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금부터 인생 말아먹어 보겠습니다
“그때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라 생각했지…….”
“응?”
1초, 2초, 3초.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뒤에야 지금이 더는 그날의 교육 시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슨 방법을 찾아내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날이 참 좋네.”
따뜻한 찻물이 들어가고서 당황스럽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다. 의아한 얼굴이 둘. 뚱한 얼굴이 하나. 오라버니들과 레이 경이다.
딱 6년 전, 두 오라비와 함께하는 수업에서 여기가 책 속 세상이라는 진실을 알았다. 너는 곧 죽을 거라고. 그리고 황태자 카스토르. 아직 보지 못한 오라비이자 이 소설의 서브 남주가 황제가 되었을 때, 이 나라가 멸망한다는 것도.
보통 빙의물 속 주인공은 약 3개월을 혼란과 경악 속에 지내며 ‘어쩌다 이 불행한 운명에 빠진 불쌍한 나’에 빠져 허송세월할지 모르나 나는 달랐다.
앞으로 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려 보면 중학생이 성인이 될 시간 정도 아닌가? 적어도 아끼는 사람 정도는 빼돌리고 이 나라를 뜰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꿨다.
무용지물이 될 꿈을.
[821년 하베르미아의 달 10일]
일기장. 그 망할 기묘한 일기장이 예언을 보이면서 탄탄대로를 걷던 인생 설계가 엉망이 되었다.
이것을 믿느냐?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왜냐, 이미 난 환생이라는 기이한 일의 결과로서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카스토르가 날 죽일 거란다.
대체 왜? 솔직하게 말해서 이게 말이 되나 싶다. 생각해 보니 미치겠네. 걔가 날 왜 찾아와? 이곳은 낡고 허름한 궁전이었으며 난 사람들이 존재조차 잊어버린 보잘것없는 황녀였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닌데 현생의 업보는 딱 그 짝이네.’
날 여기로 보낸 신이 있다면 그 새끼는 체세포 분열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야.”
“왜.”
나 빼고 전부 로그아웃해 주세요. 혼자 있고 싶네요. 며칠 전부터 약속된 티타임이 전혀 반갑지 않다. 아니, 심정 같아선 전부 이 궁에서 내보내고 싶다.
“야. 아실리 로제.”
가뜩이나 심란한데 반갑지 않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오라비를 바라봤다. 삐딱하게 옆머리를 기댄 플뢰온이 말했다.
“너 무슨 고민 있냐?”
휙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까칠하고도 차가운 얼굴. 바로 옆에서 책에 몰두한 데인과 반대되는 인상이랄까. 깊은 바다를 꽝꽝 얼려 담아 둔 것같이 파란 눈동자는 서리로 만든 보석 같았다.
“야, 안 들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나를 아니꼽게 노려보고 있다는 거다.
“으응. 고민이 있긴 한데.”
“한데?”
네가 사라져 줬으면 하는 거?
“별거 아니야. 혼자 고민하고 싶네.”
그러자 플뢰온은 세상 불만 전부 담은 얼굴로 날 훑어보았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아주 그냥 죽을 것같이 울상을 해 놓고서 실실 쪼개는 이유가 뭐냐?”
유달리 나에 관한 일에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다.
“너 때문은 아니니까 걱정 마.”
“거짓말.”
“응?”
“지금 그 멍청한 연기에 속아 넘어가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대꾸하지 않아도 불같은 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했기에 얼른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골치 아픈 인간 같으니.
“오빠가 날 걱정해 주는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정말 심각한 일은 아니니 이런 집착은 곤란해. 내가 그렇게 좋아?”
“미쳤군.”
플뢰온이 혐오감을 쏟아 내며 진저리 치는 시늉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울컥해서 한마디 쏘아붙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일기장 탓에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이었다. 될 대로 되라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주워 삼켰다.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나중에 나 결혼하면 울겠네.”
“……청력에 문제 있냐?”
안 들린다, 안 들려. 못 들은 척하고 있자 그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야, 멍청한 병아리.”
“누가 병아리야.”
“머리가 샛노라니까 병아리지.”
고개를 기울인 플뢰온이 말했다.
“내가 너 고민하는 얼굴을 몰라? 투덜거리지 말고 말해. 나 화내기 전에.”
“그런 거 없어.”
쾅! 큰 소리가 난다. 아, 이 성질머리 어쩐 일로 오래 참는다 했다.
“망할 계집애! 사람 신경 쓰이게 울상을 지어 놓고 뭐가 아니야?”
터져 나온 큰 목소리에 뒤에서 대기하던 하녀들과 문을 지키던 레이 경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 정말 이놈의 분노 좀 조절하라니까.’
그러나 포악한데도 겉모습만큼은 완벽했다.
“야. 고민이 뭐냐고, 어?”
고민이라니, 너나 내가 주연은커녕 하다못해 조연도 되지 못한 엑스트라라는 사실을 말인가?
거기다 앞으로 3년 안에 우리 모두 죽는다고? 너의 배다른 형제가 난놈 중의 가장 미친놈이라, 홀딱 반한 여자에게 미쳐서 나라가 멸망한다는데.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뭐야? 그 눈은?”
