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변화
―하베르미아의 달 10일
마지막 날이다. 방 안에 문들이 꽉 닫혀 있는데도 어디선가 마른 햇빛 냄새가 나고 따사로운 빛이 느껴졌다.
“큰일 날 소릴 하셔요!”
저 멀리 병사를 보러 간다는 말에 기겁해 쫓아 나온 한나가 말했다. 빨래하다가 온 것이라 종아리까지 겅중 뛴 치마에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붙인 채였다.
“그렇지만 마지막인걸.”
나는 용감하게 밖으로 나섰다.
“황녀님!”
“젊고 잘생긴 남자 보러 나간다니까 따라 나온 것 좀 봐.”
쫑알거리며 놀리는 말에 한나가 울상을 지으며 “아니에요.” 하고 말했다. 난 키득대며 그녀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연못까지만 가는 거예요, 알았죠? 네? 네?”
“아이참. 알았대도.”
나는 엄지로 한나 손을 살살 문질러 보다 꽉 잡아 본다. 한나의 나이가 스물다섯이었나. 한 번도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다. 주변을 챙긴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심했나 보다.
‘마지막이라고 많은 걸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궁 밖에 한번을 나가 보지 못하고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말이다.
저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밖이었다.
밖으로 나가면 한스란 병사가 정말 소문처럼 잘생겼는지 알 수 있고, 2년 뒤에 있을 건국제와 카스토르의 약혼이라는 장엄한 행사가 치러질 광장도 볼 수 있을 거다. 기이하리만치 많은 신관과 제국민이 산다는 황도를 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전부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얌전히 산책이나 하며 마지막을 보낼 줄은 몰랐다. 나는 한나의 옆으로 다가가 툭툭 등을 두드렸다.
“한나. 화장대 의자 뚜껑을 열면 작은 공간이 나와. 거기에 보석을 잔뜩 넣어 뒀어.”
“네?”
테레나 궁은 고정적인 인력난에 시달렸고 사람이 좀처럼 늘지 않았으며 원래 있던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13년 동안 예쁘고 아끼고 좋은 것 전부 내게 주었던 사람. 기억하지 못한 순간부터 나는 보호받아 왔던 것이다.
<황녀님 저는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억울해지고 만다. 한나를 두고, 유모를 두고, 얄미운 플뢰온과 레이 경, 다정한 데인을 두고. 죽으라니.
“잊지 마. 화장대 의자 뚜껑 밑. 거기가 내 보물 창고야.”
여기만큼 살기 좋고 편안한 근무 환경은 없다던 한나가 들풀처럼 웃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으로 돌아가 일기장을 보게 된다면 나는 절대 펼쳐 보지 않고 그대로 태워 버릴 텐데.
지금에 와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결심을 하며 최후를 기다렸다. 그리고 결전의 시간이 찾아오기 전,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8황녀 아실리 로제 아올레시아 칼타니아스 님이십니까?”
딱딱한 인상의 남자였다.
“제국의 꽃을 뵙습니다.”
희게 센 머리카락, 미간의 찡그림이 그대로 주름으로 남은 사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빠르게 제 용건을 건네주었다.
“아모르 님의 서신입니다.”
“뭐?”
나는 서신을 열어 본 것과 함께 딱딱하게 굳었다.
“……오라버니께서 답변을 들으라고 하시더냐.”
유려한 필체로 인사말을 제외하면 도통 뜻 모를 말이 적혀 있었다.
“그것까진 알지 못합니다. 하나, 황녀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한마디 뱉을 때였다. 작은 수풀이 흔들리더니 갈색 머리의 아가씨가 튀어나왔다.
“황녀님! 한나! 한나!”
“베스?”
“크, 큰일, 큰일 났어! 황녀님! 어서 궁으로!”
올 것이 왔구나.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찬란한 해가 빛을 잃고 회색 하늘처럼 보이는 오후, 운명을 가를 사신死神이 찾아왔다. 잠깐 숨을 들이켜며 마지막일지도 모를 풍경을 담는다.
