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금수저인데 도금이다 (2/47)

1. 금수저인데 도금이다

어릴 적 나는 리본이 잔뜩 달리고, 치맛자락은 부풀린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이 꿈이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전제 정치가 몽땅 사라진 서울에서 왕의 딸이 더는 직업적 가치를 지니지 못함을 깨달았다.

내 장래희망은 돈 잘 벌고 노후가 든든한, 달리 말해 오래오래 해 먹는 공무원이 되었다.

“우린 그냥 주옥된 거야. 인생 뭐 있냐?”

“없지.”

“승진이 다 뭐야. 결혼한 게 죄입니까? 애 낳으면 일 못 하냐고요?대체 국가가 내게 해 준 게 뭐냐? 응? 윤 대리님 말해 봐라. 우리는 왜 사냐? 와이? 왜―애!”

“답 없는 문제 묻지 마시고 식기 전에 마시자.”

“흐흐. 관우세요……?”

꿈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처음 거대하게 꾸던 꿈은 시간에 쫓기고 현실을 쫓다 풍화되어 아주 작아졌다. 대통령이 꿈이던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가 일찌감치 게임 BJ로 전향한 것만 봐도 그렇고.

그리고 10년 뒤 그 친구는 게임 BJ 활동이 쫄딱 망해 말단 사무직이 되어, 나와 술 한 잔 기울이는 사이가 됐다.

“흑, 망할 세상. 망해 버려라. 싹 다 망해 버려라…….”

소시민은 세계 평화보다 나 하나 배불리 먹는 게 짱이다. 그러나 현실과 타협했다고 하여 꿈을 완전히 버린 것과 같진 않다. 10억을 벌어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면 지금은 줄여서 딱 천만 원으로. 아니, 하나님 부처님 부탁이니 딱 로또 3등 정도만 시켜 달라는 것으로.

어른이 된 아이는 현실로 꿈을 끌어내려 거래한다.

“흑흑, 영국의 마법학교님 제게도 부엉이를 보내 주세요…….”

“취했구나. 아주.”

털썩 고개를 거꾸로 처박는 친구나 나나 꿈이 죽어 버린 어른이었다.

“……아. 넌 꿈이 뭐였냐?”

“음……, 공주님?”

TV 속 시끄럽게 떠드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면서 반지를 찾아 떠나는 신비의 여정을 꿈꾸지 않는다. 딱 그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러니까 오래전 꿈꾸었던 예쁜 공주님이나 남편은 잘생긴 드래곤이라는, 이야기 속 꿈 따위는 일찍이 버렸단 말이다.

그런데 이건……. 어떤가.

―821년, 열세 살. 하베르미아의 달.

“황녀님!!”

머리가 지끈 아프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기 때문일까. 복잡함을 담아 내려다보면 하녀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황녀님! 어디 계세요, 황녀님!!”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그녀의 드레스 끝에 잔풀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수선을 피우며 부르는 이름은 요 몇 년간 익히 들어온,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콜록, 황녀님! 황녀님!!”

숨죽인 채 보고만 있으려니 미안하고 안타까운 기분이지만. 그럼에도 턱을 괴고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어느 날 강제로 다음 생이 주어졌을 때 기분이 어땠더라…….’

참 오묘했다. 신기했고.

하지만 놀라움은 얼마 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하…….”

다시 태어난 곳은 지하철도 없고 비행기도 없으며 편의점도 없는 서울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 신관이 있고 황제가 있는 그야말로 판타지 세계의 나라. 나는 끝내 안식을 받지 못했다.

“황녀님!!”

이 모든 것을 현실로 인정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어떤 꿈도 똥 싸는 장면을 이리 자연스럽고 절절하게 표현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유아 변비였다. 어머나, 이게 뭐야. 전혀 로맨틱하지 않아…….

노력이 무색해지는 기분과 함께 깨달았다.

‘돌아갈 방법은 없구나.’

흔한 차원의 문도 없이 훌쩍 판타지 세계로 넘어왔건만 억울해졌다. 그러나 살았던 생이 아깝고 억울한데, 곰곰이 곱씹어 보니 원래 세상에서 난 만족한 삶을 살았나? 회의감이 들었다.