알면 어쩔 거고. 알아서 어쩔 건데. 삐딱한 생각이 치켜든다. 일단, 쟤는 어디서 개소리냐고 뺨을 꼬집을 거다. 하긴 저 자존심이 강한 놈이 퍽이나 믿겠다.
“지금 너 때문에 티타임이 엉망이 되었단 건 아냐?”
“엉망이 되었다니. 데인은 쭉 책만 읽고 있잖아.”
플뢰온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몇 살 오빠랍시고 꼭 어른같이 굴었지만 저놈은 태양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 거라 믿는 어린애인 데다가 결벽증까지 있는 오만한 인간이자 열 받으면 펄펄 날뛰는 열여섯 살이었다.
“야.”
제멋대로 구는 어린애 하나 다루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말 안 하면 네가 그토록 아끼는 하녀 중 하나 데려다 매질을 한대도?”
문제는 이거다.
“제발, 내 궁 애들 괴롭힐 생각 마.”
고작 열여섯 살인 주제에 퍽 패악을 부려 사람을 위협하는 각종 방법을 안다. 이건 다 황족 교육이 불러일으키는 선민의식의 폐해다.
“흥! 네가 얌전하게 굴면 나도 하지 않아.”
“거짓말, 나 몰래 괴롭히려고 했잖아.”
플뢰온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지난번 일을 말하는 거라면 네가 불렀을 때 제때 내 궁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지. 왜 내 탓이야?”
개개인의 특성을 한데 묶어 집단의 것으로 속단할 생각은 없지만, 철없는 재벌 2세의 보편적 이미지를 뽑아내면 딱 이놈 같지 않을까 생각은 한다.
“말해 두는데, 나야말로 천한 것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드레스를 고르느라 늦을 거라고 미리 전했는데도 정원을 샅샅이 뒤졌다며? 넌 걱정이 너무 지나쳐.”
이거 한숨이 나오는데. 분명, 지금 자기 행동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겠지. 찻잔을 옆으로 밀어 두고 그를 살살 달래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날은 왜 그랬어? 내가 없어졌을까 봐 걱정이라도 했어?”
“누가 걱정을 한다는 거야?”
“오빠가.”
난 아이의 미소를 만들어 냈다.
“또, 또 노려보지. 이러니까 말을 못하는 거야. 솔직하게 말해서 오빠한테 털어놓으면 오빠는 늘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잖아.”
“내가?”
“그래. 입만 열면 못난이. 꼬맹이. 내 궁 애들을 괴롭히는 심술궂은 오빠한테 해 줄 말은 없다는 거지.”
“하하. 이렇게 사랑스러운 소릴 지껄이는 입이 어느 입이지?”
눈은 빌어먹게도 살벌한 주제에 얇은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무슨 고민인지 말하기 싫다. 하녀를 응징하는 거도 싫다. 그럼 네 하녀들 말고 널 직접 응징하면 되겠군?”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그는 우습다는 듯이 따라와 내 뺨을 꼬집었다.
“요 입이. 이쁜 말만 골라 하지? 엉?”
“꺅! 우브브.”
그의 손에서 뺨이 쭉 늘어났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흘렀다.
“그만해!”
막 책에서 고개를 든 데인이 플뢰온을 떨어뜨렸다.
‘어떻게 된 게 오빠라는 인간이 힘 조절도 안 할 수가 있지?’
이런 식으로 패악을 부리는 놈은 절세 미남이라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거다. 정말이지 책 속의 엑스트라가 이렇게나 지랄 맞고 흉악할지 누가 알았을까!
“괜찮아?”
“전혀.”
“이런, 빨개졌네.”
“……흐엉. 오라버니.”
플뢰온이 눈썹을 휙 치켜세웠다.
“너, 왜 저놈은 오라버니고 난 쟤야?”
“형.”
웃기시네. 대우는 대우하고 싶어지게 행동하고 나서 바라는 거지. 그러니 다물어 줬으면.
“형, 몇 번을 말해. 아실리는 우리보다 훨씬 어린 여자애라니까.”
데인이 차분한 어조로 제 형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레이, 넌 이런 걸 좀 보면 말려.”
그는 옆에 서서 지켜보고만 있던 검사를 나무랐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고요히 서 있던 레이 경이 슬쩍 웃었다.
“제가 보기에 두 분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되는 감정이 싹트고 있는 중 같아서요.”
불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엷게 휘어진다.
“거짓말. 그냥 귀찮았던 거잖아.”
“달리 표현하자면 그렇기도 하죠.”
그는 타박에도 뻔뻔했다. 막 나가는 검사의 태도에 데인은 익숙하다는 듯 혀를 몇 번 차고 말았다.
“네놈은 뭘 믿고 건방진 거냐?”
플뢰온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레이 경은 두 황자를 포함해 나를 지키는 호위 검사였다. 성실하고 진중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진지함이라곤 날 때부터 고스란히 배 속에 두고 온 인간이었다.
굴러가던 그의 남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며, 희미하게 가늘어진다.
“저런, 황녀님. 많이 아프시겠네요.”
