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다정한 오빠가 있었다 (4/47)

3. 다정한 오빠가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팔든? 노부인이 너무 멀쩡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나도 깜빡 넘길 뻔했다가 가까스로 되물었다. 어디요? 뉘 방이요? 대답이 없다.

황당한 얼굴로 들고 있는 접시와 노부인을 번갈아 본다. 여기는 4황자의 테렛 궁이고 황자님이라면 당연히 4황자겠지. 자세히 보니 노부인이 입은 옷은 하녀장의 옷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테렛 궁의 최고 관리자, 소위 말해 하녀들의 보스란 소리. 애석하게도 말단 옷을 입은 나로서는 거부할 수단이 없었다.

“따라오거라.”

모퉁이를 돌아서는 동안 내내 황망했다. 긴 복도를 하녀장의 뒤를 쫓아 지나는 동안 그녀가 하는 행동을 따라 하기만 했다. 그러다 내 궁에는 없는 1층을 지키는 검사에게 인사했을 때였다.

잠깐, 이건 어쩌면 기회가 아닐까? 본래 오늘은 빨래터에서 내가 아는 사실과 현실의 정보를 맞춰 볼 생각이었는데, 만약 내 생각이 맞는다면 이건 큰 기회였다.

아니, 근데 이래도 되는 거야?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녀도 엄연히 직업이고 난 최고 아래 말단으로 분장했다. 지금 내가 4황자를 찾아가는 건 그야말로 갓 입사한 신입을 회사의 중요한 회의에 내세우는 일이었다.

젠장. 신입의 실수는 줄줄이 윗사람의 책임이라고. 그러나 외쳐 봤자 닿지 않을 불만이었다.

눈을 감고 4황자에 대한 것들을 추려 낸다.

4황자 아모르. 2황자와 친했고 황태자와도 가까운 사이로 두 사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던 남자. 이로 보아 어쩌면 이 망할 상황을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책 『루스벨라의 빛』은 큰 줄기가 순애보이나 중반은 말할 수 없이 난잡했다. 남주를 두고 그 외의 미남이 대거 서브 및 조연으로 등장하는 하렘이었으면서 수위는 미성년 관람 불가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기 요인이지 않았을까 싶다. 반응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반부에서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온 정성을 들여 치중했다면 중반부터는 초점이 칼타니아스로 옮겨 간다. 마성의 루스벨라는 칼타니아스 속 남자를 열이라 가정하면 거기의 반 정도와 정을 나눈다.

칼타니아스산 물고기들은 능력이 끝내주는 미남인 데다 하나같이 그녀에게 절절한 미친놈이었다. 놀랍게도 루스벨라는 이런 대어로만 쏙쏙 골라잡았다가 끝에 가서 아무래도 난 남주를 잊을 수 없어! 하고 전부 버린다. 대단한 여자 같으니.

지금 찾아가는 황자도 조연 중 하나였다.

「내 이름을 불러 주세요.」

아모르는 책 속 병약함과 순정남의 대명사로 루스벨라의 애정도는 상중하로 나눈다면 중 정도. 정사는 없는 대신 애틋한 연정이 오갔던 남자다.

루스벨라가 가진 남자 중 가장 지고지순했으며, 읽는 내내 병약한 모습을 보였지.

「불러 준 것만으로 행복할 테니까.」

병약함과 순애의 조합이 열락을 추구하는 칼타니아스에서 눈에 띄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4황자가 소설 속에서 가진 비중과 주인공에게 끼친 영향은 크지만 의외로 분량은 작다. 임팩트 있는 한 방을 남기고 일찍 퇴장하기 때문이다.

‘죽었지, 아마.’

책 속에서 직접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 언급하지 않았기에 이유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프다고 했으니 내내 앓았다는 병이 원인이 아닐까 한다.

“잠시 기다려라.”

하녀장이 칼타니아스의 상징인 흐드러진 버들가지와 넝쿨 잎이 새겨진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면, 콜록콜록, 잔기침하는 병약하고 가녀린 황자님이 있을 심산이 크다. 결정했다. 좋아, 지금부터는 임기응변이다.

똑똑.

“황자님, 베고니아입니다. 들어가겠사옵니다.”

이어 끊어질 듯 연약하며 청량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노부인이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이었다.

솨아아아―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눈을 찌푸린다. 발코니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바람이 가시고 나자 비로소 방의 풍경이 수정체 안으로 들어온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창문이었다. 그리고 이어 눈이 아찔할 정도로 짙고 푸른 녹색이 눈에 들어찬다. 벽지인가 싶었더니 전부가 식물이다.

“어서 와.”

눈을 조금 굴리자 맨발의 남자가 있었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 발코니에서 먹을래.”

“네.”

나이는 소년과 청년 사이의 중간쯤 되었을까.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것같이 높은 목소리는 산사의 풍경 소리같이 청량했다. 더구나 확실히 병자의 안색이었다. 마치 영화 속 뱀파이어의 것처럼 희고 창백한 색이다.

관찰하는 시선을 느낀 듯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어서 오렴.”

번개에 맞은 사람처럼 충격이 온몸 전체를 휘감았다. 툭, 노려보는 하녀장의 시선에 황급히 쟁반을 내려놓았다.

뚜껑을 열고, 식사 때 얼추 기억한 대로 수저를 놓고 뒷걸음질 친다. 양손을 모으고 가지런히 고개를 숙인 나는 방금 마주친 것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미친. 난 왜 4황자를 부드러운 인상으로 생각했을까. 루스벨라에게 나긋했기 때문에? 지고지순해서? 죽는 순간까지 루스벨라를 잊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풍겨서?

선입견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들어가기 전까지도 나는 4황자를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고 계산 없이 순수하며 아이 같은 남자라고 상상했다.

‘맙소사.’

나는 책 속의 4황자를 보았고 알고 있다. 5년 뒤, 루스벨라에게 푹 빠져 절절한 사랑을 앓았던 남자를 알고 있는 것이다. 저기서 날카롭게 노려보는 소년이 아니라.

남주와 서브남을 제외하고 작가의 외모 묘사는 상당히 짠 편이었다.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같이 단편적인 것만 줬고 철저히 루스벨라 시점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다 보니 간간이 나오는 그녀의 ‘잘생겼다’, 표현 정도가 다른 이들의 외모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앉아.”

그래. 내가 잘못했다. 난 무구한 남자를 상상했다. 분명 색은 같았다. 물을 뺀 듯 흐릿한 하늘색의 머리카락. 길게 뻗어 위로 말린 눈썹 아래 녹색 홍채.