잘 버는 삶은 아니었다. 하나 남은 가족과는 데면데면했으며, 잘 다니던 직장마저 성희롱 상사 때문에 때려치우고 다 늦은 나이에 밥줄 끊겨 막막하던 참이었다. 마지막이 꽤 끔찍한 기억이었으니 잠시 잊고 환생 정도로 생각하자고 억지로 이해하려 했다.

따지려고 해도 어떡해? 내 삶에는 불량 택배처럼 환불이나 교환도 없는걸. 나를 여기에 데려다 둔 신은 외면도 못하게 만들었는데. 간절히 빌어도 불가한 소통. 일찌감치 어른의 포기를 내세웠다. 그래요. 한번 살아 봅시다. 그런데 대체 이름 모를 세계에서 내게 새 삶을 주고 무얼 하라는 걸까?

“흑, 어디 계신 거예요! 제발……!”

‘그만 내려갈까.’

어영부영 엉덩일 털어 내며 일어난다. 날 찾아 헤매던 하녀가 안타깝게도 이제는 울먹이고 있었기 때문에 외면하기 어려웠다. 발을 툭툭 굴리다 발끝에 걸린 솔방울을 톡 찼다. 깜짝 놀란 여자가 좌우를 열심히 살핀다.

“여기야.”

흐트러진 차림새의 그녀는 깊은 안도의 숨을 토해 내며 땀이 눌어붙은 이마를 훔쳤다.

“드디어 찾았어요……. 제가 정말, 흐으윽, 흐끅. 얼마나 찾았는데 정말이지, 여기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양심이 콕 찔려 눈을 피했다. 그녀는 얼른 내게 숄을 둘렀다.

“아이고, 이게 뭐야. 속옷만 입고서 돌아다니는 건 다섯 살 아기씨도 하지 않으신다고요! 흐헝.”

“속옷이라니, 그냥 얇은 원피스인걸.”

“속옷이에요!”

“그보다 울지 마, 한나. 뚝.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잖니. 눈물은 피부 노화를 빨리 불러온단다.”

“제발, 나이답지 않은 말 좀 하지 마세요. 황녀님은 아직 열세 살이시라구요!”

털썩 앉은 그녀를 달래 주려 따라 앉으려 하니 풀물 든다며 앉지 못하게 한다. 탁월한 직업 정신이다. 어쩔 수 없이 서툴게 토닥인다.

“잘못했어.”

팔자에도 없는 다 큰 아가씨 달래기를 하게 생겼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베이시에게 혼날까 봐 그래?”

“훌쩍. 아니요. 이미 전 하녀장님께 미움받았을 거예요. 황녀님. 어디, 어디 계셨던 거예요? 나무엔 왜 올라가셨어요?”

“하나씩 물어봐. 하나씩. 성문을 지키는 한스를 보러 가려고 했어.”

너희가 하도 잘생겼다고 자랑해서.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면 미남을 거느리고 산다더니.’

전부 거짓말이었다. 난 아직 단 한 번도 성인 남성을 본 적이 없다. 판타지 세계에 널린 게 미남이라는 기본 법칙은 내게 통하지 않았다. 내가 사는 궁에는 여자만 스무 명이었다.

근처 남자라곤 여길 지키는 병사뿐이란다. 듣자하니 여기서 20분쯤 걸어가면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겨우 여기까지 나온 걸로도 울먹이는 한나가 있는 한 어림도 없는 일인 듯했다.

한나의 시선이 날 향했다. 눈물이 가득 맺힌 푸른 눈동자는 무척 예뻤다.

“걱정했지?”

“훌쩍. 말이라고 하셔요.”

“미안. 곧 돌아가려고 했어. 정말이야.”

“…….”

“진짜라니까.”

근처 연못에 손수건을 적셨다. 이때 머리를 묶었던 리본이 떨어졌다. 리본을 줍다 말고 나는 수면을 응시했다.

“흠…….”

손가락에서 떨어진 물이 파문을 그린다. 일그러졌다가 펴지기를 반복하는 수면은 거울처럼 반사하며 다시 그림을 그렸다.

연못 속에 비친, 금발에 자색 눈을 가진 소녀.

‘내’가 있었다.

이윽고 잔잔히 가라앉은 수면이 거울처럼 다시 상을 반사한다.

“황녀님?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냐.”

세상은 내게 편안한 삶을 영위할 버프는커녕 오히려 내게 ‘덤’ 하나를 주었다.

“얼굴에 뭐가 묻어 있나 해서.”

