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아모르 노테
서슬 퍼런 눈을 하고서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으리라 했다. 어린아이에게 선택을 종용하던 늙은 공작이 그랬다. 모친을 잃은 아이는 울면서 끄덕이거나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아모르, 살고 싶니?”
그때 따분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 보던 고결하고 고귀한 소년은, 맨 처음 페이지의 적힌 글귀처럼 아모르 인생에 첫 번째 기억으로 남았다.
자신을 카스토르라 소개한 소년. 그가 난 네 형이라고 속삭였다.
* * *
유아기 시절, 세계는 아주 좁고도 무궁했다.
<저건 해. 저건 달. 저건 꽃.>
아직 문장의 형태를 지니지 못한 그의 언어를 대신해 어머니가 대신 속삭여 주었다.
<밝구나. 은은하구나. 예쁘구나.>
모자가 둘이 사는 궁 근처에는 괴담 같은 게 돌았다. 먼 남쪽에서 온 병신 같은 여자가 홀로 아들을 키운다더라. 실제로 아모르의 어머니를 만난 사람이 입술이 좌로 갈라져 끔찍하게 변형된 모습을 증언하면서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황제에게 버려진 여자.’
어머니를 칭하는 호칭은 아주 많았지만, 그가 기억하는 한 모두 같은 의미였다.
소년의 어머니를 잉태한 여자, 아모르의 외조모는 임신한 지 6주차가 되었을 때, 라베르초의 즙을 마셨다. 그것은 배 속의 태아를 떼어 내는 창녀들의 독이었다. 그의 조모는 아이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조모는 바람과는 달리 아이를 순산하였다. 태어난 아이는 입술이 인중에 달라붙은 것 말고는 아주 건강한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그 외모가 문제였다.
“내가 언청이를 낳다니!”
그길로 계집아이는 평생 뒷방에 갇혔고, 보는 것이라곤 버려진 후원에 아무렇게나 핀 작은 수풀과 들꽃 따위였다. 지식도, 상식도, 예의와 예법도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의 말에 무뎌졌다.
그의 외가는 남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을 가진 대지와 식물의 신 텔루스(tellus)의 땅. 이곳은 대신관 이에르바의 통치 아래 제국 최대 곡창지대이자 다채로운 꽃을 사시사철 언제나 볼 수 있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약 300년 전 대지를 다채롭게 하던 능력은 명맥이 끊겨 버렸지만, 잔재로도 여전히 명예를 거머쥔 땅이었다.
황제가 이 땅에 나타난 것은 이에르바의 자식이 열여덟 살이 될 무렵이었다.
“이 땅의 대신관을 불러오라.”
거대한 병력과 막강한 능력을 갖춘 신관들과 나타난 제국의 주인은 이제는 이름만 남은 대신관에게 하나뿐인 여식을 요구했다.
텔루스 땅의 주인, 제125대 이에르바(hierba)는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한 귀족이며 이름뿐인 신관이었다. 그는 땅을 지키기 위해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기꺼이 영광스런 황제 폐하께 딸을 바치겠습니다.”
위대한 주신과 그를 따라 강림한 하위 24신. 초대 황제와 주신의 계약에 따라 선택받은 자들이 신관이 되었다. 이 땅에서 오로지 신관만이 귀족이 될 수 있을 무렵부터 권력을 차지해 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신의 힘을 잃고 풍요로운 땅마저 잃을까 무서웠던 이에르바는 부디 이 땅을 가져가지 말아 주십시오 빌면서, 주저하지 않고 언청이 딸을 내밀었다.
평생을 버려진 후원과 어둡고 축축한 방에서만 지냈던 여자는 하루아침에 고귀한 황비로서 황금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금 의자에 앉게 되었다.
처음 보는 거대한 궁에서 치러진 식은 짧고 거대하고 성대했다. 황제와 첫날밤을 보내고 발길이 끊어진 1년 뒤, 여자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텔루스의 땅에는 이런 미신이 돌았었다. 태어난 아이가 최초의 신관을 닮으면 다정한 아이로 자라나 오래도록 행복할 것이라고.
“내 아이.”
화창한 하늘을 뚝 잘라 내어 만든 것같이 희고 아름다운 하늘색 머리카락. 안개 낀 신록의 푸름을 그대로 눈동자에 버혀 만든 사내아이.