모든 색이 흐릿해 존재감이 없는 조용한 남자를 생각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책 속 묘사로는 늘 침대에 앉아 루스벨라를 반기는 모습만 나왔던 남자이니까.

누군가 그에게 병약남 혹은 대형견 같은 연하남, 순정남 따위의 키워드를 붙였고 나 또한 거기 편승한 사람이었다.

“넌 식사하는 나를 아주 빤히도 쳐다보는구나.”

마지막 잎새가 사람으로 변한다면 분명 4황자일 거예요. 어느 문학 정신 넘치는 독자가 말했다. 나는 거기에 소리쳐 주고 싶다. 전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에요!

“……죄송합니다.”

상상했던 것과 저 멀리 성층권쯤 떨어진 황자님만 있다고.

눈이 마주치자 그가 픽 웃었다.

“죄송할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지.”

마지막 잎새 같은 소리 하네. 아모르가 앙앙 짖을 것같이 생긴 귀여운 강아지과일 거란 대다수 독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눈꼬리는 올라간 편이다. 굳이 따지자면 고양잇과에 가깝다. 그것도 맹수. 종은 삵이라거나 살쾡이.

“알면 고개 내려.”

“……네.”

분명 제 사랑을 끙끙 앓으면서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 주는 한 떨기 꽃과 같은 남자였는데. 지금 보니까 보내 주기보다 옆에 꽁꽁 묶어다 놓을 것 같은 모습이다.

달그락.

흘끗 봤는데 옆에서 ‘내가 그 새끼보다 못한 게 뭔지 말해 봐.’ 따위의 대사가 어울릴 법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뭐야?”

“아. 아닙니다.”

실수로 눈이 마주쳐 버리는 바람에 얼른 시선을 쭉 내린다. 아, 소매 아래 손목은 아주 가늘었다. 아픈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걸 두고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고 하던가. 눈사태에 서리가 겹쳐 설상가상이라 하던가.

무엇이 됐든 현 상황에 적용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속담들이나 이런 소릴 지껄일 만큼 내 상황이 당황스럽다고 표현하겠다.

“너. 아까부터 시선이 영 부담스러운걸.”

잔기침을 토해 내는 황자에게서 상처 입은 짐승이 보이는 예민함이 얼핏 보였다. 누가 꽃이랬지? ……꽃은 얼어 죽을. 호랑가시나무가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은데요.

“……황자님, 황송하나 감히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좋아. 말해 봐.”

굉장히 선선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표정은 네가 감히 나대냐는 표정이다.

‘음, 저건 가소로워 죽겠다는 얼굴인데.’

난 떨떠름하게 눈을 깔았다. 하기야 감히 하녀가 황족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안 될 말이었다. 이러다 궁으로 돌아갈 순 있을까. 조금 전 하녀장을 쫓아내던 걸 봐선 무도한 취급을 받지 않을까 싶은데. 에이! 할 말은 해야겠다.

“저, 어찌 수습 하녀인 제가 황자님의 식사에 함께합니까?”

장하다. 하녀장을 내쫓고 나를 남겨 둔 이유를 장장 15분 만에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하녀장이 왜 수습 하녀들이 돌아가며 아픈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그리고 황자에게 쫓겨나며 나를 볼 때 꽤나 안타깝다는 눈을 했었지. 제기랄, 복선이었던 건가.

“심심하니까.”

이유를 아주 잘 알 것 같다. 아―주 잘.

“그리고 조금 전엔 황송이 아니라 송구합니다를 써야겠지. 쯧.”

“예? 예예. 죄송합니다. 기, 기, 긴장해서…….”

“뭘 이런 걸로. 한 번은 실수라잖아?”

턱을 괸 황자가 피식 웃었다.

“실수…….”

그러고는 수저를 든 손으로 나를 가리킨다.

“한 번은 실수. 다시 실수하면 멍청한 거고.”

싱긋. 미소만은 책 속 한 줄 묘사 그대로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다만 눈빛이 형형했고 고상한 눈매는 깊게 파였으며.

“세 번은 병신인 거지.”

아주 뚫어질 듯 관찰하는 시선이 식사 시간 내내 쭉 이어지고 있어 문제지만.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염병, 누가 쟤 다정남이라고 했냐. 나와.

진짜, 이건 뜻밖이다 못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노부인을 따라 걸으면서 4황자를 만났을 때의 이런저런 상황을 예상했지만 이런 게 있었을 리가. 잘난 껍데기 말고는 하나도 들어맞는 게 없으니까. 전부 말짱 헛일이었다.

결국 뇌세포가 파업을 선언했다. 책 속의 멍멍미는 어디 가고 웬 도사견이 한 마리 앉아 있는데. 뭐 어쩌란 말이냐. 식사를 시작한 황자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부드러운 순정남이 이렇게 하향 조정이라면 원래 글러 먹은 폭군은 얼마나 주옥같은 하강 조정이란 거지?’

이쯤 되면 한번 말하게 해 줘라. 창조신 개새끼라고.

식사를 하던 아모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넌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오늘 처음 이곳에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직할 예정입니다.

원래 하녀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황족의 물음에 답해서는 안 된다. 제국의 예법은 특히 상하 대화에 더욱 엄격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하녀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 걸로도 길길이 날뛰는 플뢰온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지.

“흐응. 오늘 이곳에 배정 받았다라. 어려 보이는데 눈치도 빠르고. 꽤 침착하구나.”

“……가, 감사드립니다.”

결심했다. 반드시, 이 방을 나가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튀어야겠다고. 그렇게 마음먹고 막 나가기로 했다.

“말투도 전혀 하녀답지 않아.”

잠시 틈을 둔 그가 이어 중얼거렸다.

“오히려 건방지기까지 해.”

뜨끔, 정곡을 찌르는 말에 괜히 찔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렇습니까?”

“응. 뭐 드문 일은 아니야. 경험이 부족한 애들이 너처럼 적응하지 못한 말투를 보이니까.”

그가 느리게 입술을 만졌다.

“그런데 보통 그런 애들은 내가 노려보면 울어 버리던데. 특히나 네 또래는. 왜일까?”

“……왜, 왜 그런지요?”

아모르가 눈을 휘었다. 곱게 휘어진 눈매 속 눈동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무섭다거나. 아니면……. 병이 옮을까 봐?”

포크를 내려놓은 아모르가 그릇을 치웠다. 원래 하녀가 치워야겠지만 그가 손을 뻗어 움직이려는 나를 제지했다. 대신 나를 응시했다.

“사람들은 날 많이 무서워해.”

아모르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푸석한 하늘빛 머리가 따라 살랑인다. 소년이 묻고 있었다. 너도 내가 무섭니? 하고. 꼭 중학교에 재능 기부 겸 봉사 나갔을 때의 아이들이 생각난다.