긴 한숨 끝에 예쁘장한 얼굴의 흉을 긁적인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 가혹한 거 아닐까? 원래 세상의 나는 좀 허덕이며 살았어도 얼굴은 말짱했는데.

관자놀이에서 시작해 열십자 모양으로 뺨을 쭉 가로지른 상처.

이러니 적응을 못 하지. 환생하고도 쭉 계속되는 유리감은 다 이 얼굴 때문이다. 내 얼굴에는 긴 흉터가 있다. 황궁의 내로라하는 신관마저 외면한 저주라고 했나.

명의라던 신관이 그랬다. 평생 아물지 않을 거라고.

“돌아가자.”

내 편 하나 없는 회사를 나올 때 나는 충분히 세상에서 제일 불행했다. 공무원 시험에 똑 떨어졌을 때는 간절하게 블랙홀이 있길 바랐었지.

솨아아―

“바람이 부네요.”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남김없이 미련을 버렸다. 친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우리 현실적으로 살자. 현실을 보자.>

실직한 날 인생에는 돈벼락도 왕자도 용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죽음마저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적인 2회차 인생 따위 꿈도 꾸지 않았는데.

“황녀님. 돌아가서 옷부터 갈아입으셔요.”

“그래그래.”

그래, 감상이야 어땠든 모날 것 없는 인생이었다. 커다란 궁, 하녀가 붙어 있는 생활, 머리부터 발끝까지 향유로 반짝거리는 몸과 달마다 나오는 돈(품위 유지비)까지. 엄청난 신분 상승이다.

얼마 전에는 정략결혼으로도 써먹지 못할 거라는 얘길 들었다. 얼굴에 하자가 있다고 말이다.

이득 아닌가. 독신 황녀라니 실로 돈 많은 백수잖아……? 축복 받은 하자에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받아들였지.

보이지 않는 부모나 얼굴도 모르는 나머지들이야 그러려니 했다. 이미 모두가 버려진 어린 황녀를 안쓰러워하며 아껴 주었다. 가까운 곳에 사는 7황자와 6황자가 놀러와 딱히 심심할 겨를도 없었다. 부족함이 없었다.

‘꿈꾸던 것과는 너무 다르네.’

보통 판타지 세계로 넘어갈 때, 탐독했던 소설 주인공은 빼어난 미녀거나 머리카락색이 특이해서 전 대륙에 나 하나밖에 없다거나 하던데. 혹은 남주 1 정도 될 법한 어마어마한 미남이 대기하고 있다가 당신은 내 운명입니다! 하고 가로챘던 것 같았는데.

마치 운명이 내게 약을 올리듯 궁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가족은 오빠 둘과 늙은 유모뿐.

피식 웃었다.

“이건 혈통만 좋은 빈 강정이잖아.”

불만을 가져도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불행에 사로잡히기에 아직 난 살아갈 날이 너무나 기니까. 그래도 그나마, 낯선 이 세상에서 수저 하나만은 번쩍번쩍 금으로 내려 줬다는 것을 위안 삼았다. 골드 수저, 이게 어디냐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저 사라졌지만.

* * *

유모의 잔소리는 강력하다. 나를 대신해 나이 든 유모에게 탈탈 털리고 있을 한나에겐 유감스럽지만 스물을 훌쩍 넘긴 나이라도 잔소리는 듣기 싫은 법이다.

“산책이 뭐 그리 큰 죄라고 이럴까.”

모시는 황녀가 이딴 어른이라서 미안하게 됐다.

‘여기 사람들은 애를 너무 과보호해.’

그게 애를 망치는 지름길인데.

“황녀님,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으응, 곧 나갈게!”

눈동자를 살짝 굴려 거울 속 순진하게 껌뻑이는 어린애와 눈을 마주쳐 보았다. 좋게 말하면 올망졸망하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오동통하니 귀여운 어린애.

곱게 늘어뜨린 내 머리카락은 엷은 금색이다. 검정이니 흑갈색이니 어두운 계열이 태반을 차지했던 전생과 다르게 이곳 사람들의 머리칼은 대체로 찬란한 총천연색이었다.

눈동자는 보라색. 빛을 그대로 투영하는 맑고 투명한 자색 홍채는 모친을 쏙 빼닮은 색이라 했다.

한숨을 쉰다.

“고르고 골라 보내 준 곳이 겨우 책 속 세계라니.”