“가자.”
문득 가슴이 찌릿하고 아파 왔다. 뜬눈으로 지새운 몸은 피곤했다. 편안한 척했지만 종일 내내 불안했다.
내 인생은 내게 너무 가혹하다.
그럼에도, 나는 살고 싶다.
황태자가 찾아왔다. 검사를 주렁주렁 달고 공작도 함께 왔다. 미래가 실현될 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진 않았다.
미래는 바뀔지도 모르니까 그냥 모르는 사이로 남아 영영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나타나고 말았다.
막 하녀들이 점심 준비를 끝냈을 무렵이었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테레나 궁에서 가장 큰 문 앞에 도열했다. 설거지를 하다 빨래를 하다 청소를 하다 허둥지둥 달려왔을 게 분명한 모습이었다.
반보 앞에 서서 카스토르를 반긴 것은 나였다.
“……위, 위대한 제국의 첫 번째 가지를 뵈어 영광입니다.”
발가락까지 내려온 드레스가 달달 떨리는 다리를 숨겨 주었다. 두렵고 화가 나지만 고요하게 가라앉혀 숨겼다. 당장 섣부른 판단을 내리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자 갓 스물을 넘겼을까 싶은, 아직 앳된 황태자가 권태로운 얼굴로 나를 깔아 보고 있었다. 원작보다 6년 앞선 지금, 가까이서 본 그는 알고 있던 것보다 젊었다.
이 떨림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말을 하는 게 무서워지리만치 떨리는 속,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느릿하게 훑던 그의 관찰이 멈췄다.
“안녕?”
떼어진 입에서 묵직하면서 나른한 저음이 이쪽으로 속삭였다.
“이름이……?”
“아실리 로제 칼타니아스라 합니다.”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요컨대, 상상 속의 카스토르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완전히 잊고 있다가 생각났어.”
이미 한 번은 보아 넘긴 얼굴이지만 실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흰 피부와 긴 검은 머리는 영화관에서 본 그리스 배경의 왕자님을 떠올리게 했고, 높은 곳에서 우아하게 떨어지는 콧날은 작은 얼굴에 더없이 균형적으로 자리했다.
“어때. 잘 자라 주었지 않아? 헤르난.”
옆에 서 있는 흰 머리칼의 남자는 책 속 조연이자 공작, 헤르난데즈 듀르젤 폰 디볼로였다.
“글쎄요.”
헤르난데즈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심하긴.”
디볼로 공작이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서 툭 튀어나온 것같이 부드러운 미남상이라면, 카스토르에겐 신전 벽화를 부수고 걸어 나온 듯한 웅장함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태함을 형상화한 듯 인간을 깔아 보고 굽어보는 오만함이 엿보였다. 인간에게 시들한 태도를 고수하는 작은 신 같기도 했다. 이 추상적인 느낌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온갖 아름다운 것을 모조리 가져다 담아 둔 것같이 찬란한 금색 눈동자. 그 눈동자야말로 카스토르를 가장 잘 나타냈다.
“헤르난, 말해 봐. 황녀에 대해선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잖아.”
홍채 주변으로 옅어지는 금빛이 물안개처럼 일렁였다.
“……저도 서류상으로밖에 알지 못합니다.”
카스토르가 웃었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인간 같지 않은 저 아름다운 눈으로부터 느껴지는 권위에 찬탄하면서 동시에 서슬 퍼런 공포를 느꼈다.
“기억난 것 같아. 6년 전쯤의 서류. ‘서쪽 영지로 호송된다.’ 맞지?”
“……네.”
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니 카스토르가 느긋한 모양새를 하며 고개를 숙인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새까만 흑발이 너울거렸다.
“용케 전염병을 피했나 보네.”