<선생님, 저는 남들과 좀 다른 것 같아요.>

여기엔 순정남도 없고 멍멍미를 발산하는 대형견 연하남도 없고 있는 거라곤 곧 사춘기를 폭발시킬 것 같은, 신랄한 예민함이 정수리를 찌르는 삐딱한 소년뿐이다.

“옮는…… 병을 앓고 계신지요?”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린다. 원래 저때가 제일 다루기 어려운 나이라는데. 예민하고, 폭! 발! 할 것같이 감수성 넘치고. 근데 문제는 내가 입은 옷이 옷인지라 까딱하면 그대로 황족 모욕죄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래 보여?”

“어…… 그것이…….”

지뢰밭을 집게발로 걷는 기분, 터질지 모를 땅을 눈을 꾹 감고 밟는 기분이다.

“안심해. 다행히도. 옮는 병은 아냐.”

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 내려친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무서운 사람이 된 것 같은데, 들어온 하녀가 전부 울진 않아. 암. 그렇지 않아. 싹싹하게 구는 애들도 있거든. 그런 애들이 간혹 아프지 마세요, 황자님! 하고 웃지.”

“그래요?”

한마디 한마디가 칼처럼 서늘하구나.

“응. 내가 울리기도 해.”

소년의 얼굴엔 꼭 꾸며 낸 듯한 천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이는 내 본래 나이 반절도 되지 않는 주제에 보이는 건 아주 잘 벼려진 검이다.

예전 중역들 회의에 곁다리로 끼었을 때, 누군가 상품에 대한 주요 안건을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며 팽팽하게 당겨진 그날의 분위기가 딱 이랬었는데. 대답 한 번 잘못하면 지금까지 잘 버텨 온 사회 인생이 골로 가는 분위기 말이다.

“……왜요?”

작가님 혹시 정신적 피해 보상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라고 아십니까. 여태까지 품어 왔던 다정남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부서지는 중입니다.

“감히.”

“…….”

“불쌍하게 보니까.”

이쯤 되면 도대체 5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궁금해질 지경이다. 아무리 봐도 저 도끼처럼 벼려진 뻣뻣한 소년이 래브라도 리트리버 같은 남자가 된다는 것보단, 차라리 숟가락으로 사람을 때려죽인다는 숟가락 살인마의 존재를 더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고개를 숙인 채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미천한 제가 한 말씀 올리자면 그건 편견이에요. 아프다고 해서 모두가 불행하진 않아요.”

너덜너덜해진 채로 중얼거리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불행하지 않다고?”

그의 낯에 영문 모를 표정이 스쳤다. 다시 어린 성자처럼 고결하고 봄의 햇살처럼 다정한 미소로 덮었지만, 소년의 눈빛은 사흘 굶은 짐승처럼 날카로웠다.

황자의 얼굴을 끝에서 끝으로 훑으며, 난 불현듯이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 내가 무언가를 느낀 건 순전히 서른을 치열하게 보내 벼려진 감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어리고 순진한 아실리 로제였다면 모른 채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다. 까칠하게 굴긴 했지만 내 무례를 못 본 척해 주었다. 한번 깨닫고 나니 연산의 답이 하나둘씩 눈으로 들어온다.

햇볕을 쬐지 못한 듯 창백한 낯. 부르터서 하얗게 각질이 일어난 입술과 바싹 말라 뼈마디가 도드라진 쇄골. 습관적인 마른 잔기침. 전신을 감싸고 있는 바싹 당겨진 분위기는 소년을 위태롭게 보이게 했고, 녹색 식물로 가득 들어찬 방은 희고 고요한 병실을 연상시켰다. 그래. 사람을 보지 못하고 큰 거다, 이 사람은.

“아픈 사람이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니.”

“네.”

흐릿한 녹색 눈동자가 정제되지 못한 감정으로 정처 없이 일렁거린다. 그리고 잠시 누그러졌다가. 관찰과 경계를 번갈아 가며 드러냈다. 소년은 꼬박꼬박 이어지는 말대꾸를 지적하는 대신, 물었다.

“그건 경험이니?”

“황공합니다. 간접적인 것도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면요.”

“……너도 몸이 아팠었던 거야? 많이?”

“……저 말고 제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어요.”

“아아. 아버지는, 돌아가셨니?”

그렇게 물으며 짓는 표정을 보고 생각했다.

이 나라는 빨리 망할 게 틀림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성격이 지랄 맞아지는 유전자가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황태자가 작중 최고로 지랄 맞은 것이 충분히 이해간다. 황태자는 보스니까. 그럼 4황자는 중간 보스쯤 되나?

아모르는 닳고 닳은 인간이 주로 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독이 강할수록 화려해지는 독초처럼 독을 품고 다정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순진한 아이는 결코 알지 못할 표정이었다. 접대 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보던 계산적이고 가식과 위선 가득한 표정 말이다.

“네. 아주 오래전에요. 돌아가셨어요.”

“그래? 돌아가셨다라……. 보고 싶지 않니?”

“아뇨…….”

“왜?”

“다시 살아나셔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으니까요.”

방 안이 숨소리 하나 없이 적막해졌다. 왜냐면 그 말을 하는 한순간 아모르가 표정을 싹 다 지우고서 정색했거든. 나를 쏘아보는 눈은 아주 유려한 빛을 가졌으면서 얼음처럼 차가웠다.

“넌 재밌는 소릴 하는구나.”

난 오늘부터 루스벨라를 존경하겠다. 루스벨라가 도사견을 사람 만들었다. 이건 곰이 사람이 되는 기적과 맞먹는 엄청난 기적이다.

플뢰온. 내가 네 성격이 지랄 맞댔나? 취소할게. 더한 놈이 있었어.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4황자가 내 데이터 속 ‘성격 나쁨’의 새 지평을 열었다.

“보통 네 또래는 말을 걸면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못해. 그릇을 깨거나 엎기도 하고. 가끔, 용기를 낸 아이들조차도 벌벌 떤단 말이지.”

그는 어떤 대답을 바라는 걸까.

“넌 좀 유별나구나?”

“그렇습니까?”

“응. 그래서 그 말투의 무례함이나 건방짐을 참아 줬지만.”

아모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축하해. 나와 이렇게나 많은 말을 나눈 건 네가 처음이야. 재미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등받이에 편히 기대어 앉은 아모르가 배를 툭툭 두드렸다. 그는 배불리 먹은 맹수같이 나른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식사를 마친 것 같긴 한데, 저거 먹고 배가 부른가? 수프는 3분의 1도 줄지 않았다.