올해로 환생한 지 딱 10년 하고도 3년째지만, 나는 일곱 살까지의 기억이 없다. 적응 기간이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과 현생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오락가락했던 탓에 환생하고도 오랫동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주변에 관심을 두는 일에 둔했고, 잘 웃지 않았다. 이런 모습이 내게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사용인들의 과보호를 불렀다. 이를테면 발달 장애라거나?

거참 말 트는 속도가 조금 늦다고 취급이 너무하지 않은가? 이 오해는 지금까지 이어졌고, 나는 과보호를 받았다.

이 때문에 환생에 대한 자각은 더 늦었던 편이었다. 거기에 더해 책 속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오래 걸렸다. 물론 주연과는 동떨어진 역할이라는 점도 깨달음을 늦추긴 했지만.

어쨌거나 결국 결론은 책속에 환생했다는 것인데, 깨닫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던 한나와 복도를 걸었다.

“이쪽이에요 황녀님.”

“응.”

나는 막 내 방을 나서는 한나를 따르며 대꾸했다. 이들 때문에 깨달음이 늦었지만, 이들을 원망하진 않는다. 이들의 보호 덕분에 이 세계가 소설 속 세상임을 알고도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황녀님?”

나는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왜 한나.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뇨. 말이 너무 없으셔서 무슨 일이 있나 했어요.”

“무슨 일은.”

우리는 지금 궁 대청소를 위해 이동 중이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청소하는 게 싫어지신 거예요? 그럼 테렌테 궁으로 가실 수 있게 준비할까요?”

붕붕 고개를 젓는다.

“아냐. 갈래. 가고 싶어.”

여기 예쁜 하녀에게 여긴 사실 책 속이야 하고 말하면 어떨까. 사실 너와 나는 이름도 없는 엑스트라란다. 멋지지?

‘나의 병명에 발달 장애와 더불어 아동 망상증이 추가되려나.’

정말, 신은 야속한 작자인 게 분명하다.

“황녀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으응, 잠깐 무서운 생각을 해서 그래.”

“무서운 생각이요?”

어느 못된 신을 생각했지. 나는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악몽을 꿨거든.”

“어머. 세상에 악몽이요?”

“응.”

“저런, 내일 테스랑 신관님께 가서 약초를 받아 올까요? 꿈도 꾸지 않고 자게 된대요.”

“아니, 그건 괜찮아 고마워, 한나.”

잠시 뒤 우리는 2층 방 앞에서 멈춰 섰다. 머뭇거리며 내 손을 잡은 한나가 ‘정말 괜찮으신가요?’ 하고 물었다. 황녀에게 청소를 시키는 게 영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청소라고는 하나 황녀님께서 나서실 필요는 없는데……. 정말로요…….”

“아냐. 나 할 수 있어.”

여기에 날 떨어트려 놓은 신의 잔상을 지워 내며 씩씩하게 외쳤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테레나 궁의 대청소를 맞이해 나서지 않을 순 없지.

한나는 간편한 옷차림을 한 나를 불안하게 보다가 한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경첩이 낡았나 보다.’

끼이익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삐걱 열린 문 뒤로 안을 들여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내게 주어진 궁이라지만 어린애 발로 돌아다니기엔 너무나 넓었고, 내 시녀들도 많은 수가 아니었기에 놀고 있는 방이 많았다. 그래서 오늘 보게 된 곳도 처음 보는 방이었다.

두꺼운 커튼 때문인지 방은 으스스했다.

“조금 춥다.”

“그렇죠?”

커튼 사이로 잘린 채 들어온 햇빛이 아스라이 바닥을 적시고 부유하는 먼지가 그대로 보였다.

“오랫동안 안 쓰였던 방이니까요.”

한나는 괜히 소름이 돋는다며 성큼 걸어가 커튼부터 걷었다. 눈부시게 스며들어 온 빛 아래 환해진 방 안은 예상과 다르게 꽤 깨끗했다. 아무래도 평소 틈틈이 청소했던 모양이었다.

“굉장히 깨끗하네. 여긴 계속 청소했나 봐?”

“아, 황녀님은 이곳을 처음 보셨죠? 이곳은 레비티나 님께서 머무르시던 방이에요.”

“레비티나……?”

“아올레시아 전하의 본명이십니다.”

아. 짧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생모가 그런 이름이었지.’