귀에는 그의 말이 ‘용케 살아 있었네’로 들렸다. ‘그러지 못하여 아쉽다’라는 여운이 전해지는 말은 분명 내게 엿을 먹이는 게 분명했다. 아, 알겠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그러나 설사 쌍욕과 함께 침을 뱉었든 무엇이 됐든 간에 나는 그의 쌍시옷 소리마저 감읍해야 하는 처지였다.
“난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다. 나를 아나?”
어쩐지 권태에 잔뜩 젖어 나른한 고갯짓을 하는 황자에게서 의미 모를 호의가 느껴졌다.
‘착각이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카스토르에게서?
“……황족으로서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어찌 모르겠습니까. 비록 처음 뵀으나 전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야.”
스르륵 내려온 머리칼에 그의 왼쪽 눈이 슬쩍 가려졌다. 카스토르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 뜻이 아닐 텐데. 나를 본 적 있느냐 물은 것이야.”
“……말씀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는 흘끗 시선을 내려서 굳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모른다면, 할 수 없고.”
그때까지,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왜 그가 갑자기 뜻 모를 소릴 중얼거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응.”
갑자기 카스토르가 왜 어디론가 걸어가는지 의아해하는 순간 그가 번개같이 손을 내질렀다.
“꺄악! 한나!”
털썩.
피가 멈췄다가 거꾸로 곤두선 것 같은 전율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꼭 얼음을 꽉 채운 욕조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미안, 피가 튀었네.”
녹아내릴 만치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후두둑, 피를 쏟는 하녀를 보면서, 피 묻은 칼을 든 채 할 수 있는 목소리가 결코 아니었다.
“한나!”
눈앞이 새하얘질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 눈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달려가 한나를 붙잡았다.
“정신 차려, 한나!”
태어나 가장 많은 피를 보았을 때는 응급실에서 부친이 기침을 하다 피를 쏟아 냈을 때였다. 굳이 이런 때에 비교하자면 과거의 것은 아주 소량이었다. 지금처럼 콸콸 쏟아지는 타인의 피에 비하면 아주 적었다고.
“아, 한나……, 한나……. 한나!”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는 건 알겠다. 시야 가장자리부터 색이 흐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만이 오롯이 색을 가지고 통렬하게 맺혔다. 피, 아주 붉은 피. 한나에게서 피가 멈추지 않아…….
“이제 기억나?”
마치 노래하듯 나긋나긋하고 보드라운 음율. 카스토르는 아름다운 얼굴에서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칼을 내밀었다. 검에서 똑똑 떨어지는 핏방울.
칼이 허공을 가르고 또 하나의 하녀가 눈먼 검에 쓰러질 때까지. 내가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음은 명백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것도 또 하려니 재미없군.”
카스토르가 한 손을 쭉 뻗었다. 기립해 있던 검사 중 하나가 피 묻은 검을 받았다.
그리고 카스토르가 부복한 이들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차릉-!
족히 수십 명은 되는 검사들이 칼을 꺼냈다. 피를 닦고 깨끗해진 검이 공손히 내밀어질 때까지 카스토르의 얼굴은 여상했다. 소름 끼칠 만큼 표정 없는 얼굴.
“지금부터 이단 심문을 시작한다. 8황비 아올레시아의 딸, 아실리 로제 아올레시아 칼타니아스.”
“아…….”
“나는 장차 이 제국을 짊어지는 몸으로서 네게 접근 및 접촉이 금지된 ‘혼돈의 신관’과 내통한 죄를 묻겠다.”
그는 당혹스런 내 얼굴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시작하라.”
더없이 건조한 명령에 따라 검사들이 칼을 휘둘렀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내 하녀들이 피를 쏟아 내며 쓰러졌다. 베스, 레나. 유모……. 나는 겁먹은 채로 뒷걸음치다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우당탕 넘어져 버렸다. 팔로 얼굴을 감싸 안아 덜덜덜 떨었다.
‘꾸, 꿈일 거야…….’
더 이상 카스토르를 보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 있던 그것이 더욱 높은 곳에서 나를 깔아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윙윙 메아리친다.