“날 재밌게 해 줬으니까 한 가지 질문을 받아 줄게.”

아, 뉘예. 뭐? 고개를 숙이고 건성으로 듣다가 헐레벌떡 머리를 들었다. 질문이라고?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성급함을 드러낸다.

“오호라.”

아모르의 눈이 여우처럼 가늘어진다. 이런. 실수했다.

“그냥 해 본 말인데.”

목 안에서 절로 신음이 흘렀다. 지금까지 꼭꼭 숨기고 있던 표정이 순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난 게 분명했다.

“말이 없네? 궁금한 게 없다면 돌아가도 좋아.”

뻔한 도발인 걸 알면서 제 발에 걸려들었음을 알았지만, 눈을 깔아 지워 낸다.

“너 이름이 뭐지?”

“……안입니다.”

“안.”

내 거짓된 이름에 고개를 든다. 아모르의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더 깊은 미소를 그렸다.

“이만하면 도망갈 만도 한데.”

감정이 고인 나긋한 아모르의 두 눈과 마주치자 바짝 입술이 말랐다.

“하지만 넌, 궁금한 게 있구나?”

어차피 이 방을 나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궁으로 향할 것이다. 뒤끝 없이 저지를 수 있다. 과감히 지를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돌아갈 것인가.

“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신중함이 지나쳐 하루 종일 돌다리를 두들기는 나라지만 내일 없이 막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당장 내일이 올지 안 올지 모를 순간 아닌가. 난 감히 맹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청하건대, 황태자 전하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망설임 없이 직구를 선택했다.

“1황자이신 황태자 전하에 대해서요.”

톡 튀어나올 듯 커다란 아모르의 눈이 그대로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놀랍구나.”

붉은 그의 입술이 반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이해할 수 없는 한기를 느낀다. 실수로 중요한 서류를 잃어버렸을 때와 같이, 한평생 치열하게 살았던 삶에 내재하였던 사이렌이 위험을 경고했다.

“형님……. 형님이란 말이지.”

그릇을 한쪽으로 전부 치워 버린 아모르는 긴 팔을 뻗어 턱을 괴었다. 헐렁한 셔츠 사이로 드러난 목선이 사슴같이 길고 가늘었다.

“하하하.”

퍽 유쾌한 낯으로 소리 내어 웃던 아모르는 눈꺼풀을 우아하게 감아 뜨며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샅샅이 훑는다.

“네가 귀족 영애였다면 난 널 형님의 외모에 넋이 나갔거나, 형님의 옆자리를 노리는 골 빈 계집애라 생각했을 거야.”

“…….”

“실제로, 형님은 이 문제로 아주 골머리를 앓으시거든. 더구나 치 떨리게 싫어하시지.”

그야, 그럴 것이다. 카스토르는 연정을 품은 여자를 매우 싫어하였으니까. 황제가 되어서도 제국의 황후를 가장 불쌍한 여인으로 만든 남자였다.

“들어 본 적 있겠지? 형님께 사랑을 고백한 고위 신관의 여식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소문이 좋지 않았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살육을 일삼으며 무자비에 가까운 그의 여성 편력은 제국 내 유명했었고, 이런 점에서 아내와 금슬이 좋았던 2황자와 사사건건 비교당하며 말이 많았다고 한다. 하기야, 이건 다 그를 루스벨라의 남자로 만들기 위한 작가의 안배였겠지만.

보통 로맨스 판타지에 으레 등장할 법한 악녀가 칼타니아스에도 있었는데 그 여성은 제국의 개국 공신이자 삼 공작 중 하나의 고명딸이었다. 더구나 특유의 냉랭하고 톡 쏘는 성격으로 카스토르에게 당당하게 들이대던 멋진 여성이었으나.

「눈에 거슬린다.」

죽었다. 내 살다 살다 악녀가 불쌍한 소설은 처음이었다. 전무후무한 퇴장에 댓글란 또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고 개중엔 여주가 카스토르에게 살해당하는 게 진엔딩 아니냐는 카스토르 여주 살해설이 큰 지지를 얻을 정도였다.

“일개 하녀가 어쩌다 형님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섣부른 호기심이라면 관두는 게 좋아. 형님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지.”

“알고 있습니다. 그, 한 번 뵌 적 있는데 너무 멋지셔서…….”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카스토르는 단 두 가지에만 의의를 두고서 필요 없는 건 가차 없이 버렸다. 그의 손에 죽은 이를 어찌 셀 수 있을까.

그는 애지중지 길러 준 유모를 죽였고 그를 사랑해 목숨마저 걸었던 약혼녀마저 죽였다. 작중 그에게 뿌리 뽑힌 가문만 수십이요, 필요하다면 어제 도운 이도 가차 없이 죽였다.

어쩌면 5일 뒤 내가 카스토르에게 죽는 건 카스토르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버려진 황녀. 얼굴을 다쳐 이용 가치가 떨어지고 쓸모없는 패일 테니까.

그러나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이상하네. 네가 형님을 뵌 일이 있다고……?”

아모르는 턱을 괸 그대로 흐응, 하고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형님은 서쪽의 테(te) 궁 구역에서 이곳 테렛 궁 말고는 걸음하지 않으실 텐데.”

그의 녹색 눈동자가 굴러갔다.

“오늘 처음 여기 왔다는 네가 봤다니. 참 신기하구나.”

눈을 마주치며 이유를 찾으려는 듯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나는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겁에 질린 사람처럼 고개를 내렸다.

“뭐. 좋아. 오래 침대에 앉아 있으면 상당히 심심하거든. 난 재밌는 거랑 신기한 걸 좋아해. 그러니 네겐 친절을 베풀어도 재밌겠다. 무엇보다……. 형님에 대해서 남과 이러쿵저러쿵 나눠 본 적 없으니까.”

여행 경험이 풍부한 루스벨라는 종일 침대에 앉아 있는 아모르를 늘 안쓰러워했다. 그를 찾을 때마다 오래 앉아 있으며 오래도록 대화를 나눴다.

다정하고 상냥했던 루스벨라는 가엾은 아모르가 외로울까 봐 모국에서 가져온 책이나 게임, 직접 만든 간식 같은 것을 모조리 선물했다. 바깥세상을 향한 동경이 컸던 책 속 아모르는 루스벨라가 가져온 모든 것에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때는 전부 가진 재벌 2세 주제에 짝녀가 주는 컵라면같이 하찮은 것에 뛸 듯이 기뻐하는 아모르를 어휴, 이 짠내 나는 자식 하고 넘어갔는데. 지금 보니 아모르는 게임이나 책 따위가 아니라 루스벨라에게 의의를 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야말로 늘 침대에 앉아 있던 시한부 소년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바람이었을 테니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조잡한 상상이고. 지금은 루스벨라가 가출을 하든 떡을 치든 알 게 뭔가. 아모르의 가녀리고 쉰 목소리에 집중했다.