본래 이름보다 다른 이름이 유명해서 잊고 있었다.

후궁 아올레시아.

이곳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8번째 후궁이자 날 낳은 생모이다. 딸이 태어나자마자 안아 보지도 않고 유모와 하녀들만 남겨 나를 키우게 하고 중앙 궁으로 떠난 여자이기도 했지.

주인 잃은 방을 새삼 둘러본다. 기구해 보이지만 사실 사랑이 굳이 필요 없는 껍데기만 열세 살인지라, 크게 와닿는 건 없었다. 모든 부모가 꼭 자식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방은 넓었지만 방치된 곳이 으레 그렇듯 조금 을씨년스러웠다. 물론 중요한 물건은 전부 가져갔을 테니 중간 빈 공간들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와 별개로 전반적으로 휑뎅그렁했다.

내가 지내는 방을 떠올린다. 거기에 비교하면 이 방은 기본 장식만 되어 있는 기둥이 화려해 보일 지경이다. 어쩐지 아름다운 생모와는 어울리는 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녀님, 저는 바닥을 닦을 테니 황녀님께서는 책장 정리를 해 주시겠어요?”

“책장?”

“네. 여기 있는 책들은 아올레시아 님의 물건이라 함부로 손댈 수가 없거든요.”

한나는 가벼운 일들을 골라서 내게 주었다.

“재밌겠다!”

책장 정리를 부탁했지만, 사실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책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으니까. 책들 또한 무슨 처리를 했는지 전부가 새것처럼 반짝반짝했다.

‘걸레보다 책장이 더 깨끗하겠네.’

그냥 이거나 보면서 놀라는 소린 것 같다. 한편으로는 한나를 이해했다. 누가 주인에게 일을 시키겠나? 그래서 얌전히 책을 빼며 제목을 읽으며 놀았다.

불안한지 몇 번 힐끗대던 한나는 드디어 안심했는지 걸레를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저건 너무 대놓고 안심하는 거 아냐? 난 꽤나 얌전한 아이일 텐데.”

하녀들은 가끔 귀찮을 정도로 과보호가 심했다. 내가 차를 마시겠다면 식기를 기다렸다 건넸으며, 산책이라도 한답시고 연못에 가겠다면 단체로 졸졸졸 쫓았다. 하긴 이해는 한다. 차에 혀를 데인 적도 있고, 비단잉어를 가까이서 보려다 연못에 빠진 적도 있지만.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잖아?

4학년 2학기 졸업반이 돼서도 저장 버튼을 깜빡해 피 같은 논문을 날릴 때가 있고, 대리 3년 차에도 업무 전화에 어버버거릴 때가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완성을 위해서는 무수한 실패가 따르게 마련이지 않을까? 암, 이런 실수를 거쳐 한 뼘 성장하는 법이지.

“흐음, 책이나 볼까.”

책장엔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크기와 색별로 빈틈없이 꽂힌 책에서 주인의 성격이 보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훑으며 내려간다.

“『제국의 꽃』, 『꽃비 축제와 라이어티의 꽃』, 『크샤스의 눈물』, 『그 검사님을 잡지 마세요』 뭐야, 소설인가……?”

거의가 소설, 아니면 제국에서도 유명한 축제인 꽃비 축제와 관련된 책들이다.

그렇게 맨 밑의 백과사전까지 훑다가 돌연 묘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손끝으로 책장을 훑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한 권을 뽑아 보았다. 촤라라락 책을 넘겨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이 평범한 책이었다.

‘대체 뭐였지……?’

다시 꽂다가 비로소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크기별로 빈틈없이 꽂힌 책장의 중간이 유독 불룩 튀어나왔던 것이다.

“오호라.”

그래, 이런 이벤트 정도 있어 줘야 판타지 세계지. 책을 와르르 꺼냈다. 그러자 숨겨 놓은 물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기장?”

내 손바닥 두 개를 합쳐 놓은 듯한 넓이의 표지에는 제국어로 ‘파레데 상단 특제 다이어리’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로 용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가 쓰던 걸까? 그녀의 책장에서 나왔으니 응당 그럴 것이다. 왜 숨긴 걸까? 누가 볼까 봐? 하지만 작정하고 숨겼다기에는 허술한 방법이다.

“혹시…… 교환 일기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하녀들이 돌려 읽는 소설 중에 검사와 지체 높은 귀부인이 교환 일기로 사랑에 빠지는 얘기도 있던데.