그가 무어라 말했지? 혼돈의 신관? 의미를 모를 단어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누구랑 내통해? 내가 왜?
왜?!
“나를 봐, 황녀.”
거짓말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지금부터 네 생명을 걸고 세 가지 질문을 할 거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너는 대답을 하되 너의 사상이 황족다운 것인지, 스스로 증명하라.”
차곡차곡 쌓았던 계획도 작전도 모조리 날려 버린 채, 나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 움직였다.
“너에게 제국은 어떤 의미인가?”
본래 준비했던 대답은 이것이었다.
‘제국은 저를 낳아 준 나라이며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저는 황녀이니까 폐하가 짝지어 준 짝과 결혼하는 것으로 나라에 이바지하겠습니다.’
그러나 수십 번 되뇌고 외웠던 말은 나오지 못했다.
“으어, 제국은, 제가, 아니 저를, 낳아 준 나라이며, 저는 제국을 위해, 평생, 평생을 나라에 이바지하겠습니다.”
대리석 타일 사이로 피가 스며들며 차차 웅덩이를 이루었다. 단 세 걸음. 아주 조금 떨어진 곳에 이렇게나 많은 타인의 피가 흐른다. 기이하리만치 잔인한 풍경에서 무사한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엎드려 그의 발밑에서 기듯이 덜덜 떨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 천으로 피가 스며들었다. 한때 나의 하녀들을 구성했던 피에 치마 끝이 젖었다.
“황녀.”
카스토르는 나른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를 낳아 주신 분이시자 제국의 아버지이십니다.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며, 언젠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실 전하께서도 폐하처럼 훌륭한 황제가 되실 거라 믿습니다!’
“저, 저를 낳아 주신 분……, 흡, 제국의 아버지, 이시며,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분……. 모르, 모르겠습니다.”
덜덜 떨면서 지껄이던 내 말에 카스토르가 달처럼 박힌 찬란한 금색 눈동자를 깜빡였다. 그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미적지근하게 웃었다.
“너에게 난 어떤 의미인가?”
드라마나 영화나 소설 속에서 많은 죽음을 보았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거나, 전쟁 통에 무수하게 죽어 가는 모습은 어디까지나 가상 세계에서 일어날 일일뿐 내 주변과는 무관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검사들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검이 날붙이 하나 들지 않은 나의 궁 사람들을 유린하는 모습은 매체 속 먼 나라 이야기와 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꾸역꾸역 토악감이 치밀었다.
누군가 지른 새된 비명에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베스!”
아침까지 웃으며, 말을 나눴던 이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진다.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고 누군가는 손가락이 날아가 비명을 질렀다.
매서운 날붙이 소리와 억눌린 울음소리, 이미 널브러진 하녀들……. 그 짧은 사이에 아주 많은 이들이 죽거나 죽기 직전까지 다쳤다.
시선을 돌려서 궁 곳곳에 남은 살육의 흔적들을 바라보았다. 전생과 현생 전부를 합쳐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기이한 풍경이 꿈도 환상도 아닌 채 섬뜩한 형상으로 늘어져 있다. 왜?
단지 살아남고 싶었던 것뿐인데!
왜!
울음이 기어이 소리를 입고 터져 나갔다.
그만해!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른다. 모래시계 안의 모래처럼 소망의 전부였던 것이 천천히 손을 빠져나간다.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흰 드레스와 타일 틈으로 흐르는 핏물의 대비가 선명하다. 정신이 조각조각 깨지는 소리가 있다면 이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났을 거라고.
모르겠다.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일기장의 마지막, 카스토르의 세 번째 질문은 아모르를 살리는 것과 함께 완성됐다. 나는 일기장을 전부 채웠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저 황금의 회오리가 뱅뱅 도는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은 백치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금안, 황금색 눈동자. 언제인지도 모르겠는 선생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신의 증표이자, 스스로를 신이라 불리게 하는 것. 금색 눈은 칼타니아스 제국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자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모든 가정과 준비를 거쳤어도 결국 내 계획은 카스토르라는 미지수 하나에 엉망이 되어 버리는 식이란 걸 알아 버렸다.