“형님은 말야, 잔인하고 냉혹하신 분이셔. 자신에겐 관대하고 타인에겐 가차 없지. 그래서 형님의 궁에는 늘 시중인이 모자라. 심심치 않게 시체가 실려 나가거든. 아마 내 궁전에서도 몇쯤 죽었겠구나.”

“…….”

의외로 소년은 떠들기를 좋아했다.

“형님은 웬만한 검사보다도 검을 잘 다루시지. 거기다 「주신의 후계자의 힘」까지 가지고 계시니 누가 함부로 건드리겠어?”

‘후계자의 힘?’

나는 가늘게 눈을 찌푸렸다. 그게 뭐지?

“그래서 호위 검사를 둘 필요가 없지만 헤르난, 아니 디볼로 공작이 자청해서 맡고 있기 때문에 아주 성가셔해. 늘 이곳에 오셔서 투덜거리시지. ‘감히 나보다 약한 놈에게 보호받는다’고. 하지만 실은 그런 책임을 지우는 걸 좋아해. 그래서 배신하는 것에 예민하시지.”

“…….”

“아, 그리고 말야. 거짓말을 아주 싫어하셔.”

“거짓말을요?”

“그래.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뒤에서 하는 것 또한 매우 꺼리시지. 실제로 형님이 없는 곳에서 떠들던 서기관 둘이 살아서 비서실을 나오지 못했거든. 형님이 그 쓸모없는 혀를 잘라 주었는데 과다 출혈로 죽은 모양이야.”

끄덕이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가만, 그럼 지금 우리가 나눈 대화도 그놈 귀에 들어가면 살아남지 못한단 소리잖아.’

상큼하게 웃는 황자는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미친놈이?

“저, 그럼 지금도…….”

“맞아, 난 지금 목숨 걸고 얘기하고 있는 거야. 고맙지?”

전혀. 아니. 절대. 네버. 살아남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했을 때, 방금 이 아모르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빅 엿을 내게 먹였다. 나는 이를 부득 갈고 싶은 걸 참으며 간신히 애처로운 얼굴을 보였다.

“……제게 너무 친절하시지 않으신가요. 걱정됩니다.”

“괜찮아. 넌 그걸 누릴 자격이 있거든.”

아, 책 속 내용이고 4황자고 뭐고 진즉에 도망갈걸. 난 대체 뭘 믿고 이 방까지 들어왔나. 여태껏 적중한 예상이라곤 이 아름다운 황자가 아름다운 개새끼라는 것 말곤 없는데.

이전엔 더없이 다정한 대형견남. 지금은 개새끼. 아모르가 앉은 식탁 겸 탁자는 내 어깨에 살짝 못 미쳤다. 아무런 경계 없이 서 있다가 아모르의 손이 머리카락을 스쳤을 때, 나는 놀라 그를 쳐다봤다.

“안.”

그가 씩 웃었다. 마치 내가 걱정하는 것을 안다는 듯이.

“방금 알았는데, 너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

눈동자만 올려 나를 보는 얼굴은 잘생겼다기보다 예뻤다. 손가락까지도. 이걸 두고 섬섬옥수라고 하던가. 나를 잡은 가냘픈 손가락이나 가만히 있는데도 곧 기절할 것처럼 창백한 안색이 예쁘며 안쓰러웠다.

“누굴 닮았을까…….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전부가 신관 귀족뿐인데.”

그러나 동시에 도드라진 빗장뼈와 튀어나온 광대가 성마른 예민함을 풍겼다.

“감히 제가 귀하신 분을 닮다니 비할 데 없이 영광이네요…….”

난 가까스로 대답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너, 안이라고 했던가.”

이름을 되묻고서 아모르는 “안.” 하고 불렀다. 그는 고기를 먹듯 발음을 우물우물 씹더니 고요한 풀빛 눈동자에 반짝 빛을 드러낸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얼굴에 붙여 놓은 그건, 혹시 다친 거야?”

반창고를 붙여 놓은 쪽에서 손이 느껴진 순간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아프니?”

그는 미려한 미소를 꺼트리지 않으며 말했다.

“아, 네. 조금입니다. 바닥 청소하다가 미끄러져서 다쳤습니다.”

“정말? 조심하지 그랬어.”

미소를 짓고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은 전에 없이 다정했다. 이브의 선악과처럼 본능적인 경계를 낳았다. 애새끼면서 사람 홀리게 웃는 건 데인만이 가능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위태로운 미소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자작나무같이 메마르고 건조한 시선으로 소년은 나를 본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안.”

“……네.”

“형님은 실은 정이 아주 많아서 주변 사람을 아주 많이 아껴. 하나뿐인 친우, 헤르난을 매우 아끼는 것만 봐도 그래. 또 말이야. 그분께선 너처럼 작고 어렸던 나를 예뻐해 주셨듯이 조그맣고 귀여운 걸 예뻐라 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형님의 재량이지.”

여기서 그의 음성이 더욱 작아졌다.

“네가 붙인 그거 말이야, 나도 붙인 적 있어. 내가 크게 잘못했을 때 형한테 맞았거든. 나더러 골치 아픈 동생이라면서. 그러더니 한 번은 자기가 첫째라서 고달프다고 하시지 뭐야.”

“…….”

“재밌지? 뜻밖에 정이 많아.”

두 번만 재밌었으면 나라가 망하겠는데요. 병으로 앓는 동생을 주먹으로 패는 형을 두고서 죽이지 않았다고 정이 많다는데 끄덕여야 하다니……. 얼른 이 비상식적인 곳에서 탈출하고 싶어졌다.

완전히 해탈해 체념한 채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들을 들었다. 뒤로 갈수록 의미 없는, 거의가 누구는 어떻게 죽었고 누구는 어떻게 죽었다더라 하는 전국 살인 자랑이었다. 자랑거리가 살인밖에 없는 형이라니. 그거 좀 문제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모르가 돌연,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아모르가 보는 곳을 따라간다.

“그만 가 봐. 늦었잖아?”

활짝 열린 발코니 밖으로 선연한 식물의 색이 보였다. 대리석 기둥을 타고 방 안쪽 유리창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넝쿨이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은 조금 징그러웠다. 착각일까? 순간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잎사귀가 움직인 것도 같았다.

“안.”

