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다섯 번째 밤, 할릭
나는 다리를 비비 꼬며 눈을 떴다. 설탕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혀에 단맛이 돌았다. 아랫배는 부글부글 끓고 색색거리는 뜨거운 숨이 연신 터져 나왔다.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필요해.
사랑이 필요해.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메마른 모래색 머리를 가진 할릭이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근육이 튀어나온 구릿빛 피부가 초콜릿처럼 달아 보였다.
독한 술 냄새가 나는 할릭의 체취에 머릿속이 더욱더 혼곤해졌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애간장이 녹아서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힘들, 지? 어제 스노아랑…….’
나는 몸 상태에 깊은 의문을 느끼다가 곧 깨달았다. 전부 스노아 때문이었다. 아다르 탓에 여린 살이 쓸렸으니, 하루는 쉬어야 한다면서 끝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지독한 갈증과 동시에 충만한 기쁨으로 밤새 덜덜 떨다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리고 깨어나선 이 상황이었다. 몸이 속았다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감히 자기를 애태우기만 했다며 열을 내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몸뚱이, 내가 만족하면 된 거지…….’
나는 어제 아주 즐거웠다. 솔직히 이 정도로 즐거웠으면 끝까지 하지 않아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다 내 착각이었다. 발정기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 주인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어제는 대강 넘어가 줬으니 오늘은 할 일을 치르라고 독촉하는 게 틀림없었다.
“흐…….”
내 애달픈 신음에 할릭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속눈썹은 머리카락과 비슷한 모래색이었다. 약간 색이 바랜 금색 같기도 했다.
그것이 천천히 열리자 거친 열기가 고스란히 혼재된 주황색 눈이 드러났다.
“카카나?”
할릭이 정신이 덜 든 얼굴로 나를 불렀다. 고막 깊숙한 곳을 긁는 저음이다.
피부가 저릿저릿하고 귀 뒤쪽이 바싹 땅기며 소름이 돋았다. 나는 설명하길 관두고 할릭의 멱살부터 그러쥐었다. 그가 내게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내 위로 올라와. 당장.”
할릭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지금?”
“그래.”
“일어나자마자 하기 버거울 텐데.”
그가 열이 펄펄 끓는 내 몸을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주물렀다. 기분 좋은 자극에 끙끙 앓았다. 긴장되고 뭉친 근육이 풀어지며 목구멍을 비트는 듯한 갈증이 조금 사그라졌다.
“인내심을 길러 봐, 카카나.”
“닥, 치고 해.”
“물론 원한다면 짐승이 되어줄 마음도 있지만…….”
할릭의 커다란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흥분을 속으로 되삼키는 들숨이었다. 그가 곧 뜨겁게 달궈진 호흡을 아주 천천히 뱉으며 인내하듯 읊조렸다.
“오늘따라 상태가 안 좋네. 내일이 절정이어서 그런가?”
그런 이유도 있었다. 나는 되는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카나. 진정하고 내 몸을 봐.”
할릭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나는 눈을 꽉 감고 있었지만, 무게로 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근육이 유난히 크고 무거운 할릭은 다섯 남자 중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갔다. 압박감이 어마어마해서 돌로 만든 조각상이 위로 올라온 것 같았다.
“눈 떠, 카카나.”
나는 울망울망한 눈을 떴다. 할릭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여? 응? 내 몸을 봐. 네가 다칠 거야.”
“괜, 찮아.”
“내가 안 괜찮아.”
나는 순간 어마어마한 힘을 내서 그를 밀쳤다. 사실상 할릭이 밀려나준 거지만 그런 사소한 사항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잔뜩 흐트러진 자세로 그를 깔고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 해줄 거면 입 다물고 내 밑에 깔리기나 해.”
“후…….”
방금 뱉은 말이 할릭을 직격으로 자극한 것 같았다. 할릭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자로 다물린 입매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는 듯하더니, 주황색 눈망울이 새까맣게 어그러졌다.
“네가 부추긴 거야.”
나는 나른하게 웃었다.
밑에 누운 할릭이 한 손으로 거칠게 웃옷을 벗어 구석으로 던졌다. 선명하게 골이 팬 근육을 보자 입 안에 군침이 고였다. 눈이 돌아가게 멋진 몸이었다.
그가 내 손목을 꽉 움켜쥐고 흥분으로 가슴을 들썩였다.
“어떻게 해줄까?”
“날 엉망으로 만들어.”
“분부대로.”
그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
나는 한참 후에 이성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서 점심도 건너뛰고 늦은 오후가 됐을 때 정신이 돌아올 기미를 보였다.
어찌어찌 아다르가 차려준 식사를 마치자 완연한 밤이었다. 나는 한 번 더 사랑을 나누려는 할릭을 있는 힘을 쥐어짜서 말린 뒤 침대에 널브러졌다.
“몸이 구타당한 것처럼 아파.”
내 도발에 못 이겨서 시작했으면서, 할릭은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많이 아파?”
“아냐. 네가 신경 써서 해줘서.”
그는 인간적으로 커도 너무 컸다. 손도 크고 발도 크고 체구도 크고 거기도 컸다. 모든 게 버거웠다.
“젠장, 나도 초월자인데 왜 몇 판 했다고 이렇게 되는 거야?”
할릭이 황당하단 얼굴을 했다.