“왜, 왜…… 나를, 죽이려는 거죠?”
멈칫, 허공을 가르던 검이 멈췄다.
“……왜 죽이려는가.”
검을 든 카스토르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봤다.
“억울해?”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느른하게 웃고 고개를 들어 기울이더니, 가늠해 보듯 눈동자를 아래로 굴렸다.
“정녕, 억울했다면 나를 피할 수 있게 찾았어야지…….”
“……무, 무엇을?”
“해답을.”
그는 그대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나직한 실소. 그가 몸을 기울여 내 귀 바로 옆에서 나긋이 속삭였다.
“정답 찾기를 게을리한 자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줄 필요 없잖아? 모르니까. 죽는 거야.”
제 부하들이 도륙하는 것을 바라보던 카스토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스토르는 황금색 눈동자를 느긋하게 깜빡였다.
[모든 질문이 끝나자. 황자님이 아주 예쁘게 웃으셨다.]
황태자가 웃었다.
“재미없네.”
밖은 여전히 꽃피는 봄처럼 화창한데. 궁에서는 피비린내가 났고 울음과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아름다운 사신에게서 마지막을 직감했는지도 모른다.
눈앞에 희고 빳빳한 천이 개선장군의 깃발처럼 크게 펄럭인다. 손에 잡힌 것은 카스토르의 옷자락이었다. 난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의 소맷자락을 잡고 빌고 있었다.
“살려 줄까? 살려 줄 수도 있어. 네가 시체와 악취만이 남은 궁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다면.”
그가 느릿느릿 말을 이어가다가, 검을 바닥에 꽂는다. 그대로 검날에 머리를 기대며 비틀어 나를 깔아 보았다. 데구루루 굴러간 눈이 그의 왼손에 쥔 것으로 향했다.
“이 여자의 머리는 네 궁의 가장 큰 문 위에 효시될 거야. 너는 매일 밤 대롱대롱 매달린 머리를 보며 잠에 들겠지.”
네 궁 하녀들의 살아 있는 가족은 네 이름으로 모두 처단될 거라는 말이 나온 순간 참았던 울음이 폭렬하게 터져 나왔다.
“살아, 살아남고 싶지 않아요!”
“그럼, 죽는 수밖에 없구나.”
그는 흑표범처럼 늘씬하게 뻗은 목을 기울여 속삭였다.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고인 자리에는 손가락과 머리카락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 그림자를 따라 땅 밑으로 고개를 처박고 싶다고 생각했다.
“흐흑, 죽고 싶지도 않아…….”
천천히 무릎을 펴 일어나는 몸짓을 따라 천이 펄럭였다. 겹겹이 물결을 이루는 천은 흰색과 보라색. 자색 실크에 금실로 가장자리에 수가 놓여 있었다. 가장 화려하고 거대하며 고귀한 자에게만 허락된 문양.
“안녕.”
올려다본 곳에 광휘 같은 것이 번쩍였다. 그것이 카스토르의 머리 위에 씐 월계수 장식인지, 그저 태양일뿐인지, 아니면 저 이질적인 황금색 눈동자인지.
눈을 감았다.
만약, 다음이란 게 있다면.
그땐, 살아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 * *
[821년 하베르미아의 달 10일
그런데 정말로 나타난 황자님이 내게 물었다.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다. 나를 아나?”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황자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거대한 이빨이 날 잡아먹을 것 같았다. 아주 아름답고 잘생기고 또 예쁜 황자님이 세 가지 질문을 했다.
“너에게 제국은 어떤 의미인가?”
“황제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에게 난 어떤 의미인가?”
모든 질문이 끝나자. 황자님이 아주 예쁘게 웃으셨다.
그리고
날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