고개를 돌리자 노을에 물든 아모르가 보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부름에 멍청히 눈을 깜빡인다. 창문밖엔 해가 지고 석양이 묻은 그의 뺨은 생기를 띠었다. 여기 황자들은 하나같이 다 기이하리만치 잘생겼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다.

“넌 늦으면 안 되잖아.”

난 얼어붙은 것처럼 굳었다. 황자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뗐다가 하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펜이었다. 그가 탁자에 놀고 있던 종이 위로 무언가 슥슥 그리더니 내민다.

“원래 나만 아는 길인데 특별히 알려 줄게.”

웃는 얼굴을 따라 시선이 타고 내려간다. 조악하게 그려진 약도였다.

“이게 지름길이야. 빨리 가야 하잖아.”

“……어딜, 빨리 가야 하는데요?”

“네가 돌아가야 할 곳. 서쪽의 가장 끝에 위치한 궁.”

“네?”

“여기서 테레나 궁은 꽤 멀지.”

나는 멈칫했다. 물감이 번지듯 잔잔하게 웃는 아모르의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주 빠르게.

그가 종을 울리자 밖에 있던 검사가 들어와 고개를 숙인다.

“다음이 있다면, 또 놀러와 주면 좋고.”

“…….”

그는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지 그대로 돌아서 가 버렸다. 나는 손이 하얘지도록 빈 그릇을 움켜쥔 채 본능적으로 걸어 복도로 나왔다.

‘빨리 가자.’

걸음이 빨라졌다. 치맛자락이 발목에 감겨 거친 느낌을 자아낸다. 조리실에 식기를 몰래 가져다 놓고 누가 볼세라 황급히 아모르의 궁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르륵 주저앉아 참았던 숨을 내쉰다. 부러 느긋해지려 후, 하, 후, 하 길게 심호흡했다.

세상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참 많다. 정말로 싫어했던 동창 얼굴을 같은 회사에서 보게 되기도 하고, 업무 미팅 도중에 남친이 회사 동료의 여친과 나란히 걷는 것을 보거나 머나먼 타국에서 뜻밖에 첫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뭐가 됐든 단순한 확률 문제다.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린다.

‘데인과 플뢰온도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나라는 여동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대뜸 테레나 궁으로 가는 지름길의 약도를 받아도 당황할 필요 없다. 그런 거겠지. 맞아. 그런 거라고. 솔직히 아무리 버려졌다 한들 이 넓은 황궁에 하나쯤은 날 아는 사람이 있지 않겠나. 한 번쯤 내가 그들을 알았던 것처럼 그들도 나를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긴 했다.

짓궂은 황자가 생각보다 더 간 떨리는 방법으로 알게 했을 뿐이야. 어차피 소설이라면, 소설 같은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법.

그렇게 자위하며 아모르가 남긴 호의인 약도를 펼쳤다.

갈 길이 바쁘다. 얼른 가자. 돌아가는 길이 제법 멀기도 한 데다 방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애나를 생각해서 얼른 신속하게 돌아가야 할 테니까.

“이쯤인데.”

그가 그려 준 약도는 선을 몇 개 겹쳐 그려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후원을 빠져나왔지만 그럼에도 길이 어려워 나는 간신히 그림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후원에서 왼쪽이란 말이지?”

후원을 통과해 모퉁이를 지나가는데, 얼핏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바리톤의 목소리. 내 궁에선 듣기 힘든 톤. 검사도 있는 모양이었다.

낮은 남자의 목소리와 그보다는 조금 높은 남자 목소리가 성큼 가까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약도에 집중했다.

‘음, 이 길이 맞는 것 같지?’

드디어 길을 찾아 고개를 들었는데, 그보다 먼저 큰 그림자가 지는가 싶더니 앞이 까만 정복으로 가득 찼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키가 큰 남자가 있었고, 남자의 어깨 즈음에 눈처럼 새하얀 머리가 하나 보였다.

……눈처럼 하얀 머리?

“누구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흰 종이가 힘을 잃고 나풀나풀 발밑에 떨어진다. 나는 뉘엿뉘엿 지는 해도 잊고 입을 틀어막았다. 쿵쾅쿵쾅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녀인가?”

“글쎄.”

곧게 뻗은 허리. 검은 셔츠. 보지 않으려 했으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간다. 곧 나무처럼 타고 올라 툭 튀어나온 남성적인 울대에 머물렀다.

‘아니야.’

안 돼. 보지 마.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여기면서도 이겨 낼 수 없는 호기심에 올라간 시선이 남자의 어깨에 머물렀다.

“……네가 모르면 어떡해.”

흰 머리 남자의 타박에 키가 큰 남자가 슬쩍 웃는 소리.

“글쎄.”

낮게 깔려 밑바닥을 긁어내는 것 같은 음성. 전생의 베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아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건 악마의 속삭임이라도 되는 양 황홀한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황급히 고개를 숙인 나는 얼른 약도를 주웠다. 그만 봐야 한다 느끼면서도 다시 올려다본다. 헐렁한 옷은 빗장뼈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단추는 엉망으로 풀려 있었다.

뇌가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안볼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러나 호기심이 먼저였다. 마침내 그의 얼굴에 도달한 나는 입을 벌렸다.

“모르는 걸 어떡해.”

짙은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검푸른 잔상을 남겼다. 검은 광택이 나는 머리카락 사이로 반듯한 아미가 드러나며 움푹 들어간 미간이 보였다.

극히 사실적인 매체에 익숙해진 전생에 체험한 연예인, 풍경, 우주, 그 어떤 경험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새삼 말하기도 어색할 만큼 몹시도 미려한 남자였다.

남자는 자신과 대비되는 새하얀 머리를 가진 남자의 어깨에 느슨하게 기댔다. 그대로 눈을 툭 늘어트리더니 웃음기 한 점 없이 찬란한 금빛 눈동자를 굴려 나를 살폈다.

눈매는 깊었고 애가 탈만큼 매혹적이었다. 손짓. 몸짓. 눈짓. 작은 움직임 전부 홀릴 듯 아찔하였으나 특히 이질적인 금색의 눈동자가 나를 사로잡았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 대충 걸친 것이 분명한 검은 망토가 너울너울 흔들렸다. 기묘한 금색 눈동자로 나를 꽁꽁 묶어 두고 남자는 권태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남자 앞에서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이 모자랐다. 소설이라고, 소설 같은 전개를 원한 건 아니야.

카스토르 드제 칼타니아스.

미친 황태자가 눈앞에 있었다.

* * *

바람에 몸이 살짝 떨렸다. 코끝으로 한기가 스몄다. 만물이 밤을 준비하는 시간에 이곳만 흐름에서 벗어난 것처럼 고요했다.

“전하.”