초상화로 본 미녀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교환 일기와는 쉬이 연결되지 않는데. 일기라는 건 본디 비밀스런 성질의 것이다. 아울러 사용인들은 주인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숨기지 않았더라도 손대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그럼 어째서 일기장을 굳이 숨긴 걸까? 생모가 머물렀을 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까? 낡은 가죽이 자아내는 신비하고 은밀한 분위기에 침을 꼴깍 삼키며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실망도 잠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손을 바라봤다.

일기장은 텅 비어 있다. 깨끗한 양피지의 상태로 보아 새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낡은 가죽이나 금박이 벗겨진 모서리에서 이것이 새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쓰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대로 보존된 게 아닌 것 같단 느낌이 드는데.’

혹시, 비밀이 숨어 있는 걸까? 영화에서처럼 불에 그슬리거나 특수한 빛을 쬐면 글씨가 나타난다거나.

마침 낡은 벽난로에 한나가 지펴 두고 간 불씨가 있어 그슬려 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끙. 쉽지 않네.”

하긴 이곳은 신력이라는 힘이 존재하는 세계니 과학으로 접근하긴 어렵겠다 싶었다. 이후 종이를 구겨도 보고 여기저기 꾹꾹 찔러 보았지만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끙, 헛다리 짚었나?”

나 혼자 신난 거고 사실 아무 쓸데없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두고 갔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왜일까. 그냥 보낼 수가 없다. 일기장을 찾았을 때 묘한 느낌이 계속 이어진다. 마치 여기에 뭔가 있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그래도 혹시, 이거 엄청 중요한 거 아닐까. 그 왜, ‘아올레시아’라면. 가능성 있는데.”

난 생모를 잘 모른다. 낳고서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생모도 날 모를 것 같다. 초상화 속의 생모는 우연히 마주쳐도 그냥 지나칠지도 모를 만큼 나와 닮지 않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을 하나의 기호로써, 전달 요소로써 알고 있다.

‘소설 속 인물 ‘아올레시아’로서 말이지.’

이름이 아주 많은 여자였다. 뱀의 부인. 황제의 옆에서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여자. 마녀. 후궁이면서 다음 황제의 조력자.

여기서 다음 황제란 훗날 폭군이 될 소설의 서브남이다. 소설 제일가는 미친놈이기도 했다. 그런 위험한 남자와 전략적 동맹을 맺은 여자다. 독자에게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는데, 어마어마한 악당 캐릭터였기 때문이었지. 표현만 봐도 그랬다.

눈짓 하나로 뭇 이성을 홀리고 미소 하나에 간과 쓸개마저 내주게 하며 머리는 비상한 데다 노련하며 발밑에는 시체뿐이라더라. 그녀 혼자 일으킨 분란만 족히 다섯 번은 넘을 거라 본다. 그만큼 책 속에서 파급력 있는 여자였다.

유모와 하녀들은 쉬쉬하지만. 나는 버려졌다.

그녀는 낳은 자식을 한 번도 보지 않음으로써 태도를 분명히 했고, 나는 나와 생모를 무관한 인물로 여겼다. 책 속 그녀를 아는 나는 그녀가 능히 아이를 버릴 수 있다고 보니까. 여러 이름과 기억을 종합했을 때 뽑아 낼 수 있는 성질은 단 하나다.

아올레시아는 비정한 여자라는 것.

하지만, 그런 여자가 비밀스럽게 일기를 남겼다?

“꽤나 궁금한데 말이야.”

친모는 황제의 궁에 기거한다. 칼타니아스의 모든 황족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의무 교육을 받는데, 수료할 때까지 대외 활동이 불가하며 황제의 인가 없이 자신이 받은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요컨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내가 친모를 만나러 중앙 궁으로 갈 수 없다는 거다. 그러니 이 일기장에 관해 그녀에게 묻는 것 또한 불가능하단 소리지.

‘그럼 이걸 어떡한다?’

나는 아올레시아 방 한구석에 있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빈 낱장만 넘겼는데, 너무 집중한 사이 누군가 다가온 것도 느끼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데인?”

언제 왔을까 싶은, 예쁜 소년이 있었다.

“응. 업어 가도 모르겠더라.”