“초월자가 되면 뭐 해? 운동을 하나도 안 하는데. 초월자는 만능이 아니라고.”
“잔소리할 기운 있으면 몸 주물러 줘.”
“일단 씻을래?”
나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정기일 때는 마나에 민감해지므로 스노아의 편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방음 마법은 몸에 직접 거는 마법이 아니기에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청결 마법’ 같은 것들은 그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손수 욕실로 가서 씻어야 했고 순간이동도 못 했다.
내가 뭐라 구시렁거리는 사이 그가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 나를 앉혀주었다.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허브 입욕제가 풀어져 있었다.
“아, 좋다…….”
“좀 나아?”
“응.”
할릭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너 아플까 봐 사정 봐 가면서 적당히 했는데.”
“적당히 하기는 뭘 적당히 해. 양심이 있어야지.”
“정말인데…….”
나는 마사지를 받다 말고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할릭이 왜 그런 눈을 하냐는 듯이 날 쳐다보았다.
“왜?”
“왜? 지금 왜라는 소리가 나와?”
자동으로 새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놀라서 피부에 소름마저 돋았다.
“진심으로, 그게 적당히 한 거라고?”
“설마 몰랐어?”
“그걸 어떻게 알아! 난 이미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은데! 네 다리가 무슨 세 개라도 돼?”
“남사스럽긴.”
할릭이 전혀 창피하지 않은 얼굴로 타박했다. 나는 기막혀서 향기로운 물로 세수했다. 풍성한 허브 향을 맡으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설마 해서 묻는 건데, 지금까지 네 맘대로 한 적 한 번도 없어?”
“시도는 해봤는데 네가 버거워서 토할 것 같다고 했었어.”
“내가 그랬어?”
할릭이 시무룩한 표정을 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는 묵묵히 나를 씻겨준 뒤, 뜨거운 물에 풀어져 흐물흐물한 몸을 안아서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그럼 너는 정말로…….”
“정말로, 한 번도 내 마음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거지.”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해.”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야. 이건 너와 나의 차이 때문에 생긴 일이고, 난 네가 허락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카카나, 너는 끌어안기만 해도 황홀한 내 반려니까.”
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아서 몸을 배배 꼬다가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느끼해!”
할릭이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이게 진심인걸,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가슴 안쪽이 괜히 간질간질해서 눈을 굴리다가 손을 뗐다. 그리곤 큼큼, 헛기침한 뒤 얘기했다.
“나는 큼!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억제제로 발정기를 넘겨 왔거든.”
“흐응.”
할릭이 내게 원피스를 입히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직 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어.”
할릭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억제제를 안 먹고 너희랑 발정기를 보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잖아. 너도 알다시피 수인족의 성욕은 발정기 때만 왕성해지는 편이고…….”
“편이고?”
“어, 언젠가는 너에게 더 익숙해지는 날이 올 거라는 얘기지. 그러면 거뜬해질 거라고.”
나는 애써 씩씩하게 말해놓고 얼굴을 붉혔다.
할릭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어서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래, 카카나.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물들 거야.”
할릭의 말이 야하게 들려서 괜히 그를 끌어안아 얼굴을 숨겼다. 그가 두꺼운 손으로 내 몸을 가볍게 받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오늘 달이 밝게 떴어. 트리포아는 특히 밤하늘이 맑기로 유명한 곳이니까.”
테라스로 나오자 바닷가의 짠 내음이 섞인 밤공기가 물결처럼 피부를 스쳤다. 희미하게 남은 열기마저 상쾌하게 씻겨주는 바람이었다. 눈을 감은 채 그것을 한참 음미했다.
쏴아아, 어디선가 모래사장을 천천히 오르내리는 바닷소리가 들렸다.
나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눈을 떴다. 어느새 밤이 깊어 사람이 내는 소음은 싹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나직하게 울리는 벌레 울음과 파도 소리만 흘렀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밤이었다.
“위를 봐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광활한 어둠이 화려한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인간이 세공해서 드레스에 뿌려놓은 다이아몬드와는 견주지 못할 풍경이었다. 아름답고, 압도적이었다.
“멋지다.”
“그렇지? 내일은 밤하늘을 충분히 즐기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오늘 실컷 봐둬.”
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할릭이 가슴으로 웃는 게 느껴졌다.
“내일은 모두와 함께 자는 날이잖아. 적어도 밖에 나올 일은 없을 거야. 물론 카카나, 네가 원한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찰싹, 소리 내어 때렸다.
“내가 그런 걸 원할 리 없잖아.”
“왜? 안 될 것도 없지.”
할릭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여긴 사유지라서 누가 앞마당으로 들어올 일도 없잖아.”
“변태!”
“흐응, 내가 이렇게 굴면 더 좋아하면서.”
할릭이 내 아랫입술을 혀로 느긋하게 핥으며 속삭였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부러 그를 타박했다.
“평소엔 바보 같으면서 왜 이럴 때만 능구렁이처럼 구는 거야?”
“내가 언제 능구렁이처럼 굴었다고 그래?”
“지금! 바로 지금 그러고 있잖아!”
“아니지. 나는 네 말대로 바보처럼 솔직할 뿐이야.”
할릭이 씩 웃었다.
“그러니까 내 변태 같은 모습도 사랑해줘, 카카나.”
그가 앙큼하게 내 목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