툭 치면 쓰러질 듯 가냘픈 계집아이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혼란과 경계를 눈을 깔아 지워 내는 태도는 아이답지 않은 의젓한 구석이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던 카스토르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아 어린 소녀를 쳐다보았다.

무엇이? 황태자가 하문하려 했으나, 그가 본 것은 쌩하니 멀어지는 뒷모습뿐이었다. 머릿수건 뒤로 금색 머리카락이 바쁘게 흔들렸다. 카스토르는 그걸 바라보며 슬쩍 눈을 찡그렸다. 해묵은 밀알같이 바랜 금발.

저걸 어디서 봤더라? 소녀의 눈동자로 살짝 비치던 먹먹한 공포와 두려움을 떠올렸다.

“도망가 버렸네.”

옆에서 헤르난데즈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확실히 조금 전 본능과도 같이 거리를 벌린 걸음걸이는 털을 곤두세운 짐승처럼 재빨랐다. 카스토르가 사라진 소녀를 보며 느낀 감상은 그러했다.

“그 차림을 알아보는 하녀는 처음이야. 그렇지?”

“아아.”

카스토르가 나긋한 목소리로 수긍했다. 헤르난데즈가 하는 말은 그들이 입고 있는, 검사들이 종종 입는 가벼운 활동복 차림을 꼬집는 것이다.

“날 알아봤겠어. 네 머리색을 알아본 거겠지.”

“그런가.”

그들은 태가 어디 가지 않듯 가만히 서 있는 자세에서도 우아한 품위를 드러냈다. 이 때문에 얼굴을 몰라도 시중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고개를 조아린다.

‘인기척을 숨기지 않았으니, 피해 갈 거라 생각했는데.’

본디 ‘눈치’란 아랫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이자 초식 동물의 생존 본능과 비슷하다. 그들은 걸음에서 굳이 귀족임을 숨기지 않았으니 검사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길을 비켜서고, 하녀와 시종은 일찍이 멀찌감치 떨어져 걸었을 것이다. 그들을 보고 두려워하는 하녀는 문제가 없다.

‘많이 자라셨구나.’

그렇지만 소녀가 하녀 신분이 아니란 것을 헤르난데즈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전하’라고, 했지?’

그리고 의문을 품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카스토르를 알아보셨을까 하고.

* * *

“헉, 허억…….”

밭은 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를 본 공터에서부터 여기까지 꽤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다. 꺾인 허리를 바로 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내 살다 별…….”

말을 하는 데도 숨이 찼다. 쪼그리고 앉자, 그나마 숨쉬기가 편했다. 조금 늦게 억울함이 뒤따른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룰 위반이라고 아시는지? 1스테이지 최종 보스를 벌써부터 보내는 게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눈물이 잔뜩 고인 눈을 비비며 방금 상황을 반추했다.

‘젠장 맞을. 죽으라고 보냈으면 벗어날 힌트라도 주던가.’

아니면 경험을 쌓아 레벨 업할 시간이라도 주던가. 최소한 안전장치는 주고 내몰 수는 없는 건가?

공포영화 한 편 찌―인하게 본 것처럼 날 선 소름이 가시질 않았다. 신은 주인공 옆에다 떨어트려 주는 최소한의 호의는 쌩까 놓고서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버둥거리는 것조차 우스웠나? 마지막 발버둥조차 뭉개 버리는 불행에 감탄할 지경이다.

‘설마 내 얼굴을 기억하기라도 하지는 않겠지?’

아. 이럴 때 흔하디흔한 내 머리카락 색이 자랑스럽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불안 요소가 있다. 손을 들어 뺨을 어루만진다.

“뺨이 관건인가……. 아니 눈동자도.”

혼란한 머리와 다르게 몸은 착실히 본능을 따랐다.

“여긴 어디지? 약도에 그려진 곳인가.”

다행히도 어찌어찌 잘 도망친 것 같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꽁지 빠져라 줄행랑을 친 뒤라 지쳐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눈앞의 현실을 똑바로 주시했다.

……아무래도 다음 엿은 4황자가 보낸 것 같지?

“약도에 그려진 곳이 맞는데.”

정신없는 중에도 약도를 보고서 달린 이곳은 요상한 돌무더기가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막다른 길이다. 허망하고 허탈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난 내가 사는 궁전을 원했지 웬 모아이 석상에 고인돌 같은 유적지를 바란 게 아닌데.’

더구나.

“해가 지고 있어.”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궁전이 한바탕 뒤집어질 거다.

일단, 돌무더기들을 살폈다. 4황자가 정말 엿을 먹이려고 한 게 아니라면 날 이곳에 보낸 이유가 있겠지. 한참을 눈이 빠져라 살펴보던 나는 얼굴을 문질렀다.

‘아모르, 정말 엿을 먹이려고 한 거니?’

정말 이 망할 돌무더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형제가 골고루 날 곤란하게 만들 셈인가.

‘찐하게 엿을 먹었네.’

아찔한 높이의 비석을 노려보았다. 비석에는 뜻 모를 글자가 잔뜩 적혀 있다. 문득, 사수의 암호문 같던 피피티를 밤새워 수정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 암호문이나 이 비석인지 모를 암호문이나 나를 엿 먹이려 하는 수작인 게 분명하다 생각돼서인가.

“금지된 숲이네.”

저 멀리 보이는 숲은 황제와 그의 후계만 갈 수 있다는 금지된 숲임이 분명했다. 황제가 인정한 자가 아니면 영원히 길을 잃는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가진 숲 말이다. 이 때문에 시중인들은 숲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인기척이 없는 건 이런 이유에서겠지.

“어쩐지 방향이 이상하다고 했어.”

털썩, 주저앉아 허망하게 숲을 바라본다.

“저기 들어가서 콱 실종되어 뒤지란 소리일지도 몰라.”

하기야 생각해 보면, 오늘 뭐 하나 제대로 생각대로 된 게 없었다.

“얻은 거라곤 쥐꼬리만 한 정보인가…….”

눈을 끔뻑이며 흘러가는 구름을 보던 나는 문득 돌을 바라봤다.

“역사 교양서에서 저런 비슷한 것을 본 적 있는데.”

돌들이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는 모습은 광개토대왕릉비라거나. 커다란 비석 같이 오래전 유적을 떠올리게 한다. 대충 살펴보다가 안 건데 공터 중간의 거대한 비석을 가득 채운 언어는 신어神語였다.

‘저걸 뭐라더라, 콰란 어였나.’

멍하니 비석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구름? 아니, 바람으로부터 인간이……. ……하늘에서…… 자유…….”

