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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 네 번째 밤, 스노아 (41/43)

외전 - 네 번째 밤, 스노아

정신없는 밤이었다.

나는 울며 매달리고, 애원하고, 부르짖으며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냈다. 잠자리를 어떻게 보냈는지 온통 소리 지른 기억밖에 없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푸른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오늘이 스노아의 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겐 조금 미안한 일이지만, 발정기였음에도 더는 못 하겠다는 마음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뭐, 이것도 날이 저물고 페로몬의 영향을 받으면 거짓말처럼 다시 타오르겠지만.

‘아다르는 진짜 침대 위의 폭군이라니까.’

“인정사정없이 했군요.”

스노아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물빛 눈망울이 오늘따라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창가에 낀 뿌연 서리처럼 한기가 풀풀 날렸다. 나는 뻑뻑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그게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반응이었다.

“아프지 않게 어루만져줄게요.”

나와 시선을 맞춘 스노아가 무스 케이크처럼 달고 뭉그러지는 어조로 속삭였다.

“그거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

“물 좀 마시겠어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벌렸다.

스노아가 물컵을 내게 기울여주었다. 아픈 목이 진정되도록 살짝 따뜻한 물이었다.

“그 안하무인인 놈이 멋대로 날뛰었으면 죽일 생각이었는데, 카카나의 표정을 보니 아닌가 보네요.”

나는 스노아의 ‘죽인다.’라는 표현이 구어적인 비유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걸 빠르게 알아들었다.

“아냐.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다행이에요.”

스노아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응?”

“카카나는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생기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워낙 서투른지라.”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를 너무 잘 아는 것도 문제네.”

“전 카카나를 챙길 수 있어서 좋아요.”

스노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슬프거나 힘든 감정을 얘기하기엔 눈치 볼 것들이 많잖아요. 전 카카나가 힘들어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눈치?”

“당시의 상황이라든가, 듣는 사람의 입장이라든가, 그걸 말하는 사람이 준비되었는가, 그런 것들이요.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죠.”

매끄럽고 시원한 손바닥이 내 이마를 쓸어주었다. 발정기의 열을 진정시키는 온기였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잖아요. 저는 그걸 놓치지 않길 바라요.”

“너야말로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는 거 아니야?”

나는 걱정스럽게 눈썹을 모았다.

“네가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사람 마음을 읽을 수는 없잖아.”

“그냥 노력하는 거예요.”

스노아가 얌전하게 웃었다. 퀄리티미엄의 청정한 물로 빚은 것 같은 미모가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넋이 나가서 스노아를 올려다보았다. 물의 정령이 존재한다면 바로 저렇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누군가 날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든든해지잖아요.”

나는 울컥해서 아랫입술에 힘을 주었다. 스노아의 말에서 나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네가 내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말보다 저런 한마디가 날 무너지게 만들었다. 나는 손등으로 뜨거운 눈꺼풀을 짓눌렀다.

“너희는 나를 너무 울려.”

“그런가요?”

스노아가 눈가를 가린 내 손에 간지러운 버드키스를 날리며 속삭였다.

“그러면 더 울어 봐요. 속이 비워질 때까지.”

혼자 묻어두고 꺼내지 않았던 감정이 마음 안에서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평생 외면받았던 케케묵은 감정들은 심해처럼 깊었다. 그런데 용사들은 내가 평생을 쌓아 올렸던 마음의 둑을 계속 깨트렸다.

그래도 좋았다. 휩쓸릴 나를 든든히 받쳐줄 거란 걸 알아서.

“내가 패악을 부리면 어쩌려고.”

“그러면 카카나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 수 있게 되겠네요.”

그 모습이 장점이든 단점이든, 더 알게 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기쁨. 스노아의 얼굴엔 온통 그 순수한 환희뿐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정말이지 바보들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가 왔는데, 확인해보실래요?”

내 의아한 얼굴을 본 스노아가 귓가에 뽀뽀하며 속삭였다.

“지금은 카카나가 발정기여서 궁에 놀러 가거나 친구가 놀러 오기 곤란한 상황이잖아요.”

“내 친구들?”

“네. 카카나의 오랜 친구들이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머리가 핑글 돌아서 이마를 짚었다. 스노아의 팔뚝이 힘 있게 무릎 아래쪽으로 파고들더니 어지럽지 않도록 천천히 안아 들었다.

흰 원피스 자락이 이불에 스치며 버석한 소리를 냈다. 나는 스노아의 목덜미에 뜨끈한 이마를 문질렀다. 발자국 없는 흰 눈밭같이 새하얀 피부였다.

“친구들의 편지를 오래 기다렸잖아요. 그렇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오로라가 집권한 이후로 꽤 안정을 되찾았지만, 아직 정비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귀족 대부분이 마족과 내통한 이유로 숙청당했으나 살아남은 미꾸라지들은 여전히 존재했고, 그들은 황실에서 위험 요소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수인족이 노예 신분에서 탈피하는 데 그들은 큰 걸림돌이었다.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되찾은 우정을 음미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친구와 제대로 맞대면한 적이 없었다. 내 방엔 편지만 수십 통이 탁자 위에 쌓여 있었다.

“왜 거실에 두지 않고 여기까지 옮겨놨어?”

“카카나가 소중하게 여기는 편지들이잖아요. 거실에 뒀다가 발에 채면 안 되죠.”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저 선물들은 다 뭐야?”

“결혼식을 올렸다고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었나요?”

“응.”

“그래서 선물을 잔뜩 보냈나 봐요. 황실은 피비린내가 빠지지 않은 상태라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선물로 대신한 것 같아요.”

편지지엔 익숙한 이름이 여럿 보였다.