그는 꿀 같은 목소리와 함께 눈을 가늘게 접으며 생긋 미소했다. 세상에, 오늘도 혼을 쏙 빼놓게 아름다운 미모는 여전하네.

습관처럼 뺨을 만지려는 내 손을 잡아챈 데인은 나를 향해 설핏 미소 지었다.

“황비님 침실에 들어온 무례를 용서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아서 걱정했어.”

그 말과 함께 내 손등에 입을 맞춘 데인이 살짝 웃었다. 애교스런 몸짓에 피식 터지고 말았다.

“걱정했어?”

“응, 걱정했어. 네 궁에 용이라도 나타났나 해서.”

“나타났으면 지켜 주려고?”

“물론이지.”

웃음이 터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꼬마 황자님은 나와 체격이 비슷했고 얼핏 아름다운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그에게 검사란 너무 안 어울려서 웃어 버렸다.

“뭐야, 오빠. 동화 속 왕자 같아. 흉내 내는 거야? 어울리지 않게.”

“흉내가 아니라 진짜 왕자인데.”

반쯤 미소에 잠긴 홍채는 타는 듯한 선홍색이었다.

“그런 말은 나보다 두 뼘은 커지고 나서 얘기해.”

“너무해.”

“응. 너무하면 멋있어져서 복수해. 당해 줄게.”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가 부드럽게 헝클어진다.

“좋아.”

그 눈이 나와 마주치자 휙 휘었다.

“그때 가서 다른 말 하면 안 돼?”

데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대로 크면 엄청난 미남이 되겠지? 이 작은 오빠는 아직도 본인 얼굴의 엄청난 파괴력을 모르는 것 같다. 이렇게 고개를 기울이며 웃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옆에 있던 화분을 부수고 싶었으니까.’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예쁜 눈꼬리가 조금 더 말려 올라갔다. 저 살짝 주름 잡히는 낯간지러운 눈웃음에는 여럿 수습 하녀를 기절시켰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좀 물러나 줄래?”

“기꺼이.”

그의 이름은 데인 로웰 칼타니아스. 7황비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내 오라비였다. 살집 없이 호리호리한 체격과 사슴같이 가늘고 긴 목 때문에 자못 연약해 보이지만, 그럼 어때. 잘생긴 게 최고다.

“오늘도 날이 참 좋네.”

“산책하기 좋은 날씨야.”

바람에 옷깃이 살랑살랑 나부낀다. 목을 살짝 덮은 머리칼은 햇살을 담뿍 받은 땅의 색이었다. 빛을 배경 삼은 그는 복잡한 복식을 좋아하지 않아 오늘도 단출한 옷차림이었다. 그럼에도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같이 빛이 나서 어쩐지 경건한 마음이 되어 보게 되더라.

“구경 다 했어?”

“……무, 무슨 구경?”

난 눈을 깜빡이며 뻔뻔히 되물었다.

“흠흠. 난 모르겠네.”

침 떨어질 것 같던 얼굴로 구경해 놓고선 모른 척 넘어가 줘 하는 뜻으로 배시시 웃어 주자, 다정한 데인은 기꺼이 모른 체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 온 거야?”

그가 잠시 갸웃 기울였다가 슬쩍 30분 전? 하고 말해 주었다.

“형이 널 찾아오라고 성화여서.”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단 말이야? 일기장을 두고 골몰했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잠깐, 플뢰온이 벌써 왔단 말이야?”

“응.”

“……웬일이래. 지금 어디에 있어?”

“응접실. 10분 전쯤에 와서 레이 경과 함께 있어.”

난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레이 경? 지금 경과 함께 뒀단 말이야? 깽판은 안 쳤고? 응접실 탁자는 무사하대?”

“음, 글쎄.”

데인이 살짝 난감한 얼굴로 덧붙였다.

“아직은…….”

“……곧 무사하지 못하겠네.”

“그렇지?”

아, 그 성질머리. 유독 내 궁에서만 지랄이야. 대체 내 궁 탁자를 몇 개나 부숴 먹을 셈인지. 진심으로 질린다는 얼굴을 가감 없이 보이자 데인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황녀님, 여기 계십니까.”

이때 문이 열리고 하녀장이 들어섰다. 그녀는 데인을 바라보며 멈칫했다.

“7황자님을 뵙습니다.”

데인을 보고서 눈치를 준다. 왜 당신이 황비의 침실에 있냐는 시선이다.