고어라서 주술 구조가 엉망이었다. 보통 소설 속 주인공은 예상치 못한 재능으로 이런 데서 기연을 얻던데 신 양반이 그 흔한 언어 패치조차 주지 않았다는 건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겠다.

“흠. 거창한 신어로 새겨진 걸 보아 어떤 고고학적 유적이라도 되는 모양인데.”

너무 수준이 높아 겨우 열세 살짜리 신어 지식으로는 무리인 걸로 보인다.

‘끝으로 갈수록 쉬워지네.’

눈으로 쭉 읽어 가다 마지막 비문에서 멈췄다. 다행히 마지막 두 문장만큼은 나라도 읽을 만한 동화책 수준으로 내려와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내게 와 주오.」”

중얼거리며 읽어 보았다.

“「바라오니 그대는 서풍에서 씨앗을 자라게 하는 봄바람.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힘을 빌려주시오. 바람을 다스리는 당신은―」”

이미 제시간에 돌아가긴 글렀다 생각하며 끝자락을 읽었다.

“「제피로스.」”

그 순간 이끼가 걷히고, 무성하던 넝쿨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뭐야?”

난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기겁하며 일어난 곳에서부터 비춰 오는 빛무리가 보였다. 돌의 글자가 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파앗!

순간 꽃처럼 피어난 것이 태양같이 강렬하게 번쩍였고, 눈이 부셨다.

“도, 도대체 뭐야?!”

거대한 빛만으로 놀랄 일인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뜨면 반투명한 녹색 빛깔이 휘몰아치고 태풍처럼 커진 바람이 엉켜 들며 거대한 원을 이루었다.

몸이 흔들린다? 아니 땅이? 지축이 흔들리고 있었다.

눈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감각기관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눈이 바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 원 안에 작은 원, 그리고 두 개의 대각선에 다시 삼각형. 본 적 있다. 신학 시간에 가장 먼저 배운 신관들이 주술을 쓸 때 사용하는 신의 도형, 신의 문양이었다.

도형이 가까워진 순간, 빛이 확 덮쳐 왔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니, 본능적으로 지금 어디로 가야 할 것을 인지한 것처럼 난 정확히 테레나 궁을 떠올렸다.

남은 한 발마저 땅에서 떨어진 순간, 몸이 휙 사라졌다.

“……으, 머리야.”

눈을 뜨고, 낯선 숲에서 눈을 떴을 때, 주위는 향긋한 냄새로 가득했다.

“여긴 어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가 말도 안 되는 광경에 굳어 버린다.

다시 왔던 곳으로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고 똑같은 비석을 발견했다. 시선이 비석을 타듯 위로 올라간다. 눈을 비빈다. 아모르의 궁에 있던 것과 똑같지만, 색은 전혀 다른 비석이다.

“……맙소사.”

저 멀리 익숙한 지붕이 보였다.

“테레나 궁이잖아!”

눈앞의 비석은 분명 4황자 궁에 있던 것과 형태가 비슷했지만 조금 더 탁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를 굴린다.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순간 이동인가? 그래, 순간 이동.

“비석이 순간 이동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거라고?”

저 새하얀 외벽은 내 궁이었다. 일어나 조금 걷자 여기가 테레나 궁 뒤뜰과 멀지 않은 곳이란 걸 알았다. 눈이 흔들리는 소리가 있다면 이 순간 가장 격렬한 소리를 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테레나 궁의 뒤뜰은…….

“금지된 숲과 이어져 있지.”

잠시 뒤, 숲의 시작을 알리는 울타리 앞에서 멈춰 섰다. ……정말 테레나 궁이네. 정말이었어.

시선을 내려, 구기듯 쥔 치맛자락을 보았다. 궁전과 숲의 경계를 나눈 거대한 울타리는 혼자서 넘어갈 수 없었다. 구멍 사이로 기어 나온 나는 채 마르지 않은 이슬에 흠뻑 젖은 머리를 털었다.

꿈인가 싶어 돌아보면 비석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거진 나무와 키 작은 풀에 적절히 가려졌을 뿐 여전히 그곳에 존재할 것이다. 아연해진다.

이게 말이 돼? 최소한 이성과 합리를 믿었던 전생의 현대인이 비명을 질렀다.

삐롱―

청아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나무 위 작고 새하얀 새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이. 에이 설마. 지나친 생각이라며 피식 웃는다.

삐롤로로롱―

양손으로 눈을 가리며 새를 향해 있는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신경과민이야.

돌아가자 유모와 하녀장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반나절 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애나와 하녀들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더라―황녀가 피로한 몰골로 나타났으니 오죽할까. 나는 적당히 상대하기 좋은 유모의 품을 택했다.

“유모, 나 배고파. 저녁은?”

상황에 전혀 맞지 않은 천진난만함에 하녀장은 할 말이 많아 보였으나, 곧바로 수긍하고 물러났다.

“애나를 혼내지 마. 응? 그냥 또래랑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

이에 선량하고 다정한 이들은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으리라. 금세 이입한 유모가 눈물을 찔끔 찍으며 “가엾은 황녀님. 친구가 필요하신 줄도 모르고…….”라고 해서 수고를 덜었다.

다만 약간의 진실을 아는 애나만은 묘한 눈으로 날 보긴 했지만 슬그머니 다가온 그녀마저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하고 속삭였다.

지독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소파에 앉아 반창고를 떼어 낸 나는 뺨을 꾹 눌렀다가 떼었다. 몸을 누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기엔 생각해야 할 것이 아주 많았다.

“한나, 차 한 잔만 갖다 줄래?”

“네!”

나는 비틀거리며 책상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에서 숲의 향긋한 내음이 아직도 나는 것 같다.

신학사전에서 「제피로스」라는 이름을 찾아보았더니 네 명의 ‘바람의 신 중 서풍의 이름’이었다. 미신과 종교, 그 밖의 신앙에서 자유로웠던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뺨을 부여잡은 채 헛숨을 토해 냈다.

‘와, 정말 판타지구나. 그럼 내 인생은 서스펜스 모험물이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 뒤뜰에 순간 이동 비석이 있답니다! 히어로 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었답니다! 하하하. 주변이 이렇게나 멋진 판타지인줄도 모르고 말이야.

지난 6년간 너무 조용하게 살아서일까?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의 힘이고 뭐고 전부 적응이 되질 않으니 말이다.

사실 환생은, 책 속 빙의는, 미래가 쓰여 있는 일기장은? 나누어 볼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비상식적이고 놀라운 일뿐이다. 이것들 전부 판타지였지. 결국은 전부 같은 것이라 생각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앞으로 개 같은 것이라 부르자!

[821년 하베르미아의 달 5일

산책을 하다가 희고 아름다운 새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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