 월계수 잎 4개는 행정관을 가리키는 문양이야.”
몸을 겹겹이 휘감은 얇은 천에는 은사로 월계수 잎이 수놓아져 있었다. 잎이 4개인 걸로 보아 제4 행정청을 가리키는 듯했다.
제국은 전통적으로 의복부터 생활 전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식과 비슷했다. 그에 비해 루스벨라의 고향 윌터 왕국은 유럽의 근세 시대, 프랑스나 영국의 궁중 문화에 가깝다.
하지만 뭔가 기기묘묘했다. 관리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가까운 복식사를 보이면서도 제법 모던한 바지나 웃옷을 입기도 했다. 로마식과 근대 유럽식이 묘하게 섞인 느낌. 나라가 가까우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걸까?
잘 모르겠다. 뭐, 이것저것 섞인 문화인 건 분명해 보인다.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신관이니 신력이니 판타지 요소가 다분한 나라이니까.
“어쨌든, 제가 뭘 가르치면 되는 거죠? 여기서 하는 일은 가르쳐 줬어요?”
“모르겠는데. 아마 공작이 가르쳤겠지.”
“세 달이나 됐다면서 퍽 살가워 보이지 않으시네요. 제 느낌엔 이 애와 가까워져서 나쁠 건 없을 듯한데 말이죠.”
“그건 네 감이냐?”
“아마도 칸바누스가 주시는?”
“얌마, 나도 신관이거든?”
그라니우스가 호탕한 모양새로 대꾸했다. 그러자 소릭스는 퍽 개구지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델리스는 힘의 신관이시잖아요. 육체파는 또 모를 법한 게 있죠.”
“은근한 무시가 느껴지는데. 북쪽으로 다시 한 번 가고 싶나?”
“독을 먹고 허언을 하였습니다. 부디 제 충정을 의심치 말아 주세요.”
소릭스는 고개를 돌리더니 검지로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곤 품을 뒤져 보더니 조그만 사탕을 내밀었다.
“딸기 맛은 별로니? 포도 맛이랑, 사과 맛이랑, 부초초 맛도 있어.”
손바닥 위에 놓인 사탕을 보며 조금 아연했다. 다섯 살 난 애를 어르는 느낌이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음, 다 괜찮은데, 딸기 맛을 제일 좋아하긴 해요. 감사합니다!”
“어라.”
기왕 준 거니 감사히 먹어 줘야겠지 하며 받아 들었는데, 나를 본 소릭스의 얼굴이 조금 의아한 기색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유심히 살펴보는가 싶던 그는 다시 가볍게 웃었다.
“너 웃으면 인상이 확 변하는구나? 꽤 무뚝뚝한 편일 줄 알았는데.”
한순간 스쳐 간 진지함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 꼬맹이가 성격은 꽤 괜찮다. 막내 괴롭힐 생각 말아라.”
“네? 조금 전에 이 쪼끄만 이마를 때린 걸 봤는데. 어디 사는 누구셨는지요?”
그러자 그라니우스는 멋쩍은 얼굴을 하더니 흠흠 헛기침을 했다. 생긴 것만 봐서는 막가파처럼 보이는 조영관은 퍽 나를 아껴 주려 하는 게 보였다. 내가 온 뒤로 직접 일어나서 물건을 가져오는 게 늘었다고.
행복하거나 기쁘거나 즐거운 생활은 아니었지만, 안온하고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수십 번의 되감기 속에서는 절대 느껴 보지 못했던 평화로움이 있었다.
이것이 해일 전의 고요함이라 해도 밤이 되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는 것이 그저 감사한 나에게 이만큼 감동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왜, 나를 무릎 꿇리고 짓밟아 수없는 삶을 반복하게 한 폭군이 나를 여기에 데려다 둔 걸까? 나를 그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백치로 만든 그가 왜 여기에 그냥 내버려 둔 것인지.
팽배한 의심이 수면 위에 떨어진 잉크처럼 천천히 번지다 녹아들었다.
* * *
<너를 중앙 궁 제4 행정청 아르벤티스 솔레토리움, 그곳 조영관 시녀로 임명한다.>
서럽도록 화창한 날, 드디어 지는 해를 보았다. 밤이 되고 달이 뜨고 별이 떴다.
오직 한나만이 중상을 입었을 뿐 모두가 무사했다. 왜일까, 살아남아 기뻐해 마땅한 밤에 서글픈 울음이 밀려들었다. 채 빠져나가지 못한 설움이 발을 꽁꽁 묶어 두고 환희와 행복을 앗아 간다.
―황녀님!
―황녀님! 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