“……이곳은 황녀님의 궁입니다. 아무리 오라버니 되시는 분이라 하여도 함부로 방에 들어서는 일은 삼가 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감히 아뢰옵니다.”

우리 하녀장으로 말하자면 카리스마로 하녀를 전부 휘어잡은 여걸로 이 궁에서 유일하게 내게 오냐오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신분이 깡패라는 이 시대에 황자를 보고서도 성마른 시선으로 훑는 것이 인상적이다.

“송구하나, 황녀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선 은근하게 나를 본다. 너도 동의하지? 하는 시선에서 졸지에 현숙한 레이디가 된 열세 살은 어색하게 끄덕인다.

“으응……. 주의를 줄게.”

그러고선 데인을 흘끗 보았다.

“나도 사과하지.”

데인이 가벼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사과하는 목소리마저 봄날의 볕처럼 나긋하고 듣기 좋다.

본디 황족이라면 누구에게도 굽혀서는 안 되지만 나나 데인, 그리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똥개 같은 황자 한 마리는 황제의 눈에서 대기권 밖으로 벗어난 쪼렙들이었다. 숨 죽여 눈치나 보는 비실비실하고 힘없는 황족이지.

어쨌거나 데인의 사과는 황녀인 나를 존중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하녀장은 흡족한 얼굴을 했다.

“6황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빨리 응접실로 가라며 독촉했다.

“3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눈물 쏙 빠지게 꼬집어 주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윽.”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싫다.”

얼굴을 문지르는 동안 하녀장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무언의 동조다.

“……얼른 가시지요.”

“그래야지.”

내 주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급증 다혈질을 꼽을 인간이 6황자 플뢰온이었다. 진짜 이 성질머리. 서둘러 무릎에 펼쳐 둔 일기장을 덮고 데인의 뒤를 따르려 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움직였던 탓일까.

“아…….”

“왜 그러시죠, 황녀님?”

난 손을 탈탈 털며 어설프게 웃었다.

“으응, 종이에 손을 벴나 봐.”

“저런, 약초를……!”

“아냐, 얕게 베인 것뿐이야. 멀쩡해. 봐, 문제없지?”

이것 참. 이 나이 먹고 덜렁대기도 힘든데. 베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기장을 꽂으려 허리를 굽혔을 때였다.

“아실리? 나오지 않고서 뭐해?”

나는 재빨리 책장을 막아서며 막 문을 나서는 데인과 일기장을 번갈아보며 소리쳤다.

“데, 데인! 나 이 책들 꽂아 두고 따라갈게!”

“응? 도와줄까?”

“아, 아냐! 먼저 가! 가서 플뢰온 깽판 좀 막아 줘!”

“그래. 그쪽이 더 걱정이겠다.”

다행히 데인은 일말의 의심도 않고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 뒤로 황급히 달려가 문을 닫은 나는 천천히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일기장에 보랏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책을 펼치자 희미한 빛은 착각이 아니었다는 듯 빈 페이지였던 곳곳에 글씨들이 하나둘씩 떼 지어 나타났다.

“글자?”

글자는 곧 단어가, 단어는 곧 문장이 되었다. 하나같이 정갈히 쓰인 필적에 소름이 돋았다.

“……글자가 생겼어?”

페이지를 또 한 장 넘기자 도미노를 하듯 주르륵 페이지가 채워진다. 약 7장쯤 넘겼을까.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뒤는 다시 빈 페이지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바다 위에 동동 뜬 널빤지처럼 낡은 양피지에 글자가 떠올랐다. 나타난 글자는 제국어였다.

[821년 하베르미아의 달 3일]

“오늘이잖아?”

침을 꿀꺽 삼켰다.

“허, 이거 참. 친모의 비밀을 알게 되는 건가?”

감사합니다. 흘끗 살펴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필체가 상당히 서툴러.’

마치…… 어린아이의 것 같다. 이상한데? 친모는 분명 성인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글씨가 생겨난 걸까? 무엇이 정답이었는지 몰라도 일단 풀었으니.

“무엇이 있을까!”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첫 장을 읽었다.

[821년 하베르미아의 달 3일

한나와 함께 어머니 방 청소를 했다. 처음으로 걸레질을 해 봤다! 청소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싶어 한나와 다른 사용인들에게 미안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한나를 보며 마음이 괜스레 불편했다. 괜히 부담을 준 건 아닐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