그의 모친은 이제는 신화 속으로 남은 텔루스 최초의 신관 ‘이에르바’를 닮은 아이를 보며 아이의 이름을 아모르 노테(amor norte)라 지었다.
* * *
어릴 적 사랑이 있었다.
다정한 어머니가 있었고, 많은 식물로 가득 찬 정원이 있었다.
4황비는 나고 자라기를 식물과 같이 자라 조용히 자리를 채우는 포근한 함박눈 같은 사람이었다.
<아가, 이것은 흙이란다. 식물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지.>
그녀는 고귀한 여인이 되고서도 눈처럼 희고 고운 손으로 흙을 만지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식물을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아들인 아모르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아모르는 어릴 적부터 흙발로 기고, 두 발을 딛기 시작하자 걷기를 즐기게 되었다.
푸릇한 새싹, 풀잎에 맺힌 이슬, 잎사귀 사이로 샌 햇살, 보드라운 길, 솔향. 아모르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어머니를 쫄래쫄래 쫓아다녔다.
<이것은 라플레시아, 이것은 부평초, 저것은 아카시아 나무, 그리고 저것은 작약.>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따뜻한 오후처럼 웃는 어머니는 어렴풋한 추억이었다.
병약하여 잦은 기침을 하면서도 즐거이 말하던 아모르는 사물의 이름 대신 꽃과 나무의 이름부터 기억한 소년이었고, 소맷자락에서 나는 이름 모를 풀꽃의 내음을 맛난 음식의 냄새보다 더욱 좋아한 소년이었다.
그날, 그 시절은 지극히 평온하고 평화로웠으며 온화한 세계였다.
모든 사람이 어머니를 꺼리기에 자연히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세계는 어머니를 지지대 삼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는 어머니와 녹음으로 충만하였다.
4황비는 배움이 짧을지언정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아들에게 들려주던 단어들은 노래하듯이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한 번도 아모르에게 사람을 사랑하라 가르치지 않았다. 숨 쉬듯 당연하게 알려 주었다. 식사를 함께하고, 아플 때 밤을 꼬박 새워 간호하며, 볕 좋은 날이면 활짝 웃으며 꼭 안아 주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교류가 그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포근하고 나긋하고 폭신하며 간지러운 것.’
이 포근한 존재를 따라 아모르도 점차 그녀를 닮아 갔다.
“아모르!”
그러나 어느 날 아모르가 고열로 아프며 다정하던 세상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렴, 아가! 아가!”
쉴 새 없이 오른 열이 그를 괴롭혔다. 15일을 내내 앓았다. 여느 때와 같이 그저 환절기 감기려니 했던 4황비는 신관을 불렀다. 가끔 들르던 신관이 문지방이 닳듯이 방문했다. 어린 생명이 끝을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음 졸이던 이때, 아모르는 꿈속에서 홀로 커다란 숲을 헤매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안개가 낀 것같이 기묘하게 어두운 숲.
“어디 계세요…….”
먹구름 낀 하늘을 보며 그는 쉴 새 없이 출구를 찾아 헤맸다.
어머니를 얼른 보고 싶다. 가끔 마주한 어둠에 엉엉 울기도 하다가 미로 같은 숲에 질려 주저앉기도 했다. 한데 신기하게 지치지도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이 기묘한 숲을 꼬박 열이레 헤맸을 때였을까. 아모르는 숲의 가장 중앙에 도착했다.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아모르는 왠지 이곳이 숲을 지탱하는 중심이요, 심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자 그곳이 마치 아모르를 기다렸다는 듯이, 천천히 박동했다. 한 걸음. 두근. 두 걸음. 두근. 다시 세 걸음. 꼭 아홉 걸음을 걸어 아모르가 손을 디뎠다.
「안녕?」
흠칫 놀란 아모르가 뒷걸음질 쳤다.
“넌, 누구야?”
「나는 대지와 식물의 대리자.」
아주 포근하고, 안락한 그것이 말했다.
「나를 다정으로 피워 주세요.」
지독히 오래 굶은 것이 속삭였다.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나는 오래전 신에게서 떨어진 조각이랍니다. 살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