“너, 그런 말 할 거면 영혼을 담아서 해.”
나는 네가 위험으로부터 지켜야 할 경호 대상자거든?
“봉급 도둑.”
그러자 스물도 채 되지 않았을 검사님이 슬그머니 낯을 깔며 옅게 웃었다.
“직무 태만이야.”
“이런, 자택에서 다음 발령을 기다려야 할까요?”
너 속으로 비웃는 거 다 안다. 태도 불량 검사 같으니라고.
‘뺨부터 식혀야겠다.’
탁자 끝에 걸린 종을 흔들자 한나가 잽싸게 물에 적신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세상에. 황녀님, 괜찮으세요? 어떡해. 잘못하면 멍들겠네!”
이미 조금 전부터 발을 동동 구르며 이쪽을 보고 있던 한나는 속상함을 가득 담아 속닥였다.
“황자님은 왜 힘 조절을 하지 않으시는 거여요…….”
“쉿. 괜찮아, 한나. 목소리 낮춰.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 봐.”
아무리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런다 해도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이런 소리는 좋지 않다. 특히나 대상이 윗사람일 땐 더더욱. 그러나 그보다 플뢰온이 빨랐다.
“아실리!”
플뢰온이 한나를 힘껏 노려보았다. 히익, 한나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나는 얼른 한나의 몸을 뒤에 숨기며 뒤로 밀었다.
“얼른 가 봐.”
그녀가 허둥지둥 고개를 꾸벅이고 뒤로 물러났다.
“너 또 천한 것에게 무르게 구는구나.”
“내가 뭘.”
찬 손수건으로 뺨을 식히며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몇 번을 말해야 그 멍청한 머리로 알아들을 테냐. 네가 한결같으니까 쟤들이 너를 한낱 어린것 취급을 하는 거야!”
“오빠야말로 이상해. 왜 그렇게 내 궁 하녀들을 싫어해?”
삐딱하게 노려보는 눈은 보석을 박아 놓은 듯 각도를 따라 하늘색부터 남색에 걸쳐 푸른색의 신비한 향연을 담은 빛을 냈다. 아직 채 성인이 되지 못한 소년의 미모는 이미 완성형이었다.
“당연한 거다. 넌 개돼지에게 사과를 하냐? 사과나무와 말을 해? 같지 않으니까 구분 짓는 거다.”
“그들은 사람이야.”
“흥. 누가 사람이 아니라고 했냐? 천한 것들에게 잘해 줄 필요 없다고 했지.”
“……그 고약한 입방정은 언제 고친대?”
“뭐?”
“네게 꼬집힌 뺨이 너무너무 아프다고 했어.”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 했던가. 그럼 눈매는 성질을 반영하는 그림자다. 플뢰온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고집스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우아한 미남인데, 눈매는 사선을 쭉 그어 놓은 것처럼 사나웠다. 잘생기긴 잘생겼는데 못된 악당 상이다.
“쯧쯧. 잘해 주면 은혜를 모르고 기어오를 족속이 천민인 걸 왜 모르는 거냐. 위엄을 세우기는커녕 이토록 물러서야……. 네가 아랫것과 어울려 주니까 네 궁에서 방정맞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거야.”
“사람 사는 곳에서 웃음소리 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뭐?”
아차. 난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혹부리 영감처럼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은 6황자의 성질은 이미 유명했다.
<네가 내 동생이라고?>
그가 지금보다 어리고 나 또한 어렸을 때, 오라비는 지금과 비교도 못할 만큼 훨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날 자기 어머니 앞에서 아주 솔직하고 적나라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징그러워. 괴물 아냐? 얼굴 반이 못생긴 상처잖아.>
그때는 뺨 상처가 지금보다 더 우글우글하게 일그러져 있을 때였다. 귀한 것만 보았을 어린 황자의 눈에 충분히 징그러울 만했겠지만. 당시 6황비님은 ‘그래도 오빠이고 3살이나 많은데.’라는 판단으로 플뢰온이 배려를 보이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 알았다.>
그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숨길 줄 몰랐을뿐더러 오히려 순수했기에 잔인했다.
<쟤가 전염병 걸렸으니 불쌍하게 여기라던 천민이야?>
그 말에 나를 제외한 모든 어른이 쩍 얼어붙었음은 물론이다.
<뭐? 황녀? 어마마마, 날더러 이딴 못생긴 애를 동생으로 삼으라는 거였어? 싫어.>
소년은 제 모친에게 이끌려 사라졌다. 당혹과 곤란, 여상치 않은 첫인상을 남기고.
사실 전직 어른으로서 충분히 넘겨 줄 수 있는 말이었지만. 만약 내가 정말 아실리 로제였다면 어땠을까?
상처 받았겠지.
6황비님은 플뢰온에게 대가를 치르게 했다.
<야. 못생긴 애. 이거 받아라.>
그리고 다음 날부터 플뢰온이 찾아왔다. 누가 봐도 억지로 온 듯한 낯으로.
<어마마마가 주래.>
<이건 어마마마가 안 쓴대.>
<어마마가 너 주라고 성화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