심지가 대쪽 같은 타도라, 므리나에게서 도망치다 발목을 다쳐서 다리를 저는 호레이, 내내 울기만 하다가 다행이라며 날 껴안았던 스칼리…….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이렇게, 다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나는 편지지를 가슴에 묻고 눈을 감았다. 이게 일종의 의식 같은 행위라는 걸 용사들은 알고 있었다. 스노아는 내가 한참 그러고 있을 때까지 말을 걸지 않았다.

“스노아, 내 친구들이 왜 황제를 돕는 데 혈안인지 알아?”

편지를 봉한 붉은 밀랍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문득 물었다. 옛날 옛적, 우정의 증표로 친구들끼리 만들었던 그 인장이었다.

“글쎄요…….”

스노아가 퍽 진지한 얼굴을 하며 고민하는 낯을 했다.

“저도 그게 의문이었어요. 저라면 쉬는 데 주력할 것 같았거든요.”

“왜?”

“인간들에게 넌덜머리났을 테니까요.”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므리나 이소리하에게 오랜 기간 학대받은 데다가, 소중한 친구를 눈앞에서 수도 없이 잃었죠.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나처럼 휴양지를 돌아다니며 쉬는 것만 해도 힘들었을 거야. 나도 말렸어. 그러지 말고 놀라고.”

“…….”

“평생 먹고 놀아도 될 금전적 지원도 약속하겠다고 했지. 그러다 대차게 차였지만 말이야.”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친구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너도 봤어야 했는데.”

곧 입맛이 써졌다. 나는 시큰거리는 눈을 손등으로 식혔다.

“친구들은 인간을 싫어해. 황실엔 질 나쁜 인간이 우글거리니까 더더욱 눈길도 주고 싶어 하지 않아. 그런데 자진해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 건 나 때문이야.”

“카카나 때문이라고요?”

이 일을 설명하려면 꽤 오래전의 일을 끄집어내야 했다.

언제였더라. 아마 친구들끼리 므리나의 은신처에서 간신히 도망쳤을 때 생긴 일일 것이다. 나는 친구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날 두고 도망치라고 했었다. 므리나는 나부터 추적할 테니까.

[왜 매번 혼자 짊어져?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 천치야? 그렇게 못미덥니?]

친구가 절규하며 소리쳤던 말은 아직도 유리조각처럼 가슴에 박혀 있었다.

“옛날에, 내가 심한 말을 했거든.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도망치는 데만 신경 쓰라고 말이야.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책임져야 하냐고 소리 질렀지.”

“카카나.”

“그렇게 모질게 말해야만 친구가 날 두고 도망칠 것 같았어. 그래서 그렇게 했지.”

당연하지만 친구들은 아직도 그 말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내가 므리나의 마수로부터 구해냈을 때, 그들은 지치고 초췌했을지언정 눈만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나약하게 꺾인 꽃이 아니라 여러 번 담금질한 검처럼 벼려진 눈이었다.

[이제 우리 차례인 건지, 카카나?]

지켜보라고, 네가 다 해결하도록 두진 않을 거라고 친구들은 이를 갈았다.

분에 차서 씩씩거리던 타도라의 얼굴을 떠올리니 불현듯 웃음이 터졌다. 나는 편지지를 뜯으며 쿡쿡 웃었다. 어느새 불쾌한 상념은 떠나가고 부드러운 감정만 남았다.

나는 편지를 차근차근 읽어보다가 얼굴을 굳혔다.

< 바보 천치 카카나에게.

얘, 카카나. 나 웃기는 소식을 들었다? 너 이번에 결혼식을 올렸다면서? 황제가 상세하게 알려줬단다. 제국에서 성대하게 해주려는 걸 굳이 퀄리티미엄에 콕 박혀서 은밀하게 진행했다던데.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냐고 묻지 않을게. 너는 예전부터 쑥스러움이 많았잖니. 다만 그 점을 생각하니까 걱정을 감출 수가 없지 뭐야? 네 남편이 퍽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네 부부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선물을 많이 보냈으니 적극적으로 이용하도록 해.

p.s 섭섭해서 화풀이하는 거 절대 아니야.

너를 소중히 생각하는 타도라가.>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고, 이미 상자 하나가 스노아의 손에 들려 있는 걸 발견했다.

“안 돼!”

비명을 지르며 스노아에게 달려드는 순간까지, 나는 하나를 까먹고 있었다. 내 몸은 어젯밤 심하게 괴롭혀진 나머지 힘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사실상 앞으로 엎어지는 중이었다. 초월자의 축복으로 마법사임에도 제법 기민한 몸을 가진 스노아가 다급하게 나를 두 손으로 받았다.

와르르르―

우리는 산처럼 쌓인 선물 상자 위로 사이좋게 나뒹굴었다.

꼼꼼하게 닫힌 상자들이 입을 벌리며 안의 내용물을 쏟아냈다. 심하게 버둥거린 나머지 빨간 리본이 다리에 휘감겼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보고 새하얗게 질렸다. 물건들은 낯간지러운 분홍색이거나 선정적인 살구색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맙소사, 타도라!’

“씀씀이가 깊은 친구네요. 부부용품을 이렇게 많이 보내다니.”

스노아가 물건 하나를 집어서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시기도 적절하고요.”

나는 소스라쳤다.

“적절하다니?”

“저는 직접 하는 것보다, ‘해주는 걸’ 더 좋아하잖아요.”

스노아가 꽃처럼 청초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카카나의 방이니,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나는 물품이 어질러진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스노아가 내 위로 올라타더니 나와 수북한 물건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아, 좋네요.”

이런, 맙소사.

나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아무래도 타도라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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